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3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정약용 지음 | 노만수 엮어옮김
2013, 앨피
진로도서관
SJ001413
151.58099
정63ㅇ
다산 정약용 , 조선을 고발하다
"몽둥이로 때리고 욕설로 꾸짖는 것보다 아프고 쓰라리다.
말하는 자가 무슨 죄이랴? 듣는 자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가환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한 다산진면목 茶山眞面目
다산에 대한 수식어는 매우梅雨의 빗방울 수만큼이나 많다. 실학자, 서정시인, 경세가, 의약학자, 언어학자, 행정가, 논변가, 과학자, 지리학자……. 이처럼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남긴 다산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렌즈가 바로 '참여파 작가' 다산이다.
높은 벼슬아치 신분에서 죄인으로 추락한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은 수많은 시와 소설, 논설, 편지, 실학서를 써서 조선의 사회적 · 정치적 · 제도적 문제들을 고발하고 풍자하고 비판하며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찾으려고 애썼다. 다산의 문학관은 다음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문학을 숭상하는 일은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같아야 한다."
이 책에는 사회 현실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강자에겐 거침없고 약자에겐 한없이 다정한 진짜 '실천적 지식인' 정약용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다산의 글에는 조선 후기 봉건적 병폐로 피폐해진 백성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지배층 양반 관료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겨 있다.
엮어옮긴이 노만수
성균관대 정치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기자 재직 하다, 일본에서 수학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과학기술대학과 북경대학교에서 수학햇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했으며,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학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학 시절 연작시 <중세의 가을>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옮긴 책으로 《쟁경爭經》《불혹의 문장들》《논어와 주판》《사마천 사기史記》《정조正祖의 사기영선史記英選》《헤이안(平安) 일본》《언지록言志錄》, 소설 《섬》 등이 있다.
가로로 보면 산마루, 옆에서 보면 산봉우리 橫看成嶺側成峰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저마다 다르네 遠近高低各不同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까닭은, 不識廬山眞面目
오로지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네 只緣身在此山中
- 소동파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200년 전 그대는 /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 조선의 자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 가슴속 핏속에 살아 흘리고 있습니다. / 귀양살이 18년 혹한속에서도 그대는 / 만 권의 책 담으로 쌓아 놓고 고금동서를 두루두루 살피셨습니다. / 그 위에 다시 압권壓卷을 올려 / 한 시대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 나라 걱정 백성 사랑 꿈엔들 / 한시라도 잊으신 적 잇었으리오마는 / 때로는 탁한 세상 하 답답하여 / 탐진강 강물에 붓대를 히저었습니다. / 애절양哀絶陽이여 애절양이여, / 그러나 어떤가요 긓 200년 지금은 / 여전히 농민은 토지로 밭을 삼아 땀 쏟아 일구고 / 여전히 벼슬아치는 백성을 밭을 삼아 등짝을 벗겨먹고 있으니…… / 아, 다산이여 다산이여 / 그대 어둔 밤 조국의 별로 빛나지 않는다면 / 내 심사 이 밤에 얼마나 황량하리요 / 어느 세월 밝은 세상 있어 그대 전론을 펵 / 주린 백성 토지 위에 살찌게 하리요. - 김남주 <전론田論을 읽으며>
본성과 도道의 본체를 참으로 잘 알아서 줄기와 가지를 조리 있게 분석하고 다스린 것은 《맹자孟子》이다.
- 다산 <오학론五學論>
차 례
머리말 "나는 조선의 리얼리스트다"
1 가난한 선비가 자랑인가
무릇 '사실'에 주목하라
책 만 권 읽었다고 어찌 배부르랴
선비도 먹고 사는 수단을 경영하라
2 나라의 안위는 경제에 달렸거늘
자지 잘라 슬프구나
저 종놈을 내쫓아라
홀아비 과부가 도리어 부럽구나
<전론田論> : 다 같이 잘사는 길
파리야, 배 터지게 먹어 보아라
당나라 징세법처럼 현물 세금만 늘어나네
동백기름은 어디에 쓰려고
3 저잣 거리에서 건져 올린 지혜
주머니 속에 갇힌 듯 궁벽하구나
주자가 그러한 적이 있는가?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
네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얼마나 열렬하고 어진 아낙네인가
주막집 할머니가 일깨운 지혜
박겨포 앞에서 활이나 익히라고 꾸짖는대서야
노예가 된 마음이 아니로세
4 세상이 이다지도 공평하지 못한가
자식 팔려 가고 송아지마저 끌고 가네
너는 꼭 살아 돌아가 원수를 갚으라
아무개는 내 손에 죽지 않았소
과거가 조선을 망친다
귀족 자제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뱀 대가리를 쳐서 죽여라
횃대에 걸린 치마도 없다
조정은 백성의 심장이요
"아빠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큰 도적을 잡아야 백성이 산다
아전 술 한 잔에 환자還子가 석 섬
한 자리를 오래 꿰차고 있지 못하도록 하라
욕심쟁이 신선도 있는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용을 잡아?
5 산하는 옹색한데 당파 싸움 드세네
서로 싸운 지 200년, 조선 당쟁사
당쟁 그치고 화합하세
큰 고래 죽이려 온갖 꾀를 짜낸다네
전라도에 대한 물음에 답하다
신분과 지역 차별을 없애십시오!
살쾡이 대신 사냥개를 부르리
서시는 눈살을 찌푸려도 예쁘지만
중국 간다고 건들거리지 말라
6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다
예법에 매여 병자를 모른 체한다면
세상을 깨우치고 건강을 지키려는 조그만 뜻
"드디어 천연두 약이 완성되었네"
임금을 살리려 달려갔지만
지체 높은 자보다 가난한 자 먼저
7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
바른말 하는 자는 천금을 주고도 못 얻는다
술자리에서 벼슬아치를 감별하는 법
"정약용의 판단이 옳다"
프로파일러 사또 정약용
8 오로지 너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
내 딸 '호뚱이'를 가슴에 묻고
나는 죽는 것이 나은데도…
부디 어머니 곁을 떠나지 마라
오로지 정情대로 할 뿐
형제이자 지기였던 둘째 형님!
그와 같은 세상에 같은 형제가 되어
9 돈을 간직하는 최고의 방법은 나눔이다
남을 먼저 도운 적이 있느냐
생계가 먼저고 공부는 그 다음이다
논밭을 물려주는 일이 믿을 만한가?
베풀되 거져 주지 말라
10 시대를 아파하고 격분하라 _ 다산의 시론과 문장론
시를 쓰려면 먼저 뜻을 세우라
미묘하고 완곡하게 드러내라
문장의 길은 곧 사람의 길
고전을 닦으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부록> 다산약전茶山略傳 : 조선의 실천적 지성인이자 통합학문 백세사百世師
변상벽卞尙壁이 변고양이로 불리는 까닭은 卞以卞貓稱
고양이 잘 그려 사방에 이름났기 때문이네 畫貓名四達
이제 또다시 병아리 거느린 닭 그리어 今復繪鷄雛
마리마다 솜털이 살아 있는 듯하네 箇箇毫毛活
어미닭 까닭 없이 성내니 母鷄無故怒
낯빛 붉으락푸르락 사납고 매섭다네 顏色猛峭嶻
(중략)
형형색색 세밀하여 진짜 닭이랑 거의 같고 形形細逼眞
출렁이는 기운 또한 막을 수 없네 滔滔氣莫遏
듣자하니 그림 갓 새로 그렸을 때 傳聞新繪時
수탉이 잘못 보고 야단법석 떨었다네 雄鷄誤喧聒
또한 변고양이가 그린 오원도는 亦其烏圓圖
뭇 쥐들을 을러 겁먹게 하였다네 可以群鼠愒
뛰어난 예술이 더 나아가 여기에 이르니 絶藝乃至斯
쓰다듬고 어루만져도 흥미가 줄어들지 않네 摩挲意未割
엉성한 솜씨 지닌 화가는 산수화 그린다며 麤師畫山水
어지러이 붓 놀려 손시늉만 활개친다네 狼藉手勢闊
- <변상벽의 '모계령자도'에 부치다(題卞尙壁母계領子圖)>. 1827년경
궂은 장맛비 열흘 만에 오솔길 끊기고 苦雨一旬徑路滅
성안 후미진 골목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城中僻巷煙火絶
내가 성균관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와 我從太學歸視家
문안으로 들어서니 시끌시끌한 소리 왁자지껄하네 入門譁然有饒舌
듣자하니 항아리 텅 비어 끼니거리 떨어진 지 며칠째이고 聞說罌空已數日
호박 팔아 허기진 배에 먹을거리 마실거리 채웠다 하네 南瓜鬻取充哺歠
어린 호박 다 땄으니 마땅히 어찌할꼬? 早瓜摘盡當奈何
늦게 핀 호박꽃 아직 채 떨어지지 않아 열매 맺지 않았네 晚花未落子未結
이웃집 남새밭 항아리마냥 큰 호박 보고 鄰圃瓜肥大如瓨
어린 계집종이 좀도둑처럼 살그머니 훔쳐 왔다네 小婢潛窺行鼠竊
돌아와 여주인에게 온몸 온 마음 바치려다 되레 야단만 맞고 歸來效忠反逢怒
누가 네게 훔치라고 가르쳤냐며 회초리 꾸중 호되다네 孰敎汝竊箠罵切
어허, 죄 없는 아이 당분간 꾸짖지 마오! 嗚呼無罪且莫嗔
내가 이 호박 먹을테니 더 이상 잔소릴랑 하지 마소! 我喫此瓜休再說
내가 남새밭 주인장에게 떳떳하게 알리고 비는 게 낫지! 爲我磊落告圃翁
오릉중자 작은 청렴 나에겐 하찮다오. 於陵小廉吾不屑
때 만나면 원대한 포부 새 날개처럼 날아오를 터…… 會有會風吹羽翮
그렇지 않으면 금광이라도 파 목구멍 포도청 지켜야지 不然去鑿生金穴
책 만 권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破書萬卷妻何飽
밭 두 뙈기만 있어도 계집종 참말로 깨끗할걸! 有田二頃婢乃潔
- <남과탄南瓜歎>, 1784
갈밭마을 젊은 아낙네 기나긴 울음소리 蘆田少婦哭聲長
고을 관아문 향해 울다 푸른 하늘 보고 부르짖네 哭向縣門號穹蒼
수자리 살러 간 지아비 아직 못 돌아온 일은 있어도 夫征不復尙可有
옛날부터 사내가 자지를 잘랐다는 말 들어 보질 못했네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상복 이미 입었고 舅喪已縞兒未澡
갓난애는 배냇물도 안 말랐거늘
시아버지 지아비 갓난애 이름이 죄다 군보에 올랐네 三代名簽在軍保
야박스런 말에 달려가 하소연해도 문지기가 薄言往愬虎守閽
호랑이처럼 가로막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 끌고 가네 里正咆哮牛去早
지아비 칼을 갈아 방에 드니 삿자리에 붉은 피 가득하고 磨刀入房血滿席
아이 낳아 어처구니없는 재앙 만났으니 스스로를 원망하네 自恨生兒遭窘厄
누에 치는 잠실에서 함부로 자지 잘린 사마천에게 蠶室淫刑豈有辜
어찌 죄가 있었으랴
내시로 출세하고자 거세한 민閩 땅 자식들도 閩囝去勢良亦慽
참으로 서럽다네
자식 낳고 사는 거야 하늘이 내린 순리이고 生生之理天所予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 되는 법이라네 乾道成男坤道女
불깐 말 불깐 돼지조차도 슬프다 말하거늘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입에 풀칠하기 바쁜 무지렁이들이야 況乃生民思繼序
대를 잇는 은혜를 입은들 무엇하리오
부자들은 한 해 내내 가야금 풍악이나 즐기면서 豪家終世奏管弦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지 않네 粒米寸帛無所損
우리 모두 한결같이 어린 백성이거늘 均吾赤子何厚薄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쓸쓸한 나그네 방에서 <시구> 편을 되풀이로 외우네 客窓重誦鳲鳩篇
- <애절양哀絶陽>, 1803
■ 한국 다도의 중흥조로 꼽히는 초의 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1812). 초의는 다산이 아끼는 제자였다.
옛날에 성현들이 어진 정치 베풀 때는 聖賢施仁政
늘 홀아비와 과부 먼저 불쌍히 여겨 돌보라 말했다지만 常言鰥寡悲
이젠 홀아비와 과부가 참말로 부럽기만 하누나 鰥寡眞足羨
굶어도 자기 한 몸만 굶으면 그만 아닌가! 飢亦是己飢
(중략)
엄숙하고 점잖은 조정의 어진 벼슬아치들이여! 肅肅廊廟賢
나라의 안위는 경제에 달렸거늘 經濟仗安危
도탄에 빠진 백성 목숨 生靈在塗炭
나리들 아니면 그 누가 구제하랴? 拯拔非公誰
(중략)
간사한 소인배는 거짓말 서슴지 않고 奸民好詐言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 선비들, 迂儒多憂時
시절이 수상타 근심하는 말이라곤
오곡이 풍성하여 흙인 양 지천인데도 五穀且如土
농사에 게으르니 스스로 무진장 굶주리는 게 마땅하다 하네! 惰農自乏貲
- <기민시飢民詩>, 1795
탐관오리 단속한다는 소리도 거짓말일 뿐 檢發徒虛語
마침내 멀리 떠나는 유랑민 신세라네 流亡遂遠蹤
한나라 조정 때 같은 진휼은 없고 漢廷無賑貸
당나라 징세법처럼 현물 세금만 늘어나네 唐稅疊調庸
탈세자 잡느라 이웃 마을까지 떠들썩하고 逮捕騷鄰里
먼 친척에게까지 밀린 세금 빚을 물리네 徵逋及遠宗
감사의 영令 깃발 펄럭여 촌사람들 화들짝 놀라게 하니 令旗驚獵獵
둥둥 농사 굿하는 북소리마저 멎었다네 賽鼓閴鼕鼕
제멋대로 까부는 비장의 횡포 아니고 裨將非專輒
제 몸을 살찌우는 감사의 책임이라네 監司乃自封
- <맹화와 요신, 곧 오국진 · 권기 두 벗이 공주 창곡의 부패한 행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실태를 극구 말하기에
그 말을 내용으로 장편 삼십 운을 짓다[孟華堯臣, 卽吳權二友,
盛言公州倉穀爲弊政, 民不聊生, 試述其言, 爲長篇三十韻]>, 1795
1
새로 짠 무명베 눈결같이 고와 애지중지하였건만 棉布新治雪樣鮮
이방에게 바칠 돈이라고 졸개 놈이 빼앗아 가네 黃頭來博吏房錢
누전漏田 세금까지 별똥별 불꽃처럼 다그쳐 漏田督稅如星火
삼월하고 중순이면 조세 실을 배를 띄운다네 三月中旬道發船
2
완도 황옻칠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여 莞洲黃㯃瀅琉璃
온 천하에 이 나무 진기하다 소문났네 天下皆聞此樹奇
지난해 임금님께서 옻칠 공납 면제했더니 聖旨前年蠲貢額
봄바람에 베어 낸 그루터기에 가지 또 났다네 春風髠枿又生枝
3
전복이야, 옛날부터 차츰차츰 조정에서도 즐겼지만 自古漸臺嗜鰒魚
동백기름이 창자 씻어 낸단 말 헛말이 아니로세 山茶濯䐈語非虛
고을 안 구실아치 들창문 방에는 城中小吏房櫳內
규장각 학사들이 억수로 보낸 서찰이 두루 꽂혀 있네 徧揷奎瀛學士書
- <탐진촌요15수耽津村謠十五首> 중에서, 1802
스무 살 무렵 임금님 계시는 서울에서 노닐 때 弱歲游王京
벗 사귀는 수준이 비루하지 않았네 結交不自卑
속물기 벗은 운치만 있으면 但有拔俗韻
이걸로 속마음까지 넉넉히 통하였네 斯足通心期
힘을 합하여 공자 학풍의 도로 돌아가 戮力返洙泗
세상 주름잡는 학문 따윌랑은 다시 묻질 않았네 不復問時宜
예의는 비록 잠시나마 새로웠으나 禮義雖暫新
허물과 후회 또한 이로부터 생겨났다네 尤悔亦由玆
지닌 뜻 굳세고 참되지 않다면 秉志不堅確
이 길 어찌 순탄만 하랴? 此路寧坦夷
늘 두렵구나, 가는 도중 뜻이 변해 常恐中途改
언제까지나 뭇사람 비웃음거리나 되지 않을지 永爲衆所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嗟哉我邦人
주머니 속에 갇힌 듯 궁벽하구나 辟如處囊中
세 방향 둥근 바다로 에워싸였고 三方繞圓海
북방은 높고 큰 산이 주름져 있네 北方縐高崧
온몸 늘 구불구불 움츠려 펴지 못하니 四體常拳曲
뜻과 기상인들 어찌 가득 채울 수 있으랴? 氣志何由充
성현은 만 리 밖에 있거늘 聖賢在萬里
누가 이 몽매함을 깨우쳐 줄 수 있으려나? 誰能豁此蒙
고개 들어 온 누리 쳐다보아도 擧頭望人間
어스레한 눈동자 흐리멍덩한 정신만 뚜렷이 보이네 見鮮情曈曨
남의 것 사모하고 따라하느라 촐랑촐랑하다 汲汲爲慕傚
훌륭한 기술을 미처 배울 겨를이 없네 未暇揀精工
뭇 바보들이 한 머저리를 치켜세우고 衆愚捧一癡
입 딱 벌리고 다 함께 무작정 받들자 하네 唅令共崇
단군 임금 세상보다 못한 게 아닌가? 未若檀君世
절박한 옛 풍속을 지녔던 그 시절보다! 質朴有古風
- <술지述志>, 1782
노나라 할아버지 공자가 이 도道를 가르치면서도 魯叟講斯道
그 절반이 임금의 정치 문제였다네 王政居其半
송나라 늙은이 주희가 여러 차례 올린 상소문도 晦翁屢抗章
온통 조정의 방침을 논술하였다네 所論皆廟算
지금 선비들은 공리공담만 좋아하지 今儒喜談理
나라 정책과는 얼음과 숯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네 政術若氷炭
깊이 숨어 감히 밖에 못 나서거니 深居不敢出
한 번 나올 참이면 남의 노리갯감 꼴이라네 一出爲人玩
마침내 거짓되고 경박한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遂令浮薄人
나랏일 깔보고 거칠게 다루게 하네 淩厲任公幹
- <고시27수古詩二十七首> 중 24번째 수, 1801
(전략)
떠날 때 갖옷 거지에게 벗어 주고 去時綿裘施行丐
바꿔 입은 망가진 옷 남루하여 성한 곳 하나 없네 換着敗衣襤褸無完縫
(중략)
노래 끝나면 화선지 찾아 붓에 먹물 담뿍 묻혀 歌竟索紙蘸筆爲墨畫
묵화 치는데
가파른 봉우리 성난 바위 콸콸 솟는 샘물 畫出峭峰怒石急泉與古松
늙은 소나무 그리네
번개 소리 우레 소리 벼락 소리 어둡고 음산한 풍경이며 震霆霹靂黑陰慘
얼음 눈 상고대 성엣장과 달 밝고 산기운 자욱한 氷雪淞凘皎巃嵸
우뚝한 산이라네
더러는 늙은 등나무 괴상한 덩굴 或畫壽藤怪蔓相紏綰
서로 얽힌 모양 그리고
더러는 재빠른 송골매와 사나운 보라매 或畫快鶻俊鷹相撞摐
싸우는 광경 그리고
더러는 하늘 날며 구름 쫓아 노니는 신선도 그리는데 或畫游仙躡空放雲氣
꽃무더기 수풀처럼 무성한 수염 눈썹 머리카락이 須眉葩髿森欲衝
용솟음치고
더러는 오뚝이 앉아 가려운 등 긁는 궁색한 스님의 或畫窮僧兀坐搔背癢
상어 뺨 원숭이 어깨 비뚤어진 입 鯊腮玃肩喎脣盍睫酸態濃
속눈썹이 눈을 덮은 초라한 몰골도 그리고
더러는 용 귀신 불 뿜으며 뱀과 싸우는 或畫龍鬼噴火鬪蛇怪
괴이한 풍경 그리다가
요사한 두꺼비가 달을 파먹어 或畫妖蟇蝕月侵兔舂
토끼 방아 못 찧는 광경도 그리네
팔이 잘린대도 부녀자는 그리려 하지 않고 斷捥不肯畫婦女
모란꽃 작약꽃 붉은 연꽃도 그리지 않네 與畫牧丹勺藥紅芙蓉
또 그림 팔아 술빚 기꺼이 갚지마는 亦肯賣畫當酒債
하루치만 벌어 그날에 맞게 써 버리네 一日但酬一日傭
늘 성과 이름 관아에 알려질까 두려워 常恐姓名到官府
고하고 싶은 자 있으면 有欲告者怒氣勃勃如劍鋒
노기가 칼날처럼 시퍼렇다네
- <천용님을 위한 노래天慵子歌>
계루고鷄婁鼓(작은북) 소리 맞춰 풍악이 울리니
둘러싼 자리가 가을 물처럼 고요하네
진주성 여인 꽃 같은 얼굴에
무사 옷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대장부로세
(중략)
쨍그렁 칼 던지고 사뿐히 돌아서니
호리호리한 허리는 처음 모습 그대로네
서라벌 여악女樂은 우리나라 으뜸으로
황창무黃昌舞 옛 곡조 지금까지 전해 오네
백 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이룩할 뿐
살찐 몸매 처진 볼 둔한 자는 못 춘다네
너 지금 꽃다운 나이 기예가 절묘하니
옛날 이른바 낭자 협객 논개를 이제야 보는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 너로 인해 애태웠나
이미 미친바람 장막 안에 몰아치네
-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1780
(전략)
벌레들도 스스로를 힘껏 지키려 昆蟲盡自衛
발톱 어금니 발굽 뿔 독 두루두루이거늘 爪牙蹄角毒
태평한 때랍시고 병사 다루는 일 내팽개쳤다가 時平不講兵
외적 쳐들어오면 옴짝달싹 못하고 무너지고 마네 寇來任隳觸
진짜 장군은 송골매와 같아서 名將如蒼鷹
용맹하고 날쌔게 멀리 날며 눈동자도 촛불처럼 빛난다네 驍邁眸如燭
편안해서 뚱뚱한 사내가 갑작스레 전쟁터에 나가면 胖夫輒登壇
지장智將이 복장福將만 못하다고 뇌까리네 云智不如福
요즈음 홍이紅夷(서양인)들 박격포란 걸 들으니 近聞紅夷礮
새로이 만들어 더더욱 무섬 탄다네 創制更殘酷
앉아서 옛날 옛적 풍속이나 지키면서 坐守太古風
활 화살 따위나 익히라고 꾸짖는대서야…… 弓箭有課督
- <고시27수古詩二十七首> 중 27번째 수
새로 거른 막걸리 젖처럼 뽀얗고 新篘濁酒如湩白
큰 사발 보리밥 높이가 한 척이로세 大碗麥飯高一尺
밥 먹자 도리깨 들고 타작마당 둘러서니 飯罷取耞登場立
두 어깨 검게 그을린 살 붉은 햇빛에 번들거리네 雙肩漆澤翻日赤
응헤야, 소리 내며 나란히 발 들어 두들겨 패니 呼邪作聲擧趾齊
잠깐 사이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 널리네 須臾麥穗都狼藉
서로 주고받는 노동요 곡조 갈수록 높아지고 雜歌互答聲轉高
오로지 처마까지 흩날리는 보릿대 가루만 보이네 但見屋角紛飛麥
그 낯빛 살펴보니 즐겁고도 즐거워라 觀其氣色樂莫樂
몸뚱어리 노예가 된 마음이 전혀 아니로세 了不以心爲形役
낙원과 낙교는 멀리 있지 않거늘 樂園樂郊不遠有
무엇이 안타까워 속세간 나그네로 헤매리오! 何苦去作風塵客
- <보리타작打麥行>, 1801
1
임금님이 논밭 가지고 있는 것은 後王有土田
가령 부잣집 영감 같네 譬如富家翁
영감님 논밭 백 이랑이고 翁有田百頃
아들 열 제각기 따로 분가해 산다면 十男各異宮
마땅히 한 집에 열 이랑씩 주어 應須家十頃
굶주리거나 배부른 형편을 같게 해야 한다네 飢飽使之同
약삭빠른 아들 팔구십 이랑을 삼켜 버리면 黠男呑八九
못난 자식 곳간 늘 비기 마련이네 痴男庫常空
약삭빠른 아들 고운 비단옷 입을 때 黠男粲錦服
못난 자식 절름절름 병나서 고생이라네 癡男苦尫癃
영감님 눈으로 만일 그 꼴 좀 볼 성치면 翁眼苟一盻
불쌍히 여기어 슬퍼하고 그 마음 쓰려야 하거늘 惻怛酸其衷
내버려만 둔 채, 몸소 다스리지 않으니 任之不整理
못난 자식들만 서쪽 동쪽 이리저리 떠돈다네 宛轉流西東
뼈와 살을 똑같이 받았건만 骨肉均所受
자혜로움이 어찌 이다지도 불골평하단 말인가 慈惠何不公
큰 줄기 이미 무너져 쓸모없기에 大綱旣隳圮
온갖 일이 꽉 막혀 통하지 않는 거라네 萬事窒不通
한밤중 책상을 치고 일어나 中夜拍案起
활꼴처럼 굽은 높은 하늘 우러르며 한숨짓네 歎息瞻高穹
2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맨머리들이란 芸芸首黔者
모두 똑같이 우리나라 백성이라네 均爲邦之民
만일 마땅히 세금 거둘 셈이면 苟宜有徵斂
부자들에게 거두어야 옳구나 哿矣是富人
함부로 벗기고 베어 내는 정치를 胡爲剝割政
왜 품 팔아 빌어먹고 사는 무리에게만 치우쳐 하는가? 偏於傭丏倫
군보는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軍保是何名
극도로 모진 횡포를 부린단 말인가 作法殊不仁
한 해 내내 힘들여 일해도 終年力作苦
이미 제 몸 하나 가릴 옷 없고 曾莫庇其身
뱃속에서 갓 태어난 젖내 나는 어린 목숨도 黃口出胚胎
죽어 백골이 되고 흙먼지가 된 목숨도 白骨成灰塵
여전히 몸에 요역이 따라다니니 猶然身有徭
곳곳마다 가을 하늘 우러러 울부짖고 處處號秋旻
원통하고 혹독해 자지까지 잘라 버릴 지경이니 冤酷至絶陽
이 얼마나 비참학 슬프고 쓰라린 일인가! 此事良悲辛
호포도 오랫동안 의논한 끝에 户布久有議
자못 고르게 하자는 뜻을 세웠거늘 立意差停勻
옛날에 평양 감영에서 往歲平壤司
겨우 몇 십 일 동안만 시험하다 그만두었네 薄試纔數旬
만인이 산에 올라 통곡하노니 萬人登山哭
어찌 임금이 조칙을 펼칠 수 있으랴 何得布絲綸
먼 곳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가까이서부터 바로잡고 格遠必自邇
낯선 사람 다스리려면 반드시 친한 사람부터 다스려야지 制疏必自親
어찌하여 고삐와 굴레를 가지고서 如何羈馽具
야생마부터 먼저 길들이려 하는가? 先就野馬馴
끓는 물을 퍼내어 다시 붓고 끓는 것을 막는 꼴이라니 探湯乃由沸
꾀를 어찌 펼 수 있으랴? 計謀那得伸
서도西道 백성들 오랜 세얼 버림받고 억눌리어 西民久掩抑
열 대 동안 벼슬아치 되는 길 막혀 버렸네 十世閡簪紳
겉으로냐 비록 공손한 체할망정 外貌雖愿恭
뱃속 늘 수레바퀴마냥 꼬여 있다네 腹中常輪囷
칠치漆齒(왜적)들 옛날에 나라 삼켰을 때 漆齒昔食國
의병들 곳곳에서 일어나 말달리며 싸웠지만 義兵起踆踆
서도 백성들 홀로 팔짱 끼고 수수방관한 것은 西民獨袖手
참으로 까닭이 있음을 돌이켜 헤아려야만 하네 得反諒有因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拊念腸內沸
술이나 진탕 마시고 참마음이나 되찾으려네 痛飮求反眞
3
농사 짓는 자는 반드시 곡식 비축하여 耕者必蓄食
세 해 농사지으면 한 해 치를 쌓아 두고 三年蓄一年
구 년이면 삼 년 치를 모아 두어 九年蓄三年
흉년 들면 곡식 나누어 주며 하늘을 돕는다네 檢發以相天
한번 사창이 문란해지자 社倉一濫觴
만 목숨이 잇달아 넘어져 슬피 우는구나 萬命哀顚連
빌려주고 빌리는 건 모름지기 양쪽 다 원해야 하거늘 債貸須兩願
고집스럽게 이를 강요하면 불편할 뿐이네 强之斯不便
온 나라 온 사람이 절레절레 도리머리 치고 率土皆掉頭
단 한 사람도 군침 흘리는 자 없다네 一夫無流涎
봄철에 벌레 먹은 곡식 한 말 받고 春蠱受一斗
가을에 방아 찧고 난 쌀 두 말을 다 바쳐야 하네 秋糳二斗全
하물며 좀먹은 쌀값을 돈으로 내라 하니 況以錢代蠱
어찌 방아 찧어 좋은 쌀 팔아 돈을 안 바치겠는가! 豈非賣糳錢
남는 이문은 간사하고 음흉한 벼슬아치만 살찌우고 贏餘肥奸猾
벼슬자리 하나에 밭이 천 이랑 생기거늘 一宦千頃田
쓰라린 고초만 아랫자리 민초들에게 돌아가니 楚毒歸圭蓽
긁어 가고 벗겨 가고 걸핏하면 매타작이라네 割剝紛箠鞭
부엌칼 가마솥 이미 깡그리 가져가고 銼鍋旣盡出
자식 팔려 가고 송아지마저 끌고 가네 孥粥犢亦牽
군량미 쌓아 놓는단 군소리나 하지 말라 休言備軍儲
이 말이 헛되이 둘러대어 꾸민 거짓말이로다! 此語徒諞諓
섣달그뭄 가까우면 곳간 닫아걸고 封庫逼歲除
새봄도 오기 전에 곳간이 바닥나니 傾囷在春前
곡식 쌓아 둔 기간은 겨우 두어 달뿐이고 庤稸僅數月
한 해 내내 곳집은 텅텅 비어 있는 꼴이지 通歲常枵然
군사 일으키는 일은 본래 때가 없거늘 軍興本無時
하필 한때만 우연찮게 탈 없으랴? 何必巧無愆
군량을 농가에 대준다는 말도 말라 休言給農饟
자애 베푸는 척도 지나치게 부지런해 고통이네 慈念太勤宣
아들딸 이미 제각기 살림났으면 兒女旣析產
부모도 자식들 뜻대로 맡겨 두거늘 父母許自專
헤프거나 아끼거나 자기들 맘에 맡겨 둬야지 靡嗇各任性
멀건 죽 쑤어라 된 죽 쑤어라, 무얼 하러 참견하랴? 何得察粥饘
무릇 자식 부부끼리 의논해서 하는 대로 내버려 둬야지 願從夫婦議
지나친 부모 사랑 바라지도 않는다네 不願父母憐
상평은 본래 좋은 법이었건만 常平法本美
아무런 까닭 없이 버림 받았네 無故遭棄捐
어쩔 도리가 없구나! 또 술이나 실컷 마시자꾸나! 已矣且飮酒
백 단지 술이 샘물같아 취하지도 않는구나! 百壺將如泉
4
해마다 창경궁 춘당대에서 과거 보는데 春塘歲試士
수많은 선비들이 한 자리에서 겨루니 萬人爭一場
눈 밝은 이루가 백 명 있다 한들 縱有百離婁
낱낱이 감시할 순 없는 노릇이지 鑑視諒未詳
붉은색으로 제멋대로 채점해 버리니 任施紅勒帛
과거자의 당락은 시험관 손에 달렸다네 取準朱衣郞
별똥별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奔彴落九天
눈 달린 자 모조리 우러르기 마련이네 萬目同瞻昂
과거제도는 법 무너뜨리고 요행심만 길러 敗法啓倖心
온 세상 사람들 모두 미치광이 같네 擧世皆若狂
지금까지 먹물들 따져 말하길 於今識者論
옛날 변계량이 허물을 거슬러 올라가 탓하네 追咎卞季良
시의 격조가 본래 낮고 더러워 詩格本卑陋
끼친 해독이 크고 넓어 까마득하다네 流害浩茫洋
마을마다 앉아 있는 선생님들이 村村坐夫子
한나라 당나라 옛글은 가르치지 않고 敎授非漢唐
어디서 온 백련구百聯句 인지 何來百聯句
읊고 외우는 소리 온 방 안 가득하다네 吟誦方滿堂
항우와 유방 이야기만 項羽與沛公
지루하고 소리 없이 쓰고 또 쓰네 支離連篇章
과시체에 능한 강백은 입부리만 놀리고 姜柏放豪嘴
노긍(조선 후기 시인)처럼 창자에서 기묘한 말만 쏟아내네 盧兢抽巧脹
한평생 공부하여 성인처럼 되고 싶었으나 終身學如聖
죽도록 소동파와 황정견(송대의 시인)은 엿보지 않았네 逝不窺蘇黃
시골에서는 비록 내로라하였지만 縱爲閭里雄
대관절 세상사 돌아가는 모양새를 몰랐네 又昧時世粧
대를 이어 이름을 날리지도 못했거늘 世世不成名
도리어 농사일 누에 치는 일로 돌아가질 않네 猶未歸農桑
과거에 뽑히는 건 또 논할 게 없고 選擧且未論
문장이래야 더더욱 보잘것없고 거칠 뿐이네 文字尙天荒
어찌하면 대나무 만 그루 가져다가 那將萬箇竹
천 길만큼 긴 빗자루를 묶어 束箒千丈長
쭉정이 먼저 따위 싹싹 다 쓸어서 盡掃秕穅塵
송두리째 바람에 날려 버릴까 臨風一飛颺
5
높고 큰 산이 아름다운 꽃 모아 피우면서 山嶽鍾英華
본래 꽃의 씨족 가리지 않았네 本不揀氏族
반드시 한 가닥 좋은 기운이 未必一道氣
늘 최씨네, 노씨네 뱃속에만 있으란 법 없네 常抵崔盧腹
보배로운 솥 솥발이 뒤집혀야 좋고 寶鼎貴顚趾
향기로운 난초 깊은 골짝에서 자라네 芳蘭生幽谷
위공(송나라 명신 한기)은 천첩의 아들로 일어났고 魏公起叱嗟
희문(송나라 명신 범중엄)도 의붓아비 밑에서 자랐네 希文河葛育
중심(명나라 대학자 구준)은 변방의 경해 출신이지만 仲深出瓊海
재능과 꾀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네 才猷拔流俗
우리나라는 어찌하여 어질고 유능한 자 벼슬길 좁아 如何賢路隘
뭇사람들 쭈뼛쭈뼛 움츠려 드나? 萬夫受局促
오로지 제일골만 가려 뽑아 벼슬에 앉히고 唯收第一骨
나머지 골품은 노예나 종과 같네 餘骨同隷僕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 늘 눈썹 찡그리고 西北常摧眉
서얼들은 죄다 통곡만 하네 庶孼多痛哭
위세 당당한 수십 가문이 落落數十家
대대로 나라의 녹봉 삼켜 왔네 世世吞國祿
그 가운데서도 붕당이 우리나라를 나누고 就中析邦朋
서로 죽이며 엎치락뒤치락 뒤집으니 殺伐互翻覆
약한 당파의 살을 강한 당파가 뜯어먹고 弱肉強之食
대여섯 세도가만 남아 거드름 피우네 豪門餘五六
이들만이 재상이 되고 以玆爲卿相
이들만이 판서와 감사가 되고 以玆爲岳牧
이들만이 승정원의 벼슬아치를 맡고 以玆司喉舌
이들만이 감찰 벼슬아치에 기대고 以玆寄耳目
이들만이 숱한 벼슬자리를 오로지 해먹고 以玆爲庶官
이들만이 많은 옥사를 살피네 以玆監庶獄
먼 시골 백성 아들 하나 낳아 遐氓產一兒
빼어난 기품이 난새와 학 같으니 俊邁停鸞鵠
그 아이 여덟아홉 살 되도록 자라서 兒生八九歲
뜻과 기상이 가을철 대나무 같았네 氣志如秋竹
아비 앞에 윗몸 꼿꼿이 세우고 무릎 꿇고 여쭈었네 長跪問家翁
"제가 이제 사서오경을 다 읽어 兒今九經讀
천 명 중에서 으뜸인 경술을 지녔사오니 經術冠千人
혹여 홍문관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倘入弘文錄
아비가 대답하네, "너는 천한 족속이라 翁云汝族卑
임금님을 곁에서 보좌하는 벼슬을 할 자격이 없다!" 不令資啓沃
"제가 지금 큰 활을 당길 만하고 兒今挽五石
무예가 극곡(춘추시대 진晉나라 장수)과 같으니 習戎如郤縠
어떻게든 오영의 장수나 되어 庶爲五營帥
말 앞에 대장기를 세워 보렵니다!" 馬前樹旗纛
아비가 대답하네, "너는 낮은 족속이라 翁云汝族卑
장군의 수레도 탈 수 없다!" 不許乘笠轂
"제가 이제 벼슬아치 일을 배워 兒今學吏事
위로는 한나라의 뛰어난 수령 공수와 황패를 이어받을 만하니 上可龔黃續
모름지기 고을 벼슬아치 인끈이나 차고 應須佩郡符
평생 동안 고량진미 물리도록 즐기렵니다." 終身厭粱肉
아비가 대답하네, "너는 하찮은 족속이라 翁云汝族卑
순리도 혹리도 너랑은 상관이 없다!" 不管循與酷
자식 놈 그제야 발끈 화내며 兒乃勃發怒
책을 던지고 활과 활집이랑은 부숴 버리고 投書毀弓韣
저포놀이 골패놀이 摴蒲與江牌
마작놀이 공차기놀이로 馬弔將蹴毱
허랑방탕해 아무런 재목도 되지 못한 채 荒嬉不成材
늙고 어그러져 시골구석에 파묻혀 버리네 老悖沈鄕曲
재산 많고 권세 있는 집안이 아들 하나 낳아 豪門產一兒
흉포하고 거만하기가 천리마나 녹이綠駬 같으니 桀驁如驥騄
그 아이 여덟아홉 살 되어 兒生八九歲
곱고 예쁘장한 옷 입고 웃으면 粲粲被姣服
손님이 말하네, "너는 걱정하지 마라 客云汝勿憂
너희 집은 하늘이 복 내린 집이라서 汝家天所福
너의 벼슬도 하늘이 정해 놓아 汝爵天所定
청관, 요직 맘대로 된단다 淸要唯所欲
헛되이 땀 흘릴 필요 없고 不須枉勞苦
문장 닦기를 과거 시험 공부마냔 죽어라 할 것 없고 績文如課督
때 되면 저절로 좋은 벼슬 오리니 時來自好官
편지나 쓸 줄 알면 그걸로 족하다!" 札翰斯爲足
그 자식 놈, 그래서 깡충 뛰며 좋아하고 兒乃躍然喜
책 상자는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不復窺書簏
마작이며 골패라든지 馬弔將江牌
장기, 바둑, 저포놀이에 빠져 象棋與雙陸
게으르게 만날 노닐기만 하며 재목 되지도 못했건만 荒嬉不成材
높은 벼슬자리 차례차례 밟아 오르네 節次躋金玉
일찍이 먹줄 한번 제대로 그어 보지 못했거늘 繩墨未曾施
어찌 큰 집 지을 재목 따로 되겠는가? 寧爲大厦木
두 아이 모두 자포자기하고 마니 兩兒俱自暴
세상천지에 어질고 품성 고운 재목 없다네 擧世無賢淑
곰곰 생각하노니 애간장 타 들어가 深念焦肺肝
또 술잔 들어 술이나 마신다네 且飮杯中醁
- <여름날 술을 마시다夏日對酒>
과거 시험 수나라 양제 때 시작되어 詞科自隋煬
그 독이 한강과 대동강에도 흘러 왔네 流毒至洌浿
찬연하도다! <생원론>이여 粲粲生員論
장단 맞추어 쾌재를 부를 만하구나 擊節成一快
구름과 노을처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라도 才俊如霞雲
줄곧 과거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다 실패했네 盡向此中敗
양반귀족 늙어 흰머리 나도록 龍鍾到白紛
화려하게 꾸미는 글 버릇 여전히 부지런하다네 雕繪猶未懈
- <고시27수古詩二十七首> 중 25번째 수
승냥이야, 이리야! 豺兮狼兮
우리 송아지 이미 채갔으니 旣取我犢
우리 염소는 물지 말라 毋噬我羊
장롱엔 이윽고 저고리마저 없고 笥旣無襦
횃대엔 이미 걸린 치마도 없다 椸旣無裳
장독 항아리에 남은 소금도 없고 甕無餘醢
뒤주 쌀독엔 남은 식량도 없다 瓶無餘糧
가마솥 이미 빼앗아 가고 錡釜旣奪
숟가락 젓가락마저 깡그리 털어 갔구나 匕筯旣攘
도적도 외적도 아니면서 匪盜匪寇
왜 그리 못된 짓만 하느냐? 何爲不臧
사람 죽인 자는 벌써 자결하였거늘 殺人者死
또 누굴 죽일 참이냐? 又誰戕兮
이리야 승냥이야 狼兮豺兮
우리 삽살개 이미 채 갔으니 旣取我尨
우리 닭일랑 잡아가지 말라 毋縛我雞
자식까지 이미 팔았다만 子旣粥矣
내 처야 누가 사 가랴 誰買吾妻
너는 내 살가죽 벗기고 爾剝我膚
내 뼈까지 쳐부수었다 而槌我骸
우리 논밭을 보라 視我田疇
또한 얼마나 큰 슬픔이냐 亦孔之哀
가라지도 나지 않는데 稂莠不生
쑥인들 명아주인들 자라겠느냐? 其有蒿萊
사람 죽인 자는 벌써 자결하였거늘 殺人者死
또 누구에게 화 입히려고 하느냐! 又誰災兮
승냥이야! 호랑이야! 豺兮虎兮
말한들 무슨 소용이랴? 不可以語
날짐승아! 길짐승아! 禽兮獸兮
꾸짖은들 무엇 하랴? 不可以詬
또한 사또 어버이 있다지만 亦有父母
믿은들 무엇 하랴? 不可以恃
하소연하였지만 싸늘한 말만 되돌아오고 薄言往愬
귀 막고 들은 체도 않더라! 褎如充耳
우리 논밭을 보라 視我田疇
또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끔찍하냐 亦孔之慘
이리저리 떠도네! 요리조리 구르네! 流兮轉兮
구덩이에 처박히며 塡于坑坎
사또 아비여! 사또 아비여! 父兮母兮
고량진미 모조리 즐기고 粱肉是啖
사랑방에 둔 기생 房有妓女
연꽃 봉오리 같은 얼굴이네 顏如菡萏
- <시랑豺狼>, 1810
아이 둘이서 나란히 걸어 다니네 有兒雙行
한 애는 총각머리 한 애는 댕기머리 一角一羈
총각머리 아이 이제 갓 말 배우고 角者學語
댕기머리 아이 머리카락 길게 땋아 늘어뜨렸네 羈者髫垂
엄마 잃고 울면서 失母而號
저 갈림길에 놓여 있네 于彼叉岐
붙들고 까닭 물었더니 執而問故
목메어 울며 말 더듬네 嗚咽言遲
"아빠는 벌써 집을 나갔어요 曰父旣流
엄마는 짝 잃고 떠도는 새 되었고요 母如羈雌
쌀독 이미 바닥나서 瓶之旣罄
사흘이나 밥 짓지 못했어요 三日不炊
엄마랑 나랑 울고 울어 母與我泣
눈물이 뺨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어요 涕泗交頤
어린 남동생 젖 달라고 울어도 兒啼索乳
젖도 말라붙었지요 乳則枯萎
우리 엄마 내 손 잡고 母携我手
젖먹이 이 애와 함께 及此乳兒
저기 저 산골마을에 가서 適彼山村
동냥해서 우릴 먹였어요 丐而飼之
물가 시장 데려가서는 携至水市
엿도 사서 먹여 주었어요 啖我以飴
이 길가 너머로 데려와서는 携至道越
어미 사슴 새끼 품듯 꺄안고 재웠어요 抱兒如麛
어린 동생은 벌써 포근히 잠이 들고 兒旣睡熟
나도 죽은 듯 잠들었다가 我亦如尸
이미 잠깨어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旣覺而視
엄마가 이곳에 보이지 않아요" 母不在斯
말하면서 울다가 且言且哭
눈물 콧물 주르륵주르륵 흘리네 涕泗漣洏
해가 지고 날이 깜깜해지면 日暮天黑
뭇 새들도 떼 지어 날아 둥지에 깃드는데 栖鳥群蜚
외로이 떠도는 두 아이 二兒伶俜
넘성거릴 집 문도 없네 無門可闚
불쌍하도다! 이 낮은 백성들이 哀此下民
그 천륜마저 잃었으니 喪其天彝
부부 사이 사랑도 못하고 伉儷不愛
자애로운 어미도 제 새끼 사랑 않고 慈母不慈
옛날 내가 암행어사 나갔던 昔我持斧
그해가 갑인년(174)이었는데 歲在甲寅
임금께서는 고아들 돌보아서 王眷遺孤
신음하거나 앓게 하지 말라 분부하셨도다! 毋俾殿屎
무릇 감사와 사또들은 凡在司牧
감히 그 분부 어기지 말라! 毋敢有違
- <유아有兒>, 1810
용산구실아치
구실아치들 용산 마을 들이닥쳐 吏打龍山村
소 뒤져 벼슬아치에게 넘겨주네 搜牛付官人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 꼴을 驅牛遠遠去
집집마다 문에 기대 멀뚱멀뚱 보고만 있네 家家倚門看
사또님 노여움만 막으면 그만이지 勉塞官長怒
뉘라서 약한 백성 속병 알아주리? 誰知細民苦
한여름 유월에 쌀 찾아 바치라 하니 六月索稻米
모진 고통 수자리 살기보다 심하다네 毒痛甚征戌
세금 내리라는 임금님 좋은 말씀 끝내 오지 않고 德音竟不至
숱한 목숨 서로 베고 죽을 판이네 萬命相枕死
오로지 구차한 삶만 서글플 뿐 窮生盡可哀
차라리 죽는 자가 더 낫구나! 死者寧可矣
아낙네는 과부되어 지아비 없고 婦寡無良人
할아버지는 아들 손자도 없다네 翁老無兒孫
눈물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우는 소를 보노라니 泫然望牛泣
내 눈물도 줄줄 떨어져 베치마를 적시네 淚落沾衣裙
촌마을 모양새 참으로 황폐하고 메말랐거늘 村色劇疲衰
구실아치 놈 버텨 앉아 왜 돌아가지도 않는가 吏坐胡不歸
쌀독 바닥난 지 이미 오래거니 甁甖久已罄
무슨 수로 저녁밥 지을 건가? 何能有夕炊
구실아치 놈 죽치고 앉아 산목숨 끊게 하니 坐令生理絶
온 이웃 모두 함께 목메어 운다네 四隣同鳴咽
소 잡아 포 떠서 세도가에 바치면 脯牛歸朱門
못된 꾀부리는 구실아치 출세 이로써 판가름 난다네 才諝以甄別
파지구실아치
구실아치 놈들 파지 마을 들이닥쳐 吏打波池坊
떠들썩하게 호령하는 꼴이 군대 점호 같구나 喧呼如點兵
염병에 귀신 되거나 굶어서 죽고 疫鬼雜餓莩
마을 농막에 농사짓는 장정이라고는 없다오 村墅無農丁
애꿎은 고아와 과부만 다그쳐 묶고서는 催聲縛孤寡
채찍질로 앞길을 더 보채는 꼴이 鞭背使前行
개나 닭을 쫓듯 몰아대고 꾸짖어 驅叱如犭鷄
뻗은 행렬이 고을 성 가까이까지 미어터지네 弥亘薄縣城
그중 가난한 선비 한 사람 中有一貧士
야위어 홀쭉한 몸뚱이 홀로 가장 외롭구나 瘠弱最伶俜
하늘 불러 죄 없음을 하소연하는 號天訴無辜
구슬픈 목소리도 끊이질 않네 哀怨有餘聲
감히 가슴뼈에 맺힌 속말도 못하고 未敢敍吏臆
오로지 눈물만 줄기차게 흘리네 但見涕縱橫
구실아치 놈 멍청하다고 화를 내며 吏怒謂其頑
욕하고 매질하며 본보기로 뭇사람들 겁박하네 僇辱출衆情
높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다니 倒悬高树枝
상투가 나무뿌리까지 닿았네 髮与树根平
"추생鯫生(변변찮은 소인)이 콧대만 높아 무서운 줄도 모르고 鯫生暋不畏
감히 네놈이 감영을 거역하다니 敢尔逆上營
글줄 읽었으면 의리를 알 터인데 读书会知义
나라 세금은 서울에다 바치는 것 아닌가! 王稅輸王京
네놈에게 유월까지 말미 줬으면 饶尔到季夏
너를 생각해 준 은혜가 가볍지 않거늘…… 念尔恩非轻
포구에서 위풍당당한 세곡선 기다리건만 峨舸滯浦口
네놈 눈에는 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尔眼胡不明
뽐 나는 위세 언제 다시 부릴 겐가? 立威更何時
공형公兄(구실아치)으로 위세 부릴 때가 좋은 게지! 指挥有公兄
해남 구실아치
나그네가 해남에서 와 客从海南來
두려운 길 피해 오는 참이라면서 为言避畏途
주저앉으니 헐떡이는 숨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고 坐久喘未定
겁에 질려 여전히 벌벌 떠네 怖怯犹有餘
만일 승냥이나 이리 만난 게 아니라면 若非値豺狼
오랑캐라도 만난 게 틀림없으리! 定是遭羌胡
"세금 달달 볶는 구실아치가 마을에 나타나 催租吏出村
동남쪽 모퉁이에서 매 마구 때린다오 亂打東南隅
신관 사또 명령은 더욱 엄하여 新官令益严
기한을 넘길 수가 없다오 程限不得踰
만 섬 싣는 주교사의 큰 배가 橋司万斛船
정월에 벌써 서울을 떠났건만 正月离王都
배가 늦추어지면 반드시 모가지가 날아가는 건 滯船必黜官
예전부터 있어 왔던 가르침이라오 鑑戒在前车
아이고 아이고 온갖 집 통곡소리 시끄럽지만 嗷嗷百家哭
노 젖는 주교사 뱃사공들 즐겁기만 하다오 可以媚櫂夫
나는 시방 사나운 호랑이 피해 왔으매 吾今避勐虎
누가 다시 죽어 가는 나를 구해줄까나?" 谁復恤枯魚
두 눈에 방울 눈물 뚝뚝 떨어지더만 泫然双泪垂
땅이라도 꺼질듯 한바탕 울음소리 길게 퍼지네 条然一嘯舒
제가끔 당파 갈라 쉴 새 없이 아옹다옹 싸우는 꼴 蠻觸紛紛各一偏
귀양살이 나그네 되어 깊이 생각하니 눈물 줄줄 흐르네 客窓深念淚汪然산하는 옹색하게 삼천리가 고작이거늘 山河擁寒三千里
비바람 섞어 치듯 서로 싸운 지 이백 년이네 風雨交爭二百年
수많은 영웅호걸 길을 잃어 슬퍼했고 無限英雄悲失路
논밭 두고 다투는 형제 어느 때나 부끄러워할까 幾時兄弟耻爭田
만일 끝없이 솟아나는 은하수로 씻어 낼 수 있다면 若將萬斛銀潢洗
맑은 날 상서로운 햇살이 온누리 비추련만 瑞日舒光照八埏
- <견흥遣興>, 1801
당파 재앙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黨禍久未已
이야말로 참으로 통곡할 일이로다 此事堪痛哭
듣지 못했네, 낙당 촉당 후예들이 未聞洛蜀裔
끝내 지씨 보씨로 나뉘어 피붙이싸움 벌였다는 말을 遂別智輔族
우리나라 당쟁 기질 양심마저 내버리고 爭氣翳天良
가는 밧줄이나 겨자씨만 한 잘못에도 마구 죽이네 纖芥恣殺戮
어린 양들은 소리 지르지 못하고 죽으나 羔羊死不號
승냥이와 범은 오히려 눈알을 부라리네 豺虎尙怒目
높은 자는 기회 잡고자 이를 갈고 尊者運機牙
낮은 자는 숫돌에 칼날과 화살촉 날카로이 가네 卑者礪鋒鏃
누가 능히 큰 잔치 열어 誰能辦大宴
휘장 둘러친 눈부신 집에 帟幕張華屋
일천 동이 술 빚어 놓고 千甕釀爲酒
만 마리 소 잡아 저민 고기 차려 놓고 萬牛臠爲肉
옛날에 물든 버릇 고치기로 함께 다짐하며 同盟革舊染
화평한 복을 구할까나! 以徼和平福
- <고시27수古詩二十七首> 중 네 번째 수
범고래海狼란 놈 이리 몸통에 수달의 가죽 海狼狼身而獺皮
가는 곳마다 열 놈 백 놈 떼 지어 다니면서 行處十百群相隨
바닷물 속에서 사냥질할 때 나는 듯이 빨라 水中打圍捷如飛
느닷없이 덮쳐 오면 물고기들도 모른다네 欻忽揜襲魚不知
큰 고래長鯨란 놈 한입에 물고기 천 섬 삼키니 長鯨一吸魚千石
큰 고래 한번 지나가면 묽기 흔적도 없고 長黥一過魚無跡
물고기 차지 못한 범고래는 큰 고래 원망하여 狼不逢魚恨長鯨
큰 고래 죽이려고 온갖 꾀를 짜낸다네 擬殺長鯨發謀策
한 떼는 고래 머리 들이받고 一羣衝鯨首
한 떼는 고래 뒤 에워싸고 一群繞鯨後
한 떼는 고래 왼쪽에서 틈을 노리고 一群伺鯨左
한 떼는 고래 오른쪽을 침범하고 一群犯鯨右
한 떼는 물에 잠겨 고래 배때기 올려치고 一群沈水仰鯨腹
한 떼는 튀어 올라 고래 등에 올라타서 一群騰躍令鯨負
아래위 사방에서 함께 호령하며 上下四方齊發號
살갗 할퀴고 속살 깨무는 게 어찌나 잔인하고 포악한지 抓膚齧肌何殘暴
고래가 우레같이 울부짖으며 입으로 물을 뿜어 鯨吼如雷口噴水
바다 물결 들끓고 갠 하늘에 무지개 일어나네 海波鼎沸晴虹起
무지개 점점 사라지고 파도 차츰 잔잔하니 虹光漸微波漸平
아아, 애닯도다! 고래 이미 죽고 말았구나 嗚呼哀哉鯨已死
혼자서는 뭇 힘을 당해낼 겨를이 없어 獨夫不遑敵衆力
작은 교활함이 도리어 거대한 사특함을 해치웠네 小黠乃能殲巨慝
너희 놈들 혈전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느냐? 汝輩血戰胡至此
원래는 기껏해야 먹이다툼인 것을, 本意不過爭飮食
호호탕탕 가도 가도 끝없는 드넓은 바다에서 瀛海漭洋浩無岸
너희 놈들 지느러미 흔들고 꼬리 치면서 汝輩何不揚鬐掉尾相休息
어찌 함께 편히 살지 못하느냐?
- <행랑행海狼行>, 1801
남산골 할아범 살쾡이놈 길렀더니 南山村翁養狸奴
해묵고 꾀 늘어 요망한 늙은 여우 따라하네 歲久夭凶學老狐
초가집에 아껴 둔 고기 밤마다 훔쳐 먹고 夜夜草堂盜宿肉
항아리 단지 뒤집고 잇달아 술잔과 술병마저 깨뜨리네 翻瓨覆瓿連觴壺
어두움 틈타 우쭐대며 못된 짓 함빡 하고 乘時陰黑逞狡獪
문 밀고 큰소리치면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네 推戶大喝形影无
홀연 등불 밝혀 살피면 추악한 행적 널려 있고 呼燈照見穢迹徧
침 흘린 이빨 자국 고기 찌꺼기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네 汁滓狼藉齒入肤
잠 설친 할아범 근력 딸려 老夫失睡筋力短
온갖 궁리 다 해도 긴 한숨만 휘영청 늘어지네 百慮皎皎徒長吁
이 살쾡이놈 저지른 큰 죄 생각하면 今次狸奴罪惡極
당장 칼을 뽑아 천벌을 주고 싶네 直欲奋劍行天誅
하늘이 네놈 낼 제 본디 어디에 쓸 참이던가? 皇天生汝本何用
쥐 잡아 백성 앓음 덜라고 네놈에게 명했거늘, 令汝捕鼠除民痛
들쥐는 밭둑에 쥐구멍 파서 벼이삭 물어다 쌓아 두고 田鼠穴田蓋穉穧
집쥐는 온갖 것 훔쳐 가지 않은 게 없고 家鼠百物靡不偸
백성은 쥐 등쌀에 나날이 핼쑥해지고 民被鼠割日憔悴
살이 타고 피가 말라 피골마저 말라 가네 膏焦血涸皮骨枯
(중략)
네놈 이제까지 쥐 한 마리 잡지 않고 汝今一鼠不曾捕
돌아보니 한갖 네놈 스스로 도둑질 범했구나 顾乃自犯为穿窬
쥐란 본디 좀도둑이라 그 피해가 적지마는 鼠本小盗其害小
네놈은 지금 힘도 세고 기세도 높고 汝今力雄势高心计粗
속셈마저 더럽구나
쥐가 못하는 짓도 오로지 네놈 뜻대로 하니 鼠所不能汝唯意
처마에 기어올라 지붕 벗기고 攀檐撤盖颓墍涂
맥질한 진흙마저 무너뜨리는구나
지금부터는 쥐떼들이 꺼릴 것도 없으니 自今群鼠无忌惮
쥐구멍 밖으로 들락날락 껄껄대며 그 수염을 흔드는구나 出穴大笑掀其须
그 훔친 장물 모아다가 네놈에게 뇌물 바치고 聚其盗物重賂汝
천연덕스럽게 네놈과 한통속으로 돌아다니는구나 泰然与汝行相俱
늘 알랑대며 떡고물 탐나는 쥐새끼가 好事往往亦貌汝
네놈을 사자로 여기고
뭇 쥐들 고관대작의 마부마냥 네놈을 떠받드는구나 群鼠擁護如騶徒
관아에 모여 나팔 불고 북치고 吹螺擊鼓爲法部
대장기 높이 들고 앞장서 가는구나 樹纛立旗爲先驅
네놈 큰 가마 타고 몸을 굽혔다 폈다 으스대니 汝乘大轎色夭矯
쥐떼들 기꺼이 앞다투어 달리며 但喜群鼠爭奔趨
거리낌 없이 좋아라 하는구나
나는 이제 몸소 붉은 활에 큰 화살 메워 네놈 쏘고 我今彤弓大箭手射汝
만일 쥐가 제멋대로 설치면 차라리 사냥개를 부르리라 若鼠橫行寧嗾盧
- <이노행狸奴行>, 1810
처음 읽다 남은 책을 끝내려던 차였건만 始爲殘書至
안타깝게도 갑작스레 병이 몸을 휘감았네 翻嗟一病纏
노란 낙엽 진 대문을 닫고서 閉門黃葉裏
푸른 소나무 앞에서 약을 달이에 煮藥碧松前
어지러운 머리카락 손질 남의 손 빌려 하고 髮亂從人理
쓴 시를 입으로만 전할 뿐이네 詩成只口傳
일어나 서쪽으로 가는 길 보니 起看西去路
눈바람이 차디찬 하늘 가득 휘몰아치네 風雪滿寒天
- <시골집에서 병석에 누워(田廬臥病)>
옴 근질근질 늙도록 낫지 않아 癬疥淫淫抵老頹
몸뚱이를 찻잎처럼 찌고 쬐고 다해 보았네 身如茶荈備蒸焙
싱거운 물 데워 소금 넣어 씻어 내고 溫湯淡鹵從淋洗
썩은 풀 묵은 뿌리 뜸도 자못 떴네 腐草陳根莫炙煨
벌집을 촘촘히 걸러 그 즙을 짜내고 密濾蜂房須取汁
뱀 허물 재가 될까 두려워 살짝만 볶았네 輕熬蛇殼恐成灰
단사 넣어 이미 만든 약 동병상련이라 丹砂已熟憐同病
자산 형님의 심부름꾼 오기만을 기다리네 留待玆山使者來
- <유합쇄병을 부쳐 온 운에 화답하다[和奇餾合刷甁韻]>
조선시로 통쾌하다
늙은이 한 가지 통쾌한 일은 老人一快事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쓰는 거라네 縱筆寫狂詞
골치 아픈 운자에 얽매이지 않고 競病不必拘
고치고 다듬느라 미적거리지 않네 推敲不必遲
흥이 나면 곧장 뜻을 싣고 興到卽運意
뜻이 되면 곧장 써내려 가네 意到卽寫之
나는 조선 사람이라 我是朝鮮人
즐거이 조선시를 쓰네 甘作朝鮮詩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들의 법을 따르면 디지 卿當用卿法
시작법에 어긋난다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자 누구신가? 迂哉議者誰
(중략)
어찌 슬프고 울적한 말을 꾸며 내어 焉能飾悽黯
고통스레 애간장을 부러 태우는가? 辛苦斷腸爲
배와 귤 저마다 독특한 맛 지니고 있거늘 梨橘各殊味
오로지 입맛 따라 즐기고 좋아하면 그만 아닌가! 嗜好唯其宜
- <노인네의 한 가지 통쾌한 일[老人一快事]>에서, 1832
배움이 넓고 깊은 성호 선생님 博學星湖老
나는 백세사로 따르려네 吾從百世師
등림에 열매 많이 열리고 鄧林繁結子
큰키나무에 뻗은 가지 울창하네 喬木鬱生枝
- <박학博學>, 1794
'내가 읽은 책들 > 2017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045 고사성어 문화답사기 1 하남 · 산동 편 (0) | 2017.11.10 |
---|---|
2017-044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이야기 (0) | 2017.10.07 |
2017-042 여행자의 인문학 (0) | 2017.09.18 |
2017-035 사임당의 뜰 (1) | 2017.07.31 |
2017-034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0) | 2017.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