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4 프로이트 - 20세기의 해몽가
Pierre Babin 지음, 이재형 옮김
1995,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7200
082
시156ㅅ 8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008
자신의 환상과 인류의 환상을
파괴하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고백한
영혼의 발생학자 프로이트, 그는 정신분석을 통해
20세기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꿈의 방언을 해석하고 성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들어올린 그의 업적은
혹독한 비난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삽화가인
랠프 스테드먼은 1979년에
삽화가 들어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펴냈다.
"유대인들의 옛 우스갯소리를 삽화로
그려 보겠다는 욕심을 가진 얼마 후, 1905년에
프로이트가 펴낸 <재치 있는 말, 그리고 그것과
무의식의 관계>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이 책은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저서에서 프로이트가
논의하고 분석하는 재담을 삽화로 그리기로
결심한 나는 그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일관성을 가지며 프로이트의 삶을 보여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여러분은 이 책 속에서 재담의
본질에 관해서 대단한 발견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그 점에 신경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담을 음미할 줄만 안다면, 이 책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훌륭한 사상가에 대하여
한두 가지 정도는 배울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랠프 스테드먼
차례
제1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2장 전환점
제3장 진리의 왕국
제4장 끝없는 운동
제5장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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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뱅 Pierre Babin
1947년 렌에서 태어났으며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정신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다. 15년 전부터 정신분석가로 일했으며, 프로이트 학파가 해체된 이후에는 새로이 결성된 정신분석 집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옮긴이 : 이재형
1956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세계 여성사> <지구는 우리의 조국> <레이스 뜨는 여자> <세월의 거품>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눈 이야기> <20세기 문학 비평> <프로이트 성 이론> 등이 있다.
제1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비평가도 그 같은 문제와 내가 그 문제에 제시하는 해답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나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 따른 당연한 벌이겠지만, 내가 누구보다 가장 먼저 뚫고 들어갔던 미답(未踏)의 심리적 영역 중 그 어느것도 내 이름을 갖거나 나의 법칙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1900년 5월, 플리에스에게
누가 감히 인간존재의 어두운 영역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는가? 누가 감히 모세처럼 계율을 정하겠는가?
지크문트가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마흔한 살 된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을 나이인 스물세 살짜리 이복형이 있었고, 이복형에게는 지크문트보다 한 살 더 많은 아들 욘이 있었다. 지크문트는 욘의 나이 어린 삼촌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 먹은 또 한 명의 이복형. 이렇게 지크문트의 요람 주위에는 세 남자가 모여 있었던 셈이다. 프라이베르크에서 지크문트의 어머니인 아말리아는 8개월 만에 죽은 율리우스와 안나를 낳았다. 철물공 자지크의 집에 있는 방 하나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다. 후일 빈에서는 또 다른 네 명의 여자형제들이 지크문트와 욘과 막내 알렉산더 사이에 끼어든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는 강한 여성이었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형이상학적 요리(料理)를 가하여 표현하곤 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나를 처음으로 가르치시면서 만물이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말씀은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고, 믿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걸 본 어머니는 양손바닥을 문지르셨다. 손바닥에 거무스름한 표피가 밀려 나타났는데, 그것은 우리가 흙으로 빚너졌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놀랄 뿐이었다."
《꿈의 해석》
유대인 하나가 "목욕했어?(As-tu pris un bain?)"라고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왜? 하나가 부족한가?(il en manque un?)" (이것은 동사 prendre와 명사 bain의 해석이 다른 결과이다. prendre는 '목욕하다' '탈취하다'는 뜻을 동시에 가지며, bain은 목욕과 욕조의 뜻을 함께 가진다. 후자는 전자가 '욕조를 가져갔느냐?'고 묻는다고 해석한 것이다 : 역주)
《재치 있는 말, 그리고 그것과 무의식의 관계》
"철학이 세계의 운행을 담당할 정도가 될 때까지 자연은 배고픔과 사랑을 통해서 기계와 같은 세계를 유지한다."
실러
1876년도에 찍은 가족사진. 아버지 야콥은 61세, 어머니 아밀리아는 41세, 지크문트는 20세.
그는 누이동생인 안나와 이복형인 에마누엘 사이에 서 있다. 그의 팔은 부모가 앉아 있는 긴 의자의 등받이에 놓여 있다.
1885년도의 프로이트와 마르타 베르나이스.
제2장
전환점
결혼계획과 실험실 연구의 포기, 그에 따른 삶의 방향변경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 프로이트는 1885년에 자신의 서류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직감은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회의감과 뒤섞였다. 자신의 운명과 맞섰던 파리 종합병원에서의 체류 아후 그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언젠가는 사르코와 어깨를 겨룰 수 있을 것이오."
"배우겠다는 욕망과 야망으로 똘똘 뭉쳐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자연이 내 이마 위에 재능의 흔적을 새겨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날마다 괴로워했소. 그러나 오래 전에 나는 천재가 아님을 받아들였소. 나는 재능이 풍부한 편이 아니라오."
1886년 2월 마르타에게
'경련성 발작'은 관심을 가져 볼 만한 소재였다. 샤르코를 포함한 몇몇 정신병 의사들은 경련성 발작에서 '도덕적 감정'의 영향을 식별해 냈다.
"저는 히스테리 환자들의 장골통(腸骨痛)이 주로 발생하는 특정 지점이 난소(卵巢) 부위와 일치한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것을 밝혀 냄으로써 우발적으로든 자극에 의해서든 히스테리 전구증세(前駒症勢)가 시작되는 난자체(卵子體)가 바로 난소 자체라는 사실을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샤르코 <두번째 강의>
"무엇이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자세히 이야기하겠소. 가장 위대한 의사로 판단력과 재능을 골고루 갖춘 샤르코가 나의 생각과 계획을 몽땅 무너뜨리고 있다오. 마치 노트르담 성당을 빠져 나오듯 완벽함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득 안고서 그의 강의 도중에 빠져 나온 적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나를 녹초로 만들고, 나 또한 그의 곁을 떠나면 모든 일이 너무나 하찮게 여겨져 의욕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마오. 아무 일도 안 한 지가 벌써 사흘째인데 전혀 후회가 안 되오. 연극에서 야회가 끝났을 때처럼 나의 정신은 포만상태에 있는 것 같소. 씨앗은 열매를 맺게 될까? 모르겠소. 내가 아는 건 그 어떤 사람도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오."
1885년 11월 마르타에게
샤르코를 좋아했고, 샤르코에게서 너무나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그로 인해 가장 격렬한 형태의 긍정적인 전이(轉移)를 경험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학생들 앞에서 진찰하고 잇는 샤르코를 그린 앙드레 부루이예의 그림은 빈에서도 런던에서도 프로이트의 사무실을 떠난 적이 없었다. 역시 이 그림에 매혹당한 큰딸 마틸데는 그림 속의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달라고 늘 아버지를 조르곤 했다. 프로이트는 으레 "너무 꽉 끼는 옷을 입어서 그래."하고 대답했다.
"샤르코는 너무나 생생해 나를 흥분케 하는데, 내가 당신 곁에 머물렀던 열흘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내 뇌리레 남아 잇었소.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 아름다운 일을 겪은 듯한 느낌이오."
1886년 3월 마르타에게
프로이트는 1886년 7월부터 1891년 8월까지 쥔하우스에서 살며 환자를 진찰했다. "대체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파트도 샀고,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결혼도 한데다가 사람들이 나를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고 해치울 수 잇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앗으니까 말이야."(1886년 8월에 처제 민나 베르나이스에게 보낸 편지). 우울하고 지친 중부 유럽 태생 사나이가 이제 화려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눈을 내리깔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얼마 후 이사를 가야 했다.
브로이어에게 헌정한 논문 <실어증의 이해>의 표지.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언어중추의 집중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브로이어와 공동저술한 《히스테리 연구》(위)가 출판된 1895년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안나 O.(아래)
브로이어(위)의 충고에 따라 플리에스(아래)는 프로이트가 신경체계에 관해 발표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즉시 프로이트에게 공감했다.
제3장
진리의 왕국
지크문트 프로이트 박사는 서른한 살이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었으며, 부유하지는 않지만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고 있다. 10년이 넘도록, 그는 자신을 혼란에 빠뜨릴, 자신을 신화적 영웅으로 희생시킬 연구에 빠질 것이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먼저 정신을 마주한 인물이 될 것이며, 거기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 순간도 혼자 놔두지 않았다. 그녀들이 읽는 모든 책들을 검열했고, 무엇보다도 처녀들은 자신들을 공격할 지 모르는 위험한 생각에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무언가에 열중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회고록》
역사적인 긴 의자.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세우는 데 기여한 긴 의자. 프로이트는 환자가 정신분석학자를 보지 않는 것이 분석치료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누운 자세는 최면방법의 잔존물이었다.
빈의 카페는 만남의 장소였다. 그곳은 문화와 사회분위기를 중개하는 장소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그리엔슈타이들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한량들의 무신경과 무관심'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각하들의 광증(狂症)'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두 개의 머리와 하나의 몸. 프로이트와 플리에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은 모두 의사였고 유대인의 아들이었으며, 과학적 탐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둘은 환자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작업과 고고학의 유사성에 관하여 자주 강조했다. 두 경우 모두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 자신도 1899년부터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햇다. "골동품은 나를 기분 좋게 만들며, 먼 시간, 먼 나라와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
벨뷔성(城)에 머무르면서 프로이트는 "꿈이란 욕망의 실현이다."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1900년 6월 12일 플리에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젠가는 '1895년 7월 24일. 이 집에서 꿈의 신비가 지크문트 프로이트 박사에게 계시되었다.' 라고 새긴 대리석판이 이 집에 세워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꿈속에서는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감춘다. 전혀 뜻밖의 이미지 뒤에도 언제나 어떤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위험하다고 얘기했지. 이 건방진 녀석아! 난 내려가겠어.
어떻게 내려가려고? 제발 그냥 있어!
꿈의 영상
고전적인 그림은 그림은 꿈꾸는 사람을 꿈속에 집어 넣는다.(위는 슈빈트의 <죄수의 꿈.인데, 프로이트는 이 그림을 욕망실현의 전형적인 예로 해석했다. 아래에 보이는 '음몽마녀(淫夢魔女, 자고 있는 남자와 성교한다는 악령 : 역주)는 퓌슬리가 그린 <악몽>의 세부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의 부조화한 요소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그리트의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남자>(위)와 막스 에른스트의 <비틀거리는 여인>(아래)이다.
플리에스에게 보낸 편지는 정신분석학의 역사와 발전을 증언해 준다. 편지를 통해 프로이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데, 왼쪽은 그가 매년 빠지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갔던 여름휴가에서 아들 에른스트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1901년도).
"툼제는 작은 천국이며, 어린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 물고기들은 이미 나를 영락없는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1901년 8월 플리에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은 그저 막막합니다."
1896년 11월 플리에스에게
제4장
끝없는 운동
"1902년부터 몇몇 젊은 의사들이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실천하고 전파시키겠다는 매우 확고한 의도를 가지고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 우리는 날을 정해 우리 집에 모여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토론을 하고, 아직은 갈피를 잡기가 힘든 이 분야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며, 우리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도록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리아, 아기 예수, 성 안나>(위). 프로이트는 1910년도에 출판된 '정신분석 소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의 신비로운 인격을 밝혀 냈다. 아래는 미국 여행에 참가했을 때 클라크 대학 교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06년의 지크문트 프로이트. "나는 관청 앞에서 처음으로 절을 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을 바랄 수가 있었다."
사춘기 때 성에 눈을 뜬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유아기부터 성에 눈을 뜬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베르크가 19번지에 잇는 건물의 두 층을 사용했다. 그것은 베르크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19세기에 지은 장중한 건물이었다. 1층은 진찰실과 사무실이었고, 2층은 가족들의 주거공간이었다. 그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고, 진찰실과 사무실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산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담배를 사러 가거나 링 위를 걷느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는 시선으로
제국의 몰락으로 야기된 불안에 직면한 빈 사람들은 보수적인 위선을 완고하게 고수하거나 무도회와 오페레타로 기분전환을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엘리트 계층의 반응은 내면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프시케를 탐험하고 정신분석학을 창시했다. 회화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분리퍄(1897년 빈에서 시작된 미술양식 : 역주) 화가들이 외관과 진실 사이의 비극적인 부조화를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다. 그림은 <프리제 베토벤(Frise Beethoven)>의 부분인 '적대적인 힘'이다. 여기서 화가는 악의 힘 때문에 결코 충만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존재를 그려내고 있다. 몇 년 뒤에 에곤 시엘레는 <앉아 있는 여인>(1917)을 통해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정열, 욕망, 꿈, 고통, 환희, 등을 거칠게 드러내는 육체를 화폭에 담았다.
"결국에는 나를 점유한 채 낯선 사람들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나와 내 목소리에 대답하기를 기다리라고 내게 말하곤 했던 그완화된 확실성에 관해서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1907년 6월 융(위)에게
평생동안 프로이트를 둘러싸고 있던 골동품은 그의 호기심과 취미의 결실만은 아니었다. 골동품은 이렇게 말한다. "저 세상을 잊지 말라."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종교적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통한 인간의 전달관계를 규정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모든 것은 아득한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38년 5월. 나치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못한 프로이트가 빈을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 사진작가 에트문트 엥겔만은 프로이트의 아파트와 사무실을 사진에 담기로 결심했다. 촬영은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플래시나 조명 없이--게슈타포는 프로이트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위험한 작업 덕택에 소중하고 감동적인 사진자료들이 남겨질 수 있었다. 이 사진에는 <현관 쪽에서 본 진찰실>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환자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석진찰실이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시아로부터 온 골동품들의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말은 없지만 과거의 조상(彫像)들은 자신의 기원과 묻혀진 역사를 다시 발견하려고 이곳을 찾아온 환자들과 웅변적으로 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리타 란조호프 <사진의 전설>
빈의 제자들이 프로이트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증정한 메달의 뒷면. 메달에 새겨진 "저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막강한 권력을 획득하게 된 자."라는 그리스어 문장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인용했다. 앞면에는 프로이트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르타는 프로이트가 젊었을 때 열정을 바친 대상이었다. 상호 헌신과 완벽한 우의는 이 두 사람의 부부관계를 특정지었다. 그래서 어니스트 존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의 53년에 걸친 부부생활에서 기록할 만한 '갈등'이란 버섯의 밑동을 자르고 요리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요리해야 하는지 하는 따위였다." 1911년에 은혼식을 맞은 지크문트와 마르타.
프로이트와 융, 페렌치, 브릴이 그들을 클라크 대학에 초빙한 스탠리 홀 총장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들의 노력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인정."
"멀고먼 미국의 보스턴에서도 기차로 한 시간 들어가는 곳에서 존경받는 한 노신사가 《정신분석연보》를 기다리고, 읽고, 전부 이해하고, 자기 고유의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 생각을 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겠습니까?
1909년 10월 피스터에게
바이마르 회의(1911년 9월 21일과 22일) 참가자들이 프로이트와 융(서 있다)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깃이 모피로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중앙에 앉아 있는 여성은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친구인 루 살로메이다. 이들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전유럽에 확산시켰다.
그들의 우호관계가 시작될 무렵 융은 프로이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쓴 소책자 한 권을 소개했다. 그것은 엔센의 <그라비다(앞으로 걸어가는 여인)>였다. 한 처녀--고고학자는 그녀가 폼페이에 묻힌 그리스 처녀라고 상상한다--의 가벼운 발걸음에 관한 어떤 고고학자의 환상을 중심으로 해서 꾸며진 이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인 프로이트는 그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해설을 써서 1907년 작자에게 보내 주었다. 평생 동안 그는 이 얕은 부조(위)의 우아함과, 돌 속에 갇혀 있는 처녀의 공기처럼 가벼운 움직임에 애착을 느꼈다. 석고로 얕은 부조의 복제품을 떠서 서재에 걸어 놓기도 했다.(아래)
제5장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사실 저의 주장이 모든 영역을 점령했지만, 당신은 내가 거기서 얻는 즐거움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분석이 개인적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나는 내가 혼자였을 때 이미 그것을 가졌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합류한 이후로는 즐거워할 기회보다는 권태로울 기회가 많았습니다."
1920년 12월, 피스터에게
파리행 기차에 오른 프로이트와 딸 안나.
타나토스에게 패배한 에로스? "모든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다. …… 비생명체는 생명체에 앞서 존재한다. 1925년 5월, 프로이트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에게 이렇게 썼다. "공명(共鳴)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의 내부에서 움직이던 충동이라든가 욕구, 활기가 단절되었음이 나타난 문구이다.
프로이트와 딸 소피. 소피의 죽음은 참기 힘든 가혹함이었다고 프로이트는 술회했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중대하며 나르시스적인 죄입니다." 상(喪)의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음인 듯하다. 소피의 막내아들 하이넬레도 네 살 반이 되던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니체와 릴케의 친구였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1911년에 프로이트를 만났고, 그녀 자신이 직접 정신분석을 행했다. 그녀는 특히 나르시시즘에 관해 작업했다. 프로이트는 "살로메는 정신분석의 시인이다."라고 칭찬했다.
전쟁중에 휴가를 나온 두 아들과 찍은 사진. 에른스트는 앉아 있고, 마르틴은 서 있다. 전쟁 초기인 1914년 12월에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경증 환자들의 증상과 마찬가지로 정상인의 꿈이나 실수는, 정신분석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나쁜 충동이 그들 모두에게서 사라지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억압된 상태로 존속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난폭해 보이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프로이트 사상의 가장 기묘하고 가장 불안한 신화의 일부를 얼핏 보여 준다. 이것은 토템적 의미의 식사이다. 아버지를 먹는 식인행위로 아들들은 아버지와 동일시되며 아버지가 구현하는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확실한 전달의 책임은 안나 프로이트에게 돌아갔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그녀는 정신분석학의 가장 공식적인 인물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
풍자화는 명성이 지표일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겟지만, 언론에서 별명을 붙인 것처럼 '사랑의 전문가'인 의사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32년에 프로이트는 국제연맹에서 청탁한 <왜 전쟁인가?>라는 글을 아인슈타인과 함께 썼다.
1912년, 프로이트는 자신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 가운데서 몇 명의 정신분석학자들(랑크, 아브라함, 아이팅온, 존스, 페렌치, 자호스)을 은밀히 불러 반지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사랑이 담긴 이 과학의 결합체는 위원회라고 불렸다. 그러나 1924년 랑크가 떠나고 1925년에는 아브라함이 사망함으로써 반지의 마법이 풀렸고, 위원회는 해산되었다. 가운데 사진은 슈테판 츠바이크, 아래 사진은 로맹 롤랑이다.
서재에 앉아 있는 프로이트. 랍비의 손자였던 그는 수백 명의 환자에게서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유대 민족과, 그 우두머리의 수수께끼 같은 정체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 그의 집 문에는 나치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게슈타포가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가택수색을 하는가 하면, 그의 딸 안나가 소환당하기도 했다.
유대인이 황금소를 숭배하고 있음을 목격한 순간 벌을 내리려는 동작을 취했던 모세는 십계명을 떨어뜨릴 것 같자 분노를 거두었다. 미켈란젤로의 조상은 분노를 참는 네번째 동작을 묘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위의 스케치를 사용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 입구
런던 집 정원에서의 평화스러운 한때, 프로이트는 죽음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만 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계속할 차례이다.
삶이 다시 한번 가져다 준 '뜻하지 않은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서글픔. 이것이 말년을 맞은 프로이트의 태도였다. 여든번째 생일을 맞아 치자나무 꽃다발을 보내준 옛날 여자 환자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에서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당신의 흰 양떼가 무사히 도착해서 어제까지 방을 아름답게 빛냈습니다. 나는 내가 칭찬과 비난에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의 정다운 글을 읽고 글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잘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준 것,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애정이었으며, 나는 내가 이렇게 만족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 나이 때의 삶은 수월하지 않지만, 봄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바로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빨간 모자>.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
70세 때인 1926년의 프로이트. 막스
발바리 요피와 함께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는 프로이트.
1938년의 프로이트.
카를 크라우스가 발행하는 《횃불》지의 속표지. 1899년
1938년 6월 6일자 《데일리 헤럴드》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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