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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17 2013-10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2013. 9. 17. 10: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 · 김성연 글 / 홍상현 사진

2009, 터치아트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1696

 

816.7

허44ㅅ

 

이 책에 소개한 열두 개의 산책 코스는 서울에 숨결을 불어넣는 문학 속 장소들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각 코스는 대부분 4km 미만의 거리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의 울림이 큰 장소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실제 산책 시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또한 한 코스씩 독립적으로 걸을 수도 있지만 소공동과 종로, 광화문, 정동 일대와 같이 가까운 곳은 저마다의 취향과 일정에 따라 두세 코스를 연결해 걸어도 좋다.

서울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은 도시이지만 문학 작품 속의 정취를 보다 잘 느끼려면 특정한 계절에 길을 나서보는 것도 좋다. 가령, 연세대 코스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친 나무'로 통하는 겹벚나무에 꽃이 피는 봄이나, 신록이 만발하는 초여름에 걸으면 좋을 것이고, 산등성이에서 서울을 굽어볼 수 있는 남산길은 청명한 가을날이 좋겠다. 다정한 이와 함께라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성북동을 걸어 보고, 미술관이나 등록문화재 등 볼거리가 특히 많은 정동길은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도 좋다.

 

허병식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현재 계간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성연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연세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상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2005년 이후 세 번의 개인전과 여러 번의 그룹전을 열었고, 2008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일러스트 하세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나와서 프랑스 아를르 국립사진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이다. 설화나 전설처럼 오랜 옛날부터 깃들어 있던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중요한 장면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연출되었다. 100여 년 전 근대도시 경성에서부터 오늘날의 첨단도시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학을 통해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서울을 들여다본다.

문학이 보여주는 서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같은 모습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무척 낯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문학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좁은 골목길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게 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차 례|

 

|발간에 부쳐|

서울만의 이야기, 서울의 문화자원

 

|책머리에|

서울을 걸어 문학을 만나다

 

01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 보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08 부암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부록|

인용 작품의 작가 약력

 

01 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새로 지은 신관과 리모델링을 거친 본관이 함께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관이 바로 옛 미쓰코시백화점이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중략)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 <날개>

신세계백화점 본관

1930년에 완공된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꼬시백화점 건물이었던 본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재로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내부 인테리어의 현대적 감각을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앙계단을 그대로 보존하고, 옥상정원을 재개장하여 방문자 휴게시설과 조각물을 배치했다.

영업 시간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미8군 PX 아래층은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이 한국물산 매장으로 되어 있어 그 경영은 한국인 위탁업자들이 맡아 하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해먹을 것이 궁색한 전쟁중이라 그 위탁 판매장 맡아하기도 웬만한 빽이나 수완 없인 어림없다는 게 최사장의 말이었고 앞을 다투어 갖가지 업종--수예품, 유기그릇, 대그릇, 고무신, 피혁제품, 귀금속--이 다 들어앉은 뒤에 엉뚱하게도 밑천 한 푼 안 드는 초상화 간판을 들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상술이 아니라는 게 최사장의 자부였다.(중략)휘황한 아래층 중앙부에 초상부를 차리고(중략)환한 조명 속에 펼쳐진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박완서, <나목>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 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예쁘군요."

그들에게는 좀 허풍스런 찬사를 보내야 하는 법인데 오후의 피곤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나른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앞에 선 우람한 지아이(GI)는 몸집보다는 민감한 듯했다. 금방 씰쭉해지더니 사진을 나꿔채듯이 제 눈앞에 가져가다 새삼스럽게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제품에 안심이 되는지 다시 입을 헤벌렸다.

나도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군요. 당신은 행운이에요. 물론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셔야죠. 어때요? 이 고운 실크 스카프에다 그리면."

박완서, <나목>

지금은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이용되는 한국은행(옛 조선은행) 건물.1930년대에는 근대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머엉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물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인 전차에 뛰어올랐다.(중략)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제 이대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구보가 또다시 고독과 피로를 느꼈을 때, 약칠해 신으시죠 구두에, 구보는 혐오의 눈을 가져 그 사내를, 남의 구두만 항상 살피며, 그곳에 무엇이든 결점을 잡아 내고야 마는 그 사내를 흘겨보고,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나의 구두를 비평할 권리가 그에게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리에서 그에게 온갖 종류의 사물을저주하고 싶다. 생각하며, 그러나, 문득, 구보는 이러한 때, 이렇게 제 몸을 혼자 두어 두는 것에 위험을 느낀다. 누구든 좋았다. 벗과, 벗과 같이 있을 때, 구보는 얼마쯤 명랑할 수 있었다. 혹은, 명랑을 가장할 수 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국가 중요문화재인 사적 제280호로 지정된 한국은행 건물은 1907년 착공되어 1912년부터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건물은 국내외 화폐문화의 역사와 한국은행의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잇으며 이곳에서는 화폐제조와 관련된 실물자료 및 영상자료를 접할 수 있다.

관람시간 화~일요일, 10:00 ~ 17:00

휴관일 월요일, 공휴일, 근로자의 날, 12월 19일 ~ 다음해 1월 2일. 공휴일(설날 및 추석연휴 제외)이 토요일, 일요일인 경우에는 개관.

문의 02-759-4881, 4882, 4061 | http://museum.bok.or.kr

 

참 요사이 무슨 좋은 일 있소. 맞은편의 경성우편국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구보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니-- 돌아보는 벗의 눈에 피로가 있었다. 다시 걸어 황금정으로 향하며, 이를테면, 조그만 기쁨, 보잘것없는 기쁨, 그러한 것을 가졌소. 뜻하지 않은 벗에게서 뜻하지 않은 엽서라도 한 장 받았다는 종류의…….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날 경성우체국 앞에서 구보씨는 벗으로부터 받는 엽서를 떠올렸다.

오늘 포스트 타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 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이십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뻔했습니다.

이십팔 관, 하고도 육백 몸매……!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이년을 데리고 진고개로 산보를 갔다가 경성우편국 바로 뒷문 맞은편, 아따 무어라더냐 그 양약국 앞에 놓아둔 앉은뱅이저울에 올라 서본 결과, 춘심이년이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우'자 쓴 벙거지 쓰고 감장 홀태바지 저고리 입고 가죽 주머니 베고 문 밖에 와서 안중문을 기욱이욱하며 '편지 받아 들여가오. 편지 받아 들여가오' 두세번 소리하는 것은 우편 군사라. 장팔의 어미가 까마귀에게 열이 잔뜩 났던 차에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질부등가라 깨어지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우편 군사에게 까닭 없는 화풀이를 한다.

"왠 사람이 남의 집 안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보아? 이 댁에는 사랑양반도 아니 계씬 댁인데, 왠 젊은 녀석이 양반의 댁 안마당을 들여다보아?"

(우편군사)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 아오. 어디 말 좀 하여 봅시다. 이리 좀 나오시오. 나는 편지 전하러 온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소."

(부) "여보게 할멈, 자네가 누구와 그렇게 싸우나. 우체사령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니 미국서 서방님이 편지를 부치셨나베.

어서 받아 들여오게"

(노파) "옳지, 우체사령이로구. 늙은 사람이 눈 어두워서……어서 편지나 이리 주오. 아씨께 갖다 드리게."

이인직, <혈의 누>

포스트 타워(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 타워는 정보소통 장소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시민들의 휴식과 체험을 위한 다양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1층 앞마당에 우정원이란 개방형 문화공간을 만들었고 보행자 광장을 조성했다. 또 11층에는 직원과 방문객을 위한 쉼터인 구름 카페와 도시의 정원, 간이 주방 등을 만들었다. 옛 중앙우체국 내에 있던 우정박물관은 2004년 충청남도 천안으로 이전했다.

 

'그러면 우선 비행기 회사에 들러 형편이나 알아볼까……'

이인국 박사는 캘리포니아산 시가를 비스듬히 문 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그는 스프링이 튈 듯이 택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도호텔로……"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전광용, <꺼삐딴 리>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아저씨를 따라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로오즈가아든으로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 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오십 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이왕직 악대의 음악 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조선호텔

1914년 10월 10일 환구단 자리를 헐고 개관한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철도호텔로 불리던 당시 조선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댄스파티' 등 서양풍 문화를 선도한 서양식 호텔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나인스 게이트'의 유리창 전면으로 환구단이 보인다. '나인스 게이트'의 뜻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 외에 아홉 번째 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문의 02-771-0500 | www.echosunhotel.com

 

환구단(원구단)

사적 제157호.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만들어졌다. 남별궁이란 태종의 둘째딸 경정 공주의 궁으로 작은 공주가 거처하는 마을이라 하여 일대가 소공동(小公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남별궁 터에 환구단만 남아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했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돌북)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환구단 건물 뒤로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인다. 조선 최초의 호텔이었던 이곳에서 근현대 소설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졌다.

 

덕기는 회피하듯이 이런 소리를 하며 전찻길로 나서자,

"대관절 어디로 갈텐가?"

하고 저녁 먹으러 갈 데를 의논한다.

여기는 황금정 이정목이다.

"타지 말고 좀더 걷세. 본정 삼정목까지."

"어딘데?"

"좋은 데를 하나 발견하였네. 값싸고 스테키나샨(썩 말없는 미인)이 있고…… 그런데 자네 너무 놀라 자빠졌다가는 큰일일세."

"왜?"

"왜든 가보기만 하세그려."

두 청년은 본정통으로 하여 꼽들었다.

염상섭, 《삼대》

명동의 상징적 공간, 명동성당.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곳이며, 때로는 약자를 보호해 주었으며, 한때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명동성당

사적 제258호. 한국 가톨릭의 대표 성지이며 1898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종현성당, 명동 천주교당이라고도 불렸다. 지하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명동성당에는 1880년대 이래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어 《경향잡지》, 《경향신문》 등이 간행되었고 한국교회의 출판문화를 선도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의 02-774-1784 | www.mdsd.or.kr

 

사오 일 동안 청음이 고루지 못하던 천기가 이날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고 석양에 이르러는 고운 비로 쓸어낸 듯이 구름은 흩어지고 청량한 월광은 동편 하늘에서 얼굴을 나타내는 때에, 더위를 쫓는 서풍은 서서히 불어 사람의 가슴까지 서늘하다. 길가에 손도 없는 빙수집의 주렴은 한가히 바람에 움직일 뿐이요, 종현 천주교당의 뎅뎅 치는 종소리는 지금 오후 여덟 시를 보하는 때라.

조중환, 《장한몽》. 1913, 《매일신보》(《한국신소설전집 9》, 을유문화사, 1968)

 

송빈이의 마음은 무엇에나 의지부터 하고 싶었다. 송빈이는 하루아침 다섯 시에 일어났다. 아침 미사종이 울리기 전에 천주교당으로 올라왔다. 처음보는 데다, 거의 남산 중턱 만큼이나 높은 지대여서 장안이 눈 아래 즐비하게 깔린다. 교당은 가까이 와보니 높으다는 것보다는 것보다는 장엄한 편이다. 서울의 여명은 먼저 이 교당 첨탑에 비치는 것이며, 좌우 남하의 홍예문들은 거기가 곧 천국에 들어가는 문처럼 위엄스러웠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대경성도시계획을 압둔 서울은 모든 현대문명의 호화와 정수를 한데 모와 '문화경성'의 면모를 널리 세상에 빛내려고 함이 작금의 대경성의 외관이다. (중략) 이러한 서울이라 그리 놀라울 것은 없으나 우리들의 시선을 모으게 할 또한 커다란 '뉴스' 하나가 생겨지고 잇음이 사실이다. 바로 장소는 대경성에서도 심장이라고 할 만한 명치정의 십자로점. 시간의 여유 있는 분은 한번 그리로 가보면 알리니 그 곳에는 삼목합명회사의 청부로 진행 중에 있는 커다란 공사장 하나이 언뜻 눈에 띄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머지않아 우리들 눈 앞에 황홀 찰란하게 나타나게 될 영화예술의 전당이다.

《삼천리》

2009년 새단장을 마치고 명동의 상업적 중심지에 새롭게 문을 연 명동예술극장.

이 지역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예배당? 정옥이 걔가 예수 믿던가?"

"아, 믿던가가 뭐야? 수표교 예배당엘 벌서 삼사 년이나 두구 댕기는데… 왜, 점심시간이면, 정해놓구 이 층에만 올라가서 찬송가 나부랭이 풍금치는 거, 입때 구경두 못했니?"

"글세, 풍금은 더러 치더구먼 두…… 그래, 걔가 수표교 다리 근처서 사나?"

"바로 수표 다리 골목 안인가 보더라. 왜, 맘이 있니?"

"맘은, 무슨……."

"맘이 있거든 지금이래두 찾어가 보렴. 수표 다리에 가서 곰보미장이 집이 어디냐구 물으면 대번 아르쳐줄 테니……."

박태원, 《천변풍경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다.

개발시대에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물의 깊이를 재는 넌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데리고

수표교 하나

내 눈물 속에 평생 잠겨 있어도

 

난 아직 내 눈물의 깊이의

깊이는 재지 못했네

 

돌이 된 내 눈물의 무게도

재지 못했네

정호승, <수표교>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중략)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

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포도송이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관수동 뒷거리

휴지 줍는 똘만이들의 부은 눈길이

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신동엽, <서울>. 1969년 《방황》 창간호에 발표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정현종, <느낌표>

 

내가 잃어버린 구름이

하늘에 떠 있구나

정현종, <내가 잃어버린 구름>

 

산에는 꽃이 피네

꽃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가는 길>

울룩불룩 자연스러운 돌에 소월의 시 <산유화>를 새겨 놓았다.

산책로 한켠에 서 있는 조지훈 시비. <파초우>가 새겨져 있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앞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봐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던고

조지훈, <파초우>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각딸각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 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하윌대로 하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 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갓을 좀 뒤로 잦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의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 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후략)

이희승, <딸깍발이>

문학의 집 서울

전시 시간 월 ~ 토 10:00 ~ 17:00. 문의 02-778-1026 | www.imhs.co.kr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연중 다양한 행사가 열리므로 일정을 확인하고 가면 좋다.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보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루었네

 <경부철도가> (1908, 최남선 작사)

옛 서울역사 내부. 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언젠가 새단장을 마치면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港口)와 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여 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 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 서울역사 3등 대합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나 창문 등에 예전 모습이 남아 있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를 골라서 돌아다니기로 했다.그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코를 다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 보다. 얼른 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룸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한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이상, <날개>

찻집 '티룸'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프랑스식 양식당 '그릴'. 2009년 리노베이션 이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서울역에 내린 성수는 휑뎅그렁한 역사며 아직은 찬 이른 봄의 깐깐한 바람 때문에 으스스 떨었다. 군용 담요로 만든 외투를 걸친 늙은 여자가 '깨끗한 하숙있어요' 했을 때도 그는 아직 그런 썰렁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여자가 다시 '이쁜 색시도 잇어요' 했을 때도 아직 첫 서울이 주는 당혹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성수가 서울에 달라붙기 위해 치른 이런 요행과 불운은 그가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 교정원으로 취직하기까지 무려 열두 번이나 거듭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무수한 서울과 만났다. 종삼과 만나고 르네상스와 만났으며 동대문이나 남대문 그리고 청량리나 영등포와도 만났다.

르네상스에서 만난 그 여대생과 같은 여자들과도 여러 번 조우(遭遇)했다. 그리고 용케도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서울에 남는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요즈음에 와서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서울이 그에게 어떤 의미와 빛깔을 던져 주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다.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한 것 같기도 한 오리무중의 감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안에서 혼자만 쑥죽을 찾아 먹는 그에게 아들놈이 말하는 수가 있다.

"아버지는 그런 풀을 어떻게 잡수세요. 아버지는 촌사람이야."

술 마시면 '타향살이'를 흥얼거리는 자신에게 여편네가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수가 있다.

"당신은 갈데없는 시향민이로군요."

이 말에서, 성수는 서울은 아직도 자기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잠겨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까닭없이 고향에 대한 미안함을 지닌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 눌러붙은 그 많은 촌놈들도 돌아서면 제각기 조금씩의 미안함을 안고 살 것이다. 고향에 대해서.

-끝-

최일남, <서울의 초상>

 

그날 오전, 서울역의 혼잡한 광장에 홀로 남겨졌을 때부터 나는 이 여행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회가 시작된 시간은 그보다 한참 먼저였다. 기차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다소 부지런을 떨었던 아침, 내가 없어도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가게끔 챙겨 둬야 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앞에 두고 느꼈던 전날 밤의 한숨, 그보다 더 앞으로 시간을 돌리면 기차표를 예매하러 나갔던 날의 몽롱함과 회의까지를 다 후회의 페이지에 삽입시켜야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후회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늘 그렇듯이 포기도 쉽게 하지를 못하고 결국 나는 예매한 기차표의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서울역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사이 이 여행을 포기해도 미련이 없을 만한 어떤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중략)

나중에 하나의 여행이 온전하게 소설로 담겨져 나오는 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필요가 먼저였고 소설은 의외의 부산물인 경우에 불과했다. 성실하게 삶을 더듬다 보면 운좋게 주어지는 그런 부산물.

그러나 이번 여행은 삶의 여러 관계들로 야기된 피할 수 없는 길떠남이 아니었다. 망설임과 후회가 그처럼 질겼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거기에서 연유되고 있을 것이었다. 소설이 제대로 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여행을 도모하고 실천하다니,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죽을 듯이 아껴서 써대도 겨우 마감 날짜를 지킬까말까 한 이 화급한 날들 중의 하루나 이틀을  온전하게 내던져 버리다니, 이 도박은 말하자면 벌써 몇 달 째 그랬듯이 이번 달 역시 마감 날짜를 그냥 지나치고 말리라는 뚜렷한 징표로서 제시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소설은, 확률이 높건 적건 간에, 결코 도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양귀자, <숨은 꽃>

 

사실을 말하면 개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약국 앞에 붙은 간이서점을 기웃거리긴 했었다. 읽을 것이 아닌 그저 볼 것, 머리에 입력되지 않고 단순히 눈에만 머물렀다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 그런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읽을 만한 책을 고르지 못하였다. 집에서도 그랬다. 어쩌면 손쉽게 아무 책이나 택해서 손가방 안에 쑥 밀어넣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이번 여행엔 아예 어떤 책도 동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무얼 구할 수 있었다면 왜 여행까지 생각했을 것인가.

(중략)

기차 안에서의 세 시간 동안 내가 만난 글자는 홍익회 판매원의 밀차에 담긴 군것질감의 상표와 앞자리 등받이에 새겨진 피로회복제 광고가 전부였다. 피곤하고 나른할 때 이 물약을 마시면 새 기운이 솟구친다는 광고 문구는 어느 좌석이건 간에 다 흰 천의 등받이에 녹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차 안 이곳 저곳에 내가 찾는 글자가 널려 있기는 한 셈이었다. 그것들의 한결같은 내용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내 눈은 글자를 읽고 뜻을 해독하는 짓을 멈추지 못한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나는 마녀의 주술 때문에 춤을 멈출 수 없이 쩔쩔매는 동화 속의 불행한 공주를 떠올린다. 누구, 이 춤을 멈춰 줄 사람은 없나요?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춤을 춰야 하고 자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춰야 한답니다. 제발, 이 춤을 멈춰 주세요.

양귀자, <숨은 꽃>

옛 서울역사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한다고 한다.

중림동 약현성당은 1998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복원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 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정호승, <약현성당>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전략) 마지막 돌아보는 셈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 왔다. 남대문의 미(美)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간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그 후 피난생활이 맺어 준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된 오랜 객지생활에서도 그때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은 조금도 퇴색함이 없이,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내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서울은 변화하고, 쳐다보고 우러러볼 높은 집도 많았거니와, 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버스에 앉아서도 줄창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는 사이에 남대문에 대한 흥미를 쉽사리 잃어 갔다. 나는 이미 이 고장이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가 지배할 고장이 아니란 걸, 남대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화재로 무너지기 전. 당당한 자태로 서 있던 남대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의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대문 시장. 살아 움직이는 이곳 사람들이 곧 시인이고,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시가 된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잔돈을 두어 두고도 심 원짜리를 낸 것이며, 부청 앞에서 내릴 테면서 정거장까지 간다고 한 것이며가 모두 요량이 있어서 한 짓입니다. 무사히 공차를 탄 윤직원 영감은 총독부 앞에서부터는 춘심이를 앞세우고 부민관까지 천천히 걸어서 갑니다.

"좁은 뽀수 타니라구 고생헌 값을 이렇기 도루 찾는 법이다."

그는 이윽고 공차 타는 기술을 춘심이한테도 깨우쳐 주던 것인데, 그런 걸 보면 아마 청기와장수는 아닌 모양입니다.

종로에서 그렇듯 많이 충그리고 길이 터지고 했어도, 회장에 당도했을 때에는 부민관 꼭대기의 큰 시계가 열두시밖에는 더 되지 않았습니다. 입장권을 사기 전에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 사이에는 또 한바탕 상지가 생겼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더러, 네 형이 출연을 한다면서 무대 뒷면으로 제 형을 찾아 들어가 공짜로 구경을 하라고 시키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심이는, 암만 그렇더라도 저도 윤직원 영감을 따라왔고, 그래서 버젓한 손님이니까 버젓하게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야 말이지, 누가 치사하게 공구경을 하느냐고 우깁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옛날 문화 예술 공연장 '부민관'이었던 곳이 지금은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된다.

 

음악회--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깜빡 잊었다. 첫날 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왓다. 일 년에 잘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코프스키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것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정신이 어디로 팔려 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에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 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 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던 것을…….

김남천, <경영>

고층 빌딩 일색인 서울에서 골목 한 구비를 돌아들면 매력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성당이 있다.

 

그들은 구세군 서대문 본영을 지나 경기고녀와 덕수국민학교 앞을 지나서 광화문으로 나왔다. "약속 있어?" 하고 이홍철 씨가 물었다. "없어." 하고 구보는 대답하였다. "9(나인)에 가 볼까?" "그러지." 9다방에는 소설가 남장우(南丁愚)가 가끔씩 들르는 곳이었다.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미대사관 담과 덕수궁 담이 이어지는 덕수궁길. 왼쪽 덕수궁 담 너머로 궁궐 건물들이 조금씩 보인다.

 

왕이 그녀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한 밤에 왕비는 그녀를 중궁으로 불렀다. 그녀가 프랑스 공사관으로 나가 살기 시작한 지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왕비와 그녀 사이에 커피와 케이크가 놓였다. 왕비는 더 가까이 오라, 하였다. 왕비의 자당의에 녹빛이 감도는 국화매듭의 단작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노리개의 부드러운 술이 눈앞에서 찰랑일 만큼 그녀가 왕비와 가까이 앉기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왕비는 그녀에게 전하께서 왕가의 이씨 성을 하사하신 것은 너를 딸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하였다. 리진은 옥첩지를 단정히 꽂고 있는 왕비의 흰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깊이 머리를 숙였다.

- 그러니 너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 또한 여염집 같으면 여식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같다.

리진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

-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중략)

- 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땀에 젖어가는 그녀의 귀에 흰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 너는 사랑을 얻어 개화된 세상에 먼저 나가는 것이니라, 서러워마라.

리진은 춤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불이 되려 했다.

- 다른 세상에 가서 여태의 족쇄를 플어버리고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 새 삶을 가지거라.

리진은 춤으로 땅이 되려 하고 쇠가 되려 했다.

- 조선의 여인으로 만 길을 떠나는 건 네가 처음일 게야.

신경숙, 《리진》

 

영철은 서대문 턱에서 탓든 전차를 차내 버리고 정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벌서 서양촌이란 노랑 냄새가 풍기고 학교촌이란 푸른 기운이 도는 것 가텃다. 그러면서도 한가롭고 깨끗한 늣김을 주엇다. 이 골목은 장차 오는 조선의 주인공인 남녀학생이 아츰 저녁으로 수천만번 그 힘찬 발자욱으로 다지고 다진 골목이다.

괴로운 바다와 가튼 세상을 다 지나 래세의 천당을 동경하고 땅 우에도 천국을 건설하려는 신남신녀가 찬미 성경을 끼고 묵상하며 종소리를 따라가고 오는 서울에도 이름난 정동골목이다.

이 골목 안에는 조선에 하나요 등대처럼 노피 서서 빗을 내는 여자전문학교가 녀왕처럼 군림하엿다. 마즌 편 음악실에서는 여름이거나 가을이든 봄이든 주야로 요량한 피아노 소리와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가 나뷔처럼 날어 담을 넘어서 지나가는 사람의 고달픈 가슴에도 안기는 파라다이스 골목이다.

방인근, <마도의 향불>

정동의 길들은 원형 분수대를 기점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붉은 벽돌로 지은 외벽과 하얀 창틀이 인상적인 정동교회.

 

"주로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와 찬송소리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창문은 구경꾼들로 메워졌고 제단에 나와 남녀 교인들이 나란히 무릎 꿇고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먹고 마시는 그 거룩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옛 배제학당 건물.

신식결혼, 연애결혼이 처음으로 열린 교회 앞에 다정한 이와 마주 앉고 싶은 벤치가 놓여 있다. 단정하게 놓인 모습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은 이곳이 교회당 앞이기 때문일까.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개관시간 화 ~ 일 10:00 ~ 17:00 문의 02-319-5579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소설 속 윤직원 영감은 정말 이동백 명창과 닮았을까?

 

그 양복신사는 웬일인지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윤직원 영감을 연해 흥미있게 보고 또 보고 해쌓더니, 차차로 호기심이 더하는 모양, 필경은 자리를 옮아 옆으로 바싹 와서 앉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앉아서 윤직원 영감에게 말없는 경의를 표한다고 할까, 아무튼 몹시 이야기를 붙여 보고 싶어하는 눈치더니 마침내,

"이번에 인기가 굉장헌 모양이지요?"

하고 은근 공손히 말을 청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으로 보면 인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니와, 또 낯모를 사람과 쓰잘데없이 이야기를 할 맛도 또한 없는 것이라 거저,

"예에!"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할 뿐입니다.

양복신사씨는 좀 싱거웠던지 잠깐 덤덤하더니 한참 만에 또,

"거 소릴 얼마나 공불 허면 그렇게 명창이 되시나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별 쑥스런 사람도 다 보겠다고 귀찮게 여기며 아무렇게나,

"글씨……나두 몰루."

"헤헤엤다. 괜히 그러십니다!"

"무얼 궈녀언이 그런다구 그러우……? 나넌 소리를 좋아넌 히여두 소리를 헐종은 모르넌 사램이요!"

"괘애니 그러세요! 명창 이동백(李東伯) 씨가 노래헐 줄 모르신다면 누가 압니까?"

원 이럴 데가 있습니까! 어쩌면 윤직원 영감더러 광대 이동백이라고 하다니요!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괘씸하고 창피하고 뭐, 도무지 어떻다고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법이 없어진 오늘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계동 자기네 댁만 같았어도 이놈 당장 잡아 내리라고 호령을 한바탕 했을 겝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판소리 공연이 열리던 정동극장에서는 요즘도 전통예술 공연이 열린다.

 

"(전략)여보 동포들, 들어보시오.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 있거든 황제 폐하 통치하에서 부지런히 빌어먹고 자식이나 잘 가르쳐서 국민의 지식이 진보될 도리만 하시오. 지금 우리나라에 국리민복 될 일은 그만한 일이 다시없소. 나는 오늘 개혁하신 황제 폐하의 만세나 부르고 국민 동포의 만세나 부르고 죽겠소."

하더니 옥남이가 손을 높이 들어,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국민 동포 만세, 만세, 만세!"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데

(후략)

이인직, <은세계>

고종의 도서관이었던 중명전. 지금은 정동극장 뒤에 옹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곳도 덕수궁 경내였다.

 

태평통(太平通) 쪽을 향하여 정동(貞洞) 골목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노동자는 건극문(建極門) 앞에까지 와서--그냥 건극문, 하면, 아는 이가 드물 게다.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덕수궁(德壽宮) 돌담을 끼고 정동 골목을 쑤욱 들어가노라면 아니 경성지방법원 맞은편짝에 있는 것은 용강문(用康門), 거기까지 가지 말고 바른편에는 전등 달린 전신주, 오른편에는 전등 안 달린 전신주 그 사이에 음침하게 울적하게 닫혀 있는 문이 바로 건극문이다.

(중략)

경성지방법원 앞까지 와서, 본래 같으면 이화학당(梨花學堂) 앞을 지나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것을, 그러나 오늘 밤은 조금 전의 행동화(行動化)할 수 없었던 그 흥미 있는 감정도 도와, 그 둘은 기약지 않고 좀더 은근한 방송국 넘어가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난 이 길이 좋아, 여기하구, 원남동 신작로하구."

갑자기 여자는 꿈꾸는 듯이 또 자못 감격을 금할 수 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한 거리는, 딴은, 남녀가, 특히 밤늦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참말, 모레 돌아가시렵니까?"

이화여고보의 긴 조선담--

"네, 그러나 또 며칠 있어두 좋구요."

마침 지나는 이화여고보 정문에 달린 외등을 쳐다본 여자는, 혹은, 남자나 마찬가지로 그 밝음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른다.

또 긴 담을 끼고 가면서,

"너무 오래 계시면, 아버니께서 걱정 하실까?"

정동 13번지, 양인의 집 외등에는 전구가 없었다. 까닭에 그 맞은편 전신주에 달린 전등은 그들에게는 좀더 원망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마침내 그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정문 앞에까지 왔다. 역시 전신주에 달린 전등이, 또 맞은편 노서아 영사관의 외등이, 남자를 잠시 주저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이 골목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절망임을 아는 그는, 용기를 내어 여자를 이화여전 정문 지붕 밑으로 이끌려 하였다.

박태원, <애욕>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고목 옆에 남아 있는 한식 교문.

 

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舍監)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중략)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 레터'였다. 여학교 기숙사라면 으레 그런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이지만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날아 들어왔었다. 기숙생에게 오는 사신을 일일이 검사하는 터이니까 그 따위 편지도 물론 B여사의 손에 떨어진다. 달짝지근한 사연을 보는 족족 그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편지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낸다.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영신이란 여자를 한 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닥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굴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릿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었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 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같으나 피봉 뒤에는,

'XX여자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심훈, <상록수>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앚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링술로

 

눈이

오는데

예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貞洞

聖미하엘 鐘樓가 보이는데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속에 돌층계가 잠드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서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지평선이 멀리 저문다.

박목월, <廢園>

이화여고 박물관은 옛날 여학교 교실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얼마나 우줄대며 다녔었나

이 골목 정동 길을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게는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 침침한 속에서

온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 소리

피아노 소리 분수와 같이 눈부시더라.

 

그 무렵

나에게는 사랑하는 소녀 하나 없었건만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음악소리에 젖는 가슴 위에

희망은 보름달처럼 둥긋이 떠올랐다.

 

그후 20년

커다란 노목이 서 있는 이 골목

고색창연한 기와담은

먼지 속에 예대로인데

지난 날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그 피아노 소리조차 들을 길 없구나.

장만영, <정동 골목>

손탁호텔 터 표석.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예전 손탁호텔이 있었다.

새로 지은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5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략)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중략)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 <거대한 뿌리> 1964. 2. 3

옛 러시아 공사관 탑. 역사책에 나오는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상한 고층 건물과 좋은 외관은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이다. 세 번째 건물은 약간 한국식 건축 양식이었는데 모양은 초라했다. 이들은 미국 감리교회와 미국 장로회파교회와 함께 회의소와 공장의 복합 주거지였는데, 그 위치는 다소 낮은 곳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사벨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저같이 의젓이 그 날개죽지 위에 싣고 잇는 자도 드물다.

 

상하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서정주, <광화문>

광화문 뒤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던 시절의 사진. 여러 차례 소실되고 재건되고 자리까지 옮겨진 광화문은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원래 경복궁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할머니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꽤 오래전부터 정규적으로 경복궁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여러 번 경복궁에 가 봤다.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에는 항상 졸병 네 명과 좀 높은 군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의 냉랭한 기세가 아니더라도, 군인들이 괜히 문 앞에 서 있을 리 없으니까 사람들은 언감생심 아무도 경복궁에 출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군인들 옆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 이어지는 돌담길을 계속 따라가면 청와대에 이른다.

 

그해 1936년 가을 威亨洙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려내게 되었다. 그때 내가 기초한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들을 합해 이르는 한 심포니를 만들어보려 했던 만큼, 동인들의 정신지향은 자세히 보면 여러 갈래였지만, 사람의 기본 자격 그것을 주로 생각한 점에서는 누구나 모두 일치했던 것으로 본다. 이 기본자격을 향한 짙은 향수, 기본자격을 박탈당하는 이들의 울부짖음과 몸부림, 이 기본자격을 향한 벅찬 질주, 이런 것은 이 때 우리들에겐 한 불치의 숙명처럼 되었던 것이다.

서정주, <천지유정>

밑동만 남은 통의동 백송을 초록 담쟁이가 뒤덮고 있다.

 

사라지기 얼마전 인사동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어쩜, 나무들도 생각을 한대. 나무가 하는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 않어?"

그리고 통의동 백송과 조계사 회화나무를 보러가자고 했었다. 나무가 만약 생각을 하는게 사실이라면 그건 사랑에 대해서일 것이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자칫하다가는 겉핥기 대꾸로 들릴까 봐서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우선 짝짓기를 위한 일차적인 사랑이 있었다. 목숨을 받아 태어난 어떠한 미물일지라도 짝짓기 행위는 눈물겹도록 놀라운 것이었다. 미물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식물도 알고 보면 번식을 위해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은 인간이 보고 즐기라고 피는 것이 아니며, 맛있는 열매는 인간이 먹고 즐기라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은 '나무의 사랑'은 일차적인 사랑만은 아니었다.

윤후명, 《무지개를 오르는 발걸음》

작가 이상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를 상가건물이 대신하고 있다. 저기 효자서당에서 혹시 이상의 시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래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뚤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烏瞰圖) - 시제1호(詩第一號)>

노천명이 살던 집. 오래된 집이지만 정겹고 단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오늘은 음력으로 며칠이나 되는지, 달이 밝다. 선선한 바람이 더운 이마를 및어준다. 끈적끈적하는 -좀 이상스러운 말이지만- 북경성(北京城)의 빈민촌인 이곳 누하동(樓下洞)에도 여름 저녁의 기분은 농후하다. 나는 이 이상 더 쓰기 싫다. 달이나 보자. 달이나 쳐다보다가 그리운 사람의 생각이나 하여 보자.

김기진,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

윤동주 시인이 잠시 몸을 의탁한 하숙이 있던 곳.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詩)>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에서

살았다. 종점근처의 쓸쓸한

하숙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 5장을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왕산은 해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덩어리 어둠에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

그런 밤일수록 눈물은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이제 두번 생각하지 않으리라.

효자동을 밤비를 그 기도를

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강바닥

달빛이 어리고

서글픈 편안이

끝없다.

박목월, <효자동>

청와대 영빈관 옆에 옛날에는 효자동 전차종점이 있었고, 이곳에서 출발한 전차는 태평로를 지나 마포종점에 도착하였다.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처럼 일어나 이 새피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의 의지……

신동엽, <아사녀> 부분.

 

수업을 끝내고 학교를 나서서 효자동 쪽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어.

곧장 집으로 갈 것을 호기심 때문에 일부러 그쪽 길로 들어섰던 것인데,

갑자기 어디선지 총소리가 들려오고 내가 빠져나가고 있는 골목길 앞쪽에서

사람들이 왁 하고 쏠려나오는 거야. 중3때 일이었으니까 안다고 해도 내가

뭘 얼마나 알았겠어? 형세가 하도 급하고 곧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

무서워져서 돌아서자 나도 딴 사람들처럼 무작정 뛰었어.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곁엣사람들이 하는 대로 아무 집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이제하, <자매일기>

 

영훈들은 달려서 적선동을 지나간다. 그의 스크린은 대열의 맨 앞장을 서고 있다. 그는 함성과 스크럼을 낀 옆 친구의 팔에서 느껴지는 열과 최루가스의 따가운 자극과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총성으로 정신을 잃은 듯이 효자동으로 달려간다. 드디어는 그의 스크럼이 깨어진다. 거기서부터 그는 구렁이처럼 길을 가로막는 기다란 하수관을 보고, 역진하는 전차를 보고, 불에 타는 소방차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와 혼주(混走)와 달리는 지프와 태극기와 그리고 펄럭이는 흰 가운자락을 본다.

이청준, <가수(假睡)>

 

효자동 낡은 중국집에 앉아

짜장면을 시켰다.

추억을 많이 갖고 사는 것이 부자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우리들의 옛 동네 효자동에 와서

짜장면을 시켜 놓고 다꾸앙에 춘장을 찍어 먹으며

모서리가 깨어진 가난한 추억을 꺼내 보았다.

삼일당에 걸렸던 이승만의 휘호는

4 · 19 때 성난 학생들에게 뽑혀 나갔고

탱크가 중앙청 앞에 버티어 선 후

청와대보다 낮게 낮게 지은 건물에서는

노오란 빗물이 새고 있었다.

 

칠궁 옆에 영비가 세운 진명학교는 이제

앞서 간 불꽃 나혜석의 그림도

노천명의 슬픈 시도 없이

낯선 신시가지 찾아 떠나갔고

빈 운동장엔 수십대의 자동차가

그녀들의 추억 위에 음흉한 괴물들을

주차시키고 있을 뿐……

팅팅 불어터진 짜장면을 쑤시다가

도난당한 추억을 어디에다 신고해야 하나,

근처 청와대를 잠시 떠올려 보다가

우리들은 말없이

낡은 중국집을 나왔다.

문정희, <중국집의 추억>

청와대 관람

관람운영일 매주 화 ~ 토요일(토요일은 10인 이하의 개인 / 가족에 한함)

신청대상 초등학생 이상(미취학 자녀는 가족 동반시 관람 가능)

관람시간 10시, 11시, 2시, 3시

집결장소 경복궁 동편 주차장 내 만남의 장소(관람시간 20분 전까지, 신분증 지참)

신청기한 관람희망일 10일 전까지

신청방법 홈페이지 내 관람 창으로 신청(노약자는 우편신청 가능), 사전예약 필수

셔틀버스 수시운행 중. 개인 및 가족단위 관람객에게 지원되며 단체 관람객은 만남의 장소에서 인원 점검 후 타고 온 차량을 이용해 바로 출발

관람문의 02-730-5800(ARS 음성안내), tour@president.go.kr

청와대 홈페이지 www.president.go.kr/kr/cheongwadae/viewing/guidance.php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