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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7 미라 - 영원으로의 여행


프랑스와즈 뒤낭, 로제르 리슈탕베르 지음 /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7


082

시156ㅅ  3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2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고 했을까?

생명을 잃고 바싹 마른 몸만 남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왕릉 속의 석관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미라의 붕대가

풀어지면서 2천 년 전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 속의 미라는 평온한 얼굴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을 들려준다.


수천 년간 내려온

시체 보존 기술을 전수받은 이집트의

방부처리사들은 죽음 속에다 삶의

외관을 되살리려 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미라들은 이집트의

서쪽 마을인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것들로,

방부처리사의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다.

이 미라들을 현대적인 기술로 분석해 봄으로써,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Les Momies, un voyage dans l'eternite


차례


제1장 미라의 부활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제5장 과학적 연구

기록과 증언

연보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뒤낭 Francoise Dunand

프랑수아즈 뒤낭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의 종교사 교수로 재직중이며, 카이로에 있는 프랑수아 동양고고학 연구소(IFAO)의 위원을 역임했다. 뒤낭은 고대 이집트의 신앙과 종교적 관습에 관한 논문과 책을 발표했으며, 1983년부터는 IFAO의 두치 고대공동묘지 발굴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로제르 리슈탕베르 Roger Lichtenberg

로제르 리슈탕베르는 현직 의사이며, 파리에 있는 아튀르-베르네 연구소의 방사선부를 책임맡고 있다. 1976년 람세스 2세 미라 조사팀에 참여했으며, 미라 연구와 방사선 임상학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리슈탕베르는 1982년부터 두치의 미라들에 대한 인류학적 · 고생물학적 연구에서 X선 촬영을 총지휘하고 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터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3번 <세잔>이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미라의 부활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나라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17세기만 해도 미라는 여전히 공상의 대상이었다(위). 기자의 제2 피라미드 대현실(大玄室)을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의 석판화(1818)는 한층 정밀한 묘사를 보여 준다.

1908년, 맨체스터 대학의 마가렛 머레이(앞치마를 두른 이)가 12왕조(B.C. 1991-1786년경) 시대의 성인 남성 미라에 대한 병리학적 검사에 착수했다. 이 미라는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나일강 하류에서 공식적인 탐사작업을 벌이던 중 발견한 것이다. 1858년 이후 카이로에 있는 고대유물관리국의 허가 없이는 유적지 발굴이나 유물의 해외반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라크의 전원 주택 복도에서 발견된 유물을 그린 루이지 마예의 그림(위). 《이집트 풍경》(1801~1804)에 수록. 아래는 람세스 2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금도금한 네 개의 성골함 중 하나를 열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성골함에는 투탄카멘의 목관을 넣은 석관이 들어 있었다.

전실(前室)에서 발견된 투탄카멘의 흉상. 채색 회반죽을 덧칠한 이 나무 흉상은 생생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아문신을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인물인 카에무세트 왕자의 장례용 가면은 사카라에서 발견되었다.

셰스홍크 2세의 것인 이 가슴장식은 재생의 상징인 풍뎅이를 묘사하고 있다(위). 프수세네스의 내장을 꺼내기 위해 복부에 뚫은 구멍을 가리기 위한 황금판(가운데). 프수세네스의 황금 샌들(아래). 타니스에서 발견된 이 유물들은 의식용 용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힌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저(생강)'라고 알려진 이 미라는 B.C. 32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게벨레인 사막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진저는 자연적으로 미라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모래 속에서 이런 미라를 발견한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스레 사후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시체를 미라로 처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이후로 그들은 제물이나 일상 생활용품을 그릇에 담아 시체 곁에 놓아두기 시작했다.

시체에서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둔 카노픽 항아리. 이 항아리가 어떻게 쓰였는지 밝혀 낸 샹폴리옹은 이렇게 적어 두었다. "섬유질조직…… 동물의 냄새, 향유를 잔뜩 바른 물체를 그릇 바닥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 간, 뇌수, 작은뇌."

안티노에에서 심하게 파손된 미라를 발굴한 사람은 이것이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의 주인공인 타이스의 미라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창녀인 타이스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다가 그에게 감화되어 평생을 사막에서 참회하면서 살았다.

아니 파피루스(19왕조)의 한 장면. 죽은 자를 썰매에 실어 영원히 쉴 곳으로 나르고 있다. 아내와 친지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장식을 넣은 튜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의 속옷)와 숄만을 걸친 '안티노에의 여자 장식사'는 파라오 시대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체 처리 방식을 보여 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아누비스 가면의 하나. 테라코타에 색을 칠했고 눈구멍을 둘 뚫어 놓았다.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生)에서 저 생(生)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구성요소가 흩어진다고 믿었다. 그림에서 검고 바싹 마른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바(영혼의 새)'와 함께 있다. 그들은 장례의 마법을 통해 영혼의 새가 언젠가는 죽은 육체와 재결합한다고 믿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서면 서민들도 왕가의 신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타네테레트라는 여인의 관에는 아누비스를 앞세운 태양의 배가 그려져 있다.

죽은 아내와 남편이 사후세계에서 이승에서의 쾌락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한 그림. 제물이 담긴 테이블과 세네트 게임 판이 부부 앞에 놓여 있다.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에 들어 있는 그림(위). 죽은 자(그림 왼쪽)가 아누비스의 인도를 받아 심판정으로 들어가 오시리스 앞에 선다(그림 오른쪽). 가운데 장면은 심장 달기 의식이다. 악어 여신인 오페트와 암소 여신인 하토르가 웨스트의 산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아래). 이 그림은 아니의 《사자의 서》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들판을 차지했노라. …… 여기서 나는 먹고 마시고 축제를 벌였노라. 그리고 밭을 갈고 추수를 하였노라." 《사자의 서》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아니의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를 묘사한 그림을 보여 준다.

매 미라 가면을 쓴 미라는 인간의 미라처럼 정교하게 붕대처리되어 있다.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관에 그려진 눈(아래, 중왕국시대)은 죽은 자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 위는 19세기 초에 루이지 마예가 그린 그림으로 대피라미드 왕의 현실을 보여 준다. 여기에 있던 케오프스 파라오의 화강암 석관은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

왕릉의 두 가지 형태. 위는 케프렌의 피라미드(4왕조)이고, 아래는 사카라에 있는 메르네이트 왕비의 마스타바(1왕조)이다.

"만약 너희들 중 하나가 저 세상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대령이오!'라고 말하라." 《사자의 서》에 있는 이 말은 죽은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우샤브티스의 임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우샤브티스에 새겨지곤 했다. 우샤브티스는 주인의 지위에 따라 몇 인치에서 몇 피트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다양했으며, 아멘호테프의 인물상처럼 주인을 흉내내어 그들 몫의 소형 관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이 세 개의 관은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여인 타무트네프레트의 것이다. 관뚜껑에는 여러 줄로 상형문자가 씌어 있고 장례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그 신들 중에는 죽은 여인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날개 달린 여신도 있다. 문자를 써넣는 일은 죽은 자가 사후에도 영생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었다.

산 자를 보는 죽은 자의 눈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를 손쉽게 알아보려는 듯이 미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실주의가 유행했다. 암모니우스라는 남자(위)와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여인(아래)의 미라 초상화는 나무나 천에 색깔 있는 왁스 혹은 접착제를 섞은 안료로 그린 것이다. 표현력 풍부한 이 초상화는 당시 사람들의 범세계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런 초상화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로마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아르테미도루스의 경우와 같이, 초상화는 관재나 붕대 섶에 찔러 넣었다. 이 미라는 하와라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대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로 네모꼴 기둥과 그리스풍 삼각형 박공벽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보여 준다.

투탄카멘 왕릉은 현대까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유일한 무덤이다. 이 왕릉도 매장 직후 도굴꾼에게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부장품은 무사할 수 있었다. 위 사진들은 1922년 이 왕릉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부장품들이 마구 흩어져 쌓여 있다. 궤짝에 찍힌 도굴꾼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20세기 초에 발굴된 미라.

애벗 파피루스는 람세스 9세 치세 때 열린 람세스 2세 무덤 도굴범들의 재판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도굴범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무덤을 약탈하러 갔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왕과 왕비의 관을 열고 부적, 보석 등 귀중품을 탈취한 뒤 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투탄카멘 왕릉의 발굴작업은 몇몇 유품을 현장에서 원형으로 복구하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힘겹게 진행되었다. 왕릉의 유물 전체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5장

과학적 연구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간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스통 마스페로 경. 마스페로는 기자의 피라미드와 룩소르의 신전을 발굴했다.

투트모시스 2세(아래)와 투트모시스 1세(위)의 사진. 둘은 가족간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엑스레이 사진은 후자가 투트모시스 1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뼈대일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시프타 파라오(19왕조 말)의 왼쪽 발의 기형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편평족이라는 주장과 소아마비 후유증이라는 견해가 맞서는 것이다.

중왕국(11왕조)시대에 제작된 미라의 가면과 관재.

헤로도토스 흉상.

알렉산더 대왕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관.

람세스 6세의 현실 그림 중 새로운 태양관(solar disk)의 창조를 묘사한 부분.

투탄카멘 왕릉에는 많은 보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위는 설화석고 화병이다.

데이르엘바하리 미라 저장소에서 발견된 세티 1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투탄카멘 왕릉에서 장례용 긴 의자를 꺼내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56 萬人譜 21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9

 

811.6

고667만 21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방의 태양을 쏘라

조명암(趙鳴岩)

 

동방이 얼어붙었다

태양의 붉은 피가 얼어붙었다

 

젊은이여 이 고장 백성의 아들이여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보아라

태양의 가슴의 붉은 피를 쏘아 흘려라

백성이 광명에 굶주리고

강산의 줄기줄기 숨죽여 누웠으니

 

허물어진 옛터

님의 꽃잎 하나 둘

……

 

화살을 쏘라

동방의 태양을 뽑아내라

피 끓는 심장에 불을 붙여

님은 봉화 재 우에 높이 들고 서서

산과 들 곳곳에 이날의 레포를 아뢰어라

 

차례

 

시인의 말

 

어떤 임종 / 지족 / 춤 몇대 / 사색풍경(四色風景) / 어머니의 정수리 / 장충동 판잣집 대장 / 할머니의 젖 / 김주열 / 유대평 씨 / 고교생들 / 신나명 / 김정렬 / 김효덕의 아버지 / 김위술 / 고(故) 김상웅의 넋두리 / 구두닦이 / 사라호 해골 / 그 형제 / 꿈 / 이대우 /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 의규군의 아버지 / 백암의 꿈 /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 손진흥 / 신호덕이 / 여순경 김숙자의 웅변 / 유정천리 / 이장 고재순 /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 그의 일생 / 노원자 / 옥봉이 / 임옥남 / 박정덕이 마누라 / 그들 9형제 / 닭 두 마리의 마당 / 청주여고 2학년 신순옥 / 대전고 / 유해성 / 김효성 / 춘천고교 설정일 / 교장 김석원 / 이 충혜왕 / 동래고 유수남 / 이의남 / 박우영 / 절도 8범 / 정추봉 / 거지 / 이상은 / 이영민 / 이정길 / 채섭 채철 형제 / 평생 침대 / 생선가게 오영감 / 최기태 / 발산리 새댁 / 김선인 / 허정 / 이문길 / 어느 어머니 / 진영숙 / 진영숙의 아버지 진명옥 / 이상은 / 강명희 / 임화수 / 임화수들 / 김순자 / 이옥비 / 4월 266일 / 김경진 / 김재우 / 야산 이달 / 박우택 / 박수만 / 국민대 김수현의 결혼 / 앉은뱅이 종석이 / 박종구 / 윤석길 / 태관동 / 씻김굿 가족 / 백원배 / 장충식 / 김치호 / 정대근 / 김효덕의 어머니 / 김영호 / 오성원 /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 두 혼백 / 아버지의 염불 / 어머니 이계단 / 아우 이중하 / 4월계 / 김분임 / 김정돈 옹 / 김광렬 / 어머니 이춘란 / 옛 꽃다발 / 신형사 / 이종양 / 전성천 / 화물차 감옥 / 그녀의 밤 / 김두철 / 가루 / 김기선 / 김유만 / 이강욱 / 이강석 / 그 할아범 / 프란체스카 도너 / 박마리아 / 승마 출근 / 어떤 낚시질 / 한상철 / 윤광현 / 김준호 / 이성남 / 안국동 덕성여중 3학년짜리 / 김창호의 관 / 박점도 / 이채섭 / 심정구의 어머니 / 명남이 / 어떤 쌀도둑 / 남기춘 고모의 넋 / 김왈녕 / 심은준 / 박철수 / 김창필 / 최현철

 

어떤 임종

 

바람이 온다 나는 간다

 

몽골독수리 둘이

나를 본다

 

이내 내려앉으리라

 

내생 필요없다

 

사색풍경(四色風景)

 

차츰 근세 조선정치는 제 본색에 접어들어

동인

서인이라

그 지긋지긋한 임진 정유 전란중에도

동인

서인이라

 

그러다가 동인이 갈라져

남인

북인이라

 

서인이 갈라져

노론이라

소론이라

 

심지어 옷맵시도 갈라져

노론의 저고리 옷섶은

둥글둥글 접혔고

소론의 저고리는

모가 났더니라

어디 바깥뿐인가

 

노론의 집안 아녀자 치마는

굵은 주름

소론의 치마는

여러 주름이더니라

 

아니 노론 풍류는

천하절경을 바라볼 때도

으음

소론 풍류는

허허

 

이것이 근대 독립운동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썩은 동앗줄로 이어지는

기나긴 당질(党疾) 아니던가

 

오늘밤 나 또한 나의 노론이고 나의 소론 아닌가

 

유대평 씨

 

밥 한 숟갈에 쌀알 3백개

밥 열 숟갈에 쌀알 3천개라

 

한끼 스무 숟갈이면

밥알 천개라

 

그러니 하루 세 끼면 밥알 1만 8천개 아닌가

 

내 입이 너무 크다

내 밥통이 너무 크다

 

긴 장마철

문 처닫고 70일 금식으로 숨진 도사 유대평 씨

 

비 그쳤다

 

구두닦이

 

열다섯살에 세상에 나갔다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는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홀어머니 어디로 시집갔다

삼촌집에 있다가 나왔다

차라리 세상의 찬 바람이 좋았다

빈 몸 하나

 

처음 1년은

구두닦이 아저씨 밑에서

단골손님 구두를 벗겨왔다

그 다음

구두닦이 견습

 

구두닦이 4년째

이제 시장 입구 곰살궂게 자리잡았다

 

190년 3월 15일 시위대열에 끼여들었다

함께 달려가다

가슴팍이 뜨끔 그리고 쓰러졌다 숨졌다

 

신마산 구두닦이 23명이 돈을 내어

죽은 동료를 장사지냈다

 

오성원 여기 잠들다

 

백암의 꿈

 

상하이 임정 대통령

백암 박은식 각하께서는

어느날 밤

빗소리 들으시다 잠든 밤

금나라 태조를 꿈속에서 뵙고

큰절을 올리셨다우

 

이런 순 오랑캐 짓거리라니

 

그러나 금나라는 여진

여진은 발해

발해족은 마한족 이주자

 

엄연함이여

 

두루 드넓은 만주 연해주 일대가

서로 어우러진

내 더운 핏줄 갈래갈래들이라우

 

꿈 깨어나서

큰절 올려도 무방하다우

오직 그것뿐 오직 영세일계(永世一系)의 왕검 자손 어디 계시나

 

신호덕이

 

이른 봄 배고픈데 똥거름 냄새 푸짐하구나

보리밭머리

뚝새 냉이 벌금자리 캐는 호덕이

 

하늘 속 종달새가 도리어 귀기울여 내려다보는지 몰라

호덕이 저 혼자 노래하고

노래 듣누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유정천리

 

1960년 2월 15일

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죽었다

야당 후보의 죽음 두번째였다

 

대폿집이 만원이었다

고교생의 빵집도 만원이었다

 

대구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

 

그 세 녀석이 유행가 「유정천리(有情千里)」 곡에

조사(弔辭)를 지어 붙여

개사곡을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만리 타국땅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다

 

교내에 퍼져갔다

시내에 퍼져갔다

전국으로 퍼져갔다

 

세 녀석 무기정학

내무부장관 최인규

책상바닥 내려치며 가로되

천인공노할 놈들 왜 그놈들 정학처분으로 끝내는가 당장 퇴학시켜라

 

그의 일생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삼촌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

 

세월이 가혹했습니다 까마귀떼가 활발했습니다

 

나는 억지춘향 빨갱이가 되었습니다 맞아죽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비탈 덤불

그가 고요히 묻혀 있다

 

영영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다

 

이 충혜왕

 

허허 이 왕 좀 보소

고려 제28대 충혜왕

 

정작 왕권은

원나라 천자께서 가져갔으니

황음(荒淫) 삼매에 드셨던가

 

왕에게는

거기에 안성맞춤인

어의(御醫) 유광렬이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동녀(童女) 100명에게 은총을 베푸시오면

마마께서 100년을 계시옵니다

 

이 말 뒤

여진 산삼

향산 녹용

사산(四山) 흰 뱀을 강정보약을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밤마다 전국 동녀 100명을 불러들여

성은망극의 은총을 베푸셨것다

 

그 100명 뒤 코피 두 사발 쏟으셨것다

허허 아예 서기를 작파하시고

앉기를 작파하시고

누워버리셨것다

 

며칠 누워 계시다가 그만 승하하셨것다

 

왕이라 함이

나라는 지키는 것

나라를 키우는 것

나라 안의 굶주림을 줄이는 것

나라 안팎의 문물을 떨치는 것

이런 왕업 저쪽에서

나라의 청색 짓밟고 쭉 뻗어버리는 것인고

 

평생 침대

 

이유순

 

4월혁명 한 가녘에 나섰던 처녀 예쁘고 곧은 처녀

 

서울 을지로2가에서

경찰 곤봉 맞고

경찰 총탄 맞았다

그녀의 허리

그녀의 좌측 좌골이 거덜났다

 

일어날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

누워서

밥 먹고

누워서 오줌 눈다 똥 싼다

 

그 침묵의 얼굴이

이따금 웃음을 보였다

 

평생 누워 있다

나무들은 평생 서 있고

나는 평생 누워 있다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그뒤로

그런 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수천개의 하루가 오고 또 왔다

혁명도 곧 거덜나 검은 안경 육군소장 쿠데타의 시대가 왔다

누워서

바람에 휘날린 적 없는 머리칼 오똑한 코 말없는 입술 감은 눈 빈 이마

빈 가슴

고요하고 고요하다

 

임화수들

 

4월 18일 저녁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아갔다 자랑스럽다

고대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 자랑스럽다

다음날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혁명의 전야를 장식했다

 

돌아가는 길

동대문 부근

종로5가

천일백화점 앞

 

쇠갈고리

곡괭이

쇠사슬 들을 휘둘렀다

때려눕혔다

자랑스럽던 고대생들 하나둘 널브러졌다

피가 튀었다

임화수는 임화수들

그 깡패들의 학살이 시작됐다

 

이 학살에 격분

다음날

모든 대학생과

고교생

중학생 들이 뛰쳐나왔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야 했다 혁명이 왔다

 

4월 18일의 학살로 4월 19일의 환희가 왔다

 

야산 이달

 

『주역』 통달

야산 이달 선생

괘 뽑아

대구 미두장에서

소 한 마릿값 10원일 때

허어 3천만원을 대번에 벌었다

1924년 봄

 

다음날

열두살 장남 건화가

용돈 좀 달라 했다

 

따귀를 쳤다

 

이놈아

이 돈이 내 돈인 줄 아느냐

이 돈은 조선 백성의 돈이다

 

차남도

삼남도 어림없었다

 

그 거액을 만주로 보냈다

자금책 임주동

연락책 이상춘 들이

잘도 전달

 

임주동은 대종교 나철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람이었다

 

1929년애도 이달 선생

만주로 독립운동자금 보냈다

광산 개발

광산 15개 지구

그리고 철원에 70가구 공동촌을 만들었다

 

『주역 철리에도 으뜸

명리에도 으뜸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의 정처 없다

늘 바람 속이었다

늘 구름 속이었다

 

조선의 밤하늘 총총한 별빛 속이었다

1889년 태어나

198년 죽었다


그녀의 밤


남편은 혁명진압의 경찰기동대장

벌써 엿새째 집에 오지 않았다

장바구니 들고

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


실내

어둠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블루스가 좋았다


제비사내 따라나섰다

바깥세상

어둠이 좋았다 사내 뒤가 좋았다


동일여관 구석방

한 여자의 육체가 살아난다

죽어도 좋다고

넋 놓으며

1960년 4월 어느 봄밤

한 여자가 뜨겁게 살아난다


한 여자의 음란한 혁명이었다


그 할아범


이승만의 독재가

혁명에 졌다

그의 쓰디쓴 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85세였다


그 이승만과 동갑인 할아범


전남 장흥군

남녘 유채꽃 눈부신 득량만 개펄마을

옛날 농민혁명군 남은 병력

마지막

마지막 진지였던 울지리


그곳에서

굶주린 농민혁명군에게

밥을 해준 어머니의

살아남은 막내아들

관군에게

부모와 형들 다 도륙당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막내아들 오달복


그 할아범이 동갑내기 대통령의 신세를 한탄했다

곰방대 꺼진 담뱃불 다시 붙여 빨았다

가슴속 울적


허어

하야가 아니라 주어야 허는디

팍 죽어번져야 진짜배기 하야가 되는디

나도 그만 살고

어서 죽어버려야 쓰겄는디

끝을 왜 이리 질질 끌어


박마리아


부족을 못 견딘 여인

민족을 못 견딘 여인

이승만의 마누라 프란체스카가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 모든 근원은 무능하구나


승마 출근


1949년 대한민국 정부 기틀이 제법 잡혀갔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대한민국 중앙청

농림부는 서울역 부근

내무부는 명동 입구

체신부는 정동 입구

차도 제자리 포도 제자리

각각 기틀이 잡혀갔다


국무총리는 중앙청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럭저럭

정부 기틀이 잡혀갔다

베니어판 책상도 의자도 새로 맞췄다

국장 과장 명패도 맞춰다놓았다

공무원증도 발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총독부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정남도 오정군 오정면사무소 호적계

만년 서기 한판남은

호적등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호적초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낮 2시면

벌써 막걸리 곤드레로

천하태평 코를 골았다


그러나 중앙청은 쉬쉬쉬 금주령이 두려웠다


아침 8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그가 만주벌판 독립군 그대로

자동차를 타지 않고

군마를 타고

독립군 영의정이라고

허리 꼿꼿 뽐내며 출근했다

그의 비서관 이개동도

어디서 구한

노새 한 마리 타고 충직하게 뒤따랐다

그런데 그 이개동이

남로당 지하당 첩자일 줄이야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