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6 꽃과 숨기장난
서상영시집
2006,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3270
811.6
서52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317
중3 초여름, 나는 완전한 시를 썼다. 꼭 한 편. 그야말로 완전에 조금의 틈도 없는 시였다. 여자 국어 선생님께 연애편지인양 시를 건넸다. 그 후 졸업 무렵까지 내가 선생님께 들은 말은 '지도'와 '편달'이 아니었다. '칭찬'과 '경탄'뿐이었다. 실로 완전한 시가, 내게는 있었다.
겨울 어느 날, 시가 뜯겨나갔다. 형 친구들이 놀러 와서 시를 훔쳐간 것이다. 형이 어려워 말도 못 붙이던 시절, 형 친구들을 찾아가서 '내 시 내놔라'고 말할 용기가 차마 생기지 않았다. 국어 선생님께 달랄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저 속으로 앓기만 했다.
몇 번이고 복원을 거듭했지만, 더 이상 완전한 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단 한 번 떠올랐던 시는, 새침한 여선생님과 시골 총각들의 가슴을 적시며, 영원히 내 마음속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시를 향한 간절함, 그리움으로 시를 쓴다. 먼 마음의 바다 속에서 가끔 들려오는 아련한 떨림, 말의 내음, 미묘한 질감, 또 세계를 향한 한 소년의 과도한 열정과 천진한 믿음으로.
시인 서상영은 1967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무역학과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문예중앙』 가을호에 「들판의 노래」외 10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오랫동안 홀로 詩作에 전념해왔다.
시집 『꽃과 숨기장난』은 대상을 감각화하는 절실함과 익숙한 리듬의 변용으로 슬픔과 우울, 고난, 잃어버린 열정에 대해 노래한다. 가령 유년의 추억이나 사랑의 꿈과 열망 등으로 흐를 때, 시는 소월과 백석 혹은 훨씬 이전의 「공무도하가」「도솔가」「헌화가」 등 옛 노래의 리듬을 탄다. 그 리듬 위에서 고향 마을과 추억의 아름다움은 현재 시간의 갈등 속에 감각적으로 뒤엉킨다. 그렇게 슬픔과 고난은 감각적인 물질로 형상화되면서 오히려 아름다움의 깊이를 획득한다.
시인의 말
세상에! 소금 사러 왔더니,
눈물만 조금 퍼주는구나.
이 시집을 어머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2006년 봄
서상영
차 례
시인의 말
제1부 빨간 고양이
나의 병실 / 바람난 / 오리 / 저 집 / 꽃 / 꽃과 숨기장난 / 봄날은 간다 / 빨간 고양이 / 야심가 / 우울 / 달라이라마 / 혜초와 沙江을 가다 / 兜率歌 / 定州 / 雪夜 / 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 / 강아지 / 난지도 / 목련꽃 / 바다
제2부 감자꽃
길 / 감자꽃 / 뱅기뱅기 / 콩새의 전설 / 수덕사 여승 / 공무도하가 - 사랑가 / 공무도하가 - 사냥 / 공무도하가 - 새벽길 떠나기 전 / 공무도하가 - 백수광부 처, 물로 들어가기 직전 / 공무도하가, 곽리자고 頌 / 만년향의 사랑 / 헌화가 / 처용가 / 비며느리 전설 / 꽃범벅 / 꿈틀거리는 집 / 민들레꽃 / 비비새 고향
제3부 오래된 나무의 이야기
징검다리 / 망초꽃을 알기까지 / 오래된 나무의 이야기 / 東頭里 / 어부 / 들판의 노래 1 / 들판의 노래 3 / 들판의 노래 4 / 무명씨 家, 터구렁이 / 고향 길 / 추운 따스함 속을 걸어봄 1 / 긴 - 하루 / 추운 따스함 속을 걸어봄 2 / 여름밤 / 땡볕 / 장마 / 초저녁 / 추운 따스함 속을 걸어봄 3 / 굴뚝새 / 별밥 / 四季 / 파꽃
해설 | 노래의 몸, 몸의 노래 · 권혁옹
꽃과 숨기장난
숙아 복상꽃 살구꽃이 피었다 숨기장난하자 내가 눈을 감거든 너는 어여와 빨리 꼭꼭 숨어라 나뭇가리 밤나무 뒤라도 좋다 울타리나 장독대 뒤면 또 어떠랴 숨어라 숙아 머리카락 보인다
살구꽃 복상꽃이 피었다 숙아 너 찾으러 간다 울타리에 매달린 바람이 되어보고 헛간에 빈 항아리 열어봐도 없던 숙아 굴뚝새가 되어 굴뚝에라도 들어갔냐 못 찾겠다 이슬이 되어 하늘에라도 올라갔냐 못 찾겠다 찌 - 인 한없이 심심해져 바람벽 기대고 섰는데 꿈결인 듯 네가 흔들린다 꽃이 흔들린다 복상나무 가지에선 꽃과 꽃과 꽃이 꽃과 온통 흔들거려 복상꽃 송이 송이 영원히 네가 흔들리는데 -
그래 꽃만 피면 나는 미친다 숙아 너 찾으러 간다 도망간 색시 찾는 방앗간 아재처럼 눈엔 불이 나고 내 속은 뒤집혔다 생각이 안 난다 그날 네가 민들어준 세상이 스물일곱 살 내 어딘가에 있으리 세상 어딘가엔 있으리 꽃이 꽃은 피고 아직도 술레가 되어 나는 미친다 온종일 복상나무 아래만 맴돌고 바람 불어 꽃이 떨어져도 네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바보 - 핏빛 같은 입술 삐쭉 내민 너의 목소리만 들린다 숙아
빨간 고양이
불꽃처럼 흔들리네
요, 요, 빨간 고양이
재롱이 여간 아니네
도망치고 싶어서, 여름은
어지럽게 꼼지락대는 혓바닥
살인마저 신물난 네로의 눈동자
아장아장 게으른, 장난 고양이
굳이 추억을 얘기하려네
지난 겨울에 만난 흰 고양이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기침이 극에 달했던 봄밤
밖으로 뛰쳐나온 내 심장이
흰 고양이를 붉게 적시었네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채송화 씨보다
작은 그리움을 나비 편에 보낸다고
쓴 편지도 있었다네
무더운 봄을 건너온 나의 여름은
무언지도 모를 生의 시장기로
타들어가며 젖는, 네로의 눈동자
월경 중인 꽃, 피 흘리듯
산들산들 엉덩이를 흔드는
아! 저 빨간 고양이
쫓아가면 장미꽃 속으로 달아나 숨고
생선 가시처럼 앙상히 뻗은
길엔
빨간 고양이 입내만 홧홧 풍기네
감자꽃
- 영월 東江 가에서
어린애도 채간다는 부엉이 소리
맷새 모두 숨죽이는 밤
할아비는 평생 쌀 한 말 못 먹고 죽었다고
뗏목꾼인 아빈 곰 같은 어깰 들척이며
술주정으로 잠들었다
쿨쿨 코 고는 소리는 도적처럼 울리고
감자 싫어 내뺐다는 어매는
원래 동강 뗏목꾼들이 우러렀다던
들병장수
방문 열고 사립문 밖 뛰쳐나오면
웬 놈에
감자꽃은 저리도 하얗나
굽어봐도 산 첩첩 산 넘으면 물 첩첩
아비는 잠에서도 드센 물결 소리 듣는가
꿈을 설치고 부엉이 소리 울고
아아 재째거리는 풀벌레처럼
난 사는구나
해지는 남쪽 길을 오도커니 쳐다보면
눈엔 누구처럼 화냥기가 백혔구나
이년아
저 강물 건너면 못 돌아온다
칡뿌리가 늙어 구렝이 될 때까지
감자꽃처럼 살그라
아비는 내 맘을 후려치며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소낙비 내리면 기운이 더 난다며
떼돈 벌러 뜀박질쳐 간 아비
된꼬까리 서 돌아왔더라
평생 못 타본 가마 타고 사뿐사뿐 돌아왔더라
산맥 같은 어깬
소금토리가 물에 빠진 듯
싱겁게 풀어지고
감자꽃 진 자리 열매가 없다
갈라진 흙바람 벽에 부엉이 소리 스미고
강 안개 걷혀 해 들면 머릴 감았다
타향이 없으니 고향도 없고
감자꽃은 피고
지고
울음보다 외롬이 더 싫은 날엔
감자를 캔다
뭐라 내 보이기도 수줍은 한 生을 캔다
꽃 진 자리 쭈그렁 열매도 없던 아비가
땅 아래서 살뜰히도
영글었다
하늘을 뿌리 삼아 가지 벌려 열렸다
오래된 나무의 이야기
그 사내아이를 잊을 수 없다
아직 어렸건만, 혼자
울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아이
하늘도 땅도 물도 허공도 죄다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이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뭔가가
자꾸 타서 사라져갔다
커다란 병을 얻어 누운
나어린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기대어 하염없이 울던 아이
저녁 어둠은 잠처럼 쏟아져내리고
이별은 숨을 쉬는가 사랑과 함께
삶은 윤회하는가 죽음과 함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도 숨어서
오래도록 눈물을 닦고
낮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
내가 너처럼 연한 살을 가졌다면
내가 함께 울고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다면
그해 겨울, 아이의 집에는
밤새도록 희미한 불빛이 피어 있었고
하얀 눈송이들은 지붕을 가득 메웠었다
길
같일랑 가자 해서
동무했더니
이제는 너만 남거라
먼저 간다고
갔겠거니 생각하고
이렁저렁 살재도
바람 센 날은
보고파
공무도하가
- 사냥
진달래 산수유 꽃물 든 산을
지방천방 들뛰며 혼령을 깨워
사향노루 목을 따서 피를 마시고
꿈틀꿈틀 휘돌아 뭉쳐진 산이
벗어도 벗어도 몸을 감아와
양지에서 맥쩍게 술을 마시고
노루를 베고 누운 산 너머 하늘
헤헤롱 아지랑이 흥건한 紫色 구름
진달래 산수유 꽃물 든 꿈에
노루는 자꾸 울며 숨을 달래고
노루는 자꾸 울며 숨을 달래고
끊어논 숨 잇지 못해 마음이 달아
서먹한 온 산을 허덕거릴 때
해설픈 뻐꾹…… 구슬픈 소쩍……
피 먹은 몸 안에는 차가운 불이 붙어
가려운 모가지엔 황갈색 털이 돋아
산 너머 하늘 향해 네 발로 껑충 --- 아,
罪여! 罪여! 罪여!
눈물 씻은 노루는 숲으로 달아나고
공무도하가
- 백수광부 처, 물로 들어가기 직전
개같이 사셔요 꼬리쳐 앵겨붙고 엉덩이를 흔들어서 볼 고운 처녀 물오른 처자 홀리고 달래고 아흐레엔 아홉 밤 스무 날에 스무 밤 작신작신 녹여서, 쌀강아지 사오듯 줄줄이 새끼라고 달고 오셔요 虎皮에 푹 파묻힌 백일홍에 환장해서 너를 버린다고 전해오셔요
새파랗게 선 그믐달 독으로 품고 가슴팍엔 동정인 단도를 품어
오뉴월 서릿발 맨발로 밟아 가서, 당신 잡아먹은 년이 되게 하셔요
허기진 솔개처럼 뱅뱅 돌기만 하는 박혁 판에 사셔요 관솔불 그을음에 얼굴은 꺼멓게 삭고 불타는 눈가에 질질 개기름이 흘러내릴 때 바짝 마른 입술 시뻘겋게 뒤집어 제 이름을 잽히고 판돈일랑 빌리셔요
엽전처럼 떠다니며 이 품 저 품 살 때 묻히다 원한도 제풀에 꺾여버리면 몫 돌아난 초막에 무심히 들어 앉아
은붙이 내온 사내 씻나락 훔쳐온 사내 눈물로 콧물로 씻어주며 살게 하셔요
죄다 싫으면, 술이나 더 드시다 가셔요 왕을 불러 꾸짖고 신선 되어 鵬을 타는 醉夢일랑 아예 깨지 마셔요 釀造工 납작코한테는 저를 시켜, 돈 한푼 내지 않고 술 사가겠다고, 어깨 으쓱대며 시위하셔요 술맛도 지쳐 혀가 붓고 목이 타고 애가 끊어져버려도 남은 술 한잔 더 드시다가,
볕 좋은 가을 목화송이 터지듯 당신의 눈자위가 허옇게 돌아가면
되다 말다 하는 세상 아예 덮으면 그때, 그땐 가셔요
만년향의 사랑
시절이야 신라 때라도 좋고 고려 때면 어떨꼬 해야 아츰 나절이라도 좋고 한밤중이면 어떻겠네만 산골엔 예쁜 두 자매가 살았다 하데 있는 게 없는 것뿐이던 세월이라 착한 맘 씨앗 가꿔 양식 되리만치 먹구 더러는 돌렸다고도 하던데, 호랑이를 잡을 체구이지만 늙은 어매 모시는 것밖에 모르는 옆집 총각을 똑같이 사랑했던 건 하늘도 몰랐다 하더이다 시절이 하 수상해져 총각은 싸움터로 떠나고, 돌아앉아 그믐달처럼 맘만 삭이던 언니 동상이 서로 맘을 털어놓으니 아요 얄궂어라 아요 얄궂어라
끓는 속을 꺼내 놓으면 대장장이는 좋을까마는 각기 천 근 자물쇠로 맘을 걸어 잠그고 서로가 자리를 내준다고 서러운 쌈판이 벌어졌는데 바람엔지 인편엔지 대뜸 총각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왔다 하지, 그만 두 사람의 끓는 맘이 터져버려 우-- 우-- 서로 지가 사랑했다고 연못에 몸을 던졌다 하데
슬픔도 세월엔 잔물결과 같아서 사람들은 또 그럭저럭 살아가고 파아란 연못가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 제발 하늘로 올라가재도 땅으로만 기는 참인데 오메, 말을 타고 웬 늠름한 장수가 연못가를 지나가는데 하늘에 올랐다던 총각이 시침 뚝 떼고 돌아온다
늙은 어매에게 인살 해도 말을 안 하고 옆집 아씨들 집도 허물어졌다 사람도 강아지도 보기만 하면 훼훼 고갤 저으며 피해만 간다 답답도 하여서 주막에 가 사람들을 붙잡고 물으니 아아 뒤집힌다 뒤집힌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빛나는 갑옷이며 살찐 말을 팔아 생긴 엽전일랑 늙은 어매에게 부치고 휑하니 총각도 연못으로 소풍을 갔다 하네 슬픔이란 안고 살아가는 짐이지 먹고 죽는 음식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또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연못가 등나무 곁에 작은 팽나무 하나가 살뜰히도 자라나니 두 등나무가 달겨들어 치렁치렁 껴안고 희멀건 배때기에 꽃송아릴 터뜨리니 그럭저럭 살아가던 사람들도 연못을 지날 때면 괜히 콧날이 팽돌고 가끔은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도 잘 살는지 그게 궁금하기도 하더라
추운 따스함 속을 걸어봄 1
- 꽃샘추위
어둠 속으로 동네가 기울면 하늘엔 면도날처럼 새파란 그믐달이 떴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다 땀에 절은 얼굴을 부비면 따끔따끔 살갗이 시려왔다 어둠 속에서 길은 더욱 새까맣게 빛났다 누나 왜 밥상을 차리지 않는 거지 도둑같이 낯설게 방문을 닫으며 내가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같이 먹자 누이는 불을 향해 앉아서 감기에 걸린 듯 연신 일부러 재채기를 해댔다 또 저녁은 굶겠구나 아버지의 술주정은 오늘도 거짓말을 안 하겠지 아직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비틀비틀 들으며 손톱으로 바람벽을 긁으면 고소한 흙 냄새가 묻어났다 너도 그렇게 놀지만 말고 숙이처럼 논두렁에 가 달롱을 캐지 그래도 난 남잔데…… 누나 지금이 봄이야 봄이 아니야 봄이 온거나 마찬가지지 개울가로 나가면 뼈가 시린 물을 먹으며 풀들이 파릇파릇했다 그 바지는 두 번이나 꿰맸는데 또 꿰매 그래도 꿰맨 흔적도 없이 새거잖니 누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등잔 불빛에 그림자가 흔들리며 구겨져버렸다 근데 있잖아 난 차라리 집에 있을래 아버지의 술주정보담 이웃집 아줌마의 그 묘한 눈빛과 볼에 비칠 때 낀 발등이 창피하니까 아야! 누니의 비명 소리에 방 전체가 떠올랐으나 이내 가라앉아버렸다 손가락 끈에 맺힌 대추 빛깔의 피를 누이는 재빨리 입술로 빨았다 아니야 아버지는 술에 취해 오시지는 않을 거란다 수제비보다도 푸석푸석한 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미리부터 울고 싶어져서 가랑이에 얼굴을 묻었다. 왜 아버지의 술주정은 겪어도 겪어도 낯설기만 한 걸까 까무룩한 잠에 빠져들다 쥐 소리에 놀라 눈을 떠도 누이는 수도승같이 앉아서 나의 꿈길을 쓸어주고 있었다
목련꽃
환절기 고뿔처럼 며칠 지독히 앓다
훅 지나쳐서, 꿈인지 생인지도 모르고
그리하여 꿈으로만 알고
아직도 삼백예순닷새 그리워하는 섬
열여섯, 내 영혼은 날아오를 수조차 없이 가벼워서
잠시라도 아프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하였다
혼자, 땅벌레처럼 숨쉬었다
늘 멀리 떠나기를 꿈꾸며
쓰러진 고목, 가지 길을 걸었는데
작은 나뭇잎 같은 우리 집을 나와서
몇 차례의 가지 길들이 겹쳐지고
차들이 다니는 큰길에서 대개 돌아서 오곤 했다
아주 큰길이 어딘지, 큰길로 계속 가면
어떤 뿌리를 만날 수 있는지, 길들은 산 뒤로 숨고
그 너머, 내가 갈 수 없는, 너무 가고 싶은 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내 영혼의 순수, 결백,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 지혜, 사랑이 숨쉬는 곳이었고
설원이든 바다이든 상관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그 너머, 한 작은 섬에 간 적이 있다
밤이면 더욱 환하게 볼 수 있는 섬
섬의 입구는 긴 동굴로 되어 있었으나 결코 어둡지 않았다
어디선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향기의 빛 때문이었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고
물살에 떠는 섬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섬에 당도했을 때는
나는 이미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내가 만났던 사람이 모두 와 있었다
놀부, 뺑덕어멈, 팥쥐, 그루센카, 카르멘
그들은 그저 헐렁한 옷을 입고 열심히 일했다
돈, 탐욕은 버린 지 오래전이라고
그것도 맑고 푸른 바다가 아닌
더 먼 곳에 버렸다고 했다
좀 모자라다 알맞다 넘친다는
그들의 법률이었고,
좀 모자라다는 그들의 규범이었다
쟁기는 소가 끌었는데, 키우던 소가 늙어 죽으면
주인은 삼일정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소와 주인의 눈망울은 유난히 닮아 있었다
교회는 어떤 신상도 배치해놓지 않았으며
교회에 들른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 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마음속으로
그리며 기도했다
곡식은 들판 가운데 지어진 지붕이 넓고 벽이 없는 헛간에 쌓아 놓았다
누구든 가져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배고픈 짐승들도 가져갔다
들짐승들도 '조금 모자라게'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들도 섬의 주인이었으므로
꿀벌들은 바다 너머 소식을 들려주었다
정원사들은 바다 너머 소식을 들려주었다
정원사들은 전지가위를 몰랐다
그들은 그저 나무를 심고 키우는 사람들이었다
한 정원사가 모종삽으로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다
큰 마당 복판에 심어져서 너무 외로워 보였다
오백 년 후 나무가 자란 모습을 상상하며 심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의 오래된 집들은 튼튼하고 각자 개성을 갖고 있었다
건축 기술자들은 늘 한가했는데
천천히, 더욱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들을 준비했다
저녁이면 사람들은 각자 명상에 잠기었고
더러는, 지상에 씌어진 슬픈 이야기들을 아름답게 고쳐 썼다
밤이 조금 깊으면 모두 잠을 잤다
섬조차 사람들과 함께 잤다
노동과 명상 이외엔 도대체 무어 귀한 것이 없었던 섬
새벽, 나는 늙은 내외가 내어준 사랑방을 나와 배에 올랐다
진주 같은 섬들이, 푸른 바다에 하얗게 떠 있었다
내가 그 섬을 어떻게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도, 섬사람들의 여전한 삶은 얘기할 수 있겠다
실제인지 환영인지 알 수 없으나
특히 맑은 봄이면
그 섬의 풍경들은, 열여섯 나의 여린 영혼과 함께 슬쩍 떠오르고는 한다
세상의 길들이 벌떡 일어서서, 뿌리가 되고, 나무가 되고, 가지가 되고
한밤중에 처연히 빛나는 저 순백의 목련꽃
목련꽃 섬
고향 길
누가 가져다 심은 새끼줄
처럼 생긴
산길을 걷고 걷다 보면
길 맨 끝엔 멍석뙈기 같은
우리 동네가 달려 있었다
너무도 천진해 돈을 벌 줄 모르는 사람들은
초가집에서 불을 지피며 살고
엿장수를 닮은 가재의 집은
개울
양식은 푸석한 흙 속에서 찾아지고
氣槪는 산을 오르며 내리며 배우니
책들은 불쏘시개로 사용되었다
산 너머에서 쇳소리가 들려올 때면
사람들은 싱긋 웃고는
낮엔 들로 나갔고 밤엔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자꾸 태어났다
아이들은 개울가로 가 가재를 잡아먹고
물벌레를 잡아먹으며 가재들은
돌 틈에서 새끼를 낳았다
가재 새끼도 사람 새끼도 무럭무럭 자라고
가을 끝이 오면 어른의 어른들은
미련도 없이
흙에다 자신들의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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