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3. 4. 29. 13:3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40-2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선조들이

생각한 건축물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건물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보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다. 건립 연대는 그보다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이 조사되기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인되었던 건물로 주심포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가장 오랜 건물이다. 1937년~1940년 해체 · 수리될 당시 1308년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목조건물

조선 선조 36년(1603)에 지어진 경남 통영의 세병관이 목조건축물 중에서 평면 면적이 가장 큰 건물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어진 여수 진남관은 객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건물이다. 숙종 23년(1697)에 건립된 화엄사 각황전은 법당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중층의 법당인 각황전은 상 · 하층이 모두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기초와 터닦기는 다르다

기초를 집터를 닦는 것이라 잘못 이해하기 쉽다. 터닦기는 집 지을 터를 만들기 위하여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성토하여 평평한 대지를 만드는 것이다. 기초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기둥이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땅을 다지는 것을 말한다.

▲ 해남 미황사  유난히 석축을 많이 쌓은 모습이다.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층이 구분되도록 바른층쌓기를 했다.

▲ 양산 통도사  쌓는 돌을 모두 정교하게 다듬은 다음 목조가구를 짜듯 격식을 갖추었다. 면석의 화려한 문양은 어느 전각의 기단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기둥의 이름

기둥은 놓이는 위치와 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주 :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 귀기둥이라고도 한다.

평주 : 건물의 바깥 둘레에 세운 기둥. 평기둥이라고도 한다.

고주 : 건물 내부의 세운 기둥. 고주는 하나일 수도 있고, 둘 이상일 수도 잇다. 내부의 기둥이 외곽기둥보다 높기 때문에 고주라 한다.

활주 : 팔작지붕의 건물 추녀 밑을 받치는 기둥. 한옥은 추녀가 밖으로 많이 빠져 나오기 때문에 처지기 쉽다. 추녀가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가적으로 설치한 보조기둥이다.

▲ 주심포 다포

▲ 초익공

▲ 이익공

 

'전 · 각 · 루'의 차이

전은 왕과 왕비가 업무를 보거나 생활하는 건물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에 사용하는 명칭이다. 경복궁의 근정전, 각 사찰의 대웅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각은 전과 같은 큰 건물의 부속 건물을 칭하는 것으로, 전보다는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다. 루는 2층의 건물을 일컬어 사용하는 용어로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등이 그 예이다.

▲ 강진 무위사극락전  조선 세종 12년(1430) 건립된 대표적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고려 말기 이후의 건축물에서 곡선재를 많이 사용했는데, 무위사극락전은 직선재를 사용해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균형 있는 짜임새가 일품이다. 기둥과 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측면은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유연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직선적이고 기능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자의 지붕은 형태가 다르다

팔각정이나 육각정 등의 정자는 지붕이 길게 뻗지 않고 우산처럼 추녀마루가 중앙의 꼭지점에서 만난다. 추녀마루만 있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런 지붕의 형태를 모임지붕이라고 한다. 지붕의 평면 모양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이라 부른다.

▲ 경복궁 경회루  팔작지붕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큰 건물이다.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처음에는 사정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세종 7년(1425)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3개의 무지개문 위에 우진각지붕으로 된 문루를 올렸다.

 

지붕도 장식을 하나요?

지붕에 특별한 장식을 한다. 초가지붕에서는 용마름('ㅅ'자형으로 역은 이엉)을 빳빳하게 다림질하거나, 지붕을 일 때 쓰는 새끼를 보기 좋게 꼰다거나 해서 치장을 한다. 기와지붕에서는 기와에 문양을 넣어 장식하거나 조형물을 놓아 꾸미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치미와 잡상이 있다. 치미는 기와의 한 종류로 용마루 양 끝에 놓여 건물의 격을 높인다.

잡상은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여러 가지 인물상이다.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해 장식한다. 일반적인 잡상의 순서는 ① 삼장법사 ② 손오공 ③ 저팔계 ④ 사오정 ⑤ 마화상 ⑥ 삼살보살 ⑦ 미구룡 ⑧ 천산갑 ⑨ 이귀박 ⑩ 나토두 순이다.

 

대문은 집 안으로 열린다.

이는 대문을 통해 복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문은 집 안으로 열린다

옛날에는 대문을 달 때 집 안으로 열리도록 했다. 지금의 아파트는 내부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밖으로 열리도록 했지만, 한옥이나 일반 주택에는 아직도 문이 안으로 열리도록 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집 안으로 복이 들어오게 한 것이다. 매년 봄이 오면 대문에 '입춘대길'이란 글씨를 써서 붙여 놓은 것도 대문을 통해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문이 집 밖으로 열리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배려를 한 것이다.

▲ 문경관문  경북 문경에서 충북 충주로 넘어가는 문경새재에 설치된 3개의 관문 중 1관문인 주흘문이다. 문경새재는 지리적 · 군사적 요충지로 옛부터 중요시 되어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관문을 설치하자는 제안이 처음 나왔고,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영의정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관문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문경에서 주흘산을 넘어 중원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었다.

▲ 수원 화성  본래 수원성은 흙을 쌓아 만든 단순한 읍성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수원부를 화성이라 개칭하고, 도시를 둘러싼 성곽 공사를 정조 18년(1794) 시작하여 2년 뒤 완공하였다. 화성은 전통적인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이론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축조하였다. 당신의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고 중국 성곽의 장점을 취해 길이 5.52km에 달하는 성곽을 만들었다.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치밀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과학적인 성곽이다.

▲ 서울 창경궁  성종 15년(1483)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궐'이라고 불린다. 조선 전기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 등 3대 궁궐이 모두 불탄 뒤 창덕궁과 창경궁만 재건됨에 따라 창덕궁이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신임년의 사화, 숙종 때 희빈 장씨의 처형,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 등 많은 사건이 창덕궁에서 일어났다.

▲ 서산 해미읍성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조선시대 성종 22년(1491)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둘레 2km, 성벽 높이 4~5m로 북쪽의 야산을 둘러쌓은 평지형 성이다. 정문인 진남문은 축조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들어 올린 석문과 팔작지붕이 위풍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한다. 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밖에 깊이 판 해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그 증거가 되는 기록이 진남문 아래 성벽에 남아 있다. 천주교 역사에서는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천여 명의 신도들이 김옥소에 갇히고 처형당한 피의 순교사를 써 내려간 아픔의 현장이다.

▲ 고창읍성  조선시대 읍성으로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곽의 둘레는 1,684m로 대부분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성문은 동 · 서 · 북에 3개를 두었고, 치 6개, 수구문 2개, 옹성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조선 숙종 때 이항이 주민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는 설과 단종 원년(1453)에 축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성벽에는 제주시, 화순시, 나주시 등의 글자가 새겨 있어 성을 축조하기 위해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인부가 동원된 사실을 알 수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