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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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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4 만인보

 

高銀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0

 

811.6

고67만  12

 

창비전작시---------------------------------------------------------------------

 

큰 명제에 대한 시대적 일탈이 여기저기서 눈여겨지는 때에 시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뜨겁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접어두고 나서 나는 그 이념의 혐의와 상관없이 먼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이나 사회 · 역사 · 문명 전반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사실에 새삼 눈떠야 했다. 인간의 실존적 정화 내지 승화만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고비들을 넘기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세상에 어디 '시적 인간'의 가능성이 그 싹수마저 보이고 있느냐라고 고개를 젓지 말기 바란다. 바로 이런 판에서 시인보다 먼저 시적 인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므로.

다만 그런 인간에게서 메시아적이기보다 연인적이기까지 한 친화를 경험하는 것이 창조의 축복과도 닿아 있을 터이다.

「머리말」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이병린 / 김영삼 / MOON / 다시 김승훈 / 정산(鼎山) 송규(宋奎) / 박태준 / 샛강 봉사 / 김홍일 / 박용길 / 이재선 / 이희호 / 김석중 / 박영숙 / 이종옥 / 이해동 / 문동환 / 서귀포 김태연 / 구시렁구시렁 / 이동인 / 장기려 / 박보희 / 문혜림 / 삼두매[三頭鷹] / 이재정 / 임형택 / 유홍준 / 김효순 / 김  영 / 도예종 / 김상현 / 담배 선 / 신과장 / 김종완 / 경순왕 / 이석표 / 김찬국 / 화가 박수근 / 허백련 / 탁희준 / 홍사중 / 리영희 / 문정현 / 문규현 / 한승헌 / 조화순 / 송기숙 / 김경징 / 서남동 / 신홍범 / 조준희 / 백기완 / 한완상 / 신구문화사 이종익 / 김병익 / 이우정 / 이광훈 / 김언호 / 변형윤 / 그 사람 / 박형규 / 지학순 / 이문구 / 수로(首露) 이전 / 소설가 이병주 / 이호철 / 임채정 / 염무웅 / 백낙청 / 최성묵 / 박봉우 / 옛 스님 / 배추 방동규 / 박태순 / 성유보 / 정동익 / 김병걸 / 김태진 / 이재오 / 이부영 / 김근태 / 이해찬 / 허  생 / 제정구 / 윤강옥 / 윤한봉 / 나상기 / 정상복 / 인명진 / 서경석 / 이근성 / YH 김경숙 / 박현채 / 송기원 / 송기원의 아버지 / 이시영 / 조태일 / 채현국 / 황석영 / 고대의 한 어린이 / 양성우 / 오원춘 / 임헌영 / 박용수 / 구중서 / 설  훈 / 박계동 / 조성우 / 서자의 나라 고조선 / 최  열 / 김승균 / 김정남 / 꼴레뜨 노정혜 / 오숙영 / 김광일 / 김한림 여사 / 최순영 / 박태연 / 화양동 / 맥주홀 월드컵 / 김우창 / 김제균

찾아보기

 

김영삼

 

이상한 순풍이었다

행운의 연속

그가 탄 배는 뱃머리가 늘 힘찼다

25세에 국회의원이니

민주당 구파는 벌써 그가 이끌어갔다

이상한 순풍이었다

 

몇번의 역려(逆旅)가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날

더 좋은 순풍일 따름이었다

그의 뱃머리 수평선은 짙푸르게 힘찼다

 

70년대에 접어들어

김대중의 상대였다가 동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구파와 신파 사이의 연장이었다

 

이윽고 신민당 총재였다

약속장소에 항상 먼저 와 있었다

술 담배 끊고

새벽 달리기를 시작했다

항상 먼저 와

10분 전 혹은 5분 전 먼저 와 있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지키는 것이 있었다

그에게는 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천부적인 전술이라면

그 수준은 누구의 수준인가를 알 수 없다

 

79년 여름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직관적인 결단으로

YH노동자들 신민당 강당 농성을 승낙해주었다

그것이 유신체제가 쓰러지는 바퀴소리일 줄이야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박태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었다

군복 정장을 입으나

군복을 벗으나

왠지 일본 사무라이 같은 사람

이 사람이

한국 무쇠의 대장부였다

 

일본의 제철을 억척으로 배워다가

일본 제철을 능가한 대장부였다

 

포항 영일만 갈대와 세모래 갈매기 대신

시뻘건 쇳물이 흘러가며

식어가며

한 덩어리 무쇠가 되는 곳

 

세계 6대주가 그를 탐냈다

박태준 그로 하여금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지나

철기시대 지나

이제야말로

그의 무쇠와 더불어

한국이 중공업의 나라가 되었다

어느새

어느새

 

영일만 해 떠오르기 전

벌써 그는 용광로 불빛에 그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희호

 

김대중의 아내라면

처음부터 파란의 아내일 터

아내 노릇 의연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녀야 했다

 

지난날 빼어난 유학생이었다가

빼어난 Y여성운동가였다가

그런 것조차

지난날로 돌려버리고

 

마음은 탈 대로 타고

썩을 대로 썩어

어느새 충청도 농가 푸짐한 두엄인 양

이른봄 김이 피어올랐다

 

김대중의 아내라면

생애 절반은 어김없이 생과부 노릇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가느다란 몸이야

오늘도 내일도

진부하기까지 한 의지로 이끌어

벼랑진 볼 단정했다

그 아래 어깨 단정했다

 

김상현

 

산에 올라 허공을 만나라

배포가 크기보다

배포가 터져 허공이었다

내려오면

4통8달이라

그는 이미 여기저기 가 있다

 

전갈보다 더 미워하는 사람조차도

덥석 껴안아

끝내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사람과도 화해하고 타협한다

그 타협은 투쟁보다 찬란하다

 

본질적으로 여당 야당이 없는 사람

그러나 바람잔 적 없다

세찬 바람

듬뿍 받아

돛폭 팽팽한 사람

 

부모 잃은 소년시절부터

오직 정치의 꿈 부풀어

20대 국회의원 이래

바람잔 적 없다

바람잔 적 없다

이상한 일이다

감옥 5년이야

그렇다 쳐도

3공 5공의 17년 공백 지나도록

그는 내내 현역 정치가였다

 

결혼식 신부 반지도 금은방에서 빌려다가 끼워주고

첫날밤을 청진동 허술한 여관에서 보낸 이래

그는 내내 현역 정치가였다

저 밑바닥 진흙탕에서 솟아오른 한 마리 이무기 같은 늙은 용 같은

 

백기완

 

강한 것이

이렇게도 자아인 것을

 

50년대 폐허 명동의 쌍도끼 !

 

강한 것이

이렇게도 웅변인 것을

웅변이었다가

쓸데없이 눈물 한 방울인 것을

 

그의 손은 가방을 들어본 적 없다

보따리를 든 적 없다

오직 두 눈과 입 하나뿐

 

그것만이면 천군만마에 채찍이니

눈 감았다 뜨면

그도 없고 그의 전사들도 다 달려가

오로지 누런 먼지만 인다

 

자아 이외에

자아의 조국 이외에

자아의 조국에 있어야 할 무력 이외에

그에게는 장차 드높이 휘날리는 고독이 있어야 한다

 

한완상

 

괴로운 날에도

말이 화려했다 벗꽃처럼

그래서인가

괴로움도 한동안이어서

그의 노래 같은 눈은

돌아서며 아름답다 여름 자귀꽃처럼

 

그래서인가

그의 사회학은 전투가 아니라 연주였다

 

교회 주일예배

자랑스러이 찬양대 앞에서

찬송가 지휘하는

그의 눈은

돌아서며 아름답다

 

그의 진보는 보수에 기울어지고

그의 보수는 진보에 다가간다

이 돌이킬 수 없는 모순을 두고

그의 눈은

돌아서며 아름답다

 

임채정

 

입을 열면

막대기로 널짝 두들기는 것 같은

그 다급한 말소리

호남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호남 유학 기씨문중의 처녀 맞아

부부가 되어도

 

그는 누구의 아들이기보다

누구의 사위이기보다

이제 막 도착한 막차인 양

마음 술렁여

 

그 순정투성이의 아이디어 가운데는

한 줄기 그어지는 번개와 같은

무자비한 직선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뚝 잘라서

덜 다듬은 채 우뚝 서 있는 돌미륵인가

뒤통수에 휘파람소리 달려

돌미륵에게 무슨 정은 그다지도 도타운지


백낙청


나중에 사람들이 당파성을 내세울 때

그것을 다 새김질하여

네 개의 밥통으로 새김질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로 가라앉혀

수놓은 사람


이 사람 없었던들

60년대의 이른 자각인들 그렇다 치고

70년대 그 고행과 더불어

현실참여의 문학

우리 문학

어쩔 뻔했겠느냐


일찍부터 자기 자신에게 엄밀한 사람

남에게 한 가닥 감정 보이지 않아

지난날

아버지가 납치된 사실조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


그에게는 타고난 평상심이 있다

그에게는 기계가 잘 돌아가는 공공심이 있다


미국 동부 브라운대 졸업생 답사를 한 이애

하바드대 어디에서 머물 수도 있지만

그는 돌아와 한국 사람으로 살아왔다

꿈속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을

꿈 깨어 뉘우치며

그의 민족문학론은 단계마다 올라섰다


이 사람 있어

민족문학론 퍼졌고

이 사람 있어

민족문학 버팅겨

모진 세월 이겨내기까지


부탁 하나 있기로는

1년에 폭음 세 번은 있어야 함


이재오


입 안에 말이 가득했다

이빨 튼튼하다 쫘악 드러내어 하얗다

맷집 좋아

경찰 분실에 가서도

남산에 가서도

실컷 맞아 뻗었다


수술한 데 터져

재수술하고 일어섰다


사춘기 지난 이래

정치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창립되면

민주회복청년회의를 만들어

정수일

최동전 들과 일어섰다

입 안에 말이 가득했다


그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교도관에게도 누구에게도

내가 국회에 나가는 날 있다고

희망이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그렇게 통속이었다

좋아


이부영


이목구비가 모여든 얼굴

외치면 천둥이지만

웃으면 강물 위의 손짓이었다

내로라 내로라 하고 나서지 않으나

어떤 사건 속에는

반드시 그가 들어 있다

과일 씨처럼


또 들어갔다

또 들어갔다

때로는 들어갈 일이 아닌데

다른 사람 대신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감옥 안에서도

그는 일을 만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과일 씨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으면서


휴전선 이남

이만한 투사와 신사 있으니 복되도다


김근태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천 어딘가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자격증 네 개 다섯 개 땄다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장 따위 던져도 좋았다

공장에서

떳떳한 호모 파베르였다


하얀 양초 같은 얼굴

하얀 염소 같은 얼굴

그러나 노란 눈동자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몇십년을 한 뜻으로 가는 의지

슬쩍 내비쳤다가 숨어버린다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한 이래

그는 70년대에는

몇몇 친구들밖에는 몰랐다

무서운 청년시절을 다 바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떨치는 것

나서는 것

그것이야 뒤로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신의 고문을 의식 속에 기록한

결사적인 또 하나의 그 자신이야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제정구


민청학련 사건 이래

그는 지식인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빈민 쪽으로 향했다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사는 동지를

아내로 맞아


70년대 재야에서는 얼굴이 없었다

달 진 어둠속

불 꺼진 빈민마을이

그의 주소였다


미덥기는 장모가 씩씩한 사위 바라보는 듯

결코 가볍지 않은 품위야

숨길수록

땅속에 파묻은 김칫독인 듯


모순 앞에 살아보아라

누구라도 이렇게

모순 앞에 살아보아라

어렵나니

오직 민중 가운데 있는 일 어렵나니


인명진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그 시절

정권이 퍼뜨렸지

도산(都産)이 가면 도산(倒産) 한다고

그 영등포 도산에

메기 입 험한 소리

마구 튀어나오는 인명진(印名鎭) 있다

조지송은 조용한데

인명진은 문 탁 닫는다


세상에 할말이 많은

세칭 '공순이'들 모여들어

우우 모여들어

떠들어대면

이년들아 ! 하고

거침없이 꾸짖는다


하지만 그들과 인명진은 잘 붙은 아궁이 불로 하나여서

까르르

까르르

꽃밭이 된다

그 지하실 17평 시멘트 바닥 위에서


서경석


아내 신혜수는 남편이 목사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목사이기를 원했다

아직 그 자신도 목사 될 생각 전혀 없었다

다만 제독의 아들이었다

공과대학을 나와


민청학련 20년형 선고 받고

상고 포기하고 기결수 되어버렸다

그것이 시작이라면


79년 YH 사건에 뛰어들어

이윽고 유신정권 붕괴의 씨앗이 되었다


일 만들기로는 따를 자 드물어

그가 가는 곳마다

일이 있고

그 일이 반드시

더 큰 일로 나아간다


굵은 나무 베어낸 뒤

그 나무 벤 자리 찐득찐득한 나뭇진 같은

비극적인 집념 잇어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웃음에도

그 비극적인 집념 있어


김광일


1970년대 중반 이래

부산에 가면

거기 김광일 변호사 있다

노무현 변호사 있다


널찍널찍한 마당 같은 얼굴에

아구찜 같은 웃음

하지만 때로는 요령소리 내어

새벽잠 깨기도 한다


무릇 과격한 사람까지도

비겁한 사람까지도

받아들일 때는 영락없이 통 큰 무당인데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저 건너 영도가

다 그의 땅인가

그의 술자리 영도만하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