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67 조선 선비 살해사건
이덕일 지음
2006, 다산초당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1359
911.05
이24조 1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4대 사화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
그동안 몰랐던 4대 사화를 둘러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반목을
손에 땀이 날만큼 생동감 있고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그만두어라. 어찌 나 혼자 살자고 상왕 전하와 동지들을 배신하겠는가."
_박팽년이 회유하는 세조에게 전한 말
"나리가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지 않았소. 나 삼문은 남의 신하가 되어 차마 군부가 폐출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상왕 전하를 다시 복위시키려 한 것이오. 나리가 평일에 자신을 곧잘 주공에 비유했는데 주공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뺏은 적이 있었소? 내가 이 일을 한 것은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나는 상왕 전하의 신하이지 나리의 신하가 아니오."
_국청에 나간 성삼문이 남긴 말
둥둥 치는 저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네 /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 하니 / 오늘밤에는 누구의 집에서 잘꼬
_성삼문이 형장으로 향하면서 읊은 시
임이 주신 밥 먹고 옷을 입었으니 / 일평생 그 마음을 어길 수 있으랴 /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나는 아네 / 현릉의 소나무 잣나무가 꿈속에 아른아른거리누나
_성승의 절명시
우 임금 솥처럼 정사가 무거울 때는 삶 또한 크지만 / 기러기 털처럼 가벼울 때는 죽음 또한 영화로세 / 새벽도 덜 깼는데 문 밖에 나서니 / 현릉 송백만이 꿈속에도 푸르구나
-이개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시
이덕일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북항일연군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객관적이고 풍부한 사료와 흡인력있는 문체를 토대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한국사의 디양한 쟁점을 소재로 한 저서들 중 특히 《조선 왕 독살사건》은 인종, 선조,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소현세자 등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왕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역사서 붐을 일으켰다. 역사의 이면을 넘어 그 의미까지도 생각하게 해준 《조선 왕 독살 사건》은 역사저술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역작이다. 그 외 조선 당쟁사의 심장부를 다룬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사도세자의 고백》,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보여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비롯하여 불운한 천재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인물들을 복원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의 여인열전》, 《조선 최대의 갑부 역관》, 《장군과 제왕》등의 저서가 있다.
1권 주요 등장인물_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온건개혁파의 영수.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렸던 성리학자. 공민왕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성리학 발전에 공이 있었다. 이성계가 즉위한 후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며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거절해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의 영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362년 예문관 검열수찬으로 관적에 진출했다. 1380년에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도와 전라도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지지했으며 우왕을 축출하고 공양왕을 지지한 공로로 익양군충의군에 봉군되었다. 고려 왕실의 존속을 주장한 그는 역성혁명과 신흥사대부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인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 태종 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조선 개창을 주창한 개혁사상가이자 혁명가.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나 배원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 의해 유배되었다.
약 8년에 걸친 귀양 및 유랑생활 후 스스로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참모가 되었다. 이성계에게 새 왕조 개창의 당위성을 주장했으며 위화도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했다. 권문세족의 토지 몰수와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를 주장했으나 보수파의 반발에 밀려 신흥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전법을 시행하는 데 머물렀다. 개국 일등공신으로서 그는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 지도 이념으로 내세우려 했다. 명나라의 부당한 간섭에 반발해 요동정벌을 추진하면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의 왕위계승을 지지하다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 방원에게 살해되었다.
우재吁齋 조준趙浚 1346~1405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조인규의 후손으로, 권문세족이었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지지했다. 위화도회군 이후 대사헌으로 문란한 토지제도의 개편을 주장했다. 공양왕 3년(1391)에 정도전과 함께 사전개혁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과전법을 단행함으로써 신흥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조선 개국 일등공신에 책봉된 후 왕위계승문제와 요동정벌문제에서 정도전에 반대하고 이방원을 지지했다. 태종 즉위 후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박포朴苞 ?~1400
조선 개국 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정사공신 이등에 봉해지자 불만을 품었다. 태조의 4남 방간과 함께 방원을 제거하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참수되었다.
하륜河崙 1347~1416
공민왕 때 벼슬길에 올라 1388년 최영이 요동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유배되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 복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명나라와 표전문 시비가 일자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주장해 이후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좌천되기도 했다. 방원을 적극 지지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사공신 일등이 되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일등이 되었다. 그뒤 영의정부사 · 좌정승 · 좌의정을 역임했는데,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를 착복해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심온沈溫 1375~1418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즉위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태종에 의해 사형되었다. 세종의 친정 이후인 1426년에 관작에 복구되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1365~1420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방원을 도운 공이 컸다. 1400년 11월에 방원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즉위 초부터 후궁문제로 태종과 불화를 빚었으며, 동생인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태종과의 관계가 더욱 심각해졌다. 민무구 형제가 끝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된 것은 원경왕후의 지나친 투기와 불평 때문이기도 했다. 그뒤로도 자주 불손한 말을 함으로써 태종의 분노를 사 폐비될 뻔하기도 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해 후덕왕대비로 봉해졌다.
민씨閔氏 형제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인 무질 · 무구 · 무휼 · 무희를 이른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대장군과 장군으로서 매형인 방원을 도와 방석을 지지하는 정도전 세력을 거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방원이 즉위한 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여 4형제를 모두 사사했다. 원경왕후도 폐비될 뻔했으나 세자 양녕과 충녕 등의 친어머니인 점이 감안되어 무사했다.
이숙번李叔蕃 1373~1440
태조 2년(1393) 문과에 급제한 뒤 방원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방석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이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박포가 방원과 반목하던 방간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한 공으로 좌명공신 일등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국왕에게 불충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결국 관작을 삭탈당하고 태종 17년(1417)에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1390~1453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한 후 세종 15년(1433) 함길도 관찰사로 여진족의 국경 침입을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해 국경선을 두만강까지 넓혔다. 병약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정승의 지위로 단종을 보좌했으나, 계유정난 때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영조 22년(1746)에 복관되었다.
압구정鴨鷗亭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수양대군의 모사. 단종 1년(1453) 음보蔭補로 태조의 개경 잠저를 지키는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으며, 현실에 불만을 품고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을 도왔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를 작성해 단종을 보좌하는 구신舊臣들을 살해했다. 정난 후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켰다.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아버지이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세조가 죽은 뒤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여 왕권을 능가했다.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어놓고도 은퇴하지 않는다는 풍자를 받기도 했다.
권람權擥 1416~1465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며 한명회 등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며 회포를 나누었다. 1450년 향시와 회시에 모두 장원급제했다. 《역대병요》를 편찬할 때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수양이 동지를 규합할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무사들을 규합해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해 정난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누렸다.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세종 20년(1438)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에 들어간 후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대부분의 집현전 학사들이 수양대군의 즉위에 반대했으나 그는 세조를 지지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후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사육신死六臣
세조 2년(1456), 수양대군에 의해 쫓겨난 단종의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사형된 여섯 신하들. 박팽년 · 성삼문 · 유성원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를 이른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도 사형되었으나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의 《육신전》과 조선 후기 송시열의 《육신사기六臣詞記》등의 영향으로 사육신에서 빠졌다. 이들은 모두 무덤이 없으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근처를 '사육신묘死六臣墓'라고 부르는 까닭은 정조 6년(1782)에 그곳에 '육신묘비六臣墓碑'를 세웠기 때문이다.
생육신生六臣
사육신에 대칭하여 세조 밑에서 벼슬하지 않고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여섯 신하들. 곧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을 이른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죽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파가 등장해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시애李施愛 ?~1467
함북 길주의 토호. 전통적으로 북도北道의 수령은 지방 토호가 임명되었는데, 세조가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하고 호패제도를 강화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자 아우 이시함과 지방세력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기세를 떨쳤으나 귀성군 준과 남이 등이 이끄는 토벌대에게 패배한 후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홍윤성洪允成 1425~1475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등을 역임하다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가담해 정난공신이 되었다. 이후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내면서 공신의 직위를 남용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예종 즉위 후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했다.
남이南怡 1441~1468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의 손자로서 태종의 외증손이다.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자 세자인 예종이 그를 꺼렸다. 예종 즉위년에 유자광의 모함으로 강순康純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차 례
선비정신의 부활을 꿈꾸며……
1권 주요 등장인물
01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정도전과 이성계, 역사를 바꾼 만남
공민왕 시해사건과 명 사신 살해사건
천민마을에서 싹튼 혁명사상
정도전의 승부수
02 낡은 세력의 몰락
폐가입진의 논리
최영의 최후
조민수를 제거하라
토지문서를 불사르다
03 고려를 구하려는 마지막 몸부림
이성계를 제거하라
동지에서 정적으로
04 새 왕조의 개창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삼부자의 최후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
05 부서진 제국의 꿈
개국공신들의 회맹
사병을 혁파하라
정도전의 위기
중원의 황제를 꿈꾸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06 백주에 벌어진 왕자들의 시가전
갈리는 개국공신들의 운명
형제의 서로 다른 야심
제2차 왕자의 난
개혁은 사라지고……
07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의 나날
태종 부부의 동상이몽
태종의 양위 소동
민씨 집안의 비극
사사된 민씨 형제
남은 두 형제마저……
대궐 담을 넘은 세자의 풍류행각
장인은 사사되고 장모는 노비가 되다
08 태평성대의 그늘
악법도 법이다?
태종의 최대 치적은 '세종'
조선의 르네상스
09 요절한 성군 문종과 비극의 소년왕 단종
병약한 형과 강성한 동생들
재상들의 섭정
풍운아 한명회, 수양대군을 만나다
북경으로 간 수양대군
명분 없는 쿠데타와 살생부
피의 대가
10 선비가 사라진 공신들의 나라
바람 앞의 촛불
상왕 복위 계획
영월을 적신 슬픈 노랫소리
자기 정당화를 위한 신화들
끝없는 반란과 옥사
01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왕이 말했다.
"내가 내일 창릉昌陵에 배알하고 거짓으로 주정을 부려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을 막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만생이 두려워하여 이발 밤에 홍륜, 권진, 홍관, 한안, 노선 등과 모의하고
왕이 술에 몹시 취한 것을 틈타 칼로 찌르고는 부르짖었다.
"적이 밖에서 들어왔다."
_《고려사절요》'공민왕 23년 6월'조
▲ 공민왕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원나라에 의해 충정왕이 폐위된 후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원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1365년 부인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결국 홍륜 · 최만생 등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 도담 삼봉 정도전은 단양 도담 삼봉 중앙봉에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한 것도 도담 삼봉에 연유한 것이다.
▲ 나옹대사와 무학대사 고려말의 고승이었던 나옹대사(위)와 제자인 무학대사의 모습. 특히 무학대사는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02
낡은 세력의 몰락
조민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단기單騎로
태조(이성계)에게 나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공이 가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고 말했다.
_《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1390) 9월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公私田籍]를
도성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
_《고려사》'석화'조
▲ 위화도 압록강의 하중도河中島로 의주 하류 쪽에서 2km, 신의주에서 상류 쪽 2km 지점에 위치한다. 고려시대에는 대마도大麻島라 하여 국방상 요지였다. 우왕 14년(1388)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이곳에서 회군을 단행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계기를 마련했다.
▲ 최영
▲ 최영의 무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신념을 지키며 평생 청렴하게 살았던 최영의 무덤에는 그가 죽기전에 남긴 말처럼 조선왕조 500년간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소재.
▲ 개성 만월대 고려의 궁전터. 중앙에 회경전會慶殿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궁성 동쪽 벽까지 약 135m, 서쪽 벽까지 약 230m이며,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昇平門까지 약 250m이다. 1361년 모두 불탄 후에 폐허로 남아 있다.
▲ 가을 들판 무신란 이후 고려의 토지제도는 권문세족들의 농장확대와 사원전寺院田의 팽창으로 문란하기 이를데 없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공양왕 2년(1390)에 종래의 공사전적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이듬해 새로운 전제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 새 왕조 개창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03
고려를 구하려는 마지막 몸부림
회군한 뒤에……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저해하여
마침내 창昌을 세워서 왕씨를 부흥하지 못하게 한 자가 있으며,
신우辛禑를 맞아다가 길이 왕씨를 끊어버리려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난적의 무리로서 왕법王法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_《삼봉집》'공양왕에게 올리는 상소'
▲ 조민수의 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창녕에 유배된 조민수는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 무열사 조선 정조 21년(1797)에 나주 유림의 발의와 전국 각 향교의 도움으로 건립된 사당으로 통합 삼한 일등공신 무열공 배현경(?~936), 금헌 배정지(1259~1322), 조선개국 일등공신 정절공 배극렴(1335~1401)의 삼위를 모셨다. 전주 나주 소재.
▲ 선죽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해 숨진 곳. 처음 1216년 이전에 다리를 만들었을 때는 '선지교'라 불렀다가 사건 후 주위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 '선죽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04
새 왕조의 개창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입니다.
신 등이 지난번에 공양군 삼부자에게 천주天誅를 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낭패를 견딜 수 없습니다.
…… 즉시 유사로 하여금 위 사람들과 그 처자, 동생, 조카까지
섬으로 옮겨 사단을 미연에 방비한다면 종사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_《태조실록》3년 2월 21일
▲ 이성계
▲ 공양왕릉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이성계에 의해 창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공양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로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되었다.
▲ 선원록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또는 '선원보략璿源譜略'이라고도 불리는 왕실의 족보.
▲ 공주 동학사 삼은각 원래 이곳은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가 동학사의 승려 영월影月 · 운선雲禪과 함께 단을 쌓고 고려의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낸 곳이다. 그러다 고려의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정종 1년(1399)에 이곳에서 정몽주와 이색의 초혼제를 지내고, 세종 3년(1421)에 유방택柳芳澤의 아들 유백순柳伯淳이 길재를 추가로 모셔 삼은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 정선 칠현사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 등 고려의 일곱 충신이 은거하던 거칠현동 어귀에는 칠현을 기리는 비석과 사당 칠현사七賢祠가 세워져 있다.
05
부서진 제국의 꿈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조준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태상왕이 마침내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으니,
조준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_《태종실록》5년 6월 27일. '영의정부사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의 졸기'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으로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
_《태조실록》7년 8월 28일
▲ 남재왕지 동생 남은과 함께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남재는 동생과는 달리 평탄하게 영의정까지 지냈다. 이 문서는 태종 15년(1415) 남재에게 '수문전대제학세자시修文殿大提學世子侍'라는 관직을 제수하는 국왕의 명령서로서, 원본은 아니고 나중에 베껴 쓴 것이다.
▲ 개국원종공신녹권 태조 6년(1397) 10월 왕명으로 내린 문서로, 사재부령司宰副令 심지백에게 개국원종공신 3등에 봉하고 내린 녹권이다. 공신은 정공신과 원종공신으로 구분되고 정공신은 1등에서 4등, 원종공신은 1등에서 3등으로 나뉘는데 조선 초기, 정공신에게는 교서와 녹권을 함께 주었으나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 주었다.
▲ 주원장 한반도가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새로 들어서는 과도기에 있을 때 중국 대륙 역시 이민족이 세운 원왕조가 쇠퇴하고 한족이 세운 명 왕조가 세력을 키워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그림은 빈농 출신으로 각지의 군웅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모습이다.
▲ 정도전
06
백주에 벌어진 왕자들의 시가전
방간이 선죽교에서 가조가可祚街에 이르러 군사를 멈추고, 양군이 교전하였다.
방간의 보졸 40여 인은 마정동馬井洞 안에 서고,
기병 20여 인은 전목 동구典牧洞口에서 나왔다.
정안공(방원)의 휘하 목인해睦仁海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화살에 맞아 즉사하였다.
방간의 군사가 다투어 이숙번을 쏘았다.
이숙번이 10여 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다.
_《정종실록》2년 1월 28일
▲ 진양부원군 신도비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 등의 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다. 경남 진주시에 소재한 이 비는 하륜의 아버지인 하윤린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 비를 세운 이후 왕실주변의 권력층을 중심으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 양촌삼대부조묘 고려말, 선초의 학자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던 권근(1352~1409)의 묘역. 권근의 묘역에는 아들 권제와 손자 권람의 묘도 함께 있는데 권제는 세종대에 집현전 부제학, 대사헌,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권람은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지냈다.
07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의 나날
집안과 나라 다스리는 일을 논한다면
궁궐 가까이에 외척을 들이는 것은 임금의 소견이 좁은 탓이다.
지금 나라가 평안하여 내외에 걱정할 것이 없지만
외척의 폐단을 잊으면 훗날 다시 발생할 것이다.
_태종이 내린 교지
"과연 내가 전일에 말한 바와 같이 그 진상이 오늘날에야 나타났구나.
마땅히 대간大姦을 제거하여야 될 것이니, 이를 잘 살펴 문초하라."
_《세종실록》즉위년 11월 23일
▲ 이거이의 묘 이거이는 조선 왕조 건국에 공이 있어 태조 2년(1393)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종 2년(1400)에는 사병제도 혁파에 반대하다가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공신이 되었고, 이후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 태종실록
▲ 숭례문 현판 양녕대군의 글씨.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 현판이 없어져서 다른 현판을 달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도 현판이 붙어 있지 않아 한동안 남대문에는 현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광해군 때 청파의 배다리란 곳에 있는 웅덩이에서 서기瑞氣가 올라와 물을 퍼내니 밑바닥에 양녕대군이 친히 쓴 숭례문의 현판이 나왔고 이 현판을 남대문에 달았더니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 태실 조선 왕실은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명당을 물색하여 태를 묻었다. 경북 성주군의 이 태실은 세종대왕이 적서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용되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는 등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 심온의 사당 심온은 세종의 장인으로 1418년 태종이 선위하여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이때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귀국 후 사사되었다. 사진은 경기도 소재한 심온의 사당이다.
08
태평성대의 그늘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서 이와 같은 수령을 임용했다."
_《세종실록》6년 4월 4일
"간원들이 이선을 서열이라 하여 과거의 응시를 정지시키라고 주청하였다.
임금의 자손을 서얼이라 일컬어 벼슬길을 닫아 막으려고 하였으니,
그들의 정상과 사유를 추국推鞠하여 아뢰어라."
_《세종실록》14년 4월 4일
▲ 낙천정 태종이 왕위를 물려준 후 수시로 머물던 이궁離宮. 좌의정인 박은이 주역계사周易鷄捨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를 따서 낙천정이라 이름 붙였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 소재.
▲ 용비어천가
▲ 자격루
▲ 측우기
▲ 앙부일구
▲ 휴대용 앙부일구
▲ 혼천의
태종 최대의 치적은 '세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종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세종은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마련했고 한글 창제를 비롯,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09
요절한 성군 문종과 비극의 소년왕 단종
문종이 승하할 때 세자는 어리고 종실은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에게 특히 명했다.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
_《야언별집》
"두루 옛날의 일을 보건대,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았고,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여러 사특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붙어서 불우不虞한 화가 항상 일어났습니다.
그때 충의로운 신하가 있어서 일어나 반정反正을 한 뒤에야
그 어려움이 곧 형통해지니, 이는 천도天道의 자연스러움이라고 하겠습니다."
_《단종실록》1년 3월 21일
▲ 《해동명적》에 실려 있는 문종의 글씨
10
선비가 사라진 공신들의 나라
"사기, 즉 《세조실록》에 말하기를
'노산이 영월에 있다가 금성대군의 옥사를 듣고 자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불장난이다.
도대체 훗날 실록을 편찬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좇던 무리들 아닌가."
_《음애일기》
▲ 경복궁 전경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 경복궁 수정전 경회루 남쪽에 자리한 수정전은 국왕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 혹은 편전 등의 용도로 쓰였던 건물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 9월 이곳에서 훈민정음이 창제되기도 했다.
▲ 오공신회맹축 세조 2년(1456)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후 세조는 민심을 다잡기 위해 개국 · 정사 · 좌명 · 정난 · 좌익공신 등 개국 이래 모든 공신들을 소집하여 회맹고유문을 작성하고 양녕 · 효령 · 임영 · 영응대군 등 종친을 비롯, 정인지 · 신숙주 · 권람 등 모두 157명의 서명을 받아 오공신회맹축을 완성했다.
▲ 청령포 영월 8경의 하나로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다. 단종은 동 · 북 · 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남쪽은 육륙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는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다.
▲ 자규루(매죽루) 단종이 영월에 유배된 그해 여름에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 일대가 침수되자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고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을 달래다 같은 해 10월 눈을 감았다.
▲ 금성대군의 금성단(단소) 단소는 시신 없는 무덤이나 죽은 자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금성단은 숙종 45년(1719)에 설치되었다. 경북 영주 소재.
▲ 호패 지금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것이다. 그 기원은 원元나라로 태종 13년(1413)에 처음 전국적으로 시행되어 호적법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목적은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계급을 분명히 하는 한편,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 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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