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2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수연산방 안마당에 성북동 골짜기의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이태준, <달밤>
작가 이태준이 살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집필한 곳. 수연산방.
성북동 안골짜기라면 물 맑고 공기 좋고 여름엔 나무 그늘 푸지고 겨울엔 솔바람 소리 그윽하고 살면 살수록 정이 드는데다 거기 또한 이웃까지 좋고 볼 양이면 따로 낙지(樂地)를 구할 생각조차 날 리 없다.
석운과 나는 이와 같은, 낙지 부럽지 않은 행복한 지대에 십 년 동안을 이웃하고 살았다. 재 직업이 비록 A출판사의 편집원이라고는 하나, 성미가 본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다 학교 적에는 미학을 전공했고, 취미가 또한 서예에 잇는 지라 사의 일만 끝나면, 한시바삐 시내의 혼탁한 공기와 착잡한 소음을 벗어나야겠다는 듯이 이내 집으로 돌아오는 버릇이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집을, 나의 집이라기보다는 나의 집이 있는 성북동의 깨끗한 자연과 석운이 있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다.
김동리, <청자>
심우장은 한용운이 거처하던 자그마한 집이지만 만해의 높은 기상이 서려 있기에
결코 작지 않은 집니다.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새암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건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의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한용운, 심우장 산시 1 <山居>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
소설가 춘원 이광수도 만해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만해는 원래 춘원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좋아하였는데, 그도 역시 창씨개명을 하자 몹시 실망하여 심우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명륜동에서 소설을 쓰다가 불교에 대한 것을 풀기 위해 고개를 하나 넘어 성북동 심우장으로 찾아온 것인데, 만해는 그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하고 문전박대를 한 것이었다.
정찬주, 《만행》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巖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잇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조지훈, <돌의 미학>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그러나 요사이 구보는 교외(郊外)를 즐기지 않는다. 그곳에는, 하여튼 자연이 있었고, 한적(閑寂)이 있었다. 그리고 고독조차 그곳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요사이,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구보 씨는 다섯시 반에 성북동에 있는 '유정'이라는 술집에 닿았다. 거기가 《성남동 까치》출판기념회 자리였다. 여느 술집과 마찬가지로, 가로가 긴 아크릴 간판을 단 한옥이었다.
(중략)
구보는 이런 얘기를 했다.
- 김광섭 선생의 《성남동 까치》는 60년대의 끝에 와서 문득 우리 문학의 하늘에 울린 길한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한국 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중략) 《성남동 까치》는 시에게 위엄과 점잖음의 옷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번쩍거리지도 절그럭거리지도 않는--목숨처럼 자유무애하고 자유인답게 점잖은 그런 옷입니다.
최인훈,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나는 참을 수 없이 그 분들이 내 할아버지라는 느낌이다. 그 분들의 핏줄과 내 핏줄이 하나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테면 1970년 5월 29일 저녁, 노인들이 환장하게 보고 싶어서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詩祭에 갔다가 들은 김광섭 선생의 답사 "나는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해서 시를 씁니다"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김광섭의 별이 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는 뜨끈한 물이 넘쳤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
정현종, <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의 말씀>
나는 뇌출혈로 메디칼센터에 입원하여 오랜 혼수 상태를 겪으면서 사경을 헤맸어요. 그 후 성북동 나의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따스한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 있었어요.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내 시적 생명은 끝났다는 절망감을 안고 있었지요. 그 때,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침마다 하늘을 휘익 돌아 나는 비둘기떼를 보게 되었지요. <성북동 비둘기>의 착상은 거기에서였지요. 둘 째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둘 째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 김광섭
병든 아내가 잠들어 있는
병원 5층의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은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5십 5년 전의 달밤 성북동에서
소년시인 함형수(滅亨洙)가 불고 가던
하모니카의 도리고의 세레나데 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함형수가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꼭 그 하모니카 소리만 같다.
서정주, <노처(老妻)의 병상(病床) 옆에서> 부분
흙냄새 나무냄새 맡으며 핥으며 땅을 기어가는 바람이 성북동을 찾아 산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올라간다 사장님들과 외국대사님들과 외국인 부사장님과 사장님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숲속에 모여 사는 성락원 일대 들어가는 길을 왼쪽으로 꺾어서 올라가노라면 캐나다대사관 공관 입구서부터 경사는 가팔라지고 다시 사장님들 저택 대문전을 지나서 외국손님 가득 가득 실은 관광버스가 매일 드나드는 우거진 숲속 대원각쯤에서 숨이 차고 저녁이면 노란 꾀꼬리 처량한 뻐꾸기 울음 소리 아닌 노랫소리 트럼펫 소리 숲을 울리고
정한모, <성북산조(城北散調) 3>
성북동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관과 공관, 으리으리한 저택 등 담 높은 집이 많다.
그날은 안개 같은 이슬비가 뿌리고 있었다.
나는 제 시간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성북동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여름감기가 걸린 탓에 며칠을 두고 앓고 방금 일어난 터였다.
나는 틀림없이 그 부잣집 사모님이 한달의 봉급에서 내가 앓아누웠던 이틀치의 공백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주며 이제 우리는 다른 가정교사를 둘까 해요라는 따위의 은근한 거절선언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또 한 가지 언덕 위의 양옥집 부수는 작업이 이틀 동안 도대체 얼마 만큼 진전이 되어 있을까, 해부실에 걸려 있는 인체 골격 구조 표본처럼 앙상하고 볼품없게 뼈다귀를 드러내고 있을까라는 기대도 아울러 품고 있었다.
때문에 성북동 그 길고도 긴 언덕길을 올라가는 나의 걸음은 열쇠구멍으로 다가가는 듯한 아슬아슬한 전율과 흥분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최인호, <무너지지 않는 집>
성북동에 있는 사장의 집은 성벽 같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늦게 돌아오게 될지 몰라 산업체 학생들은 빠지라고 했지만 윤희와 순옥은 한사코 따라나섰다. 까짓놈의 학교 때려치지 뭐, 하고 호기까지 부리며 쫓아나섰던 순옥은 그날 있은 중간고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담장 안은 들여다보이지도 않았고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쥐새끼 한 마리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원목을 켜서 만든 대문은 서른명이 달라붙어 밀어젖혀도 꿈쩍 않았다. 행여 그들과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맞은편 담벼락 쪽으로 달라붙어 지나가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그리고 가끔 지나는 광택을 잘낸 고급승용차들과의 거리만큼이나 순옥은 자신의 초라함을 사장집 대문 앞에 주질러앉아 확인해야 했다.
방현석, <새벽 출정>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당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이렇게 조용한 곳이 예전에는 '노랫소리 트럼펫소리 울리는' 요정이었다.
지금은 고즈넉하여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곳. 길상사.
거기서 무엇이 보이느냐.
저 문 뒤
바람도 보이느냐.
맞은편 하늘로 길은 사라지고
모든 지붕은 멀리 사라지고
어디서 흐린 마치 소리가
진종일
뼈의 집을 짓고 있다.
햇빛은 등뒤에서 한결 뚜렷하다.
몇 사람은 흙 속에서
구름과 함께 서성이고
뒤뜰에는 자주 기침하지 않는 하느님
한겨울 쉬었다가 내리는 눈
때없이
죽은 아비의 혼도 날아다닌다.
불치의 병을 기다리는
나의 새벽이
순라꾼의 맨발을 기웃거리고
누군가 저 산그늘 밑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강은교, <성북동>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그가 아내를 흔들었다. 드러누운 아내가 힘없는 눈을 간신히 떠본다. 그녀 앞에는 누더기에 싸인 핏덩이가 꼼지락거리며 모친의 젖을 물고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아기를 받고 국밥을 먹이고 불을 피워 보호해 주고 있다.
이기영, <산모>
사직공원은 도심에서는 드물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오 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 벤치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 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신동엽, <3월> 부분
아무런 건물도 없이 제단만 모셔져 잇는 사직단의 모습에서 무언가 신성한 시운이 느껴진다.
새벽의 사직공원 안은 서늘하기도 하거니와 휭하게 널찍해 보였다. 산 중턱에 아침 산보하는 사람이 더러 눈에 띄었다. 영아는 미끄럼틀 옆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신문팔이에게서 조간 한 장을 사서 펴들었다. 신문의 잉크 냄새가 어쩐지 신선하게 코를 찔렀다.
이호철, <4월과 5월>
아직싹트지않은이른봄건강이없는그는오와사직공원산기슭을같이걸으며오가긴히이야기해야겠다는이야기를듣고있었다. 너무나뜻밖에일은--오의아버지는백만의가산을날리고마지막경매가완전히끝난것이바로엊그제라는--여러형제가운데이오에게만단한줄기촉망을두는늙은기미호걸의애끓는글을오는속주머니에서꺼내보이고-저버릴수없는마음이-오는운다
이상, <지주회사>
쪽대문을 열어 놓으니 사직공원이 환히 내려다 보인다. 인제는 봄도 늦었나 보다. 저 건너 돌담 안에는 사쿠라 꽃이 벌겋게 벌어졌다.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돋고, 새침히 옷깃을 핥고 드는 요 놈이 꽃샘이겠지. 까치들은 새끼 칠 집을 장만하느라고 가지를 입에 물고 날아들고…….
이런 제기랄. 우리 집은 언제나 수리를 하는 겐가, 해마다 고친다. 벼르기는 연신 벼르면서 그렇다고 사직골 꼭대기에 올라붙은 깨끗한 초가집이라서 싫은 것도 아니다.
김유정, <따라지>
사직공원에서 벚꽃의 낙화가 난분분한 게 바로 엊그저께 같은데 인왕산 줄기를 아카시아의 안개구름이 젖비린내를 풍기며 피어오르고 나면 곧장 장마가 지고 여름이었다.
박완서, 《미망》
서울로 이사를 와서 행촌동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한 이삼일 뒤의 일이다. 그날 나는 딸 옥환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잠시 문안에 들어갔다가 나왓다. 그동안 집은 아내 혼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인, <사기사>
우리나라 전통기법으로 돌을 쌓아 만든 독립문. 여기서 말하는 독립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청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표적이던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다 반대인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십일월십사일에 독립문 정초식(定朧式)이 있었는데, 이날 독립협회가 조직이 되었다. 개혁과 자주독립에 열기를 가진 많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독립협회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채만식, <여자의 일생>
미국사람이 경인철도 시설권 얻고, 노국인(러시아사람)이 경원, 경성 광산채굴권 얻고, 무산 압록강 유역, 울릉동 산림벌채권 허가받고, 노한은행 지점 개설되고, 경인철도 시설권은 미국 사람 손에서 일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경부철도 시설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뿐이오니까, 금성 당현금광이 독일인 손에 들어가고, 영국기사 설계로 덕수궁 석조전이 아가리 벌려 하품하는 백돼지처럼 서고, 이 판이 아니더이까. 이 판에 영은문이 헐리면 어쩔 것이며, 독립문이 선들 어쩔 것이며, 장안신사 서른 명이 모여들어서 독립협회 간판 내거니 무삼 소용이며, 몇몇 사람이 똑똑한 소리 몇 마디 해서 어쩔 것이며, 눈을 뜨고 깨어나고 세계로 나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오니까.
이호철, <1기 졸업생 3>
백상충과 장경부는 사직골 언덕길을 넘어 독립문을 비껴돌았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을 영구 독립국가로 선언하려 1897년에 완공한 독립문을 바라보는 백상충의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이완용은 3년 뒤에 매국노로 변신했으니 독립문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셈이었다. 민중계몽운동을 주장하며 대의민주정치를 표방했던 독립협회는 개화지식인 애국지사가 주축이 되었으나 회원 중에는 기회주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문을 세울 당시 들끓었던 민족자존(民族自尊)의 드높은 외침은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됨으로써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김원일, 《늘푸른 소나무》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허는 덴가요?"
심훈, <상록수>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제아무리 충직한 함경도 물장수 김서방도 그 겨울의 지독한 눈구덩이만은 헤칠 엄두가 안 났던지 자주 물장사를 걸렀다. 그러나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안마당, 바깥마당, 장독대, 지붕 위에 지천으로 쌓인 눈을 퍼다가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만 지피면 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우린 우리의 완벽한 은신을 감지덕지할 줄만 알았지 그 허점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쓴 일단의 인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주둔하고 잇는데 거기서 산동네를 쳐다보면 매일 아침 저녁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는 집이 몇 집 있더라는 것이었다. 연기 나는 집을 하나하나 다 뒤져 봐도 재수없게 다 죽게 된 늙은이 아니면 병자가 고작이더니 이 집엔 웬 젊은 여자가 다 있냐고 마침 문을 열어 준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중략)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국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잇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김남천, <경영>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하면서…….
붉은 벽돌의 높은 담, 서대문형무소의 우중충한 풍경은 서희 마음을 짓누른다. 이곳 풍경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잿빛이엇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그 가족의 마음처럼,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길상의 건강이 그런 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 옥색 명주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쏟아지는 눈물을 훔친다.
박경리, 《토지》 제3부 3권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감옥을 둘러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해오는 듯하다.
형무소 넓은 뜨락에 물결처럼 사람들이 넘실거린다.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너절한 양쪽 길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인다. 찌부러진 국숫집, 빵집이 번창한다. 형무소 뜨락에도 매점 이외 떡장수, 고구마장수가 목판을 벌여 놓고 있었다.
도둑과 살인자와 사기꾼 그리고 정치범들이 살던 붉은 벽돌집은 지금 반역자들로 가득 차고 광장에는 그 반역자들의 가족으로 가득 차 잇다. 꽃시절이 되면 창경원 울타리 밖에까지 매표구를 늘여 한철을 재미보는 것처럼, 꽃바람은 가고 지금은 초겨울, 누더기 걸친 구경꾼 아닌 가엾은 무리들이 임시로 마련된 창구 앞에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아침에 학교 가려고 나왔다가 아파트 앞에서 나는 체포되어 다시 감방에 처넣어졋다. 재수감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문민정부에서도 이럴 수가 있냐고 물었고, 곧 나는 후회했다. '문민정부'라는 말이 뭘 구걸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五舍下 감방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구서대문구치소 일대가 유적지 보존 조치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사형장 앞에 주차된 웬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려 했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멀리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된 1980년 7월 2일 오후 1시의 햇살을 받아 독립문 아치 하늘이 어떤 영원감을 잠시 보여주고 지나갔다.
황지우,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 부분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프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지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命名)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룻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략)
이양하, <신록 예찬(新綠禮讚)>, 《조선일보》(1937)
청송대에서는 소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시절>
본관 앞 백양나무. 옛날에는 이 나무가 하얗게 줄지어 서서
길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양나무를 시간의 나무라 부른 옛 부족이 있었다
갈잎나무 잎사귀 거죽이 한밤처럼 검푸르고
뒤쪽은 대낮같이 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족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필시 삼세 번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나무 잎새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시인 부족을
사방 오랑캐가 가만둘 리 없으므로
세상은 항상 개판이었고 역사는 언제나 비가(悲歌)이므로
무참한 무참한 서사(敍事)이므로
유종호, <언제나 비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적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옆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 때까지 밖은 휘양한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질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뚜라미 울음 뿐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닌가?
(중략)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누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 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인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장철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겉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홀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나는 영안실 입구의 전광판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호텔처럼 죽은 자에게도 각자의 방이 있었다. 이 세계는 혹시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신생아실에서 태어나 교실에서 배우고 소주방에서 술 먹다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채팅방에서 채팅하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잠드는, 그리고 끝내는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서 마감하는 삶.
김영하, 《퀴즈 쇼》
사방팔방으로 그려진 건널목의 하얀 선들. 신촌을 누비는 청춘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그곳.
서울하고도 신촌에 80년대 초부터 있어온 술집이 있다. 신촌은 50년대에도 있었고(그때 그곳에 살아보지 않아 확실히는 모르지만) 60년대에도 있었을 것이고 80년에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촌에는 90년대, 그것도 세기말의 발작적이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잡지 같은 후반부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낮에는 유리와 플래카드로 분칠한 새 건물이 '비까번쩍'하고, 밤에는 요요한 불빛으로 휘황찬랑하다. 그러나 지금 거기에 분명히 70년대와 80년대의 먼지를 덮어쓴 채 삭아가는 집이 하나 있다.
성석제, <언젠가는>
(전략) 이들은 큭 머리를 맞대는 게 지겨워지면 남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문득 화장실에 다녀와서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어느 날은 로버트 드 니로가, 어느 날은 성석제가, 어느 날은 성원근, 기형도, 김소진이 먼저, 그들은 몸에 큰 오버코트를 입고 꼬부라진 혀로 인사를 하고는 무거운 문을 밀었다. 바깥에는 소란한 90년대가 거센 연기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과 별 사이에서 차갑고 더러운 눈, 물이 막 걸음을 떼려는 소년들의 이마에 떠어지곤 했다. 죽은 소년도 있었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소년도, 떠나지 못한 소년도 있었다.
모두 어른이 되었으리라.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끼리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언젠가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듯이.
시간도 사람도 포스터도 추억도 모두 사라지고 골조만 앙상한 '언젠가는'만 남는다. 그러니 인생이여, 부탁하노니, 즐겁게 춤을 추시다가 그대로 멈출 줄 알지어다!
성석제, <언젠가는>
산책 끝에 가볼 만한 곳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공씨책방, 숨어 있는 책,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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