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04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2014, 푸른역사
우리가 몰랐던 17세기의 또 다른 역사
대기근은 한 번 발생했다 하면 수년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 했다.
경제적 고충이나 사회적 불안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긴장이나 외교적 갈등을 격화시킬 정도로
고강도였으며 조선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과인도 기근 땐 적극적으로 복지에 힘썼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세상사 이치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때가 적지 않다. 기후사氣候史 연구가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기상 이변과 경제 상황, 당시 조정의 대응과 사회 안전망까지 날카롭게 주제를 파고든 저자의 시도가 돋보인다.
- 《조선일보》
17세기 '기후재앙' 조선 정치판 뒤흔들다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던 암흑의 17세기는 실은 '변화와 역동의 시기'였다. 다음 세기 '영 · 정조 르네상스'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7세기 대기근으로 빚어진 모순을 수습하면서 사회안전망이 새로이 갖춰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17세기의 생활상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사료를 곁들여 차분하게 써내려간 문체가 연방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 《경향신문》
17세기 '소빙기'… 조선 100만 명 굶어 죽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외계의 출격'이 백성의 삶을 뿌리 채 흔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간 학계에서 17세기는 '소외된 시대'였다.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거친 뒤 18세기 영 · 정조 시대를 맞이하는 과도기 정도로 자리매김됐다. 저자가 재발견한 17세기는 소빙하기의 정점에 이른 '혹한의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연 변화의 싹이 움텄다는 것이다.
- 《중앙일보》
조선 최악의 위기 입체적 조명
조선 역사에서 18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과도할 정도로 조명받았지만 17세기와 19세기는 공백 상태였다. 저자는 새로운 '화법'으로 17세기의 공백을 확실하게 메워주는 성과물을 내놓은 셈이다. '소빙기'라는 세계사적 현상으로 조선을 부각한 것이나, 정치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17세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는 것도 대단한 미덕이다.
-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주간 동아》
지은이 김덕진
전남대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조선 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1999),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2002), 《연표로 보는 한국 역사》(2002), 《세상을 바꾼 기후》(2013),《서울 재정사》(2007, 공저), 《역사 속 외교 선물과 명품의 세계》(2007, 공저) 등을 저술했다. 그 밖에도 호남 지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 《변혁기의 인물과 역사》(1996, 공저), 《남도문화》(1998, 공저), 《광주 · 전남의 역사》(2001, 공저), 《개화기 지방 사람들》(2006, 공저), 《소쇄원 사람들》(2007) 등을 저술했다. 수년 전부터는 기후의 역사를 탐구 중이다. 기후 변화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미진척의 영역인 셈인데, 이 책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차례
● 머리말
● 프롤로그 17세기의 재발견
01 17세기 소빙기, 타당한가
17세기는 위기였는가
조선은 어떠했는가
02 대기근, 이전에는 없었는가
대기근, 조선을 뒤흔들다
조선, 대기근을 극복하다
03 현종 즉위와 어수선한 정국
세자 관례와 남인의 부상
김징 탄핵과 서인의 수세
궁지에 몰린 임금
04 요동치는 동아시아 정세
대륙의 변란 소문
일본의 왜관 이전 요구
05 하늘과 땅의 불길한 징조들
유성, 하늘을 가리다
지진, 전국을 강타하다
06 유례없는 자연재해
싹도 못 나게 하는 봄가물
연일 올리는 기우제
걷잡을 수 없는 여름 물난리
제주도를 강타한 초대형 태풍
닥치는 대로 갉아 먹는 병충
07 창궐하는 전염병과 가축병
활인서에 수용하라
병을 피해 떠나는 사람들
여제를 올려라
소를 죽이는 우역
도살 금지령
08 사상 최악의 '경신대기근'
뛰는 곡물가
기승을 부리는 사재기
초근목피와 인육을 먹다
길거리를 메운 기아자
09 2년간 1백만의 죽음들
수없이 늘어나는 병사자
시신이 가득한 금수강산
시신은 도성 밖으로
10 동요하는 민심
떠돌며 도둑질하는 사람들
고조되는 변란의 조짐
흉흉한 도성 민심
11 진휼을 서둘러라
끊임없이 방출되는 비축곡
발 디딜 틈 없는 진휼소
국물도 없어
진휼소를 닫지 마시오
12 쏟아지는 민생 정책
군포를 면제하라
토지세를 감면하라
부채를 탕감하라
13 바닥난 국고를 채워라
군사비의 감축
왕실비의 삭감
신분과 관직의 매매
청나라 쌀 수입론
14 꺼지지 않은 잔불
다시 꿈틀대는 정쟁
제2차 예송과 현종 사망
● 에필로그 대기근과 함께 한 17세기사
● 주석
● 참고문헌
● 찾아보기
런던의 얼어붙은 템스강. 당시 템스 강의 결빙은 1683년 12월에 시작해서 그림이 그려진 1684년 2월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17세기 소빙기, 타당한가 01
가뭄과 홍수를 유발하는 일기불순이 장기간 반복하는 현상,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내려가고 서늘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이 잦아 이상 저온이 장기간 지속하는 현상이 지적된다. 이 가운데 소빙기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상 저온이다.
소빙기는 16~17세기 또는 17~18세기에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 추운 날씨가 많고 이에 따라 빙하의 면적, 두께가 넓고 두꺼웠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빙기氷期가 아니라 소빙기라고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에 시작해 10만 년 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용어는 학명學名이 아니라 한 신문기자가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편의성 때문인지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다(이태진, <소빙기 천변재이와 조선왕조실록>, 《역사학보》 149, 1996, p. 203)
대기근, 이전에는 없었는가 02
조선시대에 기근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겨우 숨을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왔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기근이 전국을 휩쓸고 갔다. 기근의 위력은 개인과 가정, 지역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없는 해가 없으니, 진휼하는 정사가 흉년에 대비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고 비의 혜택이 때를 잃었으나, 1백 리 안에 비 오고 볕나는 곳이 다르고, 1현縣 안에 마르고 습한 곳이 같지 않아서, 비록 가뭄 든 해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익은 곡식이 있습니다(1415년 7월 6일, 이조 판서 박은)
역대 기근 현황을 수록한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 기근의 발생 시기와 지역 그리고 요인과 규모가 잘 정리되어 있다.
현종 즉위와 어수선한 정국 03
현종대는 대기근이 연구되어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현종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이 들어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제왕가의 예법이 사서인과는 다르나, 성인의 혈기는 보통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왕세자가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고 드높이나 나이로 말하면 겨우 10세인데, 어찌 아내를 둘 나이라고 하셨습니까? 신들도 대례大禮의 차례와 절목을 알고 잇으므로 왕세자의 화려한 합방合房의 기일이 올해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호名號가 일단 정해져 절차를 진행한다면 2, 3년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1670년 2월 14일, 부제학 이민적).
백호 윤휴(1617~1680). 허적과 함께 대표적인 남인 학자. 효종 7년(1656)에 종부시 주부를 거쳐 지평 · 예빈시정에 임명되었으나 1차 예송으로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우암은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당시 정국과 사상계를 이끌었다.
《숙종 가례도감의궤》 중 <숙종 · 인현왕후 가례반차도>의 일부. 반차도란 일반적으로 관에서 행사를 치를 때 참석자들의 위계에 따라 정해진 자리를 표시한 그림을 이른다. 이 가례 반차도는 1681년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의 가례 행사 기록인 《숙종 가례도감의궤》에 포함된 것이다.
18세기 집 짓는 풍경(<태평성시도>의 일부, 작자 미상, 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재를 다듬고 벽을 바르고 지붕에 기와를 올리는 등 조선의 집 짓는 여러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요동치는 동아시아 정세 04
평온할 것 같던 중국 정세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외교 사신이 이 소식을 전하자 조선은 그 향방에 이목을 집중했다.
차왜差倭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나온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사이의 정상이 참으로 매우 괴이합니다. 어찌 그 협박으로 인하여 허락할 수 없는 청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왕래가 잇따라서 제공할 것이 다하였으니, 이것이 근심스럽습니다. 더구나 인심이 어수선하여 심지어는 임진년에 이미 경험한 변과 같다고 증거대고 있으며, 또 서울에서 유자가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잇습니다(1671년 10월 5일, 좌의정 정치화).
18세기 청나라 칙사 아극돈이 그린 <봉사도>의 부분. 칙사 영접. 임금(영조)이 모화관에서 청나라의 칙사를 영접하는 그림.(첫번째) 칙서 받기. 예를 갖춰 칙서를 받는 모습으로, 배경은 창덕궁 인정전이다.(두번째) 칙사 대접. 임금이 칙사를 대접하는 모습.(세번째)
조선통신사
동래 두모포 왜관. 일본인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사방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일본인 거주 마을과 정박용 선창이 조성되어 있다.
동래 초량 왜관. 가운데 산 오른쪽은 동관이고 왼쪽은 서관이다. 동관은 왜관에 상주하는 일본인 거주공간이고, 서관은 일본에서 온 외교관 숙소다.
하늘과 땅의 불길한 징조들 05
혜성 출현은 괴변怪變이었다. 현종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신하의 조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면서 평소 근무하던 궁궐을 피하고, 더욱 조심스러운 자세로 허물을 반성해 조금이나마 하늘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근년에 혜성의 변이 있었을 때 다들 병화가 있을까 근심하였는데, 그때 천문을 잘 아는 자가 '아무 해에 반드시 기근과 역병이 있어서 주검이 쌓이는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존망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전하께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 분발하여 일으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천심天心을 돌려서 대명大命을 잇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1671년 5월 9일, 판중추부사 정치화).
전라병사 유병익의 지시로 관청 뜰의 풀을 뽑고 있는 하멜 일행. 그림은 《하멜 표류기》 스티히터 판본에 있는 목판화 중 하나다.
조선시대 관상감의 측후관이 혜성과 객성의 변화를 관측해 기록한 《성변등록》의 일부(연세대 도서관 소장).
첫번째는 현종 5년 음력 11월 7일자. 두번째는 영조 35년 음력 12월자. 사자자리에 나타난 객성 기록.
장경각 동남쪽 마당에 있는 관천대 모습. 천문기구를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하던 곳이다.
유례없는 자연재해 06
참혹한 가뭄이 지금 20여 일에 이르러 앞날이 가망 없을 것 같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가 달마다 생기고 가뭄과 수혜가 서로 잇달아 없는 해가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며 편안할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더욱 참혹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과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고 가만히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넓은 대궐이 무엇이 편안하겠으며 먹는 것이 무엇이 맛있겠는가(1670년 5월 2일, 현종).
약천 남구만(1629~1711). 현종 9년(1668)에 안변부사 ·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167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방수비를 다졌다.
제주도 조천관.
창궐하는 전염병과 가축병 07
전염병은 정확한 이름도 없이 염병染病, 여역, 역병疫病 등으로 불렸다. 원인도 모른 채 느닷없이 찾아온 전염병에게 사람들은 순식간에 온 마을을 빼앗겼다.
흉년의 여역癘疫은 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모든 마을에 전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어 불처럼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편히 쉬게 될 날이 언제 있을지 막막합니다. 죽을 장만하는 것을 감독하는 자 중에 전염되어 앓는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고, 각 고을의 수령과 관속으로서 전염되어 앓는 자도 많습니다. 혹 관아 사람 전부가 전염되어 앓으면 그 관아 노비에게 관속의 입을 대행시키기도 합니다. 병을 앓는 백성을 위해 장막을 따로 설치하여 전염될 걱정을 방지하고 있습니다마는, 대엿새분의 마른 식량을 나누어주면 한꺼번에 죄다 먹고는 지팡이를 짚고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데, 쫓아도 안되고 타일러도 안됩니다. 비참한 꼴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습니다(1671년 3월 23일, 전라 감사 오시수).
의원의 진료를 묘사한 불암사 <감로탱>(1890).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두 의원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
여단. 여단은 악귀를 쫓는 여제를 올리는 곳으로 관아의 북쪽에 있다.
처용의 춤(《정리의궤첩》 중 14면, 김홍도, 개인 소장). 처용무는 역신을 쫓는 상징이 되어 신라 때부터 조선 말까지 그 전통이 지속되었다.
남원부지도. 남원성을 중심으로 중앙에 관아, 북쪽에 향교와 여단, 서쪽에 사직단과 성황단이 있다.
밭을 가는 소를 묘사한 풍속화(<쌍겨리>의 일부,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역으로 소가 죽어 나가자, 농가에서 사람이 소 대신 밭을 가는 데 아홉 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 마리의 일을 해내고 있었다.
사상 최악의 '경신대기근' 08
1670~1671년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대기근으로 최대 규모의 식량 고갈 상태를 가져왔다.
연산連山에 사는 사비私婢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칙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 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같은 꼴이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놓았습니다. 해당 부서를 시켜 처리하게 하소서(1671년 3월 21일, 충청 감사 이홍연).
소금 굽기(《천공개물》 중에서). 솥에 바닷물을 넣고 불을 피워 소금을 굽는다. 소금은 기근을 구제하는 데 식량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2년간 1백만의 죽음들 09
기근으로 오랫동안 먹지 못해 오염된 물로 배를 채우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아 병균에 저항할 힘조차 없는 떠돌이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너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에서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1671년 6월 4일, 대사헌 장선징).
전염병으로 죽은 엄마 곁에서 울부짖는 아이(조선총독부, 《대정 9년 호열자병 방역지》). 역병이 들면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다.
동요하는 민심 10
먹을 것이 부족한 흉년에 산 사람이라도 살려면 입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전부터 사람들은 기근이 들면 입을 줄이기 위해 자녀를 팔거나 죽이고 거리에 버리곤 했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의 기근은 옛날을 통틀어 보아도 없었던 것인데다 신해년부터 올봄까지 전염병이 크게 번져, 외방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함으로써 명화적이 인명을 살상하는 변고가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민간에 저축된 건 벌써 바닥이 나서 그들이 훔쳐가는 것이랬자 고작 됫박쌀에 불과하였는데, 길에서 장사치나 여행자를 만나면 뒤질세라 서로 달려들어 약탈을 하였다. 호남과 영남의 중간 지역이 특히 도적떼의 소굴로 변했고, 충청도 청주 등 고을에서는 보름 사이에 인명을 살상한 곳이 많을 때는 열네 군데나 되었다고 한다(1672년 3월 29일, 실록).
용주사 <감로탱>에 그려진 고아들(1790)
포도청 우포청사(서울시유형문화재 제37호, 서울 성북구 돈암동). 죄인의 심문이나 포도, 순라 등의 일을 맡았던 포도청엔 기근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더욱 붐볐다.
진휼을 서둘러라 11
진휼청은 기근 시 비축곡을 풀어 곡물을 대여하거나 판매할 뿐만 아니라 양곡과 죽을 제공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방도는 진휼 정책의 관제탑이라 할 진휼청을 조기에 정상 가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엎드려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액운이 든 시절을 만나 수재와 한재가 재앙이 되고 해마다 흉년이 져서 굶주려 사망하는 참상이 지난해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거기다 여역이 크게 돌아 쪽박을 들고 구걸하며 죽소粥所에 의지하여 얻어먹던 저 무리들은 진휼을 그친 후에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기근 · 여역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마음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 · 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167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
김만기. 김장생의 후손으로 그의 딸이 숙종의 비가 되었다.
<경기도 감영>(작자 미상, 호암미술관 소장). 돈의문 밖에 위치한 경기 감영을 그린 관아도로, 17세기 기근 당시 각 지역의 감영에는 비축곡이 풍부할 것이라는 추측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다.
<신풍루 사미도>(《원행을묘정리의궤》, 서울대 규장각 소장). 1795년 정조 화성행차 당시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주는 사미의식을 묘사한 그림이다. 진휼 때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보령 오천성에 남아 있는 진휼청 현판. 기근 시 기아자에게 양곡을 나눠 주거나 죽을 쒀주는 곳이다.
쏟아지는 민생 정책 12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이들을 살리는 길은 시급히 식량을 제공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세금을 경감해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
부세를 줄이고 기근을 구제하는 정치는 더욱 우선적으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신과 회계를 맡은 신하에게 오로지 책임을 맡겨, 각종 세금 및 경상 비용의 액수에 대해서 면제하거나 줄일 만한 것을 헤아려 계산하게 하고 또 각 도와 각 아문의 저축에 대해서 옮겨서 사용하거나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만한 것을 요량하게 하여, 전체의 계산을 맞추어두었다가 군읍에서 점검하여 아뢰기를 기다려 그 분수分數에 따라 들어다 쓰게 한다면, 일이 미리 확립되어서 백성들이 실제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1670년 7월 24일, 부제학 김만기).
서포 김만중(1637~1692). 문신이자, 소설가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이기도 하다.
경신기근에 목화와 삼 농사 역시 흉작이었다. 목화와 삼 농사가 흉작이면 농가의 면포와 마포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짜는 여섯 가지 장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여인 방적하고>(김중근, 《기산풍속도첩》에서)이다.
바닥난 국고를 채워라 13
기근이 깊어 갈수록 국가 재정을 걱정하는 한숨은 커져만 갔다. 정부 관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근이 참혹한데 불행히 나라의 저축이 바닥나서 진구할 길이 없다고 걱정만 늘어놨다.
아, 이해의 처참한 기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홍수, 가뭄, 바람, 서리의 재변이 팔도가 똑같아서 곡식이 여물지 않아 굶주려 죽은 사람이 길에 널렸다. 목숨을 잃는 재앙이 전쟁보다 심하여, 백만 목숨이 거의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실로 수백 년 아래에 없던 재난이었다. 대개 쌓아서 저축하는 것이 천하의 대명이거늘 국가가 평소에 비축한 것이 없이 갑자기 홍수와 가뭄을 만나 이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아, 비통한 일이다(1670년 10월 15일, 현종).
상평통보. 조선 후기 법정 화폐로 대기근 시 재원조달 목적으로 주조되기 시작했다.
잠곡 김육(1580~1658). 17세기 후반 개혁 정치가로 대동법을 실시, 수차 사용, 화폐의 통용, 역법의 개선 등 구체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아래 그림은 그가 사용을 건의한 수차를 그린 풍속화의 일부다.
공명첩. 국가가 재원조달을 위해 판매한 직첩으로 받는 사람의 이름이 비어 있다고 하여 공명첩이라고 한다.
꺼지지 않은 잔불 14
1671년 겨울철 잦은 천변재이로 고통받던 백성들은 조선을 온통 괴담으로 물들였다. 괴담의 생성과 전파에는 배후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고 자연 발생적인 것 같다.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지난해에 추수가 없었고 올 여름에 보리가 없었으니 실로 국가가 기울어져 엎어질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겨울 우레가 일어나니 이어지는 해가 걱정입니다. 전하께서 이전의 옛일을 죽 살펴 보시건대 오늘날과 같으면서 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1671년 11월 30일, 우의정 송시열).
<온양별궁 전도>(서울대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 왕들이 질병 치료차 자주 행차했던 온양별궁의 모습.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의 수결.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 있는 숭릉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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