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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 10:30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133 근대를 말하다

 

이덕일 지음

2012, 역사의 아침

 

대야도서관

SB071127

 

911.059

이24ㄱ

 

이덕일 역사평설

 

100년 전 근대의 모습에서

오늘의 우리를 보다!

 

우리는 고대나 중세보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근대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근대는 웬지 낯설고 불편하다. 나라를 빼앗긴 채 온갖 핍박과 오욕으로 얼룩진 암흑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를 만든 씨앗이 근대의 역사 속에 있다. 남북 분단, 좌우 대립의 문제 역시 근대 속에 내재돼 있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부분을 무시한 측면이 있다. 더불어 일제시대를 '임시정부와 우파에 의한 독립운동'과 '친일'이라는 단 두 개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본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는 '천재'가 아닌 '부분'이다. 이에 이 책은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세력과 양상들을 주어진 '팩트'를 통해 두루 조망함으로써 근대를 보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

 

어떻게 보면 읽기란 일정한 방향이 있는 수많은 팩트 읽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팩트를 통해 우리는 지난 100년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의 상당 부분들은 지난 세기에 이미 벌어졌던 일들의 재현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세기의 어떤 사건들은 흡사 현재를 읽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중략) 상대를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 본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근대는 넘어서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아니라, 약자를 보듬고 서로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믄 교훈을 우리의 지난 100년이 뼈아프게 전해주지 않았던가. 이 책은 그런 당위성에 조금 더 다가가려는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_<저자의 글> 중에서 

 

지은이 이덕일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인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다. 특히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조선 왕을 말하다』(전2권), 『조선왕 독살사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조선 선비 살해사건』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등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잇다.

홈페이지(http://www.hangaramhistory.org)

다음카페(http://cafe.daum.net/hangaram-forum)

 

|차례|

 

저자의 글

 

1장 망국의 몇 가지 풍경

 

1. 고종의 오판  러시아 200만 대군을 맹신한 고종, 일본의 패배에 '배팅'하다

2. 을사늑약  국제 정세에 깜깜한 고종, 러일전쟁 후 미국에 발등 찍히다

3. 친일내각의 갈등  김옥균 · 김홍집 제거한 고종 곁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대다

4. 헤이그 밀사  고종과 일제,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놓고 두뇌싸움을 벌이다

5. 국제 정세  열강 평화회의에 조선이 낄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6. 고종 퇴위  이완용, 칼을 빼들고 고종을 협박하다

7. 이토와 일본 개화  극렬 외세배척론자 이토, 영국 유학 뒤 개화파로 변신

8. 평민 이토, 수상이 되다  조선이 군란 겪던 임오년, 이토는 유럽에서 헌법을 배우다

9. 이토의 이중성  이토가 일본의 헌법을 완성한 순간, 아시아의 고통이 시작되다

10. 안중근, 일본 근대의 심장을 쏘다  총독이 지배하는 한인 내각 - 이토는 불가능을 꿈꿨다

11. 장충단 이토 추도식  이토에게 쫓겨난 고종, 굴욕적으로 직접 조문하다

12. 친일 전쟁  이완용, 돈 · 귀족 대우 약속받고 매국에 적극 나서다

13. 환호하는 수작자들  '500년 조선'을 파는 매국 협상, 30분 만에 상황 종료

 

2장 절망을 넘어서

 

1. 자결자들  황현, "나라 망하는 날 죽는 선비 하나 없어너야……"

2. 떠나는 사람들, 강화학파  "살아서 싸우리라" - 자결 대신 항일을 택한 양명학자들

3. 만주 횡도촌  만주로 망명한 이건승 · 홍승헌,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4.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서전서숙 세운 이상설 - 백성들의 복, 사대부의 영예

5. 독립방략  교육 · 군대 · 돈 · 조직 - 선각자들은 망국 때 광복을 준비했다

6. 일가 망명  이희영 6형제, 광복자금 600억 들고 집단 망명하다

7. 안동 유림들  "무릎 꿇고 종이 될 수 없다" - 이상룡 일가도 집단 망명

8. 우울한 기운  대역 사건과 105인 사건 - 반제 세력 탄압이 심해지다

9. 건국의 뿌리  제2의 독립운동 기지 추가가에 경학사를 설립하다

10. 신흥무관학교  구국사업과 교육 - 단군의 땅에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

11. 독립전쟁론의 씨앗  신흥무관학교,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이 되다

 

3장 식민통치 구조

 

1. 헌병경찰제도  일제 헌병은 저승사자, 한반도는 공포의 제국

2. 토지 획득  토지 강탈을 위해 국가가 차린 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3. 토지조사사업과 토지 강탈  총독부, 토지조사 '함정' 파놓고 한반도 땅 40% 약탈

4. 교육 장악  민족사학 1,217곳 중 1,175곳을 퇴출시키다

5. 공창  유곽 · 공창을 도입한 이토,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6. 정치단체 해산  '합방 후 예비내각'까지 짠 일진회, 15만 원에 토사구팽

7. 회사령 공포  허가 없이 회사 세우면 징역, 민족자본에 족쇄 채우다

8. 언론에 물린 재갈  항일 선봉 <대한매일신보>, 일제의 농간에 친일 매체로 둔갑하다

 

4장 운동의 시대

 

1. 고종 독살설  북경 망명 준비하던 고종, 이완용 숙직 다음 날 급서하다

2. 쌀소동과 3 · 1운동  '무력통치' 데라우치 내각, 쌀값 폭등으로 실각하다

3. 전 민족적인 항거  3 · 1운동 민족대표는 '33인' 아닌 '48인'이었다

4. 무너지는 무단통치  하세가와 총독, 본국 군대 동원해 시위를 유혈 진압하다

5. 문관총독 사기극  <요미우리신문>, 조선소요 사태 풀기 위해 문치 전환을 촉구하다

6.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강우규 거사날, 민중 습격 두려워 총독부 건물 소등하다

 

5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1. 망명정부의 탄생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한성정부로 대통합하다

2. 국내 행정망  상해 임시정부, 비밀조직 '연통제'로 조선총독부에 맞서다

3. 대동단  대동단 출범을 계기로 황족 · 귀족도 독립운동에 가세하다

4. 의친왕 망명 사건  상해 임시정부 향하던 의친왕, 망명에 실패하다

5. <독립신문>  춘원 이광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독립운동을 등지다

6. 임시정부 내분과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의 두 기둥' 이승만 · 이동휘, 돈 문제로 물의를 일으

                                                       키다

 

6장 만주의 삼부

 

1. 만주 한인사회 형성  만주 지역 한인 50만 명, 독립운동의 둥지가 되다

2. 독립군, 압록 · 두만강 건너다  홍번도의 대한독립군, 망국 10년 만에 국내 진공작전 개시

3. 봉오동과 청산리전투  '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 · 홍번도 연합부대

4.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일제의 패전 분풀이, 용정 장암동 학살

5. 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통의부로 뭉쳤다. 그러나 청사진이 달랐다

6. 내우외환으로 전력 약화  국내 진공작전을 주도한 참의부, 고마령참변으로 주요 간부를 잃다

7. 임시정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하얼빈 이남 한인에겐 '정의부'가 정부였다

8. 북만주의 통합 바람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9. 일제 탄압과 내부 분열  삼부통합은 멀고 만주사변은 가까웠다

 

 

▲ 1904년 한일의정서 서명 뒤의 이토 히로부미 특명전권대사(앞줄 가운데)  이토의 왼쪽이 이지용 외부대신 임시서리이다.

▲ 압록강을 건너는 일본군

▲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는 일본군들  일본군은 1904년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을 개시했으며 5월 30일 대련을 점령했다. 프랑스 신문인 <르프티 주르날>이 1904년 6월 19일 당시의 전투 장면을 묘사해 게재한 그림이다.

▲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 송병준(왼쪽)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  둘은 흑룡회의 첨병이 돼 매국의 길에 앞장섰다.

▲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왼쪽)과 고종의 조카 조남승(오른쪽)  고종의 조카인 조남승 · 조남익 형제는 고립된 고종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였다(우당기념관 제공).

▲ 이상설(왼쪽 사진)  고종은 일제가 밀사를 헐버트로 단정 짓고 있을 때 이상설을 내정해 허를 찔렀다. 조남익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서훈증(오른쪽 사진)  시종원 시종 조남익에게 특4등과 태극장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장면  이준 등 3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으나 모두 외면당했다. 제1차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에 열렸다.

▲ 왼쪽부터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본 침략주의 단체 흑룡회의 우치다는 일진회를 통해조선 강점에 깊숙이 개입했다.

▲ 서울 광화문 앞 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토의 지시에 따라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 조 · 일통상조약 체결 기념연회도  1833년 7월 조선의 민영목과 일본의 다케조에 사이에 맺어진 조약 체결을 축하하는 그림이다. 이 조약에서도 조선의 관세주권은 회복되지 못했다.

▲ 한 · 일수호조규 체결 모습  1876년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가 강화도 연무당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다.

▲ 메이지 헌법 발포식  이 의식으로 일본 천황은 허수아비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음했다.

▲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제국주의로 향하는 일본 근대사의 심장을 겨냥한 상징적인 것이었다.

▲ 안중근 유묵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자른 왼손 무명지의 마디가 선명하다.

▲ 하얼빈역의 이토 저격 지점  삼각표 하나만 표시해놓은 것이 현재 중국의 역사 인식 수준을 잘 말해준다.

▲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치러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오른쪽 예복 대열 맨 앞이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시타케이다.

▲ 백두산정계비  청나라는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 서북경락사 어윤중  그는 간도를 조선 영토라고 확정지었다. 하지만 갑오개혁을 주도하다 아관파천 때 고종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조선은 건국 5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 한일합방에 찬성한 내각 각료들이 일본 견학 당시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 줄 여덟 번째가 대원군의 아들 이희(이준용 부친), 두 사람 건너 이재각, 한 사람 건너가 순종의 장인 윤택영이다.

▲ 3대 조선 통감 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후 조선 총독 자리엔 군인들이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 매천 황현의 초상  약간의 사시였던 황현의 눈에서 그릇된 세상을 바로 보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 황현의 시문집인 『매천집』(왼쪽)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황현의 묘(오른쪽)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 조선총독부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일본 헌법을 적용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  1900년대 초에 건립됐다. 망명길에 오른 이건승은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의 집에서 망명 첫날밤을 보냈다.

▲ 이건창의 생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이건창과 생사에 교유했던 양명학자들은 황현처럼 자결하거나 정원하 · 홍승헌 · 이건승처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 이상설 생가 및 생가 마을  충북 진천읍 산척리에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와 정원하의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며 양명학의 반향이 되었다. 이상설도 양명학을 공부했다.

▲ 만주 용정촌에 있던 서전서숙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작업의 일환으로 이상설이 1906년에 건립한 학교다.

▲ 우당 이화영  그는 만주에서 광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이상설을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지도할 인물로 추천한다.

▲ 추가가로 가는 길  우당 이화영은 남만주에 있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를 국외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 석주 이상룡  이상룡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총리)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 이상룡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이상룡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팔면 고성 이씨 문중에서 되사기를 반복했던 유서 깊은 종가다.

▲ '105인 사건'에서 검거된 사람들이 공판정에 끌려가는 모습  일제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무관학교 건설을 분쇄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 양기탁의 수형기록표  양기탁은 일제가 신민회 해체를 위해 날조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 삼원보  독립운동가들이 집단 이주한 삼원보는 3 · 1운동 때 가장 먼저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 추가가에서 바라본 대고산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거쳐 결성된 경학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중 하나가 된다.

▲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영농 장면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공부하면서 농사도 짓는다는 경학사의 방침에 따라 고된 노동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합니하의 겨울 풍경

▲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합니하  중국 정부는 현재 이 지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출입 · 통행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 철도를 끊은 의병들을 학살하는 일본군  일제는 외국인인 한국인들에게 자국의 군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해 사형까지 시켰다.

▲ 초대 주차헌병대장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왼쪽)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전달하기도 한 그는 한국에서 숱한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일제가 쓰던 형틀(오른쪽)  일제는 한국인에게 혹독한 태형을 실시해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별다른 자본금을 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 세운 국책 회사였다.

▲ 1910년 무렵의 남대문 거리

▲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독립기념관 소장).

▲ 공출을 강요하는 포스터  일제는 1940년대 전시 식량을 비축한다는 명목으로 공출을 강요하지만 그 전부터 조선의 쌀을 수입해갔다.

▲ 일제의 한국 학생 교육 장면  일제는 조선교육령에서 충성스럽고 양순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 조선교육령 시안  일제는 한국인이 설립한 대부분의 사립학교를 체제 위협 요인으로 보았다.

▲ 송병준  매국의 대가로 귀족의 작위를 받았으나 기생 장사에 열중해 '색작'이란 비아냥을 받았다.

▲ 일진회 관계 문서

▲ 이용구의 가족 사진  이용구는 1912년 일본 고베시에서 45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회사란 이름을 가장한 조선총독부의 공식 수탈 기관이었다.

▲ 1920년대 명동 거리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으로 일본인 기업을 육성하면서 한국인들의 민족자본 형성을 억제하려다 많은 반발을 초래했다.

▲ <대한매일신보>  일제는 조선 강점 후 가장 반일적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시켰다.

▲ 베델의 묘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있다. 베델은 일제의 침략 행위에 진정으로 분개한 영국 언론인이었다.

▲ 고종의 장례식(위)과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된 빈소(아래)  고종 독살설은 3 · 1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 영친왕(위)과 부인 이방자 여사(아래)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평생을 장애인 봉사 활동으로 보냈다.

▲ 일제가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생산된 미곡을 반출하고 있다.  일본의 쌀소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식민지 수탈을 강화했다.

▲ '2 · 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  왼쪽 두루마기 차림이 대표인 최팔용이다.

▲ 서울 종로의 만세 시위  일제의 무력 진압에 몸을 피하는 모습이다.

▲ 북간도 용정 시내  용정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영사관 경찰은 중국 군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총격을 가해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동상  64세의 강우규는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으나 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  주변이 모두 개발되면서 인근 주민들은 임시정부 청사를 헐어버리고 상가나 아파트를 짓고 싶어 해서 대책이 시급하다. 우리 정부가 과거에 부지를 확보하지 못했던 실책을 지금 와서 새삼 느끼게 된다.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폐회식 장면  '대한민국 원년'이란 표기가 뚜렷하다. 가운데 흰옷 입은 이가 안창호, 왼쪽이 손정도이고, 둘째 줄 오른쪽 끝에 김구가 보인다.

▲ 도산 안창호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국내에 조직한 연통제는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이을규  대동단의 각종 유인물 배포를 도맡고, 의친왕 망명작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 김가진 장례식  남작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한 후 1922년 사망하자 임시정부장으로 치렀다. 김가진은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 의친왕 이강  항일 의지가 굳셌던 거의 유일한 황족이었다.

▲ 압록강 철교(오른쪽, 현재 명칭은 압록강 단교)  의친왕 일행은 이 철교를 타고 안동헌까지 탈출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망명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왼쪽은 중 · 조 우의교다.

▲ 프랑스 조계지가 있던 상해의 주택가 풍경  영국은 일제의 독립운동가 체포를 방조한 반면 프랑스는 조계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협조적이었다.

▲ 이광수  <독립신문> 초대 사장 겸 주필로 활약하다가 일제의 밀정으로 상해에 온 애인 허영숙의 회유작전에 넘어가 <독립신문>을 떠나 끝내 귀국해버렸다.

▲ <독립신문> 창간호  조선총독부의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맞선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다.

▲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다.

▲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던 애인리 전경

▲ 조선의 집단 망명자들이 거주했던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마을  뒤에 보이는 산이 1911년 4월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던 대고산이다.

▲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근처에 있던 고려관자  100여 년 전에는 조선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현재는 유하현 광화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중국 길림성 집안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모습  만주 각지에서 통합 독립군이 결성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공격을 가하자 일제는 대규모 토벌을 계획했다.

▲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  열혈 독립운동가 나철은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한 조선총독부가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시키자,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했다.

▲ 중광단과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서일  군사전문가인 김좌진과 통합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 봉오동대첩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급사격으로 적에게 120명의 사상자를 낳게 했다"고 보도했다.

▲ 청산리전투 때 썼던 독립군의 탄약과 무기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종일 전투에 임했고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 청산리전투 당시 일본군이 부상병들을 후송하며 이동하는 모습  독립군은 전열 재정비를 위해 러시아로 갔다가 자유시사변을 겪게 된다.

▲ 삼부의 형성

▲ 압록강 국경경비병들이 삼엄한 검문검색을 펼치고 있다.  일제는 압록강을 오가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검색했으나 독립군의 도강작전을 막지는 못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대원들  192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참의부는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주도했다.

▲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김승학  참의부 결성을 돕기 위해 만주로 파견되었고, 해방 후 『한국독립사』편찬을 주도했다.

▲ 만주의 독립군 맹장 백광운(채찬)이 우당 이화영에게 보낸 편지  백광운은 내부 파쟁에 희생되었다.

▲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정의부는 근거지를 계속 옮겨야 했다.

▲ 삼원포(옛 삼원보) 동명소학교  아직도 동명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회의 관선의원이 돼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을 주장했다.

▲ 만주의 삼부 관할도(채영국, 『1920년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