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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2. 16:2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8 왕초보 화엄경박사되다

 

정병조 지음

2012, 민족사

 

 

대야도서관

SB071828

 

223.55

정44ㅇ

 

화엄경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반야와 유식사상을 밑거름으로 하여 여래강사상이 싹트고 이것을 근본으로 하여 화인의 우주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또 화엄은 훗날 중국 선사상을 형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즉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완성판이자, 고대국가의 지도원리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 맨대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못하노니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어다

 

화엄에서는 수없이 많은 세계를 언급하고 잇습니다. 법문이 설해진 처소는 엄청나게 많은 장소이며, 또한 많은 횟수를 거듭하여 설해집니다. 화엄의 가르침을 얻은 후에 바르게 수행을 하려면, 편안하게 따라 들어가 부처님 법계의 미묘한 장엄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속과 함께하되 물들지 않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항상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 본문 중

 

정병조

1970년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2년간 인도 네루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1986년 동국대 대학원 철학박사학위를 취득, 1980년부터 2011년까지 동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사)한국불교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동국대 도서관장과 사회교육원 원장, 교무처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1년 정년퇴임했다. 2011년 현재 금강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며 동국대 명예 교수, 불교 연구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정병조의 불교강좌』, 『인도철학사상사』, 『지혜의 완성』, 『불교와 인도고전』, 『인도의 여정』, 『전환기의 한국불교』, 『정병조 불교입문』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역해 육조단경』, 『현대불교입문』, 『야스퍼스의 불교관』, 『불교의 심층심리』가 있으며, 「십일면관음의 연구」, 「한중불교교류사연구」, 「불교의 경제윤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또한 2010년 『성사원효(Master Wonhuo)』 및 『한국불교사상사(History of Korean Buddhism)』 등 영문판을 출간하였다.

 

삼보귀의三寶歸依

 

이 책을 불보살님 전에 올립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uddham saranam gacchami

dhammam saranam gacchami

samgh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buddh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dhamm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samgham saranam gacch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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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iyam pi samgham saranam gacchami

 

차례

 

● 글머리에

 

제1장 화엄경의 구성

    1 화엄경의 출현과 번역

       화엄경과 비로자나불

       번역의 종류

 

   2 화엄경 설법의 의미

       제목에 나타난 중심사상

      화엄의 부처님

 

    3 지상과 천상의 설법

       화엄경의 전개 방식

       설법의 주요 내용

 

제2장 화엄경 각 품의 내용

    1 부사의(不思議)한 믿음

       첫 번째 설법

          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2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3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4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5 화장세계품9華藏世界品)

          6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수행의 공덕

 

    2 변치 않는 믿음과 지혜의 열 가지 설법

       보광명전의 설법

          7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8 사성제품9四聖諦品)

          9 광명각품(光明覺品)

          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1 정행품9淨行品)

          12 현수품(賢首品)

        입법계품의 선재동자

 

    3 진여의 세계에 머무는 미묘한 열 가지 설법

        수미정상회 도리천궁의 6품

          13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14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15 십주품(十住品)

          16 범행품(梵行品)

          17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18 명법품9明法品)

        선재동자의 구도여정

 

    4 굳센 서원과 실천행을 위한 열 가지 법문

        제4회 야마천궁회의 10행(十行) 설법

          19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21 십행품(十行品)

          22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10행(行)의 의미

 

    5 중생과 보리, 진리에 대한 회향의 법문

        도솔천궁의 10회향 설법

          23 승도솔천궁품(昇兜率天宮品)

          24 도솔궁중게찬품(兜率宮中偈讚品)

          25 십회향품(十廻向品)

      10회향의 의미와 구도

 

    6 10지(十地)설법

      타화자재천궁의 설법

         26 십지품(十地品)

      10현과 6상

 

    7 보광명전에서 재차 설법함

       등각 · 묘각의 법문[인행과 불과의 원만함]

          27 십정품(十定品)

          28 십통품(十通品)

          29 십인품(十忍品)

          30 불아승지품(佛阿僧祗品)

          31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

          32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

          33 불부사의법품9佛不思議法品)

          34 여래십신상해품(如來十身相海品)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

          36 보현행품(普賢行品)

          37 여래출현품9如來出現品)

      등각 · 묘각위의 선지식

      보살도의 총결

          38 「이세간품(離世間品)」

 

    8 급고독원의 설법

         39 입법계품(入法界品)

 

● 후기

 

大 - 법계는 허공처럼 넓고 끝없어 항상하고 모든 세계를 포함함.

方 - 형상은 법계와 같아 반듯하고 삿되지 않으며 평등함.

廣 - 작용은 하늘처럼 두루하여 막히거나 장애 될 것이 없음.

佛 - 심오하고 미묘한 화엄법계의 이치를 깨친 분.

華 - 수행결과[佛果]를 맺는 수행공덕[因行].

嚴 - 인행(因行) 즉 수행의 꽃으로써 불과(佛果, 부처님의 경지)를 장엄.

經 - 오묘한 뜻을 수용한 바다.

 

불신(佛身)의 무변(無邊)함은 허공과 같고

지혜의 빛, 맑은 음성도 또한 그러하도다.

부처님은 제법에 장애가 없으니

마치 달빛과 같이 모든 것을 비춘다.

 

집금강신(執金剛神) - 법과 정의를 수호하며 무너짐이 없는 응신(應身)

신중신(身衆神) - 모든 행이 원만하여 정도(正道)를 따름

족행신(足行神) - 무량한 부처님을 섬기며 이에 무량한 몸

도량신(道藏神) - 대원으로 장엄하고 널리 공양을 행함

주성신(主城神) - 심성(心城)을 잘 수호하여 국토를 엄정히 함

주지신(主地神) - 깊고 넓은 원력을 중생을 따라 성취

주산신(主山神) - 선근을 쌓아 세상에서 벗어나 수승하고 빼어남

주림신(主林神) - 지혜의 줄기와 행의 꽃을 법문을 설하여 널리 펼침

주약신(主藥神) - 중생의 근기를 알아 구제하고자 법의 약[法藥]을 사용

 

만약에 나와 부처가

평등한 상에 안주함을 보고

그가 머무르지만 머무르는 바 없이

멀리 일체의 유상을 떠나 있으며

색(色)에나 수(受)에 수(數)가 없으며

상(想) · 행(行) · 식(識)에도 또한 그러한 것을

능히 있는 그대로 아는 자라면

그는 바로 대모니(大牟尼)로다.

보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보여진 법이 또한 따로 있지 않으니

일체의 법을 이렇게 분명히 알면

그는 세간을 능히 비칠 수 있도다.

일념으로 보기를 제불(諸佛)이

세간에 출현하지만

사실은 생긴 일 없음을 알면

그 사람이야말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지리라.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또 패괴(敗壞)함도 없이

만약 이와 같은 상을 전(轉)하면

그는 곧 무상인(無上人)이로다.

하나 안에서 무량함을 깨닫고

무량한 것 안에서 하나를 깨닫노니

전전(展轉)하여 생기는 것이 실(實)이 아니기에

이를 아는 자는 두려울 바가 없느니라.

- 문수사리보살의 게송 중에서

 

고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苦)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핍박이라고 하고 변해 달라짐이라 하고 반연이라 하고 모임[聚]이라 하고 가시라 하고 뿌리를 의지함이라 하고 허망하게 속임이라 하느니라.

 

고집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의 집(集)이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속박이라 하고 망그러짐이라 하고 애착하는 뜻이라 하고 망령된 생각이라 하고 가서 들어감이라 하고 결정이라 하고 그물이라 하느니라.

 

고멸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가 멸(滅)하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다툼이 없음이라 하고 티끌을 여윔이라 하고 고요함이라 하고 모양 없음이라 하고 없어지지 않음이라 하고 제성품이 없다 하고 장애가 없다 하고 멸(滅)이라 하고 자체가 진실함이라 하고 혹은 제 성품에 머문다 하느니라.

 

고멸도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가 멸하는 도(道)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일승이라 하고 끝까지 분별이 없음이라 하고 평등이라 하고 짐을 벗는다고 하고 나아갈 데 없다 하고 성인의 뜻을 따름이라 하고 신선의 행이라 하고 혹은 10장(藏)이라 하느니라.

 

서원컨대 빈궁한 사람이

밤과 낮으로 남이 가진 보화를 헤아리듯이

자기는 반전도 가진 것 없이

남의 말 듣기만 하는 것이 역시 그와 같도다.

 

어느 때나 중생들을 즐겁게 하고

국토를 장엄하고 부처님 공양

바른 법 받아 갖고 지혜 닦아서

보리를 증하려고 발심했으며,

 

믿고 아는 깊은 마음 늘 청정하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오며

교법이나 스님께도 또한 그렇게

정성껏 공양하려 발심하리라.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畵師]와 같아

갖가지 5음(色, 受, 想, 行, 識)을 그리네.

일체의 세계 중

어느 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가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이 또한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가지에는 차별이 없도다.

心如工畵師 畵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 10행(行)

● 환희하는 행[歡喜行]

- 목숨과 재물과 법의 세 가지 보시로써 나와 남을 기쁘게 하는 행

●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는 행[饒益行]

- 율의의 좋은 법으로써 중생을 삼취정계로써 거두어서 균등하게 요익하게 하는 행

● 거슬러 거역함이 없는 행[無違行]

- 만물의 이치를 인정하고 따라서 어기는 바가 없는 행

● 굴복하여 물러남이 없는 행[無屈撓行]

- 도에 정진하는 데 물러섬이 없는 행

● 어리석음의 어지러움을 떠난 행[離癡亂行]

- 정혜가 바르고 밝아 미혹하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행

● 잘 나타나는 행[善現行]

- 반야가 원만하게 빛나 경계와 지혜가 매우 밝은 행

● 집착이 없는 행[無着行]

- 부드럽게 조화하여 중생세계를 건너되 마음이 집착하는 바가 없는행

● 얻기 어려운 행[難得行]

- 대원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

● 좋은 법의 행[善法行]

- 미묘한 힘으로써 법을 설해 만물의 궤범이 되는 행

● 진실의 행[眞實行]

- 진실지(眞實智)를 체달하여 일체를 진실되게 살펴보는 행

 

보살의 10무진장(十無盡藏)

신장(信藏) · 계장(戒) · 참장() · 괴장(愧) · 문장(聞) · 시장(施藏) · 혜장(慧藏) · 염장(念藏) · 지장(持藏) · 변장(辯藏)

 

● 동방의 금강당(金剛幢)보살

- 고요하면서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 항상 고요함

● 남방의 견고당(堅固幢)보살

- 능히 들어가는 일을 보이고 나아가 닦기를 권함

● 서방의 용맹당(勇猛幢)보살

- 부처님을 뵙고 ㅂ버문을 듣개 되니,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구함

● 북방의 광명당(光明幢)보살

- 교화의 작용은 넓음, 교화 작용은 깊음, 교화 작용은 깊고 넓음

● 동북방의 지당(智幢)보살

- 믿기를 권하니 그 믿음의 수승한 덕을 찬탄함

● 동남방의 보당(寶幢)보살

- 생각하기 어려우니 불가사의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함

● 서남방의 정진당(精進幢)보살

- 모든 부처님의 몸이 한결같고, 두루하며, 일체가 모두 부처님의 몸

● 서북방의 이구당(離垢幢)보살

- 여래는 세간을 청정케 하고, 여래 스스로 청정함

● 하방의 성수당(星宿幢)보살

- 여래의 덕은 두루하며, 중생들에게 응함이 자재하고 자취는 묘함

● 상방의 법당(法幢)보살

- 부처님과 법을 찬탄하여 보고 듣기를 권함

 

■ 10현문(현수 법장스님 『華嚴經深玄記,』 권1)

 

1.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10현문의 총설이라고 할 만한 부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더불어[同處同時] 구족하여 드러나는 무진연기의 총체적인 모습을 밝힌 것입니다.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한다는 것은, 법계의 사물은 시 · 공간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동시에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마치 둥근 거울에 시방의 삼라만상이 다 비추임과 같습니다.

 

2.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하나[一]와 다수[多]가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법문입니다. 존재는 서로 용납하고 섭입(攝入)하여도, 장애되지 않고 하나하나 그대로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해 본다면 한 방에 100개의 등을 켰을 경우, 그 불빛이 제각기 방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불빛 하나하나는 빛을 두루 펼치지만 서로 간에 걸림이 없습니다.

 

3.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일체의 모든 법은 원융하고 무애하고 자재합니다. 이 법문의 요체는 모든 법이 상즉(相卽)하여 자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호수에 한 물결이 없으면 한 물결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물결이 없으면 한 물결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없다는 뜻에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전체가 없으면 하나가 없다는 뜻에서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고 표현합니다.

 

4.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인다라망[帝釋網]이란 제석천에 있는 보배로 된 그물입니다. 제망의 영상이 겹겹으로 서로 들어가도 걸림이 없는 문이 되겠습니다. 날줄과 씨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그물을 만들고 작용하듯이, 이 법계라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법계의 그물은 낱낱의 그물코마다 보주를 달고 있는데, 그 보주는 다른 모든 그물코에 달려 있는 보주의 영상을 비추게 됩니다. 보배 구슬 속에 우주의 그물 전체가 비춰지니 하나의 존재에 우주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잇는 도리를 설명합니다.

 

5.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미세하게 서로 받아들여 안립(安立)하는 법문입니다. 하나는 전체를 용납하고 전체는 능히 하나를 용납하는 융통 무애함입니다. 일과 다는 현상 그대로를 깨트리지 않고 그대로 일체의 관계를 가지기에 모든 것은 하나도 개성을 파괴하는 일이 없이 안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세상용이란 결국 하나와 전체가 상즉상입함이 미세하면서도 서로 용납하여 무애하는 의미가 됩니다.

 

6.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

하나의 사물을 여러 방면으로 관찰하여 경우에 따라 한 면이 숨어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각 방면이 동시에 서로 대립하므로 각 방면이 은밀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금으로 만든 사자상을 관찰할 때, 사자를 보면 금은 숨게 된다고 할 수 있고, 금을 보면 사자가 숨게 된다 할 수 있고, 금과 사자를 동시에 보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함께 이루어져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일체의 제법 작용이 넓고 좁음에 자재하여 걸림이 없습니다. 한 사물의 역량이 일체에 두루하여 제한이 없으면 광(廣), 일체에 두루하면서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협(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보시 수행할 때, 그 수행 측면에서 다른 나머지 바라밀을 모두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 갖추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실천행과 뒤섞여 없어지거나 감쇠되는 것은 아닙니다.

 

8.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삼세를 다시 셋으로 세분하면 구세가 되는데 여기에 이를 총괄하는 일념(一念)을 더하여 십세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십세의 법은 시간적으로 비록 선후의 차별이 있지만 결국 통틀어 본다면 일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융하여 서로서로 사무치게 들어가는 법문이며 원융자재하여 상즉상입하되 각기 전후 장단의 각별한 모양을 잃지 않는[異成] 특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차별의 현상계[事]를 의지[託]하여 법을 나타내 사람들에게 요해(了解)하는 지혜를 낸다는 뜻으로 현상계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상즉상입하는 무애자재한 연기실상의 법문은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렵지만 연기의 실상은 깊고 먼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 어디에나 연기의 실상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 법문의 요체는 결국, 오직 지혜로써 같고 다름[同別]에 자재하는 법계의 측면을 강조한 것일 수 있습니다.

 

10.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무진연기의 실상을 주반으로 나누어 보는 법문입니다. 여기서 주반이란, 연기하는 모든 존재라는 것은 결국 홀로 독립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의하는 관계 속에 짝을 지어 생성변화되며 한마디로 요약해 법계임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법을 주로 하면 다른 법이 그 짝[伴]이 되어 따르며, 또 다른 법을 주(主)로 하면 먼저 주(主)가 되었던 법은 다시 짝 중의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가 되고 짝이 됩니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 맨대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못하노니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 017 한국의 토종개

 

글 / 하지홍, 임인학●사진 / 임인학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7

 

082

빛12ㄷ 151

 

빛깔있는 책들 151

 

옛그림 / 삽살개 - 하지홍-------------------------------------------------------------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미생물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자연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 삽살개 보존회 부회장으로 삽살개에 관한 유전자, 혈통 연구와 함께 보존과 혈통고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삽살개의 모색 특징과 혈통에 관한 연구' 외 20여 편의 논문과 3권의 저서(공저)가 있다.

 

진돗개 - 임인학----------------------------------------------------------------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뒤 잡지사의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거쳐 지금은 현대정공 홍보실에서 일하고 있다. 글과 사진을 함께하는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진돗개, 삽살개 등 한국의 토종개에 대한 글쓰기와 사진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92년에 「애견기르기」(대원사 刊)의 사진을 맡아 출간한 바 있다.

 

|차례|

 

들어가는 말

옛그림으로 살펴보는 한국개

삽살개

    삽살개의 유래와 전설

    삽살개와 관련된 옛문헌과 이야기들

    천연기념물 지정 경위

    현대 생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한 삽살개 탐구

    체형, 성품 및 훈련 능력

    삽살개의 육종 방향

진돗개

    진돗개의 유래와 보호 과정

    진돗개의 표준 체형

    진돗개의 품성

    우수 진돗개 고르는 법

    진도 현지에서 개를 구입하고자 할 때

    도시에서 진돗개를 구입하고자 할 때

    주의해야 할 가짜 진돗개

    진돗개의 사육과 훈련

    진돗개의 번식과 종견 선정

    진돗개의 육종 방향

끝맺는 말

참고 문헌

 

 

▲ 진돗개와 삽살개  토종개는 그 나라 민족들에 의해 보존, 개량되어 길러 온 토착견으로서 나라마다 고유의 토종개가 있다. 우리나라의 진돗개나 삽살개도 우리의 대표적인 토종개로서 뛰어난 품성을 지니고 있다.

▲ 풍산개  맹수 사냥에 쓰일 정도로 용맹하고 날렵한 풍산개는 북한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 제주개  제주 축산개발사업소에서 보호, 사육하고 있는 제주개는 완전 멸종에서 간신히 벗어나 계통 번식을 통해 원형에 가까워지고자 노력중이다.

▲ 이암의 젖먹이는 개그림. 지본 담채, 73×4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암의 꽃과 새 그리고 강아지 그림. 지본 채색, 86×44.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경윤의 나무 아래서 뒤통수 긁는 개 그림. 견본 담채, 15.5×17.7cm, 간송미술관 소장.

▲ 어유봉의 앉은 개그림. 지본 담채, 63.5×37cm.

▲ 어유봉의 엎드린 삽살개 그림(모사도). 지본 담채, 63.5×37cm.

▲ 김두량의 뒷다리로 옆구리를 긁는 검둥개 그림. 지본 수묵, 23×26.3cm.

▲ 김홍도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 김홍도의 늙은 사자 그림. 지본 수묵.

▲ 신윤복의 앉은 개그림. 지본 수묵, 16×25.3cm, 간송미술관 소장.

▲ 장승업의 오동나무 아래서 하늘 보고 짖는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 조석진의 달밤에 웅크리고 있는 개 그림. 견본 담채, 26×14.5cm, 간송미술관 소장.

▲ 웅크린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47×63cm.

▲ 작자 미상의 맹견도. 지본 채색, 40.2×9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작자 미상의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34×2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작자 미상의 긁는 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9×51cm.(위)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6×38cm.(아래)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9×51cm.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6×38cm.(동그라미 안)

▲ 삽살개 가족. 지본.

▲ 들밥. 지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홍도의 경작도.

▲ 신윤복의 교접하는 개 그림

▲ 김득신의 짚신 짜는 그림

▲ 김익주의 응수도.  200여 년 전 그림으로 우리나라 옛 그림 가운데 진돗개를 닮은 개가 그려진 그림. 지본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삽살개  삽살개는 눈이 털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어수룩해 보이는 개이지만 의리와 충직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시추

▲ 페키니즈

▲ 황삽살개

▲ 청삽살개

▲ 충직한 삽살개  멀리서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힘차게 오솔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다.

▲ 청삽살개들

▲ 악돌이  1970년대 서울에서 종견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이 개는 1972년생으로 1974년 진도견보호협회 주최 품평회에서 최우수견으로 선정되었다.

▲ 중국 차우차우견  이 개는 혀가 보라색이므로 차우차우의 피가 섞인 진돗개는 혀에 보랏빛 반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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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016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8, 석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6312

 

911.05

이241조 1

 

석필 · 테마 역사 읽기

 

당쟁의 문을 열자.

외로운 왕과 강직한 선비들이 거기 있다. 조선 역사가 속속들이 보인다.

조선의 당쟁은 일본인들이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워낙 많이 공격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나는 조선의 당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노론에게는 우리 나라 유일의 성현으로 추앙받았으나 남인들에게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풍운의 정치가 송시열의 생애가 던져준 의문이 그 출발점이었다. 거기에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느낀 미진한 감정이 더해졌다. 장장 3백여 년에 걸친 당쟁의 현상과 내막을 내 안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어찌 조선 역사를 가르치겠는가 하는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그러나 역사는 죽어버린 화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다. 과거의 경험들은 찬란하면 찬란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유익함은 과거를 정확히 인식하여, 거기에 비추어 내일을 읽어낼 줄 아는 개인이나 사회만이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이덕일

 

진지한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이야기꾼의 자질이 더해져 이 시대 대중 역사서 저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진 사학자. 그는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방안의 하나로,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 지적 흥미와 학문적 깊이, 그리고 인간 중심의 사관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역사 평설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숭실대 사학과 강사

저서로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성학십도 · 동국십팔선정」(공저)이 있다.

 

차례

 

머리말

      '송자'와 '시열이'

주요 등장 인물

시대별 정당 분포도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조선 건국에서 사림의 등장까지

      갈라진 사림, 300년 당쟁의 시작

      붕당 출현을 예언한 이준경

      계속되는 동인들의 공세

      이이의 합당 노력과 '양시론'

      이이를 탄핵하다 귀양 가는 동인들

      동인과 서인의 노선 차이

 

공존의 틀, 붕당 정치

      이이의 죽음과 서인의 실각

      정여립의 난과 동인의 실각

      세자 건저 문제와 서인의 실각

      집권 동인, 남북으로 갈라지다

      왜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나?

      정철 석방을 요구하는 민초 시위대

      임진왜란 때 정권을 잡은 북인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혁신 정치

      인륜과 권력

      잇따르는 쿠데타 -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사대주의자들이 자초한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

 

개혁과 수구의 대결

      대동법 백년 전쟁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진보주의의 승리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은 정치

      상놈들만 군역의 의무가 있는 나라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상호 공존에서 상호 배척으로

      문묘종사를 둘러싼 싸움

      이이와 성혼의 '인심 도심 논쟁'

      기나긴 문묘종사의 길

      북벌, 효종과 서인 정권의 헛된 꿈

      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 제1차 예송 논쟁

      정권을 건 복제 논쟁 - 제2차 예송 논쟁

      송시열 처벌 문제로 갈리는 남인

      정청에 울려퍼진 김대비의 곡성

      남인 정권을 무너뜨린 기름 천막 유용 사건

 

살육의 시대

      허견의 옥사

      거짓 고변의 소용돌이

      조정에 복귀한 송시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서인

      장희빈 모친 모욕 사건

      사약을 받는 송시열

      이이 · 성혼, 문묘에서 쫓겨나다

      인현왕후 민씨 폐출되다

      고변과 역고변

      장희빈의 몰락

      우리 당이 미는 왕자가 세자가 되어야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왕 경종

      한밤중에 이루어진 왕세제 책봉

      세제에게 정권을 내놓으시오

      소론, 정권을 장악하다

      당운을 건 한판 승부

 

탕평에서 세도로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

      소론 강경파와 이인좌의 난

      탕평책의 등장

      영조의 중대 선언

      '혼돈 개벽'과 영조의 한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당쟁의 희생양 사도세자

      세손의 폐위를 꿈꾸는 척신들

      정조를 암살하려는 노론 벽파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

      영남 유림들의 마지막 도전 - 영남만인소

      정조의 죽음이 부른 세도 정치

 

나가는 글

      다시 보는 조선 사대부

      조선은 과연 당쟁 때문에 망했는가?

      당쟁에서 오늘을 읽는 법

 

부록

이 책의 배경이 된 주요 정치 일지

조선 각 시대 정당과 당인들

 

주요 등장 인물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 ~ 1570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宗統).

승문원부정자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했다. 풍기군수 시절 최초로 임금(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림파가 세력을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힌 조선 유학의 최고봉의 한사람이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 ~ 1572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사림파를 옹호하여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대사헌으로 있던 명종 5년(1550)에는 대윤(大尹) 윤임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영의정 시절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옹립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총괄했다. 신진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昇) 등의 공격을 받았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란 유차를 올렸다가 율곡의 공격을 받았으나 당쟁 예언이 사실로 나타나자 율곡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이준경을 옹호하였으므로 훗날 영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그 자손 이인좌가 영남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宗主).

모두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16세 때 어머니가 죽자 3년 간 여묘살이를 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죽은 후까지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 환속한 자'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나 당쟁이 현실화하자 크게 뉘우치고 동 ·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물리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ㅖ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 ~ 1598

서인 영수.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을 돕고 평양에 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초 선조가 피난할 때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죽은 후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사후인 1602년 북인들에 의해 삭탈관작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1633년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승무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손암(巽菴) 심의겸(沈義謙)

1535 ~ 1587

서인 영수.

명종 비(妃)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외숙 이양(李樑)이 사림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키려 하자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아 그를 탄핵하여 사림을 보호하여 명성이 높았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아우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을 때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사림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옹호하는 동인으로 분당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했다가 복관되었다. 전남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32 ~ 1590

동인 영수.

김종직의 학통으로서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여 년 간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강원도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음9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 ~ 1601

서인 중진 문신.

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 권신 이양(李樑)이 아들을 천거하자 끝내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양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 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가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동암(東菴) 이발(李潑)

1544 ~ 1589

동인 강경파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어 자파 등용에 힘썼다. 정여립의 옥사에 관련되어 대사간을 사퇴, 대죄하다가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 ~ 1609

북인 대북 영수.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전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 · 이조판서를 거쳐 15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서인 영수 정철을 세자 건저 문제로 실각시킨 후 그의 처벌문제로 동인의 의견이 갈릴 때 강경론을 주창해 북인(北人)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초래했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 평해(平海)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595년 풀려나와 영돈녕부사로써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북인이 갈릴 때 정인홍과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선조 때의 문장 팔가(八家) 중의 한 명으로써 시 · 서 · 화(詩 · 書 · 畵)에 모두 능했다.

 

정여립(鄭汝立)

? ~ 1589

동인 문신 · 반란 주동자.

원래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을 탈당하고 동인에 입당하였다. 스승 이이를 비판하다 선조의 미움을 받고 사직했다. 동인의 차세대 주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각지의 인물들을 끌어들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훈련을 시켰다. 선조 20년(1587)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대동계를 계속 확대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을 받고 관군이 출동하자 진안 죽도로 도망가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대대적인 국문이 벌어지고(기축옥사) 서인 위관 정철에 대한 원한이 쌓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 ~ 1593

서인 강경파 영수.

명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司諫) · 직제학(直提學) ·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 때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가사(歌辭) 「관동별곡」을 썼다. 성혼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 있던 우의정 시절 정여립 반란 사건의 위관(委官)이 되어 동인들을 엄하게 치죄함에 따라 동인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신성군에게 뜻이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진주(晋州)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임금의 어가를 가로막은 백성들의 요구로 석방되어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후 체찰사를 지내며 전란을 지휘하고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나 또다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한 후 강화도(江華島) 송정촌(松亭村)으로 이주해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 죽었다.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저술한 조선조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서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

남인 영수.

명종 때 관직에 진출해 선조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이산해, 이발과 함께 동인을 이끌었다. 광해군 건저 문제로 서인 영수 정철이 처벌받을 때 강경론을 주장하는 이산해에 반대하여 온건파인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1년 전에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천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군사를 총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하지만 전란중에 곽재우 등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그 세가 강화된 북인에 의해 1598년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誤國小人]'이란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되었다. 1600년 복관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남인의 시조로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

대북 영수.

남명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선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쳐 영남의병장(嶺南義兵將)이 되었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주전론을 주장하여 온건파인 유성룡을 탄핵해서 실각케 했다. 이산해와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어 선조 말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小北) 유영경에 맞서 광해군을 지지해 즉위케 하였다. 소북을 정권에서 몰아낸 뒤 광해군과 함께 전후복구에 힘썼으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등의 행위로 윤리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다. 이후 대북은 서인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정계에서 사라졌다.

 

춘호(春湖) 유영경(柳永慶)

1550 ~ 1608

소북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사간(司諫)으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병사를 모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가족을 먼저 피난시켜 처벌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에 재수되어 북인에 가담했다. 이후 북인이 분열될 때 소북의 영수가 되었다가 같은 파의 남이공(南以恭)과 불화하여 탁소북(濁小北)을 이끌었다. 선조 말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맞서 영창대군을 지지해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선조의 선위교서를 감추었다가 발각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정랑. 좌승지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햇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 직제학(直提學) ·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겸직하는 등 임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를 겸직하는 등 병무에 밝았다. 영의정 때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평생 당적이 없이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애썼으나 세자 건저 문제 때 서인 정철을 관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는 성혼을 구하려다 정철의 일당이란 탄핵을 받고 사직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관한 논의가 일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죽었다. 죽은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묵재(默齋) 이귀(李貴)

1557 ~ 1633

서인 · 반정 공신.

이이 · 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 선유관(宣諭官)을 역임하여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다 함흥판관 때 무고로 수감된 해주목사 최기(崔沂)를 만난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 김류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 때 임진강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가 정묘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론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죽었다.

 

이괄(李适)

1587 ~ 1624

서인 · 반란 주동자.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압록강변의 국경 수비를 위하여 출진하였다. 서인인 문회 · 허통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조정에서 그의 아들 전을 체포하려 하자 선조의 제10자 흥안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관군에 밀리자 부하의 손에 살해당했다.

 

기자헌(奇自獻)

1562 ~ 1624

대북 온건파 문신.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때 집권 대북(大北)에 속해 있었으나 인목대비의 폐위 논의 때 당론과 달리 적극 반대한 죄로 함북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대북이면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인조가 구신(舊臣)을 부를 때 응하지 않은 혐의로 옥에 갇혀 있던 중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48명의 정치범과 함께 전격 처형되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 1658

서인 · 한당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관찰사 · 부제학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귀국 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 대사헌이 된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민생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둔 개혁 정치가로서 공납폐(貢納弊) 해소책인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줄곧 주장하여 대동법을 반대하는 김집 · 송시열 등의 산당(山黨)에 대항하여 한당(漢黨)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제작하고 관개(灌漑)에 수차를 사용하고 상평통보 주조를 건의해 유통시키는 등 뛰어난 경제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제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적 업적이 되었다. 가평의 잠곡서원(潛谷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서인 · 노론 영수.

인조 11년(1633)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으나, 높은 학식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 : 뒷날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다. 그가 쓴 「장릉비문(長陵碑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친청파 김자점이 청에 밀고해 사직하였다가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효종 사망으로 야기된 1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여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 맞서 승리하였다. 효종비의 사망이 계기가 된 2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에 맞서 9개월복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하여 실각했다. 그해 현종이 사망하자 송시열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다시 9개월로 바꾸어야한다고 재론했다가 1년설을 지지하는 숙종에 의해 유배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척신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을 무고해 살육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진사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익훈을 옹호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숙종 15년(1689)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후 남인들의 공세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던 도중 만 82세의 노구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신원되었으며 이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大老社), 충북의 화양서원(華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

서인 · 노론 영수.

효종 때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후 승지가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같은 당인 송시열을 지지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유배시켰다.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이 패배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남인 윤휴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이끌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하는데 반발한 송시열의 상소로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 남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묵재(默齋) 허적(許積)

1610 ~ 1680

남인 · 탁남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 영수로써 3년설을 주장하며 서인들에 맞섰으나 패배하였다. 현종 5년(1664)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비판을 받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2차 예송논쟁 때 서인의 9개월설에 맞서 1년설을 주장, 승리하여 영의정에 복직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후 송시열에 대한 처벌의 강도를 놓고 남인들의 의견이 갈릴 때 온건파인 탁남(濁南)을 이끌어 강경파인 청남(淸南)에 맞섰다. 그 후 청남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연시연(延諡宴) 때 궁중의 기름 천막을 유용한 사건으로 몰락했다. 이후 서자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가 남인들이 재집권한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신원되었다.

 

백호(白湖) 윤휴(尹)

1617 ~ 1680

남인 · 청남 영수.

학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중용장구보록(中庸章句補錄)」「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이 뛰어났다.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어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복설에 반대하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한 후 제2차 예송논쟁 때는 1년복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관직에 나가 같은 해 대사헌이 되어 청나라를 정벌할 것과 송시열을 이배(移配)하고 서인 중진 민유중(閔維重)과 이단하(李端夏)를 삭탈관작하자고 주장했다. 숙종 6년(1680)의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허견의 옥사가 발생하자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사사(賜死)된 것은 숙종과 서인들의 미움 때문이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신원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

남인 · 청남 영수.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다가 만 52세 때인 효종 8년(1657)에 사헌부지평에 초임되어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의 1년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패배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 때 승리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헌에 특채되었다가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장기에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가 발생하자 온건파인 허적의 탁남에 맞서 강경파인 청남을 이끌었다. 숙종 5년(1679) 탁남의 영수인 영상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직되자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나주의 미산서원(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남인 문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輔導)했다.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은거했다. 효종 때 왕명으로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들의 공격으로 사직하고 다시 은거하였다. 효종이 죽자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장지(葬地)를 수원으로 정했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오히려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숙종 때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많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詩歌)를 지었다. 정철이 가사(歌辭)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서인 정치가라면 그는 시가(詩歌)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남인 정치가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 ~ 1714

서인 · 소론 영수.

유계 · 권시의 문인으로 후에 송시열에게도 사사했으나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와 정견의 차이로 절교했다.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주자서를 강학하는 등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현종 5년(1664)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익찬(翊贊), 집의(執義) 등을 제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다. 숙종 9년(1683)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나 대광보국승록대부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다. 그의 사후 소론이 실각하면서 관작을 추탈당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자 복관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

서인 · 소론 영수

효종 10년(1659) 학행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자 「복제사의(服制私議)」를 지어 남인의 3년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1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의 이론가로 또올랐다. 또한 제2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과 함께 9개월설을 주장하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복직되어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남인들에 대한 치죄 문제로 서인이 분열될 때 분당을 막고 두 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했으나 조정에 실패하자 소론 윤증을 지지하여 소론이 되었고 대동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다. 기사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학문에 정진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조 40년(1764)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황해도 장연의 봉양서원(鳳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장희빈(張禧嬪)

? ~ 1701

남인계 역관 장형(張炯)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나인(內人)으로 궁중에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된 후 왕자 균(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이로 인해 숙종 15년(1689)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으나, 5년 후인 숙종 20년(1694) 남인이 몰락한 후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장희재(張希載)

? ~ 1701

장희빈의 오빠로서 동생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되고 숙종 18년(1692)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남인 정권에 일조하다가 장희빈이 쫓겨난 후 유배되었다. 부친 장형의 묘에 흉물을 묻은 사건을 일으켜 장희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0년(1684) 공조좌랑(工曹佐郞)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서인 영수 수항(壽恒)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산(永平山)에 들어갔다가 숙종 20년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나와 사례한 후 부친의 묘소가 있는 양주(陽州)로 돌아갔다. 이후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출사해 호조 · 형조판서를 지낸 후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사망한 후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담당하였고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옹립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후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 경종 2년(1722)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의 손자 김성행이 관련되어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 16년(1740)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조선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金祖淳)은 그의 4대손(孫)이다. 사사된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재(疏齋) 이이명(李命)

165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호조참의에 제수된 후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임종하기 직전 독대(정유독대, 1717)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 경종)에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했다 하여 소론의 불만을 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숙종의 죽음을 고하기 위한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서양 신부들을 사귀고 돌아올 때 천주교와 서양 서적을 들여오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후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했다가 소론의 반발로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남해로 유배갔다. 그의 아들 이기지가 관련된 목호룡의 고변 때 임금으로 추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어 한강진(漢江津)에서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 복관되었다. 과천의 사충선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다녀온 후 대사간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좌의정을 역임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성사된 후 영의정 김창집을 대신하여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의 관료들이 경종의 병에 대해서 묻자 '발기불능'이라고 말했다. 귀국 후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 8월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 시신을 덕산(德山)에 묻고 자결했다. 영조 즉위년에 신원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1660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承文院)과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조정랑 ·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후 숙종 29년(1703) 호조판서가 되었다. 공조 · 이조판서를 거쳐 숙종 43년(1717) 우의정이 되었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을 세제로 책종하고 이어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관철시켰으나 소론의 반격을 받아 무산되자 사직하였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가 발생해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아계(丫溪)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소론 강경파 영수.

숙종 28년(170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이 연잉군을 밀어 왕세제로 책봉한 후 세제 대리청정을 관철시키자 자신을 소두(疏頭)로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규탄하는 연명 상소를 올려 일약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 후 목호룡을 배후에서 움직여 목호룡의 고변 사건(임인옥사)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인사를 대거 살육해 영조와 노론의 원수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국문 받을 때 "경종의 곁에 죽기를 원한다."며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고 사형당했다.

 

목호룡(睦虎龍)

1684 ~ 1724

남인가의 천얼(賤孼)로 종친 청룡군의 가노(家奴)였으나 풍수를 익혀 사대부들과 교류했다. 왕세제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葬地)를 정해준 공으로 속신(贖身 : 천민에서 풀려남)되었다. 이후 왕실 소유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가 되어 축재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 사주를 받아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3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해 노론 4대신 등이 사사되는 임인옥사를 불러왔다. 이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국문을 받았으나 김일경과 함께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다 사형당하였다.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 ~ 1724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된 후 경상도관찰사 · 개성유수 등을 거쳐 형조 · 이조 · 병조판서를 역임한 소론 4대신의 한 명이다. 경종 1년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관철시키자 이광좌 · 조태억 등과 함께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소론 정권이 수립되자 우의정에 올랐고 경종 4년(172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좌의정에 올랐다가 같은 해 사망했다. 영조 1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이인좌(李麟佐)

? ~ 1728

소론 강경파 · 반란 주동자.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집권하자 소론 강경파인 준소(峻少)와 남인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하였다.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후에도 반란을 꿈꾸다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반란을 고변하자 밀풍군(密風君) 탄(坦)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는 등 초기에는 기세를 올렸으나 진압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참형당했다. 이인좌는 영남 유림들이 존경하는 선조 때의 명신 이준경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영남 유림들이 난에 가담하였는데, 이 때문에 난이 진압된 후 대구부 남문 밖에 '영남반란평정기념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 찍고 영남인들의 출사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만암(晩庵) 유봉휘(柳鳳輝)

1659 ~ 1727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5년(1699) 41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1년 노론이 왕세제 책봉에 이어 세제 대리청정을 강행하여 성사시키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다. 경종 3년(1723) 이조판서에 올랐고 영조가 즉위한 후 탕평책에 의해 노 · 소론 연립 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 · 좌의정에 제수되는 등 소론 4대신의 한 명이었으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을 공격한 주동자라는 이유로 면직되어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영조 31년(1755)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다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소헌(素軒) 조태구(趙泰耉)

1660 ~ 1723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를 거쳐 대사성과 호조판서를 역임히였다. 숙종 46년 우의정에 올라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때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대리청정 요구를 저지시킨 후 집권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사주한 목호룡의 고변을 이용해 노론 4대신을 역률로 몰아 사사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경종 3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으나 영조의 즉위로 노론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

1674 ~ 1740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0년(1694) 문과에 장원하여 부수찬과 이조참의를 지냇다. 숙종 42년 숙종이 노론의 편을 들어 윤선거의 문집을 훼손하자 이에 항의하여 파직되었다가 2년 후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왕세제 대리청정 문제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신임옥사로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경종 4년(1722)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노론 왕 영조 밑에서 노론과 공존을 도모하는 온건한 탕평책을 추진했으나 끝내 화해하지는 못했다. 영조 9년 봉조하가 되었고 12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가 영조 16년(1740) 박동준(朴東俊)의 모함을 받아 울분 끝에 사망했다.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 ~ 1736

노론 영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해 관직에 오른 후 경종 때 세제 대리청정 문제로 소론에 의해 치죄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우의정으로 복귀한 후 소론을 공격하다가 정삼석(鄭三錫)의 탄핵을 받고 원주로 재차 귀양갔다가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방면되었다. 노론의 영수로써 소론을 먼저 처벌한 후 소론계 일부 인물을 등용하자는 조건부 탕평을 주장했다.

 

나경언(羅景彦)

? ~ 1762

노론인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로 있던 중 노론 벽파의 김한구 · 홍계희 · 김상로 · 윤급 등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하게 고변하여 뒤주 사건을 유발시킨 인물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먼저 사형시킨 후 사도세자를 죽였다.

 

익익재(翼翼齋) 홍봉한(洪鳳漢)

1713 ~ 1778

노론 시파.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영조 19년(1743)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영조 37년(1761)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이천보 · 민백상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후 영의정이 되었다.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에 의해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사이가 악화되자 영조 편에 붙어 사도세자를 돕지 않았다. 영조가 뒤늦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자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김귀주(金龜柱) 일당에게 돌려 실각시킨 후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했으나,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사사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부교리 이노술(李魯述)의 탄핵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홍인한(洪麟漢)

1722 ~ 1776

노론 벽파 영수.

영조 29년(175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 전라도관찰사 · 대사헌 등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면서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사도세자 사후 보복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세손(훗날의 정조)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여산(礪山)에 유배된 후 사사당했다.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35 ~ 1815

노론의 영수 홍봉한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 사도세자와 국혼9國婚)을 맺었다. 그녀의 나이 28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목도했다. 그녀의 나이 42세 때 아들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어 폐가(廢家)되었다. 정조는 그녀가 칠순이 되는 1804년(갑자년)에 홍씨 일문의 죄를 신원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무산이 되었다. 그녀는 집안을 신원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61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한중록」을 서술하였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일관되게 친정을 옹호하고 사도세자가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고 기술하여 사도세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이는 정말 군자다. 이이만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당이 없는 것이 걱정이겠다. 나도 주희의 말처럼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

- 선조의 말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 났다니.

- 성삼문(백이숙제를 비판하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이미 정적이었다. 부왕의 냉대에 상심한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었다가 창경궁에서 급서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는 무수한 소문을 낳았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인이 울어예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해 흰달 가는비 굵은 눈 쓸쓸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디 간고?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여쁜 그림자 날 좇을 뿐이로다.

- 정철 「속미인곡」중에서

 

관산에 뜬 달 바라보니 통곡이요

압록강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 쓰리도다.

조정의 신하들은 금일 이후에도

서인이요, 동인이요 나뉘어 싸울 것인가?

(痛哭關山月 像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各西東)

- 선조

 

철령 높은 봉에 쉬어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준들 어떠리

- 이항복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이를 부른 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참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의 상소문에서

 

몸을 닦고 글을 읽는 것이 너희들의 일이다. 잘 모르는 일을 억지로 논하다가 남들의 비웃음과 모욕을 사지 말라.

- 서인의 상소를 받은 인조의 비답에서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을랑 장만마라.

닫 들어라 닫 들어라.

청약립(靑篛笠 : 대나무 삿갓)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衣 : 비옷) 가져오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 윤선도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중에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청남의 영수 윤휴가 숙종의 사약을 받으며 남긴 말

 

전하께서 당을 없앤다고 하시더니 이제 도리어 두 당 외에 또 한 당을 보태서 음과 양 외에 따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 하나 나와 모두 셋이 되어 군자도 되지 못하고 소인도 되지 못합니다.

-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노론 대사헌 조관빈의 상소문에서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는 세 줄기 다섯 가지에 천 가지 만 가지 잎사귀를 털끝까지 분간하고 실같이 쪼개서, 서로 성내고 서로 떠든다. 문마다 기 하나씩을 세우고 집마다 진 하나씩을 쌓아서, 세상이 다하도록 그 송사를 능히 결단하지 못하고, 대를 전해가며 그 원망을 능히 풀지 못한다.

- 다산 정약용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 송순(宋純)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청상(萬古靑常)하리라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듣기 좋아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해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중에서

 

고산 구곡담(九谷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 : 풀베고 집을 지음)하니 벗님네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 율곡 이이 「고산구곡가」중에서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

- 남명 조식

 

병든 마음 둘 곳 생각다가

지팡이 짚고 삼계당 찾았노라.

벽에는 서책 가득하고

처마 앞에 활터를 두었다오.

새 서리에 천기(天氣) 엄숙하고

어젯밤 비에 시냇물 소리 들리누나.

이제야 진기(眞氣) 기를 곳 얻었으니

묵은 병을 아주 잊어버리겠네.

病懷然着處 扶杖出溪堂

辟上藏書籍 檐前眞謝場

新霜天氣肅 昨雨潤聲長

始得養眞地 昔疴渾却忘

- 항은(巷隱) 최태완(崔泰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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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31. 11:25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5  송광사 Songgwangsa

 

글 / 강건기, 김성우, 권희경●사진 / 김종섭, 김성우, 안장헌

1994,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6

 

082

빛12ㄷ 150

 

빛깔있는 책들 150

 

연혁 - 강건기------------------------------------------------------------------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방콕에 가서 남방불교를 연구했다. 미국 뉴욕대학에서 종교한 석사 과정 수료, 동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전북 불교대학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불교와 기독교」「마음 닦는 길」「붓다의 메아리」등이 있고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 '기도와 마음 수행'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건축 - 김성우------------------------------------------------------------------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졸업,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건축 및 도시계획 석사, 미시간 대학교 건축 및 미술사학 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성주한개마을」「괴산 김기웅 가옥」 또한 역서로 「원야」가 있다.

 

유물 - 권희경------------------------------------------------------------------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일본 구주대학 대학원 미학미술사 전공,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북대학교 박물관 전임 강사를 거쳐 현재 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고려의 사경」을 비롯하여 '고려 사경의 발원문에 관한 연구(1, 2)' '변상화에 관한 연구' '만주 속의 한국 미술'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사진 - 김종섭(본사 사진부 차장), 김성우(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안장헌(사진작가)

 

|차례|

 

송광사의 정신 및 한국 불교에서의 위치

송광사의 연혁

송광사의 입지 및 배치

송광사의 건축

송광사의 유물

참고 문헌

영문 요약

 

▲ 송광사 전경

▲ 비림(碑林)의 비석들  송광사는 보조 국사를 비롯한 큰스님들에 의해 한국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는 승보 사찰로서, 큰스님들이 남기신 많은 사연들이 비석들에 새겨져 있다.

▲ 보조 국사의 사리탑  보조 국사 지눌의 사리가 봉안된 탑으로서 관음전 뒤쪽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 보조 국사의 지팡이  보조 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았는데 그 나무가 자라났다고 하며, 스님이 돌아가시던 날 이 나무도 시들해지더니 결국 죽었다고 한다.

▲ 대웅보전 안의 불상들  닫집으로 장엄한 불단 위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의 삼세불과 지장, 관음, 문수, 보현보살의 네 분 보살을 모셨다.

▲ 비사리 구시  대중들의 밥을 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대웅보전 신중탱화(神衆幀畵)

▲ 보조 국사 영정  국사전에 모셔져 있는 이 영정은 다른 열다섯 분과는 달리 영정 앞에 향로와 촛대가 놓여져 잇고, 매년 3월에는 종제를 지낸다.

▲ 일주문 편액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라는 글씨가 사찰의 위치와 성격을 말해 준다.

▲ 승보전 석가여래와 1,250비구들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의 1,250명 비구들을 한 교단에 모셨다.

▲ 1930년경 송광사(위)와 현재의 송광사 전경(아래)

▲ 송광사 배치도

▲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 청량각  송광사에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개울의 다리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 일주문  사역에 진입하는 첫번째 문으로 척주각, 세월각의 두 작은 건물이 문 안에서 사람을 맞이한다.

▲ 우화각과 천왕문이 서로 연결되어 만드는 긴 터널(아래)을 빠져 나오면 종고루를 맞이하게 된다.(위)

▲ 종고루의 밑(아래)을 다시 한번 빠져 나오면 계단 위로 대웅전이 보인다.(위)

▲ 청량각  걸어서 지나갈 때에는 평범한 건물같이 보이는 청량각이지만(가운데), 개울 쪽에서 바라보면 석조의 홍교 위에 정자같이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다(위). 청량각 속을 통과하면서 위를 쳐다보면 보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용머리가 사람을 맞이한다(아래).

▲ 일주문  여러 층의 공포가 무거워 보이는 일주문을 지나면서(위) 두 개의 편액을 마주하게 된다.(아래)

▲ 세월각과 척주각  죽은 자의 혼을 실은 가마인 영가도 남녀가 따로 세월각과 척주각에서 속세의 때를 벗어야 사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두 건물이 마치 사찰 어귀에 서서 과거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남녀같이도 느껴진다. 아마도 한국 전통 건축 가운데 제일 작은 건물일지 모른다.

▲ 침계루  황색, 적색, 청색의 색조 구성이 두드러진다.

▲ 종고루  원래 해탈문이 있던 위치에 누각 형식으로 지어진 종고루의 2층에는 범종, 운판, 목어, 홍고 등 법구가 있다.

▲ 우화각  송광사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 우화각은 홍교와 함께 불국으로 향하는 선승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곳이다.

▲ 천왕문 안 사천왕상  동방의 지국천왕(첫번째), 남방의 증장천왕(두번째), 서방의 광목천왕(세번째), 북방의 다문천왕(네번째)

▲ 대웅보전 모서리의 공포부분

▲ 1930년경의 대웅전(위)과 지금의 대웅전(아래)

▲ 관음전

▲ 승보전  대웅전 건물을 옮겨 지은 승보전은 승보 사찰로서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석가여래, 가섭, 아난 등 십대 제자와 십육성, 1,250대비구를 모셨다.

▲ 지장전  지장보살과 시왕이 모셔져 잇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이전, 증축한 것이다.

▲ 약사전  단칸 규모의 아주 작은 전각으로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영산전  보물 제303호인 영산전 내부에는 목조여래 좌상과 팔상도가 있다.

▲ 진여문

▲ 하사당 종단면도

▲ 하사당 입면도

▲ 하사당과 공포  보물 제263호인 하사당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요사채로 오른쪽 부엌의 상부 지붕에 구멍을 내어 소슬지붕 형식으로 환기공을 장치한 특이한 건물이다.

▲ 응진당  석가여래와 16나한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 국사전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국사전은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로서 석조 기단이 특이하다.

▲ 국사전 종단면도

▲ 진영당과 편액  풍암 스님 문하승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진영당은 그 편액이 '풍암영각'이라 적혀 있다.

▲ 목조삼존불감  보조 국사 지눌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불감으로 국보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감은 중앙에 불좌상과 그 좌우에 나한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매우 작으면서도그 속에 조각된 상들은 원형 조각에 가까울 만큼 고부조이며 세부 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높이 13.9센티미터.

▲ 고려고종제서  고려 고종이 혜심 진각 국사에게 대선사를 제가한 원문으로 국보 제43호인데 고려시대의 선사 · 대선사 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 고려시대문서 가운데 노비첩  보물 제572호로 지정된 고려시대문서는 2축인데 그 하나가 수선사형지기이고 다른 하나는 노비첩이다. 노비첩은 백지에 먹으로 쓴 것으로 당시 수선사의 규모를 비롯해서 노비 제도 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송광사대반열반경소

▲ 송광사묘법연화경찬술

▲ 송광사 경패  송광사에 전래되고 있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목함의 표면에 부착한 표지물로서 경명(經名)을 새긴 43개의 경패들인데 보물 제175호이다.

▲ 송광사 금동 금강 요령(왼쪽)

▲ 송광사 금동 요령  보물 제176호인 고려시대의 금동 요령은 몸체가 사각형으로 각면이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양이다.(오른쪽)

▲ 국사전 내부의 16국사 탱화  송광사가 배출해 낸 나라를 빛낸 고승들 곧 보조 국사를 비롯한 16국사의 영정 16폭이 국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 고봉 화상 진영  국사전에 모셔져 있는 16국사탱 가운데 특이한 모습인 고봉 화상 진영은 고려시대의 15국사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국사로서 머리가 긴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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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29. 14: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4  탈

 

글 / 심우성●사진 / 박옥수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5

 

082

빛12ㄷ 149

 

빛깔있는 책들 149

 

심우성(沈雨晟)--------------------------------------------------------------

1934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한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이다. 현재 공주 민속극박물관장으로 있으며 극단 서낭당의 대표이기도 하다. 저서로 『무형문화재 총람』『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마당굿 연희본』『남사당패 연구『민속문화와 민중의식』이 있다. 그리고 1인극 작품으로는 『쌍두아』『문』『남도 들노내』『넋이야 넋이로구나』『판문점 별신굿』『새야 새야(합동작품)』가 있다.

 

박옥수(朴玉修)--------------------------------------------------------------

1949년생으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대한민국 사진전람회 초대작가이다. 1987년에 제6회 대한민국 사진전람회 초대작가상을 수상하였고, 1991년에는 『탈』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서울과 광주에서 연 바 있다. 현재 토탈 스튜디오의 대표로 있다.(전화 778-3611)

 

|차례|

 

머리말

탈이란 무엇인가

우리 탈의 역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탈의 종류

    하회(河回) 탈과 병산(屛山) 탈(국보 제121호)

    방상씨(方相氏) 탈(중요 민속자료 제16호)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놀이'의 탈들

    산대놀이

    해서(海西) 탈춤

    오광대(五廣大)

    야유(野遊)

    서낭굿 탈놀이

    뜬광대 탈놀이, 남사당 덧뵈기

     사자놀이 - 북청 사자놀음

     소놀이 굿

    춤탈 - 처용탈, 학탈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나무탈들

    토속적인 탈들, 오늘에 살고 있는 탈들

우리 탈의 전형성을 찾아서

탈놀이 보유 단체 주소록

 

▲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한 장면  탈이란 본디 제 얼굴과는 다른 형상의 '얼굴 가리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저 제 얼굴을 가리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탈을 씀으로써 본디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인 신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인격 내지는 신격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한 장면

▲ 봉산 탈춤의 사자

▲ 처용탈

 

▲ 병산탈 양반

▲ 병산탈 선비

▲ 하회탈

▲ 하회탈 양반

▲ 하회탈 각시

▲ 하회탈 부네

▲ 하회탈 선비

▲ 하회탈 중

▲ 하회탈 백정

▲ 하회탈 이매

▲ 하회탈 할미

▲ 하회탈 초랭이

▲ 양반 계급의 장례식 행렬(日本 改造社版 地理講座 日本편 6권, 1934년 12월, 240쪽)

▲ 옛 장례 행렬의 방상씨

▲ 나무로 된 방상씨 탈

▲ 양주 별산대놀이 탈

▲ 양주 별산대놀이의 왜장녀

▲ 송파 산대놀이의 취발이

▲ 봉산 탈춤의 취발이

▲ 봉산 탈춤의 미얄

▲ 강령 탈춤의 소무

▲ 강령 탈춤의 미얄

▲ 은율 탈춤의 새맥시

▲ 은율 탈춤릐 팔목중

▲ 통영 오광대의 할미양반(영감)

▲ 고성 오광대의 홍백가

▲ 고성 오광대 차양반

▲ 고성 오광대 비비새

▲ 가산 오광대 영감

▲ 동래 야유 말뚝이

▲ 수영 야유 할미

▲ 연잎

▲ 포도부장

▲ 왜장녀

▲ 노장

▲ 말뚝이

▲ 원숭이

▲ 취발이, 눈끔쩍이, 샌님(왼쪽부터)

▲ 먹중, 신할아비, 미얄할미(왼쪽부터)

▲ 양반 광대놀이 키탈(남)

▲ 양반 광대놀이 바구니탈 각시

▲ 양반 광대놀이 바구니탈 사자

▲ 짚으로 만든 방상씨 탈

▲ 동해안 별신굿 범탈

▲ 하회 별신굿 탈놀이 등장 인물 전원(1930년대)

▲ 1930년대 남사당패와 탈놀이 '덧뵈기'의 탈들

 

 

posted by 황영찬
2013. 1. 29. 09:1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3  三國志 3 적벽의 영웅들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7,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4856

 

823.5

나15삼6  3

 

⊙ 등장인물

 

제갈량諸葛亮(181~234년)

촉(蜀)의 승상. 자는 공명(孔明). 삼고의 예로 유비와 수어지교를 맺게 되었다. 208년에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으며, 214년에는 장비, 조자룡 등과 함께 성도를 공격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유선을 받들어 촉을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그러다가 227년에는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렸다. 이후 위나라와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위의 사마중달이 펼친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에서 대패한 후 병을 얻어 죽었다.

 

주유周瑜(175~210년)

오(吳)의 장수. 자는 공근(公瑾).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200년에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그는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 태수가 되었다.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로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로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서서徐庶

유비의 막료. 자는 원직(元直). 원래의 이름은 복(福)이었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으며, 의협심이 강해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고 형리에게 체포되었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도망쳤다. 그 후 느끼는 바가 있어 이름을 서(庶)로 바꾸고 무예 대신 학문에 힘썼다. 서서는 형주에 있던 유비의 막료가 되었다가 유비가 장판(長阪)에서 대패했을 무렵, 조조가 모친을 인질로 잡아두고 그를 불러들이자 눈물을 머금고 조조 휘하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비에게 제갈공명을 추천해 주었다.

 

노숙魯肅(172~217년)

오(吳)의 장수. 자는 자경(子敬). 그 역시 제갈공명, 주유와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 군을 물리친 주역의 한 사람이다. 주유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군세를 인계받았으며, 적벽대전 후 유비와 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형주 분할 문제를 해결하여 상수를 경계로 분할하는 데 성공했다.

 

마속馬謖(190~228년)

유비의 장수. 자는 유상(幼常). 마량의 동생. 228년 봄, 촉의 중원 진출을 좌우하는 중요한 싸움에서 마속은 제갈공명의 지시에 따르지 않아 크게 패전하고 말았다. 이에 제갈공명은 후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전군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아끼는 마속을 처형했다.

 

장합張郃

조조의 명장. 자는 준예(儁乂). 관도의 싸움 때 원소와 의견이 맞지 않아 조조에게 투항한 후 각지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215년, 한중의 장로 토벌에서 선봉대의 역할을 하고 한중을 수비했으나, 217년에 유비 · 법정에게 패했다. 이에 제갈공명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제갈공명을 쫓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전풍田豊

원소의 모사. 조조와 관도 싸움을 벌일 때는 지구전을 건의했고, 조조가 유비를 공격할 때 그 배후를 치도록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소가 남진을 개시하기 직전에도 간언했다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원소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확실해지자 어이없게도 원소의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방통龐統(178~213년)

유비의 모사. 자는 사원(士元). 사마휘가 유비에게 천거한 인물인 '와룡과 봉추' 중 봉추가 바로 그이다. 유비의 지혜주머니로 법정 등과 함께 서촉 공략을 적극 추진했으나 성도 진격 도중 낙성 공방전 때 화살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황충黃忠(?~220년)

유비의 장군. 자는 한승(漢升). '노익장'의 대명사. 원래 유표 휘하에서 장사를 지키고 있었으나, 적벽대전 이후 유비에게로 가서 무공을 세워 토로장군이 되었다. 218년에 한중을 공격할 때는 정군산에서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죽여 정서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후장군이 되었다.

 

감택闞澤

손권의 모사. 자는 덕윤(德潤).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대장 황개의 거짓 항복 문서를 가지고 조조 군 진영을 드나들면서 교묘한 작전을 수행했다. 결국 조조로 하여금 황개의 항복을 믿게 만들어 적벽에서의 대패전을 맛보게 했다.

 

마량馬良(187~222년)

촉(蜀)의 모사. 자는 계상(季常). 마속의 형. 눈썹이 희었기 때문에 백미(白眉)라 일컬어졌으며, 여기서 '백미'라는 고사가 생겼다. 유비 휘하에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릉 싸움에서 전사했다.

 

모개毛

조조의 모사. 자는 효선(孝先). 조조가 연주목으로 있을 때 순찰관으로 초빙되었다. 이때 천자를 받들어 불신(不臣)을 다스리고, 농경을 일으켜 군량을 비축하라는 등 진언을 하여 조조의 천하 평정 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갈근諸葛瑾(174~241년)

오나라 손권의 막료. 자는 자유(子瑜). 제갈공명의 형. 동생이 촉나라를 받들고 있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손권으로부터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215년에 오나라와 촉나라가 형주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동안 조조가 한중에 침입했다. 이에 유비가 손권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쌍방의 대표로서 만난 것이 제갈 형제였다.

 

황조黃祖(?~208년)

유표의 장수. 원술의 명령을 받고 토벌하러 온 손견을 맞아 싸워 현산에서 그를 죽였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강하 태수로 있을 때 유표가 사신으로 보낸 예형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서 그만 그를 죽이고 말았다. 자신은 208년에 손권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다.

 

신비辛毗

조조의 부하. 자는 좌치(佐治). 처음에는 원소를 따랐으나 나중에 조조 휘하에 들어가 건의관이 되고, 이어 조비 · 조예를 섬겼다.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공명의 군사와 대치했을 때는 조예의 군사(軍師)로 가서 촉(蜀)의 도발에 응하지 말도록 조칙을 전해 출전을 막았다.

 

유엽劉曄

위(魏)의 모사. 자는 자양(子陽).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항상 측근에 있으면서 참모 역할을 했다. 관도 싸움에서는 벽력거(霹靂車)를 만들어 원소의 군사를 격퇴하고, 원소 군이 터널을 파고들어오자 깊은 도랑을 파서 막았다.

 

조인曹仁(168~223년)

조조의 사촌아우. 자는 자효(子孝). 관도 싸움 때 유비가 허도 남쪽에서 반란을 선동하자 이를 진압하였고, 적벽대전 후 서황과 함께 강릉에 머물며 추격군을 막았다. 그 후 번성에서 관우의 공격을 잘 막아냈으나, 220년 손권이 공격해 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허유許攸

원소의 막료. 관도 싸움에서 원소에게 여러 가지 헌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기쁜 나머지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손부인孫夫人

유비의 후실. 손권의 누이. 유비가 서촉을 치러 간 사이 손권의 모략으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패하여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곧이듣고, 장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허저許

조조의 장수. 자는 중강(仲康). 조조의 측근에서 용맹을 떨쳐 무위장군이 되었다. 군중들은 그를 가리켜 '호치(虎癡)' 즉 미친 호랑이라 불렀다.

 

차례

 

관도 대전투

승기는 조조에게

원소의 패망

내분은 파멸을 부르고

곽가의 요절

주인을 구한 흉마

수경과 단복

아쉬운 작별

삼고초려

제갈공명

불붙는 강동 세력

공명의 첫 싸움

갈 곳 없는 유랑민

장판파의 두 영웅

강동에 이는 풍운

불 뿜는 설전

손권, 군사를 일으키다

주유의 책략

공명의 신기한 계책

고육지책

동남풍을 부르다

적벽대전

어부지리

주유의 헛수고

노장 황충

강동의 미인계

금낭삼계

 

數年徒守困

空對舊山川

龍豈池中物

乘雷欲上天

세월을 부질없이 보내기 몇 해던가.

옛 산천을 헛되이 대하고 있었네.

용이 어찌 늪 속에 살 수 있으랴.

우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려네.

 

八九年間始欲衰

至十三年無子遺

到頭天命有所歸

泥中蟠龍向天飛

팔구 년째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여

십삼 년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리라.

마침내 천명은 제대로 돌아와

흙 속에 묻혀 있던 용이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山谷有賢兮

欲投明主

明主求賢兮

却不知吾

산속의 어진 선비는

명주에게 몸을 바치려 하건만,

명주는 어진 선비를 구한다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네.

 

新野牧

劉皇叔

自到此

民農足

신야목

유 황숙이

이곳에 오신 뒤로

우리 살림 풍족하네.

 

봉황이 하늘을 날음에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는도다.

선비가 한 곳에 엎드려 있음이어

주인이 아니면 섬기지 않는도다.

들에 나가 몸소 밭을 갊이어

내 집을 사랑함이로다.

잠시 마음을 칠현금에 붙임이어

가만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도다.

 

一夜北風寒  萬里彤雲厚

長空雪亂飄  改盡江山舊

白髮老衰翁  盛感皇天祐

騎驢過小橋  獨嘆梅花瘦

하룻밤 북풍이 춥더니

만리에 붉은 구름이 두텁구나

장공에 눈발이 흩어져 날리니

강산에 옛 모습이 새로운 듯하도다.

백발의 노쇠한 늙은 몸이

황천의 도움이 왕성함을 느끼니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며

매화 여위였음을 혼자 탄식하노라.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큰 꿈은 누가 먼저 깨우는고

평생은 나 스스로 아노라.

초당에 봄 잠이 충분한데

창밖에 해는 길기도 하구나.

 

臨漳漳水之長流兮  望園果之滋榮

立雙臺於左右兮  有玉龍與金鳳

攬二喬於東南兮  樂朝夕之與共

장수의 강류에 임함이어, 원과의 자영을 바라보고,

좌우에 쌍대를 세움이어, 옥룡과 금봉이 있게 하고,

이교를 동남에 잡아맴이어, 조석을 같이 즐기기로 하리.

 

丈夫處世兮立功名

立功名兮慰平生

慰平生兮吾將醉

吾將醉兮發狂吟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어

공명을 세우리로다.

공명을 세움이어

평생을 위로하리로다.

평생을 위로함이어

내 장차 취하리로다.

내 장차 취함이어

즐겁게 노래를 부르리로다.

 

술 들고 노래하세, 인생이 그 얼만고

초로(草露)와 같다 할까, 지난날이 꿈 같구나.

슬픈 일 당할 때면 근심을 풀 길 없어.

이 시름 어찌 푸노, 술만이 약이로다.

푸르른 그대 옷깃 유유한 이내 마음.

사슴은 울어대며 풀을 뜯어먹는구나.

귀한 손 모시고 비파 타고 피리 부네.

밝고 밝은 저기 저 달 기울 줄이 있으랴.

마음속에 시름 오니 끊일 꿈 바이 없네.

백을 넘고 천을 건너 그런대로 살아가네.

오랜만에 서로 만나 옛 은혜를 생각한다.

달은 밝고 별 드문데 남으로 가는 까막까치.

두루 살펴 나무 찾되 의지할 가지 없네.

산은 높아 싫지 않고 물은 깊어 좋을레라.

주공이 밥 뱉으니 천하가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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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28. 09:0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2  버리고 떠나기

 

법정

2010, 샘터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2842

 

220.4

법74ㅂ c.2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서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생각 돌이켜,

선뜻 버리고 떠나는 일은 새로운 삶의 출발로 이어진다.

 

미련없이 자신을 떨치고

때가 되면 푸르게 잎을 틔우는 나무를 보라.

찌들고 퇴색해가는 삶에서 뛰쳐나오려면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법정法頂

 

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홀로 20년을 사신 뒤 지금은 강원도 산골 작은 오두막에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계신다.

자연의 벗이 된 후, 자연이 주는 가르침을 곧고 정갈한 글을 통해 세상에 나눠주고 계신다.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회주를 맡아 가끔씩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변하지 않는 침묵과 무소유의 철저함이 마치 자연을 닮은 곧은 나무를 보는 듯하다.

스님의 향기가 배어 있는 작품으로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텅빈 충만>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이 있다.

 

홀로 있고 싶을 때 나는 훌쩍 나그네길에 나선다.

 

차례

 

개정판을 내며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생각을 씨앗으로 묻으라

화전민의 오두막에서 /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 / 생각을 씨앗으로 묻으라 / 묵은 편지 속에서 / 나의 휴식 시간 / 별밤 이야기 / 개울가에서 / 강변의 정자에서 /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 까치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

계의 공덕 / 윤달의 한국불교 / 도라지꽃 사연 / 잔인 무도해진 우리 인생 / 깨달음과 닦음 /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 / 살아 있는 것은 다 한 목숨이다 / 입시에 낙방당한 부모들에게 / 무엇이 전쟁을 일으키는가 / 한국인의 맹렬성 /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라 /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 화두선과 관법 / 어진 이를 가까이하라 / 선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 승가의 기초교육 / 그대가 곁에 있어도

 

소유의 굴레

소유의 굴레 / 통일을 생각하며 /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 / 녹스는 삶을 되돌아보라 / 자연은 커다란 생명체다 / 반바지 차림이 넘친다 / 닭벼슬만도 못한 중벼슬 / 가을이 오는 소리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기 바로 이 자리 / 온화한 얼굴 상냥한 말씨 / 맑고 투명한 시간 / 누가 복을 주고 벌을 주는가 / 아름다움과 조화의 신비 / 겨울 하늘 아래서 /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버리고 떠나기

비오는 날에 / 운판 이야기 / 산승의 편지 / 단순하고 간소한 삶 / 버리고 떠나기 / 아가 아가 울지 마라 / 또 가을이네 /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 / 인생을 낭비한 죄 / 어제 만난 사람들 / 그 일이 그 사람을 만든다 / 산에는 꽃이 피네 / 생명의 잔치에 동참하라 / 햇차를 들면서 /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 장마철 이야기 / 남의 삶과 비교하지 말라 / 초가을 나들이

 

별밤을 가까이 하라. 한낮에 닳아지고 상처받은 우리들의 심성을

별밤은 부드러운 눈짓으로 다스려 줄 것이다.

 

해가 뜨면 밖에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방에 들어가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먹고 사니

누가 다스리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름 때문에 숨어 살기 어려워

마음 편히 쉴 곳이 없다.

지팡이 날리고 또 날려서

찾는 산이 깊지 않을까 두렵네.

- 휴정休靜 선사

 

산이야 나를 좋아할 리 없지만

내가 좋아서 산에서 사는데

한 산중에서 오래 머물다보니

번거로운 인연들이 나를 얽어매더라.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 선가禪家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허물어져

마을이 황량하게 변해 버렸다.

청산은 말이 없고 봄하늘 저문데

두견새 한소리 아득히 들려온다.

한때의 동네 아이들

창구멍으로 나그네를 엿보고

백발의 이웃 노인

내 이름을 묻는다.

어릴 적 이름 알자

서로 눈물짓나니

푸른 하늘 바다 같고

달은 삼경이어라.

- 법정

 

바람은 자도 꽃은 지고

새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

새벽은 흰구름과 더불어 밝아오고

물은 밝은 달 따라 흘러간다.

- 휴정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가 꿈속의 일인 것을

저 강을 건너가면

누가 ㅓ이고 누가 나인가.

 

누구나 한번은 저 강을 건너야 한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어

곧 바람 멎고 불꺼지리라

꿈속의 한평생을 탐하고 성내면서

너니 나니 하고 다투기만 하는가.

- 경허 선사

 

바람 잦아 머루 다래 떨어지고

산 높아 달이 일찍 진다.

내 곁에는 사람 그림자 없고

창 밖에 흰구름만 자욱하다.

- 부휴浮休 선사

 

깨달음이 개인적인 체험이라면,

닦음은 사회적인 의무와 나누어 가짐[廻向]으로 이어진다.

종교가 어느 문화 현상보다도 값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되돌리고 나누어 가지는

대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花落花開又一年

人生幾見月常圓

 

꽃이 피고 지기 또 한해

평생에 몇 번이나 둥근 달 볼까

 

빛의 비가 내리네

보이지 않는 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지고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없네

여기 환희의 비가 내리네

하늘 한복판에서 활짝 핀 연꽃처럼

한번 빛의 비에 젖은 이는 더는 젖지 않으리

누가 이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

- 까비르(인도의 성자)

 

그대,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무엇을 하든 무엇을 꿈꾸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라.

- 랄프 트라인(미국의 사상가)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란 바로 그대의 집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걸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 속으로

그대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 까비르(인도의 시인)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밟지 말라

내가 걷는 이 발자국

뒷사람의 길잡이 되리니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 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 류시화 <벌레의 별>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한편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그만큼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정신은 그만큼 부담스러우며

이웃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구만리 장천에

구름 일고 비 내린다

사람이 없는 텅 빈 산에

시냇물 흐르고 꽆 피더라.

- 황산곡黃山谷 (중국 송대의 시인, 서예가)

 

홀로 있는 시간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라.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맹목적인 겉치레의 흐름에 표류하고 만다.

홀로 있어야만 벌거벗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성찰할 수 있다.

 

벗이여, 어디 가서 '나'를 찾는가

나는 그대 곁에 있다

내 어깨가 그대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절이나 교회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

그런 곳에 나는 없다

인도의 성ㅅ러운 불탑들 속에도

ㅚ교의 찬란한 사원에도

나는 없다

어떠한 종교의식 속에서도

나를 찾아낼 수 없으리라

다리를 꼬고 앉아 요가수행을 할지라도

채식주의를 엄격히 지킨다 할지라도

그대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벗이여, 나에게 말해 다오

무엇이 신인가를

신은 숨 속의 숨이니라.

- 까비르

 

산중무일력 부지하세월  山中無日曆 不知何歲月

 

꽃을 보러 정원으로 나가지 말라

그럴 필요는 없다

그대 몸 안에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의 꽃잎을 달고 있다

그 수천의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에서나

정원 밖에서도

늘 피어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보라.

- 까비르

 

여섯 살 때 나는 내가 일곱 살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교를 향해서 가고 있었으며, 그것은 보다 나은 인가니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다기보다 나는 현실적이고 영리한 인간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늘 성공을 향해서, 행복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 나이 쉰이 되고 보니, 때로 나는 내 자신이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참담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순간마다 내 자신에게 이렇게 묻느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스와미 묵타난다(인도의 성자)

 

잎이 말끔히 져버린 후박나무와 은행나무는

그 빈 자리에 내년에 틔울 싹을 벌써부터 마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생태계의 자연스런 리듬일 것이다.

이런 리듬이 없으면 삶은 지루하고 무료하고 무의미해진다.

이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위대한 교사다.

 

현자의 눈에는 하늘은 남자이고 땅은 여자다. 땅은 하늘이 떨어뜨린 것을 키운다.

땅에 열이 없으면 하늘은 열을 보내고, 땅이 생기를 잃고 메마르면 하늘은 비를 내린다.

하늘은 아내를 위해 식량을 찾아 헤매는 남편처럼 땅 위를 맴돌고, 땅은 주부처럼 노상 바쁘고 자식을 낳아 젖을 먹인다.

땅과 하늘은 지혜롭게 일하므로 거기에도 지혜가 잇다고 생각하라.

땅과 하늘이 서로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째서 애인들처럼 마주보고 끌어안고 있겠는가.

땅이 없으면 어떻게 꽃이 피고 나무들이 자랄 수 있으리. 하늘은 또 무엇을 위해 물과 열을 만들어낼 것인가.

 

낮과 밤은 겉으로는 적이지만 같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

서로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밤과 낮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밤이 없으면 인간의 본성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따라서 낮에 소비할 것도 없으리라.

- R. A. 니콜슨 루미(회교의 시인이며 신비주의자)

 

잔 들고 혼자 안자 먼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삼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하노라

- 고산孤山 윤선도 《산중신곡山中新曲

 

이 종소리 듣는 이마다 번뇌를 끊고

지혜 기르고 보리심을 발해서

지옥 고통 여의고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 건져지이다.

- 종송鐘頌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을 둘러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 <그 문전門前>

 

하늘엔 유독가스 떠가고

강물엔 중금속이 흐르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짓밟히는 곳….

 

도시는 매연으로 뒤덮여

농촌은 농약에 찌들어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공해로 사그라드는 곳….

- 공해풀이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의 가사 일부

 

봄풀을 깔고 선정禪定에 들면

솔바람 소리는 그대로 범패梵唄

티끌 하나 날아들지 못하는 이곳

죽음도 삶도 내 몰라라

- 왕유王維(당나라 시인이며 재가불자在家佛子)의 <변각사에 올라>

 

산속의 스님 달빛이 탐이 나서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돌아와 뒤미처 생각하고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네.

- 이규보 <우물 속의 달을 보고>

 

깊은 산에 홀로 앉아 있으니

만사가 시들하여

진종일 문을 닫고

무생無生을 참구한다.

생애를 되돌아보면

별 물건이 없나니

다만 한 잔의 파에

한 권의 경책뿐.

- 부휴 선사

 

환상의 바다에 노닐기 칠십여 년

오늘 아침 이 몸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텅 비고 고요해서 아무것도 없으니

보리니 생사니 떠들지 말게.

- 부휴 선사의 임종게偈

 

대체로 인간의 삶에는 나이가 귀하나니

이제 와 비로소 지난 일을 뉘우친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닿는 저 바닷물 쏟아

산승의 '판사'란 이름 말끔히 씻을까.

- 휴정 선사 '스스로 비웃음[自嘲]'

 

보았네 못 보았네 떠들지 말고

그대도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손님 접대는 다만 이것뿐

절집엔 원래 잔정 따윈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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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24. 15:1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1 추상화 감상법

 

글, 사진 / 유재길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4

 

082

빛 12 ㄷ 148

 

빛깔있는 책들 148

 

유재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 8대학 졸업, 미술평론가이며 조형예술학 박사, 강릉대학 미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논문은 '피터 브뤼겔의 회화의 상징성과 화면구성' '바자렐리 연구' '1960년대 시각미술 탐구그룹' 등이 있다.

 

|차례|

 

추상화란 무엇인가?

    추상의 의미

    구상의 의미와 역사성

    추상화의 탄생

    칸딘스키의 추상화

    몬드리안의 추상화

현대 미술 사조에 나타난 추상화

    미래주의 추상화

    절대주의 추상화

    구성주의 추상화

    다다이즘 추상화

    초현실주의 추상화

    앵포르멜 추상화

    추상표현주의 추상화

    다양한 표현의 추상화

한국 추상화의 전개

    한국의 앵포르멜

    한국의 개념적 추상

    새로운 매체 활용의 추상화

앞으로의 추상화

용어 해설

참고 문헌

 

지오바니 벨리니(G. Bellini, 1430~1516)의 '레오나르도 로르당총독'  가장 전형적인 아카데믹한 초상화의 유형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베니스파의 거장으로 극사실에 가까운 초상화를 제작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다. 1501년경 작품.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 레오나르도 다 빈치(L.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  섬세한 인물 묘사와 공기 원근법으로 화면의 깊이를 주며, 뛰어난 인물의 성격 묘사로 미술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인물화로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1503~1505년 작품.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 클레(P. Klee, 1879~1940)의 '광대 세네시오'  광대의 이미지를 잘 살리면서도 원과 사각의 단순한 형태 구성과 황색 계통의 원색 사용으로 순수 추상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이다. 1922년 작품. 독일 발(Bale)미술관 소장.

▲ 구석기 원시 동굴 벽화 '들소'  기원전 13500년경의 제작으로 사냥이 잘되게 해달라는 주술적 의미와 들소의 사실적 묘사가 잘 나타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된 그림이다. 스페인 알타미라동굴.

▲ 뮈브리지(E.Muybridge, 1830~1904)의 '인체의 움직임 No 133'(흑백 사진)  사진작가인 뮈브리지는 인물과 동물, 새의 움직임을 연속 촬영하여 평면에 실제 움직임 표현을 강조한다. 미래주의 화가와 키네틱 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1887년 사진 촬영. 뉴욕 개인 소장.

▲ 세잔(P. Cezanne, 1839~1906)의 '생빅토와르산'  자연의 형태가 점점 더 파괴된 후기 작품으로 어렴풋이 산과 집들이 색면과 입방체로 나타난다. 세잔은 입체파와 추상미술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대표적 화가이다. 1904~1906년 작품. 독일 발(Bale)미술관 소장.

▲ 피카소(P.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  이 작품은 입체파를 탄생시킨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원근법 무시로 3차원의 환영적 공간이 파괴되며 해체된 인물 묘사로 아카데믹한 구상화의 탈피가 시작된다. 부분도에서 보듯 원시적 인물 표현으로 대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화가의 주관적 표현이 강조된다. 1907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칸딘스키(V. Kandinsky, 1866~1944)의 '푸른 기사'  두터운 질감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화풍을 따른 초기 작품이다. 1904년 작품. 취리히 개인 소장.

▲ 칸딘스키의 '추상 수채화'  추상화 No 1로 유명한 이 작품은 1910년 제작이 아닌 1913년 '구성 7'을 위한 습작으로 확인되었다. '종말과 부활'이라는 주제가 있는 이 그림은 사실 순수 추상이라기보다 상징의 모자이크이며 정신과 정념의 추상 표현이다. 니나 칸딘스키 소장.

▲ 몬드리안(P. Mondrian, 1872~1944)의 '바다'  바다의 수평선 이미지를 느끼게 하기보다 짧은 직선의 수평적 구성에 관심을 두고 순수 조형적 미를 찾아 나가는 초기 작품이다. 1914년 작품. 독일 스튜트가르트 현대미술관 소장.

▲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 - 우기'  몬드리안의 후기 대표작으로 도시의 마름모꼴 공간 구성을 통하여 보편과 균형의 조형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보다 심오한 시대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차가운 기하학 선들과 색채의 화려함은 새로운 시대 정신을 상징한다. 그의 추상화는 인간의 고양된 정신이 다이내믹한 리듬감을 통하여 나타나며 작가는 이같은 순수 추상 작업에 최후의 승리를 걸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조용히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1942~1943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발라(G. Balla, 1871~1958)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손'  점묘파와 같은 표현 기법으로 구상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움직임이라는 리듬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요소는 추상화로 변모하는 단계이다. 1912년 작품. 런던 개인 소장.

▲ 발라의 '추상적 속도감(달리는 자동차)'  역동적 팽창의 속도감 표현과 함께 움직임 자체가 아름답다는 인식으로 화면은 점점 더 추상화되어 간다. 1913년 작품. 로마 개인 소장.

▲ 세베리니(G. Seberini, 1883~1966)의 '7월 14일의 조형적 리듬'  프랑스 대혁명 일자의 제목으로 주제가 등장하나 역시 구체적 형태가 사라지고 움직이는 원, 원추, 원통이나 사각형의 구성력을 보여 주는 추상화의 초기 단계를 보여 준다. 1913년 작품. 로마 개인 소장.

▲ 말레비치(K. Malevitch, 1878~1935)의 '나무꾼'  말레비치는 1909년부터 러시아의 농민을 주제로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원시적 성격을 표현한다. '나무꾼'도 이같은 경향의 하나로 나무 토막들과 나무꾼의 형태가 원통, 원추와 같은 기하학형으로 대상의 단순화가 이루어지고 러시아의 민속적 색채가 강조되는 초기 작품이다. 1912년 작품.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 소장.

▲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구성'  말레비치는 "슈프레마티즘(절대주의)이라는 말을 나는 예술에서의 지고한 순수 감성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절대주의 구성 작품 속에서 종래의 회화적 개념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곧 그의 작품은 대상의 형태 묘사에서 미적 감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허식을 벗겨 낸 뒤에 남겨진 '핵'을 끄집어 냄으로써 '순수한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흰 바탕에 흑색과 적색의 정방형 사각이 그려진 절대주의 추상화로 기존의 회화적 개념을 크게 벗어난다. 이는 순수하게 철학적인 형태와 색채 의식 운동'이며 '흰 바탕 위에 흰 정방형'이라고 하는 극한의 세계로까지 발전한다. 1914~1916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엘 리시츠키(El Lisyzsky, 1890~1941)의 '푸룬(proun) No 6'  엘 리시츠키는 러시아의 건축가, 디자이너, 화가로 활동한 미술가이다. 평면에 입체 구성과 같은 공간감을 보여 주는 '푸룬(proun)' 연작을 제작하였다. 푸룬이란 러시아 말로 새로운 것을 확립하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그는 일련의 작품에 이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공간 구성으로 다이내미즘과 서정성을 살려 나간다. 1919년 작품. 런던 데이트갤러리 소장.

▲ 뒤샹(M. Duchamp, 1887~1968)의 '너는 나를(Tu m')  1918년 미국의 수집가이며 전위술의 후원자인 카트린느 드라이에를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반예술을 주창한 작가의 의도와 옵 아트와 같은 시각적 효과를 나타낸다. 연필로 그린 자전거 바퀴, 병마개 뽑이, 모자걸이, 겹쳐진 마름모꼴의 색표지, 지시하는 화가의 손과 그림자 등이 눈속임의 기법으로 그려졌으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의 상징으로 개념 미술이다. 카트린느 드라이에 기증, 예일대학미술관 소장.

▲ 피카비아(F. Picavia, 1879~1953)의 '우드니(젊은 미국 소녀)'  청색조의 환원과 입방체 면들로 가득 찬 입체파적 초기 추상화이다. 대상의 단순화는 이미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작은 면들의 조형적 구성력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고자하는 작품이다. 1913년 작품.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소장.

▲ 슈비터스(K. Schwitters, 1887~1948)의 '메르츠 빌딩 25A'  독일 하노버 다다를 대표하는 슈비터스는 이 작품에서도 보듯 인쇄물, 노끈, 망사 천, 막대기 등 폐품 오브제로 추상적 화면을 구성하여 반예술과 동시에 새로운 조형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1920년 작품. 뒤셀도르프 시립미술관 소장.

▲ 당기(Y. Tanguy, 1900~1955)의 '엄마, 아빠 놀라워요!'  바닷속의 풍경과 아메바와 같은 미생물들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환상의 추상화로 초현실주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1927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마송(A. Masson, 1896~1955)의 '물고기 싸움'  자동 기술법에 의해 초현실의 세계를 그린 마송은 이 작품에서도 보듯 무질서한 선들로 나타낸 추상적 형상들은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내면 세계를 상징화한다. 1927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들로네(R. Delaunay, 1885~1941)의 '리듬'  오르피즘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프랑스의 추상 화가 들로네는 다수의 환원을 여러 가지 색체로 화려하게 표현하여 '리듬'과 같은 자율적 조형의 아름다운 순수 추상화를 제작한다. 세잔과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대상의 재구성보다 화려한 색채와 환원의 움직이는 표현으로 새로운 양식의 추상화를 창조한다. 1934년 작품.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소장.

▲ 부리(A. Burri, 1915~)의 '싸코 No 5'  의무관이었던 알베르토 부리는 2차대전 뒤 화가로 변신, 엥포르멜 추상화로 유명해진다. 이 작품은 낡은 넝마와 적색, 흑색의 두터운 물감이 화면을 덮으면서 크고 작은 비정형의 불규칙한 구성을 보여 준다. 마티에르의 효과를 잘 살린 뛰어난 감성의 표현적 추상화이다. 1953년 작품. 로마 개인 소장.

▲ 타피에스(A. Tapies, 1923~)의 '벽 위의 묘법'  타피에스는 스페인의 대표적 앵포르멜 화가로 벽면과 같은 화면을 만들고 위를 긁거나 낙서 같은 형태로 추상적 기호들을 만들어낸다. '벽 위의 묘법'은 화면을 흙벽으로 만들어 거칠고 자유 분방한 선으로 극적 분위기를 연출한 원초적 행위의 추상화이다. 1971년 작품. 파리 갤러리매트 소장.

▲ 잭슨 폴록  드리핑 기법으로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 놓고 제작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은 화면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의 말을 실감나게 한다. 1951년 사진.

▲ 잭슨 폴록(J. Pollock, 1912~1956)의 '벽화'  미국의 대표적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폴록은 초현실주의 경향의 초기 작업 이후 행위성을 강조한 추상화를 제작한다. '벽화'는 초현실주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그의 초기 작품으로 뒤에 제작되는 'No 1' 등 일련 번호가 붙은 액션 페인팅의 기초가 된다. 1943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데 쿠닝(W. Kooning, 1904~)의 '여인'  1950년부터 수년간 지속적으로 나타난 데 쿠닝의 '여인' 연작은 구상적이 아니라 추상 표현이다. 여기서 그는 한 인물의 형상 묘사나 잡다한 조형적 구성보다 자신이 화면 속에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육체적 행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1950~1952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 로드코(M. Rothco, 1963~1970)의 '무제'  액션 페인팅으로 불리는 추상표현주의와 달리 로드코의 색면 추상은 대단히 사색적이며 명상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 작품에서 보듯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로드코의 커다란 색면은 이성과 질서 의식을 뛰어 넘는 독자적 구성이다. 단순하게 이등분된 분홍색과 흑색의 넓은 이등분 색면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면서 사색의 장을 만든다. 1953년 작품.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 바자렐리의 '흑과 백'  옵 아트의 선구자인 바자렐리는 평면에서 잠재적 움직임의 표현을 추구한다. 제3기에 그려진 '흑과 백' 시리즈는 시각 잔상 작용을 이용한 움직임과 볼록면의 공간이 평면에 등장하여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1950년 작품. 개인 소장.

▲ 유영국(1916~)의 '산'  유영국의 추상화는 산을 중심으로 하늘과 나무 등 풍경 이미지를 단순화한 서정적 느낌을 바탕으로 한다. 1962년 작품.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환기(1913~1974)의 '론도'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추상화이다.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면들과 적, 청, 황색의 대비가 조화를 이룬다. 인물들이 단순화되어 초기 구성적 추상화의 단계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38년 작품.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박서보(1931~)의 '묘법 No 920120'  70년대의 캔버스 위에 연필로 그려진 초기 묘법과 한지와 혼합 재료를 사용한 후기 묘법 연작은 모노크롬 추상화에 나타난 두 개의 독특한 양식적 변화이다. 전자는 단순한 묘법의 반복된 행위로 개념성에 중점을 두었으나 후자는 물성의 강조와 묘법의 구성적 조화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게 된다. 1992년 작품.

▲ 백남준(1932~)의 '다다익선'  "TV라는 캔버스를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격렬하게, 제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형성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라는 백남준의 말처럼 그의 비디오 작품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표현의 미술이 이루어진다. 1988년 작품.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 소장.

▲ 백남준의 '자석 TV'  자석의 힘에 의해 화면에 나타난 영상은 자유로운 추상적 형상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매체 이용의 추상 표현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963~1965년에 제작된 초기 비디오 작품.

 

posted by 황영찬
2013. 1. 23. 10:2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0 조선최대갑부 역관

 

이덕일 지음

2006, 김영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1060

 

911.05

이24역

 

표정있는 역사

 

중개무역으로 동아시아 상권을 장악한 조선의 통역사!

역관은 능통한 외국어실력과 탁월한 협상력으로 청일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 빈약한 조정의 재정을 확충하고 나아가 전체 조선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실무외교관으로 국제무역상으로 첩보원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중인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딛고 막후의 실제로 부상한 역관,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그들의 역사를 다시 쓴다!

 

국제무역상, 외교관, 무기수입상, 첩보원, 개화사상가, 독립운동가……

천의 얼굴을 가진 역관을 입체적으로 복원한 최초의 책!

 

⊙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거지 행색의 허생에게 거금 만 냥을 선뜻 꿔준 변씨는 역관 출신으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실존인물이었다.

⊙ 역관들은 요즘으로 치면 '투잡스족'으로 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

⊙ 세계 최초의 중국어 학습서를 저술한 사람은 조선의 역관이다.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여겨지는 조공은 실제로는 조선의 잇속을 챙기는 국제무역이었다.

⊙ 명나라 홍등가에서 기녀를 구출해주고 뒤에 보답받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상도>의 임상옥이 아니라 역관 홍순언이었다.

⊙ 은행이 무역업체에 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얻는 것처럼 조선 관아들은 앞 다투어 역관에게 대량의 은(銀)을 빌려줌으로써 재정 확충을 도모하였다.

⊙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대외정보 수집능력으로 역관은 화약의 원료를 밀수입하거나 직접 제조하여 조선군의 전투력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역관 오경석은 병인양요 때 뛰어난 첩보활동으로 프랑스의 막강한 함대에 맞선 조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 대대로 유명한 역관을 배출한 집안의 서녀(庶女) 장희빈은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기사환국의 주역이었으며, 장씨 집안은 남인정권과의 '정경유착'으로 큰 권세를 누렸다.

⊙ 역관은 천주교 서적과 새로운 서양선진문물을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개화사상의 주역이 되었고, 이는 한말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역관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앞선 시대감각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촉진하였다.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희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등 생존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는 최근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역관에 초점을 맞추고 조선 경제의 숨은 주역이었던 그들의 눈부신 활동상과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문체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방송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미지의 역사로 이끌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newhis19@hanafos.com

 

차례

 

시리즈 발간사

머리말

 

1장. 고려 말 ~ 조선 초의 역관

2장. 조선 초기의 공무역과 사무역

3장. 청 건국 이후의 역관 성격의 변화

4장. 역관은 어떻게 국제무역을 주도했는가

5장. 역관의 최대 경쟁자, 상인이 등장하다

6장. 역관의 다양한 역할

7장. 역관과 정치

8장. 시대를 앞서간 역관

 

더 깊이읽기

주요 인용 문헌

찾아보기

 

열하일기(熱河日記)

▲ <연행도(燕行圖)>(일부)  조선의 연행사들이 말을 타고 북경성을 향해 가는 모습이다. 기록화답게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작가 미상. 1760년.

▲ <통신사행렬도>(일부)  역관의 행렬 모습

▲ 『몽어유해(夢語類解)』  조선시대 몽고어 어학 교재로, 이억성9李億成)이 영조 44년(1768)에 간행하였다. 현존하는 『몽어유해』는 정조 14년(1790)에 방효언(方孝彦)이 다시 개정하여 간행한 것이다.

▲ 여진문자 동경  여진문자로 된 동경

▲ 노걸대, 박통사언해, 첩해신어(왼쪽부터)

▲ 조선통신사비  대마도 역사 민속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초량왜관도(草梁倭館圖)>  1783년 변박(卞璞)이 그린 것으로, 당시의 왜관 전경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 『광국지경록』  종계변무를 축하하기 위해 선조와 여러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모은 것. 1744년, 영조 20년에 간행.

▲ 조양문  사행길에서 조선 사신이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

▲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지은 전승비(戰勝碑). 송파구 석촌동에 자리하고 있다.

▲ 연경 성시도(일부, 작자 미상)  중국 청나라의 북경을 그린 지도로 각국도첩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사신이 들어가는 문인 조양문이 오른쪽에 있고, 외국 사신이 머물던 회동관은 정양문의 오른쪽에 있다.

▲ 압록강 변계도  압록강 주변의 국경지역을 그린 지도

▲ 노걸대(왼쪽), 『담헌연기(湍軒燕記)』

▲ 산해관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 지점으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불릴 만큼 예로부터 군사 · 교통의 요충지였다.

▲ 베이징의 회동관  명 · 청시대 조선 사신이 묵었던 공식 숙소인 이 자리에는 현재 캐피탈 호텔이 들어서 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명나라에 조회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 『통문관지(通文館志)』

▲ 백두산정계비 탁본  숙종 38년(1712)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 이 비는 만주사변 때 일제가 철거하였다.

▲ 『신전자초방』  1698년 역관 김지남이 북경에서 배워온 자초술을 남구만의 건의에 따라 국문 번역을 붙여 간행하였다.

▲ 김지남 묘  김지남은 청에 맞서 조선의 영토를 지켜냇다. 경기도 고양시 소재

▲ 장희빈 묘  장희빈은 유명한 역관 가문인 인동 장씨가의 서녀(庶女)였다.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경내

▲ 북경의 북천주당  이승훈은 이곳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왼쪽),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오른쪽)

▲ 박규수의 재동 집터에 우뚝 선 아름다운 백송

▲ 『유년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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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21. 15:1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9  민화

 

글, 사진 / 김영학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3

 

082

빛12ㄷ 147

 

김영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서울교육대학 교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와 동대학 가정대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정산 고등기 자료관 관장으로 있다. 1958년 한국 최초의 조각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전 초대 작가를 거쳤고, 1991년 제2회 조각 개인전을 가졌다. 저서로는 「김영학 조각 작품집「미술교육」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민화는 한국 민족의 순수한 감장 표현'(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논문, 1992, 3), '반가상 조각'(서울교대논문집 2호, 1969. 3) 등 다수가 있다.

 

|차례|

 

머리말

민화의 발생

    한국의 자연 환경

    한국의 가옥 구조

    도배와 민화

    병풍과 민화

    방랑 화가와 무낙관

민화의 명칭과 종류

    민화의 명칭과 개념

   민화의 종류와 화제

민화의 재인식

    민화에 대한 재인식

    민화의 미관

민화의 특징적 표현에 대한 현대적 고찰

    정면성에 의한 표현

    동시적 표시에 의한 표현

    환상에 의한 표현

    의인화에 의한 표현

    등축도법에 의한 표현

    입체에 의한 표현

    특수 기법에 의한 표현

맺음말

참고 문헌

찾아 보기

 

▲ 일월곤륜도  일월곤륜도는 권위를 상징하여 그린 그림으로 당채를 짙게 사용하여 도색하였다. 해와 달을 하늘에 띄우고, 중국의 곤륜산을 상징한 산과 출렁이는 바다, 그리고 양쪽 옆에는 바위와 적송이 배치되었는데 이것이 일월곤륜도의 일반적인 도식이다. 덕수궁 중화전 당가의 일월곤륜도

▲ 용그림  권위의 상징으로 그리는 용그림은 황색을 주조로 사용하며 반드시 여의주가 수반된다. 용의 발톱 수에 따라 황제용, 제왕(諸王)용, 경상(卿相)용 등으로 구별한다. 115×66cm

▲ 겸재 정선의 실경 산수도  겸재는 위 그림의 왼쪽 밑에 그려진 바위처럼 의인화된 그림을 최초로 표현한 화가이다. 56.3×32.2cm

▲ 구운몽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꿈속에서 이루려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허망함을 기본 설정으로 한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병풍으로 그렸다. 10곡 병풍 가운데 8곡 병풍의 그림들이다. 36× 117cm

▲ 송학도  우리나라의 나무들은 기후 조건으로 대개가 곡목으로 성장하는 까닭에 민화에도 구부러진 나무가 많이 나타난다. 41×78.5cm.

▲ 책거리 병풍(부분)  예전 우리 선조들의 사랑방을 주로 장식하던 이 책거리 병풍은 기명절지(器皿折枝) 가운데에서도 책이 주를 이루는 그림이다.

▲ 화조도  꽃과 새를 그린 그림으로서 비교적 사실에 바탕을 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36.5×66cm

▲ 연화도  연화도에는 반드시 물고기가 곁들여져 있으며 더러는 오리(원앙새)가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104×33cm

▲ 신사임당의 초충도  사임당이 맨 처음 시작한 이 초충도는 이후 민화나 백자 등의 표면화에도 많이 응용되었다.('전통문화' 150호)

▲ 포도도  늙은 포도송이 밑에 다람쥐가 있는 민화로 생존의 양태가 표현되어 있다.(「이조의 민화」일본 강담사)

▲ 호표도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표현된 그림이다. 호랑이의 어깨 부분에서 동시성에 의한 표현이 엿보인다.(「이조의 민화」일본 강담사)

▲ 송학도  소나무, 학, 바위를 내용으로 그린 민화로서,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획기적으로 3단으로 나누어 그렸다.(「이조의 민화」일본 강담사)

▲ 봉황도  나무 밑 한 쌍의 봉황을 그린 것으로 묘법이 아주 단순하다. 64×36cm.

▲ 쌍마도  흰 말과 점박이 말 한 쌍이 표현되어 있다. 동양화와 민화의 두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그림이다. 32×38cm.

▲ 연화도  물새가 연밥을 먹고 있는 그림으로 전형적인 연화도의 민화이다.

▲ 모란도  태극 문양이 이채로운 화분에 모란이 풍성하게 꽂혀 있다. 47.4×113cm.

▲ 동시성에 의한 표현의 그림  피카소의 '거울 앞의 여인'

▲ 환상에 의한 표현의 금강산도  금강산 그림이지만 각기의 바위 모습이 미로를 연상케하는 괴상한 모습이다.(조자룡 「금강산도」에밀레 미술관)

▲ 박생광의 탁몽  박생광은 한국의 불교적 설화, 무속 등의 전통적 소재를 구사하여 민족적 이미지를 유감없이 나타낸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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