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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03 2013-093-1 오래된 서울

2013-093-1 오래된 서울

 

예전 내 나이 열예닐곱 때에

이곳에 놀러오지 않은 날이 없었지.

바윗돌 하나 시냇물 하나도 모두 내가 가졌고

골짜기 터럭까지도 모두 눈에 익었겠지.

오며 가며 언제나 잊지 못해

시냇가 바위 위에다 몇 간 집을 지으려 했었지.

그대는 젊은 나이로 세상에서 숨어살 생각을 즐겨

나보다 먼저 좋은 곳을 골랐네 그려.

내 어찌 평생 동안 허덕이며 사느라고

이제껏 먹을 것 따라다니느라 겨를이 없었나.

싸리 울타리 서쪽에 남은 땅이 있으니

이제부턴 그대 가까이서 함께 살려네.

이 다음에 세 길을 마련하게 되면

구름 속에 누워서 솔방울과 밤톨로 배 불리세나.

- 장훈의 시 「우과천이군선옥계이거(偶過千二君玉溪移居)」 전문

 

맑고 얕은 옥계수

아늑한 청풍계 산기슭

천 년 전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의 놀이가

지금은 벌써 옛일이 되었네

아름다워라, 우리 시사의 글벗들이여

예전엔 우리 함께 대빗자루를 타고 놀았지

산이 높으면 물도 더욱 길어지니

우리 늙을 때까지 서로 좇아 노니세

- 천수경(1786년 7월 16일)

 

1791년 유둣날 옥계시사의 시회 결과를 담은 『옥계청유첩』(개인 소장)에 수록된 이인문(위)과 김홍도(아래)의 그림. 만년의 정선이 「인왕제색」을 그린 때로부터 꼭 40년 뒤 인왕산 기슭에서 벌어진 일을 담은 그림이다.

1950년대 말 김영상이 촬영한 '송석원' 바위 각자 사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진이 '송석원' 각자의 존재를 증언하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김정희는 청년기에 청나라에 다녀온 뒤 자신의 예산 생가 뒤 오석산 바위에 '송석원'과 비슷한 필치로 '소봉래'라는 각자를 새기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탁본).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이다.

최근 확인된 또 다른 '송석원' 바위 각자의 사진이다. 사진 위쪽의 '벽수산장'이라는 각자 왼쪽에 횡서로 '송석원' 각자가 보인다. 사진의 주인공은 윤덕영이다.

이완용의 옥인동 집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 만년의 이완용이 '순양식 2층짜리 건물'인 바깥채 앞에서 차남 이항구(뒷줄 가운데) 및 네 손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13일자 1면 머리의 사설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는 이완용의 죽음에 대한 논평이었다. 여기에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유명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아래는 이 사설이 일제 당국의 금지령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이 날치 신문 전체가 발매금지처분을 당하자 해당 사설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한 모습.

벽수산장과 송석원 일대의 1929년 모습. 필운동의 배화여고 쪽에서 건너다본 모습이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자에 실린 '경성소경 : 명물 아방궁'기사(위)와 1924년 7월 21일자에 실린 '내 동리 명물 : 옥인동 송석원' 기사(아래). 두 기사 모두 당시 10년 넘게 건축이 진행되던 벽수산장의 위용을 소개한다기보다 윤덕영의 행태를 비꼬는 데 집중했다.

벽수산장의 몇 안 되는 흔적 가운데 하나인 정문 기둥 세 개. 하나는 아래 사진 철망 뒤의 건물에 담벼락 일부로 묻혀 있다.

백운동 영역에 유일하게 남은 김가진 자신의 흔적이 바로 이 '백운동천' 바위 각자다. 몰몬교회 입구에서 100미터만 걸어 올라가면 바로 나온다. '몽룡정'과 같은 솜씨의 글씨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가로 길이가 6미터에 가까운 이 대형 각자의 끝에는 '광부7년 중추(中秋) 동농'이라는 관지가 붙어 있어 '몽룡정' 현판을 쓴 지 몇 달 뒤에 썼음을 알 수 있다.

 

병든 몸이 더워 식히려 계정溪亭에 묵던 중에

난간에 기대어 달을 기다리다 술을 잠시 잊었네.

일 많은 세상에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었지만

숲 아래서 그대를 보니 두 눈 가득 반갑네.

바람 불어오는 옛 골짜기엔 공허한 소리뿐이고

적막한 밤 찬 하늘엔 화성이 달려가누나.

문득 고개 돌리니 도성엔 연무煙霧가 가득한데

깊은 밤 잠들어 꿈속이라 몇이나 깨었을꼬.

- 「몽룡정 가을밤(夢龍亭 秋夜)」(1908년) 전문

경복궁역 근처 적선동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진 '김가진 집터' 표석.  그의 국내 마지막 거주지였던 체부동 86번지가 인근에 있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사직도 기울었는데

부끄러움 안고 죽음을 견디며 지금껏 살았구나.

늙은 몸이지만 아직 하늘을 뚫을 뜻이 남아

담숨에 높이 날아 만 리 길을 떠나가네.

민국民國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보랴

천라지망天羅地網 경계망을 귀신같이 벗어났네.

누가 알아보랴 삼등열차 안의 이 나그네가

누더기 걸친 옛적의 대신破笠敝衣舊大臣인 것을.

-김가진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 직후인 '대한민국 원년(1919년) 11월'에 발표된 '대동단 선언문'.  선언문 말미에 연호를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적었고, 단원 명부 첫머리에는 '이강(의친왕)', '김가진' 등의 이름이 선명하다.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에 있던 김가진의 묘비와 무덤.  '동농김가진선생지묘'라고 쓰인 묘비는 문화혁명 때 없어졌지만 무덤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김가진의 중국 상하이 묘지와 그의 아들 김의한의 북한 평양 '재북인사 묘역' 묘지, 며느리 정정화의 대전 '국립현충원' 묘지 등 세 군데로 나뉜 이들 일가족의 사후 이산은 우리 민족의 현실과 과제를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 건축과 재학시절(1926~29년)의 김해경.  그는 이 시절에 이미 '이상'이라는 별명을 사용했으며, 건축과 문학과 미술 모두에 관심을 쏟으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사진 속의 다양한 조소상들이 그의 다양한 면모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상의 절친한 동료였던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1935년).  이상을 모델로 했다. 이 그림은 '불가능'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상과 구본웅 두 사람 모두의 내면이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 옛 집터의 변화. 왼편은 1910년대의 지적도로서 154번지 전체가 이상이 살던 원래의 집터다. 오른편은 현재의 지적도로서 154번지가 분할되어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던한' 복장으로 1930년대의 경성 시내를 산보하는 이상(왼쪽)과 구본웅을 동시대의 화가 이승만이 그린 캐리커처.  '봉두난발'의 이상과 '꼽추' 구본웅이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면서도 함께 걷는 모습이 조화롭게 표현됐다.

구본웅의 「여인상」(1936).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구본웅의 야수파적인 터치가 느껴지지만 194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런 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1941. 5. 31) 전문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바람이 불어」(1941. 6. 2) 전문

이여성, 이쾌대 형제가 함께 등장하는 사진의 하나. 앞줄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여성, 뒤줄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쾌대다. 이쾌대 등이 중심이 돼 일제 말기에 조직한 신미술가협회의 1943년 전시회 개막식 기념사진이다.

이여성이 '조선 현실의 과학적 인식'을 위해 펴낸 『숫자조선연구』의 제2권과 제5권 표지

'청전(이상범)'과 '청정(이여성)'의 2인전이 동아일보 사우회 주최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1935년 10월 1!3일 열린다는 광고(왼쪽).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 조사부' 소속으로서 이여성은 부장, 이상범은 화백이었다. 2인전을 소개한 동아일보의 1935년 10월 2일자 기사(오른쪽). 전시 첫날 전시작품 100점 가운데 60점 이상이 예매되는 등 성황이었다고 한다.

이여성의 역사풍속화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격구」(1936년경). 비단에 채색한 90.5×87m 크기의 대작이다.

이쾌대가 도쿄의 제국미술학교 졸업반 시절이던 1938년 왕성한 창작열로 완성한 유화 작품들. 위는 「운명」(160×130cm, 제25회 이과 전 입선), 아래는 「상황」(160×130cm). 학창시절의 여러 가지 모색이 민족적 소재의 발굴과 동양화 풍의 기법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그의 그림들은 맑은 수채화 또는 동양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서양화(유화)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능력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옥외패션쇼의 결과물.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에 실린 고대 복식 사진의 하나다.

1940년대 초 신미술가협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던 화가들. 왼쪽부터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김종찬

이쾌대의 인물화 세점.  일본 유학시절(1934~39)에 그린 「자화상」(목판에 유채, 45.7×38cm, 위), 귀국 후 서촌의 궁정동에 살며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하던 1942년 무렵 그린 「자화상Ⅱ」(켄버스에 유채, 53×41cm, 가운데), 후자는 그의 인물에 대한 천착이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치 고구려 벽화 속의 인물이 튀어 나온듯한 느낌을 준다. 아래 인물화는 「자화상Ⅱ」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법으로 그린 형 이여성의 인물화(캔버스에 유채, 90.8×72.8cm)다.

이쾌대가 해방을 전후해 그린 「군상」시리즈 4점 중의 첫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이 작품을 1944~1948년에 걸쳐 그리면서 「해방고지」(181×222.5cm)라는 부재를 붙였다. 그의 신고전주의적 화풍과 동양화적인 화풍이 아주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쾌대의 「군상Ⅳ」(1948년). 미 공군의 독도 폭격으로 수십 명의 어민이 몰사한 사건이 작품의 계기가 되었다.

이쾌대의 자화상 가운데 남한에 현존하는 마지막 작품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49년). 형형한 눈빛과 붓을 꽉 잡은 손에서 그의 의지가 읽힌다.

김수임이 1930년대 말 세브란스 병원의 치과과장 비서 겸 통역으로 근무할 때 부스 과장과 함께 찍은 사진.

해방 후 모윤숙(앞줄 왼쪽 끝)이 주동이 돼 조직한 미국인 상대의 사교조직 낙랑클럽 회합 장면. 사진 뒤쪽 오른쪽 끝의 두 사람이 김수임베어드 대령이다.

1950년 6월 17일자 당시 한 일간지에 실린 김수임의 사흘째 재판 스케치 및 해설기사. 기사 제목들 가운데 "모(윤숙)여사 증인대서 진술", "김수임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매아미(매미)를 동무 삼던 고독한 여성" 등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일제시대 <조선일보> 시절의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벙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1953년) 전문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뭇 사나이들 머릿속 어지러웠다

가슴속 너울 일렁거렸다

 

1903년생

식민지시대

분단시대

미국

중국

남한과 북한

체코 등지를 망라

지치지 않는 스파이의 삶을 살았다

 

1910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박헌영의 친구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 공로자

현순 목사의 딸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시민권자 앨리스 현

컬럼비아대 졸업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 CIA 요원

 

앨리스와

그의 아우 피터 현

데이비드 현

세 남매는

 

1945년 매카시 사령관 비서였다

1949년

체코 경유

북한으로 들어가

박헌영과 합류

 

그녀는 미국 스파이였으므로

평양에서 처형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뭇 사나이들

그 매혹에 오만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었다

- 고은, 「앨리스 현」 전문, 『만인보』

 

앨리스 현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의 가족 사진. 중앙이 아버지 현순 목사, 그 왼쪽이 앨리스, 왼쪽 끝이 바로 아래 남동생 피터다. 1948년 9월 앨리스의 아들 웰링턴(오른쪽 끝)이 의학 공부를 위해 체코로 떠나기 직전 LA의 한 식당에서 가진 가족회식 자리였다.

『신천지』 1946년 5월호에 실린 앨리스 현의 「미국의 여성」 기사.

현순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직후의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앞줄 오른쪽부터 현순, 안창호, 신익희

앨리스 현이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22년 '정준'이라는 유학생과 만나 결혼한 뒤 별거 - 재결합 - 이혼을 거치는 과정에서 1927년 10월에 낳은 아들 웰링턴과 함께 찍은 사진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전시회의 브로슈어

위는 이중섭이 서울 누상동 시절에 그린 「길 떠나는 가족」(종이에 유채, 29.5×64.5cm). 그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 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 이 장면을 삽화식으로 여러 차례 되풀이해 그렸다.

 

통인동 뒷골목을 지나다 보니

옛날의 기와집

그대로 있고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서투르게 그려 놓은

마징가 제트

지금도 낙서가

여전하구나

 

개구쟁이 꼬마들이

30년을 그려 온

붉은 벽돌 담벼락의

재미있는 낙서들

지우고

또 지우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먼 옛날

어린 시절

 

커다란 대가리에

가느다란 손과 발

백묵으로 그리다 만

영이의 솜씨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아빠가 되고

영이는 엄마 되어

소꿉장난 하다가

싫증이 나면

영아는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 철수 바보 똥개

 

쫓아가서 지우면

화살표를 끌며

저만치 도망가서

영이는 백묵으로

화성인을 또 한 마리

그려 놓았다

 

쫓아가서 지우면

도망가서 그리고

쫓아가면

도망가고

지우면

그리고……

영이를 쫓다가

오후를 보낸 날은

꿈속에서도

약이 올랐다

 

어린 시절

되새겨 보니

아무래도 무엇인가

놓쳐버린 아쉬움

영이의 낙서를

지우려 하지 말고

영이의 뭉똑한

예쁜 손에서

그 하얀 백묵을

빼앗아야 했던 건데……

 

이제야 깨달은

먼 옛날의 어리석음

너무 빨리 크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지

자라지 않는

어른들은

그것을 모르지

- 김광규, 「영이가 있던 날」 전문

 

한때 그 가슴에 호랑이를 기르고

한양 도읍 오백 년 산자락에 펼치고

서울의 슬픔과 기쁨

소꿉장난처럼 내려다보던

장엄한 인왕산

아득한 할아버지의 고향

어린 날 올라가고 싶었던

헌칠한 미끄럼바위의

믿음직한 얼굴 어디로 갔나

맑은 물 돌 사이로 흐르던

가파른 골짜기 소나무 숲에 오늘은

깨어진 유리 조각 비닐 봉지 나뒹굴고

석유 냄새 풍기는 잿빛 아지랑이

큰 산을 가리고 아른거린다

그 억센 지맥도 이제는

동서남북 아스팔트길로 모두 끊기고

8백만 인구의 한가운데 갇혀

머지않아 쓰러질 듯

가쁜 숨만 헐떡인다

비쩍 마른 옆얼굴과

헐벗은 뒷모습 드러낸 채

종로구와 서대문구 변두리에 주저앉아

늘그막에 셋방살이를 하는

불쌍한 인왕산

- 김광규, 「인왕산」 전문

민정기 화백의 「인왕산」(천 위에 유채, 392×218cm, 6매 연작, 2007년). 서촌의 든든한 의지처이자 배경인 인왕산과 그 아래 서촌의 소박한 동네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서촌은 수백 년을 이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굳어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장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쫓는다

굽힘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런 후배

온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

우리의 잃어버린 이상을

새롭게 가꿔 가는

그의 힘찬 모습을 보라

 

그렇다

적선동에서 쓰러진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전문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