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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9. 09:26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78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2006, 이가서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1758

 

811.6

안25그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때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 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 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 「별빛들을 쓰다」 중에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의 기준을 여기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선집이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눈높이를

한 단계 상승시켜 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 책머리 중에서

 

엮은이_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등이 잇으며, 시화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등을 받았다.

 

차례

 

책머리에

 

1부 |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掌篇 · 2 - 김종삼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 서정춘

밥그릇 - 정호승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파안 - 고재종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봄날 오후 - 김선우

墨竹 - 손택수

찜통 - 박성우

파행 - 이진수

살구꽃 - 문신

 

2부 |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돌 하나, 꽃 한송이 - 신경림

새떼를 베끼다 - 위선환

감꽃 - 김준태

태백산행 - 정희성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손님 - 백무산

도장골 이야기 - 부레옥잠 - 김신용

밀물 - 정끝별

부검뿐인 생 - 이정록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 강윤후

가재미 - 문태준

부부 - 오창렬

 

3부 | 마음의 풍경

그 굽은 곡선 - 정현종

들찔레와 향기 - 오규원

이런 詩 - 최승자

고니 발을 보다 - 고형렬

고래의 항진 - 박남철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흰뺨검둥오리 - 송재학

호랑나비돛배 - 고진하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만복

11월 - 최정례

아, 오월 - 김영무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 이나명

 

4부 |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물 끓이기 - 정양

환한 걸레 - 김혜순

가시 - 남진우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 이문재

만년필 - 송찬호

트렁크 - 김언희

빗방울, 빗방울 - 나희덕

진흙탕에 찍힌 바퀴 자국 - 이윤학

월식 - 강연호

불룩한, 봄 - 강미정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절편 - 유홍준

 

掌篇 · 2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기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이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 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핝 장 끼워 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살구꽃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을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감꽃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당신 그리고 나는 먼훗날에

과연 무엇을 세면서 살아온 날을 되돌아볼 것인가?

 

 

 

 

 

 

별빛들을 쓰다

오태환

 

   필경사筆耕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 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고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 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 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 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그 굽은 곡선

정현종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절대적인 천진무구의 세계란 이런 것일까?

'평화의 노다지!'

평화는 'No touch', 바로 그것이다

 

이런 詩

최승자

 

평평한 밋밋한

어눌한 느슨한

납작한 헐거운

엷은 얇은

오그라든 찌그러진

찌들어버린 빵꾸 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리듬의

김빠진 맥 빠진

기진맥진한 기고만장을 잊어버린

이런 시!

 

언젠가 나는 한 시에서

"얘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라고 쓴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속에, 이 시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이런 시나 쓰는 마음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나는 다시 그 구절을 써본다.

 

예들아, 이개 시냐, 막걸리냐!

 

 

 

 

 

 

 

어눌한 느슨한

납작한 헐거운

예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

 

 

 

 

 

 

 

 

 

 

 

고니 발을 보다

고형렬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논둑을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마른

풀 하나 건들지 않는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밭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작은 발가락들이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반짝이는

그 사이로 눈발이 영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게는 그들의 집은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

끝없이 눈들이 붐비는 하늘 속

고니들은 눈송이도 건들지 않는다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논둑을 넘어간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이나명

 

왜가리가 물 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멍청히 서 있다

냇물이 두 다리를 댕강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빤히 두 눈을 물 속에 꽂는다

냇물이 두 눈알을 몽창 빼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첨벙 냇물 속에 긴 주둥이를 박는다

냇물이 주둥이를 썩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가 잘리고 두 눈알이 빠지고 긴 주둥이가 잘린

왜가리가 놀라 퍼드득 날개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

온몸을 던져 넣는다

냇물도 놀라 퍼드득 하늘로 솟구치다

다시 흘러간다

 

 

 

 

 

 

세상이 우리의 두 다리를 베어가도, 우리의 두 눈알을 빼가도,

우리의 주둥이를 뻬어가도 왜가리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까?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형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송'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

 

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언,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녀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 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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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