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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22. 07:3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40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

 

오주환 지음

2011, 북허브

 

대야도서관

SB071555

 

- 전국 곳곳의 문화재를 한 권으로 읽는다! -

 

우리 문화유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여행자가 되는 길

 

온 가족이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면 상식이 풍부해진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지만, 내가 아는 역사의 깊이는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문화유산 상식여행'이라는  역사여행 입문서를 쓰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일반 사람에 비해 역사를, 여행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이런 게 있다.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의 말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의 것과 같지 않으리라."

여행기자로 이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여행지는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폐허가 된 절터에 덩그라니 남은 석탑도, 깊은 산중의 사찰도, 화려한 단청을 뽐내는 건물도, 심지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만 같은 오지의 자연에도 우리의 역사가 있었고, 선인들의 예술혼이 담겨 있었다.

글로써 이것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이면의 이야기도 찾아내야 한다.

역사가 필요하면 자료를 뒤져야 했고, 옛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마을 어른들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 대해, 문화유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한 해 두 해 되풀이되니 나의 여행은 더욱 풍성해졌다.

역사여행은 더 이상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자나 전공 학생들의 영역으로만 생각되었던 답사의 벽은 무너진지 오래다.

답사라는 거창한 명목이 아니라도, 누구나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것과 만난다.

문제는 만남을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관심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역사에 대해 문화유산에 대해 조금의 애정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훌륭한 여행자가 될 수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지은이  오주환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했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거치는 동안 여행기자로 일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어렵고 재미없어 하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글 쓰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길 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기 위해 늘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이다.

저서로 『문화유산을 찾아서』『답사여행 100배 즐기기』『조선 500년 풍류지를 찾아서』『조선왕조 상식여행』『내 마음 속 꼭꼭 숨겨둔 여행지』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Part 1 문화유산이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문화유산의 종류

 

Part 2 불교유산

    절

    불탑

    불상

    전각

    부도

    탑비

    석등

    당간지주

    불화

    불구

 

Part 3 목조건축

    목조건축의 특징

    목조건축 구성요소

    공포

    가구

    지붕

    대문

 

Part 4 성곽

    성곽

 

Part 5 석조건축

    석비

    돌다리

    석빙고

 

Part 6 고분

    고분

 

부록

    문화유산 여행 코스

    국보 · 보물 목록

 

여행을 좋아하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훌륭한 답사여행자가 될 수 있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내가 아는 지식을 하나씩 여행지에서 적용시키다 보면 어느새 이 땅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애정을 갖게 된다.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해 왔다.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극락에 대한 염원은 두터운 신앙심으로 이어져 곳곳에 절이 세워졌고, 신앙은 뜨거운 예술혼으로 표출되어 전국에 불상, 불탑, 불전 등에 표현되었다.

▲ 김천 직지사 일주문  절 입구에 세워진 첫 번째 문이 일주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 하는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심을 뜻하기도 한다. 일주문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절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성한 곳에 들어서기 전에 세상의 번뇌를 털어내고 마음을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하나로 모으라는 뜻에서다. 절 밖은 속세요, 안은 탈속과 성스러움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안거

승려들이 외출을 삼가고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을 안가라고 한다. 본래 인도의 수행자들이 여름철 우기에 폭풍우에 상해를 입기도 하고, 비를 피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벌레들을 죽이는 일이 많이 발생하자 외출을 하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하안거가 유래되었다. 하안거는 4월 보름 다음 날부터 7월 보름날까지 3개월간 행해진다. 겨울이 있는 북방불교권에서는 하안거 외에도 음력 10월 보름 다음 날부터 다음 해 정월 보름날까지 동안거라고 하여 시행하고 있다.

 

절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우기를 피해 공동생활을 하기 위한 공동 주거지에서

출발해 차츰 종교 의례를 행하는 장소로 변화하였다.

 

절은 왜 산에 있나

불교가 국교였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평지에도 절이 많았다. 그러나 그 뒤에 산 속에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절이 산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의 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속세의 이익이나 행복보다는 자기 수양을 통해 불도를 깨치는 것이 중요하므로 조용한 산 속이 적합했다. 풍수지리도 한 몫 한다. 명산의 좋은 곳에 절을 세워야 나라가 부강해 진다는 믿음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 사상에도 기인한다. 금강산, 오대산 등 신령이 깃든 산에 절을 짓고 불교의 성지로 발전시켰다.

 

최초의 절

고구려의 불교 도입 이듬해인 소수림왕 3년(373), 평양에 세워진 이불란사와 성문사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아도가 선산지방에서 최초의 포교활동을 한 모례의 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이 순교를 빚은 천경림의 흥륜사를 효시로 보고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보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가지 보물이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부처(불), 부처의 말씀인 불전(법), 부처를 따르는 사람(승)이 그것이다. 삼보가 모셔져 있는 절을 삼보사찰이라 한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3보사찰이다. 통도사는 부처의 사리와 가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 송광사는 지눌을 위시한 16국사를 배출해서 승보사찰이라 불린다.

 

회랑이 뭐야?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한 건물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복도를 달리 부르는 말. 건물의 중앙마당을 구획하거나 신성한 지역을 둘러싸기 위해 설치하였다. 행사가 있을 때는 좌석이나 통로로도 사용된다.

▲ 평양 청암리사지 가람배치도  중앙의 8각목탑을 중심으로 동 · 서 · 북면에 금당을 둔 일탑삼금당식의 전형적인 고구려 가람배치 형식이다.

▲ 부여 군수리사지 가람배치도  남북 일직선상에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둔 일탑일금당식이다.

▲ 부여 정림사지 가람배치도  백제의 대표적인 탑이 있는 절터답게 탑을 중심으로 중문, 금당, 강당이 나란히 늘어선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소승불교는 인도의 남쪽 해로를 따라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등에 퍼진 것으로 남방불교라고도 한다. 자신의 해탈을 구하기 때문에 작은 수레, 즉 소승이라고 한다. 출가자만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이루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가승 중심의 교리를 갖고, 전통과 형식에 치우쳐 계율과 교법을 중시한다.

반면 대승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해져 북방불교라고도 한다.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어 부처의 자비와 지혜를 믿고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소승불교가 자신의 수행에만 치우쳐 있고, 출가자 중심의 계율과 전통을 고집함으로써 형식화되자 이를 개혁하고자 일어난 불교운동이 대승불교이다.

▲ 익산 미륵사지 가람배치도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라는 특이한 형식을 보인다. 군수리사지나 정림사지와 같이 일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면서, 좌우에 각각 동원과 서원을 두고 별도의 탑과 금당을 세운 것이 특별하다.

▲ 경주 황룡사지 가람배치도  단탑식 가람배치라는 신라만의 가람배치 형식을 취하고 잇다.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금당의 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 경주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금당 좌우에 석탑을 배치한 쌍탑식이다. 석탑 남쪽에 중문을 설치하고, 중문 좌우에서 시작하는 회랑이 강당까지 둘러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이다.

 

금당과 법당

가람배치를 설명할 때 일탑일금당식, 일탑삼금당식이란 말을 사용한다. 탑은 무엇인지 금방 알겠는데, 금당이란 말은 다소 생소하다. 금당은 불상이 신앙의 중요한 대사이었던 고려시대 초기까지 보편화되었던 말이다. 부처의 신체적 특징 중 몸에서 은은한 금빛이 풍겨나는 것을 상징해 금당으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인 부처를 모신 중심 건물이 금당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금당에 모신 부처의 성격에 따라 그 명칭이 달리 불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천태종 계열 절의 금당은 대웅전, 화엄종 계열은 대적광전, 법상종 계열은 미륵전, 정토종 계열은 극락전을 두어 사찰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법당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종파는 선종이다. 고려시대 중기부터는 교종보다 선종이 크게 유행하면서 법당이 중요한 건물이 되었다. 선종에서는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도 조상들의 가르침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금당보다 법당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법당은 부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장소이기에 '영원한 자유와 진리로 충만한 법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계종과 천태종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을 고려 때 합친 종파.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천태종은 고려 숙종 2년(1097) 때 대각국사 의천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에서 오는 분열과 대립을 정리하여 성립한 종파 잡념을 멎게 하여 마음을 집중케 하고, 바른 지혜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 본체를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넣기 위해 돌을

쌓아 올린 부처의 무덤에서 유래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담은 탑은 불상이 조성되기

전까지 불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 중국탑  중국탑은 높은 누각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길쭉한 목조건물처럼 보인다.

▲ 익산 왕궁리오층석탑  목탑양식을 석탑에 재현한 백제계 석탑의 양식

▲ 화순 운주사원형다층석탑  제기 위에 떡을 포개 놓은 것 같아 '떡탑'으로 불린다.

▲ 평창 월정사팔각9층탑  탑신이 4각형에서 벗어나 8각 모양을 이루는 다각형의 다층 석탑을 대표하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고려시대 불교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 경주 불국사다보탑  우리나라 특수형 탑을 대표하는 석탑이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화강암으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 석탑의 세부 명칭

 

탑돌이를 하는 이유

불상이 없던 초기 불교 시대에는 탑이 바로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였다. 모든 불교행사가 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탑에 예배할 때에는 먼저 탑을 향해 합장 반배한 다음 합장한 채로 시계 방향으로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합장 반배한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은 인도의 전통 예법에 따라 자신의 어깨가 항상 탑쪽을 향하게 하기 위함이다.

▲ 화순 쌍봉사 대웅전  원래 목조 삼층탑이었던 것이 불에 타자 삼층지붕을 개조해 대웅전으로 바꾼 것이다. 건물 내부는 밑바닥부터 3층까지 뚫려 있으며, 건물 가운데에 꼭대기까지 이르는 나무기둥을 박았다.

▲ 보은 법주사 팔상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의 목조탑이다. 웅대한 크기에 비해 올라갈수록 좁아드는 축소율이 커서 지나치게 안정감이 강조되어 있다. 층에 따라 건물의 양식이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양식이고 5층은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부른다.

▲ 법흥사지7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기단부는 네모꼴로 팔부중상과 사천왕상, 12지신을 양각한 판석을 세웠고, 탑신부는 진회색의 무늬 없는 벽돌을 어긋나게 쌓아올렸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법흥사의 탑이다.

▲ 안동 조탑동5층전탑  안동 조탑리 들판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이다. 탑 모습이 동부동5층전탑과 많이 닮았으나, 1층 몸돌을 화강암으로 축조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탑에서 화강암을 섞어 탑을 조성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1층 몸돌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예는 찾기 힘들다.

▲ 여주 신륵사다층전탑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전하는 고려시대 전탑이다. 탑신부는 옥신의 높이가 체감률이 거의 없고, 6층 몸돌만 갑자기 높이와 너비가 줄어들어 훨씬 고준해 보인다. 탑을 쌓을 때 벽돌 사이의 간격을 넓게 하고 그 사이에 면토를 발랐다. 이는 신라시대의 전탑이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것과는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 영양 신해리5층모전석탑  신해동 강가의 밭 가운데 서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고, 감실 양쪽에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을 조각하였다. 1단 기단의 모습, 돌을 다듬은 기술, 감실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동양탑과 서양탑

동양에서의 탑은 불탑으로 '부처의 묘'라는 상징적인 것이고, 서양의 탑은 여러 층으로 또는  높고 뾰족하게 세운 건축물(tower)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높은 건조물을 통틀어 탑이라고 하는 수도 있지만, 북아메리카 원주민 토템이나 수십 층의 고층빌딩은 탑이라고 하지 않는다.

▲ 경주 분황사석탑  신라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가 창건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신라석탑과는 달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높은 기단 위 네 모서리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수컷과 암컷사자를 배치하였다. 탑신에는 4면에 감실을 파고 화강암으로 문틀을 만든 문을 달았다. 문설주에는 입체감이 돋보이는 인왕상을 새겼다. 현재는 3층만 남아있지만, 『동경잡기』라는 책에는 '분황사구층탑'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근거 자료가 되지 못해 원래 몇 층의 석탑이었는지 그 규모는 알 수 없다.

▲ 경주 구황리3층석탑  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에 작은 석재를 짜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1개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기단부의 탱주가 3개에서 2개로 감소하는 점 등이 석탑양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전체적인 모습이 단아하고 안정되며 규모는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에 비해 작아졌다.

▲ 익산 미륵사지석탑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본래 미륵사에는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2기의 석탑을 두었는데, 그 중 서탑이다. 탑은 한 변의 길이가 10m 정도인 정사각형이며, 탑 부재 하나하나를 따로 만들어서 맞춰 세웠다.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다. 지금은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탑신의 비례를 따져 보아 본래는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  백제계 석탑의 전형 양식으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2기의 백제석탑 중 하나이며, 한국 석탑의 시원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목탑 양식을 따랐으며 미륵사지탑보다는 조형 수법이 한결 세련된 멋을 보인다. 2층 이상의 탑신이 1층에 비하여 현격히 줄어들어 장중하면서 격조 높은 멋을 풍긴다.

▲ 경주 감은사지3층석탑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마주보이는 감은사 터에 동서로 같은 구조와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석탑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석탑의 양식도 백제계의 목탑양식과 신라계의 전탑양식이 혼합되면서 전혀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시초가 되는 것이 감은사지3층석탑이다. 이 탑의 양식이 신라석탑의 전형 양식의 효시가 되었다.

▲ 경주 고선사지3층석탑  본래 암곡동의 고선사지에서 있던 것인데, 1975년 덕동댐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되어 국립경주박물관 뜰로 옮겨졌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조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탑이다. 기단부와 몸돌의 일부는 여러 장의 석재를 사용하여 짜맞췄다. 1층 몸돌에 문을 조각해 감실을 표현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못 자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이 감은사지3층석탑과 흡사하다.

▲ 경주 불국사3층석탑  석가탑 또는 무영탑으로 유명하다. 신라시대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다보탑이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여성적인 느낌이라면, 석가탑은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이 없어 선이 간결하고 화려하지 않은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감은사지3층석탑과 고선사지3층석탑에서 이어지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을 이룬다. 상륜부는 멸실되었던 것을 1973년 남원 실상사3층석탑의 것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1966년 도굴범의 훼손으로 인한 탑신부 해체수리작업 도중 2층 탑신부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장엄구와 세계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됐다.

▲ 영주 부석사3층석탑  무량수전 옆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쌓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3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이 몸돌에 비해 넓으면서도 각 몸돌의 폭이 좁아 몸돌이 밀착해 있는 느낌을 준다.

▲ 남원 실상사3층석탑  보광전 앞 마당에 동 · 서로 서 있는 2기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두 탑은 규모와 양식이 같다. 상륜부가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탑의 크기에 비해 기단부가 커서 안정감은 있어 보이나, 얼핏 보아서는 4층탑으로 오해하기 쉽다.

▲ 경주 용장사지3층석탑  남산 서쪽 용장계곡 정상에 세워진 신라시대 석탑이다.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아 탑을 세워서 마치 남산을 하나의 탑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탑 각 부재의 조화가 뛰어나고 안정감이 있어 주위의 환경과 매우 잘 어울린다. 이 탑은 용장사 주위의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잇어 이정표의 구실을 한다. 용장사는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저술했던 장소다.

▲ 양양 진전사지3층석탑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의 형식을 하고 있으나, 기단부에서 탑신에이르기까지 사면에 천인상, 8부신중, 사방불 등의 조각이 새겨진 이형석탑이다. 조각의 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명쾌하면서 고고한 탑의 외관이 돋보인다. 진전사지3층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견되는 훌륭한 탑이다. 진전사는 신라 선문구산의 하나인 가지산파를 개산한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이 출가한 곳으로 유명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말은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나 혼자 잘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처가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온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아독존에서 '아'는 석가모니뿐만이 아니라 개개의 모든 사람이 지닌 불성을 가리킨다. 불성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며,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갖춘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평등하다는 의미로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의 불합리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인간 존엄의 선언이다.

▲ 안동 제비원미륵  자연석 암벽에 부처의 몸체를 조각하고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국내 최대의 석조보살상이다.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으로 머리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씌웠고, 그 위에 네모난 갓을 다시 씌웠다.

▲ 보은 법주사마애여래의상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 화순 운주사와불  열반상과는 다르게 좌불과 입상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 있다.

▲ 경주 배리삼존석불입상  남산 기슭에 흥터져 있던 것을 1923년 이전했다. 조각 솜씨가 뛰어나 인간미와 종교적 신비함이 함께 우러나는 작품이다.

▲ 불상의 세부 명칭

 

석가모니는 부처의 이름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부처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현명한 사람'이란 뜻으로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현인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의 본래 이름은 인도 가비라성의 왕자인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라 불리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얼굴 가득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는 조성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앙에 본존인 여래입상과 왼쪽에 관음보살상, 오른쪽에 반가사유를 한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은 머리 뒤의 보주형 광배와 미간의 백호공, 초생달 같은 눈썹, 엷은 미소를 짓는 입술이 매우 다정다감한 느낌을 준다. 또한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잇어 입체감과 생동감을 준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 마애불을 대표하는 것으로 양 협시보살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삼존불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삼존불은 중앙에 본존을 세우고 양옆에 협시보살을 세우는 것으로 인도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부처를 모시는 하나의 단위로 생각되었다.

▲ 경주 석굴암본존불  신라 석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깊은 사색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입술, 풍만한 얼굴과 몸에는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과 한없는 자비로움이 공존한다. 신체의 비레가 알맞고 각 부분이 세련된 솜씨로 조각된 것이 불심 깊은 신라인의 예술혼이 집약되어 완성된 불상이다.

▲ 남원 실상사철제여래좌상  어깨선이 부드럽게 연결되고, 가슴의 볼륨도 살아있지만 전체적으로 차갑고 딱딱한 인상을 준다. 아마도 철이 주는 재료감에서 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다소 근엄하게 묘사되어서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인상의 불상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 영암 도갑사석조여래좌상  광배, 대좌, 불신을 모두 갖추고 있다. 광배와 불신은 각각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이마가 좁은 편이며, 눈두덩이는 불룩 나왔고 코는 넓적하게 표현하였다. 어깨의 선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는데 반해 결가부좌한 하체의 신체적인 굴곡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불상 조성의 원칙

불상은 자세 하나하나마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불상의 자세를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

불상을 제작할 때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규범을 지켜야 한다.

1. 신상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부처의 존엄성을 나타내고 중생과 구별되는 특징인 32길상 80종호의 묘상을 갖춰야 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해도 무방하나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남은 재료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남은 재료로 새나 짐승을 그려서도 안 된다. 단, 공양의 의미일 때는 괜찮다.

3. 탑이나 불상에는 모두 사리가 안장되는 것이 원칙이다. 사리숭배사상은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사리공양의 공덕은 여러 경전에 쓰여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는 구하기 어려우므로 금, 은, 수정, 유리, 마노 등으로 만든 법신사리를 안장하는 것이 허락된다. 법신사리 중 으뜸은 부처의 설법을 기재한 경전이다.

▲ 수인의 여러 가지 모양

 

승려의 명칭

행자 : 사미계를 받을 때까지 밥 짓기와 나무하기 등 온갖 허드레일을 도맡아 하며, 사찰에서 필요한 기본 의식과 그에 따른 송경을 익히는 사람. 주로 밤색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평생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스님 밑에서 여러 가지 계행을 배운다.

사미 · 사미니 : 일정한 행자 생활을 마치고 사미십계를 받은 스님.

비구 · 비구니 : 출가하여 정식 수행을 하는 수도자로 구족계를 받은 스님. 남자 스님인 비구는 250계를 받아 지켜야 하며, 여승인 비구니는 348계를 받아 수행한다.

중 :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Sangha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4인 이상의 모임. 후에는 3인 이상의 무리를 말하였으나 지금은 출가한 개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스님 : 불교의 수행자로 사문이라고 한다.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사람을 칭한다.

대사 : 원래 부처님의 존칭이나, 고승을 존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또한 국가에서 고승에게 내리는 호를 대사라고도 한다. 스님들 사이에서는 자기의 동료나 손아래 되는 스님에게 대사라 부른다.

 

불상의 재료

불상을 제작할 때는 돌, 나무, 금, 청동, 철 등이 많이 이용되었다. 간혹 소조불과 건칠불이 제작되기도 했다. 소조불은 점토로 만든 불상이다. 삼국시대 이후 많이 만들어졌는데 현존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몸에서 목 부분까지 골격이 되는 심목을 세우고 손가락은 철사로 따로 심지를 만든다. 그 위에 삼베조각이나 짚이 섞인 진흙을 2중 3중으로 붙여서 완전한 형태로 만든 다음 회칠을 한 후 도금한다. 건칠불은 나무로 간단한 골격을 만들고 종이나 천 같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후 옷칠을 하고 다시 도금한 것이다. 다른 불상에 비해서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 보살상의 세부 명칭

 

광배

불상이나 탱화에 그려져 있는 둥근 원. 광염 또는 후광이라고도 한다. 부처의 자비광명을 상징한 것. 이 세상의 어둠을 없애고 진리를 밝히는 빛을 상징화한 것. 광배는 대체로 두광과 거신광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두광은 머리에서 비춰나오는 광명을 나타내는 것이고, 거신광은 몸에서 비추어 나오는 광채를 표현한 것.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후광을 입었다'고 할 때 사용하는 후광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