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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7. 10:3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56 나를 찾아 떠난 길 - 홀로서기 · 4

 

서정윤 시집 

1996, 문학수첩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3904

 

811.6

서74ㄴ

 

문학수첩신작시집

 

인간적 성숙을 위한

자아 탐구 여행

 

우리가 진정한 독자라면

서정윤 시인에게 눈여겨볼 것은 시의 우열이 아니고

그가 얼마만큼 시의 깊이와 넓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고난의 몸짓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직까지는 끊임없이 시세계의

변용을 기할 수 있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아탐구를 위해

고난의 몸짓을 보이고 있는 이번 시집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박호영(문학평론가 · 한성대 교수)

 

서정윤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홀로서기 · 1」「홀로서기 · 2」「홀로서기 · 3」 등이 있으며, 특히 이 시집들은 한국 신시 80여년 동안 최고 · 최대의 경이적인 판매 부수로 독자를 사로잡은 애송시집들로서, 전국 여론조사 "내가 좋아하는 시"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서정윤의 <홀로서기> 순으로 자리매김된 국내 초유의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차례

 

1. 수채화로 그린 절망

만종의 시 / 그대를 사랑하는 /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다 / 꽃씨 / 작은 소리 / 아빠의 기도 / 동화책의 세상 / 수채화로 그린 절망 1 / 수채화로 그린 절망 2 / 수채화로 그린 절망 3 / 수채화로 그린 절망 4 / 사랑한다는 말은 / 노을 스러지는 그 뒤로 / 겨울 귀가 / 돌아보면 / 변명 - 나무 아래서 / 침묵의 새 / 눈오는 날의 환상

 

2. 나로 돌아와서

가끔은 / 욕심 / 소의 환상 / 촛불 명상 / 화두 / 그림 그리기 / 탑을 돌며 / 꿈속 기행 / 나를 찾아 떠난 길 1 / 나를 찾아 떠난 길 2 / 절망의 빛깔 / 마음에서 / 꿈 아닌 얼굴로 / 나로 돌아와서 / 버린 후 / 노스님 / 허상 / 새 1 / 새 2

 

3. 나무 이야기

나무 이야기 / 나의 나무 / 손을 펴고 / 믿음의 나무 / 나무와 풍경 / 꽃 속에 서면 / 바위 눈빛으로 / 물 속에 숨어 / 성(城) / 그의 환상 / 비 오기를 소원하며 / 겨울나기 / 문에 대한 기억 1 / 문에 대한 기억 2 / 문에 대한 기억 3 / 말에 대한 기억

 

4. 부르지 않는 노래

편지 / 천사에게 / 노을, 살아 있는 / 변화를 위한 시도 / 개 / 무당벌레 / 강가에서 / 운동장 사설 / 문득 떠오른 생각으로 / 여름날 오후 / 바다에 갈 때가 되어 / 구름 뒤 얼굴 / 소리 / 노을 그림자 / 부르지 않는 노래 / 낚시 / 밤낚시 / 물위의 그림

 

해설  인간적 성숙을 위한 자아탐구

        --- 박호영(문학평론가, 한성대 교수)

 

돌아보면

 

내가 맑고 고요한 강을 노래하고

돌아서면, 강은

붉은 홍수의 강이 되어 웃고 있다.

 

내가 절망의 시를 쓰고

돌아서면, 시는

맑은 별빛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건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기 때문

나 아닌 나와의 다툼에서

찾을 수 있는 나,

힘겹게 걸어온 걸음들이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스로 만든 틀 속에 자세를 잡고

돌아보면,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만큼 가고 있다.

 

작은 소리

 

고독한 사람에게만 계시가 있다.

아직도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못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 속에서

낯선 돌에 몸을 의지하여 고개 숙일 때

그대는 비로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금방 울음이 터져버릴 지경이 되어

마음이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데

고개를 저으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자신을

달래며 다독인다.

기다림은 오래된 그림보다 바래져

그대 눈빛조차 잃어버리면

이제야 그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위대한 자를 기다리며

믿음은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고

남은 건 확실하지 않은 시간

죽음이 즐기는 유희들만

모여 서성이는 들판에서

소리들은 순례자로 떠돌고 잇다.

 

나는 그들만큼도 고독하지 못하다.

더 많은 죽음의 경험을 쌓으려

떠난 내 속의 어둠

낯선 돌무더기 곁에서

모든 소중한 것들을 위해 절망하는 날

내 귀에도 작은 소리가 전해지고 있다.

 

노을 스러지는 그 뒤로

 

산 뒤로 노을이

아직 해가 남았다고 말할 때

나무들은 점점 검은 눈으로 살아나고

허무한 바람소리 백야처럼

능선만 선명하게

하늘과 다른, 땅을 표시한다.

 

고통 속에서만 꽃은 피어난다.

사랑 또한 고통으로 해방될 수 있음을

무수히 자신을 찢으며 깨달아가는 것이다.

노을 스러지는 그 뒤로

바람마저 지나가 버리는 내 마음의 간이역에는

아직도 기다리는 엽서 사연들이

오래된 낙엽으로 밟히고

먼저 잠든 자의 표정에서

내 슬픈 방황 먼 흐름의 물길을 찾는다.

 

창에 비치는 풍경이 눈앞에서 맴돌고

긴 흔들림에 영혼이 지쳐

내 속의 장미 시들어 가시만 남는다.

귀가를 서두르며 나는

스러지는 노을, 그 뒤로 따라가고 있다.

 

마음에서

 

마음에서 시작된 방황

배는 결국 뭍에서 닻을 내리고

번뇌와의 싸움 또한

내 속에서 사라져야 함을 알지만

마음을 깨달을 때

나는 말할 수 있었다.

빗방울은 연꽃에 맺힐 뿐

꽃잎을 적시지 않는다.

 

소의 환상

---심우도(尋牛圖)를 보고

 

우거진 수풀 속에서

내 찾던 소가 울고 있다.

 

하나를 얻어 모두를 잃어버리고

다시 돌아와 소를 보니

내 무심턴 그 자리였다.

 

눈을 뜨고 본다.

쥔 손을 펴기가 힘들지만

남은 해가 풀섶 사이에 뒹군다.

소는 이슬 속에 있는데

나는 그림 밖에도 없다.

 

버린 후

 

내 집착하여 찾는 것 버린 후

버릴 수 있는 것 다 버리고

버릴 수 없는 것마저 버리고 나면

소나무 숲길에 흰 눈이 쌓여

발자국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 가는 길은 무심하다.

 

가끔은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벗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노스님

 

마음을 잊어버리면

불 속에 핀 꽃이 보이고

그물을 뚫고 나온 고기는

다시 물 속에 머문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다면

불이 어디 있고

그물이 어디 있는가

돌아서서 가리키는 손끝에

구름이 맺힌다.

 

나를 찾아 떠난 길 1

 

빛과 어둠은 둘이 아니었다.

가지도 오지도 않으면서

허공 밖에 있는 허공

머물지 않는 것들은

애초부터 없었다.

나를 찾아 떠난 길에서

아무도 따라가주질 않는다.

 

나를 찾아 떠난 길 2

 

바람에 흩날리는 재는

할 일 다하고 등 돌리는

오래된 영혼

아쉬움 없이 멀리 날릴 때

비로소 나를 찾아

떠날 수 있다면

그 떠남은 살아 있는 길이다.

 

탑을 돌며

 

진흙이 물을 담고

옹기가 되어 서 있다.

모든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침묵을 보고 잇으면

세상은 찬란하게 빛난다.

아름다움 속에 죽음이 숨어 있다.

삶의 흰 이빨을 보인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 1

 

내가 묻기도 전에 해는 서산에 진다.

시간의 질문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결국 그대는 흑백사진의 한 장면으로

기억의 한쪽 면을 차지할 것이다.

 

영혼을 학대하기 위해 육신을

팽개쳐 버린 모습으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대의 고통을 읽기에 앞서

가슴 아리는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내 짊어져야 할 그 점들을

그대에게만 맡겨두고, 나는

잘도 잠을 잤구나. 그대 지친 몸으로

잠 이루지 못해 뒤척일 때도

나는 어줍잖은 낱말이나 맞추며,

싸구려 추억에 잠겨 잔을 들었구나.

내 앞에서 말없이 흐르는 그 흔적들과

함께 추락하며

여기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억겁 윤회로 인해 나 여기 서 있다면

앞 생의 어떤 인연의 끈으로 나는 그대에게

이만큼의 고통을 안겨 주었나.

시간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고

이미 예액된 다음 생을 느끼면서도

구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나를 본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 2

 

이제 강가에는 아무도 없고

아직 그대의 절망은 끝나지 않아

나의 가장 아픈 곳에 남아 있다.

어쩌면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어도

흙의 일을 흙으로 돌리는 일과

하늘에 노을 그리는 일이 남았다는 핑계로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지친 그대를 힘들게 한다.

 

강가에 선 나무들은

철새의 약속을 믿지 않지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기다린다.

기다릴 수밖에 다른 일은 없다고

어린 나무들을 돌아보며

타이르고 있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 3

 

우리는 전생에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았나.

말로도 남의 가슴에 상처주지 않고

미소로 그들을 도우며

그들의 고통으로 밤을 새웠다면,

 

다른 누가 우리의 다정함에

시기하는 말을 하늘에다 했는가.

그로 인해 이 생을 받았다면

자랑하지 말아야 했어.

내 삶이 남과 다름을 말하지 말아야 했다.

 

이번 생에 이 고통 다 지나면

이젠 윤회의 테두리 벗어나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다.

이 욕심 다시 씨앗이 된다면

다음 생엔 아주 조그만 절망으로

마무리 지으며 살고 싶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 4

 

자신을 잊기 위해 애쓰던

차가운 바람의 날들

말 못하고 돌아서던 순간이 있었다.

가슴속 수많은 단어들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부딪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초라하지 말라고

하늘의 푸른 절망이

먼저 손을 내민다.

내 가진 건 그대의 맑은 웃음,

고통스런 변명은

건너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히 말했다.

아니 충분히 비참했다.

이제는 시간이 낯설게 느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 절망의 끝이 보인다.

 

나로 돌아와서

 

마음 밖으로만 다니던 길에서

이젠 돌아와 동네 어귀에 선다.

빈손으로 들어선 집이

나를 제한하지 않으면

뜰에 핀 꽃이 반갑다.

구름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버려둘 수 있다.

 

나무 이야기

 

가장 안타까운 건

믿음의 나무가 흔들리는 일

아직 견고하지 못한 뿌리로

작은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온몸으로 휘청일 때

달려오는 수많은 유혹의 소문들

진실의 순간조차 유린당하며 침몰한다.

 

내 가진 건 오직 허무

그것조차 놓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부르지 않는 노래

 

내 안에 부르지 않는 노래가 있다.

어린 목동의 시절

들판에서 부르던 노래가

이제 내 안 나무 뒤에 숨어

아무리 달래어도 나오지 않는다.

 

그를 만나면 나는 반가워도

그는 내가 낯설다고,

누렇게 변한 내 얼굴을 알지 못하고

그저 달아나고만 있다.

 

그는 내 변화를 인정할 수 없어

그 어린 시절 능금나무 아래서

수없이 함께 손잡고 돌아오던

양철지붕의 집

탱자나무 울타리 주위로만 서성인다.

내 안의 부르지 못하는 노래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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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