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0 집을 버리다
■강영환 시집■
2006, 신생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9945
811.6
강646집
신생시선 ⑦
강영환 시인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공중의 꽃」 입선. 79년 《현대문학》 시 천료(필명 / 강산청),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시집으로 『칼잠』, 『눈물』, 『뒷강물』. 바다시집 『푸른 짝사랑에 들다』와 지리산 시집 『불무장등』 외 8권. 시조집 『북창을 열고』, 『남해』가 잇으며, 월간 《열린시》 주간 역임. 부산 · 경남 젊은 시인회의 초대 의장을 거쳐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디지털 부산신인회의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는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이사 겸 부산 지회장을 맡고 있다.
홈페이지 : http://ebond.hihome.com
이메일 : soolsan@korea.com
시인의 변
등단 30년이 되는 해다. 두 권의 시조집을 포함해 열다섯 번째의 시집을 낸다. 그동안 부지런히 시를 살았다. 주변의 시기와 격려가 질타해 주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시는 말이 많다. 속내를 들켜버리기 쉽상인 말을 여기저기 설사처럼 함부로 흘리고 다니는 꼴이 사납다. 허비되는 말만큼 의미는 소멸되고 급기야는 언어를 잃게 된다. 이젠 그동안 안주해 왔던 말의 집을 버릴 때가 되었나 보다.
2005.12 저자
차례
● 시인의 변
제1부
반 지하 / 따뜻한 입김 / 거미의 생 / 늪 / 벌판에서 / 누이를 찾아서 / 붉은 동백꽃 / 지는 꽃들 / 지상의 봄 / 성주 성밖 숲 늙은 나무 / 비 - 메일 / 나의 안경 / 구월 비 / 빈칸을 채우며 · 1 / 빈칸을 채우며 · 2 / 그대 떠난 일출 앞에서 / 얼굴 / 어머니 생각 / 덕천댁
제2부
집을 버리다 / 그녀의 손 / 그녀의 입술 / 홍수 / 모기같이 살며 / 트리를 장식하며 / 연화동 비둘기 / 비둘기는 얼마나 행복한가 / 나의 춤 / 반 고호의 귀 / 나는 산청에서 왔다 / 오징어 다리 / 마지막 달력이 젖어 / 밑에 사람이 있었다 / 판다곰 인형 / 연탄 수레 / 빈 화분에 / 심야버스를 타고 와서 / 가을 하늘
제3부
끊었던 담배를 다시 붙이며 / 주검을 남긴 사내 앞에서 / 채팅을 위하여 / 헌혈 / 물의 뼈 / 세기말 누드 / 천년 / 노을 풍경을 새로 만나다 / 물에 잠긴 비디오 가게 / 이슬의 비밀 / 그 여자의 사진 / 초량천변 / 시계무덤 / 밝은 어둠 / 입 속의 눈 / 별의 섬 / 무한호텔
제4부
수레 위의 나무 / 망개나무 / 땀 / 언덕을 내려가다 / 억새꽃이 억새에게 / 시선 끝에서 / 내가 가고 싶은 곳 / 나의 왼발 / 빈집 / 이명 속으로 / 떨어진 잎 / 내 안의 적 / 허 거 참 / 봄의 블랙홀 / 겨울이 오는 쪽 / 아직도 목쉰 노래가 남는다 / 쓸쓸함이 긴 겨울 / 시월시장 / 프리지아
해설 벼랑의 정신
거미의 생
1
지하철 공사장에서 인부가 추락했다
기우뚱거리던 복공판이 중심을 잃고
함께 30미터 아래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번 떨어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흔들리는 생을 탓하지 않는 그가
혼자서도 깊어질 줄 아는 강물 속에다
무거운 생애의 어깨를 내려놓았다
2
외줄 위를 걸어가는 거미는
흔들림 속에서 침묵할 줄 안다
그러다가 투명한 말 속으로 걸어가서
눈치 없이 건너온 줄을 돌아본다
거미는 낡은 길 위에다 다리를 풀고
벼랑을 향해 걸어가는 일만 남아서
부릅뜬 눈이 그늘을 본다
늪
눈을 뜨니 사방이 수렁이다
끈적끈적한 진흙 방이다
목에까지 차오르는 죽음을 뱉으며
잡을 지푸라기 하나 남지 않은 외진 곳
아침이 오고 다시 밤이 되어도
다가오는 불빛도 없이 소리칠수록 더 깊이
목을 죄는 올가미가 침묵을 부른다
그대 눈에 몸을 던져두고
끈끈이 풀로 옭아 맨 발목이 풀리지 않는 도시
귀뚜라미 소리도 머리 위로 지나간 뒤
아침 해가 눈 부릅뜨고 간다
몸부림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일 뿐
눈부신 재앙은 갑자기 온다
몹쓸 그대 눈에 빠졌을 때처럼
반 지하
한 발은 지상에 또 한 발은 지하에
그 조건에 전세금을 걸었다
계단을 내려서면 벌써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몸도 반은 지하다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제라늄 분도
잎 하나는 햇빛에 두고
다른 하나는 그늘에 두고
사는지 죽어 가는지 모르던 때
물은 얼룩을 타고 벽에 숨어들었다
시련 끝에 선 제라늄이 활짝 꽃을 피운 날
나머지 그늘도 환한 빛이 되어
얼굴 펴고 가는 높은 창유리에
몹쓸 십 년의 햇빛이 반짝 지나갔다
벌판에서
머리 속 지푸라기를 마저 비운다
어둔 벌판에 외로 선 발이 저려오고
서릿발 일어서는 땅에 몸은 더 깊어간다
바꿀 수 없는 의자에서 재가 될 때까지
수많은 아침과 저녁은 나를 지나가리니
내게서 떠나는 물
내게로 오는 바람
그대 횃불처럼 눈부신 저항을 닮아
넝마 한 겹을 흔들며 벌판을 간다
더 많은 무서리와 더 작은 별빛을 온몸에 받으며
몸 그릇을 훨훨 비우고 혼자
빛나는 벌판을 눈에 새긴다
붉은 동백꽃
내 가슴을 열어 들여다보지 말라
남 몰래 피운 동백꽃이
서릿발 돋은 신 새벽을 불사르고 피었다가
툭, 뚝, 모가지 째
눈길 홀로 걸어간 발자국을 남겼다
무슨 상처를 밟고 지나갔는지
발자국마다 고여 있는 피는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눈밭에다
낮은 어느 누가 남긴 흔적일까
나는 꽃을 가르고 들어간다
꽃 안에 다시 붉은 꽃
가슴 깊이 떨어져 피어 있다
눈물로도 지워지지 않는 꽃은
떨어져도 그 가슴이 시리다
나의 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까
말초 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조명 앞에서 발가락 끝이 오르가즘이다
얇은 가슴에서 퍼내는 가느다란 소리에도 손가락은 하늘을 감아쥔다
덫이 없고 사슬이 녹아든 하늘 아래 이 분노는
다시없이 캄캄한 지상을 맨발로 뛰게 하느니
그 동안 풀어 넣었던 어눌한 말 앞에 무릎 꿇었던 반벙어리 시간들
이제는 말끔히 허리 펴고 눈감고도 갈 수 있는 나라
조명은 눈부신 햇살로 온 몸에 흐르는 선을 비춘다
하늘을 차고 오르는 빛나는 몸뚱이
긴소매에 붉은 꽃을 피운 노을의 분노가 어둠이 된다.
반 고호의 귀
노란 햇빛 가득한 창가에서 귀를 자른다
어둠이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귀를
쓸모없는 소리들이 첩첩 고여 썩은 냄새에 저린 귀를
내다 버리기 위해 서늘한 칼에 희망을 건다
귀 속 어둠은 듣기를 거부한지 오래
오랜 소리만 쌓인 것이 아니라 눈물도 함께 쌓여
몰래 농축된 귀청을 뽑아내 식탁 아래로 굴려 보낸다
수천의 입이 들어 와
집을 튼 귀가 검은 물을 밀어내 보지만
나팔관을 붙들고 늘어지는 혀의 칼에
울면서 토해내는 소리가 현기증을 부르고
그것은 눈 속의 색깔마저 흩어 놓는다
함부로 쓴 입이 삐뚤어져 귀에는 썩은 물이
물이 입 속으로 흘러간다
세상의 막장이 되어가나 보다
지상의 봄
벚꽃은 언제 지상을 다녀갔을까
피고 지고……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눈 안에 들어
마음의 칼날은 무뎌졌다
찰나다, 찰나다, 찰나다
내 마음 건질 새도 없이
강물은 꽃잎을 싣고 흘러갔다
돌아오지 못할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다시 지상으로
가벼운 옷을 입고 날아와 이 땅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느니
벚나무 아래 지나가던 봄이
뭇매를 맞고 땅에 떨어져
봄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남아
함성으로 촛불을 켠다
빈칸을 채우며 · 1
아파트를 짓기 위해 까맣게 깎아놓은 산
돌 틈에 풀씨들이 싹을 틔우고 섰다
봄 아니라도 날개를 펴고 하늘을 부르는 손짓
누가 보아 주지 않아도
어눌한 사투리를 끼워 넣으며 기다리기라도 한 듯
금새 빈칸을 채워 나가는 하얀 웃음들
줄곧 푸른 생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찾아 나선 것일까
빈칸은 채워지기 위해 있다지만
누군가가 만든 빈칸 앞에서 막막해 하며
캄캄한 절벽을 혼자 오르는 풀씨
독한 그들이 내 이웃이다
집을 버리다
그 집은 수리한지 칠 년이 지났지만 비가 새기는 마찬가지다
동란 중에 피난 와서 미군이 버린 캔 조각을 이어 붙여 바람 앞에 세운 집
지붕 위에 골탈도 칠하고 모래도 뿌려 녹이 스는 것을 막기도 했지만
산복도로에 사는 어느 집도 안에서 피는 녹을 몰랐다
품에 드는 연탄가스를 거부 못해 삭아 내리는 살을 알지 못했다
그 낡은 집에서 무너지는 것은 살만이 아니었다
대들보도 써까래도 토담도 빠져나갔다
뼈도 목울대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집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의 무너짐을
지붕이 있던 자리에 파랗게 뜨는 하늘이
홀로 가는 집을 버리게 했다
몇 개의 보따리가 떠난 뒤 하늘이 무너졌다
나는 집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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