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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8. 15:1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8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지음

2005, 솔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0130

 

650.4

오76옛 1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의 틀을

제시한 친절하고 깊이 있는 문화재 안내서!

 

훌륭한 예술품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든 사람의 훌륭한 정신이 깃들어 잇고 그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품을 통하여 사람과 시대의 정신을 만납니다. 예술과 정신과 삶이 하나인 예술품만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며 마력처럼 그 세계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추체험追體驗이라 부릅니다. 오주석 선생은 조선시대의 그림들을 격조 높게 풀어나가면서 어떻게 할지 머뭇거리는 우리를 그러한 영원의 세계 안으로 인도합니다.

강우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오주석吳柱錫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그리고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히였다.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던 그는, 2005년 2월 백혈병으로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단원 김홍도』『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우리 문화의 황금기-진경시대』 등이 있다.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 다치지 않은 옛 그대로의 자연이 있고, 그것을 보는 옛사람들의 눈길과 그들의 어진 마음자리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옛 그림은 아련한 지난 세월의 향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아꼈던 많은 아들의 고상한 입김과 정성스런 손때가 묻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라는 한 인격체의 독특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

 

차례

 

책을 펴내며

 

1 호방한 선線 속의 선禪  김명국의 <달마상>

---옛 그림의 색채

2 잔잔하게 번지는 삼매경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3 꿈길을 따라서  안견의 <몽유도원도>

---옛 그림의 원근법

4 미완의 비장미  윤두서의 <자화상>

5 음악과 문학의 만남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옛 그림의 여백

6 군자의 큰 기쁨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7 추운 시절의 그림  김정희의 <세한도>

---옛 그림 읽기

8 누가 누가 이기나  김시의 <동자견려도>

9 들썩거리는 서민의 신명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

---옛 그림 보는 법

10 올곧은 선비의 자화상  이인상의 <설송도>

11 노시인의 초상화  정선의 <인왕제색도>

---옛 그림에 깃든 마음

 

<달마상達磨像>

김명국金明國(1600~1662 이후), 종이에 수묵, 83×5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명국의 <달마상>에는 색色이 없다. 먹의 선線, 그것은 형태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의 흐름이기 때문에 사물의 존재적 속성의 대명사인 색깔은 껴앉을 자리가 없었다. 색이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거기에 색을 칠할 수도 없었다.

 

선과 선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필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

옷주름 선뿐만 아니라 얼굴선,

관서 글씨의 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이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기氣의 주인은 김명국인가, 달마인가?

 

<달마상> 낙관 세부

 

김명국金明國

조선 중기의 화가. 도화서圖畵署 화원을 거쳐 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나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인물 · 수석水石에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를 비롯하여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기려도騎驢圖><관폭도觀瀑圖><투기도鬪碁圖><은사도隱士圖><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이 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전傳 강희안姜希顔(1417~1464), 종이에 수묵, 23.4×1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사관수도>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 <고사관수도>는 그러나 움직이고 있다. 작품 속의 모든 것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선비는 한가로움을 얻었다. 딱딱한 바위도 거리끼지 않고

펄퍼덕 엎드려서 팔짱을 끼고 그 위에 자연스레 턱을 괴었다.

선비는 매우 느긋하고 편안하다.

작은 공책만 한 공간은 끝없이 확장되고,

화면의 고요함과 평화로움 속에는

동양철학의 사색이 깃들어 있다.

<고사관수도> 인물 세부

<고사관수도> 도서 세부

 

강희안姜希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화가로서도 유명하지만 학자로서 더 유명하다. 집현전 직제학이라는 벼슬을 지낸 사대부 화가로서,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사서화 삼절이라 불렸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 않은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安堅(1400?~1479?), 1447년 작, 비단에 수묵 담채, 38.6×106.2cm,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오늘날까지 전하는 조선의 옛 그림 가운데 가장 귀한 작품을 하나만 들라고 하면 -- 물론 매우 비예술적이고 지각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 아무래도 <몽유도원도>를 들 수밖에 없다. <몽유도원도>는 한 편의 장대한 교향시다.

 

두루마리를 여는 순간,

우리는 대뜸 펼쳐진 황홀한 무릉도원의 전경에 압도된다.

마치 궁중아악 수제천의 시작을 알리는 박 소리가 그치자

모든 악사들이 일제히 강박 합주로 장엄한 첫 음을 울리는 것처럼,

안개 자욱한 무릉도원은 물결 같은 향기를 온 누리에 퍼뜨리며

화평한 기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안견安堅

화원 출신으로 도화원圖畵院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까지 지냈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겼으며, 1447년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고 이듬해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를 그렸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 · 사군자 · 의장도 등에도 능했다.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등이 있다.

<몽유도원도>의 무릉도원 세부

무계동武溪洞 각자刻字

<미텔하르니스의 마을길>

흡베마(1638~1709), 캔버스에 유채, 103.5×141cm, 런던국립회화관 소장.

<자화상自畵像>

윤두서尹斗緖(1668~1715), 종이에 담채, 38.5×20.5cm, 국보 240호, 개인 소장

 

<자화상>을 바라보는 나는, 이를테면 그림 속의 윤두서와 그것을 그리는 또 하나의 윤두서, 그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철저하게 소외되어 잇다. 나는 그려진 윤두서의 고요함 속으로도, 그린 윤두서의 강한 의지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윤두서가 나지막이 윤두서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누구인가, 네가 나인가, 너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여섯 자도 되지 않는 몸으로 온 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지녔구나!

긴 수염 나부끼고 안색은 붉고 윤택하니,

보는 사람들은 그가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하게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는

역시 홀로 행실을 가다듬는 군자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옛 사진 속의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尹斗緖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시 · 서 · 화에 두루 능했다고 한다. 특히 인물화와 말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이고 있다. 유작으로는 60여 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을 비롯하여, <노승도老僧圖> <출렵도出獵圖> <백마도白馬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등이 전한다.

<심득경沈得經 초상>

윤두서, 비단에 채색, 160.3×87.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짚신 삼는 사람>

윤두서, 삼베에 수묵, 32.4×21.1cm, 개인 소장.

<황현黃玹 초상>

채용신蔡龍臣(1850~1941), 비단에 채색, 94×65.5cm, 개인 소장.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164×76cm, 개인 소장.

 

만약 하늘이 꿈속에서나마 소원하는 옛 그림 한 점을 가질 수 있는 복을 준다고 하면 나는 <주상관매도>를 고르고 싶다. 이 작품의 넉넉한 여백 속에서 시성 두보의 시름 섞인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늙은 김홍도 그분의 풍류로운 모습을 아련하게 느낄 수 있으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옛 음악의 가락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가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단원도檀園圖>

김홍도金弘道(1745~1806?), 종이에 수묵 담채, 135.3×78.5cm, 개인 소장.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7.9×37cm, 개인 소장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3.2×27.8cm, 간송미술관 소장.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

김홍도,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구詩句>

김홍도, 비단에 묵서, 25.7×19.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백법留白法을 적용한 김유성金有聲(1725~?)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종이에 수묵, 42.1×2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

윤두서, 비단에 채색, 111.0×68.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두서는 고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넓은 길이 한중간에서 꺾여나가도록 하고 그 끝을 아득하게 여백 처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오래도록 온 천하가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암시하였다.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숙종의 제시題詩>

선불기종仙佛奇蹤에 실린 진단 삽화.

진단의 얼굴 세부.

인물과 당나귀 세부.

<세한도歲寒圖>

김정희金正喜(1786~1856), 종이에 수묵, 23.7×61.2cm, 국보 180호, 개인 소장.

 

<세한도>는 꿋꿋이 역경을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고 견정堅定한 의지가 있다. 메마른 붓으로 반듯하게 이끌어간 묵선墨線은 조금도 허둥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하다고 할 정도다. 초라함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 연민이 어디에 있는가?

 

석 자 종이 위에 몇 번의 마른 붓질이 쓸고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그림.

그러나 거기에는 세상의 매운 인정과 그로 인한 쓸쓸함,

고독, 선비의 굳센 의지, 옛사람의 고마운 정, 그리고

허망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세한도>를 문인화의 정수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한도>의 화발畵跋.

<춘풍추수春風秋水>

김정희, 종이에 묵서, 각 폭 130.5×29cm, 간송미술관 소장.

<침계梣溪>

김정희, 종이에 수묵, 42.8×122.7cm, 간송미술관 소장.

우리 옛 악보인 <정간보井間譜>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김시金禔(1524~1593), 비단에 채색, 111×46cm, 보물 783호, 호암미술관 소장.

 

김시에게는 <동자견려도>가 있다. 작품의 됨됨이가 매우 깔끔하고 구도 역시 뚝떨어진 것이어서 이 역시 그의 마음이 화창하고 밝은 상태에서 제작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소년과 고집 센 나귀의 힘겨루기.

끙끙거리는 동자의 모양새가 애처롭고, 저를 해치려는 것도 아닌데

꼬리를 드리우고 뒤로 움츠러들기만 하는 나귀가 딱하기도 하다.

저러다 동자가 그만 개울에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좋은 꾀를 못 내고 억지힘만 쓰는 꼴이 우습기도 한데,

이들을 둘러싼 경치는 아랑곳없이 그저 조는 듯 무심하고 곱기만 하다.

<동자견려도> 세부.

 

김시金禔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산수 · 인물 · 우마牛馬 · 화조 등 여러 분야의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호韓濩의 글씨, 그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유작으로는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매조문향도梅鳥聞香圖> <선록완월도仙鹿翫月圖> <하산모우도夏山暮雨圖> 등이 전한다.

<이항복 초상>

작자 미상, 종이에 수묵 담채, 59.5×35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씨름>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7.0×22.7cm, 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씨름>은 공책만 한 작은 화첩에 스물두 명이나 그려져 있고,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다른 표정에 다른 자세를 하고 잇다. 이 작품이 척척 그려낸 스케치풍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화가라면 그려낼 수 없으리라고 판단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씨름판은 흥분과 초조로 서로 엇갈리며 점차 최고조를 향해 가는데

그 와중에도 단 한 사람 여유 만만한 이가 있었으니,

씨름꾼과 등을 진 채 목판을 둘러맨 떠꺼머리 엿장수가 그 사람이다.

씨름꾼 세부.

<무동舞童>

김홍도, 종이에 수묵, 27.0×22.7cm, 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동>의 원형 구도는 화가가 운영한 뛰어난 화면 구성이 아닐 수 없다. 방사선 구도의 원심적인 요소가 신명 넘치는 우리 옛 가락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조성했다면, 원형 구도 자체로는 둥글게 둥글게 넘어 가며, 듣는 이를 하나로 묶어내는 우리 옛 장단의 멋을 참으로 잘도 재현해냈다.

 

북, 장구에 피리 둘, 대금, 해금까지 여섯 악기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흥겨운 가락을 몰아가니,

잘생긴 무동 아이는 덩실덩실 소매를 펄럭이며 걸지게도 춤을 춘다.

춤추는 아이 세부.

<설송도雪松圖>

이인상李麟祥(1710~1760), 종이에 수묵, 117.4×5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송도>는 짐짓 보는 이를 전제하지 않고 혼자 그저 그려본 듯한 경계를 표방하며, 나를 알아달라고 남을 설득하려는 듯한 재주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인상은 담담한 의취意趣를 화면 위에 은은하게 띄워본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비 오는 날 홀로 거문고 정악곡을 뜯어보는 마음과 완전히 같은 것일 게다.

 

소나무와 바위는 한갓 자연의 일부분이 아닌, 인간 이인상의 자화상이다.

백설을 이고 선 늙은 소나무가 이인상의 높은 절개를 상징한다면,

날카롭게 결이 진 바위는 그대로

'얼음처럼 맑고 쇠처럼 단단한 마음' 그것이다.

저 늠름함과 굳셈으로 소나무와 바위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의리의 마땅함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인상 초상>

작자 미상, 종이에 수묵 담채, 51.1×3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상李麟祥

조선 후기의 서화가. 시 · 서 · 화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했고, 그림에는 산수山水, 글씨에는 전서篆書에 뛰어났으며, 인장印章도 잘 새겼다. 저서에 『능호집』, 그림에 <설송도雪松圖> <노송도老松圖> <산수도山水圖> <옥류동도玉流洞圖> <검선도劍仙圖> <송석도松石圖>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한림수석도寒林秀石圖> 등이 있고, 글씨에 <대사성김식표大司成金湜表>가 전한다.

<설송도> 나뭇가지 세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鄭敾(1676~1759), 1751년 76세 작, 종이에 수묵, 79.2×138.2cm, 국보 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인왕제색도>는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 화필畵筆을 잡은 지 어언 60년, 그야말로 써서 닳아버린 몽당붓이 쌓여서 무덤을 이루었다고 하는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心意를 더하여 이루어낸 걸작이 바로 <인왕제색도>다.

 

임종을 앞에 둔 60년 지기知己를 위해

칠순 노인 정선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려낸 작품 <인왕제색도>.

궂은 날씨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벗을 생각하며

그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한 마음으로,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올라 개어가는 인왕산처럼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날 것을 빌며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안개에 희망처럼 보일 듯 말 듯한 푸른 먹빛이 배어 있다.

<인왕산도仁王山圖>

강희언姜熙彦(1738~1782), 종이에 수묵 담채, 24.6×42.6cm, 개인 소장.

 

정선鄭敾

조선 후기의 화가.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박연폭朴淵瀑>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 등이 있다.

<금강전도金剛全圖>

정선, 1734년 59세 작, 종이에 수묵 담채, 130.7×94.1cm, 국보 217호, 호암미술관 소장.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

정선, 1740~41년 65~66세 작, 비단에 채색, 29.0×26.4cm, 간송미술관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3. 10. 8. 09:16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7  한국의 자생란

 

글, 사진 / 김수남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솬

EM023107

 

082

빛12ㄷ  184

 

빛깔있는 책들 184

 

김수남-------------------------------------------------------------------------

1959년 경기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인천 교대를 졸업하고 장현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난초와 관련된 작품으로 37회와 40회 전국과학전람회에서 특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식물분류학회 회원, 한국식물연구회 회원으로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산 난초과 식물의 분포 및 생태학적 고찰」, 「무엽란의 분포와 생태에 관한 연구」, 「경인 지방의 난초와 식물」, 「보춘화의 분포를 제한하는 환경 요인」, 「제주 한라산에서의 수직 고도에 따른 난초과 식물의 분포와 생태」, 「백운란속의 분포와 생태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난초과 개요

한국의 자생란

    동휴면 낙엽성 지생종

    하휴면 낙엽성 지생종

    상록성 지생종

    무엽성 부생종

    상록성 착생종

부록 1. 한국산 난초과 목록

       2. 용어 해설

참고 문헌

개불알꽃

털개불알꽃

광릉요강꽃

해오라비난초

잠자리난초

방울난초

손바닥난초

주름제비란

구름병아리난초

나도제비란

북방나비난초

병아리난초

나도잠자리란

큰나도잠자리란

개제비란

포태제비란

씨눈난초

나도씨눈란

큰제비란

산제비란

애기제비란

제비난초

갈매기난초

흰제비란

큰방울새란

방울새란

쌍잎난초

닭의난초

청닭의난초

금난초

은난초

꼬마은난초

은대난초

김의난초

이삭단엽란

자란

한라옥잠난초

옥잠난초

나나벌이난초

나리난초

키다리난초

참나리난초

타래난초

풍선난초

비비추난초

약난초

두잎약난초

감자난초

한라감자난초

섬사철란

애기사철란

한국사철란

자주사철란

줄무늬사철란

사철란

붉은사철란

백운란

흑난초

여름새우란

새우난초

큰새우난초

금새우난초

죽백란

녹화죽백란

보춘화

한란

구화란

으름난초

천마

한라천마

제주무엽란

애기무엽란

애기천마

산호란

대흥란

차걸이란

콩짜개란

혹난초

석곡

풍란

지네발란

금산자주난초

탐라란

제주난초

나도풍란

 

 

posted by 황영찬
2013. 10. 5. 13:3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6-1 그림 속에 노닐다

 

《경교명승첩》 중 <양화환도도>

정선, 1740, 비단에 채색, 29.2×23cm, 간송미술관 소장.

 

앞에 손님 배 불러가니

뒤 손님은 배 돌려라 하네

우습구나 양화나루

뜬구름 같은 삶 가고 또 오네

 

 

구한말 박정양 주미 전권공사가 휴대 했던 태극기(위)와 지금 태극기(아래)

김구(1876~1949)

독립운동가.

윤동주(1917~1945)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

<금강전도>

정선, 종이에 수묵담채, 130.7×94.1cm, 국보 217호, 호암미술관 소장.

<군선도>

김홍도, 1776, 종이에 수묵담채, 132.8×575.8cm, 국보 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인왕제색도>

정선, 1751, 수묵담채, 79.2×138.2cm, 국보 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귀거래도>

전기, 1853, 수묵담채, 109.0×34.0cm, 호암미술관 소장.

<세한도>

김정희, 1844, 종이에 수묵, 23.7×61.2cm, 국보 180호, 개인 소장.

<화성전도>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화성전경도. 신도시와 주요 시설물의 형태 및 이름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이 쓴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贈鐵甕府伯赴任之行>

1799, 201.8×73.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 자화상>

1782, 비단에 채색, 88.7×51cm, 보물 5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진주 강씨 백각공파 기탁>.

<이필중 묘갈李必重墓碣> (부분)

1764, 지본묵탁, 한신대학교박물관 소장.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짓고, 조윤형이 쓴 글씨.

<현륭원 문인석>

1789년, 정조대왕이 부친인 사도세자를 잊지 못해 곁에서 항상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문인석을 만들게 했다.

<채제공 초상>(부분)

이명기, 1791, 비단에 채색, 121.0×80.5cm, 개인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3. 10. 5. 10:0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6 그림 속에 노닐다

 

오주석의 讀畵隨筆

2008, 솔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5190

 

650.4

오76ㄱ

 

전시실에서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 바로 보는 이가 의외로 적다.

작품보다 설명을 더 오래 보는 사람, 남에게 열심히 해설하느라 정작 자신은 못 보는 사람,

감상 시간을 작품 숫자로 나누어 정확히 몇 분마다 옮아가며 보는 사람까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단 한 점을 보더라도 마음에 와 닿는 작품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저 게으름뱅이 시인처럼 마냥 느긋해 할 수 있을 때에만 훌륭한 예술품은 그 고갱이를 드러낸다.

사실 시인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했다.

미美의 관조란 결국 마음의 관조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오주석 吳柱錫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간송미술관 ·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냈다.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연을 펼쳤으며, 2005년 2월 지병으로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단원 김홍도》《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 2》《우리 문화의 황금기-진경시대》(공저)《이인문의 강산무진도》 등이 있다.

김홍도 作, <송하선인취생도>

김홍도 作, <주상관매도>

 

차례

 

간행사 하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_강우방

 

1부 | 바로 보기 어려움

바로 보기의 어려움 1

바로 보기의 어려움 2

옛 그림에 깃든 마음

조선 국왕은 참여예술가였다

역원근법에 깃든 마음

미켈란젤리와 이인상

 

2부 | 옛 그림 읽기

'한국인의 얼굴' 왜 포기하나

일본 표구에 갇힌 <송하맹호도>

'그대 마음'만큼만 보이리

'돈' 빼고 '빈 마음'으로 보라

'음양 조화' 깨져 있는 태극기

예술품은 시대의 '거울'

지폐 속 위인들의 '가면'

우리는 역사 앞에 떳떳한가

예술에도 국경이 있더라

국악가락 닮은 우리 산하

<세한도>에 밴 사제의 정

문화재의 '싸구려 거래'

 

3부 | 어처구니를 찾아서

천덕꾸러기 겨레 문화

어떤 것들은 그대로 남겨둘 때 가장 잘 간직된다

찢어진 태극기

 

4부 | 정조대왕을 기리는 마음

<정조대왕 서거 200주년 추모전>을 열면서

정조어필

명신명필

집자비문

화성유적

<정조대왕 서거 200주년 추모전> 마무리에

 

5부 | 낙숫물 소리 듣는 행복

멘델스존과 김홍도

기타와 거문고

수원 만두집 아저씨

멋지고 의리 있는 도적 이야기 《수호전》

한 순간도 가볍지 않게

낙숫물 소리 듣는 행복

 

추모글 | 오주석을 기리며

미완의 대기, 오주석_강우방 / 외우 오주석을 추모함_민병훈 / 오주석을 기억하며_유봉학 / 학문의 도반, 오주석-그와 함께한 기쁜 순간들_이원복 / 인왕산이 참 좋지요_이광표

 

편집후기 《그림 속에 노닐다》를 펴내며_임우기

<전 이재 초상>

작가 미상, 비단에 채색, 97.9×5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채 초상>

작가 미상, 1802, 비단에 채색, 99.2×58.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모계영자도>

변상벽, 비단에 수묵담채, 94.4×44.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하정인도>

신윤복, 지본채색, 28.3×35.2cm,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정월 대보름 저녁[上元夕]

 

땅 생김새 따라서 높고 낮지요

하늘 때가 저절로 이르거나 늦지요

사람들 말 무엇하러 신경쓰나요

밝은 달은 본래가 사사롭지 않아요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정월 대보름 달을 보고 지은 오언절구 시

<일월오봉병>

작가 미상, 종이에 채색, 162.6×337.4cm, 호암미술관 소장.

<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 1954, 캔버스에 유화, 146×113.7cm, 브뤼셀, 벨기에왕립미술관 소장.

ⓒRene Magritte / ADAGP, Paris-SACK, Seoul, 2008

<주방도廚房圖>(부분)

고구려시대(4세기),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3호분 앞방 동측실 동벽.

<이현보 상 李賢輔像>

옥준상인玉峻上人, 조선 16세기, 비단에 채색, 130×95cm, 보물 제872호, 개인 소장.

<이인상 초상>

작가 미상, 종이에 수묵 담채, 51.1×3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쪽 바다 산호 가지야 꺾여진들 어떠하리

오늘밤 구중궁궐이 춥지 않을까 걱정일세

南海珊瑚折奈何 秖恐今宵玉樓寒

<마상청앵도>

김홍도, 종이에 수묵담채, 117.2×52.2cm, 간송미술관 소장.

<송하맹호도> (표구를 포함한 전체 모습)

김홍도, 비단에 채색, 90.4×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송하맹호도>

 

너무 게을러서 《노자》를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道는 책 속에 없으니까

게을러서 경전을 읽지 않는다. 경전 역시 도보다 깊지 않으니까

게을러 시도 읽지 않는다. 읽기를 마치면 시가 달아나니까

게을러 술도 안 마신다. 세상사 이미 모두 술 밖에 읶으니

게을러 바둑도 두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다 밖에 있으니

게을러 경치도 보지 않는다. 마음속에 벌써 그림이 있으니

게을러 바람 쐬고 달 볼 일 없다. 신선이 이미 내 마음 속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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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10. 4. 09:2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5  오대산

 

글 / 박용수●사진 / 손재식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6

 

082

빛12ㄷ  183

 

빛깔있는 책들 183

 

박용수-------------------------------------------------------------------------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1987년과 1989년에 KBS방송문학상과 『문학정신』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1991년에 단국문학상을 받았으며 작품집으로 『유언의 땅』(문학과지성사) 등이 있다. 현재는 창작활동을 하면서 우리 국토와 문화에 관한 연구를 하는 백두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리관련서로는 『백두대간』과 『산경표』 해설서를 출간하였으며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한국산서회 회원이다.

 

손재식-------------------------------------------------------------------------

신구전문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대림산업과 대원사 사진부 등에서 근무하였고 「빛깔있는 책들」 가운데 전통 문화 및 자연 시리즈 10여 권의 사진을 찍었다.

 

|차례|

 

책 머리에

개관

불교 성지로서의 오대산

오대산의 유적과 문화재

시문학에 나타난 오대산

청학동 소금강

방아다리약수와 여러 명소들

오대산 산행 안내

참고 문헌

얼레지  오대산 골짜기나 숲 속의 나무 그늘에서 잘 자란다. 이른봄에 보라색 꽃이 피는 백합과의 다년생초이다.

동의나물  4~5월에 황색 꽃이 피는 미나리아제비과의 다년생초로 주로 습지에서 볼 수 있다.

덩굴개별꽃  5~6월경 흰 꽃이 피는 다년생초로 주로 산의 나무 밑에서 자란다.

노랑제비꽃  이른봄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 풀밭에서 볼 수 있다. 줄기에서 꽃대가 나와 노란 꽃이 피는 게 특이하다.

꿩의바람꽃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흰 꽃이 핀다. 바람이 불어야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인다.

노루귀꽃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꽃은 주로 자주색으로 피는데, 드물게 흰색 또는 분홍색으로 피기도 한다.

관대걸이  세조가 상원사에 참배하러 오는 도중 목욕을 할 때 의관을 벗어 여기에 걸었다고 한다. 관대걸이가 있는 길 건너편 계곡이 세조가 목욕했던 장소라고 전한다.

상원사 고양이상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가 고양이의 도움에 의해 죽음을 모면한 후 그 은덕을 기릭 위해 세운 석상이다.

월정사 적광전  신라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월정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이다. 이 적광전 앞뜰의 팔각구층석탑을 중심으로 삼성각, 대강당, 승가학원, 범종각, 요사 등이 빙 둘러 있다.

월정사 부도밭과 전나무 숲  울창한 전나무 숲에 있는 부도들은 대부분 석종형이어서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 고승들의 사리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모양이라도 크기는 물론 부도 외곽을 장식한 문양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상륜부의 화려한 금동 장식과 위로 올라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비례, 이중으로 조성된 기단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우수한 석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보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조 보살 좌상  적광전 앞의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무엇인가를 들고 정중하게 공양하는 자세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석조 보살 좌상은 턱이 길고 둥글며 눈두덩이가 두껍고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강릉 한송사 석조 보살 좌상, 강릉 신복사 터 석조 보살 좌상과 함께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의 상이다.

상원사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8.7킬로미터 떨어진 비로봉 동남 기슭에 있는 상원사는 월정사의 말사이지만 우리나라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다.

상원사 동종과 비천상  현존하는 우리나라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각 장식이 뛰어날 뿐만아니라 소리 또한 매우 아름답다.(위) 종 몸체에 양각된 비천상은 흐르는 듯한 구름 무늬나 위로 치솟아 흩날리는 천의 자락의 표현이 생동감 넘쳐, 이 시대 불교 미술의 진수를 보여 주는 듯하다.(아래)

문수동자상  세조가 직접 보았다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목조 좌상으로 1466년 제작되었다. 전체 높이는 98센티미터이며 국보 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수동자상 복장 유물  1984년 목조 문수동자상 복장에서 발견된 유물로 보물 793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벽에 걸린 것은 세조가 입웠던 저고리러 보이며(위) 이 밖에 『묘법연화경』『대방광불화엄경』 등의 불교 경전과 문수동자상 발원문 등 23종이 전시되어 있다.(아래)

동진보살상  상원사에 모셔진 이 상은 화려한 보관과 정제된 영락을 걸친 모습이다. 85센티미터 크기의 의좌로 신중상이지만 조선시대 목조 불상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작품이다.

적멸보궁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신라 때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정골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적멸보궁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방유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리탑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증표로 작은 탑 모양을 새긴 비석으로 적멸보궁 바로 뒤에 있다.

중대 사자암  상원사와 적멸보궁 사이에 위치한 사자암은 문수를 상징하는 사자와 연관되어 지어진 이름의 암자이다.

동대 관음암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인 동대 관음암은 '동관음암'이라는 현판이 걸린 자그마한 암자이다.

남대 지장암  현재는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지장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암자이다.

서대 수정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수정암은 도량으로는 특이하게 너와지붕을 하고 있다. 염불암이라고도 한다.

북대 미륵암  상원사에서 북쪽으로 난 큰 길을 따라 4킬로미터 떨어진 상왕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복원된 오대산 사고  조선시대 5대 사고 중의 하나로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도중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대산 사고가 최초로 이곳에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이었지만 6 · 25 전쟁을 겪으며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선원보각을 비롯한 현재의 건물은 1989년 이후 복원한 것이다.

식당암  수백 명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고 판판한 바위로 삼국시대부터 이곳에서 식사를 했던 여러 사연으로 인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구룡폭포  구룡연 계곡을 이루는 마지막 아홉 번째 폭포이다.

연화담  소금강 계곡물과 바위가 빚어낸 아름다운 연못이다.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오대산 지역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가운데 오대산 지역이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상원암'과 '사고' 그리고 '월정사'와 '금강연'이 그 아래에, 오른쪽으로 지금의 청학동 소금강 지역인 '청학산' · '천유동' 등의 지명이 보인다. 한강의 발원지로 일찍부터 중요시되던 '우통수'도 표기되어 있다.

 

진화 「유오대산(遊五臺山)

 

언젠가 그림 속에서 오대산을 볼 때에는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골짜기마다 물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정추 시 두 편

 

1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 씻어 낸다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竹)가 매우 근심케 한다.

 

2

자장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金殿)은 문 닫았고 향연(香煙)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김시습 「오대산」

 

오대산 위에는 오색 구름이 나는데

시냇물 돌 씻는 소리 익히 들어 왔네

세상 사람들 많고 적은 일들 굽어 보았더니

분주하고 구속 많아 돌아감만 못하다 했네

 

원통암(圓通岩) 아래 반야연(般若淵) 물 속에서

활발하게 노는 물고기 떼지어 뒤척거리네

네 우선은 돌아가 볼 것이라

백년 동안 사람의 일은 얽혀 줄줄이 이었다네

 

중대 높은 뫼에 강(講) 하는 때 종소리에

아지랑이 창망(蒼茫)하여 바라봐도 끝이 없네

어느 곳 들중[野僧]이 아직도 도착 못하고

석양의 노을 속에 홀로 지팡이를 끄는가

 

북대엔 사월에도 남은 눈이 쌓였는데

푸른 나물 흰 구리떼 흙을 이고 나오네

나옹대 가에는 높은 구름 떠 있어

높고 깊고 아득하여 측량하기 어려워라

 

서산의 높은 봉우리 의롭게도 끊겼는데

우통(宇筒) 못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고승(高僧)은 병 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 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

 

산 남쪽은 깎아질러 기린(麒麟)이라 부르는데

들풀 곱고 우거져 기미(氣味)가 순진하네

오대산의 분명한 뜻 다잡아 알려 하면

눈 가운데 동자(瞳子)요 얼굴 앞의 사람일세

 

김시습 「오대산」

 

오대산은 옛날엔 신라 땅이어서

신성(神聖)과 효명9孝明)이 여기서부터 나왔네

성오평9省烏坪)에서는 백관(百官)이 모여서

울부짖어 하늘 보며 길을 막고 울었네

바위 구멍 숲 사이를 모조리 뒤지니

풀 먹으며 해진 옷  형상이 학 같았네

대보 신위(大寶神位)를 대궐 속에 가둘 수 없어

일백 관원들 둘러싸고 군사(君師)로 모시었네

사로(斯盧)의 한 구역에 평생 머물러서

천연 홍업(鴻業) 기초를 여기에다 닦았네

다시 신효(信孝)가 공주(公州)에서 태어나서

학 한 마리 쏜 것이 자비(慈悲)와 인연되었네만

자장은 늙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해서

거만한 마음 더하여 아주 크게 어리석었네

월정사 터 멀어도 아직 그대로 있어

옛 비석과 보탑(寶塔)이 어찌 그리도 진기한가

나 이제 그대를 보내어 한번 놀게 하는데

그 속에서 두 눈썹을 우선 열어야 하네

오만 개의 산봉우리에 가을달이 나직한데

산마루서 자규(子規)의 울음 익히 들어 왔으리

가을 바람 썰렁하여 쇠잔한 나무 놀라게 하는데

차가운 달이 훤하게 흙 섬돌에 올라서서

역력히 밝았다 때로는 도로 마치는 듯

이끼 무늬 아롱진 곳에 풀이 한창 우거졌네

오대 산경(五臺山境)을 사람이 묻거들랑

십리 길 솔 사이에 토란잎 가지런하다 하소

 

「재유오대산석간답설(再遊五臺山石澗踏雪

 

4월의 산 속에서 눈 비탈길 걷노니

바람에 옷자락 스쳐 허공에 드날린다

뭇 산봉우리 온통 푸르러 소리 없이 고요한데

소나무 밑 그윽한 샘물이 사람 향해 속삭이네

-율곡 이이

 

「유남대서대중대숙우상원(遊南臺西臺中臺宿于上院)

 

깊은 산골에 날씨 활짝 개었는데

바위에 흐르는 물소리 맑기도 하구나

오대산 가는 곳마다 흥취에 끌리어

이끼 길에서도 발걸음 가볍다

다래 덩굴 휘어잡고 절정에 오르니

흰 구름 푸른 벼랑에 피어 일고

옹기종기 작은 산들을 굽어보니

여기저기에 연기 낀 나무들이 펀펀하네

돌 틈에 흐르는 우통수의 차가운 샘물

담담한 심정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한번 마시니 세상일 다 잊고

선방(禪房) 방석에 앉으니

새벽 종소리에 깊은 반성 떠올라

담담한 심정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율곡 이이

 

「중유월정사(重遊月精寺)

 

쓸쓸한 숲속으로 걸어가는 나그네 길

석양의 풍경 소리 절간에서 들려온다

스님네들 묻지 마오 다시 찾아온 뜻을

바위에 흐르는 물 말없이 대하니 세상 일 어둡네

-율곡 이이

 

「장입내산우우(將入內山遇雨)

 

벼슬 버리고 돌아오니 뭇일이 홀가분해

오대산 절경이 가장 저에 쏠리네

산신령이 뿌린 비 손님이 싫어서가 아니고

숲속의 샘물 늘려서 더욱 맑게 함일레

-율곡 이이

 

「증산인(贈山人)

 

오대산 밑에 월정사라

문 밖의 맑은 냇물 쉬지 않고 흐르네

가소롭다 스님이 실상(實相)에 미혹하여

무(無)자만을 갖고서 부질없이 추구하네

-율곡 이이

 

조현명 「오대산 사고사(五臺山史庫寺)

 

명산이 겹겹하여 사서(史書)가 간직된 곳

나그네 위해 주인이 백리 길 함께 왔네

상석(上席)에서 성례(盛禮) 받으니 몸둘 곳 없어

전인(前人)을 따르는 후인(後人)인 양 괴롭다

솟아나는 샘물은 푸른 한수(漢水)로 돌아들고

둘레의 산들은 태종(泰宗)을 우러르는 듯

소매로 먼지 털고 벽판(壁板)을 바라보니

서리 가득한 하늘에 종소리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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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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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4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퉁(Alain de Botton) 장편소설, 공경희 옮김

2008,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선관

EM048756

 

843

보8856우 c. 2

 

그림, 퀴즈, 혹은 유명 철학자들의 언어를 인용하면서 드 보퉁은 오늘의 포스트모던한 사랑에 대한 단상들을 보여준다. Publishers weekly

 

이 책은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조명한다. 많이 이야기하고 적게 보여주는 그의 글은 풍부한 위트와 유머로 무장하며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The New Yorker

 

이 책의 독자들은 도널드 바셀미, 줄리안 반즈, 우디 앨런,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 대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드 보퉁은 이들을 작품 속에 훌륭하고 풍부하게 차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본질에 접근한다. The New York Times

 

연애의 탄생에서 결실까지,

남녀의 심리를 꿰뚫는 놀라운 통찰력

현학적 분석과 진지함의 무게를 더는 재치

 

THE ROMANTIC MOVEMENT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지적인 연애소설은 처음 본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그 첫 만남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안'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백만 개나 되는 파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앨리스는 이토록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리고 예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과 해석이 뒤따르는 불안정 상태에 힘이 빠졌다.

 

알랭 드 보퉁 Alain de Botton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은행가이며 예술품 수집가인 아비지를 둔 덕택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여러 언어에 능통하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 수석 졸업했다.

스물세 살에 쓴 첫 소설 <왜 나는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우리는 사랑일까 The Romantic Movement>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Kiss & Tell> 등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이 현재까지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수 많은 독자를 매료시켰다. 이 소설들로 그는 '90년대식 스탕달'과 '닥터 러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사랑일까>는 그의 단 세 편뿐인 소설들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외에도 에세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여행의 기술 The Art of Travel> <불안 Status Anxiety>을 썼으며, 문학평론서인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등을 냈다.

www. alaindebotton.com

 

옮긴이 공경희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17년간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균관대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여대 영문과 대학원에서 강의중이다. 주요 역서로 <얼음에 갇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호밀밭의 파수꾼> <파이 이야기>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100종 이상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서장

현실

예술이냐 생활이냐

이야기에 대한 선망

냉소

파티

동정녀 잉태

사랑을 사랑하다

불확정성

촉매

섹스, 쇼핑, 소설

세탁 주기

가치 체계

상대방을 안다는 것

예측 가능성

사랑의 영속성

권력과 007

신성한 관계

에릭의 짐

왜 사랑받는가?

여행

독서의 문제

유쾌증

다이빙, 루소, 그리고 너무 생각이 많은 것

사춘기

여성 혐오

자기 자신에 대한 휴가

지역성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게 하나?

영혼

진실의 층위

의문

책임 떠넘기기

혼자만의 언어

오독

누가 노력하는가?

연애의 조각 맞추기

선언

초대

순교

옮기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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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9. 30. 16:4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3 독도

 

글 / 박인식●사진 / 김정명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5

 

082

빛12ㄷ  182

 

빛깔있는 책들 182

 

박인식-------------------------------------------------------------------------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월간 『사람과 산』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했다. 월간 『사회체육』에 장편소설 「만년설」(1985~1986)을 연재한 바 있고 창작집 『사람의 산』(1987년 예문사), 산악희곡집 『서문동답』(1987년 문성당), 『북한산』(1993년 대원사), 기행소설 『대륙으로 사라지다』(1994년 광화문) 등의 저서가 있다.

 

김정명-------------------------------------------------------------------------

1972년 어린이들을 위한 영상물로 「옛날 옛날 이야기」 시리즈 30여 편을 제작했고, 1986년에는 문화영화제에서 「설악산 사계」로 우수작품상을 받았으며 1987년 주간조선에 「한국의 얼을 찾아서」를 연재했다. 1993년 미도파백화점에서 KBS와 공동으로 독도 365일 사진전을 개최하였고, 그 해 대전 엑스포 무역박람회에서 독도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잇다. 저서는 「산과 들에 피는 꽃 (95)식물도감」이 잇으며, 1994년 1월부터 KBS 2TV 아침방송에 「한국의 야생화」를 방송하고 있다.

 

도움 주신 곳-----------------------------------------------------------------

푸른 울릉 · 독도 가꾸기 모임

 

|차례|

 

독도는 우리 땅

지리와 자연 환경

    개관

    토양과 식생

    동물과 어류

    독도의 사계

독도의 역사

    독도의 한국 영토 첫 확인, 서기 513년

    조선시대의 공도 정책

    일본 속의 독도 역사

    1697년 조선 영토로 공식 인정

    '독섬'에서 유래된 '독도'

    지도 속의 독도 역사

    일본인의 불법 밀입과 조선의 대응

    한반도 식민지화의 서곡, 1905년 독도 침탈

    일본의 억지 주장이 계속되는 이유

독도를 지킨 사람들

    독도를 지킨 영웅, 안용복

    홍씨 문중의 독도 사수

    독도 의용 수비대의 활약

    '자연섬' 독도를 위래

참고문헌

 

저 멀리 동해 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은 동해로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 타고 떠나다

한라산 제주에서 배 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 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 한돌, '홀로 아리랑'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

동경 132도 북위 37도

평균 기온 12도 강수량은 천삼백

독도는 우리 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 알 해녀 대합실

17만 평방 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

- 정광태, '독도는 우리 땅'

독도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위는 태극기와 독도에 뿌리내리고 사는 해국이 어우러진 정경이다. 아래는 국기 게양대. 우리가 독도를 국토와 민족의 이름으로 지켜 나갈 때 독도는 우리 땅과 민족에게 내일도 선명한 아침을 밝혀 줄 것이다.

가산도 뗏목 탐사  지난 1988년 KBS-TV에서는 「가산도(독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다. 그때 제작팀은 뗏목을 만들어 해류에만 의지한 채 울릉도를 출발한 지 3일 만에 독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지도 모양  동도의 바위 사면에는 풀이 돋아난 곳이 주변과 구분되어 마치 우리나라 지도 형상을 한 곳이 있다.

 

가제바위에서 본 동도와 서도  독도는 동도와 서도, 두 개의 큰 섬과 60여 개의 바위들로 구성된 화산섬이다. 면적은 약 5만 평. 행정 구역상으로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산 42번지에서 산 75번지로 동해의 끄트머리 자락에 위치한다.

동도의 독립문바위  동도는 서도에 비해 면적은 좁지만 독립문바위를 비롯한 수려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동도에서 본 서도  서도는 해발 167.9미터로 독도의 유일한 주민인 김성도 씨의 집과 유일한 식수원인 '물골'이 있다.

천장굴  천장굴은 동도의 중앙에 있는 해식 동굴이다. 거친 동해의 파도는 바위를 깎아 기묘한 바위와 신비한 동굴을 만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도의 이야기가 들려올 것 같다.

삼형제굴  삼형제굴은 서도 북서쪽 탕건봉 맞은편 옆에 있다. 얼른 보아 아버지 옆에 비켜서서 동해를 응시하는 아들의 형상이다. 큰 바위에 파도가 뚫어 놓은 굴 세 개가 머리를 맞댄 의좋은 형제의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탕건봉  서도에는 떨치고 일어서는 남성의 양기를 느끼게 하는 탕건봉이 솟아 있다. 반듯하게 잘린 정상 부분이 남자들이 머리에 쓰는 탕건을 닮았다 하여 탕건봉으로 불리는 이 바위 봉우리는 멀리서도 발견된다(위). 아래는 동도의 해식 동굴 안에서 본 탕건봉의 모습이다.

동도 정상에서 본 촛대바위

장군바위  일명 촛대바위라고도 한다. 동도와 서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여 이름도 두 가지다. 동도에서 보면 촛대 모양이지만 서도 쪽에서 보면 출전을 앞둔 장군의 긴장된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섬장대꽃과 벌  해풍에 씻긴 말간 꽃들이 독도의 바위틈을 비집고 향기를 내뿜고 있다. 거친 해풍에 날개짓하기도 힘들 듯 싶은데 독도의 벌은 육지 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털머위  독도는 해안이 모두 바위 절벽이어서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식물조차 독도에 상룩할 수 없어 종자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는 식물만 번식할 수 있다.

독도에서 제일 큰 섬괴불나무와 꽃  5월이면 노란색 꽃을 피우는데 거친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낙엽 떨기 나무이다. 한때 토끼가 다 뜯어먹어서 현재는 벼랑에 10여 그루만 남아 있다. 100원짜리 동전을 통해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강치  조선시대에 강치는 울릉도 주민에게 '바닷가제'로 불렸는데 그런 가제가 많이 출몰하는 섬이라 하여 독도는 정조 때 '가제도'라 명명되기도 하였다.

괭이갈매기  부근의 바다에 물고기가 풍부하기 때문에 독도에는 각종 새들이 저마다의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바다제비와 괭이갈매기, 슴새, 황조롱이 등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천연기념물인 괭이갈매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괭이갈매기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이 괭이갈매기의 일생은 독도의 사계절과 맞물려 전개된다. 독도는 망망한 바다 위로 솟아올랐다가 울릉도가 있는 서쪽으로 지는 태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이 되면 날아와서 수만의 새끼를 부화시키고 키우다가 계절이 바뀌면 새끼와 더불어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괭이갈매기에 의해 나이를 먹고 철이 든다.

독도의 풀, 파도, 갈매기  독도는 풀도 나무도 없는 돌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쑥, 쇠비름, 왕호장근 등 50여 종의 식물과 하얗게 바다를 뒤덮은 괭이갈매기가 독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왼쪽 바위를 뒤덮은 것은 왕호장근의 군락이다.

태풍 전야  독도가 위치하고 있는 동해는 남태평양에서 북태평양으로 부는 태풍의 통로이다. 하늘의 먹구름이 짙어지면서 태풍으로 변하고 있다. 태풍 전날은 원래 평화로운 법이지만 다음날 큰 태풍이 이곳을 지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다. 동해에 울릉도, 우산도를 나란히 표시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나타낸 것이다.

용오름  회오리치는 물기둥이 지름 50~60미터, 높이 500미터로 높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용오름이라 하고 과학 용어로는 토네이도 현상이라 한다. 아래는 용오름이 시작될 때이고 위는 끝날 때의 모습으로 물기둥이 흐트러지고 있다.

클라프로트의 삼국총도  하야시의 『삼국통람도설』을 번역한 클라프로트는 그 책 안에 부록 지도첩으로 「삼국총도」 및 「조선팔도지도」를 첨가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이 명기되어 있어 독도 문제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독도의 일출  동해에 얼굴을 씻은 태양이 이땅에서 제일 먼저 선명한 아침을 여는 곳이 바로 독도이다. 동해에서 솟은 해는 독도를 연 다음에야 울릉도와 한잔도에 선명한 아침의 서기를 뿌려 준다. 위는 천장굴 앞에서 본 일출, 아래는 얼굴바위에서 본 일출 광경이다.

한국령  1954년에서 1956년까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때에 울릉도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는 일본의 어부들로부터 독도를 지켰다. '한국령'이라는 글씨들은 독도 의용 수비대가 활약하던 당시에 새겨 놓은 것이며 위의 '한국'은 한진호 씨 글씨이다.

독도 의용 수비대  우리는 독도를 노래나 구호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 곳에 살며 독도에 불법 침입한 일본 어부들이나 해군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여 물리친 영웅들의 넋이 구천에서도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 의용 수비대원 명부

고성달  김수봉  김인갑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안학률  이상국  정이관  정재적

조상달  한상용  허신도  홍순칠  황영문(이상 사망자)

구용복  김경호  김병렬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박영희  서기종  양봉준  오일환

유원식  이규현  이필영  이형우  정원도  정현권  최부업  하자진(이상 생존자)

1996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는 고 홍순칠 대장에게 4등급인 보국훈장 삼일장을, 나머지 대원 32명에게는 5등급인 광복장을 각각 수여하기로 의결했다.

태극기 게양대 밑에 새겨진 '한국령' 글씨

독도 수비대가 세운 팻말  한자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팻말로 동도 선착장 부근에 있다.

파도가 밀어 올린 포탄  미 군정 때에 독도는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바다에 떨어졌던 녹슨 포탄 1개를 파도가 밀어올렸다.

독도 기념 우표  1954년 9월 15일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뜻으로 3종의 독도 도안 우표를 발행하였다. 이에 일본은 11월 19일 이 우표가 첨부된 한국의 우편물을 반송하기로 의결한 적도 있다.

독도의 샘 물골  물골은 독도의 모든 식물들이 만들어 낸 수액들이 고여 만들어진 샘이다.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물골 덕이다. 1989년부터 독도에 나무 심기가 본격화되면서 물골의 생명수는 더욱 맑고 그 양도 풍부해졌다.

물길러 가는 계단  서도에 있는 물골은 태풍을 피해 독도를 찾아든 어부들의 목을 축여 주는 생명수다. 거친 파도를 피해 물을 길어야 했던 사람들의 의지가 가파른 벼랑에 계단을 만들었다. 이 계단은 1987년 울릉도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민간인의 집  독도 주민 김성도 선장의 집이다. 고 최종덕 씨가 산비탈 절벽을 깎아 지은 민간인 숙소로 여름이면 어부들의 보금자리 역할도 한다. 태풍이나 강풍이 몰아쳐도 피해가 없을 정도로 위치가 잘 선정되었다.

이차년도 나무 심기  이차년도부터는 흙이 붙어 있는 10센티미터 정도의 큰 나무를 심어 정성을 기울였다. 또 토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망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는 야생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장군바위를 배경으로 한 독도의 일출

독도박물관 전경과 전시실 내부  1997년 8월 8일 준공된 독도박물관은 울릉도 약수공원 내에 위치한다. 제1, 2전시실에는 서지학자 이종학 씨가 수집한 독도 관련 자료가 있고, 제3전시실에는 독도 의용 수비대 및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 활동 자료가 총 580여 점 전시되어 잇다.(사진 제공 삼성문화재단)

 

 

posted by 황영찬
2013. 9. 30. 09: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2 책이 무거운 이유

 

맹문재 시집

2005,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602

 

811.6

맹3619책

 

창비시선 252

 

맹문재 시인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성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그는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종달새 소리와 흰나비를 쫓는 순진한 소년이다. 그는 쇳가루를 뒤집어쓴 공장노동자 생활을 경험한 바 있으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배신과 실망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하나의 소망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시는 인간이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씌어진 그의 시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본다. 거짓된 말은 사람을 유혹하나 진실된 말은 사람을 움직인다.

최동호 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맹문재 孟文在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등이 잇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차례

 

제1부 ___

운(運) / 봄 / 품 / 홍무수 맛 / 안부 / 별똥별 / 선생님 / 목련꽃 / 선생님 / 목련꽃 / 귤 / 가장자리에서 / 나침반 / 신발 / 주인 / 집 / 귀가 / 손목시계

 

제2부 ___

책이 무거운 이유 / 달 / 단단한 무늬 / 벽화 앞에서 / 까치집 / 꽃 / 새순 지팡이 / 첫눈의 노래 / 다음에 / 까마귀 소리 / 사십대 / 아름다운 얼굴 / 산길 / 배수진을 친 집

 

제3부 ___

약수 / 염소 / 도둑고양이 / 착지점, 이자 /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 사십을 생각한다 / 이자가 적을 만든다 / 말일 / 사남매 / 시집 읽기 / 예 /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다 / 라면을 한 개 더 삶다

 

제4부 ___

소읍은 살고 있었다 / 겨울 저녁을 닮은 단추 / 사십세 / 뉴스가 사이렌을 울린다 / 안전 주간 / 치기를 위하여 / 안주를 뱉다 / 수선공의 손 / 배수진과 원탁 / 1980년대에 대하여 / 평전 다시 읽기 / 아름다운 푯대 / 뿔

 

해설 | 이경수

시인의 말

 

목련꽃

 

잠지리에 들었는데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도 제법 내리는 것 같다

택시에 받혀 나가떨어진 엊저녁 퇴근길에 본 사내가 떠오른다

그의 아내도 저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까

정비공으로 일하는 작은동생의 운전길이 미끄러울텐데

쇠를 만들어 밥 먹는 제철소 친구들의 안전화가 젖을텐데

자전거를 타고 건너다가 넘어졌던 그곳 철길이 여전히 미끄러워

나는 이불 속으로 움츠러든다

이사를 다녔던 거미줄 같은 길들이 질펀하다

시골집의 낡은 전선과 형광등이 괜찮을까

할머니의 산소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잠자다가 일본 광산에 끌려간 조선인들, 그들이 탄 열차가 흔들린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그날도 저렇게 비가 내리지 않았을까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길을 내기 위해 목련꽃들이

천둥소리를 잡아먹고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사십대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에

더이상 놀라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어

십이월의 섬에서 고독하게 저녁을 맞는다

 

식사 시간에도 새벽안개를 긁어모았고

담화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고

일기장마다 건조한 지도를 그려온 나의 그림자도

조용히 앉아 풀어지고 있다

 

저쪽 언덕 위에서는 위로(慰勞)가

마치 송편 같은 눈으로 아웃된 나를 안쓰러워하며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머리가 허옇고 눈을 껌벅거리고

장작개비처럼 마른 팔로 책을 들고 있는 한 노인이

등을 구부린 채 골목길을 가고 있다

위로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싶지만

이내 포기한다

나의 카리스마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인 것이다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를 무시하고

십이월의 섬에 앉아 카리스마의 독설을 묵묵히 듣는다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소를 부려 밭을 갈던 아버지의 목청이 가라앉았다

거실의 텔레비전이 가라앉았다

걸려온 전화를 조심스레 받는 어머니가 가라앉았다

안방의 장롱이 가라앉았다

야근한 뒤 점심도 굶고 잠자는 동생이 가라앉았다

화장실이 가라앉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가라앉았다

안부전화를 건 제철소의 동료가 가라앉았다

쿨룩거리는 냉장고가 가라앉았다

먼 지방의 공사장으로 간 여동생 남편이 가라앉았다

십년째 쓰는 전기밥솥이 가라앉았다

고객의 호출을 착하게 받는 막내 동생이 가라앉았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낡은 수첩이 가라앉았다

윤기 없는 아내가 가라앉았다

날아드는 먼지를 막지 못하는 현관이 가라앉았다

취직 걱정에 몸살이 난 내가 가라앉았다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가라앉았다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1

돈, 돈 하고 있는데

주는 돈 다 셈하면 가져도 좋아, 못하면 헛일이고

나는 이자의 제의에 휘파람을 불었다

 

만원, 이만원, 삼만원…… 십만원, 십일만원……

백만원, 백일만원……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돈방석에 앉아 있었다

세기만 하면 되었기에

유행가를 부르듯 부지런히 이어갔다

천일만원, 천이만원, 천삼만원……

 

2

그러나 점점 초조해졌다

설마 그렇게 많이 가졌을까 하고 생각했던 이자의 돈이

끊기지 않고 속주머니에서 계속 나와

오히려 겁이 난 것이다

그래도 엄청난 기회를 잃을 수 없다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일억 일만원, 일억 이만원, 일억 삼만원……

 

마침내 나는 헐떡거렸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이자에게 농락당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산더미 같은 돈 앞에서 든 것이다.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이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띠고

내게 돈을 건넸다

 

3

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눈을 돌려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어디에도 있는 별, 그러나 나의 손안 어디에도 없는 별

 

진정 내게 전략이 없는가?

 

배수진과 원탁

 

아더왕은 원탁이 잇어 배수진을 칠 수 있었을까

배수진을 쳤기에 원탁을 살릴 수 잇었을까

 

영화 「킹 아더」를 보다가 생각했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개채용에 또 한번 속고 나서

배수진을 치지 않는 한 원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살인범의 죄까지

나와 상관있다고 애써 인정해왔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환경은 지배계급의 원탁이기에

나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탁에 둘러앉는 것보다

배수진을 치고 들어가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아더왕의 지배계급성을 싫어하지만

언 강물 위에 배수진을 치고 칼을 뽑았던 결정을 수용한다

 

모든 길은 원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수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귀가

 

1

나는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 우리 집이 보이는데

아직 식구들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모두 잠들었는지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나는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갈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길이 너무 미끄러워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술 몇잔을 마셨다고 이렇게 힘이 없을까

나는 오기를 가지고 올라갔지만

몇걸음 못 가 다시 미끄러지고 말았다

 

2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밧줄을 구해 와

매듭을 지어 집을 향해 던졌다

밧줄은 대문에 정확히 걸려

나는 밧줄을 감아쥐고

한 발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가갔을 때

대문이 나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이 밧줄을 놓고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 하는데

아내와 어린애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대한 아버지가 왔다고 큰소리쳐야 하는데

따뜻한 방에 슬픈 그림자를 눕히고 재워야 하는데

 

3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밤바람이 제법 찼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손발을 오므렸다

 

나는 온몸으로 길을 녹이며 오르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

 

야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한 마리의 고양이와 마주쳤다 주춤거리며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제법 무서웠는데 슬퍼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 들켰다고 화를 내는 것일까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다음날 저녁 나는 다시 그 쓰레기통에서 고양이와 마주쳤다. 나를 아는 눈치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눈빛이었지만 늦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처럼 외롭고 슬퍼 보였다

 

그 다음날 귀갓길에 나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어느새 고양이는 나의 슬픈 신발이 되어 있었고 외로운 거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골목에 들어서서 다가갔다 그런데 고양이는 없었다 왜 오지 않았을까, 허망했고 걱정도 되었다

 

그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눈빛을 찬물을 끼얹어 장작불을 끄듯 내 마음속에서 끌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슬퍼 보였고 외로워 보였던 그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촛불로 삼고 복잡한 서울 거리를 헛디디지 않고 다녔다 구조조정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인터넷 뉴스를 뒤졌고 아이들의 용돈을 마련하려고 교통비를 아꼈다 주눅 든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고 『전태일 평전』을 읽었고 겨울바람을 막으려고 전세 대출금 이자를 연체하지 않고 냈다

 

사남매

 

할머니가 밭에 나가 있는 동안

일곱살 동생이 열다섯 된 오빠를 데리고 논다

마늘 몇접 걸려 있는 처마 밑에 놀이터를 마련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따라

방을 꾸미고 컴퓨터를 설치하고

화단을 가꾸고 우편함을 만들고 만국기를 단다

해가 뜨면 오빠와 할머니께 인사를 한 뒤 회사에 출근하고

집에 있는 오빠가 궁금해 회사에서 가끔씩 전화를 걸고

과일과 붕어빵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퇴근한다

저녁을 지어 오빠와 할머니와 냠냠 먹고 나서는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설거지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오빠는 동생의 소꿉놀이가 즐거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헤헤 웃으며 손뼉을 치고

동생은 했던 놀이를 하고 또 해도 마냥 즐거워하는 오빠가 좋아

집안 살림을 신나게 한다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남매를 부르면

동생은 오빠를 이끌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오빠는 동생을 따라가야 된다는 마음으로 달려간다

할머니가 세상에 두번 다시 오지 않기라도 하는 듯 치마를 잡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서면

이부자리 곁에서 낮잠을 자던 또다른 남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멘트공장에 일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 뜬 남편과

정신박약아인 아들과 이자가 안될 딸과 노모를 버리고 가면서

선물로 남기고 간 인형 남매가

어느덧 언니들과 어울려 놀 만큼 자라난 것이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 동안

사남매는 모여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손뼉을 치며 노래도 부른다

 

운(運)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리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아름다운 얼굴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푯대

 

공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가

뒤편의 산마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꽃들은

말갛게 쓸린 오후의 골목길처럼 깨끗했고

미인의 귀볼처럼 발그레했고

세상살이가 좋기라도 하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저 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나는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쇳가루를 뒤집어쓴 시커먼 공장을

아름다운 푯대로 삼으려고 했던 내가

꽃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니

 

공장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내가

꽃 앞에서 강박관념을 느끼는 존재라니

나를 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푯대여

 

책이 무거운 이유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무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만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살한 노동자의 유서에 스며 있는 슬픔이나

비전향자의 편지에 쌓인 세월을 잊을지 모른다고

때로는 겁났지만

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의 나무를 기준으로 삼아

몸무게를 달고

생활계획표를 짜고

유망 직종을 찾아보았다

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

 

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그 나무 때문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9. 27. 11:5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2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수연산방 안마당에 성북동 골짜기의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이태준, <달밤>

작가 이태준이 살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집필한 곳. 수연산방.

 

성북동 안골짜기라면 물 맑고 공기 좋고 여름엔 나무 그늘 푸지고 겨울엔 솔바람 소리 그윽하고 살면 살수록 정이 드는데다 거기 또한 이웃까지 좋고 볼 양이면 따로 낙지(樂地)를 구할 생각조차 날 리 없다.

석운과 나는 이와 같은, 낙지 부럽지 않은 행복한 지대에 십 년 동안을 이웃하고 살았다. 재 직업이 비록 A출판사의 편집원이라고는 하나, 성미가 본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다 학교 적에는 미학을 전공했고, 취미가 또한 서예에 잇는 지라 사의 일만 끝나면, 한시바삐 시내의 혼탁한 공기와 착잡한 소음을 벗어나야겠다는 듯이 이내 집으로 돌아오는 버릇이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집을, 나의 집이라기보다는 나의 집이 있는 성북동의 깨끗한 자연과 석운이 있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다.

김동리, <청자>

 

심우장은 한용운이 거처하던 자그마한 집이지만 만해의 높은 기상이 서려 있기에

결코 작지 않은 집니다.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새암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건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의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한용운, 심우장 산시 1 <山居>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

 

소설가 춘원 이광수도 만해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만해는 원래 춘원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좋아하였는데, 그도 역시 창씨개명을 하자 몹시 실망하여 심우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명륜동에서 소설을 쓰다가 불교에 대한 것을 풀기 위해 고개를 하나 넘어 성북동 심우장으로 찾아온 것인데, 만해는 그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하고 문전박대를 한 것이었다.

정찬주, 《만행》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巖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잇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조지훈, <돌의 미학>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그러나 요사이 구보는 교외(郊外)를 즐기지 않는다. 그곳에는, 하여튼 자연이 있었고, 한적(閑寂)이 있었다. 그리고 고독조차 그곳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요사이,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구보 씨는 다섯시 반에 성북동에 있는 '유정'이라는 술집에 닿았다. 거기가 《성남동 까치》출판기념회 자리였다. 여느 술집과 마찬가지로, 가로가 긴 아크릴 간판을 단 한옥이었다.

(중략)

구보는 이런 얘기를 했다.

- 김광섭 선생의 《성남동 까치》는 60년대의 끝에 와서 문득 우리 문학의 하늘에 울린 길한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한국 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중략) 《성남동 까치》는 시에게 위엄과 점잖음의 옷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번쩍거리지도 절그럭거리지도 않는--목숨처럼 자유무애하고 자유인답게 점잖은 그런 옷입니다.

최인훈,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나는 참을 수 없이 그 분들이 내 할아버지라는 느낌이다. 그 분들의 핏줄과 내 핏줄이 하나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테면 1970년 5월 29일 저녁, 노인들이 환장하게 보고 싶어서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詩祭에 갔다가 들은 김광섭 선생의 답사 "나는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해서 시를 씁니다"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김광섭의 별이 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는 뜨끈한 물이 넘쳤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

정현종, <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의 말씀>

 

나는 뇌출혈로 메디칼센터에 입원하여 오랜 혼수 상태를 겪으면서 사경을 헤맸어요. 그 후 성북동 나의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따스한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 있었어요.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내 시적 생명은 끝났다는 절망감을 안고 있었지요. 그 때,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침마다 하늘을 휘익 돌아 나는 비둘기떼를 보게 되었지요. <성북동 비둘기>의 착상은 거기에서였지요. 둘 째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둘 째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 김광섭

 

병든 아내가 잠들어 있는

병원 5층의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은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5십 5년 전의 달밤 성북동에서

소년시인 함형수(滅亨洙)가 불고 가던

하모니카의 도리고의 세레나데 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함형수가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꼭 그 하모니카 소리만 같다.

서정주, <노처(老妻)의 병상(病床) 옆에서> 부분

 

흙냄새 나무냄새 맡으며 핥으며 땅을 기어가는 바람이 성북동을 찾아 산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올라간다 사장님들과 외국대사님들과 외국인 부사장님과 사장님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숲속에 모여 사는 성락원 일대 들어가는 길을 왼쪽으로 꺾어서 올라가노라면 캐나다대사관 공관 입구서부터 경사는 가팔라지고 다시 사장님들 저택 대문전을 지나서 외국손님 가득 가득 실은 관광버스가 매일 드나드는 우거진 숲속 대원각쯤에서 숨이 차고 저녁이면 노란 꾀꼬리 처량한 뻐꾸기 울음 소리 아닌 노랫소리 트럼펫 소리 숲을 울리고

정한모, <성북산조(城北散調) 3>

성북동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관과 공관, 으리으리한 저택 등 담 높은 집이 많다.

 

그날은 안개 같은 이슬비가 뿌리고 있었다.

나는 제 시간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성북동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여름감기가 걸린 탓에 며칠을 두고 앓고 방금 일어난 터였다.

나는 틀림없이 그 부잣집 사모님이 한달의 봉급에서 내가 앓아누웠던 이틀치의 공백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주며 이제 우리는 다른 가정교사를 둘까 해요라는 따위의 은근한 거절선언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또 한 가지 언덕 위의 양옥집 부수는 작업이 이틀 동안 도대체 얼마 만큼 진전이 되어 있을까, 해부실에 걸려 있는 인체 골격 구조 표본처럼 앙상하고 볼품없게 뼈다귀를 드러내고 있을까라는 기대도 아울러 품고 있었다.

때문에 성북동 그 길고도 긴 언덕길을 올라가는 나의 걸음은 열쇠구멍으로 다가가는 듯한 아슬아슬한 전율과 흥분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최인호, <무너지지 않는 집>

 

성북동에 있는 사장의 집은 성벽 같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늦게 돌아오게 될지 몰라 산업체 학생들은 빠지라고 했지만 윤희와 순옥은 한사코 따라나섰다. 까짓놈의 학교 때려치지 뭐, 하고 호기까지 부리며 쫓아나섰던 순옥은 그날 있은 중간고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담장 안은 들여다보이지도 않았고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쥐새끼 한 마리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원목을 켜서 만든 대문은 서른명이 달라붙어 밀어젖혀도 꿈쩍 않았다. 행여 그들과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맞은편 담벼락 쪽으로 달라붙어 지나가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그리고 가끔 지나는 광택을 잘낸 고급승용차들과의 거리만큼이나 순옥은 자신의 초라함을 사장집 대문 앞에 주질러앉아 확인해야 했다.

방현석, <새벽 출정>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당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이렇게 조용한 곳이 예전에는 '노랫소리 트럼펫소리 울리는' 요정이었다.

지금은 고즈넉하여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곳. 길상사.

 

거기서 무엇이 보이느냐.

저 문 뒤

바람도 보이느냐.

맞은편 하늘로 길은 사라지고

모든 지붕은 멀리 사라지고

어디서 흐린 마치 소리가

진종일

뼈의 집을 짓고 있다.

햇빛은 등뒤에서 한결 뚜렷하다.

몇 사람은 흙 속에서

구름과 함께 서성이고

뒤뜰에는 자주 기침하지 않는 하느님

한겨울 쉬었다가 내리는 눈

때없이

죽은 아비의 혼도 날아다닌다.

불치의 병을 기다리는

나의 새벽이

순라꾼의 맨발을 기웃거리고

누군가 저 산그늘 밑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강은교, <성북동>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그가 아내를 흔들었다. 드러누운 아내가 힘없는 눈을 간신히 떠본다. 그녀 앞에는 누더기에 싸인 핏덩이가 꼼지락거리며 모친의 젖을 물고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아기를 받고 국밥을 먹이고 불을 피워 보호해 주고 있다.

이기영, <산모>

사직공원은 도심에서는 드물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오 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 벤치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 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신동엽, <3월> 부분

아무런 건물도 없이 제단만 모셔져 잇는 사직단의 모습에서 무언가 신성한 시운이 느껴진다.

 

새벽의 사직공원 안은 서늘하기도 하거니와 휭하게 널찍해 보였다. 산 중턱에 아침 산보하는 사람이 더러 눈에 띄었다. 영아는 미끄럼틀 옆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신문팔이에게서 조간 한 장을 사서 펴들었다. 신문의 잉크 냄새가 어쩐지 신선하게 코를 찔렀다.

이호철, <4월과 5월>

 

아직싹트지않은이른봄건강이없는그는오와사직공원산기슭을같이걸으며오가긴히이야기해야겠다는이야기를듣고있었다. 너무나뜻밖에일은--오의아버지는백만의가산을날리고마지막경매가완전히끝난것이바로엊그제라는--여러형제가운데이오에게만단한줄기촉망을두는늙은기미호걸의애끓는글을오는속주머니에서꺼내보이고-저버릴수없는마음이-오는운다

이상, <지주회사>

 

쪽대문을 열어 놓으니 사직공원이 환히 내려다 보인다. 인제는 봄도 늦었나 보다. 저 건너 돌담 안에는 사쿠라 꽃이 벌겋게 벌어졌다.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돋고, 새침히 옷깃을 핥고 드는 요 놈이 꽃샘이겠지. 까치들은 새끼 칠 집을 장만하느라고 가지를 입에 물고 날아들고…….

이런 제기랄. 우리 집은 언제나 수리를 하는 겐가, 해마다 고친다. 벼르기는 연신 벼르면서 그렇다고 사직골 꼭대기에 올라붙은 깨끗한 초가집이라서 싫은 것도 아니다.

김유정, <따라지>

 

사직공원에서 벚꽃의 낙화가 난분분한 게 바로 엊그저께 같은데 인왕산 줄기를 아카시아의 안개구름이 젖비린내를 풍기며 피어오르고 나면 곧장 장마가 지고 여름이었다.

박완서, 《미망》

 

서울로 이사를 와서 행촌동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한 이삼일 뒤의 일이다. 그날 나는 딸 옥환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잠시 문안에 들어갔다가 나왓다. 그동안 집은 아내 혼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인, <사기사>

우리나라 전통기법으로 돌을 쌓아 만든 독립문. 여기서 말하는 독립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청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표적이던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다 반대인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십일월십사일에 독립문 정초식(定朧式)이 있었는데, 이날 독립협회가 조직이 되었다. 개혁과 자주독립에 열기를 가진 많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독립협회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채만식, <여자의 일생>

 

미국사람이 경인철도 시설권 얻고, 노국인(러시아사람)이 경원, 경성 광산채굴권 얻고, 무산 압록강 유역, 울릉동 산림벌채권 허가받고, 노한은행 지점 개설되고, 경인철도 시설권은 미국 사람 손에서 일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경부철도 시설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뿐이오니까, 금성 당현금광이 독일인 손에 들어가고, 영국기사 설계로 덕수궁 석조전이 아가리 벌려 하품하는 백돼지처럼 서고, 이 판이 아니더이까. 이 판에 영은문이 헐리면 어쩔 것이며, 독립문이 선들 어쩔 것이며, 장안신사 서른 명이 모여들어서 독립협회 간판 내거니 무삼 소용이며, 몇몇 사람이 똑똑한 소리 몇 마디 해서 어쩔 것이며, 눈을 뜨고 깨어나고 세계로 나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오니까.

이호철, <1기 졸업생 3>

 

백상충과 장경부는 사직골 언덕길을 넘어 독립문을 비껴돌았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을 영구 독립국가로 선언하려 1897년에 완공한 독립문을 바라보는 백상충의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이완용은 3년 뒤에 매국노로 변신했으니 독립문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셈이었다. 민중계몽운동을 주장하며 대의민주정치를 표방했던 독립협회는 개화지식인 애국지사가 주축이 되었으나 회원 중에는 기회주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문을 세울 당시 들끓었던 민족자존(民族自尊)의 드높은 외침은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됨으로써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김원일, 《늘푸른 소나무》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허는 덴가요?"

심훈, <상록수>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제아무리 충직한 함경도 물장수 김서방도 그 겨울의 지독한 눈구덩이만은 헤칠 엄두가 안 났던지 자주 물장사를 걸렀다. 그러나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안마당, 바깥마당, 장독대, 지붕 위에 지천으로 쌓인 눈을 퍼다가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만 지피면 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우린 우리의 완벽한 은신을 감지덕지할 줄만 알았지 그 허점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쓴 일단의 인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주둔하고 잇는데 거기서 산동네를 쳐다보면 매일 아침 저녁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는 집이 몇 집 있더라는 것이었다. 연기 나는 집을 하나하나 다 뒤져 봐도 재수없게 다 죽게 된 늙은이 아니면 병자가 고작이더니 이 집엔 웬 젊은 여자가 다 있냐고 마침 문을 열어 준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중략)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국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잇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김남천, <경영>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하면서…….

 

붉은 벽돌의 높은 담, 서대문형무소의 우중충한 풍경은 서희 마음을 짓누른다. 이곳 풍경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잿빛이엇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그 가족의 마음처럼,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길상의 건강이 그런 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 옥색 명주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쏟아지는 눈물을 훔친다.

박경리, 《토지》 제3부 3권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감옥을 둘러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해오는 듯하다.

 

형무소 넓은 뜨락에 물결처럼 사람들이 넘실거린다.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너절한 양쪽 길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인다. 찌부러진 국숫집, 빵집이 번창한다. 형무소 뜨락에도 매점 이외 떡장수, 고구마장수가 목판을 벌여 놓고 있었다.

도둑과 살인자와 사기꾼 그리고 정치범들이 살던 붉은 벽돌집은 지금 반역자들로 가득 차고 광장에는 그 반역자들의 가족으로 가득 차 잇다. 꽃시절이 되면 창경원 울타리 밖에까지 매표구를 늘여 한철을 재미보는 것처럼, 꽃바람은 가고 지금은 초겨울, 누더기 걸친 구경꾼 아닌 가엾은 무리들이 임시로 마련된 창구 앞에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아침에 학교 가려고 나왔다가 아파트 앞에서 나는 체포되어 다시 감방에 처넣어졋다. 재수감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문민정부에서도 이럴 수가 있냐고 물었고, 곧 나는 후회했다. '문민정부'라는 말이 뭘 구걸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五舍下 감방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구서대문구치소 일대가 유적지 보존 조치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사형장 앞에 주차된 웬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려 했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멀리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된 1980년 7월 2일 오후 1시의 햇살을 받아 독립문 아치 하늘이 어떤 영원감을 잠시 보여주고 지나갔다.

황지우,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 부분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프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지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命名)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룻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략)

이양하, <신록 예찬(新綠禮讚)>, 《조선일보》(1937)

청송대에서는 소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시절>

본관 앞 백양나무. 옛날에는 이 나무가 하얗게 줄지어 서서

길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양나무를 시간의 나무라 부른 옛 부족이 있었다

갈잎나무 잎사귀 거죽이 한밤처럼 검푸르고

뒤쪽은 대낮같이 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족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필시 삼세 번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나무 잎새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시인 부족을

사방 오랑캐가 가만둘 리 없으므로

세상은 항상 개판이었고 역사는 언제나 비가(悲歌)이므로

무참한 무참한 서사(敍事)이므로

유종호, <언제나 비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적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옆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 때까지 밖은 휘양한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질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뚜라미 울음 뿐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닌가?

(중략)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누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 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인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장철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겉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홀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나는 영안실 입구의 전광판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호텔처럼 죽은 자에게도 각자의 방이 있었다. 이 세계는 혹시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신생아실에서 태어나 교실에서 배우고 소주방에서 술 먹다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채팅방에서 채팅하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잠드는, 그리고 끝내는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서 마감하는 삶.

김영하, 《퀴즈 쇼》

사방팔방으로 그려진 건널목의 하얀 선들. 신촌을 누비는 청춘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그곳.

 

서울하고도 신촌에 80년대 초부터 있어온 술집이 있다. 신촌은 50년대에도 있었고(그때 그곳에 살아보지 않아 확실히는 모르지만) 60년대에도 있었을 것이고 80년에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촌에는 90년대, 그것도 세기말의 발작적이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잡지 같은 후반부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낮에는 유리와 플래카드로 분칠한 새 건물이 '비까번쩍'하고, 밤에는 요요한 불빛으로 휘황찬랑하다. 그러나 지금 거기에 분명히 70년대와 80년대의 먼지를 덮어쓴 채 삭아가는 집이 하나 있다.

성석제, <언젠가는>

 

(전략) 이들은 큭 머리를 맞대는 게 지겨워지면 남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문득 화장실에 다녀와서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어느 날은 로버트 드 니로가, 어느 날은 성석제가, 어느 날은 성원근, 기형도, 김소진이 먼저, 그들은 몸에 큰 오버코트를 입고 꼬부라진 혀로 인사를 하고는 무거운 문을 밀었다. 바깥에는 소란한 90년대가 거센 연기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과 별 사이에서 차갑고 더러운 눈, 물이 막 걸음을 떼려는 소년들의 이마에 떠어지곤 했다. 죽은 소년도 있었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소년도, 떠나지 못한 소년도 있었다.

모두 어른이 되었으리라.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끼리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언젠가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듯이.

시간도 사람도 포스터도 추억도 모두 사라지고 골조만 앙상한 '언젠가는'만 남는다. 그러니 인생이여, 부탁하노니, 즐겁게 춤을 추시다가 그대로 멈출 줄 알지어다!

성석제, <언젠가는>

산책 끝에 가볼 만한 곳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공씨책방, 숨어 있는 책,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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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9. 24. 15:5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 한 귀퉁이에 있는 비각.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적이지만 그 내력은 만만치 않다.

 

"花商(화신백화점)의 '쇼윈도우' 속에서 붉은 입술을 방긋이 벌이고 있고 被女들의 푸른 치마폭은 아침의 '아스팔트' 위에서, 백화점의 층층계 위에서 깃발과 같이 발랄하게 팔락거리지 않는가."

김기림, <봄의 전령>, 《조선일보》, 1933년 2월 22일

옛날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종로타워.

예나 지금이나 주변 어느 건물보다 눈에 띄는 랜드마크와 같은 건물이다.

 

그래도,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그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하여 주려 하였다. 사실, 4, 5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기쁨을 가져 이렇게 거리로 나온 젊은 부부는 구보에게 좀 다른 의미로서의 부러움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가정을 가졌고,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당연히 그들의 행복을 찾을 게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그리고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질 사태가 벌어졌다. 안의 얼굴에 놀라운 기쁨이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빠른 말씨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조경란의 장편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에는 주인공이 이 레스토랑(탑 클라우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다.

 

33층 스카이라운지의 화장실은 한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자동센서가 달린 커다랗고 둥근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통유리 앞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남산타워와 은밀한 도시의 요새처럼 환하게 붉을 밝힌 동대문 두산타워의 빽빽하게 밀집한 빌딩숲과 구불거리는 길에 수많은 골목을 숨긴 인사동 거리, 푸른빛의 간접조명을 받으며 성채처럼 우뚝 선 세종문화회관 건물……33층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한밤은 셀 수 없이 많은 빛을 흩뿌려 놓은 듯 화려한 빛무리로 들끓고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힐 때마다 자동센서에서 저절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탑 클라우드, 높은 구름, 구름의 꼭대기, 나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유람하다가 지나는 길에 잠깐 이곳을 비행하고 있는 거란 느낌에 휩싸이고 있었다.

조경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늘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로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서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보신각에서는 매일 낮 12시 보신각종 상설 타종행사가 열린다.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직접 종을 쳐 볼 수도 있다.

 

이야기에 팔려서, 오는 줄도 모르게 어느덧 종각 앞을 지나 광교를 건너고 잇다. 화신 잎 네거리까지가 송영호 군에겐 거주지역이고, 게서부터는 남쪽으로 본정을 들어 명치정 골목을 돌아 내려오는 건, 이를테면 여행을 하는 셈이다.

채만식, <종로의 주민>

 

썸싱 장소를 묻다가 소양이가 종로 2가에 자주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옥의 말에 의하면 소양이도 여느 젊은 아이들처럼 재수할 때부터 종로통이었고, 자리마다 인터폰이 있어서 졸팅하는 재미로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썸싱에서 희중을 만나게 되었다.

강석경, 《숲속의 방》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에는 일어 학원 말고도 학원이 무수히 많았다.

서울 아이들은 보통 학교를 두 군데 이상이나 다니나 보다. 영수 학원, 대입 학원, 고입 학원, 고시 학원, 예비고사반, 연합고사반, 모의고사반, 종합반, 정통영어반, 공통수학반, 서울대반, 연고대반, 이대반……이 무수한 학원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몰려 들어가고 쏟아져 나오고 했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무가 되어 한껏 바람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네

가축의 피가 되어 욕망을 으르렁거리기도 했네

정액이 되어 번식의 황홀경에 도취되기도 했네

눈물이 되어 타령으로 한세상 쓴 살이도 했네

자학의 세월 돌부리에 몸 부딪치며

계곡을 뒤흔들기도 했네

아으, 구름이 되어 한량처럼

한세상 두둥실 떠돌기도 했건만

이제 모든 소리를 탕진하고 늙어

침묵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네

저기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네

함민복, <탑골공원에서>

 

종로에 들렀다가 탑골공원으로 갔다. 갈비와 물김치가 못 견디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몰래 주워먹었다. 그러고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얘기를 엿들으며 하루를 보냇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 걸지 않았다.

김영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잇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탑골공원 한 구석에 숨은 듯이 서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기념비.

옛 파고다극장이 있던 낡은 건물.

영원토록 젊은 시인을 추억하게 하는 곳.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지나,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아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옛 조선극장 터.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인사동에 들어서게 된다.

 

"진짜 호경기야 만주사변 지나서 아니겠습니까. 만주사변을 일으켜 놓자 그쪽에선 구경꾼을 잃어버린 왜놈들이 조선땅을 찾아들었던 거죠. 그쪽에선 그맘때 벌써 영화가 판을 쳤다지만 우리네야 명절 때면 모를까 어디 큰맘 먹지 않고는 우미관이나 조선극장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서커스에서 몸담아 지나온 영욕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잇었다.

한수산, 《부초》

 

그들이 인사동에 있는 르네상스에 들어섰을 때, 아닌게 아니라 분위기는 무척 가라앉고 처져 있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뭐랄까 조금은 느적지근하고 사람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고급스런 냄새가 났다. 함부로 막걸리 냄새를 풍긴다든가, 도나캐나 쇠똥말똥 밟은 흙발로 들어서서는 안 될 것 같은 가라앉은 치장으로 휩싸여 있었다. 우선 전후의 막돼먹은 다방과는 달리 디스크 플레이어를 따로 유리 박스에 가두어 두고 그 옆으로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작은 산더미 같은 레코드판이 그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어지간한 다방에 들어서면 공기부터가 텁텁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들로 하여 쇠전이나 장바닥에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르네상스는 안 그랬다. 모두가 차분히 가라 앉아 있고 박힐 것들이 제자리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최일남, <서울의 초상>

 

걸어서 인사동까지 온 운지는 승찬이 평소 잘 들락거린다는 이층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어서면 머리끝이 천장에 닿았다.

"여기가 바로 그 쟁이들이 밤낮으로 죽치고 술마시는 그 술집인가? 이름부터 좀 수상한데? 세상만들기라……."

"예, 괜찮은 집이예요. 선배도 앞으로 잘 애용해보세요."

김소진, 《양파》

 

오늘은 인사동이 궁금하다

며칠 안 나가는 동안

눈에 번쩍 띄이는 벼루가 나왔다가

눈 밝은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틈만 나면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 그 벼루 조각 한 번 참!

은 만나지 못하고

찌든 먹 냄새만 가슴에 환하게 담고

목 부러진 백자주병처럼

고개 꺾고 돌아오는

이근배, <인사동 산책 - 벼루 읽기> 부분

 

시현은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그곳이 바람든 여염집 여편네 같다고 생각한다. 체면과 탐욕이, 명분과 실리가 적절히 섞여 있는 그 모습이, 과거와 현재가, 예술과 상혼이, 그리고 온갖 딜레탕트적인 주변예술이 뒤섞여 이제는 노쇠와 퇴락밖에 남지 않은 비만한 중년부인을 닮아가고 있다.

김형경, 《새들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전통의 거리라는 인상이 강하던 인사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 쌈지길 모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천상병 시인의 아내(문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 귀천.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 석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 이

평균 60여 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천상병,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의 분점이 생겼다. 이제 인사동에는 귀천 카페가 둘이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광화문 큰 거리를 총독부 쪽으로 어슬어슬 걸어가노라니 그의 그림자가 짤막하게 앞에 누워 간다. P는 그 자기 그림자를 꽉 밟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내어 디디면 그림자도 그만큼 앞으로 더 나가곤 한다. 이 그림자와 자기 자신에서, 그리고 그림자를 밟으려는 자기 자신과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자에서 P는 자기의 이중인격의 모순상(相)을 발견하였다.

(중략)

물론 그는 지금이라도 누가 한 달에 삼십 원만 줄 테니 와서 일을 해달라면 마치 주린 개가 고기를 보고 덤비듯이 덮어놓고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 딴판으로 배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P가 삼청동으로 올라가느라고 건춘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저편에서 말쑥하게 몸치장을 한 여자 하나가 마주 내려왔다.

역시 삼청동 근처에 사는 여자인지 P와는 가끔 마주치는 여자다.

P는 그 여자와 만날 때마다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는 체하면서도 실상은 고비 샅샅 관찰을 하였고, 그리고 속으로는 연애라도 좀 했으면 하던 터였었다.

무엇보다도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모지지 아니하고 얼굴의 윤곽이 둥글듯이 모가 나지 아니한 것, 그래서 맘자리도 그렇게 둥글려니 하는 것이 P의 마음을 끈 것이다.

(중략)

삼청동 꼭대기에 있는 집--집이 아니라 사글세로 든 행랑방--에 돌아왔다

객지에 혼자 있으니 웬만하면 하숙에 있을 것이로되 방값이 밀리고 그것에 졸릴 것이 무서워 P는 방을 얻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채만식, <레디 메이드 인생>, 《신동아》, 1934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東門)이다.

키 큰 가로수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오늘 산책을 시작한다.

 

불안과 초조와 희망이 섞인 사흘이 겨우 지났다. 나흘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찬구는 P의 집에 가보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통지는 오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 일러 그런 게지 하고 도로 나와 창덕궁 앞으로 나서서 단성사 앞을 지나 종로를 한 바퀴 휘돌아 또 들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편지도 안 왔다 한다. 이번에는 북으로 돌아 원동 계동 재동 삼청동 일대를 돌아 오정 때나 되어 세 번째 글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소식도 없었다. 혹시 또 채용이 못 되는 것인가 생각하니 기가 탁 막힌다. 그러나 자기가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이라 돌려 생각하고 아주 멀리 장충단공원으로 가서 잔디밭에서 낮잠을 잤다. 따뜻한 햇살에 몸은 노곤히 풀리면서도 깊은 잠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언뜻 눈을 뜨고 보니 꽤 잠을 잔 모양으로 가로 길게 비낀 나무 그림자가 오후도 퍽 늦어진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찬구는 분주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 P의 집으로 걸음을 빨리하였다.

유진오, <오월의 구직자>

여고와 남고가 모여 있던 동네에 자리잡은 정독도서관.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지는 향수어린 풍경.

 

도서관에 다다랐을 때엔 마침 때 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라고 영민이가 킁킁거렸다.

우리는 거리에 서서 도서관 문 닫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늘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첫눈 치고는 폭설에 가까웠다. 날이 더운 탓에 눈은 쌓이질 않고 땅 위에 떨어지자마자 녹았다. 그러나 좀 후에는 쌓이기 시작했다.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벽에 기대서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그때였다. 도서관 시간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려고 기웃거렸다.

소녀가 맨 나중에 나오고 있었다.

최인호, 《머저리 클럽》

 

정독도서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1977년 1월에 개관한 서울시립공공도서관이다. 옛날 학교 건물을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있어 곳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운영시간 07:00(동절기 08:00) ~ 20:00 정기휴관일 매월 1, 3주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칠 경우 휴관)

 

북촌

북촌한옥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북촌문화센터 및 북촌한옥마을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북촌의 유명한 풍경을 찍을 수 있는 '북촌 8경'이란 포토 스폿도 마련되어 있는 데 이에 대한 정보도 있으니 사진을 찍을 계획이 있는 이들은 한번 확인해 보고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http://bukchon.seoul.go.kr

헌법재판소의 백송. 버팀기둥에 몸을 의지해야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알렌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 말이다.

(중략)

둥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되어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 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팁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 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멀리서 보아도 희게 빛나는 백송의 줄기. 오랜 세월 탓에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늦가을 아침 유언을 남기고 죽은 박지원의 재동 집 벽장에 들어있었다는 지구의를 떠올린다. 그 지구의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지구의를 가져왔다고 쓴 바 있다. 박지원이 손수 지은 재동 집 사랑채 앞에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는 숲을 이룰 만큼 많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잇다. 바로 그날,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바로 그 나무 한 그루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의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박지원의 벽장 속의 지구의와 뜰 앞에 나무 한 그루도 남겼다. 그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인촌 김성수의 대저택을 그대로 보존한 인촌기념관.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 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 난 장자[富者] 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중략)

구경을 아주 원만히 마치고 난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는 제 집이 청진동이니까 걸어가라고 보내고, 자기 혼자만 전차 정류장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숱해 몰려 나온 구경꾼들과 같이서 전차를 탈 일이며, 또 버스를 탈 일이며, 그뿐 아니라 재동서 내려 경사진 계동길을 걸어올라가자면 숨이 찰 일이며 모두 생각만 해도 대견했습니다. 십 원짜리를 가지고 하면 또 공차를 탈 수도 있을 테지만, 에라 내가 돈을 아껴서는 무얼 하겠느냐고 실로 하늘이 일까 무서운 변심을 먹고, 마침 지나가는 인력거를 불러 탔던 것이고, 결과는 돈 오 전을 가외에 더 뺏겼고, 해서 정히 역정이 났었고, 그리고 또 대문이 말입니다.

대문은 언제든지 꽉 잠가 두거니와, 옆으로 난 쪽문도 안으로 잠겼어야 할 것이거늘 그것이 훤하게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큰대문을 열어 놓고 있노라면 어쩐지 집안엣것이 형적 없이 자꾸만 대문으로 해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고, 그 대신 성서롭지 못한 것이 자꾸만 술술 들어오는 것만 같고 하여, 간혹 창작바리나 큰짐이 들어올 때가 아니면 큰대문은 결단코 열어 놓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 집의 엄한 가헌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중앙고등학교에 있는 이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겨 놓았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그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쳤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채만식의 업적을 기리는 채만식 문학비.

<국화 옆에서>를 새겨 놓은 서정주 시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의 찻집 싸롱마고에서는 이런저런 문화 행사들이 열린다.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피는 소설 속 한옥집은 어디쯤 있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름을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후략)

박인환, <목마와 숙녀>

 

어머니를 따라서 살게 된 가회동집은 한옥으로서 굳이 말하자면 튼 ㅁ자형이었다. 대문을 열면 좌우에 사랑방과 창고가 들여져 있었고, 곧 뜰로 이어졌다. 곱은자형의 안채에는 안방과 뒷방이 있었으며, 대청을 사이에 두고 건넌방이 있었다.

뜰은 나무들이 울창했다.

인위적으로 가꿨다기보다 절로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와를 얹은 동편 담장을 따라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라일락과 단풍나무와 사철나무가 있었으며,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자라고 있었다. 특히 마당의 중앙에 서 있는 백목련은 아주 나이 많은 나무여서 기둥이 한 아름은 충분히 될 정도였다.

박범신, 《외등》

 

08 부안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나는 아직도 청청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도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산마루 어느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후략)

김관식, <자하문 밖> 부분

성문 현판에는 분명 창의문이라 쓰여 있지만 사람들은 자하문이란 이름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樺榴나무에 연둣빛 기류가 감돌게 되면 봄은 벌써 와 있다고 해야 한다.

해는 차츰 길어지고 낮달이 유난히 눈을 끈다. 저녁에는 사철나무 키 작은 어깨가 달싹인다. 저희끼리 뭔가 표정을 나누고 있다. 이럴 때 서울의 부암동 산꼭대기 그 누옥, 술 때문인지 온종일 입에서 떼지 않는 파이프 때문인지 강화백의 한쪽 눈이 젖어 있다. 지금도 아마 그 큰 눈의 어느 한 쪽은 젖어 있으리, 고지새가 한 마리 거실 맞은 편 뜰에 내려와 집주인의 눈을 먼발치서 가만히 바라본다.

김춘수, <강화백>

 

여기가 어디다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여기가 종로구란 말이냐?

(중략)

작년에 네 가족들이 삼 년 남짓한 외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 전세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실망하더니 이런 마을을 찾아낸 모양이로구나. 여긴 완전히 시골마을이여, 커피집도 잇고 미술관도 있긴 하나 방앗간도 있더구나. 방앗간에선 흰 가래떡을 뽑고 있더구나. 옛날 생각이 나서 한참 구경을 했구나. 설이 다가오는가. 방앗간에서 흰떡을 뽐는 사람들이 꽤 있던걸. 아직도 설이라고 흰떡을 뿜는 그런 마을이 이 도시에도 있구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환기미술관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11 ~ 2월은 오후 5시) |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 매주 일요일, 설날, 추석연휴 휴관

입장료 일반 2,000원, 학생 1,000원 문의 02-391-7701 ~ 2 | www.whankimuseum.org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가 담만 즐비하게 남았즈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남았겠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떡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드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싶었다.

현진건, <고향>

좁은 골목 입구 담 아래 현진건의 집터를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있다.

 

지난 봄에 창의문 밖에 있는 전 대원군의 별장을 구경한 일이 있다. 워낙은 김모라는 당시 재상이 지은 것인데 뒤에 대원군이 가진 것이라는데 첫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재목으로 그렇게 아끼는 것이 없이 짓는 집을 왜 요즘 집장수들의 집처럼 간사를 좁게 지었나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그때 사람들이라고 키가 더 작았던 것도 아니요, 재목을 아꼈음도 아니요, 다만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겸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태준, <집 이야기>

석파정은 잠긴 문틈으로 보기만 해도 풍채 좋은 한옥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느릿느릿 흘러내리던 인왕산(仁旺山) 자락이 세검정 시냇물을 만나 문득 걸음을 멈추면서 불끈 또아리를 튼 이곳은 풍광이 좋아 예로부터 별장이 많던 것이었다. 세검정 개울 건너 산비탈에 자리잡은 것은 춘원(春園)의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둘러쳐진 철조망 너머 숲 사이로 살짝 보이는 기와지붕은 대원군의 별장이었다는 석파정이었고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현대식 삼층건물은 무슨 재벌동아리 회장의 별장이었다.

김성동, 《길》

'춘원헌'은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남긴 곳이다.

 

세검정 빨래란 자고로 유명하다고 하오. 날이나 밝은 아침이면, 밥솥과 장작과 빨래 보퉁이와 빨래 삶을 양철통과를 사내가 걸머지고, 여편네는 진뜩 한 임 이고 코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자하문으로 주렁주렁 넘어오는 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이 고장의 한 풍경이오. 그들은 개천가 빨래하기 좋은 목에다가 진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어 가며 빨래질을 하는 것이오. 저보시오. 개천가에는 홑이불, 욧잇, 치마, 모두 널어 말리고 있소.

이광수, <육장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상명대학교 건물은 큰길에서 바로 보인다.

 

"저기는 세검정인가요?"

초희는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저 큰 집은 뭐지요?" 전에는 집 한 채 없던 세검정 골짜기에 그득 서 있는 집들, 그 중에서도 산중턱에 새로 지은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저건 학굔가 부지요?"

"상명여자사범대학이야"

"저기다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박영준, 《고속도로》

 

집 앞에서 135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인지를 지나, 상명여대 입구에서 내린다. 홍은동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론 제법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왼쪽으론 몇 개의 작은 산길이 나 있다. 그중 하나의 산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나무들과 바위와 바람이 있다. 비라도 내린 날이면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봄과 여름에는 야생화도 핀다.

구효서, 《낯선 여름》

 

내가 자하문고개를 넘어 세검정을 찾았던 것은 1964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의 학생이었고 게다가 세검정은 초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서울에서는 꽤 외딴 동네에 들었다. 그날은 가랑비가 하루 종일 안개처럼 흐르다 멈췄다 하는 날씨였는데, 그렇다고 음산하지는 않았다. 그곳 분지는 안개비에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배운 대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산수운연(山水雲煙)의 경계를 몽롱하고 침중하게 나타낸다는 선염법(渲染法)에 의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였다. 집에서 나와 그곳에 틀어박힌다는 상상이 실제의 일처럼 내 앞에 다가와 나는 망연자실, 남모르는 환희에 몸이 떨렸던 것도 같다. 버스가 자하문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아마도 느티나무인가, 황록색에 붉은빛을 띤 가을 잎사귀들이 무리져 날리는, 어쩌면 비현실의 세계 같기도 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세검정이라는 동네가 두고두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 바로 이때의 느낌 때문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을의 깊고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저 도끼로 찍어 놓은 준(皴)처럼 주름져 보이는 것도 인상이 깊었다.

윤후명, 《돈황의 사랑》

 춘원이 살던 동네에는 '춘원'이라는 빌라가 있어 이정표 구실을 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주위는 점점 낯설어졌다. 길 가는 사람을 까닭 없이 멸시하는 듯한, 거드름 섞인 높고 도도한 담장들 사이의 삭막한 길. 모든 것이 나로부터 철저하게 무관했다. 그런데 나는 방금 이런 세상을 두려워하여 거짓된 말의 방패 뒤에 비열하게 몸을 숨겼던 것이다.

서영은, 《그녀의 여자》

 

부귀영화를 빼앗아 만년이나 누릴 듯, 후세의 비평을 듣는 단종의 삼촌 세조도 겨우 열세 해 만에 호화로운 꿈도 한 줌의 흙을 보태었을 뿐이요. 그의 원자(元子) 덕종(德宗)은 세조 생전에 참혹한 꼴을 본 것이매, 손도 꼽지 않으려니와, 둘째이신 예종(睿宗)이 또한 겨우 왕위에 오르신 지 일년에 이 세상을 버리시니, 나이 겨우 스무 살이신 예종이 장남한 왕사(王嗣)를 두실리 없다. 세조 비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명을 받들어 덕종의 둘째 아들이신 자산군(者山君)을 왕위에 모시니 곧 성종(成宗)이시며, 임금 노릇 하신 지 스물 다섯 해, 춘추 서른 여덟에 승하하시니 원자 연산(燕山)이 왕위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 영특한 임금, 갸륵한 어른으로 존숭을 받으시는 성종으로도 호색이 빌미가 되어 비빈 사이에 질투의 불길이 일어나고, 나중에 세자의 어머님이요 곤전마마이신 막중한 왕비를 폐위시키고 또 사약을 내리니, 백성의 집인들 어찌 이러한 흉변이 잇으랴. 한 지어미 원한을 품으매 오 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거늘, 막중한 왕비어니 종묘 사직이 어찌 위태치 아니하랴.

박종화, 《금삼의 피》

그만 헐려버린 충신동 한옥이 너무 아까워 서재만 뽑아서 평창동 산 속에 옮겨 놓았다는 박종화 고택.

 

차가 도심지를 뒤를 밀어내면서 자하문 고개로 넘어가고 있었다. 눈발은 어느덧 굵어져 있었다. 눈발 너머의 숲은 새댁처럼 음전햇으나, 음모자 같은 구석도 잇어 뵜다. 숲 사이로 그림 엽서에서나 봤음직한 아름다운 2층 3층 양옥들이 나타났다. 먼 이역의 딴 세계였다.

(중략)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인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자 3층집이었다. 눈이 너른 정원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집채만한 암석이 그의 품에 키는 낮고 나이는 많은 노송 한 그루를 품고, 정원 끝에서 그를 내려다 봤다.

박범신, 《죽음보다 깊은 잠》

 

마리가 다시 뾰족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때 그에게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며칠전 재혁이 전화에서 자랑한 곳이었다.

"나 요즘 사는 집 하나는 팔자 늘어졌다. 건평만 100평 단독주택 나 혼자 쓴다는 거 아니냐? 그것도 평창동 그윽한 곳에 집주인들 식구대로 해외 나갈 일이 있는데, 그게 겨우 다섯 달이라 세를 줄 수도 없고 두둑한 관리비까지 주며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데 어떻게 하냐? 거기다 잘나가는 교회 당회장님 부탁이니."

이문열, 《호모 엑세쿠탄스》

 

문득, 새소리가 울려댓다. 그를 부르는 휴대전화의 울림이었다.

Y문학박물관에서 그에게 오는 오후 시간 중에 방문해달라고 했다. 며칠전 전화에서, 그쪽의 용건은 문인들의 라이프마스트를 떠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보존도 해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준은 머리를 식힐 겸 평창동의 그 문학박물관에 갔다. 관장은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K여사, 노년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과 창작가들의 지료와 자취들을 폭넓게 많이 수집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많지 않은 문학박물관의 기능을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노년에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극성이냐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에도 "그럼 나라도 이런 걸 안 하면 누구 하우?" 하는 K여사의 주름진 얼굴이 남준의 가슴을 가만히 흔들었다. 문학을 위해 헌신하는 일중엔 이런 일도 있구나…….

호영송, 《죽은 소설가의 사회》

영인문학관

관람시간 전시기간(4 ~ 5월, 9 ~ 10워)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전시기간 이외에는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토, 일요일 휴관 문의 02-379-3182 | www.youngin.org

 

영인문학관 내부.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대학가와 대학오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대학로를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대항노, 아니면 대항로가 될 것인데, 그 때문인지 그 거리는 그야말로 대항의 신작로로 변하여 시국 규탄대회가 열려 최루탄이 난무하기 일쑤이고,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이 무리져 와서 마음껏 북 두드리고 꽹과리 치고 기타 치고 춤추고 악을 쓰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새벽 두세 시에도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만우 씨의 고막을 얼얼하게 만든 것은 다반사로 잇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우 씨는 그 거리에 빽빽하게 들어선 무슨무슨 레스토랑의 간판을 무슨무슨 레지스탕스로 읽곤 할 정도였다. 레스토랑이든 레지스탕스이든 저런 것들이 한 거리에 저렇게 많이 있을 필요가 있는 건지 만우씨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 연극이나 영화 같은 것을 구경하고 싶을 때는 편리한 점도 잇긴 했다. 그 거리에 꽤 많은 연극 공연 극장들이 모여 있고, 제법 쓸 만한 영화관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재즈 카페도 있고, 심지어 낭만적인 시절에나 있을 법한 고전음악 감상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만우 씨는 이 동네에서 10년도 더 넘게 살아 오고 있고 지금도 이 동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는 자로서, 이 동리에 머무름으로써 얻게 되는 그럴듯한 이익들을 어떻해서든지 찾아내 보려는 버릇이 있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거리의 활달함 같은 것도 창작생활에 보탬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만우 씨가 술을 마실 만한 적당한 공간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사실이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대학로도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도 잇다.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샘터 파랑새극장.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오월>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기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서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잇는 것이다.

(후략)

피천득, <수필>

 

향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면 누구든 이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대할 수 잇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정자였다. 어느 날 임금께서 길을 가다가 이 정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미풍에 얹혀 슬쩍 지나가는 향기가 있었다. 기가 막힌 향기였다. 임금은 수행 신하들을 불러서 부근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오도록 했다.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향기가 좋기로 소문난 꽃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왔다. 모란, 난초, 양귀비……그러나 임금은 꽃을 하나하나 코에 대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이때였다. 먼 하늘 깊은 곳에 잇는 별빛인지, 가늘고 맑은 바람이 한줄기 흘러왔다. 그러자 보라. 풀섶 사이에서 작은 꽃이 갸우뚱 고개를 내밀다가 들킨 향기를, 바로 그 황홀한 향기가 아닌가.

향감별사는 임금 앞에 돌아가서 아뢰었다. "그 향기는 화관이 크고 아름다운 꽃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멀고 귀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굳세게 살고 자기 빛을 잃지 않은 작은 풀꽃이 지니고 잇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향기는 보는 이의 마음이 청정할 때만이 제대로 깃들 수 잇기 때문에 좀체로 만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정채봉, <멀리가는 향기>

조금은 뜬금없지만 어쨌든 반가운 김광균의 시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를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

옛날에는 청춘들의 아지트. 지금은 추억을 지켜주는 고마운 공간, 학림다방.

 

(전략)

1973년 : 동숭동 개나리꽃 소주병에 꽂고 우리의 緯度 위로

봄이 후딱 지나간 것을 추도하다. 가정교사 때려치우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다.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그때

홍표 · 성복이 · 석희 · 도연이 · 정환이 · 철이 · 형준이 · 성인이와 놀다.

그들과 함께, 스메타나, <몰다우江> 쏟아지는 學林다방, 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 지나가는 버스 세워놓고 욕지거리, 감자 먹이기 등 發狂을 한다.

發精期, 그 긴 여름이 가다.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바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숲 위로 새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로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城떠나다. 친구들 <아침 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후략)

황지우, <활엽수림에서>

역사와 내력이 진하게 묻어나는 학림의 방명록.

 

나의 학림. 방학이 끝나고 서울역에 5시 반에 내리면 갈 데가 없어서, 이불 보따리 책 보따리 들고 찾아와 새벽잠을 자던 학림. 나의 고향, 나의 청춘, 나의 상실, 내가 슬피 울던 곳, 보첼로를 청해 듣던 곳. 1990. 6. 15. 김승옥.

달빛 밝은 밤이면 수만 리가 한 마을입니다. 2004. 정월. 황석영

희미한 옛사랑이 머물었던 곳 <학림다방>에 4 · 19세대 한 사람이 34년 만에 다녀가다. 1994. 5. 2. 김광규

 

(전략)

L선배가 학림을 다시 찾은 것은 1985년 가을이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가파른 나무 계단은 여전했다. 추억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옛날의 아늑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의 시간이 훼손되어버린 듯한 느낌은 통렬한 아픔을 몰고 와 그곳을 찾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사연을 듣고 나니 호기심이 일었다. 어떻게 변해 있길래 저러는가 싶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혼자 학림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실내를 훑어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 탁자와 빛 바랜 소형 소파,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어두우면서도 편안한 조명, 은은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 그녀의 이야기가 연상시킨 천박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학림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추억을 남긴 채 문을 닫은 것은 1983년이었다. 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것. 새 주인은 대학로라는 새로운 소비문화 거리의 고객 취향과 맞지 않은 학림의 1960년대 분위기를 털어냈다. L선배가 망연자실한 것은 당연했다. 학림의 분위기가 다시 바뀐 것은 1987년 K가 학림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그는 과거의 정취를 살리는 데에 골몰했다. 내부 단장을 새롭게 하는 한편, 학림의 추억을 안고 찾아오는 '늙은 손님'들을 반갑게 만났다. 방명록도 만들었는데, 그들이 남긴 글들은 빛 바랜 흑백 사진처럼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후략)

정찬, <베니스에서 죽다>

 

(전략)

그야 주인의 직업이 직업이라 결코 팔리지 않는 유화(油畵) 나부랭이는 제법 넉넉하게 사면 벽에 가 걸려 있어도, 소위 실내장식이라고는 오직 그뿐으로, 원래가 삼백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시작한 장사라, 무어 찻집답게 꾸며 보려야 꾸며질 턱도 없이, 다락과 의자와 그러한 다방에서의 필수품들까지도 전혀 소박한 것을 취지로, 축음기는 자작(子爵)이 기부한 포터블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모든 것이 그러하였으므로, 물론 그러한 간략한 장치로 무어 어떻게 한밑천 잡아 보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엉뚱한 생각은 꿈에도 먹어 본 일 없었고, 한 동리에 사는 같은 불우한 예술가들에게도, 장사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구락부와 같이 이용하고 싶다고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을 감격시켜 주었던 것이요, 그렇기에 자작은 자기가 수삼 년간 애용하여 온 수제형 축음기와 이십여 매의 흑반 레코드를 자진하여 이 다방에 기부하였던 것이요, 만성(晩成)이는 또 만성이대로 어디서 어떻게 수집하여 두었던 것인지 대소 칠팔 개의 재떨이를 들고 왔던 것이요, 또 한편 수경(水鏡) 선생은 아직도 이 다방의 옥호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 그릐 조그만 정원에서 한 분의 난초를 손수 운반하여 가지고 와서 다점의 이름은 방란장(芳蘭莊)이라든 그러한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의하여 주는 등, 이 다방의 탄생에는 그 이면에 이러한 유의 가화미담이 적지 않으나, 그러한 것이야 어떻든, 미술가는 별로 이 장사에 아무러한 자신도 있을 턱 없이, 그저 차 한 잔 팔아 담배 한 갑 사먹고 술 한 잔 팔아 쌀 한 되 사먹고 어떻게 그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으면 하고, 일종 비장한 생각으로 개업을 하였던 것이 (후략)

박태원, <방란장 주인> 

카페 마리안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언명법으로 된 명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콧속으로 무언가 썩은 냄새가 밀려들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보랏빛 명조체로 힘차게 타이핑된 폰트 18크기의 명제였다. 폰트 18,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가 나는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잇었다. 문득 어떻게 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마치 눈앞에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실체처럼 여겨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 글자체며 폰트까지 하나의 개념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인가 하는 짧은 궁금증이 스쳐갔다.

윤이형, <피의 일요일>

혜화동 로터리.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4.19혁명 18년 뒤 쓰여짐)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한무숙문학관은 돌담에 나무 대문 그리고 기와지붕을 한 100여 년 된 한옥이다.

 

현숙하다는 칭송을 듣기까지의 심중의 고초는 한마님께옵서 익히 아오시는 몸부림이오며 아내가 깊고 깊은 절망을 겪은 후에야 갖출 수 있는 거동에 대한 보답이오이다. 겉이 평정하옵다고 안이 잔잔할 수는 없나이다. 송조집 진이의 자질은 투기하옵기엔 너무나 뛰어났사오며 시새워하기엔 위인이 지나치게 사리 밝고 민첩 체체하옵고 설부요안은 천품이오니 천수를 부러워할까 겨눌 기력은 없사옵니다.

사가(士家)에 태어나서 부도 여공을 익히고 배운 바는 이름 석 자 문안문, 여우 언문 익혀 쓰고, 열녀전 떼면 학문은 족하다 하셨나이다. 아녀자가 학문하면 기구해진다 하오셨는데 학문 익히지 못한 몸 시앗보고 공규(空閨)를 지킨 지 하 오래이오니 선인들 말씀은 거짓이오잇가.

송도집 진이의 높은 학식을 잡기라 할지라도 자즈러진 가무 현악 하오며 찌르는 듯한 재치를 따라가지 못하오니 지아비 마음을 그와 어찌 겨누어 차지할 수 있겠사오리잇가. 마음을 암담하게 아프게 던져 버리오니 남이 현숙하다 하더이다.

한무숙, <이상종의 아내>

 한무숙문학관

www.hanmoosook.com 문의 02-762-3093

 

한무숙문학관 내부 응접실에는 작가가 생전에 쓰던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장왕록 영문학 교수, 노벨상 수상자 펄벅(Pearl Comfort Buck) 여사, 한무숙(1964년)

 

이제는 아득하게만 생각되는 50년대 말 아직 학교에 다닐 때 혜화동에 있는 한무숙 여사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 송영택 형의 제의에 의해서였다. (중략) 한무숙 여사는 물론 몇 안 되는 당대 유수한 여류 작가였고, 《역사는 흐른다》의 작가로서 명성이 높았었다. (중략) 우리가 찾아갔을 때 한무숙 여사는 듣던 바대로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맞아 주었는데 미당이 얘기했다던 '마담 델리카'란 말을 실감시켜 주었다. (중략) 한 여사는 가슴을 앓던 시절에 읽은 체호프를 얘기하고 투르게네프를 얘기하였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처녀지>, <연기>, <귀족의 검>, <그 전날 밤> 등등. 투르게네프의 표제 자체가 그대로 시가 되는 탓도 있지만 부지중에 어떤 정서적 감염을 경험하였다. 한 여사는 또 토마스 만을 얘기하였다. <토니오크뢰거> - 그러자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50년대 말 명륜동댁의 서가에 꽂힌 책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책이 있었다.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토마스 만이 쓴 <파우스트 박사>의 일역판이다. 그것은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인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당시 신간이었다는 것과 내 자신이 몹시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는 것과 연관된 것이라 생각된다.

<작품 해설-삶의 진실과 슬픔>, 《한무숙 문학전집 6-감정이 있는 심연》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