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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13. 12:26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9 사진으로 본 일제시대의 잔영

 

 

이서규 지음

2005, 지식의날개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000

 

911.06

이54일

 

광복 60년,

그 아픈 과거의 흔적을 찾다

 

이 책은 80여 컷의 컬러 사진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역사 에세이로, 35년간 이 땅을 유린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 만들어진 유형 · 무형한 것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아프고 참담한 현실도, 그 현실 속의 사람들이 떠나가고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게 마련이다. 광복 60년,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이러한 흔적들이 재조명을 통해 그 시대의 진실을 되새겨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일본과 일본인을 바로 보고 제대로 알아야 그들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이서규(李瑞圭)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와 스페인 마드리드 Complutense 대학 왕립 외교관학교, 중앙미디어그룹 영자신문 기자를 거쳐 CBS(기독교방송) 문화체육부 기자로 2004sus 아테네올림픽을 취재한 바 있고,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일본에 거주하면서 한일관계에 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차례 |

c o n t e n t s

 

책머리에


1. '식민'의 의미와 그 흔적을 찾아서

2. 조선은 그들에게 신천지였다

3. 착취와 수탈의 역사를 더듬다

4. 그들의 무덤이 말을 건넨다

5. 교통을 장악하는 자가 조선을 접수한다

6. 서로 다른 목욕 문화가 만나 낯을 붉히다

7. 식물까지 창씨 개명을 당하다

8. 한국인의 정신까지 수탈하다

9. 건축 양식, 일본식과 한국식의 차이

10. 일제의 붉은벽돌 콤플렉스

11. 성 문화에 '문화'는 사라지고, '행위'만 남았다

12. 러일전쟁, 군국주의를 부르는 비석

13. '조선의 자존심' 마저 일제의 군사요새로 전락하다

14. 일제가 약탈한 유물, 한반도에서 빛을 발하다

15. 재일동포, 두 개의 조국을 바라보는 비애

16. 한국과 일본, 가깝고도 먼 이웃

17. 정치는 실리를 다투지만 학문은 진리를 다툰다

18. 비록 일본인이지만 자랑스런 한국의 어머니

19. 아름다운 사람, 그가 있어 한일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과거 청산에는 반드시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용서에는 반드시 반성과 참회가 필요하다.

 

■ ■

동래도호어문

교각을 높이 올려 그 밑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형태인 이 문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모습이 혼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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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근대역사관

1929년 설림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의 모습. 그 뒤 미군 사무실 미문화원으로 쓰이는 등 우리 현대사의 영욕을 겪은 증인이기도 하다.

■ ■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일본인 묘지 바로 앞에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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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묘지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 부산시립공원묘지에 있다. 부산시는 인도적 차원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무연고 일본인 묘지 1,528기의 유해와 위패를 이곳에 안장했다.

■ ■

수성못 전경

수성못 인근에는 이 저수지를 만든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소가 있으며, 조선인 토지가 저수지에서 제외된 데 합의한 미즈사키의 공을 기려 시민들이 관리하고 있다.

■ ■

부산시 소재 동래역

부산시 동래구 난민동에 있으며, 전형적인 뾰족지붕의 일제시대 역으로 이런 역은 여객수가 적은 동해남부선에 밀집되어 있다.

■ ■

금강공원

황기 2600년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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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일제에 의해 왜곡당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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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매축기념비

부산 동부경찰서 관내에 위치한 이 매축비는 부산을 내륙의 관문이라고 칭하는 글귀가 아직도 선명해 부산이 대륙침략의 시발점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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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항매축기념비

원래 비문이 있던 곳을 파내 한반도 지도를 넣은 이 기념비는 한반도의 허리부분이 부러져 분단된 조국을 상징하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현재는 이순신 장군 영모비로 변모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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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관광호텔 내부에 있는 유성온천 기념비

공주 갑부였던 김갑순은 이 자리에 유성온천장여간을 세웠다. 한때 중부권 최고의 갑부였던 김갑순은 생전에 수많은 첩들 소생 자녀들의 재산 싸움으로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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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상

1930년대 초 온천 사거리의 전차 개통을 기념해 만든 이 할아버지상은 당시 온천업에 뛰어든 일본인들이 사업의 성공을 빌며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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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간별장

일본인 거부인 하자마 호타이로가 지은 저택이다. 현재는 예식장의 연히장이 된 이 별장은 빼어난 정원조경과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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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간별장

자갈과 목재를 깔아 만든 정원과 삼나무로 만든 박간별장 대문의 모습은 1900년대 초 벼락 부자가 된 일본의 거부들이 얼마나 호사를 누렸는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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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곡수원지 삼나무 숲

일본에서 주로 주택이나 선박 수리용으로 쓰이던 삼나무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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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곡수원지 계곡

이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여 늘어나는 부산 거주 일본인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가 상수도를 설치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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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각 13층 석탑

원나라 형식의 석탑으로 일제시대에 세워졌다.

■ ■

황기 2600년 기념비

대동아공영권을 강조하여 새긴 이 기념비에는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금강원을 확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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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대웅전 계단

영남 불교의 주축이던 범어사 역시 일제의 종교 침투를 벗어나지 못해 곳곳에 일본인이 만든 건조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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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석등

범어사 대웅전 앞을 장식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석등이다. 둥근 모양의 지붕과 전반적으로 긴 몸체가 일본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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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대웅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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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현판

사찰의 입구에서 보면 대웅전이 개방되어 있는 우리 절의 구조와는 달리 범어사는 보제루가 대웅전을 가로막고 있어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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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 · 고등학교 터(址)

일제가 경희궁의 일부를 헐고 세운 경성중학교 터. 광복 후 경성중학교는 서울중 · 고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1980년 강남개발의 여파로 서초동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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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동에 있는 일련정종 본부

13세기 기존의 불교와 일본 민간신앙이 결합해 만들어진 일련정종은 일제의 대륙침략에 앞장선 대표적인 우익집단으로 현재는 공명당이라는 종교정당까지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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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교회 전경

일본 신도에서 출발한 이 종교는 주로 부산과 경남에 터전을 두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신도교파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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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건물

전형적인 일제시대 상가건물 형태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의 추녀와 창문의 구조가 일본식 모델을 보여주는 부산자갈치시장의 한 상가다.

■ ■

남포동 영도대교 주변과 건어물 도매시장

전형적인 일본식 상가로 위는 콘크리트건물, 아래는 목조 건물이다. 나무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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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집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은 이 일본식 2층 주택은 단열 효과를 내기 위해 벽과 벽 사이에 황토를 채워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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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전형적인 견치식 공법을 이용한 영도다리의 교각. 1934년 섬이던 영도와 부산시를 잇는 이 다리가 개통되자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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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도소 감시탑

1919년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정치범을 수용했던 대전교도소에는 지금 재소자의 탈옥을 막기 위해 세워진 감시탑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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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읍사무소

작은 건물도 화강암으로 지은 사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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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세관 첨탑

건립 당시 붉은벽돌을 구하기 어렵자 러시아에서 벽돌을 종이로 한 장씩 싸서 수입할 만큼 일제는 많은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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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1907년 건립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붉은벽돌로 쌓은 담을 따라 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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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병원 본관

처음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양식이다. 사각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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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 기상청

선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른 일제시대 건물처럼 현관 뒤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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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물 정란각

일제시대 요정으로 현재도 요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1」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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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승전비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중인 이 기념비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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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일본군 지하요새

일본군은 연합군 폭격에 대비해 암벽을 파고 포탄을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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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 발상지 기념비

가덕도 포병사령부의 상륙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비로 일본군 포대 자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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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선박의 식수나 보일러용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 ■

일본군 포대

가덕도 외양포에는 산 능선을 따라 일본군이 포사격 시 관측을 위해 설치한 시설들이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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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방공호

전황이 불리해지자 1943년 12월부터 건설된 이 방공호는 총독부 요인의 피신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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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천불도 단편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에서 출토된 벽화로 흙벽에 채색되었으며, 6~7세기 작품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복희여와도

중앙아시아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 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것으로 천지창조의 설화를 인물화의 형태로 묘사하고 잇으며, 7세기 작품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재일교포 3세 정구미 씨

민단계 교포로 국내에 교포들의 애환을 소개하고 있다.

■ ■

프란치스코의 집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이 단돈 200원으로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 ■

주방에서 일하는 고사카 요시히로 수사

 

 

 

posted by 황영찬

2018-018 우리 역사는 깊다 [2]

 

 

전우용 지음

2015, 푸른역사

 

대야도서관

SB108231

 

911.06

전66ㅇ  2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오늘로 들여다본 어제

오늘이 말해주는 내일

오래지 않은 오늘로

오래지 않을 미래를 그리다

 

이 책은 10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때그때 날짜에 맞춰 총 60개의 주제를 선정했기 때문에 꼭지들 간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모든 꼭지를 관통한 내 문제의식은 역사란 시간 · 공간 ·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라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기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서울의 동쪽》 등이 있다.

 

차례

 

● 책머리에


7월 18일_을축년 대홍수

인간은 자연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

7월 22일_자동차취체규칙 제정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동차, 새 가족을 얻은 대신 잃은 것들

7월 24일_광무신문지법 공포

탄압받던 언론에서 ‘한통속’이 된 언론

7월 29일_양화진에 외국인 묘역 조성

글로벌시대,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과 외국인 묘지

8월 4일_김우진, 윤심덕 현해탄 투신

자살률은 시대의 ‘우울도’ 측정하는 바로미터

8월 6일_서소문 화교들의 삶

‘외국인 혐오증’, 우리가 용납될 공간도 줄인다

8월 10일_일제, 서울 시민의 공동묘지 용산 땅을 군용지로 수용

기억에서 지워진 공동묘지 용산, 삶 주변에서 사라진 죽음

8월 12일_보건부, 무면허 의사 275명 적발

의료 민영화, ‘가난이 사형선고’인 사회를 만든다

8월 19일_한성전기회사, 전등개설예식 개최

‘불야성’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전등, 그래도 늘 부족한 현대인의 시간

8월 20일_청계천 복개 계획 제출

복개에서 복원까지, 청계천의 역사와 인간의 변덕

8월 23일_여자정신근로령 공포

만행의 기록이 문서로 남는 경우는 드물다

8월 29일_일본, 한국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

남이 이름 지어준 대로 불리는 자, 식민지 백성

8월 31일_종로경찰서, 종로변 상점에 변소 설치 지시

민주 사회의 관리들, 다양하고 상충되는 시민들의 요구 경청하고 설득하는 자세 필요

9월 15일_추석 임시열차 증편 운행

귀성과 민족 대이동, 이제 사라질지도 모를 한국적 ‘전통문화’

9월 26일_일본 제실박물관장, 순종 황제 알현

‘빼앗은’ 나라의 박물관과 ‘빼앗긴’ 나라의 박물관

10월 1일_가로명제정위원회, 새 동명과 가로명 고시

나라의 중심가로 세종대로, 그러나 나라의 정치 철학은?

10월 7일_종두규칙 공포

전염병 예방의 시대, 예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10월 12일_대한제국 선포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에 담긴 뜻

10월 22일_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의 주역 홍범도, 그에게도 이 땅에 설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주어야

10월 23일_일본 덴노, 조선총독에게 〈교육칙어〉 하달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진 〈교육칙어〉의 군국주의 정신

10월 27일_장충단 설치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 장충단, 털어내지 못한 오욕의 흔적

11월 4일_훈민정음 반포 팔회갑 기념식 개최

‘반글’, ‘암클’에서 ‘한글’이 된 훈민정음, 지금 다시 ‘반글’이 된 건 아닌가

11월 11일_경무청, 채소 도매상 단속

물가 단속으로 민심 다독이려 한 ‘권력 주연 코미디’의 서글픈 역사

11월 17일_우정총국 개국, 우편사무 개시

우편사무 개시와 지번 부여, 모든 것을 숫자화하는 시대를 열다

11월 27일_대한제국, 정동 부근에 고층건물 신축 금지

고층화를 향한 욕망, 뒷수습은 어찌 할까

12월 3일_조청국경회담 결렬

동북아 영토분쟁, 냉철한 역사인식으로 대처해야

12월 10일_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

여의도 상공을 비행한 안창남, 한국인에게 3차원의 시야를 선물하다

12월 17일_지전 상인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명분 없는 이득 경계했던 옛 상도, 지금 우리 기업문화에 절실히 필요한 것

12월 24일_셔우드 홀, 크리스마스실 발행

유병장수有病長壽 시대, 질병과 오래 동거하면서도 불행해지지 않을 방법 찾아야

12월 30일_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민심 살피고 국민 즐겁게 하는 ‘대’라는 이름에 충실했으면


●참고문헌

●찾아보기

 

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용산 전경

 

건물의 지붕만 수면 위에 떠 있어 수상도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수해는 기록적인 폭우가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한강변 저지대에 새 택지가 조성된 탓도 컸다.

천재는 언제나 인재와 함께 하는 법이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8쪽.

 

1909년 2월 20일자 《런던 그래픽 뉴스 London Graphic News》에 실린 삽화

 

프랑스 영사의 이탈리아제 란치아 자동차가 서울에 나타난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들고 가던 짐도 내버리고 숨기에 바빴다. …… 소와 말도

놀라서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는 설명이 부기附記되었다.

자동차가 도로의 폭군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이보다 생생히 묘사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1921년 용산 철도운동장의 취재기자석

 

<신문지법>을 근거로 한 일제의 신문 검열은 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총독 정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기사를 써봐야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고 공연히 경찰서 구경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기자들은 변죽만 울리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사의 찬미>

 

김우진과 윤심덕의 실종 후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 <사의 찬미>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사의 찬미> 가사가 수록된 레코드회사의 음반 설명글은 윤심덕을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로 소개하고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대한제국기 장성군수를 지낸 목포 부호 김성규의 맏아들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살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심덕 역시 유부남을 사랑한 것 말고도 숱한 고민을 안고 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둘 모두 죽을 핑계보다는 살 이유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용산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한국인들에게서 거저 빼앗다시피 한

용산 공동묘지 터에 초호화판 관저를 지었다. 그가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이 된 뒤

이 건물은 조선총독 관저가 되었다. 그러나 1919년 3 · 1운동으로

하세가와가 경질된 뒤에는 이 건물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5쪽.

 

1956년 가톨릭의대 신입생들

 

일제 강점기 남한 지역에는 1개의 의과대학, 5개의 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해방 이후 의학전문학교들이 의과대학으로 승격하고, 1954년까지 부산대, 이화여대, 가톨릭대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어 의과대학은 8곳이 되었고, 정원도 많이 늘었다.

의학 교육기관의 확장은 '가짜의사'가 발붙일 곳을 줄였다.

*출처 :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2004.

 

1900년경 한성전기회사 앞의 매표소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걸린 자리다.

'밝은 밤'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간대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전등은 출현하자마자 귀신을 쫓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출처 : 체신부, 《한국전기통신100년사》, 1985.

 

일제 강점기 청계천 수표교 주변

 

서울이 조선 왕조의 수도가 된 이래 내내 청계천은 도시 하수도였다.

도성 안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도시 산업화에 따라 독소가 개천에 흘러들면서

청계천은 경성 주민의 전염병 발병률을 높이는 '살인하천'이 되어갔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청계천 복개는 경성부 당국자뿐만 아니라 경성부민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49쪽.

 

평화시장에서 열린 청계천 복개공사 개통 기념식(1963년 12월 5일)

 

지류 복개가 시작된 1936년부터 계산하면 청계천 복개에는 무려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복원 공사는 단 3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재원이 늘어나고 기술 수준이 높아진 덕인데,

반면 시행착오를 교정할 여유는 줄어들었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공감포토, 사진으로 보는 오늘, 역사속의 오늘, 1960년 10월 29일.

 

일본에 도착한 전라북도 여자정신근로대원들

 

중노동에 시달리며 임금조차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선발 과정에서, 또는 이동 중에 자기 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았기에 부모들은

사윗감 재목을 따질 겨를도 없이 혼사를 서둘렀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10년 일본에서 발행된 병합 기념엽서 중 하나

 

상단 원내는 순종 이척과 메이지 무쓰히토.

지도의 붉은 색 부분에는 각각 조선과 일본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보다 뒤에 나온 같은 양식의 지도에는 일본 대신 본주, 구주, 북구주, 북해도를 써넣어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표시했지만, 한국 강점 당시에는 조선의 '국가적 지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옛 그림엽서로 본) 민족의 사진첩 Ⅳ, 개화기의 생활과 풍속》, 서문당, 2007, 176쪽.

 

1920년대 후반 종로

 

전차가 다니는 큰 길은 근대도시의 중심가로 다운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사진은 '냄새'까지 전달해주진 못한다.

도시의 외관이 '근대화'한 뒤에도 도시 공간 내부는 오랫동안

중세적 '구린내'와 '지린내'로 채워져 있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22쪽.

 

<서울시헌장>

 

미 군정청은 1946년 8월 10일 <서울시헌장>을 공포했다.

제1장 제1조는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었다.

뒤이어 '서울특별시 설치' 법령이 시행되면서 서울은 일본의 지방 도시 중 하나로 격하된 지

36년 만에 법률적으로 수도의 지위를 회복했다.

 

1936년의 광화문통

 

중앙분리대가 현재의 광화문광장 자리를 거의 그대로 점거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쓴 한성종두사 소장 박진성

 

뒤쪽에 송아지에서 혈청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 리하르트 분쉬,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200쪽.

 

현재의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원구단

 

고종은 독자적인 천하를 상징하는 원형 제단을 짓고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56쪽.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기념 촬영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 백계白系 러시아군과 체코군에게서 우수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군 승리의 중요 요인이었다.

*출처 : 박도, 우당기념관 엮음,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1910년대 보통학교 어린이들의 돗자리 짜기 실습

 

<교육칙어>는 학문과 기예를 함께 강조했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는 단순 기능을 가르치는 데에만 역점을 두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Ⅳ(6판), 1991, 835쪽.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에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강령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교육칙어>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학교 수업

 

학생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교실 안의 글자는 한자와 가나뿐이었다.

일제 강점기 공교육에서 조선어 교육은 계속 축소되다가 끝내는 사라졌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831쪽.

 

1900년경의 체전부

 

고깔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왼손에는 장죽을,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채 우편 행낭을 어깨에 맸다. 온화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글을 아는 사람'의 풍모가 엿보인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7쪽.

 

1910년경 간도 용정 거리

 

한국인의 간도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간도 이주자가 계속 늘어나자 엄형嚴刑으로 일관하던 정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이후 중국인 비적들의 교민 습격이 빈발하자, 교민 보호를 위해 관리와 경찰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27쪽.

 

추락한 비행기에서 포즈를 취하는 안창남

 

안창남은 1923년 오쿠리비행학교의 의뢰로 일본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를 추모하는

인쇄물을 공중 살포하던 중 도쿄 인근에 추락했다. 추락한 뒤에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했던 그는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30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 《역사사진》(일본) 1923년 8월호.

 

1910년대 말의 지전

 

육의전 상인들은 대개 망했지만 건물은 남았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당시 이 건물 가액은 2만 원 정도였는데,

당시 서울 일반 주택지의 기와집 한 채 값이 300원 남짓이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78.

 

셔우드 홀이 처음 구상한 크리스마스실 도안

 

이순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하여 일본 침략자를 물리쳤다는 내용을 부기했다.

홀이 이런 도안으로 총독부 당국에 협조를 구할 만큼 순진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출처 : 대한결핵협회,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2003.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의 대통령 관저

 

일제 강점기 이 건물을 지었을 때의 공식 명칭은 그냥 '총독 관저'였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병학사, 1997.

 

posted by 황영찬

2018-017 앵통하다 봄

 

 

임성구 시집

2016, 문학의전당

 

대야도서관

SB110690

 

811.7

시68ㅅ  43

 

시인동네 시인선 043

 

태양과 달과 별은 지는 법이 없다.

단지 어둠이 우리 곁에서 피고 지기를 매번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나의 시는,

오뉴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불판 너럭바위 위에서도

시들지 않아야 하고……

 

어둠이 싱싱하게 자라나는 골짝에선

반갑게 어둠을 받아내고 지워내면서

하늘의 씨앗을 지상에 총총 뿌려

세상을 아름답게 가꿔내야 하고……

 

상류로 향하는 달빛 속 연어들처럼

힘차게 힘차게 은유의 비늘을 반짝이며

당신께로 좀 더 가까이 가고픈

무수한 열망과 절망 사이의 황홀한 키재기.

 

임성구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94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살구나무죽비』 등이 있다.

E-mail : jaje@hanmail.net

 

시인의 말

 

누군가가 유기해서

 

척박한 땅에 자라난

 

못생긴 내 자식들아

 

네 진한 향기를 열어

 

나보다

 

신나게 고함치거라

 

파란만장을

 

웃게 하라

 

 

2005년 어느 앵통한 봄에서 다시 봄까지

임성구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눈꽃 경적을 울려라

도화역(桃花驛)

꽃물 한때

토란잎 우산

달빛 우포

바람 호루라기

방어진(方魚津)

잡초의 눈물

잡내를 없애다

일 하는 사람

삼나무 숲에 들다

노래하는 김광석

수선화 지는 날

서운암의 봄

가을 탁발(托鉢)

단풍나무 관절

초정을 읽다



제2부 깨끗한 짝사랑 같은

뱀사골의 봄

삼파귀타

봄, 산동마을

나비물

양후니 형아

부부

시(詩)

다시 낫을 들다

바다, 노래방

나무 물고기

각북(角北)에 앉아 있다

분신

고사목

차향[茶香]에 녹다

이른 아침 하늘수국

야한 생각


제3부 온몸 녹아서 꽃이 되기까지

러브체인

꽃, 다방

케냐

그 짓

나들이

앵통하다, 봄

봄 혹은 강변카페

달에게 사정(射精)하다

위양못 삼매경

에로틱 아이스바

천리향

밤꽃 여자

화인(火印)

어떤 동백 시집

잡초의 눈물 2

텍사스 에레나


제4부 공손한 절규

먹구야

공갈 연애(戀愛)

부재중이었던 그해 봄

할복(割腹)의 시(詩)

내 시의 아가리를 찢고 싶다

황소개구리 울음처럼

김수영을 읽다

잡초의 눈물 3

공손한 절규

불빛 시위대

저, 울대를 그냥

내 시로 창난젓을 담그다

잘 까분다는 것

잡초의 눈물 4

몸이 식어 간다

개 한 마리

참 어이가 없어서


제5부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샐비어 엄마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오동꽃 장의차

팔월

환승

인공세심(洗心)실험실

옻단풍

아니 기쁩니까?

42병동 먹구에게

파란 나물

문자의 궁합

시를 업은 항아리

다듬어진다는 것

묵비권에도 가시가 있다

막차 떠난 후 불시착

용담꽃 평설(評說)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 사이, 내 이름이 참으로 따뜻하게 피어 있었음을…


해설 자학(自虐)과 자존(自尊)의 굴레

        정용국(시인)

 

도화역(桃花驛)

 

오월로 뛰어가는 김천 라고 어디쯤에

복사꽃이 피었다. 흰 눈 펑펑 내리는 날

기차가 그냥 지나쳐도

손 흔드는 간이역

 

내일이면 지워질 이 역에서 쓰는 편지

반쯤 고개 내민 복사우체통 비둘기

천년을, 또 천년을 향해

눈꽃 경적 울린다

 

이른 아침 하늘수국

 

널 보면서

뭉퉁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욱한 안개 너머

소녀의 깨끗한 미소

 

한 번도

다가서지 못한

 

내 유년의 짝사랑 같은……

 

러브체인

 

허공 난간에 매달린 가난한 진물들이

 

서로를 보듬은 채 푸르게 몸을 꼰다

 

녹아서 꽃이 되기까지

 

그 꽃이 지기까지

 

앵통하다, 봄

 

우물가 앵두나무가 뽑히던 컴컴한 봄

꽃의 대중들은 못 들은 척 고개 돌린 채

잘났다 제 잘났다고 빨갛게들 떠든다

 

앵두 젖 훔쳐 먹은 달콤한 올가미들

순해서 더 푸른 달아 기도문만 외지 마라

운주사 석가모니는 왜 여직 주무시나

 

바들바들 떨며 진 한 송이 사람의 집

온몸이 녹아내린 식초 같은 절규인 양

화구구(火口丘) 앵두꽃무덤에는 재 냄새가 진동한다

 

공손한 절규

- 노숙에 든 도시

 

딱지로 오래 앉은 그 상처의 속내는

 

단 한 방울 눈물조차 될 수가 없었다

 

낮술에

젖어버린 생애가

작두를 탄다

맨발로

 

시위 못 당긴 화살처럼

방향 잃어 질척인 목숨

 

동굴 안 부러진 종유석으로 널려 있다

 

차라리

출구를 막아주오

 

저 울음의 비상구를…….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지푸라기 바람이 대문 밖에서 불어온 날

재 발라 놋그릇 닦는 어머니가 흔들리고

 

아득한

쌀뜨물 쑥국

보글보글 끓고 있다

 

비 한 자루 골목 골목 어둠을 쓸어내던

70년대 새벽종이 두부장수로 왔다 가고

삼십 촉 농촌의 꿈은 장닭처럼 경쾌했다

 

오래된 봄 한 술 뜬 샛별아파트 두레밥상

자연 퐁퐁 거품처럼 초록세상 부푼다

 

저만치

정겨운 얼굴

쑥뜸으로 오고 있다

 

내 시의 아가리를 찢고 싶자

 

고아 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예쁜 꽃을

 

콱 찢어 뭉개고 싶다,

세상 어디 발도 못 딛게

 

상처도

빛나길 열망하는

 

이 병신 같은

새끼

 

내 시로 창난젓을 담그다

 

쿰쿰하게 잘 썩은 세상

내 창자를 모두 꺼낸다

 

소금 대신 짠 눈물 섞인

백일 잠을 깨부수고

 

뜨신 네,

밥숟가락에게

 

개좆처럼 대들다

 

불빛 시위대

 

상남동 LED등은

마귀 같은 불빛 군중

 

저 거센 비바람에도

폐부까지 찌르는 말

 

부도난

살구나무죽비

처형하라

처형하라

 

개 한 마리

 

하루 해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물녘에

 

뉘 집 개가 짖는다

 

온 마을을 뒤흔든다

 

한쪽 귀

 

담을 넘어가 보니

 

힘없는 시가 놓여 있다

 

이 빠진 일상들이 새파랗게 질려 떤다

 

틀니 같은 행간들이 발악하듯 되짖는다

 

달걀로

 

바위 치던 자음들

 

내 낭심을 물었다

 

잡초의 눈물 3

- 아름드리나무 밑 잡초에게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시 한 편을 쓰겠다고

 

햇빛도 하나 없이

긴 사색에 젖지만

 

파문 져

영양실조에 걸린

해 한 포기

달 한 포기

 

악착같이 살아보겠단 그 결심도 네 앞에선

쉬-이 꺾여 우는, 빼빼 마른 영감(靈感)이여

 

아, 제발

무릎만 꿇지 마라

한낮 개꿈도

희망이다

 

잡초의 눈물 4

- 잡초에게도 등급이 있을까

 

번지레 잘났든디

학벌 아예 좋든지

 

길도 늪도 아닌 곳에

노둣돌 놓고 바라본 하늘

 

가을날

백발 꽃잎으로 번진

저 억새의 눈물 눈물

 

뜨거운 시 되겠다고 땅웃음 짓는 뿌리의 나날

 

밤은 어찌 날마다 불청객으로 찾아오나

 

못다 핀

혈전의 밤도

맥은 아직 살아 있다

 

할복(割腹)의 시(詩)

 

1

스스로 이 장검을

푹 찔러 넣는다

 

외마디 유서들은

"욱!"하고 쓰러지고

 

식어 쓴

문장들이 뚝 뚝,

애리한 몸에

 

2

봄이

긴 여름이

내 몸을 관통해갔다

 

몸 밖으로 흘러내린

늦가을 단풍 군무

 

벼랑을

뛰어내린다

 

아, 달라붙는

흰 서리꽃

 

시(詩)

 

바람 살짝 불어와도 마음 먼저 흔들려

주름으로 웃다가 팽팽하게 젖어가는

 

우포늪

가시연 같은

실안낙조 어부 같은

 

때 되면 호령하고 때 되면 회항하는

그들의 꿈은 늘, 가시 돋친 불화살

 

가슴에

새긴 마음 한 줄

검붉게 탄 초록바다

 

잡내를 없애다

 

얼마나 많은 욕심이 썩어서 문드러진 채

방 한 켠에 자리 잡고 울었는지 모른다

진갈색 염증들의 큰 눈이

나를 먹고 있었다

 

마흔에서 오십으로 휘어지는 이 길목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한 욕심을 볕에 말린다

뽕잎을 따다 먹인다

내가 나를 먹인다

 

누에가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푸른 한낮

오십은 육십을 먹고 칠십 팔십 백세를 먹고

가벼운 저 구름 속으로

실을 뽑아 올리겠다

 

분신

 

여자의 방 빠져나온 울혈의 날들이

전조등 하나 없이 저벅저벅 어둠 사린다

어머닌 이미 강을 건너시고

빈 배에 앉아 시를 쓴다

 

둥글게 매끄럽게 살란 말씀 새기는데

툭툭 터진 실밥처럼 보풀거린 문장이

자꾸만 갓길을 가고 있다

천길 벼랑 뾰족한 길

 

곁가지는 쳐내야, 모난 돌은 다듬어야

아름드리 된다는데, 꽃빛도 환하다는데

아직도 나를 태우며 가는 길이 아득만 하다

 

잡초의 눈물

 

이 척박한 땅에서도 푸른 꿈 안 버린 널

호미로 낫으로 쳐내겠다는 마음 한 켠

비릿한 풀물의 고함 천둥처럼 번진다

 

우후죽순 돋아난 날[刃]을 벼린 이 어둠

걷어내지 못하면서 감히 널 뽑겠다니

곁가지 피워 올린 꽃도 미안해서 못 보겠다

 

씀바귀 엉겅퀴꽃 구둣발로 앉은 나비야

 

발소리를 줄여라

안 온 듯이 다녀가거라

 

햇살아

밤새 고인 천둥눈물

남김없이 먹고 가거라

 

먹구야

 

섣불리 웃지 마라

 

장마의 날

있을 거다

 

함부로 짖지도 마라

 

우는 하늘

며칠이겠나

 

시인은

웃음도 울음도

 

절체절명에

 

쏟는

거야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 사이,

내 이름이 참으로 따뜻하게 피어 있었음을……

 

갓길에 핀

풋 찔레꽃도

 

울음 매우

따뜻했네

 

가슴을 다

도려내놓고

 

빛 한 줌

들이기까지

 

우주를

오래 애돌아 와서

 

참회 눈물로

벙그네

 

42병동 먹구에게

 

부러진

갈비뼈도

터져버린

공기주머니도

 

어머니의

하늘비단

자락 자락을

다 꿰매면

 

저만치

폈다 지는 꽃

열매 한 알로

오리라

 

고사목

 

지리산

법계사 근처

산등허리 한입 물고

 

온몸으로 비를 맞는

까마귀 몇 마리

 

울지도

날지도 못해

 

우두커니

 

슬프다

 

삼파귀타*

 

바람이 불어왔다

조용히 밤도 왔다

 

어둠 밝힌 별 노래에

터져버려 아린 물집

 

달 등의

박꽃 하나가

손수건이 되어주었다

 

물풀 같은 그 여자

열여덟 필리핀 순이

 

젖은 밤을 보내놓고

풋감 떨어진 새벽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엌문을 또 연다

 

*삼파귀타 : 필리핀의 국화.

 

용담꽃 평설(評說)

 

쪽빛 하늘 구릉 모서리

시집 한 권 놓여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마음 편한 때 있나봐

정제된 꽃잎 페이지 남청 글씨 좀 봐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은 자리 가을볕 자리

나비도 읽고 가고 잠자리도 읽고 가는

주머니, 향기주머니 무지개로 넘친 꽃밭

 

눈으로 퍼 먹고 냄새로도 저어 먹는

아침 산행 보폭 따라 앙가슴 열어놓은

간결한 한 다발의 시평(詩評) 시원하게 뜨겁다

 

 

 

posted by 황영찬
2018. 3. 30. 11:53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6-016 우리 역사는 깊다 [1]

 

 

 

전우용 지음

2015, 푸른역사

 

대야도서관

SB108230

 

911.06

전66ㅇ  1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오늘로 들여다본 어제

오늘이 말해주는 내일

오래지 않은 오늘로

오래지 않을 미래를 그리다

 

이 책은 10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때그때 날짜에 맞춰 총 60개의 주제를 선정했기 때문에 꼭지들 간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모든 꼭지를 관통한 내 문제의식은 역사란 시간 · 공간 ·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라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기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서울의 동쪽》 등이 있다.

 

차례 / 우리 역사는 깊다 1

 

● 책머리에


1월 7일_조선총독부 이전

경복궁 잔디밭과 일제의 공간정치


1월 14일_광장주식회사 주주총회 개최

대통령의 재래시장 방문, ‘서민 코스프레’ 아닌 ‘임금 코스프레’


1월 21일_경찰, 방탕한 방아타령과 음란한 춘향가 공연 금지

대중문화 길들이기, 권력의 헛된 욕망일 뿐


1월 27일_화신백화점 화재

화신백화점에서 종로타워로, 역사는 땅에도 새겨진다


2월 5일_미국인, 돌싸움 구경하다 살인

공공연한 폭력은 줄었으나 비물리적 폭력은?


2월 10일_종로경찰서, 어린이 행상 단속

어린이를 거리로 내몬 ‘불량한 가족’


2월 19일_에케르트, 대한제국 군악대장으로 부임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실종된 퍼즐조각


2월 24일_조선총독부, 한센병 환자 격리 위해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한센병보다 무서운 병, ‘장애인 혐오증’


3월 3일_고종황제 국장

‘죽은 권력’을 둘러싼 기억의 싸움


3월 10일_만민공동회 개최

민주주의, 가장 낮은 곳에서 나는 소리를 먼저 듣는 것


3월 18일_조선총독부, 조선태형령 제정 · 공포

형벌의 목적, ‘교화’인가 ‘복수’인가


3월 26일_우리나라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여의사 탄생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려는 태도, 이미 시대착오


4월 1일_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변경

국민을 찍어내는 기계였던 ‘국민학교’, 이름은 바뀌었으나 …


4월 7일_값싼 알코올, 대량생산 본격화

연료용 알코올이 서민용 음료가 되면서 술의 신성성도 옅어지다


4월 15일_광희정 수건 공장 총파업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지워버린 개발


4월 22일_서울에 시내버스 등장

‘나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본능적 욕구, 대중교통수단 기피로 표출되다


4월 30일_의생醫生으로 격하된 한의사들, 서양의학 수강

양방과 한방이 공존하는 현실, 의료일원화의 해법 찾아야


5월 4일_첫선을 보인 전차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 전차와 ‘근대병’ 그리고 ‘주의사항’


5월 14일_이 땅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양의 탄생

근대화의 역사, 배움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5월 19일_도둑질 겸하던 깍쟁이패 체포

놀고먹으려는 욕망이 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시대, 깍쟁이란 말도 원뜻에서 풀려나다


5월 27일_여자 경찰 채용 시험 시행

경찰에 대한 불신, ‘이미지 쇄신’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것


6월 3일_물장수들, 상수도 준공에 따른 손해배상 요구

자연과 인류 최대의 적은 인간의 탐욕이다


6월 10일_총독부, ‘시의 기념일’ 선포

권력의 여론 조작, 역사의 시계바늘을 엉뚱한 곳으로


6월 16일_대조선은행 창립 준비모임 개최

‘공공’을 돌보지 않는 은행, 천한 고리대금업체와 다를 바 없다


6월 25일_한국전쟁 발발

인류의 ‘주적’은 전쟁이다


6월 30일_한양상회, 기업 이미지 광고 게재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 ‘지름신’의 거소 백화점


7월 6일_일제 경찰, 무당 체포

세계 희유의 ‘다종교 단일민족국가’ 한국, 통합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


7월 8일_신생활복 착용안 통과

‘의복 통일’, 전체주의적 저질 생체 권력의 상징


7월 13일_조선체육회 창립

‘수신’ 버리고 ‘체육’만으로 얻는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다


7월 15일_조선중앙위생회 설치

‘위생’의 이름으로 사생활에 개입하는 국가, 생체 정보 유출의 위험성


● 찾아보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축 현장

 

일제는 경복궁 내의 대다수 전각을 헐어버리고

그 앞에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총독부 신청사를 지었다.

조선왕조의 '초라함'과 일본 제국의 '위용'을, '야만' 조선과 '문명' 일본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의도였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 외침과 투쟁》, 서문당, 1996, 142쪽

 

경복궁 잔디밭(1926년 이후)

 

일제는 잔디가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경복궁 마당에 잔디를 심었다.

*출처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 2002, 158쪽

 

1900년경 동대문으로 드나드는 장사꾼 행렬

 

광장주식회사는 18세기 중반부터 새벽장이 열리던 '배우개'에

근대적인 상설 시장을 세우고 이름을 '광장시장'이라 했다.

오늘날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대문시장 타운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츨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7쪽

 

1902년 야주개(현 새문안교회 부근) 봉상사奉常司 자리에 세워진 협률사 극장

 

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이었는데,

최남선은 이 건물이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보기 삼았다고 썼다. 1908년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바뀌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902쪽

 

화재 직전의 화신백화점

 

왼쪽이 '선전' 건물을 증개축한 서관이고 오른쪽이 동아백화점을 매수한 동관이다.

1935년의 화재는 서관에서 일어나 동관으로 옮겨 붙었다.

화재 후 신축된 화신백화점은 당시 서울의 최고층 건물로 '입전' 터라는 장소의 이미지에 잘 부합했다.

*출처 : 《신세계 25년의 발자취》, 주식회사 신세계백화점, 1987, 59쪽

 

돌싸움

 

1880년대 이 '놀이'를 본 알렌은 "군인들이 보았다면,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 주민들이 아주 훌륭한 군사훈련을 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썼다.

*출처 : 서울특별시, 《사진으로 보는 서울백년》, 서울특별시, 1984.

 

1910년대 서울 종로의 땔감장수 어린이

 

10살 남짓한 아이 둘이 나뭇짐을 잔뜩 실은

소 한 마리씩을 끌고 와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캬라멜, 과자, 사이다 등 부피가 작고 가벼운 새 상품이 나온 뒤에는

이것들이 '소년 행상'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89쪽.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음악회를 마친 후

외국인 청중들과 함께한 한국 군악대원들(1902).

아래는 프란츠 에케르트

 

에케르트는 한국이 망한 뒤에도 회현동 자택에 머물며 양악洋樂을 전수하다가

1916년 8월 6일 6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례음악 연주는 '특별히' 이왕직 양악부가 담당했다.

*출처 : 경향신문 광복50주년 사록 편찬팀, 《격동 한반도 새지평》, 경향신문사, 1995, 5쪽

 

1947년 소록도 갱생원에서 열린 환자와 자녀들 간의 면회식

 

혹시 자녀가 감염될까 보아 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바람을 마주 대하고 섰다.

'미감아'란 '아직은 감염되지 않은 아이'란 뜻이니 '미망인'만큼이나 심한 말이다.

소록도에 격리 수용된 환자들은 갱생원 직원들 앞에 설 때 바람을 맞는 자리에 서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 영구 격리가 중단된 것은 1954년 이후였다.

*출처 : 보건사회부 국립소록도병원,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80년》, 보건복지부, 1996.

 

덕수궁 이태왕 봉고제

 

1919년 2월 9일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일본 신관神官 주재로 일본 왕가의 장례의식인 봉고제가 열렸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궁내성이 주관하는 일본의 국장이었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를 '한국의 국장'으로 바꿔 치렀다.

*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이태왕국장

 

이태왕국장은 일본식과 한국식이 뒤섞인 기묘한 형식으로 치러졌다.

장례 행렬의 앞쪽은 일본 기마경찰대와 군인들의 호위 속에 서양식 예복을 입은 관리들이 이끌었으며,

한국인들은 전통 상복을 입고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일제는 이 같은 형식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이씨 왕조'의 종식을 알리고자 했다.

반면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은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을 확산시키려 애쓰는 한편,

장례식 이틀 전에 3 · 1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옛 신민들의 비통한 마음을 새 시대를 여는 에너지로 삼으려 한 것이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194쪽.

 

1899년의 종로 네거리 보신각 주변

 

사진 왼쪽 구석이 보신각, 그 건너편이 백목전 건물이다.

만민공동회 회장이 된 싸전 상인 현덕호는 이 건물 다락에서 자기보다 윗급인

사농공士農工을 내려다보며 개막 연설을 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Ⅰ. 민족의 심장-정도 600년 서울의 풍물》, 서문당, 1998, 43쪽

 

일제가 '조선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제작, 유포한 사진엽서

 

일제는 '연출'한 장면을 담은 이런 사진엽서들을 다량 배포하여

조선의 '야만성'을 내외에 알리는 데 열중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법치의 이름으로 은밀한 장소에서 더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그깨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1쪽

 

영화 <검사와 여선생> 포스터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제작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에서 주인공은 여선생이다.

그러나 여선생은 주인공임에도 자기가 처한 억울한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의 가혹한 운명을 결정한 이도, 그를 남편 살인범의 처지에서 구해준 이도, 모두 남자들이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는 존재이고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보조일 뿐이라는 인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세 청강생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사진(1918)

 

군복을 입고 칼을 찬 교수들은 순사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검은 제복의 남자들 뒤에 흰 옷을 입고 선 세 여성이 '여의사' 시대를 연 선구자들이다.

*출처 : 사토 고죠佐藤剛藏, 이충효 옮김, 《조선의육사》, 형설출판사, 1993.

 

일제 강점기 국기 게양식

 

근대는 '국가'와 '국민'이 신神을 대체한 시대이기도 하다.

국민은 언제나 '옳고' 국가는 가장 '신성'하다.

국가를 상징하는 물건들도 '신물神物'의 자리를 차지했다.

국가를 '정신을 가진 실체'로 만들려는 시도는 국가의 표식일 뿐인 '국기'를

'경배'와 '서약'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기 소유물의 표식에 경배하는 것은 개념상 모순이다.

*출처 : 목도공립학교 제2회 졸업기념, 1943.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낭송하는 어린이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양상이 전방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총력전'으로 변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국민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제 역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꾸고

학생들이 '황국의 도'를 체득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 임정과 광복》, 서문당, 1996, 160쪽.

 

대한제국기의 술도가

 

마당 가득 술을 만들기 위한 밑밥이 널려 있다.

증류주 한 되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쌀 한 되가 든다.

여기에 시간과 노력, 정성이 더 들어가야 하니 증류주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 말부터 희석식 소주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소주 값은 비쌌다.

희석식 소주 값이 크게 떨어진 것은 1920년대 화학적인 주정酒精 추출법이 개발된 이후였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38쪽

 

 

일제 강점기 주정공장

 

일제는 '연료국책' 방침에 따라 1936년부터 조선에 무수주정 공장을 만들었다.

뒤이어 무수주정 제조시설을 갖추지 않은 소주 공장의 신설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뒤로 '값싼 알코올'이 대량 생산되면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 값이 하락했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된 것이다.

사진은 1940년대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 제주항 근처에 건립하여 운영했던 주정酒精공장.

 

 

1930년대 면사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현재의 광희동, 창신동, 숭인동 일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울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이런 산업과 생활의 산 역사가 도시 재개발 과정에 고려된 적은 없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 임정과 광복》, 서문당, 1996, 109쪽.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경성부영버스와 여차장

 

경성부는 부영버스 운행을 앞두고 12명의 여차장을 모집했는데,

75명이 지원했다. 그중 한국인이 73명이었고 여고보 출신자도 2명이나 되었다.

한국인 여성 취업이 그만큼 어려웠던 실태를 반영한 것이지만,

버스에 대한 '호감'도 작용했다. 그러나 버스의 인기가 급락하면서 '여차장'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출처 : 윤준모, 《한국자동차70년사》, 교통신문사, 1975.

 

 

대한제국 시기의 한의원

 

1882년 혜민서 혁파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한의학 교육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의료 개입이 본격화하자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동제학교가 설립(1906)되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의학은 사설 강습소를 통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한의학 연구와 교육이 체계화한 것은 해방 이후였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36쪽.

 

 

일제 강점기 한의원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통의사들을 식민지 보건 의료 행정의 말단에 배치했다.

양의의 감독 하에 놓인 전통의사는 일본 문명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 비문명'을 상징했다.

 

 

동대문 전차 차고에서 출발하는 전차

 

1899년 5월 20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전차 영업이 개시되었다.

이날 이후 전차는 남대문과 대궐을 제치고 장안의 제일가는 명물로 떠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전차가 공중의 물기를 다 태워버려 날이 가물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71쪽.

 

 

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지켜보는

콜브란 상사의 직원들

 

5월 4일 '신문명의 이기'에 환호한 군중과

5월 26일 '살인기계'를 파괴한 군중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짧은 시차를 두고 같은 기계에 대해 같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례이지만,

이를 '군중이 어리석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출처 : 최인진, 《한국사진사 1631~1945》, 눈빛, 1999, 133쪽.

 

 

의학교 교관 김익남(왼쪽)과 제1회 우등 졸업생 김교준의 군의軍醫 시절

 

우사尤史 김규식의 당숙인 김익남은 대한제국 2등 군의장으로 있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의 동생으로 1962년 제5대 총전교가 된 김교준 역시

대한제국 3등 군의장까지 올랐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출처 : 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 544쪽.

 

 

일제 강점기  개천 축대 밑 아이들의 모습

 

개천 축대 밑에서 국수를 먹는 지게꾼을 넝마 망태를 걸머진 어린아이가 쳐다보고 있다.

조선시대 개천의 다리 밑은 거지들의 소굴이었고, 그래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겼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에는

광교, 수표교 등의 교각에 '살모사', '구렁이' 등의 글자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 역시 거지들이 '땅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출처 : 이돈수 · 이순우, 《꼬레아 꼬레아니-100년 전 서울 주재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대한제국 견문기》, 하늘재, 2009, 238쪽.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1760)

 

영조의 청계천 준설공사 완공을 기념하는 행사를 기록한 4첩 그림.

영조는 홍수피해 방지와 하천 정비를 목적으로 청계천 준설공사를 실시, 1760년에 완공했다.

다리 밑을 차지하지 못한 '거지'들은 이때 준설된 토사를 쌓아둔 가산에 총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발족 직후 여자 경찰대의 사열

 

1946년 7월 1일 군정청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정식으로 설치됐다.

여자 경찰의 창설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예를 따른 것이지만, 여기에는 당대의 여성성으로 읹ㅇ디던

'칝ㄹ가 상냥'을 끌어들여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해보려는 의도도 잇었다.

*출ㅊ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Ⅱ, 1991(6판), 523쪽.

 

 

칼을 휘두르는 식민지 경찰

 

일본은 한국 강점 후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리, 심지어 교사에게도 칼을 차게 했다.

한국인들에게 칼로써 새 통치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3 · 1운동 이후 교사와 일반 관공리의 대검은 폐지했으나 경찰에게는 계속 칼을 차게 했다.

3 · 1운동 당시 여학생의 팔을 자르는 식민지 경찰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신한민보》 1919년 4월 15일.

 

 

우물가에 모여 한담을 나누는 대한제국기의 물장수들

 

급수 구역은 대개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구역마다 물 공급권을 가진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물장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배달 노동자였다.

한 집에서 받는 한 달 치 물값은 성인 남자 하루 품삯과 대략 같았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32~33쪽

 

 

대한제국시기 우물가의 물장수

 

대한수도회사가 서울에 상수도를 준공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물장수들은 1908년 6월 3일 대한수도회사에 급수권 배상을 요구했다.

대한수도회사는 물장수들이 수돗물을 받아 팔도록 했다.

이에 물장수들이 당장 실업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집 마당에 수도꼭지를 설치하는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물장수들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다.

*출처 : Hamilton Angus, Korea(London, 1904).

 

일제 강점기 배제학당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서양식 시간제는

개항 이후 서양 각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한국인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관념은 '시간표'로 표시되었는데,

전차나 기차 등의 운행 시간표, 극장의 공연 시간표, 병원의 진료 시간표, 학교의 수업 시간표 등

여러 시간표들이 24시제를 채택했다.

1890년 배재학당은 '오전 8시 15분'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경복궁 건천궁에 설치되었던 시계탑

 

초기의 시계탑들은 명확히 종탑 모양이었다.

시각을 알리는 것은 먼 옛날부터 권력자의 의무이자 권리였고, 종탑은 그 권력을 상징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계탑이 종탑 모양으로 궁궐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05년경의 한성은행

 

현재의 중구 다동 개천 변에 있었다.

대조선은행 창립 발기인 중 일부는 이 은행 설립에도 관여했다.

민간 보통은행을 표방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귀족의 자금 관리를 도맡아

'귀족은행'으로도 불렸다. 해방 후 조흥은행을 거쳐 현 신한은행으로 이어졌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130쪽.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구호물자를 얻기 위해 몰려든 어린이들

 

전쟁은 본질상 인간다움에 적대적이다.

그러나 '현대전'의 주역들은 전쟁이 인간성 자체를 말살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도주의를 강조한다.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잃어 먹을 것을 구걸하는 고아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것은 '의로운 전쟁'의 표지였다.

 

 

피난민들에게 DDT를 살포하는 UN군

 

DDT 살포가 이미 머리카락에 세례를 받은 남자의 바지춤에 들어가 잇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소년은 DDT가 해로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출처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문관

 

 

대한제국기의 잡화상

 

점포 안과 건물 밖 매대 위에 온갖 상품을 늘어놓고 잇다.

한양상회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보다 규모가 큰 잡화상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현대의 백화점은 이 시절의 '양품洋品 잡화상'에서 출발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옛 그림엽서로 본) 민족의 사진첩 Ⅳ, 개화기의 생활과 풍속》, 서문당, 2007, 91쪽.

 

 

대한제국 시기의 굿판

 

자기들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삼아

'국민'을 창출하려 했던 일제는 신도와 종교적 메커니즘이 비슷한

한국의 기층 종교를 '미신迷信'으로 몰아 집중 탄압했다.

*출처 : 조풍연 해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상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123쪽.

 

 

1955년에 제정된 신생활복

 

제복은 집단성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표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강한 현대인들은 대체로 제복을 기피하며,

마지못해 입더라도 조금이나마 변형시키려 든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공감포토, 사진으로 보는 역사, 역사속의 오늘, 1960년 11월 4일.

 

 

1910년대 YMCA 야구단과 경성고보 야구단의 경기 장면

 

스포츠는 몸을 늘리고 힘을 쓰는 일들을 재미있게 해주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체육활동과 몸에 대한 관심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늘어났지만,

마음에 대한 관심은 대략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들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946쪽.

 

 

1933년 증축된 순화원

 

일제는 한국 강점 직전 지금의 서울 옥인동 언덕에 전염병자 격리 병원인 순화원을 세웠다.

말이 병원이지 수용소에 가까워 일단 이 병원에 수용되면 죽어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더구나 일본 경찰들은 전염병에 예민해서 다른 이유로 아파도 잡아다 순화원에 보내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인들은 집안에 환자가 잇어도 숨기느라 전전긍긍했다.

*출처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 2002, 357쪽.

 

 

 

 

 

posted by 황영찬
2018. 3. 26. 14:1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5 내가 없다

 

 

 

신동완 철학 에세이

2017, 북랩

 

대야도서관

SB121772

 

126

신25ㄴ

 

나는 과연 세상의 중심인가?

 

"문명은 믿어서 생긴 지식과

의심해서 얻어진 지식의 투쟁이다."

 

"미래 인간의 생존은 기술의 발전이 아닌

개념의 변화에 좌우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으며, 실체도 없고 영혼도 없다

오직 이 같은 뼈아픈 인식에서 출발해야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

 

현대인들이 굳게 믿어온 가치를 망설임 없이 전복시킨

한 젊은 철학자의 비판적인 사유 실험

 

이 책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나'라고 인식하는 자의식 자체는 뉴런의 연결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능일 뿐이며, 우리가 '영혼'이라고 믿는 특별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 없이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저자는 인간 문명이 믿어온 모든 허구들을 지적한다. 신, 생명, 민족, 사랑, 자유 등은 사실 대단하지 않으며, 대단하다고 믿게 만듦으로써 이익을 얻는 어떤 집단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5억 인구가 믿고 있는 상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거기서 변화가 시작된다.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의 당연하지 않음, 그 비판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염세적인 듯하지만 깊은 희망을 보여주려는 몸부림으로 읽히는 저자의 주장은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주리라.                                                         -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노재성

 

신동완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서울가톨릭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의 사랑에 실망하고 중퇴하였다. 경희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 전문가인 척하는 종교가 인간의 아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지 않고 그 원인과 대안을 찾는 연구를 지속하였다. 40여 개국을 여행하며 각 나라의 문화와 행복한 삶의 형태를 연구하였다. ‘행복연구소’를 설립하고 인간 문명 속의 편견과 허구를 고발하는 저술 작업을 하고 있으며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구원에 대한 진전된 연구결과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차례

 

머리글

추천의 글


제1장 허구 탐구

개념이라는 허구

생명이라는 허구

자아라는 허구

민족이라는 허구

신이라는 허구

인식이라는 허구

사랑이라는 허구

예술이라는 허구

문명이라는 허구

돈이라는 허구

자유라는 허구

도덕이라는 허구


제2장 그 외의 허구들

결혼

보수와 진보


제3장 허구를 지탱하는 원인

인간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믿어서 생긴 지식과 의심해서 얻은 지식

신념과 신념의 충돌

철학은 용기이다


제4장 허구를 넘어서

동물과 인간

죄 없는 세상

고통 없는 세상

외로움 없는 세상

죽을 수 있는 권리

행복한 세상


제5장 새로운 인류

진화란 단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이유이다

존재의 허술함에 대하여

다중의식, 모두를 위한 하나의 자아


마치는 글

용어설명

 

1

CHAPTER

 

허구

탐구

 

인간 문명의 적은 허구와 상상에 의한 거짓된 믿음 체계이며 그것은 특히 종교와 민족이다. 종교와 민족이 인간 생활에서 유용한 면이 잇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삶을 위로하고 연대감과 소속의식을 갖게 하며 경쟁을 촉진시키고 관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잇었다. 그러나 허구에 의한 거짓된 믿음 체계에서 위로 받을 생각을 접어야 문명이 제 기능을 찾아갈 것이다.

 

개념이라는

허구

 

개념은 늘 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하나의 개념을 얘기한다. 사랑에 대한 개념은 지구의 인구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 말이 있다고 해서 그 말에 해당하는 실체가 잇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생명이라는

허구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 준다. 원시지구에 유기물이 생긴다. 그러다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불현듯 신비한 작용에 의해 작은 생물이 생기게 된다. 정말 생명은 그렇게 신비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된 것일까? 초기에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이 생명 아닌 것에 비해 대단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의견을 낼 수 있다.

 

자아라는

허구

 

생명이 무생물과 다르지 않은 기계라면 인간 역시 기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나'라는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심한 철학적 오류인 것 같다. 단지 책상 속에서나 생각할 만한 쓸데 없는 사색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생명을 가진 자아가 허상일 수도 있을까?

 

민족이라는

허구

 

오천 년 역사와 단일민족 국가라는 자부심을 되새기다 보면 갈라진 국토를 통일하고 민족을 부흥시켜야겠다는 애국심이 솟아오른다. 일제의 침략을 경험했기에 이 한몸 바쳐서라도 민족을 지켜 내야겠다는 결심 또한 뜨겁다. 이런 애국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신이라는

허구

 

신은 철학에서 부정되었다. 신은 과학에서도 부정되었다. 신을 믿는 자아는 그 실체도 없는 하나의 기능일 뿐이다. 문명의 세계에서 신은 설 자리가 없어야 되지만 오히려 가장 번성하고 있다. 신은 누구인가?

 

인식이라는

허구

 

인간의 인식은 불완전하다. 감각기관이 다양하지 못하며, 그 다양하지 못한 감각기관의 기능마저 매우 불완전하다. 또한 불완전한 감각기관을 이해하는 뇌의 기능도 불완전하며, 이를 사고하고 전달하는 인간 언어도 대단히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존해 왔다.

 

사랑이라는

허구

 

사랑의 개념은 다의적이다. 무심코 사랑을 얘기하면서 문명을 파괴하는 독소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은 내가 살고 함께 살고자 하는 것이다. 분열과 복수, 파멸을 말하는 것은 사람일 수 없다.

 

예술이라는

허구

 

예술은 즐기는 것이다. 예술행위와 작품에서 존재의 심연 같은 가능하지 않은 허구의 세상을 추구한다면 미신이 될 것이다.

 

문명이라는

허구

 

문명은 인간의 자랑이다. 문명은 인간의 희망이고 미래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함께해서는 안 될 야만적 미신들이 가득 차 있다. 인류가 사실상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미신들을 깨뜨리려면 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돈이라는

허구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왜 그들이 돈을 더 가져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왜 특정한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는가?

 

자유라는

허구

 

인간은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는 치명적 한계를 가지고 잇다. 자유란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허구

 

도덕은 필요하지만 인간의 행복을 억압한다. 도덕이 만들어진 역사와 배경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새로운 도덕의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 그 기준은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2

CHAPTER

 

그 외의

허구

 

결혼에 대해서 신화를 걷어 내는 것은 행복의 작은 출발이다. 결혼이 불행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결혼이 너무 큰일이기 때문이다.

 

결혼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 결혼 생활의 불행을 초래한다. 결혼은 작은 것이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분열은 심각하다. 그러나 현재의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으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의 유권자들과 미래세대를 위한 보수와 진보의 기준이 새롭게 제시되어야 한다.

 

3

CHAPTER

 

허구를 지탱하는

원인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를 위협하는 진실과 증거는 필요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밝혀진 범위 내에서 인정하고, 밝혀야 할 것을 질문하고, 잘못된 근거들을 내던지고 새로운 근거를 쌓아가는 것이 철학일 것이다.

 

인간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인간은 진보를 이루었지만 진보의 결과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은 더 많은 정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밝혀진 진실들을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온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고 내 믿음과 다른 것을 진실이라는 이유로 믿는 것이다.

 

믿어서 생긴 지식과

의심해서 얻은 지식

 

의심해서 얻은 지식만이 지식일 뿐이다.

 

신념과

신념의 충돌

 

믿음에 근거한 신념들의 충돌을 멈춰야 한다.

 

철학은

용기이다

 

인간이 자부심 많은 문명과 더불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허구와 미신에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은 묻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하지 않기 때문이다.

 

4

CHAPTER

 

허구를

넘어서

 

짧은 시간의 삶이기에 그 무엇보다 행복이 가치가 더 필요한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행복감을 뒤로하고서라도 불편한 진실과 마주 서는 것이 질문하는 인간이 택해야 할 책임일 것이라 생각한다. 거기에서 자연의 진화가 멈추고 진화의 산물인 인간이 진화를 조정하고 설계하는 새로운 창조가 열리게 될 것이다.

 

동물과

인간

 

동물은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낀다. 그런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다른 것이 아니다. 진화는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오직 인간만이 진화의 잔혹함을 바로잡을 수 잇고 인간에게만 그런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죄 없는

세상

 

죄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미래에 인간의 혁명은 기술보다는 개념의 변화에서 올 것이다. 죄는 관리되고 치료해야 할 질병이다.

 

고통 없는

세상

 

고통은 인류의 진화과정에 필요했지만 인간이 계속 가지고 갈 필요가 없는 기능임에 틀림없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외로움 없는

세상

 

인간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정신과 전문의의 목표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죽을 수 있는

권리

 

삶에 대한 권리가 중요하듯이 죽음에 대한 권리도 중요하다.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문화는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죽음을 처참한 환경으로 내몰아 간다. 인간은 존엄하고 쾌락한 죽음을 맞을 권리가 있다.

 

행복한 세상

 

행복이 중요하지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행복한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

 

5

CHAPTER

 

새로운

인류

 

너와 나와 그들이 벽을 허물고 공동의 행복을 추구할 미래를 먼저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나'와 '너'라는 닫힌계에서 나와, 인간의 미래인 열린계의 플랫폼에서 하나되는 확장성을 경험한다.

 

진화란 단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이유이다

 

진화는 단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이유이다. 진화는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게 적용되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사후적 설명이다.

 

존재의 허술함에

대하여

 

아름다운 생명과 사랑스런 인간을 분석하고 파헤쳐서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신비감을 없애고 그 허술함을 보는 심정은 안타까울 것이다.

 

다중의식,

모두를 위한

하나의 자아

 

닫힌계에 있던 인간들이 과학의 발전으로 열린계를 형성해 하나의 의식으로 뭉치는 것이 다중의식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8. 3. 16. 12:21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4 맛과 멋, 풍경이 있는 숨은 골목 즐기기

 

 

 

· 사진 이경택

2004, 성하출판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1116

 

981.102

이146숨

 

<문화일보> 이경택 기자의 서울 골목기행

도심의 골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점심때면 넥타이 부대가 몰리는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이나, 삼각지 대구 매운탕골목으로부터 정도 500년 한양의 풍모를 아직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북촌의 한옥골목, 그리고 서울 한가운데 그런 시골풍경이 있으리라곤 도저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법한 은평구 진관외동이나 성북구 정릉천변의 시골길, 또 언제부터인지 외국인이 거주하기 시작하며 형성된 외국인촌의 이국적인 거리 등 다종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이 분명히 있다.

 

스피드와 규격을 중요시하는 디지털시대에 그 골목들은 아직도 목소리와 인정을 고집하는 아날로그시대에 멈춰있었다.

 

문화일보 여행 · 레저 기자 이경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경향신문, 스포츠조선을 거쳐

현재 문화일보 문화부에서

여행 · 레저 담당기자로 일하고 있다.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2002년 관광진흥유공자로 문화관광부 장관상 표창.

저서 우리땅 우리맛(2003년, 역사넷 출판사)

 

차례

 

*을 찾아서

푸짐한 인심에 '배 속까지 두둑' - 마포 공덕동시장의 족발골목

명절이 반가운 '떡 맛 지킴이' 텃밭 - 낙원동 떡집골목

얼큰 매콤 갈치조림 '입맛 당기네' - 남대문시장 갈치골목

빌딩 숲 뒤에 숨은 '정겨운 식당' - 명동 계란말이골목

이열치열 화끈한 '군인의 맛' - 삼각지 대구탕골목

늦가을 퇴근길에 '소주 한잔' - 응암동 감자국골목

기찻길 옆 선술집 '발길이 절로' - 창전동 소금구이

연탄 화덕 위엔 '인정이 지글지글' - 황학동 곱창구이 포장마차촌

노릿노릿한 생선구이에 '밥 한 공기 뚝딱' - 동대문 생선구이골목

맥주 마시는 '오동통 골뱅이' - 을지로3가 골뱅이골목

 

*을 찾아서

인연의 소중함을 실감케 한다 - 남윤철 씨 한옥살이

떡살, 절구, 조선시대와 만난다 - 답십리 고미술상가

춘사 나운규의 추억이 서린 곳 - 돈암동 아리랑고개

전통문화와 와인의 결합은 참으로 걸작 - 삼청동 박물관거리

숱한 역사가 숨 쉬는 잊혀진 길 - 종묘 돌담 옆 순라길

100년 묵은 유럽가구 속을 거닌다 - 이태원 앤티크 거리

더는 부촌이 아니다 - 평창동

허름한 담장에 수놓은 실험적 벽화 - 홍대 앞 주차장 골목

 

*풍경을 찾아서

갈 곳을 잃은 사람들 - 동대문 풍물시장

리틀 명동 - 성신여대 앞길

안빈낙도 - 농사꾼 윤경섭 씨 부부

서울 속의 시골살이 - 정릉천변 오태갑 씨 마을

불안한 미래? 궁금하잖아요 - 이대 앞 사주카페거리

서울의 이방 - 외국인 마을

                     이촌동 일본인 마을

                     연희 · 연남동 차이나타운

 

 

을 찾아서

 

늦가을,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찡하니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날엔 왜 걸쭉한 감자탕에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뜨거운 불에 구수한 향을 내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자탕을

보고 잇으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질 것만 같다.

 

푸짐한 인심에 '배 속까지 두둑' - 마포 공덕동시장의 족발골목

지하철 이용 시 5호선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와 만리재고갯길에서 약 50여 미터.

 

명절이 반가운 '떡 맛 지킴이' 텃밭 - 낙원동 떡집골목

지하철 이용 시 5호선 종로3가역 4, 5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1~2분.

 

얼큰 매콤 갈치조림 '입맛 당기네' - 남대문시장 갈치골목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회현역에서 숭례문수입상가 방면으로 좌회전해서 10미터.

 

빌딩 숲 뒤에 숨은 '정겨운 식당' - 명동 계란말이골목

지하철 이용 시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을리조3가 방향으로 약 100미터.

 

이열치열 화끈한 '군인의 맛' - 삼각지 대구탕골목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삼각지역 1번 출구나 6호선 삼각지역 13번 출구로 나와 우리은행 첫번째 골목.

 

늦가을 퇴근길에 '소주 한잔' - 응암동 감자국골목

지하철 이용 시 6호선 새절역 1, 2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8분.

 

기찻길 옆 선술집 '발길이 절로' - 창전동 소금구이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신촌역 8번 출구로 나와 동교동 방향으로 500여 미터 걸어 창전동 삼거리까지 간다. 삼거리에서 왼쪽 홍익대 방향으로 2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보이는 산울림소극장 건너 골목.

 

연탄 화덕 위엔 '인정이 지글지글' - 황학동 곱창구이 포장마차촌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신당역 2번 출구로 나와 중앙시장을 가로질러가야 한다.

 

노릿노릿한 생선구이에 '밥 한 공기 뚝딱' - 동대문 생선구이골목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동대문역 9번 출구로 나와 종로5가 방면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대학천상가가 있다. 그 앞에서 100여 미터.

 

맥주 마시는 '오동통 골뱅이' - 을지로3가 골뱅이골목

지하철 이용 시 을지로3가역에서 12번 출구로 나와 10여 미터 직진.

 

을 찾아서

 

언제부터인가 그 거리에 젊은 부부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리타분한 골동품만 가득한 그 거리를

첨단컴퓨터로 상징되는 빠름의 미학에 길든

신세대들까지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연의 소중함을 실감케 한다 - 남윤철 씨 한옥살이

지하철 이용 시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우츨 길로 올라간다. 2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북촌문화센터가 있다. 가회동 한옥마을 관람은 이 문화센터를 중심으로 왼쪽 가회동 31번지 한옥마을과 오른쪽 가회동 11번지 한옥마을로 나뉜다. 31번지는 재동초등학교 위쪽에 있는 가회동성당 옆길로, 11번지는 북촌문화센터에서 나와 오른쪽 창덕궁 길로 올라간다.

 

떡살, 절구, 조선시대와 만난다 - 답십리 고미술상가

지하철 이용 시에는 2호선 답십리역 2번 출구.

 

춘사 나운규의 추억이 서린 곳 - 돈암동 아리랑고개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4번 출구 또는 7번 출구로 나와 정릉 방향으로 걸어 가면 된다. 도보로 10분.

 

전통문화와 와인의 결합은 참으로 걸작 - 삼청동 박물관거리

지하철 이용 시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 사거리까지 간 후 우측 대로변에 난 삼청동길로 들어서면 있다.

 

숱한 역사가 숨 쉬는 잊혀진 길 - 종묘 돌담 옆 순라길

지하철 이용 시 안국역 3호선 4번 출구로 나와 창덕궁 방향으로 직진. 종묘 시민광장을 지나서 순라길 표지판 앞.

 

100년 묵은 유럽가구 속을 거닌다 - 이태원 앤티크 거리

지하철 이용 시 6호선 이태원역 4번 출구에서 나와 보광동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더는 부촌이 아니다 - 평창동

지하철 이용 시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직진.

 

허름한 담장에 수놓은 실험적 벽화 - 홍대 앞 주차장 골목

지하철 이용 시 홍대입구역에서 홍대 방향으로 나와 서교호텔을 지나면 주차장 골목이 모습을 보인다.

 

풍경을 찾아서

 

아니, 아직도 서울에 이런 마을이 있다니,

녹음이 우거진 산자락을 따라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고,

마을 고샅길에는 감나무, 대추나무가 담장 덩굴을 이루고 있다.

또 집집마다 앞뜰, 뒤뜰 가릴 것 없이 모두 채마밭을 가꾸고 있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 - 동대문 풍물시장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도보로 3, 4분.

 

리틀 명동 - 성신여대 앞길

지하철 이용 시 성신여대입구역 1번 출구.

 

안빈낙도 - 농사꾼 윤경섭 씨 부부

승용차 이용 시 연신내 사거리에서 우회전, 기자촌을 지나 첫째 사거리에서 진관사 쪽으로 들어간다.

 

서울 속의 시골살이 - 정릉천변 오태갑 씨 마을

승용차 이용 시 국민대학교 정문에서 길음역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정등천주교회 옆길인 솔샘길로 좌회전, 언덕길을 오른 후 첫 번째 터널을 지나 또 한 번 좌회전한다.

 

불안한 미래? 궁금하잖아요 - 이대 앞 사주카페거리

지하철 이용 시 이대입구역에서 이대방향으로 나와 이대 정문 앞.

 

서울의 이방 - 외국인 마을

                     이촌동 일본인 마을

                     지하철 이용 시 4호선 이촌역 3, 4번 출구로 나와 아파트를 가로질러 동부 이촌동 대

                     로 앞.

                     연희 · 연남동 차이나타운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로 나와 연희교차로 방면으로 걸어간다.

              을지로 6가 중앙아시아촌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12번 출구로 나오면 곧바로 중앙아시아촌인

                     벌우물길로 들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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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 도착하지 않은 삶  (0) 2018.02.23
posted by 황영찬

2018-013 두근두근 중구산책

 

 

 

중구 · 박성애 지음

2013, 알에이치코리아

 

대야도서관

SB089857

 

981.1602

중16ㄷ

 

중구에서 찾은 매력 만점 산책 코스 16

 

동네 한 바퀴 시리즈 5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중구!

구석구석을 걸으며 행복을 느끼는

중구 산책 코스 올가이드

 

때로는 천천히 도시를 거날어 보자 PART 01 - SLOW CITY

서울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PART 02 - CENTER OF SEOUL

오감만족! 특별한 산책을 시작하자 PART 03 - SHOPPING STREET

잊고 있던 추억을 찾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다 PART 04 - MEMORY BOX

 

서울의 중심에

우리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새로 만들어질 이야기들도 가득하다.

천천히 걸으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리고,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테니 우리는

그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박성애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오다가 훌쩍 떠난 1년 간의 호주여행에서 ‘무조건 즐겁게 살자!’라는 큰 결심을 안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틈틈이 걷고, 먹고, 찍는다. 강인한 체력이 가장 큰 자랑이다. 덕분에 아무리 걸어도 쉽게 지지치 않아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즐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일상 여행가.

 

목차

 

작가의 말
중구산책 활용하기


PART 01. SLOW CITY
때로는 천천히 도시를 거닐어 보자


정겹고 소담스러운 길 덕수궁
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정동
자유를 향해 달리다 서울역 일대
빌딩 숲 산책 시청 일대
INTERVIEW 유림면 염숙환 사장님과 쫄깃한 인터뷰


PART 02. CENTER OF SEOUL
서울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서울의 배꼽을 찾아서 남산
산 아래 이야기 보따리 남산 아래
발걸음이 머무는 장충동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자 동국대학교
INTERVIEW 동국대학교 한승윤 학생과 톡톡 튀는 인터뷰


PART 03. SHOPPING STREET
오감만족! 특별한 산책을 시작하자


언제나 활기차고 반짝이는 명동
시장 1번지 남대문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동대문
무엇이든 찾아보세요 을지로
INTERVIEW 정혜옥, 복민규 관광안내 도우미와 친절한 인터뷰


PART 04. MEMORY BOX
잊고 있던 추억을 찾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다


추억 한 컷 충무로
물길 따라 찾는 마음의 휴식 청계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회현동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황학동 & 신당동
INTERVIEW 김보성 오!재미동 프로그래머와 매력적인 인터뷰

테마로 만나는 중구 산책길

 

정겹고 소담스러운 길

덕수궁

 

산책코스         덕수궁 - 약 600m. 15분 - 구세군중앙회관 - 약 600m. 15분 - 대한성공회서울대성

                       당

찾아가는 법     지하철 :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

                        버스 : 101, 150, 402, 405, 501, 506, 1711번 탑승 후 서울신문사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성당이나 건물을 둘러볼 때는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 미국대사관저, 영국대사관 등은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사랑의 말을 타고 달릴 때에는

어떤 길도 멀지가 않다.

- 독일 속담

 

아련한 그 이름

덕수궁

 

Address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Tel 02-771-9955 Open 09:00~21:00(20:00 입장마감) Close 매주 월요일 Fee 1000원 Web www.deoksugung.go.kr

 

궁궐에서 즐기는 문화 산책 덕수궁 미술관

이별의 아이콘 덕수궁 돌담길

암호를 말하라! 왕궁수문장교대의식

 

빨간 자선냄비의 집

구세군중앙회관

 

Address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130 Tel 02-6364-4086 Open 11:00~16:00 Close 매주 토 · 일요일(미리 연락하면 관람 가능)

 

100년의 전통 서울덕수초등학교

대한민국 도로의 중심 도로원표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곳

대한성공회서울대성당

 

Address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21길 15 Tel 02-730-6611 Open 월~토요일 11:00~16:00(대성당 투어) Web www.cathedral.or.kr

 

금융의 역사를 한눈에 한국금융사박물관

 

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정동

 

산책코스         서울시립미술관 - 약 180m. 5분 - 정동제일교회 - 약 100m. 2분 - 중명전 - 약

                       350m, 8분 - (옛)러시아 공사관

찾아가는 법     지하철 : 1호선 시청역 2번 출구, 2호선 시청역 9, 12번 출구

                        버스 : 101, 171, 472, 600, 602, 603, 7019번 탑승 후 서소문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심슨기념관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도 있으니 정숙하도록 하자.

                        ●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곳이 많으니 미리 근대사 공부를 하고 가면 더욱 알찬 산책

                            이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

- 바이런

 

문화충전

서울시립미술관

 

Address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61 Tel 02-2124-8800 Open 10:00~20:00 Close 매주 월요일  Web sema.seoul.go.kr

 

신교육에 눈을 뜨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조그만 그 교회당

정동제일교회

 

Address 서울시 중구 정동길 46 Tel 02-753-0001~3  Web chungdong.org

 

정동극장에서 열리는 한국 전통 뮤지컬 미소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Address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Tel 02-732-7524 Open 10:00~17:00 Close 매주 월요일, 설날 · 추석 당일 Fee 무료 Web www.deoksugung.go.kr

 

그윽한 커피 향 가득 전광수 coffee house

 

덩그러니

(옛) 러시아 공사관

 

Where 이화여고 맞은편 예원학교 담을 따라 올라간다.

 

다 같이 돌자 정동貞洞 한 바퀴! 다정한 도보답사

여성교육의 불씨를 피우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자유를 향해 달리다

서울역 일대

 

산책코스         문화역 284 - 약 500m. 7분 - 서소문공원 - 약 150m. 2분 - 약현성당 - 약

                       400m, 5분 - 손기정체육공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1 · 4호선, 공항철도 서울역 2번 출구

                        버스 : 103, 163, 702A, 702B, 505, 506, 603, 405, 202, 421, 500, 7011, 7017,

                                  7021, 7022, 7019, 8000번 탑승 후 서울역환승센터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문화역 284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는 일정을 미리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 언덕길이 있으니 편한 신발을 신도록 하자.

 

조국 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 손기정

 

새로 태어난 서울역

 

문화역 284

 

 

Address 서울시 중구 통일로 1번지 Tel 02-3407-3500 Open 10:00~19:00(18:00 입장마감) Close 매주 월요일, 설날 · 추석 당일 Fee 무료 Web seoul284.org

 

기찻길 옆

 

서소문공원

 

내 발에 딱 구두거리

향긋한 꽃향기 가득 서소문 꽃 도매시장

 

 

언덕 위 예쁜 성당

약현성당

 

Address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Tel 02-392-5018 Web www.yakhyeon.or.kr

 

천주교의 역사를 한눈에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영웅을 만나다

 

손기정 체육공원

 

 

Address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101 Tel 02-364-1936 Open 10:00~18:00(17:00 입장마감) Close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 날) · 1월 1일 · 설날 · 추석  Fee 무료 Web www.sonkeechung.com

 

 빌딩 숲 산책

시청 일대

 

산책코스         시청 앞 서울광장 - 약 600m. 15분 - 을지로1, 2가 - 약 200m. 5분 - 을지한빛거리

찾아가는 법     지하철 : 1 · 2호선 시청역 5번 출구

                        버스 : 172, 472, 504번 탑승 후 을지로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101, 150, 402, 405, 501, 506번 탑승 후 서울신문사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서울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려면 회원 가입을 위한 신분증이 꼭 필요하다.

                        ● 도서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 있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 카우퍼

 

서울 시민의 놀이터

시청 앞 서울광장

 

황제의 이름으로 환구단(원구단)

 

빌딩 숲 사이사이

을지로1, 2가

 

최초의 은행 건물 광통관

 

빛의 거리

을지한빛거리

 

디지털 놀이터 한빛미디어갤러리

통일의 꿈 베를린광장

 

서울의 배꼽을 찾아서

남산

 

산책코스         남산공원 - 약 600m. 15분 - 안중근의사기념관 - 약 200m. 5분 - 서울성곽길 남산

                       코스 - 약 800m, 30분 - 남산 정상

 

찾아가는 법     지하철 : 4호선 회현역 4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약 300m 이동, 언덕 끝에 남산공원

                        입구

                        버스 : 104, 105, 263, 421, 503, 505, 507, 604, 7011, 7013번 탑승 후 남대문시

                        장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남산 초입에는 그늘이 없으니 여름이라면 모자를 준비는 것이 좋다.

                        ● 물은 미리 챙겨 가는 것이 좋다.

                        ● 구두는 금물! 낮고 편한 신발을 신도록 하자.

 

그대는 말이 없네

흘러가듯 시간은 여기에

일 년을 함께 하고

555일째 되던 날

다시 찾아온 여기 이 남산은

우리 둘만의 향기로

오롯이 가득찼네

- 더필름 남산 세레나데 中

 

산의 문턱

남산공원

 

남산 정상까지 3분! 남산케이블카

 

애국심이 불끈

안중근의사기념관

 

Address 서울시 중구 소월로 91 Tel 02-3789-1026 Open 하절기 10:00~18:00(17:00 입장마감), 동절기 10:00~17:00(16:00 입장마감) Close 매주 월요일 · 1월 1일 · 설날 · 추석  Fee 무료 Web www.ahnjunggeun.or.kr

 

지구촌 문화가 한자리에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

 

땀이 송골송골

서울성곽길 남산 코스

 

서울이 한눈에 잠두봉 아일랜드

 

서울의 배꼽

남산 정상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봉수대 봉화의식 & 전통문화 공연

 

산 아래 이야기 보따리

남산 아래

 

 

산책코스         남산골한옥마을 - 약 300m. 5분 -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 - 약 900m. 15분 - 서울에

                        니메이션센터

찾아가는 법     지하철 : 3 · 4호선 충무로역 3, 4번 출구 사이 골목 끝에 남산골한옥마을 정문이 있

                        다.

                        버스 : 104, 105, 263, 421, 507, 604, 7011번 탑승 후 퇴계로3가 한옥마을한국의집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남산골한옥마을은 주말에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니 홈페이지를 참고하자.

                        ● 산책코스에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으니 산책 시간을 넉넉히 잡는 것

                            이 좋다.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는 것!

그것은 게으름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그것은 풍요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 토마스 제퍼슨

 

산의 문턱

남산골한옥마을

 

Address 서울시 중구 퇴계로34길 28 Tel 02-2266-6923 Open 하절기 09:00~21:00, 동절기 09:00~20:00 Close 매주 화요일 Fee 무료 Web http://hanokmaeul.seoul.go.kr

 

덩기덕 쿵덕 남산국악당

 

1000년의 서울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

 

여유 그 자체 퇴계로26가길

 

추억이 방울방울

서울애니메이션센터

 

Address 서울시 중구 소파로 126 Tel 02-3455-8341 02-3455-8330(도서정보실) 02-3455-8335(영상정보실) Open 09:00~18:00(도서관 17:45) Close 매주 월요일 · 법정공휴일 Fee 무료 Web www.ani.seoul.kr

 

한 땀 한 땀 정성 가득 초전섬유 · 퀼트박물관

 

발걸음이 머무는

장충동

 

산책코스         서울성곽길 남산코스(1코스) - 약 1.5km. 40분 - 국립극장 - 약 600m. 10분 - 장충

                       단공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3 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200m 직진 후 오른쪽 언덕 위에서 성곽

                        길 계단이 시작된다.

                        버스 : 144, 301, 407, 7212번 탑승 후 장충체육관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장충동 서울성곽길은 서울신라호텔, 서울클럽, 민주평통부지를 지나는 길이므로

                            조용히 이용해야 한다.

                        ● 성곽길 중간에 샛길들이 있으니 짧은 산책을 원한다면 샛길을 이용하자.

 

나는 매우 일찍 인생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는 인생이 나를 위해 특별한 것을 해줄 거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은 내가 찾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낫다.

- 오드리 햅번

 

과거와 현재 사이

서울성곽길 남산코스(1코스)

 

걸으며 공부하기 성곽길 걷기 및 생태탐방 프로그램

 

남산을 배경으로 예술의 향기가

국립극장

 

Address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59 Tel 02-2280-4114 Web www.ntok.go.kr

 

공연 자료의 모든 것 공연예술박물관

발걸음이 자꾸 멈추는 장충단길

 

머물고 싶은

장충단공원

 

차 한잔의 여유 다담에뜰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자

동국대학교

 

 산책코스        동국대학교 박물관 - 약 150m. 5분 - 정각원 - 약 100m. 3분 - 팔정도

찾아가는 법     지하철 : 3 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간다.

                        버스 : 144, 301, 407, 420, 7212번 탑승 후 장충동 동국대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건물을 오를 때는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숙!

                        ● 학교 내부에 남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으니 산책길에 참고하자.

 

모든 이들이

낮잠을 자는 것은

가을 달 때문

- 마쓰모토 데이토구(하이쿠 시인)

 

불교 유물이 한자리에

동국대학교 박물관

 

Where 혜화문에서 첫 번째 건물 Tel 02-2260-3721 Open 10:00~16:00 Close 매주 토요일  일요일 · 법정공휴일 Fee 무료

 

예술무대 이해랑예술극장

 

경희궁 숭정전

정각원

 

남산 아래 하늘마루

 

여덟 가지 진리

팔정도

 

언제나 활기차고 반짝이는

명동

 

산책코스        명동 거리 - 약 600m. 10분 - 명동성당 - 약 500m. 7분 - 롯데백화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4 호선 명동역 6, 7번 출구

                        버스 : 104, 105, 263, 421, 507, 604, 7011번 탑승 후 명동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명동 거리는 큰길 외에 작은 골목에도 상점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으니 구석구

                        석 둘러보자.

                        ● 대부분의 상점들이 밤 10시를 전후로 문을 닫으니 쇼핑에 참고하자.

                        ● 롯데백화점에 먼저 가길 원한다면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7번 출구를 이용

                         하는 것이 좋다.

 

명동거리 수많은 연인들 누굴 약 올리나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 크라잉넛 명동콜링 中

 

브랜드 집합소

명동 거리

 

외국인 친구와 함께라면 서울글로벌문화관광센터

어깨가 들썩들썩 난타전용관

 

뾰죽집

명동성당

 

Address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Where 명동예술극장 사거리에서 약 200m Tel 02-774-1784 Web www.mdsd.or.kr

 

옛 명성 그대로 명동예술극장

 

아트 쇼핑

롯데백화점

 

화폐의 모든 것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시장 1번지

남대문

 

 산책코스        남대문시장 - 약 300m. 5분 - 숭례문 - 약 500m. 7분 - 신세계백화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4 호선 회현역 5번 출구

                        버스 : 104, 105, 503, 505, 507, 604, 7011, 7013번 탑승 후 남대문시장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남대문시장은 골목과 상가마다 많은 점포(약 1만 개)가 있으니 원하는 물건을 사

                        기 위해서는 관광안내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 남대문시장의 상가들은 대부분 오후 5시를 전후로 문을 닫으니 쇼핑에 참고하

                        자.

                        ● 신세계백화점에 먼저 들를 계획이라면 지하철 4호선 회현역 7번 출구를 이용하

                         는 것이 좋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 조지 산타야나

 

골라골라

남대문시장

 

한민족의 자존심

숭례문(남대문)

 

최고의 시설

신세계백화점

 

작은 네모 속 큰 세상 우표박물관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동대문

 

산책코스        평화시장 - 약 700m. 15분 - 동대문 패션타운 - 약 300m. 5분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1 호선 종로5가역 6번 출구, 1 · 4호선 동대문역 8번 출구, 2 · 4 · 5호선 동

                        대문역사문화공원역 12번 출구

                        버스 : 163번 탑승 후 청계6가 평화시장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쪽에 있는 쇼핑몰들은 대부분 도매시장으로 소매 거래는 불

                        가능한 곳도 있다.

 

거릴 가득 메운 사람의 물결은

잠든 이 거리를 깨어나게 하고

오늘 같은 밤이면 낯선 사람마저

친구가 돼줄 것만 같아

- 소울라이츠 도시의 밤 中

 

패션 쇼핑몰의 원조

평화시장

 

종이향 가득 청계천 헌책방 거리

 

유행의 중심

동대문 패션타운

 

동대문 속 세계여행 중앙아시아촌

 

옛것을 회상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작은 문 광희문

 

무엇이든 찾아보세요

을지로

 

산책코스        을지로3, 4가 - 약 800m. 20분 - 방산시장 - 약 300m. 5분 - 중부시장

찾아가는 법     지하철 : 2 · 3 호선 을지로3가역 5, 6번 출구

                        버스 : 100, 105, 152, 202, 261, 500번 탑승 후 을지로3가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을지로3, 4가는 골목마다 다양한 상점들이 잇으니 직선으로 걷는 것보다 골목 사

                        이사이를 오가며 걷는 것이 더 재미있다.

                        ● 방산시장과 중부시장을 먼저 갈 계획이라면 지하철 2, 5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은 지금이다.

행복을 즐겨야 할 장소는 여기다.

- 로버트 인젠솔

 

만물상

을지로3, 4가

 

또 하나의 을지로 을지로지하상가

 

포장천국

방산시장

 

장군 신앙을 엿보다 성제묘

 

짭조름한

중부시장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죽 한 그릇

 

추억 한 컷

충무로

 

산책코스        오!재미동(충무로역) - 약 70m. 2분 - 인현시장 - 인쇄거리

찾아가는 법     지하철 : 3 · 4호선 충무로역 8번 출구 KB국민은행 옆 골목으로 약 70m 직진하면 인

                       현시장 입구가 나온다.

                        버스 : 104, 105, 263, 421, 507, 6047011번 탑승 후 대한극장 앞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오!재미동은 충무로 역사 내에 있다.

                        ● 인쇄거리는 충무로 전체에 걸쳐 잇어 거리로 표시하지 않았다.

                        ● 종이를 나르는 오토바이들이 많이 다니니 보행에 주의하자.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

 

독립영화의 천국

오!재미동

 

Address 서울시 중구 퇴계로 지하 119 Where 충무로 역사 내 Tel 02-777-0421 Open 11:00~20:00 Close 매주 일요일 · 법정공휴일  Fee 아카이브, 갤러리, 상영관은 무료, 그 외의 시설들은 소정의 대여료 지급 Web www.ohzemidong.co.kr

 

멍멍멍 애완견 거리 & 부릉부릉 오토바이 거리

 

가느다란 골목 시장

인현시장

 

장군의 고향 이순신 생가 터

 

종이 냄새 가득

인쇄거리

 

물길 따라 찾는 마음의 휴식

청계천

 

산책코스        청계광장/청계천 - 약 4km. 2시간 - 황학교

찾아가는 법     지하철 : 5 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버스 : 101, 150, 405, 420, 501, 506, 1711, 7016번 탑승 후 서울신문사 정류장에서

                        하차 163번은 청계천변을 따라 운행

Memo             ● 비가 오면 출입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다. 갑자기 많은 비가 오면 다리 밑 수문이

                        열릴 수 있으니 다리 밑으로 피하지 말고 하천 밖으로 빨리 나와야 한다.

                        ● 청계광장에서 중구에 속해 있는 황학교까지만 거리를 표시했다.

                        ● 청계천은 길이가 긴 만큼 원하는 구간을 미리 정해 놓고 산책을 즐기길 권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추억을

저에게도 나누어주세요.

- 영화 '러브레터' 中

 

여유가 흐르는

청계천

 

빛의 이야기 디지털 캔버스

빛의 정원 디지털 가든

시민과 함께 하는 수상 패션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회현동

 

산책코스        회현동 골목 - 약 600m. 10분 - 회현제2시민아파트 - 약 600m. 10분 - 우리은행 은

                      행사박물관/회현지하쇼핑센터

찾아가는 법     지하철 : 4 호선 회현역 1번 출구

                        버스 : 104, 105, 503, 505, 507, 604, 7011, 7013번 탑승 후 남대문시장 정류장에서

                        하차 또는 143, 401, 406번 탑승 후 남산3호터널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회현동은 언덕길이 대부분이니 편한 신발을 신도록 하자.

                        ● 회현동은 골목길이 많다. 골목을 두루두루 둘러보며 올라가길 권한다(산책코스

                        의 거리는 편의상 최단 거리를 표시함).

                        ●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과 회현지하쇼핑센터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풍족한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감사할 줄 모르게 한다.

부족한 것은 나쁜 현상이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만든다.

- 미겔 데 세르반테스

 

꼬불꼬불 언덕길 위

회현동 골목

 

은행의 역사를 한눈에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Address 서울시 중구 소공로 51 Where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 Tel 02-2002-5090 Open 10:00~18:00(17:30 입장마감) Close 매주 일요일 · 법정공휴일  Fee 무료 Web www.woorimuseum.com

 

500살 회현동 은행나무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지다

회현지하쇼핑센터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황학동 & 신당동

 

산책코스        황학동 만물시장 - 약 150m. 3분 - 서울중앙시장/주방가구 거리

찾아가는 법     지하철 : 2 · 6 호선 신당역 11번 출구 약 150m 직진해 성동공업고등학교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물시장 입구이다.

                        버스 : 147, 202, 263, 421, 2012, 2013, 2014, 2015, 6211번 탑승 후 신당역 중앙시

                        장 앞 정류장에서 하차

Memo             ● 황학동 만물시장과 서울중앙시장은 서로 맞물려 있다. 특히 주방가구 업체는 황

                        학동 전반에 걸쳐 고루 분포되어 있다.

                        ● 서울중앙시장에 먼저 가길 원한다면 지하철 2호선 신당역 2번 출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여기 다 모였네!

황학동 만물시장

 

공연을 즐기자 충무아트홀

 

신나는 시장 구경

서울중앙시장

 

멋진 작가들이 모여 있는 곳 신당창작아케이드

대통령이 살던 집 박정희 가옥

 

 

 

 

 

 

 

posted by 황영찬

2018-012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집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3902

 

811.6

최64ㅅ

 

창비시선 121

 

나는 『창작과비평』에서 이 시인을 "교과서가 없는 시대에 고투하는 젊은 영혼의 편력을 도시적 감수성으로 정직하게 노래하고 있는 신인"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녀의 첫시집을 교정지 상태에서 읽어나가면서 나는, 당분간은 그 무엇이라고도 이름붙일 수 없는 '한 시인'이 태어났음을 실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투과되는 시인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예감은 감지되지 않는 법이어늘, 바라건대 그 불투과성(不透過性) 이 우리 시의 내일을 여는 "첫번째 사과의 서러운 이빨자욱으로" 전환되는 기적을 목격할 수 있게 되기를!

- 문학평론가 최원식

 

최영미의 시는 얼핏 보기에 도발적이다. 사람을 저으기 당황스럽게 하면서, 그러나 그의 시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이 유혹의 빛은 삶을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어떤 것, 이념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이 사라져버린 자리를 비춰주고는 문득 암전(暗電) 되고 만다. 나이 서른살에 "잔치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 시집은 이념의 대홍수 이후 그것의 범람에 가담했던 세대의 기록으로 기억되겠지만, 시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더 이상 명예가 아닌 때에 삶에의 자존심마저 훑어가버리고 없는,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그 황폐한 곳에 스스로 거주하고자 하는 시인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자가 이 시대에 또 있다니(!) 반갑다.

- 시인 황지우

 

최영미는 여성시의 다양성이라는 공간 확장에 개성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개성적이라는 것은 최영미가 청춘과 운동, 사랑과 혁명 같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질퍽하게 하나로 동화시켜가는 궤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궤적에는 불가피하게 싸움들이 끼여든다. 그 싸움의 대상들은 부조리한 사회일 수도 있고, 그 부조리한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전반일 수도 있다. 그의 시들은 어쩌면 어떤 싸움의 기록이다. 그는 그 싸움의 상처들로 만들어진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다("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그래도 그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누더기 옷을 통해, 그 투명한 알몸, 혹은 알몸의 투명성의 아름다움이 내비치기 때문이다. 싸움으로 질척거릴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아름다움이.

- 시인 최승자

 

崔泳美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2년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차례

 

제1부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선운사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혼자라는 건

속초에서

가을에는

그에게

마지막 섹스의 추억

먼저, 그것이

위험한 여름

어떤 족보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떤 사기


제2부 나의 대학


과일가게에서

목  욕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어떤 게릴라

우리 집

사는 이유

슬픈 까페의 노래

돌려다오

대청소

다시 찾은 봄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폭풍주의보

인생

나의 대학


제3부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1

지하철에서 2

지하철에서 3

지하철에서 4

지하철에서 5

지하철에서 6

마포 뒷골목에서

새들은 아직도……

짝사랑

Personal Computer

茶와 同情

24시간 편의점

관록 있는 구두의 밤 산책

라디오 뉴스


제4부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생각이 미쳐 시가 되고……

꿈속의 꿈

영수증

사랑의 힘

어쩌자고

또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자본론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歸去來辭(1992)

내 속의 가을

담배에 대하여

어떤 輪廻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발문 - 김용택

후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의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마지막 섹스의 추억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목욕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 ---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 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슬픈 까페의 노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눗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姦飮의 목격자

 

나의 대학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난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짦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낸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암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무 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지하철에서 1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새들은 아직도……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크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없이 소문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만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내 가슴에 부끄러움 박으며

새들은 오늘도 집을 짓는구나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posted by 황영찬
2018. 2. 23. 13:1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0 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시집

2009, 문학동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34426

 

811.6

최64ㄷ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들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강철처럼 단련된 시들에서 사랑과 정치에 대한 정열적인 탐색, 놀랍게도 신선한 무모함이 페이지마다 터져나온다. _체이스 트위첼(시인 · 평론가)

 

최영미의 시는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스타일은 바로 그녀의 독립성이다. 그녀의 시는 삶으로 쓴 시들이다. _제임스 킴브렐(시인)

 

성감각을 노래한 여성 시인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남성사회의 알력 아래서 여성의 삶을 깊이 생각해온 사상의 언어가 그녀에게는 있다. 시에 의해서 잉태된 언어를 이만큼 신중하게, 고독하게 기르고 있는 시인이 가장 이웃한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_사사키 미키로(시인), 아사히신문

 

최영미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산문집 『시대의 우울』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미술에세이 『화가의 우연한 시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번역서 『화가의 잔인한 손』 『그리스 신화』가 있다.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3인 시집 『Three Poets of Modern Korea』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협회상의 최종후보로 지명되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일본 문단과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버클리 대의 초청으로 2009년 4월 시낭송 프로그램 ‘lunch poem'에 참가할 예정이다.

 

차례

 

제1부

일요일 오전 11시
종이 울리고
어느새
중년의 기쁨
다시는
아파트를 꿈꾸며
내 집
2007년의 사포
10월의 교정
11월의 낙엽
내일을 위한 기도



제2부

나무가 깡통에게 - 난지도를 지나며
Love of My Life?
글로벌 뉴스
세계는 지금
나무는 울지 않는다
손의 여행
활주로
얼음처럼 낯선
4월은 잔인한 달
사계절의 꿈
여기에서 저기로
한가한 오후
광장을 지나며
2008년 6월, 서울
지상 최대의 쇼-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일상의 법칙들



제3부

온종일 집에서
허기와 객기
가장 쉬운 길
동시를 읽고
동시를 읽은 다음날
타인의 시
한여름, 부엌에서
지루하지 않은 풍경
행복
아이에게
똑똑한 아이
극장
자연의 합창
하늘의 소리
?
청개구리의 후회
그 여자
보낸 편지함
청동정원



제4부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롭게
교토의 바위정원
나의 여행
4월의 알리칸테
파리의 지붕 밑
발굴 현장
철길, 핏줄
사교적인 저녁식사
나쁜 평판
서투른 배우
어떤 동문회
1977년 12월 7일
나는 시를 쓴다


해설 | 사가와 아키 글로벌 시대의 세련된 지성
시인의 말

 

글로벌 뉴스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가 마르고 닳도록

죽음의 행진이 멈추지 않는다

강한 자는 강자의 방식으로

약한 자는 약자의 방법으로

신의 이름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예수와 마호메트가 태어나 묻힌 곳에서

예언자들이 평화를 설교했던 성지에서

왜 매일 총질이 끊이지 않는가

 

예언자들이 틀렸거나, 당신들이 틀린 거야

 

밥을 먹다 한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섬광과 굉음은 있지만, 살인자의 얼굴은 없어

우리는 안심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첨단기술로 생중계되는 비극은 구경거리가 된다

 

발레리나의 날씬한 허벅지에서 피 묻은 바지로

화면이 바뀌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아

아파할 시간도 없이,

말쑥한 정장 차림의 신사숙녀가

녹음테이프에 담긴 시신들을 쏟아내며

종달새처럼 재잘된다

요단 강 동쪽과 서쪽의 반응을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총알처럼 빠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것도 미친 것 아닌가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고

배아를 복제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왜 인류의 자기 파괴를 막지 못하나

 

립글로스가 매끄러운 입술에서 언제까지

자살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들어야 하나

비징한 고전음악에 깔린 어머니의 눈물을

사막에 몰아치는 복수의 회오리를……

 

종이 울리고

 

잠에서 깨어난 엘리베이터가

검정 구두들을 실어나른다.

금요일의 죄를 일요일에 속죄하려는,

피곤한 발들이

거대한 유리문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시멘트 벽에 강림(降臨)한 거룩한 얼굴은

낡기도 전에 새로 칠해지고,

늙은 백인이 부러뜨린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까만 눈동자

할머니를 따라 주기도문을 외는 장밋빛 입술도

언젠가는 문밖으로 뛰쳐나가겠지

 

길 건너, 빌딩의 장막에 가려진 호숫가에는

신을 믿지 않는 부자들이

새벽부터 골프채를 휘두르고,

시끄러운 아침의 나라에 싫증난 사람들은

어디로든 떠나려 짐을 싸는데,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내 방을 떠나지 않는다.

미친 대한민국은 정치가들에게 맡기고

나를 천국으로 데려다줄 그,

잡지의 얼굴처럼 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을 내 것으로 붙들지 못해 탄식하면서

 

내일을 위한 기도

 

잘 가라 2007년, 어리석은 날들이여

봄부터 겨울까지 내가 도모했던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아가, 나무, 푸른 산이 보이면

초라한 한 해를 돌아보는 저녁이 춥지 않아

텔레비전에서 약속들이 쏟아질 때

나는 책장의 먼지를 털었다.

 

서해 바다를 덮은 검은 기름띠도

우리의 푸른 들판을 가리지는 못해

우리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누구도 우리를 버리지 못하며,

머리 위에서 해가 빛나는 동안, 희망은 죽지 않는다.

내일의 집을 지으며, 그대는 살아갈 힘을 얻으리니

 

이 냉혹한 별의 어느 서러운 구석에도

따사로운 정오의 햇볕을 허락하시는

당신을 믿지 않았던 저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힘으로, 절망의 힘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소서.

시든 이파리에 생살이 돋고

제가 강인 줄도 잊어버린 흙바닥에 강물이 흐르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창가에 우정이 꽃피게

 

먼길 떠나는 나그네가

살아서 떠돌

지상의 모든 길이

영원히 푸른 하늘과 닿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한 잠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2008년 6월, 서울

 

광장엔 옛날 사진들이, 피 묻은 신문들이 붙어 있고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도

어쩜! 이십 년 전과 똑같지만,

큰길에서 느긋하게 나눠주는 선언문은

그때보다 두껍고 인쇄 상태도 좋다.

21세기의 IT강국에서 인쇄된

빨간 느낌표는 세련되었고

서 있는 얼굴들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80년대처럼

분노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종이컵 안에서 안전하게 타는 촛불처럼 온화한 눈빛.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외치다가 내가 죽을 구호를 모르는 건강한 입술.

어깨에 부딪치는 익명의 팔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내 옆의 젊은이에게 촛불을 건네주고 지하로 들어갔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

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

친구와 수다를 즐기며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입 안에 죄의식이 거품을 품지 않고

 

광장을 지나며

 

1981년 5월에 나는 순결한 하얀 운동화였다

독재자가 차려준 축제를 거부하려 학교를 뛰쳐나와

남학생과 어깨 걸고 행진하던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강물을 적시었나

정처없는 밤의 다리를 건너

쓸쓸한 도시의 창문들을 지나, 나는 늙었다

 

내 앞의길들을 토막내며 나는 걷는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의 내가

도서관에, 광장에,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는,

그녀는 오지 않는다

1985년에도 1995년에도 그리고 2008년에도

 

내가 달라질 다른 곳을 헤매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제자리.

과거에 갇힌 시멘트 벽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정글에 던져졌다면,

삶은 더 단순했으리

 

서투르게, 능숙하게 벗겨진

신발들을 나는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상 최대의 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그토록 어두웠던 나라이기에

우주가 놀라게 불꽃을 터뜨리며

천문학적인 돈을 불살라야 했나.

 

지상 최대의 쇼를 냉면에 말아먹는다.

편안히 집에서 실크로드를 순례하는 밤.

 

천년제국의 후예들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린

시체들이 일어나 북을 두드린다.

땅을 흔들고 하늘을 찢으며

스모그를 걷어버린 오천 년의 북소리.

 

한 몸처럼 움직이는 팔과 다리들.

진시황릉에 묻힌 병사들처럼

바둑판 위의 돌처럼, 전체의 일부로만 존재하는 육체들.

그 옛날 황제를 치장했던 궁녀들처럼

오로지 하룻밤을 위해 온통 칠하고 붙이고

춤추는 만리장성의 인형들.

 

두루마리 위에 펼쳐진

찬란한 역사의 모서리는 날카로웠고

금박을 입힌 위에 금을 덧칠한 듯 번들거리는

빛의 바다, 인간의 바다, 중화인민공화국.

 

얼마나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으면,

열강에 짓밟힌 백견의 치욕을

기나긴 장정의 굶주림을 보상받으려

오늘밤 미친 듯 쏟아내는가, 불쌍한 아시아여.

동경과 서울이 간 길을 베이징, 너도 피하지 못하는구나.

서양의 근대문물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봉건제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건너뛰어

2008년의 첨단기술로 버무린 무협지를 과시하는가.

백년의 어둠을 깨고

허공을 불지르며 질주하는 열차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교토의 바위정원

 

여기 들어오는 자는 신발을 벗어라

 

오래된 나무마루에 떨어지는 햇빛.

나무도 물도 없는 이상한 정원.

바깥은 꽃나무가 우거진 봄날인데

바위와 흙벽을 바라보며

 

벽을 넘지 않는 초월에 심취했던

사무라이들, 寺院의 탐미주의자.

 

바라볼 뿐 소유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무거워도

내려놓을 땅이 없었으니

남북이 십 미터인 직사각의 안뜰에서

 

위는 열리고 아래는 닫힌

유토피아, 혹은 감옥에서

아침마다 빗자루로 욕망을 쓸며

 

천하를 흑과 백으로만 재현한

그들이 떠난 뒤에도 검은 바위와 하얀 자갈은 남아

참선을 계속한다 흐트러지지 않는 곡선으로

 

16세기 일본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

열린 감옥이 내 방보다 편해서, 다리를 꼬았다 풀며

거기에 오기까지 내가 저지른 우여곡절을 지웠다.

지워지지 않는 총천연색을 정오의 광선에 태우며

단순한 흑백으로 돌아가고파.

 

발굴 현장

 

삼국시대, 백제라던가 통일신라였던가

노동에 지친 어느 장인의 실수로

기왓장에 찍힌 손자국.

두툼한 살결이 선명해

살아 숨쉬던 숨결이 느껴져, 선뜻 만지지 못했다

 

천년을 건너뛰어 내 앞에 서 있는

이름 없는 회색의 파편이

박물관에 보존된 보물보다 신비로워

금관을 장식하는 비취보다 또렷하게

내게 말을 건다

 

누구였을까?

얼마나 많은 기와를 구웠을까

富와 권력에 봉사하며

올려다보던 古都의 가을하늘.

그가 탐했지만 갖지 못했던 여자들.

그의 손끝에 닿았을 입술이며 가슴들이 환생해.

 

웃고 떠들며 情을 나누다

수천의 기와를 이고 운이 다하여, 허리가 꺾였을

목숨을 생각하며

 

오백 년이 지나 발굴된 文字의

지문(指紋)을 찍는다 피와 땀이 배인

진화(進化)의 흔적을.

 

어떤 동문회

 

젊은 그녀는 화창한 봄날 강물에 몸을 던졌고

 

누구는 유서를 남기고 4층에서 떨어졌고

 

누구는 암수술을 받은 뒤 계단에서 쓰러졌고

 

누구는 암수술을 받고 회복중이고

 

누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모르고

 

누구는 뒤늦게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하고

 

누구는 사주팔자를 연구하는 도사가 되었고

 

그리고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

재에 묻힌, 그녀는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

 

그녀들과 학교를 다닌 나는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팔장끼지도 않은 나는

종이에 기억을 오려붙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그들과 나의 길이 갈렸는지, 이해하려고

 

중년의 기쁨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Love of My Life ?

 

너무 맑아

낚시꾼도 포기하고 돌아서

아무도 놀지 않는 연못.

깊은 물을 두려워 않던……

 

그는

나의 열린 문으로 들어온

날쌘 물고기.

 

노를 젓지 않아도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기술을 알던

능숙한 바람개비.

 

어느 겨울 아침, 황금비늘을 자랑하며

그는 떠났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

흉터와 무늬가 되어,

 

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

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

 

11월의 낙엽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럽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룸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청동정원

 

청도으로 빚은 나무가 못에 걸려 있네.

휘어진 가지에 사이좋게 마주 앉은

작은 새 한 쌍, 위에 매달린 종을

건드리면 청아한 울림이 떨어지지

 

그 밑에 누워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먼지가 이끼처럼 내려앉은 계절을 보내고

푸르던 잎이 퇴락한 왕조의 구릿빛으로 변하는데

나 말고는 지나간 사람이 없네

 

배반의 노래가 거실에 쌓이던

어느 날 나는 알았네

울리지 않는 종을……

수상한 그림자만 얼씬거리는

녹슨 청동정원에서

새와 단둘이 오래 살았네

 

문이 만 번쯤 열리고 닫히고

연애시를 백 편쯤 만드는 동안

누군가 천천히 지나가며

방울을 쓰다듬는 사람이 없어,

 

천둥처럼 울리기를 기다리며

단단히 문을 걸어잠그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누워 있네 차가운 바닥에

두 마리 새들이 하나로 겹쳐져,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posted by 황영찬
2018. 2. 12. 15:29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09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홍순민

2017, 눌와

 

대야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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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궁궐은 왕조국가 조선의 정점이자 핵심이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왕조국가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다. 그런 임금이 '산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넘어, 국정을 운영하고 통치행위를 하는 공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임금은 궁궐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임금의 활동은 대부분 궁궐에서 이루어졌다. 궁궐은 임금의 존엄을 과시하고 정치적, 행정적 명령을 내는 곳이었다. 궁궐은 왕조국가의 중심이요, 최고의 관청이었다.

 

홍순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조선 후기 국가경영의 실상을 밝혀보려 공부하고 있다. 정치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꼴, 곧 문화로 탐구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도성과 궁궐에 대한 책을 쓴 데 이어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조선시대사 1》(공저), 《서울 풍광》, 《우리 궁궐 이야기》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문화자원을 가르치고 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우리 땅 우리 서울


1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산분수합, 산자분수령
   반도 삼천리의 배꼽, 서울


2 왕도 서울

   서울을 왕도로 만든 세 가지
   왕도의 예복, 도성
   서울 바닥
   묘사궁궐


제2장

임금이 사는 곳, 궁궐


1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 그 낱말의 뜻
   궁궐은 아닌, '궁'들


2 궁궐의 짜임새

   오문삼조?
   궁궐의 여섯 공간


3 건물 읽기

   전통건축의 구조
   건물의 신분


제3장

궁궐의 역사


1 첫 번째 양궐체제

   궁궐 이해의 열쇠, 양궐체제
   영원한 법궁,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의 탄생
   임진왜란, 궁궐을 삼키다
   정릉동행궁


2 두 번째 양궐체제

   광해군의 무리수
   동궐과 서궐
   궁궐 임어, 왕권의 발현


3 세 번째 양궐체제

   법궁 경복궁 중건
   고종의 이어, 이어, 이어


4 경운궁 단궐체제

   경운궁 시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궐의 끝, 국망


부록

궁궐을 보는 눈

궁궐의 주제, 궁중문화
사람들의 삶의 꼴, 문화
공간, 시간, 인간 속으로
문화유산 만나기
전통문화의 기본 관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

 

《여지도》 중 <조선일본유구국도>의 한반도 부분 |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거기서 갈라져나온 한북정맥의 끝에 매달린 붉고 탐스런 열매 서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기전도>, 《동국여도》| 서울은 바로 북쪽의 북한산성, 서북쪽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 강화의 읍성 및 돈대와 문수산성, 남쪽 광주의 남한산성, 더 멀리 수원의 화성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한성전도>, 《고지도첩 | 도성은 내사산 등성이를 따라 한 바퀴 돈다. 내사산 바깥으로는 산줄기들이 겹겹이 감싸준다. 도성 안에서 모여든 물은 동으로 나가 중량천으로 합류하고, 중량천은 남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치고, 한강은 서쪽으로 가면서 성저십리 전체를 안아준다.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울의 내사산 | 북한산의 가장 남쪽 봉우리 보현봉에서 산줄기가 내려가면서 형제봉, 구준봉을 거쳐 백악으로 솟았다. 백악에서 동남쪽으로 흐른 줄기가 나지막하게 타락산을 이루었다. 백악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목멱산으로 마무리되었다.

《숙빈최씨소령원도》 중 <묘소도형여산론>의 산도(山圖) 부분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의 산도다. 산줄기는 가운데 무덤을 겹겹이 감싸고, 그 갈피갈피에서 물줄기가 모여들어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른바 명당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손들이 잘 되었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도성도>, 《조선강역총도》 | 도성의 문루가 숭례문과 흥인문, 돈의문, 광화문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성 정비가 끝나기 전인 1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 경희궁은 경덕궁으로 쓰여 있으며, 숮정문은 터만 있고, 광희문은 수구문으로, 남소문은 광희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도성 | 백악곡성에서 서편으로 도성이 구불구불 백악 정상을 휘감아 돈다. 저 멀리 인왕산 암봉을 돌아 목멱 정상을 넘고 넘어 사진에 보이지 않더라도 타락산을 더듬어 훑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인왕산 밑자락의 도성 옛 모습 | 도성 아래 순라길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몇몇은 성 밑 마을에서 이제 막 올라오고 있다. 저 뒤편으로 인왕산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성의 서쪽 소의문과 돈의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혜화문 옛 모습 | 도성의 동북쪽 문인 혜화문. 속칭 동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네 정문(正門)의 하나가 되었다. 좌우에 성벽을 거느리고 고갯마루에 올라앉은 모습이 장하다. 강원도 함경도 방면에서 몇 날 며칠을 걸려 한양에 온 시골 사람들, 저 성문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조선고적도보》)

불타기 전 숭례문 | 화재 바로 전날인 2008년 2월 9일에 찍은 숭례문 모습. 저때까지 유지되어오던 옛 모습이 하룻밤 새에 잿더미가 되었다. 보존은 어려운데 파손은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속에 들이닥친다.

창의문 | 도성문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창의문.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운종가 옛 모습 | 오늘날의 종로2가 YMCA 자리에 있었던 한성전기회사 옥상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광경. 널찍한 운종가 한가운데로 전차 선로가 가고 있다. 사진 왼편의 다른 건물들보다 조금 큰 건물이 보신각이다. 피마골 안에도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수선총도>의 운종가 부분 | 운종가 가운데서도 중심부인 종루 근처와 그 아래 남대문로에는 주요 생필품을 파는 시전 점포들이 모여 잇었다. 사진의 아래에 가로로 그어진 선이 운종가이다. 그 주변에 시전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03년 서울 | 사진 왼쪽에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굽은 선이 도성이다. 도성 밖으로도 시가가 이어져 있다. 중단에 숭례문이 우뚝하고, 그 안에 선혜청이 넓게 자리 잡았다. 도성 안이 도성 밖보다 지형이 높고, 도성 안에는 크고 중요한 건물들이 많은 데 비해서 도성 밖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들로 채워져 있다. (일본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마포 옛 모습(위) | 한강변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초가집과 함께 기와집들도 빽빽하게 들어찼다. 강안에 닿아 있는 배들의 돛대도 촘촘하게 줄을 지었다. 선착장으로 오가는 사람들, 골목골목에서 무언가 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숭례문 바깥 옛 모습(아래) | 소로 밭을 가는 뒤로 초가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저 멀리 도성이 높다랗게 좌우로 지나가는데 숭례문이 우뚝 솟아 있다. 장한 모습이다. 사진의 왼쪽 아래로 만초천이 흘러간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남대문로 옛 모습 | 숭례문 문루 2층쯤에서 성 안을 바라보았다. 남대문로가 오른쪽으로 굽어 이어진다. 길 가장자리에 길게 이어지는 초가집은 도로를 침범하여 지은 가가(假家)다. 아직 종현성당이나 상동교회는 들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98년 이전 사진이다. (《토미 톰킨스와 더불어 한국에서》)

1915년 이전 보신각 | 단층으로 된 종각 건물에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보신각 편액이 걸려 있다. 위치는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삼거리 동남쪽 모퉁이이고, 정북을 바라보고 있다. 1915년에 옮기기 전임을 알 수 있다.

1915년에 옮긴 이후의 보신각 | 북에서 남으로 바라본 남대문로의 동쪽가에는 서양식 2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의 왼편에 보신각이 서북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다. 한복 입은 사람들 사이에 간간이 일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루 주춧돌 | 원래 자리에서 발굴되어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는 종루 주춧돌. 주춧돌 전부가 아니지만 이렇게 남아 있는 주춧돌만 보아도 종루가 얼마나 장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신각 | 위치는 뒤로 물러났고, 좌향은 엉뚱하게 서북쪽을 바라보며,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이다. 세부 모양과 장식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달려 있는 종도 제 것이 아니다. 보신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기념비전(위) |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를 품고 있는 기념비전. 자리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주위 건물이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도 몇 차례 넓어지는 등 주변 환경이 변함에 따라 매우 옹색한 처지가 되었다.

기념비전 옛 모습(아래) |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기념비전. 하지만 이것도 원래 모습은 아니다. 원래는 기로소 행각 안에 있었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현재 광화문앞길 | 도로 안에 광장이 갇혀 있는 형국이다. 세종대왕 동상을 넘어 광화문으로 가까이 가기 전에는 광화문과 그 뒤 풍경을 보기 어렵다. 가까이 간들 곧바로 걸어가서 광화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광화문앞길 옛 모습 | 길 동편과 서편에는 국가의 중추 관서들의 행각과 정문이 담처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광화문이 남면하며 주인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 멀리는 백악 산줄기가 감싸주는데, 북한산 보현봉이 슬쩍 넘겨다보고 있다.

광화문앞길에 모인 사람들 | 사진 맨 왼쪽에 광화문의 반이 보이고, 그 앞으로 관아들의 행각과 문이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광화문앞길을 흰 옷에 흰 갓 또는 삿갓 아니면 희고 검은 장옷을 입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신주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99년 이전이다. 그렇다면 1897년 명성왕후의 빈소를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긴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장이 된 경복궁 | 공진회장 광고탑에서 동남쪽을 찍었다. 중앙 약간 왼쪽에 근정문이 있다. 그 오른편에 크게 'ㅁ'자로 보이는 가건물이 공진회 제1호관이다. 오른쪽에 오벨리스크를 얹고 있는 것은 철도국 특설관이다. 그 오른편에 광화문이 있고, 광화문 앞으로 광화문통으로 이름이 바뀐 광화문앞길이 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종묘 들어가는 길 | 운종가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면 운종가의 북쪽에서 운종가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제생동천을 건너게 된다. 그곳에는 당연히 돌다리가 걸쳐 있었다. 임금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탈것에서 내려야 했다.

<도성도>(부분)에 나타난 종묘, 사직과 궁궐 | 종묘가 서울의 중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지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종묘 자리부터 정하였고 그다음에 경복궁 자리를 잡았다고 《태조실록》은 말한다. 중국의 종묘와 조선의 종묘는 성격과 위상이 상당히 다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창덕궁 | 돈화문의 남서쪽에 있는 빌딩에 올라가 동북쪽으로 바라본 창덕궁 전경. 응봉에서 길게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서쪽 기슭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창경궁 |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본 창경궁 전경. 응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동쪽 기슭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창경궁 너머로 서울 도심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

경희궁 | 멀리 떨어진 빌딩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본 경희궁의 외전 영역. 새로 지은 건물들이지만 숲과 어울려 궁궐 분위기를 제법 낸다.

경운궁 |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정북 방향으로 바라본 경운궁 전경. 야경인 덕분에 경운궁의 부자연스럽고 초라한 부분들이 가려져서 그런대로 궁궐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북문 | "고궁박물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자금성은 그 많은 왕조가 생겼다가 없어진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궁궐이다. 물론 현재 살아 있는 궁궐은 아니다. 고궁으로서,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 일대 | 창덕궁 서쪽 건물 높은 곳에서 본 전경이다. 오래된 건물도 있고, 새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 죽은 건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이요,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어진> | 우리는 조선의 임금을 아주 먼 옛날 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조선의 임금을 우리의 임금으로 여기는 생각도 저변에 깔려 있다. 서로 어긋나는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옛 사람들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 정확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경복궁 동십자각 옛 모습 | 높은 대 위에 잘 생긴 누가 있고, 그 안에 작은 방이 있다. 성상소다. 동십자각 바로 옆으로 삼청동천이 흘러내려 개천으로 들어간다. 그 삼청동천에 난간도 없는 돌다리가 걸려 있다.

<보인소의궤> 중 조선국왕지인 | 조선 임금의 존재와 권력을 알리는 대표적인 인장, 대보다. 전서체 한자와 청나라 글자로 새겼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함흥본궁 | 이성계가 임금이 되고 나서 함흥이 있는 자신의 잠저에 지은 건물이다. 이성계가 죽은 뒤에는 왕실의 사당으로 쓰였다. 늙고 굽은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편에는 노둣돌이 보인다. 이 노둣돌을 밟고 내리는 이는 누구일까? (《조선고적도보》)

건구고궁 현판 | 주역 건괘(乾卦)는 여섯 효(爻) 모두 양효(陽爻, -)로 되어 있다. 구(九)는 양효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첫째, 곧 맨 아래 양효인 초구(初九)는 잠룡을 가리킨다. 아직 용이 되기 전 물에 잠겨 있는 상태다. 이러한 뜻을 담아 영조는 자신의 잠저였던 창의궁 정당에 이 "건구고궁"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운현궁 노락당 |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때는 그 위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었지만, 이후 영역도 축소되고 건물들도 바뀐 것이 많다. 그 후손들이 지키지 못하고 지금은 서울특별시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인평대군방전도> | 타락산 기슭에 있던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집(위)을 그린 그림이다. 인평대군의 형으로서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집(아래)을 함께 포함하였다. 봉림대군의 집에는 조양루(朝陽樓), 인평대군방에는 석양루(夕陽樓)가 있어 서로 마주보며 형제 우애를 다졌다 한다. 정조 대에 집을 고쳐 짓고, 1792년(정조 16) 이 도면을 그렸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육상묘와 연호궁 편액 | 뒤편의 육상묘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이름이다. 연호궁은 숙빈 최씨의 며느리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 이름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신주가 한 건물에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화성행행도병> 중 서장대야조도 |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갔다 오는 장면을 그린 여덟 폭 병풍 중 서장대에서의 야간 군사 훈련 장면이다. 가운데 화성행궁이 보이는데,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행궁 | 2003년에 복원을 마친 화성행궁을 팔달산 쪽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 행궁은 정확한 위치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는가? 그래서 과연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남한산성행궁 | 인조가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은 시설인데, 실제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활용하였다. 사라졌던 것을 복원하긴 하였으나 의문이 남는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시간의 층위가 쌓여 있는데…. 그것을 살리는 방법은 정녕 없었을까? 아쉽고 안타깝다.

<오문삼조>, 《삼재도회》 | 고문(皐門)에서 노문(路門)까지 다섯 문이 구역을 나누고 있다. 외조, 치조, 연조는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 고문(庫門) 안에 가석(嘉石) 등이 있고, 그 좌우에 종묘와 사직이 표기되어 있다. 종묘와 사직의 위치와 위상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선 전기 경복궁의 구조를 추정해 그린 지도인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궁궐의 여섯 공간을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하였다.

경복궁 외전 구역 | 광화문 안에 홍례문, 홍례문 안에 영제교, 영제교 건너 근정문, 근정문 안에 근정전, 광화문 밖에서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을 셋, 다리를 하나, 총 네 개의 경계를 지나야 한다. 어느 문이 고문(皐門)이고 또 고문(庫門)이며, 치문이며 응문인가? 어느 공간이 외조이고 치조인지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근정전 | 근정문 안이자 근정전 앞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열린다. 이를 조정이라고 한다. 저 조정에 가득 차게 들어선 많은 관원들, 곧 만조백관을 그려본다.

창덕궁 인정전 | 정면 5간 측면 4간에 중층 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2층 기단 위에 좌우 대칭을 하고 있어 매우 엄격한 느낌을 준다.

<정아조회지도> | 정아란 궁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여기서처럼 조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조정에서 조회할 때 각 참여자들이 자리 잡을 위치를 밝힌 도면이다. 조회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대단히 많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복궁 강녕전 내부 | 강녕전은 경복궁의 내전이다. 그에 걸맞게 그 내부도 널찍하다. 가운데 대청마루의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고, 마루와 대청마루 사이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나뉘어 있다.

<무신진찬도병> 중 통명전진찬도 | 통명전은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이다. 외부의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들어올 수 없다. 통명전에서의 진찬은 그러므로 여성들의 진찬, 내진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복궁 사정전 일원 |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과 관원들이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공간이다. 가운데 편전의 정전인 사정전은 하나의 마룻방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그 동편에 만춘전, 서편에 천추전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갖추고 있다.

<호조>, 《숙천제아도》 | 19세기의 문관인 한필교가 자신이 근무하였던 관서들을 그림으로 그려 모은 화첩인 《숙천제아도》 가운데 호조의 그림이다. 호조는 광화문앞길에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 소장)

경복궁 함화당 |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의 북쪽, 생활기거공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동쪽으로는 집경당이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의 행각은 일제강점기 때 사라졌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창덕궁 소요정 | 동궐의 후원 옥류천 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다. 소요정의 이름 중 '소요'는 《장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후원은 이렇게 자연에 안기고자 하는 공간이었다.

경복궁 강녕전 월대 | 건물에 월대가 있다는 것은 그 건물이 그럴 만한 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경복궁에서 임금이 머무는 대전 강녕전 역시 그러하였다.

창경궁 경춘전 | "경춘전은 정면 (     )간, 측면 (     )간 해서 전체 (     )간 건물입니다" 건물을 보면 먼저 바닥의 규모부터 보는 것이 좋습니다. (    ) 속에 알맞은 숫자를 써 넣으세요.

종묘 정전의 기둥들 | 종묘 정전은 벽과 문을 맨 바깥 기둥에 내지 않고 한 간 뒤로 물러서 냈다. 그 결과 전면 한 간은 회랑이 되었고, 맨 바깥 기둥은 노출되었다. 배흘림기둥이 길게 늘어서서 빚어낸 모습이 매우 깊고 긴 울림을 준다. 그런데 가까이 보이는 왼편 기둥은 원이 아니라 네모다. 정전의 기둥이 아니라 익랑 기둥이기에 격을 낮추었나 보다.

지붕의 다양한 형태들

전당합각재헌루정 | 건물 이름의 끝 글자들을 보면 건물의 격과 모양, 기능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편액 자체도 대체로 크고 화려한 데서 작고 간결한 데로 바뀌어간다. 건물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이나마 건물이 보인다. 위로부터 근정전, 양화당, 곤녕합, 경훈각, 낙선재, 영춘헌, 주합루, 함인정.

창경궁 명정전 | 외전의 정전으로서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광해군 대에 다시 지은 이래 큰 화재를 입지 않아 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부 내부 여러 곳에 변형된 부분이 다수 잇음에도 국보로 지정된 근거다.

창경궁 양화당 |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인 통명전 동편에 있다. 정면 6간 측면 4간 단층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건물 크기에 비해 높이가 다소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당당한 기품을 갖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 | 헌종 대에 후궁으로 맞이한 경빈 김씨의 거처로 지은 건물이다. 그 뒤로도 주로 후궁과 같은 왕실 여성들이 쓰던 건물이다. 높지 않은 기단에 계단이 셋 놓여 있다. 그 앞에는 노둣돌도 있다. 왼편에 앞으로 누마루가 돌출되어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부분이 많다.

창덕궁 태극정 | 동궐 후원 가운데 가장 북쪽에 흐르는 옥류천변에 있는 다섯 정자들 가운데 가장 상류에 있는 정자다. 장대석으로 네모반듯하게 쌓은 기단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사모지붕인데 모임 부분에 절병통을 얹었다. 아주 엄격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신진찬도병> 중 인정전진하도 | 1848년(헌종 14) 3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망오(望五), 곧 41세가 됨을 기념하는 진찬 행사를 열었다. 이를 그린 병풍 가운데 헌종이 인정전에서 신하들에게 진하를 받는 부분이다. 구름에 잠긴 소나무가 뒤에서 받쳐주고 잇어 이곳이 인정전임을 알려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조 '법궁-이궁 양궐체제'의 변천

만월대 |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궁궐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궁궐이 만월대에 있었다. 뒤편의 임신한 여인이 누워 있는 형상의 산이 바로 송악산이다.

<조선태조어진> |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은 조선 말기의 모사본이다. 얼마나 태조 이성계의 본성과 인상을 드러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후덕한 군주보다는 단단한 무장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전주 경기전 소장)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북한산에거 서쪽으로 뻗어나간 등성이 가운데 비봉 꼭대기에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이것이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당연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고 여섯 자가 새겨져 잇지는 않다. 지금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경조오부>, 《동여도》 | 경조란 서울이란 뜻이다. 행정적 공식 도시 이름은 한성부. 한성부의 행정 구역은 다섯 부로 구성되었다. 5부는 처음에는 도성 안만을 포함하였지만, 점차 도성 밖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게되면서 부 아래의 행정 구역인 방(坊)이 설치되었다. 행정 구역을 넘어 넓은 범위의 서울은 이 지도에 포함된 지역, 곧 북으로 북한산 기슭, 남서로 한강을 경계로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복궁 근정전 | 사방을 행각으로 둘러싼 안 넓은 마당을 박석으로 덮었다. 2층 기단에 돌난간을 두르고 정면 5간 측면 5간에 겹지붕을 한 건물이 위엄 있게 자리 잡았다.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다.

<경복궁전도> |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의 모습을 당대에 그린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기억에 의존해 그린 개념도들이다. 그 가운데 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마치 산도처럼 주위 산줄기의 흐름을 공들여 그렸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성 말바위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교태전으로부터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 광화문이 일직선으로 축을 맞추고 있다. 광화문 앞으로는 광화문앞길이 열린다.

창덕궁 금천교 |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임금 태종 대에 건설된 다리이다. 하지만 저기 조각되어 있는 석수들의 표정은 살벌함과는 거리가 멀다. 부드럽고 재미있어 친근감을 준다.

변박, <부산진순절도> | 부산진을 공격하는 왜군이 타고 온 배가 바다를 덮었다. 이미 상륙하여 성 밑에까지 다가와 아우성치는 왜군이 새까맣다.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며 싸우는 조선 사람들의 수효는 많지 않다. 목숨을 바쳐 싸우다 간 이들의 심정…. 그것을 잊지 말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육군박물관 소장)

정선, <경복궁도> | 무너지다 만 궁성 안에 경회루 돌기둥과 근정전 기단의 흔적만 있는데, 빈터를 지키는 군사들의 건물이 덩그렇다. 뒤편은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영묘조구궐진작도> | 1767년(영조 43) 12월 16일 영조는 태종이 태조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술 잔을 올렸던 옛일을 본받아서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관원들로부터 술 잔을 받는 의식인 진작례를 베풀었다. 2층 월대와 중앙의 계간, 모서리의 동물상 등이 근정전 터임을 알려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 실록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이 사초를 작성하고, 임금 사후에 사초와 함께 여러 자료들을 편집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만큼 엄정하였다. 하지만 기록자와 편집자의 주관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었다. 권력을 잡은 집단이 급격하게 바뀌면 실록을 없애지는 못하고 수정본을 작성하였다. 그 수정한 실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이고 엄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입장과 관점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본 규슈 구마모토성 |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뒤인 1601년부터 7년간 쌓은 성이다. 규모가 크고, 자연 지형을 이용한 축성 기술이 잘 살아 있다. 가토가 임진왜란에서 얻은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고 한다.

월산대군 사당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사당 남쪽 큰길 건너에는 월산대군의 묘가 있다. 임금의 형. 어찌 보면 동생 성종보다 더 임금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나 임금이 되지 못한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며 전해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경운궁 즉조당 | 인조반정 후 인조가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서궁, 곧 경운궁에 와서 즉위하였다는 건물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함인지 조선 후기 내내 보존되었다. 1904년 화재에 불타서 바로 다시 지었다.

광해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다. 쫓겨난 임금은 임금이 아니다. 종묘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덤도 능이나 원이 아닌 묘이고, 외지고 좌향도 좋지 않는 곳에 그 규모나 치장도 웬만한 양반만도 못한 묘로 남았다.

<원종어진> |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초상화이다. 백택 흉배를 한 것으로 보아 임금이 아닌 종친 신분을 표현하였다. 추존되어 '원종어진'이란 이름으로 불리긴 하나, 임금이 아닌 임금의, 어진이라고 불리나 어진이 아닌 초상화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한산성 우익문 |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거리로 통하는 문이다. 위의를 차리기에는 바깥 지형의 경사가 너무 급하다. 긴급하게 드나드는 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 문을 나서서 삼전도로 갔다.

<동궐도> | 동궐, 곧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그 후원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기록화.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의 부감법을 써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건물들을 사선으로 배치하였다. 동궐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도움을 주는 자료이나, 또 한편으론 그림은 그림일 뿐, 사진이나 실측 도면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한양도>, 《천하도》 | 위백규(魏伯珪)가 1770년에 그린 지도를 1822년에 그의 후손인 위영복(魏榮馥)이 목판으로 제작, 간행하였다. 당시 도성 내부에 묘사가 매우 소박하고 부정확한데, 유독 경희궁이 강조되어 잇는 것이 눈에 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희궁 | 네모반듯한 회랑 안에 숭정전이 자리 잡고 잇고, 그 뒤로 자정전, 그 서편에 태녕전이 잇다. 바로 뒤편에서 인왕산이 이 모두를 받쳐주고 있다.

<연잉군초상> | 후일 영조가 된 연잉군이 사모를 쓰고, 백택 흉배를 단 녹색의 단령을 입고 있어 종친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째진 눈꼬리가 <영조어진>의 인상과 통한다. 그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는 신임옥사의 원인이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도세자의 영지(令旨) | 1761년(영조 37) 4월 3일 사도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내린 명령서. 평양부에 사는 통덕랑 서필영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부과하는 잡역을 면제해주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사도세자가 수결(手決)을 하였다. 이듬해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경희궁 금천교 | 적지만 옛 부재가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옛 모양을 추정하여 다시 지었다. 정문 흥화문 자리는 구세군회관이 차지하였고, 외전 내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가로막았다. 지금은 물길도, 궁궐도 사라졌지만, 본래는 이 다리를 건너면 궁궐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무진진찬도병> | 1868년(고종 5) 익종비 신정왕후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 장면을 8폭 병풍으로 꾸몄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열린 첫 큰 행사였다. 오른쪽부터 1폭과 2폭은 근정전진하도, 3폭과 4폭은 강녕전진찬도, 5폭에서 7폭은 강녕전익일회작연도이고, 8폭은 좌목이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경희궁 후원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저 멀리 겹지붕이 불쑥 솟은 근정전, 그 뒤에 사정전, 그보다 조금 가까이에 경회루가 보인다. 1876년의 화재로 내전이 불탄 후 복구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반면 가까이 경희궁에는 별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고 나무만 무성하다. 궁성도 무너진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사진 상태가 좋진 않지만 19세기 말 경복궁과 경희궁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백전 | 엽전 100개의 명목가치를 갖는 돈이다. 앞면에는 상평통보, 뒷면에는 호대당백이라고 새겨져 잇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돈은 경제 질서, 나아가서는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초상> | 흥선대원군 자신이 제발을 직접 써 넣었다. "내가 61주갑 되던 해의 초상이다." 경진년, 그러니까 1880년(고종 17) 여름에 그렸다. 이미 실권을 잃은 후의 일이다. 검은 건을 쓰고 푸른 포를 입었는데 인상이 강하다. 흥선대원군은 끝내 권력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창덕궁 농수정의 고종 |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3년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을 안내한 인연으로 1883년 12월부터 3개월간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때 고종의 사진을 찍었다. 고종이 1876년의 화재로 창덕궁에 이어해 있을 때의 일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던 방 | 서양식 침대와 실내 장식이 화려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외국 공관에서 1년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은 그 공간이 아무리 화려하다 한들 씁쓸한 뒷맛을 지우기 어렵다. (《이왕궁비사》)

옛 러시아공사관 탑 |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본채는 다 없어지고 동북 모서리에 있던 탑 부분만 무슨 지표인양 남아 있다.

경복궁 곤녕합 | 곤녕합 일대는 건청궁 안 왕비의 거처이다. 그중에서도 사진에 찍힌 누 부분의 이름이 옥호루인데, 이곳이 바로 1895년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뒤의 서양식 건물은 외국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관문각이다.

미국공사관 옛 모습 | 1905년 9월 방한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총영사 고든 패덕 등 미국인들. 그리고 대한제국 군인 몇이 미국공사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미국공사관 건물은 한옥 골격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현관을 추가 설치하였다.

원구단 | 대한제국에서 외국 귀빈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대관정에서 본 모습이다. 왼편에 있는 건물이 원구단 정문, 중앙부에 보이는 3층 지붕 건물이 황궁우, 중단 오른편에 흰 기단에 흰 지붕이 보이는 부분이 원구단이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경운궁 함녕전 | 고종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1904년 화재를 입어 다시 짓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오늘까지 경운궁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경운궁의 중심 건물이다.

1902년 경운궁 전경 | 모습을 갖춰가는 경운궁 서측 부분 전경. 아직 궁성은 완성되지 않았고, 내부 건물들도 온전히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2층 건물 중화전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1904년 경운궁 화재 |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불타버린 경운궁 중심 구역.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다. 보는 우리 가슴도 타들어간다.

1904년 일본군의 전첩축하회 | 러일전쟁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창덕궁 후원에서 축하회를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단과 아래층 규장각은 물론 2층 주합루까지 일본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대안문 편액 | 대안문 편액. 주변의 테두리가 떨어져 나가고 퇴색되었지만 단정한 글쎄에는 기품이 배어 있다. 글씨 부분에 검은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재의 중화전 | 기단에 견주어도 건물의 높이가 낮다. 1904년 화재 뒤 다시 지으면서 겹지붕을 홑지붕으로 만든 결과다.

을사늑약 기념사진 |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제의 고위 관원들이 대관정에서 기념사진을 박았다. 그러나 비준 절차를 마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법적으로 체결되지 않았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으나, 만국이란 말에는 세계 모든 나라가 아니라 힘 있는 나라들만 포함되었다. 고종이 파견한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헤이그 특사 위임장(영인본) | 고종이 특사들에게 준 위임장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위임된 권한은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덕궁 인정전 | 인정문에 외벽이 생기고 거기 판문이 아닌 작은 문이 달렸다. 회랑에도 문이 생겼다. 회랑이 아닌 접견실 등 건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용마루 전면에 다섯, 인정문 용마루 전면에 셋, 오얏꽃 문양이 박혔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인정전 앞의 순종 |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순종에게 현재 서울역인 당시의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평양, 신의주 등 서북 지역을 순행하게 하였다. 순종이 돌아온 뒤 인정전 앞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순종의 왼쪽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인정전 내부 | 인정전 용상의 단이 없어지고 맨 마룻바닥에 서양식 의자가 놓여 있다. 임금의 자리가 아니라 파티의 주인이 되는 총독이나 정무총감의 자리다. 그 뒤에는 일본식 가리개 위에 공작인지 뭔지 모를 일본풍의 새 그림이 걸렸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닫집이 도리어 어색하다. (《인정전 사진첩》)

순종 경술국치 위임장 |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병합조약을 체결하러 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준 위임장. '척(坧)'이라는 순종의 본명을 쓴 수결(手決)이 못났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데라우치 마사타케 | 뜻밖에 합병 문제를 용이하게 해결하고 그는 이렇게 썼다. "가가(呵呵)." 사진에서도 속으로는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있을 것이다.

통감 관저 | 대한제국을 일본이 집어삼키는 형식상의 절차인 조약안에 도장을 누른 장소인 통감 관저. 목멱산 북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은 곳. 그날 경술국치의 출발점이다. 다만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불타 새로 지었기 때문에 그때의 그 건물은 아니다.

하도(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낙서(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복희팔괘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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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