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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12. 09:16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139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지음

2010, 역사의 아침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0309

 

911.05

이24ㅈ

 

이덕일 역사평설

 

날까로운 시선으로 조선 왕 바로보기!

 

성리학적 관점과 당파적 관점을 걷어내야 그들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태종_모든 왕들은 성군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역사는 왕들에게 악역을 요구하기도 한다.

세조_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시대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이 있어야 미래를 조망할 수 있다.

연산군_진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지만 때로는 의견이 수백 년간이나 사실로 여겨지기도 한다.

광해군_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이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선조_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이 혼란해진다.

인조_신하의 기본 의리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 명분으로 성립되기도 한다.

성종_권력을 줍는 행운을 누릴 수는 있지만 성공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영조_군주의 절검생활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개혁을 요구한다.

 

이덕일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인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이다.

특히 『조선왕 독살사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선비 살해사건』,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등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hangaramhistory.org)

다음카페(http://cafe.daum.net/hangaram-forum)

 

사진 권태균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샘이깊은물」, 「원간 중앙」 사진기자를 역임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람들의 삶을 사진에 담아 왓다. 일본과 아시아권에서 사진을 요청해올 정도로 방대한 한국사 사진을 보유하고 잇으며, 한국사와 관련된 역사 현장을 두루 답사했다. 발 빠른 취재력을 바탕으로 누구도 찍지 못한 역사와 인믈을 렌즈에 담고 잇다.

 

그림 우승우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수차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활달한 수묵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평소 이덕일의 독자였던 그는 『그 위대한 전쟁』을 시작으로 이덕일의 글을 한국화로 그려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박완서의 『옛날의 사금파리』, 이청준의 『숭어도둑』, 김용택의 『섬진강 아이들』, 정호승의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될까』 등에 그림을 그렸다.

 

차례

 

저자의 글

 

1부 악역을 자처한 두 임금 - 태종과 세조

 

1 태종

하늘이 시킨 일 오명을 마다하리 - 정몽주 제거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 골육상쟁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 외척과 공신 숙청

호랑이가 새끼 키우듯 후계자는 엄하게 키워라 - 세자 교체와 양위

태평성대를 위하여, 수고는 모두 내게 맡겨라 - 마지막 유산

 

2 세조

시대를 잘못 읽어 잉태된 국가의 비극 - 군주의 오판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 헌정질서 파괴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 사육신과 생육신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게는 지옥이 되다 - 공신들의 나라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 예종 목숨마저 앗아간다 - 불행한 종말

 

2부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들 - 연산군과 광해군

 

3 연산군

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 폐위 이후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 - 준비 안 된 군왕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사대부 - 부풀려진 폭정

조선 최고 음란한 임금은 반정 사대부들의 날조 - 황음무도 논란

문풍에 갇힌 사대부, 무인 군주의 꿈을 꺾다 - 숭무정책의 좌절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 우군 없는 군주

 

4 광해군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정쟁이 깊어진다 - 험난한 즉위의 길

서른 세 살의 준비된 임금, 세 살짜리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 적자 옹립세력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하지 못한 군주의 비극 - 동북아 정세 급변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 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 - 문묘종사 논란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 소수파의 임금

 

3부 전란을 겪은 임금들 - 선조와 인조

 

5 선조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 방계승통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어 주다 - 정여립 사건

수많은 전란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 임진왜란 전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 요동 파천 논란

신분제도와 조세제도 개혁, 민초들이 전쟁에 나서다 - 면천법과 작미법

전쟁 끝나자 다시 양반 천국 - 지배층의 변심

 

6 인조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 서인의 왕

피의 보복이 부른 정치 실종, 전란을 부르다 - 정치 보복과 자체 분열

명분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정권, 끝내 삼전도 굴욕 - 외환 부른 쿠데타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 날개 꺾인 소현세자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진 임금 인조 - 세자 일가의 비극

 

4부 절반만 성공한 임금들 - 성종과 영조

 

7 성종

기다렸다는 듯, 예종 승하한 날에 성종 즉위식 - 밀실 담합

권력은 공신들 손에, 어린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 귀성군 제거 사건

대비 윤씨, 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 승정원 벽서 사건

신진 사림에 탄핵 · 언론권 주며 시대의 금기와 맞서다 - 홍문관 설치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 - 압구정 사건

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 낮과 밤의 두 얼굴

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 무예 장려

 

8 영조

난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뻣뻣했다 - 소론 강경파 숙청

결국 봉기한 준소, 하지만 영조 곁엔 완소가 있었다 - 이인좌의 난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영조, 탕평을 제안하다 - 신유대훈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지 못했다 - 애민군주의 한계

화난 영조, 양반의 나라이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 숙빈 최씨 추숭

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 - 나주 벽서 사건

영조의 왕위이양 쇼, 네 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 - 사도세자

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 사도세자

열다섯 살 계비가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이야 - 두 외척의 대립

옥새를 세손에게, 새 군주의 시대 열리다 - 마지막 유조

 

조선 왕조 계보도

찾아보기

 

 

「태종삼호자도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태종은 살아생전 세종에게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 선죽교(위)와 정몽주 초상(아래)  고려 말의 문신 겸 학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격살되었다.

▲ 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는 전곶교라고도 한다. 세종이 재위 3년(1420년) 태종을 위해 다리를 놓으라고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태상왕 이성계가 형제를 죽인 이방원에게 화살을 날렸다는 일화가 전하는 곳이다. 길이 78미터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 소재.

▲ 민무질 묘(위)와 신도비(아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민무질 묘가 전한다. 민무구 · 민무휼 · 민무회의 묘들은 실전했다고 한다. 민무질은 제주도에서 자진해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했다. 민무질의 신도비는 세 개인데, 그중 구신도비이다.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소재.

▲ 헌릉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두 개의 능이 같은 언덕에 조성된 쌍릉으로, 조선 태조의 건원릉 형식을 따른 것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 태화전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북경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의 모습이다.

▲ 『육신전』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육신전』을 써서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정당하다고 역설했다.

▲ 세조 영정(위)과 광릉(아래)  세조는 불교에 심취해 불경을 간행하는 간경도감에도 대납권을 주었다(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소장). 광릉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묘이다(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소재).

▲ 「무오년, 서옥에서 바라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항상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 간의 긴장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계기로 폭발했다. 필화사건이 터지면 대를 이은 숙청과 보복의 역사를 낳아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 연산군 부부 묘  연산군과 왕비 신씨의 묘소로 이곳에 딸과 사위의 묘도 있다. 연산군의 외동딸 휘순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아들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시켰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재결합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 장의사 터의 당간지주(위)와 금표비(아래)  연산군이 이궁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소재). 금표비는 연산군이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소재).

▲ 월산대군 부부 묘(위)와 신도비(아래)  뒤의 봉분이 월산대군의 부인 순천 박씨의 묘이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신도비는 정2품 이상으로 후세의 사표가 될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풍수가에서 동남쪽을 신도라고 하기에 동남쪽에 주로 세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소재.

▲ 회묘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승했다가 중종반정 이후 회묘로 강등됐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했다.

▲ 연산군 부부 초상  연산군이 귀양 가서 죽은 강화도 교동도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그곳에 걸려 있는 연산군 부부 초상이다. 연산궁이 민간에서는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 「평양성탈환도」(부분)  임진왜란 당시 조 ·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건 무기들이 잘 묘사괘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동법 시행비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소재.

▲ 「양수투항도」  조선 후기 김후신이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충렬록忠烈錄』에 들어 있다.

▲ 『동의보감』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은 17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잇다. 의학서적으로는 처음으로 2009년 7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광해군 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에게 경도되어 인목대비의 생부와 친아들을 죽이고 인목대비까지 폐위하는 바람에 유교 정치 체제의 공적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소재.

▲ 「남한산성」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이 한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 「난죽도」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로,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 죽도 전경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라북도 진안군 죽도의 전경이다.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 오사카 성(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아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 황금가면(위)과 갑옷(아래)  왜군 장수의 황금가면과 전투 때 입은 갑옷이다.

▲ 「동래부순절도」(위)와 「수군조련도」(아래)  동래 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항전하다 성민들과 함께 전사했다(육군박물관 소장). 「수군조련도」는 조선 수군이 훈련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덕령 충효비(왼쪽)와 김덕령 친필(오른쪽)  김덕령은 현종 때 신원됐으며 비각은 정조 때 세워진 것이다. 충장사에 있는 김덕령의 친필은 거제도에 있는 적의 간계에 속지 말자는 것과 둔전 개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소재.

▲ 공신녹권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년) 류성룡에게 내려진 호성공신 녹권이다. 일등공신에 이항복과 정권수의 이름이 있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선조를 수행했고, 정권수는 명나라 사신으로 가 명군 파병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류성룡은 이등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이를 사양했고 국가에서 화원을 보내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것도 거부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충효당 소장.

▲ 인조 별서 유기비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되었다.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 소재.

▲ 이원익 초상  남인이었으나 서인에 의해 영의정에 발탁된 이원익은 기자헌 등 37명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일본 뎬리[天理]대학교 소장.

▲ 영은사(왼쪽)와 석송정(오른쪽)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에 거처했다(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소재). 석송정은 인조가 피난길에 잠시 쉬던 곳이라고 전한다(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소재).

▲ 삼전도비  청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이다.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소재.

▲ 강상대교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으나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 소경원  소현세자의 무덤이다. 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 「'무신 봉기 영수' 이인좌」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 망원정(왼쪽)과 희우정(오른쪽)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져 희우정喜雨亭이라고 불렀으나 훗날 성종의 친형 월산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이라고 불렀다.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소재.

▲ 「몽유도원도」발문  정인지가 쓴 「몽유도원도」발문이다.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는 성종을 추대한 공으로 좌리 일등공신에 책봉됐다.

▲ 「신숙주 시고」  신숙주는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공신집단의 리더가 되어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 예림서원  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예림서원은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소재.

▲ 현릉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무덤이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척들이 상왕 복위 기도 사건에 가담하자 무덤을 파헤쳤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 이심원 정려 현판  효령대군의 증손자 이심원은 사돈인 임사홍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연산군 때 사형당했으나 사림이 집권하면서 신원되었다. 정려 현판은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에 내린 것이다.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면 소재.

▲ 압구정  정조 시절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이다. 명나라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 했다는 압구정은 한명회가 자신의 호를 따 세운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 소장.

▲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 연암군  초상  연암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 「이광좌 간찰」  영조가 즉위하자 이광좌 같은 소론 온건파는 김일경을 비롯한 손론 강경파와 선을 긋는 것으로 영조와 공존을 꾀했다.

▲ 조문명 초상  조문명은 소론 탕평파로 그의 딸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부인이 되었으나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했다.

▲ 「영조의 왕세제 책봉 죽책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되었고,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으나 이는 훗날 영조에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 「순무영진도」(부분)  조선 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는 군역 의무가 없고 가난한 양인들만 군역 의무가 있는 모순된 군역 제도를 갖고 있었다.

▲ 박문수 초상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 『수문록』  『수문록』은 들은 대로 썼다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다. 이문정은 종제 이진유가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리자 절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노론 정체성이 강했고, 이 책도 그런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 소령원(왼쪽)과 육상궁 현판(오른쪽 위)  소령원에는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묻혀 있다. 이 묘는 지관 목호룡이 잡아 주었으나 목호룡은 영조 즉위 후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숙종 당시 묻힐 때는 소령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조령원으로 격상되었다(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영조는 즉위 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는데 현판은 아직도 육상묘인 것이 이채롭다. 이곳은 주로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사당이다(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소재).

▲ 『한중록』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이다.

▲ 함춘원지의 함춘문(위)과 사도세자 사당(아래)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사당을 창경궁 동쪽 후원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경모궁으로 개명했다. 일제는 1924년 이 자리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건설하면서 그 원형을 파괴했다. 함춘문은 경모궁으로 가는 문으로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이다. 사도세바 사당은 정조 때 마을 사람들 꿈에 사도세자가 여러 차례 나타나 이 마을에 살겠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삼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전한다(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소재).

▲ 이천보 초상  이천보가 만든 노론 청명당은 소론을 배제하고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청명이라고 생각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