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7 늦게 온 소포
고두현 시집
2002,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28139
811.6
고26늦
고두현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등단
●
차례
1 땅 이야기
빗살무늬 추억 / 달과 아이들 / 횡단보도 / 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 늦게 온 소포 / 연밥을 따며 / 해금(海琴)에 기대어 / 땅 이야기 / 상생(相生) /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 상원사 / 남으로 띄우는 편지 / 4월 장자(莊子) / 장수잠자리 / 외포리에서 / 칡꽃 / 봄 꽃 편지 / 인동당초 벽화 / 불목하니 / 직녀
2 밥에 관한 생각
보고 싶은 마음 / 오목 / 산할미꽃 / 참회 / 먼 그대 / 묵언 / 산에 가야 맛을 알지 / 남해 금산 큰 새 / 말씀 / 사람들 산에 오르다 / 산감나무 / 허암사 빈 절에 얽힌 / 겨울 두타산 / 밥에 관한 생각 / 풋고추 / 헌 집에 들며
3 유배시첩(流配詩帖)
남해 가는 길 / 울타리 밖에 채마밭을 짓고 / 안부 / 적소에 내리는 눈 / 꿈에 본 어머님 / 구운몽 / 잎 속의 바다 / 세 발 까마귀 / 월광(月光) 소섬 / 희방사 길 / 꿈꾸는 돌기둥 / 그리운 굴뚝 / 사랑니 / 집 짓기 / 마음의 등짐 / 참 예쁜 발 / 끈
4 참나무와 함께 자다
책성의 목책 울타리 / 자작나무 숲 / 발해 금(琴) / 발해 자기 / 푸른 기와로 지붕 얹고 / 발해 맷돌 / 그리운 그대 느릅나무 강 / 노성의 벼 / 수이푼강 / 도읍 / 참나무와 함께 자다 / 줄 없는 현금(玄琴) / 신라 가는 길 / 길이 끝나는 곳에 / 옥주에서 들은 얘기 / 콩밭 / 그 우물 아직 / 쑥무덤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땅 이야기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 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데나 자리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대로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빼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 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밥에 관한 생각
냉장고 문에
에티오피아 아이들
굶는 사진 붙여놓고 석 달에 한 번
용돈으로 성금 채우는 건이 녀석,
장난치다가 짐짓
눈길 굵어지는 표정
아내가 달덩이 같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
누군가 수저를 놓고 쨍,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먹는 일의 성스러움이란
때로 기품 있게 굶는 일.
식구들 모여
오래오래 냉장고 문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남해 가는 길
- 유배시첩 ·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도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여끙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櫓島) 앞바다 이름이다.
참나무와 함께 자다
산이 짙어 작잠누에를 쳤더니
산은 간데없고 명주폭 흰 치마에
깁옷 입은 발해 며느리
갓 시집 온 고치 속에서 달빛만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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