2014-006 피아노악어
서영처 시집
2006, 열림원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2168
811.6
서64피
문학 · 판 | 시 1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6 우수문학도서
누각은 기러기나 오리의 날개처럼 세워진다 그 아래 내 안압을 팽창시키는 못이 있다 중얼중얼 물결 퍼지자 대궁은 움켜쥐었던 햇살 펼친다 꽃잎은 손가락이다 못의 근심이 밀어올린 태양, 망막을 찢으며 수면 구석구석을 수런댄다 매표소 근처 바람개비 파는 여자, 장맛비 못 둑 넘치게 울어 눈이 벌겋다 생각난 듯 가슴 헤치고 돌아앉자 주린 젖먹이, 어미의 무덤 속으로 파고든다 아기 잇몸 뚫고 하얀 꽃잎 돋아난다 가쁜 숨들 어둠 삼키고 자맥질 치며 솟아오른다
시인에게 모든 삶은 근원적인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채 낙타처럼 하염없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 갈증이나 낙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삶의 고난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 날카로운 갈증,/모래경전에 무릎 세우고/나는 순정률로 쏟아지는 햇살을/모두 받아 고슴도치가 되었다/그러나 멀찍이 떨어져/네게로 다가갈 수 없는 이 슬픔,"(「모래구릉이 뒤채는 건조한 내 잠 속 선인장 가시는 왜 바이올린의 고음을 따라가는가」)에서처럼 순정률의 근원에서 멀어져 끝없이 방황해야 하는 불완전한 삶으로 인한 고통에 가깝다. 수천 번을 그어도 절대음에 도달하기 어려운 바이올린의 음향이 일으키는 갈증처럼, 민감하고 예리한 시인의 감성은 삶의 불완전함에 절망하고 상처받는다.
- 이혜원 해설 「공명(共鳴)과 공생(共生)」 중에서
서영처
1964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영남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엔 날개가 달려 있다」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을 펴내며
찰나인 과거와
숨겨져 있는 미래 사이의 굴절점인
나의 현재는 늘 모호하다.
끼여 옴짝달싹 못하는 이 카오스의 시간을 넘어가려
나는 시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
찬란한 햇빛과 음악과 무덤 속을 오가며
나는 늘 조급했고 모자랐다.
2006년 봄
서영처
차례
시집을 펴내며
제1부 공명이라는 것
나의 천국 / 피아노악어 / 겨울 벚나무 / 오, 나의 태양 / 공명이라는 것 / 폭풍우의 밤 / 한여름 밤 / 모래구릉이 뒤채는 건조한 내 잠 속 선인장 가시는 왜 바이올린의 고음을 따라가는가 / 전봇대를 따라갔네 / 박수치다 / 다시 오래된 우물 / 그렇게 이름들이 내려왔다 / 로자 아줌마 / 도미노 / 베니스의 뱃노래 / 고요한 거울 / 분수 / 애벌레 움츠리고 있었네 / 살바도르의 시계 / 밤바다 / 석굴암 / 모스크바 - 서울 KE923 / 밤에 늠비봉을 오르다 / 봄밤 / 성탄 전야 / 낡은 책을 읽다 / 떡집 / 낙타를 위한 / 목련
제2부 무덤들에서 듣다
오래된 우물 / 불면 / 봄날 / 거울들, / 비 온다 / 돌의 날개 / 네모의 날선 나날 / 태양, 물 위의 연꽃들 / 黃道로 운명을 점쳤다 / 매일 느티나무 아래를 지난다 / 그대와 나 사이 골짜기 솟구쳐 무덤이 되었나 / 파이프오르간 / 늦가을, 단풍나무 숲으로 가면 / 그해 여름 / 배웅 / 소한과 대한 사이 / 십자수 / 안산을 기억하다 / 부소산성에 해 지면 / 봄비 / 새의 이름 / 나무 / 검은 밤 / 무덤들에서 듣다 / 죽은 여인을 위한 파바느 / 혹서의 밤 / 바이엘 연습
해설_ 이혜원
공명(共鳴)과 공생(共生)
검은 밤
검은 장의사들이 관을 메고 나타난다
이미 몸속에 제 묘비명을 새긴 자의 관을
그들은 뚜껑을 열고 주술을 건다
굴촉성인 영혼은 꿈틀거린다
만 가지 염료를 갈무리하느라 피아노는 검다
열 개의 흡반 달린 팔을 밀착시키고
연주자는 주문을 외워댄다 피아노는
그리핀처럼 포효하고
형형색색 뒤집어쓰는 그의 옷, 검다
무대는 발굴 중인 위대한 왕의 무덤인지 모른다
순례자들 숨을 죽이고
피아니스트는 태양의 배를 타고 하늘을 건넌다
금관과 허리 드리개 부장품들이 발굴된다
순장되었던 삶들이 공중을 선회한다
검정은 마지막 헐떡임까지 삼켜버린 색
여음이 사라지려는 순간
우레 가운데 왕은 위엄을 드러낸다
제사장의 집전이 끝나도록
검은 밤의 음악회는 輓章보다 화려하다
나의 천국
강가에서 우린 납작한 돌을 모아 온돌방을 만들고 실새삼을 뜯어 머리에 얹고 결혼식을 했다 손바닥을 펴고 입김 묻힌 인장을 꽝, 꽝, 찍었다
우리들은 태양에 눈이 먼 채로 신방에 들었다 하늘을 뒤덮는 다족류의 붉은 벌레들, 흰 옷과 고리 건 새끼손가락으로 기어올랐다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어도 맨살에 달라붙는 흡혈귀 태양, 돌로 찧으면 붉은 것이 뭉클 터져 나왔다
우리들의 천국엔 휘묻이한 햇살들 잎 틔우고 미운 점 까맣게 박혀 할딱이던 산나리, 과수원에서는 심장들 두근두근 익어가는 소리 들려왔다 태양은 스피커처럼 아, 아, 아, 아, 끈끈한 파장을 흘려 우리들을 묶고……
베니스의 뱃노래*
화창한 날
멘델스존 씨와 뱃놀이를 갔지요
가까운 선창에서 우린 곤돌라를 탔지요
수로마다 떠 있는 곤돌라들
현악기군처럼 조용히 바다를 연주하고 있었지요
그이도 노를 잡고 물결의 현을 켜기 시작했어요
건반 앞에 앉아 나는
출렁거림을 무릎으로 불러들였지요
페달을 깊숙이 밟을 때마다
배는 몸을 뉘며 물살 위로 미끄러졌지요
산들바람 불어오고
바다 내음이 코끝에 뭉클 밀려왔어요
하늘은 양다리를 좌악 벌리고
태양의 붉은 속과
무성한 금빛 털을 죄다 보여주었지요
바글거리며 기생하는 희망들
바서져 내리는 찰나들로 눈이 시렸어요
오래전 다리 밑에 버렸던 핏덩이 같은
추억들 일깨우는 폭양 아래 흔들려가는데
느닷없는 방역차의 굉음에 바닷물은 빠져나가고
곤돌라는 딱딱한 바닥에 박히고 말았어요
멘델스존 씨요?
어쩌면 수장된 제 생각들을 찾아
여태 어느 깊숙한
몸의 수로를 헤매고 있는지 몰라요
* 멘델스존, 「無言歌」 중 베니스의 뱃노래 F#단조.
오, 나의 태양
활활 타는 아궁이지요 누군가 닥치는 대로 불쏘시개를 던져넣네요 높고 높은 탑 속, 실을 잣는 그레첸 물레에 다친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툭, 툭, 떨어지네요 그래도 끝없이 비단실을 풀어내는군요 수사자 한 마리 으르렁거리다 금세 암컷과 새끼들을 거느리고 내 눈꺼풀 속으로 뛰어드네요 맹수들, 더위에 지쳐 바다에 가도 갈기 나부끼며 몰려오네요 사는 게 전쟁이라고 종일 화기를 뿜는 태양, 세포 분열하는 태양이 케이블 선에 매달려 네거리 차도에도 우글우글 뜨고 지고 그럼요 산목숨들을 삼켜 그 힘으로 익어가는 무덤입니다 무덤이 삼킨 것들을 가지런히 답안으로 뱉어놓았군요 산자락마다 볼록볼록한 음향판들,
태양, 물 위의 연꽃들
누각은 기러기나 오리의 날개처럼 세워진다 그 아래 내 안압을 팽창시키는 못이 있다 중얼중얼 물결 퍼지자 대궁은 움켜쥐었던 햇살 펼친다 꽃잎은 손가락이다 못의 근심이 밀어올린 태양, 망막을 찢으며 수면 구석구석을 수런댄다
매표소 근처 바람개비 파는 여자, 장맛비 못 둑 넘치게 울어 눈이 벌겋다 생각난 듯 가슴 헤치고 돌아앉자 주린 젖먹이, 어미의 무덤 속으로 파고든다 아기 잇몸 뚫고 하얀 꽃잎 돋아난다 가쁜 숨들 어둠 삼키고 자맥질 치며 솟아오른다
고요한 거울
너는 나의 안
나는 너의 밖
나의 공허와 너의 충만 사이
종일 너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너를 모방하고
네 속으로 들어가 너의 것이 된다
너는 내 몸을 속속들이 주형해 태어나게 하고
내가 결코 보지 못할
은밀한 곳의 비밍까지도 쥐고 있다
너는 나를 회복시키고 나를 주장한다
그리고 기획한다
종종 나는 네 고요를 방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너를 착취해왔는지 모른다
너의 왜곡이 나다
나야말로
너의 어두운 반영이다
도미노
고층 아파트단지,
앞 동이 뒷 동에게 또 그 다음 동에게
척, 척, 척, 그림자를 넘겨준다
창문 차례로 색칠하며 지나가는 노을
창문 차례로 두드리며 넘어가는 바람
창문 차례로 밀며 엄습하는 어둠
101동
102동
103동
104동
105동
106동
107동
108동
109동
창문 차례로 일깨우며 눈 뜨는 불빛
저녁 먹고
TV를 보아도 좋소
다시 어둠 속으로
척, 척, 척, 드러눕는,
黃道로 운명을 점쳤다
바람은 긴팔원숭이 떼처럼 창틀에 매달려 휘파람 분다 들판엔 이어달리기 하는 전신주들 미닫이에 떨어지는 햇살의 분포를 문살은 막대그래프로 정확하게 그려낸다
나뭇가지들은 자라나 방문을 도배해버린다 아침상 받는 동안도 사그라지지 않던 추위의 정체가 저 뿔들이었다 뿔들은 미닫이를 틀어 안고 슬픈 노래를 뜯는다
눈이 세상을 덮어버린다 행불자의 주검처럼 풍경은 흰 천 아래 뉘여진다 사라진 길을 더듬으며 트럭은 달려가고 모든 소리는 봉인된다 누구도 봉인을 열 수 없다
나는 열에 들떠 그림자의 기울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만 킬로미터의 長征에도 태양의 고도를 재며 돌아오는 연어처럼 어둠이 부풀린 배를 안고, 나는 옛집을 찾았다 흑점 인장 찍힌 산봉우리엔 오래도록 얼룩이 남았다
한여름 밤
내 속에 들어앉은 슬픔을 꺼내놓자
무덤이 하나 더 늘어난다
구름 같고 산 같은 무리
늙은 소나무 회나무가 능을 향해 경배한다
나는 잔디밭에 누워
노른자위 황금의 위치를 추정해본다
덤덤하게 등 맞대는 슬픔
팽팽한 법칙을 놓친 항성들인지 모른다
신음 소리를 땅 속에 묻어버린,
순간, 고분들 두근거린다
침묵이야말로 오래 묵힌 소음인 것을
꺼내놓은 슬픔을 집어넣자
슬그머니 능이 하나 사라진다
그대와 나 사이
골짜기 솟구쳐 무덤이 되었나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바람
나무 아래 걸려 있네
진흙 같고 슬픔 같은 부장품들
한해살이풀들로 돋아 흔들리네
책갈피에 잘못 날아든 날벌레처럼 기웃거리다 보면
차곡차곡 구덩이 채워 부풀어오르는 봉분들
산그늘 내려와 차일을 치고
저물녘은 소매 끝에서 떨고 있네
산봉우리는 왕의 무덤
순장당한 사람들 뻗쳐낸 손가락이
나무라는 그릇된 생각을 하네
햇살은 허공을 할켜댄 손톱자국
화농하여 노을로 번지네
숲마다 기계총 앓는 자국
산 자들의 소란한 동네가 아득하네
무덤들에서 듣다
깊이 뿌리내린 섬이네
한 사람씩 들어가 고립되어 버리는,
낙타의 육봉처럼 군데군데 솟아
오--ㅁ 오--ㅁ 낮은 소리를 내네
소를 놓치고 울던 어린 날의 아버지가
여기 봉분에 기대어 잠이 들었네
이장한 곳의 붉은 흙은
생살을 도려낸 듯, 지금도 아프네
원재료들 요리되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네
구근처럼 양지바른 곳만 골라 태양을 호흡하더니
통통하게 살 오르는 무덤이여
절반쯤 굴러내린 달이여
삶이 갈증을 일으켜 나는 다시 무덤을 헤매네
누구에게도 덤은 없다고 무덤은 말하네
먼 길 가려 내 등에도 일찍이 혹을 하나 달았네
隊商들은 보이지 않고
짐 지고 구릉을 넘는 낙타구름
그림자만 가득하네
전봇대를 따라갔네
제의를 위해 나아가는 행렬 아닌가
일렬로 묶인 죄수들처럼
전봇대는 현을 걸고
어두운 곡조를 허밍하네
우는 아이를 떼놓고 돌아오는 길
무엇인가, 내 죄가 사무치네
나목들의 울음소리 빈 들판을 건너네
제단은 어디인가
엎드리고 싶은데
어두워가는 하늘을 이고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부소산성에 해 지면
백마강이 고란사 종 줄을 잡아당긴다
저녘 종이 웅웅거리며 토해내는 벌 떼들
어둠 퍼뜨리고 날아간다
스티커 같은 별빛을 반짝거리며
청동 거울 두 개가 마주본다
강물도 허리를 앓아 기포 일으키며 흐르는지
아물지 않은 火傷의 수면을
연고 바르듯 흰 배가 지나간다
모래구릉이 뒤채는
건조한 내 잠 속 선인장 가시는
왜 바이올린의 고음을 따라가는가
똬리 틀던 날들이었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다 보면
파편처럼 날아와 박히는 소리
자주 마음을 긁혔다
신경초처럼 오그라들곤 했다
팽팽하게 튕겨올라 과녁을 비끼던 미분음들
내 날카로운 갈증,
모래경전에 무릎 세우고
나는 순정률로 쏟아지는 햇살을
모두 받아 고슴도치가 되었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네게로 다가갈 수 없는 이 슬픔,
쥐 떼가 허벅지를 파고
이따금 봉오리들이 맺혔다 지곤 했다
공명이라는 것
라닥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이다 투링은 암벽 위의 꼼빠에 산다 만류하는 어머니를 울며 졸라 열 살에 출가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 덮인 산과 맑은 하늘뿐 아이는 또래의 도반과 얼음이 어는 추운 방에서 잔다 새벽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그 물 뿜어 얼굴을 씻는 아이 큰스님 되기가 소원이었지만 휑한 눈으로 멀리 산 아래를 한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겨울 볕을 해바라기하며 두런두런 경전을 읽는 아이의 팔에 소름이 돋는다 붉은 사리를 두른 이, 혹한의 여백을 밀며 당기며 악기가 되어간다
불면
1
왕릉의 석관을 열면 보인다 물과 공기로 키워진 육신이 흩어질까 아마포로 단단히 동여 놓았다 생전의 욕망을 제거하는 대신 거푸집은 송진이나 흙으로 채워진다
아프리카, 굶주린 아이들은 숯덩이 같다 뇌수와 장기를 제거한 듯 몸속은 비었다 어떤 고고학자도 거기 없다 고개가 땅에 닿자 독수리는 잰걸음으로 다가선다
내 스튜디오에는 가지런한 관 속에 현악기들이 팔을 모으고 섰다. '死者의 書'가 펼쳐진 보면대 종일 노래하느라 아가미에선 피가 번진다 공명하려면 속을 비워야 한다
2
갈라진 혓바닥 모래펄에 떨어진다
장롱 아래 전갈 한 마리 팔뚝으로 기어오르는
사막,
침 마르게 더듬어도 어눌한 말들
천공 돌 듯 초침은 열두 별자리를 운행한다
玄室엔 미라와 악기, 굶주린 아이들
비쩍 말라가는 팔을 긁으며 뒤척인다
허공에 매달려 붉게 건조된다
다시 오래된 우물
문득 생각했습니다
기타와 우물은 서로를 흉내낸 악기라고
어둑살 젖어오는 속엔
출렁거리는 무늬들이 보였지요
달이 들락거린 듯한 울림통으로
두레박줄을 드리웠지요
투둑, 투둑, 물방울 음표들 흩어졌지요
전깃줄의 제비들 후다닥 날아가고
먼 나라 알함브라 궁전의 물줄기가
얼굴을 때리며 날아들었지요
현의 떨림으로
그들이 퍼올리던 이름도 둥글게 파문져갔겠지요
두레박줄은 우물의 깊은 곳을 건드린 것입니다
기타 소리가 어둠을 불러오고
물방울별들 반짝거리자
움푹한 구덩이를 빠져나온 달덩이에
마을이 환해졌었지요
이젠 포조주마냥 익어가고 있을 우물,
향기라도 나는지
동네 개들 짖어대는군요
피아노악어
혼자 지키는 집,
늪으로 변해버린다
땀이 거머리처럼 머리 밑을 기어다니고
눅눅한 공기가 배밀이를 하며 들어온다
수초가 슬금슬금 살을 뚫고 자라난다
피아노 뚜껑을 연다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악어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여든여덟 개의 면도날 이빨이 덥석 양팔을 문다
숨이 멎는다
입에선 토막 난 소리들의 악취
손가락은 악어새처럼 건반 위를 뛰어다녔는데
놈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내동댕이친다
물 깊이 몰고 내려가 소용돌이 일으킨다
수압에 못 이긴 삶은 흐물거린다
대궁 아래 숨어 있는 눈망울
나는 수초 사이 처박혀 한없이 불어 터진다
어디선가 웅성거림 들려오는데
핏물 흥건한 이곳으로
물거품이 궤적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죽어라 헤엄치다 돌아본 늪엔
수련이 가득
구설수처럼 피어 있다
매일 느티나무 아래를 지난다
아이들의 바이올린 합주를 들으며
파닥거리는 저 잎사귀들은
빛을 향해 힘껏 꼬리치는 지느러미,
나무는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악보 속에는 정충들이 떼지어 헤엄친다
현을 짚는 손가락 끝에선
순식간에 복제되어
숨 쉬고 꽃 피는 시간
지상에서 사라져간 사람과 짐승,
식물들이 공기를 흔든다
아이들은 건어물 같은 악기를 깨워 바닷물을 펌프질한다
악기가 쏟아내는 비늘은 바다 밑 쓸고나와
파도의 날갯죽지에서 번쩍거린다
돌아가는 길에도 흔들리는 느티나무
연습은 끝났지만 아이들 활은
아직 내 관자놀이 이쪽저쪽을 켜고 있다
낙타를 위한*
세계 최초로 낙타를 위한 연주를 하러
한 남자가 첼로를 안고 온다
누대로 적재된 시간들의 무덤
허리께와 물결치는 둔부 위로
유혹당한 자의 눈길이 지나간다
나부가 꾸는 꿈은 무엇일까
모래폭풍 속으로 死者들의 아우성이
몰려왔다 물러가고
숨죽이며 흘러내리는 사막
먼 요새에선 총성이 하늘장막을 찢는다
붉은 밤이 내리고
별빛 쏟아지고
남자는 낙타의 등 위에서
와디 같은 첼로의 음을 몸속에 구겨 넣는다
* 영화 「시간의 요새」에서
나무
봄나무가 파릇파릇 수열을 토해낸다
ⅰⅱⅲⅳⅴⅵⅶⅷ
잎사귀들은 고유의 번호를 가지고
몸을 흔든다
새끼돼지들처럼 꿀꿀대며
어미의 수액으로 통통해진다
원소들의 무한집합을 조직화하는 가지와
그들의 결론을 증명하려 끊임없이 반짝거리는 나무
바흐의 파르티타를 켜면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다가선다
가지에 내려앉는 새 떼
선창을 하자 새들은 화답하듯 노래를 이어간다
밑동이 통주저음을 울리고
현악기의 빠른 활 놀림처럼 나뭇잎들 요동친다
분침이 되어 자라는 가지와
팔락거리는 초침들이 터질 듯 푸르게 시간을 부풀리는 나무
겨울나무가 쿨럭거린다
가래덩이를 뱉어낸다
앙상한 가지 아래 서면
화살기도 같은 응얼거림이 들려온다
낙엽은 쥐떼!
어두운 길을 가로질러와 내 가랑이를 휩쓸고 간다
낡은 숫자를 모두 뜯어내고 나무는 새 달력을 준비 중이다.
겨울 벚나무
등화관제 훈련하던 밤,
호루라기 소리는 어둠을 흔들어댔다
우리들은 히죽거리며 천 기저귀를 뒤집어썼다
동생들을 울려놓고 신명이 나 골목을 쏘다녔다
검은 크레용으로 덧칠한 아래
삐져나오려 넘실대던 빛의 살처럼,
방공호 같은 밑동에 기대
나무껍질에 얼굴을 부비다 보면
해제 사이렌에 마을은 수런거리며 꽃잎을 터뜨렸다
겨울눈 다닥다닥 붙은 가지 위로
휘청,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먼 곳의 물살을 감지하고 몸을 부풀리는 나무
컴컴한 구멍 속에서
어른들의 호명을 근심하며
우리는 가려운 몸들을 긁어댔다
목련
어디서 홰치는 소리에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어라, 둥근 알을 깨고
세상 궁금한 것들이
푸드덕 날개를 펴는 것 아냐?
저 햇것들 좀 봐!
횃대에 줄지어 앉아
힘껏 목청을 높이는,
살바도르의 시계
굶주린 이빨들 종일 무언가를 씹는다 열두 개의 공이들 들어앉은 절구 축축한 혀가 입술을 핥고 있다 뼈다귀까지 씹어대느라 각이 지는 턱, 틀니를 덜그럭거리거나 합죽해진 입으로 찌꺼기를 흘릴 법도 한데 이 밤 또 요란하게 껌을 씹어대는군
바늘들을 모두 몸 밖으로 밀어낸 태양, 대형시계처럼 공중에 걸려 있다 공허한 마음, 그는 감시한다 베란다의 빨래는 빳빳해지고 수건은 톱니가 돋아 얼굴을 문다 독재자의 눈매 매서운 거리엔 검은 햇살의 얼굴 없는 태양들 걸어다닌다 탑 속에 갇힌 허기가 입맛을 다신다 순식간에 덜미를 낚아채 반지 낀 손가락까지 오도독 오도독 씹어댄다 트림하는 입에서 흘러내리는 끈적한 시간
십자수
십자를 긋는다
어미의 마음으로
세상 제자리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을 위하여
심장 구석구석마다 색실 새겨 넣는다
행여 가위표 되질 않길 빌며
이중으로 맞혀버린 아이의 소아마비 접종을 위하여,
종일 매달리다 보면
손목 묶여 끌려다니는 사람이 보인다
촘촘한 구멍마다 그를 묻는다
무덤덤한 무덤들 위로 돋는 십자가
흰천의 무죄 위에
한 땀 한 땀 여죄를 찾아 채워간다
쉬 손 놓지 못하고 새우는 밤
낙타가 실에 꿰여 끌려오고
시간은 뾰족한 부리 돋은 새
천 구멍을 또박또박 쪼아대다
어둠 속으로 날아가버린다
바늘귀에 쫓기다 눈꺼풀 속 들여다보면
제 눈 찔러 터트린 꽃들 이파리 흔든다
파이프오르간
저 길고 짧은 길들 잔뜩 하늘로 매단 악기는
한 그루 실한 나무다
물관 체관으로 양분을 빨아
푸르디푸른 잎사귀 천정으로 피워올린다
열 손가락 발가락 닮은 페달이
노 젓듯 부지런히 흙 속을 파고든다
바람은 몸 깊숙이 박힌 管을 휘저으며
육신의 동굴마다 박쥐들을 깨워 날려보낸다
상하수도와 가스관, 통신케이블 관
누군가 지하에서 불어넣는 숨소리로 도시가 울고 있다
묘지마다 부풀어오른 봉분들의 긴장 좀 봐
달리는 자동차 우는 아이들 굴착기의 굉음,
빌딩의 막대그래프가 춤추며 출력을 그려댄다
파이프 오르간이다
아픈 짐승들처럼 먹구름 몰려오고
고층아파트는 오디오 스피커처럼 늘어서서
하모니를 뿜어낸다
거대한 뿌리,
지하철이 철컥철컥 옥문을 잠그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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