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7 다시쓰는 택리지 ① 경기 · 충청편
신정일 지음
2004, 휴머니스트
시흥시대야도서관
EM037822
981.1
신746택 1
신정일의 글은 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발이 도달한 산천 도처에서 금강의 여러 구비에서 울고 웃는다.
-김지하(시인 · 사상가)
신정일의 『다시쓰는 택리지』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 땅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많이 걸었던 그의 발이 쓴 국토교과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덕일(역사가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신정일은 무당처럼 답사를 한다. 혼이 실리고 신명이 나는 답사…이렇게 신명나는 답사의 궤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이정민(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신정일
문화사학자이자 답사가인 그는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데 힘쓰고 있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면서,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하여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까지 답사를 끝냈고,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등 북한의강을 답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저서로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 『지워진 이름 정여립』『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1, 2』『금강 401km』『섬진강 따라 걷기』『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신정일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 등이 있다.
"내가 한발 한발 걸으며 지나온 산과 강, 그 길을 걸으며 내가 발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였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우리의 국토였으며, 그 국토를 몸서리치도록 사랑하고 잇다는 사실이었다."
-머리말 중에서
차례
경기도(京畿道)
1. 남한강 주변의 고을
한남정맥이 뻗어 나가고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다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서울로 가던 길목 양근나루
남한상성 아래에 있는 성남시
청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화냥년에 숨겨진 사연
2. 역사와 한의 고장 강화
역사의 고장 강화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 내고
3. 남북으로 통하던 중요한 길목
서울이 가깝고 소금이 풍부했던 안산
남양 홍씨의 고장
익령군이 숨어 지낸 영흥도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한양 남쪽의 큰 도회지였던 안성
안성맞춤의 유래가 된 안성 유기
땅은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고
남북으로 통하던 길목 용인
4. 수원에서 인천까지
사통팔달의 고장 수원
산은 관악과 연하여 평야를 둘렀고
원미동이 있는 부천시
비류 백제의 도읍지 인천
천명고개에는 임꺽정의 흔적이 남아
김포공항이 있는 곳
5. 한강 변에 자리한 서울 공화국
형제의 우애가 서린 투금탄
한강 변의 명소 망원정
한양에 도읍한 이씨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까닭
신분에 따라 사는 곳도 달랐다
서울의 유래와 자연 경관
서울의 시장, 우리나라의 얼굴
사라지고 남은 서울의 이름들
마포 새우젓장수, 왕십리 미나리장수
고려시대의 귀양지 밤섬
복덕방과 땅 투기 바람
서울 공화국의 어제와 오늘
6. 한반도의 중심부 경기도
통일수도의 적지 교하
양주의 고구려 때 이름은 매성군
팔당댐을 바라보는 산
다산의 탯자리 능내리
왕따 중의 왕따 정약용
7. 경기 북부의 땅
고을이 작아 송사하는 백성이 없던 포천
조선의 진정한 선비 이항복
산은 첩첩 물은 구불구불
8. 임진강에 강물은 흐르고
고봉산 자락 고양
이여송이 크게 패한 벽제관 싸움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
파평 윤씨의 고향
임진나루에 강물만 흘러가고
9. 장단 너머에 개성이 있다
옛 시절 장단도호부
고려 건국 이야기
용왕의 딸에게 장가든 작제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두문동 72인
10. 500년 왕업의 터는 만월대로만 남아
왕씨들은 자취를 감추고
500년 사직의 터 만월대
스스로 깨우친 화담
만수산 드렁칡은 얽히고 또 얽혀서
충청도(忠淸道)
1. 내포 땅에 얽힌 사연
가야산 아래 내포
풍수지리상 천하의 길지
서산마애삼존불
추사 김정희의 고향
바다가 가까운 곳
홍주는 호서의 거읍
2. 홍성에서 보령에 이르는 길
인물이 많이 태어난 홍성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 있는 성주사지
한산 세모시가 아름다운 곳
임천에 있는 성흥산성
3. 무량사에서 김시습을 만나다
김시습과 무량사
무량사에는 진묵스님의 자취가 남아
이몽학의 난
4. 계룡산 아래 공주
계룡산 높이 솟아 층층이 푸름 꽂고
계곡의 물은 쪽빛처럼 푸르고
갑사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갑천의 발원지 태고사
남적이 아산을 함락시키고
5. 강경포구엔 빈 배만 매어 있고
놀뫼의 땅 논산
은진의 서쪽 강경
6. 부여, 그 새벽의 땅
백제의 세 번째 서울 부여
금강 속으로 여승들은 사라지고
사월은 갈아 엎는 달
새벽의 땅 부여
이중환의 고향 연기
김구 선생이 숨어 지낸 절
산천이 아름다운 공주
<훈요십조>의 진실
고마나루에는 곰이 없다
7. 충청도와 경상도의 길목
산이 높고 물은 맑다
송시열이 태어난 구룡리
인물의 고장 옥천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
보은 청산 시악시들 시집 못 가 눈물 난다
인삼의 고장 금산
적벽강이 금산에도 있다
8. 미호천 변의 고을들
살제 진천, 죽어 용인
그 유명한 음성 고추
미호천과 부강포구
백제 때 상당현
한줄기 물은 비단같이 흐르고
쓰러져 가는 홍명희의 옛집
이인좌의 난
아나키스트 신채호
대청댐과 문의
9. 교통의 요지 천안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아 흥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은 아산
이순신이 살았던 곳
10. 천하의 으뜸가는 물맛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이라
물은 갈수록 겹겹, 산은 거듭거듭
중원에 세워진 고구려비
탐금대에 서린 한
11. 남한강 변의 나루들
번성했던 목계장터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빼어나고
영춘과 온달산성
의림지가 있는 제천
여주 영릉
살아 있을 때 100년의 저택이 아무리 호사스러워도 죽어 만년의 유택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왕비 소현왕후가 묻힌 여주읍 왕대리의 영릉은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고달사지 부도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을 지닌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부도는 부도 중의 부도로 알려져 있으며, 국보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부도(普濟尊者 石鐘浮屠)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불교를 중흥시킨 나옹화상의 부도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연상시킨다. 보물 제228호이다.
남한산성
백제 온조왕 13년에 쌓은 성으로 이괄의 난 이후 개축하였으며, 병자호란의 아픈 상처를 지닌 곳이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인조가 병자호란 때 40여 일 간 머물며 직접 군사를 지휘했던 곳으로, 안쪽 편액에 씌어진 무망루라는 이름은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8년 만에 돌아와 그 치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마니산 참성단
사적 제136호로,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단이다.
부근리 고인돌
강화군 화점면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은 북방식 무덤으로 우리나라 고인돌 중 가장 큰 것에 속하며,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평택시장
넓은 평야를 끼고 교통의 요지라서 평택시장은 경기도의 이름난 시장이었다.
안성 궁예미륵
어떤 이유로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지 알 길은 없다. 미륵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궁예의 실패를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사람들이 연민의 마음으로 붙인 것은 아닐까?
안성 유기
조형미가 뛰어난 안성 유기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품질이 좋기로 소문이 났었다. 안성 장날이면 안성 꽃신과 함께 안성 유기를 사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수원 화서문
수원성의 서문인 화서문은 장안동에 있으며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원 화산 용주사
용주사는 본래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라는 절이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폐사지였던 이곳에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 원찰로 삼았다.
1920년대 인천
중국을 오고 가던 백제의 사신들은 지금의 송도 유원지 근처인 능허대에서 배를 탔다. 온조와 함께 내려왔던 비류가 터를 잡았던 인천의 1920년대 모습에서 오늘의 모습을 조급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양천 투금탄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옛 속담이 오늘날에는 "내것은 내것이고, 네 것도 내것"이라는 말로 변해 가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양천 투금탄 전설은 전해 준다.
대성문
북한산성의 5대문 중에서 제일 큰 문으로, 이곳으로 임금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경복궁 전도
경복궁 경회루
경회루는 태종 12년에 창건했는데, 사신을 위한 연회나 여러 신하들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회루는 사정전 서쪽에 있으며 누주 위에는 못을 만들었다. 못은 깊고 넓으며 연꽃을 심었고, 그 가운데 두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원정
1867년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경복궁을 재건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2층 정자이다.
압구정도
한명회가 세웠다는 정자 '압구정'을 소재로 그린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현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마포나루
조선 후기의 마포나루 전경이다. 삼개나루라고 불렀던 마포는 용산 · 양화진과 함께 주로 삼남지방에서 오는 곡식을 풀어 내려 저장하고 황해에서 잡히는 새우 조기 등의 수산물을 풀어 놓는 포구였다.
국회의사당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원들이 국정을 논의하는 장소이다. 7대 국회였던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에 기공식을 가져 완공되었다. 이곳을 차지한 국회의원들이 그 규모나 신분보장에 걸맞은 의정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회의원의 말년이 아름다워질 날은 언제일까?
복덕방
마을 노인들이 심심풀이로 집을 소개해 주면서 시작된 복덕방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동산 중개소로 명칭이 바뀌면서 복부인 · 떳다방 등의 신조어를 만들며 날로(?) 번창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묘
오랜 유배생활에서 돌아와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고향 마재에서 저술에 몰두하다 1836년 일흔다섯으로 세상을 떠난 다산은 아내 풍산 홍씨와 함께 뒷산에 잠들었다.
화산서원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에 있다. 인조 9년에 지방의 유림들이 이항복의 덕행을 기려 세었고, 숙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용미리 석불입상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예로 꼽히는 용미리 석불입상은 보물 제93홀 지정되어 있다. 벽제관을 지나 혜음령을 넘어 개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서 있는 수호신이다.
화석정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이 세운 정자로, 벼슬에서 물러난 율곡이 머물면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했던 곳이다.
신사임당의 무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의 묘 바로 위에 율곡 내외의 묘가 있다. 부모의 묘 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쓰는 경우를 역장이라고 한다.
임진각 기차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씌어진 경의선 철도에 세워진 기차. 새들은 마음대로 오가고 강물은 남과 북을 건너다보며 흐르는데 언제쯤 이웃집 마실 가듯 오고 갈 수 있을까?
개성 성균관
고려 문종왕이 별궁으로 세운 것이다. 1089년 최고 유교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긴 뒤 1310년에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인재양성을 위해 세운 오늘날의 국립대학이라고 볼 수 있다.
선죽교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철퇴를 맞고 쓰러진 곳이다. 그때 흘린 피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공민왕릉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 산 중턱에 있는데 공민왕의 무덤 현릉과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 정릉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박연폭포
개성에서 60리쯤 떨어진 천마산 자락에 있다. 높이는 약 35미터쯤 되는데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장대하기 이를 데 없다.
남연군 묘
가야사라는 절터였는데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을 주지에게 주어 스님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하고, 중국 명품 단계 벼루를 선사한 뒤 가야사 스님들을 쫓아내고 마곡사의 스님들을 불러다가 불을 질렀다고 한다.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데 암벽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가 볼이 터질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김정희 고택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사대부의 집으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양반가 주택의 모습을 보여주며 바로 집 옆에 추사의 묘가 있다.
수덕사
고려시대의 건물로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형태미가 뛰어난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상 아주 중요한 건물이다.
보령 무창포
매년 4월 초순이면 무창포에서 솔숲 우거진 석대도까지 바닷길이 열리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이라고 일컫는다.
보령 성주사 터
신라 말기의 고승 무염국사가 열었던 성주사는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번창했던 절이다.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보물급 석탑들이 여러 개 있다.
대조사 석불상
부여군 임천면 뒤쪽의 성흥산 중턱에 있는 대조사에 있다. 논산 관촉사의 미륵불과 모양새가 흡사하다.
무량사 김시습 부도
조선시대 최고의 아웃사이더였던 김시습이 세상을 주유하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절이 무량사였고 이 절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서 부도를 세웠다,
무량사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자락에 있다.
이몽학 집터
청양군 청남면 아산리 원촌방죽, 이곳이 이몽학의 집터이다. 난이 끝난 뒤 집터에 저수지를 만들었고 산봉우리에 있던 이몽학의 선조 무덤은 파낸 뒤에 뜸을 떴다고 한다.
갑사 당간지주
갑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올라가면 너른 공터에 철당간이 있다.
공주 장기면의 영평사
절 안팎으로 온통 구절초가 흐드러져 가을이면 구절초 축제가 열린다.
동춘당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다'는 뜻을 지닌 동춘당은 효종 때 대사헌과 병조판서 등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의 집 별당으로,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성
유성 온천으로 이름이 높은 유성(옛 이름은 명학소)에서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망이 ·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유성에 세워져 2002년에 월드컵 경기를 치른 대전 월드컵 경기장이 보인다.
견훤의 무덤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묘 · 왕묘 · 왕총 말랭이라고도 부르는 이 무덤은 견훤묘인지 아닌지 그 진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견훤은 후백제가 망한 뒤 등창이 나서 죽기 전 "내가 죽거든 전주 땅을 바라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논산 쌍계사 무늬문
쌍계사 대웅전의 문은 정면 다섯 칸으로 모두 열짝이 달려 있는데, 모란 · 연꽃 · 국화 등의 꽃 창살이 세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윤증 고택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윤증 고택은 향촌 사대부 집의 면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경시장 풍경
대구 · 평양과 더불어 나라 안의 3대 시장으로 불리던 1900년대 초의 강경시장
옛날의 강경포구
신동엽 생가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이라고 시인이 노래한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신동엽의 옛집.
신동엽 시비
부여대교 못미쳐 우거진 숲속에 있는 신동엽의 시비에는 서정시 <산에 언덕에>가 새겨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
부여읍 동남리에 세워진 백제탑.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궁남지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로 조성된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 35년 3월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김옥균 생가 터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에 있는 한말의 개혁사상가이자 혁명가인 김옥균의 집터에는 감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마곡사
숙종 때 사람인 송상기가 「유마곡사기」에서 "절은 고갯마루 아래 있었고 10여 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 하였던 것처럼 마곡사는 들어가는 길이 무척 아름답다.
공산성 공북루(? 임류각)
공산성은 오붓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데, 공북루는 1603년 옛날 망북루가 있던 곳에 세운 2층 누각이다.
우금치 위령탑
1894년 우금치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접전을 벌여 동학농민군이 참패했다. 모레는 수원, 글피는 한양성 하며 올라왔던 동학농민군은 결국 금강의 곰나루를 건너지 못했다.
적등진나루
추풍령을 넘어 서울길로 향하던 길손들이 꼭 넘어야 했던 이 나루는 옥천군 이원면에 잇었다. 지금은 경부선 철길이 놓여져 여전히 교통의 요지이다.
정지용 생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그 실개천 곁인 옥천군 옥천읍 구읍에 정지용의 옛집이 있다.
영동 노근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경 영동군 황간읍 노근리 경부선 철도변에서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미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숨진 노근리 사건의 현장이다.
보은 삼년산성
보은읍을 바라보는 삼년산성은 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큼 대단한 석축산성이다.
진천 농다리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 변에 고려 고종 때 최씨 무신정권에 이어 권력을 잡았던 임연이 세웠다는 돌로 쌓은 다리이다.
화양구곡
예로부터 금강산 남쪽의 제일가는 경치라고 알려진 화양구곡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이 금사담이고 멀리 보이는 집이 송시열의 서재이자 별장인 암서재이다.
송시열 묘
수원 무봉산에 있다가 숙종 23년(1697년)에 괴산군 청천면으로 옮겼다. 모든 산들이 이 산을 향해 달려오는 듯싶다.
만동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준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 송시열의 유촉으로 그의 제자였던 권상하 등이 건립하였다.
천안 광덕사
신라 흥덕왕 때 진산화상이 창건한 절로 고려 충렬왕 때 유청신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서 호두 묘목을 가져와 제일 먼저 심어 호두의 원산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20년대의 온양 온천
온양읍 온천리에 있는 온양 온천은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온천이다. 조선왕조 때 태조 · 세종 · 세조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앙탑
고구려탑이라고 알려진 중원의 중앙탑. 이곳이 나라의 중심지라고 한다.
고구려비
고구려가 장수왕 때 한강 상류의 여러 성을 점령한 뒤 나라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남방 진출의 거점이 된 이곳에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탄금대비
탄금대는 신라 때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신립이 크게 패하였다.
단양 도담삼봉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도담삼봉. 원래 영월에 있다가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온달산성
고구려의 장수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온달동굴이 있고 그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며, 강 건너 고을이 영춘이다.
제천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인공수리시설의 하나이다.
괴산 연풍의 풍악헌
연풍의 관아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연풍 동헌인 풍악헌만이 연풍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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