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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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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8. 12:28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86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곽재구 시집

1999, 열림원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0186

 

811.6

곽73ㄲ

 

섬진강과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보성강에게

75년 이후 그곳 모래 위에 발자욱을 남긴 모든 추억들에게

 

차례

 

1

산수유꽃 필 무렵

두 사람

밤 편지

큰눈 내리는 날

돌점 치는 여자

얼음주사위

따뜻한 편지

눈오는 밤에 춘향전을 읽다

얼음 풀린 봄 강물

칠석날

묵언 1

묵언 2

사월의 노래

배꽃

자장가

 

2. 연화리 시편

나무

누란

나뭇잎 배

계단

사마르칸트

하늘의 춤

산수유나무 아래서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기다림

고등어장수

수제비죽

분수

雪蓮

그리운 폭우

꽃을 드리는 이유

타클라마칸 사막

무지개를 위하여

참으로 오만하고 우아한 열정

쟈스민차

노란 꽃

하늘의 나무

촛불

소나기

가을의 시

백합

소년

타지크스탄

연꽃잎 우산

설해목

쓸쓸한 날의 춤

 

3

수선화 핀 언덕

겨울 시집

첫눈 오는 날

마음

가거도 편지

연기암에 올라

도문장터

선유도

낮달

용흥리 석불

0.75평

봉정리에서

모래톱이야기

바람소리

花心里에서

 

□ 시인의 말 / 강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날들

 

산수유꽃 필 무렵

- 산동에서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깊은 삼십 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 리.

 

 

모든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녔는지

난 알고 있다네

그 머리칼에 한 번 영혼을 스친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되는지도.

 

눈오는 밤에 춘향전을 읽다

 

눈오는 밤에

完版本 춘향전을 읽는다

찹쌀떡 사시오

찹쌀떡 사시오

거칠게 새겨진 목판활자

사이로 스며든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풀피리소리만 같다

날이 새면 경칩

옥문에서 풀려난 춘향이 앞장세우고

조선팔도 금수강산 유람 나서리.

 

칠석날

 

우리 할머니

채송화 꽃밭에서

손금 다 닳아진 손으로

꽃씨 받으시다가

 

이승길 구경 나온

낮달 동무 삼아

하늘길 갔다

 

반닫이 속

쪽물 고운 모시적삼도

할머니 따라

하늘길 갔다.

 

묵언 1

- 소금밭에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나무

- 연화리 시편 1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누란

- 연화리 시편 3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난 곳은

사막 한가운데였습니다

돈황 버스 정류장 대합실에서

뜨거운 쟈스민차 한 잔에 마른 빵을 찍어 먹었습니다

바로 그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지요

 

네가 찾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군데밖에 없지

 

사랑하는 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얼마나 설레였는지

당신은 모릅니다

삶과 죽음이 영원히 교차되지 않는 땅

영혼과 육체의 핍박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는 곳

사랑하는 이여 오늘도 나는

樓蘭으로 가는 모래밭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뭇잎 배

- 연화리 시편 4

 

강으로 가는

길목에서

매일 나뭇잎 배

하나씩을 띄웠습니다

 

나뭇잎 배에

나는 내 이름이나

영혼의 흔적 같은 것을

새기지 않습니다

 

어쩌다

당신이 내 배를 발견하곤

말하겠지요

난 너를 알아

네가 만든 이 작은 배도.

 

하늘의 춤

- 연화리 시편 7

 

당신으로부터

초록빛 만년필과

초록 빛깔의 잉크 한 병

선물 받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樹液이 적신

들판 저 멀리

눈부신 초록빛의 시 한 편

쓰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원고지를 남길 적마다

내게 하늘의 손을 주겠지요

그 손을 잡고 싶어요

당신이 내게 보낸 깃털 같은 그리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아늑하고 크낙한 하늘의 춤을 추고 싶어요.

 

산수유나무 아래서

- 연화리 시편 8

 

꽃뱀 한 마리가

우리들의 시간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

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

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

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

사랑하는 이여,

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 연화리 시편 9

 

그날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던 도중

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릴없이

무너지는 내 마음이

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그 많은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기다림

- 연화리 시편 10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고등어장수

- 연화리 시편 11

 

어느 날

강변 내 오두막집 앞에

한 고등어장수가 닿았습니다

먼 바다에서 온 그의 고등어들은

소금에 잘 절어 파랗게 빛났습니다

고등어 값은 너무 비쌌답니다

난 이렇게 말했지요

왜 고등어 값이 쌌다가 비쌌다가 그러지요?

먼 바다에서 온 고등어장수가

내게 말했답니다

당신 제일 가까운 곳의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면서

먼 바다 고등어의 값을 어떻게 셈하겠소?

 

수제비죽

- 연화리 시편 12

 

어제 저녁엔 수제비죽을 쑤었습니다

내 작은 오막살이 가득 멸치국 내음 가득 찼습니다

이 맛있는 내음 함께 맡아줄 이 없어 조금 서운했습니다

그때 한 나그네가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마중을 나간 내게 나그네가 말했답니다

"이 집에서 나는 향기는 처음 맡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상석에 앉히고 한 대접 수제비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지요

"神이시여, 이 모든 향기가 그대의 은총입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답니다

"그대는 어떻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

이 지상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神이시여, 내 그리운 그 사람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이름입니다."

 

雪蓮

- 연화리 시편 15

 

히말라야 산맥에 오르면

눈 속에 피는 연꽃이 있습니다

나 그대 위하여

그 연꽃이 되겠습니다.

 

그리운 폭우

- 연화리 시편 16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도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 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꽃을 드리는 이유

- 연화리 시편 17

 

끝없이

정말 끝없이

여기가 천국의 끝이기나

한 것처럼

오만해질 것

 

그리하여

어느 날

눈 화안하게 트여 오는

순정한 지평 하나를 볼 것.

 

타클라마칸 사막

- 연화리 시편 18

 

버스를 타고 끝없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리다 보면

차창 밖 어디에고 신기루 피어납니다 오아시스 마을

지나온 지 불과 이십 리 지도에는 앞으로 하룻길 더

달려야 새 오아시스 마을에 이른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평선 어디에건 오아시스 마을 자리하지

않은 곳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 향한 내 마음이

신기루와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저 광활한 사막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 그 어디에도 그대 향한 내

그리움 스며들지 않은 곳 없습니다.

 

무지개를 위하여

- 연화리 시편 19

 

영혼은 어디에 있어요?

영혼의 강은 찾을 수 있어요?

영혼도 숨을 쉬나요?

영혼의 날개를 본 적 있어요?

그걸 좀 보여주세요

 

당신의 가슴에서

내 가슴에 이르는 저 기나긴

다리의 이름은 무엇인지요?

색색의 꿈으로 빚어놓은

저 섬세한 바람의 술렁거림은 무엇인지요?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한 번도 꿈꾼 적 없으면서

그냥 그렇게 가슴에 와 부서지는

저 그리운 빛들의 축제는 또

무어라고 부르지요?

 

참으로 오만하고 우아한 열정

- 연화리 시편 20

 

빛살 터지는

강변을 거슬러 오르며

나는 내 언어의

금속세공업자가 됩니다

 

밟히는

모래 한 알 한 알마다

참으로 오만하고 우아한 열정이라

새겨 넣을 겁니다

떨어지는 빛살 한 올 한 올마다

꼭 그렇게 새겨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하늘의 찬란한 기술을

다 익혔을 때

당신이 벗은 발로 내게 찾아오던

그날의 긴 설레임과 환희를

금빛의 강물 위에 새길 것입니다.

 

쟈스민차

- 연화리 시편 21

 

내가 처음 쟈스민차를 마신 곳은

돈황의 사막이었습니다

나는 돈황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쟈스민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당신을 깊게 사랑한 것은 아니었던지요

돈황

그 이름 속에 쟈스민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정말 알 수 없었답니다.

 

노란 꽃

- 연화리 시편 22

 

그 꽃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높은 산으로 가는 길목에 앉아

호박죽 하나로 그리운 허기를 지우고 있을 때

우리 눈앞에 그 노란 꽃들 나타났습니다

산뻐꾸기가 울고 어디선가

하얀 나비떼들이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깊게

당신의 무릎 위에

내 영혼을 눕히고 싶었습니다

바람이 일고

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하얀 나비떼들이 팔랑팔랑

바람 속을 날았습니다

내 가슴속에

함께 춤추고 싶은 꽃의 이름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노오란 그 꽃의 이름은 당신에게조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나무

- 연화리 시편 23

 

긴 여행 끝에

우리는 한 포구에 닿았습니다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우리들의 낡은 배는

포구의 잔 불빛에도 자꾸만 흔들렸습니다

마을의 불빛과 고깃배들의 불빛이

싸리꽃처럼 곱고 아름다웠으므로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그 꽃송이들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한 차례 흔들면 우수수 쏟아질 듯

하늘의 나무에 무수한 별들이 매달렸습니다

인간의 한 사랑이

8만 4천 년을 적신다는

그 땅의 이름은 무엇인지요?

얼마나 더 깊은 사랑을 만나야

그리운 그 바닷가에 닿을 수 있나요?

 

촛불

- 연화리 시편 24

 

사랑하는 이여

 

그대 산 너머 떠날 때

내게 촛불 하나 주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밝히라는 따뜻한 言語인가요

사랑하는 이여 오늘밤

은하수 너머 당신이 사는 먼 마을까지

촛불 하나 들고 끝없는 하늘길 오르내리는

사내 하나 있습니다.

 

소나기

- 연화리 시편 25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을의 시

- 연화리 시편 26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水深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백합

- 연화리 시편 27

 

당신이 고통으로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당신이 주체할 수 없는 정신의 방황으로

아름다운 긴 머리칼마저 흐트러뜨릴 때

내 마음의 뜨거운 골짜기에서

진실로 순결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어느 날

당신은 나를 떠나겠지요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찬란한 바다

모든 파도가 슬픔으로 술렁이는

그날도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소년

- 연화리 시편 28

 

소라껍질을 귀에 대면

큰 도시의 시장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바다 소리가 들려

어느 날 당신이 내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 바다 소리 들으러

소라고둥 하나 들고

마음의 먼 도시로 떠나가는

소년 하나 있습니다.

 

타지크스탄

- 연화리 시편 29

 

낡은 라다 승용차를 타고

나는 눈 덮인

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밤은 먼 도시의 불빛들을

페르가나산 보석으로 치장하여 줍니다

지금부터 2,600년 전 한 인도 사내는

6년 동안 이 지상의 불빛들을

雪山 위에서 헤아렸습니다

그대여

내가 그대를 위하여

오르는 산의 높이는 불과 5,400미터입니다

그런데도 오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오르다가, 산 아래 불빛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만 그 중의 하나를 붙잡고

잠이 들고 싶기도 하답니다.

 

- 복종, 연화리 시편 30

 

밥을 먹다가

바로 앞 당신 생각으로

밥알 몇 개를 흘렸답니다

왜 흘려요?

당신이 내게 물었지요

난 속으로 가만히 대답했답니다

당신이 주워 먹으라 하신다면 얼른

주워 먹으려구요.

 

연꽃잎 우산

- 연화리 시편 31

 

강물이 고요한 목소리로 흐릅니다

바람이 산비탈을 따라 느릿느릿 내려오는 모습도 보입니다

뱃사공은 어느 산자락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날개가 하얀 큰 새가 모래사장을 따라 내려가고 있습니다

작은 빗방울들이 강물 위에 꽃맨드라미를 지피고 갑니다

이러한 날 당신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연둣빛 우산과 함께 걷고 있겠지요

즐거워하며 팔짱을 끼고 인도의 어느 꽃가게 앞이나

이집트의 古樂器店 앞도 기웃거리겠지요

난 당신의 그런 모습도 보기 좋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내게 찾아오는 날

난 당신에게 연꽃잎으로 만든 우산 하나 펼쳐 드릴 겁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어떤 표정을 지을 건지

가만히 생각해보는 산자락에 비는 그대로 내립니다

 

수선화 핀 언덕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을 때

 

강가의

나무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새

 

수선화 핀

언덕을 넘어가자고

 

수선화 핀

언덕을 차마 넘어가자고.

 

선유도

 

섬과

섬 사이

새가 날아갔다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편지 한 통을 물고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

 

posted by 황영찬
2015. 9. 17. 09:1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85 Andy Warhol 앤디워홀

 

지은이 | 이자벨 쿨, 옮긴이 | 정연진

2008, 예경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01661

 

650.8

아887ㅇ  7

 

ART SPECIAL 7

 

Andy Warhol |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표면을 관찰하면 된다.

그 표면 밑으로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은 살아 있는 동안에 '살아 있는' 신화였고, 세상을 떠난 지금 역시 '살아 있는 신화'이다. 워홀에 의해 수프 캔, 세탁 세제 박스 같은 일상용품은 처음으로 예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공장(팩토리)'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실은 뉴욕 보헤미안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 책은 워홀이 활동한 1960년대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으로부터 팩토리와 그의 사랑을 비롯한 삶과 예술, 오늘날 앤디 워홀의 위상 등을 한꺼번에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지은이 | 이자벨 쿨 Isabel Kuhl은 미술사가이며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원에서 통번역학 박사과정 재학 중에 있고,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앤디 워홀 | Andy Warhol(1928-87)

 

가난한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단돈 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워홀은 잡지나 신문 삽화, 광고 그림을 그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흔히 먹던 캠벨 수프, 코카콜라병을 작품소재로 삼아 뉴욕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킨다. 이후 공장에서 찍어내듯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미술품을 대량생산해내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인 팩토리에서 조각품, 실크스크린뿐만 아니라 실험영화까지 제작했다. 그는 영화에 그치지 않고 유명인과의 인터뷰를 실은 잡지를 창간하고, TV 쇼를 진행하고, 광고에 출연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워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비판이 커질수록 더욱 높은 유명세를 탔다.

 

1928-44

 

세계사

 

>> 1929년 토마스 만, 《부덴부르크 일가》로 노벨문학상 수상. 10월 24일, 뉴욕 증시 급락으로 '검은 금요일' 이후로 세계경제에 위기가 도래.

>> 1933년 아돌프 히틀러, 독일 제 3제국 총리로 취임.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 1941년 콘라드 추제가 최초의 컴퓨터 발명.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

 

>> 1928년 8월 6일 피츠버그에서 워홀 출생함. 당시 이름은 '앤드류 워홀라'

>> 1934-36년까지 초등학교, 그 후에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함.

>> 1942년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 사망.

 

1945-49

 

>> 1945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 1946년 첫 UN 총회가 열림.

>> 1947년 인도 독립.

>> 1949년 나토 설립.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선포. 윌렘 드쿠닝, 잭슨 폴락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뉴욕에서 예술가 동맹인 '성마른자들(The Irascibles)' 결성.

 

>> 1945년 피츠버그 카네기 공대에서 산업디자인 전공으로 학업을 시작함.

>> 1949년 졸업과 동시에 뉴욕으로 이사 · 광고 디자이너로 취업함.

 

1950-55

 

>> 1953년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앨범 발매.

>> 1954년 제1차 베트남 전 종결.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의 시대가 막을 내림.

>> 1955년 독일 카셀에서 제1회 도쿠멘타 전시회 열림. 제임스 딘이 차 사고로 사망. 바르샤바 조약 체결.

 

>> 1950년 어머니 줄리아, 뉴욕 워홀의 집으로 이사 옴.

>> 1952년 뉴욕 휴고 화랑에서 드로잉 작품으로 첫 개인전이 열림.

>> 1954년 '미국 그래픽 아트 협회'가 수여하는 상업디자인 분야 최우수상 수상.

>> 1955년 처음으로 조수를 기용함.

 

1956-62

 

>> 1957년 영화배우 험프리 보거트 사망. 구소련,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에 쏘아 올림.

>> 1958년, 미국 첫 인공위성 발사.

>> 195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 장악함.

>> 1952년 배우 마릴린 먼로 사망.

 

>> 1956년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서 '디스팅티브 메리트' 메달 수상.

>> 1957년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 사(社) 설립.

>> 1960년 만화를 모티브로 한 첫 작품을 선보임.

>> 1962년 할리우드 스타와 캠벨 수프 깡통 모티브의 실크스크린 작품을 선보임.

 

1963-64

 

>> 1963년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됨.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 상영.

>> 1964년 초반 베트남 전 발발. 제3회 카셀 도쿠멘타 열림.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거부함.

 

>> 1963년 작업실을 '팩토리'로 명명함. 첫 영화 <슬리프>를 제작함.

>> 1964년 파리 일리아나 소나벤드 화랑에서 유럽 첫 전시회 열림.

 

1965-68

 

>> 1965년, 말콤 X 피살됨. 밥 딜런, 노래 <라이크 어 롤링 스톤> 발표.

>> 1966년 중국 문화혁명이 일어남.

>> 1967년 체 게바라의 사형이 집행됨. <섬머 오브 러브> 행사로 히피문화가 절정에 다다름. 뮤지컬 <헤어> 초연됨. 르네 마그리트 사망.

>>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됨. 파리에서는 대학생들이 소르본 대학을 점거하고, 무력진압이 벌어짐.

 

 

 

>> 1966년 해프닝 예술인 <익스플로딩 플레스틱 인에비터블>을 연출함.

>> 1967년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커버를 디자인함.

>> 1968년 제2 팩토리로 이사. 7월 3일 여성권리주의자 발레리 솔라나스의 총격에 의해 중상을 입음.

 

1969-72

 

>>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

>> 1970년 점보제트 여객기 첫 출항.

>> 1971년 이집트에서 아스완 댐 준공. 가수 루이 암스트롱 사망. 빌리 브란트, 노벨평화상 수상.

>> 1972년 로마 클럽에서 《성장의 한계》 보고서 발표.

 

 

>> 1969년 《인터뷰》지 창간.

>> 1971년 뉴욕의 라마마 실험극장과 런던의 라운드하우스 극장에서 <포크>를 상연. 워홀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에디 세즈웍 사망.

>> 1972년 피츠버그에서 어머니 줄리아 사망.

 

1973-75

 

>> 1973년 베트남전 휴전. 1차 오일파동이 일어남. 파블로 피카소 사망.

>> 1974년 미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파문으로 하야함. 요셉 보이스가 뉴욕에서 <나는 미국을 좋아하며,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라는 제목 하에 행위예술을 펼침.

>> 1975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社) 설립.

 

 

>> 1974년 제3 팩토리로 이사함.

>> 1975년 저서 《앤디 워홀의 철학》 출간으로 큰 성공을 거둠.

 

1976-80

 

>>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사를 공동설립함. 화가 만 레이 사망.

>> 1977년 한스마틴 슐라이어 독일경영자연맹 회장이 테러단체 '적군파(RAF)'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됨. '독일의 가을'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독일 테러리즘이 최고조에 달함.

>> 1978년 첫 시험관아기 탄생.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 1978년 <산화> 연작을 선보임.

>> 1980년 《파피즘》 출간, 요셉 보이스의 초상화를 작업함.

 

1981-85

 

>>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 IBM 사가 첫 개인컴퓨터(PC)를 시장에 선보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이 열림.

>>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포크랜드 전쟁 발발. 배우 로미 슈나이더 사망.

>>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됨.

 

>> 1981년 제4 팩토리로 이사함.

>> 1982년 뉴욕 지역방송사에서 <앤디 워홀 TV>가 방영됨.

>> 1984년 장 미셸 바스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공동작업을 시작함.

 

1986-87

 

>>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참사가 일어남. 요셉 보이스 사망.

>>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가 세스나기(機)로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착륙함.

 

>> 1986년 MTV에서 <앤디 워홀의 15분>이 방영됨.

>> 1987년 2월 22일 수술 합병증으로 워홀 사망함.

 

차례

 

그때 그 시절

모든 길은 빅애플로……

 

최고가 되기까지

높이, 더 높이

 

예술

일상을 그리는 화가

 

파티도 좋지만 일 먼저

 

사랑

슈퍼스타의 조용한 사랑

 

지금도 우리 곁에

뒤늦은 명성

 

그때 그 시절

 

"뉴욕은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뉴욕은 추하고, 지저분하다.

탁한 공기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뉴욕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다른 어떤 도시도 뉴욕만큼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을……."

헨리 제임스

 

거대한 사과!

 

빅애플은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국제적인 예술, 미디어,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잠들지 않는 도시'인 뉴욕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앤디 워홀도 그 수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생활소품들을 커다랗게 확대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미술품에 현실성을 부여하려면 그것을 현실 세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야 한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예술은 박물관에 쳐박혀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한다."

- 클래스 올덴버그

워싱턴 스퀘어 광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비트족 시인 앨런 긴즈버그, 그레고리 코르소, 언론인 바니 로셋, 1957년.

맨해튼에 있는 낡은 모자공장을 개조해 만든 앤디 워홀의 첫 '팩토리'.

안무가 머스 커닝엄이 공연한 발레극 <레인 포레스트>, 1968년.

팝 예술가인 톰 웨슬만은 일상생활의 소품을 나체 여성과 함께 구성했다.

액션 페인팅 | 잭슨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세계와 더불어 새로운 회화기법도 함께 발견했다. '드리핑' 기법이 그것으로, 거대한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뿌려대는 방식이다. 캔버스가 큰 경우에는 캔버스를 눕혀 놓고 그 위를 돌아다니며 작업했다고 하니, '액션 페인팅'이라는 며ㅛㅇ칭이 어색하지 않다.

표현주의 | 잭슨 폴록이 사망한 뒤 웰렘 드 쿠닝이 추상표현주의 예술의 선두주자로 나선다. 드 쿠닝이 살던 곳의 지명을 딴 1957년 작품 <팰리세이드>는 제목만 보고는 감상자가 모티브의 지형을 가늠하기 어렵다. 푸른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를 휘저은 넓은 붓터치가 인상적이다.

발견자 | 앤디 워홀의 초상화에 나타난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스트인 그는 1960년대 뉴욕을 휘저었던 최고의 예술 기획자였다. 재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 팝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성공을 안겨준 인물이다.

젊은 야성 |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을 알기 전, 장 미셸 바스키아는 맨해튼의 벽이란 벽은 모두 그래피티 낙서로 채우고 다녔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최고의 예술가로 급부상한다. 바스키아는 27세로 요절했지만 100점이 넘는 유화 및 오브제 그리고 2천 점이 넘는 습작을 남겼다.

 

최고가 되기까지

 

"물론 앤디 워홀이 재능이

없다은 아니오.

…… 다만 천재적인

자기홍보 능력외에

그가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모르겠단 말이오."

트루먼 카포티

 

"사업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이는 워홀이 뉴욕 광고계에 몸담았던 초기에 터득한 신조이다. 예술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워홀에 대한 관심은 불꽃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1980년 독일 뮌헨에서 함께한 앤디 워홀과 요셉 보이스.

 

극장에 이름을 걸다

 

1968년 여름, 앤디 워홀은 여성운동가 발레리 솔라나스의 총격으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그가 입원한 병원에 문안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서 예전에 워홀의 영화를 상영했던 그리니치 빌리지 개릭 극장에서 보내온 편지는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홀을 기리는 뜻에서 1968년 7월 15일, 극장 이름을 '더 앤디 워홀 개릭 극장'으로 개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앤디 워홀에 대한 심리분석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네. 그를 너무 사랑하니까."

- 요셉 보이스

워홀의 끊임없는 노력과 야망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홀은 생전에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명예를 누렸을 뿐 아니라 국제전시회를 통해 엄청난 부도 거머쥐었다.

1949년, 사회 초년생인 워홀이 맡은 일은 여성지 《글래머》에 실린 '뉴욕 직장에서 성공하기'라는 기사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 앤디 워홀

1961년,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쇼윈도 장식에 활용한다.

1964년 레오 커스텔리 화랑에 전시되었던 <브릴로 박스>.

1964년 동료 화가들과 함께한 워홀. 왼쪽부터 톰 웨슬만,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위조지폐 혹은 예술지폐 | "난 돈이 벽에 걸려 있는 게 좋다. 어차피 20만 달러를 주고 그림을 살 거라면, 그냥 돈을 벽에 거는 게 더 낫다." 워홀은 자신의 저서 《앤디 워홀의 철학》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가 그린 위조지폐들은 진짜 지폐의 가치를 훌쩍 넘어서버렸다.

돈의 예술 | <달러 사인>은 평단과 관람객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갤러리스트 레오 카스텔리가 1982년에 기획한 대규모 전시회는 실패로 끝나버린다.

화제 바꾸기 | 작품 <꽃>은 워홀이 <전기의자>의 예처럼 죽음과 연관지어 기획한 시리즈 이후에 탄생한 작품이다. 워홀이 이처럼 친근한 모티브를 선택하게된 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 담당인 헨리 겔트잘러의 역할이 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 워홀의 <꽃> 시리즈는 1964년 카스텔리 화랑 전시회에서 전 작품 매진이라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꽃> 시리즈는 워홀이 처음으로 자연에서 모티브를 구한 작품으로, 위에서 내려다본 꽃밭을 사진에 담아 작업에 활용했다.

친구, 그리고 적 | 워홀은 독일 출신 예술가인 요셉 보이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친구만 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진작가인 프레데릭 에버슈타트는 1960년대 워홀에 대해 "은색 가발을 뒤집어 쓴 역겨운 말라깽이"라는 서슴지 않았다.

동료 예술가 | 워홀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유명인사라면 누구든 초상화의 모티브로 삼았는데, 동료 예술가였던 요셉 보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홀은 초상화 모델의 사진을 찍을 때, 그림같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얼굴을 하얗게 화장시키곤 했다고 한다.

 

예술

 

"착한 워홀은 워홀이 아니지.

사람이 이보다 짖궂을 수 있을까?

워홀은 예술사학자들에게

아주 골칫거리다.

워홀이 일부러 예술사를 무시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가 폭발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달러 지폐, 자동차 사고,

연쇄살인범, 수프 깡통……

 

워홀의 작품에 등장한 모티브들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가 찾는 대상은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이었다. 미술계가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아직은 추상표현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팝 예술가인 재스퍼 존스 또한 제품 포장 디자인에 매혹을 느꼈다. 다만 그가 고른 소재는 수프가 아닌 맥주 깡통이었을 뿐.

 

 

"팝아트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앤디 워홀

 

 

 

워홀은 20년간 캠벨 수프가 자신의 점심 메뉴에서 빠진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가까운 대상이었으니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80년대에는 거꾸로 캠벨 회사에서 워홀에게 광고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말이 없는 작품일수록 완벽한 작품이기 마련이다."

- 앤디 워홀

아크릴과 파스텔로 캔버스에 그린 <슈퍼맨>. 1960년 작품.

깡통의 활약은 계속된다. 캠벨 수프 깡통은 워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모티브가 된다.

1966년, 워홀은 카스텔리의 화랑에서 벽지와 방석 디자인을 선보인다.

슈퍼스타 제인 홀저와 함께 한 앤디 워홀. 1966년.

번진 선 | 워홀의 드로잉 기법은 '블로티드 라인' 즉 '선 번짐'이라고 불린다. 번진 점이 이어져 선 모양이 되는데, 잉크로 그림을 그린 후 종이를 덮어 찍어내면, 거울 반대방향으로 드문드문 끊어진 선이 생겨난다. 이러한 인쇄기법은 워홀의 오프셋 인쇄 작품들을 한층 다양하게 해주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신발 | 워홀은 구두라면 가리지 않고 그렸다. 1956년 작품인 금장식 구두 그림은 조금 특별하다. 제목이 가수이자 배우인 <주디 갈런드>였기 때문이다. 워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꼬불꼬불한 글씨는 워홀의 어머니인 줄리아의 필적이다.

스텝을 따라서 | 워홀은 스텝 순서를 그림으로 옮기면서 깨끗한 흑백으로 처리했다. 이 1962년 작품은 2분의 2박자 또는 4분의 4박자의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추는 폭스트롯 스텝을 보여준다. 이 연작의 다른 그림을 감상하면 또 다른 춤들을 배울 수 있다.

30명의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미녀 모나리자에 워홀은 홀딱 반했다. 워홀은 결국 이 신비한 미소를 복제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림의 제목은 <서른 개가 한 개보다 낫다>이다.

실험정신 | 워홀의 영화 <이트>에서 주인공 로버트 인디애나가 버섯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다. 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45분. 뻔한 장면이 계속되는 것을 감안하면 꽤 긴 작품이다. 1960년대 워홀 영화의 키워드는 '디테일'이었다.

인내심 | 1964년 영화 <앰파이어>에서 워홀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이 영화를 감상하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7시간 동안 한 각도만을 응시해야 한다.

산화작용 | 이 작품의 기법에 대한 점잖은 표현은 '금속성 킬러에 혼합재료' 정도가 되겠다. 워홀의 팩토리에선 금속 함유 물감을 칠하고 오줌으로 산화처리한 이 기법을 '오줌 페인팅"이라고 불렀다.

미스터리 | <그림자> 시리즈는 크기가 매우 큰 추상화이다. 이 비밀스러운 작품을 보면 도무지 이전 작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워홀은 이 그림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에게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오"라고.

그림자 극장 | 팩토리에 들어찬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모양의 그림자는 워홀의 그림자 시리즈 제작에 많은 영감을 주었으리라,  <산화>와 마찬가지로 워홀은 이 작품에서도 구매자들에게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앤디는 다른 인간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냐고요?

세계 최초로 제작된 플라스틱

인간이니까요."

울트라 바이올렛(본명 이자벨 뒤프렌)

 

"수줍고, 말이 없고

때론 배타적인 사람."

 

워홀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지인들의 평가다. 수많은 사진 속의 웃는 모습이 많지 않다. 워홀은 하루의 대부분을 창작에 매달렸고 시간이 생기면 파티 장소를 돌아다니는 데 썼다. 어김없이 카메라, 녹음기 그리고 그를 따르는 '슈퍼스타'들을 대동하고 말이다.

스튜디오 54에서 파티를 즐기는 앤디 워홀과 모델 제리 홀.

 

"내가 결혼한 건 1964년. 내 생애 첫 녹음기를 손에 넣었을 때다. 그 녹음기가 내 아내가 되었지. 내가 보통 '우리'라는 인칭을 쓰면, 그건 '나와 내 녹음기'를 지칭한 거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에선 어딘가 항상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지하실 아니면 지붕 위에서, 지하철 아니면 버스에서, 배 위에서 아니면 자유의 여신상에서."

- 앤디 워홀

워홀라 형제들. 왼쪽으로부터 폴, 앤드류, 존. 1942년 피츠버그 추정.

어머니 줄리아, 형 존과 함께한 앤디 워홀. 1931년 추정.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앤디 워홀. 17세 추정.

인테리어 디자이너 수지 프랭크퍼트와 공동으로 펴낸 코믹 요리책 《와일드 라즈베리》 중 가장 많이 추천받은 래시피.

거울 속의 나 | 앤디 워홀은 앤드류 워홀라로 불리던 고등학생 시절에 이미 자화상 그리기를 좋아했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알게 된 1942년까지는 연필을 주로 사용했다.

클로즈업 | "앤디 워홀은 예술가와 사회 사이, 그리고 문명, 예술, 소비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소외감을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그는 갈등 없는, 그리고 의미 없이도 아름다운,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예술적 삶을 꿈꾸어왔다. 그는 쓸데없는 공산주의 따위가 아니라 이러한 삶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고, 또 '행복한 소비기계'로 만든다고 했다." 1982년, 에두아르 보캉의 말.

캔버스에 만화 |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 만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커서도 그 취향이 크게 바뀌지 않았던 모양이다. 워홀은 1961년, 시금치를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뽀빠이'를 캔버스로 불러냈다.

컬트 캐릭터 | 만화 캐릭터가 무조건 어린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재치 있는 소녀 낸시의 일상과 모험을 그린 만화 <낸시>는 각종 신문에 연재되었고, 20세기에 가장 오래 연재된 만화 중 하나다.

색채의 향연 | 워홀은 1974년에 그린 영국 화가 데이비스 호크니 초상화에서 배경을 푸른 물빛으로 가득 채웠는데, 그냥 사용한 것은 아닌 듯하다.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의 수영장들을 그린 유화로 유명해진 화가이기 때문이다.

동질감 | 1961년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카스텔리 화랑에서 선보인 거대한 만화 컷들은 워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76년, 워홀은 존경하는 리히텐슈타인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는다.

영화산업의 여신 | 노란 배경에 보라색, 검은 배경에 연두색……, 워홀이 만들어낸 수십 개의 틀 속에서 마릴린 먼로가 미소 짓고 있다. 워홀은 영화 <나이애가라>(1953)에 나온 먼로의 모습을 작품 소재로 택했다.

여신의 신화 | 먼로가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36세였다. 먼로의 죽음에 관한 억측이 쏟아져나오면서 그녀는 점차 신화로 자리매김해갔다. 끊임없이 먼로에 대해 '찍어내고' 싶어하는 마음은 언론이나 워홀이나 매한가지였다.

1975년에 출간된 《앤디 워홀의 철학》 표지.

워홀 사망 후 출판된 《앤디 워홀의 일기》.

1968년 6월 4일자 《뉴욕 포스트》지에 앤디 워홀과 저격범인 발레리 솔라니스(오른쪽)의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뉴욕에서 워홀과 촬영작업 중인 프레드 휴즈, 테일러 미드, 패트릭 틸든클로즈, 1967년 12월.

조 달레산드로가 출연한 1968년 워홀 영화 <플레시>의 포스터.

워홀이 발간한 잡지 《인터뷰》의 창간호 표지. 1969년.

1987년 2월 23일 《데일리 뉴스》에 실린 워홀의 사망 소식.

황제 | 워홀의 스타 시리즈에 '로큰롤의 황제'가 빠질 리가 없다. 워홀은 가수로, 또 배우로 성공을 거듭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열광했다. 1963년 작품 <더블 엘비스>에서 워홀은 은빛 배경에 자동차 도장용 래커 한 통을 모두 사용했다.

재키 | 1963년 11월 케네디 암살 당시 재클린 케네디는 옆에서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수 주가 흐른 뒤에도 미디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실린 재키의 다양한 모습은 워홀에게 영감을 주었다. <열여섯 명의 재키>에서 워홀은 패션 아이콘 재키와 미망인 재키의 모습을 상반되게 보여준다.

초고속 작품 | 팩토리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에는 '초고속'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당시에 제작된 연작 중 하나도 이러한 특성에 걸맞게 교통사고를 모티브로 했다. 하지만 미술시장은 아직 도발적인 예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재난 | 워홀은 비극적 문구의 헤드라인이 지니는 흡인력에 대해 일찌감치 간파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 전기의자, 연쇄살인범, 해골, 재난사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그것이다. 위의 작품은 <열 번의 초록빛 재난>.

진부함의 아름다움 |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워홀은 이러한 신조를 내걸고 진부한 대상까지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일의 저명 출판업자인 지크프리트 운젤트가 앤디 워홀에 대해 평가한 1991년의 편지 내용이다. 달걀 그림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형태의 최소화 | 때론 흑백으로, 때론 요란한 색깔로 캔버스를 가득 메운 달걀 그림은 간략한 모티브와는 달리 규모가 어머어마하다. 캔버스 길이가 자그마치 180cm, 작품 수는 230점이나 되었다. 1982년 워홀이 부활절 기념으로 제작한 이 연작에서 추상화풍이 살짝 엿보인다.

워홀의 안목 | 워홀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워홀이 이 작품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가 중요하다. 1987년 워홀 사망 후 그의 <최후의 만찬> 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경매에서 17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빈정거림의 진실 | 화가 자니스 쿠넬리스는 1985년 요셉 보이스와 나눈 대화에서 워홀의 무지함에 대해 성토한다. "5년 전, 앤디 워홀이라는 작자가 이탈리아에 왔어요. 사람들이 이 멍청이를 우리 테이블에 앉혔죠. 테이블에는 모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작가가 있었는데, 이탈리아 예술가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워홀이 글쎄 '이탈리아에 관해선 스파게티밖에 아는 게 없다'고 하지 않겠어요." "빈정거린 것이었겠지." "빈정거린 게 아니었어요! 워홀은 앉아서 줄곧 모욕적인 말만 늘어놓았다구요. 그는 재능도 없고,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에요!"

 

사랑

 

 

"세상본인

직접 참여해야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섹스와 파티."

 

앤디 워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미국 산업화시대의 수시민적 삶에서 시작하여 폭풍우 같던 1968년 히피시대를 거쳐 1980년대 피트니스 열풍과 첫 에이즈 공포를 겪기까지 워홀이 살아온 시대는 빠른 변화를 겪었고, 워홀은 그 물결을 따라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코르키(랄프 T. 워드)와 앤디 워홀이 1953년 함께 펴낸 시집 《사랑은 핑크 케이크 같은 것》의 표지.

 

"가십과 스타들을 그토록 좋아하는 앤디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내보이기 싫어했다는 건 매우 모순된 일이다."

- 헨리 겔트잘러

워홀은 그림, 영화,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던 자유분방함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애정사에 관해서는 매우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워홀이 1955년에 《내 정원의 바닥에서의 책 표지에 그린 연인의 형상.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 내 영화, 내 모습에서 보이는 표면을 관찰하면 된다. 그 표면이 바로 나다. 그 밑으로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

워홀은 오랜 세월 어머니와 한집에서 살았다. 1974년 작 <줄리아 워홀라>.

앤디 워홀과 그림자. 1981년에 그려진 자화상 연작 중 하나이다.

골드북 | 《골드북》에서 보이는 인체 드로잉 및 초상화에서도 워홀은 특유의 부드럽고 드문드문 이어지는 곡선을 사용했다. 사진을 근거로 드로잉을 그렸는데, 후기 초상화에는 상상력이 많이 추가되었다. 18점의 그림이 담긴 《골드북》은 하드커버로 100권이 제작되었다.

초기 작품 | 1957년 출판된 《골드북》의 드로잉은 워홀이 서른 살 때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워홀은 상업디자이너로 성공을 거둔 지 십 년이 흘렀지만 그의 금빛 드로잉들이 순수미술로 인정받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Do It Yourself!" | "직접 꾸며보세요!" 워홀이 작품에 곁들인 친절한 설명이다. <두 잇 유어셀프> 연작에서 워홀은 일부만 색칠하고, 나머지 작업은 구매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이러한 '색칠공부'식 콘셉트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색칠공부 | 워홀의 <두 잇 유너셀프> 연작에서는 숫자 칸이 모두 비거나, 모두 채워지는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거대한 캔버스에 펼쳐진 바닷가 풍경 속에 색을 지시하는 번호들이 흩어져 있다.

권태 | 워홀은 1976년 동료인 글렌 오브라이언이 "요즘은 왜 자주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떨어졌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고, 난 오래 전부터 그리기를 포기하려고 했어. 매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야……."

토르소 | <토르소> 연작은 워홀이 회화를 포기하고 영화제작에 전념하겠노라고 선언한 후에 탄생했다. 팩토리에 넘쳐나는 모티브들이 그를 새로운 영감으로 이끌었나 보다.

카무플라주 | 워홀은 카무플라주 무늬에 애착심을 보이면서, 자화상에까지 이 무늬를 사용했다. 위의 작품은 세로 3m, 가로 10m가 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1986년에 제작된 <카무플라주> 연작은 여러 가지 색으로 제작되었다.

칭찬 혹은 견제 | 워홀은 자신의 추상작품 개인전의 개막식에 온 관람객에게 다른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 전시회 길 건너에 더 뛰어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로르샤흐 검사법 | 환자가 잉크얼룩을 보고 연상되는 것을 근거로 심리분석을 하는 검사법이다. 이것을 고안한 스위스 심리학자 헤르만 로르샤흐는 화가가 꿈이었지만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궁 속의 내면 | 워홀이 1984년에 완성한 <로르샤흐> 연작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으로, 400×280cm의 어마어마한 크기다. 워홀이 이 그림을 연상시키려 했던 내면의 비밀은 무엇일까?

 

지금도 우리 곁에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

"워홀의 예술세계에서

보이는 반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예술에는

어떠한 반복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 워홀에 대해 말하며

 

끝없는 유산

 

워홀이 남긴 자료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규모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워홀은 작품 수량뿐 아니라, 수집품도 엄청난 양을 자랑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싶다면, 워홀의 고향 피츠버그행 비행기를 타라.

 

"앤디 워홀은 당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술가였다."

- 칼 앙드레

이제 워홀의 명성은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시대가 왔다. 200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앤디 워홀의 후기 작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대규모 전시회에는 7만 5천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찾아와 워홀의 예술인생 후반에 만들어진 비디오, 영화, 유화 들을 감상했다. 위는 마오쩌둥의 초상화.

1982년, 갤러리스트 레오 카스텔리는 워홀의 <달러 사인>을 자신의 화랑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죽으면 어떤 잔재도 남기고 싶지 않고, 스스로도 어떤 잔재가 되고 싶지 않다. …… 나라는 기계가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 앤디 워홀

뉴욕 소더비 사에서 제작한 앤디 워홀 경매 카탈로그. 방대한 수집품 때문에 6권이나 되었다.

소더비 사 직원들이 워홀의 소장품을 분류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사진은 워홀의 부엌.

팀워크 | 바스키아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꼽히면서 그의 작품들이 경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그래피티, 만화, 아프리카 가면, 토템상, 동물, 문자 등……. 모티브의 다양함에 있어서도 워홀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두 화가가 공동작업한 작품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토끼 | 마이클 잭슨과 애완원숭이 버블스의 모습을 도자기로 굽고, 금속 재질로 싸구려 슈퍼마켓 토끼 풍선을 흉내 낸 제프 쿤스의 작품들은 항상 논란을 몰고다녔다. 쿤스 역시 워홀과 마찬가지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았다.

도자기 마을 | 워홀은 1980년 독일 방문 중에 유명 도자기회사인 로젠탈 사를 방문햇다. 워홀은 공장 방문을 기념하여 사장인 필립 로젠탈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런 인연으로 로젠탈 사는 워홀 시리즈 제품을 기획, 판매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은 캠벨 수프 깡통 모양의 머그잔이다.

바스키아 | 워홀은 영화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1996년 그래피티 예술가인 장 미셸 바스키아를 기리는 영화를 제작한다. 바스키아에 제프리 라이트, 워홀 역은 데이비드 보위가 맡았다. 그리고 개리 올드먼, 데니스 호퍼 같은 스타들이 대거 조연으로 출연했다.

영화 주인공 | <오스틴 파워-제로>(1997)는 스윙 문화가 극에 달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1960년대라면 워홀이 빠질 수 없다. 마크 브링글슨이 은빛 가발을 쓰고 분한 워홀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파티장에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앤디 워홀의 친구들

 

앤디 워홀은 생전에 어딜 가나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워홀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던 이들 그룹은 낮에는 그의 조수, 모델, 배우이었고, 밤에는 그의 파티 친구들이었다. 팩토리를 드나드는 이들은 누구나 이 그룹에 속하길 열망했으며, 그만큼 그의 측근 자리를 꿰차기 위한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워홀은 지인들에 대한 호감을 순식간에 비호감으로 바꾸어버리기로 유명했다. 이들 중 몇몇은 워홀과의 관계를 발판 삼아 경력을 쌓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팩토리 시절의 영광을 뛰어넘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린다.

 

네이션 글럭

1955년부터 워홀의 조수로 일했다. 그의 인맥관리 능력과 창의력은 50년대 워홀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베이비 제인 홀저

본명은 제인 홀저. 뉴욕 상류사회를 주름잡던 여성으로, 《뉴욕 매거진》이 선정한 '1964년을 빛낸 여성'에 뽑힌 바 있다. 워홀의 첫 영화인 <키스>(1963) 출연으로 워홀의 슈퍼스타 계보의 초시가 되었다.

 

프레데릭 휴즈

텍사스 휴스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휴즈는 1964년에 워홀을 알게 되었다. 휴즈는 미국 최대 규모의 미술품 소장으로 유명한 메닐가(家) 사람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두었기 때문에, 워홀을 위해 자신의 인맥을 적극 활용한다. 휴즈는 후에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 사(社)의 자회사인 앤디 워홀 영화사의 회장직을 맡는 동시에 워홀의 유산관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드 존슨

제드 존슨은 1968년 팩토리 직원으로 고용된 이래로 80년대까지 애인으로서 워홀의 옆자리를 지켰다. 존슨은 워홀의 마지막 영화인 <앤디 워홀의 배드>(1976)에서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워홀 사망 후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제라드 말랑가

말랑가는 1963년 20세에 워홀의 조수로 기용된 이후로 그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동료이다. 말랑가는 워홀의 영화에 몇 번 출연했고, 《인터뷰》지 창간 당시 공동출판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폴 모리세이

본래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가 1965년에 워홀의 팩토리 팀에 합류햇다. 그는 주로 워홀의 영화제작에 참여했는데, 워홀의 말기 영화에서는 연출을 맡기도 했다.

 

빌리 네임

본명은 빌리 리니치. 전에는 미용사이자 조명기사로 일하다가, 1960년 워홀과 알게 되고 나서 첫 팩토리의 공식 사진기사로 탈바꿈했다. 그는 1970년 어느 날 갑자기 "난 간다. 내 걱정은 마."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작업 도중에 잠적해버린다.

 

온딘

본명은 빌리 올리비오. 마약에 찌든 이성복장착용자로, 1963년부터 팩토리를 드나들었다. 워홀의 영화 <첼시 걸스>에서는 '그리니치빌리지의 교황' 역을 맡았다.

 

브리짓 포크

본명은 브리짓 벌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반항심과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워홀의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던 포크는 1963년 처음 워홀을 알게 된 후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그의 최측근 자리를 지켰다.

 

에디 세즈윅

본명은 에디스 민턴 세즈윅. 워홀과는 1965년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워홀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익스플로딩 플래스틱 인에비터블>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세즈윅은 1960년대 뉴욕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세즈윅 사망 1년 후인 1971년에는 그녀를 기리는 전기영화 <차오, 맨해튼>이 나오기도 했다.

 

비바!

본명은 재닛 수잔 메리 호프먼. 1960년대 워홀의 슈퍼스타가 되면서 '비바'라는 예명을 얻었다. 비바는 <첼시 걸스>, <론섬 카우보이>, <블루 무비> 등의 워홀 영화에 출연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9. 14. 10:18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 - 083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가인혜 시집

2002, 미네르바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9903

 

811.6

가6819나

 

가인혜의 시는 청초하다. 아니 나이브하다. 행간 마다 자간 마다 오래 생각을 묵히고, 가라앉히며, 숙성과 발효를 기다려온 흔적이 뚜럿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날은 알 수 없는 생기를 맛본다. 슬픔과 절망의 뒤안에서 새벽꽃 한 송이 만나는 기분이다. 마치 낮은 음성으로 자장가처럼 울리는 간절한 기도처럼.

이경교 시인

 

가인혜 시인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94년 월간순수문학(수필부분) 3월호에 "돌아온 자리"로 신인문학상에 당선, 98년 국제펜클럽 펜과 문학(시부분) 겨울호에 "나는 따뜻한 씨앗을 묻는다"로 제1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심장동인 활동을 하면서 동인집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제1집)"과 "엉겅퀴꽃 붉은 마음(제2집)", "나무들은 뿌리로 사랑을 한다(제3집)" 등을 세상에 상재하였으며, 현재 은혜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차례|

 

1부 숲에는 사랑이 있네

    곁, 그 따뜻한 자리

    숲에는 사랑이 있네

    창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플러그가 빠지지 않는다

    파란 줄무늬 셔츠

    장미와 아스피린

    이별

    세상은 정원이다

    저 먼 밤바다

    산새

    바다가 끓고 있었다

    허공

    戀歌, 김장김치

    깊은 바다

    새벽길

 

2부 그늘 속의 방

    그늘 속의 방

    이슬의 말

    나는 따뜻한 씨앗을 묻는다

    폭우 속에서

    알

    바람은 상두가를 부르며

    돌 속의 길

    하늘로 올라 간 바다

    얼레를 푼다

    진달래 필 무렵

    나무들은 뿌리로 사랑을 한다

    불 속을 지나며

    나를 위한 이유

    움직이는 것은 모두 그늘을 만들고 싶어한다

 

3부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결혼식

가로등

강물

그가 온다

화분

바다에 서 있는 것은

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었다

바다로 간 꽃게

송화가루

첫 단추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하늘이 전부 유리창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무 그림자

봄은 이제 외롭지 않네

나의 그림자는 길다

물소리가 들린다

숲으로 난 길

나는 바다에 내리는 첫 눈이어라

 

4부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알집

파문

삼월의 과수원에 눈이 내린다

저녁 해

영원 속의 하루

폭우 속에서

빗방울

흙장난

무너져 내리는 것들

밤바다

참꽃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안에서 우는 소리는 깊다

 

요리를 잘 하는 시인

 

숲에는 사랑이 있네

 

구름이 되어 나무가 되어

해 저물도록 듣는 얘기소리

미움 어느 곳에도 없고

사랑은 추억으로 가볍네

한 곳에 오래 앉아 주저앉은 바위

물 마시러 나온 청설모의 외진 눈길에도

나는 바위였네

날아다니는 소리들

새는 보이지 않아도 가까이 있네

새가 인도해 준 길 따라

나무와 나무가 기대여 새들의 다리를 놓아주고

계곡은 물을 흘려보내 짐승을 먹이는 모습들

저마다 서로를 내어주며

나뭇잎 태어나는 목숨 한 가운데

나비도 땅에 내려와 기도하듯 날개를 접는

숲에는 사랑이 있네

 

그늘 속의 방

 

그늘 속에는 방이 있다

들어가 앉고 싶은 아늑함 속에

지친 얼굴을 내려놓으며

기대인 담 하나가

온 세상을 가리워 주는 풀밭에서

나는 아름다운 긴장을 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공간 속에 그늘을 만들며

신발 속의 나를 풀어놓는다

나의 힘줄은 너를 보며 힘차게 팽창하는데

들어 온 적도 나간 적도 없이

탁 트인 공간이 자유로와

하늘도 맑은 숨쉬는 길 위의 방

문도 달지 않고 지붕도 얹지 않은 채

촛불을 켜 놓은 방처럼 환한 어둠을 끌어안고

나는 아무것도 후회할 것 없는 맨살로

계관화처럼 붉어진 담장 밑의 너를 안는다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하늘을 꽈리 불던 그 목소리

무거운 추를 단 구리종의 진폭처럼 어둡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는 나뭇잎처럼

썩기를 기다리는 아픔 바윗돌로 눌러놓고

가릴 것 없는 나뭇가지

하늘은 노을을 불러 금물을 입힌다

 

어둠이 먼저 찾아든 산 속

먹을 것 없어 빈 손 든 가지들 위에

새떼들 날아와 껍질을 마구 쪼아도

맘 좋게 살점을 열어줄 뿐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시작이 언제나 힘겹고 쓸쓸했던 것처럼

나무도 아름다운 계절의 연습을 한다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잘 익은 포도주 한 병을 당신께 내어 드리고

떠나지 않은 것처럼 떠나도 좋겠습니다

햇살이 꼭꼭 다져놓은 흙 속에 씨앗을 묻고

이슬도 묻지 않은 처녀의 몸 속에

굵은 포도알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따가지 못하도록 밤마다 서리로 덮고

땅 속 깊은 물로 껍질을 기워

터질 듯 실핏줄 속에 붉은 태양을 숨겼습니다

꽉 찬 포도알 속

내 영혼의 즙을 짜서

잘 익은 포도주 한 병을 당신께 내어 드리고 가는 길

포도원을 떠난 검보랏빛 노을로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하늘 한 자락을 끌어 와 당신께 물든

마지막 인사여도 좋겠습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8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

 

서중석 답하다 김덕련 묻고 정리하다

2015, 오월의 봄

 

대야도서관

SB0486693

 

911.07

서766ㅅ  2

 

"전쟁이 터지자,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승만 대통령, 전선에선 피 흘리는데 영구 집권 꾀해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에게는 '역사의 힘'이 있다. 항일 독립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계속된 것도, 우리 제헌 헌법에 자유 · 평등의 독립 운동 정신이 담겨 있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우리 국민이 친일파, 분단, 독재를 있어선 안 되는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막강한 힘의 지원을 받은 역사 교과서가 참패한 것도 그렇다.

- '책머리에' 중에서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 · 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 · 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 · 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등이 있다.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를 거쳐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신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역사 관련 책 작업을 함께해왔다.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차례|

 

책머리에

연표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한국전쟁,

                                             어디부터 잘못 꿰어졌나

 

두 번째 마당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세 번째 마당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요동치는 전선, 평화는 멀고도 멀었다

 

네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

                                             한국전쟁 공포 때문"

 

다섯 번째 마당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민간인 집단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

                                          참 무서운 한국"

 

두 번째 마당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네 번째 마당                       추종자 아니면 모두 적

                                          무서운 '빨갱이 만들기'

 

다섯 번째 마당                   국민 목 친 학살자들이

                                          오히려 출세하는 세상

 

여섯 번째 마당                  민간인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나가는 말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 한국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계 전쟁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예컨대 한국에 전투 지원을 한 나라만 16개국(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콜롬비아, 그리스, 태국,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이르렀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개척자 브루스 커밍스가 펴낸 한국전쟁 관련 서적들. 커밍스는 1950년 6월 25일 이전 38선 부근에서 내전 상태라고 할 만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있었고 한국전쟁은 그것이 확대된 것으로 보았다.

1949년 3월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 등 북한 대표단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궁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때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조선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물었다.

1948년 북한을 떠나기 전에 평양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행진하고 있는 소련군의 모습. 소련군은 그해 12월에 북한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남한에 머물기가 어렵게 된 미군이 약 500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1949년 6월에 철수했다.

1949년 박헌영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김일성. 왼쪽 두 번째에 앉아 있는 이가 소련 대사 테렌티 쉬티코프.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있는 마오쩌둥.

1950년 6월 26일에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회의 모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소련은 불참했다.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세 생일 축하연. 마오쩌둥의 모습도 보인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한 규모로 관여할지를 주목하면서 한반도를 시험장으로 생각했다.

1951년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 내외.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초기에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도 있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전쟁 초기 북한군의 행진 모습. 북한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아서 초기에 이기지 못하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돼 있었다.

국군이 행군하고 있는 모습.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으면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신성모 신임 주일 대표(공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방부 장관 시절 신성모는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경향신문, 동아일보 1950년 6월 27일 자 신문. "찬(燦)! 아군 용전(勇戰)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 중"(위),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아래)란 제목이 크게 적혀 있다. 나중에 크게 논란이 일게 되는 "해주시를 완전 점령"(아래 오른쪽) "일부는 해주시에 돌입"(위 오른쪽)이란 제목도 눈에 띈다. 국방부 발표문을 토대로 보도한 이 기사들은 사실상 거짓이었다. 이 내용을 보고 피란을 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이미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고 없었다.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보다 먼저 서울을 떠났다. 자신은 도망을 가면서도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거짓말 방송을 몇 차례나 내보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후, 미군과 한국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주민이 인민군 부역자를 폭행하고 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되기도 했다.

경남 거제도에서 피란지를 살피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 국민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정치인이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개회된 국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사회를 보는 이는 신익희 2대 국회의장. 이승만 정권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2년 6월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의원들은 1952년 대한민국 최초로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로 대부분 자유당 쪽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부 편에 서서 국회를 압박한ㄴ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9월 인천에서 한 여자 어린이가 울고 있다. 한국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국제전이 되었고, 애꿎은 사람들만 큰 피해를 봤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끊임없이 폭격을 퍼부었다. 그래서 북한의 군대는 주로 밤에 이동했다. 사진은 미국 공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 지역의 모습.

1950년 9월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북한은 이 작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비할 군대가 별로 없었다.

1950년 10월 27일 국군의 평양 입성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서울에서 열렸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당시의 맥아더. 맥아더는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소련을 상대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흥남에서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 1950년 12월의 모습.

1951년 1월 8일 강릉 부근에서 피란을 떠나는 사람들.

한국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잡힌 중국군의 모습.

미군에게 생포된 중국군의 모습.

1951년 4월 부산에 있던 전쟁 포로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정전협정을 맺기까지는 무려 2년 넘게 걸렸다.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전쟁 포로 문제였다.

위쪽부터 미국의 마크 클라크,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팽덕회가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과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모든 관계자의 서명이 완료된 정전협정문. 이로써 3년 만에 포화는 멎었다.

1950년 11월 서울의 모습. 폐허 더미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찾고 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한반도 전체는 이미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만큼 대규모의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 삐라 1040 소련과 중공을 위해서 죽음을 택할 필요가 있는가?

2 삐라 1242 지주와 그 하인과 소

3 삐라 1276

중공군은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는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왜? 북한이 약해져야 집어먹기 쉬우니까…… 북한 주민들이여! 이젠 여러분이 왜 중공군이 북한군에게 쏘지 못할 무기만 넘겨주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중공군은 여러분의 적이다!

4 삐라 1282 북한 인민은 이렇게 뜯기만 한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촉구하는 우익 단체의 시위 행렬.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6년 서울 세종로. 제3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 사회에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1년 1월 북한 지역을 폭격하고 있는 미국 공군.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기되었다.

1955년 1월 고아원의 아이들이 고무신을 받아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1950년대엔 고아원이 많았다. 이산가족이 많이 수용됐고, 북한에서 내려온 어린애들이 수용된 경우도 많았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영화 <자유부인> 포스터와 스틸컷.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1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영화를 봤다. 감독 한형모, 주연 박암, 김정림, 1956년 개봉.

박인수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1심 판결에서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54년 북진 통일 궐기대회에서 한 학생이 지붕 위에 올라가 '북진 통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 학생은 교복, 교모에 혁대를 차고 목청껏 부르짖고 다른 학생은 호루라기를 불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1950년대 극우 반공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38선의 모습.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극도로 단순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남북 모두 군인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남한의 경우, 30년간 군대의 획일화된 사고와 문화가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 단순화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되는 장면. 이때 무려 1,800여 명의 정치범 및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1951년 4월 대구 인근에서 군인이 정치범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학살 당시 어린이도, 여자도, 노인도 많이 죽었는데 그때 죽이면서 '빨갱이 새끼는 죽여도 좋다. 빨갱이 여편네는 죽여도 좋다. 빨갱이 애비는 죽여도 좋다', 이런 식의 주장을 폈다.

1950년 4월 서울 부근에서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좌익들. 미국 측은 이들이 공산주의자이며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형에는 6명의 미국 군무관 및 장교가 참관했다. 처형을 준비하고, 사격을 가한 뒤,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한 후 한 미군이 미국영사관에 성조기를 내걸고 있다. 서울 수복을 전후해 우익 청년 단체들이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미군도 학살에 가담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근리 학살이다.

여순 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모습.

국민보도연맹증.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에 결성되었다.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순 사건 당시 진압군이 반란군과 협력자를 색출해 연행하고 있다. 학살에 관련된 군 지휘관들은 과거에 일본군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이 학살을 키운 셈이다.

노근리 사건이 벌어졌던 다리 밑 사진. 19660년 자료다. 미군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명령서를 통해 '전투 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 수뇌부. 제주 4 · 3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작전권이 미군한테 있었다. 미군은 직접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고, 한국군의 학살을 방조하기도 했다.

미군이 찍은 1950년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당시 사진. 여러 자료를 볼 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주한 미군이 져야 할 책임이 크다.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앞줄 왼쪽). 이승만 대통령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그의 정적이었던 조봉암은 간첩 협의로 처형됐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 포스터. 이 선거는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1950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의 날(유엔데이) 기념 행사장에 나란히 자리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이시영 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에 결정한 비상 조치령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중형에 처해졌다.

1951년 2월 11일 방위사관학교 졸업식 모습. 방위사관학교는 국민방위군을 이끄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트럭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일까지 대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군경에 의해 학살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총살 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돼 있는 걸로 봐서 이 학살은 정부 고위층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1956년 8월 지방 자치 선거에서 군인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이 선거에서도 엄청난 부정이 일어났다. 일부 지방에서는 다수의 민주당원들이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 당시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선거 홍보물이 내걸려 있다. 이 선거가 끝난 후 이승만은 친일파, 학살을 자행한 인사 등을 요직에 등용한다.

4 · 3사건 당시 중산간 지대로 피신한 제주 사람들. 당시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된 걸로 추정된다. 제주도 전 주민의 10퍼센트다.

1954년 4월 중앙청(현 경복궁) 광장에서 열린 북진 통일 궐기대회에 참가한 청년이 태극기에 혈서를 쓰고 있다. 민간인 대량 학살을 일으킨 극우 반공 독재 세력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반공주의가 내면화돼서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80년 5월 21일 12시경 공수부대와 시민이 전남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다. 한 시간 후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이 철저히 이뤄졌다면, 광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전남대 5 · 18연구소

1961년 5월 22일 대한상이용사회가 5 · 16 지지 차량 행진을 하고 있다. 5 · 16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다시 한 번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1952년 전쟁 중 부산에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 청사 건물. 한국전쟁 이후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에서 진보적인 흐름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