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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2. 16:4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0 저녁의 연인들


황학주 시집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0031


811.6

황92저


문예중앙시선 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7 우수문학도서


황학주의 시가 변했다. 이제, 어디서도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고 차단하는 불화의 테크닉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상처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상처가 완전히 가실 수 있겠는가!) 어두운 숲이나 깊은 구멍 문고리 어머니 같은 은유적 언어들이 이를 감싸고 가린다. 그래서 그의 언어들은 읽는 이의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기억의 풍경들을 밝혀주고 땡그렁땡그렁 울린다. 우리는 풍경에서 왔으며, 지금도 풍경 속에 있으며, 앞으로도 풍경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슬픈 그 풍경이 우리 마음을 울리고 우리 이마를 세차게 때린다.

- 최하림(시인)


황학주 시인을 뵙지 못한 것이 10여 년은 되었는가. 가을날 그의 새 시집 원고 『저녁의 연인들』이 도착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음은 붉어진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시집에서도 황 시인은 무척 말을 아낀다. 그리하여 한 줄 한 줄 숨을 죽이며 천천히 읽어나가야 한다. 읽다가 책장을 가끔은 접고 숨을 한번 내쉬어야 한다. ……내가 국경을 넘어 떠돌아다닐 동안 황 시인 역시 국경을 넘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 밑은 그리고 고즈넉하고 검고 따뜻하다. 서울 방학동 시절의 다정하나 스스로를 몰락 지경으로 이끌 것 같은 시정이 긴 세월 동안 따뜻하게 뭉쳐 있다가 너무 세게 펴 보이면 들킬세라 조용하게 숨죽여 있다. 서늘한 서정이라는 비수가 세계의 빛과 어둠을 향하여 은은한 빛을 보내고 있다. 『저녁의 연인들』이 당신에게 수줍은 말을 계속 걸어온다면 당신도 어쩌면 국경을 넘은 자인지도 모르겠다. 지정학적의 국격이 아니라 마음의 어느 국경. 그 안에서 견디는 자. 그 견딤의 순간들. 당신,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그리하여 이 시집의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 허수경(시인)


황학주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한 이래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함』『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루시』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의 말


수줍은 중년이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낮은 집을 출입하고 있다.

이런 마음의 집에 '저녁' 외에 달리 무슨 이름을 달겠는가.

짝, 도 좋다.


2006년 가을

황학주


|차례|


● 제1부


화대

마음

쇠귀나물

오이밭에서

사과나무밭 밑동들

세일즈맨, 백 칸 건물 속으로

겨울 양수리

젓가락, 내 마음은

얼레지

탑이 있는 풍경

막 어두워지는 숲길


● 제2부


버스

북 치는 인형

그해 여름

흰 염소

꽃 없이

뉘엿뉘엿 눈발 속으로 가는 일

거기는

두 번째 가는 정선

어느 날

장독대

익어가는 달-백중 무렵

극장


● 제3부


저녁의 연인들

베네치아의 연인

열대야

덜 닦인 방

은디라이

옛 부두

비어(飛魚)

푸른 사과 속 같은


● 제4부


저수지

소렌토에 멈춘 저녁

종점을 기다린다

K의 이사

동강 한때

가슴검은도요

예전에, 방직공 목련

삭정이

내가 했던 일


● 제5부


그 집 뒤꼍

퇴근 열차

간병

두 남자

용산역

지루한 오후

노인

조선대 뒷산을 넘어 할머니에게 어머니 심부름을 다녔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작품 해설| 송승환(시인 · 문학평론가)

정지된 세계의 비유와 성찰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북 치는 인형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발 없는 아이가

나귀에 매달려

하굣길

10리를 간다


퇴짜 맞은 것은 만삭인 낮달도 마찬가지

아무도 낳을 생각이 없다


등교할 힘도 없는

놀미낭가이네 흙집 지붕 위

딸려 올라가는 소시지나무 열매가 때로 달려 잇다

불도 못 때주고 먹이지도 못하는

불모의 자지들


새 발자국 몇 개 빗방울 무늬로 찍힌 운동장

누가 내 이야기를 한다


며칠째 학교 뒷문으로

텅 빈

기차가 지나가면

낙엽들이 개처럼 쫓아나간다


서랍을 열면

가슴에 달빛처럼 접힌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꿍짝꿍짝 발을 맞춘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사탕수수밭 뒤쪽에

일렬횡대로 앉아

아침이면 사내들과도 함께 일을 보는


사과 베어 먹으며 돌아앉은 여자

엉덩이 한쪽에 푸른 멍이 들어 있다


얘들아, 버펄로 수레 조심하렴


늘어난 데 없이 번지는

한 채의 꽃구덩이가 일렁이며

등굣길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푸른 사과 속 같은

여자의 그림자

사과씨 묻혀 있는 멍을 닦는다


버스


갑자기 버스가 나타났다

비 내릴 때 나의 마음을 태울 차가 저렇게 분명하게 오는 일이 거북하지 않나 일단 그렇지 않나

해 진 뒤에 마음은 배롱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버스가 오면 나는 손을 들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보다 당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빛을 켠 밝은 내부, 담쏙 받아 든 자두 광주리 같은 저녁을 태우고 버스가 온다

버스가 오나 보러 나와 한번쯤은 세상이 우리에게 시간을 맞춰줄 수도 있지 싶다

당신을 먼저 집으로 보내는 것인데

2, 3일 후 4, 5일 후 무려하게 따라갈 수도 있지 싶다

우레 치는 길은 옷고름을 풀어가

버스가 오는 걸 미끄러지듯 받아 안는다

언젠가는 다가올 슬픔 중 가장 귀한

버스가 온다면 사랑하다고 꼬집는 묵언도 쓸데없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가까스로 불이 붙는 라이터가 입술 주위를 밝힐 것이다

지금은 손을 들지 않고 버스를 보낼 수도 있는

누가봐도 생에게 또박또박 대꾸를 할 수 있는 시간 언저리


곧 버스가 끊기는 밤이 된다

슬프면 안 된다

그 뒤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해 여름


멀리 간 날이었다

무서우리만치 많은 나무들이 몰려왔다

다함이 있어야 혼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박물관 앞에서 여자를 처음 보고서

눈을 감았다 뜰 때 아주 먼 시간이 어둔 화덕에 피어 있었다

찌그려 신은 한 켤레 시간을 세족시키며

여강(驪江) 가 꽃 피듯 일없이 여자가 앉았다

무슨 물고기를 먹은 그 오후와 저녁 사이

그 식당은 지금 없어졌다 침이 마르듯이


낌새가 없는 일이었지만 식당 뒤

공사장 붉은 흙더미와 고랑 흑백 어딘가에

수줍은 중년이 어떻게 손을 들고 있었나

오색을 다 내줘버린 자작나무

몸 떨군 가장자리로 가만가만 가져가는

저녁처럼 여자 혼자 살고 있는 곳

이승에서 하루쯤이면 갈 수 있는 곳

요행이 떠나면 잊을 수 있을 듯도 해

그 한나절은 기념이 되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피는 일엔 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여자가 눈짓해준 그해 여름


사과나무밭 밑동들


부석사 까치가 쪼고 있는 늙은 사과나무 밑동들


시간이 꼭꼭 씹어 쌓아둔 시커먼 밑동과 엉덩이를 맞대고

나는 눌러앉아 있었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연애가 여물었다 떨어지고

점점 말수가 줄다 경청하는 귀만 커다랗게 남겨진 노인일까

베이고 없는 사과나무들

질질거리며 소변 보는 마지막 모습만 얼어 있었다

저녁은 그사이

망한 부석 아랫도리와 바닥 모를 말을 나누며

얼룩얼룩했다


저런, 자필 사인한 이별 같은 노을에

젖어 벌어지는 사과나무 한 그루

털썩 주저앉아

몇 해 전 내 몸에 들어오지 않았나 묻고 있었다


종점을 기다린다


종점을 기다린다 흰 우산살을 펴며


비가 쉬지 않고 새드는 가게 처마 밑

물받이가 비벼서 내려 보내는 빗방울

뭐라고 하나

빗소리

불 꺼진 창만 골라

사납게 뛰어들 때


허리띠를 풀면 내려가는 바지처럼

눈이 풀어지면 스르르 종점에 닿으련만 버스가 오지 않는다

정류장에서 매일 저녁 출생 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용의 여행자, 상속받은 귀가를 기다린다

봄비에 젖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러 오라는 듯

눈이 흐린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거리는 파인 도마처럼 펼쳐져 있고

탈을 든 영혼처럼 손목을 놀리는 비

포플러나무가 팔을 붙인 채 염주비를 돌린다

빗소리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배뇨를 참고 있는 사람의 골목이 먹갈치처럼 흘러가며


종점을 기다린다

낙수 고랑을 타고 그 한 집

불 꺼진 방으로 가는

 

극장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제 것을 주물럭거리며 아프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는 미완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 젖을 살짝 들어올리면 동그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멀그스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만 일어나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환하게 불 들어오며 종영될 인간 극장

 

익어가는 달

- 백중 무렵

 

혈흔을 감싸안고

이사 가는

밤마다 다리가 아픈

영생

 

예전에, 방직공 목련

 

날마다 달이 도장을 찍으러 오는

누이의 세숫대야 속에

목련이 졌다

 

그날 목련꽃이 쏟아진 마당에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가고

나는 운동화 끈을 푼 뒤란에서

한 10년 한자리서 눈 맞은 사람 하나 손잡아 끌었습니다

앞바다에 굴러 떨어뜨린 배추며 돼지 똥값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때 잡고 다니던 손처럼 고물고물 해안선을 건네준 후

아버지를 모아 난바다에 내다 버린 나는 자주 도시락이 없었고

나라도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은 점 많은 식구들이 있었다고

그렇게 쉽게 어른이 되었다고 해야 되었습니다

홑거적 속에서 날갯짓을 하며

너무 늦어 돌아가면 빚이 될 것 같은

목련,

씨줄과 날줄 끌어 녹슨 세숫대야를 방직하며

울컥 쏟아졌습니다

 

두 남자

 

정신이 돌아오는 길목은 언제나 치욕이다

간병인 아줌마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게

허, 화가 나는 아버지

 

허 참,

파르스름한 엉덩판에서 똥을 긁어내는 동안

 

쓰레받기 하나 비석처럼 들고 서 있는 내 그림자

이 진땀과 냄새 우려내는 데를 생각하고 잇다

 

자신의 것만은 아닌 똥물 진물 골목 위를 걷는

팔순, 침대 이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에

저쪽을 흐지부지 잊어버린다

 

단 한 번도 동이 나지 않은 똥 웅덩이

한옆에서

슬쩍슬쩍 똥빨래를 만작대는 달빛에 나도 스며서,

 

쇠귀나물

 

유리병이 버려진 논물 위로

소의 귀 모양을 한 풀잎들이 나와

아, 아, 아, 입을 갖다 대며 쭈그리고 앉아 놀던 학교 길

손을 묻어 물을 만지면 꼼지락거리는 소녀가 느껴졌다

막 뜯은 편지 봉투처럼 가난한 마음을 들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배배 꼬인 연애를 하러 가던

누나는 중학교밖에 못 마치고

쇠귀나물 뽑힌 논에서 모를 심었다

 

쇠대나물 쇠태나물 쇠택나물 수사 곡사 급사 택사 물택사

버려지면 이름도 아무렇게나 불린다

물집 잡힌 하얀 꽃잎 우리 누나

중퇴한 교실 창 안에 대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했나

쇠귀에 뭐라고 했나

소리치고 밀쳐도 남자는 꿈쩍을 않고

세상에 골똘해야 하는 일을 쇠귀에 속삭이는 일로 알았던

 

유리병 안에 들어간 나비가 팔랑거린다

쇠귀나물 잎 떨어진 자리가 구드러지고 있다

 

오이밭에서

 

오이 살색을 살피며 생각한다 싱싱하고 오톨도톨하던

몸의 나이에 신세 안 지고 올 수는 없었구나

자기 가시로 박음질된 오이의 몸에

넓삐죽한 칼을 대며, 자신을 깎아보지도 못한

물렁한 포대자루 못생긴 그림자 둑길 하나 두고 앉아 있다

 

살짝 잠이 모자란 오이가 잎 속에 있다

임신한 차림으로 길게 넘어진 오이 옆에

부은 목젖처럼 잎 하나가 돋는다

새끼들이 모두 나와 있는 오이밭

덩굴손으로 붙들고 있는 젖은 어머니들

 

가시 분화구 밑 싱싱한 지층을 섬벅 베어 문다

읽고 싶은 백 권의 기갈을 잃어버렸다 오이밭에서

물맛 좋은 가슴 한 짝 덜렁, 그랬다

물벼락 같은 오이 냄새 아래

땅벌레가 취해서 옴직옴직 돌아가는 참이다

 

막 어두워지는 숲길

 

숲길이 막 어두워져 더 걸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피에서

무슨 빛인가 발그레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숲이 항아리를 씻어두었는지

무슨 빛인가,

 

여름날 길을 달리한 모든 가지들 위에

밥 묵은 손바닥처럼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양푼을 업은 금달맞이꽃이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굽은 소나무 그림자

 

등 뒤에서 나의 가장 먼 곳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었다

등 뒤에는 오래 오래된 마룻장이 있었다

극락전까지 걸어가는 시월이면

등 뒤로 찔러오는 것처럼 깊어

슬픔과 함께 피어오르는 망향은 확인해줄 수도 없다

 

연못 수면에 살짝 쓰러진 꽃을

받쳐 들고

오래 걸어서 갈고리가 되도록 구부러진 가지로

극락전까지

핏줄을 대가는

그림자

 

은디라이

 

  국경을 건너는 소들도 우기(雨期)는 추워 자꾸 옆구리가 부딪친다. 넘어지지 읺으려고 벽에 가 먼저 부딪치던 시간들이 인간에게도 있었다. 옥수수밭이 피어나 달리는 목동 뒤로 돌아온다. 참 오래전 아버지 어릴 적부터 맨발로 다니며 넘어져본 일 없는 은디라이. 집 나간 황소 틀어쥐고 오던 날 쓰러진 옥수수꽃 위에 맨발 탈탈 털던 어린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은 조금 작고 스웨터는 기장이 길다. 송아지는 친구라서 한 방에 재우고 염소는 아버지 꼭 닮은 의심이 들어 울타리 안에 밀어 넣던 은디라이. 내가 준 신발을 신고 멀리도 걸어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은디라이마저 잃어버린 나.

 

탑이 있는 풍경

 

눈 내리는 날 기우뚱 탑이 발목께를 보고 있다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한번씩 낫을 휘둘러 허공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춤추게 하는

바람, 날아 내리는 눈들이 구멍을 통해 쌓일 때

 

빈 마당은 점점 구멍이 배불러와 어디론가 빠지고 있겠구나

 

탑은 자기가 큰 구멍에 빠진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두 번째 가는 정선

 

처음 가던 정선 고랑 파듯 고불탕고불탕 내려가던

 

마음으로는 벌써 다녀온 귤암리 가수리 많지

아무리 못 만들어도 저렇게 못생긴 소나무 하나는

 

물 내려가는 산자락에 낳을 수 있겠다 싶은

 

할머니 마음에 따라붙는 동강할미꽃

가는 팔목이 어여 어여 목줄을 당긴다

 

여기 어디쯤 5백 평은 너무 큰 땅

그 땅 쓸만한 시간이 있어서 어디엔가 당신이 살고 있을까

 

지겟다리를 받친 고목의 허리가 떠오르고

해는 빈 도시락 가방을 들고 기울었다

 

허벅지 홀쭉해진 시골 저녁에만 떠오르는 길을

어디선가 갈 수는 있겠지

 

땅에 관해서는 물이 알아봐줄 일이다.

 

베네치아의 연인

 

사랑이 풀꽃 반지를 만드는 때가 오면

가로등 지지지 제 몸 지지는 소리를 내고,

사랑이 배를 놓아 첫날밤 같은 한순간을 미끄러지면

부끄러움은 돛처럼 쫑긋한 귀가 서 있었다

 

불쑥 엉뚱한 섬이 나오는 골목을 지나

곤돌라는 낡은 기둥 같은 시간에 옆구리를 거꾸로 댔다

언제든 석양에서 되돌아 나갈 수 있다는 듯

그러니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한 아침까지 인정할 것 같다

우리는 저렇듯 우박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고랑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 많지도 않을 것 같다

 

쇄골 위에서 정전이 되자 사랑은 잠이 들고

긴 머리가 허리까지, 가물가물 물속으로 흘러갔다

사실은 가운을 여민 바다는 제 몸을 씻지도 못했다

오해를 피해 잊혀져가는 과거처럼 비치는

장신구는 본능의 하부에 풀어놓앗다 허벅지 안쪽 같은

둥글고 민감한 안 보이는 그곳

 

베네치아 빈 길에 잠자리에 든 이승들이

유실된 연인이 되어 물에 뜨고

물에 닿아 아픈 부위로 된 궁륭을 안았다

태양은 살 있는 모든 부위에서 번개처럼 빠져나가리라

사나흘쯤 밤낮이 심장 놓인 그대로 가고 잇었다

 

소렌토에 멈춘 저녁

 

올리브나무 박은 하늘이 풍덩 기울며

바다 공터를 여는

이 모퉁이

 

사랑은 온다 대리석 기둥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해는 보랏빛 포도식초를 찍으며 구관과 신관 사이에

한옆으로 비껴 앉아 있다

 

사랑은

큰 포대자루 같은 절벽 위에서

바다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이다

 

유람선이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섬은 바다에 잘 들어맞는다

그 뒤에까지 돌아가 보지 않아도

사랑은 과거에도 앞으로 좀 쏠려 있었다

 

열대야

 

불을 끈 늦은 밤, 2층 방문을 앞뒤로 다 열었다

너무 커서 짤 수 없는 빨랫감을 들고 아버지를 부르는 듯

아래층 노모의 목소리 마른 물받이통 타고 들리고

 

건넛방 창문마저 밀치는 순간

옆집 2층 열린 창 속으로 벗은 할머님의 전신

굽은 등에 비스듬히 수건을 두르고 있다가

황급히 냉장고 문을 닫으며 몸을 숨긴다

냉장고 불빛에 잠깐 어른한 노년의 알몸

후끈한 잠실에 비스듬히 앉은 고치 같았다

할머님 곁엔 재작년 돌아가신 그 댁 할아버님이

주전부리 오디 같은

너무 여물어 쇤 뽕잎 같은 걸로라도 누웠을 것 같고

 

아래층 아버지가 흠흠 일없이 마당을 거니신다

밖엔 바람이 좀 있다 하면서 2층의 기척을 살피는 중이셨다면

그 언젠가 언질을 주던 능소화 그림자와 함께였을 것이다

망측하게, 위층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를 핀잔하는 어머니 한밤중 쌀 씻는 소리

 

오 뜨거운 것의 아름다움은 땅 저 아래쪽으로부터 오래전 내게 왔을 것

깊어지는 밤 달빛을 제 몸에 버무려서

옆집 담 위로 능소화가 쭉 올라와 들여다본다

 

덜 닦인 방

 

늘 덜 닦인 방에서

덜 갚은 빚처럼

몸서리치며 나누던 몸

 

한 국자쯤 고이고

다시 한 스푼쯤 차오르는

볕 한 줌을 시간 안에 나누느라고

 

우리여,

 

저수지

 

하얀 맨발의 연꽃잎 내려앉듯 해가 다 내려가고

흙에 접을 붙인 듯 불빛이 점점점 떠오른다

연인들이 몸의 구석구석에 노후로 깃들듯이

 

우리가 떠난 후에도

다는 안 가지고 싶어, 라고

연인들은 창문 한쪽에 써서 보여주고 있을까

문득 눈앞에나 서 있을 것 같은 펀펀한 엉덩이가

이 마음속에 언제 와 있었는지 놀라면서

수고로운 저녁을 느릿느릿 안아 들고 있을까

다 준다는 게 다 받고 싶다는 비명이었다는 것

 

그대 둥글게 앉아 있는 어둠 속으로 늦은 밥을 물리고 또 물렸다

그대 안쪽에서 가만히 받아주었다

옷가슴만한 봄이 숨죽이며 깜짝깜짝 놀라던

누가 보아도 그곳엔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젖가락,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 동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에이즈를 부르는 말. '도둑'이라는 뜻을 가진 스와힐리어.

 

뉘엿뉘엿눈발 속으로 가는 일

 

여러 날 오체투지해가다

때 없이 잠에 빠뜨리는

서거나 쓰러지는 몸

 

당나귀 등에

눈밭 여기저기서 주운 나무토막 쇠똥이 모이는

자루가 삐뚜루 걸쳐 잇다

오늘 밤 달빛이 되는 영혼이 우둘투둘 들어 있는 것 같다

 

가죽 치마 깔고 쓰러지면

어디서는 눈보라가 어디서는 모래바람이

우는 마음을 알아듣는 것 같다

귀 뒤에선

나무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휘어지고 있을 텐데

앞서 있던 전봇대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판자 조각을 댄 가죽 장갑 땅에 내리치면

낑낑대며 생의 한 귀퉁이 잡아 굴리느라

무릎뼈처럼 구부러지던 계절이 생각난다

내 안의 붉은 머리채에 낚여

꽈당 엎어지는

참, 사랑을 쉬는 일도 중요한 일이네

 

배꼽 속에 성산이 꼬르륵 부푼다





posted by 황영찬
2015. 7. 16. 13:3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9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2008, 알마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320

 

911.6

권18ㅅ

 

서울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실을 만나게 되는 요술경 같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촌스러운 건물이었지만, 서울시의회 청사에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치던 보신각과 청계천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었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수도답게 서울의 변화 속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을 대변했던 청계고가도, 2열종대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삼일아파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우리가 밥벌이의 고단함에 치여 허우적대는 사이 축적된 삶의 편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기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의미 · 장소 · 문화 · 일상을 재발견하다.

 

일상의 재발견  일상의 공간이기에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공간이 겪어낸 역사적 사건을 떠올린다.

 ● 이순신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란 용산동 해방촌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을 가다 ● 남산에 오르면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빚은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문화의 재발견  우리 주변의 장소와 건물이 가진 문화를 탐색한다.

단성사에 가면 100년 한국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 조만간 기억 속으로 사라질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이었다 ● 무참히 헐려버린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가다 ● 서울 최초의 커피숍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를 찾아 정동을 걷다...


의미의 재발견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면에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한다.

● 해방 이후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 '사대의 상징'을 헐고 '일제로의 종속'을 기념해 독립문을 세우다 ● '친일파 항일' '남과 북'이 불편한 동거 중인 국립현충원은 너무 시끄럽다 ●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은 어디에?...


장소의 재발견  지나간 이야기를 숨긴 채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장소를 찾아가 그때를 생각한다.

●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다 ● 유스호스텔로 변해 버린 옛 안기부 건물에서 하룻밤 묵어볼까? ●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신궁은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 리라초등학교 뒤에 가면 '군인의 신' 노기를 기리던 신사가 있다...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올라온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말에는 SBS 기자까지 되어버렸다. 적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자 일을 하면서,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6년 SBS 특종상' 등을 타며 "오늘의 사건사고"를 취재 중이다. 사회부 기자로 살다 보니 그 좋아하는 여행도 쉽지 않다. 그래도 1년에 두세 번은 나름대로 긴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다음 여행지를 구상하는 재미에 하루 피로를 잊는다. 서른 즈음에 와 있는 그는 요즘 제주도나 오키나와 같은 변방의 역사, 스포츠와 민족주의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삶의 자세로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어머니가 가발공장에 취직하던 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을 찾아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라다

용산동 2가 '해방촌'을 찾아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빚다

남산공원 '김구와 안중근 동상'을 찾아


해방 60년 만에 닻 올리는 친일 역사 청산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을 찾아


침략과 수탈에서 평화 교류의 철도로

'서울역'을 찾아


2부 문화의 재발견


100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산증인

종로 3가 '단성사'를 찾아


실패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 유람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리고 있다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


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으려 하다

정동 '손탁호텔'터를 찾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정동 '옛 대법원'을 찾아


'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종로 '보신각'을 찾아


3부 의미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사대의 상징'을 헐고 들어선 '일제로의 종속'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을 찾아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철저히 유린된 제국의 상징

소공동 '환구단'을 찾아


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평동 '경교장'을 찾아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을 찾아


4부 장소의 재발견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를 찾아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찾아


진정한 민족대표는 누구인가?

인사동 '태화관'터를 찾아


'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하지 못하다

남산공원 '조선신궁'터를 찾아


남산에 신사 유구가 있다!

리라초등학교 뒤 '노기신사'터를 찾아


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장충동 '박문사'터를 찾아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태평로 1가 '부민관'과 해방 후 '국회'가 있던 곳을 찾아


산책을 마치며

참고 문헌

사진 출처

과거권력과 현재권력 등 한국 사회의 '파워'가 교차하는 세종로, 그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956년 8월 10일 옛 남산식물원 터에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의 대형 동상이 들어섰다. 당시 언론들은 이 동상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64년 5월 16일 세종로에서 '애국선열' 37인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박정희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한 애국선열 동상 건립사업은 그 자체로 부실 덩어리였다.

세종로에 한복판에 자리한 이순신 장군상.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새 모습의 동상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 앞에 서 있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

일제강점기 때 위생의 목적과 전쟁 물자 수송을 위해 시작된 복개사업은 40년 후인 1977년까지 계속됐다. 복개 중(위)과 복개 후(아래)의 모습.

1970년대 청계고가와 삼일빌딩은 정부의 해외홍보물에 수시로 등장하는 자랑거리였다. 삼일빌딩은 63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군사작전하듯 마구 덮어버린 청계천이 거침없이 다시 열렸다. 과연 청계천은 '복원'된 것일까?

'수많은 전태일들'이 일했던 작업장이 대부분 창신동 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평화시장은 그저 의류 도매시장일 뿐이다.

평화시장이 아닌 '착취시장'에 갓 취직했을 때 전태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각혈하며 쓰러져가는 시다들이었다. 시다, 미싱보조사와 함께 찍은 위의 사진에서는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미사 동료와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맨 오른쪽이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2005년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흉상이 세워졌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 전태일 정신이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03년 말까지만 해도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에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공사 와중에 뜯겨 나가고 말았다.

남산과 용산 미군기지 사이에 자리한 해방촌은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랐다.

국회의사당 중앙현관에 서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대리석상. 둘 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김경승의 작품이다. 땅달막한 몸집 등 모양새가 유려하지 않다.

남산공원에 있는 도마 안중근상(위), 백범 김구상(가운데), 김유신상(아래)도 모두 김경승의 작품이다. 김경승은 '친일'에서 '친독재'로 변신하여 명성을 이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고 쓴 박 대통령의 글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정통성이 빈약한 독재정권은 '항일'마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명동 국민은행 건물이다.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열린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 기념사진으로, 원 안의 인물은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총무과장이었던 이원용 조사관이다.

이승만 대통령 등 집권세력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거나 반민특위 인사들에 대한 집단 암살이 시도되는 등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조사부가 설치한 투서함의 모습이다.

1951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육군 참모총장과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지낸 정일권 중장에게 훈장을 주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정권은 친일부역자들을 중용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 한쪽 구석에 (정부나 서울시가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반민특위 표지석 한기가 서 있다. 글씨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썼다.

경성역 2층에 있던 '그릴'은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을 쏟아 부어 만든 경성역(현 서울역). 설계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와 츠가모토 야스시 도쿄 제국대 교수가 맡았다.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 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머커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 1년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울역 한쪽 구석에 강우규의 거사를 기록한 표지석 한 기가 쓸쓸하게 서 있다.

2007년 5월 17일 남쪽 열차(위)와 북쪽 열차(아래)가 강원도 제진역에서 만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끊긴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됨으로써 남북 철도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새 KTX 서울역과 옛 서울역.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상영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흥미로워 보이는 1955년의 단성사로, 건물은 1934년 5차 완공 당시 그대로다. <피아골>은 빨치산 남자대원들이 한 여대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을 그린 반공 영화였으나, 빨치산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주연의 <플레이밍 스타Flaming Star>와 말론 브란도 주연의 <애꾸눈 잭. 간판 등이 내걸린 1962년 4월 30일의 단성사.

<월하의 맹서>에 출연한 '최초의 본격적인 여배우' 이월화.

1926년 <아리랑>에 출연한 나운규와 신일선.

단성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 개봉관의 지위를 누렸다. 사진은 <장군의 아들3>과 <서편제> 개봉 당시 단성사 앞에 영화를 보고자 몰린 관객.

2005년 2월, 10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상영관으로 거듭난 단성사.

일제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용 공터는 한국전쟁 후 빈민들 차지가 됐다. 사진은 종묘 맞은편 공터를 메운 판잣집으로, 이것을 없애고 지은 것이 '한국판 라데팡스' 세운상가다.

세운상가는 보행자전용로와 인공정원 등을 갖춘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으로 기획됐다. 사진은 세운상가 아파트 조감도.

1967년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지은 세운상가는 완공 후 10여 년 만에 슬럼화됐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 세운상가는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67년 11월 17일 세운상가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2003년 1월 19일 찾아간 우이동 최남선 고택은 지붕에 물이 새고 기둥에는 곰팡이가 스는 등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택은 답사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헐려버렸다.

철거 직전 집 주변에는 일본 황실 사진첩(위)이나 최남선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흥미로운 지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아래).

한 청년이 최남선에게 편지로 "선생님의 거룩하신 애족, 애국 정신으로 지도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윤색되어 있었다.

손탁은 4개 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배포가 커 주한 외국인들의 대모 역할을 했다. 조선왕실은 일본을 견제하고자 그런 그녀를 필요로 했다. 사진은 손탁과 그녀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손탁호텔로, 박공(지붕 아래 삼각형 부분)에 '손타그 호텔'이라고 일본어로 씌어 있다.

덕수궁 중명전 마당에서 환담하는 더럼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 모두 한국인에게 처단당했다.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이화여고가 들어섰다. 손탁호텔은 사라졌지만 정동에서는 여전히 열강의 각축이 느껴진다.

1954년 5월 15일 미국 '군인의 날' 기념식을 마친 미군이 세종로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념행사를 세종로에서 할 정도로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는 막강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1978년까지 사법부 수장은 모두 친일부역자들 차지였다. 사진은 법원 인사를 둘러싼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옷을 벗은 뒤 이 대통령을 찾은 김병로 대법원장.

'제야의 종' 행사를 기획한 경성방송국은 정동 덕수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사진은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념비다.

보신각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었다.

2층으로 중건된 현재의 보신각.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2008년 1월 1일 '제야의 종' 타종식이 열린 서울 보신각. 그 기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도 어김없이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몰렸다.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담과 감시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사형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위)과 사형집행 후 시신을 외부로 내보내는 통로(아래).

해방 후 미군정청과 독재정권도 정적이나 진보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서대문 형무소를 활용했다. 사진은 1959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진보당 조봉암 당수(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가 사형판결을 받는 모습으로 조봉암은 '북진통일'을 주창한 이승만에 반해 '평화통일'을 추구했다.

항일의 공간으로만 추억되는 서대문 형무소가 온전한 모습을 찾을 날은 언제일까.

1910년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독립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 다른 종속을 의미했다.

독립문의 남과 북 편액은 각각 한글과 한자로 씌어 있는데, 모두 이완용이 썼다.

1979년 8월 15일, 독립문은 고가도로 건설을 위해 '獨立門址'라고 쓴 동판을 남겨둔 채 북서쪽으로 70미터 밀려났다.

독립문 옆에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서 있는 필립 제이슨 동상. 그가 만든 《독립신문》은 개화사상을 고취하기는 했으나, 한게도 분명했다.

'또 다른 종속'에 불과한 것이 '독립'이라는 상징으로 조작되어 있는 현장.

충성분수대와 그 뒤에 있는 겨레의 마당 너머로 현충문과 현충탑이 보인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충성'과 '민족' 과잉의 현장이다.

1963년 4월 29일 여고생들을 도열시킨 가운데 아산 현충사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이른바 '구국의 현장' 성역화 작업은 '군인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주효한 수단이었다.

1962년 5월 5일 투병 중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방문한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

장군들의 묘(위)는 촘촘하기만 한 사병 묘(아래)에 비해 각각 8배나 넓다. 게다가 묘비도 훨씬 크고 봉분까지 갖추고 있다.

본질적으로 국립현충원도 야스쿠니신사처럼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이다.

네모난 담장 안에 원형 제단이 3단으로 쌓여 있고, 그 한가운데 원추형 지붕의 건물이 보이는 창건 당시의 원구단. 사진 왼쪽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와 삼문이 보인다.

일제는 환구단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과 반도호텔 등을 지었다. 사진은 지난 1958년 8월 31일 화재가 난 조선호텔(옛 조선철도호텔).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미처 외딴섬 같은 황궁우.

위로부터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조선저축은행(SC제일은행)조선은행(한국은행),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본점). 신세계백화점은 2007년 외장재를 교체해, 초기의 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1940년까지만 해도 환구단 대부분의 영역은 파괴됐어도 황궁우 삼문 앞에는 그나마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위). 그러나 지금은 호텔을 너무 바짝 들여 짓는 바람에 문의 기능을 잃어버렸다(아래).

환구단 대문이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이 2007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해방정국 당시 암살은 정적을 제거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 구멍 너머로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종합병원 건물로 둘러싸여 병원 정문으로 전락한 경교장의 모습.

경교장은 2층 김구 집무실만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김구가 앉아 있던 책상과 안두희가 총을 쏜 위치, 창문에 뚫린 구멍 등 암살 당시 상황으로 꾸며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은 서울시가 이화장의 유지보수 비용을 부담하는 등 경교장과 달리 복원 상태가 양호하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려고 모인 학생(위)과 결국 북행길에 나서 같은 날 38선 앞에 선 김구 일행(아래).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찍은 단체사진. 그러나 그들의 환국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한미호텔의 전신인 혼마치호텔.

한미호텔 터에 들어선 신한은행 건물. 뒤늦게나마 신한은행이 한미호텔 관련 사료 찾기에 나섰다.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아버린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붕괴되지 않고 서 있는 옆 동도 가파른 산비틀하며 얇은 기둥이 위태로워 보인다.

정부는 무허가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두리로 이주시키는 '배제정책'과 시민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는 '포용정책'을 병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포용된 빈민은 거의 없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은 정권 차원에서 추진됐다. 1969년 4월 21일 금화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안기부가 떠나간 건물은 각각 TBS교통방송(위)과 서울시 별관(가운데), 문학의 집(아래) 등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문락의 집은 안기부장 관사를 개조한 것이다.

온갖 고문이 행해졌던 안기부 별관 지하. 그러나 지금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간첩을 잡아야 할 우리 정보기관은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능숙했다. 사진은 1964년 8월 14일 '제1차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옛 안기부 건물을 민주주의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안기부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쓰이게 됐다.

학생 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멀지 않은 인사동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3 · 1운동을 준비했다.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과 독립선언 표지석.

3 · 1 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라고 불렸던 이들이 모였던 태화관.

1952년 7월 22일 한강철교 재개통식에서 시승용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1966년 7월 22일 열린 맹호, 청룡 교체부대 환송식.

조선싱궁으로 향하는 참도와 도리이로, 위 사진은 숭례문 쪽에서 힐튼호텔 쪽을 바라본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힐튼호텔 앞 어린이 놀이터 근처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신궁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나 됐다. 주요 건물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지금은 없어진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다.

신사의 석등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재는 뒤집혀 탁자와 의자, 장독받침 등으로 쓰이고 있다. 미타라이샤는 기증자와 기증연도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흉물처럼 버려져 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데다 무쓰히토 천황 장삿날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함으로써 '군신'으로까지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

노기가 이끄는 일본군이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203고지에서 내려다본 뤼순항 사진으로, 침몰하거나 반파된 군함들이 보인다.

이토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4년 동안 1,000엔권 지폐의 모델이었을 정도로 일본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박문사 본전.

일제는 조선왕실과 관련한 시설을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으로 만드는 등 철저히 희화화했다. 사진은 1972년 4월 21일 촬영한 창경궁으로, 지금도 창경궁 대신 놀이공원의 의미를 지닌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일제는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떼어다 박문사 정문으로 삼았다(위, 가운데 박문사 정문 앞뒤 모습). 흥화문은 해방 후 경희궁으로 옮겨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흥화문의 모조품이 서 있다(아래).

태평로 국회 역시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사진은 1958년 12월 20일 야당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통과를 저지하려고 철야농성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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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7. 13. 11:12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8  The Blue Rider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 옮긴이 | 홍진경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97

 

6650.8

아887ㅇ  4

 

ART SPECIAL 4

 

The Blue Rider |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사람들은 칸딘스키로부터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할 것이다."

- 알프레트 쿠빈

 

이 책은 칸딘스키를 비롯한 청기사파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루고 있다.

청기사파는 추상화로 가는 길을 닦아 20세기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었다.

이 책은 세기 전환기 '뮌헨의 몽마르트르' 슈바빙 거리에서 새로운 예술을 향해 고군분투한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화가들이 주인공이다. 칸딘스키와 그의 연인 가브리엘레 뮌터, 동물화가로 유명한 프란츠 마르크와 부인 마리아 프랑크, 아우구스트 마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와 부인 마리안네 베레프킨……또한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랑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선구자적인 여성 화가들도 만날 수 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최초의 추상화를 그려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다!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은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다. 이들의 단체 이름이 청기사파이다. 이 화가들이 도달한 곳이, 바로 20세기 현대 미술을 정의하는 추상화였다. 칸딘스키가 주도한 청기사파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유지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추상화와 현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어놓고……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광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고,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는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뮌헨에 살고 있다.

 

옮긴이 | 홍진경은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쾰른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고전고고학, 교육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쓴 책으로는 《베로니카의 수건》,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도상학과 도상해석학》(공역), 《미술사학의 이해》, 《당신의 미술관 1, 2》, 《집들은 어떻게 하늘 높이 올라갔나》 등이 있다. 홍익대학교 디자인 미술원(서초동)과 상명대학교 미술대학원 무대디자인과에 출강중이다.

 

1990

세계사

>> 빌헬름 황제, 베를린에서 통치함.

>> 파리에서 세계만국박람회 개최.

>> 미술계에서 유켄트슈틸 유행.

>> 독일에서 여성들의 대학 입학이 허용됨.

 

청기사파

>> 청기사파 화가들이 뮌헨의 예술가 부락인 슈바빙에 모여들기 시작함.

 

1909

세계사

>> 피카소 파리에서 야수파와 어울리며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모색함.

>> 이사도라 덩컨 자유로운 무용형식을 펼침.

 

청기사파

>> 칸딘스키, 뮌터, 베레프킨, 야블렌스키가 청기사파의 전신인 뮌헨 신미술가협회 결성함.

 

1910

세계사

>> 독일의 전위 미술가단체 '다리파' 베를린에서 신분리파전에 참가함.

>> 전기세탁기,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 발명됨.

 

청기사파

>> 마르크가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가입함.

>> 마케는 뮌헨에서 마르크를 만나고 그의 동료화가들과도 친해짐.

>> 칸딘스키는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진 <구성 2> 제작함.

 

1911

세계사

>> 3월 8일 최초의 세계여성회의 개최.

>> 여성운동은 여성의 참정권 확보에 주력함.

>> 마리 퀴리, 노벨화학상 수상.

>>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켄트슈틸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가 주도한 표현주의에 밀려 쇠퇴함.

 

청기사파

>>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내분 일어남.

>> 뮌터, 마르크, 칸딘스키가 탈퇴함.

>> 12월 18일 제1회 청기사 전시회 개최됨.

 

1912

세계사

>> '타이타닉호' 미국으로 항해 중 빙산에 부딪혀 좌초함.

>> 말레비치 등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작품을 공개함. 일례로 1912년 '당나귀 꼬리 전시회' 등.

 

청기사파

>>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해>와 <청기사 연감> 발간.

>> 제2회 청기사파 전시회 개최.

 

1914

세계사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다다이즘 시작됨.

>> 다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가 살바도르 달리와 만 레이 등에게 영향을 줌.

>> 찰리 채플린은 커다란 구두, 헐렁한 바지, 꼭 쬐는 조끼, 작은 중절모와 콧수염 등으로 분장한 '떠돌이' 캐릭터로 세계적인 배우가 됨.

 

청기사파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청기사파 해체됨.

>>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은 스위스로 이주하고, 마케와 마르크는 군대에 징집됨. 마케는 1914년, 마르크는 1916년 전사함.

 

1933

세계사

>>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의 현대 미술가들을 박해함.

>>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리에 취임함.

>> 그로피우스, 클레, 칸딘스키가 교수로 있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폐교됨.

>> 수많은 미술가와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오름.

 

청기사파

>> 청기사파 그림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힘.

 

1938-45

세계사

>> 1939년 초-1945년 말 제2차 세계대전.

>> 1938년 나치 유대인 대탄압이 시작됨. 유대인의 예배당과 상점들이 약탈됨.

>> 1943년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현한 <카사블랑카> 개봉.

>> 피카소, 미로, 달리 등의 스페인 미술가들이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의하는 작품 제작함.

 

청시가파

>> 칸딘스키는 1944년 파리에서, 베레프킨은 1938년 아스코나에서, 야블렌스키는 1941년 비스바덴에서 세상을 떠남.

>> 뮌터는 청기사파 작품들을 무르나우에 있는 자신의 집 창고에 숨김.

 

1949

세계사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서독과 동독의 분단. NATO 설립으로 냉전시대가 시작됨.

>> 뉴욕에서 데 쿠닝, 잭슨 폴록 등 추상 화가들이 '성난 작가들' 결성.

 

청기사파

>> 뮌헨에서 제1회 청기사파 회고전 열림.

 

1957

세계사

>> 엘비스 프레슬리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함.

>> 소비에트 연방국은 최초의 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함.

>> 유럽연합(EU)의 전신인 EC(유럽공동체)가 결성됨.

>>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헨리 무어가 1950년대 조각미술계를 대표함.

 

청기사파

>> 뮌터는 보관하던 청기사파 작품들을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기증함.

>> 청기사파 컬렉션은 중요한 후원자 베른하르트 쾰러에 의해 보강됨.

 

1962

세계사

>> 팝 아트, 미술계의 주류로 떠오름.

>> 마틴 루터 킹이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운동 시작함.

>> 노벨의학상이 DNA 연구자에게 돌아감.

 

청기사파

>> 뮌헨에서 청기사파 화가 중 뮌터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남.

 

차례

 

그때 그 시절

'슈바빙의 보헤미안'

 

최고가 되기까지

'K'씨의 엄청난 능력

 

예술

추상화의 탄생

 

예술가들

친구이자 적

 

사랑

"마르크는 항상 나와만 춤을 추었어……"

 

지금도 우리 곁에

모두 한 지붕 아래에

 

그때 그 시절

 

"나는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나는 뭔가를 동경하는데,

무엇에 대한 것일까?"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

러시아 태생의 미술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했다.

 

세기의 전환기 뮌헨에서는

 

…전통적 방식이건 새로운 방식이건 가리지 않고 창조적 영감을 찾아 다양한 미술활동과 작업들이 나타났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수도 뮌헨은 젊은이들에게 파리처럼 매력 넘치는 예술의 도시였다. 이 거리에서 '청기사파'의 화가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아르 누보'

뮌헨에서는 프란츠 폰 렌바흐의 고전주의 역사화에 반대하는 흐름들이 나타났다. 이는 베를린과 빈보다 앞선 행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칸딘스키와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902년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신의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앞에서 오른쪽). 이 학생들 중에 이후 칸딘스키의 연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된 가브리엘레 뮌터(가운데)가 앉아 있다.

1901년 칸딘스키가 제1회 팔랑크스 전시회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로, 유켄트슈틸과 상장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친절한 말 한마디 못 듣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 바실리 칸딘스키

당대의 명망 높은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 그의 저택이었던 렌바흐하우스는 오늘날 '청기사파'의 중요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현대미술의 시발점이 된 인상주의 : 폴 세잔의 <연못 위의 다리>, 1890년.

유켄트슈틸의 '교황' 프란츠 폰 슈투크가 거주하던 빌라 슈투크의 음악감상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천국의 수호자>, 1889년.

1902년 여름 코헬로 야외수업을 가던 중의 칸딘스키(왼쪽)와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

생 클루 공원 | 칸딘스키가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린 그림이다.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는 가장 나중에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칸딘스키는 대상보다는 색채의 본성을 표현하려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말하는 빛과 대기의 문제는 내 관심거리가 아니다……내게 중요한 것은 신인상주의 기법이다. 그들은 대기를 놔두고 색채의 효과를 강조한다."

생 클루 공원의 오솔길 | 같은 시기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그림이다. 두 사람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근교의 이 공원을 즐겨 찾았다. 뮌터의 그림은 여전히 대상의 재현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다. 반면 칸딘스키의 가을빛이 완연한 오솔길에는 나무와 땅의 형체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도시 앞에서 | 칸딘스키는 "뮌헨의 대기가 만들어내는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도시의 풍경을 자주 그렸는데, 그중 하나가 1908년에 그린 이 그림이다.

말에 탄 연인들 | 칸딘스키의 초기작은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들었던 러시아 전래동화와 중세의 기사 이야기나, 러시아 동화의 삽화나 유켄트슈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1907년 제작된 이 그림은 특히나 유명하다.

 

최고가 되기까지

 

"자랑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때때로

제시한 새롭고, 아름다운 길

현대 회화의 발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화가 친구들을 추상의 세계로 이끈다.

 

'사기꾼' 협회

 

청기사파의 전신은 뮌헨 신미술가협회이다. 칸딘스키와 동료들은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뮌헨에서 전위적인 미술을 선보이려 했다. 하지만 관객과 언론의 매몰찬 반응만이 돌아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기꾼'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칸딘스키, <구성 5>, 1910년.

칸딘스키, <구성 2>.

칸딘스키, '청기사파전' 도록의 제호, 1911년 12월.

1911년 칸딘스키가 《청기사 연감》의 표지를 위해 그린 11점 수채화 중의 하나.

1903년 칸딘스키가 그린 <청기사>.

베른하르트 쾰러는 청기사 미술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후원자였다. 쾰러의 조카와 마케는 결혼한 사이였다.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쾰러의 초상화.

칸딘스키가 자신의 책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초판을 위해 디자인한 표지.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푸른 말>은 청기사파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현재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다.

《청기사 연감》을 위해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 제작한 목판화.

아우구스트 마케는 이 그림 <청기사에 대한 조롱>을 통해 '대부' 칸딘스키와 결별을 선언한다.

나무들 | 청기사파는 배타적인 미술단체가 아니었다. 피카소나 들로네 등 여러 작가들이 이 단체의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블라디미르 부를리우크도 1911년에 그린 이 그림을 제1회 청기사파 전시회에 내놓았다. 칸딘스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 아방가르드 화가와 아즈베의 화실에서 작업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숲속의 노루 | 프란츠 마르크는 이 그림에 '숲속의 노루'(1911)라는 제목을 붙였다. 동물은 마르크에게 언제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적인 순수함과 구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예술


"예술에서 나는 교황처럼

절대 무오류성을 지니며

황제처럼

독재적이다."


열정적인 정원사 칸딘스키.

높은 자의식과 확신을 가진 예술가 칸딘스키는

홀로 새로운 미술을 향한 길을 만들어갔다.


'대부' 칸딘스키!


지적이고 명민한 이 러시아 화가가 아니었다면, 청기사파의 결성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 단체를 창립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의 기초를 세운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비구상 즉, 추상회화의 근거를 미술이론으로 정립했다. 미술이론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20세기 초 칸딘스키는 미술이론가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던 것이다.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클로드 모네의 <해질 무렵의 건초더미>, 1884년경.

여러 계열의 청색 : 칸딘스키가 그린 <무르나우의 교회>(1910)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칸딘스키는 1911년 그린 이 그림을 <즉흥 19a>이라 불렀다.

1912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동물원 1>. 동물은 항상 마케의 관심거리였으므로, 이후 그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에 그린 이 그림을 <작은 황색 말>이라 불렀다.

가브리엘레 뮌터, <교회가 있는 풍경>, 1910년.

폭풍 | 마케는 제1회 청기사 전시회에 3점을 출품하는데, 이 그림(1911)도 그중 하나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마케는 청기사파를 신랄하게 비난하고는 동료들과 거리를 두었다. 제2회 전시회에도 참가하지만 이후 청기사파에서 완전히 탈퇴한다.

빗속에서 |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 이탈리아 미래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 그림을 선보이는데, 당시 많이 그려진 '순수한 동물화'와는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프란츠 마르크, 부인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애완견 루시이다.

 

예술가들

 

"무능력자들……

화려한 색채를 걸친 아둔한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악질적인 촌뜨기들……

타고난 저능아들……"

 

청기사파 미술가들에 대해 당시의 한 비평가가 내뱉은 말이다. 그림 왼쪽부터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베른하르트 쾰러, 친구사이였던 하인리히 캄펜동크와 코마스 폰 하르트만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

 

친구이자 적

 

 

칸딘스키가 이끌어간 청기사파는 사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서로를 존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직접 들어보자.

 


 

 

 

아들 발터와 함께 한 아우구스트와 엘리자베트 마케 부부, 1912년, 본.

 

1905년 칸딘스키가 그린 인생의 동반자 가브리엘레 뮌터의 초상화.

 

야블렌스키와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19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화.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초상화(위) 그리고 1871/72년 오데사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모습(아래).

 

"벌 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큰 짐이 될 수 잇으며, 때로 역겨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 바실리 칸딘스키

1908년 칸딘스키가 그린 <바이에른의 가을>.

가브리엘레 뮌터가 무르나우에서 구입한 집. 이 집은 칸딘스키 때문에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렸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1923년.

바실리 칸딘스키, 1938년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뮌헨 - 이자르 강 | 안톤 아츠베와 프란츠 폰 슈투크로부터 아카데미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칸딘스키는 야외에서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1907년까지 야외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로,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칼뮌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 칸딘스키는 1903년 이 그림에 사용된 기법을 '순간 묘사'라고 명명했다. 팔랑크스 미술학교의 제자였던 엘라 뮌터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 나프탈의 야외 수업에 참여했다.

인상 3 | 1911년 칸딘스키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공연을 보고 온 직후 그린 그림이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의 제목을 '인상', 즉 외적인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이라고 붙였다. 지배적인 효과는 '노란 소리', 즉 소리의 인상에 대한 선언이다.

낭만적인 풍경 | 이 그림에 대해 칸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0년 <낭만적인 풍경>을 그렸다. 이 제목은 고전적인 낭만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미래의 낭만성은 실제 매우 깊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낭만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한 조각의 얼음덩어리이다. 사람들이 얼음덩어리의 불꽃은 못 보고 얼음덩어리만 느낀다면 불행해질 것이다."

붉은 반점 2 |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칸딘스키는 미술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쟁 직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말레비치나 타틀린의 구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기하학적 특성에 대해, "삼각형의 한 꼭짓점과 원의 만남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과 아담의 손가락 접촉만큼이나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구성 10 | 칸딘스키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 1939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이 해 칸딘스키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독일에서는 이미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힘.) 1939년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칸딘스키의 작품은 규모가 줄어드는데, 이를 꼭 물자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09년 그린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

가브리엘레 뮌터, <어부의 집>, 1908년 전성기 시절의 작품.

 

"누군가 내 그림을 감상한다면 그 속에서 선을 그리는 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가브리엘레 뮌터


1897년 자전거를 타는 엘라 뮌터의 모습. 당시 어린 소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푸른색 위의 사과들>, 1908/09년.

화구를 들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1902년 코헬에서.

1918년 코펜하겐 전시회를 위해 가브리엘레 뮌터가 제작한 포스터.

1949년 뮌헨의 미술관에서 개최된 청기사파 회고전에 참석한 뮌터와 아이히너.

흰색의 벽이 있는 풍경 | 1910년에 그린 '전형적인' 가브리엘레의 작품. 그녀는 자연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추상화했다. 대상이 있는 주제들, 말하자면 풍경, 집, 벽면 등은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검은색 윤곽선이 둘러지고 그 안은 색면으로 채워졌다.

눈이 온 광장 1 | 칸딘스키가 뮌터의 그림에 대해 "뮌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소리를 치거나 갑자기 생과 죽은 것에 대한 재미있는 소리들이 들려올 것 같은 어두운 소박함의 세상"이라고 표현한 지 1년 후에 제작된 그림이다.

노란 나무가 있는 가을 풍경 | 무르나우 시절 가브리엘레의 그림은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형태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색채 대비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그림은 1909년 제작되었다.

병자(병病者) | 1917년 가브리엘레가 스톡홀름에서 하염없이 칸딘스키를 기다릴 때 그린 그림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당시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건조한 색채가 당시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새들의 아침 | 1930년대 초 무르나우로 돌아온 가브리엘레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의 표현주의적인 뿌리에 골몰한다. 이 그림은 1934년 제작된 초상화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프란츠 마르크의 세 모습. 1913년 진델스도르프와 뮌헨에서의 모습(위, 가운데), 그리고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스케치(아래).

<유수프 왕자의 레몬색 말과 불꽃색 황소>는 1913년 마르크가 친구인 여류시인 엘제 라즈커 실러에게 보낸 엽서 그림이다.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는 수치가 아니라 관념의 강도가 승리를 결정짓는다."

-프란츠 마르크

마르크는 1908-10년 사이에 수많은 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곧 찢어버렸다. <렝그리스의 거대한 말 1>은 후에 찢어진 부분들을 이어붙여 복원한 것이다.

마르크는 1907년 <바닷가의 기사>를 첫 번째 아내 마리쉬누어와 함께 떠난 오스트제 여행에서 그렸다.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프란츠 마르크의 모습.

1913년 <푸른 말의 탑>. 원작은 1945년 사라졌다.

노란 소 | 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색채 상징이론을 주장했다. "푸른색은 건조하고, 영적이고, 남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노란색은 부드럽고, 밝고, 감각적이고, 여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붉은색은 잔인하고, 무거운 재료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이 이론에 상당히 합당해 보인다. 1911년 그린 이 그림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푸른 말들 |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그림이다. '푸른 말'이라는 모티브는 오늘날까지 청기사파와 동일어로 여겨지고 있다.

푸른 고양이와 노란 고양이 | "나는 동물화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미술을 동물화 시키는 것보다 더 행복한 방식은 볼 수 없다." 마르크는 1912년 일련의 동물 그림을 제작하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이다.

호랑이 | 프란츠 마르크가 제작한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1912)이다. 이 그림에는 추상화 과정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아우구스트 마케.

1913년 마케가 그린 <햇살이 드는 길>.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은 내게는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아우구스트 마케

아직 학생 시절이던 1906년에 그린 마케의 <자화상>.

마케와 부인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의 삼촌 베른하르트 쾰러. 쾰러는 청기사파의 막강한 후원자였다.

마케의 <모자를 쓴 화가의 부인>은 약혼녀 엘리자베트를 그린 것이다. 결혼하기 바로 직전에 그렸다.

말을 탄 인디안 | 마케가 청기사파의 관념에서 영감을 얻어 1911년 그린 그림이다. 이 무렵 마케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문화의 미술에 푹 빠져 있었다.

나무 아래서 햇빛을 받고 있는 아이들 | 마케는 청기사파를 탈퇴한 직후인 1913년에 이 작품을 그렸다. 당시 그는 본에서 젊은 미술가들을 모아 오늘날 '라인 인상주의'라 알려진 운동을 주도했다. 이 미술가들은 마케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12년의 <자화상>.

1887년 젊은 중위 때의 야블렌스키의 모습.

야블렌스키, <푸른 찻잔과 사과가 있는 정물>, 1904년.

 

"야블렌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는 늘 그렇듯이 포동포동한 얼굴로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을 엿듣는 모습이었다."

- 가브리엘레 뮌터, 자신의 작품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에 대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안드레아스 야블렌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 무르나우, 1908년.

야블렌스키, <오버스도르프 풍경>,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 1909년.

무용가 알렉산더 사하로프의 초상 | 1909년 야블렌스키는 30분간에 걸친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사하로프는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격하게 뺏어 들었다. 겁이 난 야블렌스키는 언제나처럼 다시 잘 그리겠다고 말했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세 모습. 자화상(1910년)과 두 점의 사진.

마리안네 베레프킨, <무용가 사하로프>, 1909년.

 

"나 스스로의 고문을 막을 수 없다면야, 내가 정말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는 있을까."

-마리안네 베레프킨

베레프킨, <붉은 나무>, 1910년. 이 작품은 그녀가 일본 목판화에 매료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30년경 아스코나의 아틀리에에서.

쌍둥이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09년 작품. 그녀를 매혹시킨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영향이 엿보인다.

비극적 분위기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10년 작품. 야블렌스키와의 비극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


"오직 당신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위대함

이를 수가 있소."


바실리 칸딘스키가 연인이자 뮤즈, 그리고 동료였던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쓴 글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베레프킨과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이 세 미술가 커플은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길든 짧든) '부적절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또한 남자든 여자든 모두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베레프킨과 야블렌스키, 젊은 시절 러시아의 아틀리에에서.

191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연인 칸딘스키와 공동으로 그린 <조각배 소풍>.

가브리엘레 뮌터, <풍경화를 그리는 칸딘스키>, 1903년 초.

첫 번째 부인 안나, 어머니와 차를 마시는 칸딘스키.

193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러시아인의 집>.

1913년 자신의 그림 <작은 기쁨> 앞에 선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결혼한 니나, 1921년.

가브리엘레 뮌터, <차가 놓인 탁자 앞의 칸딘스키>, 1910년.

애견 루시와 함께 있는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1911년 렝그리스에서.

프란츠 마르크, <주홍색 누드>, 1910년, 모델은 부인인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누드>, 1910년, 모델은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여인 2>, 1912년.

프란츠 마르크와 그의 반려자 마리아 프랑크, 1908년 렝그리스에서.

아우구스트 마케의 스케치, <본의 아틀리에에서 마리아와 프란츠 마르크>,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1909년, 야외스케치 여행 중의 장면.

일랴 레핀, <붕대를 맨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888년.

야블렌스키는 1900년 15살의 어린 가정부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다. 헬레네는 2년 후 야블렌스키의 아들 안드레아스를 낳았다.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905년.

야블렌스키와 부인 헬레네, 1929년 비스바덴에서.

 

지금도 우리 곁에는

 

"나는 단지

작품들한데 모아

놓아야 했다."

 

청기사파와 이 단체의 보물 같은 그림들을 지킨 수호천사 가브리엘레 뮌터와 그녀의 반려자 요하네스 아이히너, 1955년 뮌헨에서 열린 '추상적 즉흥'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청기사파의 발자취

 

한 시대의 유산인 뮌헨의 미술가 그룹과 세계적으로 이름난 그들의 작품들, 시대를 앞서간 여성 미술가들과 남성 미술가들에 대한 회고전. 그 들의 창조 정신은 오늘날 미술관과 기념관, 그리고 예술가의 이름을 딴 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뮌터의 그림 <러사아인의 집 실내>(1909)에 따라 새로 복원된 아틀리에.

1910년 칸딘스키가 직접 칠한 계단의 난간도 복원되었다.

프란츠 마르크 미술관.

비스바덴 미술관.

가브리엘레 뮌터 상.

청기사파 컬렉션의 고향인 뮌헨의 렌바흐하우스.

무르나우의 집. 의자가 놓인 벽면에 가브리엘레는 중요한 청기사파 그림들을 보관했다.

가브리엘레 뮌터, 1957년 1월.

 

작품의 변천 과정

청기사파 화가 개개인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칸딘스키

1907

1908

1910

1939

 

>> "그는 아시아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급하게 보이지만, 무척 재미있으며, 그리고 완벽히 비밀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마케가 칸딘스키에 대해)

 

가브리엘레 뮌터

1903

1908/1909

1910

1918

1934

 

>> "뮌터의 그림은 정말 독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박함을 지니고 잇다. 절대적인 자연성, 건조하며 낮은 채도……그것이 그녀 그림의 본질이다. 바로 그 안에 선함과 사랑이 존재한다. 나는 그녀의 그림에서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

(쇤베르크가 뮌터에 대해)

 

프란츠 마르크

1908

1910

1911

1911

1912

 

>> "다른 화가들보다 젊은 이 화가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들판과 숲 속에 묻혀드는 소나 노루 등을 그려 마르크 자신의 세계관을 내보이고 있다."

(칸딘스키가 마르크에 대해)

 

아우구스트 마케

1906

1911

1912

1912

1913


>> "그것은 일상적이며 우연한 삶의 진정한 시(詩)이자 비전들이었다. 그는 끊이지 않는 기쁨과 정열로 자신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엘리자베트가 남편 마케에 대해)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00

1904

1909

1912

1936


>> "나는 색채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야블랜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09

1910

1910

1910


>> "자신이 느낀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 속으로 녹여낼 수 있다면, 그는 비전의 대가이다.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하기 위해 자신이 느낀 가시적인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대가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준으로 미술가들을 판단해야 한다."

(베레프킨)

 

 

 

 

posted by 황영찬

2015-067 화엄사

 

글 / 정병삼, 김봉렬, 소재구●사진 / 손재식

2005,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8

 

082

빛12ㄷ  241

 

빛깔있는 책들 241

 

정병삼(연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한국불교사 전공). 1983년부터 간송미술관연구원을 거쳐 1991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의상 화엄사상 연구』,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일연과 삼국유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통일신라 관음신앙」,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의의」, 「통일신라 불교 철학」, 「진경시대 불교의 진흥과 불교문화의 발전」, 「추사의 불교학」 등이 있다.

 

김봉렬(건축)-------------------------------------------------------------------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문화 관광부 문화재전문위원, 김수근 문화재단 전문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건축의 재발견(전3권)『한국의 건축 - 전통 건축편』, 『법주사』, 『한국 건축과 만남』(전3권) 등이 있고 한국 건축에 관한 30여 편의 연구 논문과 다수의 현대 건축 비평들이 있다.

 

소재구(유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에 근무하고 있으며 「원각사지 10층석탑의 연구」, 「동문선의 불탑자료」, 「우리나라의 불탑」, 「고달원지 승탑편년의 재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손재식(사진)-------------------------------------------------------------------

신구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불교 문화와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작업을 주로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십여 권의 빛깔있는 책들에 이와 관련된 사진을 실었고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자연탐험』 작업에 참여하였다. 현재 『사람과 산』의 객원 편집위원으로 있다.

 

|차례|

 

천년의 화엄 성지, 화엄사

화엄사의 역사

화엄사의 건축

화엄사의 유물

화엄사 가는 길

참고 문헌

효대에 있는 석등.

남악사 전경  신라 이래 국가에서 명산 대천으로 지목받아 제사지내던 곳으로 화엄사 초입에 있다.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사경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사경으로 백지 14미터에 각행 31자로 묵서하였다.

효대  각황전 뒤 언덕에 있는 이곳 효대에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4사자3층석탑과 배례석, 석등 등이 서로 마주보는 상관 관계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어버이에게 효성을 드리는 모습으로 전화되어 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도선국사 영정  신라에서 고려에 걸쳐 이름을 드날렸던 도선국사는 15살에 이곳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어 화엄을 배웠다. 도갑사 소장.

가람 구성  거대한 석탑을 경계로 단 위와 단 아래로 나누어지는 화엄사의 가람은 중심 전각인 대웅전과 각황전은 단 위에, 보제루와 승방 요사들은 단 아래에 자리잡았다.

화엄사 배치도.

동서주축선상에서 본 북면.

만월동에서 바라본 범종각 및 중심 사역.

각황전  초창 때의 장륙전은 화엄석경을 위주로 한 강당 공간이었지만, 1702년 계파선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각황전은 완벽한 예불 공간으로 바뀌었다.

각황전 중수 후 평면도(1층).

1 · 2층 모두 내외 2출목을 보이고 있는 각황전의 공포.

각황전 내부  전형적인 예불용 공간으로 3불 4보살이 모셔진 내부의 전면 바닥에는 가설 마루를 깔았고, 2층 외벽에 단 창문을 통해서 은은한 햇빛이 불상들의 얼굴을 비춘다.

대웅전 전경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인 1630년에 중건되었다.

대웅전 측면  측벽 중앙칸에는 X자 모양으로 결구한 가세가 설치되어 독특한 외관을 이룬다.

대웅전 평면도.

원통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크기나 형태로 볼 때 각황전과 대웅전의 중간에서 두 중심 건물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와도 같다.

보제루와 1층의 기둥들  1층에는 기둥만 세우고(아래), 2층에는 우물마루를 깐 전형적인 누각 형식을 취했으나 누 아래로의 출입은 불가능하다.

보제루 1층평면도.

대웅전에서 바라본 명부전  주심포 형식의 공포와 풍판을 단 맞배지붕 집으로 단정한 인상을 준다.

나한전  나한전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이익공 형식을 취한 맞배지붕 집으로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를 연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전  영전은 원통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맞배지붕 집이다.

일주문  절의 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작은 산문으로 절의 경계에 담장을 쌓고, 좌우로 두 개의 기둥을 세운 다음, 대문과 같은 모양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측면이 두꺼워서 외관이 당당해 보이며, 기둥이 높아 훤칠해 보인다.

천불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불전으로 가운데 칸이 양 협간보다 2배 정도 넓다.

천불보전  내부와 대방채의 생나무 기둥  계단형 불단에는 1,000구의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으며(위), 모과나무를 생긴 그대로 잘라서 사용한 것으로 Y자형으로 갈라진 나무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건축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 준다(아래).

4사자3층석탑  우리나라의 사자탑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하면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사자탑 앞에는 머리에 석등을 이고 있는 석조 공양보살좌상이 탑을 향하여 공양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4사자3층석탑의 사자상  윗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연꽃을 머리 위에 인 채로 윗단의 덮개돌을 떠받치고 있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한가운데에는 공양상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서 있어 네 사자의 호위를 받고 있는 듯하다.

동5층석탑  모양새는 비슷하나 단층 기단이며 아무런 새김 장식이 없다는 점이 2층 기단에 새김 장식이 풍부한 서5층석탑과 대조를 이룬다.

서5층석탑과 탑신부의 여러 가지 조각 장식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이 탑의 꼭대기에는 간단한 상륜 부재를 장식하였으며(위), 1층의 몸돌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다(아래).

원통전 앞 사자탑  화엄사에만 존재하는 탑으로 사자탑 형식의 2층 기단을 구성하였고, 탑신부는 단층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또는 그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 앞 석등  각황전의 위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제작된 이 석등은 여러 가지 무늬 장식과 받침부의 변화 있는 조형으로 완화시켰으며, 상륜부를 강조함으로써 석등의 규모를 한층 신장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당간지주  지주 끝부분이 앞뒤로 둥글게 깎여 있으며, 측면 모서리의 모를 죽이는 방식이 중간부까지만 나타나고 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화엄석경  통일신라시대 벽면을 장식했던 석경의 전돌 모양 조각들을 통해 경전의 내용과 함께 변상도를 새겼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벽암대선사비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활약하고 화엄사 중건 사업에 헌신하다 입적한 벽암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는 거북돌과 이맛돌의 형태가 소박하고 친근한 향토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구층암 3층석탑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하고 있는 이 석탑은 탑이 무너지고 난 뒤 절집이 들어서면서 탑과 건물의 향배가 어긋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층암 석등  8각석등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매우 단정하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신라 석등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대웅전 목조 삼신불좌상  화려하게 장엄된 내부에는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석가여래불을, 왼쪽에는 노사나불을 봉안하였으며, 각 불상 위에는 독립된 닫집을 설치하였다.

각황전 목조 칠존불상  3구의 불상과 4구의 보살상들은 거구의 신체를 표현하면서도 외모의 변화를 억제하고 조형적인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사천왕상  흙으로 빚어낸 소조상으로 천왕문의 오른쪽에 있다. 갑옷을 입고 걸터앉은 자세로 비파를 들고 있는 소조상이 동방지국천왕이며, 갑옷을 입고 왼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남방증장천왕이다.

인왕상과 동자상  인왕상은 가람의 출입문을 지켜 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바로 뒤편에 용맹을 상징한다는 문수동자가 사자의 등에 걸터앉아 있다.

화엄사 괘불  색채가 곱고 균형 잡힌 구도와 치밀한 선의 움직임이 돋보이는 이 불화는 임진왜란 이후 불타 버린 전각들을 중창하고 난 뒤 벽암대사를 비롯한 승려와 불자들이 공을 들이고 왕실을 축원하며 제작한 것이다.

범종각 범종  보제루 옆 종루(범종각) 안에는 화엄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범종이 걸려 있는데, 이 범종에는 18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내용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posted by 황영찬

2015-066 萬人譜 23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11

 

811.66

고667만  23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어느날 밤 / 조상매 / 장영옥 / 최봉옥 / 지복수 / 어느 방 / 이흥수 / 국가보안법 위반 제1호 / 황규직 / 윤삼이 아버지 / 궁녀 길례 / 매린(買隣) / 재회 / 횃불데모 / 김태석이 / 금홍 / 임기택 / 지영헌 / 김태연 / 이수돌의 낙서 / 민병록 / 김영기 / 101세 광대 / 김용준 / 한정기 / 남재섭과 심혜옥 / 동굴대궐 / 조선관 / 이승만의 개 / 김영달의 막걸리 / 박종표 / 이강희 / 박찬원 / 송규석 / 전한승 / 노희두 / 어느 여중생 / 마누라의 일 / 이한광 / 쎄단 / 자매봉 / 천인복 / 양대춘 / 이연하 / 김영호 / 함장호 / 이성희 / 손경호 / 박춘봉 / 이상관 과장 / 그 3천여명 / 이현란 / 이장선 기자 / 임용학 / 국보 미륵반가사유상 / 장경근 / 박지수 / 유도 6단 / 이석제 / 김명시 / 윤건중 / 백남의 / 박마리아의 어머니 / 한정봉 / 신도환의 꿈 / 최경자 / 송시환 / 이기태 / 김종진 / 안정수 / 신경식 / 김용실 / 두 미루나무 / 이한수 / 이기태의 애인 / 강수영 / 임종 / 어느 사상범의 주술 / 약광 / 어느 인생역정 / 박기병 / 김철규 / 오성원 / 전무영 / 그 손녀 / 한성여중 진명숙 / 천막 대폿집 / 어린 고물장수의 꿈 / 인걸이 어머니께서는 / 김흥한 / 복취루 배달원 / 막내 오줌 / 김진호 당수 / 도둑 내외 / 김정보 영감 / 닭 / 김택수 / 그 골방 / 어느 석녀 / 거지 필남이 / 가짜 / 조용수의 마지막 / 한 노인의 나라 운수풀이 / 돈 사람 윤청일 / 여숙희 / 영옥이 / 청계천 판잣집 / 전순의 / 깡패 참회행진 / 갈치장수 / 우는 남자 / 가영훈의 아내 / 끄나풀 우만철 / 노점상 임태길 영감 쌍영감 / 황금찬의 9천 미터 / 전남편 / 엄진달 면장 / 1965년 11월 19일 저녁 / 남대문시장 입구 / 옥채금 / 해월의 따님 / 야반도주 / 변영태 / 꿈 / 송철원 / 술 한잔 여본걸 씨 / 길자 / 박벽하 스님 / 황태성 / 가수 한명숙 / 부활 / 6 · 3의 시대 개막 / 밤섬 윤옥녀 / 어린 종 견동이 / 머리칼 장미 / 천상병 / 박종홍 / 수번 710번의 죽음 / 강태원 원장 / 홍어배 임태섭이 / 그 갓난아기 / 구재학당의 밤


해설 「아, 4 · 19」 / 김윤식


장영옥


자동차 운전사였다

그날

거리에 있었다

그날

거리에서 쓰러졌다


차주는 다른 운전사를 구했다


누군가가 이 반생의 생이야말로 허무가 아니라 한다


이흥수


아버지가 야당 민주당원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3학년 중퇴

육사 8기

국방부 정보과

김종필 동기


그러나 그는 육군소위로 제대한 뒤

을지로

종이가게에 다니고 있다


평범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낮

평범한 밤


아내

두 아들


4월혁명의 거리에 평범하게 몸 바쳤다

어디에나 평범하게 아니 평범하지 않게 생과 사 있다


궁녀 길례


고려 만월대의 새벽이야

닭이 울어서 연다

고려 만월대 충렬왕의 새벽이야

닭이 울어서 연다


마마께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으셨으나

간밤 부름받은

궁녀 길례는 성은 입은 몸으로 깨어나서

꿈인가

생시인가

제 옷 속의 몸 여기저기 손대어보았다


이로부터 길례의 시대 연다


고려 만월대 궐내에서는 때를 알리는

수탉 일곱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진한 운우지정 뒤

닭 우는 소리 시끄럽다고

그 닭들을 다 없애는 길례의 시대 연다


더이상 고려 만월대의 새벽은 없다 긴 긴 밤 있다


재회


강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달이 없었다면

국자별 북두칠성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아 이 세상에 포옹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전란 때 헤어진 뒤

다시 만난

두 사람


눈 맞으며 오래오래 포옹을 풀지 않는다

눈 내리는 날 없다면

어쩔 뻔했는가


진오식과 현상희


남재섭과 심혜옥


제주도 산지포


밤 뱃고동소리 들으면서

잠든 너를 바라본다


멀리 도망쳐와서 너는 이제 어엿이 내 아내이구나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지 않으리


구름 쓴 한라산 밑 귤꽃 피어 있구나

두 몸 꽁꽁 묶어 여기 살리 곧 아기 낳으리


천인복


너 포항 영일만

가슴 넓은 바다를 두고 온


서울 을지로 그 궤짝 같은 방

서울프린트사 등사원


너 가슴 뜨거운

4월의 거리로 나선


처음으로 경무대 앞 당당히 앞서가다

거꾸러진


네 어머니의 통곡 속의


박춘봉


남산동 산동네 판잣집

스물일곱살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스물아홉살이면 뭘 해

소금가마니

어깨에 저나르는 하루 저물면

어깨가

욱신욱신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스물아홉살이면 뭘 해


4월 26일 낮 1시

영등포 연흥극장 앞 데모 속에 있었다

일 나가지 않고

데모 속에 있었다


영등포 연흥극장 앞 데모 속에 있었다

일 나가지 않고

데모 속에 있었다


영등포연합의원에 실려와 눈감았다

여기저기 몽둥이자국

가슴팍 칼자국


스물일곱살이면 뭘 해

이제사 죽어 파리 들끓는 판잣집 지전(紙錢)도 없이 싹 벗어났다


임용학


쉰살은 넘은 듯

막일꾼인 듯


4월 26일 밤

세브란스병원에 실려온 주검

다른 주검의 가족들 울음소리로

덩달아 외롭지 않았다

며칠 뒤

누가 와서 임용학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아직 그 주검 누가 찾아가지 않았다

시시한 무관심

시시한 관심

시시껄렁한 타인들이 이 세상 한쪽이었다


바람 왜 부노


김종진


문리고등공민학교 1학년

고학생

자취방에는

담요 한 장

왜간장 두홉들이 절반

양재기 하나

밥그릇은 있고

국그릇은 없다


4월 26일

중학생

고등학생 데모


문리고등공민학교를 대표해서

스물두살

늙은 1학년 야간학교 학생 김종진도 나아갔다


머리 관통상


그날 밤9시경 병원 임시 안치실 시신번호가 붙었다

18번 김종진


안정수


소년은 열여덟살

소년은 부모가 없다

소년은 학생이 아니다

소년은 다니는 공장도 없다 처음부터 빈털터리였다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즉사

M1 소총 총탄이

소년의 빈털터리 생을 뚫었다


누가 찾아가지도 않는 주검


어쩌다 이 세상에 제 이름 하나 붙어 있었다

안정수


이한수


남대문 아래에 죽어 있더라

열아홉살

용산고 졸업하고

사범대 가려던

죽어 아무 말 없더라


쉬파리가

네 주검 알아보고 와 있더라


혁명이란 너의 죽음을 지나가는 행렬이더라


이기태의 애인


오늘도 기태씨가 걸었던 길을 걸었어요

경희대 벚나무길

정문 앞

제일다방에 가서

기태씨가 마시던

모닝커피를 시켜서 마셨어요

지금 이대통령은

하와이로 떠났어요


기태씨가 숨 거둔

수도의대부속병원에는

이제 혁명 사망자와 부상자 하나도 누워 있지 않아요


오늘도 나는 기태씨가 달려가던 길

종로5가

종로3가를

시내버스로 지나왔어요

이제 나는 4 · 19묘지에 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예요 사랑하던 당신이여 안녕


강수영


사과꽃 졌다

경남고 3학년이

이 세상의 끝


할 수 없구나

네 시작은

다음 세상


이 세상의 행로는 네 시작도 끝도 바로 지워버렸다

개가 짖는 밤 이슥하구나


임종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 둘이 살고 있었다

그 오막살이

처마에는 참새 몇 마리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래 누워 있었다

어린 손자가

오릿길 약방에 가서 약 지어왔다

숨찬 손자


할아버지 전세중 손자 전대양


할아버지 약 지어갔어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눈떠

이놈 대양아 약 지어갔어요가 아니라

약 지어왔어요라고 다시 말해라


할아버지 약 지어왔어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음 진 모습 이미 숨졌다


오성원


1939년

경남 창원에서 첫울음 울다

1960년 3월 15일 그날

경남 마산에서 숨지다


살아 있을 때

국숫집 지나가면 국수가 먹고 싶었다 구름을 보면 구름이 되고 싶었다


한성여중 진명숙


한성여중 2학년 진명숙


   시간이 없는 관계로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위하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하여주세요


열다섯살 소녀는 이 유서를 남기고

미아리고개 시위에 참가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얼굴 명중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피투성이 얼굴

눈도 코도 없어진 얼굴


갈치장수


하루 내내 갈치 쉰 마리 예순 마리 받아다

팔러 다니는 아낙

갈치 다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팔러 다니는 아낙


날 저물어 돌아가면


하루 내내 누웠다 앉았다 하던 사내

아이들 잠자기를 기다렸다가

지친 마누라 벌렁 눕혀

천상의 낙을 베푸누나


어흐

어흐

어흐


끝난 뒤

진땀 비지땀 알몸뚱이 이대로

사내 담배 빼앗아 연기 한 모금 뿜어내는 마누라


아이고 당신 없으면 나 못 살아


노점상 임태길 영감 썅영감


무허가 노점상

단속반이 납시는 날

오늘도 썅

아까부터 주전자에 담아온 막걸리

오로지 그것만이

이 세상의 벗이었다


재작년에

마누라

망우리 무덤으로 가고

오로지 막걸리 한 주전자

그것만이

이 세상의 벗


내일은 국군의 날이라 한다

아들은 빽 없어

강원도 화천 일선부대에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65 환단고기를 찾아서 3 중국이 날조한 동북공정을 깨라

 

신용우 장편소설

2013,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16

 

813.7

신65ㅎ  3

 

중국 정부가 감춰둔

      우리 역사서에 실려 있는 영토의 진실!

껍데기 벗은 동북공정의 실체와 낱낱이 해부된 그 허상의 백서!

 

환단고기를 찾아서 3

중국이 날조한 동북공정을 깨라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동북공정과 요하문명론의 엄청난 음모를 똑바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

 

프롤로그 : 우리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구려벌

 

1. 동북공정은 중국 2대 주석 화궈펑의 작품

2. 감각보다 진한 피

3. 만주라는 보물을 조선에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4. 첸쉐썬 박사

5. 스탈린이 가지고 논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6.25 동란

6. 첸쉐썬이 실패한 대약진운동

7. 피를 부르는 문화대혁명의 신호탄

8. 문화대혁명과 화궈펑

9. 화궈펑의 벼락출세

10. 화궈펑의 무혈 쿠데타

11. 환단고기와 동북공정의 시작

12. 동북공정의 시발은 194년

13. 피는 바꿀 수 없어도 신분은 바꿀 수 있다

14. 물은 막아도 피는 못 막는다

 

에필로그 : 메아리는 언젠가는 돌아온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26. 17:1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4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미셸 오 지음,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8


082

시156ㅅ  33


시공디스커버리총서 33



"나는 당신에게 회화의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평생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독창적인

천재 세잔은 회화의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세상사와는 담을 쌓은 채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침내 세잔은 색채의 논리를 규정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의 작업은 곧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자연의 모든 물상은

색채를 갖고 있으므로, 데생과

색채는 결코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칠해 나감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색의 조화가

이루어질수록 데생도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색채가

풍부해질 때 형태는 가장 풍만해진다.

색조의 대비 및 관계가 데생과 형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림이란 색채, 형태 공간 따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렇게하여 그것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에 따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강렬한 느낌 - 나는 그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 이 미술적 개념을 이해하는 근본적 바탕이 되고 이 바탕에 의존해서 모든 미래의 작품들이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볼 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관련한 폭넓은 지식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오로지 오랜 동안 쌓아 온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명암(빛과 그림자)은 곧 색채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우연적 요소는 색 자체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색이 함께 어울릴 때의 공명도(共鳴度)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림자도 빛만큼이나 어엿한 색채입니다. 단지 명도(明度)가 떨어질 뿐이지요. 그러므로 명암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조(色調)가 맺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림에는) 대비(對比)가 있을 뿐, 선(線)이나 모델링(modelling, 대상에 입체감을 주는 것 : 역주)은 없습니다. 그것은 명암의 대비가 아니라, 색채감(sensation of color)의 대비를 뜻합니다."


"모델링은 색조의 관계를 정확하게 맞추었을 때 얻어집니다. 색조를 조화롭게 병치(倂置)시켜 완성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 모델링을 갖추게 됩니다."


차례


Cezanne, "Puissant et solitaire"


제1장 유년 시절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미셸 오 Michel Hoog

파리 로랑제리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미셸 오는, '로베르 들로네'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리얼리즘과 시정' '르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주최한 바 있다. 1971년부터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루브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펴낸 수많은 미술 서적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2번 <미라>가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유년시절


"은행가이신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책상 뒤에서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남부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출신인 한 총명한 학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당시 은행가이던 그의 아버지가 반대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세잔은 자신의 사진(아래, 1860년대 초만 해도 사진은 신기한 물건이었다.)을 보면서 그린 초상화(위, 1861~1862)를 고의적으로 보기 흉하게 처리했다. 누런 안색, 응시하는 눈, 험악한 인상은 악마를 연상시킨다. 훗날 제작된 초상화들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유명하지만, 이 초상화만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못했다.

세잔의 누이인 마리 세잔의 초상화(위, 1866년경). 세잔의 초기 시대에 그린 몇 안 되는 여자 초상화이다. 물감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두텁게 칠해져 있는데, 세잔은 임파스토(impasto)라고 하는 이런 빠르고 거친 붓질을 애용했다. 이 기법은 널리 통용되던 관학적인 기법이나 당시 엑스에서 가르치던 부드럽고 장식적인 붓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세잔의 외삼촌 도미니크 오베르의 초상화
(아래, 1866)는 약 10점 정도 제작되었다. 그는 조카를 위해 군말없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물결치는 파도 위로 나는 달아낫다. 몇 년간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날랜 두 팔이 부드러운 파도 위로 뱀처럼 헤엄쳤을 때

안녕, 포도주로 익힌 행복한 날들이여! 대어를 낚는 행운이 따르기를!"

세잔

18558년 4월 9일 에밀 졸라에게 쓴 편지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1848년 엑스에 은행을 차렸고, 큰부자가 되었다.

<4계절> 벽화(당초 자 드 부팡의 벽에 그린 것이었으나 현재는 파리의 프티 팔레 박물관에 옮겨져 있음)는 그림을 그려 넣은 벽지나 로맨틱한 커튼에 등장할 법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등장시킨 가을(위)과 (아래)은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연상시킨다. 야망이 엿보이는 이 초심자의 작품이 보여 주는 예리한 데생, 분명한 윤곽, 긴 팔 등은 세잔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그림에 '앵그르'라고 서명한 이유를 말해 준다. 신고전파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관학적 화풍의 교과서적 전범이었던 것이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그린 이 데생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효시이다. 이 그림은 1859년 1월 17일 에밀 졸라(아래)에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그린 것으로, 세잔은 "죽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제목을 달아 낳았다.

1863년에 사망한 외젠 들라크루아는 세잔 세대의 많은 화가들의 우상이었다. 이 그림은 세잔이 그린 들라크루아의 초상(1864~1866).

<노인의 두상>(위, 1865~1868)은 도미니크 외삼촌을 그린 초상화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정교하다. <메데아와 자식들>(아래, 1879~1882)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모사작이다.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안토니 발라브레그는 엑스 출신이었고 파리의 카페를 즐겨 찾던 소집단의 멤버였다. 무뚝뚝한 시골뜨기 세잔은 파리의 예술가들이 즐겨 드나들어 파리 예술계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던 카페 게르부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잔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마네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있었다. "마네 씨, 난 악수하지 못하겠소. 1주일 동안 손을 닦지 않은 터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페트 샹페트르>(1510경, 이 작품은 한때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옷 입은 남자들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여체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1863년. 낙선자들은 전시회장의 옆건물에서 낙선전을 열었다. 당시의 신문 만화에서 알 수 있듯, 낙선전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얘야, 모자를 벗으려무나. 이 불행한 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야지."

세잔은 기법과 주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폭력적인 장면(1867~1868년경에 제작한 <살인>)이나 어느만큼은 풍자적인 초상화를 그릴 때는 아주 신속하게 작업을 했다. 두터운 붓질과 빈번한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평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정물화는 부드럽고 사색적인 붓질로 처리하곤 했다.

졸라에게 책을 읽어 주는 폴 알렉시스

그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폴 알렉시스는 졸라의 제자였고 그의 비서로 지내기도 했다. 위 그림(1869~1870)에서 알렉시스는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파기해 버리는 세잔으로서는 이례적인 미완성작이다. 간단히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알렉시스는 이 그림보다 1~2년 전인 1868년에 제작된 마네의 유명한 그림 <졸라>(아래)를 연상케 해준다. 이 그림은 졸라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촐라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은 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의 제자(題字)를 일부러 나오게 그렸다. 그 신문은 아버지가 평소에 보던 신문이 아니라, 1866년 4월과 5월에 살롱을 성토하는 기사를 게재한 《에베느망》지였다. (살롱을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글에서 살롱을 통렬히 논박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이 신문의 편집인은 졸라의 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조처하는 한편, 졸라를 해고해 버렸다. 젊은 세잔이 그린 정물화-<설탕그릇, 배, 푸른 컵이 있는 정물>(가운데, 1863~1865)-가 안락의자 뒤에 걸려 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이 아들의 정물화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는 폴 고갱의 친구이며 화가인 에밀 슈프네케의 소유였다가 다시 반 고흐의 모델이며 화가인 외젠 기욤 보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잔은 후년에 이 그림을 파기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이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오로지 그 크기와 풍자적인 면모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은 1870년 이전, 세잔이 살롱 입선을 노리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잔은 당시 스타일,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원칙'을 찾아내기 위해 탐구에 탐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세잔은 자신의 감각을 분석하기보다는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 강렬한 색채, 풍자적 분위기, 대문자로 적어 넣은 제목 따위가 고풍스런 기법과 간판쟁이의 손놀림이 뒤범벅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림 속의 안락의자는 아버지의 초상화와, (비록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1866년에 제작된 <탄호이저 서곡>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앙프레르를 스케치한 것.

세잔은 전통적인 테마에서 많은 것을 빌려 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첫번째, 두번째) 이외에는 종교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속의 그리스도는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된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그림에서 모사한 것이고, 막달라 마리아(네번째, <비탄>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음)는 루브르에 있는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엑상프로방스 출신 친구인 포르튀네 마리옹은 세잔이 파리 교외로 산책을 나갈 때 자주 동무해 주었다. 그는 지질학자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다. <야외사생을 나가는 마리옹과 발라브레그>(1866)에는 두 친구가 야외작업을 위한 복장을 하고 나온다. 세잔이 외광파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선언한 작품이다.

이 풍경화(1865~1867)에서 두텁게 느껴지는 형태가 나무인지 암석인지 확실하지 않다. 세잔은 모델의 얼굴을 표현할 때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자연을 그렸다.

<대주연>(1870년경)은 아주 큰 화폭에 그려졌다. 세잔은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다음인 1895년에 가졌던 개인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반드시 전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시대(1866~1870)의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의 하나가 뤼 드 라 콩다민에 있던 졸라의 집에서 제작되었다. 세잔은 이 그림을 완성하여 졸라에게 선물했다. <유괴(강간)>(1867)는 세잔의 의도대로 366~457cm에는 못 미치고 89~117cm로 완성되었다. 콤마(,) 같은 터치로 그려진 초록색 초원은 마치 험난한 바다 같다. 이런 배경에 서 있는 구릿빛 거인의 누드는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사내는 양팔로 청흑색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여인을 안고 있다. 여인의 엉덩이에서 진청색 천이 흘러내린다.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물체에 둘러싸인, 여인의 흰색 피부와 사내의 구릿빛 피부가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저 멀리 배경에 흰 구름을 인 산은 생트빅투아르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에 있는 두 소녀의 핑크 빛 육체가 구성에 생기를 준다."

존 리월드

《세잔 전기》(1986)

<두개골과 초가 있는 정물>(1865~1867)은 세잔의 전형적인 초기 정물화이다. 소재 선택에서는 전통에 충실한 면을 보이나 그 기법과 조명에서는 매우 현대적이다.

바늘이 없이 표현된 검은 시계는 졸라의 것이다. 탁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테이블보는 엑스 교외의 채석장에서 볼 수 있는 바위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탄호이저 서곡>(1866경)은 몇 개의 직각(안락의자, 등받이 있는 소파, 작은 의자, 피아노 치는 소녀의 팔, 피아노)을 이용해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소재는 캔버스의 면과 수직 혹은 수평을 이룬다. 은은하게 퍼진 빛,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안락의자의 미묘한 반사광은 베르메르나 사르댕 같은 시적 분위기를 전해 준다. 글레이즈(마른 색채 위에 칠하는 밝은 빛)의 터치로 회색과 흰색은 가볍게 진동하고 있다.

풍자만화가 스톡이 그린 세잔의 초상. 1870년 살롱에서 낙선한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와 누드(이 그림은 전하지 않음)가 함께 그려져 있다. "팔레트 나이프, 페인트브러시, 붓 따위 여러 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리는 쿠르베, 마네, 모네 등이여, 당신들은 모두 유행에 뒤떨어졌소이다, 여기 당신들의 스승 세잔을 소개하나니!" 이 풍자만화는 1870년 봄에 출간된 스톡의 주간 잡지에 수록되었다.

초기에는 그리 흔하지 않던 여성의 초상화는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 1869년 이후로 그 수가 많아졌다. <붉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1877).

철로를 부설하기 위해 허리를 잘라낸 언덕이 살벌하게 다가서는 이 풍경화(1870)는 엑스 교외에서 제작되었다. 언덕 뒤로는 생트빅투아르산이 주변을 제압하고 있다. 이 풍경화에서 처음 등장한 생트빅투아르는 그뒤 한참 잊혀졌다가 만년에 자주 등장한다.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전쟁이 터지기 몇 년 전부터 피사로는 파리 북방의 퐁투아즈라는 곳에서 젊은 제자 화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세잔은 1872년에 오르탕스 피케와 어린 아들 폴을 데리고 그 그룹에 합류했다. 이제 불안에 떨며 자기분석에 열중하던 청년기가 막을 내리고 약 10년 가까이 평온한 시기가 이어진다.

퐁투아즈 근교의 전원풍경은 세잔의 예술적 발전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색채는 밝아졌고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는 사라지고 밝은 색채의 화음이 등장했다. <오베르에 있는 작은 집>(1873~1874경).

모네와 르누아르가 표현한 것처럼 인상파 운동은 즉흥성의 결과이거나 우연한 발견마냥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기요맹 들은 근 10년 동안 한가지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르누아르(프레데릭 바질, 1867), 기요맹(세잔, 1869~1872), 시슬레(르누아르, 1874), 모네(르누아르, 1875), 오베르로 야외작업을 나가는 세잔.

'겸손하고 위대한' 피사로 - 세잔은 자신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은 피사로를 그렇게 불렀다 - 의 지도를 받으면서 세잔의 팔레트는 눈에 뛸만큼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위는 피사로의 <퐁투아즈에 있는 집들>, 아래는 세잔의 <메당의 집>(1879~1881경).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무명 예술가 30여 명으로 모임이 결성되었다. 유명한 사진가인 나다르(펠릭스 투르나숑)가 자신이 사용하던 카퓌신 35번가의 스튜디오를 빌려 주었다. 세잔의 강렬한 그림이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지도 모른다고 동료들이 우려했지만, 피사로는 세잔의 그림을 꼭 출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네도 세잔을 편들어 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유사한 특징이 발견되지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1872~1873)은 다른 개성을 담고 있다. 그림의 구성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 벽, 언덕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곳저곳에 짙은 물감이 팔레트 나이프로 발라져 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보고 그 <현대판 올랭피아> 얘기를 하라는 건가? 흑인 하녀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베일을 걷어 내는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나? 그 작품은 이 세잔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루이 르루아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현대판 올랭피아>의 두번째 그림(위, 1873경), <현대판 올랭피아>의 첫번째 그림(아래, 1867경), 마네의 <올랭피아>(가운데, 1863).

1880년경의 세잔(위)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의 습작(아래, 1895경).

 

"붓이나 연필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그가 데생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또 그림이 부정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통해 얻어진 세련됨이다."

조르주 리비에르

《랭프레시오니스트》 1877년 4월 14일

열광적인 미술작품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위, 1877경)에게 보낸 1866년 5월 11일자 편지에서 세잔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 다음 자기는 야외작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둘 다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는 점을 하나의 매개로 하여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놀랍고 안정된 지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성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단 말입니까! …… 그러나 나는 그런 행운을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 그것말고는 나에게 특별한 불만이 없습니다. 자연의 광대무변한 울타리인 하늘은 늘 나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을 쳐다볼 때마다 기쁨에 잠깁니다." <자 드 부팡의 풀장>(아래, 1878~1879경).

고갱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그림을 수집하여 오노레 도미에와 조앙 바르톨트 종킨트 옆에 걸어 놓았다. 고갱은 세잔의 작품도 석 점 갖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인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1880경)은 고갱 자신의 그림 <여인 초상>(1890)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세잔의 이 정물화는 내가 갖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야. 내가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이 그림은 갖고 있을 거야." 고갱은 1888년 6월에 친구 에밀 슈페네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화>(위)는 1877년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집에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평범하고 둥근 정물 위로 쏟아지는 빛은 정교한 반사광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림자는 거의 생략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샤르댕의 위대한 정물화 열 점을 사들였는데, 이 그림은 샤르댕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샤르댕의 <은제 술잔>(아래).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감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세련된 것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쟁이들의 기교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속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비전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진설을 신장하는 즐거움이 잇기 때문입니다."

세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74년 9월 26일

오베르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그린 작품(1873~1875).


"이곳의 햇빛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모든 물체가 마치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 오베르 출신의 풍경화가들이 이리로 내려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잔

카미유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1876년 7월 2일. 에스타크

<마르세유와 마리섬>(1882경).

<라크루아 신부의 집>은 제작년도(1873)와 서명이 분명하게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세잔은 약 20점에 서명을 했고 약 10점에 제작년도를 적어 넣었다. 이것이 세잔 작품의 정확한 제작년도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맹시의 다리>(1879).


"다리를 그림 한가운데 놓고 이어 다리 옆에다 두 개의 아치를 구도의 요소로 삼은 다음, 마지막으로 앞에다 나무를 배치해 다리의 전경으로 삼았다. 왼쪽의 아치는 물에 강렬하게 어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와, 다리와 나무의 두 공간을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도적 균형은 변하고 있는 듯한 물빛으로 더욱 단단하게 뒷받침되고 잇다. 물빛의 한가운데가 짙은 초록이지만 양옆은 옅은 갈색을 띠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다리 위쪽의 잎새 처리도 인상적이다. 세잔은 모자이크 같은 터치로 녹색과 흰색을 다양하게 변조시켜 마치 물방울이 퍼지는 듯한 빛의 효과를 이룩해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잔이 인상파 수법에 정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세잔이 자연에서 느낀 풍성함과 여러 선들이 잘 어우러져 절묘한 회화적 공간이 창조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의 정서적 긴장을 '경험'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해준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노대가(老大家, 15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배출된 대가들)의 권위와 세잔 시대의 새로운 광학(光學)이 잘 결합된 찬연한 금자탑이다."

리처드 베르디

《세잔》(1992)

<맹시의 다리>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을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1921)

세잔은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화상을 그렸으며, 심리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외형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두번째부터 아래로, 1880년, 1875년, 1877~1878년에 그려진 자화상. 맨 마지막 작품은 한때 피사로가 소장했다.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그림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네." 세잔은 1879년 9월 24일 졸라에게 털어놓았다. 인상파 수법을 7~8년 시험한 끝에 세잔은 반사광과 색채의 그림자에 대한 분석을 최대한 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880년경부터는 세잔의 작품에 인상파의 수법과 다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의 수법과 갑작스런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로 그린 <화분>(아래, 1883~1887>. 유연한 꽃줄기와 미동하는 듯한 빛이 나란히 늘어선 화분의 균일감을 깨뜨리고 있다. 세잔은 수채화에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했다. 세잔 이전의 프랑스 화가 중에서 세잔처럼 수채화를 잘 활용한 화가는 몇 되지 않는다.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 부인>(위, 1879~1882).

<나무와 집>(위, 1885~1887)의 밝고 옅은 물감칠과 미묘한 색조는 수채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검은 나뭇가지들이 확 트인 밝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그림의 구성은 세잔의 작품 중에서도 돋보인다. 미술학교 선생이던 질베르에게 배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풍경화를 그려 볼 생각이었을까? 아래는 <나무와 지붕>(1882~1883경).

세잔은 자 드 부팡에서 평화와 정적을 얻었다. 그는 그 건물(<자 드 부팡의 저택과 농가>, 1885~1887경). 멋진 호수, 공원, 나무 등을 4계절 내내 그렸고, 정원에서는 농부들과 인부들이 모델을 서 주었다. 세잔의 어머니가 사망한 지 2년째 되던 1899년 이 집은 세잔 누이의 강권으로 매각되었다. 세잔은 이사를 가기 전에 소지품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1879경). <에스타크만>(아래, 1879~1883).

 

"남프랑스의 바다풍경,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푸른 바다, 울퉁불퉁한 바위산, 뜨거운 열기 속에 몽롱하고 나른해 보이는 사물, 강한 구도를 갖춘 해변들이 아주 솔직하고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귀스타브 제프루아

《르 주르날》 1894년 2월 1일

<에스타크와 샤토 디프의 풍경> (1883~1885).

세잔은 종종 넓게 펼쳐진 풀경의 전경에 외딴 나무를 돌출시키곤 했다. 여기 <커다란 소나무>(1885경)에서는 나무가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하여 풍경을 가리고 있다. 가지들 사이로 땅과 하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 나무껍질, 잎새, 땅빛깔 등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수채화에서처럼 선영(線影)이 드러나는 비스듬한 붓질로 풍경화에 일체감을 주고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많이 구사된 노랑색은 나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해준다. <생트빅투아르산>과 같은 장대한 구도는 없지만, 세잔이 시골풍경화에 종종 부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다.

<부엌의 정물>(1888~1890)에 나오는 사물들은 두 개나 세 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천재 세잔은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재배열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그림을 보면 원근법의 왜곡이 더 이상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이 하나의 정상적 비전을 획득하여, 새로운 질서가 그 안에서 탄생하고 또 그림 속의 사물은 지금 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한데 집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센스와 넌센스》(1948)

<푸른 화병>(1885~1887)은 세잔의 중기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징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놀라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선은 문인지 혹은 벽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색채는 캔버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그림자 부분마저도 밝게 해주고 있다. 빛의 방향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사과와 비스킷

완숙기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 중의 하나인 <사과와 비스킷>(1879~1882)은 평온기에 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특징을 잘 드러낸다. 궤짝 위에 올려놓은 접시 하나와 사과들은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채화의 뉘앙스를 풍기는 섬세한 색감(色感, 비스킷은 분홍, 접시는 연한 청색), 교묘하게 꾸민 단순함, 정물 주변의 절묘한 공간처리 등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정물화는 프랑스 화가 루뱅 보갱, 스페인 화가 프란치스코 드 주르바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세잔이 이들 화가의 정물화를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년시절의 사과

사과는 세잔의 스타일 실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정물화의 소재로 늘 사과를 선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잔에게 사과는 전통적인 성애의 상징 이외에도 유년의 투쟁을 나타내는 사물이었다. 학생 시절 동급생인 졸라가 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도와 주었던 세잔은, 졸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건네받았던 것이다. 세잔은 훗날 사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과를 그려서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뜻이리라. 그림은 <테이블 위의 정물>(1883~1887)이다.

메당의 저택 서재에 앉아 있는 졸라. 1897년경에 찍은 사진.

세잔은 여러 화가들에게 지중해의 햇빛을 발견하도록 권했다. 에스타크에 있던 세잔은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조르주 브라크, 라울 뒤피들의 방문을 받았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자화상>(아래, 1880).

에스타크의 바다

세잔이 에스타크 바다말고 다른 바다를 그린 적은 거의 없다(이 그림은 1883~1886년에 제작된 그림). 그러나 에스타크의 산업화가 촉진되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세잔은 1902년 9월 1일 대녀(代女)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에스타크 해변은 한때 대단히 아름다웠지. 그러나 진보라는 괴물이 이 고장에도 닥쳐왔어. 그 두 발 달린 동물은 아름다운 해변을 기괴한 부두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가스등을 달았고, 더욱 한심하게도 전등을 달았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어!"

모네나 시슬레가 그린, 햇빛 속에 반짝이는 포플러에 비교해 볼 때, 세잔의 포플러는 청동처럼 부동(不動)하는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음영 속에서 보이는 이 미묘한 밝음은 1885~1890년 사이에 그려진 웅장한 풍경화의 특징이다. 이들 풍경화에서 세잔은 푸생의 영웅적 풍경화가 갖고 있는 시적 평온함을 획득한다. 위에서부터 세잔의 <포플러>(1879~1882), <포플러>(모네, 1891), <루앵 인근의 모레>(시슬레, 1892).

생트빅투아르산은 시나이, 타보르, 올림피아 등과 어깨를 겨루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생트빅투아르라는 이름(그 기원은 불분명함)부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이 그림은 1885년경에 제작되었다. 전경에 외로운 소나무를 배치한 구성은 풍경 전체에 깊이를 주기 위한 것으로서 파격적이면서도 대담하다.

<생트빅투아르 산>(위, 1882~1885) <생트빅투아리 산>(아래, 1885~1887).


"르톨로네 마을에서는 그 산이 보인다. 민둥산이기 때문에 색채라기보다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는 흑백의 산일 뿐이다. 어떤 때는 그위에 떠 있는 구름이 산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반대이다. 그 멋진 산은 일견 보기에 하늘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느낌이다. 태곳적에 석화(石化)된 듯한 연속되는 습곡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어쩌면 산밑둥에서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바위절벽이 지닌 동세(動勢)는 이런 감상을 더욱 강화해 준다. 생트빅투아르는 산과 똑같은 색깔의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아니 우주공간에서 솟아 나와 거대한 암석덩어리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페터 한트케

《생트빅투아르산의 교훈》(1980)

 

분명하고 단순한 양감(量感)을 보여 주는 세잔의 오르탕스 피케의 초상화는 입체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움직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마르디 그라>(두번째, 1888)는 1870년 이후의 작품경향으로 볼 때 희귀한 그림이다. 세번째 스케치는 <마르디 그라>를 위한 습작이고, 네번째는 <커피포트와 여자>(1890~1895)이다. <온실 속의 세잔 부인>(첫번째, 1891~1892)은 오르탕스 피케를 그린 유명한 그림으로, 오르탕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미완성 작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세잔의 자화상은 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생기빌랄하고 가장 적극적이다. <자화상>(첫번째, 1895경). 두번째부터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890~1894), <중산모를 쓴 자화상>(1883~5), 한때 드가가 소장했던 <자화상>(1879~1882).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파블로 피카소가 한때 이 그림을 소장했다.

<목욕하는 남자들>(1890~1894)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세잔은 오로지 내적 확신만을 길잡이삼아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그의 작품은 회화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1903년 1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수줍게 고백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進境)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가릴 것 없이 세잔은 자신의 모티프를 재치 있고 자유롭게 처리했다. <앉아 있는 발리에>(위, 1906년), <정물 : 사과, 배, 그리고 그릇>(아래, 1900~1904).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아래, 1899)과 볼라르의 화랑에서 1898년에 개최된 세잔 개인전시회의 카달로그(위).

세잔은 정물화의 대상으로 과일이나 병 같은 간단한 사물을 골랐고 정물의 부동상태에 움직임과 유연을 주기 위해 식탁보를 배치하곤 했다. <양파가 있는 정물>(첫번째와 세번째, 1895경)의 부분, <사과와 오렌지>(두번째와 네번째, 1895~1900경)의 부분.

수욕도 시리즈를 그리던 시기에 카드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야외에서 실루엣 처리되어 마치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수욕도>의 등장인물과는 달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집중된 표정과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드놀이하는 사람>(위, 1890~1892)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재단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그림 중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이며, 강한 집중과 긴장을 전해 준다. 훨씬 평온한 느낌을 주는 아래의 <카드놀이하는 사람>(1890~1892)은 뉴욕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 간의 대치상황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 시리즈에서 세잔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의 투쟁,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까? 카드는 화가 세잔의 무기와 작업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용어로 보나, 게르부아 카페의 테이블에서 흘러다녔던 말로 보나, 카드는 마네와 인상파 화가의 단순화된 스타일과 평면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석 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두 점은 1890~1895년 사이에 제작(첫번째와 두번째)되었고 나머지 하나(네번째, 세번째는 부분 확대)는 1890~1892년에 제작되었다-은 두 명의 대결구도로 구성을 축소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리고 잇는 이 석 점의 그림은, 쓸데없는 배경을 생략한 가운데 자유분벙한 기법과 단호한 붓질을 통한 색채처리를 보여 준다.

<사과와 오렌지>(위, 1895~1900경), <양파가 있는 정물>(가운데, 1895경), <큐피드 석고가 있는 정물>(아래, 1895경)

만년에 세잔은 젊었을 때 즐겨 쓰던 짙은 색을 많이 썼다. 1902~1906년에 제작된 대형 수채화. <주름 잡힌 천 위의 두개골>에서 세잔은 투명성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는 당시의 관습과 반대로 균형을 깨면서 대상을 배치해 구성의 자유를 획득했다.

미술평론가 제프루아는 세잔이 그려 준 자기 초상화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서가, 책상 위의 서류, 로댕 작품의 복사 석고, 포즈를 취하기 전에 세잔이 가져온 인조 장미꽃 등 모든 것이 탁월하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책상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는 너무나도 세심한 손질과 풍부한 색조, 그리고 비할 바 없는 조화로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아생 가스케의 초상>(위, 1896)과 <팔짱을 낀 남자>(아래, 1899경)는 면(面)의 왜곡을 보여 준다.

고갱, 모네, 앙리 '르두아니에(세관관리)' 루소 등의 그림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녹음(綠陰)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림들은 1870년대에 세잔과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탁 트인 풍경이나 거대한 하늘과 대조된다. <숲>(1895~1900).

 

"프로방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왔다네. ……아주 쾌적한 곳이군. 주위를 에워싼 산들이 쾌 높은 것 같아. 두 계곡ㅇ[ 둘러싸인 호수는 젊은 처녀들이 데생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지. 정말 고요한 자연일세. 젊은 여자 여행가의 스케치 수첩을 들추면 금방 튀어나올 법한 그런 곳이라네."

세잔

조아생 가스케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아느시호>(1896)

 

"나는 심심풀이로 그림을 좀 그리고 있소. 별로 재미는 없소. 하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제법 그럴듯하다오. 산높이가 2,000m 정도 된다지만 우리 고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세잔

에밀 솔라리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샤토 누아르

"엑스와 르톨로네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샤토 누아르(검은 성)는 19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 산림이 무성한 산기슭에 난 산길 바로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건축물은 니은 자 모양을 한 두 개 동(棟)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리고 각 동에는 일련의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그러나 기둥은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기 때문에, 어쩐지 폐허 같은 인상을 준다. 좁은 고딕풍 창문과 뾰족한 지붕도 을씨년스럽다. …… 두 동 사이에는 정원이 있는데 세잔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였다. …… 이 집의 이름은 어쩐지 어색하다. 집을 온통 둘러보아도 검은 색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이 집이 성 같아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집은 근처의 비베뮈 석산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노란 돌로 지어졌다. …… 세잔의 그림에서는 서쪽 동의 진노란색 정면이 커다란 빨간색 헛간 문에 강조되어 노랗게 빛나고 잇다. …… 노랑은 짙은 진녹색 녹음을 압도한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샤토 누아르의 공원>(첫번째, 1898경), <샤토 누아르 정원에 있는 피스타치오 나무>(네번째, 1900경), <샤토 누아르>(두번째, 1894~1896), 다른 <샤토 누아르>(세번째, 1904~1906)의 부분 확대.

 

녹색과 황토색의 하모니

"색채감은 빛의 깊이를 변별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추상작용이 일어나 화면을 채우기가 어렵고 또 공기와 물체 사이의 부드러운 접촉면(윤곽)을 정확하게 그려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미지와 그림은 번번히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세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0월 23일

웅장한 산

1896~1898년 사이에 제작된 <르톨로네 길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탁 트인 풍경 속에 완벽한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 평원과 언덕들 사이에는 그 어떤 단절도 보이지 않으며 또 산과 평원도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하늘은 푸른색, 녹음은 녹색, 땅은 연한 황토색, 산은 연한 푸른색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색채가 구사되었다.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한 윤곽선을 따라 색면이 단절 없이 펼쳐진다. 생트빅투아르산 작품 중 하나의 완성을 목격한 조아생 가스케는 이렇게 썼다. "캔버스는 서서히 어떤 균형감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 둔 이미지가 온 사방에 퍼진 색면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잔은 신중하게 선택한 색을 가지고 물체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려 나갔기 때문에 전체적인 풍경은 약간 진동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날마다 이들 색가에 확실한 조화를 주어 착 가라앉은 것 같은 명석함과 정밀함으로 그들을 한데 연결합니다."

1904년 세잔은 에밀 베르나르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대수욕도>(아래, 1900~1905)를 뒤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부조 조각같은 구도를 취하는 이 수욕도는 거대한 수욕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은 펜실베이니아 메리언에 있는 반스 재단 컬렉션에 수장된 수욕도 그림의 일부분이다.

여자들, 나무들, 그리고 하늘

"이 작품은 <대수욕도>(1900~1906)를 위한 밑그림이라기보다 별도의 독립 작품으로 시도된 듯하다. …… 이 미완성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캔버스에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만으로도 미완성이라고 보아야 할 이 작품은, 구성 면에서가 아니라 채색 면에서 미완으로 보아야 한다. 슥슥 붓질을 한 이 그림은 청회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땅, 나무, 하늘에는 약간의 녹청색이 사용되고 있다. …… 전체 구성에서 가장 짙은 부분은 중경(中景)의 진청색 삼각형인데. 그 주위에 모여든 누드 넷은 왼쪽과 오른쪽의 다른 누드들과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세잔의 다른 수욕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구도이다. (그러나 수채화에서는 이런 구도를 볼 수 있다.) 바탕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은 양옆의 누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중앙의 누드들은 땅바닥에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 몸을 수그리고 있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대수욕도

"이 그림은 세잔의 작품 중 가장 크고 가장 형식적인 면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의 이상적 구성을 나타낸다고 전해져 왔다. …… 이 작품은 누드들이 나무와 강과 함께 정확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세잔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균형감을 갖추고 있다. …… 이 그림의 분위기는 낯설면서도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는 풍경 속으로 하늘, 물, 녹음이 녹아드는 듯하며 그리하여 멋지게 그려진 누드들이 돋보이고 있다."

마이어 샤피로

<폴 세잔>(1988)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1889~189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인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긴 오른팔은 추상예술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세잔 같은 대가만이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순수회화(그림에 그려진 내용이 아니라 선, 색, 형태 등으로 호소하는 그림 : 역주) 속에서 성공적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축쳐진 오른팔과 턱을 괸 왼팔을 대비시켜, 소년이 겪고 있는 고민의 갈등상을 드러내고 있고, 화면 뒤쪽의 보라색, 조끼의 빨간색, 소매의 흰색을 대비시켜 소년의 사색적 심리상태를 드러냈다는 뜻 : 역주)

<항해사>(위, 1902~1906)의 주인공은 세잔의 정원사 발리에이다. <앉은 사람>(아래, 1905~1906)에는 허깨비 같은 모습이 등장한다.

세잔은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하나의 조화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자극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린 느낌은 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강렬한 서정주의를 뿜어대고 있는 것 같다."(그래서 사람들은 얼토당토않게 세잔의 시력이 나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만년에 그린 생트빅투아르 그림 속에서 산은 더 이상 언덕, 땅, 녹음 등과 어우러지는 파노라마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산은 이것들과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분명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언덕, 나무, 집과 같은 차원에 놓인 물체가 아니었다. 산은 이미 다른 성질을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하게 그어진 수평의 선이 산을 여타 풍경과 구분지어 놓고 있다(동세에 가득 찬 산의 모습이 세잔의 예술가적 의지에 억제되어 동세와 의지 사이에 절묘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뜻 : 역주). 첫번째는 <레로브에서 바라본 생트빅투아르 산>(1904~1906)이다. 두번째부터 네번째까지는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세 그림(1904~1906)이고, 다섯째는 레로브 언덕에서 이젤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세잔을 화가 케 그자비에 루셀이 1906년에 찍은 사진이다.

<레로브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1902~1906)


최초의 현대적 화가

"세잔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가이다. 그를 반 고흐나 폴 고갱에 견주는 일은 격에 맞지 않는다. 세잔의 업적을 생각하면 17세기의 거장 램브란트가 연상된다. <엠마오의 순례자들>을 그린 렘브란트처럼, 그는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혜의 눈으로써 리얼리티의 심연에 뛰어들었다. 설혹 심오한 리얼리즘이 어느새 반투명한 정신적 상태로 뒤바뀌는 그 경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잔은 적어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후배들을 위해 분명하면서도 멋진 방법론을 하나 남겨 놓았다. 그는 우리에게 우주의 약동하는 힘을 터득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생명이 없는 낯선 물체들이 서로에게 변화를 주는 그 미묘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세잔에게 대상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그 대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체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체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잔에 대한 이해는 곧 입체파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다."

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거

《입체파 화가에 대하여》(1912)



1871년경의 세잔.

에밀 졸라.

졸라의 시골 별장. 샤토 드 메당.

21세기 초의 세잔(위)과 졸라(아래).

엑스에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한 세잔을 방해할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1901년에 지은 레로브 스튜디오는 생트빅투아르의 산록에서 도보로 몇 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카미유 피사로가 1874년에 그린 세잔 초상화(동판화).

야외작업을 나가는 피사로(1874경).

인상파 화가이며 세잔이 스승으로 받든 카미유 피사로(오른쪽 끝)의 퐁투아즈 집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왼쪽 앞). 1877년 사진.

니콜라 푸생이 그린 <폴리페무스>(1649). 화면 속의 산이 풍경을 압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을 완전히 위축시키지는 않고 있다.

<목졸린 여자>(1870~1872경)는 1874년의 제1차 인상파 전시회 때 물의를 일으켰던 <현대판 올랭피아>(1873경)의 극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으며, 알맞게 곱슬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약간 구붓한 매부리코와 크고 검은 두 눈은 루브르에 있는 아시리아 부조의 인물상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뒤에 만난 그는 정수리부터 대머리가 되었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는데 머리에는 얼마만큼 흰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처럼 반짝거렸다. 만년의 세잔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만년에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퇴역군인 같아 보였다고 존했다.

조르주 리비에르

《스승 폴 세잔》(1923)

마티스가 1889년에 사들인 그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한때 고갱이 소유했던 정물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화가 오딜롱 르동과 에두아르 뷔야르, 평론가 앙드레 멜레리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화가 모리스 드니, 폴 세뤼지에, 폴 엘리에 랑송, 케르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드니의 아내, 드니가 1900년에 그린 <세잔에게 경의를>이라는 이 그림에서 그들은 세잔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1906년의 세잔.

세잔의 아내 초상화를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인 후앙 그리스가 1916년에 다시 그린 작품.

한때 모리스 드니가 소장했던 <수욕도>(1890~1894).

<오베르의 농가>(1879경).

에밀 베르나르가 1904년에 찍은 세잔의 사진.

<미디의 풍경>(1885경).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려 하며, 또한 그 느낌을 나의 개인적 미학을 통해 조직할 것입니다."

생트빅투아르산과 샤토누아르. 1904~19066년에 제작된 세잔의 그림이다.

사과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랑을 연상시킨다. <석고 큐피트가 있는 정물>(1895경).

생트빅투아르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1900~1902).

 

 


 

posted by 황영찬
2015. 6. 23. 11:0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3 萬人譜 22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10

 

811.6

고7만 22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방옥수의 시 / 신선로 / 김광석 / 안승준 / 최신자 / 김종술 / 봄날 무명씨 / 김성수 / 김영호의 친구 / 어부 김기돈 / 권찬주 / 이창원 / 이귀봉 / 안종길 / 홍종필 / 최기태 / 김평도 / 진수만이 / 박지두 옹 / 서울의 한 풍경 / 이효의 / 안부자 / 삼섭이 / 임원협 영감 / 임동성 / 김승하 / 김현기 / 김용실 / 박동춘 / 김관식 / 이상현 / 이시광 / 김영길 / 원일순 / 고해길 / 효덕이 / 한쪽 눈 눈물 /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 효덕이 / 최경순 / 늙은 막일꾼 / 구자숙 / 꼬냑 / 김영준 / 오막살이 영감 / 홍순선 / 김찬우 / 최기두 / 심자룡 / 가실 / 두 주검 / 김용안 / 이정옥 / 김경이 / 장인서 / 최정규 / 차명진 / 강관순 / 성엽이 / 김재복 / 이근형 / 이강섭 / 박순희 / 장기수 / 서대문 최현식 / 김지태 / 이영 / 김철호 / 이수길 / 조근남 / 채광석 / 안응헌 / 김재준 / 강석원 / 김호석 / 박완식 / 김치호 / 조주광 / 천년 농사 / 순복이 / 팔짱 낀 여자 / 박래욱 / 발바리 / 그의 고백 / 그 아버지 / 박동희 / 유대수 / 김응수 / 박경식 / 이종량 / 정환규 / 정삼근 / 전청언 / 그 아기 / 임진표 / 이후락 / 석정선 / 차성원 / 정임석 / 권장근 / 이성룡 / 김창무 / 장형 / 옥여 자매 / 기숙이 / 선비의 길 / 강기학 / 최동섭 / 최봉섭 / 나영주 / 정규철 / 최태식 / 정태성 / 소매치기 전일중 / 안창완 / 박쥐 / 강명석 / 다정도 할사 / 차대공 / 권한승 / 김호남 / 박재옥 / 장도영 / 조용수 / 김철곤 / 임순자 / 장인보 / 이규복 /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 이판갑 / 최현식 / 김두호 / 이학수 / 봉원집 / 빈 죽음 / 김도연 / 지복수 / 어떤 청년 / 종로3가의 소리 / 최봉옥 / 저무는 충무로

 

방옥수의 시

 

그 혁명 어느날

사랑하는 남자 방옥수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임수인은 머리 풀고

회문산에 들어가

혼자 살았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혼자 뻐꾸기로 두견새로

띠밭 일구어 살았습니다 머리 잘랐습니다

고운 살결 굳어버렸습니다

 

20년 뒤 어느날

그네가 세상 떠나버렸습니다

 

그네 유품 하잘것 없었습니다

백팔염주 한 벌과 만년필

염주는 심심풀이로 목에 걸었을 테고

만년필은 필시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다음과 같은 접고 접힌 분홍색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저세상 어디에도

영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꽃도 달도 사람도 그렇다 하더이다

 

지난날 방옥수의 글월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아 그러고 보니

4월혁명은 한 편의 서정시도 벙어리로 남겼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이런 거짓말이 어느덧 흰구름 이는 참말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봄날 무명씨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잿빛 세상 잿빛 마음을

잘도 바꿔놓았다

 

기뻐라

 

한강물도 느리게 느리게 가며

눈 시리게 새로운 개나리를 바라본다 돌아다본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 건너

압구정 터 과수원이 내려다보인다

봄 배추밭도

어느날은

봄 배추밭에 나온 삽사리도 내려다보인다

 

세상에는 자유당만 있다

자유당 임흥순만 있다

그러나 야당 유옥우도 잇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

백년 사랑할 듯 사랑하던 사람

저세상의 사람이 내려다보인다

봄날 내 호주머니는 빈 새집인 양 텅 비었다

 

약수동 네거리 식당에 가서

곰탕 한 그릇만

사먹었으면 좋겠다

막걸리 한 사발만

마셨으면 좋겠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한창 벙어리로 벙어리로 피어 있다

 

김영호의 친구

 

마산 중앙중학교 3년생

영호군

제1차 의거의 밤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총 맞아 죽었다

 

열여덟살의 일생

 

네살 때부터 고누를 두고

다섯살 때부터 바둑을 두었다 가포리 바닷가에 한번 간 적 있다

 

다음날 뒷산

영호군의 친구 인섭군이 외쳤다

내 이름 오인섭을 버리고

네 이름 김영호로 살겠다

영호야

이제 내가 너이다

 

메아리가 있었다 내가 너이다 너이다

 

어부 김기돈

 

거룻배 위

혼자 앉아

홍합을 잡아올린다

바다는 막막하고 뭍은 피를 흘리고 있다

 

오늘 따라

잡히지 않는다

빈 갈고리

빈 갈고리

 

그러다가 덜렁 무거운 것이 걸렸다

잡아당겼다

시체

흰 메리야스

잿빛 반지

눈두덩에 55센티 최루탄이 박혀 있다

 

거룻배가 기우뚱거렸다

 

김주열 시체

어부 김기돈은 불려가

사찰계 형사의 모진 닦달을 받았다

 

너 누가 시켜

그 송장 건져냈느냐

너에게 시킨

빨갱이가 누구냐

숨기지 말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바다 밑 홍합된다

 

아무도 시킨 적 없소 죽이든지 죽여 던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서울의 한 풍경

 

여기는 신촌 노고산 기슭

개구리가 오다가 도로 간다

사랑하면 무엇이고 궁금한 아이가 되어버리나

 

토끼풀밭에 벌렁 누운

순옥이 물었다

 

왜 하늘은 파래?

 

사랑하면 할수록 행복도 불안해지나

 

10년 뒤에도

우리 지금처럼 행복할까

 

이런 순옥이 말에 대답 없다

돌아다보니

공광식이는 잠들어 있다

파리 한 마리가 왔다가 도로 간다

 

순옥이가 혼자 콧노래를 불렀다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지금 종로1가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돌항아리 같은

돌대가리 같은 장군이

검은 안경 쓰고 기우뚱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한쪽 눈 눈물

 

밤 기차는 운명이다

친구들은 벌써 캔맥주 네개째다

시끌벅적하다

그 가운데 창가의 유보섭

한밤중 조치원역을 지나갈 때

지난날 조치원에서 일하셨던 아버지 생각으로

가슴 저렸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 절뚝거리며

조치원 화물취급소에서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 유보섭도

여기서 자라났다

 

5년 전 그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신 저세상에 가셨다

 

친구들은 캔맥주 다섯개 여섯개 째다

시끌벅적하다

창밖은 캄캄하다 불빛이 화살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차창 쪽 눈은 눈물

다른 쪽 눈은 말없는 눈웃음이었다

 

통일호 야간급행은 지칠 줄 모르고 간다

이따금 나타나는 간이역들 사그리 무시하고 간다

 

어느덧 친구들은 하나둘 곯아떨어지고

유보섭만 다른 쪽 눈마저 눈물

유보섭의 마음은 깊고 깊다 저세상도 들어 있다 아무도 모르겠다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옛 스키타이 사람들

어떻게 말을 타기 시작했던가

자주 말등에서 떨어져

다쳤으리라

마구 달리는 동안 떨어져

생발목이 부러지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익어

태어난 듯

말등에 익어

나이 다섯 여섯 살이면

냉큼 말등에 올라

바람인 듯 내달렸으리라

이랴

이랴

채찍 휘둘러

말엉덩이 냉큼 쳐대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안장 놓고 말에 재갈도 먹였으리라

 

고구려에도

백제에도 이런 말 타는 핏줄 이어져

기원 370년

기마군대 늠름하였다

백제군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갔다

근초고왕 태자

근구수 장군 앞에

적 고구려 진영에서 뛰쳐나온 자가 앞잡이로 대령하였다

 

그를 앞세워

적 정예군을 무찌르니

그밖의 장병은 붉은 깃발만 괜히 휘날리다 다 투항해버렸다

그 전쟁을 백제의 승리로 이끌었다

투항자 사기

그는 본디 백제인이었다

백제 기마군 마구간지기였다

 

어느날 장군 애마의 말굽을 망가뜨려

그 길로 고구려로 달아난 것

 

과연 말이나 소는

고구려 백제에서

사람값을 다하였으니

죽은 딸 시신도

소나 말로 주고 찾아왔다

 

하물며 장군의 애마를 못 쓰게 만든 죄 커서

적지로 달아났던 것

달아났다가

고국 정복군이 닥치자

목숨 부지하려고

투항한 것

적진을 자세하게 알려준 것

 

그러나 그 마구간지기 사기는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지난날의 장군이 거느린 부대에

말굽 온전한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1일 1식

마구간 말똥 말오줌

청소

마구간 검불

마구간 말먹이 여물통

날마다 밤마다 날라야 하였다

3년 노역형

어느새 팍 늙어버린 사기

갈비뼈 속

한숨소리 났다

 

오도가도 못하고 팍 늙어버렸다 이제 조국도 적국도 없어졌다

 

늙은 막일꾼

 

혁명은 태어났다

혁명은 자라났다

누구의 붉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들의 푸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하얀 우연의 정의(正義)

혁명은 불쑥 튀어나왔다

담모퉁이에서

두런두런 나타났다

혁명은 나아갔다

누구의 노란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된다

안돼

이승만 독재는 안돼

 

탄압의 모든 이유는 반공

반공은

독재의 만사형통

안된다

안돼

여기저기서

안암동 젊은이들이

연건동 젊은이들이

신촌 젊은이들이

흑석동 젊은이들이

 

아니

신설동 어린이들이

동대문 어린이들이

 

종로 관철동 늙은이들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섯 여섯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들불이 일어났다

대구 들불

마산 들불

대전

광주 들불이 일어났다

아 서울 들불이 일어났다

태평로 들불

세종로 들불

아 4월혁명의 들불

 

4월 26일 낮

동대문 밖 신설동 네거리에서

안병채가

총 맞아 쓰러졌다

누군가가

일으켰으나

이미 주검

 

늙은 아버지 안병근 씨는

막일꾼이었다

 

내 자식 손

일만 한 손

내 자식 등짝

남의 짐만 진 등짝

 

막일꾼 아들은 죽고

막일꾼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4월 혁명의 눈물

 

오막살이 영감

 

서정리 바위배기 언덕

해송 언저리

오막살이 집 한 채

오막살이 지붕에는

박 한 덩어리

사립문 없고

울타리 없다

아예 마당도 없다

뱀이 섬돌 밑 똬리 틀고 있다가 가기도 한다

 

윗말에서 낮닭이 한번 운다

 

그 오막살이 영감 합죽이영감

안마을

윗마을 초상 나면

슬슬 일어나서

초상집 간다 차일 쳐주고 궂은일 도맡아 한다

 

막걸리 한 사발

밥 만 국 한 사발

더도 덜도 말고

그것이 품삯이었다

 

누가 시답지 않은 반말로 물었다

 

자네

본관 어디신가

 

모르오 청주인지 전주인지

 

자네

김가는 정말 김가인가 피가 아닌가

 

성이야

어찌 내가 마음대로 달겠소

그냥 어릴 때부터

김가였소

 

허허

자네 집 방 안에 세간은 있나

 

고리짝 하나 없소

농짝 하나 없소

이 내 몸 하나

겨울에는

여름옷 두 벌 껴입고

여름에는

한 벌 벗거나

두 벌 다 벗거나

 

방문 한 짝

자물쇠도 열쇠도 없다오

 

그러나 오두막 굴뚝 아래

맨드라미 하나는

올해도 닭벼슬 시뻘겋게 소리친다오

 

아쭈 자네 정수동인가 김삿갓인가

 

닭벼슬이 소리친다

시뻘겋게 소리친다

아쭈

 

천년 농사

 

내 이름 알아서 무엇하리오

박아무개

장아무개

그중의 하나

임아무개

임칠성이오

고래실 조각논 110평

고개 넘어

비알밭 30평

 

더 바라는 것 없소

 

딸아이 하나 시집가고

아들 하나 자라나

고등학교 갔다오면

교복 벗고

허드레옷 입고

소 몰고 각시풀 뜯기러 가오

 

더 바랄 것 없소

 

아침 인시(寅時) 어둑어둑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밭 쪽으로 큰절 올린다오

 

더 바랄 것 없소

 

천년 농사 이어온 조상 핏줄

나에게는 논이 하늘이고

밭이 대세지보살이라오

 

나에게는 절간도 예배당도

소용없소

 

저녁 해시(亥時) 어둑어둑

재 너머 밭 쪽으로 큰절 올리고

고래실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더 바랄 것 없소

 

내일모레

마누라하고

오랜만에 딸네집 다니러 가오

 

팔짱 낀 여자

 

1960년 한국 과부는 총 50만 6천명에 이르렀다

전쟁과부 중

몇천명은 해를 거듭하며 재혼하거나

개가했다

전생과부가 아니더라도

그냥 과부들도

하나둘 시시한 새살림을 위해

지난날의 반지를 팔아버렸다

하지만

전쟁 뒤 10년

아직도 이 강산의 과부는

논의 뜸부기

뒷산 두견이로 흔하디흔했다

 

그네들의 한으로

한국의 밤하늘 뭇별들 침 삼키듯 울음 삼키듯 찬란했다

어쩌다 비장하게 사라지는 별똥별이 있었다

과부별인듯

과부별인듯

 

1960년 다음해 봄

한국 창녀는 총 4만명을 넘었다

그네들의 몸으로

한국의 젊은 엉터리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네들이 번 화대 몇푼으로

두고 온 고향의 동생이 공부를 했다

 

기생 7백여명이

난만한 밤 요정에서 국회부의장의 술을 따르고

권력에 바짝 눌어붙은

정욕의 술을 따르고

충성스러운 장관의 개다리 사타구니를 달래주었다

장구소리로 밤이 으슥토록

아코디언 소리로

전자오르간 소리로 으슥토록

 

그들에게

한국은 천국이었다

절대빈곤 보릿고개의 한국은

절대 지옥이 아니었다

 

이에 질세라

기우뚱거리는

베니어판 위에

백노지 쫘악 깔고

거기에

빈대떡 놓고

막걸리 놓고

소주 놓고

밀주도 놓고

젓가락 니나노가 시작되는 술집들

니나노 작부 3400명

 

명동 빠아 오아씨스

남포동 마도로스

청춘

불야성 카사부랑카 등 여급 2300명

 

금자가 마리아가 된 댄서 1200명

 

밥만 먹여주세요

잠만 재워주세요

밤중의 식모방 주인영감이 덮쳐도

한강물에 배가 지나가고요

 

생쥐꼬리

월급도 감지덕지

하녀 1870명

 

저 캠프 아이젠하워 밖

양공주촌

양공주 3천명

미군 동거 온리 3천명

아니 민족공주 몇천명

 

이 온갖 몸의 행위자야말로

조국의 폐허에서 태어났고

조국의 폐허에서 살아남았다

이 몸의 운명이야말로

조국의 폐허를 다시 삶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네들의 나락으로

그네들의 자포자기로

한국의 봄 얼음이 풀려 떠내려갓다

죽은 송장도

그 얼음덩이 타고 떠내려갔다

 

이런 한국여성의 시절

그러나 아직도 깜깜절벽 남녀부동석의 시절

빠리에서 돌아온

이병복이

그의 남편 권옥연의 팔짱 끼고

화신 앞을 지나간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여자가 남자하고

팔짱을 끼다니

세상에

세상에

아이고 망측해라

아이고 말세

 

그의 고백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여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사실이나

틀림없는 사실이나

천번이라도

틀림없는 사실이나

나의 아버지는 나의 원수입니다

나의 삼촌이 민청 면지부 간부였을지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야산대에

한두번 참가했더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외사촌 관호형

그 자식이 의용군에 따라갔어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자장면집 빨간색 춘첩(春帖)도 뜯어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태극기의 태극 빨간색을

검정색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가을 빨간 단풍잎들도 마구 후려쳤습니다

나는 니나노집 작부의

빨간 구찌베니 주둥이를 짝 찢어버렸습니다

병원비 몽땅 냈습니다

손해배상 몽땅 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빨간 금붕어도 꺼내어

눌러 죽여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이승만 각하의 눈깔입니다

나는 반공연맹 흰 똥 푸른 똥 변소입니다

 

나는 죽어도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 아버지

 

어미가 제 새끼 다섯 마리 고루 핥아주었다

제 새끼 오줌 다 핥아먹고

제 새끼 똥 흔적 없이 다 핥아먹었다

 

새끼들 궁둥이 깨끗하다

막 나기 시작하는

젖비린내 나는 몸뚱이 깨끗하다

 

아비는 필요없다

 

전라북도 완주군 지주 진달권 영감께서는

맏아들

맏며느리

둘째아들

첫째딸

셋째아들

넷째아들

다섯째아들

둘째딸

여섯째아들

죽은 다섯째아들의 무덤

두루두루

골고루 챙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냇다

 

마누라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마당에는 거위 울음소리가 있고

거위 똥이 있다

 

장차 그 아들딸에게 나누어줄 논과 밭

산과 과수원을 챙겼다

밤중에 나누어두었다

밤중에도 혼자서 땅문서 꺼내놓고 이것저것 챙겼다

 

그 형제자매들 어머니는 필요없다

 

선비의 길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펼친다

 

제3장 몸가짐〔持身〕의 장

아홉가지 수련의 항목

하나 발모양을 무겁게 하라 경솔과 거만 다 피하라

둘 손모양을 공손히하라

셋 눈모양을 단정히하라 훔쳐보지 마라

넷 입모양을 움직이지 마라

다섯 소리를 조용히 내라 트림도 삼가라

여섯 머리모양을 곧게 하라

일곱 숨쉬는 모양을 숙연케 하라

여덟 서 있는 모양을 덕스럽게 하라

아홉 얼굴모양을 장엄하게 하라

 

아홉가지 지혜 수련을 위한 항목

 

하나 바르게 보라 바르게 생각하라

둘 밝게 들어라

셋 안색 온화하게 하라

넷 언제나 공손함을 생각하라

다섯 말을 충실하게 하도록 하라

여섯 일마다 공경스럽게 정성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라

일곱 의심나는 것은 바로 물어라

여덟 분할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라

아홉 옳은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라

 

이런 수련을 지나 한 사람의 조선 성리학 선비가 만들어진다

그 조선 선비 사흘 굶어도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바른 말하고 사약 앞에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나라가 기울어질 때

분연히 일어섰다

그중 일어서지 않은 선비 있다

도포 입고

『중용』 『대학』만 읽고 있는 제천 선비

육만손 영감 있다

 

그의 아들 육관섭이

아버지의 제자들을

다 내쫓앆다

 

다정도 할사

 

조선 4대 임금 세종 연간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세 정승

영의정 황희

영의정 맹사성

좌의정 유관

그 가운데 유관 대감 거동 보아라

 

여름 한 달 넘게 장맛비 왔다

유관 대감과

그의 부인

지붕이 줄줄 새니

종이우산 하나 펴들고 앉았다

 

다정도 할사

 

유관 대감께서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겠소 그나마 우리는 낫소그려

부인이 그 걱정 달랬다

우산 없는 집은 그 집대로 다른 마련이 있을 것이오

 

다정도 할사

 

방 안의 그릇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

궁상각치우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조선 서유거(徐有擧)의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는 말한다

최치원

공의 이름은 최치원 자는 해부(海夫) 고운(孤雲)은 그의 호이다

호남 옥구 사람이다

 

청나라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 강남오통지사(江南五通之事)는 말한다

신라 말기에 최승은 이 고을(桂州, 지금의 沃溝)에 태수가 되었는데

그의 처가 아들을 낳으니 치원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보통이 아니었다

고군산도의 옛 이름은 문창군(文昌郡)이다 또 고기가 많이 잡히니

당나라 장삿배가 자주 왕래했다 장사꾼이 치원을 좋아하여

드디어 싣고 당나라로 가서 과거에 통과하여 벼슬하게 되었다 뒤에

고국으로 돌아가 산수를 방랑했다 고군산도에 있는 월영대(月影坮)는

곧 선생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당에 들어가 18세 소년으로 급제하니 과연 도교의 별 문창성(文昌星)을

과거를 비는 신으로 삼아온 바 고려 때 최공을 문창후로 추존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문창초등학교가 군산 교외 바닷가에 있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문창후 고운이시여

동쪽 나라 시의 아비시여

 

돌 한 덩이에게도 물 한 구비에게도 떳떳한 시 아니거든

시를 말하지 말라 하신 아비시여

천년 전 가야산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으신 아비시여

삼가 당신의 후인 어쭙잖은 몇다발 시편 불태우지 못하고 세상이나 희롱하며 떠돌고 있나이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다시 한번 태어나소서 태어나 밤 하늘에 시의 미친 밤 이루소서

 

어떤 청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거리

시청 앞

서울역 앞

종로

세종로 거리

 

수백개 횃불들이 춤추며 소리치며 타올랐다

횃불데모는 흉흉했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횃불데모는 섬뜩했다

4월혁명 배신했다 그놈이 그놈이다

횃불데모는 공포였고 또 공포였고 매캐한 불안이었다

북으로 가자

남으로 가자

 

횃불데모 이틀째 참가한 청년 현중구

이제 그는 제기동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교 중퇴 실업자가 아니라

태평로의 혁명가였다

횃불데모 맨 앞에서

우렁우렁한 구호 외쳐댔다

지정구호 말고

즉흥구호 마구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그놈이 그놈이다

중앙청은 우리 것이다

중앙청으로 가자

중앙청으로 가자

 

한 혁신정당은 그를 설득했다

현동지 우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구해냅시다

한 혁신정당은 그를 반대했다

안되오

저런 맹목적인 자

저런 난폭한 자는

반드시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이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나타나 외치고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종로3가의 소리

 

이 쌍놈으 새끼

씹값 떼어먹고 튀는 새끼

이 쌍놈으 새끼

지 에미 씹구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 숨막혀 뒈질 새끼

 

치사한 새끼

떼어먹을 게 없어

씹값 떼어먹고 사라진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뭐 오줌 싸고 와서

한번 더 하자고

이대로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어쩌고 저쩌고

 

더러운 새끼

속여먹을 게 없어

나를 속여먹어

이 쌍놈으 새끼

 

제 에비 좆

썩어문드러진

그 좆으로 낳은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네놈의 새끼

네놈의 여편네

네놈의 자식들 다 뒈져라

이 쌍놈으 새끼

 

종로3가 단성사 골목

이렇게 욕 퍼붓는 한밤중이 숙연하다

창녀 우옥자

그네 얼굴 빼어난 미모

나이 25세

어디서 이런 짙푸른 욕이 나오나 숙연하고 숙연하다

 

저무는 충무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혁명이 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그뒤 혁명의 거리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무지랭이들

일자무식 머저리들의 주검 널린 그 거리에

 

놈들은 혁명을 찬양하고 혁명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할렐루야

놈들은 혁명을 벌써 제것으로 만든다

 

결국 놈들은 혁명을 모독한다 혁명을 배반한다

 

1961년 3월

벌써 1년 미만으로

혁명은 없어져가고 있다

서울 충무로 입구 주점 오스카

그 술집 한구석 벽에 기대어 음독자살한

계영제 군

신흥대 야간부 학생

종잇조각 낙서가 유서였다

 

두번의 데모 속에서

나는 도망쳤다

네번의 데모 속에서

내가 밀려났을 때

앞으로 나아갔던

내 친구 안진호 군

이제라도

그대의 뒤 따르겠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20. 12:4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2 환단고기를 찾아서 2 - 일본왕실의 만행과 음모

 

신용우 장편소설

2013,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01

 

813.7

신65ㅎ  2

 

일본왕실 지하서고에서 숨 막히는

우리 역사서 20만 권의 진실

대한의 딸들을 성매매도구로 전비를 벌어들인 매춘제국 일본!

 

환단고기를 찾아서 2

일본왕실의 만행과 음모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우리 역사의 진실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프롤로그 :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명

 

1. 죽음도 바껴간 사연

2. 왕실 지하비밀서고에서 숨 막히는 고조선

3. 모택동이 돌려주려는 고구려 땅, 김일성이 사양했다

4. 이글거리는 활화산, 백성들

5. 멀고도 긴 여행

6. 일본왕실전문 파파로치 전문

7. 일본의 <새 역사 창조단>

8.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9. 나라가 망하면 집안도 망한다

10.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떠나보내다

11. 열세 살 성규와 열다섯 소희의 징집

12. 총알받이와 성매매도구

13. 독립자금을 댄 지주의 아들이 반동?

14. 사무라이의 피를 지배해야 애가 생긴다?

15. 보여도 밝힐 수 없는 진실

16. 환단고기의 실상과 허상

17. 고구려(高句麗)가 지배했던 우리 땅 구려(句麗)벌

 

에필로그 : 마침은 시작입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6. 15. 12:5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1 Frida Kahlo 프리다 칼로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옮긴이 | 정연진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003

 

650.8

아887ㅇ  3

 

ART SPECIAL 3

 

Frida Kahlo | 프리다 칼로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 내가 그림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 1939년,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민속 미술과 개인적 고통의 경험을 승화시켜

꾸미지 않은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서구 백인 남성의

미술계에 도전장을 던졌던 프리다 칼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았던 그녀의 삶은 작품과 함께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풍부한 사진 자료와 그림을

독특한 형식으로 녹여낸 이 책은 프리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준다. 프리다 칼로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짙은 눈썹 아래 감추어진 수수께끼 같은

눈길을 따라 따라가다 보면, 다채롭고 매혹적인 그녀의

삶과 예술이 펼쳐질 것이다.

 

프리다 칼로 | Frida Kahlo(1907-1954)

불꽃과 같은 사랑과 작품을 남기고 떠난 멕시코의 화가.

원시주의적인 양식으로 그린 화려한 색조의 개성 넘치는 프리다의 자화상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한 프리다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는 등 끊임없이 육체적 고통과 싸워야 했다.

또한 20세기 벽화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과 이혼, 별거와 재결합을 거듭하며 작품 못지않게 극적인 삶으로도 유명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그에 굴복하지 않는 투지는 그녀의 삶과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은이 | 클라우디아 바우어 Claudia Bauer는 미술시가이며 뮌헨에서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과 슈트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동시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대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1907


>>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에다 칼로, 멕시코 교외의 코요아칸 마을에서 탄생하다.


>> 여성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 보르프스 베데에서 사망하다.

>> 마리아 몬테소리, 로마에서 첫 학교 및 유치원을 개교하다.

>> 아스트리트 린트그렌 탄생하다.

 

1924


>> 프리다, 이미 2년 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대학 예비학교를 다니다.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53세로 모스크바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하다.

>> 베를린 국제전파매체박람회(IFB) 첫 개장하다.

>> 말론 브란도, 오마하(네브래스카)에서 탄생하다.

 

1925



>> 프리다, 9월 17일 대형 교통사고로 수개월 동안 입원하다. 예비학교에 복귀할 수 없었던 프리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


>>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발간되다.

>> 중국 혁명 발발하다.

>> 만하임 미술관에서 미술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 <신즉물주의> 전시회 개막되다.

>> 예술가 장 탱글리 탄생하다.

 

1929



>> 8월 21일,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결혼하다.

>> 디에고,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프리다도 디에고를 따라 탈당하다.



>> 10월 25일, 뉴욕증시 대폭락하다. 이 날은 후에 경제대공황을 알리는 서곡인 '검은 금요일'로 불리다.

>> 바티칸 시국 독립하다.

>> 뉴욕 현대미술관 개장하다.

 

1932



>> 프리다, 디에고와 디트로이트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유산을 경험하다.

>> 9월에 프리다의 어머니 마틸데 사망하다.


>> 마하트마 간디, 천민 억압에 항거하여 옥중단식 감행하다.

>> 구 소련,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를 국가 공식 예술기조로 표방하다. 자유예술 활동이 금지되다.

>>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탄생하다.

 

1939-45

 

>> 프리다, 1939년에 파리 '멕시코' 전시회에 출품하다.

>> 같은 해 디에고로부터 이혼당하다.

>> 1940년 디에고와 재혼하다.

>> 아버지 기예르모, 1941년에 사망하다.

>> 프리다, 1941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 프리다, 1943년부터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 독일 군대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하다(1939년 말).

>> 피카소, 미로, 달리 등 스페인 예술가들,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거하는 작품 활동을 펼치다.

>> 1945년 8월 17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되다.

>> 1945년, UN 설립되다.

 

1946



>> 프리다, 작품 <모세>로 교육부 주최 국립전시회에서 수상.

>> 프리다, 뉴욕에서 대형 척추수술을 받다.


>> 뉘른베르크 재판 첫 선고가 내려지다.

>> UNESCO 설립되다.

>>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탄생하다.

 

1949

 

>> 프리다의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다.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선포하다.

>> 구소련, 첫 원폭 실험,

>> 월렘 드 쿠 닝, 잭슨 폴록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뉴욕에서 예술가 동맹인 '성마른 자들(The Irascibles)'을 결성하다.

 

1954

 

 

>> 프리다, 코요아칸의 고향집 '카사 아슬'에서 7월 13일 사망하다. 공식 사인은 폐색전증.

 

>> 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That's All Right, Mama>로 유명세를 타다.

>> 미국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이 절정에 다다르다.

>> 미국대법원, 공공교육 시설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다.

>> 앙리 마티스, 11월 3일 니스에서 사망하다.

 

1957

 

 

 

>> 디에고, 11월 24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다.

 

>>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사망하다.

>> 구소련, 세계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에 쏘아 올리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방문객에 의해 약한 손상을 입다.

 

1958

 

 

>> '카사 아술'을 박물관으로 꾸며 개장하다.

 

>>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거, 미국에서 사망하다.

>> 미술가 키스 해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커츠타운에서 탄생하다.


 


차례


그때 그 시절

¡비바 멕시코!


최고가 되기까지

디에고의 그늘에서


예술

캔버스를 거울삼아


불안한 영혼


사랑

비둘기와 코끼리


지금도 우리 곁에

프리다 칼로 슈퍼스타


그때 그 시절



"무릎꿇은 채로 사느니

선 채로 죽는 것이 낫다."

멕시코 혁명가 ● 에밀리아노 사파타


격동의 시기 속에서 


…프라다는 성장기를 보냈다. 당시 멕시코에서 농부, 노동자, 인디오족들은 새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해방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과 빈곤 탈출을 원했다. 이에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한 벽화예술가들은 민중의 귀가 되어 벽화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아즈텍 문명의 예술


'Toltecatl'이란 고대 아스텍어로 '예술가'란 뜻인데, 아스텟족은 고유 언어로 '예술가'란 단어를 표현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인디오 부족 중 하나였다. 예로부터 아스텍 부족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예술가는 교양 있고, 기술이 뛰어나다. 진정한 예술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며, ……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화합으로 이끄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멕시코의 벽화예술들의 예술혼에서 이어받았으리라.


"멕시코는 이렇듯 모든 게 혼란스럽고 엉망인데, 농가의 풍경과 인디오들만이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구나!"

- 프리다 칼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30년 이상 권력을 장악하다가 1910년 자유 혁명을 통해 축출되었다.

혁명이 끝난 후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들이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업 중인 벽화예술가 | 디에고 리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미술대학의 의뢰로 제작한 벽화에서 표현 공간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벽화가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한가운데 위치한 구역엔 총 지휘를 맡은 예술가가 마치 왕좌에 앉은 듯 한 손엔 붓을, 다른 한 손엔 팔레트를 든 채 임시구조물에 걸터앉아 있고, 그 주위에는 열심히 작업하는 문하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으로 그려낸 정치 | 벽화예술가들은 프레스코를 통해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표현했다. 예를 들어 위 작품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시티 교육부 청사에 그린 벽화로, 자본주의의 말로를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리베라가 이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고향"인 미국에서 많은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고가 되기까지


드랭, 자네, 그리고 나 중에서

프리다 칼로처럼 사람머리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파블로 피카소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하룻밤 새 유명세를


…안게 된 프리다는 원칙적으로는 자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을 뿐, 스타 화가가 되고 싶은 어떤 야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필요한 시기에 적재적소에 있었던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최고의 지지자를 얻기에 이른다. 이로써 프리다 칼로는 느리지만 꾸준히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생전에 뉴욕 현대미술관과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는 영광까지 누린다.

프리다는 예술의 메카 뉴욕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


상속녀


디에고 리베라는 임종 얼마 전,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돌로레스 올메도 파티뇨에게 자신과 프리다의 재산에 대한 신탁을 위임한 바 있는데, 당시 돌로레스는 이미 프리다의 그림을 25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돌로레스가 이 그림들을 프리다 생전에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 사이에는 우정이 조금도 싹트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돌로레스가 디에고와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해 프리다가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고 하지만, 어쩌면 프리다는 돌로레스가 자신의 첫사랑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염문을 뿌렸던 것에 대해 계속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도나 로지타 모리요의 초상.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가르는 축대 위에 선 프리다. 뒤로 보이는 신전의 잔해는 고국의 전통문화를, 공장굴뚝은 미국의 산업화를 상징한다. 그림의 사인으로, 잘 알려진 '프리다 칼로' 대신 자신의 중간이름인 Carmen과 디에고의 성인 Rivera를 사용한 것이 흥미롭다.


"난 요즘 그림도 조금 그리고 있어. 내가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딱히 다른 할 일도 없거니와,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만은 모든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접 서술했다. "여기에 헝가리계 독일 혈통이며,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이고, 너그러운 성품에, 박식하신 우리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를 그렸노라. (……) 존경을 표하며, 딸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를 매우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상화는 단 한 점만을 남겼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위해 수없이 국경을 오가는 디에고와 줄곧 동행했다. 사진의 배경은 반쯤 완성된 뉴욕의 '뉴 워커스 스쿨' 벽화.

뉴욕 주재 화상인 쥘리엥 레비(아래)가 프리다의 재능을 알아보고 열어준 첫 개인전은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몇 년 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도 프리다의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다(아래).

1952년 또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던 프리다는 병상을 떠나지 못하게 되자, 미술활동 초기처럼 누워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내면을 보여주는 창 | 프리다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자화상들은 마치 암호를 걸어 잠궈 놓은 영혼의 거울과도 같다. 이 자화상이 완성된 1930년 당시 프리다는 23세로, 유명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된 직후였다. 감상자를 응시하는 듯한 프리다의 모습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운 멕시코 여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여배우를 추모하며 | "1938년 10월 21일 새벽 6시, 도로시 헤일이 햄프셔 하우스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녀를 추모하며 제작하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이 자화상에 여배우의 생전 모습을 격을 갖춰 담는 대신, 그녀의 죽음을 끔직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수상작 | 프리다가 멕시코시티 왕립미술관 국립전시회에서 2위를 수상한 작품 <모세 혹은 천지창조의 씨앗>으로, 후원자가 선물해 준 프로이트의 《모세와 유일 신앙》이란 저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모세를 수많은 캐릭터로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예술



"나는 내가 처한 현실

그려낼 뿐이다."

프리다 칼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은


…프리다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츠리다는 줄곧 자신이 택한 길만을 걸었으며, 동시대 주류 예술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 프리다는 작품 활동에 있어서 독립적 창조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고대 중남미 예술, 서민들의 민속공예 등이 그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재앙의 유희>, 1929. 캔버스에 유채/콜라주, 31×41cm, 개인소장.


초현실주의


1921년 이후 다다이즘에서 발생한 현대 문학과 예술의 사조. 무의식, 꿈,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 대한 미학적 표현을 추구하며, 이성적 제어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 초현실주의 예술가로는 작가이자 시인인 알드레 브르통과 화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르네 마그리트 등이 있다.

프리다는 태어나자마자 인디오족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림에서 유모가 쓰고 있는 가면은 고대 멕시코의 것으로, 프리다가 후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문화에 가지게 될 애착을 예견하는 듯하다.

페데그랄 지방의 용암지대에 뿌리를 박고 누워있는 프리다는 이 그림에서 수사적 표현이 아닌 실제 뿌리의 묘사를 통해 고국의 대지와 자신이 융화되어 있음을 표현했다.


"나는 다른 수단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한 만족 외에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

이 그림을 작업할 당시 프리다는 이혼상태였다. 이를 반영하듯, 목에 두른 나뭇가지의 가시는 목을 찌르고, 정면을 응시한 눈빛은 갈 길을 잃은 듯 공허하다.

<탄생 혹은 나의 탄생>은 매우 모호한 그림이다. 프리다는 당시 유산을 겪은 상태였고, 얼마 지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프리다의 상처받은 영혼을 엿볼 수 있는 모티브이다.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나 이 그림의 후안 그리스 등은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입체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반면 프리다는 대서양 건너 유럽대륙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어떤 기조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프리다의 말기 작품들은 이전처럼 자세한 묘사를 추구하지 않는다.

건강의 악화도 프리다의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수박을 그린 정물화는 밝은 색과 생기로 넘쳐난다.

첫 자화상 | 끔찍한 교통사고 후 병상에 틀어박힌 프리다는 미술서적을 탐독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세계에 빠져 든다. 프리다가 선보인 첫 자화상 속에 나타나는 자세, 기다란 목, 우아한 손짓은 보티첼리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욕조 속에서의 상상 | 프리다가 그린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내가 물 속에서 본 것 혹은 물이 나에게 준 것>을 보면, 다른 작품들, 그리고 살아오며 겪은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로 가득하다. 오른쪽 초록 잎 사이로 프리다의 부모가 내다보고 있으며, 왼편에 물에 잠겨 떠다니는 민속의상은 한 해 전 그린 <추억 혹은 심장>에도 등장한다.

동물에 대한 애착 | 프리다의 자화상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칼로 · 리베라 부부는 원숭이, 개, 염소 등을 키웠다. 프리다 왼편 어깨 뒤의 고대 멕시코 형상은 프리다와 디에고가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멕시코 골동품을 연상시킨다.

수집품 | 원숭이와 함께한 이 자화상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후인 1940년, 뉴욕의 수집가인 네이슨 위단의 의뢰로 그려졌다. 이 시기는 프리다가 전남편으로부터 금전적 독립을 하기 위해 작업 의뢰를 활발히 받던 때이다.




"이 당신에게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받아두도록 하시오!"

1938년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비극과 행복은


…어떻게 보면 매우 밀접한 개념이다. 특히 프리다의 삶을 관찰하면 그렇다. 프리다가 겪은 끔찍한 사고는 학문에 대한 꿈은 꺾어 버렸지만, 예술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었다. 극에서 극을 달리던 디에고와의 사랑은 큰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깊은 고통을 안겨 주면서, 프리다가 계속하여 명작들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격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 낸 프리다는 우리에게 그림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기예르모가 찍은 사족사진에는 여자아이들이 넘쳐난다.


일기장


프리다가 1940년 뒤늦게 쓰기 시작한 일기장에는 글보다는 그림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일기장을 가득 채운 수채화, 스케치, 시구, 짧은 메모들은 너무나 모호해서 그 명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편 일기장 곳곳에 보이는 화려한 색채들은 프리다의 감성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는 데, 그 표현방식이 어떤 작품보다도 더 직접적이다.


1932년 10월 16일, 아버지 기예르모가 가장 아끼던 딸 프리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프리다는 부모인 기예르모, 마틸에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프리다와 함께 하는 삶이 정말 즐겁죠?"

-프리다 칼로

마틸데 칼데론기예르모 칼로는 1898년 2월에 결혼한다. 기예르모는 미래의 장인 밑에서 일하면서 사진촬영기술을 배웠다.

프리다는 네 자매 중 셋째였다. 사진은 1911년 프리다가 네 살 때.

프리다는 소싯적부터 가족 중에서도 특이한 구성원이었다. 자매들과 사촌들이 사진촬영을 위해 예쁜 드레스를 꺼내 입을 때, 프리다는 엉뚱하게도 신사 같은 정중앙 가르마에 양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프리다는 당시 사고 상황과 비슷한 봉헌화를 하나 찾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희생자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 같은 형상으로 덧그렸다. 위기에서 구원해 준 성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하단의 봉헌사는 프리다가 직접 쓴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예술가로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활발한 정치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디에고는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가두행진에도 자주 참가해 시위대를 진두지휘하곤 했다. 사진은 1920년대 디에고가 참가한 가두시위 장면.

프리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공산당원이었다. 이 벽화에서 디에고는 젊은 프리다를 계층갈등에 항거해 무장 시위하는 민중을 돕는 공산당 여성투사로 그렸다.

결혼식 1년 후, 프리다는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일종의 준비용 스케치라서 후에 완성된 작품과는 달리 디에고의 손에는 아직 찰레트와 붓이 들려 있지 않다.

프리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알게 된 레오 엘뢰서 박사는 프리다에게 의료에 관한 상담을 자주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이 초상화는 프리다가 그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린 작품이다.

어두운 빛깔 | 알리샤 갈란츠를 그린 이 초상화는 프리다의 초기작으로서, 귀족적인 알리샤의 자세나 우아하게 취한 손짓을 볼 때 프리다가 그린 첫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이다. 프리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사랑했고, 후에 당대의 그림에서 마음에 들었던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반영했다.

대가족 | 작은 여자아이로 표현된 프리다가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카사 아술의 마당에 서 있고, 그 뒤에 펼쳐진 멕시코 농촌을 배경으로 부모인 기예르모와 마틸데가 자리를 잡고 있다. 프리다의 손에서 나온 붉은 리본이 부모를 걸쳐 조부모에게까지 닿아 있다. 어머니 마틸데의 몸 앞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상태의 프리다가 공중에 떠 있고, 그 밑에는 꽃 한 송이가 꽃가루를 뿌리는 동안, 후에 프리다가 될 난자가 수정되고 있다.

전통 민속 | 프리다는 디에고와 결혼한 후 자신의 멕시코 혈통에 대한 자긍심을 밖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프리다는 특히 색깔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테우아나 여인들은 명절엔 그림에서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쓰곤 했다.

화초인간 |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원예가인 루터 버뱅크로, 프리다는 그를 직접 알지도 못했고, 또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그림의 주인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한때 버뱅크의 번식이론에 매우 심취한 적이 있었다. 프리다의 상상 속의 버뱅크는 반은 인간, 반은 화초이고, 뼈만 남은 인간의 사체에서 생명에너지를 뽑고 사는 존재이다.

실험 | 프리다가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유화가 아닌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 있는데, 디트로이트에서 겪은 유산의 아픔(아래 그림 참조)을 묘사한 이 석판화가 그것이다. 왼편에는 세로로 "이 에디션들은 네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좋은 것도 아니었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더 좋은 작품을 얻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가혹한 운명 | 프리다는 1932년 7월, 유산으로 인해 디트로이트 헨리 포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끝없는 눈물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는 프리다에게서 마치 탯줄 같은 빨간 줄이 뻗어 나와 유산을 상징하는 형상들이라든지 달팽이나 꽃처럼 성적인 상징의 형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프리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황량한 산업단지의 풍경은 프리다가 느끼는 절망과 외로움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한다.

멕시코를 향한 그리움| 프리다가 이 그림에 착수할 당시 디에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디에고가 미국에서 예술가로서 높은 명성을 누리며 상류사회와 교류하는 동안, 프리다는 어서 디에고와 함께 다시 멕시코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도시 정글 속에서 홀로 길을 잃은 듯한 테우아나 전통의상이 프리다의 그리움을 상징한다.

밝은 모습 | 목걸이를 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담은 이 인상 깊은 자화상은 위의 작품 <내 드레스가 거기에 걸려있다 혹은 뉴욕>과 같은 해에 그려졌지만, 그림 속 당당한 모습에서 당시 프리다를 괴롭혔던 향수병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이 그림 속의 프리다는 유산의 괴로움까지도 씻어낸 듯 밝은 모습이다.

 디에고는 디트로이트 미술학교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자, 프리다와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북서부 도시인 이리(Erie)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진은 건축가 앨버트 칸과 만날 당시 찍은 것이다.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왂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슬픔을 삭이지 못해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이 사진은 그 직후 친구인 루시엔느 블로흐가 찍은 것이다.

디에고는 록펠러 센터에 그렸다가공산주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 모티브로 논란을 일으켜 파기되었던 문제의 벽화를 후에 멕시코시티에 다시 복원했다.

프리다의 첫 개인전을 주관했던 쥘리앵 레비의 애정은 프리다의 작품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공개된 레비 개인 소장의 몇 사진들은 그들이 더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파리에서 그림을 전시할 당시, 프리다는  동료예술가인 마르셸 뒤상의 집에서 머물렀다. 프리다에게 그는 "온갖 뜨내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붉은 이념 | 레오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은 트로츠키의 정치이념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 하얀 커튼은 트로츠키가 대항하여 투쟁하던 러시아 혁명의 반대세력인 '백색파'를 의미한다. 반면 프리다는 입술엔 새빨간 립스틱을, 그리고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붉은 상의를 입어 '적색파'임을 나타내어 자신은 트로츠키의 편임을 상징하였다.

회색빛 나날들 |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프리다는 그림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배경이 되는 방은 온통 회색빛에 황량하기만 하고, 프리다가 입은 검은 옷은 테우아나 여인들이 장례식에 입는 의상이다. 프리다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예술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릴 시기였지만. 전시회가 길어질수록 사랑하는 남편과 떨어져 있는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높은 곳에 바쳐지다 | 화상 피에르 콜르가 멕시코를 주제로 기획한 그룹전에 전시되었다가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한 자화상이다. 이로써 프리다는 유명 박물관에 그림을 제공하게 된 첫 남미 여성 예술가가 되었다.

이별의 아픔 | 1939년, 프리다는 디에고와 이혼하게 된다. 프리다는 매우 괴로워했고, 이별의 아픔을 그림을 통해 달랬다. 두 명의 프리다가 상처받기 쉬운 심장을 드러내 놓고 있는 이 그림은 프리다의 작품들 중에서도 명작으로 꼽힌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어린시절 사진이 있는 작은 메달이 들려있고, 이 메달은 핏줄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데, 왼쪽에 앉은 프리다는 메달을 가위로 잘라 버린다.

고통 받는 육신 | 프라다는 18세에 겪은 끔찍한 버스사고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정기구를 착용해야 했다. 프리다가 보는 자신은 갈라진 틈으로 척추 대신 부러진 기둥이 보이는 육체였다. 몸에 수없이 박힌 바늘은 프리다가 겪어야 하는 만성적 고통을 상징한다.

용기 | 프리다는 1946년에 대규모 허리수술을 받아야 했다. 프리다는 고통 때문에 평생 많은 수술을 받았지만, 매번 일시적인 효과뿐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프리다가 손에 들고 있는 깃발에는 자신을 응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희망의 나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

프리다는 1943년 멕시코시티 국립미술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이 자화상에서는 스승을 둘러싸고 있는 네 마리의 원숭이는 프리다가 "로스 프리도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던 네 명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프리다는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부쩍 정치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1929년에 탈퇴했던 공산당에 재가입한다. 사진은 디에고와 함께 시위활동에 침여한 프리다.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 개막식 날 병세가 악화되어,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 갤러리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프리다 생애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다.

다리 절단수술 전 프리다가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다리가 뭐 하러 필요해. 내겐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 걸……."

죽기 직전, 프리다는 휠체어에 앉아 디에고와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감성의 역사 | 프리다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비교적 나이가 들고부터이다. 프리다는 일기장에 주변 사건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감성을 연상시키는 비밀스러운 스케치, 수채화, 시구 등도 함께 실었다. 이 그림은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눈의 공룡"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여자를 보여 주고 있다.

당을 위하여 충성 | "난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내 작은 힘이라도 혁명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는 일기장의 일부분은 프리다가 말기에 얼마나 공산주의에 심취했는지 짐작케 한다. 엥겔스, 미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은 프리다에게 마치 자신을 보호하는 성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대지가 선사하는 열매 | 프리다가 가끔 그리곤 했던 정물화들은 단순히 꽃이나 과일 등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차원의 정물화가 아니라, 나름대로 숨겨진 깊은 의미를 담고 잇다. 여기서 붉은 과육은 프리다의 상처 입은 육신을 상징하며,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과일과 야채의 조화는 육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성한 잎 속에 숨겨진 이중적 의미 | <태양과 삶>은 언뜻 보기엔 단순히 최초를 그린 그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깊이 관찰하면, 붉은 태양 뒤로 성적 묘사가 펼쳐진 것이 보인다. 태양 뒤로 꽃봉오리 속에 보이는 것은 울고 있는 태아의 형상으로, 아이를 갖고 싶은 프리다의 마음을 나타낸다.

생명의 꽃 | 프리다가 1944년에 그린 이 이국적인 꽃 그림은 육체적 사랑과 번식행위의 신비에 대한 경의를 담은 작품이다.

표현력 |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탄생한 작품 <원(圓)>은 매우 영적이고 강한 표현력을 뿜어낸다. 내면에 꿈틀거리는 강한 성적 에너지와 점점 허물어져 가는 육신에 대한 절망이 동시에 내재된 인상 깊은 작품이다.

유토피아 | 프리다의 공산주의 찬양은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기괴한 모습을 띤다. 프리다는 마치 공산주의 우상들이 자신을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프리다가 사망한 해에 완성된 작품 <마르크스주의가 병자를 낫게 할지니>에선 목발을 집어 던지고 그림 중앙에 우뚝 선 프리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 | 프리다가 당당한 자세로 대형 스탈린 초상화 앞에 앉아 있다. 그림은 산만하고 초조하며 거칠기까지 하다.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섞어 먹었던 약과 술은 프리다에게 어쩔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사랑


"난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

일 뿐이었다."

디에고 리베라, 1955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불타는 정열만큼


…프리다의 연애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동료예술가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가인 레오 트로츠키까지도 모두 프리다에게 반해 버리지만, 정작 프리다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프리다를 가장 실망시킨 사람이었다. 못 말리는 카사노바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댔다.

프리다가 신부 · 신랑으로 그린 두 사람.

<내 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

레오 트로츠키.


프리다의 여인들


지독히 이성애적이었던 디에고조차도 인정한 사실이 있은;, "여자 둘이 만나면 전혀 다른 차원의 놀라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에고는 프리다 주위의 남성들에게는 질투심에 불타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지만, 프리다의 레즈비언 애인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했다.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성과의 경우에는 달리, 프리다의 동성애적 사랑은 짧게 끝났으며, 정열적인 밤을 보내는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생을 같이할 사랑 : 온갖 비극과 대립 속에서도 프리다와 디에고는 항상 서로에게 다시 돌아가곤 했고, 결국 최후의 순간까지 운명을 함께했다. 이 사진은 1954년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촬용한 것이다.

친구인 돌로레스 델 리오를 위해 그린 작품 <숲 속의 두 누드>에서처럼, 프리다는 동성애적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가 국립학교 예비학교 건물에 벽화 <천지창조>를 그릴 당시, 아직 학생이었던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를 대면한다. 하지만 유명화가인 디에고를 칭송하는 대신, 프리다의 머릿속에 가득한 건 동아리 친구들과 디에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다.

프리다를 알게 되기 전까지 디에고는 루페 마린과 결혼한 상태였다.

디에고의 자화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고집스러운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디에고라면 모두 사족을 못 쓰고 그를 흠모했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보며 "비둘기와 코끼리"같다고 했다. 어쩌면 그리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표현을 찾았는지!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유산으로 잃은 아기들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낸다. 한 여자아이가 망자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버려진 듯 멕시코 고원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다.

프리다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불륜관계를 맺을 당시, 디에고는 마침 국립궁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디에고는 이 벽화에 프리다와 크리스티나의 형상을 삽입하면서, 그가 두 자매 중 누구를 더 편애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 준다.

일본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는 프라다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디에고는 질투심에 불타 노구치를 총으로 위협하기에 이른다.

프리다는 이 그림을 레오 트로츠키를 만난 해에 그렸다. 남근 형상의 선인장이나 원숭이와 같은 육욕의 상징을 담은 이 그림은 미묘한 에로티시즘을 띠고 있다.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가 렌즈에 담은 프리다의 모습은 눈부신 매혹으로 넘쳐난다. 이는 사진의 주인공과 사진작가 간에 나눈 뜨거운 열정의 결과물이다.

디에고는 1930년 제작한 석판화에 프리다의 누드를 담았다.

특이한 방법으로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 프리다는 봉투 겉을 이용해 디에고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밑에 키스자국을 남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 당신의 소녀 프리다."

프리다의 침대 천정에 누워있는 하얀 몰골은 유다의 형상으로, 멕시코인들은 부활절을 기념해 이러한 형상을 터트리곤 한다. 풍성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 프리다의 꿈에 나타난 하얀 망자는 프리다를 지켜주는 존재인 동시에 위협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왕립미술관으로 운구된 프리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디에고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결식에는 600명이 넘는 애도객들이 참석해 프리다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소리 없는 탄식 | 유산을 몇 차례 겪은 프리다는 끝내 아이에 대한 미련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프리다의 절망을 그다지 이해해 주지 못했다. 디에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었고, "아이는 디에고에게 네 번째 순위쯤밖에" 안 되었다. 텅 비고 차가운 방을 배경으로 묘하면서도 공허한 분위기를 담은 자화상 <나와 나의 인형>은 당시 프리다가 느끼는 슬픔에 대한 표현이다.

사랑의 아픔 | <추억 혹은 심장>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뚜렷하다. 프리다의 가슴을 관통하는 구멍과 바닥에 놓인 피흘리는 심장은 디에고의 끊임없는 불륜행각으로 프리다가 겪는 사랑의 아픔을 상징한다. 또한 잘려나간 심장은 고대 아스텍 민족이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제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내살인사건 | 프리다는 이 작품에서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하나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한 남성이 질투심에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는, 법정에서 자신은 "단도로 몇 번 찌른 것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는 기사였다. 물론 여기서 프리다가 모티브를 통해 상징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불륜행각이 얼마나 프리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안중에도 없는 디에고임은 당연하다.

쓰디쓴 눈물 | 프리다가 이 작품을 완성시킬 당시, 디에고는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구입했던 아르킨과 샘 윌리엄스 부부는 프리다와 절친한 사람들로,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목을 휘감은 검은 머리카락에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우는 프리다의 그림 속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요."

완전한 사랑 | 디에고의 58세 생일날, 프리다는 자신의 사랑고백을 그림으로 담아 선사한다. 편안한 표정의 디에고와 프라다의 얼굴은 하나로 융화되었고, 그 옆에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태양과 달이 떠 있다.

"난 불쌍한 사냥감" | 프리다는 자신을 온 몸에 화살을 맞은 채 쫓기는 사냥감으로 보았다. 몸에 꽂힌 화살들은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디에고의 외도로 프리다가 겪는 정신적 고통도 의미한다. 화살촉에 깊은 상처를 입은 몸뚱이에도 불구하고, 사슴의 머리에 달린 프리다의 얼굴은 뿔을 높이 쳐들고 당당히 우리를 응시한다.

극단적인 커트 | 디에고와 이혼해 버린 후, 프리다는 두 번째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다. 위에 보이는 악보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이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머리카락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머리는 삭발되어 버렸으니,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여성성의 상징 | 프리다는 자화상에서 풀어 내린 머리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아름답게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반면 이 자화상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길고 검은 머리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도 이 머리카락은 디에고와 다시 결합한 후 프리다가 다시금 느꼈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일 것이다.

화려한 머리장식 | 프리다의 머리를 장식하는 특이한 매듭 형태는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Oaxaca)주의 전통 장신구를 연상하게 한다. 털실들이 프리다의 머리칼을 굽히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 흥미롭다. 머리 장식은 또한 8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번에 이어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8이란 숫자는 영원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주의 혈통 | 프리다가 품에 디에고를 안고 있고 대지의 여신은 이런 프리다와 디에고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있다. 프리다가 가장 아끼는 애완견인 '세뇨르 솔로틀'은 모든 걸 감싸 안고 보호하는 우주의 팔 위에서 평화로이 잠들어 있다. 이혼 후 재결합한 프리다와 디에고의 관계는 갈수록 더 모성애적 구도를 띠었고,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집착 또한 더욱 커져 갔다.


지금도 우리 곁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은

프리다에게 배울 점이 많다.

프리다는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벗어나,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바

추구했다."

배우 셀마 헤이엑


프리다의 흔적을


…찾는 건 오늘 날 전혀 어렵지 않다. 프리다는 지금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순수예술 분야뿐 아니라, 영화감독, 작곡가, 작가, 안무가, 패션디자이너에게까지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프리다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코요아칸에 위치한 프리다의 고향집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보다 쉬운 방법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서적과 영화를 통해 살아 있는 프리다의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다.

카사 아술의 작업실에 놓인 프리다의 이젤. 당시 작업 중이던 스탈린의 초상화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프리다에게 매겨지는 가치


이미 생전에 수집가와 애호가들에게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었던 프리다였지만,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에 매겨지는 가치를 보면 아마 기절할 것이다. 프리다의 작품들은 지금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자화상 한 점이 무려 3백2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이는 지금껏 디에고의 작품에 매겨졌던 수치들을 모두 뛰어 넘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프리다의 그림을 소장하게 된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의 작품이 시장에 나오는 것조차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출신 배우 셀마 헤이엑은 프리다 칼로의 역할을 맡으면서 평생의 숙원을 풀었다.

프리다가 친구 티나 모도티와 춤추는 장면. 모도타역은 배우 애슐리 주드가 맡았다.


"프리다는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나 또한 프리다처럼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셀마 헤이엑

여성 영화감독 줄리 테이머는 배우 셀마 헤이엑과 함께 오스카 수상작 <프리다>를 탄생해 냈다.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프라다의 옷장(Frida's Closet)'이라는 가게에는 멕시코 전통의 화려한 색상과 심벌로 가득한 프리다 풍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침실 | 카사 아술에 있는 디에고의 침실을 들려다보면, 마치 디에고가 줄곧 방에 있다가 지금 막 빠져나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이다. 모자, 가방, 구두 한 켤레, 외투 등이 방에 흩어져 있고, 침대 머리맡에는 자명종이 놓여 있다. 침대 뒤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했던 프리다의 사진이다.

눈이 즐거워야 입도 즐겁다 | 프라다와 디에고가 사용하던 식당은 식도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장식장 안에 몇 층에 걸쳐 진열된 멕시코 고대 유물과 민속공예품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안 마당의 벽에 쓰인 글씨는 "프라다와 디에고 이곳에서 살다. 1929-1954년"

카사 아술 | '파란 집'이란 뜻의 카사 아술은 파랗게 칠한 벽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안마당에 가면, 방문객들은 프리다 생전과 다름없이 이국적인 화초들과 고대 멕시코 토우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