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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8 우리 역사는 깊다 [2]

 

 

전우용 지음

2015, 푸른역사

 

대야도서관

SB108231

 

911.06

전66ㅇ  2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오늘로 들여다본 어제

오늘이 말해주는 내일

오래지 않은 오늘로

오래지 않을 미래를 그리다

 

이 책은 10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때그때 날짜에 맞춰 총 60개의 주제를 선정했기 때문에 꼭지들 간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모든 꼭지를 관통한 내 문제의식은 역사란 시간 · 공간 ·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라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기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서울의 동쪽》 등이 있다.

 

차례

 

● 책머리에


7월 18일_을축년 대홍수

인간은 자연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

7월 22일_자동차취체규칙 제정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동차, 새 가족을 얻은 대신 잃은 것들

7월 24일_광무신문지법 공포

탄압받던 언론에서 ‘한통속’이 된 언론

7월 29일_양화진에 외국인 묘역 조성

글로벌시대,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과 외국인 묘지

8월 4일_김우진, 윤심덕 현해탄 투신

자살률은 시대의 ‘우울도’ 측정하는 바로미터

8월 6일_서소문 화교들의 삶

‘외국인 혐오증’, 우리가 용납될 공간도 줄인다

8월 10일_일제, 서울 시민의 공동묘지 용산 땅을 군용지로 수용

기억에서 지워진 공동묘지 용산, 삶 주변에서 사라진 죽음

8월 12일_보건부, 무면허 의사 275명 적발

의료 민영화, ‘가난이 사형선고’인 사회를 만든다

8월 19일_한성전기회사, 전등개설예식 개최

‘불야성’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전등, 그래도 늘 부족한 현대인의 시간

8월 20일_청계천 복개 계획 제출

복개에서 복원까지, 청계천의 역사와 인간의 변덕

8월 23일_여자정신근로령 공포

만행의 기록이 문서로 남는 경우는 드물다

8월 29일_일본, 한국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

남이 이름 지어준 대로 불리는 자, 식민지 백성

8월 31일_종로경찰서, 종로변 상점에 변소 설치 지시

민주 사회의 관리들, 다양하고 상충되는 시민들의 요구 경청하고 설득하는 자세 필요

9월 15일_추석 임시열차 증편 운행

귀성과 민족 대이동, 이제 사라질지도 모를 한국적 ‘전통문화’

9월 26일_일본 제실박물관장, 순종 황제 알현

‘빼앗은’ 나라의 박물관과 ‘빼앗긴’ 나라의 박물관

10월 1일_가로명제정위원회, 새 동명과 가로명 고시

나라의 중심가로 세종대로, 그러나 나라의 정치 철학은?

10월 7일_종두규칙 공포

전염병 예방의 시대, 예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10월 12일_대한제국 선포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에 담긴 뜻

10월 22일_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의 주역 홍범도, 그에게도 이 땅에 설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주어야

10월 23일_일본 덴노, 조선총독에게 〈교육칙어〉 하달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진 〈교육칙어〉의 군국주의 정신

10월 27일_장충단 설치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 장충단, 털어내지 못한 오욕의 흔적

11월 4일_훈민정음 반포 팔회갑 기념식 개최

‘반글’, ‘암클’에서 ‘한글’이 된 훈민정음, 지금 다시 ‘반글’이 된 건 아닌가

11월 11일_경무청, 채소 도매상 단속

물가 단속으로 민심 다독이려 한 ‘권력 주연 코미디’의 서글픈 역사

11월 17일_우정총국 개국, 우편사무 개시

우편사무 개시와 지번 부여, 모든 것을 숫자화하는 시대를 열다

11월 27일_대한제국, 정동 부근에 고층건물 신축 금지

고층화를 향한 욕망, 뒷수습은 어찌 할까

12월 3일_조청국경회담 결렬

동북아 영토분쟁, 냉철한 역사인식으로 대처해야

12월 10일_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

여의도 상공을 비행한 안창남, 한국인에게 3차원의 시야를 선물하다

12월 17일_지전 상인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명분 없는 이득 경계했던 옛 상도, 지금 우리 기업문화에 절실히 필요한 것

12월 24일_셔우드 홀, 크리스마스실 발행

유병장수有病長壽 시대, 질병과 오래 동거하면서도 불행해지지 않을 방법 찾아야

12월 30일_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민심 살피고 국민 즐겁게 하는 ‘대’라는 이름에 충실했으면


●참고문헌

●찾아보기

 

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용산 전경

 

건물의 지붕만 수면 위에 떠 있어 수상도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수해는 기록적인 폭우가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한강변 저지대에 새 택지가 조성된 탓도 컸다.

천재는 언제나 인재와 함께 하는 법이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8쪽.

 

1909년 2월 20일자 《런던 그래픽 뉴스 London Graphic News》에 실린 삽화

 

프랑스 영사의 이탈리아제 란치아 자동차가 서울에 나타난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들고 가던 짐도 내버리고 숨기에 바빴다. …… 소와 말도

놀라서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는 설명이 부기附記되었다.

자동차가 도로의 폭군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이보다 생생히 묘사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1921년 용산 철도운동장의 취재기자석

 

<신문지법>을 근거로 한 일제의 신문 검열은 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총독 정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기사를 써봐야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고 공연히 경찰서 구경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기자들은 변죽만 울리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사의 찬미>

 

김우진과 윤심덕의 실종 후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 <사의 찬미>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사의 찬미> 가사가 수록된 레코드회사의 음반 설명글은 윤심덕을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로 소개하고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대한제국기 장성군수를 지낸 목포 부호 김성규의 맏아들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살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심덕 역시 유부남을 사랑한 것 말고도 숱한 고민을 안고 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둘 모두 죽을 핑계보다는 살 이유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용산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한국인들에게서 거저 빼앗다시피 한

용산 공동묘지 터에 초호화판 관저를 지었다. 그가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이 된 뒤

이 건물은 조선총독 관저가 되었다. 그러나 1919년 3 · 1운동으로

하세가와가 경질된 뒤에는 이 건물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5쪽.

 

1956년 가톨릭의대 신입생들

 

일제 강점기 남한 지역에는 1개의 의과대학, 5개의 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해방 이후 의학전문학교들이 의과대학으로 승격하고, 1954년까지 부산대, 이화여대, 가톨릭대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어 의과대학은 8곳이 되었고, 정원도 많이 늘었다.

의학 교육기관의 확장은 '가짜의사'가 발붙일 곳을 줄였다.

*출처 :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2004.

 

1900년경 한성전기회사 앞의 매표소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걸린 자리다.

'밝은 밤'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간대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전등은 출현하자마자 귀신을 쫓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출처 : 체신부, 《한국전기통신100년사》, 1985.

 

일제 강점기 청계천 수표교 주변

 

서울이 조선 왕조의 수도가 된 이래 내내 청계천은 도시 하수도였다.

도성 안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도시 산업화에 따라 독소가 개천에 흘러들면서

청계천은 경성 주민의 전염병 발병률을 높이는 '살인하천'이 되어갔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청계천 복개는 경성부 당국자뿐만 아니라 경성부민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49쪽.

 

평화시장에서 열린 청계천 복개공사 개통 기념식(1963년 12월 5일)

 

지류 복개가 시작된 1936년부터 계산하면 청계천 복개에는 무려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복원 공사는 단 3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재원이 늘어나고 기술 수준이 높아진 덕인데,

반면 시행착오를 교정할 여유는 줄어들었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공감포토, 사진으로 보는 오늘, 역사속의 오늘, 1960년 10월 29일.

 

일본에 도착한 전라북도 여자정신근로대원들

 

중노동에 시달리며 임금조차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선발 과정에서, 또는 이동 중에 자기 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았기에 부모들은

사윗감 재목을 따질 겨를도 없이 혼사를 서둘렀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10년 일본에서 발행된 병합 기념엽서 중 하나

 

상단 원내는 순종 이척과 메이지 무쓰히토.

지도의 붉은 색 부분에는 각각 조선과 일본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보다 뒤에 나온 같은 양식의 지도에는 일본 대신 본주, 구주, 북구주, 북해도를 써넣어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표시했지만, 한국 강점 당시에는 조선의 '국가적 지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옛 그림엽서로 본) 민족의 사진첩 Ⅳ, 개화기의 생활과 풍속》, 서문당, 2007, 176쪽.

 

1920년대 후반 종로

 

전차가 다니는 큰 길은 근대도시의 중심가로 다운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사진은 '냄새'까지 전달해주진 못한다.

도시의 외관이 '근대화'한 뒤에도 도시 공간 내부는 오랫동안

중세적 '구린내'와 '지린내'로 채워져 있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22쪽.

 

<서울시헌장>

 

미 군정청은 1946년 8월 10일 <서울시헌장>을 공포했다.

제1장 제1조는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었다.

뒤이어 '서울특별시 설치' 법령이 시행되면서 서울은 일본의 지방 도시 중 하나로 격하된 지

36년 만에 법률적으로 수도의 지위를 회복했다.

 

1936년의 광화문통

 

중앙분리대가 현재의 광화문광장 자리를 거의 그대로 점거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쓴 한성종두사 소장 박진성

 

뒤쪽에 송아지에서 혈청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 리하르트 분쉬,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200쪽.

 

현재의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원구단

 

고종은 독자적인 천하를 상징하는 원형 제단을 짓고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56쪽.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기념 촬영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 백계白系 러시아군과 체코군에게서 우수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군 승리의 중요 요인이었다.

*출처 : 박도, 우당기념관 엮음,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1910년대 보통학교 어린이들의 돗자리 짜기 실습

 

<교육칙어>는 학문과 기예를 함께 강조했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는 단순 기능을 가르치는 데에만 역점을 두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Ⅳ(6판), 1991, 835쪽.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에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강령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교육칙어>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학교 수업

 

학생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교실 안의 글자는 한자와 가나뿐이었다.

일제 강점기 공교육에서 조선어 교육은 계속 축소되다가 끝내는 사라졌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831쪽.

 

1900년경의 체전부

 

고깔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왼손에는 장죽을,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채 우편 행낭을 어깨에 맸다. 온화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글을 아는 사람'의 풍모가 엿보인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7쪽.

 

1910년경 간도 용정 거리

 

한국인의 간도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간도 이주자가 계속 늘어나자 엄형嚴刑으로 일관하던 정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이후 중국인 비적들의 교민 습격이 빈발하자, 교민 보호를 위해 관리와 경찰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27쪽.

 

추락한 비행기에서 포즈를 취하는 안창남

 

안창남은 1923년 오쿠리비행학교의 의뢰로 일본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를 추모하는

인쇄물을 공중 살포하던 중 도쿄 인근에 추락했다. 추락한 뒤에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했던 그는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30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 《역사사진》(일본) 1923년 8월호.

 

1910년대 말의 지전

 

육의전 상인들은 대개 망했지만 건물은 남았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당시 이 건물 가액은 2만 원 정도였는데,

당시 서울 일반 주택지의 기와집 한 채 값이 300원 남짓이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78.

 

셔우드 홀이 처음 구상한 크리스마스실 도안

 

이순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하여 일본 침략자를 물리쳤다는 내용을 부기했다.

홀이 이런 도안으로 총독부 당국에 협조를 구할 만큼 순진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출처 : 대한결핵협회,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2003.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의 대통령 관저

 

일제 강점기 이 건물을 지었을 때의 공식 명칭은 그냥 '총독 관저'였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병학사, 1997.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