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total
  • today
  • yesterday
2013. 12. 3. 09:3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31 여우

 

류인서 시집

2009, 문학동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2983

 

811.6

류68ㅇ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류인서의 시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이다. 기억의 영지에 파릇하게 돋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시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민담, 설화, 동화, 영화, 소설의 젖을 빨고 그 자양분으로 상상세계를 꽃피운다. 거기서 얼음접시, 물배꼽, 유리구두, 접시거미, 그늘하숙, 울음더위, 종이거울, 그늘나비, 고담시, 세상의 동쪽 끝방, 깜빡죽음 저 나라, 구름 난전 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삶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려는 유희 본능이 빚은 것들, 시인은 누추한 기억들, 그 천일야화에 상상의 도금을 입힌다. 그것은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것,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이자 "일종의 연금술"이다. 시인은 "세상 가득 떠다니는 글자들의 파편"을 모아 몽상을 꽃피우고, 사물들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의 시들은 푸른 수염의 거인에게 붙잡혀가 돌아오지않은 처녀들의 노래, 그 "세상의 동쪽 끝방"에서 부르는 슬픈 아리아다.

장석주(시인)

 

이곳은 늙은 느티나무가 거느린 그늘,

먹을 것을 담은 바구니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가지 사이로는 당신이 보낸 푸른 전갈이 기어나오고

나뭇잎 뒤에는 가난한 사내가 누워 있기도 한

추억과 반성의 분실물 보관소,

그늘은 다른 그늘을 받아들여서

그늘의 경계는 넓거나 없고,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무수히 눈을 찔러오는 햇빛,

탄식하거나 감탄인, 그런 예기와 관용의 지도 제작소,

잠시 머물다 떠날 당신 손에 건네주는

섬세한 엽맥(葉脈)의 지도 한 장.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류인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2001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가 있다.

 

우리가 읽어온 류인서 시편의 감각적 구체성과 활달한 유동성은, 환상이나 신화적 요소를 넘어 훨씬 더 멀리 존재하는 궁극적인 '사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불모성을, 구체적이고 상상적인 감각의 묵시록으로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그 세계의 일회적이고 고유한 그리고 심미적인 아우라를 경험할차례이다.

유성호(문학평론가)

 

自序

 

동티모르 산악지역에서 커피나무와 함께 생장한다는

그림자나무(shade tree).

무릇 관계와 관계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그림자나무였으면 좋겠다.

 

시가 누군가를 향한 어설픈 폭력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2009년 봄

류인서

 

차례

 

自序

 

1부

전갈 / 거울 / 칼새 / 썩은 사과 한 자루 / 명료한 열한시 / 마녀의 사전---마흔 / 공공연한 미술관 / 접시거미 / 거울 마네킹 / 일일극 / 유리구두 / 흐르는 빨래들 / 몽상을 찢다 / 느티나무 하숙집

 

2부

철쭉 / 사물의 말 / 울음더위 / 자연 / 알리바이 /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 황사 / 잠자는 남자 / 여우 / 연애 / 한 잎의 파도 / 처녀들의 램프---성(性) / 얼음땡, 나라 / 입체카드 / 섬 / 활극처럼

 

3부

폐원 / 티켓 자판기 / 책 / 오아시스 / 새 / 먼나무 / 감각기관의 붓 / 추억의 스타 / 생계 / 연 / 가시나무 / 천사의 나팔꽃 / 창(窓) / 기억의 영지

 

4부

그를 요약하다 / 음화(negative) / 포장마차 청춘극장 / 추억 마케팅 / 클럽, 아라비안나이트 / 당신들 / 그 나무?---시 / 꽃 먼저 와서 / 나비 / 천국의 정원 / 촛불

 

해설 | 유성호  감각의 묵시록

시인의 말

 

여우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 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별 얼음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촛불

 

어둠은 오늘도 우리의 우울한 안부로구나

얼어붙은 창(窓)을 향해 당기는 부드러운 방아쇠와

납방울처럼 다시 우리 귓속으로 떨어져 굳어가는 촛농의 말

잠든 거리로 피 흘리는 어린 불빛을 몰고 사라지는 외로운 저 작은 짐승

 

그 나무?

---시

 

그 나무는

층층 늑골 아래가 바람의 카타콤이다

 

가지와 가지 사이 지하계단에

십자가도 없이 매장된

바람의 유골들

 

빛이 죽은 검은 밤

 

한 벌 잎새의 수의조차 입지 못한 바람의 가난한 혼령들이 돌아와

 

삐걱삐걱

허물어진 저의 몸을 흔들어 깨운다

 

전갈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거울

 

시골집 수돗가 빛바랜 저 거울에게도 어느 순간 반짝, 빛나던 때가 있었다

 

일생을 흘려보낼 조그마한 저수지를 이루었다고 세숫대야 물이 흰 부추꽃처럼 찰랑일 때

아버지 돋보기안경에 날아앉은 잠자리가 멀리 있는 어린 자식 안부편지를 일을 때

긴 여름날 마당가 백일홍꽃 속에서 더위 한자락 싹둑 자르는 가위 소리 들릴 때

오래 집 나갔던 맨 끄트머리 보랏빛 형제가 돌아와 일곱 색깔 모두 모였으니 어머 이리 나와봐, 저기 무지개 떴어

포도 몇 송이 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을 때, 으깨고 으깬 그 저녁의 육즙

 

그리고 시골집 수돗가 거울이 마지막 반짝 빛나던 때, 이삿짐 나가고 식구들 다 떠나고 담장 밖 능소화가 적막한 등불 하나 걸 때

 

폐원

 

식이 끝나자 단상의 여섯 자루 촛불 꺼지고 꿀벌과 나비의 음악도 멎었네

흥성대던 바람 하객들도 한 잎씩 식권을 손에 들고 서둘러 자리를 떴네

성장(盛裝)의 신랑신부만 늦은 꽃으로 남아 색 바랜 붉은 비단길을 지금도 가고 있다

 

공공연한 미술관

 

한동안 전시중이던 공공公共空空연한 미술품들*이 사라진 동대구역

 

공연히 헛헛해진 내 눈 속으로 공공연한 빵집과 공공연한 약국, 공공연한 커피숍이 쏟아진다

다짜고짜 손부터 내미는 공공연한 구걸이 다가온다

공공연히 붉은 석류꽃이 비둘기똥 말라붙은 분수대와 손잡고 광장을 빠져나간다

 

빈 대합실엔 하나둘 모여드는 얼굴 없는 승객들

저 공공연한 노숙의 옷자락을 시속 삼백 킬로미터 굉음으로 스쳐가는 고속열차

속도가 빠져나간 역사, 유리벽엔 어둠의 차단먹이 방화셔터처럼 내려지고

 

차도 너머 가등 불빛은 기괴한 갈퀴손 그림자 광장까지 뻗친다

놀다 가세요 자고 가세요, 공공연한 밤의 호객이

불온 전단지처럼 뿌려지는

이곳에서는 사실

생의 목록으로 전시되는 둥글고 각진 모든 것들이 다, 공공연하다

 

* 2004년 여름부터 2005년 봄까지 동대구역 구내에 전시되었던 설치작품전 '공공公共空空연한 미술전'

 

포장마차 청춘극장

 

후루룩 급하게 말아 삼킨 혓바닥 뜨건 우동국수 같은 것이었다는

채 익기도 전에 새까맣게 타버린 몇 도막 살점이었다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유령처럼 튀어나온 잊어버린 게릴라였다는

시대와 치기를 섞어 버무려 단숨에 써내리는 지루한 연대사였다는

술집과 노래방과 모텔 즐비한 이 도시 뒷골목 공터였다는

청춘, 아닌 청춘의 그림자들만 뜨내기로 앉아 있었다는

심야할인 서비스도 지정좌석도 없는 황야(荒夜)의 천막극장

덜컹덜컹 돌수레를 끌고 세상의 끝을 돌아서 오던 그 밤이었다는

 

칼새

 

이과수폭포에 사는 칼새는 날랜 검객의 그것처럼 눈썹이 없다

칼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 한 자나 된다 다모(茶母)의 검날보다 한 치가 적을 뿐이다

지붕을 훨훨 나는 검객처럼 칼새는 이과수폭포의 공중에서 결코 땅에 내려서지 않는다

이과수폭포의 뿔 이과수폭포의 숨겨둔 배꼽…… 칼새는 폭포가 오래 겨루어야 할 상대임을 안다

관광객들이 폭포에 뜬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눈앞을 스쳐가는 깃털 한 점, 칼새가 벼랑에 새겨놓은 아득한 발자국

 

겨울 마네킹

 

대머리 여자가 이제 막 투구를 쓴다

반짝반짝 거울 방패를 닦는다

그리고 불길한 싸움의 징조인 까마귀떼를 부르자

어디선가 수백 조각 검은 거울들이 날아온다

 

여자는 저의 가장 깊은 상처인 몸의 구릉을 내려다본다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꽃 하나

쇼윈도 밖, 길을 가던 행인이 그 꽃을 꺾어간다

 

느티나무 하숙집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음화(negative)

 

필름 조각을 햇빛에 비춰본다

 

사진은

순간들의 데스마스크를 뜨는 즐거운 놀이

싹뚝싹뚝 풍경을 가위질하던 너의 경쾌한 셔터 소리 들린다

 

풍경은 죽어서도 고여 썩지 않고 가볍게 우리들의 잔을 넘쳐흘렀구나

네가 도착하지 않은 그 나라까지 끌어당겨 창틀마다 끼워두었구나

보려무나, 머리카락과 눈썹 하얗게 센 네가

한낮의 검은 햇빛 아래 나앉아 웃고 있는 것

김치 치즈 속삭이며

낮에 보는 반달 입술, 유령처럼 깜찍하게

웃고 있는 것

 

사물의 말

 

나는 빛을 모으는 오목거울이지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 사이에 핀 양귀비꽃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떨며 흐르는 공기

회오리를 감춘 강물이지

 

조용히 밤의 표면을 미끄러져가는 유령들의 범선

나비걸음으로 다가오는 폭풍우지

땅의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르는 새

태양을 애무하는 파도의 젖가슴*이지

춤추는 방랑자지, 나는

 

멀리 있는 별보다 더 멀리 있는 별*

네가 잡은 주사위의 일곱째 눈이지

 

세계의 벽을 두드리는 망치, 나는 그 끝나지 않는 물음이지 기다림이지

아침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가는 괘종시계

발기하는 소경의 지팡이지, 날 선 창끝이지

 

네가 나를 들을 때,

너의 눈이 나를 쓰다듬을 때,

나는 너에게 덤빈다 먹어치운다

먹으며 먹히며 서로 끝없이 스민다

내가 너를 수태하고 네가 나를 낳는다

 

너와 나, 마주하는 두 개의 사물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

 

 

온몸이 흰

미라 같은 책이 있다

 

당신의 손은 고고학자의 그것, 침착하게

얼굴에 눌러붙은 붕대를 벗겨내는 중이다

 

빛 아래

차갑게 떠오르는

군데군데 변색한 미라 특유의 얼굴빛과

어둠이 파먹은 이 목 구 비

 

정작 중요한 건

누구도 이 책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붕대를 푸는 일만으로 끝나기 마련인

끝없는, 표지의 책이기 때문

 

썩지 않는다는 책의 심장은

발굴되지 않는다

 

마녀의 사전

---마흔

 

이것은 일억 년 전 벌(蜂)에서 분화했다는 개미의 나라 글씨로 쓴 책이다

이것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는 맹목의 눈을 위한 책이다

이것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고 안 밴 아이를 낳기도 하는 수상한 수돗가의 책이다

이것은 멸치잡이 그물에 밍크고래가 걸리기도 하는 행운복권 같은 책이다

이것은 비린내와 화근내가 진동하는 저잣거리 가판대에서만 파는 책이다

이것을 하나의 집에 두 개의 대문, 감춰둔 그의 뒷문 같은 책이다

이것은 얼음접시의 불룩한 물배꼽에서 피워올린 회오리바람 같은 책이다

이것은 열 때마다 쪽수가 늘어나고 볼 때마다 내용이 달라지는, 사본 불허의 책이다

이것은 발꿈치를 들고 따박따박 당신 뒤를 따라가는, 삶에도 죽음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령들의 책이다

이것은

당신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당신을 읽는, 종국에는 통증 없이 당신을 잠들게 하는, 잠든 당신의 피를 먹고 자라는 흡혈박쥐 같은 책이다

이것은 당신의 마른 혓바닥을 서표로 사용하는 책이다

 

먼나무

 

겨울나무 붉은 열매 속을 걸으며 누군가

어쩜 먼나무인 줄 알았네, 하고 탄식하듯 낮게 읊조린다

 

스쳐가는 그 말끝 건져올려 '먼나무 당신' 소리없이 되뇌면

머나먼, 눈먼, 나무 한 그루 떠듬떠듬 지팡이도 없이

보이지 않는 눈발을 헛밟으며 온다

 

잎자루에서 이파리까지 먼나무

어둠들 청수바다 건너 노래만큼 먼나무

발자국도 그림자도 얼룩얼룩 붉은 문장 저 나무, 구름과 새도 아직 보지 못한 먼나무

 

추억 마케팅

 

  추억 마케팅이 시류라지요 아마? 달리 향수 판매라고도 부르는, 아 지레 코를 킁킁거리진 마세요 당신, 단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근원의 그리움을 살짝 충동질해주자는 얘기죠 이건 얇은 물주머니와 같아서 바늘 끝만한 자극에도 바로 반응하게 돼 있거든요 봐요 노래도 영화도 리메이크 버전, 아기공룡 둘리가 주민번호를 받고 잠자던 태권브이가 아싸, 철권을 날리지요 카푸치노 비엔나 에스프레소, 오만 것 다 홀짝거려봐도 당신 입맛엔 역시 다방커피가 제일이구요

 

  영락없는 도깨비놀음이라구요? 큰물 진 여름날 황토하천에 흘려보낸, 귀신 시끄럽다 진작에 엿 바꿔 먹어버린 구년묵이 헛것들을 어디 가서 찾느냐구요?

  걱정 마세요 추억은 어차피 유령이거나 부장물인걸요 이건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라 당연히 분묘개장공고 따위의 번거로운 절차 생략이에요 간단해요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 무덤 같은 당신의 기억에 접이식 내림사다리 하나만 걸치면 되는데요 뭐, 그림자 몇 조각 집어내는 걸로 충분해요 단계별 추억회생 프로그램이 있잖아요 누추한 기억일수록 도금발이 한결 쌈박하게 먹힌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일종의 연금술이죠

  버려둔 상한 그림자들을 불러모으세요 삼면경 속에서 흔들리던 할머니의 촛불 한 접시, 신발짝에 퍼담아온 논개구리 알이라도 좋아요 생손가락 앓던 당신의 창백한 검지 손톱이라도 좋구요

 

  가소롭게시리 뉘 앞에서 선무당 휘파람 흉내냐구요? 당신의 업(業)이야말로 세상 최고(最古) 전통의 추억 마케팅이라구요? 스쳐가는 것들을 낚아채 잘근잘근 추억의 사이즈로 난도질하는 재미,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그게 당신 업이라구요? 아하, 대충 알 만하네요 누군지

 

가시나무

 

무슨 선물을 갖고 싶어?

길 떠나는 여자가 그에게 물었을 때

당신 모자에 스치는 불꽃나무 첫 가지,

그는 옛이야기의 한 장면을 흉내내 답했다네

 

여자가 내민 건 그러니까, 어린 가시나무였다네

그는 동쪽 창 연못가에 그 나무를 심었네

가시가 가시를 낳고 잎새가 잎새를 키워

그의 가시 사랑도 이자처럼 쑥쑥 불어났다네

발아래 의심과 망설임의 잔뿌리를 키우기도 하면서

겨울이면 그 나무 새하얗게 불타는 얼음가시나무가 되어 주곤 했다네

 

연못의 쪽배는 이제 진흙에 파묻히고

시간은 다만 불꽃나무 바깥에서만 흘렀다네

그 나무 고요한 잎사귀에는

고약한 냄새뿔을 이마에 숨긴

뱀눈무늬호랑나비 애벌레가 살았다네

애벌레를 탐하는 말랑말랑 설익은 가시혓바닥의 어린 새도 살았다네

 

잠 깬 호랑나비 얼룩 날개 햇빛 위를 떠갈 때

낮말은 새가 먹고 밤말은 쥐가 먹어

여자와 당신 사이 모자 안에

발가벗은 새빨간 거짓말나무 한 그루 살았다네, 한 그루 지나 열 자루

가시 돋힌 불꽃나무들이 살았다네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그의 손목은 시간을 잡아당기는 무거운 구리 문고리

그의 손목에서는 숨가쁜 말굽 소리가 났다

그의 손목에서는 매일 노오란 해바라기꽃이 피었다 졌다

 

선생의 아이들이 바구니 속에서 울어 보채는 동안

화분의 제라늄이 비릿한 비염의 코를 베어내는 동안

그는 얼룩진 매트리스를 창문으로 끌어내 마구 두들겨패고 있다

여자보다 더 많은 수의 시계가 그의 손목 안팎으로 꽃피며 지나갔다

 

그는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느닷없는 사랑의 복면도 만났다 여우와 신포도도 보았다 깨진 무릎으로 찾아가는 아주 낡고 오래된 모서리도 보았다

그가 흰사슴을 보았을 때 날카로운 꼬챙이가 그의 눈을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정신없이 팔을 휘둘렀다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계들을 잠재우지 않으려

 

한때 그에게 단단히 손목 잡혀 있던 시간들이 이제 그의 손목을 되잡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처녀들의 램프

---성(性)

 

그 램프는 세상의 동쪽 끝방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

세상은 그때 주변의 익숙한 사물과 함께 램프의 부드러운 빛 속에 있었다

 

누군가 훅, 뜨거운 입김을 불어 그것의 불꽃을 꺼뜨린다

빛들은 홀연히 램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이 그 이상한 동쪽 끝방에 갇혀 잇으리라 믿는 쳐녀들

끝없이 램프의 캄캄한 구멍 속을 훔쳐본다

얼룩수염을 가진 램프의 거인은

처녀들의 엷은 분홍 눈꺼풀을 덮고 잠들어 있다

동쪽 맨 끝방을 여는 오래된 열쇠는 거인의 헝클어진 수염 끝에 단단히 묶여 있다

 

호기심 많은 처녀들 램프의 작은 방울 찾아

하나둘 금지된 밤의 계단을 내려간다

라, 라, 라, 저 깊고 깊은 동쪽 끝방의 열쇠는 세상 모든 방들의 열쇠……

노래 부르며 가도가도 제자리인 그 계단을 내려가는 처녀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아침

램프는 울컥, 삼켰던 모든 것들을 제 그늘 안에 쏟아 놓는다

거인은 사라지고 동강난 열쇠와 녹슨 정조대, 부러진 새들의 발목

호호백발 백년 전의 처녀들만 햇빛 아래 소복하다

 

그 램프는 깨지지 않는 처녀들의 작은 성채

세상의 동쪽 끝방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

 

연애

 

우리 사이에 리본 매듭만한 짧은 길이 있었다

어느 날 이 길가에 흐린 외등이 깜빡 켜졌다

불면의 밤이 흠칫 놀라 서너 발짝 뒤로 물러났고

길은 몇 자쯤 더 길어진 골목길이 되었다

 

그로부터 당신과 나 아비규환의 날이 시작되었다

당신 발등에 꽃밭이 생기고 내 발목에 환히 복사꽃 피었다

내 정강이에 앵초꽃 피고 당신 허벅지의 물수국 잎을 터뜨렸다

그만큼 더 멀어진 길모퉁이에 전에 없던 빈집 한 채 보이고 전봇대가 껑충 몸을 일으켰다

 

당신과 나 아비규환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돌멩이가 발끝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밤고양이 그늘에 숨어 담벼락을 할퀴었다

당신 등에 푸른 멍 그늘나비 내 옆구리에 생채기 해당화꽃

내 혓바닥엔 상한 구절초꽃이 당신 어깨엔 침묵의 검은 새가 날아와 앉앗다

길은 이제 뒷걸음쳐 달아나는 지루한 길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이 길로 서로 다른 계절이 와서 다른 눈들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길 초입에다 누가 후사경을 세워두고 갔다

 

---사물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