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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9. 14:5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8 三國志 2 풍운이 감도는 천하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4,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4855

 

823.5

나15삼6 2

 

정비석(1911~1991)

 

평북 의주 출생으로 일본 니혼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6년 단편 <졸곡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된 데 이어, 1937년 단편 <성황당>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54년에 성 윤리에 대한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자유부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한국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하였다. 그 이후 그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는데, 1981년에 발표한 《소설 손자병법》은 한국 출판사상 최대 판매부수를 기록하였다.

또한 1985년에는 조조, 유비, 제갈량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인생 흥망사가 펼쳐지는 동양 최대의 고전인 《삼국지》를 출간하여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 메이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정비석 특유의 생동감 잇고 웅장한 표현으로 소설적인 재미를 극대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의 최고 영예는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이라는 소신을 가졌던 그는 고희를 넘긴 80년대 이후에도 《여수》, 《김삿갓 풍류기》 등 단행본으로 따지면 14권 분량이나 되는 작품을 일간지에 연재하며 전업 작가의 한 전범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위의 작품 이외에도 《청춘산맥》(1949), 《여성전선》(1951), 《홍길동전》(1953), 《산유화》(1954), 《야래향》(1957), 《유혹의 강》(1958), 《여성의 적》(1960), 《혁명전야》(1962), 《여인백경》(1962), 《욕망해협》(1963), 《명기열전》(1976), 《소설 명성왕후》(1987) 등 수십 권에 달한다.

 

◎ 등장인물

 

손권孫權(182~252년)

오(吳)의 초대 황제. 재위 222~252년. 손견의 둘째 아들.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 손권은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촉나라의 유비와 함께 적벽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그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 후 형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했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했다. 그 결과 위 · 촉 · 오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에 손권도 황제위에 올랐다.

 

조운趙雲(?~229년)

유비의 맹장. 자는 자룡(子龍). 처음에는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나중에 유비의 신하가 되어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쫓겨 아들과 감 부인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가 단신으로 이들을 구출해냈다. 219년에 한중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위의 주력부대를 만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였다. 221년,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때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 수비에 나서 공을 세웠고 228년, 제갈공명이 기산에 출전할 때도 등지와 함께 양동작전으로 시곡에 진주했다가 위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용감하게 싸웠다.

 

유장劉璋(?~219년)

후한 말의 군웅의 하나. 자는 계옥(季玉). 아버지 유언의 뒤를 이어 익주목이 되었다. 그는 조조가 원정군을 이끌고 오자 구원세력으로 유비를 맞아들였다. 촉에 들어온 유비는 한중(漢中) 방위에 나서는 체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유장이 있는 성도로 진격했으며, 곧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손권이 형주를 탈취한 뒤 유장은 그에 의해 다시 익주목에 임명되었다.

 

정욱程昱

위(魏)의 모사. 자는 중덕(仲德). 194년 조조가 두 번째 서주 공격에 나섰을 때 장막과 진궁이 배반하여 근거지인 연주를 여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진성과 다른 두 현(縣)을 확보하고 조조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196년에는 헌제(獻帝)를 맞아들이자는 조조의 제안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욱과 함께 적극 찬성했으며, 유비를 경계해 그를 죽이자고 진언했다.

 

장수張繡

후한 말 군웅의 하나.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변장 · 한수의 군사를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삼촌인 장제의 군대를 인계받아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다시 반하여 완(宛)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조조의 장남 조앙을 죽였다. 그러다가 관도의 싸움 때 모사 가후의 진언에 따라 조조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장소張昭(156~236년)

오(吳)의 건국공신. 자는 자포(子布).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했다가, 197년에 손책이 강동에 발판을 마련했을 때 그의 참모가 되었다. 200년, 손책의 유촉(遺囑)을 받은 그는 비탄에 잠긴 손권을 꾸짖어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 후 주유 등과 협력하여 손권을 잘 보좌했다.

 

양표楊彪(142~225년)

양수의 아버지. 자는 문선(文先). 사도 벼슬에 있으면서 동탁의 천도에 홀로 반대하다가 파면당했다. 또 조조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공융의 간언으로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후에 한(漢) 황실이 종말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신병을 핑계로 은퇴했다.

 

우금于禁(?~222년)

위(魏)의 명장. 자는 문측(文側). 원소와의 싸움에서 맹위를 떨쳐 호위장군에 임명되었다. 219년, 번성에서 관우의 군대와 싸우다 홍수를 만나 투항했다. 그 후 손권이 관우를 무찔렀을 때 위나라에 귀환했으나, 예전에 자기가 촉나라에 투항했던 모습이 조조의 무덤에 그려진 것을 보고 굴욕감을 느껴 끝내 병을 얻어 죽었다.

 

순유荀攸

조조의 모사. 순욱의 조카. 일찍이 황문시랑을 지냈으나 낙향해 있다가 숙부와 함께 조조의 막하로 들어갔다. 조조가 적벽대전의 보복을 계획할 때 높은 벼슬을 미끼로 서량의 마등을 불러다가 죽여 후한을 없앴다. 뒤에 조조가 위왕이 되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 결국 그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

 

미축

촉(蜀)의 중신. 자는 자중(子仲). 서주의 명문 출신. 서주목 도겸의 부관이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유비를 서주로 맞이하는 사신이 되었다. 그 후 유비를 섬기면서 가장 큰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195년,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성을 빼앗기고 유랑하게 되었을 때도 그가 자금을 대고 누이동생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유대劉岱(?~192년)

후한 말의 군웅의 하나. 189년, 동탁에게 발특되어 연주 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지에 도착하자 반 동탁군을 일으켜 원소 등과 연합군을 형성했다. 192년 4월, 청주의 황건적 백만이 연주에 침입했을 때, 지구전으로 싸우라는 포신의 책략에 따르지 않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동승董承(?~200년)

헌제(獻帝)의 장인. 196년, 헌제를 맞이하기 위해 안읍에 온 조홍의 군사를 물리쳤다. 후에 헌제를 따라 허도에 들어가 유비 등과 함께 조조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비가 서주 정벌을 나간 사이에 계획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정보程普

오(吳)의 장수. 자는 덕모(德謨). 오나라 장수 중에서 가장 연로하고 인물 등용이 뛰어나 존경을 받았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을 무찌른 후 더욱 신임을 받았고, 그가 죽자 손책과 함께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또 손책이 죽자 그의 동생 손권을 잘 보좌했다.

 

진규陳珪

후한 말의 명사. 자는 한유(漢瑜). 197년 원술이 여포와 연합하려는 것을 보고 이것이 유비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걱정하여 여포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합류하도록 했다. 그 공으로 조조의 영접을 받고 원술 군을 격퇴했다. 후에는 여포를 물리치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손건孫乾

유비의 심복. 199년, 유비가 서주에 근거하면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당시에 원소와 손을 잡기 위해 사절로 갔다. 또 201년에는 여남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유표에게 의지하려 했을 때도 사정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장요張遼(171~221년)

위(魏)의 장수. 자는 문원(文遠). 정원, 하진, 동탁, 여포 등을 섬기다가 조조의 막하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전공 가운데서도, 합비를 에워싼 손권의 군대를 8백의 돌격대로 격퇴한 무공이 가장 빛난다. 그 후에도 자주 손권의 군대를 무찔러 오나라 군사를 두렵게 했다.

 

조앙曹昻(?~197년)

조조의 맏아들. 자는 자수(子修). 생모인 유 부인이 일찍 죽어 정 부인에게 양육되었다. 197년, 조조를 따라 남양의 장수(張繡) 정벌에 참가하여 항복을 받았으나, 이해 장수의 두 번째 반란 때 죽었다.

 

저수沮授

원소의 모사. 원소의 조조 공격을 반대하다가 진중에 감금되었다. 그러면서도 천문을 보아 적의 야습을 예견하고 대책을 건의했다. 그러나 결국 이 싸움에서 대패하게 되었고 달아나다가 끝내 붙잡혀 죽었다.

 

장흠蔣欽

오(吳)의 장수. 자는 공혁(公奕). 손책 · 손권을 섬긴 장수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몽과 함께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후에 관우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진궁陳宮(?~198년)

여포의 참모. 198년 10월, 하비성에서 조조 군의 포위를 받고 여포에게 재삼 작전을 헌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항복하여 여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 관우

 

차례

 

허수아비 천자

근왕병 일어나다

간웅의 싹

이리를 끌어들이다

손책의 등장

강동의 소패왕

정략결혼

조조의 실책

원술의 참패

조조의 지략

함락되는 소패성

진규 부자

여포의 패망

천자의 은밀한 조서

피로 쓰는 연판장

유비, 조롱을 벗어나다

멸망하는 원술

적장을 살려 보내다

독설가 예형

태의 길평

잔인한 보복

약조삼장

안량 · 문추를 베다

금석 같은 충의

난관을 돌파하여

다시 만나는 삼 형제

손책의 최후

관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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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17. 14:5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7 법정 스님 숨결

 

변택주 지음

2010, 큰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SB038790

 

220.4

변883ㅅ

 

사람은 저마다 제 빛깔과 향기를 지녀야 한다!

 

저자는 '법정 스님과 십 년' 인연을 갖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풀어놓는다.

조그만 일에도 천진스런 아이처럼 잘 웃으시고, 넘치는 유머감각은 영락없는 개그맨 수준이고,

흙처럼 구수하고 정겨운 민화 속 호랑이를 꼭 빼닮으셨다는, 겉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한없이 여리시고 푸근하고 세련미 묻어나는 법정 스님 인간 면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리 싸고 싸도 향이 지닌 향기를 어쩔 수 없듯이,

맑고 향기로운 스님 향기는 사람들 가슴에 잔잔하고 따뜻하게 여울질 것이다.

 

부처님 숨결이 감싸드는 고즈넉한 길상사는 한 폭 그림처럼 그렇게 내 안에 들어앉았다.

그 뒤로 십 년 세월을 빠짐없이 스님 숨결을 느끼면서 법음을 듣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삶 속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며 큰 나무처럼 살고 계신 법정 스님과 십 년……

늘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담아 주신 글, '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나 또한 새롭게 시작해 보고 마음이 일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맑고 향기로운 스님 숨결에 슬기의 배를 띄우련다.

_ 저자의 말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절을 짓기 위해 큰 나무를 쓸 줄 알고, 아름다운 장식물을 만들려고 작은 나무를 쓸 줄 아는 숙련된 목수가 되십시오. 큰 나무는 큰 쓰임이 있고 작은 나무는 작은 쓰임이 있습니다.

_ 본문 중에서

 

맑고 향기롭게

'맑고 향기로운 삶'이란 자기 마음자리를 제대로 찾고 세상과 자연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는 삶이다. '맑고 향기로운 삶'이란 세상과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기 위해 마음이나 몸을 제대로 써서, 너를 살리고 빛내는 목수로 사는 일이다.

 

智光 변택주

아둔하고 미욱한 탓에 좀 슬기로워지라고 법정 스님께서 智光이란 법명을 지어주셨다. 하지만 '슬기로운 빛'이란 법명이 무색하게도 여태 어리석음을 벗지 못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수십 년을 옷만 만들었던 바보 변택주 업業을 바로 세우고 나다움을 찾으면 모두가 이긴다고 믿는다.

1998년부터 법정 스님과 인연을 맺고 법회 진행을 맡고 있으며, 아울러 컨설팅과 인문학 강연도 겸하고 있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바른 수행이 아님을 알아라.

종교 여행은 시작은 있고 끝은 없다.

그저 늘 새롭게 출발할 뿐이다.

그 새로운 출발 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차례

 

여는 글

 

1장_난 나이고 싶다

절 / 만남은 눈뜸이다 / 조각과 나온 분 / 가난한 절되기가 어려운 세상 / 이제껏 지켜온 정절이 아까워 / 네 생각을 말해라 / 거꾸로 세상보기 / 진면목 / 난 나이고 싶다 / 남에게 머리 못 맡겨요 / 지금 그 자리 / 행지실 / 내 생명 뿌리가 꺾였구나 / 서슬 푸른 구도 그 끝에는 / 마지막 한 마디 / 미리 쓰는 유서 / 마음으로 깨쳐 가슴으로 느끼려면 / 있으라고 이슬비 / 민화 속 호랑이 같은 스님 / 천진불 스님 / 하회탈 같으신 스님 / 우리가 꿈꾸는 도량은? / 사랑해요 동감! / 친견 / 음식 진언 / 틈새, 숨길을 트자

 

2장_나밖에 모르면

좋은 말씀을 찾아서 / 지금도 마음 아픈 엿장수이야기 / 결 고운 그 마음이 걸림돌 / 철부지 / 마감시간 / 무공덕 / 바람처럼 걸림 없이 드나드는 삶을 누려야 / 유유화화 / 소유와 쓰임 / 숫자는 단 세 개뿐 / 시간은 목숨이다 / 영혼에는 세월이 없다 / 어제는 전생, 오늘은 새 날 / 예배와 염불은

 

3장_나눈 것만 남는다

길상사, 시작부터 알싸한 뺄셈 / 극락전이 본전인 까닭은? / 맑고 향기롭게 / 손으로 말한다 / 토끼풀을 뽑아든 아이 / 하숙집 할머니 / 도탑고 넉넉한 품 / 맑은 복 / 사랑 온도 지금 몇 도인가 / 워낭소리를 내자 / 나눈 것만 남는다 / 세상에서 가장 큰 절 친절 / 쓰던 말을 버리고 / 착하게 살라 / 새 식구를 들이는 입양의 날 / 한 생각 일으키면 / 무엇을 읽을 것인가 / 거리낌 없는 관세음보살님 원력 / 부조, 그 사랑 나누어 드림

 

4장_길을 열라 나는 자유다

흐름을 따라가시게 / 하나 속에 모든 것이 / 소를 몰아야지 수레를 몰면 어쩌나 / 식사대사 생사대사 / 알아차림 / 고통은 사랑이다 / 온몸으로 '듣기' / 길에서 배우기 / 스승의 날 / 길은 거기 있지만 / 길을 열라 자유! / 비어 있음은 비어 있음이 아니다 / 비움, 그 빼기 철학 / 재와 제사 그 얼 이어짐 / 죽음은 새로운 시작 / 오! 늘 좋은 날! / 울음터는 어디인가? / 진실한 말이 지닌 힘

 

맺는 글

 

"지나간 생을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에 불법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 늘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은 어떤 만남에 의해 거듭 형성되어 갑니다. 일찍이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우리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도 부처님 가르침 덕분입니다."

- 법정 스님, 2002년 동안거 결제법회에서

 

"내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법정 스님을 많이 닮았다는 말을 낯선 사람들로부터 들을 때가 더러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요. 그 스님이 나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실린 법정 스님 말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떠올릴 때,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서는 남기는 글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 <무소유> '미리 쓰는 유서'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텅빈 속에서 무엇인가 움이 틉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소리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졌느니 버렸느니, 선하니 악하니, 아름다우니 추하니하는 일체 분별들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 2008년 여름 안거 결제 법석에서 하신 법정 스님 말씀

 

"사랑이라는 건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저 아이가 좋아할 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죠.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르는 겁니다.

- 어느 법석에서 하신 법정 스님 말씀

 

 

"나는 가끔 내 손을 들여다보면서 고마워할 때가 있다. 나무와 찬물을 다루다 보니 손결이 거칠어졌지만 이 손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물을 길어 오고, 땔감을 마련하고,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것도 이 손이다. 그리고 내 삶 자취와 생각을 이렇게 문자를 빌려 표현해 주는 것 또한 이 손이다."

- 법정 스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겨우살이' 중에서

 

"선한 일을 하면 이기심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선한 일을 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들라. 도움이 필요해 도와주면 되레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와줘라. 좋은 것을 주면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을 주라."

 

"사실 저는 아직까지도 행복이란 게 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행복을 떠올리는 자체로도 매우 즐겁다는 것입니다."

- 쓰지 신이치(문화인류학자, 환경운동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뭔지 아십니까? 불교도 기독교도 또는 유대교나 회교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입니다……."

- 법정 스님이 어느 법석에서 하신 말씀

 

무재칠시(無材七施)

 

첫째, 안시眼施. 눈으로 나눔. 눈은 마음을 담는 창이란 말이 있듯이, 눈으로 하는 말이 한 마디 말보다 더 울림이 크다. 상대에 대한 호의를 담아 따뜻하고 그윽한 눈빛을 나눌 일이다. 늘 좋은 눈으로남을 대하면 천안天眼과 불안佛眼이 열린다. 눈길에 따라 사람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해진다.

둘째, 화안시和顔施. 얼굴로 나눔. 얼굴에 가득 넉넉하고 따사로운 욱음을 담아 부드럽고 살갑게 대하는 일이다. 아침에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하는 사람은 하루가 꽃피어나고, 하루를 부드러운 얼굴로 사는 사람은 인생이 꽃핀다.

셋째, 언사시言辭施. 말로 나눔. 덕담. 언제나 좋은 말과 부드러운 말씨로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사랑 담은 말, 칭찬하는 말, 위로하는 말, 양보하는 말이 그것이다.

넷째,  신시身施. 몸으로 나눔. 내 몸을 놀려 적극 나서서 남을 돕는 일. 상대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거나, 상대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일.

다섯째, 심시心施. 마음으로 나눔. 다른 이를 대할 때 자비심을 갖는 일. 마음을 늘 평화롭게 하여 일희일비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는 일이다.

여섯째, 상좌시床座施. 자리를 나눔. 언제나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일. 경쟁자 자리를 빼앗지 않고 외려 더 넓게 보고 그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일곱 번째, 방사시房舍施. 방과 집을 나눔. 자기 집을 남에게 하룻밤 숙소로 내어주는 일이다. 또는 다른 이에게 쉴 만한 공간을 내주는 일이다. 상대가 힘들고 괴로울 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줄수록 내 존재 영역이 더 넓어진다.

 

 

"'미륵반가사유상'과 로댕이 조각한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이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 앞에 서면 저절로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우리 안에 저며 듭니다. 그러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그러한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없습니다. 그저 무거운 고요가 감돌 뿐입니다.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아름다움, 무애無碍 미美가 깃들어 있는데, 생각하는 사람에는 이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미륵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법정 스님 말씀

 

직소폭포에서 내소사까지는 전혀 표지판이 없어 순전히 느낌으로 길을 가야 하므로 잘못 들기 쉽다. 한참 개울을 따라가다가 꺾인 지점에서 왼쪽으로 개울을 건너 낮은 솔밭 언덕으로 올라갔다가 혹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는가 싶어 다시 개울가로 한참 따라가니  뽕나무를 가꾸는 산촌이 나와 아차 싶었다. 처음 솔밭 언덕길이 내소사로 넘어가는 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바른 길로 가면서도 확신이 없으면 다시 헤매게 된다는 교훈을 이 길에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낯선 길에서 '느낌'이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배웠다. 우리는 길에서 많은것을 배운다.

- 법정 스님 <물소리 바람소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나는 이곳에 와 지내면서 새삼스레 죽음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은 삶과 무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연소요, 소모이므로 순간순간 죽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이란 삶 끝이아니라 다음 생 시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나는, 평소부터 죽음에 따르는 의례 치루는 번거로운 의식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여럿이 사는 절에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많은 이웃들에게 내 벗어버린 껍데기로 인해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버리고 떠나기>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에서

 

"천고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을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석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울지 못한다. 그런 울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가운데 슬플 때만 우는 줄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至情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대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 도강록

 

 

 

 

 

 

 

 

 

 

 

 

 

 

 

 

 

 

 

 

 

 

 

 

 

 

 

 

 

 

 

 

 

 

 

 

 

 

 

 

 

 

 

 

 

 

 

 

 

 

posted by 황영찬
2013. 1. 16. 17:1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6 문자도

 

글, 사진 / 유홍준, 이태호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2

 

082

빛 12 ㄷ 146

 

빛깔있는 책들 146

 

유홍준-------------------------------------------------------------------------

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였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 강좌를 개설하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현재는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1986, 열화당),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1993, 창작과 비평사), 편역서로 「미학에세이」(1998, 청년사) 등이 있으며 '단원 김홍도 연구' 등 한국미술사 관계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이태호-------------------------------------------------------------------------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고대 산수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김홍도의 진경산수' '다산 정약용의 예술 세계' '조선시대의 초상화' '1940년대 친일 미술' 등이 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그림으로 본 옛 서울」 등의 저서와 평론집 「우리 시대, 우리 미술」이 있다.

 

|차례|

 

글머리에

조선 후기 민화의 유행과 쓰임새

민화의 성격에 대한 문화사적 의의

    민화의 확산

    민화의 성격

효제 문자도의 의미와 쓰임새

문자도의 표현 내용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문자도의 양식 변천

맺음말

주(註)

명품 감상

도판 해설

 

 

 

 

 

▲ 문자도 8폭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 禮義廉恥)라는 8가지의 도덕적 덕목을 그림 글씨로 만들어 8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집안치레와 병풍 사용이 유행되면서 나타난 서민 미술 문화의 대표적인 예로 생각되고 있다. 이 민화 문자도는 처음에는 글자를 엄정한 해서체로 하고, 각 획에 삽입되는 그림은 각 덕목에 해당하는 고사성어의 내용을 도해(圖解)하는 방식으로 출발하였고, 그 양식은 각 지방에 따라 또한 제작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오게 되면 민화 문자도는 그 변형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글자는 아주 단순화되고, 삽입되는 그림은 내용보다도 치장 효과에 더욱 주목하게 되어 일종의 그래픽 디자인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힐 만하다. 직선을 위주로 하면서 약간씩 곡선의 미를 살려 낸 글씨체의 간결한 변형이 현대적 세련미를 느끼게 해주며, 획 속에는 꽃과 새로써 글씨의 내용이 아니라 화사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장식미로서 흘렀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문자도의 도덕적 엄정성이 아니라 밝고 화려한 희망과 꿈이 서려 있는 장식미술로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각폭 60.9×36.4cm, 종이에 채색, 운향미술관 소장.

▲ '悌'자 문자도

▲ '孝'자 문자도  75.0×42.0cm, 개인 소장.

▲ '孝'자 문자도

▲ '悌'자 문자도

▲ '忠'자 문자도(도판 1의 부분)  19세기, 장지에 먹과 채색, 35.0×54.5cm, 개인 소장.

▲ '信'자 문자도  75.0×42.0cm, 개인 소장.

▲ '信'자 문자도

▲ '禮'자 문자도(도판 4의 부분)  19세기 후반, 장지에 먹과 채색, 개인 소장.

▲ '義'자 문자도  48.0×29.2cm,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 '廉'자 문자도(도판 4의 부분)  19세기 후반, 장지에 먹과 채색, 개인 소장.

▲ '廉'자 문자도  75.0×42.0cm, 개인 소장.

▲ '恥'자 문자도(도판 6의 부분)  19세기 후반, 장지에 먹과 담채, 개인 소장.

▲ '禮義廉恥' 문자도

▲ '孝'자 문자도(도판 8의 부분)  18세기 후반, 장지에 먹과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 [도판 4]

▲ [도판 6]

▲ [도판 7]

▲ [도판 8] 18세기 후반, 장지에 먹과 채색, 각폭 74.2×42.2cm, 호암미술관 소장.

민화 문자도의 현존 작품 가운데에서 비교적 시대가 오랜 작품으로 생각되는 정통적인 양식이다. 여덟 글자가 혁필의 준경한 필세로 쓰여지고 그 획 속에 각종 도상들이 섬세하고 친절하게 묘사되었으며 채색은 화려의 극을 달릴 정도로 원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글씨는 정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고 그림은 화사한 맛을 자아내는 민화 문자도의 걸작으로 손꼽힐 만한 명품이 되었다. 도상을 그려 낸 솜씨를 보면 결코 허드레 환쟁이의 솜씨가 아닌 듯하다. 아주 작은 도상이지만 말탄 사람, 누각 속의 인물들 표현을 보면 인체 비례도 정확하고 표정도 갖추고 있고, 화조화 형식에서 따온 소나무, 매화, 국화 등의 표현에서도 세필과 채색에 능숙한 화공(畵工)의 솜씨를 역력히 느낄 수 있다.

각 글씨의 그림은 문자의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산수, 인물, 화조라는 세 장르를 각 폭마다 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형식을 보여 주며 그로 인하여 이 그림의 중후한 인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채색은 진채를 사용하여 화려함이 돋보이는데 글자 획을 거의 메우는 듯 여백을 약간만 남김으로써 먹빛의 강한 느낌을 눌러 준 것이 더욱 조형적으로 성공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도판 10]

 

 

 

 

 

 

 

 

 

 

 

 

 

 

 

 

 

 

 

 

 

 

 

 

 

 

 

 

 

 

 

 

 

 

 

 

 

 

 

 

 

 

 

 

 

 

 

 

 

 

 

 

 

 

 

 

 

 

posted by 황영찬
2013. 1. 15. 09:1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5 三國志  1 도원에서 의를 맺다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6,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4854

 

823.5

나15삼6 1

 

《삼국지》는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뛰어난 소설인 동시에 오랜 세월을 두고 가장 널리 읽힌 소설이기도 하다.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삼국지》는 대단히 흥미진진한 소설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온갖 철학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용이 풍부한 교양서이다.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새로운 책!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문학 작품이자 뛰어난 병법서!

거장 정비석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최고의 명저 《삼국지》!

 

난세의 교활한 영웅 조조, 덕을 무기로 활약하는 유비, 신출귀몰한 재사 제갈량 등 수많은 호걸과 재사들의 인생 흥망사가 펼쳐지는 동양 최대의 고전! 뛰어난 문학작품이자 최고의 병서인 《삼국지》가 한국 문학의 거장 정비석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다!

 

《삼국지》는 몇 번을 읽어도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읽을 때마다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다. 그만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새로운 책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만은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삼국지》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저라는 것을 나는 서슴지않고 단언하는 것이다.

- 정비석

 

◎ 등장인물

 

유비劉備(161~223년)

촉한(蜀漢)의 초대황제. 자는 현덕(玄德).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의형제를 맺은 관우 · 장비와 함께 그 토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삼고지례(三顧之禮)로 제갈공명을 맞아들여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다가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오자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했다. 220년 조비가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오른다. 그 후 손권에게 빼앗긴 형주의 탈환과 죽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다가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사를 제갈공명에게 위탁하고 병사한다.

 

관우關羽(?~219년)

촉한(蜀漢)의 무장. 자는 운장(雲長). 후한 말의 동란기에 유비 ·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토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했을 때 조조에게 사로잡혀 귀순을 권유받았으나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적벽대전 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 공략 때에는 형주에 머물러, 그 무력과 위풍(威風)으로 조조와 손권을 두렵게 했다. 그러나 결국 형주에서 조조와 손권의 협공을 받아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장비張飛(?~221년)

촉한(蜀漢)의 무장. 자는 익덕(翼德).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진다. 장비 역시 유비 · 관우와 의형제를 맺고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형주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장판교 위에 홀로 서서 "내가 장비다"라고 일갈하여 위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후 관우가 죽은 뒤 그 복수를 위하여 오(吳)를 치러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조조曹操(155~220년)

위(魏)왕조를 세운 사람. 자는 맹덕(孟德). 황건적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華北)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손권 ·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했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을 잡았으나 제위에 오르지 않았다.

 

동탁董卓(?~192년)

후한 말의 군웅 중 하나.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잡고는 권세를 마음껏 휘둘렀다. 이에 대해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反) 동탁 토벌군이 조직되자, 190년 동탁은 낙양성을 소각하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그 후 그는 점점 더 횡포가 심해졌으며, 마침내 왕윤의 모략에 걸려들어 여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여포呂布(?~198년)

후한 말의 무장. 자는 봉선(奉先). 동탁의 심복이었으나 왕윤의 계책에 걸려 초선을 두고 동탁과 다투다가 결국 192년에 동탁을 암살했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유비에게서 서주(徐州)를 빼앗고, 곧이어 원술과 결탁하여 하비에서 유비를 공격한다. 그러다가 조조가 유비를 도와 여포를 공격하자, 마침내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원소袁紹(?~202년)

후한 말의 군웅 중 하나. 자는 본초(本初). 반 동탁 토벌군을 일으켜 동탁을 장안까지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고 하북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다. 그러나 조조와 화북(華北)에서 상호 견제하던 중 200년에 관도에서 대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만다.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

 

손견孫堅(156~192년)

오(吳)의 군주 손권의 아버지. 반 동탁 토벌군이 일어나자 낙양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제릉(諸陵)을 수복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우물 속에서 전국옥새를 얻는다. 192년 형주의 유표와 싸워 크게 이겼으나 자기의 용맹을 믿고 단기로 현산(峴山)에 출진했다가 전사했다.

 

손책孫策(175~200년)

아버지 손견의 뒤를 이어 강남(江南)을 평정했다.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에 있는 한나라 헌제(獻帝)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원술袁術(?~199년)

원소의 사촌동생. 자는 공로(公路). 원래 원술은 원씨(袁氏) 일가에 의한 제위 찬탈을 뜻하고 있었다. 원술은 197년 수춘을 수도로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다. 그러나 원소와 조조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 과정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공손찬公孫瓚(?~199년)

후한 말의 군웅 중 하나. 191년 황건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원소의 죄상을 들추어 그와 싸웠으며, 유우를 쳐서 유주를 손에 넣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199년에는 원소의 대군에 패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진何進(?~189년)

후한의 권신. 자는 수고(遂高). 이복동생이 후궁으로 들어가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고 황자 변(辨)을 낳자 급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환관을 주멸하려는 계획을 짰다가 발각되어 결국 환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도겸陶謙(132~194년)

후한 말 군웅 중 하나. 자는 공조(恭祖). 황건적 토벌 때 서주 자사가 되었다. 조조 일가의 몰살에 연루되어 조조의 침공을 받는다. 그러다가 자신을 도우러 온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주려 햇으나 유비가 거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병으로 죽는다.

 

가후賈詡(147~223년)

조조의 모사. 자는 문화(文和). 어려서부터 장량(張良) · 진평(陳平) 등에 비유될 만큼 유능한 재사로 인정받았다. 동탁이 살해되었을 때, 이각에게 장안 공격을 진언하여 여포를 몰아내게 했다. 후에 장수의 참모로서, 또 조조의 모사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유표劉表(142~208년)

형주 자사. 자는 경승(景升). 조조 · 원소의 관도 싸움 때 결정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천하 웅비의 기회를 놓쳤다. 그가 죽은 뒤 조조가 형주를 차지한다.

 

이각李(?~198년)

동탁의 부하. 전선에 나가 있을 때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자 군사를 동원하여 여포를 몰아내고 왕윤을 처형한 뒤 동료인 곽사와 함께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후에 헌제가 파견한 토벌군에 잡혀 효수당했다.

 

장제張濟

동탁의 부하. 동탁이 죽은 후 이각 · 곽사 등과 함께 동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 이각 · 곽사의 난 후 장안에서 군사를 모아 형주 · 양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채모蔡瑁

형주의 호족. 유표의 형주 입성에 협력한 것 외에 누이를 유표의 후처로, 조카를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로 시집보내 유씨와 굳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유표의 전처 소생 유기를 제쳐두고 유종으로 대를 잇게 했다.

 

하후돈夏候惇(?~220년)

조조의 장수. 자는 원양(元讓). 조조의 거병에 참가하여 동군 태수가 되었다. 여포와의 싸움에서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다. 조비가 위왕(魏王)이 되었을 때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뒤 병사했다.

 

곽사郭汜

동탁의 부하. 항상 동료인 이각과 행동을 같이하다가 동탁이 죽은 후 장안을 지배하여 후장군(後將軍)이 되고 군정을 마음대로 움직였다. 후에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차례

 

옮긴이의 말

해설

 

소년 천자 유비

어지러운 세상

가는 곳마다 황건적

환란은 꼬리를 물고

의사 장비를 만남

숨은 지사 관운장

형제의 의를 맺다

건군과 첫 승리

싸움터를 전전하며

황건적 섬멸

칙사를 때리다

쓸쓸한 귀향

황실의 내분

천자를 폐위시키다

눈물의 노래

맹주 원소

격전 또 격전

조조의 참패

군응할거

손견의 죽음

미녀 초선

동탁의 멸망

감도는 전운

난세의 간웅

맹장 여포의 몰락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마땅히 일어서리.

갑자년만 되면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 장각

 

잔디는 푸르건만

봄은 오지 아니하고

중천에 제비만

쌍쌍이 날고 있네

한 줄기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곳

구름 짙은 저 숲속에

나의 옛 궁전이 있도다

언덕 위에 오가는

저 사람들아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을

뉘라서 풀어줄 이 없다더냐

- 소년 폐제(홍농왕)

 

아아, 천지는 바뀌고 일월은 뒤집혔다

만승의 귀하던 몸이 오늘 신세 웬일인고

신하에게 핍박 받는 오래지 않은 목숨

대세는 갔으니 눈물만이 넘치는구나

- 소년 폐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또한 꺼지도다

몸이 제희(帝姬)되어 임 못 뫼시는 이 원한

생사가 길이 달라 예서 헤어지네

끝없는 이 내 슬픔을 어이하리오

- 당비

 

서쪽 우두머리도 한낱 사내요

동쪽 우두머리도 한낱 사내다.

사슴이 달려서 장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어려움은 없게 되리라.

 

수명우천(受命于天)

기수영창(旣壽永昌)

 

千里草

何靑靑

十日上

不得生

천리초

청청은 하나

열흘이면

죽어버리는 것을!

 

여자의 살결은 약하다고 하지만

거울 대신에 검을 품으면

검은 정의의 마음을 굳세게 하도다

나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련다

부모 아닌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것이 또한 나라를 위함이라면

악기를 버리고 춤추는 손에

비수를 숨겨 들고 역적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독배(毒杯)를 올렸도다

들려온다, 죽음에 직면한 이 귓가에

장안의 백성들이 드높이 부르는 평화의 노래

그리고 천상(天上)에서 나를 부르는

죽음의 소리!

- 초선

 

 

▲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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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11. 13:3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4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지음

2012, 역사의 아침

 

 

시흥시대야도서관

SB066564

 

911.058

이24ㅅ

 

사도세자의 고백 개정판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힌 것은 윤5월 13일. 그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신음하다 이승을 하직했다.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는 뒤주의 모서리를 잡고 '아버지 살려주소서'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가 뒤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세자를 살려주소서'라고 영조에게 빈 조정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 홍인한. 그리고 김상로 · 홍계희 등 집권 노론 인사들은 모두 세자의 반대편에서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 이종성 · 조현명 · 조재호 같은 소론 인사들은 세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사실상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이 양편이 완충지대없이 좁은 뒤주에서 맞부딪친 결과 발생한 것이다.

 

가해자의 기록, 『한중록』의 이면에 감춰진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말하다!

 

영조 38년 윤5월 21일. 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 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 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메웠다. 『한중록』은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 세자의 부인이 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이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너무나 다른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그리고 가해자의 기록이면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사도세자 죽음의 비밀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자 현전하는 사료들을 취합하고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이 책에 담긴 내용만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강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중록』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저자의 손을 떠난 이 책이 또 하나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이덕일 李德一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인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이다. 특히 『조선 왕을 말하다』(전2권), 『조선왕 독살사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조선선비 살해사건』 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등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hangaramhistory.org)

다음카페(httP://cafe.daum.net/hangaram-forum)

 

차례

 

들어가는 글_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는 사람들

프롤로그_ 노회한 정객, 혜경궁의 진실

 

1부  삼종의 혈맥

    축복 속에 태어난 세자

    부정父情

    효종을 닮은 소년 천자

    박문수의 예언

 

2부  눈물의 임금

    장희빈과 경종, 모자의 한

    이복형제의 비극, '경종 독살설'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

 

3부  슬픈 서막

    저승전의 한상궁

    당습을 하지 말라

    어린 왕자의 정치 체험

    노론 세자빈

 

4부  임금과 대리 임금

    무제의 반만큼만 짐을 섬겨라

    대리청정의 숨은 뜻

    임금보다 어려운 세자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무슨 면목으로 황형을 뵙겠는가

 

5부  정적政敵

    만약 다른 왕자가 있다면

    나주 벽서 사건의 파문

    부자의 갈림길

    그때부터 게장은 먹지 않았소

    세자의 꿈, 북벌

    또 하나의 정적, 외척

 

6부  사도세자의 반격

    풍원군이 살아 있었으면

    온궁의 행복

    진현을 둘러싼 의문의 8개월

    세자가 관서로 간 까닭은?

    거 땅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

 

7부  비극

    노론의 승부수, 나경언의 고변

    차라리 미쳐버려라

    영조가 분노한 이유

    운명의 그날, 세자가 부른 사람

    아버님, 살려주소서!

    뒤주 속의 세자, 뒤주 밖의 궁궐

 

8부  미완의 꿈

    세손을 끌어내려라

    영조의 마지막 전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들의 마지막 반격

    노론과의 결별, 남인과의 결합

 

에필로그

주요연표

주요인물

제2판 머리말

제1판 머리말

 

『영조실록』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하다.

사도세자가 밤을 세워 금천교禁川橋 가에서 대죄하다.

 

『영조실록』 38년 5월 24일

임금이 홍화문에 나가 각전各廛 시민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 창경궁 집복헌  영조11년(1735) 1월 21일, 훗날 세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자, '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正殿으로 성종 15년(1484)에 건축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건축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영빈 이씨 인장  훗날 '선희궁'으로 불리기도 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나인이었다가 영조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 왕세자 탄생 축하연(부분)  태어난 당일 원라로 책봉된 왕자 '선'은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모든 당파의 지지 아래 세자가 되었다.

▲ 사도세자 책봉 죽책  영조 12년(1736) 3월 15일, 백관들이 하례한 가운데 창덕궁 인정전에서 두 살짜리 원량 선의 세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 박문수(1691~1756)  비록 소론에 당인이었지만 원자를 두고 노론과 소론, 각 당파의 당론이 다른 것에 대해 '유일한 삼종의 혈맥을 당파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면 원자와 나라의 운명이 망국의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영조에게 나타냈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나경언이 고변한 지 21일째 되던 날)

영조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었다.

▲ 의릉(경종릉)  조선의 20대 왕인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경종은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 후사없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서울시 성북구 소재.

▲ 김일경 단소(壇所)  신임사화를 주도했던 소론 강경파 김일경은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되었다가 목호룡과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했다. 경상북도 예천군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4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이,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조실록』 같은 날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假仙 등을 베어 죽였다

처음에 박필수는 세자를 따라 놀면서 세자를 종용하여

좋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가선은 안암동의 여승인데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였다.

이때 임금이 박필수와 가선 및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 왕세자 태학 입학식도  사도세자는 여덟 살 때 태학에 '입학'했다. 물론 세자가 태학에서 실제로 교육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그만큼 유학을 중시한다는 의사 표시이자 세자가 이제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접어 들었음을 의미했다.

▲ 탕평비  세자의 태학 입학을 기념하며 세운 비로, 세자를 포함한 성균관 유생 모두가 편벽된 당심을 갖지 않고 두루 통하는 군자의 도를 깨치기를 바라는 영조의 마음을 비에 새겼다. 서울시 성균관대학교 구내 소재.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벽되어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마음이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 창덕궁 선원전  역대 임금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다. 영조 16년(1740) 5월, 신하들이 당론을 하자 영조는 이곳에서 왕위와 옥체를 무기로 빗속에서 양위 소동을 벌인다. 양위 소동이 있을 때마다 어린 세자는 영문도 모른채 그 혼란 속으로 던져졌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홍봉한(1713~78)  아버지가 예조 판서를 지낸 홍현보인 까닭에 음직으로 출사할 수 있었다. 딸 홍씨가 세자빈이 되고 그해 과거에 급제하면서 비로소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 창덕궁 금천교  왕가와 사가를 구분 짓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다리다. 이곳을 지남으로써 왕가의 일원이 된 홍씨는 훗날 일어날 비극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5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이틀이 지난 날)

영조가 경화문景化門에 나아가 직접 지은 하교로써

자신이 정사에 복귀하는 이유를 담은 반교문을 반포했다.

이익원李翼元을 증도부처하였는데, 반교할 때

소리를 내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영조실록』 같은 날

죄인 서필보徐必普와 정중유鄭重維의

목을 베어 전시하라 하였는데

구 동궁(사도세자) 시절에 범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

- 사도세자가 열 살 때 지은 시

 

부엉아 부엉아 내 자식 잡아먹었으니

나의 보금자리는 헐지 마라

정성으로 어린 자식 길렀는데 불쌍하구나

장맛비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 벗겨다가

창을 엮고 문을 얽었으니

이제 너 같은 아랫것들이 어찌 감히 나를 모욕할 수 있겠는가

내 손이 다 닳도록 내 갈대 이삭 뽑아다가

내 집을 쌓고 보금자리를 깔았다

내 입이 병난 것은 내 집이 없기 때문이니라

내 날개는 부러지고 내 꼬리는 닳아 빠졌으며

내 보금자리는 위태하여 비바람에 흔들거리는지라

내 소리는 어려움에 떤단다

-치효장鴟鴞章(부엉이장)

▲ 조현명(1690~1752)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 조씨의 숙부로, 형 조문명과 함께 영조 때 탕평책을 이끈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또한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 사도세자 대리청정 '휘지'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사진은 대리청정을 위임받은 왕세자가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 증표다.

▲ 육상궁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이다. 영조는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을 이곳 육상궁의 별감으로 특채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6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사흘이 지난 날)

"아! 비록 만고에 없는 일을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 보좌에 나갔으니 조선을 중흥해야 하는데

오늘 대신臺臣(3사의 신하들)이 어찌 감히

정사에 복귀하는 처음에 연달아 아뢰는가?"

 

『영조실록』 38년 윤5월 17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나흘이 지난 날)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엄흥복을 진국하였다.

이때 엄흥복이 조재호가 한 불령한 말을 듣고서

이미에게 전했고 이미가 홍봉한에게 전했는데,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어 친국이 있게 된 것이다.

임금이 판부사 조재호와 응교 이미를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 나주 금성관  영조 31년(1755), 이곳의 대문에 걸린 '흉서'로 영조의 탕평책에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나주벽서사건이 시작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소재.

▲ 『천의소감』  신임옥사에서부터 나주 벽서 사건까지를 언급한 책으로, 경종 대 노론의 행위는 모두 영조와 나라를 위한 충성이었음을 주장한다.

▲ 『능허관만고』  사도세자의 시문집으로 사, 부, 시뿐아니라 대리청정할 때 군신들의 상소에 대한 답과 판부判付 등이 실렸다.

▲ 정순왕후 생가  영조 35년(1759), 당시 15세이던 김한구의 맏딸은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해 정순왕후가 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는 세자보다 열 살이 어렸다. 충청남도 서산시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8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닷새가 지난 날)

죄인 엄흥복을 수구문 밖에서 참하였다.

결안하기를 "본디 허황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지목을

받아왔는데, 4월 사이에 만나서 긴요치 않은 수작을 나누었고,

이로 인해서 무상하고 망측한 말을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히자 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죄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같은 날

임금이 "이현중李顯重을 강진현으로 정배하고,

조재호는 단천부로 안치하라"고 명했다.

▲ 온양별궁 전도  영조 36년(1760) 7월, 세자는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별궁인 '온궁'이 있는 온양의 온천으로 향했다.

▲ 영괴대  영조의 온양 별궁 행차 때 동행한 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들 정조가 세웠다. 충청남도 아산시 소재.

▲ 경희궁  원래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개명되었다.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어제조훈언해』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내린 열 가지 훈사를 책으로 만든 『어제조훈御製祖訓』을 언해한 책이다.

▲ 홍계희 묘  홍계희는 노론의 중진으로, 경기 감사로 있을 때 세자의 잘못을 고변하게 함으로써 세자가 죽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조 즉위 후 그의 두 아들 및 일가가 정조암살미수로 처형당하자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경기도 용인시 소재.

▲ 서명응(1716~87)  세자의 관서행에, 당시 대사성이었던 서명응은 세자의 근신들 중 관련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동궁일 때 빈객이었으며 정조 즉위 후 첫 번째 규장각 제학으로 규장각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9일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엿새가 지난 날)

13일(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에 따라서 들어온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관원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했다.

 

『영조실록』 같은 날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복정復政(영조가 세자를 폐하고 정사에 복귀한 것)을

하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 장의 치사致詞를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말했다.

▲ 조재호(1702~60)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아들이자 풍원군 조현명의 조카이며 효장세자빈의 오빠다. 죽음을 예견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세자가 도움을 청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세자를 보호하려 한다"는 말을 한 혐의로 사형당했다.

▲ 창경궁 선인문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는 영조의 명에 따라 창경궁 휘령전(문정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세자가 들어간 뒤주는 선인문 앞으로 옮겨졌으며 8일 뒤인 21일 세자는 그 속에서 운명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융릉  사도세자의 무덤(혜경궁 홍씨와 합장)으로 정조 대에 영우원, 현륭원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무 3년(1899)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경기도 화성시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여드레가 지난 날)

사도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미 보고를 들은 후이니 30년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라 한다.

 

『영조실록』 같은 날

세자궁의 중관 구흥삼具興三 등을

모두 종으로 삼으라고 명하다.

▲ 정민시(1745~1800)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세손의 옆을 지켰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과 함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끝까지 분수를 지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 『향사반차도설』  『경모궁의궤』의 한 부분으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서 제례를 올릴 때 제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그림이다.

▲ 채제공(1720~99)  정조 12년(1788) 우의정으로 발탁됨으로써 남인 유일의 정승이 되었다.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 장용영 내부평면도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해 문관을 배출하고 장용영을 강화해 무관들을 키운 것은 모두 개혁을 위한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였다. 정조의 꿈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 김조순(1765~1832)  정조가 세자빈으로 선택한 이는, 노론이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이었던 시파 김조순의 딸이다.

▲ 시사단試士壇  정조 16년(1792),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시를 기념해 세웠다. 정조는 이 별시로 노론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남인의  결속을 도모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소재.

 

단군 · 기자 이후 4천 년에

세상의 온갖 만물 성신들이 만들었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뚫어서

큰 강에는 나무다리 놓고 작은 강엔 줄다리를 놓았네

남쪽의 금강과 북쪽의 용흥강에

모두 다 다리 놓아 인객人客을 건너게 하였어라

유독 한수漢水(한강)에만 섣불리 논의하기 어려워

예전부터 다리 없이 배를 타고 왕래했네

백학은 아니 오고 청룡도 달아났건만

수면엔 무지개처럼 곧은 다리 보이지 않았네

13년 되던 해 가을 7월에

원침을 장차 만년 터전으로 옮길 때

대궐의 밤 시간은 효심으로 길어가고

애타는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했네

지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좋은 자리 찾았고

산악에 오른 적도 없이 명당자리 얻었도다

여룡이 구슬을 뱉으니 햇살이 빛나고

하늘 너머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봉새 깃이어라

찬란한 연화는 구슬과 비단을 따르고

명당을 찾아뵈니 금성을 에워쌌네

세심하게 공을 들여 책에서 찾아봐도

마치 귀신이 몰래 하사한 듯하네

성인聖人(정조)이 성인(사도세자)을 장사하니 길상吉祥이 뒤얽히는데

구슬 같은 언덕은 어찌 그리 고운고

흠의를 마련할 때 내탕고를 기울이고

갖가지 공역은 삯을 내어 꾸려서

털끝만큼도 농군들을 귀찮게 안 하니

닭과 개도 저마다 새 고을(수원)로 돌아갔네

의장 행렬은 앞길에 십여 리나 늘어서고

임금님 지나는 길 깎은 듯이 평탄하네

 

첫 겨울의 날씨 좋은 병진일에

임금 상여 떠나니 은초롱 늘어섰네

울긋불긋 의장대에 운삽이 뚜렷한데

새벽녘에 강물을 무사히 건넜도다

신이 외람됨을 잊은 채 긴 시詩를 지어

성사를 노래하여 천년 억년 전하노니

후인에게 부교浮橋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게 하여

하수에 임해 우임금의 업적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노라

- 부사직 이헌경李獻慶이 지어올린 「부교행浮橋行」이란 장시의 일부

 

주요 인물

· 사도세자(1735~62)

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종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열살 때 노론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군사와 용인用人을 제외하고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한다. 영조 31년(1735)에 소론이 일으킨 나주  벽서 사건 관련 옥사 확대에 반대한다 노론의 미움을 산다. 노론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소론 영수 조재호와 연합해 대항하려 하다가 나경언을 앞세운 노론의 역습을 당해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사망한다. 훗날 장헌세자와 장조莊祖로 추존된다.

 

· 영조(1694~1776)

사도세자의 아버지. 무수리 출신 어머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인 · 손론계인 희빈 장씨 소생의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된다. 이어서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 강경파에게 역적으로 몰리지만 경종에 의해 구원된다. 경종이 와병 중일 때 어의의 반대를 무릎 쓰고 독단적으로 약을 처방했다가 경종 독살설에 휘말린다. 즉위 후 탕평책을 추진해 노론과 소론을 병용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으로 탕평책을 포기한다. 이후 독주하기 시작한 노론과 사도세자가 대립하자 노론을 지지하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그 후 노론의 반대를 무릎 쓰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지지해 왕위에 오르게 한다.

 

· 경종(1688~1724)

희빈 장씨 소생으로 숙종의 큰아들이다. 어머니가 사삭된 후 소론의 보호로 왕위에 올랐으나 노론에 밀려 이복동생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케 한다. 소론 강경파가 대리청정을 역으로 몰자 이를 이용해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키는 신축 · 임인옥사를 단행한다. 재위 4년 만에 급서하자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전국 각지에 나붙고 소론 강경파 이인좌가 경종의 복수를 기치로 거병하기도 한다.

 

· 홍봉한(1713~78)

사도세자의 장인. 예조 판서를 지낸 홍현보의 아들로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으나 나이 서른이 넘도록 출사하지 못하다가 딸이 세자빈이 된 그해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입어 고속으로 승진해 노론 영수가 된다. 나주 벽서 사건 이후 세자가 소론으로 처신하자 당론에 따라 김상로, 홍계희, 윤급, 김한구 등과 함께 세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다. 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가 즉위한 후 온 집안이 화를 입는다.

 

· 혜경궁 홍씨(1735~1815)

노론 홍봉한의 딸로서 열 살 때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혼인 초에는 세자와 사이가 좋았으나 세자가 소론으로 처신하면서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를 버리고 친정을 택한다. 이후 세자의 여러 동정을 홍봉한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친정이 사도세자 살해의 주모자로 몰려 화를 입는다. 정조가 사망한 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손자 순조에게 친정을 변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중록』을 저술하는 노회한 정객으로 변신한다. 

 

· 조재호(?~1762)

소론 영수 조문명의 아들로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빈의 오빠다.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당쟁에 반대했고 노론이 독주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다. 이후 춘천에 은거하면서 노론에 둘러싸인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모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직후부터 홍봉한에게 공격을 당하기 시작해 세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한다.

 

· 인원왕후 김씨(1687~1757)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서 인현왕후 민씨의 뒤를 이어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친정은 소론가였으나 숙종이 노론을 지지하자 노론이 되었다. 경종 재위 시 노론을 배후에서 움직여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에도 정치적 위기 때마다 여러 차례 연잉군을 구해주었다.

 

· 정성왕후 서씨(1692~1757)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이 되었다가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이 되었다. 임인옥사 때 처조카 서덕수가 연잉군 관련설을 자백하고 사형당함에 따라 정치적 곤경에 처한다. 세제빈 시절 연잉군과 함께 많은 정치적 역경을 헤쳐나가 왕비가 된다.

 

· 선의왕후 어씨(1705~30)

경종의 계비. 1718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원래 노론 어유구의 딸이지만 경종이 소론으로 처신하자 그녀도 소론으로 정치 소신을 바꾸었다. 경종이 후사를 낳지 못하자 시동생 연잉군 대신 종친을 양자로 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다가 대비 인원왕후와 노론의 저지로 실패하고 경종이 승하한 지 6년 후 쓸쓸하게 세상을 뜬다.

 

· 김상로(1702~69?)

노론 영수이자 영의정으로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하고 숙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 등과 결탁해 세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정조 즉위 직후 관작이 추탈되고 그 아들 치양致良 · 치현致顯 등은 유배당한다.

 

· 윤급(1696~1770)

노론 중진으로서 탕평책에 반대했다. 자신의 청지기 나경언을 시켜 세자를 역적으로 고변케 했다.

 

· 나경언(?~1762)

노론 중진 윤급의 청지기로서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이다. 가산이 탕진되어 곤경에 처하자 윤급 · 홍봉한 · 김상로 · 김한구 등의 사주를 받아 거액을 받고 세자를 역모로 고변하는 일을 맡았다.

 

· 홍계희(?~1771)

노론 중진으로서 균역청 설치를 주관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홍봉한 · 김상로 등과 짜고 세자를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영조 47년에 사망했으나 그의 아들 지해 · 술해 등이 정조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멸문당하고 그 역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 이종성(1692~1759)

소론 영수로서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한다. 나주 벽서 사건 때 옥사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여 삭탈관직을 당한다.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가 임신해 세자에게 위기설이 나돌자 세자 호위를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영조 35년(1759) 사망한 것은 세자에게 큰 타격이었다. 사후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숙의 문씨(?~1776)

효장세자빈 조씨(현빈)의 나인이었는데 현빈이 사망하자 영조가 친히 장례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어 승은을 입는다. 오라비 문성국과 함께 노론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일에 가담했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사사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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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 11. 09:3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3 해인사 Haeinsa -1

 

▲ 대장경판전 내부  해인사 장경각 안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 장경각 수다라장의 외벽  건물의 앞면(위)과 뒷면(아래)의 살창을 아래위 크기가 다르게 설치하여 실내의 공기가 돌아 나가게 하였다.

▲ 세조 영탱  세조 3년에 그린 것으로 높이 109센티미터, 폭 72센티미터이다. 세조는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고 각 당우를 중수한 대공덕주이므로 그 진영을 그려 봉안했다 한다.

▲ 희랑 조사상  희랑 조사가 직접 자신의 모습을 조각했다고 전해지는 목조상이다.

▲ 경허 스님 친필 「방함록」

▲ 김정희 필 상량문  감색 비단에 금니로 된 이 상량문 끝에는 화재를 진압하는 하나의 비방으로 육위사를 등장시켰다.

▲ 길상탑  해인사 일주문 앞에 있는 이 3층석탑은 높이 3미터의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서 여기에서 발견된 탑지와 사리구 등은 당시 해인사의 실상과 신라 말의 사회상을 고찰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 원경 왕사비  천왕문과 해탈문 사이에 있는 이 비각에는 원경 왕사비가 안치되어 있는데, 비석의 명문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 원당암 보광전  해인사에 속한 암자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신라 왕실의 원찰이다.

▲ 원당암 다층석탑  보물 제518호로서 일명 청석탑이라 부른다.

▲ 원당암 배례석(위)과 다층석탑 부분(아래)

▲ 원당암 석등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 석등으로서 화사석은 결실되었으나 석등의 본래 모습은 우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공양 조화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 가운데 화(花)공양은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청대 문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화분으로 부처님 앞 불단에 장식했던 조화이다.

▲ 칠보 촛대  새 모양 칠보 촛대는 청나라 것으로 추측되는데 구한말에도 번성했던 해인사의 사세를 확인할 수 있는 물품이다.

▲ 칠보 촛대의 옆모습  암석 위에 선 두 마리의 새는 금빛과 분홍 · 파랑의 선명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키가 다른 것으로 보아 암수 한쌍을 만든 것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003 해인사 Haeinsa

 

글 / 이재창, 장경호, 장충식●사진 / 김종섭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1

 

082

빛12ㄷ 145

 

연혁 - 이재창----------------------------------------------------------------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이며 철학박사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 대학원장, 불교대학원장, 한국불교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고려사원경제의 연구」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불교의 사회경제관'외 다수가 있다.

 

건축 - 장경호----------------------------------------------------------------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동대학원 건축과 졸업,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중앙대 · 동국대 · 홍익대 강사,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백제사찰건축」「한국의 전통건축」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고려가람의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유물 - 장충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동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학과장,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장, 교무처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동국대 인문과학대학 학장으로 있으며 경상남도문화재위원, 한국미술사학회 정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신라석탑연구」「한국의 불상」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해인사 원당 석조물에 대하여'외 다수가 있다.

 

|차례|

 

해인사 창건

중창의 역사

해인사 배치

    대장경판전

    법보전

    동, 서사간고

    대적광전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경학원

    국사단

해인사 성보

    홍치4년명 동종

    고려대장경판

    오백 나한도 사경

    세조 영탱

    목조 회랑 조사상

    경허 스님 필 방함록

    김정희 필 상량문

    길상탑

    원경 왕사비

    원당암의 유물

참고 문헌

영문 요약

 

▲ 해인사 전경  창건 뒤 여러 차례의 큰 화재로 많은 건물과 요사들이 불탔으나, 지금도 75개의 말사와 16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해인사 전경

▲ 대적광전  해인사는 순응과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 해인사의 지붕선  통도사(불보 사찰), 송광사(승보 사찰)와 더불어 삼보 사찰 가운데 법보 사찰인 해인사는 신라 화엄 십찰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도 학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장경각과 현판  고려대장경을 봉안한 장경각은 여러 차례의 화재에도 해를 입지 않은 불가사의한 곳으로서 해인사를 대변하는 건물이다.

▲ 대적광전 뒤 장경각 사이

▲ 풍경

▲ 법라  대중을 모으는 신호로 사용한 고동이다.

▲ 요령  법요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 정중 3층석탑  대적광전 앞에 있는 이 3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일반형에 속하는 우수한 작품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그 조화를 깨뜨려 투박한 난간을 둘러 세우고 3성기단을 이루고 있다.

▲ 독성각  명부전 서북쪽에 있는 6각형의 특이한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복잡한 살미초로 장식하였다.

▲ 대적광전 뒷면의 대방광전 편액

▲ 장경각 건물인 법보전과 수다라장 사이 뜰

▲ 해인사 승가대학 건물인 궁현당

▲ 해인사 배치도

▲ 당간 지주  해인사 입구에 위치한 당간 지주는 현재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 있으며 나말 여초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 일주문 옆의 영지

▲ 경학원  경홍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현재는 도서실로 사용되고 있다.

▲ 사운당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예전에는 승정(僧政)을 행하였고, 지금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 홍제암 부도전  사명 스님이 입적한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을 비껴서 200미터쯤에 있다.

▲ 가야산 마애불  보물 제2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불상은 높이 7.5미터, 어깨 너비 3.2미터이다.

▲ 장경각 전경  장경각은 모두 4동으로 이루어진 대장경판전으로, 사진의 오른쪽이 수다라장, 왼쪽이 법보전, 뒤쪽이 동사간고, 앞이 서사간고이다.

▲ 해인사 장경각 배치도

▲ 수다라장 현판

▲ 수다라장  장경각 문을 들어서면 맨 앞에 보이는 수다라장은 정면 15칸 중 가운데 칸에다 종의 모양으로 출입구를 만들었다.

▲ 수다라장 앞면  짧은 서까래와 긴 처마서까래를 걸친 홑처마집의 우진각 건물인 수다라장은 내부의 경판을 보호하고자 통풍과 온도 등을 고려하여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 수다라장 뒷면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네모 또는 자연석 위를 면바르게 한 초석을 두어 평면으로 보아 앞뒤에 갓기둥열과 중앙에 높은 기둥열을 배치하였다.

▲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

▲ 동, 서사간고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 동, 서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작은 2동의 건물로 역시 환기를 원활히 하기 위해 벽은 판문과 살창으로 되어 있다. 위는 동사간고, 아래는 서사간고이다.

▲ 법보전 앞면  수다라장과는 달리 출입문이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달아 출입하게 되었으며, 붙박이 살창도 수다라장의 것과 비슷하나 규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 대적광전 내부와 비로자나불  해인사의 본전 격인 대적광전 안에는 화엄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 수다라장에서 본 대적광전 뒷면  대적광전의 서북면 위에는 법보단, 동남면에는 금강계단 또한 뒷면에는 대방광전이란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 대적광전 정면 중앙 계단의 소맷돌

▲ 일주문 정면(위)과 뒷면(아래)

▲ 해탈문  일주문과 봉황문을 지나면 정면 6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에 솟을 대문을 한 해탈문을 만나게 된다.

▲ 봉황문

▲ 구광루

▲ 명부전  옛날 금탑전 자리에 신축한 건물로 현재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 응진전

▲ 삼성각  독성각이라고도 부르는 이 건물은 6각형의 특이한 건물로 1940년 운호 스님이 창건했다.

▲ 국사단  지금의 건물은 1899년 중수한 것으로 가람산을 봉안하고 있다.

▲ 홍치4년명 동종  조선 초기 1491년에 제작된 이 범종은 높이 3자 되는 아름다운 중종이다. 종신에는 명문이 있어 그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범종루에 있는 해인범종과 법고

▲ 범종루에 있는 운판

 

 

 

 

 

 

 

 

 

 

 

 

 

 

 

 

 

 

 

 

 

 

 

 

 

 

 

 

 

 

 

 

 

 

 

 

posted by 황영찬

2013-002 설악산

 

글 / 손경석●사진 / 성동규

1996,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0

 

082

빛12ㄷ 144

 

빛깔있는 책들 144

 

손경석-------------------------------------------------------------------------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산악회 이사. 종신회원으로 대한산악연맹, 대한스키협회 이사, 서울대 문리대 OB 산악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 적설계 오대산 초등을 비롯하여 설악산 천불동 계곡 초등반, 설악산 서북주릉 초등대장, 히말라야 · 안나푸르나 Ⅰ봉 남벽 정찰대장 등 많은 산행 경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은령스키 산악클럽 회장, 한 · 네팔협회 회장, 한국산서회 회장직,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등산의 이론과 실제」「등산 · 하이킹 시리즈」「저! 히말라야」「한국의 산천「한국의 산악」「명산사계」「최신종합등산기술백과」「안전등산「서바이벌」「히말라야 초등반기」「암벽등반기술」「회상의 산들」「등산 일기「등산 반세기」「세계산악콘사이스사전 한국편」「그 산길 그 여로」「산 또 산으로」 등의 기행문 수필집 등이 다수 있다.

 

성동규-------------------------------------------------------------------------

1948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1973년 설악산의 사진 작업을 위하여 설악동으로 이주하였다. 1986년 설악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겨울 알프스를 2달 동안 다녀왔으며, 1989년 히말라야 로체봉을 원정 C3(7300m)까지 진출하였었다. 사진집으로 「비경설악」(강원일보 刊, 1985), 「이미지 오브 설악」(아카데미 서적, 1989) 등이 있으며 「꿈속의 설악」을 출간할 예정이다.

 

|차례|

 

머리말

설악산의 예와 오늘 그리고 구분

개관

    이름의 유래

    경관의 개요

지세(地勢)와 교통

    국립공원

    능선(稜線)

    지질(地質)

    교통

명승과 사적

    외설악

    천불동 계곡 주변

    내설악

    남설악

설악산 특유의 동식물과 전설

    동식물

    설악산의 전설

설악산 경관의 보존

설악산 주변의 명승과 고적

설악산 등산 코스

 

 

 

 

 

posted by 황영찬

2013-001 왕초보 경전박사되다

 

계환스님 지음

2008, 민족사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367

 

223

계95ㅇ

 

민족사 왕초보 시리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경전이 언제 어디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팔만사천법문 중에서 자주 읽히는 경전만을 엄선하여

왕초보라도 이 책 한 권으로 경전박사가 되는 경전해설서!

 

관무량수경  관음경  금강경  금강삼매경  금강정경  금광명경  능가경  능엄경  대반열반경  대일경  대품반야경  무량수경  미륵삼부경  밀린다왕문경  반야심경  반야이취경  반주삼매경  백유경  범망경  법구경  법화경  본생경  부모은중경  불소행찬  사문과경  사십이장경  소승열반경  소품반야경  숫타니파타  승만경  아미타경  아함경  안반수의경  약사경  여래장경  옥야경  원각경  유교경  유마경  육방예경  인과경  인왕반야경  장로계경 · 장로니게경  전유경  지장경  천수경  해심밀경  화엄경

 

계환스님

운문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졸업. 일본 화원대학 불교학과 졸업. 교토 불교대학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중국불교사》《화엄사상사》《홍명집》《중국화엄사상사연구》《백팔고개넘어부처되기》 등의 저서와 역서가 있음.

 

|차례|

 

경전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관무량수경 | 극락왕생의 길

관음경 | 자비와 구원

금강경 | 집착을 끊다

금강삼매경 | 본래의 자기를 보다

금강정경 | 만다라의 세계

금광명경 |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능가경 | 깨달음과 번뇌는 하나인가

능엄경 | 청정한 깨달음

대반열반경 | 석존의 마지막 여로

대일경 | 비로자나 부처님

대품반야경 | 공의 세계

무량수경 | 서방정토로 가는 길

미륵삼부경 | 미륵보살의 세상

밀린다왕문경 | 동양과 서양의 만남

반야심경 |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이취경 | 탐심도 본래 청정하다

반주삼매경 | 부처님을 보다

백유경 | 백 가지의 교훈

범망경 |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법구경 | 진리의 말씀

법화경 | 방편과 비유의 극치

본생경 |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부모은중경 | 끝없는 부모의 은혜

불소행찬 | 시로 만나는 부처님의 생애

사문과경 | 출가의 공덕

사십이장경 | 인간의 목숨은 순간에 있다

소승열반경 |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다

소품반야경 | 팔천송의 반야바라밀

숫타니파타 | 최초의 부처님 말씀

승만경 | 승만부인의 설법

아미타경 | 아미타불을 염원하다

아함경 |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안반수의경 | 위빠사나 수행의 경전

약사경 | 병든 이를 구제하다

여래장경 | 깨달음의 씨앗

옥야경 | 현명한 아내의 자세

원각경 | 원만한 깨달음

유교경 | 석존의 마지막 가르침

유마경 | 침묵과 대화

육방예경 | 싱갈라에 대한 가르침

인과경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인왕반야경 | 호국의 경전

장로계경 · 장로니게경 | 비구 · 비구니의 고백

전유경 | 독화살의 비유

지장경 | 끝없는 중생구제

천수경 | 염불의 경전

해심밀경 |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

화엄경 | 겨자씨 속의 우주

 

'눈물은 슬픔을 정화시키는 소리 없는 말'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와 같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이슬과 같다.'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사물의 겉모습을 보고 그것이 참된 모습이 아닌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님에게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님께 보이자고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님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일지라도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새 없이 님을 그리워하고 님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에 많은 사람이 오직 님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님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님과 나의 존재도 잊을 때에

거기서 나는 지혜(智慧)를 배웠노라.

아, 이제야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시라고.

 

연화의 체는 본래부터 더러움을 싫어하여

더러움에 물 드는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욕(諸欲)의 본성도 또한 그러하다.

 

잠 못 이루는 이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아 윤회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마땅히 깃을 붙인 보배일산 받치고

손에는 나는 용의 고삐 잡을 것을

어찌하여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발우 들고 밥 빌러 다니는가.

 

부처님은 그 부왕(父王)의 마음을 살피시고는

아직도 아들이란 생각에 집착하는

부왕의 마음을 일깨워 주고자

공중의 연꽃에 앉아 설법하셨네.

 

날카로운 무기나 코끼리나 말이나

군사나 수레를 구태여 쓰지 않고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 항복 받으니

천하의 어떤 적도 당하지 못하리라.

 

보는 사람 마음으로 슬퍼하고 기뻐하며

모두 조용히 합장하고 눈물을 흘리었네.

 

애욕으로부터 근심을 낳고

근심으로 해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이 없으면 곧 근심도 없고

근심이 없으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가장 알찬 것은 빈 것처럼 보이고, 최고의 웅변은 눌변같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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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