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5. 6. 13. 12:3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0 권기봉의 도시산책 서울의 일상. 그리고. 역사를 걷다

 

권기봉 지음

2015, 알마

 

 

신천도서관

SG038744

 

911.6

권18ㄱ

 

걷고 생각하며 재발견하다

 

기록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역사는 그 의미가 사라지거나 퇴색한다.

이 책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살아 있는 '서울'의 기록이다.

 

서울에 이렇게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 몰랐다. 도시를 산책하며 건져 올린 이야기들은 때로 심각하고, 때로 흥미로워 깊이 빠져들게 한다. 도시를 다각도로 깊게 살피고 성찰할 줄 알아야 과거를 바탕으로 오늘과 내일의 삶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 책은 도시 서울을 깊고 넓게 보고 질문을 품게 하며 우리를 대화와 토론으로 이끈다.

이용훈_서울도서관장 · 도서관문화비평가

 

이 책에서 저자가 안내하는 곳은 대개 익숙한 옛것이지만 거기서 얻는 지식과 감동과 성찰은 온통 새롭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익숙한 것에서 새것을 찾는 온고이지신의 교과서다. 흔히 가슴과 머리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하지만 역사와 예술과 문화와 삶을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고마운 책이다.

노회찬_정치인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이다. 1998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경험하게 된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또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SBS 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그사이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5년 SBS 특종상' '2008년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한국기행>에 진행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KBS 라디오 <우연한 여행자>와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명소 스토리텔링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려 지금까지 50여 개국을 여행했는데, 최근에는 아시아를 비롯해 태평양과 인도양, 유럽의 근현대사 관련 현장으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기록으로 남기고,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돌아봐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는다. 지은 책으로 《다시, 서울을 걷다》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가 있다.

 

▒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장 에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

 

'부도'의 정체_경복궁

권력과 미술_남대문 세무서 터

친일미술가가 만든 조각상_국립4·19민주묘지

정몽주 동상을 세운 이유_양화대교 북단

'칼레의 시민'과 한국의 동상_플라토미술관

김수근의 명암_공간건축 사옥

한 건축가의 소신_세종문화회관

두 번의 재해석_국립극장

여기 '문화 독립운동가'가 있다_간송미술관

'시민문화유산 제1호'의 탄생_최순우 옛집

'한국 최초 서영화가'의 옛집이 열리다_고희동 가옥

문화인의 자취_김수영문학관

'이상의 집' 그 이면_상촌(서촌)

디자인 그 너머_남산 소월길

우미관과 김두한_종로 피맛길

변사와 남녀유별석의 추억_단성사 터

무성영화를 만나다_한국영상자료원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궁궐을 정원으로 삼은 집?_창덕궁

파헤쳐진 내시 묘지_북한산 중골

'연신원' 철거 단상_연세대 신촌캠퍼스

다시 볼 수 없는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_명동

자동차에 밀려난 대한문_덕수궁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을사늑약의 현장_중명전

누구도 몰랐던 경술국치의 현장_남산

'동척' 관사가 남아 있다_종로구 통의동

일본군 장교 관사의 운명은?_부엉이 근린공원

서울 한복판의 태평양전쟁 흔적_경희궁 방공호

'비원'과 '후원' 사이_창덕궁

'대일본'은 낭설이다_백악산·옛 조선총독부청사·서울도서관

화재감지기 위에 단청?_동묘

철거만이 능사였을까?_조선총독부청사

일제가 끊은 지맥, 다시 잇는다_율곡로

100여 년 만에 드러난 하수관거의 의미_명동성당

서울에도 도자기 가마가 있었다?_북한산 우이천 입구

'백제 500년'의 역사가 드러나다?_풍납토성

붉은 벽돌집의 정체_딜쿠샤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안식처_창덕궁 낙선재

6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문화유산_한양도성

한양도성을 축대 삼은 동네_행촌동·장충동·혜화동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

 

남북 대결 시대의 상흔_북한산 우이령길

최후의 바리케이드_유진상가

붕괴, 그 후 20년_삼풍백화점 터

'사직동팀'은 추억일 뿐?_서울 시립어린이도서관

'여우사냥'과 사라진 비석_경복궁 건천궁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역사의 내막_러시아공사관 첨탑

'독립'의 또 다른 의미_독립문

'절반의 역사'만을 기억하는 역사관_서대문형무소

이리저리 또도는 '반민특위' 표석_명동 입구

그는 그곳에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_종각 사거리

최초의 신식무기 공장_번사창

비운의 노래 <대한제국  애국가>_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그곳에서는…_인사동 태화빌딩

3·1독립만세운동의 아지트_승동교회

그 뜨거운 역사의 현장_서울역

그곳만 볼 게 아니다_운현궁

최후의 독립운동 현장 '부민관'_서울시의회청사

다시 돌아온 '마지막 임시정부청사'_경교장

절대 권력자의 집을 찾아_이화장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역사_4·19혁명기념도서관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

 

서울역 앞 쪽방촌의 여름 그리고 겨울_동자동·갈원동

'넝마공동체'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_개포동 영동 5교

겨울이면 더 바빠지는 사람들_구세군중앙회관

그때의 터줏대감은 지금 어디에_황학동 도깨비시장

"내가 어떻게 소멸해가는지 봐두게"_청계천 공구상가

"잠깐 참으라"는 팻말보다 필요한 것은…_마포대교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다?_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사람이 꽃보다 먼저다_덕수궁 대한문 앞

판화가의 동분서주가 반갑지만은 않은 까닭_광화문광장

차들이 사라진 거리흫 걸으며_홍대 앞 주차장 골목과 연세로

'거리의 지뢰' 볼라드_국립서울맹학교

'황연대성취상' 그 너머_정립회관

128년 만의 재개국_우정총국

만인을 위한 의료기관을 꿈꾸다_제중원 터

"마마야 물렀거라. 지석영 대감 행차시다"_대한의원 의학박물관

'세계 제2의 피폭국가' 한국_'합천 평화의 집' 서울사무국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의 운명은?_종로구 송현동

지금은 사라진 '여인들만의 밤'_보신각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

 

미스코리아대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_명동예술극장

'멸종 위기'에 처한 서점들_신림동 고시촌

부대찌개의 추억_용산 미군기지

127년 만에 사라지는 백열구_경복궁 향원지

자연지세가 사라져가는 서울_화동 고갯길

복원 논란을 넘기자 이번엔…_부암동 백석동천

_청계천

왜 굳이 그 자리에 그 돈을 들여서_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거리예술 창작센터로 변신한 취수장_옛 구의취수장

'서울 유일' 석유비축기지의 미래_매봉산

'찾아가는 시민발언대'의 이면_서울시민청

한옥 게스트하우스의 미래_북촌

'조선철도호텔' 이후 100년_웨스턴조선호텔

역사의 옷을 입은 백화점_신세계백화점 본점

국내 첫 고가차도여, 안녕!_아현고가도로

남겨둔 청계고가 교각의 의미_청계천

튼튼해서 혁신적이었던 아파트_회현 제2시범아파트

인권 감수성을 가늠하는 잣대_서울유스호스텔

 

사진 및 기사출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전傳 흥법사 염거화상탑'(위)과 '흥법사 진공대사탑'(아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위)과 '거돈사 원공국사 현묘탑'(아래).

국립4·19민주묘지.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김경승의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정몽주 동상.

남산에 있는 김경승의 '백범 김구 동상'.

'포은 정몽주 동상' 건립 비문. 제작비는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헌납했다.

플라토미술관 '칼레의 시민'.

세종로 한복판의 '세종대왕 동상'

옛 공간건축 사옥.

'아라지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바뀐 옛 공간건축 사옥.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외벽의 모습.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건물(위)과 내부 조사실(아래). 물고문 등을 가능케 한 치밀한 설계가 특징적이다.

세종문화회관.

전통건축 요소를 가미해 디자인한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 흉상(위)과 간송미술관 현관(아래).

최순우옛집.

최순우옛집.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아 거니 곧 깊은 산속과 같다'는 뜻으로, 한적한 한옥에 머물며 한국미술 연구에 천착해온 혜곡의 정신이 엿보인다.

고희동 가옥.

옛집 내부에 재현한 춘곡의 화실.

김수영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인의 유품.

상촌(서촌).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터. 이 한옥은 이상이 실제로 살았던 큰아버지 집이 아니다.

남산 소월길.

김현근과 스가타 고의 공동 작품 <쉼표+또다른 여정>(2011).

5 · 16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삼일절을 맞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사진을 찍은 김두한.

단성사 터.

1934년의 단성사.

한국영상자료원.

<청춘의 십자로>(1934) 포스터.

궁궐을 침범하고 들어선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 지금은 개인 소유로 바뀌어 있다.

개인 집의 벽이나 축대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창덕궁 서쪽 지역의 담장.

연신원.

윤동주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기숙사.

한국 최초 증권거래소.

철거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

덕수궁 대한문.

섬처럼 고립되어버린 1968년경의 대한문.

시내버스 차고지 정문으로 쓰이다 발견된 환구단 정문.

중명전.

남산 통감관저 터.

1910~1911년경의 통감 관저 진입로(위)와 현재의 모습(아래). 수령 42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의 위치와 형태가 닮았다.

연설하는 사람 뒤로 1936년 통감 관저 앞마당에 세운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 동상 좌대가 보인다(위). 2006년 좌대 관석 세 개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아래).

종로구 통의동.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서 있는 나석주 열사 동상.

부엉이 근린공원.

발견된 22개 동 가운데 2개 동을 보존해둔 일본군 위관급 장교 관사.

뤼순감옥(위)의 왼쪽 회색 건물은 러시아가, 오른쪽 붉은 건물은 일본이 지배하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그 지역의 복잡한 역사를 보여준다. 근처에 위치한 옛 일본군 뤼순전투 승전탑(아래)은 현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경희궁 방공호.

창덕궁 주변의 '비원' 간판들.

옛 조선총독부청사.

'本(본)'자보다는 '弓(궁)'자를 닮은 옛 경성부청사.

동묘.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천안독립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놓은 옛 조선총독부청사 첨탑.

명동성당 재개발 시 발견된 하수관거.

2012년 말 발견된 을지로 입구 사거리의 하수관거.

풍납토성.

딜쿠샤.

'행복한 마음'을 뜻하는 딜쿠샤.

창덕궁 낙선재.

'달빛기행' 중 만날 수 있는 창덕궁 주합루(위)와 어수문(아래).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 태조 때 쌓기 시작한 이래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지속적으로 보수되고 있다.

한양도성을 담장이나 축대로 삼고 있는 경신고등학교.

북한산 우이령길.

우이령길 곳곳에 남아 있는 대전차 장애물.

유진상가.

유진상가 옥상(위)과 1층(아래).

삼풍백화점.

양재 시민의 숲 한쪽에 자리한 '삼풍 참사 희생자 위령비'.

한때 '사직동팀' 사무실로 쓰였던 현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경복궁 건청궁.

2007년 복원한 건청궁 전경.

을미사변이 벌어진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복원 전 건청궁 자리에 있던 '명성황후 조난지지'비.

러시아공사관 첨탑.

정동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던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독립문이 들어서기 전 서 있던 영은문. 지금은 돌기둥 두 개만 남아 있다.

서대문형무소.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서대문형무소 내부.

반민특위 터 표석.

반민특위가 와해되기 직전인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열린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위), 원 내의 인물은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 씨다. 현 명동 KB국민은행 명동영업부 빌딩 자리에 있던 반민특위 본부 청사(아래).

김상옥의거터 표석.

1995년 설치된 '김익상 의사 의거 터' 표석(위)과 8년 뒤인 2003년 설치된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 표석(아래).

번사창.

열과 가스 배출을 위해 굴뚝지붕을 둔 번사창.

탑골공원.

 

하늘의 신이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나이가 끝이 없을 정도로 장수하시고

위엄과 권세를 온 세상에 떨치시고

오래도록 복록福祿이 이어지게 하소서.

하늘의 신이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든 프란츠 에케르트.

1902년 탑골공원에서 음악회를 미친 후 팔각정 앞에서 포즈를 취한 대한제국 군악대원들.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석.

이완용 소유의 별장 태화정이 있던 곳에 들어선 태화관.

승동교회.

인사동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승동교회.

서울역.

강우규 의사(위)와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아래).

운현궁.

일본군 헌병 초소 터에 들어서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위)과 운현궁 뒤쪽에 위치한 양관(아래).

서울시의회청사.

마지막 독립운동의 순간을 증언하고 있는 표석(위)과 그 현장이었던 부민관(아래).

경교장.

1946년 경교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이화장.

친일부역혐의자 김경승이 조각한 이승만 동상.

4 · 19혁명기념도서관.

3 · 15부정선거는 이후 4 · 19혁명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넝마공동체 컨테이너 철거 뒤 나붙은 현수막.

구세군 중앙회관.

1928년 처음 등장한 구세군 자선냄비.

마포대교.

마포대교에 설치되어 있는 'SOS 생명의 전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내부.

황조롱이 숲.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단결을 상징화한 이윤엽 작가의 벽화.

보행 전용거리로 바뀌기 전의 신촌 연세로. 이제 보행자 외에는 버스와 긴급차량만 통행할 수 있다.

정립회관.

2012년 런던패럴림픽 '황연대성취상' 시상식. 손을 흔들고 있는 이 중 오른쪽이 황연대 전 정립회관 관장.

우정총국.

한국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제중원 터.

재동 시절의 제중원(위)과 지금의 을지로와 명동 사이로 이전한 뒤의 제중원(아래).

대한의원 의학박물관.

대한의원 의학박물관 앞뜰에 있는 지석영 동상.

'합천 평화의 집'에서는 2012년 이래 매년 비핵평화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왼쪽의 풀밭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던 송현동 일대.

1966년 안국동에서 쌍문동으로 옮겨진 이후 2003년 경기도 여주로 다시 옮겨진 감고당.

보신각.

명동예술극장.

1960년 제4회 미스코리아대회 중 수영복 심사.

신림동 고시촌 서점 그날이 오면.

서점 '그날이 오면' 내부.

1960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꿀꿀이죽' 노점상 관련기사의 사진.

경복궁 향원지.

향원지 북서쪽에 있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 표석.

2013년 무악동의 '연근바위' 파괴 현장.

부암동 백석동천.

'白石洞天(백성동천)' 각자.

무계정사 터에 있는 '武溪洞(무계동)' 각자.

무계정사 터 근처에 들어선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 2014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요정 '오진암' 건물을 헐어다 지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한양도성 이간수문.

옛 구의취수장.

2013년 9월 열린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음악당 달다의 '랄라라쇼'.

매봉산 석유비축기지.

마포 석유비축기지 탱크 내부.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민발언대 풍경.

"이 북은 '전시용'입니다. 두드리거나 울릴 수 없습니다"라는 경고문이 걸려 있는 청와대 앞 신문고.

웨스틴 조선호텔.

일제는 조선철도호텔을 지으며 환구단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아현고가도로.

아현고가도로 철거 전(왼쪽)과 후(오른쪽).

청계 8가와 9가 사이 청계천 위에 남겨놓은 청계고가 교각 세 개.

회현 제2시범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구름다리를 설치해 남산 중턱에서도 곧바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서울유스호스텔.

현재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시청 남산별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안기부청사. 

 

 

posted by 황영찬
2015. 6. 11. 16:23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9 환단고기를 찾아서 1 : 고조선과 대마도의 진실


신용우 장편소설

2012, 작가와비평



대야도서관

SB102400


813.7

신65ㅎ 1


끊을 수 없는 대한민국과 일본 역사의 고리

1910년부터 총독부가 찬탈한 우리 역사책 51종 20여만 권은 어디에 있을까?


환단고기를 찾아서 1

고조선 대마도 진실


신용우의 소설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쉰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지침으로 삼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광개토대왕의 비문까지 고쳐가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조선에서 대진국 발해의 역사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는 이 판국에 우리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 소설가 신용우가 우리의 자랑스런 고조선과 고구려, 대진국 발해의 역사와 광역을

현실로 가져와 되살려 놓는다. 또한 그 역사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 특유의 메타픽션적 역사 접근은 역사가 과거에 묻혀

숨 막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함께 웃고 숨 쉬게 한다.

특히 유난히 왜곡된 부분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의 찢기고 기워진 아픈 구석을 찾아 명쾌하게 치료한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는 그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신용우는 여지없이 그 매력을 발산한다. 일제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의 역사를 그가 소생시키고 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거둬들인 역사와 문화,

예술 서적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는 기록이 그의 눈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그 책들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라 반드시 찾을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을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부디 이 작품이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몫을 하기를 바라며,

이런 작품을 쓰는 신용우 작가의 노력이야말로 우리 후대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민용태(시인, 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고려대 명예교수)


 

지은이 신 용 우

195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1회 외대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장편소설 『천추태후』,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요동묵시록』(상, 하), 『요동별곡』, 『도라산 역』(1, 2), 『철수야! 안 철수?』를 출간했다. 그중 『요동별곡』은 세계일보 스포츠월드 연재소설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배우는 목적은 역사를 거울삼아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왜곡된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역설하며 일본과 중국에 의해 찢기고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요동 수복과 대마도 되찾기, 통일에 대한 관심 역시 역사 속에서 그 뿌리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역사를 바로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풍성한 삶과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라는 역사관을 소설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 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의 삶에 투영시킴으로써 보다나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방송, 기업, 관공서, 교사연수회, 학생특강, 포럼 등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서 각각의 눈높이와 특성에 맞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작가서문 : 역사는 잠시 감춰질 뿐 지워지지 않는다


프롤로그 : 찾아야 할 책들


1. 시간을 감춘 땅속

2. 동행

3. 죽음도 기다려준 해야 할 일

4. '역사'라는 퍼즐 맞추기

5. 유해는 요동벌판과 대한해협에

6. 끝나지 않은 일본의 역사왜곡

7. 경상북도 칠곡군 산 321번지

8. 하야시 리스케, 이토 히로부미가 되다

9. 이토 히로부미, 역사를 칼질한 망나니

10. 아! 대마도

11. 독도와 대마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땅

12. 역사는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13. 고조선의 영광

14. 나라가 못 찾으면 백성이 찾는다

15. 가슴에 부는 따뜻한 바람, 경애

16. 기회의 붉은 피

17. 일본왕실 비밀서고의 흑막

18. 발가벗은 역사가 사져다준 선물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도전

참고 지도






posted by 황영찬

2015-058 바그너, 그 삶과 음악


스티븐 존슨 지음, 이석호 옮김

2012, PHONO



능곡도서관

SF035309


670.99

존57ㅂ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8


Wagner His Life and Music


2CDs of music + free web access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바그너가 숨을 거둔 지 벌써 한 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바그너라는 인물과 그의 음악은 지금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심오한 통찰력의 소유자로 칭송되는가 하면,지독한 난봉꾼, 파시즘의 선구자 혹은 장황한 음악을 일삼은 거만한 인물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거대한 4부작 <반지> 사이클 또한 서양 문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창조적 과대망상증이 낳은 독보적인 사례로 일축하고 만다. 이 책은 개인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을 통틀어 바그너라는 인물이 가졌던 어두운 측면들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가 내세운 훌륭한 비전은 인간으로서의 결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도유망과는 거리가 먼 풋내기 음악가에서 관능적이고 아름다우며 또한 가장 혁신적인 음악의 찾조자가 되기까지, 그 비범한 인생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멀티미디어 전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1 바그너의 작품 세계를 직접 개괄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CD 두 장

2 낙소스 웹사이트의 '바그너의 생애와 음악' 콘텐츠 자유이용권

(CD에 담지 못한 많은 음악과 보너스 자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Stephen Johnson

맨체스터 노던 스쿨 오브 뮤직과 리즈 대학을 거쳐 맨체스터 대학을 졸업했다. <인디펜던트>와 <가디언> 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해왔고, <스코츠맨> 지의 수석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 BBC 라디오 제3, 4 채널과 월드 서비스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도 자주 참여했으며, 1996년에는 브루크너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 제작된 총 14편분량의 다큐맨터리에도 출연했다. 《브루크너를 기억하며》를 썼고, 《케임브리지 지휘 안내서》에 그가 쓴 글이 포함되어 있다. 2003년 '아마존닷컴 올해의 클래식 음악 저술가'로 선정되었고, 현재 BBC 라디오 3의 <디스커버링 뮤직>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이석호 Lee Sukho

보성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대학 졸업 후 <그라모폰 코리아>의 편집기자를 거쳐 EMI 뮤직의 클래식 부서에서 일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음악과 예술 전반에 관련된 좋은 책을 쓰고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왜 말러인가?》(2010)와 《악마의 악기》(출판예정)가 있다.


Contents

차례


서문


제1장

시대의 풍운아


제2장

파리로 가는 길


제3장

승리와 재앙


제4장

망명


제5장

한줄기 빛


제6장

강한 성城


부록

작품해설

책에 나오는 인물들

용어집

음반 수록곡과 해설

연표

역자후기

참고문헌


www. naxos.com/naxosbooks/wagnerlifeandmusic

웹사이트의 바그너 전용공간 주소입니다.

처음 방문 시 로그인 창 아래의 here를 클릭해 메일을 등록하시면

로그인 후 아래의 내용을 자유로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등록 창에서 ISBN_9781843792000, 암호_Bayreuth


CD에 수록된 전곡

바그너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

동시대의 문화예술, 정치 관련 사건과 나란히 보는 바그너의 생애 연표.


Chapter 1

A Child of His Time


_

제1장

시대의 풍운아


바그너는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아꼈다.


Chapter 2

The Road to Paris


_

제2장

파리로 가는 길


그에게 파리 시절은 매문賣文과 가난, 그리고 끊이지 않는 낙심으로 채워진 시련기였다.

바그너의 첫 아내 민나 플라너.

파리 시절의 젊은 바그너. E. B. 키츠의 그림(1842)


Chapter 3

Triumph and Disaster


_

제3장

승리와 재앙


1848-1849년의 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바그너의 사상은 특히 선동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했다.

1842년 10월 20일 드레스덴 왕립궁정 극장에서 초연된 <리엔치>의 한 장면.

1849년에 발부된 바그너의 수배 영장.


Chapter 4

Exile


_

제4장

망명


바그너는 욕망의 포기와 해소라는 고통스러운 역설을 비록 말로는 시원스럽게 풀어 설명하진 못했지만, 음악으로는 조금의 남김도 없는 극한까지 탐험해냈다.

1858년 뮌헨 시절의 프란츠 리스트.

마틸데 베젠동크. 서른두 살 때의 초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마지막 부분의 자필 악보. 바그너는 이 자필보를 마틸데 베젠동크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다.


Chapter 5

A Light Must Show Itself


_

제5장

한줄기 빛


"바그너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차라리 하나의 질병이자 병폐가 아닐까?"

1865년 6월 10일로 예정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알리는 포스터.

트립센. 바그너는 스위스 시절 이곳에 기거했다.

바그너와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1880).

바그너와 그의 후원자 루트비히 2세가 <라인의 황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Chapter 6

A Safe Stronghold


_

제6장

강한 성城


얼마나 열심히 바그너의 음악을 뜯어보고 분석하건 간에, 그 역설적인 아름다움과 "심오한 의미"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남는다.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는 1872년 5월 22일 바이로이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1876년 8월 13일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된 <라인의 황금> 초연이 끝나고 열린 만찬에서 건배를 제의하고 있는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 코지마 바그너, 한스 폰 뷜로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동석하고 있다.


Supplement

부록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에서 열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초연을 알리는 포스터.

1861년 3월 13일 <탄호이저> 파리 추연을 알리는 포스터.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된 <라인의 황금> 초연 중 한 장면.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니벨룽의 반지> 무대 사진.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라인의 황금>에 출연한 라인 처녀들. 라인 강 수중의 느낌을 창조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무대장치가 인상적이다.

1876년 <반지> 초연 무대에서 브륀힐데로 분한 아말리에 마테르나 Amalie Materna(1844-1918)





posted by 황영찬

2015-057 미라 - 영원으로의 여행


프랑스와즈 뒤낭, 로제르 리슈탕베르 지음 /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7


082

시156ㅅ  3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2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무엇이었으며,

왜 그들은 시체를 영구히 보존하려고 했을까?

생명을 잃고 바싹 마른 몸만 남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왕릉 속의 석관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미라의 붕대가

풀어지면서 2천 년 전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 속의 미라는 평온한 얼굴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을 들려준다.


수천 년간 내려온

시체 보존 기술을 전수받은 이집트의

방부처리사들은 죽음 속에다 삶의

외관을 되살리려 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미라들은 이집트의

서쪽 마을인 두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것들로,

방부처리사의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다.

이 미라들을 현대적인 기술로 분석해 봄으로써,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Les Momies, un voyage dans l'eternite


차례


제1장 미라의 부활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제5장 과학적 연구

기록과 증언

연보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프랑수아즈 뒤낭 Francoise Dunand

프랑수아즈 뒤낭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의 종교사 교수로 재직중이며, 카이로에 있는 프랑수아 동양고고학 연구소(IFAO)의 위원을 역임했다. 뒤낭은 고대 이집트의 신앙과 종교적 관습에 관한 논문과 책을 발표했으며, 1983년부터는 IFAO의 두치 고대공동묘지 발굴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로제르 리슈탕베르 Roger Lichtenberg

로제르 리슈탕베르는 현직 의사이며, 파리에 있는 아튀르-베르네 연구소의 방사선부를 책임맡고 있다. 1976년 람세스 2세 미라 조사팀에 참여했으며, 미라 연구와 방사선 임상학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리슈탕베르는 1982년부터 두치의 미라들에 대한 인류학적 · 고생물학적 연구에서 X선 촬영을 총지휘하고 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터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3번 <세잔>이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미라의 부활


이집트를 여행한 옛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의 저술에서 이 낯선 나라 사람들은 "모든 풍습이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썼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반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에 생명의 모습을 주려고 애썼다. 이러한 저작들 덕분에, 이집트는 늘 미라의 땅으로 기억되어 왔다.

17세기만 해도 미라는 여전히 공상의 대상이었다(위). 기자의 제2 피라미드 대현실(大玄室)을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의 석판화(1818)는 한층 정밀한 묘사를 보여 준다.

1908년, 맨체스터 대학의 마가렛 머레이(앞치마를 두른 이)가 12왕조(B.C. 1991-1786년경) 시대의 성인 남성 미라에 대한 병리학적 검사에 착수했다. 이 미라는 영국의 위대한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나일강 하류에서 공식적인 탐사작업을 벌이던 중 발견한 것이다. 1858년 이후 카이로에 있는 고대유물관리국의 허가 없이는 유적지 발굴이나 유물의 해외반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불라크의 전원 주택 복도에서 발견된 유물을 그린 루이지 마예의 그림(위). 《이집트 풍경》(1801~1804)에 수록. 아래는 람세스 2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금도금한 네 개의 성골함 중 하나를 열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성골함에는 투탄카멘의 목관을 넣은 석관이 들어 있었다.

전실(前室)에서 발견된 투탄카멘의 흉상. 채색 회반죽을 덧칠한 이 나무 흉상은 생생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아문신을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인물인 카에무세트 왕자의 장례용 가면은 사카라에서 발견되었다.

셰스홍크 2세의 것인 이 가슴장식은 재생의 상징인 풍뎅이를 묘사하고 있다(위). 프수세네스의 내장을 꺼내기 위해 복부에 뚫은 구멍을 가리기 위한 황금판(가운데). 프수세네스의 황금 샌들(아래). 타니스에서 발견된 이 유물들은 의식용 용품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미라 제작 기술


미라 제작은 B.C. 3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라 처리 기술이 완성된 것은 B.C. 1000년 전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시체에 살아 있는 모습을 부여하는 복잡힌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저(생강)'라고 알려진 이 미라는 B.C. 32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게벨레인 사막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진저는 자연적으로 미라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모래 속에서 이런 미라를 발견한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스레 사후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시체를 미라로 처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이후로 그들은 제물이나 일상 생활용품을 그릇에 담아 시체 곁에 놓아두기 시작했다.

시체에서 들어낸 내장을 담아 둔 카노픽 항아리. 이 항아리가 어떻게 쓰였는지 밝혀 낸 샹폴리옹은 이렇게 적어 두었다. "섬유질조직…… 동물의 냄새, 향유를 잔뜩 바른 물체를 그릇 바닥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 간, 뇌수, 작은뇌."

안티노에에서 심하게 파손된 미라를 발굴한 사람은 이것이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의 주인공인 타이스의 미라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창녀인 타이스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다가 그에게 감화되어 평생을 사막에서 참회하면서 살았다.

아니 파피루스(19왕조)의 한 장면. 죽은 자를 썰매에 실어 영원히 쉴 곳으로 나르고 있다. 아내와 친지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장식을 넣은 튜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의 속옷)와 숄만을 걸친 '안티노에의 여자 장식사'는 파라오 시대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체 처리 방식을 보여 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아누비스 가면의 하나. 테라코타에 색을 칠했고 눈구멍을 둘 뚫어 놓았다.


제3장

불멸을 향한 갈증


"그대는 '라'와 같이 되어 영원을 향해 일어서서 헤엄쳐 가리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이 생(生)에서 저 생(生)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동물 할 것 없이 영원한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라 처리라는 준비단계를 마쳐야 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구성요소가 흩어진다고 믿었다. 그림에서 검고 바싹 마른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바(영혼의 새)'와 함께 있다. 그들은 장례의 마법을 통해 영혼의 새가 언젠가는 죽은 육체와 재결합한다고 믿었다.

신왕국시대에 들어서면 서민들도 왕가의 신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타네테레트라는 여인의 관에는 아누비스를 앞세운 태양의 배가 그려져 있다.

죽은 아내와 남편이 사후세계에서 이승에서의 쾌락을 누리고 있음을 표현한 그림. 제물이 담긴 테이블과 세네트 게임 판이 부부 앞에 놓여 있다.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에 들어 있는 그림(위). 죽은 자(그림 왼쪽)가 아누비스의 인도를 받아 심판정으로 들어가 오시리스 앞에 선다(그림 오른쪽). 가운데 장면은 심장 달기 의식이다. 악어 여신인 오페트와 암소 여신인 하토르가 웨스트의 산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아래). 이 그림은 아니의 《사자의 서》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들판을 차지했노라. …… 여기서 나는 먹고 마시고 축제를 벌였노라. 그리고 밭을 갈고 추수를 하였노라." 《사자의 서》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아니의 《사자의 서》는 사후세계를 묘사한 그림을 보여 준다.

매 미라 가면을 쓴 미라는 인간의 미라처럼 정교하게 붕대처리되어 있다.

 

제4장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저승에서의 삶을 이승의 삶과 같이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어 주었다. 그중에는 값이 상당한 귀중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는 도굴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도굴은 이집트 도처에서 자행되었고 소박한 무덤이라해도 도굴꾼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관에 그려진 눈(아래, 중왕국시대)은 죽은 자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 위는 19세기 초에 루이지 마예가 그린 그림으로 대피라미드 왕의 현실을 보여 준다. 여기에 있던 케오프스 파라오의 화강암 석관은 텅 빈 채로 발견되었다.

왕릉의 두 가지 형태. 위는 케프렌의 피라미드(4왕조)이고, 아래는 사카라에 있는 메르네이트 왕비의 마스타바(1왕조)이다.

"만약 너희들 중 하나가 저 세상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대령이오!'라고 말하라." 《사자의 서》에 있는 이 말은 죽은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우샤브티스의 임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우샤브티스에 새겨지곤 했다. 우샤브티스는 주인의 지위에 따라 몇 인치에서 몇 피트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다양했으며, 아멘호테프의 인물상처럼 주인을 흉내내어 그들 몫의 소형 관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이 세 개의 관은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여인 타무트네프레트의 것이다. 관뚜껑에는 여러 줄로 상형문자가 씌어 있고 장례의 신들이 그려져 있다. 그 신들 중에는 죽은 여인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날개 달린 여신도 있다. 문자를 써넣는 일은 죽은 자가 사후에도 영생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원이었다.

산 자를 보는 죽은 자의 눈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를 손쉽게 알아보려는 듯이 미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사실주의가 유행했다. 암모니우스라는 남자(위)와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여인(아래)의 미라 초상화는 나무나 천에 색깔 있는 왁스 혹은 접착제를 섞은 안료로 그린 것이다. 표현력 풍부한 이 초상화는 당시 사람들의 범세계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런 초상화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로마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아르테미도루스의 경우와 같이, 초상화는 관재나 붕대 섶에 찔러 넣었다. 이 미라는 하와라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대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하묘지로 네모꼴 기둥과 그리스풍 삼각형 박공벽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을 보여 준다.

투탄카멘 왕릉은 현대까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유일한 무덤이다. 이 왕릉도 매장 직후 도굴꾼에게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부장품은 무사할 수 있었다. 위 사진들은 1922년 이 왕릉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부장품들이 마구 흩어져 쌓여 있다. 궤짝에 찍힌 도굴꾼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20세기 초에 발굴된 미라.

애벗 파피루스는 람세스 9세 치세 때 열린 람세스 2세 무덤 도굴범들의 재판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도굴범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무덤을 약탈하러 갔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왕과 왕비의 관을 열고 부적, 보석 등 귀중품을 탈취한 뒤 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투탄카멘 왕릉의 발굴작업은 몇몇 유품을 현장에서 원형으로 복구하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힘겹게 진행되었다. 왕릉의 유물 전체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5장

과학적 연구


이집트학이 정립되면서 미라는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제약원료 정도로 취급되던 미라가 현대 과학의 집중 탐구대상이 된 것이다. 도굴꾼의 손에서 미라를 구출해 낸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 귀중한 인간자료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가스통 마스페로 경. 마스페로는 기자의 피라미드와 룩소르의 신전을 발굴했다.

투트모시스 2세(아래)와 투트모시스 1세(위)의 사진. 둘은 가족간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엑스레이 사진은 후자가 투트모시스 1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뼈대일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시프타 파라오(19왕조 말)의 왼쪽 발의 기형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편평족이라는 주장과 소아마비 후유증이라는 견해가 맞서는 것이다.

중왕국(11왕조)시대에 제작된 미라의 가면과 관재.

헤로도토스 흉상.

알렉산더 대왕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관.

람세스 6세의 현실 그림 중 새로운 태양관(solar disk)의 창조를 묘사한 부분.

투탄카멘 왕릉에는 많은 보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위는 설화석고 화병이다.

데이르엘바하리 미라 저장소에서 발견된 세티 1세의 미라.

하워드 카터가 투탄카멘 왕릉에서 장례용 긴 의자를 꺼내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056 萬人譜 21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9

 

811.6

고667만 21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방의 태양을 쏘라

조명암(趙鳴岩)

 

동방이 얼어붙었다

태양의 붉은 피가 얼어붙었다

 

젊은이여 이 고장 백성의 아들이여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보아라

태양의 가슴의 붉은 피를 쏘아 흘려라

백성이 광명에 굶주리고

강산의 줄기줄기 숨죽여 누웠으니

 

허물어진 옛터

님의 꽃잎 하나 둘

……

 

화살을 쏘라

동방의 태양을 뽑아내라

피 끓는 심장에 불을 붙여

님은 봉화 재 우에 높이 들고 서서

산과 들 곳곳에 이날의 레포를 아뢰어라

 

차례

 

시인의 말

 

어떤 임종 / 지족 / 춤 몇대 / 사색풍경(四色風景) / 어머니의 정수리 / 장충동 판잣집 대장 / 할머니의 젖 / 김주열 / 유대평 씨 / 고교생들 / 신나명 / 김정렬 / 김효덕의 아버지 / 김위술 / 고(故) 김상웅의 넋두리 / 구두닦이 / 사라호 해골 / 그 형제 / 꿈 / 이대우 /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 의규군의 아버지 / 백암의 꿈 /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 손진흥 / 신호덕이 / 여순경 김숙자의 웅변 / 유정천리 / 이장 고재순 /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 그의 일생 / 노원자 / 옥봉이 / 임옥남 / 박정덕이 마누라 / 그들 9형제 / 닭 두 마리의 마당 / 청주여고 2학년 신순옥 / 대전고 / 유해성 / 김효성 / 춘천고교 설정일 / 교장 김석원 / 이 충혜왕 / 동래고 유수남 / 이의남 / 박우영 / 절도 8범 / 정추봉 / 거지 / 이상은 / 이영민 / 이정길 / 채섭 채철 형제 / 평생 침대 / 생선가게 오영감 / 최기태 / 발산리 새댁 / 김선인 / 허정 / 이문길 / 어느 어머니 / 진영숙 / 진영숙의 아버지 진명옥 / 이상은 / 강명희 / 임화수 / 임화수들 / 김순자 / 이옥비 / 4월 266일 / 김경진 / 김재우 / 야산 이달 / 박우택 / 박수만 / 국민대 김수현의 결혼 / 앉은뱅이 종석이 / 박종구 / 윤석길 / 태관동 / 씻김굿 가족 / 백원배 / 장충식 / 김치호 / 정대근 / 김효덕의 어머니 / 김영호 / 오성원 /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 두 혼백 / 아버지의 염불 / 어머니 이계단 / 아우 이중하 / 4월계 / 김분임 / 김정돈 옹 / 김광렬 / 어머니 이춘란 / 옛 꽃다발 / 신형사 / 이종양 / 전성천 / 화물차 감옥 / 그녀의 밤 / 김두철 / 가루 / 김기선 / 김유만 / 이강욱 / 이강석 / 그 할아범 / 프란체스카 도너 / 박마리아 / 승마 출근 / 어떤 낚시질 / 한상철 / 윤광현 / 김준호 / 이성남 / 안국동 덕성여중 3학년짜리 / 김창호의 관 / 박점도 / 이채섭 / 심정구의 어머니 / 명남이 / 어떤 쌀도둑 / 남기춘 고모의 넋 / 김왈녕 / 심은준 / 박철수 / 김창필 / 최현철

 

어떤 임종

 

바람이 온다 나는 간다

 

몽골독수리 둘이

나를 본다

 

이내 내려앉으리라

 

내생 필요없다

 

사색풍경(四色風景)

 

차츰 근세 조선정치는 제 본색에 접어들어

동인

서인이라

그 지긋지긋한 임진 정유 전란중에도

동인

서인이라

 

그러다가 동인이 갈라져

남인

북인이라

 

서인이 갈라져

노론이라

소론이라

 

심지어 옷맵시도 갈라져

노론의 저고리 옷섶은

둥글둥글 접혔고

소론의 저고리는

모가 났더니라

어디 바깥뿐인가

 

노론의 집안 아녀자 치마는

굵은 주름

소론의 치마는

여러 주름이더니라

 

아니 노론 풍류는

천하절경을 바라볼 때도

으음

소론 풍류는

허허

 

이것이 근대 독립운동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썩은 동앗줄로 이어지는

기나긴 당질(党疾) 아니던가

 

오늘밤 나 또한 나의 노론이고 나의 소론 아닌가

 

유대평 씨

 

밥 한 숟갈에 쌀알 3백개

밥 열 숟갈에 쌀알 3천개라

 

한끼 스무 숟갈이면

밥알 천개라

 

그러니 하루 세 끼면 밥알 1만 8천개 아닌가

 

내 입이 너무 크다

내 밥통이 너무 크다

 

긴 장마철

문 처닫고 70일 금식으로 숨진 도사 유대평 씨

 

비 그쳤다

 

구두닦이

 

열다섯살에 세상에 나갔다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는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홀어머니 어디로 시집갔다

삼촌집에 있다가 나왔다

차라리 세상의 찬 바람이 좋았다

빈 몸 하나

 

처음 1년은

구두닦이 아저씨 밑에서

단골손님 구두를 벗겨왔다

그 다음

구두닦이 견습

 

구두닦이 4년째

이제 시장 입구 곰살궂게 자리잡았다

 

190년 3월 15일 시위대열에 끼여들었다

함께 달려가다

가슴팍이 뜨끔 그리고 쓰러졌다 숨졌다

 

신마산 구두닦이 23명이 돈을 내어

죽은 동료를 장사지냈다

 

오성원 여기 잠들다

 

백암의 꿈

 

상하이 임정 대통령

백암 박은식 각하께서는

어느날 밤

빗소리 들으시다 잠든 밤

금나라 태조를 꿈속에서 뵙고

큰절을 올리셨다우

 

이런 순 오랑캐 짓거리라니

 

그러나 금나라는 여진

여진은 발해

발해족은 마한족 이주자

 

엄연함이여

 

두루 드넓은 만주 연해주 일대가

서로 어우러진

내 더운 핏줄 갈래갈래들이라우

 

꿈 깨어나서

큰절 올려도 무방하다우

오직 그것뿐 오직 영세일계(永世一系)의 왕검 자손 어디 계시나

 

신호덕이

 

이른 봄 배고픈데 똥거름 냄새 푸짐하구나

보리밭머리

뚝새 냉이 벌금자리 캐는 호덕이

 

하늘 속 종달새가 도리어 귀기울여 내려다보는지 몰라

호덕이 저 혼자 노래하고

노래 듣누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유정천리

 

1960년 2월 15일

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죽었다

야당 후보의 죽음 두번째였다

 

대폿집이 만원이었다

고교생의 빵집도 만원이었다

 

대구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

 

그 세 녀석이 유행가 「유정천리(有情千里)」 곡에

조사(弔辭)를 지어 붙여

개사곡을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만리 타국땅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다

 

교내에 퍼져갔다

시내에 퍼져갔다

전국으로 퍼져갔다

 

세 녀석 무기정학

내무부장관 최인규

책상바닥 내려치며 가로되

천인공노할 놈들 왜 그놈들 정학처분으로 끝내는가 당장 퇴학시켜라

 

그의 일생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삼촌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

 

세월이 가혹했습니다 까마귀떼가 활발했습니다

 

나는 억지춘향 빨갱이가 되었습니다 맞아죽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비탈 덤불

그가 고요히 묻혀 있다

 

영영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다

 

이 충혜왕

 

허허 이 왕 좀 보소

고려 제28대 충혜왕

 

정작 왕권은

원나라 천자께서 가져갔으니

황음(荒淫) 삼매에 드셨던가

 

왕에게는

거기에 안성맞춤인

어의(御醫) 유광렬이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동녀(童女) 100명에게 은총을 베푸시오면

마마께서 100년을 계시옵니다

 

이 말 뒤

여진 산삼

향산 녹용

사산(四山) 흰 뱀을 강정보약을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밤마다 전국 동녀 100명을 불러들여

성은망극의 은총을 베푸셨것다

 

그 100명 뒤 코피 두 사발 쏟으셨것다

허허 아예 서기를 작파하시고

앉기를 작파하시고

누워버리셨것다

 

며칠 누워 계시다가 그만 승하하셨것다

 

왕이라 함이

나라는 지키는 것

나라를 키우는 것

나라 안의 굶주림을 줄이는 것

나라 안팎의 문물을 떨치는 것

이런 왕업 저쪽에서

나라의 청색 짓밟고 쭉 뻗어버리는 것인고

 

평생 침대

 

이유순

 

4월혁명 한 가녘에 나섰던 처녀 예쁘고 곧은 처녀

 

서울 을지로2가에서

경찰 곤봉 맞고

경찰 총탄 맞았다

그녀의 허리

그녀의 좌측 좌골이 거덜났다

 

일어날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

누워서

밥 먹고

누워서 오줌 눈다 똥 싼다

 

그 침묵의 얼굴이

이따금 웃음을 보였다

 

평생 누워 있다

나무들은 평생 서 있고

나는 평생 누워 있다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그뒤로

그런 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수천개의 하루가 오고 또 왔다

혁명도 곧 거덜나 검은 안경 육군소장 쿠데타의 시대가 왔다

누워서

바람에 휘날린 적 없는 머리칼 오똑한 코 말없는 입술 감은 눈 빈 이마

빈 가슴

고요하고 고요하다

 

임화수들

 

4월 18일 저녁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아갔다 자랑스럽다

고대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 자랑스럽다

다음날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혁명의 전야를 장식했다

 

돌아가는 길

동대문 부근

종로5가

천일백화점 앞

 

쇠갈고리

곡괭이

쇠사슬 들을 휘둘렀다

때려눕혔다

자랑스럽던 고대생들 하나둘 널브러졌다

피가 튀었다

임화수는 임화수들

그 깡패들의 학살이 시작됐다

 

이 학살에 격분

다음날

모든 대학생과

고교생

중학생 들이 뛰쳐나왔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야 했다 혁명이 왔다

 

4월 18일의 학살로 4월 19일의 환희가 왔다

 

야산 이달

 

『주역』 통달

야산 이달 선생

괘 뽑아

대구 미두장에서

소 한 마릿값 10원일 때

허어 3천만원을 대번에 벌었다

1924년 봄

 

다음날

열두살 장남 건화가

용돈 좀 달라 했다

 

따귀를 쳤다

 

이놈아

이 돈이 내 돈인 줄 아느냐

이 돈은 조선 백성의 돈이다

 

차남도

삼남도 어림없었다

 

그 거액을 만주로 보냈다

자금책 임주동

연락책 이상춘 들이

잘도 전달

 

임주동은 대종교 나철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람이었다

 

1929년애도 이달 선생

만주로 독립운동자금 보냈다

광산 개발

광산 15개 지구

그리고 철원에 70가구 공동촌을 만들었다

 

『주역 철리에도 으뜸

명리에도 으뜸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의 정처 없다

늘 바람 속이었다

늘 구름 속이었다

 

조선의 밤하늘 총총한 별빛 속이었다

1889년 태어나

198년 죽었다


그녀의 밤


남편은 혁명진압의 경찰기동대장

벌써 엿새째 집에 오지 않았다

장바구니 들고

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


실내

어둠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블루스가 좋았다


제비사내 따라나섰다

바깥세상

어둠이 좋았다 사내 뒤가 좋았다


동일여관 구석방

한 여자의 육체가 살아난다

죽어도 좋다고

넋 놓으며

1960년 4월 어느 봄밤

한 여자가 뜨겁게 살아난다


한 여자의 음란한 혁명이었다


그 할아범


이승만의 독재가

혁명에 졌다

그의 쓰디쓴 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85세였다


그 이승만과 동갑인 할아범


전남 장흥군

남녘 유채꽃 눈부신 득량만 개펄마을

옛날 농민혁명군 남은 병력

마지막

마지막 진지였던 울지리


그곳에서

굶주린 농민혁명군에게

밥을 해준 어머니의

살아남은 막내아들

관군에게

부모와 형들 다 도륙당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막내아들 오달복


그 할아범이 동갑내기 대통령의 신세를 한탄했다

곰방대 꺼진 담뱃불 다시 붙여 빨았다

가슴속 울적


허어

하야가 아니라 주어야 허는디

팍 죽어번져야 진짜배기 하야가 되는디

나도 그만 살고

어서 죽어버려야 쓰겄는디

끝을 왜 이리 질질 끌어


박마리아


부족을 못 견딘 여인

민족을 못 견딘 여인

이승만의 마누라 프란체스카가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 모든 근원은 무능하구나


승마 출근


1949년 대한민국 정부 기틀이 제법 잡혀갔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대한민국 중앙청

농림부는 서울역 부근

내무부는 명동 입구

체신부는 정동 입구

차도 제자리 포도 제자리

각각 기틀이 잡혀갔다


국무총리는 중앙청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럭저럭

정부 기틀이 잡혀갔다

베니어판 책상도 의자도 새로 맞췄다

국장 과장 명패도 맞춰다놓았다

공무원증도 발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총독부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정남도 오정군 오정면사무소 호적계

만년 서기 한판남은

호적등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호적초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낮 2시면

벌써 막걸리 곤드레로

천하태평 코를 골았다


그러나 중앙청은 쉬쉬쉬 금주령이 두려웠다


아침 8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그가 만주벌판 독립군 그대로

자동차를 타지 않고

군마를 타고

독립군 영의정이라고

허리 꼿꼿 뽐내며 출근했다

그의 비서관 이개동도

어디서 구한

노새 한 마리 타고 충직하게 뒤따랐다

그런데 그 이개동이

남로당 지하당 첩자일 줄이야

 

 

 

 

posted by 황영찬
2015. 5. 30. 13:42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5 수덕사

 

글 / 고영섭, 윤희상, 유마리●사진 / 박보하

2000, 대원사

 

 

시흥시립도서관

SA0026643

 

082

빛12ㄷ  240

 

빛깔있는 책들  240

 

고영섭(연혁)-------------------------------------------------------------------

시인, 경북 상주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 ·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불교학 전공). 현재 한국불학연구소 연구실장으로 동국대 · 한림대 · 강원대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석굴암 관세음을 기리는 노래』, 『원효, 한국 사상의 새벽』, 『몸이라는 화두』, 『새천년에 부르는 석굴암 관세음』 등이 있다.

 

윤희상(건축)-------------------------------------------------------------------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 ·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한국건축사 전공).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였고, 목원대 · 남서울대 · 경원대 · 홍익대에서 한국건축사를 강의하였다. 현재 신흥대학 건축설계학과 조교수이며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위원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9세기 목조 건축의 기법 연구」, 「한국 중세 목조 건축기법에 관한 연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미술 문화의 이해』(공저)가 있다.

 

유마래(유물)-------------------------------------------------------------------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과 파리 4(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동양미술사 전공, 문학박사). 파리 기메국립동양박물관에 파견되어 근무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학예연구관으로 재직중이다. 동국대 · 한성대 · 한남대 · 덕성여대 강사를 지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일본에 있는 한국 불화 조사-쿄토 ·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서울 · 경기 지역 괘불 탱화의 고찰」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조의 탱화』, 『조선조 아미타불화의 연구』,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연구』 등 다수가 있다.

 

박보하(사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1993년 월간 『사진예술』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사진가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Korean Culture』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예술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국의 전통 문화를 주제로 한 사진들을 주로 촬영하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산사의 미를 찾아서』가 있다.

 

|차례|

 

선의 으뜸 사찰, 수덕사

연혁

건축

유물

수덕사 가는 길

참고 문헌

 

선(禪)이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는 방법이다. 조용히 앉아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 않고, 옳고 그름에 관계하지 않고, 있고 없음에 간섭하지 않아서 마음을 안락 자재한 경계에 거닐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건강한 이치를 사유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흩어지거나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 곧 선이다.

선은 붓다의 마음이요, 교는 붓다의 말씀이다. 붓다의 마음인 선은

 

자신의 마음을 가리켜 直指人心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며 見性成佛

문자를 세우지 않고 不立文字

문자 밖의 소식을 따로 전하는 敎外別傳

 

것을 지침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 임을 일깨우는 수행법이다.

덕숭산 전경  명산과 고찰이 조화를 이루고 구릉과 들판이 어우러진 덕산. 그래서 사람들은 예부터 이곳을 호서의 소금강이라 일컬어 왔다.

서산 마애불  이 시대 불상들에는 온화한 미소와 넉넉한 기품이 담겨 있는데 수덕사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음바위와 관세음보살상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기원하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경허선사 영정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였다. 사진 : 유남해.

무이당 편액  경허선사의 친필로 '오직 하나뿐인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는 수행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만공선사의 시가 새겨진 거문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 공이 만공선사에게 선사한 것이다.

일주문 편액  동방제일선원 수덕사의 격을 나타내고 있다. 글씨는 소전 손재영이 썼다.

일주문  이와 같은 관문들은 주불전에 이르는 길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욕심,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정화시키는 상징이 된다.

사천왕상  수미산 중턱에 머물며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상이다.

황하정루  경내에서 행하는 제반 의식의 집전 장소로,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지옥 중생의 천도와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범종각  범종을 보관한 곳으로 1973년에 건축되었다.

법고각  사물 가운데 목어 · 운판 · 법고가 봉안되어 있다.

청련당과 백련당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보면 청련당(위)은 좌청룡에, 백련당(아래)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수덕사 대웅전  고려 후기 사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약 200여 년을 단위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대웅전 평면도.

대웅전 초석(위)과 기단석(아래)  초석은 대부분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으나 대웅전 정면 열의 초석들은 주좌를 돋음하여 사용하였고, 기단석은 장대석을 곱게 다듬어 깐 다듬돌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대웅전 기둥과 창호  전통 목조 건축의 대표적 의장 기법인 배흘림 · 귀솟음 · 안쏠림 기법이 기둥에 사용되었으며, 창틀은 전체로 연귀맞춤하여 한 틀로 짜 맞추는 고식 구성을 보인다.

대웅전 측면 가구 및 공포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적절하게 전달해 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며, 역학적 원리에 의해 중점되는 부재들의 의장적 효과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대웅전 처마  처마는 벽체나 창호가 빗물이나 직사광선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것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대웅전 종단면도.

대웅전 측면  기하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은 한국 전통 목조 건축의 가구미를 가장 잘 나타낸다.


고려시대 건축의 구조 형식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대웅전 내부  실내에는 반자를 꾸미지 않고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꾸며 개방감을 돋우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 종단면도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선 이 건물은 통일신라시대 건축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종단면도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의 과도기적 특징을 잘 간직하면서 건물의 외관적 아름다움에 충실한 고려시대 대표적 건축물이다.

수덕사 대웅전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건축 형식의 맥을 이어 주며 고려시대의 건축을 정립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능인선원 편액

정혜사 관음전

정혜사 남매탑

정혜사 산신각

소림초당  1920년대 만공선사가 지은 암자로 볏집 이엉을 얹은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진여문  만공선사의 조실체였던 금선대 입구 암자로 통하는 문이다.

전월사 편액  만공선사가 말년을 보낸 전월사는 '허공의 둥근 달을 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월사 내 만공선사 좌선대

견성암 전경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1965년 벽초스님이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이전 · 건립하였다.

견성암 편액  만공선사 친필.

환희대 내 원통보전  환희대의 주법당으로 개화기 여류시인이었던 하엽스님의 열반처이다.

환희대 내 극락암  현재 비구니들이 기거하며 수도정진하고 있다.

석조관음보살입상

수덕사 노사나불 괘불탱  1673년(현종 14) 작. 세로 10.59미터, 가로 7.27미터, 삼베 바탕에 채색, 보물 제1263호.

대웅전 삼세불과 후불탱화 1908년 금호당, 약효, 목우 등의 금어 비구가 그렸다.

주악비천도(벽화 모사도)  장구를 치거나 피리를 불며 날고 있는 모습으로 우아하며 경쾌하여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근역성보관(수덕사박물관) 내부

대웅전 본존불  대웅전 중앙벽 앞에 봉안되어 있으며 1938년 만공선사가 남원 귀정사에서 옮겨 왔다고 전한다.

석조관음보살입상  1924년 만공선사가 발원하여 조성하였다. 높이 8미터.

수덕사 범종  높이 2.7미터, 둘레 4.5미터의 청동제 대종으로 전통 범종 주조 기법을 따라 조성하였다.

법고  축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느끼게 하며 수행정진을 독려하는 법구이다.

사물 가운데 목어(위)와 운판(아래)

3층석탑  고려시대 석탑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였다. 높이 4미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7층석탑  충청남도 지정문화재자료 181호로, 1930년 만공선사가 건립하였다.

만공탑  1947년 만공선사의 제자인 박중은선사에 의해 만들어진 현대식 부도이다. 상부의 둥근 돌은 만공선사의 사리를, 세 개의 팔각기둥은 불교의 삼보를, 팔각기단은 팔정도를 나타낸다.

흥주사 아미타후불탱화  18661년 작, 근역성보관 소장.

근역성보관 소장 불상  수덕사의 말사인 일락사 철불좌상(위)과 영탑사 금동비로자나삼존불상(아래)

문수사 금동아미타불 복장 유물 일괄  지금까지 조사된 복장 가운데 이른 시기에 속하는 귀한 일괄품으로, 발원문(가운데), 청색화문포(아래), 단수포의, 단온진언, 연화판다라니부적, 목합, 불경 등을 포함하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5. 30. 11:3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4 萬人譜 20 사람과 사람들

 

高銀

2004,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8

 

811.6

고67만  20

 

창비전작시

 

시인 고은은 20여년 전부터 한국사에 드러나고 숨겨진, 스러지고 태어나는, 추앙받고 경멸당하는, 아름답고 추악한, 떳떳하고 비굴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붓 대신 언어로, 그림 대신 시로, 거대한 민족사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지을 수 있고 짓지 않을 수 없는 숱한 표정들이 늘어서 있고 그들의 천태만상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이 벅적거리고 있으며 절망과 한(恨), 운명과 열정, 기구함과 서러움의 삼라만상적 인간상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그것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보다 더 착잡하고 내가 멕시코씨티의 정부청사 안에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보다 더욱 거창한 서사를 담은 우리 한민족의 벽화를 이루고 있다.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은이 그린 사람들에게서 한을 듣고 그가 그린 세계에서 향기를 맡으며 그의 만인화(萬人畵)에서 세계와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 ■ 김병익  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후백제 을구 / 임화 / K-8 미 공군기지 밖 / 미제 진달호 영감 / 안동환 / 광주 부자 현준호 / 탱자 / 나그네 / 현재 / 김상돈 / 장인 강문석 / 일곱살 남옥이 / 노천명 / 남한산 / 부산 갑부 몇사람 / 배성섭 상사 / 김낙중 / 해후 / 토월회 / 연숙자 / 강노식 대원 / 송길자 / 지덕 / 남두만 / 황성 옛터 / 현인 / 이난영 / 시골다방 미스 김 / 시베리아 언년이 / 만경강 / 남인수 / 김정구 / 의병 제대 허인호 / 초롱꽃 / 아버지와 딸 / 진주풍경 / 북간도 한곳 / 월천꾼 / 횡계 아이들 / 안설녀 / 원치수 / 별주부전 / 평양사람 이종기 / 성진이 / 9월의 섬 / 염동진 / 블루스 / 할렐루야 / 법랑 선사 / 적상산 관음암 / 유점순 / 밤 서울역 / 그 아이 / 지하련 / 박백 중위 / 남대문 도깨비시장 고사리 / 장작장수 / 옹점 / 그 노래들 / 의사 윤성주 / 세번째 출옥 / 도라무깡 술집 / 태껸 이보성 / 노천 사진사 / 삼강 주막 / 정운삼 / 대구 르네상스 / 이중섭 / 빈집 / 비담 / 박용구 / 요지경 / 그림 속의 아이들 / 구상 / 탄피종 / 따불 명순이 / 두 사람 / 진태 할아버지 / 명동 나정구 / 그 주검 / 이학구 / 홍사준 / 국민학교 운동장 / 두 젊은이 / 강물 / 좀도둑 유강철이 / 손두섭 영감 / 한강 빙판 강태공 / 박헌영 / 울릉도 벼랑 밑 / 하느님 / 지창수 / 방호산 / 왕십리 할멈 / 기억들 / 귀향죄인 / 뻥튀 할아버지 / 권진규 / 연인 / 한산선사 / 5학년 구만서 군 / 이쾌대 / 실존주의자 정찬형 / 이정이 가족 / 김달봉 / 공창렬 / 방순경 아내 / 윤영준 / 전봉건 / 최승희 / 변상희 옹 / 임창호 씨 제삿날 / 한라산 / 박두진 / 엄비 / 엄항섭의 눈물 / 누가 씨부렁댄다 / 변수자 / 김중업 / 홍문봉의 집 / 계일지와 오병탁 / 9연대장 김익렬 / 유해진 지사 / 이재명의 무덤 / 이해명 부인 / 휴전 직후 / 사의 찬미 / 억척 설옥순 / 헛소리 세상에서 / 이청일 / 늙은 기생 / 어머니의 날 / 좌달육 / 강경 갈숲 / 밀양 이른봄 / 김악 / DDT / 이재긍 중좌 / 감봉룡 대장 / 행주산성 / 금은 / 김명국 / 명동 / 실성한 사람

 

해설 만인의 얼굴, 그 민족사적 벽화/김병익

 

황성 옛터

 

1932년 서울 단성사 무대에 이애리수가 섰다

처연한

투명한

가을 처녀의 목소리

「황성 옛터」가 퍼졌다

 

눈물 가슴에 차고

등뒤에서 비가 퍼부었다

 

한 노래를 세번 불러야 했다

청중은 울고불고

울부짖었다

 

고향 개성

망한 고려 만월대를 노래한 것

 

일본인 코가 마사오의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가

이 노래의 표절이라는 소문이 났다

 

「황성 옛터」를 학생에게 가르친

대구의 한 교사는 파면당했다

 

작곡자 전수린과 코가는

서울 소공동에서 어린 시절 소꿉동무였다

 

늘 이애리수의 뒤 형사가 따라다녔다

늘 전수린의 집 형사가 찾아왔다

노래 하나에도 자유는 불가능했다

 

현인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도

징용 피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천진에서

바다 건너

고국을 그리워했다

 

샹송과 깐쪼네를 불렀다

 

위엄 있다

매혹 있다

 

해방 뒤 멋쟁이로 돌아왔다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건달같이 「베사메무초」를 불렀다

 

전쟁이 일어났다

군가 1번

「전우야 잘 가거라」를 불렀다

피난가요 1번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렀다

 

휴전 뒤

자작 작사 작곡 「서울야곡」을 불렀다

자작 작곡 「추억의 꽃다발」을 불렀다

 

음절 파괴 대담했다

육중하고

기름진

바이브레이션

3음절이 7음절이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휘감았다

'고요한'은

'고호호요호하한'이 되었다 건달 황홀!

 

이난영

 

긴 목 가는 허리

 

남편 김해송이 북에 납치되었다

납치된 자의 가족조차

반공세상에 어긋났다

남편이 경영하던

KPK쇼단도 해체당했다

 

어린 다섯 남매의 엄마 이난영

 

딸들

숙자 애자 그리고 조카 민자로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미8군 무대 환호성을 차지했다

'김보이즈' 영조 상호 태성으로

미8군 무대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스터즈

보이즈 미국으로 갔다

 

엄마 이난영 가지 않았다

「목포의 눈물」은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임진왜란은 아직도 한으로 애끓이며 살아 있었다

 

남인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며 자라났습니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부르며 자라났습니다

'이 강산 낙화유수……'를 부르고

「서귀포 칠십리」를 부르며 자라났습니다

해방 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람도 하나'를 불렀습니다

아 「가거라 삼팔선」을 부르며 분단을 알았습니다

 

임시수도 부산을 떠나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부르며

휴전 뒤의 삶을 살았습니다

 

리라꽃도 피었습니다

쌍고동도 울었습니다

이 산유화도 피고 졌습니다

 

남인수

식민지 말기 일제 찬양의 노래도 불렀습니다

 

기생들 몰려들었습니다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본명 최문수

강씨 문중에 입적 강문수가 되었습니다

18세 이후

그는 반도의 목소리였습니다

해맑은 색깔

넓은 음역

그리고 간드러진 굽이굽이

그의 나비넥타이는 퍼덕여 곧장 나비로 날아올랐습니다

 

김정구

 

신문도 팔았다

달걀장수였다

달걀꾸러미 한 줄 떨어뜨려

길바닥 깨어진 달걀 보고 울기도 했다

 

원산 덕원목장

양치기 노릇도 했다

 

책방 점원으로 책을 꽂고 책을 팔았다

활동사진 음악사로

바이올린도 제법 연주했다

 

그런 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불렀다

세상이 그의 노래 따라불렀다

 

김정구의 무대

갈 수 없는 두만강

잊지 못할 두만강

그의 노래에서 언제까지나 흐르고 흘러갔다

 

 

 

 

posted by 황영찬
2015. 5. 29. 12:2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3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제레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2011, PHONO

 

 

시흥시군자도서관

SE039004

 

670.99

시897ㅊ

 

Tchaikovsky His Life and Music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표토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차이콥스키는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자곡가 중 한 명이다.

한 인간이자 음악가로서는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사라지지 않을 운명을 짊어진 듯하다.

그에 대해 주색이나 탐하는 감상주의나 '러시아의 정신나간 천재'라는

고정관념부터 떠올리는 편견이 만연해 있다. 실제의 그는 확고한 클래식 음악 전통에 맞는

훈련을 받았고 그 기법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극도로 예민한 성정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는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을 살았고 수난이라는 수난은 거의 다 겼었다.

이 점은 그가 쓴 음악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의 음악은

작곡가 본인과 동시대의 주변사람들의 말 만큼이나 몰입하게 되는

이 인물의 초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는 작곡가가 살던 문화적 ·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를 만나본다.

인류애, 분별력, 위트로 차고 넘치는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멀티미디어 전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1. 차이콥스키의 작품 세계를 직접 개괄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CD 두 장.

2. 닉소스 웹사이트의 '차이콥스키의 생애와 음악' 콘텐츠 자유이용권

(CD에 담지 못한 많은 음악과 보너스 자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제레미 시프먼 Jeremy Siepmann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가, 음악가, 교사, 방송인이며, <피아노> 잡지의 편집자이다. 수많은 잡지(<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 <뮤지컬 타임스Musical Times>, <그라모폰Gramophone>, <BBC 뮤직 매거진BBC Music Magazine> 등)와 참고 도서(『그로브 음악과 음악가 사전 신판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에 논문과 평론과 인터뷰 기사를 썼으며, 그 중 일부는 단행본으로 재출간되었다. 널리 호평을 받는 쇼팽 전기, 피아노의 역사와 연혁에 관한 단행본 두 권, 브람스와 모차르트, 베토벤의 전기가 있다.

www.jeremysiepmann.com

 

김형수 Kim Hyong Soo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 삼십대에 들어서서야 작곡가와 작품의 가치를 밝히고 널리 알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에 대한 평전과 연구서를 두루 번역하여 음악 서가를 넓히는 것이 1차 목표이고 궁극적으로는 공부를 거쳐 직접 책을 쓰는 것이 꿈이다.

 

CD1

1. 젬피라의 노래 2:17
Zemfira's Song
류바 카자놉스카야, 소프라노; 류바 오르페노바, 피아노
Ljuba Kazarnovskaya, soprano; Ljuba Orfenova, piano

2. 폭풍 Op.76 (마무리) 7:01
The Storm Op.76 (Conclusion)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3. 피아노 로만스 바단조 Op.5 6:12
Romance in F minor for piano, Op.5
옥사나 야블론스카야, 피아노
Oxana Yablonskaya, piano

4.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 20:26
Romeo and Juliet (fantasy overture)
우크라이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테오도르 쿠카르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Ukraine; Theodore Kuchar

5. 곧 잊어버리고 3:12
To Forget so Soon
류바 카자놉스카야, 소프라노; 류바 오르페노바, 피아노
Ljuba Kazarnovskaya, soprano; Ljuba Orfenova, piano

6. 현악사중주 1번 라장조 Op. 11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6:36 (W)
String Quartet No. 1 in D major, Op. 11 Movement 2: Andante cantabile
뉴 하이든 쿼텟, 부다페스트
New Haydn Quartet, Budapest

7. 교향곡 2번 다단조 Op. 17 '소러시아' 피날레: 모데라토 아사이-알레그로 비보 10:32 (W)
Symphony No. 2 in C minor, Op. 17 'Little Russian' Finale: Moderato assai-Allegro vivo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아드리안 리퍼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drian Leaper

8. 눈 아가씨, Op. 12 15번: 브루실라의 노래 1:32 (W)
The Snow Maiden Op.12 No. 15: Brusila's Song
엘레나 오콜리시예바, 메조 소프라노; 아카디 므셴킨, 테너; 모스크바 카펠라; 모스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고르 골롭신
Elena Okolysheva, mezzo soprano; Arkady Mshenkin, tenor; Moscow Capella; Moscow Symphony Orchestra; Igor Golovchin

9. 피아노협주곡 1번 내림나 단조, Op. 23 피날레: 알레그로 콘 푸오코 7:10 (W)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minor, Op. 23 Finale: Allegro con fuoco
베른트 글렘저, 피아노;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Bernd Glemser, piano;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10. 교향곡 4번 바단조, Op. 36 (W)
3악장: 스케르초(피치카토 오스티나토): 알레그로-메노 모소-템포 I 5:55
Symphony No. 4 in F minor, Op. 36
Movement 3: Scherzo (Pizzicato ostinato): Allegro-Meno mosso-Tempo I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아드리안 리퍼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drian Leaper

11.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33 (마무리) 2:11 (W)
Variations on a Rococo Theme for cello and orchestra, Op.33 (Conclusion)
마리아 클리겔, 첼로; 아일랜드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게르하르트 마르크손
Maria Kliegel, cello;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Ireland; Gerhard Markson

12. 예브게니 오네긴, Op. 24 2막 2장: 렌스키의 아리아 ‘어디로, 아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6:17
Eugene Onegin, Op.24 Act II, Scene 2: Lensky's aria 'Where o where have you gone?'
블라디미르 그리시코, 테너; 우크라이나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블라디미르 시렌코
Vladimir Grishko, tenor; Ukraine State Radio Symphony Orchestra; Vladimir Sirenko
TT 79:29

CD2

1.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Op. 35 피날레: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10:46 (W)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Finale: Allegro Vivacissimo
일리야 칼러, 바이올린; 러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드미트리 야블론스키
Ilya Kaler, violin; Russian Philharmonic Orchestra; Dmitry Yablonsky

2.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전례가, Op. 41 11번: 에피클레시스 2:58 (W)
Liturgy of St John Chrysostom, Op. 41 No. 11: Epiclesis
빅토르 오프디, 테너; 파블로 메줄린, 베이스; 키예프 체임버 합창단; 미콜라 호브디치
Viktor Ovdiy, tenor; Pavlo Mezhulin, bass; Kiev Chamber Choir; Mykola Hobdych

3.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Op. 45 (마무리) 4:06
Capriccio italien, Op. 45 (Conclusion)
우크라이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테오도르 쿠카르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Ukraine; Theodore Kuchar

4. 1812년 (축전 서곡), Op. 49 (마무리) 6:34
1812 (festival overture), Op. 49 (Conclusion)
우크라이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테오도르 쿠카르
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Ukraine; Theodore Kuchar

5. 현을 위한 세레나데 다 장조, Op. 48 2악장: 발스 3:57 (W)
Serenade in C major for strings, Op. 48 Movement 2: Valse
빈 체임버 오케스트라; 필립 앙트르몽
Vienna Chamber Orchestra; Philippe Entremont

6. 피아노 삼중주 라단조, Op. 50 2악장: 테마 콘 바리아치오니(발췌) 6:54 (W)
Piano Trio in A minor, Op. 50 Movement 2: Tema con variazioni (Excerpts)
보프카 아쉬케나지, 피아노; 리처드 스탬퍼, 바이올린; 크리스틴 잭슨, 첼로
Vovka Ashkenazy, piano; Richard Stamper, violin; Christine Jackson, cello

7. 만프레드, Op. 58 2악장: 비바체 콘 스피리토 9:44 (W)
Manfred, Op. 58 Movement 2: Vivace con spirito
슬로바키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온드레이 레너드
Slovak Radio Symphony Orchestra; Onderj Lenard

8. 교향곡 5번 마단조, Op. 64 13:40 (W)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알쿠나 리센차
Symphony No. 5 in E minor, Op. 64
Movement 2: Andante cantabile, con alcuna licenza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9. 잠자는 숲속의 미녀, Op. 66 1막 제7번: 발스 4:45 (W)
The Sleeping Beauty, Op. 66 Act I, no. 7: Valse
슬로바키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치셰); 앤드류 모그렐리아
Slovak State Philharmonic Orchestra (Ko?ice); Andrew Mogrelia

10. 스페이드의 여왕, Op. 68 1막 3장: 헤르만의 아리아 ‘천상의 피조물이여, 저를 용서하소서’ 2:48
The Queen of Spades, Op. 68
Act I, Scene 3: Hermann's aria 'forgive me, heavenly creature'
블라디미르 그리시코, 테너; 우크라이나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블라디미르 시렌코
Vladimir Grishko, tenor; Ukraine State Radio Symphony Orchestra; Vladimir Sirenko

11. 호두까기 인형, Op. 71 2막 제14번 변주2번: ‘자두인형의 춤’ 2:16 (W)
The Nutcracker, Op. 71 Act II, No. 14, Variation 2: 'The Dance of the Sugar-Plum Fairy'
슬로바키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온드레이 레너드
Slovak Radio Symphony Orchestra; Onderj Lenard

12. 교향곡 6번 나 단조, Op. 74 '비창‘ 피날레: 아다지오 라멘토소-안단테 10:51 (W)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Pathetique'
Finale: Adagio lamentoso-Andante
폴란드 내셔널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토니 비트
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Antoni Wit
TT 79:25
부록에 상세한 곡 해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W표시가 있는 작품은 웹사이트에서 전체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Contents

차례

 

서문

 

제1장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18401864

간주곡1 피아노 음악

 

제2장 다가오는 그의 시대 18655-1876

간주곡2 차이콥스키와 극음악

 

제3장 명성과 위기 1876-1877

간주곡3 관현악

 

제4장 성, 고통, 승화, 상실 1878-1884

간주곡4 실내악

 

제5장 새집에서 찾은 안정과 행복 1885-1888

간주곡5 가곡

 

제6장 국내와 해외에서 귀빈으로 살다 1888-1891

간주곡6 차이콥스키와 러시아적인 것

 

제7장 질병, 죽음, 신화 1891-1893

에필로그_ 차이콥스키와 후세

 

부록

19세기의 배경

러시아의 문화적 배경

책에 나오는 인물들

용어집

CD 수록곡 해설

연표

역자 후기

참고문헌

 

www.naxos.com/naxosbooks/tchaikovskylifeandmusic

웹사이트의 차이콥스키 전영공간 주소입니다.

처음 방문 시 로그인 창 아래의 here를 클릭해 메일을 등록하시면

로그인 후 아래의 내용을 자유로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등록 창에서 ISBN_ 97818437921195, 암호_ Nutcracker)

 

CD에 수록된 전곡

차이콥스키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

동시대의 문화예술, 정치 관련 사건과 나란히 보는 차이콥스키의 생애 연표

 

Chapter 1

Childhood, Boyhood, Youth 1840-1864

제1장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1840-1864

 

_

Interlude 1

Tchaikovsky at the Piano

간주곡 1

피아노 음악

 

그는 엄청나게 예민한 아이였다. 아주 사소한 일로도 당황하거나 기분이 상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도 그 아이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체벌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차이콥스키의 아버지. 일랴 페트로비치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 차이콥스카야(결혼전 성은 아시에르)

보트킨스크 생가. 차이콥스키는 여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859년 당시 차이콥스키의 모습. 이해에 그는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의 모습. 1863년

클린 시에 있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방. 그는 1885년부터 계속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다.


Chapter 2

Coming of Age 1865-1876

제2장

다가오는 그의 시대 1865-1876


_

Interlude 2

Tchaikovsky in the Theatre

간주곡 2

차이콥스키와 극음악


그의 인기는 매일, 아니 매 시간 높아졌다. 그의 모임에 끼어든 이들은 모두 단번에 그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데지레 아르토 Desiree Artott. 벨기에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가수로 차이콥스키는 그녀와 급히 약혼했다.

밀리 알렉세예비치 빌라키레프 Mily Alexeyevich Balakirev('강력한 소수'의 실질적인 지도자). 강력한 그의 설득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관현악 작품을 자신이 쓴 최초의 걸작으로 남기게 된다.

한스 폰 뵐로 Hans von Bülow. 그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을 맡았다.


Chapter 3

Celebrity and Crisis 1876-1877

제3장

명성과 위기 1876-1877


_

Interlude 3

Tchaikovsky and the Ochestra

간주곡 3

관현악


"숙취가 심한 채로 일어나 내 앞에 있는 아내를 보면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야. 그리고 절망에 빠져 들지."

나데즈다 폰 메크. 그녀는 다년간 차이콥스키를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내 안토니나와 함께 있는 사진. 1877년.

아돌프 브로츠키. 그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했다.


Chapter 4

Sex, Suffering, Sublimation and Loss 1878-1884

제4장

성, 고통, 승화, 상실 1878-1884


-

Interlude 4

The Chamber Music

간주곡 4

실내악


<예브게니 오네긴>은 결코 타인을 위해 구상한 오페라가 아니다. 적어도 타인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이 오페라는 자기 자신을 위해 써야만 했던 작품이며 그도 작고 도중 이 곡이 설사 주요 레퍼토리에 못 들어간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단언했었다.

차이콥스키의 모습. 1879년


Chapter 5

House, Home and Happiness 1885-1888

제5장

새집에서 찾은 안정과 행복 1885-1888


_

Interlude 5

Tchaikovsky in Song

간주곡 5

가곡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오랫동안 앉아서 놀랍도록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봄날 밤이 내는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는 거야."

프롤로프스케예 자택의 정원에서 쉬고 있는 차이콥스키.


Chapter 6

The New Statesman : At Home and Abroad 1888-1891

제6장

국내와 해외에서 귀빈으로 살다 1888-1891


_

Interlude 6

Tchaikovsky and Russianness

간주곡 6

차이콥스키와 러시아적인 것


"방문객들이 나를 포위했다. 기자들, 작곡가들, 오페라 대본 작가들, 무엇보다도 미국 전역에서 친필 서명을 해달라며 보낸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차이콥스키 형제들. 1890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아나톨리, 니콜라이, 이폴리트, 표트르, 모데스트

차이콥스키와 함께 있는 니콜라이 피그너와 메데아 피그너. 피그너 부부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헤르만과 리자 역으로 분했다. 1890년.


Chapter 7

Morbidity, Mortality and Myth 1891-1893


_

제7장

질병, 죽음, 신화 1891-1893


그의 삶은 끝났다. 하지만 그 음악의 생명력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와 조카 블라디미르 레보비치 '밥' 다비도프. 1892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차이콥스키. 1893년.

임종을 맞은 차이콥스키. 1893년.

루빈슈타인 형제들. 니콜라이(왼쪽), 안톤(오른쪽).



 

 

 

 

posted by 황영찬
2015. 5. 19. 10:2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2 로댕 - 신의 손을 지닌 인간


엘렌 피네 지음 /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6


082

시156ㅅ  31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31


현대의 미켈란젤로, 조각의 거장이란

화려한 말이 뒤따랐던 천재 조각가 로댕.

그가차가운 조각들 속에 인간의 고뇌와 열정, 애증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로댕 자신이 너무도

열정적이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복잡하고도 열렬한 연애조차 뛰어난 천재성의

상징으로 용납될 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았던 로댕은,

20세기 현대 조각의 창조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별의 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이 남자들이

어떻게 여행을 시작했는가를 생생히 표현했으며,

각자의 가슴이 삶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을 짊어진 채 이제 유서 깊은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릴 각오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여섯 사내는 비슷한 두 형제를

제외하고는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결정을

내렸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것은 생에 매달리려 하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영혼의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세월의 무게게 지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겨 놓는

노인을 만들어 냈다. ……

그는 열쇠를 든 사내를

깎아 냈다. 사내 안에는

아직 살아야 할 숱한 세월이

남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 마지막

순간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 그는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독을 맛보려는 듯이, 숙인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남자를 창조해

냈다. 그는 두 형제를 다듬어 냈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또 한

사람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아니면 다

체념하고 사형집행인에게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막 생명이

빠져 나가는'

남자(귀스타브

주프루아)의 수수께끼

같은 몸짓을 만들어 냈다.

발걸음을 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린다.

도시가

아니라.

눈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료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이 손짓은 모든 불확실성, 아직

도래하지 않은 행복, 이제부터

헛되이 기다려야 할 슬픔, 어디에

살고 있을지 모르나 그가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들, 미래와

그 이후의 모든 가능성. 늘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종착점에서

고요히

찾아오리라 믿었던

죽음 이후의 모든

가능성을 놓아 버리고

있다."


차례


제1장 타고난 예술가

제2장 배고픈 시절

제3장 걸작, 또 걸작

제4장 새로운 인간

제5장 명성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로댕 Rodin, les mains du genie


엘렌 피네 Helene Pinet

1976년부터 로댕 박물관 사진부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엘렌 피네는, <로댕의 사진들>을 비롯해 <로댕> <조각가> <그 시대의 사진들>과 같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옮긴이 : 이희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번 <마티스>와 30번 <고갱>이 있으며, 그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타고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능히 겨룰 수 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가 환상으로 충만한 별세계에 살고 있던 그 무렵에 말이야. 그때 우리는 구름 사이로 빠끔 공간이 열리면서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무리를 볼 수 있었어. 너는 그때 잠시 숨을 멈추고는, 저 암흑을 꿰뚫고 스무 살 청년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고 말했지."

조각가 레옹 푸르케

젊은 로댕(1862경, 아래), 위는 프랑수아 비아르가 그린 <4시의 살롱>.

에콜 데 보자르는 새로운 조류에 적대적이었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여러 단계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일단 입학을 한 뒤에도 학생들은 학기마다 재입학을 허락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으며, 시험결과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6개월마다 치르는 시험에 무난히 합격한 학생들도 시험성적에 따라 데생 시간에 앉는 자리가 달라졌다.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은 한 학기 내내 모델의 등만 보고 데생을 해야 했고, 시험에서 메달을 딴 사람만이 영구 지정석에 앉을 수 있었다. 위는 앙리 제르베가 그린 <그림 심사위원들>이다.

이 자화상은 로댕이 가게 창문을 깨뜨리면서 넘어진 1859년 이전에 그려졌음에 틀림없다. 이 사고로 남은 커다란 흉터를 로댕은 수염을 길러 감추었다, 로댕의 전기작가인 쥐디트 클라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수줍어하는 젊은이의 이목구비에서 무의식적인 자기확신이 얼마나 강하게 풍겨 나오고 있는가!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어린아이에 가까운 얼굴, 곧은 콧날, 가슴속에 묻어 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드러내는 듯 반듯하게 다문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물선을 그리며 한곳으로 모인 그의 눈썹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을 보여 주고 있다.

위와 비슷한 확고함은 로댕이 1959년에 제작한 아버지의 흉상에도 나타난다. 흉상에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연상시키는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로댕과 마리아(이 사진은 1859년경에 촬여한 것이다)는 무척 사이가 좋앗다. 그녀는 로댕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누구보다 로댕의 예술가적 자질을 확신했기 때문에 부모님 앞에서는 동생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엇다. 신앙심이 깊었던 누이는 자식으로서의 책무와 종교적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성령회를 창시한 에마르 신부는 신출내기 수사가 수도원 뜨락의 광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로댕 앞에서 모델로 섰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마르 신부도 흉상에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이마 위로 말려 올라간 머리 터럭이 꼭 악마의 뿔 같다고 불평했다. 로댕이 흉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제2장

배고픈 시절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청동을 마무리했고 대리석과 돌을 다듬었으며 은(銀)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깎았다. 역작을 만드는 데 쏟아 부었어야 할 노력을 그렇게 엉뚱한 곳에다 분산시켜 허비한 시간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1864년의 로댕.

 

알베르 에르네 카리에 벨뢰즈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거인족의 항아리>는 사실 로댕의 작품이다.

"나의 모델은 도시 여자의 우아함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농부의 딸다운 활기 넘치는 육체와 단단한 살집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활발하고 솔직하며 강인한, 왠지 남성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여체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왕 말이 난 김에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그녀는 언제라도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평생 그렇게 살았다." 로댕은 평생의 반려이며 모델인 로즈 뵈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꽃모자를 쓴 젊은 여인>(위)과 <미뇽>(아래)의 주인공으로 오인받아 왔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로댕은 카탈로그에 자신을 '바리예와 카리에 벨뢰즈의 제자'로 소개했다. 카리에 벨뢰즈는 싸구려 골동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로 무시당했지만 실은 재능 있는 도안가이며 조형가였다. 그는 대형 조각물의 값싼 아연 소형 복제품부터 정교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기술혁신을 감행했다.

때때로 로댕은 한 장의 종이 위에 고대 조각을 본딴 데생, 중세 미술이나 미켈란젤로를 모사한 습작을 뒤죽박죽으로 그려 넣었다. 그의 작품에 깃들인 창조력의 열쇠를 여기서 일부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지들의 관계가 항상 뚜렷한 것은 아니다.

<청동의 시대>를 위해 포즈를 잡은 오귀스트 네트(위). 문제의 석고상(가운데). 훗날 프랑스 정부가 구입한 청동상(아래).

 

"(코가 주저앉은 남자.가 얼굴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면, <청동의 시대>는 로댕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육체를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세례 요한>(위)과 <걸어가는 남자>(가운데와 아래).

 

"어느 닐 아침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 모델이 되겠다고 아브루치에서 나를 찾아온 농보였다. …… 나는 그이를 보는 순간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예언가 세례 요한을 떠오렸다. 사내는 옷을 벗은 다음 회전대 위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포즈를 잡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두 발로 굳게 버티면서 머리를 들고 상체를 곧게 폈다. 컴퍼스처럼 벌어진 두 다리가 몸무게를 똑같이 받쳐 주고 있었다. 그 솔직담백한 자세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걷는 사람의 모습이로군!' 나는 그이를 당장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오귀스트 로댕


제3장

걸작, 또 걸작


"한순간 관능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 주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 그는 관능을 찬양한다. 그는 삶의 고통, 죽음의 공포, 지옥 그 자체의 공포를 표현할 줄 알았다. <칼레의 시민>에서 그는 역사를 대변했고, <빅토르 위고>에서는 자연성의 요란한 분출을 표현했으며, <발자크>에서는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 주었다."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

뫼동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릴케는 이렇게 썼다. "수천 개의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창조주의 두 손에로 이끌리게 된다."

<지옥문>을 위한 최초의 구성. 문이 여덟 개의 패널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피렌체의 교회에서 본 로렌초 기베르티의 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댕은 건축적 구성논리보다는 형태적 연결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지옥문>을 위한 습작(점토 습작).

<지옥문>을 위한 데생.


"밀착된 부분이 늘어날수록 두 몸뚱이는 유기적으로 가까운 화합물처럼 불 같은 충동으로 서로에게 파고들었다. 그들이 엮어 낸 새로운 결합은 아주 긴밀하게 녹아들면서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릐 얼굴은 평범했다. 두툼한 코, 혈색이 안 좋은 눈꺼풀 밑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 길게 늘어뜨린 누런 구레나룻, 짧게 깎아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카락, 둥그스름한 머리, 그 머리는 그가 전잖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고집의 소유자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내가 상상하는 예수의 사도들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쥘과 에드몽 드 공쿠르 《일기》. 1878년 4월

<지옥문>의 석고상.


지옥문

"그는 자기 손보다 클까 말까 한 수백 점의 인물상에 인생의 모든 정념, 온갖 쾌락의 절정, 갖가지 악의 무거운 짐을 담아 냈다. 그는 온몸을 비벼대며 동물처럼 바짝 달라붙어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의 몸을 깨물면서 한 마리의 짐승처럼 뒤엉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육체들을 창조했다. 그 육체들은 얼굴처럼 귀를 기울이고, 무언가를 집어 던지려는 팔처럼, 육체의 사슬처럼, 화환과 덩굴손처럼 뻗어 나가고 있다. 고통의 뿌리로부터 악의 즙이 솟아오르는 인간들의 군상이 거기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옥문>의 왼쪽 상인방.

<세 망령>.

<추락하는 사람>.

<돌아온 탕아>.

<사랑의 도피>.

생각하는 사람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브>(첫번째)의 모델이던 이탈리아 여인이 임신중이어서 로댕은 작품을 끝없이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우골리노>(두번째). <아담>(세번째)과 <이브>의 거대한 형상은 <지옥문>을 장식했다. <한때는 투구 제작자의 아리따운 아내였던 여인>(네번째).

1887년의 로댕.

 

"뛰어난 흉상은 모델의 도덕적, 육체적 현실을 드러내고 내밀한 생각을 표현하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장점과 약점을 파고든다. 모든 가면이 벗겨진다. …… 예술가는 순전히 감수성에만 의존해 계몽가, 예언가가 된다."

오귀스트 로댕

빅토르 위고의 동상(위)과 에칭(아래)이다.

 

"모델 앞에서 나는 마치 초상화를 그릴 때와 같이, 진실을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여 작업한다. 나는 자연을 수정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모델 안에 집어 넣는다. 모델이 나를 이끈다. 나는 오직 모델을 통해서만 작업할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은 나를 강화시키고 나에게 자양분을 준다."

오귀스트 로댕

5년간 카미유 클로델과 한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로댕은 갖가지 문제에 조언을 주었으며 그녀를 모델로 쓰기도 했다.

<칼레의 시민>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손이 붙어 있는 카미유의 석고 흉상(위). <사색>(아래)에 대해 릴케는 "돌의 무거운 잠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삶을 바라보는 초월적인 시선"이라 평했다.

욕망과 순결이 함께하는 포옹

"남자는 고개를 숙였고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입은 두 존재의 내밀한 합일을 봉인하는 입맞춤 속에서 만난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 입맞춤은, 비범한 예술의 마법을 통해, 그 사색적인 표현에서뿐 아니라 목덜미에서 발바닥까지 두 사람의 온몸을 똑같이 관통하는 전율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뼈와 근육과 신경과 살이 구부러지고 펼쳐지고 부풀어오르면서 숭고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등을 이루는 모든 섬유질 속에서, 연인의 다리를 부비기 위해 움직이려는 듯 서서히 뒤틀리는 남자의 다리 속에서, 열정과 교태에 휩쓸려 자신의 존재 전부를 들어올리고 있는 바닥에 닿을락말락 한 여자의 발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귀스타브 주프루아

카미유의 재능을 파악한 로댕은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그녀에게 황금밭을 알려 주었지만 그녀가 발견한 황금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오로라>(위)는 카미유를 모델로 해 만들어졌다. 작업중인 카미유(아래).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잇다. 너그러움, 자부심, 참을성을 담은 표정으로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꽃밭에 파묻힌 듯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있지만 여자보다 훨씬 더 밑으로 돌을 파고들엇다. 그의 손은 쓸모 없는 공허한 물건처럼 뒤로 뻗어 있다. …… 이 작품 안에는 어딘지 연옥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천국은 가깝지만 아직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옥 또한 가까워 아직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영원한 우상>에 대해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의 '장 데르'.

14세기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1347년 칼레시를 포위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의 중요 인사 여섯 명이 모자와 신발을 신지 않고 목에 밧줄을 두른 채 칼레시와 성곽의 열쇠를 들고 시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시민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로댕이 제시한 최초의 소형 모형은 군상으로 제작되었다.

칼레의 시민

'피에르 당드리외'의 누드 점토모형을 다듬고 있는 로댕(위). 옷을 입힌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의 점토 모형(아래). 로댕은 자주 편지를 띄워 칼레시장에게 작업의 진척사항을 알렸다. "누드상, 다시말해서 의상 아래 부분은 모두 끝냈습니다. 비록 옷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걸 아마 나중에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4장

새로운 인간


"만일 진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면 후세인들은 나의 <발자크>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한 것이므로, 나는 나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리라 장담할 수 있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마음먹은 대로 부수기가 여의치 않으니까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발자크 상이 뫼동의 정원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발자크의 두 모습.

1914년 2월의 로댕.


"여러 해 동안 로댕은 이 인물에게 온통 빠져들었다. 그는 발자크의 고향을 방문해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투렌의 풍광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는 발자크의 편지를 읽었으며 발자크의 초상화를 연구했다. 그리고 발자크의 작품을 꾸준히 여러 번 반복해 읽어 나갔다. ……발자크의 정신에서 자극을 얻은 로댕은 차츰 작가의 외관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형태에서 형태가 나오듯이 로댕의 구상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자크를 보았다. 그는 힘차게 앞으로 내딛는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로서 육중한 몸집이 늘어진 외투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굵은 목덜미까지 내려왔으며 풍성한 머리털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열정으로 끓어오르는 얼굴. 자신의 구상에 매혹된 얼굴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근본적인 힘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힘으로 넘쳐흐르는 발자크, 시대를 창조하고 숱한 운명을 쏟아 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 그것은 강한 집중력과 비장감이 엄습한 순간에 로댕이 본 발자크의 모습이었다. 로댕은 그 모습을 충실하게 살려 나갔다. 로댕의 구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자크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자세로 서 있게 될 것이다. 두 발은 약간 벌린채 팔짱을 끼고 있다. 그는 허리띠가 달려 있지 않은,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가운을 입게 될 것이다."

발자크를 옹호하는 진영에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위), 화가 클로드 모네 같은 쟁쟁한 작가와 예술가가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모네는 로댕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실컷들 떠들라고 하십시오. 당신은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았으니까요." 논쟁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섰고 일반 대중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1898년 살롱전에 출품된 <발자크>(아래)는 비대한 괴물, 형체 없는 뚱뚱보, 거대한 태아(胎兒)라는 혹평을 받았다.

 

카미유 클로델(위)과 결별한 다음 로댕은 1896년부터 로즈 뵈레(가운데)와 뫼동의 빌라데브릴랑(아래)에서 살았다. 그는 철거되던 이시성(城)에서 구한 건물 정면을 이 집에 덧붙였고, 1900년 회고전을 가진 후에는 알마 전시관에 있던 별채를 옮겨 놓았다. 

언제나 남편을 '로댕 선생님'이라고 칭했던 로즈 뵈레는 로댕이 퍼부어대는 온갖 모욕과 바람기를 견뎌 냈다. 그러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을 다른 여인과 공유하기를 거부했고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으며 자신의 예술적 성공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재능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로댕은 카미유가 1888년경에 만든 자신의 흉상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아주 높은 받침대 위에서 뫼동의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칼레의 시민>. 로댕은 이렇게 높은 받침대를 원했다.

뮤즈와 함께 있는 작가의 모습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완성품은 1897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1906년, 로댕은 <비극의 뮤즈>와 <사색>을 여기서 분리해 두 형상을 별개 작품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제5장

명성

 

"나의 '조각'을 보여 주고 내가 이해하는 조각의 내용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예술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고 로댕은 말했다. <발자크>로 물의를 빚고 카미유 클로델과 갈라선 뒤 로댕의 관심사는 달라졌다. 그는 마침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작품세계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로댕은 남은 힘을 자신의 모든 조각과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는데 쏟아 부었다.

몇 안 되는 컬러 사진(위, 1907). <대성당>(아래).

 

"명성이 찾아들기 전 로댕은 외로웠다. 그리고 그가 일구어 낸 명성은 그를 전보다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명성이란, 새로운 이름의 주변부에 응축된 오해의 총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은 캄보디아의 전통무용(네번째는 마르세유에서 열린 식민지 박람회에 참석한 캄보디아 왕을 수행한 한 무희를 스케치하는 로댕)과 러시아 발레단의 율동미(첫번째와 두번째는 니진스키의 두 모습으로, 온몸이 잠재된 에너지를 분출해 내려는 듯 용수철마냥 표현되어 있다)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미술수집가 케이트 심슨(세번째)과 그에게 강한 인상을 준 일본 여배우 하나코(다섯번째)의 흉상(여섯번째)도 만들었다.

로댕과 <신의 손>.

"누드는 진정한 나의 종교이다"

1900년경부터 로댕은 여성의 누드 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이 도발적인 그림들-에로틱한 누드와 레스비언 커플을 포함해-은 모두 1,500점이 넘는다. 상징주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아서 사이먼스는 이렇게 썼다. " 이 놀라운 누드화에서 우리는 드가를 능가하는 단순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동물로서의 여성, 어떤 면에서는 백치로서의 여성이다. 일본인이라도 이처럼 빛나는 휘갈김을 통해 그림을 단순화시키지 못했다. …… 이것들은 조각가의 데생, 조각가의 노트이며, 따라서 조각가의 눈에 비친 형태를 화가보다 더욱 간명하고 더욱 담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것들은 화가의 데생과 다른 언어로 발언하며, 그 과정에서 선에서 빛을 포착하는 지점들, 윤곽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곡선을 찾아 나간다. 화가의 데생을 볼 때 우리는 색을 본다. 그러나 조각가의 압축된 이 노트에서 우리는 마치 대리석을 손끝에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 만큼 느끼는가?"

"작업에 임할 때 나는 사람의 육체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육체의 구석구석에 관한 깊은 '느낌'을 갖고 잇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나요?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육체가 그리는 선을 육화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 선들은 나의 본능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요. 나는 손끝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눈에서 나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보세요! 이 데생은 무엇입니까? 이 양감을 표현하면서 나는 모델로부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어요. 왜냐고요? 어느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델을 종이에 표현하는 기술문제가 모델에 대한 나의 감정, 눈으로 손으로 전달되는 느낌의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눈을 떨구는 순간 그 흐름은 멈추어 버립니다. 나의 데생이 나 자신을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지요. …… 나의 목표는, 내 눈이 본 것을 나의 손은 어느만큼 느끼는가를 검증하는 데 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

앤서니 루도비치의 《오귀스트 로댕의 개인적 추억》(1926)에서

 

릴케는 비롱관에서 로댕에게 받은 책상을 고맙게 여겼다. 그것은 "나의 원고를 마을처럼 펼쳐 놓을 수 있는 드넓고 비옥한 벌판이 될 것이다."

로댕은 이집트 청동상, 작은 조각, 페르시아 소품, 그리스-로마의 흉상과 토르소를 수집했다. 이것들은 헛간, 뜰, 작업실, 식탁까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뫼동의 이시성(城) 앞에 있는 로댕의 무덤을 <생각하는 사람>이 굽어보고 있다. 로댕은 로즈 뵈레 옆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로댕의 친구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5. 19. 09:50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51 萬人譜 19 사람과 사람들


高銀

2004,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7



811.6

고67만  19

 

창비전작시

 

시인 고은은 20여년 전부터 한국사에 드러나고 숨겨진, 스러지고 태어나는, 추앙받고 경멸당하는, 아름답고 추악한, 떳떳하고 비굴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붓 대신 언어로, 그림 대신 시로, 거대한 민족사적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지을 수 있고 짓지 않을 수 없는 숱한 표정들이 늘어서 있고 그들의 천태만상의 갖가지 삶의 모습들이 벅적거리고 있으며 절망과 한(恨), 운명과 열정, 기구함과 서러움의 삼라만상적 인간상들이 복작거리고 있다. 그것은 삐까쏘의 「게르니까」보다 더 착잡하고 내가 멕시코씨티의 정부청사 안에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보다 더욱 거창한 서사를 담은 우리 한민족의 벽화를 이루고 있다.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은이 그린 사람들에게서 한을 듣고 그가 그린 세계에서 향기를 맡으며 그의 만인화(萬人畵)에서 세계와 시대를 읽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

■ ■ ■ 김병익  문학평론가, 인하대 초빙교수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어느 부부 / 연안 차씨 / 유해진 경위 / 토지국민학교 마당 / 오라리 / 청계천 3가 / 권애라 / 남산 언저리 / 송호식 모자 / 사명 / 도깨비 길달 / 고무신 한짝 / 토말 쌍봉이 / 김성주 1 / 김성주 2 / 고려 팔관회 / 남강전투 / 김지웅 / 남은 동생 / 천동이 / 김진열 / 현종 이후 / 남일병 / 방공호 / 상복이 / 유철 / 주명철 대위 / 김개남 / 밤행군 / 오대산 / 이만종이 / 그 무명 철학자 / 양진봉 하사 / 유관순 / 정일권 / 강성병 / 최익한 / 공서방 / 생일 / 위장결혼식 / 전태욱 / 박관혁 / 아낙 / 유상국 / 이영근 / 가막골 / 육군대위 고명곤 / 버린 이름 / 김소운 / 기황후 / 어부 피용구의 저승 / 한 여학생의 생애 / 오늘의 밥상 / 제비꽃 / 부청하 / 모본왕 / 하종숙 / 박영덕 / 귀신 여인 / 임환섭 / 강경 / 한재덕 / 대야성 함락 / 영랑 용아 / 키무라 타께오 / 절 / 조옥자 / 김정길 / 배순호 경사 / 삼태기 스님 / 타찌하라 세이슈 / 이기붕 / 이영원 / 임지훈 / 김소희 / 그의 행적 / 김춘길 소위 / 연등회 / 박천노인 / 이희주 / 오장원 / 홍제동 화장장 / 첫눈 / 을동이 / 아기 / 이달수 / 앨리스 현 / 외아들 상권이 / 그 아기 / 백형복(白亨福) / 서상훈 씨 / 길선주 목사 / 김규동 / 임경술 / 어느 어머니 / 할망구집 / 완월동 / 대륙의 10일 / 이장돈 마누라 / 오충남 / 어느 제자 / '폐허' 동인 / 미친 사내 / 관악산 연주암 / 한탄강 / 그 중학생 / 꼬마 존 / 장덕운 / 팔당 노인 / 을지로 1가 / 그들 / 만명부인 / 편종수 / 추교명 / 통불 / 장현 / 박근상 / 만성이 / 모함 / 지처사 / 영덕포구 / 이삼봉이 마누라 / 어린 안인석 / 민상기 / 을불 / 9 · 28수복 직후의 어느 풍경 / 조명희 / 김인종 / 남포동 거지 / 옥선이 / 인애 / 춘삼월 / 서면 주막 / 을지로 1가 파출소 / 성균관 과거장 / 환생 / 최훈장 / 그 피리소리 / 유진태 / 정수환 / 향도계 지길중 / 허윤석 / 이계선 / 이형도 중령 / 광복이 / 쇼리 팍 / 탄생 / 한순례 여사 / 신상봉 / 해인사 인민위원 / 두 청년 / 이정송 / 채호석 / 이일웅 / 임후남 여사 / 장명구 / 술꾼 윤구연 장수


유관순


충청도 천안 목천 만화천 감돈다

열여섯살 소녀 유관순

매봉에 올라

그녀가 보낸 봉화에 호응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여섯 곳을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오르는 감격에 벅찼다


그뒤 아우내장에 모여든 만세소리

일본 헌병의 발포

일본 경찰의 폭거로

조선의 남녀노소 쓰러졌다


유관순 체포되었다

총대 얻어맞아

어린 등뼈가 튀어나왔다

젖가슴 칼에 찔려

옆구리 등짝으로 관통 피고름이 나왔다

자궁도 파열


그런 몸으로 감방에서 만세를 불렀다

다음해 1920년 10월 12일 새벽

먼동 튼 철창 바라보며 눈감았다

일제는 유관순 일가의 호적을 아주 말소시켰다


정일권


어린 시절 창호지 찢어진 가난 잊어버려라

북관 돌무지 출생지 떠난 이래

행복밖에 모르는 평생

암흑의

식민지도 행복

해방도 행복

전쟁도 더더욱 행복

전선 시찰의 밤엔

후방에서 스리쿼터에 미녀가 실려왔다

전쟁 이후도 내내 행복


이런 사람도 한국사람이었다


기황후


한 처녀의 커다란 운명 있다 사막 꽃이 아니라 사막이었다


1333년 원나라 공녀(貢女)로 끌려갔다

울음의 길

한나라 도읍 연경 대궐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눈에 번쩍 들었다

울음 접고

궁녀의 길 익혀갔다

몽골어

몽골 풍습을 익혔다

고려 풍습을 애틋하게 익혔다

용꿈 뒤 별궁에서 순제의 눈에 들었다

운우지정이 깊었다

황후 타나시리가

온갖 학대를 다했다


황후 축출의 정변이 일어났다


기궁녀는

순제의 아들 아이시리다라를 낳았다

황후 책봉

그로부터 고려여인 기황후가

원나라 전권을 떡 주무르고 양념 주물렀다

속국 고려에서도

그녀의 친정에서 권력을 주물렀다


고려 금강산 장안사도

원나라 황실 원찰이 되어 범패소리 바라소리 쉬지 않았다

보덕암도

기황후의 원찰

묘향산 보현사도

원나라 태자의 원찰이 되었다


고려 충숙왕은 기황후의 하인이 되어

기황후의 서찰 분부를 엎드려 받드는 변방 제후였다


부청하


제주 북촌

사람들 3백20명이 잡혀왔다


할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도 죽었다

너마저 죽으면 대가 끊긴다

너는 이 할미 치마 속으로 들어오너라


싸이렌이 울렸다


일제히 총소리가 났다

모두 일어섰다가

풀썩

풀썩 쓰러졌다

비명도 몇개 없었다


부대장은

막 제주도에 상륙한 병사들마다

사람 죽인 경험이 없어서

사람 죽이는 경험을 위해서

3대대 전원에게

총살작전을 명령했다


죽은 할머니의 치마 속에서

손자 살아 있었다


부청하

혼자 웃자라며

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난바다 저쪽까지

마구 헤엄쳐갔다


중학교 중퇴하고 밀선을 탔다 이마 주름 여섯개였다


모본왕


고구려 5대 모본왕

무엇하러 이런 사람이 나오는가

무엇하러 이런 왕이 나오는가

모를 일


신하의 여인을 빼앗고

백성의 물건을 빼앗았다

남의 땅도 빼앗아

모본벌을 늘여놓았다


날마다 백성 괴롭혀야

사는 보람

밤마다 신하 괴롭혀야

왕의 보람

참다참다 늙은 신하가 울며 간하였다


폐하 부디 선정을 베푸소서


알았소 내가 깊이 생각하겠소


뜻밖에 이 대답을 들은 신하

죽음을 각오하고 간한 터라

기쁨 넘쳐 어전을 물러났다

왕이 활을 쏘아 돌아가는 신하의 등을 뚫었다


뒷날 신하 두로가

포학무도한 왕의 가슴에 탈을 박았다

다음날 아무도 시해라 하지 않았다

6대 왕좌는 모본왕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왕손을 추대했다 비로소 나라가 제자리에 섰다


이기붕


남을 모르는

이승만 집사로 시작해서

나를 모르는

이승만 집사로 끝난

어느 그림자


여기 끼니 거른 듯 슬픈 사진 한 장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