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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27 2013-082 풍경 뒤의 풍경
2013. 7. 27. 12:45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82 풍경 뒤의 풍경

 

최하림 시집

2001,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7778

 

811.6

최92풍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이 산 밑에 이르러 시와 나는 근거리로 이마를 마주하고 있다. 귀를 모으면 시의 숨소리도 들린다. 나는 시가 무엇이며, 왜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시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퇴화해버렸다. 나는 시 가까이, 가만히 있을 뿐.

 

시인 최하림은 1939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김현 · 김승옥 · 김치수 등과 함께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전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충북 영동에서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에서』 『굴참나무숲으로 아이들이 온다』 등과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미술 에세이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등이 있으며, 조연현문학상 ·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풍경 뒤의 풍경』에서는 본래 세계의 모습대로 풍경이 주인이다. 그곳에서는 사람도 풍경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시인은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소리들을 듣는다. 그 소리들은 풍경이 일으키는 소리들이다. 다시 말하면, 늘 존재해왔던 소리였지만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풍경에 의해 비로소 시인의 귀에 들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 풍경 속에서 사람들에 의해 재단되고 갈무리된 시간이 아닌 순수한 시간을 발견한다. 그 시간은 바로 시의 시간이다. 이 시집에서 시간은 더 이상 배후가 아닌 사물 그 자체이다.

 

시인의 말

 

여섯번째

시집을 낸다.

한결 몸이 가볍고

부끄럽다.

 

    2001년 6월

          최하림

 

차례

 

▨ 시인의 말

 

제1부

가을날에는 / 빈집 / / 다시 빈집 / 바람이 이는지 /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 이제는 날개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새여 / 썩둑썩둑 시간을 자르며 나는 가리니 / 다시 구천동으로 /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 겨울 갈마동 일기 / 달 / 오늘 밤에도 당신은 / 어디로?

 

제2부

가을의 속도 / 저녁 예감 / 겨울 내소사로 /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 의자 / 호탄리 詩編 / 함티 가는 길 / 손 / 전화 벨이 운다 / 한밤중 / 바람이 대숲으로 빠져 나간 뒤 / 물 그림자 위로

 

제3부

나는 다리 위에 있다 / 싸락눈처럼 반짝이면서 / 마애불이 돌 속으로 / 겨울 월광 / 불국사 회랑 / 겨울 내몽고 1 / 겨울 내몽고 2 /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 마애불을 생각하며 / 雨水

 

제4부

억새풀들은 그들의 소리로 / 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 동강에서 /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 햇빛 한 그릇 / 봄 길 / 가을의 집 / 첫 시집을 보며 /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 68번 도로에서

 

제5부

강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 황혼 저편으로 / 비루먹은 말차럼 / 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날이여 / 길 위에서 / 낮은 소리 / 농부들이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 삽살개 같은 것들이 / 하늘소 / 별아! / 에튀드

 

▨ 해설 · 흐르는 풍경의 깊이 · 최현식

 

가을날에는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겨울 내소사로

 

하늬바람이 내소사 길 나무들을 날립니다

아직도 햇빛은 찬란하고 수은주가 내려가는지

12월의 시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마르고

하늘 가운데로 소리들은 투명하게 솟아올라

우리가 우리 그림자를 물속으로 들여다보듯이

지상에 어린 내소사 길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걷습니다 언 돌이 발부리에 채입니다

얼음의 여울이 미광처럼 흐르고, 여전히 내소사 길은 덜덜

떨면서 산 밑으로 뻗어나가고, 점점 날은 어두워가고

바람이 쇠북에 걸려 오래도록 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호탄리 詩編

 

어둔 길로 한 남자가 경운기를 몰고,

그 뒤로 여자가 계집아이를 업은 채 타고 있다

그들은 반달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개 한 마리도 허리를 구부리고서

꼬리를 흔들며 뒤따르더니

어떤 영상이 보이는지

방향을 바꿔 추수가 끝난 논으로

뛰어가고 있다 까마귀들이 후두둑

후두둑 날고 있다 낮게 또 낮게

 

까마귀들은 어떤 논에는 내리고

어떤 논에는 내리지 않는다

까마귀들의 뒤로 저녁 공기가 빠르게 이동한다

왼편 골짜기에서 어스름이 달리듯이 내리고

시간들이 부딪치면서 부서지고

어떤 시간들은 문을 닫고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침묵 속으로 강물 소리 멀리 들린다

나는 강물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모은다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귀 기울인다

이제 경운기는 없다 개 한 마리도 없다

 

어둠이 내린 들녘에는 검은 침묵이 장력을 얻어

물결처럼 넘실대면서 금강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금강이 검게 빛난다

 

어디서 달이 뜨는지

마른 풀잎들이 서걱이는 모습이 보이고

밤새들이 날아오르고 소 팔러 갔던

사내들이 술에 취해 노래 부르며 오는 소리 들리고 있다

 

저녁 예감

 

한로가 지나면

화원에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염소들이 서성거리고

돌밭으로는 물안개가 몰아오고 검푸른

하늘이 바다 깊이 내려와 모습을

감춘다 발도 보이지 않게 어스름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 수채 구멍 같은

골짝으로 내려간다 나는 빠르게

밭고랑을 걸어 집으로 간다

퐁당퐁당 시간들이 떨어지고

빈집들이 숨을 죽이고

골목이 두런거린다

 

가을의 속도

 

줄달음쳐 오는 가을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조금 더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가 빠르게 머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산굽이를 돌고 완만하게 경사진 들을 지나자 옛날 지명 같은 부추 마을이 나오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는 모습이 보이고

 

가랑잎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내립니다 물이고 가랑잎이고 가을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산 속의 짐승들도 오늘은 그들의 겨울을 생각하며 골짜기를 빠져나와 오솔길을 가로질러 달립니다

 

가을은 우리 밖에서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우리는 안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비명처럼 있습니다

 

빈집

 

초저녁, 눈발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서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이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날개를 들고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크게

울린다

 

다시 빈집

 

며칠째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려 들을 가리고

 

함석집에서는 멀고 먼 옛날의 소리들이 울린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리는 눈은

 

처마에서 담장에서 부엌에서 간헐적으로 기명 울리는 소리를 낸다

 

귀 기울이고 있으면 연쇄 파동을 일으키며 계속 일어난다

 

나는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걸고 유리창을 내대본다

 

아직도 눈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다

 

천태산 아래로 검은 새들이 기어들고

 

하반신을 어둠에 가린 사람이 샛길로 접어들고

 

시간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언덕과 들길을 지나

 

파동을 일으키며 간다 이제 함석집은 보이지 않는다

 

눈 위로 함석집의 파동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주목하지 못한다

 

파동은 모습을 드러내는 일 없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빈 하늘을 회오리처럼 울린다

 

수천의 새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끝을 모르는 시간 속으로 새들이 띄엄띄엄 특별할 것도 없는

 

날갯짓을 하면서 산 밑으로 돌아나간다 강물이 흘러 내려 가고

 

나무숲이 천천히 가지를 흔든다 이윽고 나무숲 새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번쩍이면서 수천의 그림자를 지운다

 

새들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하늘 속으로 들어가 멈추어 있다가

 

시간의 거울 속으로 빠져나가면서

 

거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날갯짓을 한다

 

하늘에는 수천 새들의 날갯소리로 시끄럽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요요마는 거울 속에서

 

거울의 부축을 받으면서 연주한다 황혼이 거울 속으로

 

몰아든다 새들이 또다시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날아가면서 꾸르륵꾸르륵 운다

 

어디로?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더 이상 종달이는 높이 날지

읺는다 봄날은 지나가버렸다

긴 의자에 사람들은 오지 않고

시간은 주춤주춤 고장난 시계처럼

흘러간다 나는 창문을 빠끔히 열고

시간의 자국들을 보고 있다

이태리 포플러들이 강 건너 연푸른

가지를 드러내며 가지런히 있다

무슨 신호를 공중으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오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 바람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날개에는 솜털 같은 은유들이 실려 있고

은유들은 희망도 없이 부서져내린다

들판은 병들었다 수세기를 두고

오염된 세상은 이제 종달이 하나

떠올릴 힘이 없다

 

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겨울이면 배고픈 까마귀들이 이 논에서

저 논으로 고랑을 뒤지며 바삐 걸음을 옮기고

참새들도 작은 모습으로 창가에 와 웁니다

눈 내리는 날은 눈물 방울이 줄줄줄 흘러내리면서

들판을 지우고 강을 지우고 마을을 지웁니다

그런 날은 유난히도 저녁이 빠르게 옵니다

(독자여

밤이 오거든

유리창을

오래오래 보십시오

엑스선 사진처럼

검은 유리에서는

새들이 날고

새들이 울고

새들이 일렬로

이동하는 것이 보일 겁니다

살고 아파하고 이동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은 아직도 유리창 밖에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밤이 깔아놓은 길 위로 시간들은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고 있습니다

나는 배고프게 세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나는 울고 있습니다

 

황혼의 저편으로

 

노을 속으로 그림자들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어스름을 끌어당기며 밤 속으로 들어간다

내 것이 아닌 추억들이 소리 지르며 일어선다

주민들은 입을 다물고 가만가만 발길을 옮긴다

주민들은 침실로 들어간다 한밤에는

빗줄기들이 세차게 이파리들을

때리고 풍경은 길게 숨을 내쉬고

나는 두렵다 나는 눈 뜨고 있다

내 앞에는 아직도 검은 시간들이

뭉텅뭉텅 흘러가고 있다

 

길 위에서

 

나무들은 멀어져가고 들이 어스름에

잠깁니다 한때 들에서는 영혼이 숨 쉬고

있었고 신들과 함께 구월을 맞으며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세기에 들어서면서

신은 떠나바렸고 우리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 위에서 여러 길들을 보고 있습니다

언덕 아래 도랑에서는 물소리 들리고

우리 마음은 간절히 물에 잠기며 물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넋을 잃고 싶습니다

오오, 저는 애통하려고 여기 있습니다

어느 누가 우리의 토르소를 울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누구의 소유물입니까?

왜 아이들은 우리를 떠나 그들의 길을 저토록 바삐

갑니까 저는 찾아갈 집도 골짝도 없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저는 떨고 있습니다

 

- 박재삼 시인을 위하여

 

유리창으로 넘어온 햇살이 사기그릇에 찰랑찰랑 넘칩니다

 

한 손이 조심스레 사기그릇을 들고 방 가운데 섭니다

 

사기그릇 속의 햇살은 사기그릇과

 

햇살 사이 방과 유리창 사이

 

무명으로 파동합니다

 

한 손이 고요로히 햇살을 적습니다

 

한 손이 떨립니다 한 손이 멈춥니다

 

떨림과 멈춤이 거의 동시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간들을 빨랫줄에 넙니다

 

그개 전부입니다 그 이상 방 안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사기그릇 속의 햇살은 넘치면서 적멸의 소리로 울리지만

 

소리들은 영토를 넓히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사라져갑니다

 

햇빛 한 그릇

 

      1

   강 얼음처럼 금속성을 내며 햇빛이

   마룻바닥으로 한 뼘 한 뼘 기어 올라온다

   그릇에 담아 나는 검은 상 위에 놓는다

   밤이 깊어도 햇빛은

   사라지지 않고 일용할

   양식처럼 찰랑찰랑 넘친다

 

      2

   나는 햇빛 속을 가고 있다 강물 위인 듯, 진공 속인 듯, 나는 맨발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조금씩 흔들리며 블랙홀 같은 시간 속을 가고 있다 저편에 얼굴 모습을 얼른 알아볼 수 없는 사내들이 몇, 가고 오른쪽으로는 낙엽송이 져 내리고 볏가리들이 반대쪽에 세워져 있다 공기는 말라 바스락거렸다 나는 무어라고 외치고 싶었으나(하다못해 어머니!라고도 외치고 싶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꺼번에 시간들이 쏟아질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리며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릇 위 햇빛이 번쩍거렸다

 

      3

   나는 서너 번 기침을 하고 햇빛 속으로 찰랑찰랑 흘러가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4

   오늘 같은 날에는 덤벙대지 말고

   조용히, 시를 생각하며,

   시를

   기다려야겠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