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
안숙경 시집
2007, 천우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03281
811.6
안56보
첫 월경이 터진 날부터 보름달을 그려 놓고, 그 안에 맨드라미를 심었다.
꽃이 필 때마다 헛꿈인 줄 모르고 꿈만 키웠다.
가슴은 보름달만큼 커지고, 눈은 작아지고, 귀는 멀어지고, 손발은 떨어져 나간다.
입만 살아서 골목을 죽이고, 길을 만들고 싶은 맨드라미는 울다 웃다 족보에 갇힌 술꾼이 되었다.
아버지 닮은 발가락은 떠도는 별이 되었다. 치매에 걸린 유년의 목걸이만 가슴을 치고 있다.
안숙경 詩人
부산 출생
쥬리아 소네트 공모전 동상(1993)
『문예한국』 「화장을 지우고」로 등단(1993)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시상문인 회원
시인의 세상 초대작가
공저시집 『사랑의 노래 소네트』
『빈 가지에 이는 바람소리』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2동 184-107
청림파크빌라 나동 301호
이메일 : sundance425@hanmail.net
차례
■ 시인의 말
1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
나 / 숫자판에 없는 번호표 / 밤…춤 / 빵 /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 / 젖몸살을 앓는 여자 / 모자 속에 갇힌 여자 / 저 별이 위독하다 / 내 사랑 황소자리는 잠들고 / 아스피린 두 알 / 이 가을엔 삼나무 숲에 숨고 싶다 / 돼지꿈을 꾸고 싶은 날 / 아니면 말지 / 바람이 바람나면
2 골목 안의 죽음은 신문에 샬리지 않는다
어딘가에 /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 뒤꿈치가 권태로운 오후 다섯 시 / ?실화입니다 / 그래도 날개가 있는데 / 첼로 / 모기 / 바퀴벌레 / 늦가을 저녁 / 가을 남자 / 길에게 묻다 / 인사동 만다라 / 시(詩)방 / 골목 안의 죽음은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 박쥐 / 당분간은
3 사주 도둑은 없다
사주 도둑은 없다 / 추락한 손금 / 전화가 묻는다 / 사철나무의 노래 / 연(緣) / 업(業) / 맛있는 죽음 / 맨발로 아침을 부른다 / 마침표 화가와 쉼표 여자 / 기억에도 없는 날들로 / 얼지 마 / 비상구가 없다 / 한번 흔들어봐 / 이사 가고 싶다 / 이 시대의 귀신
4 서울 집시, 2006
11월의 꿈은 바람도 피해 간다 / 봄비를 밟으면서 / 삼팔따라지 / 야단법석 · 1 / 야단법석 · 2 / 야단법석 · 3 / 야단법석 · 4 / 야단법석 · 5 / 정동진 / 방패연 / 아쟁 산조 / 신들린 뒤꿈치 / 너름새에 흥을 박고 / 노을로 태어난 춤꾼 / 서울 집시, 2006
5 위장은 춥다
오월의 숲 / 위장은 춥다 / 가을은 / 통조림 음악 / 황지우 조각전(展)에 부치다 / 달팽이 / 밥그릇 / 귤은 이 맛이 아니야 / 그는 · 1 / 그는 · 2 / 그는 · 3 / 이웃 / 지하철 2호선을 타본 적이 있나요 / 유리창에 핀 백합 / 어금니가 흔들린다 / 푸닥거리 / 화장을 지우고 / 병실에서 / 수제비에 관한 기억 / 거울 / 한 방울 안약 / 사철나무의 노래 · 3 / 밤의 기별 / 죽었니, 살았니 / 출입 금지 / 홀로 춤을
밤…춤
벗었지 모두 벗어 버렸지 가슴 한쪽에서 보라색 무덤이
커지고 있는 걸 느꼈지
꿈에 시달리는 기타 울음을 달래려고, 발이 예쁜 그 여자는
맨발로 춤을 추지
열매에 빛을 저장한다는 일월 달밤에, 인디언 소녀처럼
긴 머리 팔랑거리며 춤을 추지
생명을 수혈받은 팔과 다리는, 별꽃이 만발한 별밭으로
날아다니며 춤을 추지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
첫 월경이 터진 날부터 보름달을 그려 놓고, 그 안에 맨드라미를 심었다. 꽃이 필 때마다 헛꿈인 줄 모르고 꿈만 키웠다. 가슴은 보름달만큼 켜지고, 눈은 작아지고, 귀는 멀어지고, 손발은 떨어져 나갔다. 입만 살아서 골목을 죽이고, 길을 만들고 싶은 맨드라미는 울다 웃다 족보에 갇힌 술꾼이 되었다. 아버지 닮은 발가락은 떠도는 별이 되었다. 치매에 걸린 유년의 목거리만 가슴을 치고 있다.
(아아 가슴만 살아서 움직이네)
내 사랑 황소자리는 잠들고
노인네 씻기고
젊은 애 깨우고
주변의 초상화를 닦고, 쓸고
하루는 멀고, 내일은 지루하고
카페인에 담금질하면서
삶의 풍경에 주리를 뜰면
혼자만의 놀이에 하품이 비명이 된다
비틀어 잠가도 새어 나오는 수돗물처럼
흐르는 꿈에서 썩은 사과 냄새가 난다
토하는 일상의 권태로움
리듬을 타고 책 보따리 품었다 쌓았다
먼지로 가슴을 적시면
폐병 말기 환자처럼 기침이 나를 깨운다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내 안에서 펄떡이는 것들을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내는 일
그것이 오후 4시에 해야 하는 일
제 몸 끓여가며 불과 싸우는 건
체념이 아니고
길들여가고 있는 한낮의 햇살 같은 것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희망 같은 것
끓고 있는 냄새가 방 안 가득 채운 동안
젓가락이 필요 없는 국물은
또 다른 이름으로 7시를 만난다
땅거미가 찾아온 창문 너머
잠깐 눈 맞춤 했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첼로
젖은 살결처럼 흐르는 아다지오
잿빛 그리움 타고 스며든다
자색 등꽃 터널을 빠져나온 나비 한 마리
구름에 떠밀리어
이슬로 바람 카고 흐른다
음(音)의 무게로 끊어진 혼자만의 날갯짓
금 간 손바닥으로 시린 가슴 쓰다듬으며
짙은 비음으로 깨우는
오늘의 장애, 내일의 장애
시(詩) 방
늘 깨어 있어 밤이 없는 방
책벌레가 춤을 추면 연필이 추임새를 넣고, 종이가 소리를 한다
진통은 신이 난 듯 산달을 채근한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그 방은, 자음과 모음이 꽃으로 피는가 하면
곧 시들기도 한다
전화가 묻는다
집으로 전화를 한다
울리던 신호음 끝나고
- 지금은 외출 중이니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
또 다른 목소리는 남겨지지 않았다
외로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전화기
피아노곡 유령이 살고 있는 방
목소리의 유령이 녹음되고 있다
만질 수 없는 음(音)이 손가락으로 들어와
카타쥘리처럼 굳은 몸을 두드린다
불행에 맞추어 방을 슬프게 하는 조명들
울음에 맞추어 방을 눈물 젖게 하는 소리들
지나가는 여인 2가 욱음을 던져준다
평생은 얼마 만큼인가
전화가 묻는다
이사 가고 싶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신음 때문에, 방바닥은 갈라지고, 시(詩)는 버려지고, 머리카락은 까치집을 짓다 허연 가루를 밤새도록 깔아 놓는다. 긁어 부스럼 만든 손가락은 연필을 부러뜨리고, 절망은 벽을 타고 창문을 넘다가 피 흘리며 짜증과 욕설로 원고지를 찢는다.
왼손은 왼발을 찍고, 오른손은 오른발을 찍는 나를 처형시키는 다락방에는 음악만 살아서, 트럼펫이 또 한번 죽여준다. 항아리 속에 갇힌 빗물처럼 부패한 감성.
예매가 필요한 시어(詩語). 줄서기를 포기한 절름발이 시간 탓이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되풀이하며, 게으른 미래를 점(占)치는 불길한 다락방.
야단법석 · 4
- 그냥 시인의 장례식
이 세상아 나는 빈손으로 간다 공수래 공수거
오복은 물복이다 술 석 잔은 살아도 석 잔, 죽어도 석 잔
간다 간다 한날한시를 모르는 세상아 춤을 추어라
산 사람 마음 풀고, 죽은 사람 마음 풀어
도깨비타령 진양조로 칠흑 같은 세상 가르네
한바탕 놀음으로 춤을 추어라
이 세상아 고부라지게도 질긴 세상아
꽃상여를 타고 떠나는 길손아
첫 잔은 사랑을 기억하는 맛이오
둘째 잔은 시(詩)의 행(行)을 가르는 맛이오
셋째 잔은 묶이고, 벗기고 푸는 맛이오
가오, 가오, 그냥 가오
폭죽을 터뜨리는 오월의 장미에 누워서
너름새에 흥을 박고
- 으이, 얼시구 -
고수의 추임새에
자귀나무에 앉아 있던 나비
노랑머리 풀어헤치고 요사를 떤다
쟁쟁 울리는 바람결
계면조로 풀리더니
두레박에 숨어 있던 어제의 내가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춤을 춘다
신명을 연필도 장단을 맞추고
소리꾼 북채 휘두르니
흥에 젖고 땀에 젖은 오늘의 詩가
나비 되어 날아다닌다
오월의 숲
나무는 서로 말한다
천년을 돌아 그 자리에서 약속도 없이
비 내리는 오월에 웃음으로 만나고 있다
선명한 사랑으로 젖은 잎사귀는 숲이 되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만나는 크고 작은 나무 사이로
구름이 떠돌아다닌다
고요와 함께 내리는 비에 젖은 해맑은 그리움은
부풀어 오월의 마지막을 아쉬워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긴 삶의 산등성이를
걸어서 퉁퉁 부어오른 발등
나무에 기대어 젖은 잎으로 얼굴을 숨긴다
나무는 말한다
누구나 등에 지니고 다니는 인연으로
사람은 점점 작아진다고
몸 안으로 밖으로 굴러다니던 바퀴는
삶의 은유로 길을 트는 나무 사이로 굴러간다
완전한 자유로 숲은 하늘을 덮는다
화장을 지우고
누군가에 의해 다리는 잘리고
그 눈길은 심장을 가르고
입술을 트게 만들었다
떠도는 숨결은
숨겨진 또 하나의
껍질을 벗긴다
화장을 지운 얼굴은
속까지 드러내며
세수를 한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가지런한 눈썹은
눈 뜨기를 거부하며
손바닥에 눈물을 심는다
골목 안의 죽음은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새벽 5時인지, 오후 5時인지 판토마임을 하는 세상
손짓, 발짓은 허무의 개그였다
허연 거품으로 몸치장을 하고
어둠의 박자를 긁어내듯 블루스로 움직인다
뼈까지 뒤틀리는 하루하루가
장애로 365日을 모두 삼켰다
네가 인제는 지겨워
치매 중인 세상 혼자만의 연기는 서툴다
만들어진 비극에는 재수 없는 이유만 등장했다
아니면 말지
못숨 걸고 덤빈다는 건 거짓말이다
울지 마 눈물은 마음을 마르게 하지
심장 뛰는 대로 살게 내버려둘걸 그랬나
즉석 사진기에 버려진 사람들의 증명사진에
내 얼굴이 찢어져 있다
모든문예지의등용문은전쟁중이다창칼에목이잘려도골목안의죽음은신문에실리지않는다
사주 도둑은 없다
맥반석에서 구워지는 한치처럼, 가을 햇살이 가슴 속에서 구워지고 있는 종로에서, 늘 소풍 가는 여자가, 보따리를 풀고, 피리를 불며 춤을 추고 있다. 볼장 다 본 사람들만 모여 박수를 치고 있다. 며칠째 세수도 안 한 그들은 마음 안에 숨겨 논 것을 토하며, 생명이 된 눈물의 춤을 추고 있다. 이불로 포갰던 신문들이 찢어지며, 바람개비로 돌고 있다. 가난은 게으른 자의 책임이라고, 기사를 썼던 기자의 얼굴이 찢어져 종로 거리를 돌고 있다.
가장 많은 이웃을 가진 시청 지하도의 식구들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어젯밤 자고 간 여자를 보내려고 박수를 치고 있다. 그 소리에 나무젓가락들이 쏟아지며, 다른 세상의 다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전생에 안개를 사랑했다가, 안개를 임신해, 다시 거리의 안개로 태어난 그들은 집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구워진 햇살로 다리를 감싸고 있는 그들은.
서울 집시, 2006
효자동 단발머리로 6년, 긴 머리로 4년을 걸어 다니면서도
4 · 19도 모르고, 5 · 16도 모른다
하이네 베끼고, 슈베르트 귀에 걸고, 니이체 가슴에 품고
세상은 몰라요 다
산(山)이 한 번 넘자 북한산이 보였고
산(山)이 또 한 번 넘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날마다 경례를 하면서 광화문을 떠돌았다
꿈과 이상이 소박맞고, 사람들에게 뺨 맞고, 화가 찬 마음 풀려고
화간을 쓰고, 화풀이 굿을 벌리고 싶어, 경복궁 은행나무를 안고 다녔다
빌딩숲에 갇혀 숨이 막혀도
실존의 단비 자판기 커피 맛과, 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오후 햇살의 게으름을 만나는 여유로 살고 있다
삶의 숨결 하나가 트였다
청계천에 한을 품었던 아들아 풀어라
둥글둥글 어울려 서로 도와 축축하게 살자
박수를 쳐라, 웃다 보면 즐겁고, 울다 보면 슬프다
사람들아, 서울아
신분을 죽여라 감탄사를 아끼지 마라
세상이 춤을 추고 있지 않니
긴 치맛자락에 붙어 다닌 독한 스트레스가
춤을 추고 있지 않니
위장은 춥다
밥알이 위벽을 부순다
구역질을 비린내가, 쉰내까지 게워내며
망가진 위장을 안고 병원 침대에 눕는다
빨간 꽃이 만발한 위장
신물로 채운 하루하루가
화살표 없는 위장은 하수구가 되었다
밥맛없는 삶은 밥만이 좋은 무기
예민한 위장을 무시한 죄
약 봉투를 들고 5층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
귀찮게 따라다니는 구역질
삶을 기만한 죄
거리는 좋은 시절 만난 듯 가지마다 새순이 돋았다
봄의 설법으로 시방세계가 춤추는 바람으로 가볍다
그 바람결에 보이는 삶은 한 움큼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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