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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30. 11:53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6-016 우리 역사는 깊다 [1]

 

 

 

전우용 지음

2015, 푸른역사

 

대야도서관

SB108230

 

911.06

전66ㅇ  1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오늘로 들여다본 어제

오늘이 말해주는 내일

오래지 않은 오늘로

오래지 않을 미래를 그리다

 

이 책은 10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때그때 날짜에 맞춰 총 60개의 주제를 선정했기 때문에 꼭지들 간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모든 꼭지를 관통한 내 문제의식은 역사란 시간 · 공간 ·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라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기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서울의 동쪽》 등이 있다.

 

차례 / 우리 역사는 깊다 1

 

● 책머리에


1월 7일_조선총독부 이전

경복궁 잔디밭과 일제의 공간정치


1월 14일_광장주식회사 주주총회 개최

대통령의 재래시장 방문, ‘서민 코스프레’ 아닌 ‘임금 코스프레’


1월 21일_경찰, 방탕한 방아타령과 음란한 춘향가 공연 금지

대중문화 길들이기, 권력의 헛된 욕망일 뿐


1월 27일_화신백화점 화재

화신백화점에서 종로타워로, 역사는 땅에도 새겨진다


2월 5일_미국인, 돌싸움 구경하다 살인

공공연한 폭력은 줄었으나 비물리적 폭력은?


2월 10일_종로경찰서, 어린이 행상 단속

어린이를 거리로 내몬 ‘불량한 가족’


2월 19일_에케르트, 대한제국 군악대장으로 부임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실종된 퍼즐조각


2월 24일_조선총독부, 한센병 환자 격리 위해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한센병보다 무서운 병, ‘장애인 혐오증’


3월 3일_고종황제 국장

‘죽은 권력’을 둘러싼 기억의 싸움


3월 10일_만민공동회 개최

민주주의, 가장 낮은 곳에서 나는 소리를 먼저 듣는 것


3월 18일_조선총독부, 조선태형령 제정 · 공포

형벌의 목적, ‘교화’인가 ‘복수’인가


3월 26일_우리나라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여의사 탄생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려는 태도, 이미 시대착오


4월 1일_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변경

국민을 찍어내는 기계였던 ‘국민학교’, 이름은 바뀌었으나 …


4월 7일_값싼 알코올, 대량생산 본격화

연료용 알코올이 서민용 음료가 되면서 술의 신성성도 옅어지다


4월 15일_광희정 수건 공장 총파업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지워버린 개발


4월 22일_서울에 시내버스 등장

‘나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본능적 욕구, 대중교통수단 기피로 표출되다


4월 30일_의생醫生으로 격하된 한의사들, 서양의학 수강

양방과 한방이 공존하는 현실, 의료일원화의 해법 찾아야


5월 4일_첫선을 보인 전차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 전차와 ‘근대병’ 그리고 ‘주의사항’


5월 14일_이 땅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양의 탄생

근대화의 역사, 배움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5월 19일_도둑질 겸하던 깍쟁이패 체포

놀고먹으려는 욕망이 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시대, 깍쟁이란 말도 원뜻에서 풀려나다


5월 27일_여자 경찰 채용 시험 시행

경찰에 대한 불신, ‘이미지 쇄신’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것


6월 3일_물장수들, 상수도 준공에 따른 손해배상 요구

자연과 인류 최대의 적은 인간의 탐욕이다


6월 10일_총독부, ‘시의 기념일’ 선포

권력의 여론 조작, 역사의 시계바늘을 엉뚱한 곳으로


6월 16일_대조선은행 창립 준비모임 개최

‘공공’을 돌보지 않는 은행, 천한 고리대금업체와 다를 바 없다


6월 25일_한국전쟁 발발

인류의 ‘주적’은 전쟁이다


6월 30일_한양상회, 기업 이미지 광고 게재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 ‘지름신’의 거소 백화점


7월 6일_일제 경찰, 무당 체포

세계 희유의 ‘다종교 단일민족국가’ 한국, 통합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


7월 8일_신생활복 착용안 통과

‘의복 통일’, 전체주의적 저질 생체 권력의 상징


7월 13일_조선체육회 창립

‘수신’ 버리고 ‘체육’만으로 얻는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다


7월 15일_조선중앙위생회 설치

‘위생’의 이름으로 사생활에 개입하는 국가, 생체 정보 유출의 위험성


● 찾아보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축 현장

 

일제는 경복궁 내의 대다수 전각을 헐어버리고

그 앞에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총독부 신청사를 지었다.

조선왕조의 '초라함'과 일본 제국의 '위용'을, '야만' 조선과 '문명' 일본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의도였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 외침과 투쟁》, 서문당, 1996, 142쪽

 

경복궁 잔디밭(1926년 이후)

 

일제는 잔디가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경복궁 마당에 잔디를 심었다.

*출처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 2002, 158쪽

 

1900년경 동대문으로 드나드는 장사꾼 행렬

 

광장주식회사는 18세기 중반부터 새벽장이 열리던 '배우개'에

근대적인 상설 시장을 세우고 이름을 '광장시장'이라 했다.

오늘날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대문시장 타운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츨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7쪽

 

1902년 야주개(현 새문안교회 부근) 봉상사奉常司 자리에 세워진 협률사 극장

 

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이었는데,

최남선은 이 건물이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보기 삼았다고 썼다. 1908년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바뀌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902쪽

 

화재 직전의 화신백화점

 

왼쪽이 '선전' 건물을 증개축한 서관이고 오른쪽이 동아백화점을 매수한 동관이다.

1935년의 화재는 서관에서 일어나 동관으로 옮겨 붙었다.

화재 후 신축된 화신백화점은 당시 서울의 최고층 건물로 '입전' 터라는 장소의 이미지에 잘 부합했다.

*출처 : 《신세계 25년의 발자취》, 주식회사 신세계백화점, 1987, 59쪽

 

돌싸움

 

1880년대 이 '놀이'를 본 알렌은 "군인들이 보았다면,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 주민들이 아주 훌륭한 군사훈련을 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썼다.

*출처 : 서울특별시, 《사진으로 보는 서울백년》, 서울특별시, 1984.

 

1910년대 서울 종로의 땔감장수 어린이

 

10살 남짓한 아이 둘이 나뭇짐을 잔뜩 실은

소 한 마리씩을 끌고 와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캬라멜, 과자, 사이다 등 부피가 작고 가벼운 새 상품이 나온 뒤에는

이것들이 '소년 행상'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89쪽.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음악회를 마친 후

외국인 청중들과 함께한 한국 군악대원들(1902).

아래는 프란츠 에케르트

 

에케르트는 한국이 망한 뒤에도 회현동 자택에 머물며 양악洋樂을 전수하다가

1916년 8월 6일 6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례음악 연주는 '특별히' 이왕직 양악부가 담당했다.

*출처 : 경향신문 광복50주년 사록 편찬팀, 《격동 한반도 새지평》, 경향신문사, 1995, 5쪽

 

1947년 소록도 갱생원에서 열린 환자와 자녀들 간의 면회식

 

혹시 자녀가 감염될까 보아 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바람을 마주 대하고 섰다.

'미감아'란 '아직은 감염되지 않은 아이'란 뜻이니 '미망인'만큼이나 심한 말이다.

소록도에 격리 수용된 환자들은 갱생원 직원들 앞에 설 때 바람을 맞는 자리에 서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 영구 격리가 중단된 것은 1954년 이후였다.

*출처 : 보건사회부 국립소록도병원,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80년》, 보건복지부, 1996.

 

덕수궁 이태왕 봉고제

 

1919년 2월 9일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일본 신관神官 주재로 일본 왕가의 장례의식인 봉고제가 열렸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궁내성이 주관하는 일본의 국장이었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를 '한국의 국장'으로 바꿔 치렀다.

*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이태왕국장

 

이태왕국장은 일본식과 한국식이 뒤섞인 기묘한 형식으로 치러졌다.

장례 행렬의 앞쪽은 일본 기마경찰대와 군인들의 호위 속에 서양식 예복을 입은 관리들이 이끌었으며,

한국인들은 전통 상복을 입고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일제는 이 같은 형식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이씨 왕조'의 종식을 알리고자 했다.

반면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은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을 확산시키려 애쓰는 한편,

장례식 이틀 전에 3 · 1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옛 신민들의 비통한 마음을 새 시대를 여는 에너지로 삼으려 한 것이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194쪽.

 

1899년의 종로 네거리 보신각 주변

 

사진 왼쪽 구석이 보신각, 그 건너편이 백목전 건물이다.

만민공동회 회장이 된 싸전 상인 현덕호는 이 건물 다락에서 자기보다 윗급인

사농공士農工을 내려다보며 개막 연설을 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Ⅰ. 민족의 심장-정도 600년 서울의 풍물》, 서문당, 1998, 43쪽

 

일제가 '조선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제작, 유포한 사진엽서

 

일제는 '연출'한 장면을 담은 이런 사진엽서들을 다량 배포하여

조선의 '야만성'을 내외에 알리는 데 열중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법치의 이름으로 은밀한 장소에서 더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그깨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1쪽

 

영화 <검사와 여선생> 포스터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제작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에서 주인공은 여선생이다.

그러나 여선생은 주인공임에도 자기가 처한 억울한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의 가혹한 운명을 결정한 이도, 그를 남편 살인범의 처지에서 구해준 이도, 모두 남자들이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는 존재이고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보조일 뿐이라는 인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세 청강생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1918)

 

군복을 입고 칼을 찬 교수들은 순사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검은 제복의 남자들 뒤에 흰 옷을 입고 선 세 여성이 '여의사' 시대를 연 선구자들이다.

*출처 : 사토 고죠佐藤剛藏, 이충효 옮김, 《조선의육사》, 형설출판사, 1993.

 

일제 강점기 국기 게양식

 

근대는 '국가'와 '국민'이 신神을 대체한 시대이기도 하다.

국민은 언제나 '옳고' 국가는 가장 '신성'하다.

국가를 상징하는 물건들도 '신물神物'의 자리를 차지했다.

국가를 '정신을 가진 실체'로 만들려는 시도는 국가의 표식일 뿐인 '국기'를

'경배'와 '서약'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기 소유물의 표식에 경배하는 것은 개념상 모순이다.

*출처 : 목도공립학교 제2회 졸업기념, 1943.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낭송하는 어린이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양상이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총력전'으로 변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국민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제 역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꾸고

학생들이 '황국의 도'를 체득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 임정과 광복》, 서문당, 1996, 160쪽.

 

대한제국기의 술도가

 

마당 가득 술을 만들기 위한 밑밥이 널려 있다.

증류주 한 되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쌀 한 되가 든다.

여기에 시간과 노력, 정성이 더 들어가야 하니 증류주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 말부터 희석식 소주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소주 값은 비쌌다.

희석식 소주 값이 크게 떨어진 것은 1920년대 화학적인 주정酒精 추출법이 개발된 이후였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38쪽

 

 

일제 강점기 주정공장

 

일제는 '연료국책' 방침에 따라 1936년부터 조선에 무수주정 공장을 만들었다.

뒤이어 무수주정 제조시설을 갖추지 않은 소주 공장의 신설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뒤로 '값싼 알코올'이 대량 생산되면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 값이 하락했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된 것이다.

사진은 1940년대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 제주항 근처에 건립하여 운영했던 주정酒精공장.

 

 

1930년대 면사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현재의 광희동, 창신동, 숭인동 일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울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이런 산업과 생활의 산 역사가 도시 재개발 과정에 고려된 적은 없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 임정과 광복》, 서문당, 1996, 109쪽.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경성부영버스와 여차장

 

경성부는 부영버스 운행을 앞두고 12명의 여차장을 모집했는데,

75명이 지원했다. 그중 한국인이 73명이었고 여고보 출신자도 2명이나 되었다.

한국인 여성 취업이 그만큼 어려웠던 실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버스에 대한 '호감'도 작용했다. 그러나 버스의 인기가 급락하면서 '여차장'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출처 : 윤준모, 《한국자동차70년사》, 교통신문사, 1975.

 

 

대한제국 시기의 한의원

 

1882년 혜민서 혁파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한의학 교육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의료 개입이 본격화하자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동제학교가 설립(1906)되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의학은 사설 강습소를 통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한의학 연구와 교육이 체계화한 것은 해방 이후였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36쪽.

 

 

일제 강점기 한의원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통의사들을 식민지 보건 의료 행정의 말단에 배치했다.

양의의 감독 하에 놓인 전통의사는 일본 문명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 비문명'을 상징했다.

 

 

동대문 전차 차고에서 출발하는 전차

 

1899년 5월 20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전차 영업이 개시되었다.

이날 이후 전차는 남대문과 대궐을 제치고 장안의 제일가는 명물로 떠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전차가 공중의 물기를 다 태워버려 날이 가물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71쪽.

 

 

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지켜보는

콜브란 상사의 직원들

 

5월 4일 '신문명의 이기'에 환호한 군중과

5월 26일 '살인기계'를 파괴한 군중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짧은 시차를 두고 같은 기계에 대해 같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례이지만,

이를 '군중이 어리석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출처 : 최인진, 《한국사진사 1631~1945》, 눈빛, 1999, 133쪽.

 

 

의학교 교관 김익남(왼쪽)과 제1회 우등 졸업생 김교준의 군의軍醫 시절

 

우사尤史 김규식의 당숙인 김익남은 대한제국 2등 군의장으로 있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의 동생으로 1962년 제5대 총전교가 된 김교준 역시

대한제국 3등 군의장까지 올랐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출처 : 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 544쪽.

 

 

일제 강점기  개천 축대 밑 아이들의 모습

 

개천 축대 밑에서 국수를 먹는 지게꾼을 넝마 망태를 걸머진 어린아이가 쳐다보고 있다.

조선시대 개천의 다리 밑은 거지들의 소굴이었고, 그래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겼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에는

광교, 수표교 등의 교각에 '살모사', '구렁이' 등의 글자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 역시 거지들이 '땅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출처 : 이돈수 · 이순우, 《꼬레아 꼬레아니-100년 전 서울 주재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대한제국 견문기》, 하늘재, 2009, 238쪽.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1760)

 

영조의 청계천 준설공사 완공을 기념하는 행사를 기록한 4첩 그림.

영조는 홍수피해 방지와 하천 정비를 목적으로 청계천 준설공사를 실시, 1760년에 완공했다.

다리 밑을 차지하지 못한 '거지'들은 이때 준설된 토사를 쌓아둔 가산에 총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발족 직후 여자 경찰대의 사열

 

1946년 7월 1일 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정식으로 설치됐다.

여자 경찰의 창설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예를 따른 것이지만, 여기에는 당대의 여성성으로 읹ㅇ디던

'칝ㄹ가 상냥'을 끌어들여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해보려는 의도도 잇었다.

*출ㅊ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Ⅱ, 1991(6판), 523쪽.

 

 

칼을 휘두르는 식민지 경찰

 

일본은 한국 강점 후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리, 심지어 교사에게도 칼을 차게 했다.

한국인들에게 칼로써 새 통치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3 · 1운동 이후 교사와 일반 관공리의 대검은 폐지했으나 경찰에게는 계속 칼을 차게 했다.

3 · 1운동 당시 여학생의 팔을 자르는 식민지 경찰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신한민보》 1919년 4월 15일.

 

 

우물가에 모여 한담을 나누는 대한제국기의 물장수들

 

급수 구역은 대개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구역마다 물 공급권을 가진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물장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배달 노동자였다.

한 집에서 받는 한 달 치 물값은 성인 남자 하루 품삯과 대략 같았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32~33쪽

 

 

대한제국시기 우물가의 물장수

 

대한수도회사가 서울에 상수도를 준공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물장수들은 1908년 6월 3일 대한수도회사에 급수권 배상을 요구했다.

대한수도회사는 물장수들이 수돗물을 받아 팔도록 했다.

이에 물장수들이 당장 실업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집 마당에 수도꼭지를 설치하는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물장수들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다.

*출처 : Hamilton Angus, Korea(London, 1904).

 

일제 강점기 배제학당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서양식 시간제는

개항 이후 서양 각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한국인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관념은 '시간표'로 표시되었는데,

전차나 기차 등의 운행 시간표, 극장의 공연 시간표, 병원의 진료 시간표, 학교의 수업 시간표 등

여러 시간표들이 24시제를 채택했다.

1890년 배재학당은 '오전 8시 15분'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경복궁 건천궁에 설치되었던 시계탑

 

초기의 시계탑들은 명확히 종탑 모양이었다.

시각을 알리는 것은 먼 옛날부터 권력자의 의무이자 권리였고, 종탑은 그 권력을 상징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계탑이 종탑 모양으로 궁궐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05년경의 한성은행

 

현재의 중구 다동 개천 변에 있었다.

대조선은행 창립 발기인 중 일부는 이 은행 설립에도 관여했다.

민간 보통은행을 표방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귀족의 자금 관리를 도맡아

'귀족은행'으로도 불렸다. 해방 후 조흥은행을 거쳐 현 신한은행으로 이어졌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130쪽.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구호물자를 얻기 위해 몰려든 어린이들

 

전쟁은 본질상 인간다움에 적대적이다.

그러나 '현대전'의 주역들은 전쟁이 인간성 자체를 말살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도주의를 강조한다.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잃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고아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것은 '의로운 전쟁'의 표지였다.

 

 

피난민들에게 DDT를 살포하는 UN군

 

DDT 살포가 이미 머리카락에 세례를 받은 남자의 바지춤에 들어가 잇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소년은 DDT가 해로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출처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문관

 

 

대한제국기의 잡화상

 

점포 안과 건물 밖 매대 위에 온갖 상품을 늘어놓고 잇다.

한양상회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보다 규모가 큰 잡화상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현대의 백화점은 이 시절의 '양품洋品 잡화상'에서 출발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옛 그림엽서로 본) 민족의 사진첩 Ⅳ, 개화기의 생활과 풍속》, 서문당, 2007, 91쪽.

 

 

대한제국 시기의 굿판

 

자기들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삼아

'국민'을 창출하려 했던 일제는 신도와 종교적 메커니즘이 비슷한

한국의 기층 종교를 '미신迷信'으로 몰아 집중 탄압했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123쪽.

 

 

1955년에 제정된 신생활복

 

제복은 집단성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표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강한 현대인들은 대체로 제복을 기피하며,

마지못해 입더라도 조금이나마 변형시키려 든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공감포토, 사진으로 보는 역사, 역사속의 오늘, 1960년 11월 4일.

 

 

1910년대 YMCA 야구단과 경성고보 야구단의 경기 장면

 

스포츠는 몸을 늘리고 힘을 쓰는 일들을 재미있게 해주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체육활동과 몸에 대한 관심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늘어났지만,

마음에 대한 관심은 대략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들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946쪽.

 

 

1933년 증축된 순화원

 

일제는 한국 강점 직전 지금의 서울 옥인동 언덕에 전염병자 격리 병원인 순화원을 세웠다.

말이 병원이지 수용소에 가까워 일단 이 병원에 수용되면 죽어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더구나 일본 경찰들은 전염병에 예민해서 다른 이유로 아파도 잡아다 순화원에 보내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인들은 집안에 환자가 잇어도 숨기느라 전전긍긍했다.

*출처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 2002, 357쪽.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