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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7. 13:11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44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이야기

 

 

 

허남춘 · 허영선 · 강수경

2015, 이야기섬

 

대야도서관

SB117957

 

381.75

제76ㅈ

 

제주대학교 박물관 문화총서 ● 2

 

베지근한 구슬로 풀어내는

제주전통음식 20

 

2015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지역문화콘텐츠 선정작

 


자연이 살아 있는 제주 밥상


 

사람살리는 음식천지 제주의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건강하고 질박한 음식 이야기!

 

"전복도 암놈, 수놈이 있어. 남자들은 암놈을 먹고, 여자들은 수놈을 먹어. 수놈이 딱딱하긴 해도 죽 만들 때는 수놈이 좋아. 바닥이 검은 것은 수놈, 노란 것은 암놈이야. 그런데 노란 것 중에서도 특별히 노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약 전복이야. 그리고 그것은 가파도에서 많이 나. 여기도 성산과 우도 사이에서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없어."

 

콩국은 저으면 절대 안 되고, 콩죽은 잘 저어야 해. 옛날엔 콩국 끓이면서 배추놨는데, 지금은 뱇ㅂ터 먼저 놓고 끓어가면 챗하고 간장을 놓지. 그러니까 절대 넘겨선 먹어볼 거 없어. 곁에 지켜서야 해. 콩국은 무큰(푹) 익어야 맛있다고 하주. 옛날엔 멸치다시를 안 했어. 옛날엔 멸치다시가 어디 있어?"

 

"한 부락에 도감이라는 사람이 있어. 도감은 막 옛날, 아무나 막 두텁게 툭툭 썰어도 안 되고 몽탕몽탕 썰어도 안 딕 얄풋하게 낭썹(나뭇잎) 모양으로 잘 써는 사람이 있어. 좀 와서 해달라고 하면, 그때는 돈으로 주는 거면 돈 봐서 갈 수도 있지만 돈도 안 받았어. 하루 종일 가서 앉아서 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 그러니까 서로 인정간에 해주는 거야."

 

메밀 / 콩 / 조 / 보리 / 돼지 / 말 / 닭 / 미역 / 톳 / 몸(모자반)

전복 / 성게 / 보말 / 문어 / 게 / 자리 / 멜(멸치) / 고사리 / 노루 / 꿩

 

저자---

 

허남춘

●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주대학교 박물관장

● 저서 : 『제주의 음식문화』(공저), 『제주도 본풀이와 주변 신화』 이 다수

 

허영선

● 시인, 제주대학교 강사

● 저서 : 『제주 4 · 3을 묻는 너에게』,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제주 오디세이』 외 다수

 

강수

● 제주대학교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 논저 : 「제주지역 돼지고기 음식문화의 전통과 변화」, 『서순실 심방 본풀이』(공편) 이 다수

 

할망 하르방의 음식 이야기에서

미래를 찾다!

 

2만 불 소득이 넘자 TV에는 온통 음식 프로그램 일색이다.

현대인은 먹는 것으로 문명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이 부풀려진 욕망은 지구를 모두 뜯어 먹고 사막화시킨다.

종말이 눈앞에 있는데 그칠 줄 모른다.

이제 소박하게 먹고 굶는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지구를 파탄에서 구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조화를 모색해야 한다.

여기 할망하르방 밥상 이야기에는 소박한 식단이 있다.

장수의 섬 제주, 거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먹는 문화가 있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가 거기 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역사에는 생활의 역사와 생존의 역사가 있다. 생활이 역사에는 유희와 화려한 기교가 동반된다. 생존의 역사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땀과 눈물이 밴 건강한 삶이 담긴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은 주로 생존의 역사를 담아내고 잇다. 그래서 화사한 도자기는 없지만 투박한 질그릇은 넘쳐난다. 미래는 과거에 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은 숱한 고난을 이겨온 할망 하르방의 역사를 전시하면서 강인한 투지로 미래를 개척하길 기대하고 있다.

 

차례-----------------------------------------------------

 

프롤로그

1부

화산섬 뜬땅,

농사와 음식 이야기



1장 -- 씨멩텡이 한번 보카마씀!

1절 | 여신이 가져다준 효자 곡물, 메밀
2절 | 일상의 보양식, 콩
3절 | 술과 떡과 엿의 전생, 조
4절 | 바람이 빚어낸 양식, 보리

2장 -- 농사는 인력만으로 안 되어마씀!

5절 | 신화의 조연이자 잔치의 주역, 돼지
6절 | 제주 목축의 상징, 말 그리고 테우리
7절 | 제주의 유월 스무 날엔 닭

2부

지픈 바당 야픈 바당,

바다 농사와 음식 이야기


1장 -- 바당풀도 케멍 살앗수다!

8절 | 달빛 아래 추억, 미역
9절 | 바다밭의 선물, 톳
10절 | 돼지고기와의 환상적인 조화, 몸

2장 -- 헛물에도 들엇수다!

11절 | 해녀의 기쁨, 전복
12절 | 향긋하고 쌉싸름한 별미, 성게

3장 -- 바릇잡이도 허엿수다!

13절 | 아기자기한 작은 고둥, 보말
14절 | 놀잇감에서 보양식으로, 게와 문어

4장 -- 궤기도 잡앗수다!

15절 | 작아도 돔, 자리
16절 | 원담 속의 은빛 풍경, 멜
17절 | 한 점 먹고 또 먹고, 제주 갈치
18절 | 생선 중의 생선, 옥돔



3부

백록이 놀던 한라산,

하늘이 내린 음식 이야기



1장 -- 한라산엔 고사리 천지우다!

19절 | 제사의 시작, 고사리


2장 -- 진진헌 겨울, 재미삼아 사냥헷수다!

20절 | 겨울 한라산의 선물, 노루와 꿩



에필로그

 

 

하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 해월거사

 

 

콩죽을 끓이며

허영선

 

동지즈음 찬바람 휭휭 몰아칠 때는 떠오른다

만월같은 눈동자 꽃누님 휘휘 젓던 콘죽 파도

차가운 생 하나가 바다로 간 이른 저녁

함께 쪼그려 앉은

누님의 보라낭불 죽솥단지는 고요로 시작하였다

강약 조절 보리낭불 한눈 팔새 없었다

서서히 달아오른 콩죽은 부글락부글락 끓기 시작하였다

 

절대 일어서지마라

일어서면 맞는다

콩가루에 흐린 조는 푸닥푸닥

화르륵 넘치면 아무 것도 없지

여린 손이 죽의 포물선을 살살 휘저어 가자

파짝 튀던 파도는 차츰 가라앉았다

누님은 근질근질하는 내 엉덩이를 눌렀지만

저 고소한 것이 무슨 파도같은 비수를 품고 있을라고

일어서는 순간 콩죽은

온 몸에 폭죽처럼 날아들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생에도 조심히 건너야 할 고랑이 있다는 걸

누구나 한바탕 몸부림치는 순간이 있다는 걸

누님은 뭉근 불의 강약을 조절하였다

그렇게 고요히 달래다보면

어느새 그 파도 콩죽의 뜨거움은 진정 되어서

몽실몽실 구름처럼 피어올라서

한 겨울 내 배설엔 기름이 도랑도랑

차가운 생을 데워주었다

 

| 메밀 |

 

제주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딸에게

그리고 며느리에게 메밀 음식을 먹이려 한다.

모든 게 달라진 지금도 산모와 아이를 위한 어머니들의 마음이

거기에 고이 담겨 풍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메밀 농사 지면 동네 마당에서 도리깨질 잘하는 몇 사람이 서로 수눌면서 두드리고 털어냈어. 그거 두드릴 때 아주 재미있어. 모멀(메밀)을 비어놨다가 그것이 바싹 마르면 그냥 드르(들, 野)에서 멍석 깔고 마당 한편이 너다섯 사람 정도 잡아서 도리깨로 두드리는데 막 재미있어.

사공이라고 해서 소미가 있는데 사공은 아주 빠른 사람, 잘하는 사람이야. 이 도리깨를 들른 사이에 확하게 나무를 걸러내고 메밀을 그쪽으로 갖다놓고 하는 사람이 사공이었어. 마당질하는 걸 재미있게, 소리치며 그렇게 했지."

- 김례

 

"모멀은 붓기를 빼어. 애기 난 때에 우리 큰아들 3월에 낳는데 그때는 우리 친척들이 모멀쌀을 가져와. 약 해오는 대신에. 그래서 서 말 먹었어. 서 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그 가루 카먹을(타서 먹을) 시간 되면 일어나. 그걸 먹으면 그렇게 모유가 많이 나와. 우리 아이들이 이만씩 신체가 다 건강해."

- 김례

 

"덕천, 송당리, 거기는 토지가 넓고, 김녕이 토지가 없는 곳이야. 화산지대라서 굴만 많고 비가 오면 다 씻겨 내려가버려. 전부가 다 암석 천지야. 저 새별오름 우리가 거기 들불축제 가봤어. 그 지대 가보면 참 부러워. 거긴 돌 하나 없는 전부 흙인데 여긴 전부 돌밭이야. 다 물로 빠져 버려.

(메밀은) 거기서(송당에서) 팔러 내려와. 거기서는 조, 보리 농사가 잘 안 되니까 그것을 가져와서 바꿔 먹지. 물물교환."

 

"여름에 가물 때는 중산간 부락이 풍년이 들고, 또 장마가 계속될 때는 중산간 부락이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 그래서 굶주리니까 해변에 와서 쌀 바꿔가죠. 장리 먹는다고 해. 그걸 먹어서 보답할 때는 메밀쌀 져와서 보답해."

- 안이길

 

"빙떡은 느넨 묵도 안쒀보니까 모르지. 풀풀하게 물에 타서 기름 조금, 소금 조금 놓고 판에 싹 널르게 해서 너무 크게도 말고 너무 작게도 말고 무수 삶아놨다가 그거 거려놓고 뱅뱅 말아."

 

"파 놓고 기름 놓으면 더 고소하고, 그렇게 해서 양 끝을 딱 눌러. 그러면 따뜻할 때는 그렇게 맛 좋아. 빙빙 마니까 빙떡이었주."

 

"빙빙 말아서 어디 대소사집에도 제물해서 가져가고 집에 제사할 때도 해 먹었어. 그러니까 메밀 갖고도 여러 가지 해."

- 허을봉

 

"솥뚜껑에다가…… 돼지 기름 칠하고, 더 맛있죠. 구수하고."

- 안이길

 

"(빙떡을 만들 때) 그때는 팥도 삶아서 넣고, 무도 넣었어. 팥은 삶아서 살짝 빻고 체로 쳐서 그 가루를 넣었지. 그것을 먹을 때는 끄댕이를 꺾어서 먹어야지, 안 그러면 팥을 다 흘리게 돼. 지질 때는 후라이팬이 없으니까 약간 베짝한(표면이 비교적 평평한 모양) 솥뚜껑으로 했어. 예전에는 시발세라는 것이 있어. 세 발이 이렇게 돋은 것에 대썹(댓-잎, 竹葉)이나 참나무가지를 했다가 그걸로 불을 때면서 빙을 지졌어. 또 빙은 돗지름으로 해야 해.

(빙떡을 부조로 가져갈 때) 예전에는 상이 나면 3년을 하니까 소상이나 대상 때 빙을 지져서 동이에 조근조근 놔서 가져가났어. 우리는 그런 부조를 안 했는데 우리 어머니네는 빙떡으로 부조를 했어."

- 송옥수

 

"나도 (시집)와서 옛날엔 빙(떡) 지져서 제물 했어. 그러니까 시아주버님 돌아가신 때 제물 고량(고령, 대오리나 차풀의 줄기로 엮어서 채롱보다 통이 아주 얕고 작게 만든 그릇)으로 세 개 해서 갔어."

- 김술득

 

"모멀을 맷돌에서 갈면 처음엔 쌀에서 가루가 나오는데, 그것보고 느쟁이라고 해. 그것에 감저(甘藷, 고구마) 해다가 삶아서 그 느쟁이 놓고 범벅한 것도 맛좋아났어. 그 고운 가루는 뺏다가 빙떡도 지지고, 묵도 만들고 했지."

- 김례

 

| 메밀 음식의 천국, 제주 |

 

사람들이 만드는 풍경 중 제일 화려한 게 잔치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가깝고, 없이 살던 시절에 또 그만큼 먹을거리가

넘쳐 나던 장소도 없을 터다. 그런 제사, 명절이나 혼 · 상례와 같이 집안과 동네에

큰일을 치를 때 하던 대표적인 메밀 음식으로 빙떡이 있다.

 

"메밀밥은 메밀 섞어서 헙디다. 모멀(메밀)을 좁쌀 놓듯이 잡곡에 놔. 옛날은 보리쌀 많이 먹었지. 모멀쌀은 작박(솥의 물을 퍼내는 바가지)으로 떠다가 씻지도 안 해. 위에 싹 뿌려. 뚜껑 덮어서 밥 보골보골 해갈 때, 보리쌀 거의 다 익어갈 때, 그 모멀쌀을 그때 위에 놓는 거라. 뜸 들여서 먹으면 잘도 맛있어. 모멀쌀을 주걱으로 삭삭삭 섞어서 거리면 그게 민질민질(매끈매끈)했지.

보기엔 코실코실한데 입에 놓으면 멘질멘질해.나 어릴 때 먹어났어. 우리 외할머니 집에 가면 항아리도 나 이 몸뚱아리 몇 개 들어갈 만큼 있어. 항아리 속에 젓갈이나 뭐나 많이 담았거든. 쌀 거리는 항아리에 사다리 타서 들어가. 항아리가 어마어마하게 커. 우리 어머니도 그 속에 몇 번 들어갔지. 할머니가 '너 거기 들어가서 긁어내라' 하면 들어갔어. 마지막 긁어낼 땐 사람이 들어가야 헤."

- 김자량

 

"또 영장(영장, 장사장사)나면 옛날에는 나무로 해서 국수 빼는 걸 만들어났어. 그것보고 면 뺀다고 해. 모멀가루 해서 반죽하고 그 나무 기계에 해. 거기서 메밀 빼는 기계 틀 만들고, 반죽해서 거기 담아놓고 꽉 누르면 면이 쫙 빠져. 그러면 그거 삶아서 큰일 때에 그것도 주면 잘했다고 했지. 양념이라고 한 건 별거 없어. 간장 놓고 깻가루나 조금 놓으면 그게 그자 국수 다시고 그렇게 해서 먹었지."

- 김례

 

"모멀 요리는 모멀국수, 모멀 돌레떡도 이만큼, 떠오르는 달만큼 만들어. 어디 장사나 나면 '피력'이라고 해서 돌레떡 두 개 딱 붙여서 줬어. 수산에서 시아버지가 돌아가니까 친정에서 다 모멀을 부주로 해 왔어. 모멀쌀 스무 말. 그 모멀쌀을 갈아서 돌레떡을 만들었거든. 산에 가져가니까 제주시 친족들이 다 왔어. 다른 건 말고 그 달떡 하나만 더 주라고. 스무 말 떡을 만들어서 하루에 다 소비시켰어. 장밭에 가서."

 

"만두도 물만디라고, 얇게 반죽해서 밀어놓고 사발로 본을 떠내서 무수채를 넣거나 팥고물을 넣고 요렇게 덮으면 반달이 되어. 바우만 조금씩 쪽쪽쪽 접어가면 반달되어. 반달 떠오를 때처럼. 그거 먹이는 사람도 있고, 돌레떡 해서 먹이는 사람도 있어. 그땐 설기떡이라고 해서 시루떡해서 먹이는 사람도 있고. 지금도 수산 그 풍습을 친정에 가보면 지금도 해."

 

"또 떡을 만드는데 새미떡처럼, 메밀쌀 해서 밀어서 콩을 넣는데 콩을 삶아서 통째로 넣어서 콕콕 좁아서 무적떡이라고 해서 영장난 데 부조로 했어."

- 송옥수

 

| 제주의 삶, 메밀 |

 

제주의 전통 음식에 대한 어르신들의

기억에서 메밀 음식은 빠질 수 없을 듯하다.

 

"모멀묵도 수산은 가루 갈아서 가루묵을 만들었어. 나비적도 있고 그걸 숯불에 쇠를 놓고 적꼬쟁이를 걸쳐서 간장에 참기름 놓고 꿩 날개로 하면 솔 닮아. 그것을 묵에 발라, 바르면서 구우면 고소하니 그렇게 맛이 좋아. 지금도 그렇게 구워."

 

"모멀쌀로 죽을 많이 했어. 그땐 배가 아프면, 요즘 같으면 식탈이라고 할 수 있지. 모멀쌀에 파 있지. 쪽파 썰어 놔서 죽을 쒀서 그거 한 그릇을 먹으면 그것이 다 좋아. 감기에도 좋고. 감기가 걸려도 그런 걸로만 약 대용하지. 어디 가서 약 사올 데가 없어."

- 오옥주

 

"메밀 조배기는 메밀가루 많이 들어. 아기 낳은 어멍이나 해서 먹지. 막 생각해서 특별한 날이나 먹지, 함부로 먹지 못해. 무나 미역을 놔서 먹기도 했어.

보리쌀이나 밀가루를 할 때는 세게 반죽을 해서 뜯어 넣지만 메밀조배기는 물을 따뜻하게 해서 가루를 타서 흘탁하게(묽게) 저어서 숟가락으로 떠 넣어야지, 세게 반죽하면 세어서 먹지 못해."

 

"큰일집이 고사리국 끓일 때는 메밀가루 약간 타서 썼어."

 

"메밀 잘 갈았었지. 그런데 삼양은 잘 안 갈고 목장(회천) 쪽에는 잘 갈았어. 갈음팍 같은 곳에 농사가 잘 되는 곳은 말고, 난지경에 조금 궂인 데는 메밀을 갈아. 늦어서 갈아도 메밀은 되어. 조 갈다가 벗어분 디도 메밀은 갈 수 있어. 애기도 낳을 때 안 낳ㄱ 늦어서 낳으면 '메밀 농사로 늦어서 낳았다'고 말했어. 메밀은 뜬땅(차지거나 끈끈한 기가 조금도 없는 부슬부슬한 흙이 깔려 있는 땅)에도 잘 되어."

- 송옥수

 

| 깔깔한 콩잎쌈의 기억 |

 

콩은 처음 자랄 때부터 제주 사람들의 먹거리로 함께한다.

여름에 콩잎은 배고픈 이들을 잠시 달래주는 음식이자

그 야들하고 깔깔한 느낌은 식욕과 지친 삶의 의욕까지 되살려주었다고 한다.

 

"우리 앞밭에 콩을 갈아. 콩을 갈면 요만한 바구니에 야! 도시꼬야 도시꼬야, 나 딸아 가서 콩잎 따서 오라 해. 콩잎 못 따게 했어. 그러니까 난 콩잎 속에 들어가면 안 보여. 콩잎 나무가 이만하면 난 키 작아서 오물락하게 들어가버리면 잘 몰랐어. 자꾸 콩잎만 따러 가니까 어린 때 친구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콩잎 잘 먹는 도리모 도시꼬야' 하면서 나를 약 올려.

그렇게 하면 할망들은 '아고, 나 딸아, 도시꼬야, 콩잎 따와서 맛 좋아, 맛 좋아' 하면 또 콩잎 따러 가고 했어. 그땐 콩잎에 집에서 담은 된장 찍어 먹으면 왜 그렇게 맛 좋은지. 아무 양념도 안 해도. 고추 하나 놓고 할망들 콩잎 하나 먹고, 할망들 먹는 거 왜 그렇게 맛 좋은지."

- 김이자

 

"여름 되면 콩잎 너무 어린 것은 따오지 말라고 했어. 그땐 채소가 없을 때거든. 콩을 먹으면 섬유질이 보충될 거 아니. 보리밥이 되어가면 콩잎 위에 놓아서 톡톡 콩잎을 무지러서 놓아. 그러면 국도 해 먹고, 검질(김0 메러 가면 아버지가 국 없인 못 먹는다고 하면서 된장 풀어놓고 거기에 콩잎을 손으로 톡톡 무지러 놓아. 그러면 그걸 국으로 해서 먹거든. 반찬이 얼마나 없어야 그걸 국으로 해서 먹었겠어. 밭에 가면 생 콩잎으로 국 해서 먹었어."

- 현용준

 

"콩은 꺾는다고 해. 콩은 벤다고 안 하지. 콩은 꺾는다고 하고 팥은 둥그린다고 해. 녹두도 팥도 뿌리 쪽은 끊으면서 둥그리거든, 두드릴 때는 한 덩어리째 놔서 도리깨로 두드려. 팥은 가는 대로, 우리 동네 팥은 둥그릴만큼 길게 벋어.

그런데 웃뜨르에는 가서 보면 팥이 꼬질꼬질하게 났어. 그걸 뿌리 채 뽑아서 새를 베서 깔고 이삭 쪽이 가운데로 가게 해서 양쪽으로 묶으거든. 그렇게 해서 싣고 와. 토질이라고 한 게 상당히 중요해.

그러니까 중산간 마을에 사람 살아난 다는 곡식이 될 수 있는 토질이고, 웃뜨르 안덕면 광평 그쪽에 가면 농사가 안 돼. 농사가 안 되니까 해변 사람들 소 봐줘 가지고 보리쌀 두 말인가 세 말인가 받아서 그걸로 해서 살았어."

- 현용준

 

"맨 처음 우영팟(텃밭)에 가서 배추를 해와서 손으로 끊으면서 바작바작 괴는 부분에 놓거든. 우린 남죽이라고 해. 남군 쪽에는 배수기이라고 하고, 죽 쑬 때 남죽으로 저어. 죽은 넘어버리면 먹어볼 거 없다고 해. 조금씩 끓어 넘치는 쪽으로만 손으로 놓으면서 해."

 

"콩국 끓일 때는 저어도 안 되고, 덮어도 안 돼. 끌허가면 간장 조금씩 놔. 소금도 놔도 되고, 아니 소금 놓으면 맛이 없어. 간장은 막 끓여서 넘치려고 할 때 조금씩 조금씩 놓아가는 거여. 국자로 조금씩 놓으면 가라앉주게. 채소부터 놔도 되고, 끓으는 걸 잘 보면서 하면 돼.

콩국은 저으면 절대 안 되고, 콩죽은 잘 저어야 해. 옛날엔 콩국 끓이면서 배추놨는데, 지금은 배추부터 먼저 놓고 끓여가면 채소하고 간장을 놓지. 그러니까 절대 넘겨선 먹어볼 거 없어. 곁에 지켜서야 해. 콩국은 무큰(푹) 익어야 맛있다고 하주. 옛날엔 멸치다시를 안 했어. 옛날에 멸치다시가 어디 있어?"

 

"콩국 끓일 때는 이것이 넘어나는 데만 배추 톡톡톡톡 넣으면 부글락 넘쳐. 그러면 쑥 가라앉곡 가라앉곡 하주만. 그런데 이 콩죽은 튄다 말이어. 파삭파삭 뛰거든. 그러니까 누님하고 콩죽할 때, 같이 불 땐 때가 있거든. 누님이 일어서지 말라, 일어서지 말라. 일어서면 튄다고. 얼굴이랑 여기저기 막 맞아."

- 현용준

 

| 콩국과 콩죽 |

 

콩국 끓일 때는 이것이 넘어나는 데만 배추 톡톡톡톡 넣으면 부글락 넘쳐.

그러면 쑥 가라앉곡 가라앉곡 하주만. 그런데 이 콩죽은 튄다 말이어.

파삭파삭 뛰거든. 그러니까 누님이 일어서지 말라,

일어서지 말라. 일어서면 튄다고. 얼굴이랑 여기저기 막 맞아

 

"겨울에 콩죽을 먹는 게 단백질 흡수로는 최고거든. 우리 동네 그 어른이 내가 어릴 때 들어본 바로는 콩국 뜨뜻하게 해서 한두 달 겨울에 먹어가면 배설에 기름이 도랑도랑 도랑도랑 한다고 해."

- 현용준

 

"달래나 냉이는 콩죽에 놓으면 맛 좋아. 쑥하고 달래하고 같이 논 것도 맛이 좋아. 요새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달래가 많이 나오는데 그건 맛이 없어. 야산에서 캐어온 거, 그런 거 놔야 고소해. 이 집에 들어오면 저기서부터 먹고 싶어 했어. 콩죽할 땐 그걸 놓는게 최고. 너무 쇠면 쑥도 맛없어. 연한 거 그 정도로 놓아야 맛이 있어."

- 김자량

 

"콩국은 끓일 때 처음 배추 놔서 막 끓여난 다음에 그 우이로 콩가루를 물에 탔다가 한번 놔서 젓고 한번 넣고 또 넣고 해야 토락토락해서 맛 좋아. 불 베롱하게 해야 돼. 뚜껑도 좀 열어야 하고. 콩국 끓이는 게 힘들어라.

콩죽 쑬 때는 놈삐(무) 썰어 놓고, 어떤 데는 배추 썰어 놓고 해도 맛 좋아. 그때야 드릇 마농(꿩마농) 캐어다가 놔서 먹었어. 이제야 드릇 나물 캐다가 삶아서 된장에 찍어 먹지. 이젠 그것들 안 먹지. 옛날엔 왜 그렇게 멍텅허게 살아신고이."

- 김이자

 

"아무 때나 못 먹었어. 명절 때 되면 콩을 물에 담갔다가 가레에서 갈아서 두부햇어. 몇몇 동네 사람들이 콩을 조금씩 갖고 와서 한 집에서 모여 큰 솥에서 끓이면 이제 두부 짜듯이 베보자기로 잘 짜서 물 잘 개어놓고 가렛착(맷돌짝)에 올려놔두면 물이 착 빠져."

- 양오순

 

"옛날엔 우리 할머니네는 두부도, 콩 물에 담갔다가 갈아서 집에서 했어. 정가래에 갈아서 잔치가 되나 제사가 되나, 옛말에 '큰메누리허민 에고 두붓물에 손 덴 메느리라'는 말이 있어. 그 며느리 들어올 때 두부를 만들다가 시어머니가 그 물에 손을 데었거든. 그래서 그런 말이 있어. 그렇게 하면서 마른두부 했지."

- 오옥주

 

| 두부 그리고 된장 |

 

마른두부는 보통 두부보다 수분이 적어 단단하며 고소하다.

제주에서는 된장을 빼고는 음식 이야기를 아예 할 수가 없다.

 

마른두부(둠비)

 

마른두부는 '둠비'라 부르는데, 지금도 제주의 상갓집이나 잔칫집에 가면 으레 나오는 생두부 절편이다.

 

식재료

콩 6kg, 바닷물 16L, 물 40L

 

조리방법

1. 콩에 물을 부어 충분히 불린다(겨울에는 15시간 이상, 여름에는 8시간 정도)

2. 불린 콩에 2~3배의 물을 나누어 넣으면서 맷돌이나 분쇄기에 곱게 갈아둔다.

3. 삼베주머니에 2를 넣고 끓는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즙을 짜낸다.

4. 3의 즙을 솥에 붓고 계속 나무주걱으로 저어주면서 끓인다.

5. 끓어 넘치기 전에 바닷물을 넣어 엉킨 것이 풀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잘 젓는다. 이것이 순두부다.

6. 맑은 물이 떠오르고 두부가 엉키면 다른 큰 그릇에 면포를 깔고 두부 엉킨 것을 쏟아 넣은 뒤 꼭 짜서 무거운 것으로 눌러 잘 굳히고 적당한 크기로 썬다.

 

 

| 고소리술 |

 

고소리술이란 명칭은 증류기인

고소리(또는 소줏고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소리술은 고소리에서 땀처럼 내린다 하여 '한주(汗酒)'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친정 아버님이 조가 노릿노릿 익어가면 먹는다고 해. 오메기하고 누룩해서 술을 담그는 거라. 술 담그면 술이 처음엔 시큼하질 않고 보글보글 괴어야 맛이 나. 오래되면 청주이고 해서 그걸 제사상에도 올렸어. 밑에는 탁배기, 위에 건 청주지.

우리 할아버님 제사 때 고모님들이 제사 보러 올 때면 제물이라고 해서 차롱 요만이 헌 것에 제주를 두 병을 가져오는데 제주로 하나, 아버님 몫 하나 해서 먹었어."

- 김례

 

"술은 흐린조해서 쌀 물에 담갔다가 방애에 갈아서 그걸로 오메기 만들주. 솥에 놔서 댓잎 해다 놓고 댓잎 안 놓으면 눌러붙어서 안 돼. 그거 한 줌해서 묶고 솥 바닥에 탁 잎을 풀어놔. 삶아서 익었는지 설었는지 해서 위에 붙으면 안 익은 거고, 위에 붙지 않으면 익은 거야. 그게 다 삶아지면 국물하고 오메기하고 큰 도구리(넓고 낮은 원형의 나무 그릇)에 퍼놓지. 완전히 식지 않고 손을 넣으면 맨도롱할 정도로. 그러면 보리누룩 빻아서 섞어놨다가 이젠 청주라고 노랑한 지름이 둔닥하게 위로 떠. 뜨면 그걸 전부 따라 먹어. 밑에 탁배기는 다 짜서 먹다가 국물 찌꺼기는 다시 해놔. 누룩해서 또 해놨다가 그걸 고소리에 앉혀서 닦으지. 처음은 쭈루루루루루 하게 나오다가 막 끝날 때 되면 뚝뚝뚝하게 흘러. 그러면 술 싱겁다고 하면서 끝내지."

- 한신화

 

"좁쌀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그것에 물을 놔서 떡으로 만드는데 가운데 구멍이 있게 만들어. 그리고물에 넣어서 삶은 후에 식으면 누룩에 같이 버무려. 보리쌀 거피어서(정미소가 있기 전에 재래식으로 껍질을 벗기던 과정을 말함) 차롱에 담아서 뜨뜻한 곳에 놔두면 그것이 터. 그것을 부셔서 오메기쌀에 같이 치대겨서 항아리에 담아둬. 거기에 달걀을 까 넣을 때도 있고, 청도 넣고…… 요즘처럼 보약이 없을 때니까 보약이 되라고 그런 것들을 넣는 것이라. 바당에 나갈 때 그거 한 사발 먹고 가면 춥지도 않고 몸이 후끈후끈 허여."

- 이복련

 

"주로 술 없을 땐 감주를 잘 먹었지. 좁쌀로 밥해서 식히고 골하고 섞어서 물에 담가두면 보글보글 괴면 삶아. 삶아서 찌꺼기를 막 짜두고 물만 해서 달이면 거품 일면서 감주가 되지. 졸여지면 감주가 돼. 제삿날 저녁이나 명절 아침에 감주 해서 올렸어."

- 양오순

 

| 술 |

 

다만 술을 빚는 과정이 단순하지도 않고, 잡곡도 귀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살림이 넉넉해야 술도 빚으면서 별미로 맛볼 수 있었다.

 

옛날 사또가 한 마을을 지나다가 친구 집에 들렀다. 그 부인은 점심상에 차릴 쌀이 없어 걱정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이웃집에 가서 쌀을 빌려올 수도 없으니 참으로 딱한 처지였다. 마침 음력 4월이 되기 전이라 석보리를 급히 만들기에도 이른 때였다. 보리가 알을 맺으려고 겨우 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이놈을 베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 묶음의 보리를 베어내 절구통에 넣어 가시랭이가 달린 채 찧었다. 찧어놓은 것을 깨끗한 보자기에 싸서 물을 짜내자 파란 기운이 감돌았다. 솥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남편 친구인 사또에게 대접했다. 사또는 맛있게 먹고 나서 이런 음식은 난생처음 먹어봤다고 기뻐하며 돌아갔다.

- 고광민,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보린 석 달 열흘 해도 잘 안 되어. 여긴 뜬땅 박허여. 우리 집은 궂은 밭만 잇어. 보리, 조, 산듸(밭벼) 해서 1년을 사는데, 양식이 넉넉하지 않았어. 옛날에는 찬이라는 건 없어. 보리는 옛날에 '말가레'라고 해서 말로 메서 하는데, 우리 집은 말로도 안 해서 식구들이 모다 들어서 했어. 난 일고여덟 살 되니까 애기 보면서 그렇게 햇어."

- 김례

 

"제일 바쁠 때가 보리하고 삼거릴 때주. 장마 오지, 보리도 비어야지. 삼도 해야지. 온 식구가 놀 새가 없어. 또 우리 친정에는 9남매인데 나 밑으로 동생 세 명은 우리 아버님이 학굘 안 보냈어. 한문 서당이라고 해서 몇 군데 잇었는데 한문 글방이 글이지 그 꼬부랑글도 글이냐고 우리 오라버니들은 한문 글만 배웠어.

여름 나야 보리쌀은 하니까, 가을에 걸로 봄까진 먹어야지. 이제 가을 걸로 보리 날 때까지가 제일 어려운 시기지. 쌀은 다 먹어가지, 새 건 채 안 나지 하면 이제 닭 굶는 삼사월이라고 닭이 굶는다고 했어. 칠팔월도 닭 굶는 칠팔월이라고 했지. 보리도 채 안 나고 가을도 안 되었으니까 닭 굶는 칠팔월, 칠월 팔월이 먹을 게 없어.

여름은 나면 보리밥, 가을부터는 조밥. 좁쌀에, 산듸하고 모멀쌀도 좀 섞으면 그건 정말 맛 좋아. 흐린좁쌀에. 우리 집은 열여섯 식구가 한 솥에 밥해 먹으면서 살았어. 옛날에는 왜솥이라고 까만솥이 있는데, 요즘 쌀을 큰 되로 두 되 놓으면 한 솥 되어. 솥으로 보리밥 하나 하고, 촐구덕이라고 한 거 있어. 거기에 콩잎 한 구덕 뜯어다 놔. 또 요만한 사기 독사발이라고 한 거 있어. 그것에 된장 한 사발 양념은 뭐 마늘이나 좀 뜯어 놓고 깨나 뿌리면 그게 양념한 거지. 콩잎 한 번 먹고 그 밥 한 솥한 거 먹으려고 하면 하루 세 솥 해야 먹었어. 열여섯 식구니까."

- 김례

 

"된장에 그냥 나물도 없어서 된장에 보리밥만 해서 먹었어. 일제시댄 일본놈들 공출하라고 해서 우리가 먹을 수가 잇었나. 어느 만이 바치라고 그거 못 바치면 가라 오라 했지. 부인회장 하면서 스물세넷에 아이고 집집마다 가서 바치라고 하면 내놓았어. 어느 만큼 기준이 없어. 내노라고 하면 내놓지. 놋사발, 놋양푼이 같은 거. 면사무소에서 그냥 법에서 이장 집더레 통화하면 이장한테 오면 이장은 부인회장한테 얼마만큼 받아오라고 했지.

시국이 그러니까 뭐라고 해. 시국이 그러니까 하라고 하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작게 받으면 또 받아 오라고 하고, 나중엔 해방되어서 또 4 · 3사건 터지고 우린 막 고생으로 먹는 거고 입는 거고 힘들었지."

- 이인춘

 

"옛날 우리 어릴 때 강정 살 때는 이제도 입매가 짧지만 우리 어머니가 통보리쌀 부글부글 삶아서 곤쌀 조금 놓고 항상 밥을 먹었어. 어머니도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다 먹엿어. 동녕바치도 우리 집에 와서 먹었어.

협재에 시집 가서 보니까 좁쌀하고 보리쌀 조금 놔서 고구마 섞어서 먹고 있더라고. 밥 적게 하면 솔잎 모아서 한림까지 가서 팔았어. 그땐 보리쌀을 작은 되로 사고 좁쌀 두 되 사고, 조금씩 사 와서 그걸로 밥해 먹었어.

얼마나 박하게 살았는지. 강정에서는 대부분 보리쌀 조금 놓고 감저(고구마) 막 많이 놔서 먹었어. 보리쌀 조금 삶아서 고구마 한 솥 썰어 놓고 좁쌀 놓고 밥하면 맛 좋았어."

- 김이자

 

"호박잎 날 때면 호박잎 국을 끓이는데 보리밥 먹다 남은 것을 이용했어. 호박잎이 꺼끌꺼끌하니까 풀풀한 가루를 넣어야 하는데 밀가루가 그때는 귀해서 대신 호박잎국 끓일 때 보리밥을 같이 넣어서 끓였어. 그러면 보리밥이 퍼지면서 국물이 걸쭉해지고 호박잎의 꺼끌거림이 덜 느껴져. 간장은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으로 간을 했어.

그리고 보리쌀을 갈아서 먹었던 기억이 잇어. 통보리로 밥을 한 것은 그 이후에 해서 먹었지. 어릴 적 동네 할머니 집에 가면, 옛날에는 보리 깎으는 게 없으니까 보리 지는 게 있었어. 물에 조금 담갔다가 말방아에서 돌리면 껍질이 물러져서 떨어져나가고 보리쌀이 되는데 이것이 깨끗하게 잘 다듬어지지 않았어. 그래서 거치니까 다시 맷돌에 갈았지. 간 것을 대거름체에 치면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고 좀 굵은 것들은 위에 남았어. 그렇게 해서 떨어진 아래 것은 좀쌀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호박잎국에 넣으면 밀가루 기능을 해. 그리고 그 좀쌀로 죽도 끓여 먹었어."

- 김구자

 

| 보리 농사 |

 

"제일 바쁠 때가 보리하고 삼거릴 때주. 장마 오지,

보리도 비어야지, 삼도 해야지. 온 식구가 놀 새가 없어."

 

"보리 기계에 가서 볶아서 갈아 와서 개역 해서도 먹었지. 솥뚜껑에 볶아서 가레에 갈아서 무슨 설탕이 있었나, 아무것도 안 놓고 굵은 소금 조금 나. 가루를 체에 치면서 먹었지. 보리개역은 제일 좀진 합체로 쳐야 대."

 

"비만 오면 우리 시어머님은 보리 볶아서 보리개역 햇어. 밭에서만 사니까. 솥뚜껑에는 지지미(전) 지지고, 나무로 떼어서 무쇠솥에. 그냥 솥 속에다 볶아도 와다닥 와다닥 막 튀어. 볶아서 내버리면 이렇게 쥐어서 먹기도 하고 했지."

 

"(여름에는) 보리 볶아다가 갈아서 보리개역 해 먹었어. 또 쉰다리도 했주. 식은 밥 많아서 쉬어가면 아이고 이거 어떻게 하지 하면서 쉰다리 했어. 누룩하고 물 놔서 아침에 놔둬서 저녁 되면 부글부글해. 저녁 땐 단 것 조금 놔서 한 그릇씩 주면 다들 시원하닥 한 사발씩 먹었어. 집마다 누룩 만들어서 놔뒀다가 먹었지. 없으면 옆집에 갓 빌려다가도 해 먹고 그랬어."

 

"여름철에는 보리개역이나 쉰다리가 있어. 우리 어릴 때, 클 때는 일제 강점기니까 사카린이 있어서 조금만 넣어도 굉장히 달았거든. 설탕은 없었고. 사카린은 조금만 놓아도 맛있어. 그렇게 맛있었어. 밥해서 놔두면 조금만 놓아도 맛있어. 보리마당질할 때는 간식으로 쉰다리를 한 사발씩 드리거든. 그거 마시면 배불다고 해."

- 현용준

 

"쉰다리 만드는 법은 누룩 만드는 법부터 알아야 돼. 나쁜 보리도 갈아서 틔워. 헌 구덕에나 놓아서 보리짚이나 풀들 사이사이에 놓으면서 잘 틔우면 한 달 이상 틔워야지. 막 마르면 그거 빻아서 체로 쳐. 밥 쉬면 물 따뜻하게 해서 쉰밥에 놓고 누룩 놓고 해서 저어둬야 쉰다리가 맛이 좋아. 또신물(따뜻한 물)에 쉰밥."

- 위경생

 

| 칼 받는 3월 호미 받는 4월 |

 

춘궁기를 넘기려 3월에는 칼 받아들고 들나물을 캐어 먹고

4월에는 호미를 받아들고 설익은 보리를 베어다 먹고 살아야 했다는 말이다.

 

"도감은 막 옛날, 아무나 막 두텁게 툭툭 썰어도 안 되고 몽탕몽탕 썰어도 안 되고 얄픗하게 낭썹(나뭇잎) 모양으로 잘 써는 사람이 있어. 한 부락에 도감이라는 사람이 있어. 좀 와서 해달라고 하면, 그때는 돈으로 주는 거면 돈 봐서 갈 수도 있지만 돈도 안 받았어. 하루 종일 가서 앉아서 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 그러니까 서로 인정간에 해주는 거야. 아이고 도감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고기 한 반 얻어 먹으려면 도감 무서워서 말 못하고 했어. 돼지고기 한 점이 얼마나 값 비쌌어. 이제는 비계 같은 거 다 던져버리고 해도 그때는 비계로 해도 그 돼지고기 석 점……."

-오옥주

 

"돗통에 체 주고 궂은 물 주면서 기르면 얼마나 크겠어. 요새 같으면 한 15관, 20관짜리 만들기 어려워. 없는 사람은 기르지도 못해. 그러면 못 사는 집에 가서 돗통에 보면 아이고 돼지 안 기르면 똥 싸놓은 게 미삭미삭. 아이고 돼지나 하나 사줬으면 기를 걸. 이 집에 사람은 여러이고, 돼지 하나 살 가망이 없어서…… 돼지 안 길러서 아이고 저 돗통이 미삭미삭. 돼지 기르는 집은 판찍(씻은 듯이 아무것도 없는 모양)하지."

- 한신화

 

"돗거름이 큰 거름이지. 여긴 초언(촌)이니까 소 먹여난 촐(꼴)도 있고, 이 곡 짚, 조 갈았던 짚, 그런 것도 놓고, 안 놓으면 더러워. 그러면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거름을 내야 되거든. 그거 젤 최고, 요새 같으면 요소라 요소. 또 이 소거름은 염화가리고, 돗거름은 요소 역할해. 보리 갈 때."

- 양창세

 

 

 

| 제주의 똥돼지 |

 

"돼지는 잔칫집에서 돼지 좀 넉넉히 잠은 건 잘 사는 집이고,

그냥 가 늠에 맞게 사는 사람은 작은 거 한 10관짜리 해서 잔치를 했어."

 

"웃침돗, 미리 사다가 있는 사람은 옛날은 바깥에 돗통시가 있었거든. 만일 내년 잔치라 하면 올핸 또 잔치 전, 또 내년 소상이다 하면 요만한 돼지 새끼들, 옛날은 새끼들 많이 내왔거든. 걸 사다가 1년 동안 길러. 그걸 웃침돗이라고 해. 이거 성심으로 결혼식 때 쓸 거다. 부모 때 쓸 거다 해서 웃침돗 말이야. 잘 먹이고 해서 그거 잡아서 해. 많이 커. 이렇게 한 사람은 상당히 이 부락에서도 높게 알아줬어. 그 아무집 며느리는 웃침돗 길러서 부모 공양하고 아들 잔치하려고 한다고 했어. 그래서 잘 먹이고, 그러면 그거 잡아서 기름이 잇으면 잘 길렀다고, 잘 길러서 기름이 많이 있다고 했어. 기름 없으면 웃침돗 기른다는 말뿐이구나 했어. 지금은 기름이 많으면 나쁘다고 하지만 옛날은 아니야."

- 한필생

 

"돼지는 잔칫집에서 돼지 좀 넉넉히 잡은 건 잘 사는 집이고, 그냥 가 늠에 맞게 사는 사람은 작은 거 한 10관짜리 해서 잔치를 했어.(부잣집은 두 개도 잡았고) 가난한 집은 작은 거 하나 잡아도 잔치를 했지. 영장나도 그냥 했어."

- 정신숙

 

"큰일 때 돼지 잡으면 돼지 삶아난 국물을 집 주면에 나눠줬어. 끓여 먹을 만큼 놔두고, 오지 못한 노인네가 있어. 그러면 국 끓여서 먹으라고 나눠주는 거야. 친척이 바가스에 물박(물바가지) 놓고 들고 다니면서 이 집에 가서 조금 나눠주고 또 다른 집에 가서 나눠줬어. 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집 주면에 쪼로록하게 그 국을 나눠줬어. 그 집 며느리 와서 먹고 갈 때 가져가라고 하면 가져가고 했지."

- 이정자

 

"잔치할 때 돗 삶아난 데, 몸썰어 놓고 패마농 같은 것도 썰어 놓고 해서 몸국 만들면 잔치에 온 사람들이 먹었지."

- 강계화

 

"난 육계장을 잘해져. 제주도식 육개장이야. 가운데 뼈다귀하고 뼈를 많이 해다가 그걸 푹 고으려면 오래 걸려. 맛도 좋아. 그거를 식히면 기름이 위에 떠. 그걸 깨끗이 걷어두고 다시 두 번째 푹하게 고아. 그렇게 해서 참기름 많이 들어가야 좋아. 간은 소금이나 조선간장 넣어."

- 김화삼

 

| 제주돼지 |

 

돼지고기 한 점을 먹기 어려웠던 시절부터

돼지고기가 흔해진 지금까지

제주도 의례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그저 돼지고기엔 한 건 제사 때에만 쓰지. 뭐 먹을 수가 있나. 아버지네 적갈 할 때면 옆에 앉았다가 끄트머리 떨어지는 거 먹으려고 하면 손 탁 때리고 했어. 그런 시절이 있었지. 적갈할 때 고기가 길어서 끄트머리 썰면 그건 갱 끓인다고 하고. 그러니까 못 먹게 햇어. (제사가) 끝나야 먹었지."

- 강이순

 

"(명절 때도)실컷은 무슨, 약간씩,. 그렇게 해서 제사 명절할 때는 적을 하거든. 적을 하는데 이 사람(아내)이 와서 바꿔놨어. 적은 여자가 하나? 남자가 하나? 남자가 하지. 남자가 돔베[도마] 놓고 화로도 놔서 적을 해서 꿰는데, 적 길이가 요만이(손가락 한마디만큼) 해. 돼지고기가 남아도 그렇게 했어. 이 사람이 가서 적을 보고 아, 그거 이젠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고 해서 하니까 이만큼 길이(손가락 길이 보여주며)로 했거든. 한입에 먹지도 못할 길이야. 이젠 적갈을 여자한테 맡겨버려.

반을 태우는데(나누는데) 반에 떡 놓고 작게 썬 적이 있거든. 그러면 자기 반에는 적 들었다 안 들었다 해. 아고 고기가 뭐라고 꼭 찾아서 먹거든."

"속담에도 '친아방 낭 깨는 딘 가지 말곡 다슴아방 적 꿰는 딘 가라.' 했어. 친아버지가 나무 깨는 데는 가면 나무가 탁 도끼로 찍어 맞을 우려가 있는데, 의붓아버지 적하는 데는 가면 적 하다가 못 쓰게 된 거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거야."

- 현용준

 

| 나눔의 문화 |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평등하게 하나씩 준다.

다만, 집안의 가장 어르신에게는 특별히 생선이나

고기적을 추가로 놓아서 대우한다.

 

쉐(牛)도 전머리를 먹고 돗(豚)도 전머리를 먹나.

하니, 만민백성이 말씀하뒈

가난한 백성이 어찌 쉐를 잡아서 위할 수가 있겄습네까? 가가호호(家家戶戶)의 돗을 잡아 위로(慰勞)하겠습네다.

그리하라.

-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 제주 말과 말고기 |

 

말은 나라의 재산이자

이동의 수단이며, 농사의 버팀목이었다.

 

"옛날엔 고기도 없었어. 그때는 우럭, 우럭 했지. 제사 때나 밭 볼릴 때 먹었어. 밭 볼리는 날엔 그것이 우선이라. 밥은 산디쌀이나 나룩쌀 하나씩 섞고 팥 조금씩 보리밥에 섞어서 먹을 때야. 말테우리가 이렇게 하면 나쁘게 생각하지만 대접을 받았어. 대접받으니까 우럭도 별도로 갖다놓고 밭 가는 사람 별도로 밥을 해다가 놓는 거라.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말을 몰아서 가면 나는 아들로서 그것을 꼬챙이에 꿰어서 집에 가져오면 집에서도 맛잇게 먹어. 소금해서 말렸다가 잡풀 태우는 불에 잘 구워진 것도 있고, 안 탄 것도 잇고 해. 재가 여기저기 막 붙은 거라도 우선 말테우리한테 바쳤어."

- 고태오

 

| 테우리 |

 

자기 밭이 없는 테우리들은 남의 밭을 빌려 바령을 치기도 한다.

남의 밭을 빌려 한 해 동안 바령을 치면

3년 동안 경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도 한다.

 

"말추렴 해서 말고기도 먹어. 말고기는 소고기 닮지 안 해서 다른 고기보다는 고소하고 날로 먹어도 돼. 말고기는 기름이 없어. 내장은 쇠 창자보다는 말 창자가 아주 좋아. 말 창자 봐가지고 말 도둑질 한다고 햇어."

- 강계화

 

"비양도 등대 위에도 하루에 몇 번씩 올라가서 쇠똥을 줍곤 했어. 비양도 꼭대기 위에 가면 움푹한 데가 있는데 거기 가서 쇠똥을 주워다가 골채하고 섞어서 떡처럼 해서 말려. 한 사나흘 말리면 그것으로 굴목(아궁이)을 땔 수 있어.

새벽에 첫 닭이 울 때는 도채비(도깨비) 난다고 해. 시계가 없으니까 그것으로 시간을 가늠하는데 "이거 첫 닭 울었으니까, 세 번째 닭 울면 가라" 하고 말하면 (세번째 닭이 울고 난) 새벽에 가서 쇠똥을 주웠어. 그 꼭대기 위에 움막(구룽진)한 곳은 막 깊고 가파라서 올라오기가 힘들어. 그래도 나는 매달리면서 잘 갔지."

- 이복련

 

"집집마다 닭을 다 길렀어. 알에서 깬 병아리는 길러서 잡아먹고 계란도 낳으면 후라이 해먹고 말도 못하게 복이 되었어. 막 영양가 된 거지. 벌레도 주워먹고 풀도 주워먹고, 보리도 주워먹고, 닭이 자진해서 다 먹은 거니까 얼마나 영양가가 높아. 지금 토종닭이라고 해도 옛날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좋은 닭이라고 해도 없어.

그땐 닭하고 지네가 최고의 약재가 되었지. 지네가 땅에 많이 있었어. 그러니까 지네 잡아먹고 벌레 같은 거, 요만이 한 것도 닭이 다 주워 먹으니까 닭이 그렇게 눈이 밝아. 좁쌀도 조그만한 거 땅에 떨어져 잇으면 주워 먹어. 여름 나서 그 닭을 잡아먹으면 보양이 됐지.

닭 간은 눈 나쁜 사람, 눈물 질질질 나는 사람 먹으면 치료가 잘 됐어. 그런데 요즘은 시대에 따라서 날 거를 좀 뭐하기 때문에 그런 거지. 옛날엔 눈이 침침하면 닭 간, 소 간, 돼지 간 그런 것들은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먹었어."

- 오옥주

 

| 자연에서 기른 닭 |

 

사료가 아닌 자연의 흐름과 자연의 먹거리로 기른 닭이

그 어떤 닭보다 보양에 적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음력으로 유월 스무날, 유월 스무날 닭 잡아가지고 보약으로 먹는 데, 그건 어떻게 해서 유월 스무날이냐면 일월에 난 병아리가 유월 스무날 되면 딱 먹을 만큼 커. 닭이 너무 늙어도 약이 안 되어. 그러니까 유월 스무날 되면 이삼월에 깐 병아리들이 딱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커. 또 농사가 딱 끝난 때가 유월 스무날이라. 사람들이 막 버치지. 여름 농사, 콩, 조, 팥 같은 농사, 고구마 같은 거, 그때 딱 끝나. 갈고, 심고, 가을 들어야 거둬들이지만 여름 농사는 전부 그때 해. 망종 되면 선 보리가 없다고 해. 농사가 완전히 다 익어버려. 보리 베고 그 시기쯤 농사가 다 끝나면 유월 스무날이 되어. 음력으로."

- 강상우

 

"닭엿은 (좁쌀밥에) 골(엿기름)에 섞어서 놨다가 보글보글 괴면 이제 솥에 놔서 끓여. 닭 잡아서 골 섞은 물에 삶다가 건지는데, 오래하면 너무 꽈당해. (닭은) 건져두고 그냥 엿만 조리다가 깨도 볶아서 놓고, 좁쌀도 조금 놓고, 참기름도 조금 놓고 다 되어갈 때 닭고기도 찢어서 놓아. 그래야 연해서 좋지. 닭이 꽈당지지 않아서 먹기 좋아. 집마다 다 만들어서 먹었지. 닭밖에 없어서 닭엿 했어.

우리 어머니가 몸이 약하니까 닭을 잡아주는데 우리 동네 구릉, 먹는 물 고이는 곳. 거기가 찰흙이라. 그 물 위로 씻으면서 그 물에 닭을 삶아. 삶을 때는 사금파리 놓고 앵두나무 가지 조금 놔. 사금파리, 글쎄 그걸 놓으면 회충 안 생긴다고 해. 어른은 옻나무를 놨어. 거 칠 오르면 피부가 완전히 부글거리거든게."

- 홍순

 

"기르던 닭해서 힘나는 거라고 만들어 먹었어. 좁쌀로 밥해서 골 같이 섞어서 항아리에 조금만 담아두면 보글보글 괴어. 그걸 찌꺼지 짜두고 닭에 같이 놔서 막 달이면 물이 졸아들고 엿이 됐어. 돼지고기 엿도 했었어. 돼지머리해서 달이고 좁쌀해서 감주 해놓고 골 섞어서 했지. 닭 엿하듯이 해."

- 양오순

 

| 보양식 닭 |

 

사실 제주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는 별다른 조리법과 특별한 양념이 없다.

게다가 식재료 또한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자란 식량 자원들을

그대로 이용했다. 그러니 옛 어르신들이 먹었던 소박한 음식은

그 자체로 건강식이요, 기력을 보충하는 약이 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몸이 약하다고 우리 할머니가 '닭제골'을 해줬어. 아무도 안 해서 먹었던 모양이라. 내 책을 보고 육지서도 닭제골, 닭제골 하더라고. 우리 할머니는 이 닭제골을 뽑아서 나를 먹이면 한 삼일은 내 속이 느글거려서 아무것도 못 먹어. 왜 그러냐면 닭 속의 걸 다 꺼내고 거기다 마늘 놓고, 참기름 놓고 해서 솥 속에 빈 뚝배기를 놔. 이게 솥이면 물 놓고, 뚝배기 놔서 적고지 이렇게 걸치는 거라. 그 닭을 여기 놓는 거라.

뚜껑을 덮어. 그렇게 하면 증기로 닭의 성분이 물이 되어서 여기 떨어져. 그러면 이 물을 먹는 거라. 닭고기는 바삭바삭해서 맛이 없어. 그걸 먹으면, 참기름하고 마늘 떨어진 거 먹으니까 며칠을 김치만 먹어도 속이 뒤집어져. 몸이 약하다고 그걸 먹였어. 꼭 자라 삶은 물 같이 뽀얀 물이야. 닉닉하고, 사람들은 닭제골을 모르더라고."

- 김지순

 

비양도 미역에 대한 기억

 

허영선

 

펑펑 눈 내리는 밤

파도처럼 누룩괴어 끓어 넘치는 밤

밤과 밤 사이 바람 부는 밤

벽 틈 사이 어둠 스며드는 물의 기슭에

나는 몰래몰래 달의 눈을 빌려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달밤에 훤히 제 몸 드러낸 누런 미역,

달의 얼굴처럼 다가오던 그것들

비릿한 달은 너를 비추고

나는 달의 눈썹에 기댔다

희미하나 그것들은 비양도 밤바다를 향해

몸을 풀고 있었다

층층 멀어지는 난청의 바다로 귀를 곧추세운 채

 

나는 물개처럼 그것들과 협상을 하고

바다의 집에 마음을 주고 말앗다

아침엣 것 햇살에 널어 말리고

저녁엣 것 달빛에 널어 말려

 

달의 눈 아래서 만삭 물질

물 이랑 골골 캐고 캐다가

올라와 아이하나 낳고

사르르사르르 눈물 쓸리는 소리

그 소리 들었다

깊은 난청의 바다에서 살찐 너는 기어이

그물 주머니 하나 가득

새벽으로 피어올랐다

 

| 미역국은 먹었느냐? 메밀미역국 |

 

미역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아니 유일무이한 해산 음식이라 불릴 만하다.

 

1629년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남녀가 같이 미역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서 '연해 근처 돌 위에 담쟁이처럼 붙어 자라는데, 제일 지천하다'고 했다. 1970년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역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큰 수입원이었다. 그야말로 환금작물이었다. 때문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채취를 금했다가 동시에 채취하는 관행이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른바 '줄미역'이라는 양식 미역이 흔해지면서 제주도 미역은 사양하였다.

- 고광민, 《제주도 생산기술과 민속》

 

"한 열네 살, 열다섯 살쯤. 그때 시작해서 육지 물질 나가고 했지만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 (비양도는) 옛날에는 미역이 좋았어. 물때에 맞춰 새벽에 가서 해 오는데 어떤 날은 저녁에도 나가서 미역을 해 오니까 하루에 두 번 바다에 나갈 때도 있었지. 그렇게 해 오면 밤에 미역을 널어 말려, 달밤에.

포구 앞 자갈밭에 보리짚을 깔아서 거기에 미역을 널어놓는 거야. 그 자리에 참석을 못한 사람은 저쪽 경찰서 앞쪽 잔디밭에 널어야 하는데 그것도 빨리 가야 해. 사람들끼리 자리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지. 빠른 사람은 미역을 여기저기 뿌려서 넓게 차지하고 느린 사람은 자리를 별로 차지하지 못 해."

- 이복선

 

"물질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 식구 많은 사람은 그것을 가족들이 널어주고, 아닌 사람은 그것을 다 자기가 해야 해. 미역을 캐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널어 말리는 일이 또 힘든 일이야. 이슬에 널면 누렇게 되니까 물기가 빠지면 거둬들어야 하고 이것을 손질해야 하니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굳이 밤에 하는 이유는,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밤에 하는 거지. 달빛이 있으면 훤해서 잘 보이니까 달밤에 하는 거야. 식구 있는 사람들은 미역을 해 오기만 하면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널어주고 거둬들이고 하면서 손질을 해줘.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혼자서 해야 하니까. 밤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아침에 해 온 미역은 낮에 널어 말리고, 저녁에 해 온 미역은 밤에 널어 말리지. 너무 오래 그냥 놔두면 미역이 뻣뻣해지니까 적당히 마르면 거둬들여야 해. 특히 낮에는 햇빛에 너무 오래 두면 안 돼. 널어서 2~3시간이 지나면 들여와서 보리짚 붙은 거 떼어내고 손질해서 열 개씩 묶어서 보관해. 미역귀가 있는 채로 묶어야 보기도 좋아. 미역귀는 몸말린 거로 불 피워서 거기에 구워 먹으면 맛있어."

- 이복선

 

 

|달빛의 미역 말리기 |

 

"굳이 밤에 하는 이유는,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밤에 하는 거지.

달빛이 있으면 훤해서 잘 보이니까 달밤에 하는 거야.

식구 있는 사람들은 미역을 해 오기만 하면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널어주고 거둬들이고 하면서 손질을 해줘."

 

"대체로 그렇게 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날 자기가 작업한 양에 따라서 자리를 차지하지. 욕심이 센 사람은 넓게 차지해서 계속 사용하려고 해. 돌멩이를 놓아서 구역을 구분하면서 자기 자리를 표시하지. 그러다가 싸움이 날 때도 있지. 특히 미역을 말릴 자리가 없는 사람은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해."

 

"얕은 곳에 것보다 깊은 곳에 미역이 맛있어. 물이 센 곳이 싱싱하고 맛있어. 한림 바다에 '도구리'라는 밭섶이 그런 곳이야. 지금은 등대가 있는데 그 곳이 동그란 모양이어서 '도구리'라고 했어. 미역을 하려면 이렇게 물이 센 곳에 가야 하니까 오래 할 수가 없어. 물때에 맞춰서 가서 두 시간쯤 작업을 해. 잘하는 사람은 망사리(바구니)로 하나 넘치게 하면, 나와서 펴두고 다시 들어가서 하지만, 잘 못하는 사람은 한망사리 쯤 해."

 

"(한 망사리는) 300개쯤? 작게 하는 사람은 100개쯤 하고 50개 정도 하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많이 한 사람은 미역 말리는 자리를 넓게 차지하려고 애쓰지."

 

"(좋은 미역은) 파랗지. 말라도 파랗게 돼. 얕은 곳에 것은 노랗고, 톳도 마찬가지야."

- 이복선

 

| 바다밭과 톳 |

 

요즘은 바다 생태 환경이 바뀌면서 자연 해산물이 많이 감소했다.

따라서 소라와 같이 일부 해산물들은 씨를 뿌려 채취하므로

관리는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다.

 

"미역도 해 먹고, 톨도 해서 먹었어. 친구들하고 가서 캐다가 데쳐서 된장에 찍어 먹었지. 톨은 캐다가 푹 데쳐서 된장에 찍어 먹었어. 톨은 푹 삶지 않으면 안 돼."

 

"톳은 빨아서 물에 담갔다가 다시 헹궈야 해. 짠물이 우러날 정도 두세 시간 담가놔야지. 톳은 공동으로 관리를 하다가 해경(解警)하면 채취를 해. 그런데 빠른 사람들은 밤에 차지해서 채취해버리면 다른 일을 하다가 간 사람은 참여를 못 할 때도 있지. 그러다가 싸움이 나기도 했어. 이젠 공동으로 관리하고 채취하면 팔아서 그 이익금을 나눠. 그러니까 예전처럼 서로 바다밭을 차지하려고 안 하지."

 

"톳은 맨손이나 호미로 베어냈어. 어촌계 조합원이 아니고서는 채취권이 없지. '톳조문'이라고 해서 우뭇가사리 조문과 마찬가지로 어촌계 조합원들은 적당한 날 조합원이 같이 톳을 해. 주로 해녀들은 톳을 캐고 남자들은 톳을 나르는 일을 해. 공동 작업은 거의 일주일동안 하지. 공동으로 채취한 톳은 그 이익금도 참여한 사람이 똑같이 나눠."

- 이복선

 

| 가장 쉽게 얻은 음식, 톳 |

 

"톨 비어다가 톨 냉국 해서 먹었지. 막 흉년에는 톳 놔서 밥도 해 먹었어.

그냥 장 찍어서도 먹어."

 

"밥은 톳밥, 솥에서 보리쌀하고 좁쌀, 흉년 때는 밀주시 톳밥. 왜 톳밥을 하느냐 하면 땅알로 솟아나는 뭇[물릇]이 있어. 잎은 마늘잎 같은 거. 그거 파다가 톳에 밥을 섞어서 삶으면 톳밥도 그렇게 맛있었어. 아무것도 없으니까. 좁쌀에 보리쌀에 거의 먹었지.

- 고순여

 

"톨 비어다가 톨 냉국 해서 먹었지. 막 흉년에는 톳 놔서 밥도 해 먹었어. 그냥 장 찍어서도 먹어. 그때는 농사짓는 걸로는 굶주리진 않을 텐데, 공출이라고 해서 전부 다 할당해. 부락에서, 누구 집은 밭이 몇 평이니까 얼마, 몇 섬, 딱딱 할당제로 하니까 그걸 하다보면 양식이 모자라."

 

"톨 해다가 무쳐서 밥 한 숟가락이면 톨은 두 숟가락 세 숟가락 먹는 거지. 식욕이 당기니까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영양가는 있든 없든. 해변가에 가면 너패, 파래 여러 가지 다 해다가 먹었지. 밥에 버무려서 먹어."

- 안이길

 

"그때 보리밥, 조팝. 그때까지도 쌀밥 안 먹었어. 톨에 좁쌀도 놔서 하고 톨만 놔서 밥도 해 먹고, 흉년에는 톨밥들 먹었을 거라. 톨해다가 삶아서 물에 담갔다가 썰어서 먹기도 하고 안 썰어서 그냥 먹기도 했지. 쌀이 없으니까 공출해버리면 먹을 것도 없어. 자기네 먹을 것도 놔두지만 넉넉한 사람은 먹고, 못 사는 집은 못 먹기도 하지. 우린 그것도 먹어가니까 별미로 생각해서 톨밥, 몸팝 먹었어. 몸팝은 먹었지만 톨밥은 못 먹겠더라고."

 

"톨밥? 톨만 먼저 삶아서 밥할 땐 좁쌀에 톨 거려놓으면 밥이 됐지. 익어갈 때 버무리면서 톨조밥 해서 먹었어. 우리 아이들은 다 그 밥 먹어서 컸어. 톨은 이만큼씩 크고 먹을 건 없으니까 그거 찢어서 밥 했어. 밭에 가면 뭇[물릇]이라고 한 거 있어. 그거 뿌리 캐어다가 또 바다에는 패라고 한 게 있어. 이런 것들도 섞어서 먹었어."

- 김계석

 

"몸국도 변비에 좋아. 제주도 몸국이야 알아주지. 돼지고기 삶았던 물에 몸 넣어서 몸국 만들면 그건 제주도 전통적인 거지. 몸 건데기를 많이 먹으면 변비 안 걸려. 이거 먹는 식품이 다 약이라. 생각해보면 다 좋아."

- 김자량

 

"잔치할 때 돼지 잡으면 몸 썰어 놓고 패마농 같은 것도 썰어 놓고 해서 온 사람들이 먹었어. 여름나면 톳해서 톳장국 먹고, 미역이고 뭐고 돈 줘서 먹는 거니까 쉽게 먹을 수가 없었지. 바다에 가서 몸 주워다가 먹었어."

- 강계화

 

제주도에서 봄에 물질하여 호미로 몸을 베어내는 방식으로 채취한다. 미역 · 몸 · 감태 등 바다 속의 해조류들을 베어 거두는 도구를 '정게호미(종게호미, 종게호멩이이, 물호미)'라 한다. 뭍에서 여러 가지 풀을 베는 도구인 호미와 같은 기능을 하는 도구다. 제주도 말로는 낫을 호미라 하는데, 뭍의 호미와 바다풀을 베는 정게호미는 비슷하다.

- 고광민, 《제주도 생산기술과 민속》

 

"거름을 어디서 사고 그런 게 없어서 몰[몸]이란 걸 채취하는 기간이 있어. 그게 뭐냐면 '고재기'라. 고재기라고 하는 몸은 위에까지 촤악 자라는 몸이 아니고 어느 정도 밑에 자란 다음에 옆으로 팍 퍼지는 그런 종류의 몸이 있었거든. 고재기 몸 조물 때가 주로 가을, 늦은 가을 농사짓고 나서 겨울 오기 전에 그걸 하면 몰로서 제일 거름으로 쓰는 데 상품이야. 그 다음에 '갑실몸'이란 건 땅밑에서부터 물위에까지 좍 자라. 삭 자라면 그게 뭐 어마어마한데. 그거는 해녀가 들어가서 자르는 게 아니고, 몸 비는 호미라고 해서 낫처럼 아주 길게도 만들고 아주 크게, 반경도 아주 크게 만들어서 떼배 위에서 훑으는 거지. 또 바람에 의해서 그게 파도가 세니까, 뽑아져서 가로 올라오면 그걸 해다가 말려서 거름으로 쓰고, 썩혀서도 거름으로 썼어.

그 다음에 거름으로 쓰는 게 제일 많은 게 '노랑몸'인데, 노랑몸은 거름으로 치면 제일 품질이 안 좋아. 그거는 일부러 채취를 하면서 거름으로 안 썼어. 하도 양이 많으니까. 태풍이 온다거나 뭐 하면은 들이갖다 말리고.

고재기는 해녀가 가서 잠수질하면서 비고, 우리도 들어가서 해녀하는 것처럼 좀 채취를 해봤으니까. 개인적으로."

- 김용중

 

| 몸국 |

 

이 베지근한 맛의 몸국은 잔치를 함께 즐기는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 공유의 음식이다.

그만큼 제주 사람들의 기억에 특별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 전복 |

 

간편하고 투박한 조리법에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밭과 바다밭으로 내달려 식량을 장만해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중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대접받으며,

제주를 찾는 이들에게까지 사랑받는 해산물이 바로 전복이다.

 

"예전에는 바다 밑 15미터쯤 들어가다보면 바위 밑에 전복이 많이 잇어서 땄어. 전복이 보이면 소라나 다른 것들을 채취했다가도 다 내버리고 전복을 따지. 감태를 걷고 그걸 채취해 오는데, 숨이 짧은 사람은 감태 속에 있는 소라만 잡고 올라오고, 숨이 긴 사람은 그 주위를 한바퀴 뱅그르르 돌다보면 바위 밑에 딱 붙어 있는 전복을 발견할 수 있어. 그러면 잔뜩 잡았던 소라는 그냥 내버리고 빗창을 꺼내 들고 그 전복을 바위에서 떼어내고 올라와.

올라오고 나면 힘이 탁 풀리고 숨이 막 가빠서 테왁을 의지하고 그 위에 엎어져서 '호이호이' 숨을 몰아쉬지. 그때는 그렇게 채취해서 하루에 2~3킬로그램 정도 잡을 수 잇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잡을 수가 없어."

- 강인자

 

| 바다의 보물, 전복 |

 

과거에는 자연산 전복이 성인 손바닥만 하고 꽤 듬직한 무게였기 때문에

전복을 발견한 날은 운수 좋은 날이다.

 

"(전복을 발견하면) 물속이니까 기뻐서 소리도 못 치고, 숨이 긴 사람은 발견 즉시 전복을 따지만, 숨이 짧은 사람은 일단 올라가야 해.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물위에서 '전복 잇다'고 막 외치지.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그걸 발견하고 따 가버리기도 했어. 그러면 서로 '내 전복이다. 아니다.' 하면서 다투기도 하지. 그래도 그때는 전복이 흔할 때니까, 그것을 그냥 주는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만약 그 빛창(전복 따는 도구)으로 처음 전복을 딴 거라면 주지 않아. 다시 그 빗창으로 두 번째 전복을 따야만 주지. 장사에서 마수 같은 거지."

- 강인자

 

"생복 나는 데나 고동(고둥) 보는 데나 다 같은데 고동 보는 사람은 고동만 보고, 생복 재수 좋게 보는 사름은 생복만 봐. 생복은 아무 눈에나 보이지 안 해. 상군처럼 잘하는 사람이라야. 재수 좋은 사람이주."

 

"5년 전쯤 일출봉 뒤에서 소라를 잡다가 밭고랑 같은 곳에서 전복을 발견해서 따왔는데 무게가 무려 800그램이었어."

 

"전복 해다가 생채 많이 먹어. 어린 애기들 잇으면 죽도 쑤어서 먹고 제일 힘이 많이 난다고 햇어. 비싼 거라도 애기들 한두 개는 다 가져가."

 

"전복 보는 게 어렵지. 깊이 들어가지 안 해도 이렇게 돌 잇으면 돌에도 붙어 있고, 아래도 붙어 있어. 가울에도 붙고, 밋밋한 돌ㅔ도 붙어. 가울이라고 하는 건 생복 붙음직한 고랑이야. 밭 갈면 골이 나는데 그렇게 높은데 밑바닥이 아니고, 발견하면 뜯어."

 

"그거 보면 기분이 좋지. 다른 거 못해도 전복 따서 나오면 재수가 좋은 거라. 어려워도 그걸 잘 따 왔어. 아주 가까이서. 너무 얕게 하면 껍데기가 부서져. 건들지 않으면 오므라들지 안 해. 건들면 오므라들어버려. 건들지 안 한 때 이렇게 봐서 빗창으로 꾹 찔러서 딱 떼면 얼른 떼어져. 그렇지 않으면 살에 찔러버리면 생복도 죽어버리고 값도 내려가지. 젤 좋은 건 큰 거지. 숫전복하고 암전복하고, 암전복은 무룩무룩 크고 숫전복은 좀 얇아, 알아주는 건 숫전복이고 숫전복은 살이 많기도 많아. 암전복은 크긴 해도 여물이 얇고, 맛은 똑 같아. 그래도 숫전복이 더 쳐주지.

생복도 많이 했었어. 그러면 고동 한 망사리 한 것보다는 생복 8~9개 한 개 돈을 더 많이 받지. 아무래도 고동 한 망사리보다는 전복 5~6개 한 게 나아."

 

"스물서너 살, 다섯 살 됐을 거라. 대마도 가던 해에 들어가면 생복만 있어. 두 개 세 개 따서 나오다 보면 망사리 위에 엎어졌어. '야, 여기 오라 생복 여기 막 눌었져.'

좀녀들이 물 아래 들어가서 보면 없어. 나 생각엔 난 봐지는데 난 두 개 세 개 따서 나와. 그 사람들은 못 보는 거라. 아고 가 보라. '성님 엇수다(없다) 엇수다.' 난 들어가면 자꾸 잇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헛숨해서 나오지. 이무것도 없어서 나오기도 하고, 그땐 고동은 반 구덕이고 생복은 막 많았어. 그러니까 그거 머정으로 한 거라."

- 김계석

 

"소금으로 입을 헹군 후 전복을 씹어서 부드럽게 한 후 숟가락으로 떠먹였어. 요즘 의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지만, 생것으로 먹이려면 그렇게 해야 했어. 아이가 조금 크면 전복을 세 등분 정도로 썰어서 손에 쥐어주면 그걸 빨아 먹기도 하지. 그러면 감기도 안 걸리고 건강해. 또 자연 전복은 주변이 딱딱하니까 동그랗게 가운데만 잘라내, 그것을 밥할 때 잠깐 얹어서 쪘다가 잘라서 실에 목걸이처럼 꾸ㅐ어서 빨아 먹게 했어."

- 강인자

 

"게웃(전복 내장)이 중요해.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버려버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많이 들어가야 맛있어. 쌀을 물에 담가두고, 전복은 씻어서 칼로 잘 썰어. 배장은 손으로 잘 주물러서 터트린 후에 솥에 기름을 두르고 쌀하고 같이 볶아야 돼. 바닥에 눌러 붙을 정도로 오랫동안 잘 볶은 후에 물을 놓고 끓이다가 한소끔 끓으면 불을 줄이고 쌀이 푹 퍼지게 해야지. 거의 다 될 쯤 전복의 하얀 몸통을 썰어서 넣어. 그 위에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으면 고소하게 맛있어."

 

"생으로 썰어 먹어야 맛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버터에 살짝 익혀서 먹는 것도 좋아해. 간혹 늙은 전복은 고아서 먹기도 해. 찹쌀하고 인삼을 넣어서 푹 끓이면 약이 되지."

 

"(요즘 같은 겨울에는) 24시간 정도 괜찮아. 차반에 놓고 수건을 덮어서 냉장실 안에 넣으면 안 죽고, 여름에는 짠물 적신 수건을 덮어서 서늘하게 해야 해."

 

"전복은 산란기 때가 전복 내장이 기름지니까 맛잇어. 이 시기 전족은 500그램짜리 하나면 전복죽 열다섯 그릇 정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전복 내장이 부풀어 올라 맛있어. 그 시기가 10월부터 12월 말까지 3개월이야."

 

"전복도 암놈, 수놈이 잇어. 남자들은 암놈을 먹고, 여자들은 수놈을 먹어. 수놈이 딱딱하긴 해도 죽 만들 때는 수놈이 좋아. 바닥이 검은 것은 수놈, 노란 것은 암놈이야. 그런데 노란 것 중에서도 특별히 노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약 전복이야. 그리고 그것은 가파도에서 많이 나. 여기도 성산과 우도 사이에서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없어."

- 강인자

 

| 맛있는 전복 |

 

할망 하르방은 계절에 따라 전복 보관하는 방법을 달리했고,

또 시기에 따라 전복이 가장 맛있을 때를 알고 있었다.

 

| 성게국 |

 

제주 사람들은 성게를 국으로 끓여 먹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판로가 없었기 때문에 성게를 대량으로 잡지 않았다.

잡은 그 자리에서 까서 알맹이만 먹던 음식이 바로 성게였다.

 

"옛날에는 성게로 국을 끓여 먹지 않았어. 성게를 잡아 오기는 해도 국 끓여 먹는 것을 몰랐는지 성게국을 해 먹지 않았어. 생으로 미역에 싸서 그냥 먹었지 뭘 만들어서 먹을 줄은 몰랐어. 성게국, 성게비빔밥 이런 것은 요 중간에야 나온 것이지 옛날에는 그렇게 해서 먹지 않았어. 오분자기도 죽이나 끓여 먹었지 찌개를 한다든가 그런 건 없었어."

- 김구자

 

"난 여기서 나고 자랐어. 어릴 적에 아버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4남매를 키우려니까 힘들어서 학교도 못 하고 우리 형제가 같이 물질하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했어. 열여덟 살쯤부터 물질을 시작해서 지금까지야. 요즘은 가끔씩 소라 채취할 때만 해. 최근에는 소라할 때 외에는 벌이가 되지 않아. 요즘 같은 밀감 철에는 해녀들이 귤 따러 가. 하루 일당에 점심주니까 그것이 더 수지맞아. 잘하는 해녀들 열 명쯤만 바다에 가지. 예전에는 성게, 오분작은 잘 잡지도 않았어. 이제는 이것도 귀해. 여기 성산은 배 타고 나가면 소라를 두 시간만에 100킬로그램 정도도 잡았어."

- 강인자

 

"응, 옛날에는 고등어, 코생이, 성게 닮은 것은 먹을 것으로도 알지 않았는데 요즘엔 그런 것도 시세가 막 좋아!"

 

"옛날에 성게국이 있었어? 파래국은 있어? 성게를 돌 트멍에서 잡으면 칼로 썰어서 생으로 먹지. 그것을 국을 끓여 먹거나 하지는 안 했어. 그때는 성게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객가에 가서 잡으면 썰어서 훓어 먹는 거라."

- 송옥수

 

"성게죽 맛잇지. 쌀에 성게 놔서 참기름을 볶다가 물을 넣어서 죽을 쒀."

- 오춘련

 

| 성게와 솜 |

 

"솜은 잡아다가 도고리(함지박)에서 닥닥 빻아서

앙금을 두 번 정도 걸러낸 다음 초벌물, 두벌물 넣고 끓이면

둠비(두부)모냥 드박드박해, 그렇게 해서 먹었어."

 

"솜 해다가 마께(나무로 만든 방망이)로 빻아서 국물이 나오면 파래해서 국 끓였어. 솜국이 그렇게 맛 좋아."

- 고순여

 

"솜 잡아다가 도고리(함지박)에서 닥닥 빻아서 앙금을 두 번 정도 걸러낸 다음 초벌물, 두벌물 넣고 끓이면 둠비(두부)모냥 드박드박해. 그렇게 해서 먹었어."

- 홍순

 

"우린 노상 먹는 건 바다 것으로만 먹었주. 이젠 보말도 잡으러 가지 못 하게 한다고 해. 보말도 잡아다가 삶아서 까서 간장 놓고 볶아서 먹어. 그냥 까서 깻가루 놓고 담가 놓고서도 먹고."

- 홍순

 

| 수두리 보말 |

 

보말이 가장 맛있을 때는 봄이나 장마철이다.

겨울에는 제맛이 나지 않는단다.

봄 바다에 나가 보말을 깡통한가득 잡아다가

그자리에서 삶아 먹으면 하루가 즐거웠다고 한다.

 

"국도 끓여 먹고, 보말죽도 쑤면 맛 좋아."

- 강계화

 

"죽 쑬 때 속에 붉은 딱지 벗겨두고 보말 내어. 그 시절에 흐린 좁쌀이라고 한 게 많아. 시루에 좁쌀 가루 빚어다가 보맑ㄱ 끓일 땐 보말 놔서(찐좁쌀을) 문덕문덕 문질러서 국에 놓고 저어서 배추나 미역이나 놓고 먹으면 맛 좋아. 보말국은 미역새 졸딱졸딱한 거 잇어. 그거 해서 놓으면 맛 좋아."

- 강계화

 

| 보말잡이는 아이들의 놀잇거리 |

 

당시에만 해도 흔하게 보말을 볼 수 잇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오염되거나 환경이 변한 탓인지 보말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 팟깅이, 듬북깅이, 지름깅이 |

 

게가 가장 맛있는 시기는 겨울을 제외한 계절이나,

특히 보리를 베어 들일 즈음인 망종 전후다. 이때 잡은 게가 가장 맛있다.

 게들이 알을 품고 잇어 가장 살이 쪄 잇는 동안이기 때문이다.

 

"놈 싼 훼에 깅이 잡나.(남이 켠 횃불에 게 잡는다.)"

- 김녕 노형 조수 인성, 《제주어사전》

 

"우리 열세네 살 때 탑동 아래가면 돌킹이(돌게) 나올 때, 참깅이(참게) 나올 때 돌만 들러내면 발발 거려. 그러면 동그랗게 사방으로 에워싸서 잡아놓고 안에 돌은 밖으로 던지면 깅이가 거기 모이게 돼. 깅이를 바깥으로 못 나오게 갇히는 거라.

그러면 한 주먹씩 잡아놓지. 그냥 하나하나 잡으려고 하면 어떤 놈은 잡아지고 어떤 놈은 도망가버려. 아이고 차롱에 놓으면 올라와서 착착 두드리고 해. 이젠 바가스라도 있지.

몪아서도 먹고, 죽도 쒀 먹어. 그거 잡을 땐 코토데기(남방울타리 고동) 보말이라고 하는 게 많이 있어. 그거 같이 잡아 오면 삶아 먹었어. 깅이가 적게 나오면 그거 해서 먹엇지."

 

"콩 볶아서 깅이에도 놔서 먹어. 그게 큰 반찬이었어."

 

"우리 부모님네는 밭일만 하니까 바다의 것은 많이 해오지 못했어."

- 위경생

 

"뭉게죽 하려면 가끔 바다에 잡으러 갔어. 그땐 탑동 안 메운 때야. 우리 열세네 살 때 가면 아주 물이 쌀 때는 멍게, 구젱기(소라) 같은 거 돌은 들러내지 못하고 떼어다가 먹었지. 탑동 아래 물이 바짝 싸면 구젱기도 있으면 떼고, 멍게도 골갱이(호미)로 파서 먹고, 뭉게는 상퉁이(상투) 확 잡아야 해. 그렇게 해서 잡아다가 삶아서 먹었어. 죽은 그냥 돔박돔박 썰어서 쌀 놓고 끓여. 부드러워지라고. 그땐 무슨 돌들이 있었어. 그냥 막 두드려. 볶아서도 먹고 죽도 해서 먹었지."

- 위경생

 

| 문어 요리 |

 

"난 맛만 보고 안 먹으니까 지금도 먹었으면 해.

난 맛있는 거 있으면 남편만 먹였어. 고기국 끓여도

난 미역만 건져서 먹어도 왜 고기가 없는지 말 안 했어."

 

"물꾸럭죽은 환자들이 먹으면 좋아. 물꾸럭죽을 하려면 막 빻아서 해. 나는 물꾸럭먹을 버리지 않고 같이 난도질 해. 생채로 하면 막 튀어. 팔팔 끓는 물에 데쳐서 냉장고에 놔두면 좀 굳어. 그러면 물꾸럭을 난도질해. 먹을 냉장고에서 꺼내서 같이 난도질 해서 죽을 쑤니까 아주 맛잇어. 그건 내가 개발했어. 옛날엔 먹을 던져버렸지. 먹은 영양분도 잇고 몸에도 좋아."

 

"우리 하르방(남편)이 설사를 계속하니까 문어 사다가 데쳤어.이젠 그 먹통을 딱 잘랐어. 그냥 놔뒀다가 먹만 꺼내려고 하면 헤싸질(헤벌어질) 거니까 머리통, 먹통을 톡하게 잘라서 냉동실에 우선 담았어. 아래 발은 난도질하고 냉동에 20분 동안 잇으니까 굳었어. 그걸 꺼내서 막 잘게 썰어서 난도질했어. 너무 맛있는 것 있지. 전복죽 저리가라. 쌀은 같이 불려서 놨다가 건져서 쌀이 마를 정도 되면, 먹하고 쌀하고 참기름하고 같이 놔서 막 볶아. 어느 정도 골고루 참기름 들어가면서 꺼멍해져. 물을 적당히 넣은 거라. 새카맣게 돼도 그렇게 맛있어. 먹이 그렇게 좋은 거라. 코피 잘 나는 사람, 하르방 그거 먹어서 일어나니까 설사 며칠 해서 아이고 이 어른 병원에 입원해야 할 건가 했어. 그런데 일어낫어. 약도 되고 맛도 좋아. 이제도록 그런 죽을 먹어본 적이 없어.

내가 머릴 쓴거라. 옛날엔 문어죽 할 땐 먹을 버렸어. 문어죽을 잘못 쑤면 비린내가 나잖아. 내가 하니까 비린내가 없었어. 참기름에 볶다가 단지 소금만. 죽에는 미원이나 맛소금 같은 거 놓으면 안 돼. 완전히 문어죽이 진짜 보약이야, 보양식. 내가 문어죽이 좋다고 해도 잘 못해. 우리집이 난도질허는 도마가 새카맣게 됐어.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질 안 해. 그러니까 문어죽이 최고로 맛있어. 먹이 비린낼 없애는 모양이라. 식어도 비린내 안 나. 먹죽이 그렇게 맛 좋아. 문어먹죽."

 

"우린 먹을 구워서 먹었어. 불 때는 데 놓으면 노리롱[노르스름] 하면서 구워졌어."

- 김장옥

 

"뭉게 잡으면 상통이 뒤집어서 먹부터 잘랑 던져버렸어."

 

"난 맛만 보고 안 먹으니까 지금도 먹었으면 해. 난 맛있는 거 잇으면 남편만 먹였어. 고기국 끓여도 난 미역만 건져서 먹어도 왜 고기가 없냐는 말 안 했어."

- 강석량

 

"우리 어릴 때는 깅이를 도고리(함지박)에 빻아서 죽을 쑤어 먹었어. 그리고 깅이범벅이라는 것이 있어. 물 넣고 깅이를 바글바글 끓여서 간장으로 간을 하고 거기에 가루를 놓고 저으면 깅이들이 서로 엉켜 붙어. 그걸 깅이범벅이라고 해.

- 김구자

 

"이젠 그냥 놔서 벌겋게 해서 먹지만 그땐 뭉게를 해다가 뜨거운 불치(불티)에 놔두면 하얗게 벗겨져. 그러면 하얗게 벗겨서 쌀 놔서 죽 쑤어 먹었지. 썰어서 삶아도 좋고 그냥 삶아도 좋고 죽 쑤어서 참기름 놓으면 맛 좋지.

 

"얕은 데 있어. 구젱기(소라) 하러 갔다가 가에 잇으면 잡아다 먹어. 그냥 벌겋게 앉은 것도 있고 돌틈 사이에 불빛이 베롱한(불빛이 반짝이는 모양) 거 있으면 물 위에도 나와. 탕건 하다가 횃불이라고 불 켜서 왕대나무 같은 거에 그신새(지붕을 덮었던 묵은 띠) 같은 거 묶어서 그걸로 횃불 켜서 보말 잡아서 먹엇어. 짚 일어난 새(띠) 잇으면 그거 빌어다가 놔뒀다가, 묶어서 길게 해서 불 붙여서 쓰고 했어. 불 꺼져버리면 막 기어서 오지. 막 돌바랑을 기어서 와. 대막대기에 솜이나 헝겊 꽉꽉 담아서 석유 비우고 또 홰 켜서 가고 했지."

 

이중섭

 

"옛날엔 깨 끝나면 깨짚해서 잉걸이 질듯 말듯해. 깨짚하면 잉걸이 있는 듯 마는 듯하지. 거기에 가을 자리 소금 팍팍 해서 놓으면 구워졌는지 말았는지 그거 내어보면 불치(불티) 가득해도 그거 털어서 맛있게 먹었지. 또 콩짚도 하면 그것에도 넣어서 구워 먹어. 그냥 볶아 먹기도 하고, 자리젓은 젓으로 먹어. 제라하게 나무로 불 때어난 적쇠에 놓아서 불에 구우면 맛이 좋아. 옛날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서귀포 사람이 태흥리 학교 가서 남의 집에 살았어. 우잣디(울안에) 가는데 나물을 뜯어서 갈중이에(감물 들인 옷) 닦아. 박박 문질러서 국에 놓아서 끓이고 불 지피다가 불에 자리를 푹푹 던져 넣으니까 익었는지 말았는지 검질(김0로 박박 닦아서 먹어도 맛만 좋더라고 하더라고. 그 집에 가서 우리 살았는데 옛날에는 그렇게 하면서도 먹어서 살았어."

- 김례

 

| 자리젓과 자리구이 |

 

자리젓은 오랫동안 보관해 먹는 음식으로 유용했고,

자리구이는 불을 지피다가 남은 불재에 던져넣어서 익은 듯 안 익은 듯

불티가 붙은 상태로 먹었다. 제주 할망 하르방은 지금껏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

 

"자리젓은 바작바작 허주게. 소금 놓아서 소금은 너무 짜게 놔도 안 되고 싱거워도 안 되고 간 맞게 하면 자리젓이 제일 맛 좋아. 싱싱해서 이제 썩지 안 했으면 마께로 독독해서 배설 다 빼내고 이제 소금 놓고 잘 무쳐서 담아두면, 간을 딱 맞추어서 맛있지. 자리젓이 클클하고 맛 좋아."

- 김계석

 

"자리젓은 자리 작은 거 간 맞게 하면 맛 좋아. 자리 한 말이면 소금 한 되 못 되게 넣어. 유월 자리가 맛 좋아. 너무 굵은 거 말고 중간 정도쯤 한 거. 잘 버무려서 꾹꾹 눌러서 놔두면 돼. 자리젓이 큰 반찬이지.

- 김술득

 

"(비양도에서는) 멜젓, 자리젓이지. 자리젓은 두 말씩 했었지. 자리는 사서 했어. 금능지역 배들이 팔러 왔어. 가끔은 물질 갔다 오다가 자리배가 보이면 그 배에 대서 직접 사오기도 해. 자리는 구워서도 먹고 볶아서도 먹어. (자리젓은) 집집마다 다 자기대로 담그지. 자리 한 말이면 소금 한 되 넣는 게 적당해."

 

"항아리에 소금 간을 맞춰서 하면 자리젓이 되어. 별다른 방법이 없어. 옛날에는 산남지방의 사람들이 여기에 자리 사러 오고 했어. 자리철 되면 자리사러 왔다가 없어서 못 사고, 미리 부탁해두고 해야 자리를 샀었는데 이제는 자리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 요즘에는 팔리지 않으니까 있어도 잡지 않아. 요즘에는 조금씩만 거려."

- 김구자

 

"손맛으로 가서 단내 나게 먹는 사람은 그렇게 담그는데 나는 그런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좀 벌겋게 익어서 쿠싱한(구수한) 것을 좋아하지."

- 이복선

 

| 제주와 자리 |

 

자리젓은 제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먹었다.

해안과 중산간 마을을 구분하지 않고

대부분 1년 동안 먹을 음식으로 자리젓을 담갔다.

중산간 사람들도 자리를 사기 위해서 먼 걸음을 마다치 않는다.

 

"아이고 국 하면 막 맛 좋아. 자리국물 놔서 국 끓이면 밥 두어 사발 먹었어."

- 한신화

 

"(자리조림은) 사람마다 다른데 약간 소금했다가 물을 근근히 넣어서 조리면 되지. 당시 할머니들은 간장도 안 쓰고 풋고추나 위에 좀 썰어 넣었어. 그러면 노랗게 조려져. 생으로 하는 사람은 조선간장 조금 넣고 물 넣고 해서 오랫동안 조려. 오랫동안 조리니까 저장력이 강한 것 같아."

 

"전복껍데기에 구멍을 막아서 거기에 자리젓을 넣고 무를 썰어 놔서 바글바글 끓여 먹으면 배지근하니 맛이 좋아. 밥 했던 불티를 긁어서 거기 놔두면 바글바글하니 괴어."

- 오춘련

 

"자리젓을 잉걸숯, 정동화로 부엌에 가져가서 엄청 큰 전복 껍데기에서 자글자글하게 끓이면서 무 넣고 붉은 고추 파란 고추 넣고 야채 넣어서 하면 맛있어."

- 김복희

 

| 함덕 썩은 멜 장시 |

 

어촌에서 남아도는 멜을 처분하기 위해 중산간으로 팔러 다니다보면

신선도가 빠르게 저하되는 멜의 특성상

물이 흐르고 부패해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여름되면 멜조림 해 먹어. 멜을 배를 갈라서 말려. 손으로 하면 갈라져. 차롱에서 말리면 고들고들하지. 그거 고추장에 엿기름에 간장에 버무려서 참기름 놓고 해봐. 진짜 맛 좋아. 호상하러 우리집이 닷새를 다녔는데 내가 멜 조림을 해드렸어. 그것이 그렇게 맛 좋았다고 해.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같이 개발하고 해야 음식이 늘어."

- 강석량

 

"막 몰려들어서 느가 사켜, 나가 사켜 잠방잠방 옷 적시면서 들어가. 서로 사겠다고 다투니까 차례로 차례로 사. 멜 배가 그렇게 많지는 안 했지. 여러 개 안 되니까 그렇게 했어. 그때도 우린 분수 몰라서 파는 것만 사다가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확하게 주워다가 먹고 그렇게 했어. 멜 팔다가 아래로 흘려버린 거 족바지로 거려다가 먹는 사람도 있었어."

- 고춘자

 

"여긴 원담 지음직한 곳이 없어. (원담은)지형이 돌이 많고, 잔돌이 많으면 그 돌 올려놔서 밭담 쌓듯 쌓는 거지. 물 들어서 고기 들어오면 그안에 물이 깊은 줄 알아서 놀다가 물 싸버리면 나가지 못하지. 그것이 원담이야."

- 송창수

 

| 멜국과 멜튀김 |

 

"우리 식구들만 해. 많이 하면 나눠서 먹어.

같이하자고 하면 같이해서 나눠 먹어. 멜이 아직도 많아."

 

"그릇 닮은 거 구덕 말고, 구덕은 물 흘러. 양철바가스 같은 거. 물 안 나오는 거에 지어서 걸어가. 오래 걸리지. 선흘까지 두 참이니까 몇 미터 될 건지 모르겠어. 함덕서 조천 두 곱만치. 멜 사러 오는 건 여자도 하고 남자도 해. 고무바가스는 안 나고 구덕이나 하려고 하면 가죽이나 대어야 돼. 옆으로 흐르는 거."

 

"선흘서는 멸치를 못 만들지. 젓하는 거밖에 못하는데, 싱싱할 때 하려면 함덕 사람들밖에 못 해. 함덕에서 멜장수가 팔러도 많이 가. 족바지 물흘러도 바깥으로 안 흐르게 가죽으로 대어서 지어. 그런데 이 멜로 잘 안되니까 그만두었는데 한 몇 년 사다가 이루꾸(いりこ)해서 많이 먹었어."

- 고춘자

 

"멜젓은 망데기에 하나 담으면 웬만한 집은 1년 먹다 남아. 멜이 다 소모될 때도 있지만 멜이 많이 들면 처리하기가 곤란해서 그냥 모래사장에 널어놓고 말리면 거름으로 쓰지. 산촌이나 뭐 특별 농사 짓는 사람들이 사가기도 해. 거름용으로. 워낙 저가니까 말이 사간다는 표현이지, 그냥 주기도 해. 그땐 조리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지금처럼 잘 말려서 뭐 이렇게 저장하는 방법도 몰랐어. 여하튼 생으로 처리를 해야 하니까. 지금은 뭐 아무리 잡아봐야 처리를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땐 좀 많이 나면 그렇게 처리를 못할 정도로 했어."

- 김용중

 

"이렇게 보면 멜이 막 솟과. 물속에 보글보글. 횃불 들어서 가면 막 쫓아오거든. 그러면 그물 들러서 양쪽에 있으면 횃불 든 사람이 싸악 들어올리면 이 그물쪽으로 하면 한 번에 세 구덕까지 들어와. 그거 내가 만들었어. 목매기라고 해. 작은 그물이라는 뜻이라고 하던데 확실한 뜻은 모르겟어.

두 사람은 대 달리고 한 명은 홰 들르고. 또 한 사람은 구덕 들르고 네 사람이면 돼. 난 우리 식구들만 큰 튜브 있잖아. 튜브 가져가서 거기에 구덕 놓고 해. 그렇지 않으면 포대에 담아서 거기서 거렸지. 스물한 살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고 봐야지. 이젠 안 해. 나 하던 그물 주니까 지금 우리 아들이 하긴 하는데, 재작년인가 많이 거려서 나한테 줘서 먹었어."

- 전연옥

 

"이루꾸 만들려고 하면 물 두 말쯤 상상상상 끓여서, 족바지 있는 사람은 족바지로 하고, 족바지 없는 사람은 납작한 나이롱 차롱 닮은 거 팔아. 조그마한 차롱으로 흔들면서 해. 소금 놓고 물 빠지면 멍석에 널어났어. 잔 멜. 굴ㄷ은 멜은 멸치국수 해 먹는 다시다로 써. 멍석에 말리는 것은 그날그날 다 말라. 볶아서도 먹고 국도 끓여서 먹고. 큰 멜도 배는 안 갈라서 그냥 이루꾸 해. 우리 이루꾸 할 때는 막 굵은 거는 안 나왔어."

- 고춘자

 

"(전연옥)우리 그물은 크니까 한번에 잘 다섯 콘테나씩 들어. 우리 식구들만 해. 많이 하면 나눠서 먹어. 같이하자고 하면 같이해서 나눠 먹어. 멜이 아직도 많아. 근데 여긴 옛날부터 모래판이니까 멜이 가을 들면 많이 들어와. 자갈 있는 데도 있는데, 한전 있는 데는 옛날에 많이 들었어. 거기 내가 소 할 적에 목초 비러 다니는데, 운 좋을 때 가서 보면 멜이 이만씩 쌓여 있어. 썰물일 때. 우리는 장난 삼아 운동 삼아 하는거니까 멜을 많이 잡으면 리어카에 실어서 팔러도 가고 또 아는 사람한테도 줬어.  멜 팔러는 여자들이 가.

그렇지 않으면 퇴비했어. 옛날은 팔지 못하면 밭에 조 갈려고 하는 조밭에 막 날채 뿌려버렸어. (전연옥)날차 주는 사람 있고, 썩형 주는 사람 있고."

 

"우리 같은 경우는 비료 뿌리듯 그냥 막 뿌려버렸어. 조 갈기 전에. 한 4월. 이젠 농사 안 지으니까 다 잊어버렸어."

- 송창수

 

"솥에 삶아가지고 그걸 말려. 이루꾸라고 해서 멸치 팔지. 삶으면 떠, 소금 놔서 막 바글바글 괴면 탁 들이치면 떠."

 

"(전연옥)물에 소금 놓고 해서 팔팔 끓여서 팍 놓으면 멜이 떠. 그때 싹 건져서 하는 거지. 완전 삶아내는 거야. 물에 싹 내려가면 떠. 고기가 뜰 때 건져내야 돼. 멍석 해서 말려. 이루꾸는 상인들 막 사러 와. 그거하는 줄 알면 집까지 막 와. 팔라고 하면 글쎄 뭐 좋으나마나 팔라고 해. 그 사람들은 영업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개날에 한번 동날에 한번 하는 사람이니까. 푼돈이주게."

- 송창수

 

| 갈칫국과 갈치잡이 |

 

"갈치는 조려서 먹고 끓여서도 먹어. 갈친 몸뚱이하고

대가린 소금젓 했다가 팔월달 촐(띠)밭에 고사릿불에 구워서

점심 먹을 때 먹으면 최고급으로 쳤지."

 

"갈치는 조려서 먹고 끓여서도 먹어. 갈친 몸뚱이하고 대가린 소금젓 했다가 팔월달 촐(띠)밭에 고사릿불에 구워서 점심 먹을 때 먹으면 최고급으로 쳤지. 전에는 그렇게 해도 이젠 그렇게 안 해. 옛날엔 먹을 거 없으니까 촐밭에 가면 고사리불 와랑와랑한 데에 푹 들이쳐서 구우면 불티는 대작대작 붙어도 꺼내서 먹었어. 털어도 맛 좋아. 짭조름하게 해서 먹어도. 이젠 대가리 먹지도 안 해. 다 던져버리지. 옛날같이 갈치 대가릴 먹고 잇으면 눈이 밝지. 아무것도 생선 대가리, 생선 눈 먹으면 눈 밝다고 해. 간 먹으면 간 좋다고 하고.

- 강계화

 

"반찬은 어머니가 갈치를 사와. 갈치 낚으면 꿰어서 팔러 와. 팔면 그걸 우리 어머니가 사서 이만큼 소금 했다가 처음 물은 걸러내고 다시 소금해서 팍 묻어버려. 그렇게 해서 먹을 때마다 하나씩 씻어서 밥솥에 쩌서도 먹었어. 아무것도 안 놔서 요만한 양재기 있잖아. 어머니하고 나만 먹을 거니까. 갈치 놔서 고춧가루 고추 조금 썰어 놓고 마늘도 조금 놔서 밥솥 안에 놔서 쪄 먹어. 땔감으로 때서 잉걸불에 구워도 먹지.

우리 어머닌 나무 때어나면 그 불 그져가서 그 잉걸에 고기 구워 먹었어. 잉걸에.

난 우럭같은 거 배 갈라서 소금 했다가 짭짤하게 말려서 잉걸에 구워 먹으면 그것이 맛좋아."

- 김이자

 

"옛날에는 갈치도 흔해서 잘 먹었는데 불 피우던 잉걸에 갈치를 구워 먹으면 맛잇어. 갈치는 한림 쪽 바다보다는 서쪽 바다로 나가서 한치잡을 때 같이 잡아와. 그리고 관탈섬에 가서 살면서 갈치잡이를 하기도 했어."

 

| 갈치 어장 |

 

어느 정도 위치까지 나가면 배 밑으로

갈치 떼가 보이는데 이를 살피며 자리를 잡는 조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작업을 한다.

 

"난 갈치조림도 고추장 안 놓고 간장, 소주 놓아. 난 간장 놀 때 소주 놓고 식초 조금 놓고 설탕도 기본 좀 놓고 마늘은 많이 넣어야 돼. 뭣이든지 마늘은 많이 넣어. 청량고추 얼큰하게 조금 놓고, 고춧가루 양념해서 넣지 말고 파 놔서 얼마 있다가 고춧가루 놔. 고추장에 간장 놓고 하면 풀풀해서 국물 맛이 없어. 항상 감자 놓고 무 놓고 해서 바글바글하면 그 위에 갈치 놔서 바글바글하면 그 위에 파 놔서 얼마 있으면 고춧가루 살짝 놓으면 차박차박하고 국물도 풀풀 안 하고 맛있어. 어떤 집에는 가서 보면 닉닉하더라고. 미원 놓는 것은 기본만. 어떤 집에 가서 보면 미원 너무 많이 노니까 닉닉해."

- 김이자

 

<갈치 낚그는 소리>

 

무러가라    무러가라    강갈치야    무러가라

어족님네    들어오라    이네놈의    낚시에는

 맛있는        닉껍이여    멩지갈치    비단갈치

   바다멀리    물러가곡    사모배기    열두점짜리

버덩갈치    큰놈이랑    내낚시에    물어도라

   한술에는    두머리씩    두술에는    서너머리씩

무러간다    무러간다    숙숙숙숙    무러간다

올라온다    올라온다    두머리씩    올라온다

 이네놈의    머정인가    우리배의    영급인가

 하루밤에    두세짐만    낙그게       하여줍서

- 윤경로, 《향토강정(개정증보판)》

 

"옛날 잔치 때 교자상을 보니 좋은 옥돔을 해서 간장에 고추장을 되직하게 해서 통째로 튀겨서 내놓는 거라. 난 아고 저 좋은 재료를 가지고 왜 쇠똥 싼 것 식으로 그렇게 할까 했었어.

우리 친구 딸 약혼식에 가서 내가 옥돔을 꿰고 양념 만들어서 약간씩 지단 놓고 해서 먹기 좋게 싹 만들어 내놓으니까 사돈집에서 어떤 사람이 누가 머리를 써서 이렇게 만들었냐고. 어디 가든 교자상에 옥돔을 통째로 내놓으니까 먹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젓가락으로 먹게 만들었다고. 10만원을 탁 내놓더라고. 이제는 식당으로 가서 하지만, 옛날엔 저런 좋은 음식 가지고 미안스럽게 먹지 않게 만드느는가 했어. 통째로 크게 내놓는 음식을 어떻게 먹어. 젓가락만 가면 먹을 수 잇게 해야지."

- 김자량

 

"건옥돔죽은 그냥 옥돔 씻어서 냄비에 통째로 넣고 끓여서 익히면 육수도 맛좋게 잘 나와. 살도 또렷또렷해지면 살하고 뼈도 따로 추려. 쌀을 참기름에 넣어서 볶다가 쌀이 퍼지면 옥돔 삶아진 거 놔서 끓이면 비린내도 안 나고 죽 중에 제일 맛있어. 요샌 옥돔 회도 해 먹고. 구이, 조림, 강회로 무쳐서 먹어도 되고, 옛날엔 강회로 먹진 안 했어."

 

"마른 옥돔은 국. 그건 생옥돔으로는 미역이나 이런 거 놔서 국 끓이지만, 건옥돔국은 미역하고 무. 겨울에. 막 바다가 세어버리면 생선이 안 날 때 있잖아. 제사 때에도 그러면 반드시 무하고 미역하고 같이 놔서 끓이면 아주 맛있거든. 소금도 덜 들어가고 비린내도 안 나고, 옛날엔 쌀뜨물해서 했어. 옛날엔 옥돔을 말려놓으면 기름이 펴. 그런 걸로 국 끓이면 노란 게 떠. 그건 성하지 않은 거야.

옥돔은 잘 말려서 보관된 거, 요새는 냉동실에 보관되니까 안 그러지. 이제는 맹물로 해도 그런 현상은 안 일어나. 산패된 생선을 가져와서 요리하면 물에 넣으면 노랗게 뜨거든. 그러면 그 노란 거 걷어서 먹고, 그때는 미역하고 무 넣으면 맛 좋다고 막 먹었어. 요새는 옥돔국도 그냥 밋밋하게 끓이면 아이들은 잘 안 먹어. 나이 든 사람들은 맛있다고 먹고. 고춧가루나 고추장 들어야 먹고. 제주도 음식은 본래 고춧가루가 없어. 그러다보니 조금 넣는 척하고 안 놔서 먹고 이랬어. 요새는 그런 국 끓여도 고춧가루 넣고 먹을 사람 먹으라고 하지.

제주도 음식은 담백하고 만드는 것도 단순하고 그러다보니 음식이 주식부터가 보리 먹고 조 먹고 하다보니까 거칠어. 거친 음식을 씹다보니 체내에 들어가서 좋은 작용도 하고 제주도 음식은 ㅈ자연 음식이다 얘기할 수가 있어."

- 김지순

 

| 담백한  옥돔요리 |

 

어르신들은 마른 옥돔으로 가능한한 양념을 하지 않고 만드는 것을

제대로 된 옥돔요리라 말한다. 과거에는 제주 음식에 고추장이나

고춧가루 등 과한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담백한 요리였다는 것이다.

 

양하꽃

- 춘자에게

 

허영선

 

보거라 춘자야

단언컨대 이 에미

밥상 위에 그 향 한번 올린 적 없었다

쫑긋쫑긋 노란 애기똥풀 눈뜨는 사월

덤벙진 우영팟 연초록 차마 눈 못 뜨는구나

 

울지마라

마을은 혼수상태 그 순간

파릇파릇 양하의 집에 숨은 그 순간

그것이 네 여린 가슴 한번만 덮어주었더라면

조랑조랑 작은 두 개의 구덩이에

오늘같은 붉은 꽃 피우지 않았으리

양하꽃대 한사코 올라오는 우영팟

네 겁 질린 눈

에미 치마말기에 사근대던 숨소리

 

얼마나 조심했는지 몰라

어디 새 하나 기척 하나 없었지

바스락 댓잎소리 스치던 푸르딩딩 올레에

양하밭 폭폭폭 후비던 그날 이후

다신 밭을 옮길 수 없었다 춘자야

일곱 매듭 아직도 도리도리

돌리지 못한 에린 것아

에미 홀로 양하밭 틈새에서

한 톨 콩처럼 튕겨 나와

웅얼거리는 동박새 눈알같은 네 눈망울 찾앗다

봄눈의 양하 너른 이파리 속에서

네 한 다발 머리카락 찾앗다 그날 이후

서녁으론 다시 가지 않았다

- 중략

 

"3월 보름에서 4월 보름 사이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간단한 그릇(차롱 등)을 들고 고사리를 꺾으러 들로 나간다. 이때 꺾어온 고사리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건져낸 후 그늘에서 말린다. 그러면 색깔이 까맣게 되며 실제 크기의 1/2 정도로 줄어드는데 이것을 보관해두었다가 제사 때 제물로 올린다. 제일이 되면 고사리를 물에 담가 불린다. 바싹 말려 두었던 고사리는 물을 먹으면 부드럽게 된다.

묘 위에 자란 고사리는 되도록이면 먹지 않으며, 제사에는 쓰지 않는다. 고사리를 빼지 않는 이유는 고사리가 돋아날 때 꺾고 또 꺾어도 아홉 차례나 재생한다고 해서 그처럼 자손이 번성되기를 바라는 뜻에서라고 한다."

-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도의 식생활》

 

 

 

제주도 육개장은 육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색도 다르고 만드는 법도 다르다.

아직도 제주 음식점에는 전통 육개장을 만들어 파는 곳이 적지 않다.

그만큼 제주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다.

 

"고사리는 곶에서 날것으로 받았어. 삶지 않은 거. 그러면 거기서 꺾어서 팔고 쌀을 사서 애기 죽 해주고, 밥 해줬어.

고사린 볶았다가 죽도 쑤어 먹었어. 쌀을 놓고 쑤다가 고사리 쏨쏨 썰어서 놔. 국은 육개장이라고 맛 좋아. 그저 고사리해서 문질러놓고 가루 타서 놓으면 육개장 맛이야. 소고기나 돼지고기 놔야 육개장이지. 명절이나 제사 때에는 볶아 놓고, 전 지질 때에도 하나씩 놔.

글쎄 이건 말도 소도 안 먹어. 이상한 물건이아. 그런데 꼭 고사리나 한 가지 먹을 철 돌아와. 말 소 안 먹어. 전부 골라내. 그런데도 귀신을 대우하니 이상해.

- 한신화

 

"고사리 난도질 해서 그걸로 전 부치는 사람도 있어. 모슬포 사람은 그 고사리로 전을 잘 부치더라고. 전 부치는 걸 좋아했어. 다 지역마다 특수한 게 있어. 난 육개장이 가끔 좋아 뵈여."

- 김자량

 

"삶은 고사리를 절구에서 살짝 두들겨주면 줄기가 찢어지면서 부드러워진다. 다시 국물에 넣고 푹 끓이면, 고사리 전분이 나와서 국물이 걸쭉해지는데 여기에 메밀가루를 풀어 넣어서 더 걸쭉해지게 한다. 국간장으로 간을 한다. 봄철에 햇고사리로 끓이면 더욱 맛이 있고, 늦봄에 움터오는 양애순을 잘게 썰어 넣거나, 꿩마농(달래)을 썰어 넣으면 향기가 더욱 좋다.

-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도의 식생활》

 

"난 육개장을 잘해져. 제주도식 육개장이야. 가운데 (돼지) 뼈다귀해서 등뼈를 많이 넣고 달이다가 잘 씻어서 그걸 푹 고아. 오래 걸려. 맛도 좋아.

그거를 식히면 기름이 위에 떠. 그걸 깨끗이 걷어두고 다시 두 번째 고아. 푹하게 고아. 참기름 많이 들어가야 좋아. 그렇게 해서 이 고사리를 깨끗이 씻어서 압력솥에서 삶으면 잘 돼. 그걸 잘게 썰어서 얇게 그냥 갖은 양념 해. 양파를 갈아서 넣고 대파도 넣고 잔파도 넣고 파종류를 다 넣고, 마늘도 빚어 넣어. 간은 소금이나 조선간장 넣어.

옛날엔 기름 없는 고기로 했지. 큰일 땐 돼지고기 삶아낸 국물로 하고, 기름은 깨끗하게 걷어내야 해. 육개장 해서 노인당에도 가져가면 좋아해."

- 김화삼

 

| 고사리 |

 

최근 제주도 고사리가 맛있다는 유명세를 타면서

매해 5월 고사리 축제가 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사리를 꺾으러 일부러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고사리 관광'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열세네 살 때에. 꿩마농 캐러 구덕 옆에 끼고 우리가 어린 때에도 그렇게 다 했어. 보진 못하면서 큰 마농 해 가면 그 꿩마농 내 꺼. 내 꺼니까 캐지말라고. 그렇게 하면 '아이고 꿩마농 신화 거라네. 어느 때 봤는지.' 그렇게 하면서 캤어. 그러면 한 구덕 캐지. 그거 해서 물에 가서 '묵은 복덕 벗으라, 새 복덕 입져주마. 묵은 복덕 벅으라. 새 복덕 입져주마.' 그거 잡아서 이렇게 해가면 궂인 건 빠져. 집이 와서 또 다듬아."

- 한신화

 

"꿩마농은 캐어다가 김치처럼 무쳐도 먹고, 달래는 국 끓여 먹고 데쳐 먹었지."

- 양오순

 

"꿩마농 소금물에 삼삼하게 절여서 오래오래 며칠이고 내버려. 그러다가 먹으면 맛 좋아. 소금 간 맞게 해서 돌 짝 지둘러. 향기가 그대로 있어. 그것만 건져 먹어봐. 음식은 정성껏 먹어야 해. 정성껏 만들고."

- 김화삼

 

| 사만이 |

 

모든 굿에서 액막이를 할 때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멩감본풀이를 보면 당시 노루와 꿩을 사냥하던 모습과 그 뭎속을 알 수 있다.

 

옛날 주년국 땅에 소사만이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부인은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에게 주며 장에 가 팔아 아이들 먹을 쌀이나 사오라고 하였다.

사만이는 장에 가 머리를 팔아 석 냥을 받고 쌀을 사러 다니다가 조총을 하나 샀다. 이것으로 사냥을 하면 쌀도 나오고 돈도 나온다는 장사꾼의 말에 솔깃해서 사 온 것이다.

어느 날 사만이는 들판을 헤매다가 백년 해골을 발견하고, 이것이 자기 집안 조상이 아닌가 하여 집으로 모셔다가 위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사냥이 잘 되어 사만이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사만이가 서른 세 살이 되던 해, 어느 밤 꿈에 백년 해골이 백발 노장으로 나타나서 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저승 삼차사가 내려왔지만 사만이가 차려준 굿 정성까지 받고 나니 사만이를 잡아갈 수가 없었다.

삼차사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가 '사만이 정명 삼십(三十)'이라 쓰여 있는 저승 문서의 열 십(十)자에 한 획을 비껴 그어 일 천(千)자를 만들어놓았다. 이리하여 사만이는 3천 년을 잘 살았다 한다.

 

"그자 눈 오라가면 옛날은 그 사농한다고 노리(노루) 잡아먹으려고. 곶에 가서 막아서 노리 넘어감직한데 코를 놓거든. 그렇게 해서 노리도 잡아 먹어. 코는 그때 당신 칡. 그 이상해. 칡이 이만큼 두껍거든. 그런데 그거에 들어가는데. 다른 것에 뭐 쇠줄같은 거는 가늘어서 놓은 줄 모르거든. 근데 쇠는 냄새가 나는지 안 들어. 해봤는데 쇠줄로는 안 들어. 칡이 제일 잘 들고 그후에는 신사라(신서란).

잡으면 반찬 해먹주. 옛날 노리 잡는 식은 혼자만 잡아먹다가는 뭐 소나 말이나 잡아 먹엇다고 해서 막 수군수군하거든. 그러니까 하나 잡으면 그 동네 다 갈라 먹어야 돼.

- 송두옥

 

"대개 '꿩사농'과 '노루사농'을 하고, 아이들은 오리나 참새 등을 덫(태기)을 놓아 잡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눈우읫사농'(적설기 사냥)이라고 하여, 동네에서 '사농패'를 모아 꿩과 노루 사냥을 했다.

주로 다랑쉬오름 근처, 돋오름이나 한 머을곶 등지가 좋은 사냥터였는데 사냥감도 풍부한 편이었다.

인원은 딱히 몇 명이라고 정해진 바가 없이 "오라, 사농가게" 하고 누군가 눈 온 날 아침 골목을 돌며 소리치면, 바지에 대님을 치고 '윤노리 막댕이' 하나씩 둘러메고 나왔는데, 개가 있는 집에서는 개를 데리고 나왔다.

사냥은 전적으로 남자의 모임이다. 사람이 모이면 그 자리에서 패장을 정하여 그날 할 사냥 전반의 지휘권을 맡긴다.

각자 역할이 분담되면 맡은 직책, 그러니까 망보는 이는 높은 동산을 찾아 오르고, '훈누는' 몰이꾼은 꿩이나 노루가 숨었음직한 덤불이던지 머들을 들쑤셔 짐승을 '훈누고' 잡은 짐승은 운반꾼이 져 나르게 된다.

그날 사냥에서 노획한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분배 양식에 의해서 나누게 되는데, 이를 분육, 혹은 분짓이라고 한다. 분육의 원칙은 나이든 어른에게 살코기를, 나이가 어린 순으로 차츰 살과 뼈의 비율이 뼈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 《평대리지》, 1990

 

"동네 사람들이 들에 사농가자 하면 짝 가는 거라. 개만 데려서 나가. 저기 서고 여기 서서 군인들 포위하듯이 다 남자들이 딱 서. 개는 가운데 한 몇 마리를 놔. 꿩은 풀밭에 앉아 잇으면 개가 흔들면서 그걸 물어오는 거라. '야, 느 앞이 보라. 느 앞이 보라. 저쪽으로 달아난다.' 그러니까 '느 앞이 보라. 느 앞이 보라' 했거든. 그런데 '느 아비 보라. 느 아비 보라'로 들리는 거라.

사람이 저만이 포위 선 사람한테 '느 앞이 간다' 하는 소리로 개가 꿩을 물어서 그쪽으로 가. 풀이 이렇게 많으니까 말 안 해주면 모르거든. 그러니까 '느 앞이 보라, 느 앞이 보라' 하는 거라. 그러면 나중에 들은 사람들은 '느 아비 보라'로 들은 거라.

그거 가져다가 생으로 해서 제사가 디면 숯불을 살려서 기름장 발라서 구워놓으면 맛이 있어. 또 제사가 멀리 있으면 그놈을 말려서 놔두었다가 쓰기도 해. 그날 제사 때 쓸 수도 있지. 제사 며칠 앞이 있다 하면 그놈을 잘 말려서 고지에 꿰어서 저건 제사에 쓸 거라고 하는 거지. 제삿날에 조금 찢어서 그것을 떡반을 하는 거라.그거 주워먹는다고 악, 맛ㄷ 좋아. 너무 좋아.

글더니 어느 날 시대가 바뀌어지니까 꿩고기 먹으면, 산신령 같은 거니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될 수 있ㅇ면 먹지 않으려고 하는 거라. 또 국가에서도 꿩을 함부로 잡지 못하게 했어.

나 열 살 때 보고 들은 거라. 여자가 그런 데 가지도 안 하지만, 우리 하르바님네가 했던 오육십년 될 때 그거지. 이제는 시대가 당최 하지도 않지. 여럿이 가서 나눠 가져서 그날에 와서 잡아와서 소비시켜버리는 사람도 있고, 제사에 쓰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제사에 쓰지도 안 해."

- 오옥주

 

| 꿩 |

 

노린 내려갈 땐 하르바님 하르바님 하당 올라갈 땐

내 아들놈 내 아들놈 한다.

 

"이승만 시절에 먹어볼 거 없으면 4 · 3사건 난 후에 노루나 하러 가자 했어. 먹어볼 건 없으니까 이놈의 노리나 잡아다가 먹주 해서 코 오육백장 해서 산에 가. 올가미 해서 놔두면 잡아다가 먹어났어. 먹을 거 없으니까 산에 가서 나무 하고 숯 캐고 겨울내내 토굴 파서 그 굴속에서 나무해서 숯 묻어다가 제주시에 가서 팔아서 쌀 받아다가 먹었어."

 

"노루는 그대로 불고기도 해서 먹고 꿰어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어. 벗들하고 여러이 장난으로 갔주. 잘하면 하나 잡았어. 그러다가 산 노루도 앞에서 잡아지니까 한참 지어서도 오고, 잡아서 갈라서도 먹고. 이승만 시절이주."

- 강계화

 

"꿩엿은 몸이 막 허약할 때, 옛날은 폐 나쁜 사람 많았지. 폐 나쁜 사람은 바짝 마르지. 온몸이 기력이 없으면 꿩엿을 해서 그걸 먹여야 좋다고 해서 먹였어. 닭엿도 하고, 돼지고기도 엿 하고, 호박엿, 감자엿, 엿 안 하는 것이 없어. 촌에서는 우린 항시 할머니네가 엿을 해주면 떡을 먹을 때도 엿을 찍어 먹고, 설탕이 없을 때니까. 집에서도 얼마든지 엿을 할 수 있어. 보리 갈아서 보리로 엿기름 기르지. 엿기름 길러놨다가 엿기름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몸에 좋다하는 것은 했어."

- 오옥주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를 현지조사한 이즈미 세이치의 기록에도 가죽옷이 등장합니다.

 

"제주도 풍속의 하나로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거론하는 가죽옷은 개, 너구리, 노루 가죽으로 만든다. 그 당시(1900년 경)도 섬 전체에서 널리 볼 수 잇었던 수렵은 대부분은 겨울 농한기를 이용한 사냥으로, 고기를 얻기보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한 가죽을 얻을 목적으로 행해졌다."

 

제주에는 노루가 많습니다. 천적이 없는 조건에서 노루가 좋아하는 한라개승마, 제주황기, 사철나무, 송악, 마삭줄, 동백나무가 지천이라 노루에게는 천국입니다. 사냥풍습이 사라진 조건에서도 사냥 흔적은 생활 곳곳에 남았습니다.

- 제주대박물관, 《제주의 땅》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