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7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 | 송필용 그림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3022
811.6
도75흔
도종환 시화선집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의 시와 그림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장 뜨거운 순간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말들이 넘쳐흐르곤 합니다.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더 경건해지고자 말들이 두 손을 모으는 때가 많습니다. - 도종환(시인)
"도종환 선생님의 섬세하게 폐부를 파고드는 생태적 자연에 대한 희망과 사랑의 울림이 저의 지난 작업들과 일정 부분 공동분모가 되어 있었음을 느껴 투박하면서 자연의 맑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시의 아우라에 잡힐 듯 말듯 흐르는 물처럼 사유하고 명상하게 하는 빈자리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그림, 마음의 여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가에게 세상의 많은 꿈을 가슴에 품게 해주신 도종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시와 그림의 간극에서 펼쳐지는 풍경들과 마음의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 송필용(화가)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덕산중학교 교사로 복직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해인으로 가는 길』 등과 산문집 『모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과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과 민족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송필용
195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전남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학고제, 이화익갤러리, 금호미술관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진경 그 새로운 제안' (국립현대미술관), '몽유금강' (일민미술관), '구성과 중심' (예술의 전당), '한국모더니즘' (금호미술관), '가고픈 경기비경', '앙코르와트 기행전' 등 국내외 기획초대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금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청와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제비울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차례|
시인의 말
1부…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 가을 저녁 / 바람이 오면 / 꽃잎 / 담쟁이 / 늦가을 / 여백 / 처음 가는 길 / 희망의 바깥은 없다 / 홍매화 / 저무는 꽃잎 / 깊은 가을 / 시래기
2부…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초겨울 / 산벚나무 / 폐허 이후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빈 방 / 산경 / 그리운 강 / 오늘 밤 비 내리고 / 낙화 / 개울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자작나무
3부…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쓸쓸한 세상 / 섬 / 꽃다지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초저녁 / 혼자 사랑 /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나리소 / 꽃씨를 거두며 / 산 너머에서 / 쑥국새 / 오월 편지
4부…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이 세상에는 / 그대 잘 가라 / 꽃잎 인연 / 어떤 마을 / 목련나무 / 봄의 줄탁 / 연필깎기 / 빈 교실 / 어린이 놀이터 / 세우 / 돌아가는 꽃 / 눈 물
5부…함께 먼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흔들리며 피는 꽃 / 먼 길 / 저녁 무렵 / 깊은 물 / 나무 / 산맥과 파도 / 상선암에서 / 벗 하나 있었으면 / 풀잎이 그대에게 / 강 / 쇠비름 / 우 기
시의 그림들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들어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매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깊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날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콘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혼자 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와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아픔 그 그리움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먼 곳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습니다.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꽃잎 인연
몸 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 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 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먼 길
하늘엔 별도 없고
대추나무 잎마다 달빛만 흩어지는데
끝도 없이 먼 어둠을 건너는 구름
밤을 새워 풀그늘에 벌레는 울고
이 땅의 길들도 모두 저물어
저마다 쓰러져 깊게 누운 날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어쩌면 어쩌면 이리 아득해
몇 번이고 홀로 불을 켜고 앉아서
꺼지고 넘어지는 불씨를 안고
고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함께 먼 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 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우 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 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매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잇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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