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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29. 09:2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54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가인혜 시집

2002, 미네르바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9903

 

811.6

가6819나

 

가인혜의 시는 청초하다. 아니 나이브하다. 행간 마다 자간 마다 오래 생각을 묵히고, 가라앉히며, 숙성과 발효를 기다려온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날은 알 수 없는 생기를 맛본다. 슬픔과 절망의 뒤안에서 새벽꽃 한 송이 만나는 기분이다. 마치 낮은 음성으로 자장가처럼 울리는 간절한 기도처럼.

이경교 시인

 

가인혜 시인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94년 월간순수문학(수필부분) 3월호에 "돌아온 자리"로 신인문학상에 당선, 98년 국제펜클럽 펜과 문학(시부문) 겨울호에 "나는 따뜻한 씨앗을 묻는다"로 제1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심장동인 활동을 하면서 동인집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제1집)"과 "엉겅퀴꽃 붉은 마음(제2집)", "나무들은 뿌리로 사랑을 한다(제3집)" 등을 세상에 상재하였으며, 현재 은혜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차례|

 

1부 숲에는 사랑이 있네

    곁, 그 따뜻한 자리

    숲에는 사랑이 있네

    창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플러그가 빠지지 않는다

    파란 줄무늬 셔츠

    장미와 아스피린

    이별

    세상은 정원이다

    저 먼 밤바다

    산새

    바다가 끓고 있었다

    허공

    戀歌, 김장김치

    깊은 바다

    새벽길

 

2부 그늘 속의 방

    그늘 속의 방

    이슬의 말

    나는 따뜻한 씨앗을 묻는다

    폭우 속에서

    알

    바람은 상두가를 부르며

    돌 속의 길

    하늘로 올라 간 바다

    얼레를 푼다

    진달래 필 무렵

    나무들은 뿌리로 사랑을 한다

    불 속을 지나며

    나를 위한 이유

    움직이는 것은 모두 그늘을 만들고 싶어한다

 

3부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결혼식

가로등

강물

그가 온다

화분

바다에 서 있는 것은

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었다

바다로 간 꽃게

송화가루

첫 단추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하늘이 전부 유리창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무 그림자

봄은 이제 외롭지 않네

나의 그림자는 길다

물소리가 들린다

숲으로 난 길

나는 바다에 내리는 첫 눈이어라

 

4부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알집

파문

삼월의 과수원에 눈이 내린다

저녁 해

영원 속의 하루

폭우 속에서

빗방울

흙장난

무너져 내리는 것들

밤바다

참꽃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안에서 우는 소리는 깊다

 

요리를 잘 하는 시인

 

숲에는 사랑이 있네

 

구름이 되어 나무가 되어

해 저물도록 듣는 얘기소리

미움 어느 곳에도 없고

사랑은 추억으로 가볍네

한 곳에 오래 앉아 주저앉은 바위

물 마시러 나온 청설모의 외진 눈길에도

나는 바위였네

날아다니는 소리들

새는 보이지 않아도 가까이 있네

새가 인도해 준 길 따라

나무와 나무가 기대여 새들의 다리를 놓아주고

계곡은 물을 흘려보내 짐승을 먹이는 모습들

저마다 서로를 내어주며

나뭇잎 태어나는 목숨 한 가운데

나비도 땅에 내려와 기도하듯 날개를 접는

숲에는 사랑이 있네

 

그늘 속의 방

 

그늘 속에는 방이 있다

들어가 앉고 싶은 아늑함 속에

지친 얼굴을 내려놓으며

기대인 담 하나가

온 세상을 가리워 주는 풀밭에서

나는 아름다운 긴장을 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공간 속에 그늘을 만들며

신발 속의 나를 풀어놓는다

나의 힘줄은 너를 보며 힘차게 팽창하는데

들어 온 적도 나간 적도 없이

탁 트인 공간이 자유로와

하늘도 맑은 숨쉬는 길 위의 방

문도 달지 않고 지붕도 얹지 않은 채

촛불을 켜 놓은 방처럼 환한 어둠을 끌어안고

나는 아무것도 후회할 것 없는 맨살로

계관화처럼 붉어진 담장 밑의 너를 안는다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하늘을 꽈리 불던 그 목소리

무거운 추를 단 구리종의 진폭처럼 어둡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는 나뭇잎처럼

썩기를 기다리는 아픔 바윗돌로 눌러놓고

가릴 것 없는 나뭇가지

하늘은 노을을 불러 금물을 입힌다

 

어둠이 먼저 찾아든 산 속

먹을 것 없어 빈 손 든 가지들 위에

새떼들 날아와 껍질을 마구 쪼아도

맘 좋게 살점을 열어줄 뿐

나무는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시작이 언제나 힘겹고 쓸쓸했던 것처럼

나무도 아름다운 계절의 연습을 한다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잘 익은 포도주 한 병을 당신께 내어 드리고

떠나지 않은 것처럼 떠나도 좋겠습니다

햇살이 꼭꼭 다져놓은 흙 속에 씨앗을 묻고

이슬도 묻지 않은 처녀의 몸 속에

굵은 포도알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따가지 못하도록 밤마다 서리로 덮고

땅 속 깊은 물로 껍질을 기워

터질 듯 실핏줄 속에 붉은 태양을 숨겼습니다

꽉 찬 포도알 속

내 영혼의 즙을 짜서

잘 익은 포도주 한 병을 당신께 내어 드리고 가는 길

포도원을 떠난 검보랏빛 노을로

떠나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하늘 한 자락을 끌어 와 당신께 물든

마지막 인사여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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