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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7-1 오직 독서뿐

양응수梁應秀(1700~176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가 백수白水다. 권집權緝과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집 『백수집白水集』 30권 17책이 전한다. 1755년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사서강설四書講說」을 남겼고, 공부법의 방향을 갈래별로 엮은 『위학대요爲學大要』를 정리해 남겼다.

이 책에 수록한 독서에 관한 글은 『백수집』 권 26의 『위학대요』 중 「독서법讀書法」 항목에서 오늘날에 음미할 만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독서법」에 수록된 글은 모두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주자와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등 송대 학자들이 언급한 독서의 단계와 방법을 망라해 간추린 내용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공부법이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공부법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주로 독서에서 유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과 유의점을 설명한 내용이 많다. 어록체의 글이라 백화투의 표현이 섞여 있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책을 읽는 것은 장차 이치를 궁구하고, 실용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제 혹 문장 구절의 말단에만 마음을 쏟는 것은 소용이 없다.”

程子曰 : “讀書將以窮理, 將以致用也. 今或滯心於章句之末, 則無所用也.”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책을 읽을 때 유사하다 하여 그 뜻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마다 서로 막힌다. 마땅히 문장의 기세와 아래 위의 뜻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충실(充實)한 것을 일러 미(美)라고 한다고 할 때의 아름다움과, 시의 미(美)라고 할 때의 아름다움은 같지가 않다.

凡讀書, 不可以相類泥其義. 不爾, 則字字相梗. 當觀其文勢上下之意. 如充實之謂美, 與詩之美不同.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일찍이 독서가 사람을 기쁘게 할 때가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손과 발이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할 때가 있음을 알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옛사람의 뜻과 선생의 뜻이 서로 합치된 뒤라야 이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嘗覺讀書有令人喜時, 有令人手舞足蹈時. 或問 : “莫是古人之意與先生之意, 相合後, 如此否?” 曰 : “是也.”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읽은 책이 적으면 살펴 따져서 정밀한 뜻을 얻을 길이 없다. 대개 책이란 이 마음을 유지시켜 준다. 한때라도 내려놓으면 그만큼 덕성이 해이해진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항상 간직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책은 모름지기 줄줄 외워 정밀하게 생각해야 한다. 흔히 밤중에 앉아 있을 때나 혹 고요히 앉아 있다가 얻곤 한다. 하지만 글을 기억하지 못하면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루 꿰어 큰 근원을 얻은 뒤라야 글이 쉽게 기억된다. 책을 보는 까닭은 자기의 의심을 풀고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는 데 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유익을 더하면 배움은 진전된다. 하지만 의심치 않던 곳에서 의심이 생겨야 바야흐로 나아간 것이다.

讀書少, 則無由考校得義精. 蓋書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讀書則此心常存, 不讀書, 則終看義理不見. 書須成誦精思. 多在夜中, 或靜坐得之. 不記則思不起, 但通貫得大原後, 書亦易記. 所以觀書者, 釋己之疑, 明己之未達. 每見每加新益, 則學進矣. 於不疑處有疑, 方是進.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꼼꼼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모두 설명이 있으니, 제가의 풀이를 하나하나 관통한 뒤라야 그 옳고 그름을 견줘보아 성현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뜻을 구할 수가 있다. 비록 이미 얻었더라도 또한 다시 이처럼 되풀이해 살피고 음미해서 그 의리가 내 안에 흠뻑 젖어들어 피부에 스미고 골수까지 무젖게 해야만 배웠다고 말할 수가 있다.

讀書先要虛心平氣熟讀精思. 令一字一句, 皆有下落, 諸家註解一一通貫然後, 可以較其是非, 以求聖賢立言之本意. 雖已得之, 亦且更如此反復玩味, 令其義理, 浹洽於中, 淪肌浹髓然後, 乃可言學耳.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책을 볼 때는 다만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이치가 담긴 곳을 찬찬히 살펴야 한다. 취할 만하면 비록 세속 보통사람의 말이라도 폐하지 않는다.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비록 성현의 말씀으로 전해 온다 해도 또한 다시금 살펴 가려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의미가 차분해지고 이치가 명백해져서 발은 실지를 딛고 행동에 의거함이 있게 되니, 통발에 걸려 스스로를 속이는 근심이 없다.

觀書, 但當虛心平氣, 以徐觀義理之所在. 如其可取, 雖世俗庸人之言, 有所不廢, 如有可疑, 雖或傳以爲聖賢之言, 亦須更加審擇. 自然意味平和, 道理明白, 脚踏實地, 動有依據, 無籠罩自欺之患矣.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남의 글을 볼 때 하는 소리를 따라 덩달아 옮겨가서는 안 된다. 내가 옳은 곳을 얻어 보아야만 믿을 수가 있다. 모름지기 침잠하고 깊이 살펴야 보는 곳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덩달아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看人文字, 不可隨聲遷就. 我見得是處, 方可信. 須沈潛玩繹, 方有見處. 不然, 人說沙可做飯, 我也說沙可做飯. 如何可喫?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란 일반적인 사람의 일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 저 일을 알려 하면 저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 문득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단지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반드시 이럴 것이라고 말한다.

讀書如問人事一般, 欲知彼事, 須問彼人. 今却不問其人, 只以己意料度, 謂必是如此.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겠는가?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사사로운 뜻을 주장함이고, 다른 하나는 전부터 먼저 들어앉은 견해가 있는 것이다. 비록 떨쳐 내던지려 해도 또한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고 만다.

學者觀書, 病在只要向前, 不肯退步看. 愈向前, 愈看得, 不分曉. 不若退步, 却看得審. 大槪病在執着, 不肯放下. 正如聽訟, 心先有主張乙底意思, 便只尋甲底不是, 先有主張甲底意思, 便只見乙底不是, 不若姑置甲乙之說. 徐徐觀之, 方能辨其曲直. 橫渠云: “濯去舊見, 以來新意,”此說甚當. 若不濯去舊見, 何處得新意來? 今學者有二種病, 一是主私意, 一是舊有先入之說. 雖擺脫, 亦被他自來相尋.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마음이 공정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와 보니 정말 그렇다. 예를 들어 성인의 경전을 풀이할 때는 한결같이 자기 자신은 두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내맡겨 단지 그 도리만을 붙들어 옳고 그름을 스스로 보아야 한다. 그저 문자만 보게 되면 오히려 스스로 옛 습속에 얽매여 점검할 곳을 잃고 만다. 온전히 자기의 사사로운 뜻만 붙들고서 성현의 글을 본다면 어떻게 얻을 수가 있겠는가?

嘗見人云, 大凡心不公底人, 讀書不得. 今看來, 是如此. 如解說聖經, 一向都不有自家身己, 全然許心, 只把他道理, 自看其是非. 恁地看文字, 猶更自有牽於舊習, 失點檢處. 全然把一己私意去看聖賢之書, 如何看得出?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에는 방법이 있다. 이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낸 뒤에 보아야 한다. 만약 깨달아 얻지 못하면 잠깐 내려놓고 다른 생각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가 또 보아야 한다.

讀書有箇法, 只是刷刮淨了那心後去看. 若不曉得, 又且放下, 待他意思好時, 又將看來.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예전 진열(陳烈) 선생이 기억력이 없어 고생했다. 하루는 『맹자』를 읽는데,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방심을 구하는 것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아 말했다. “내 마음을 일찍이 거두어들이지 못했으니, 무슨 수로 책을 기억하겠는가?”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고요히 앉아 1백여 일 동안 책을 읽지 않고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였다. 그러고 나서 책을 읽자 마침내 한 번 보면 빠뜨림이 없었다.

昔陳烈先生苦無記性. 一日讀孟子,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忽悟曰 : “我心不曾收得, 如何記得書?” 遂閉門靜坐, 不讀書百餘日, 以收放心, 却去讀書, 遂一覽無遺.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한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어 봤자 기억나지 않는 것을 괴로워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욕심이 많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복주의 진정지(陳正之)는 정말 노둔했다.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50글자씩 반드시 2,3백번은 읽어야 익숙해졌다. 습관이 되도록 읽어나가자, 나중에는 안 읽은 책이 없게 되었다.”

一學者, 苦讀書不記, 先生曰 : “只是貪多, 故記不得. 福州陳正之極魯鈍, 每讀書, 只讀五十字必二三百遍, 方熟. 積習讀去, 後來却無書不讀.”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의리를 구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돌이켜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한다. 진한(秦漢) 이래로 누구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그저 한결같이 서책 위로 나아가 구하기만 했지 자신에게 나아가 따져 깨달으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도달하지 못했는데 성인이 앞서 하신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은 단지 말만 빌리고,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비로소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인의예지를 설명하려면, 자신이 직접 인(仁)이 무엇이고 의(義)가 무엇이며, 예(禮)와 지(智)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 모름지기 몸소 체득해야만 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읽을 때는 자신이 어떻게 배우고 익혔는지 알아야 한다.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일찍이 어떻게 해야 기뻤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얻게 된다. 만약 그저 단락 따라 풀이나 하며 지나가고, 풀이하는 것으로 그치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讀書不可只專就紙上求義理. 須反來就自家身上推究. 秦漢以來無人說到此. 亦只是一向去書冊上求, 不就自家身上理會. 自家見未到, 聖人先說在那裏? 自家只借言語, 來就身上推究, 始得. 如說仁義禮智, 曾認得自家如何是仁, 自家如何是義, 如何是禮, 如何是智. 須是着己體認. 方得如讀學而時習之, 自家曾如何學, 自家曾如何習, 不亦說乎, 曾見須如何是說. 須恁地認, 始得. 若只逐段解過去, 解得了便休也, 不濟事.

- 양응수, 「독서법

누가 물었다. “책을 읽어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심을 어떻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근래에 배우는 자 가운데 어떤 부류는 책은 버려두고, 한 마디나 반 구절에서 이치를 깨달으려 든다. 또 한 부류는 내쳐 넘치도록 읽으면서도 귀착할 지점을 모른다. 이는 모두 배움을 아는 자가 아니다. 모름지기 익히 보고 익히 생각해서, 오랜 사이에 저절로 그 도리가 아무 걸림이 없게 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핵심이란 것은 그 속에 절로 있다.”

或問 : "讀書未知統要." 曰 : "統要如何便會知得? 近來學者, 有一種, 則捨去冊子, 却欲於一言半句上便要見道理. 又有一種, 則一向汎濫, 不知歸着處. 此皆非知學者, 須要熟看熟思, 久久之間, 自然見箇道理四停八當, 而所謂統要者, 自在其中矣."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모름지기 자세해야 한다. 구절 따라 글자마다 보아야만 한다. 노력이 거칠고, 정밀한 생각에 힘쓰지 않으면서 단지 의심할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면, 의심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서 의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일 뿐이다. 독서는 의심이 없는 것은 의심이 나게 하고, 의심이 있는 것은 의심이 없게 해야 한다. 이에 이르러야만 큰 발전이 있다.

讀書須是仔細, 逐句逐字要見去着. 若用工麤鹵, 不務精思, 只道無可疑處, 非無可疑, 理會未到, 不知有疑爾. 讀書, 無疑者須敎有疑, 有疑者却要無疑. 到這裏方是長進.

- 양응수, 「독서법

배우려고 책을 읽으려면 모름지기 번거로움을 참고 세밀하게 이해해 나가야 한다. 절대로 마음을 거칠게 먹으면 안 된다. 만약 “꼭 책을 읽어야 해? 지름길이 따로 있는데”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다. 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흡사 몇 겹의 물건으로 속에 든 것을 감싼 것과 같아, 대놓고 살펴볼 방법이 없다. 오늘 한 겹을 벗겨내어 또 한 겹을 살피고, 내일 또 한 겹을 제거해서 또 한 겹을 이해한다. 껍질을 다 벗겨야 살이 보이고, 살을 다 걷어 내면 뼈가 나온다. 뼈를 다 제거하면 그제서야 골수가 나온다. 거친 마음과 큰 기세만 가지고는 얻지 못한다.

爲學讀書, 須是耐煩細意去理會, 切不可麤心. 若曰, 何必讀書? 自有箇捷徑法, 便是悞人底深坑也. 未見道理時, 恰如數重物色包裹在裏許, 無緣可以便見得. 須是今日去了一重, 又見得一重, 明日又去了一重, 又見得一重. 去盡皮, 方見肉, 去盡肉, 方見骨, 去盡骨, 方見髓. 使麤心大氣, 不得.

- 양응수, 「독서법

독서란 비유컨대 집 구경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한 차례 보고도 또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나야 본 것이다.

讀書者譬如觀此屋. 若在外面見有此屋, 便謂見了, 卽無緣識得. 須是入去裏面, 逐一看過, 是幾多間架, 幾多窓欞. 看了一遍, 又重重看過, 一齊記得, 方是.

- 양응수, 「독서법

성인의 말씀은 천 송이의 꽃과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보기가 좋다. 모름지기 단적으로 정말 좋은 곳을 보아야 비로소 얻은 것이다. 모름지기 힘을 쏟아 자세히 보아야 한다. 공부는 단지 자세히 보는 데 달렸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

聖人言語如千花, 遠望都見好. 須端的眞見好處, 始得. 須着力仔細看. 工夫只在仔細看上, 別無術.

- 양응수, 「독서법

독서의 방법은 마땅히 차례에 따라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두와 문장의 의미 사이에 침잠해서, 붙들어 보존하고 실천하는 실지를 체험한 뒤라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점차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널리 구하고 넓게 취해서 날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운다 해도 또한 배움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했다. “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을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보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이 말이 특별히 맛이 있다.

讀書之法, 當循序而有常, 致一而不懈. 從容乎句讀文義之間, 而體驗乎操存踐履之實然後, 心靜理明, 漸見意味. 不然則雖廣求博取, 日誦五車, 亦奚益於學哉? 程子曰 : "善學者, 求言必自近, 易於近者, 非知言者也." 此言殊有味.

- 양응수, 「독서법

책을 읽다가 의리를 깨달으면 가슴이 활짝 열려 시원스럽고 명쾌해진다. 이렇게 되는 것이 가장 좋다. 효과 보는 것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보람만 거두려 들면 근심스런 생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저 이렇게만 하면 가슴 속에 떡 덩어리처럼 딱 맺힌 것이 있게 된다. 그럴 때는 등한하게 내버려 두되 생각조차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 단지 온 마음을 쏟아 의미를 음미해야 문득 마음이 정밀해진다. 마음이 정밀해져야 익숙해지게 된다.

讀書看義理, 須是胸次放開, 磊落明快, 恁地去第一, 不可先責效. 纔責效便有憂愁底意, 只管如此, 胸中便結聚一餠子不散. 今且放置閒事, 不要閒思量. 只專心去玩味義理, 便會心精, 心精便會熟.

- 양응수, 「독서법

사람들은 독서는 마땅히 차분하게 완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스스로를 나태하게 만드는 말이다. 만약 어떤 책을 읽어 의미를 깨치지 못했다면 급하게 허둥대서는 안 되겠지만 놓아 버리지 않는 것이 그래도 낫다. 만약 온종일 서성이면서 이를 차분한 것이라 말한다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약 달이는 것에 비유해 보자. 모름지기 센 불로 달인 뒤에는 불기운을 늦춰서 은근히 달여야 문제가 없다.

人言讀書當從容玩味, 此乃自怠之一說. 若是讀此書, 未曉道理, 雖不可急迫, 亦不放下, 猶可也. 若徜徉終日, 謂之從容, 却無做工夫處. 譬之煎藥, 須是以大火煮潦然後, 以慢火養之, 却不妨.

- 양응수, 「독서법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배움은 노소가 다르다. 젊어서는 정력이 남아도니 모름지기 읽지 않은 책이 없어야 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가 들게 되면 주력할 것을 가려야 한다. 한 가지 책을 읽다가 뒤에 공부하기가 어렵겠다 싶거든 다시 읽어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침잠하고 따져 살펴 지극한 곳까지 마저 살펴야만 한다.

某嘗謂 爲學老少不同. 年少精力有餘, 須用無書不讀, 無不究竟其義. 若年齒向晩, 却須擇要用功, 讀一書, 便覺後來難得工夫, 再去理會, 須沈潛玩索, 究極至處可也.

- 양응수, 「독서법

정신이 우수한 사람은 널리 취해 얻는 것이 많다. 정신이 부족한 사람은 다만 말뜻이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 함양해야 한다. 중년이 지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으려 들면 안 된다. 단지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고 사색해야 의미가 절로 드러난다.

精神長者, 博取之, 所得多, 精神短者, 但以詞義簡易者涵養. 中年以後之人, 讀書不要多, 只少少玩索, 自見道理.

- 양응수, 「독서법

곽우인(郭友仁)이 작별 인사를 하자 주자가 말했다. “공은 식견은 밝지만 정력이 부족하니 날마다 글을 너무 많이 보면 안 되오. 또 기억력이 나빠도 공부를 쉬지 않고 하면 절로 큰 진전이 있을 것이오.” 또 말했다. “사람이 하루 중에 쓸데없는 말을 줄인다면 한두 구절을 얻고, 일없이 손님 만나 보기를 줄인다면 한두 사람을 얻는다. 일을 처리하면서 만약 몸뚱이를 온통 등한한 가운데다 둔다면 어찌 책을 읽겠는가? 사람이 날마다 할 일이 없다면,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고, 반나절은 책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1,2년만 하면 어찌 발전하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郭友仁拜辭, 朱子曰 : “公識性明, 精力短, 每日文字不可多看. 又記性鈍, 但用功不輟, 自有長進矣.” 又曰 : “人若於日間閑言語省, 得一兩句, 閒人客省見, 得一兩人也. 濟事若渾身都在閑場中, 如何讀得書? 人若逐日無事, 用半日靜坐半日讀書. 如此一二年, 何患不進?”

- 양응수, 「독서법

『맹자』와 『논어』를 보는 법은 다르다. 『논어』는 냉정하게 보아야 하고, 『맹자』는 숙독해야 한다. 『논어』는 구절과 뜻마다 각기 한 가지 의리를 담고 있어 자세하고 고요히 살펴야만 한다. 『맹자』는 큰 단락으로 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서 숙독해야 글의 뜻이 드러난다. 한 구절 한 글자마다 깨달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看孟子與論語不同, 論語要冷靜看, 孟子要熟讀. 論語逐文逐意, 各是一義, 故用仔細靜觀. 孟子成大段, 首尾通貫熟讀, 文義見, 不可逐一句一字上理會也.

- 양응수, 「독서법

예전 한 부류의 학자들은 많음을 탐하고 얻음에 힘써 『주례(周禮)』와 여러 역사 책, 그리고 당대의 전고(典故)까지 읽으려고 했다. 한결같이 모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허다한 공부를 죄다 이해하려고 들었다. 짧은 순간에 몸이 이미 온통 스스로 고꾸라져서 놓아둘 곳을 잃고 말았다. 이는 마치 음식 먹는 일과도 비슷하다. 제 철도 아닌 어떤 잡된 물건을 한 끼에 온통 배부르게 먹어 치우면, 이 때문에 배가 더부룩하고 장이 뒤틀려서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된다.

向時有一截學者, 貪多務得, 要讀周禮諸史本朝典故, 一向盡要理會得許多沒緊要底工夫, 小刻身己都自恁地顚顚倒倒, 沒頓放處. 如喫物事相似, 將甚麽雜物事, 不是時節, 一頓都喫了, 便被他撐腸拄肚, 沒奈何他.

- 양응수, 「독서법

무릇 글을 볼 때 적게 보며 숙독하는 것이 첫째다. 천착해서 주장을 세우지 않고 반복해서 체험하는 것이 둘째다. 몰두해서 이해하되 보람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이 셋째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를 지켜야 한다.

凡看文字, 少看熟讀, 一也. 不要鑽硏立說, 但要反覆體驗, 二也. 埋頭理會, 不要求效, 三也. 三者, 學者所當守.

- 양응수, 「독서법

글을 볼 때는 용맹한 장수가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 곧장 단번에 끝까지 무찔러 싸우는 것 같이 해야 한다. 가혹한 형리가 옥사를 다스리면서 막바로 철저하게 추궁해서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얻을 수 있다.

看文字, 須是如猛將用兵, 直是鏖戰一陣, 如酷吏治獄, 直是推勘到底, 決是不恕他, 方得.

- 양응수, 「독서법

글을 볼 때 두 가지 병통이 있다. 성품이 둔한 부류는 이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봐도 생소해서 서두르기만 해서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또 민첩하고 날카로운 부류는 흔히 자세히 보려 들지는 않고, 쉽게 얻어 대충 소홀히 하려는 생각이 많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看文字, 有兩般病, 有一等性鈍底人, 向來未曾看, 看得生, 卒急着不出, 固是病. 又有一等敏銳底人, 多不肯仔細, 易得有忽略之意, 不可不戒.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우선 숙독해야 한다. 그 말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해야 한다. 계속해서 정밀하게 따져 보아 그 뜻이 죄다 내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숙독해서 깊이 생각하여 깨달아 얻은 뒤에도 또 이 정도에서 의문을 멈추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전이 있다고 할 만하다. 만약 이쯤에서 그친다고 하면 끝내 다시는 진전이 없다.

大抵讀書, 先須熟讀, 便其言皆若出於吾之口, 繼以精思, 便其意皆若出於吾之心然後, 可以有得爾. 然熟讀精思旣曉得後, 又須疑不止如此, 庶幾有進. 若以爲止如此矣, 則終不復有進也.

- 양응수, 「독서법

배우는 사람이 글을 처음 보면 그저 몇 개의 혼란스러운 물건으로 보일 뿐이다. 오랫동안 보아 한두 조각에서 십여 조각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큰 진전이 있는 것이다.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 그의 눈에는 온전한 소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學者初看文字, 只見得箇渾淪物事. 久久看作一二兩片, 以至於十數片, 方是長進. 如庖丁解牛, 目視無全牛, 是也.

- 양응수, 「독서법

 

안정복安鼎福(1712~1791)

조선 후기 학자. 자는 백순百順, 호가 순암順菴 또는 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남인 실학의 정맥을 이었다. 역사와 지리학의 방법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운 점은 높이 평가된다. 저서에 『동사강목』, 『순암집』, 『가례집해家禮集解』 등이 있다. 1767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중 난해한 구절을 해석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안정복의 독서론은 「상헌수필橡軒隨筆」과 「잡록」, 그 밖에 사우 간에 주고받은 편지글 중에서 뽑았다. 그의 독서론은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방향을 짚어 주는 명료성이 있다. 특히 학문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많다. 공부를 겉멋이나 혈기로 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 점검은 어떻게 하는지, 공부에 임하는 각오는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성호 이익의 독서론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담았다. 이익에서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들의 공부법이 잘 담겨 있다.

책이란 옛 성현들의 정신과 심술(心術)의 궤적이다. 옛 성현들이 오래 살면서 가르침을 베풀 수 없었으므로, 반드시 책을 저술하여 뒷 세상에 남겨, 후인들이 그 말을 말미암아 자취를 찾고, 자취를 통해 이치를 미루어 알게 하려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후세의 선비가 책을 읽어 성현의 뜻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으면 그 뜻을 알 수가 없고, 널리 보지 않고는 그 변화에 통달하지 못한다. 옛 사람이 말했다. “책 읽어 1만권을 독파했더니, 글을 씀에 신기(神氣)가 있는 듯 하다.” 또 말했다. “책을 천 번 읽으니, 그 뜻이 절로 드러난다.” 또 말했다. “묵은 책을 싫증 안 내고 백 번을 읽는다.” 또 말했다. “1만권의 책을 끼고 있는 것이 1백개의 성을 손아귀에 둔 것보다 낫다.” 또 말했다. “5천권의 책을 읽지 않은 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 옛 사람이 독서에 있어 많이 읽고 넓게 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書者古聖賢精神心術之運也. 古聖賢不能長存而施敎, 故必著書垂後, 欲使後人由言而尋跡, 由跡而推理, 是以後儒莫不讀書以求聖賢之意. 而不多讀, 無以知其義, 不博觀, 無以通其變. 古人曰 : "讀書破萬卷,下筆如有神." 又曰 : "讀書千遍, 其義自見." 又曰 : "舊書不厭百回讀," 又曰 : "擁書萬卷, 勝於南面百城." 又曰 : "有不讀五千卷者, 不入吾室." 古人之於讀書, 其多且博, 可知矣.

- 안정복安鼎福, 「상헌수필(橡軒隨筆)」하 중에서

내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말을 살펴 보았더니 이런 말이 있었다. “일찍이 ‘책은 반드시 1만 번을 읽은 뒤라야 그 정신과 통할 수 있다’고 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두율(杜律)》을 가져다 1만 3천번을 읽었다.” 그는 마침내 이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한번은 역질을 피해 촌가에 머물렀다. 다만 『중용』 한 권만 가지고 갔으므로 1만번을 읽었다. 문리가 통달해서 글을 쓰면 문장을 이루었다. 참판 임유후(任有後)도 젊은 시절 역병을 피해 나가 있었다. 머무는 곳에 책이 없고, 다만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한 편만 있었다. 또한 1만번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변려문이 붓만 잡으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모두 이미 있었던 분명한 징험이다.

余觀東岳李安訥語, 有云嘗聞慕齋金安國先生言, 讀書必萬遍然後, 可以通神, 於是取杜律讀一萬三千遍, 遂以詩名于世. 吳德溪健嘗避癘寓村家, 惟取中庸一卷去, 讀過萬遍, 文理通達, 下筆成章. 任參判有後少時亦避癘, 寓中無書, 惟有王勃滕王閣序一篇, 亦讀過萬遍, 自後騈儷之文, 操筆立成. 此皆已然之明驗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명 나라 양천상(楊天祥)은 자가 휴징(休徵)이니, 혜주(惠州) 사람이다. 자란 뒤 열심히 배우고 책을 읽어, 낮에는 문지방을 넘지 않았고, 밤에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겨울 밤에는 얼음 물에 발을 담궜다가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의 독송하는 방법은 마음으로 책과 마주하고, 귀로는 소리를 들었다. 입에 올리려 들지도 않았고, 굳이 풀이하는 법도 없었다. 매 장마다 1백번씩 읽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는 비록 일이 생기거나 물건이 와도 일체 들은 체 하지 않았다. 먹고 자는 것도 모두 폐한 채 반드시 외우는 숫자를 채운 뒤라야 응대하였다. 글을 지으려 붓을 잡으면 천마디 말이 쏟아져 나왔다. 평생 한가한 날이 없었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에 진사(進士)가 되어 벗과 여러 형제에게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내가 약관(弱冠) 때부터 뜻을 힘써 책을 읽었으니, 이제까지 13년이다. 1년 중에 명절과 집안 경사 및 병으로 앓아 누운 날이 60일이 넘지 않는다. 나머지 300일은 모두 외우고 읽었다. 날마다 석 장 이하로 읽은 날이 없으니, 1년이면 9백장을 밑돌지 않고, 15년이면 1만 5천장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의 1만권 독서에 견주면 겨우 열에 한 둘일 뿐이지만, 근세 사람과 견준다면 내가 그래도 많을 것이다. 예전 상자평(尙子平)은 집안 일을 일절 끊고 오악(五嶽)을 두루 유람하였다. 하지만 어찌 능히 이를 소매에 품고 와서 남에게 알려 줄 수 있었겠는가? 또한 혼자 아는데 만족했을 뿐이리라. 오악을 유람하려면 산 넘고 물 건너는 수고로움이 있고, 헤어져 쓸쓸한 근심이 있다.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여러 해를 지나보내야만 겨우 다 볼 수가 있다. 대저 오경(五經)에는 천지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오악에 견준다 해도 어느 것이 더 크겠는가? 제자백가와 역대의 사서(史書)의 말은 또한 세상의 동천(洞天)이요 복지(福地)이다. 내가 이를 읽어 매번 책 한 권을 마치면 마음이 툭 터지고 정신이 가쁜해져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새로웠다. 대문과 뜰을 나서지 않은 지 10여년에 이를 두루 읽었다. 비록 남에게 알려주기에는 부족하나 또한 혼자 알기에는 충분하다.”

明楊天祥字休徵, 惠州人. 長而苦學讀書, 晝不踰閾, 夜不帖席, 冬夜以凍水沃足致跛. 其讀誦之法, 以心對書, 以耳聽聲, 不求上口, 亦不強解. 每簡以百遍爲度, 當其讀時, 雖事至而物來, 一切不聞, 食寢俱廢, 必誦數足後應之. 爲文操筆千言, 平生無暇日, 無書不讀. 正德丁丑, 成進士, 書示友人及諸昆弟曰 : “予自弱冠, 厲志讀書, 至今十三年. 一年之中, 除時節家慶及疾病之日, 不過六十日, 其三百日, 皆誦讀. 日不下三簡, 一年不下九百簡, 十有五年, 不下一萬五千簡. 方之古人萬卷, 僅十之一二, 然以近世較之, 予猶爲多. 昔尙子平勅斷家事, 徧遊五嶽, 豈能袖之以喩人哉? 亦足以自喩而已. 遊五嶽, 則有跋涉之勞, 有離曠之憂. 勞筋苦骨, 曠年閱歲, 僅乃徧之. 夫五經備天地萬物之理, 比之五嶽也, 孰大而加之? 諸子歷代史百家之言, 亦寰中洞天福地也. 予讀之每徹一書, 心曠神怡, 視聽俱新. 顧不出戶庭者十餘年, 徧之矣, 雖不足以喩人, 亦足以自喩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상사(上舍) 신후담(愼後聃)은 자가 이로(耳老)이고 호는 돈와(遯窩)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문인이요, 나와는 동문이 된다. 젊었을 때 한번 만나 나와 함께 독서의 방법에 대해 토론한 일이 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성현의 책은 1만 번 쯤 읽지 않고는 그 뜻을 알지 못하네. 비근한 일에 견줘 말하자면, 1백 아름이나 되는 나무를 베려할 때는 반드시 큰 도끼로 찍은 뒤라야 손을 댈 수가 있는 법일세. 성현의 말씀은 의리의 심오함이 어찌 큰 나무 따위에 견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여러번 읽은 뒤라야 대략 그 뜻을 알게 된다네. 지금 사람들은 책 읽기를 견디지 못해, 반드시 한 두 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안다고 여기니, 얻을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어찌 작은 낫으로 큰 나무를 찍어 그 껍질만 벗기는데 그치고 마는 것과 다르겠는가?”

그때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손자에게 준 글 한 편을 얻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빈노인(河濱老人)은 5,6세 때부터 책을 읽어 60에 병으로 죽게 되었다. 평생에 독서한 횟수를 기록하여 어린 손자에게 보여준다. 나는 『중용』을 가장 많이 읽었다. 1만번 이후로는 숫자를 헤아리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수 천 번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대학』은 5천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헤아리지 않았는데, 내 생각에 1만 번에서 그다지 차이 나지 않지 싶다. 『서경』과 『역경』은 각각 수 천번을 읽었고, 『시경』과 『논어』, 『맹자』도 각각 1천 여번 씩 읽었다. 『소학』은 1백 여번 읽었고, 『예기』와 『춘추좌씨전』은 각각 50번씩 읽었다. 삼전(三傳)은 그 절반만 읽었다.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와 『효경』은 각각 수십 번씩 읽었다.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全)』,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은 죽을 때까지 읽었다. 그 가운데 초록하여 1백번 또는 수십번 씩 읽은 것이 있다. 심씨(沈氏)가 편찬한 『백가유찬(百家類纂)』은 수십 번 읽었다. 그 가운데 『도덕경(道德經)』과 『음부경(陰符經)』 및 『남화경(南華經)』과 『참동계(參同契)』는 수 백번 씩 읽었다. 『한위총서(漢魏叢書)』에 『대대례(大戴禮)』나 『왕씨역례(王氏易例)』, 『초씨경씨역문(焦氏京氏易文)』, 『신공시설(申公詩說)』 같은 글은 각각 수십번 씩 읽었다.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와 한문공(韓文公)의 『창려집(昌黎集)』은 초록해서 1백번 또는 수십번 씩 읽었다. 그밖에 읽기는 했어도 횟수가 수십번이 되지 않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많이 읽었더라도 단편의 짧은 글은 적지 않는다. 중풍으로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겨우 써서 네게 주니, 네가 능히 유업(遺業)을 잇기 바란다.”

愼上舍後聃字耳老, 號遯窩者也, 星湖李先生之門人也, 與余爲同門. 少時嘗一見, 與我論讀書之法, 其言曰 : "聖賢之書, 不讀萬遍, 不知其義. 以鄙事比之, 欲伐百圍木, 必須以大斧斫之然後, 可以下手. 聖賢之語, 其義理之深奧, 豈可以大木較之哉? 必須多讀然後, 畧知其義. 今人不耐讀書, 必欲一二看閱, 自以爲知, 其不可得必矣. 是何異於以小鎌子斫大木, 不過剝其皮膚而止耳?" 其時聞其言而喜之, 及其沒後, 得其示孫兒書一篇, 有曰 : "河濱老人自五六歲讀書, 至六十病且死, 記平生讀書之數, 以示幼孫. 萬後不計數, 而想不下數千. 大學半萬後不計數, 而想去萬不遠, 書易各數千讀, 詩論語孟子各千餘讀, 小學百餘讀, 禮記春秋左氏傳各五十讀, 三傳半之, 周禮儀禮孝經各數十讀. 二程全書,朱子大全,心經,近思錄,性理大全, 終身所閱, 其中抄讀百遍或數十遍者有之. 沈氏所撰百家類纂數十讀, 而其中道德經陰符南華參同則讀至數百, 漢魏叢書中, 如大戴禮,王氏易例,焦氏京氏易文,申公詩說之類, 各數十讀, 太史公史記,韓文公昌黎集, 抄讀或百遍或數十遍. 其外讀不及數十者不記, 多讀而單篇小文不記. 風攣不成字, 強書貽汝, 冀汝之克嗣遺業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독서는 다만 본문의 의리를 추구해야지, 경솔하게 간추려서 별도의 뜻을 찾거나, 보태 부연하여 다른 주장을 펼쳐서는 안 된다.

讀書只求本文上義理, 不可徑約而求別義, 不可漫衍而爲他說.

- 안정복, 「잡록(雜錄)」

책 보는 일은 삼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음란한 소설을 보면 저도 몰래 방탕한 마음이 생겨난다. 산수의 해맑은 이야기를 읽으면 어느새 안개와 노을을 향한 생각이 깃든다. 병법과 진법에 관한 여러 글을 보노라면 모르는 사이에 용맹한 기운이 솟아난다. 성현의 경전을 읽으면 뜻과 기운이 화평하게 되어 어느새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은 매번 잡서(雜書)를 가지고 경계로 삼았다.

看書不可以不愼. 看淫戱小說, 不覺有流蕩之意, 看山水淸談, 不覺有烟霞之想, 看兵陣諸說, 不覺有武猛之氣, 看聖賢經傳, 則志平氣和, 而油然有正大之心. 故古人每以雜書爲戒.

- 안정복, 「잡록」

독서는 모름지기 의문이 있어야 한다. 의문이 있은 뒤라야 학업에 나아갈 수가 있다. 주자께서는 “책을 읽을 때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고 하셨고, 또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의문이 없는 것 같더니, 그 다음부터 점점 의문이 생겨나서, 중간에는 말 한마디 마디마다 의문 투성이다. 이런 과정을 한 차례 거친 뒤에야 의문이 점차 풀려, 두루 꿰고 회통(會通)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독서의 일대 단안(斷案)이니, 달리 다른 방법은 없다. 대저 성현의 말씀은 모두 평이하면서도 명백해서 굽은 길을 찾아 구하여 스스로를 의심으로 어지러운 가운데에다 얽어매는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退溪) 선생이 말씀하셨다. “책을 읽으면서 굳이 다른 뜻을 깊이 구하면 안 되고, 마땅히 본문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뜻만 구하라.” 이 말씀은 꼭 알맞으면서도 쉬우니 시험삼아 따져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전의 글은 두 가지 뜻이 있게 마련이다. 뒷 사람이 해석할 때는 반드시 헤아려서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한다. 이제 그대가 독서할 때, 경전의 뜻풀이와 다른 것이 있거든, 그 같지 않은 곳에 나아가 경중을 찬찬히 따져보고 읊조리며 상세히 음미한다면 절로 분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나의 사사로운 뜻을 마음 속에 가로질러 놓고 도리어 선유(先儒)의 학설을 자기에게 맞추려 한다면 이는 절대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기가 직접 한편의 글을 짓는 것이 낫지, 어찌 굳이 괴롭게 옛 책을 읽는단 말인가?

讀書須要有疑, 有疑而後, 可以進業. 朱子曰 : “讀書大疑則大進.” 又曰 : “始讀未始有疑, 其次漸漸有疑, 中則節節是疑. 過了這一番後, 疑漸釋, 以至融貫會通, 方是學.” 此爲讀書之一大斷案也, 更無別法. 而大抵聖賢言語, 皆平易明白, 不可探曲以求, 自致纏繞于疑亂之中矣. 退溪李子曰 : “讀書不必深求異意, 當於本文上, 求見在之義.” 此語的當簡易, 試入思議也. 經文固有兩般義, 後人解釋時, 必量度而取其最近者. 今君讀書, 有與傳義不同者, 試就其不同處, 劑量輕重, 諷詠詳玩, 則自有可別之道矣. 我之私意, 橫在肚裏, 却以先儒之說, 求合於己, 是甚不可. 若然則我去自做一般文, 何必苦苦讀古書乎?

- 안정복, 「권철신의 별지에 답함(答權旣明哲身別紙)」

책을 읽다가 의문을 갖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의문이 작으면 진보도 작고,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 실로 이는 바꾸지 못할 가르침이다. 하지만 의문에만 힘을 쏟고 밑바탕이 정해지지 않으면, 마음의 실마리가 점차 어지러워져서 실효를 얻기가 어렵다. 내 생각은 이렇다. 독서에서 비록 자득(自得)이 중요하지만, 자득한 뜻을 앞세워 마음 속에 가로 놓아 두면 그 폐단이 선유(先儒)의 가르침에 대해 먼저 잘못된 점만 찾으려 드는 혐의가 있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미 이루어진 가르침에 의거하여 되풀이해 읽고 침잠하여 깊이 음미하기를 오래한 뒤에, 그래도 의문이 끝내 가시지 않는다면 또 스스로 “내 한 때의 거칠고 얕은 식견이 어찌 선배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내 생각이 잘못된 걸 게야.”라고 여겨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오래 읽었는데도 의문이 끝내 풀리지 않으면 의리로써 질정하고 선각에게 물어서 지극히 마땅한 귀결점을 구해야 한다.

만약 내 견해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면 또한 하나의 주장을 갖출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자족해서 선배를 가볍게 보는 습관이 들면 안 된다. ‘학(學)’이란 한 글자는 『서경』의 「열명(說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 말은 이렇다. “오직 배워 뜻을 겸손히 갖고, 힘써 때에 민첩하라.” 배움은 반드시 뜻을 겸손하게 한 뒤에 옛 가르침과 벗들의 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지 이를 가로막아 버리는 폐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만세의 학자들이 최초로 학문 할 때 받들어야 할 지극한 가르침이다. 가만히 배우는 자를 살펴보니, 수십 권의 책을 읽어 몇 건의 의리를 강구하여 약간 얻은 것이 있다 싶기만 하면 마침내 사사건건 선배의 허물을 찾으려 든다. 심지어는 편장(篇章)의 훈고에 있어서도 조각조각 찢어발겨 이리저리 뽑고 찢어 누더기로 만드는 나무람을 면치 못하기까지 하니, 이는 실로 통렬하게 징계해야 할 지점이다.

讀書有疑, 固是美事. 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實是不易之定訓. 然而惟疑之務而靡所底定, 則心緖漸紛, 而實効難得. 愚則以爲讀書雖以自得爲貴, 先以自得之意橫在肚間, 則其弊恐於先儒之訓, 有洗垢索瘢之嫌. 故當依其成訓, 讀來讀去, 沉潛玩味之久, 而疑終未已, 則又自以爲我一時粗淺之見, 豈有過於前輩者? 是必吾見妄也. 又讀之之久, 而疑終未解, 則質之以義理, 講之於先覺, 以求其至當之歸. 若使吾見不至甚妄, 則亦可備一說. 不可以此自足, 有輕視前輩之習. 學之一字, 始見于書之說命. 其言曰, 惟學遜志, 懋時敏. 學必遜志然後, 於古訓與朋友之言, 易於虛受, 無扞格之患. 此萬世學者最初爲學承受之至訓也. 竊觀學者, 若讀數十卷書, 稍能講究數件義理, 而有得焉, 則遂欲事事求過于前輩, 至若訓誥篇章, 斷斷分裂, 未免撏撦繿縷之譏, 此實痛徵處也.

- 안정복, 「권기명에게 답함(答權旣明書)」

일찍이 들으니 주자(朱子)가 그 문인에게 독서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문자는 차라리 얕게 볼망정 너무 깊어서는 안되고, 낮춰볼지언정 지나치게 높으면 안 된다.” 또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문자를 볼 때 의론 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는 자기의 뜻을 우선해서 남을 보는 것이니, 성현의 말씀을 가슴 속에 무젖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독서를 살펴보니 매번 자기 주장을 내세우되 반드시 깊고 높기만을 구하려 든다. 그런 까닭에 책 한 권을 읽고 한 가지 이치를 얻는데도 침잠하여 꼼꼼히 하는 공부를 보탤 겨를도 없이 먼저 제 주장부터 늘어놓아 반드시 자기 뜻에 합치되기만을 구하려 든다.

만약 이런 점을 서둘러 돌이키고 빨리 되돌리지 않는다면, 끈적끈적 들러붙은 버릇이 오래 되어 스스로 이기려고만 들뿐 뜻을 겸손히 해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뜻이 사라지고 만다. 심술(心術)에 해가 될 뿐 아니라 덕에 나아가는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嘗聞朱子語其門人, 以讀書之法曰 : “文字寧看得淺, 不可太深, 寧低看, 不可太高.” 又曰 : “公看文字, 好立議論, 是先以己意看他, 却不以聖賢言語來澆灌胸中. 自後只要白看乃好.” 愚嘗觀公之讀書, 每欲自主議論, 而必求其深高. 故讀一書得一理, 未及加沉潛縝密之功, 而先自主張, 必欲求合於己意. 若或於此不能亟回頭疾旋踵, 則膠滯之久, 自用勝而欠遜志虛受之義, 未必不爲心術之害, 而有妨於進德修業之大功矣.

- 안정복, 「권기명에게 답함

대저 학문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글을 널리 읽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친다. 하지만 글을 널리 본다는 것은 많이 듣고 말을 신중히 하며, 많이 보고 행실을 삼가, 살펴 묻고 밝게 따져 많이 알고 덕을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감춰지고 구석진 일을 찾아다니고, 기이한 이야기를 주워 모아 많이 아는 것을 뽐내고 화려함을 다투어 입과 귀로 외우고 암송하는 밑천으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터득함은 마음으로 이를 체득하고 몸으로 징험해서, 쌓음을 참되게 하고 오래도록 힘써서 저절로 꿰뚫어 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격물(格物)하는 궁리가 깊지도 않으면서 뜻과 생각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어쩌다 본 것이 있으면 혼자 선인이 미처 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전을 업신여기고 도리에서 벗어나면서도 그칠 줄 모르는 것과는 같지 않다.

大抵爲學之方, 必先博文, 必貴自得. 然欲其博文, 則多聞愼言, 多見愼行, 審問明辨, 多識畜德之謂也, 非若世之搜求隱僻之事, 鉤摘奇異之說, 誇多鬬靡, 以爲口耳記誦之資者也. 欲其自得, 則體之於心, 驗之於身, 眞積力久, 自然貫通之謂也, 非若世之窮格未到, 意慮橫生, 偶有所見, 自以爲發前人之未發, 至於誣經離道, 而不知止者也.

- 안정복, 「황이수 덕길에게 답장함(答黃耳叟德吉書)」

한동안 못 만나 몹시 보고 싶네. 생각건대 그대 형제가 부모님을 봉양하는 여가에 반드시 글공부를 할 터인데, 지금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글을 보고 있는가? 때로 특별한 맛이 있는 대목이라도 있는가? 동생의 편지에 마음을 쏟아 배움에 향하겠다는 말이 있던데, 이왕에 이런 독실한 마음을 지녔거든 반드시 이런 독실한 공부를 실행에 옮겨 쉬는 틈이 없어야 한다네.

만약 한갓 말뿐이라면 비록 마음이 있더라도 실다운 학문이 없게 되니, 이는 특히 배우는 사람의 공통된 병통일세. 반드시 집안 살림은 관심 두지 않고 괴롭게 공부해서 오래 습관이 쌓인다면 절로 시원스러운 지점이 있게 될 걸세. 이는 모두 선현(先賢)께서 이미 시험해본 말로 후학을 일깨워 주신 것이라네.

乍阻瞻菀. 竊想君昆季定省之餘, 必有簡策之工. 今讀何書觀何書, 而時有雋永否? 季君書, 有慥慥向學之語. 旣有此慥慥之心, 則必行此慥慥之工, 無時間斷而已. 若徒以言爲, 則雖有心, 而無實業, 此尤學者之通病也. 必也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積習之久, 自當有灑然處. 此皆前賢已試之言, 而諭後學者也.

- 안정복, 「황덕일 황덕일 형제에게(與黃莘叟德壹耳叟書)」

선배의 영향은 점차 멀어지고, 후학의 취향은 점점 어긋나서, 속학(俗學)들 외에 스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말하는 자 또한 너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재주가 높은 사람은 옛사람의 말을 굳이 다 믿으려 들지 않고 먼저 별도의 길을 찾지요. 기운이 약한 사람은 옛사람의 말을 의심할 수 없다고 여겨 글의 뜻에 얽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옳지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현의 글을 공평한 마음으로 익히 읽고, 글에 따라 뜻을 풀이하여 문장의 뜻이 평이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여, 사견(私見)을 내세우지 않고 별도의 뜻을 세우지도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서 비록 의문의 단서가 점차 생겨나더라도 의문나는 점을 가지고 선현이 미처 펴지 못한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옛 사람의 말에 합치되기를 구하되, 합치됨을 구하고도 얻지 못한 뒤에야 사우(師友)에게 질문하여 그 득실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의심하여 스스로 선현이 미처 펴지 못한 뜻이라고 말했던 것이, 정자와 주자가 울타리 곁에다 이미 내다버린 물건이 아닐 줄 어찌 알겠습니까? 후학이라면 다만 마땅히 선현들이 해석해 놓은 뜻을 밝히 알아 이를 받들어 따르기를 마치 왕조의 법령을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처럼 한 뒤라야 비로소 일관되이 통일되는 뜻이 있게 되어, 나아가는 바가 어지럽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마다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집집마다 문호를 열어 그 어지러움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늘 이러한 생각을 품고는 있었지만 우러러 여쭐 곳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감히 번거롭고 귀찮게 하여 옳은 지 그른 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말이 많다는 나무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깊이 살펴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前輩之影響漸遠, 而後學之步趨漸差, 俗學之外, 自謂有志於此者, 亦不無過不及之失. 才高者以古人之言, 不必盡信, 先尋別路, 氣弱者以古人之言, 爲無可疑, 繳繞文義, 二者均爲不是矣. 愚意欲將聖賢之書, 平心熟讀, 隨文解義, 務使文義平易明白, 不主私見, 不立別意. 讀之之多, 雖疑端漸生, 不可以所疑者, 謂前賢未發之旨, 而求合於古人之說, 求合不得然後, 或質之師友, 以正其得失而已. 其所疑之自謂得前賢未發之旨者, 安知非程朱笆籬邊已棄之物耶? 後學只當明知前賢所釋之義, 而遵奉之, 若王朝令甲之不敢有違, 然後始有一統之意, 而所趨不亂矣. 不然則人執一椎, 家開一戶, 不勝其紛然矣. 常懷此意, 無所仰質, 玆敢煩瀆, 欲承可否之敎. 饒舌之誚, 是恐是懼, 幸俯諒之. 不宣.

- 안정복, 「소남 윤장에게 보냄(與昭南尹丈書)」

배운다는 것은 앎과 행함을 합친 이름이다. 배우는 바는 무엇인가? 성인(聖人)이다. 성인이란 나면서부터 알아 편안히 행하여서 인륜의 지극함이 된다. 성인의 도를 배우는 것은 성인의 앎과 행함을 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순(舜) 임금은 여러 사물에 대해 밝았고, 인륜을 살폈다. 이 말은 만물의 이치를 밝게 알았고, 특별히 인륜을 깊이 살폈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깝다.” 지식이 아무리 많다해도 마땅히 먼저해야 할 것은 실로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맹자도 이렇게 말했다. “요순(堯舜)의 지혜로도 사물에 두루 미치지 못했던 것은 먼저 힘써야 할 일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먼저 힘써야 할 일이란 것은 어떤 일을 가리킬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래에서 배워 위로 도달한다.[下學上達]” 여기서 아래란 것은 비근(卑近)한 것을 일컫는다. 비근하여 알기 쉬운 것이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힘을 쏟아 그치지 않고 오래 쌓아, 많은 괴로운 경계를 다 겪고 난 뒤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어렵다거나 가로 막히는 근심이 없어 쾌활하고도 시원스런 경계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상달(上達)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이른 바 배운다는 것은 다만 하학(下學)일 따름이다.

學者知行之緫名, 而其所學, 學聖人也. 聖人生知安行, 而爲人倫之至, 學聖人之道, 不過求聖人之知與行, 而不出於日用彛倫之外也. 舜明於庶物, 察於人倫, 言其明知庶物之理, 而尤致察於人倫也. 大學論格致之義, 亦曰 : “知所先後, 卽近道矣.” 知雖多般, 而所當先者, 實不出於日用彛倫之外. 孟子亦曰 : “堯舜之知, 而不遍物, 急先務也.” 其謂先務, 指何事也? 子曰 : “下學而上達.” 下者卑近之稱也. 卑近易知者. 非日用彛倫而何? 用工於此, 積累不已, 備盡多少辛苦境界然後, 心體爲一, 無艱難扞格之患, 而庶幾覩快活灑然之境, 上達卽在此也. 故所謂學者, 只是下學而已.

- 안정복, 『하학지남(下學指南)』 「독서(讀書)」

『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그리고 육경을 가져다가 글자를 헤아려 보았다. 『효경』은 1,903자, 『논어』는 11,705자, 『맹자』는 34,685자, 『주역』은 24,107자, 『상서(尙書)』는 25,700자, 『시전(詩傳)』은 39,234자, 『예기』는 99,010자, 『주례(周禮)』가 45,806자, 그리고 『춘추좌전』이 196,845자였다. 중간의 재주를 기준으로 삼아, 만약 날마다 300자씩 외운다면 4년 반이 못되어 마칠 수가 있다. 혹 조금 둔하여 중간 가는 사람의 절반으로 줄인다 해도 9년이면 마칠 수가 있다.

取孝經論孟子六經, 以字計之. 孝經一千九百三字, 論語一萬一千七百五字, 孟子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周易二萬四千一百七字, 尙書二萬五千七百字, 詩傳三萬九千二百三十四字, 禮記九萬九千一十字, 周禮四萬五千八百六字, 春秋左傳一十九萬六千八百四十五字止. 以中才爲準, 若日誦三百字, 不過四年半, 可畢. 或稍鈍, 减中人之半, 亦九年可畢.

- 안정복, 「독서의 차례(讀書之序章)」 중 「구양공독서법(歐陽公讀書法)」

 

홍대용洪大容(1731~1783)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가 담헌湛軒이다. 북학파 지식인으로 천문 · 과학 · 음악 방면에 해박한 식견을 지녔다. 1765년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으로 연행 길에 올라, 절강 선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均 · 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귀국 이후에도 이들과 서신 왕래를 통해 지속적인 교유를 가졌고, 문인 후배 및 후손에게까지 교류가 이어졌다.

책에 수록된 글은 엉성 등을 통해 알게 된 중국 선비 조욱종趙煜宗에게 보낸 편지인 「매헌에게 보내는 편지(與梅軒書)」의 전문과 다른 글에서 간추린 세 편을 담았다. 조욱종에게 보낸 편지는 예전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부 수록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한 편의 글을 단락별로 나눠서 공부의 단계에 따른 대중 처방으로 읽었다. 특히 독서와 송서, 간서로 구분한 세 가지 독서법의 설명과 질문 방법과 잘못된 습관 등을 차례로 지적해서 낱낱이 일러 준 내용이 인상적이다.

 

독서는 진실로 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외우는 것을 버린다면 더더욱 기댈 바가 없게 된다. 날마다 배운 책을 가지고 우선 정밀하게 외워 음과 구두에 착오가 없어야만 한다. 그런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워 먼저 한 차례 읽는다. 그 다음은 한 차례 외우고, 다시 한 차례 본다. 보기를 마치고는 다시 읽는다. 이렇게 모두 3,40 차례 하고 그만둔다. 매번 한권이나 반권을 떼고 나면 앞서 배운 것까지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우고, 그 다음에 보기를 각각 서너 차례 한 뒤에 그만둔다.

讀書固不貴記誦, 惟初學舍記誦, 益無依據. 每日將所受書, 先要精誦, 音讀無錯, 然後始立算, 先讀一遍, 次誦一遍, 次看一遍, 看已復讀, 摠得三四十遍而止. 每畢受一卷或半卷, 幷前受亦先讀, 次誦次看, 各得三四遍而止.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소리를 높이면 기운이 빠진다. 눈을 놀려서도 안 된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 마음이 부산스러워진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된다. 몸을 흔들면 정신이 흩어진다.

凡讀書, 不可高聲, 聲高氣乏. 不可遊目, 目遊心馳. 不可搖身, 身搖神散.

- 홍대용, 『여매헌서』

위의 독서, 송서, 간서의 세 조목은 나눠 말하면 다르지만, 마음을 오로지하여 체득해서 얻어야 하는 점은 꼭 같다. 몸을 거두어 똑바로 앉아,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다른 소리를 거둔다. 손과 발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을 한데 모아 책에도 쏟아붓는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의미가 나날이 새롭고, 절로 무궁한 온축이 있게 된다.

右三條, 分言雖殊, 要專心體究則一也. 須斂身正坐, 目定視, 耳收聽, 手足不妄動, 聚合精神, 灌注于書. 循此不已, 意味日新, 自有無窮妙蘊.

- 홍대용, 『여매헌서』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깨칠 수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병통이다. 하지만 병의 뿌리를 따져보면 뜬 생각을 쫓아 내달리느라 뜻이 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서 억지로 의문을 깨치려 들면, 에돌고 막히고 얕고 가볍게 되어, 참 의문을 깨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의문을 깨치려면 먼저 뜬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

하지만 뜬 생각은 또한 억지로 밀쳐낼 수가 없다. 억지로 밀쳐내려 들면 이것이 외려 한가지 생각을 덧보태게 해서 어지러히 뒤엉킴을 더하게 만든다. 다만 어깨와 등을 곧추 세워 뜻을 고무시켜 편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면 뜬 생각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금세 흩어지고 만다.

凡初學, 不能會疑, 人之通患. 然原其病根, 馳逐浮念, 志不專於書也. 故不去浮念, 强欲會疑, 迂滯淺率, 眞疑不會. 是故欲會疑, 先去浮念. 然浮念亦不可强排. 强排則卽此轉添一念, 適增攪繞. 惟竦直肩背, 鼓發意趣, 一字一句, 心口相應, 浮念倐散, 亦不自覺也.

- 홍대용, 『여매헌서』

무릇 뜬생각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앨 수가 없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맑게 다스림을 보태야 한다. 혹 심기가 평온하지 않거나 옭죄인 생각이 떠나지 않거든, 즉시 묵묵히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키다. 그러면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난다. 과연 이 도리를 능히 하여 나날이 다달이 공력을 쌓음이 점차 익숙해지고, 보람이 점점 커지면 글을 보는 식견이 날로 발전할 뿐 아니라 심기가 편안하고 화평해져서 일을 함에 몰두하여 정밀하게 된다. 위로 도달하는 배움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凡浮念不可一朝凈盡. 惟貴勿忘, 隨加澄治. 或値心氣不平, 纏縛不去, 卽默坐闔眼, 注心臍腹, 神明歸舍, 浮氣退聽. 果能此道, 時月之間, 用功漸熟, 責效漸長, 不惟文識日進, 心安氣和, 作事專精. 上達之學, 亦不外是.

- 홍대용, 『여매헌서』

의리(義理)는 다함이 없으니, 결코 망녕되이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글을 대충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다.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궁구하여 탐색한 것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던 데서 의문이 생기고, 아무 맛 없는 데서 맛이 생겨난 뒤라야 능히 독서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義理無窮, 切不可妄自滿足. 凡文字粗通者, 必無疑, 非無疑也, 究索之不到也. 疑生於無疑, 味生於無味, 然後可謂能讀書矣.

- 홍대용, 『여매헌서』

무릇 독서는 절대로 서둘러 의문을 깨치려 들면 안 된다.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해서 읽고 또 읽는다. 의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의문이 생기면 되풀이해서 살피고 탐구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할 일도 아니다. 혹 일에 응하는 가운데 이를 징험해보고, 혹 잠겨 노니는 중에 구해본다. 빨리 가거나 걸어가거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수시로 살피고 탐색한다. 쉬지 않고 이렇게 하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이같은 탐색을 먼저한 뒤에 남에게 묻는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凡讀書, 切不可徑要會疑. 只平心專志, 讀來讀去, 不患無疑, 有疑則反覆參究. 不必專靠文字, 或驗之應事之際, 或求之游泳之中, 凡行步坐臥, 隨時究索. 如是不已, 鮮有不通, 設有不通, 先此究索而後問於人, 乃可以言下領悟.

- 홍대용, 『여매헌서』

책을 읽을 때 공연히 소리의 기세를 펴거나, 글자를 잘못 틀리게 읽는 것, 어거지로 자구를 가져다 붙이거나, 입에서 나오는대로 논난을 펼치는 것,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버러 돌아보지 않거나, 한번 묻고 한번 대답하고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은 더 나아짐을 구하려는데 생각이 없는 것이니, 함께 배우기에 부족하다.

凡讀書, 虛張聲氣, 錯亂音讀, 强拈字句, 信口發難, 答語未了, 掉過不顧, 一問一答, 不復致思, 此無意於求益也, 不足與爲學也.

- 홍대용, 『여매헌서』

책을 볼 때에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窮究)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 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凡看書, 默誦其文, 玩索其意, 參以註釋, 潛心溫繹. 若徒寓目而心不在, 亦無益也.

- 홍대용, 『여매헌서(與梅軒書)』

성현의 말씀을 볼 때 옛 사람을 참고삼아 이미 그러한 자취를 살피고, 내 자신에게 이를 돌이켜서 통변(通變)의 마땅함을 구해야만 한다. 받아들여 감동하고 슬퍼하고 두려워 하기를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한다. 옛 사람의 독서는 대개 이같은 바탕이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학문이다.

凡看聖賢言語, 參之古人, 考其已然之跡, 反之吾身, 求其通變之宜. 歆動惻怛, 如針箚身. 古人讀書, 盖有此本領, 不如是, 皆僞學也.

- 홍대용, 『여매헌서』

내가 일찍이 맹자가 말한 ‘내 뜻으로 지은이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 네 글자를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옛 사람이 지은 글은 의리(義理)나 사공(事功) 뿐 아니라 편법(篇法)과 기승전결 같은 문사의 말단 기교조차도 각각 뜻을 두지 않음이 없었다. 이제 나의 뜻을 가지고 옛 사람의 뜻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로 합쳐져 아무 간격이 없고 서로 기뻐하여 이해하면, 이는 옛 사람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에 스며 하나가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귀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딱 붙으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와서 능히 이처럼 하게 되는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문장 구절을 본뜨고 해묵은 자취를 흉내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주고받음이 만 가지로 변화하고, 바로 곁에서 근원과 만나게 되어, 내가 또한 옛사람일 뿐이다. 이처럼 책을 읽은 뒤라야 하늘의 교묘함을 빼앗을 수가 있다.

余嘗以孟子以意逆志四字, 爲讀書符訣. 古人作書, 不惟義理事功, 雖篇法起結文辭之末技, 莫不各有其志. 今以吾之意, 逆古人之志, 融合無間, 相說以解, 是古人之精神見識, 透接我心. 譬如乩神降附靈巫, 分外超悟, 不知自何而來, 能如是. 不待依㨾章句蹈襲陳跡, 而酬酢萬變, 左右逢原, 我亦古人而已矣. 如是讀書, 然後可以奪天巧.

- 홍대용, 『여매헌서』

고인이 책을 지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아 공명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살핀 것을 밑천 삼아 명예를 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고 기억하여 살핀 것을 밑천으로 삼는 것 또한 조급하고 얄팍하게 섭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온종일 소리 내서 읽어, 눈이 책의 행간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뜻과 생각이 날리고, 입으로만 읽을 뿐 마음이 이르지 않고 보니, 작자의 본래 뜻을 살피는 것은 열 겹의 무쇠 관문에 가로막힌 격이다. 어찌 도에서 더욱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는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다.

古人作書, 非敎人飭文藻以取功名, 資記覽以干名譽. 然要飾文藻而資記覽者, 亦不可以躁淺涉獵而得之. 今終日誦讀, 目不離行墨, 自以爲如是足矣. 然意慮飛越, 口到而心不到, 視作者本志, 不啻隔十重鐵關. 豈不益遠於道乎? 此天下之棄才也.

- 홍대용, 『여매헌서』

처음 배움을 시작한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어려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어려워 괴롭다고 내버려 둔 채 그저 손쉬운 것만 차지해서 구차하게 편안하기만 도모한다면 이는 버린 재주로 마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조금만 스스로 굳게 참아, 살펴 점검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열흘 사이에 반드시 소식이 오게 되어 있다. 어려워 괴롭던 것은 점차 사라지고 취미가 날로 새로워진다.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이 자연스레 이르러 장차 무한히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다.

初學讀書, 孰不苦其難也? 然任其苦難, 聊占便宜, 以圖苟安, 是終於棄才而已. 若稍自堅忍, 不忘省檢, 旬日之間, 必有消息, 苦難漸去, 趣味日新, 馴致乎手舞足蹈, 將有無限樂事.

- 홍대용, 『여매헌서』

독서란 장차 이치를 밝혀서 일에다 펼치려는 것이다. 진실로 정밀하게 읽고, 익숙하게 강하며, 적실하게 보고, 진실되게 얻는다면, 저 책이란 것은 아무 짝에 쓸데 없는 낡은 종이일 뿐이니, 이를 묶어 다락에 올려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오직 정밀하고 익숙하며, 적실하고 참된 것은 비록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다. 그럴진대 독서란 것은 그 공부가 진실로 끝이 없어, 실로 배우는 자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사업이다. 비록 그렇긴 해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는 진실로 한쪽에만 치우쳐 다른 하나를 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본말과 경중의 차이로 또 크게 등급의 구별이 생긴다. 이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돈오(頓悟)로 들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훈고로 귀착되고 마니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의 독서란 대충대충 섭렵하여 읽다 말다하는 것이다. 이미 정밀하지도 익숙치도 않은데 어찌 적실하고 진실됨을 논하겠는가? 독서의 공부가 이런 지경인데도 또 한 책을 다 읽고는 내 일을 이미 마쳤다고 말하며, 함부로 날뛰고 망녕된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문득 가서 이를 실행하는 큰 일이 남아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려하는 것에 비유해보자. 책이란 한 부의 노정기(路程記)이고, 행함이란 말에게 꼴을 먹이고 수레에 기름칠 해서 노정기에 따라 몰고 또 달리는 것이다. 다만 말에 고삐를 씌우고 수레를 손질해 두고는 몰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으면서, 오직 열심히 노정기만을 강론한다면, 먼 길을 가려는 계획은 끝내 무너져 이루어질 날이 없다.

且讀書, 將以明夫理而措諸事也. 苟能讀之精, 講之熟, 見之的, 得之眞, 則彼書者, 乃無用之故紙也, 可以束之高閣矣. 惟精也熟也的也眞也, 雖聖人猶有所憾焉, 則讀書者, 其功固無涯岸, 而果學者之終身事業也. 雖然, 知行兩端, 固不可偏廢, 而本末輕重之分, 又大有等別, 於此有差則不入於頓悟, 必歸於訓詁, 可不懼哉? 今吾輩之讀書, 鹵莽涉獵, 忽斷忽續. 旣未精熟, 何論的眞? 其讀書之功旣如是, 而又讀盡一書, 便謂吾事已了, 乃猖狂妄行, 無所忌憚. 不知讀書盡後便去行之, 方大有事在. 譬如有人欲作遠行, 書者一部路程記也, 行者秣馬脂車, 按記而驅且馳者也. 惟縶馬理輪, 弗驅弗馳, 切切焉惟記之是講, 所以行邁之謀, 終無潰成之日也.

- 홍대용, 『철교에게 준 편지(與鐵橋書)』 중에서

아아! 곤륜산의 옥도 갈고 쪼지 않으면 기왓장 자갈돌과 한 가지다. 예장(豫章)의 훌륭한 재목도 깎고 다듬지 않으면 가시나무와 다를 게 없다. 안연(顔淵)과 맹자의 자질로도 배워 닦지 않는다면 평범하고 천한 사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옥은 쪼지 않을 수 없고, 재목은 깎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은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으로 배움을 알지 못한다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알면서 능히 행하지 못한다면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긴 해도 힘껏 할 수 없다면 용기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알고서 행하고, 용기로 나아갈 때 이를 두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 공자의 문하에 제자가 3천명이었으되,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일컬어진 자는 홀로 안연 뿐이었다. 증자(曾子)와 민자(閔子) 이하로는 대개 축에 들지도 못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 힘들기가 이와 같았다. 하물며 성인의 시대에서 수천 여년이나 떨어지고, 성인의 살던 곳에서 수천 여리라 떨어진 곳임에랴! 도타운 풍속은 날로 사라지고, 경박한 풍속만 날로 심하다. 이러한 때를 당해 공자께서 말씀하신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를 만나 보려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나 안연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만약 명리에 뜻을 끊고 책에만 마음을 쏟아, 어렵고 험한 길을 피하지 않고서 오로지 도만을 구하는 사람은 또한 오늘날의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할만 하다.

嗚呼! 不磨不琢, 崑崗之玉, 猶之瓦礫矣, 不鑿不斲, 豫章之材, 猶之樲棘矣, 不學不修, 顔孟之姿, 不離於凡夫賤卒. 是以玉不可以不琢, 材不可以不斲, 人不可以不學. 人而不知學, 可謂智乎? 知而不能爲, 可謂義乎? 爲而不能力, 可謂勇乎? 知而爲之, 勇以將之, 斯其爲好學者歟. 昔者孔氏之門, 其徒三千, 稱好學者獨有顔淵, 曾閔以下, 盖無與焉, 若是乎好學者之難得也. 况乎去聖人之世數千有餘歲, 去聖人之居數千有餘里. 淳風日喪, 而薄俗日競, 當此之時, 欲求見孔氏所謂好學之士, 不亦難乎? 雖然, 顔淵何可當也, 若絶意名利, 潛心簡編, 不避難險, 惟道之是求者, 亦可謂今之好學者矣

- 홍대용, 『주도이에게 한 애사(周道以哀辭)』중에서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낯빛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집중하되 기운은 편안하게 갖는다.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선입견을 주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몸을 자주 흔드는 것은 그 뜻이 급해서이고, 눈동자를 어지러이 굴리는 것은 그 마음이 들떠 있기 때문이다. 몸가짐을 바로하고 눈동자를 고정시키면 중심에 법도가 갖춰진다. 마음을 보존하고 앎에 도달하게 되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먼저 대강의 뜻을 살핀 뒤에 곡절을 미루어 헤아린다. 반드시 일을 하는데다 중점을 두어 문장의 구문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한 구절을 보고나면 문득 이를 알아야 하고, 한 구절을 알고 나면 이를 행해야 한다. 한 가지를 알아 한 가지를 행하면 발과 눈이 둘다 나아가게 된다. 경전이나 역사책 외에 이단의 잡서는 또한 반드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해야 한다. 음란하고 불경스런 주장은 공부를 해치고 뜻을 잃게 만드니 절대 읽어서는 안 된다.

讀書必整襟肅容, 專心易氣. 毋生雜念, 毋主先入. 搖身數者, 其志促, 轉睛亂者, 其心浮. 竦身定睛, 中心必式. 存心致知, 一擧兩得. 先觀其大義, 而後推其曲, 必措諸事爲, 而毋繳繞於章句. 才見一句, 便要知之, 才知一句, 便要行之. 一知一行, 足目兩進. 經史之外, 異端雜書, 亦必捨其所短. 而取其所長, 如淫媟不經之說, 害工喪志, 切勿寓目.

- 홍대용, 『자경설(自警說)』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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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027 오직 독서뿐

 

정민

2013, 김영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79152

 

029.4

정38ㅇ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책을 왜 읽나? 어떻게 읽을까? 무엇을 읽을까? 옛글 속에 뜻밖에 이런 물음에 대답한 글이 많다. 선인들의 독서는 생활 그 자체였다. 밥 먹듯이 읽고 숨 쉬듯이 읽었다.

 

"앵무새 공부,

원숭이 독서와 결별하라!"

 

조선 최고 지식인들의 삶을 바꾸는 핵심 독서 전략!

허균, 이익, 양응수,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 그들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 독서를 통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정립했을까? 어떻게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와 기적 같은 학문적 성취를 완성했을까? 입으로만 흉내 내는 앵무새 공부, 읽는 시늉만 하는 원숭이 독서를 뛰어넘어 삶을 바꾸는 핵심 독서 전략을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배운다!

 

오직 독서뿐! 책 읽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 책만 읽으면 될까? 된다. 어떻게? 그 대답은 옛 선인들이 이미 친절하게 다 말해 두었다. 왜 읽고, 어떻게 읽고, 무엇을 읽을까? 여기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 책은 아홉 분 선인의 글 속에서 독서에 관한 글을 추려 내 옮긴이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모아 놓고 읽으니 반복되는 얘기가 있다. 소리 내서 읽는 낭독의 위력, 정독의 한 방편으로 권장되는 다독의 효과, 의심과 의문을 통해 확장되는 생산적 독서 훈련 등이 그것이다. 한결같이 강조하고, 예외없이 중시했다.

「서문」 중에서

 

정민[鄭珉]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터넷 시대가 될수록 독서의 소중함은 더 절실해진다. 어려서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지식을 얻지만 깊은 사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뿐이다. 또한 책 읽기는 필연적으로 그쓰기와 맞닿는다.

그동안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삶을 바꾼 만남』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일침』,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있고,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도 썼다.

 

차례

 

서문

 

책을 일는 까닭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책은 마음을 지켜 준다 / 책은 밥이고 옷이다 / 독서하기 좋은 때 / 한 가지 뜻으로 한 책씩 읽어라 / 마음으로 읽어라 / 꼭 필요한 책은 숙독해야 /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의문과 메모의 독서법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읽으나 마나 한 독서 / 독서와 벼슬길 / 책 보관은 공정을 담아 / 보이지 않는 독서의 힘 / 잊기 전에 메모하라 / 깊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라 / 의문을 품어라 / 역사책을 읽는 법 / 역사책 속의 성공과 실패 / 공부의 바른 태도

 

옛 성현의 독서 아포리즘

백수白水 양응수梁應秀 1700~1767

독서의 쓸모 / 문맥을 살펴라 / 독서에서 기쁠 때 / 줄줄 외워 깊이 생각하라 / 본래의 뜻을 구하려면 /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야 / 덩달아 하지 마라 / 모르면 물어라 / 물러서서 살펴보라 / 스스로 판단하라 / 잠깐 내려놓기 / 기억력을 높이려면 / 욕심을 버려라 / 종이를 벗어나 몸으로 깨달아라 / 핵심을 파악하려면 / 의심하는 것이 공부다 / 거친 마음을 버려라 / 독서와 집 구경 / 자세히 보라 / 가까운 데서 찾으라 / 써먹을 궁리 / 긴장과 이완 / 강약의 조절 / 노소의 차이 / 역량과 나이에 따라 / 꾸준함이 총명을 이긴다 / 『논어』와 『맹자』의 독법 / 욕심은 독이다 / 공부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세 가지 / 용맹한 장수와 가혹한 재판관처럼 두 부류의 병통 / 숙독과 정사精思, 그리고 의문 / 포정이 소를 잡듯

 

바탕을 다지는 자득의 독서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많이 읽고 널리 보라 / 1만 번 독서의 힘 / 양천상의 독서기 / 내가 읽은 책과 읽은 횟수 / 아전인수의 독서 / 잡서를 경계하라 / 독서와 의문 / 자득과 겸손 / 얕게 읽고 낮춰 보라 / 스스로 터득하라 / 독실한 마음, 독실한 공부 / 사견을 눌러라 / 하학상달下學上達 / 구양수의 독서분일법讀書分日法

 

독서의 바른 태도와 방법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초학들의 책 읽는 방법 / 책 읽기의 자세 / 외우는 방법 / 책 보는 마음가짐 / 세 단계 독서 / 뜬생각과 의문 / 뜬생각을 다스리는 법 / 의문의 중요성 / 의문을 깨치려면 / 책 읽기의 못된 버릇 / 옛것을 내게 비춰 보라 / 이의역지以意逆志 독서법 /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 / 무한히 즐거운 일 / 자각해서 노력해야 / 먼길을 가려면 /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 / 독서에 임하는 자세

 

독서는 깨달음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읽기 싫어요! / 지렁이의 책 읽는 소리 /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네 / 가장 책을 잘 읽은 사람 / 마음을 읽어야지 / 오직 독서뿐 /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할 때 / 독서의 좋은 방법 / 새벽의 복습과 점검 / 새벽의 새 일과 / 선비의 보람 / 능히 잘 읽는 사람 / 책을 잘 읽는다는 말의 뜻 / 부끄럽지 않은 일 / 실용이 먼저다 / 독서의 해악 / 독서와 천착 / 하루도 그만둘 수 없는 일 / 책의 기운

 

생활의 습관, 독서의 발견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첫 권만 때 묻은 책 / 통째로 읽어라 / 다만 책을 읽을뿐 / 독서의 세 가지 효용 / 독서의 유익한 점 네 가지 / 청명한 기운 / 책을 펴면 부끄러워 / 『논어』의 위력 / 열다섯 살의 마음가짐 / 독서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 / 맹랑한 사람 / 소득 없는 독서 / 독서의 표준 / 베껴 쓰기의 위력 / 모르면 찾아라 / 좋은 내용은 함께 나눠라 / 규모와 체제를 먼저 살펴라 / 책에 대해 해서는 안 될 행동 / 한 권을 끝까지 집중해서 읽어라 / 책을 아끼는 태도 / 적은 분량을 깊이 읽어라 /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칠 때 주의해야 할 점 / 가르침을 받는 바른 자세 / 빨리 읽지 마라 / 독서만이 능사가 아니다

 

안목과 통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

독서와 학문 / 집중해서 읽어야 / 글을 외우는 묘방 / 가장 무서운 건 소인 / 안목을 갖추면 글쓰기가 변한다 / 평생 가장 사랑한 글 / 배움은 정밀하고 거친 것을 가리지 않는다 / 독서는 그 시대를 고려해야 /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 / 잠자리의 생각 / 꿈에 만난 성현 /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 평소의 연습이 중요하다 / 옛 책의 다섯 가지 등급

 

사색과 깨달음의 독서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라 / 깨달음이 있어야 / 독서의 다섯 등급 / 『논어』를 제대로 일은 사람 / 독서의 효과 / 일상과 독서 / 책의 선택 / 일은 책 다시 읽기 / 모든 것이 책이다 / 내 것으로 만들어야 / 옛글을 읽는 자세 / 독서와 활용 / 독서의 횟수 / 남의 글 비판하기 / 부분과 전체

 

허균許筠(1569~1618)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양천陽川, 자가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이다. 학산鶴山 또는 성소惺所도 썼다. 아버지는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엽許曄이다. 형 허봉許篈과 누이 난설헌蘭雪軒이 모두 문학으로 이름 높았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오고, 이듬해에 한 번 더 다녀왔다. 올 때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해서 돌아왔다. 시 비평의 방면에도 두각을 드러내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성수시화惺叟詩話』를 펴냈고,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조선조 최고의 앤솔러지로 꼽힌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정치가로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훗날 여모를 꾀하다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그는 대단한 천재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중국에서 구해 온 명말明末의 청언소품淸言小品을 두루 섭렵하여 이 가운데 좋은 내용만 추려 『한정록閑情錄』으로 묶었다. 이 책에 수록한 독서 관련 항목은 『한정록』중 「정업靜業」편에서 간추렸다. 이 책에 실린 글은 허균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가 중국의 청언소품에서 따온 글이다. 독서에 임하는 자세를 말하고, 독서를 통해 삶의 운치를 깃들이는 법을 설명했다.

장횡거(張橫渠)*가 말했다.
"책은 이 마음을 지켜준다. 한때라도 놓아 버리면 그만큼 덕성이 풀어진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늘 있게 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마침내 의리義理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게 된다."

張橫渠云 : "書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讀書則此心常在, 不讀書則終看義理不見."

-허균許筠, 『한정록閑情錄』 중 「정업靜業」

*장횡거 : 송나라 때 학자 장재(張載). 미현 횡거진(橫渠鎭) 사람이라 횡거선생이라 불렀다.

 

안지추(顔之推)*가 말했다.

"재물을 많이 쌓아두는 것이 얕은 재주를 몸에 지니는 것만 못하다. 재주 중에 익히기 쉽고 귀한 것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이나 어리석은 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많은 사람을 알고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책은 읽으려 들지 않는다. 이는 배부르기를 구하면서 먹거리 마련에는 게으르고, 따뜻하려 들면서 옷 해 입는 데는 나태한 것과 같다."

顔之推曰 : “積財千萬, 不如薄伎在身. 伎之易習而可貴者, 莫如讀書. 世人不問賢愚, 皆欲識人之多見事之廣, 而不肯讀書. 是猶求飽而懶營饌, 欲煖而惰裁衣也.”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안지추 : 남북조 시대의 문인.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지었다.

독서에도 때가 있는데, 동우(董遇)*가 말한 ‘삼여(三餘)의 설’이 가장 일리가 있다. 그가 말했다.


"밤은 낮의 나머지다. 비 오는 날은 개인 날의 나머지다.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다. 마땅히 이 세 가지 나머지에는 사람의 일이 조금 뜸하므로 내가 한 뜻으로 학문에 힘을 쏟을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한밤중에 가만히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끓이노라면 온 세상은 적막한데 성근 종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이처럼 해맑은 광경 속에 책과 마주하여 피곤을 잊고, 이부자리를 걷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길을 막게 되면 문을 닫고 깨끗이 소제한다. 사람의 왕래도 끊고 서책만 앞에 가득하다. 흥에 따라 뽑아서 뒤적인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들려,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로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하고 적막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또 한 해도 늦어 잎 다 진 숲에 싸락눈이 살풋 내리거나 흰눈이 쌓였을 때, 바람은 마른 가지를 흔들고, 찬 새는 들판에서 우짖는다. 방안에서 난로를 끼고 앉아 차 향기에 술이 익는다. 예전 지은 것을 읊조려 외우노라면 완연히 좋은 벗과 마주한 것만 같다. 이러한 정경이야말로 세 번째 즐거움이다. 내가 일찍이 이같은 맛을 얻었기에 동우의 설을 부연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하려한다.

讀書亦有時節, 故董子三餘之說, 最爲有理. 其曰 : "夜者日之餘, 雨者時之餘, 冬者歲之餘. 當此三餘. 人事稍與踈闊, 吾可一意問學" 何也? 良宵燕坐, 篝燈煮茗, 萬籟俱寂, 疎鍾時聞, 當此淸景, 對編簡而忘疲, 徹衾枕而不御, 一樂也. 至如風雨蔽途, 掩關却掃. 絶人往還, 圖史滿前, 隨興抽檢. 潺湲在耳, 簷花拂硏. 如此幽寂, 二樂也. 又若空林歲晏, 微霰密雪. 枯條振風, 寒禽呼野. 一室擁爐, 茗香酒熟. 陳編諷誦, 宛對良友, 顧此景象, 三樂也. 吾嘗得此意味, 故衍其說, 與諸子共之.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동우 : 위나라 사람

소동파가 왕랑(王郞)에게 준 편지에서 말했다.
"나이가 젊은데 배움이 없는 사람은 한 권의 책마다 모두 숫자를 꼽아가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바다에 들어가면 온갖 물건이 다 있지만, 사람의 정력은 모두 거두어 다 가질 수는 없다. 다만 구하려 하는 바를 얻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매번 한 가지 뜻으로 이를 구해야 한다. 만약 고금의 흥망치란과 성현의 작용을 구하려 한다면, 단지 이 뜻만을 추구해야지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또 달리 사적이나 문물 따위를 구하려 해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학문을 이루어 팔방에서 적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제대로 섭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한 몫으로 말 할 수가 없다."

東坡與王郞書云 : "少年無學者, 每一書, 皆作數次讀之. 當如入海, 百貨皆有, 人之精力, 不能兼收盡取, 但得其所欲求者耳. 故願學者, 每次作一意求之. 如欲求古今興亡治亂, 聖賢作用, 且只作此意求之, 勿生餘念. 又別作一次, 求事迹文物之類, 亦如之也. 若學成, 八面受敵, 則涉獵者, 不可同日而語."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소순흠(蘇舜欽)*이 장인인 두기(杜祁) 공의 집에서 지낼 때 일이다. 매일 저녁 책을 읽는데, 술 한 말을 기준으로 삼았다. 가만히 하는 양을 엿보니, 그가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을 읽다가 자객이 철퇴로 진시황을 치는 대목에 이르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깝다! 친 것이 맞질 않았구나.” 그리고는 큰 술잔으로 가득 따라 마셨다. 또 장량(張良)이 “처음에 신은 하비 땅에서 일어나 유(留) 땅에서 상(上)과 만났습니다. 이는 하늘이 저를 폐하께 준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 한 데 이르자, 또 책상을 어루만지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렵구나.” 하더니, 다시 큰 잔을 들이켰다. 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처럼 먹는다면 한 말도 많다할 것이 없겠다.”

蘇子美客外舅杜祁公家, 每夕讀書, 以酒一斗爲率. 密覘之, 子美讀漢書張良傳, 至與客椎擊秦皇帝, 撫掌曰 : “惜乎! 擊之不中.” 遂滿引一太白. 又讀至“良曰始臣起下邳, 與上會於留. 此天以授陛下”, 又撫案曰 : “君臣相遇, 其難如此.” 復擧一太白. 公笑曰 : “有如此下物, 一斗不足多也.”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소순흠 : 송대의 문인. 자는 자미(子美). 소동파의 아버지다.

왕도곤(汪道昆)의 책장에는 찌를 찔러둔 책이 만권을 훨씬 넘었다. 손님이 한참동안 곁눈질해서 보자, 공이 말했다. “많다고 괴로워 말게. 다만 참고하고 찾아보려고 갖추어둔 거라네. 인생에 쓸모 있는 책은 단지 몇 종류를 숙독하면 되네. 비유하자면 한(漢) 고조(高祖)가 천하를 취할 적에 가장 뜻이 맞았던 사람은 소하(蕭何)와 장량(張良)과 한신(韓信) 등에 불과했지."

汪道昆架上牙籤, 不啻萬卷. 客睥睨久之, 公曰 : “無苦其多, 聊備檢訨. 人生所用書, 只須熟數種. 譬之漢高取天下, 其最屬意者, 不過蕭張韓耳.”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문절공(文節公) 예사(倪思)가 말했다.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학 울음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비가 섬돌에 떨어지는 소리, 창으로 눈이 흩날리는 소리, 차 달이는 소리 등은 모두 소리 가운데 지극히 맑다. 하지만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가장 좋다. 다른 사람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까지 기쁘지는 않지만, 자제가 책 읽는 소리만큼은 기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또 말했다. “천하의 일은 이로움과 해로움이 반반인데, 온통 이롭고 작은 해로움도 없는 것은 다만 책 뿐이다.”

倪文節公曰 :“松聲澗聲, 山禽聲野蟲聲, 鶴聲琴聲, 棋子落聲雨滴堦聲, 雪洒窓聲煎茶聲, 皆聲之至淸. 而讀書伊吾聲爲最. 聞他人讀書, 未極其喜, 惟子弟讀書聲, 則喜不可勝言.” 又曰 : “天下之事, 利害常相半, 有全利而無小害者, 惟書.”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이익李瀷(1681~1763)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성호星湖. 저서에 『성호사설』과 『곽우록藿憂錄』 외에 사서삼경에 대한 독서 비망기에 해당하는 질서疾書 연작을 남겼다. 남인 학단의 출발점에 선 학자로 신후담愼後聃 · 안정복 · 권철신權哲身 등의 문인을 배출했다. 정약용丁若鏞이 그 학문적 흐름을 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에 은거하며 자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했고, 일생에 걸쳐 실용적 학문 경향을 추구했다.

이 책에 수록한 글은 주로 『성호사설』과 사서질서의 서문에서 추려 냈다. 이익은 독서에서 메모와 토론을 가장 중시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한다는 '질서疾書'와, 사제 또는 붕우 간의 서면 토론 및 대면 토론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 의문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독서를 역설했다. 역사책 읽기에서 주의할 점 등 공부하는 사람이 유념해야 할 독서의 바른 태도를 친절하게 일러 준다.

 

찾는 것이 있어 책을 읽으면 읽더라도 얻을 것이 없다.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하는 자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읽어봤자, 읽고 나면 아마득하기가 소경과 다름없다. 이는 흑백을 말하면서도 정작 희고 검은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말을 해도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데 불과하므로, 마치 실컷 먹고나서 토하는 것과 한 가지다. 살과 피부에 보탬도 되지 않고 뜻 또한 사납게 된다.

有求而讀書者, 雖讀無得. 故擧子業者, 至唇腐齒爛, 讀止則茫然如瞽師, 言白黑而無以知白黑, 其言之也, 不過入耳出口. 如飽食而嘔, 不惟肌膚無益, 而志亦戾矣.

- 이익, 『성호사설』 중 「유구독서(有求讀書)」

어려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행하려면 독서만한 것이 없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보아 얻은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예로부터 현달하고서도 평생 배운 것을 베풀어 행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어째서 그런가? 막상 일을 할 때는 처음 나아갈 때와 같지 않고, 남의 마음이 내 마음만 못한 까닭에, 혹 위세나 지위에 눌리고, 혹 무리가 떠드는 데 유혹되며, 시세(時勢)에 내몰리거나 이욕에 이끌리게 된다. 이는 모두 이욕이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이기려 들면 마음이 옮겨간다. 마음이 옮겨지면 일도 따라서 옮겨간다. 비록 옛 성인께서 형세로 판단하고, 지난 역사가 증명했어도 그 가운데 얽히고 설키면, 일이 같지 않고 시대가 다른 것만 보는 까닭에 잠깐만에 생각의 방향이 바뀌고 속마음도 달라지고 만다. 이런 까닭에 큰 일에 당하여 시비를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작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야 능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요점이다.

幼而學之, 壯欲行之, 莫如讀書. 讀聖賢書, 推究義理人, 孰無多少見得? 然古來顯任, 未聞有以平生所學施措者. 何也? 做時不如就時, 人心不如我心故. 或爲威尊所壓, 或爲衆咻所誘, 或爲時勢所迫, 或爲利欲所導, 而都不過其利欲者爲之. 機栝欲勝, 則心遷, 心遷則事移. 雖古聖之所勢斷, 前史之所證明, 其中回互周羅, 但見其事有不同, 時有異宜處. 故俄而頭面易方, 腸肚剝換矣. 是以當大事, 判是非, 必也不貴爵祿者, 能之, 此其要也.

- 이익, 『성호사설』 중 「독서사환(讀書仕宦)」

 

옛 책은 읽으면 사람에게 뜻과 지혜를 보태주니 엄한 스승인 셈이다. 어찌 업신여겨 함부로 하겠는가? 판목에 새긴 뒤로 서적이 비록 많아지긴 했어도 가난한 선비가 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하는 것은 괴로울뿐 아니라 또한 잘못 되기도 한다. 선조의 해묵은 장서는 점점 헐어지고 훼손되게 마련인지라 자손이 비록 살펴보려 해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평소에 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책을 아껴 손상되지 않도록 한다. 잘 아는 고을 수령에게 부탁해서 표지와 붙일 종이를 많이 얻어와 책이 헐면 바꾸었다. 남에게 책을 빌렸을 때도 책을 꿰맨 것이 끊어지거나 문드러진 것은 반드시 종이를 비벼 꼬아 기워 묶었다. 실을 마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옛날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은 책을 햇볕에 말릴 때 반드시 곁에 서서 마음을 쏟았고, 이동할 때는 반드시 네모난 판목에 보관했다. 책에 손의 땀이 젖을까 염려해서였다.

매번 책 한 장을 다 읽으면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가장자리에 대고, 집게 손가락으로 덮어 책면을 눌러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넘겼다. 사람들이 손톱으로 집는 것을 번번이 보게 되는데, 이는 책 아끼기를 재물 아끼는 것만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전 극선(郤詵)이 과거시험의 사책(射策)에서 1등으로 뽑히자 붓에게 두 번 절을 하며 말했다. “용수우(龍鬚友)가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어떤 사람이 금거북을 새긴 보배로운 비녀를 선물하자 제자에게 주며 말했다. “붓 3백 자루를 사오너라.” 붓이 못 쓰게 되면 또한 글 주머니에 보관해 두고, 자손에게 좋은 향으로 예를 올리게 했다. 문방구를 아끼는 마음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古書者, 讀之益人意智, 乃嚴師也. 其可慢之耶? 板刻之後, 文籍雖繁, 非貧士所可易得. 手寫傳錄, 不但艱難, 又亦以訛誤. 先祖舊藏漸至殘缺, 子孫雖欲看閱, 何可得也? 故平余生敬以玩之, 無至傷損. 託於所識宰縣者, 多取粧褾貼紙, 隨缺隨易, 借人典籍, 其縫池斷爛者, 必撚紙補綴, 亦緣絲繩之難辦也. 昔范文正晒書, 必側立而暴其腦, 移動必永以方版, 恐手汗之漬. 每竟一板側, 右手大指, 面襯其沿, 而覆以次指, 面撚而挾過. 每見人以手指爪撮起, 卽是噯書不如愛貨貝也. 昔郤詵射策第一, 再拜其筆曰 : "龍鬚友使我至此." 有遣金龜寶簪者, 與弟子曰 : "市筆三百." 管退亦藏之文囊, 令子孫以名香禮之, 其愛惜文房意, 亦善矣.

- 이익, 『성호사설』 중 「경완서적(敬玩書籍)」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로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 했다고 할 만하다.

有一學士, 看書未半, 投地曰 : "掩卷輒忘, 看亦何益?" 玄谷曰 : "人之喫飯, 不能恒留腹中, 然精英之氣, 亦能潤身澤體, 讀書雖忘, 自有長進之效." 可謂善於辭令.

- 이익, 『성호사설』 중 「조현곡(趙玄谷)

「장횡거화상찬」에 묘계질서(妙契疾書), 즉 오묘한 깨달음을 빨리 적었다고 했다. 묘계(妙契) 즉 오묘한 깨달음은 잘 하기가 어렵지만 그 즉시 써두는 질서(疾書)는 쉬운 일이다. 장횡거가 『정몽(正蒙)』을 지을 적에 가는 곳마다 붓과 벼루를 마련해 두었다. 또 밤중에라도 얻은 바가 있으면 일어나서 등불을 가져와 이를 써두곤 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금세 달아날까봐 염려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정자(程子)가 이를 기롱하여 “자후(子厚)는 이처럼 능숙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이다. 능숙했다면 굳이 빨리 쓰지 않더라도 절로 잊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 말이다.

橫渠贊云, 妙契疾書. 妙契難能, 而疾書乃其所短也. 橫渠之作正蒙, 隨處置筆硯, 又或夜中有得, 起而取燭書之. 恐其不疾則旋遺也. 故程子譏之曰 : "子厚如此不熟." 蓋熟則不必疾其書而不自忘也.

- 이익, 『성호사설』 중 「묘계질서(妙契疾書)」

오늘날 사람들은 책은 존중하지만 그 정신은 잃었다. 글은 읽으면서도 그 뜻은 저버리고 있다. 깊이 생각하면 잘못이라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 주제넘다 하며, 부연설명하면 쓸데없는 짓이라 한다. 곧이곧대로 규정하여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도 성역을 설정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 결과 둔한 사람과 총명한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옛 사람이 뒷사람에게 기대하는 바이겠는가? 가령 사람이 백리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수레와 말을 갖추고 하인과 마부가 앞장을 서서 하루 만에 당도하였고, 한 사람은 옆길로 찾아가다가 곤란을 겪은 뒤에 비로소 도달하였다고 하자. 만일 이들로 하여금 다시금 그 길을 가게 한다면 길을 찾아가며 다닌 사람은 정확히 알아, 길잡이를 앞세우고 간 사람처럼 갈림길이나 네거리에서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 주석만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其在于今, 尊其書而失其心, 誦其文而後其義. 思量則爲妄, 致疑則爲僭, 發揮則爲賸. 尺尺寸寸, 一切卑近, 勒爲禁網, 而愚與智無別. 此豈古昔人所望於後來哉? 比如人趨百里之程, 其一人則需以車騎, 導以傔騶, 一日便到, 其一人探搜旁蹊, 艱難而始達. 後使之更趨焉, 則其探搜者認得分明, 不比導行者之或迷於歧衢也. 以此知謹守訓誥之非心得者也.

- 이익, 「논어질서서(論語疾書序)」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의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얻어도 야물지가 않다. 의문이란 의심하고 머뭇대면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 옳은 줄 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울러 살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얻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혹 잘못된 것을 옳다고 우겨도 대응할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과일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복숭아나 살구 같은 과일을 주면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살이 맛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씨 속에 다시 어떤 맛이 있을지 의심한다. 다른 날 개암이나 밤 따위를 주면 껍질은 벗겨내고 씨만 먹는다. 맛이 씨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복숭아나 살구씨의 맛이 개암이나 밤처럼 먹을만 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만약 그때에 모두 먹어보아서 분명하게 알아두었더라면 어찌 다시 이같은 근심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의문을 갖는 것은 의문을 없게 하려는 것이다. 저 먹기만 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비록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또한 장차 이를 따를 것이다.

學必要致疑, 不致疑, 得亦不固. 所謂疑者, 非謂狐疑猶豫無所决擇也. 若知如是而是, 則必兼審如是而非, 方始是見得. 不然則人或以非爲是, 將無以應也. 比如食果子相似, 與之以桃杏之屬, 噉其肉而棄其仁, 美在肉也. 猶疑夫核中更有滋味在也. 佗日與之以榛栗之屬, 剝其皮而噉其仁, 美在仁也. 又安知向之仁之美, 不如榛栗之可噉乎? 若使當時都咬破知得分明, 豈復有此患? 故有疑所以無疑也. 彼食焉而不疑者, 雖爲栗房可嚼, 亦將從之矣.

- 이익,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평소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늘 의심이 생기곤 한다.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다. 그 당시에는 꼭 그렇지 만은 않았을 터. 역사책을 쓸 때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면하려는 지극한 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저 보아 넘길 때는 착한 사람이야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지만, 저 악한 사람이 어찌 그토록 지독했겠는가?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사람이 실제 시비에 현혹되어, 버리고 취함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나무람을 받고 죄를 얻었던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러한 뜻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常時讀史, 每疑. 善者偏善, 惡者偏惡. 在當時, 未必然. 作史, 雖因懲惡勸善之至意. 今人平地上看過, 以爲善者固當, 彼惡者, 胡此至極. 其實, 善中有惡, 惡中有善. 當時之人, 實有是非之眩, 故有去取不審, 貽譏得罪者也. 讀史, 不可不知此意.

- 이익, 『성호사설』 중 「고사선악(古史善惡)」

천하의 일은 대개 열에 여덟 아홉은 요행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고금의 성공과 실패, 날카로움과 둔함은 그때의 우연에 따른 것이 워낙 많다. 선과 악, 어짊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반드시 그 실지를 얻은 것도 아니다.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고 여러 책에서 증거를 찾아 참고 대조해서 비교해 보아야지 진실로 오로지 한 가지 책만 믿고서 단정할 수가 없다.

옛날 정자(程子)가 역사책을 읽을 때, 절반쯤 읽다가 문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패를 가늠해 보곤 했다. 그런 뒤에 문득 보아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더욱 곰곰이 생각했다. 그 사이에는 요행으로 성공하거나 불행으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대개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맞는 경우 또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역사란 것은 성패가 이미 정해진 뒤에 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꾸미게 마련이니, 이를 보면 마치 진실로 마땅한 것만 같다. 게다가 착한 사람은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그 장점을 없애 버린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대한 판단과 착하고 악함에 대한 보답을 징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아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훌륭한 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겠고, 졸렬한 계책이 어쩌다 맞아 떨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그런데 천년 뒤에 무엇으로 옳고 그름의 진실을 안단 말인가? 이런 까닭에 역사책에 근거해서 성패를 가늠해보면 합치되는 것이 많고, 오늘날 눈으로 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생각해 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맞지가 않는다. 이는 내 지혜가 밝지 않아서가 아니라 요행으로 이루어진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일이 어그러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또한 역사책이 진실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천하의 일은 놓여진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은 그 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가 된다.”

天下事大抵八九是幸會也. 其史書所見, 古今成敗利鈍, 固多因時之偶. 然至於善惡賢不肖之別, 亦未必得其實也. 歷考前史, 旁證諸書, 參驗而較勘之, 誠未可以專信一書而爲已定也. 昔程子讀史, 到一半, 便掩卷思量, 料其成敗, 然後却看, 有不合處, 又更精思. 其間多有幸而成, 不幸而敗. 盖其不合處固多, 而合處亦未可準信. 史者作於成敗已定之後. 故隨其成與敗而粧點, 就之若固當然者. 且善多諉過, 惡必棄長. 故愚智之判, 善惡之報, 疑若有可徵, 殊不知. 當時自有嘉謀不成, 拙計偶逭, 善中有惡, 惡中有善也. 千載之下, 何從而知其是非之眞也? 是以據史書, 料其成敗, 則合處多, 從今日目擊顯見者而思量, 則八九是不合. 此非但吾智之不明, 卽幸會之占多也. 非但今事之多戾, 亦史書之難眞也. 余故曰 : "天下之事, 所置之勢爲上, 幸不幸次之, 是非爲下."

- 이익, 『성호사설』 중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나는 평소에 “가르치기가 어렵지만, 배우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경전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옛 가르침을 법도로 삼게할 뿐, 이렇다저렇다 의논하는 뜻은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남을 따라 덩달아 웃으면서 마침내 자기 견해는 없게 되지 싶다. 아니면 장차 다른 자료를 채집하고 널리 궁구해서 증명하는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낮은 처지에 함부로 따진다 하여 죄과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져 밝히는 것이 더 낫다. 그런 까닭에 제자의 직분은 오로지 가르침을 받되 스스로를 속이는데 이르지 말고,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멋대로 바꾸는 데서 실수가 생겨서는 안 된다.

余嘗曰 : "敎旣難, 學亦不易." 使經生學子, 將尺寸古訓, 無容議意耶, 有似乎隨人嬉笑, 而卒無見解. 將旁採博究, 要歸證明耶, 有似乎處下橫議, 易陷罪過. 然與其昏也, 寧覈. 故弟子之職, 專聽受, 而不至於自欺, 發疑難, 而無傷於躐易.

- 이익,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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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