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9 피카소 - 성스러운 어릿광대
마리-로르 베르나다크, 폴 뒤 부셰 지음, 최경란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3
082
시158ㅅ 18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8
마리-로르 베르나다크 Marie-Laure Bernadac
1950년 2월에 태어난 그녀는 1980년 이후 지금까지 피카소 미술관의 관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0년에 사진집 <피카소 미술관>을 출판했으며, 같은 해에 피카소 미술관의 카탈로그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디디에 보시(Didier Baussy) 감독의 영화 <피카소>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폴 뒤 부셰 Paule du Bouchet
1951년 4월에 출생했다. 폴 뒤 부셰는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오가피 Okapi> 지(紙) 기자로 활약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도서를 다수 저술하였다.
옮긴이 : 최경란
1963년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0대학에서 언어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 단편 작가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번역서로는 <표절>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그리스 문명의 탄생>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통찰자, 피카소.
피카소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통찰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의미를
파악하여 생명력을 지닌 그림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그는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살던 시대를, 사람을, 사물을
잘 보았던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격하고 비밀스러워서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1955년 여름,
피카소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피카소는 번지지 않고 종이에 잘 스며드는
착색 잉크를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았는데,
이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앙리-조르주는 반투명한
종이 뒤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피카소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필름에 담았다.
1956년에 개봉된 <피카소의 신비>는
캔버스 위의 그림이 생명을 얻어가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 주었다.
미셰 리셰
<피카소 미술관, 파리 : 데생, 수채화, 고무수채화 그리고 파스텔화>,
1988
차례
제1장 스페인에서 보낸 유년기
제2장 몽마르트르에서의 광적인 시절
제3장 입체주의 혁명
제4장 명성으로의 길
제5장 천재의 고독
제6장 방황과 좌절
제7장 영광의 나날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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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스페인에서 보낸 유년기
스페인의 남부 도시 말라가의 하얀 대저택에서 피카소가 태어난 것은 1881년 10월 25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 정확히 23시 15분이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달과 성운들이 신기한 조합을 이루어 자정 무렵 하늘이 범상치 않게 밝았다. 그 빛은 신비한 광채를 드리우며 고요히 잠든 마을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피카소가 첫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8세 때 그린 <피카도르>(위)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다소 손상되기는 했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을 평생 간직했다. 파스텔을 사용한 어머니의 초상화(아래)는 피카소가 14세 때에 바르셀로나에서 그린 것이다.
1890년. 피카소가 9세 때 그린 비둘기 그림. 당시 피카소는 아버지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였다.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새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모델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집 안에서도 많은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들은 집 안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카소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비둘기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간직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로 이주하던 무렵인 1896년에 찍은 사진으로, 이때 피카소는 15세였다. 짧게 자른 머리가 그의 강렬한 시선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맨발의 소녀>. 1895년. 라코루나에서 이 소녀상을 그렸을 때 피카소는 14세였다. "이곳의 가난한 소녀들은 항상 맨발로 다녔다. 그림의 소녀는 온통 동상으로 뒤덮인 발을 내놓고 있다." 기법은 사실적이고 전통적이지만, 인물의 무거운 시선과 슬픔에 찬 모습 등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화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자의 동체>. 1893~1894.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으며 고대 주형들을 모사하였다. 완벽에 가까운 그의 작품들은 교수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는 어린아이의 그림을 그려 본 적이 한번도 없다. 12세 때 이미 라파엘처럼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한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바르셀로나는 유럽의 지성이 융합되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펜과 붓》, 《청춘》, 《카탈루냐 예술》 등의 잡지 외에도 피카소가 1901년에 예술부장직을 맡아 보기도 했던 《젊은 예술》과 같은 문예 지가 활발히 간행되는 가운데 모더니즘이 제창되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잡지들은 당시 바르셀로나 깊숙이 침투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의 기관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바르셀로나는 무정부주의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전유럽을 휩쓸던 무정부주의가 노동자 계급의 중심부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빈민가는 처참할 정도로 빈곤했다. 이는 사회에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촉진제 구실을 하였고 이 같은 폭력은 종종 소요와 테러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양이 네 마리'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페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이것은 카탈루나 지방의 '고양이 네 마리도 없다'는 표현이 프랑스어로 '고양이 한 마리도 없다.'라는 표현과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899년, 피카소는 이 카페의 차림표 표지를 그렸다. 피카소는 존경하던 툴루즈 로트레크의 화필을 환기시키면서 세기말 영국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양식을 유머러스하게 해석하고 있다.
색의 시대
'청색시대'의 작품들은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비교적 현실에 '부합'되며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의 주제 역시 직접적 감정을 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이 시기 작품에서도 피카소가 가진 고유한 시각이 관건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삶>(위). 1903년. 청색시대의 작품 중 가장 대작인 이 작품은 하나의 상징이다. 한쪽에는 한 쌍의 나체 인물이 있고 다른 쪽에는 초췌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이들 부부에게 사랑과 해산 등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이들 사이에 놓인 웅크린 나신은 창조가 현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는 곧 예술인 것이다. 피카소에게 예술은 죽음에서의 구원을 의미한다. 예술은 삶이다.
<자화상>(아래). 1901년. 피카소는 20세였으나 이 자화상에서는 무척이나 나이 든 모습으로 표현했다. 푹 꺼진 볼, 텁구룩한 턱수염, 넋이 나간 듯한 두 눈은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인간의 고독과 고뇌를 웅변해 준다.
청색시대
1901년에서 1904년에 이르는 시기에 피카소는 모든 것을 청색으로 보았다. 마치 그와 세계 사이에 청색 여과지가 놓여 있는 것처럼, 그가 사용한 디양한 청색들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청색은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청색은 밤의 색이고 바다의 색이며 하늘의 색이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생명, 태양, 열기를 표현하는 따뜻한 색이라면, 청색은 깊고도 차가우며 허무주의와 빈곤 그리고 일종의 절망감에 적합한 색이었던 것이다.
<맹인의 식사>. 1903년. '맹인'은 당시 피카소를 사로잡고 있던 주제였다. 맹인은 볼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다. 피카소는 자신의 손에 지대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화가에게 있어 모든 작업은 시각에 의존한다. 모든 권능이 눈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그 어떤 불구보다도 치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맹인이라는 주제를 통해 피카소는 진정한 시각, 즉 내면의 시각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은 외부세계가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을 때 화가가 보고 느끼게 되는 시각을 의미했다.
여명의 색
장밋빛시대는 1904년에서 1906년까지 이어진다. 이 이름은 당시 피카소의 화폭을 지배하던 황갈색과 창백한 장미색, 그리고 화폭에 나타난 인물들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때 모델이 되었던 인물들은 주로 곡예사, 서커스 단원, 소외 받고 상처 입기 쉬운 예술가 등이었다.
<공 위에 올라선 곡예사>(위). 1905년. 튼튼한 근육으로 단련된 육상선수가 넓다란 등을 보이며 각진 상자에 앉아 둥근 공 위에 올라서 있는 소녀를 지켜본다. 우아한 동작으로 두 팔을 들고 허리를 살짝 젖힌 소녀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대립을 환기시켜 준다. 한편에는 힘과 안정감, 자제력이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는 가벼움, 유연함, 우아함이 나타난다. 기하학적인 형상, 즉 정방형과 원형은 이러한 대립을 함축하고 잇다. 장식은 극히 단순화되어 있다. 배경에는 말과 인물들이 흩어져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아래). 1904년. 바짝 마른 몸에 슬프고 피로한 표정을 한 젊은 여인이 다리미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피카소의 몇몇 작품은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의 중간단계를 보여 준다. 이 그림의 주제는 청색시대의 그것(빈곤, 고난, 고역)이지만 색채는 분홍색과 회색을 향해 밝게 변하고 있다.
장밋빛시대
피카소의 세계는 1905년부터 밝아진다. 그의 삶도 회복되는 듯하다. 이 시기에 그는 매일 저녁 메드라노 서커스를 보러 갔다. 거기서 그는 곡예사들과 서커스 단원들에게 매료되어 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실상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이었다.
<어릿광대와 그의 동반자>(위). 1901년. <곡예사의 가족>(아래). 1905년. 4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된 이 두 작품에는 피카소가 매우 사랑했던 서커스 단원들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꿈꾸는 듯하면서도 어릿광대 특유의 다소 슬픈 표정을 한, 그리고 약간 취기가 도는 듯한 어릿광대와 그의 반려자가 사념에 잠겨 있다. 서커스 단원들은 피카소가 장밋빛시대를 지나는 여정 동안 진정한 동반자였다. 체크 무늬 의상의 어릿광대, 뾰족한 모자를 쓴 늙은 익살꾼, 두 명의 어린이, 수영복 차림의 곡예사,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무용수, 한쪽 구석에는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을 보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말해 주렴. 그들이 누구인지. 헤매는 이 사람들, 우리들보다 조금은 더 덧없이 보이는 이들이."
어릿광대의 색
<손풍금을 치는 사람>(위) 1905년. <원숭이와 함께 있는 곡예사 가족>(가운데). 1905년. <배우>(아래). 1904년.
"로마의 카니발 기간 중에 때로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밤의 대주연을 치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성 베드로의 발가락에 입맞추기 위해 산피에트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가면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피카소를 매혹시킬 만한 존재들이었다. 조악하게 번쩍거리는 싸구려 의상으로 치장한 이들 서커스단의 날씬한 모습에서 변덕스럽고 교활하며 가난에 찌들어 거짓말을 일삼는 젊은이를 느낄 수 있다."
기욤 아폴리네르
《화가, 소묘가인 피카소》
"청색은 사라져 가고 더 명료하고 가벼운 다른 색에게 자리를 내준다. 또 화폭의 여기저기에 공기나 빛에 영향받지 않은 고무수채화 기법의 우윳빛 색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색채는 어릿광대 의상의 색이다. 즉, 어떤 물체를 덮고 있는 다른 하나의 물체와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숨결 아래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이 톡톡 끊어진 윤곽선 안에 감미로운, 때로는 너무나 감미로운 수법으로 배치된 색채들은 목판화에서는 뜻밖의 것처럼 느껴진다.
세자르 브란디
<적색, 즉 회화>
제2장
몽마르트르에서의 광적인 시절
1900년 피카소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파리 생활은 최초의 외국생활이었다 그에게 파리는 몽마르트르를 의미했다. 피카소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았다. 몽마르트르는 가장 매력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착할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해 가을은 진정 영예로운 한철이었다. 파리는 아름다웠고 피카소는 이 도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바르테스의 초상>. 1901년. 어느 날 저녁 하이메 사바르테스는 카페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때 피카소가 들어와 그를 알아보곤 이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에는 녹색과 흰색, 황색이 사용되고 있다. 슬픔이 이미 자리를 잡은 얼굴에 손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카사게마스의 죽음>. 1901년. 파리.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의 죽음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었다. 이 작품들은 당시 피카소의 화풍 중 가장 이질적인 것들이다. 피카소는 죽어서 창백해진 친구의 얼굴을 기억을 더듬어 그려 나갔다. 이 얼굴은 반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빛을 방사하고 있는 촛불로 밝혀져 있다. 관자놀이 위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탄환자국이 선명하다.
당시 피카소는 빈곤과 창작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 사바르테스는 이렇게 썼다. "피카소는 예술이 슬픔과 고통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믿고 잇었다. 그는 슬픔이 명상에 적합한 것이며 고통은 삶의 토대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 불확실한 시기를 자신의 비참함에서 비롯된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페르낭드 올리비에. 1905년부터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한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훗날 피카소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피카소는 작은 키에 가무잡잡했으며 작달막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동시에 불안감을 주는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꼭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년. 피카소가 이 유명한 초상화에 착수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때 거트루드 스타인은 오랜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런데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피카소는 그 동안 그린 얼굴을 몽땅 지워 버렸다. 그에게는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6년 가을, 고솔에서 돌아온 피카소는 그동안 제쳐두었던 이 초상화에 다시 착수하여 가면 같은 모습을 부여햇다. 매끈한 이마는 튀어나온 듯하고 윤곽은 개성이 없고 도식적이며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여러 초상화 중에서 언제나 나의 모습으로 남아 잇는 유일한 것입니다."
<자화상>. 1906년. 피카소가 고솔에서 막 돌아와 그린 것이다. 고솔에서의 체류기간은 그의 미술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으로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인공적인 가식을 곁들이지 않고 일종의 투박함과 형태의 순수성만으로 그려 나갔다. 인물들은 거의 조각작품과도 같은 풍부함을 가지고 잇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피카소가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잇다.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그가 아닌 그 누군가가 문제라는 듯 자신의 얼굴을 가면처럼 그렸다. 이 작품의 강렬함과 거의 원시에 가까운 의고주의는 피카소가 몇 년 간, 어쩌면 지난 몇 달 간 겪은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머리손질>. 1906년. 파리 둥글고 단순한 형태와 달걀형의 얼굴 그리고 황갈색과 분홍색 계통의 색감 등, 이 작품은 고솔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머리손질'은 그 시기에 피카소가 즐겨 그리던 주제였다. 피카소는 여성의 몸동작들이 지닌 우아함과, 이 친밀한 순간의 차분하고도 육감적인 분위기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제3장
입체주의 혁명
1906년 말, 피카소는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맞았다. 피카소는 회화와 데생뿐 아니라 조각과 판화 분야에서도 널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마티스를 만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 다른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내부에서 용트림하던 하나의 흐름이 서서히 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흐름은 피카소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작업 태도와 신념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소녀의 초상>. 1914년 여름. 아비뇽. 선명한 빛깔과 뛰어난 장식효과, 경쾌한 분위기를 보이는 이 그림은 당시에 피카소가 제작하던 콜라주와 색종이 기법을 눈속임 효과로 모방해 그린 것이다.
그레보 가면. 목재와 식물성 섬유로 만든 이 가면은 피카소의 소장품 중 하나이다. 피카소는 흑인예술을 '이성적인 예술'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 다시 말해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사유를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피카소에게는 이 가면들에 담긴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시기의 피카소 작품에서 우리는 이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조르주 브라크. 1910년 클리시가에 있는 피카소의 화실에서. 브라크와 피카소는 기이한 한 쌍의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 정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브라크는 단적으로 "피카소는 스페인인이고 나는 프랑스인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카소가 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원기왕성했던 반면 브라크는 정적이고 냉철했으며 두드러지지 않은 성격이었다.
조각난 처녀들의 몸
미술사가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모든 현대미술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이 그림에서 최초로 한 화가가 사실적인 모습과 단절하고 새로운 회화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나체화는 모든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이다. 19세기에 앵그르는 <터키탕>을 그렸고, 20세기 초에 세잔은 <목욕하는 여인들>(1)을 그렸다. 많은 소묘(2)를 통해 작품의 구성을 연구하면서,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몇 달이나 걸렸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3년.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왼쪽의 세 여인은 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커다란 눈을 가지고 가운데에 위치한 여인은 귀가 8자처럼 그려져 있고 얼굴은 정면인게 코는 옆으로 뉘여 있다. 피카소의 설명은 이렇다. "옆으로 그린 코요? 그건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코라고밖에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오른쪽의 각진 형태를 한 두 여인은 줄무늬 섞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그녀들의 얼굴은 대칭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위쪽 여인의 커다랗고 검은 눈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다른 눈은 3/4 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 또한 아래쪽 여인은 등을 돌리고 앉은 자세에서도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 부분. 이 두 얼굴은 전혀 다른 두 유형을 보여 준다. 한 얼굴은 곡선으로, 다른 얼굴은 사선으로 그려져 있다.
<두 인물이 있는 풍경>. 1908년. 풍경 속에 두 명의 나체 인물이 놓여 있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다. 그들의 육체는 마치 나무에 흡수된 듯하다. 경치와 인물은 모두 단순화된 기하학적인 양감으로 동일하게 처리되었다. 언젠가 세잔은 "회화는 무엇보다도 광학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예술은 눈이 생각하는 것에서 소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08년경, 피카소는 아직 세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리가 '세잔식 입체주의'라고 부르는 입체주의의 초기단계이기도 하다.
에바(마르셀 움베르). 1912년. 피카소는 에바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년 간 그녀와 함께 살았다.
<파이프, 유리잔, 스페이드의 에이스, 바스병, 기타, 주사위(아름다운 나의 여인)>. 1904년. 생생한 색체와 반점들 그리고 <소녀의 초상>에서와 같은 눈속임 효과를 이 정물화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그리던 시기, 에바를 깊이 사랑하고 있던 피카소는 당시 유행하던 <아름다운 나의 여인>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작품 안에 악보를 삽입했다.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는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사물들로 구성된 정물화들을 다수 제작하였다. 특히 선술집의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물건들, 예컨대 카드, 병, 파이프 등을 즐겨 그렸으며, 여성의 몸을 연상시키는 악기인 기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15년. 쉘세르가 화실에서 찍은 피카소의 사진. 때는 전쟁 중이었다. 이 사진은 에바가 병에 걸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침울한 시기에 찍은 것이다. 매일 아침 피카소는 전철을 타고 화실과 환자의 침상 사이를 오가곤 하였다.
입체주의의 작은 입방체
입체주의란 1908년에서 1915년 사이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했던 탐구방식을 말한다. 입체주의(cubism)라는 단어는 '입방체(cube)'에서 파생한 것으로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한 미술비평가가 사용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실제로 브라크의 풍경화에서는 집과 나무, 배경이 모두 입방체 모양이다. 20세기 예술의 주요한 발견인 입체주의는 점진적인 단계들을 거쳐 발전한다. 초기의 '세잔식 입체주의'의 뒤를 이어 '분석적 입체주의'가 등장하고, 다음에는 '콜라주', 마지막으로 '종이붙이기'와 '구성'이 등장한다.
<빵과 과일그릇이 있는 정물>(1, 위)과 그 부분(2, 가운데). 1908년. 모든 대상이 원통, 원추, 구 등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정면에서 본 탁자를 표현한 그림에서는 탁자의 아래쪽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피카소는 탁자의 밑면에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렸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는 시선의 각도라는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오르타의 공장>(3, 아래). 1908년. 표면은 밝고 짙은 결정면들로 분할된다. 공장건물은 입방체로 표현되고, 건물을 구성하는 상이한 면들이 중첩된다. 피카소는 배경과 대상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산산조각이 난 얼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외관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사물로부터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앞면과 옆면, 빛과 공간 속에서 차지한 위치,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등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나의 화폭에 모두 표현할 수 잇을까? 그것은 사물의 모든 면들을 한꺼번에 늘어놓음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서로 중첩시킴으로써 가능했다.
<페르낭드의 초상>(위). 1909년. 가까이 보면 얼굴이 마치 골절되어 도드라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같은 평면의 유희는 이마의 양감과 음영을 재구성해 주고 있다. 여기서는 아직 얼굴의 윤곽선이 닫혀져 있다. 그러나 이듬해 피카소는 이 테두리마저 많은 부분으로 깨뜨린다.
<블라르릐 초상>(아래). 1910년. 결정면들의 좁다란 격자망을 통해 한 남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다. 형태를 해체하며 피카소가 채택한 방식은 그를 더욱 극단화시켰다. 이때 한편으로는 회화의 매커니즘에 따르는 지적인 과정, 즉 선과 결정면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격자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려야 할 모델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긴장감을 준다. 형태를 존중해야 할 것인가?
노끈, 신문지, 비닐장판 : 콜라주의 탄생
콜라주의 새로운 체계는 문외한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곧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가 미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소수의 전문가에게 국한된 순수한 실천으로 변질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작품에 어느 정도 현실을 보증하는 실제 사물을 붙이기 시작했다. 먼저 브라크가 자신의 작품에 못을 도입하고는 못의 그림자를 함께 그려 넣었다. 그림이 그 못으로 벽에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1912년에 피카소는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을 제작했다. 이는 최초의 콜라주 작품으로 미술사에 기록된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1912년. 등나무 의자를 그림으로 재현해서 의자라는 착각을 심어 주는 대신 피카소는 등나무 의자 무늬의 비닐장판을 한 조각 사용했다. 테두리로는 진짜 노끈을 사용했다. 그림의 내부에는 다양한 대상들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둥근 레몬 조각과 가리비 조개를 나타내는 삼각형이 놓여 있다. 투명한 물잔은 간략한 선으로 윤곽만을 그려 넣었다. 왼쪽에는 JOU라는 철자가 있는데, '신문(journal)'일 수도 '유희하다(Jouer)'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그림 자체가 말의 유희이자 이미지의 유희이다. 위에는 담배 파이프 관과 담배통이 그려져 있다.
바이올린과 악보 : 종이붙이기와 구성
모든 종류의 재료를 이용하는 콜라주라는 결정적인 기법을 발명한 후, 브라크와 피카소는 종이붙이기에 착수했다. 신문조각, 색종이, 악보 등. 그들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자르고 붙이고 구성했다. 종이붙이기 수법을 통해 색채가 다시 도입되었고 중첩된 여러 평면들에서 깊이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피카소는 회화의 평면적 공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용적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공간의 정복을 원하게 되었다.
<만돌린과 클라리넷>(1). 구성. 1913년. <기타>(2). 구성. 1912년. <바이올린>(3). 구성. 1915년. <바이올린과 악보>(4). 종이붙이기. 1912년.
<바이올린>(5). 1913년. 피카소는 화폭 위에 마분지로 된 상자를 붙였다. 그리고 상자에 길쭉한 틈을 내어 울림통을 표시했다. 그 옆에는 바이올린의 'f자 구멍'을 그려 넣었다. 종이붙이기를 한 '인조나무'는 바이올린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바이올린의 형태는 신문지 바탕 위에 목탄으로 그렸고, 악기의 현은 흰색 종이띠 위에 표시했으며, 바이올린의 받침대는 화폭의 제일 위쪽에 그렸다. 이렇게 바이올린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기법으로 나타나 있다.
제4장
명성으로의 길
1917년의 로마는 태양과 로마 시민들의 쾌활함과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용돌이 장식으로 꾸며진 바로크풍의 기념물들, 경탄을 자아내는 성당 건물과 성당의 독방 기도실에서 빛을 발하는 대리석 조각들, 고대의 대광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작품들, 피카소는 황홀경에 빠져 온종일 걸어다니다 베네토가 깊숙이 자리잡은 카페에 들어가 피곤한 다리를 쉬곤 했다. 그는 마치 공작새 꼬리의 수많은 눈을 가진 사람처럼 로마를 관찰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의 초상>(위). 1917년. 피카소는 고전적이고 구상적인 양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인 채 남겨 두었다. 의자덮개가 종이붙이기를 한 자락 해놓은 것처럼 처리되어 있다. 아래는 발레극 《메르큐르와 퓰치넬라》를 위한 의상.
<에릭 사티의 초상>. 1920년. 당시 50세였던 사티는 피카소보다 15세 정도 연상이었고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기상천외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초상화가 제작되기 불과 몇 년 전부터 친구 드뷔시와 라벨의 도움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퍼레이드》의 무대장막. 1917년. 첫 상연부터 관객들은 분노했다. 낭만적인 발레를 애호하던 사람들은 《퍼레이드》를 혐오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 이 무대장막은 오늘날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새로운 친구 장 콕토의 캐리커처. 1917년. 파리.
<아폴리네르의 초상>. 1916년. 피카소는 군복을 입은 시인 친구의 모습을 한번의 필치로 그려 냈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때 전쟁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전선에서 입은 상처를 싸맨 붕대 위에 군모를 눌러쓰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 전시회에 즈음하여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흔히 피카소의 작품이 때이른 환멸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그 반대이다. 나에겐 그가 모든 것에 매혹당해 자신의 부인할 수 없는 재능을 달콤함과 끔찍함 그리고 비천함과 우아함을 뒤섞는 어떤 공상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1922년. 해수욕장의 두 여인은 마치 거인과도 같다. 그들의 발은 지축을 뒤흔드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시간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에 취한 듯, 발레리나와 같이 우아하게 도약하여 달리고 있다. 1920년대에 피카소는 정기적으로 바다를 찾았다. 그곳에서 해수욕하는 여인들의 육체에 매혹된 그는 그 몸들을 괴이하게 변형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고무수채화는 콕토와 다리우스 미요의 발레극 《푸른 열차》의 무대장막으로 사용되었다. '푸른 열차'는 휴가열차라는 의미이다. 이후에 피카소는 잠시 로마에 체류하였다. 그곳에서 피카소는 로마 제국 시대의 조각품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육상선수, 전사, 여신들의 조각상들이 지닌 장엄함은 고귀함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시기 피카소의 삶에 등장한 연극이라는 요소는 고대 로마 예술품들의 기념비적인 형태와 결합되었다.
제5장
천재의 고독
피카소가 고전적인 주제들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린 지 몇 년이 지났다. 가족인 올가와 파울로를 모델로 그린 많은 초상화들, 이제 이 고전풍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1925년 6월에 공개된 작품 앞에서 비평가들은 모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이 작품은 <무용>이었다.
<무용>(위). 1925년. 마음대로 휘어진 몸, 요란한 색채, 축약된 움직임을 보이는 새 인물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는 고개를 젖히고 가슴 한쪽을 공중에 드러낸 채 다리 하나를 들고 있다. 또 한 여인은 십자가에 박힌 듯 두 팔을 들고 있다. 측면상으로 그려진 남자는 못 모양을 한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고 있다. 아래는 만 레이가 1937년에 찍은 피카소의 사진.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 시의 근본을 제시했다. 그것은 무의식의 탐구와 더불어, '현실'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언어를 탐색한다는 것이었다.
<기타>. 1926년. 구멍난 삼베천, 가느다란 실, 못, 신문지를 잘라 만든 띠들, 이것들로 기타가 하나 만들어졌다. 이 작품의 의도는 극히 공격적인 것이어서, 피카소는 작품 주위에 칼날을 붙이려고까지 생각하였다. 작품에 손을 대려는 사람의 손가락을 끊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청동제 광대상과 여인상
피카소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그는 조각의 모든 형태들을 새롭게 창안했으며 수많은 재료와 새로운 기법을 실험했다. 그는 석회를 주물했고 나무를 깎았으며 마분지와 함석을 자르고 접었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낸 사물을 조합했다. 이리하여 피카소는 현대조각의 길을 열었다.
1909년에 피카소는 전통적인 조각의 양감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각이 진 수많은 결정면들로 양감을 분해했다. <페르낭드의 두상>(1, 위).
1905년에 제작된 초기작품의 하나인 <광대>(2, 가운데)는 즐겨 표현하던 곡예사의 테마를 가지고 고전적인 수법으로 제작한 환조이다. 처음에 이것은 친구인 막스 자코브의 흉상으로 계획되었다.
1930년대에 피카소는 형태나 짜임새로 선택된 재료나 대상을 주형으로 각인을 뜬 후, 그것으로 모델링을 하는 방식을 창안했다. 그는 석회를 사각형 통에 부은 후, 구멍을 세 개 뚫어 머리를 만들었다. 주름진 종이 안에다 석회를 부은 것은 옷이 되었다. 이렇게 만든 옷의 주름은 건축물 기둥 세로홈을 연상시킨다. 잎맥이 모두 드러난 나뭇잎의 각인은 <나뭇잎 여인>(3, 아래)에 생명의 떨림을 부여한다.
대형 목제 수영객들
피카소는 물건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끈, 깡통, 못, 중고품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모았다. '언젠가는 다 쓰일 데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잡일꾼이자 천부적인 '넝마주의'였던 그는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사물은 그의 천재성을 통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해수욕객들>. 1956년. 이들은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잠수부, 손을 모은 남자, 분수(噴水)-남자, 어린이, 팔을 벌리고 있는 여자, 젊은 남자 등이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유일한 군상 조각품이다. 긴 기하학적 모양을 한 인물들은 다듬지 않은 판자들을 조합하여 제작했다.(피카소 미술관에는 이 작품의 청동제판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침대다리, 빗자루대, 액자틀 등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판자 위에는 인체의 해부학적 특징들이 삽입되어 그려져 있다. 판판하고 단순한 형태만을 가지고서도 피카소는 표현력과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들을 창조해 낸 것이다. 피카소가 제시한 인물들의 연출에 따르면, 잠수부와 손을 모은 남자는 방파제 위에 서 있고 팔을 벌리고 있는 여자와 젊은 남자는 다이빙대 위에, 그리고 분수-남자와 어린이는 바닷물 속에 있다.
조합해 만든 조각품
1941년부터 조각은 또다시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는 새로운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쓰레기 하치장 등에서 주워 모은 잡다하고 기묘한 잡동사니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자전거 안장과 녹슨 핸들이 생명력 넘치는 황소 머리로 둔갑하고, 고철조각이 품위 있는 커다란 새로 변신했다. 다시 한번 피카소는 눈에 띄는 노력 없이 마술 같은 변신을 보여 주었다.
<염소>(위). 1950년. 종려나무 잎이 염소의 등이며, 부풀어오른 염소의 배는 버드나무 바구니로 만들었다. 나무와 고철조각이 염소 다리로, 철사가 꼬리로, 포도나무 그루터기가 뿔과 수염으로 바뀌었다. 염소의 귀는 마분지로, 흉곽은 통조림 깡통으로, 젖통은 두 개의 도자기로 만들었다. 반으로 접은 냄비 뚜껑이 성기이며, 금속 파이프를 잘라 낸 것이 항문이다. 이 모든 요소는 회반죽으로 뭉쳐져 하나가 되었으며, 끝으로 염소에 청동을 입혔다.
<줄넘기하는 소녀>(아래). 1950년. 바구니는 소녀의 몸, 과자를 찍는 틀은 꽃, 주름무늬 마분지는 소녀의 머리이다. 이 작품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는다. 피카소는 말했다. "줄넘기하는 작은 소녀를 어떻게 공중에 띄워 둘 수 있을까? 나는 줄넘기 줄을 바닥에 고정하기로 했다."
함석판 자르기
피카소가 조각예술에 마지막으로 기여한 바는 함석조각들을 자르고 채색하여 만든 60년대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수욕객들>에서 시작된 평면조각의 원칙을 접기 과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피카소는 계획한 그림에 맞추어 종이를 잘랐다. 그리고 몇몇 면을 접어서 인물들을 세운 후, 거기에서 생긴 각들로 입체감을 가늠해 보았다. 다음에는 종이나 마분지로 만든 이 모형에 맞추어 함석판을 잘라 작품을 완성했다.
<축구선수>. 1961년. 둥글고 충만한 형태와 경쾌한 색감으로, 공을 차기 직전에 가볍게 몸을 날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는 것이 옷, 얼굴, 발, 손 등을 도식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피카소는 일생을 통해 회화와 조각을 밀접하게 관련지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화를 자르기만 하면 된다."
<마리 테레즈 발터>(위). 1929년 여름 디나르에서 찍은 사진. 아래는 1931년 작품인 <여인 흉상>. 이마의 연장선에 커다란 코가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마리 테레즈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부아줄루에서 피카소가 조각 작업실로 개조한 천장이 높은 마구산에서 제작한 것이다. 피카소는 이 새로운 모델의 둥글고 충만한 형태와 관능적인 우아함에 물리는 법 없이 수많은 조각과 회화, 판화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찬양했다.
<조각가의 휴식>. 동판화 1931년. 이 작품은 <조각가의 작업실> 연작의 일부이다. 몇 년 전부터 피카소는 볼라르에게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제공한다는 계약을 맺고 있었다. 1937년까지 지속된 10년 간의 계약기간 동안 피카소는 100여 점의 판화와 동판화를 넘겨주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볼라르 연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이다.
<막사를 열고 있는 해변의 여인>. 1928년. 1927년에서 1929년 사이에 피카소의 화폭에는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여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분해된 듯한 여인들의 몸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들 가운데 이 시기의 것들은 가장 널리 알려진 동시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회화에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주제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인형을 안고 있는 마이야>. 1938년. 여기에서 마이야의 눈은 하나는 정면을, 다른 하나는 측면을 보고 있다. 옆모습을 하고 있는 코에는 두 개의 콧구멍이 있고, 입은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입체주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피카소는 마이야의 모습을 동시에 두 개의 각도에서 그리고자 했다. 변형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이야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다. 마이야는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당시 세 살이었다. 이 혼돈스러운 그림에서 단지 인형만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프랑코의 망상과 기만>. 피카소는 1937년에 <프랑코의 망상과 기만>이라는 시가 삽입된 두 개의 판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프랑코의 폭정에 대한 가차없는 저항을 의미했다. 여기서 스페인의 독재자는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전쟁광의 모습으로 그려져 잇다. 사건들이 마치 만화처럼 직사각형 속에 넣은 일련의 그림을 통해 표현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고발의 글이 함께 실렸다. "어린이들의 외침, 부녀자의 외침, 새들의 외침, 기둥과 돌들의 외침, 벽들의 외침, 침대와 의자와 커튼과 항아리의 외침……." 고국을 갈가리 찢어 놓은 비극 앞에서 피카소가 보인 격렬한 반응은 그가 진정한 스페인 사람으로 남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게르니카>
<게르니카>(1). 1937년. 위의 단순한 소묘들이 피카소의 회화작품 중 가장 강렬한 <게르니카>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공포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외침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1937년 5월 1일부터 6월 말까지 피카소는 45점의 크로키를 제작했다. 황소, 불을 든 여인, 말 등 그림의 주된 요소는 첫 소묘에 이미 다 나타나 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것은 전쟁, 맹목적인 폭력, 어린아이들의 죽음, 어머니들의 고통 등 모든 인류에 공통된 비극이다. 피카소는 투우 장면, 말, 암흑과 야만성의 상징인 황소 등 자신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비극을 말하고자 했다. 전체 색조는 초상, 장례의 그것이다. 피카소는 의도적으로 물감을 흰색과 검정색으로 한정했다. 형태는 마치 포스터에서 보는 것처럼 납작하고 단순화되어 강한 극적 효과를 주고 있다. "어떻게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냉담한 상아탑에 갇혀 다른 사람들이 그리도 풍부히 제공하는 삶을 외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무기입니다."
미노타우로마키(Minotauromachy)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와 투우(Toraumachy)를 합성해 피카소가 만든 말이다. <미노타우로마키>(1935)라는 이 유명한 판화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촛불을 든 소녀를 향해 위협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장면의 배경은 해변이다. 긴 턱수염을 한 남자는 사다리 위로 도주하고 있다. 중앙에 있는 암말은 칼을 쥔 여자 투우사를 등에 태운 채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비둘기와 함께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이 기이한 장면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작품은 미노타우로스로 의인화된 악의 힘과 밤의 어두움, 소녀로 대표되는 선과 빛, 순진함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 여왕 파시파애와 바다에서 온 황소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로, 인간의 몸과 황소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이다. 피카소는 이 신화에 매혹되어 여기에 자신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인간과 동물 간의 필사적이며 비극적 투쟁인 투우를 결합시켰다. 이때 동물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강한 힘을 상징한다. 피카소 자신은 종종 스스로를 미노타우로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종이 위에 모두 표시하고 그 점들을 이어 보면 그것은 미노타우로스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6장
방황과 좌절
1939년은 두 개의 겹쳐진 얼굴, 두 개의 겹쳐진 존재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와 도라였다. 피카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두 얼굴은 서로 대치되고 중첩되었다, 1월의 어느 날에는 똑같은 포즈를 취한 모습으로 두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깊고 깊은 표정을 가진 도라의 얼굴은 피카소를 매혹시켰다. 피카소는 울면서 애원하는, 눈물자국이 난 얼굴을 한 그녀의 모습을 수없이 그렸다.
<애원하는 여인>(위). 1937년. 작달막하고 괴물 같은 몸에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여인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이 여인은 스페인 내전에서 상처를 입은 어머니들과 과부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아래는 1941년의 도라 마르.
<앙티브에서의 밤낚시>. 1939년. 이 작품은 <게르니카> 다음으로 큰 대작이다. 1939년 여름. 피카소는 집어등을 밝힌 밤낚시라는 주제로 항구의 일상생활을 담았다. 작은 배의 이물 앞에 놓인 대형 램프는 불빛을 발하면서 물고기를 유인한다. 한 어부가 사지창으로 사각형 모양의 생선을 찍고 있다. 다른 어부는 손으로 물고기를 낚아채려고 물 위로 위태롭게 상반신을 내밀고 있다.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두 여인은 도라 마르와 앙드레 브르통의 아내 자클린 랑바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부두를 따라 자전거를 끌고 있다. 지중해의 밤은 어두운 청색과 보라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물들의 얼굴과 몸은 폭력적으로 왜곡되어 있으며, 그림은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결정면들로 분할되어 있는 듯하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녀들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피카소의 용어로 물고기와 가재류는 폭력과 잔인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새를 잡은 고양이>. 1939년. 세계대전의 위협이 프랑스 전역을 내리덮고 있었다. 피카소는 한번도 전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 때 그린 그림에는 전쟁이 몰고온 폭력과 공포가 가득 차 있다.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소재들, 예컨대 고양이나 새들까지도 견디기 어려운 잔혹함의 이미지로 변형되어 있다.
자작 희곡 《꼬리 잡힌 욕망》의 속표지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1941년.
<양을 안고 있는 사나이>. 청동. 1943년. 1950년에 피카소는 발로리스 시청에 이 조각상을 기증했다. 이 작품을 발로리스 시내의 작은 광장에서 볼 수 있다.
<태양의 여인 프랑수아즈>. 1946년.
피카소,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의 조카 그자비에 빌라토.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1948년 여름.
올빼미의 이글거리는 눈은 피카소의 눈이다.
피카소의 컬렉션
"화가란 수집가입니다. 타인들로부터 좋아하는 부분을 취해 스스로 그린 그림을 수집하지요."
피카소
세잔의 <에스타크의 바다>(1). 1879년. 세잔의 회화는 입체주의의 시발점이다. "세잔에 대해 아느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입니다. 나는 수년 간 그의 그림을 연구했습니다."
마티스. <오렌지가 있는 정물>(2). 1912년. 마티스는 피카소가 존경하던 경쟁자였다. 피카소는 평생 마티스와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마티스가 색채, 조화, 충만감, 행복이었다면, 피카소는 데생, 분해, 갈등, 비극이었다.
루소. <여인의 초상>(3). 1895년. 이 걸작은 피카소가 1908년에 한 고물상에서 발견한 것이다. 두아니에 루소의 신선한 시각은 피카소와 친구들에게 중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여인의 두상들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는 눈, 옆으로 누운 코, 삐뚤어진 턱, 뾰족하게 과장된 얼굴, 그로테스크한 모자, 예를 들어 사람들은 뭔가 변형되고 왜곡되어 있는 것을 보면 "피카소 작품 같군."하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의 작품을 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피카소는 이런 변형을 준 것일까? 피카소는 대체 왜 인간의 얼굴을 흐트러뜨리고 아래위를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서 즐거워한 것일까?
<마리 테레즈의 초상>(위). 1937년. 언제나 마리 테레즈의 모습은 차고 부드러운 색으로 그려져 있다. 마리 테레즈는 푸른색과 녹색, 황색과 백합색을 사용해 둥글고 조화로운 선과 아라베스크한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피카소는 독서를 하거나 잠이 들어, 자신의 시선에 전신을 맡긴 마리 테레즈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줄무늬 모자를 쓴 여인의 흉상>(아래). 1939년.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는 여인들 하나하나에 대한 시각을 담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모자와 함께 여인들은 희극적이고 가련하고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여인의 얼굴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문양, 특히 줄쳐진 모자의 모티브를 완전히 흡수해 버린 듯하다.
울고 있는 여인
피카소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최우선 문제였다.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다음 문제였다. 피카소는 형태, 선, 색채를 변형시킨 다음에 전체적인 조화를 부여했다. 그는 얼굴이나 몸을 하나의 구조물로 여겼다. 즉, 코, 귀, 목 등을 마음에 드는 장소에 배치하는 정물화로 생각한 것이다.이러한 변형이나 왜곡된 형태들은 표현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한다.
<울고 있는 여인>. 1937년.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거나 폭력적인 충격을 받을 때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변형을 체험한다. 많은 표현들이 변형을 증명해 준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입이 얼어붙는 것 같다' '얼굴이 눈물로 푹 팬다'하는 말이 그것이다. 피카소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감정들이었다. 전쟁중에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전쟁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도라 마르의 초상>. 1937년. 그녀는 종종 검은색이나 붉은색 등의 강렬한 색채와 함께 뾰족한 형태로 표현된다. 붉은색으로 칠한 긴 손톱과 둥글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이는 턱, 지성과 생기로 반짝이는 두 눈이 인상적이다. 도라 마르의 얼굴은 전쟁중에 있는 인간의 고통을 대변해 준다. 그녀는 '우는 여인' 즉 고통으로 뒤틀린 여인의 상징이었다.
여인과 꽃
피카소는 모델의 개성이나 특징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모델이 자기에게 불어넣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여인은 그에 따른 특정한 양식에 대응한다. 왜곡된 형태는 화폭에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즉, 여인의 정면상, 측면상, 3/4상 등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폭은 하나밖에 없었고, 따라서 모든 부분을 전부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얼굴을 비틀어야만 했다.
<자클린의 초상>(위). 1954년. 그리스풍 옆모습을 지닌 자클린. 이마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곧은 코와 아몬드 열매같이 깊이 팬 커다란 두 눈을 가진 자클린은 완벽한 지중해 여인의 전형이었다. 피카소는 터키 의상을 입고 동양식으로 무릎을 꿇은 그녀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얼굴선의 엄격한 순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구성하는 면들을 기하학적으로 처리했다.
<꽃여인>(아래). 1946년. 프랑수아즈 질로는 꽃여인, 해여인을 상징했다. 피카소는 이 특징을 더욱 강조하여, 꽃잎 같은 풍성한 머리채는 빛을 발하며 둥글게, 만개한 가슴을 지탱하는 허리는 꽃줄기로 표현했다.
제7장
영광의 나날
라칼리포르니는 칸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별장으로 20세기 초엽에 벨에포크(Belle Epoque)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집이었다. 통풍이 잘되는 방들은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들이 있어 매우 밝았다. 하지만 힘든 시기였다. 1955년 초여름, 피카소의 가장 큰 소망은 무분별한 질문들을 해대는 기자들과 대중을 피하는 것이었다.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의 초상>(위). 1955년. 피카소는 자클린이 들라크루아의 작품 <알제리의 여인들> 속에 그려진 하렘의 여인 하나와 닮았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래는 1950년대의 피카소. 투우장면을 그리고 있다.
<알제리의 여인들>(위).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 주제에 의한 작품>(아래). 피카소. 1955년.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방'한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구성과 인물은 그대로 고수했으나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지난 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 작가들을 일생의 어느 한 시기 동안 사로잡던 주제였다. 마네와 세잔 같은 화가들, 프로코피에프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음악가들, 콕토 같은 시인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탐구의 최종목표는 항상 공통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즉, 그들은 고전적인 교훈에 비추어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넘어서자는 것이었다. 피카소도 그의 생애 마지막의 몇 해 동안 과거와의 호기심 어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을 주제로 한 14개의 변형 작품,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주제로 한 44개의 작품,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주제로 한 27개의 작품을 제작했다.
1955년. 피카소는 새로운 거주지로 옮겼다. 칸에 위치한 저택 라칼리포르니였다. 그는 거대한 거실을 화실로 꾸미면서 전적으로 바로크적이며 그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 가구 등 피카소가 사랑하던 물건들이 곳곳에 쌓여 있는 라칼리포르니는 말 그대로 창고 같았다. 피카소는 이 화실을 '나의 내면 풍경'이라고 불렀으며, 이 장소를 소재로 15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의 가운데에는 이젤에 걸린 백색의 캔버스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의 초상화 습작이 보이고, 왼쪽에는 마름모꼴의 소형 조각인 <여인의 두상>과 마로크산(産) 접시가 보인다. 피카소는 창문 가장자리의 잘라 낸 듯한 형태를 전체작품의 구성에 리듬을 주는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엑상프로방스 가까이에 자리잡은 보브나르그성. 세잔이 살았던 이곳에 피카소는 1958년에서 1961년까지 거주했다.
<모성>. 1971년. '모성'은 종종 강한 추진력으로 피카소를 찾아오는 주제이다. 그 자신 67세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되었던 피카소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모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생의 끝에 다다른 90세가 되어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회화기법을 창안했다. 흐르는 물처럼 간략한 형태를 빠르고 분명한 붓놀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색채는 더 많이 사용되었다. 소홀한 듯 잘 다듬어지지 않은 특징은 실제로는 새로운 생명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피카소의 탐구는 회화에서의 좀더 큰 자유를 상징한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피카소
"우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피카소
피카소와 프랑수아즈 질로. 발로리스에 있는 집 라갈루아즈에서의 한때. 1951년.
칸바일러와 피카소. 1960년대. 라칼리포르니에서.
밤의 정경을 찍고 있는 브라사이. 1930년경.
엘뤼아르의 시집 《비옥한 눈》에 실린 일러스트레이션. 피카소 작.
A PABLO PICASSO
I
Les uns ont inventé l’ennui d’autres le rire
Certains taillent à la vie un manteau d’orage
Ils assomment les papillons font tourner les oiseaux en eau
Et s’en vont mourir dans le noir
Toi tu as ouvert des yeux qui vont leur voie
Parmi les choses naturelles à tous les âges
Tu as fait la moisson des choses naturelles
Et tu sèmes pout tous les temps
On te prêchait l’âme et le corps
Tu as remis la tête sur le corps
Tu as percé la langue d l’homme rassasié
Tu as brûlé le pain bénit de la beauté
Un seul cœur anima l’idole et les esclaves
Et parmi tes victimes tu continues à travailler
Innocemment
C’en est fini des joies greffées sur le chagrin.
II
Un bol d’air bouclier de lumière
Derrière ton regard aux trois épées croisées
Tes cheveux nattent le vent rebelle
Sous ton teint renversé la coupole et la hache de ton front
Délivrent la bouche tendue à nu
Ton nez est rond et calme
Les sourcils sont légers l’oreille est transparente
A ta vue je sais que rien n’est perdu.
III
Fini d’errer tout est possible
Puisque la table est droite comme un chêne
Couleur de bure couleur d’espoir
Puisque dans notre champ petit comme un diamant
Tient le reflet de toutes les étoiles
Tout est possible on est ami avec l’homme et la bête
A la façon de l’arc-en-ciel
Tour à tour brûlante et glaciale
Notre volonté est de nacre
Elle change de bourgeons et de fleurs non selon l’heure mais selon
La main et l’œil que nous nous ignorions
Nous toucherons tout ce que nous voyons
Aussi bien le ciel que la femme
Nous joignons nos mains à nos yeux
La fête est nouvelle.
IV
L’oreille du taureau à la fenêtre
De la maison sauvage où le soleil blessé
Un soleil d’intérieur se terre
Tentures du réveil les parois de la chambre
Ont vaincu le sommeil.
V
Est-il argile plus aride que tous ces journaux déchirés
Avec lesquels tu te lanças à la conquête de l’aurore
De l’aurore d’un simple objet
Tu dessines avec amour ce qui attendait d’exister
Tu dessines dans le vide
Comme on ne dessine pas
Généreusement tu découpas la forme d’un poulet
Tes mains jouèrent avec ton paquet de tabac
Avec un verre avec un litre qui gagnèrent
Le monde enfant sortit d’un songe
Bon vent pour la guitare et pour l’oiseau
Une seule passion pour le lit et la barque
Pour la verdure morte et pour le vin nouveau
Les jambes des baigneuses dénudent vague et plage
Matin tes volets bleus se ferment sur la nuit
Dans les sillons la caille a l’odeur de noisette
Des vieux mois d’Août et des jeudis
Récoltes bariolées paysannes sonores
Ecailles des marais sécheresse des nids
Visage aux hirondelles amères au couchant rauque
Le matin allume un fruit vert
Dore les blés les joues les cœurs
Tu tiens la flamme entre tes doigts
Et tu peins comme un incendie
Enfin la flamme unit enfin la flamme sauve.
VI
Je reconnais l’image variable de la femme
Astre double miroir mouvant
La négatrice du désert et de l’oubli
Source aux seins de bruyère étincelle confiance
Donnant le jour au jour et son sang au sang
Je t’entends chanter sa chanson
Ses mille formes imaginaires
Ses couleurs qui préparent le lit de la campagne
Puis qui s’en vont teinter des mirages nocturnes
Et quand la caresse s’enfuit
Reste l’immense violence
Reste l’injure aux ailes lasses
Sombre métamorphose un peuple solitaire
Que le malheur dévore
Drame de voir où il n’y a rien à voir
Que soi et ce qui est semblable à soi
Tu ne peux pas t’anéantir
Tout renaît sous tes yeux justes
Et sur les fondations des souvenirs présents
Sans ordre ni désordre avec simplicité
S’élève le prestige de donner à voir.
Paul Eluard, in Cahiers d'Art n°3-10, 1938
1941년. 친구들과 함께한 《꼬리 잡힌 욕망》의 낭독회. 피카소는 중앙에 서 있다. 그의 오른쪽으로는 자니 드 캉팡, 루이즈 레리, 피에르 레베르디, 갈라의 딸, 세실 엘뤼아르, 라캉 박사가 있고, 그의 왼쪽으로는 발렌틴 위고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보인다. 장 폴 사르트르, 미셀 레리 그리고 장 오비에는 앉아 있다. 알베르 카뮈는 쭈그린 모습이다.
《퍼레이드》의 등장인물인 파리의 매니저(Manager of Paris).
《퍼레이드》의 무대장막 위에 앉아 있는 피카소와 일꾼들.
1953년 12월 27일 《뤼마니테》지 제1면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1953년에 피카소가 제작한 스탈린의 초상화는 프랑스 공산당 내부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의 기법이 너무 공상적이라는 것이었다.
1906년 바르셀로나에서.
1916년 쉘세르가에서.
1910년경 클리시가에 있는 화실에서.
애견 카스백과 함께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당나귀 위에 앉은 파울로. 1923년.
1937년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에서 <게르니카>를 그리고 있는 피카소.
투우 관람. 피카소 왼쪽에 장 콕토, 오른쪽에 자클린 로크, 뒤에 팔로마, 마이야, 클로드가 있다.
1951년 라갈루아즈에서.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피카소와 클로드.
1967년 라칼리포르니에서 피카소와 자클린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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