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5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남진우 시집
2006,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3411
811.6
남78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봄날 뻐꾸기가 울고 있다. 가까운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도시의 소음 탓이거나 분주함 때문이리라. 잘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건물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리가 늘 내 귀를 채우고 있다.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라진다 해도 실내의 TV 음향이나 오디오의 음악,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내 몸을 가로지르며 흘러다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는 일에서 풀려나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뻐꾸기는 운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무심코 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던 나는 한 순간 전신이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뻐꾸기는 나를 삼키고 내가 있던 공간을 삼키고 이윽고 우주 전체를 삼켜 버린다.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오직 뻐꾸기 울음소리만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 몇 초 정도 지속된다…… 무중력 상태의 공간을 비행하는 느낌이 이럴까…… 그 소리에 잠겨 있으면 내 몸이 깊은 우물 속으로 한없이 낙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열기구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지상을 굽어보며 광막한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한동안 뻐꾸기 소리에 빠져 있다가 슬며시 놓여 나온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내 의식은 내 몸이 속한 공간에 닻을 내린다. 여전히 내 곁엔 아무도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에서 한가로이 뻐꾸기가 울고 있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고요의 밑바닥에서 내 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 울고 있는 뻐꾸기. 내 몸을 들락날락하는 저 소리를 징검다리 삼아 한 시절 건너가면 거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시인 남진우는 196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현재까지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시집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 자를 위한 기도』『타오르는 책』이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서 시인은 낯선 것과의 조우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낯선 것들은 사자, 악어 같은 짐승이기도 하고, 식물이나 기후,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낯선 것들의 정체는 우리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미지의 세계의 한 자락이면서, 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또한 이 세계 안에 있는 타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부이면서 영원히 타자이기도 한 죽음과도 같은 잠처럼.
시인의 말
그물을 거둔 자리
물고기는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다
은지느러미를 빛내며
수많은 물방울 사이 잡히지 않는
말들의 뒤채임
2006년 여름
남진우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모자 이야기 / 꿈 / 여우 이야기 / 저수지의 개들 /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 겨울잠 / 먼 산 먼 길 / 종일토록 / 열대야 / 저 석양 / 계단 오르기 / 들소떼와 춤을 / 버섯들 / 소음 / 어부의 꿈 / 봄의 幻 / 도서관 유령 / 전갈에 물리다
제2부
낮잠 / 오래된 정원 / 조등 / 달의 물 / 소금별에서의 일박 / 베니스에서 죽다 / 문밖에서 / 환절기 / 우물 이야기 / 번개 치는 밤의 기록 / 일식 / 그가 보고 있다 / 오늘도 무사히 / 오후 세 시의 예감 / 어머니 /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 생은 다른 곳에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 / 눈 내리는 날 / 겨울 일기 / 그런 날 / 선인장 / 모래알과 마른 풀들 사이 / 겨울 아침
제3부
일식 / 金宗三 / 축제는 계속된다 / 오래된 사원 / 앙코르 / 반얀나무 아래 / 몽생미셸 / 오후 세 시의 추억 / 카타콤 / 경을 찾아서 / 정거장에서 / 오래전 길을 떠날 때 / 저녁 산책 / 연가 / 멍키 템플 / 수목한계선 / 독서
해설 | 열세번째 사도의 슬픈 헛것들 · 신형철
저수지의 개들
비 내리는 밤
저수지 밑에서 개들이 짖는다
흙탕물 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음소리
긴 혀를 늘어뜨리고
두 눈에 푸른 불을 켠 개들이
발톱으로 서로의 목줄기를 찢으며 짖어댄다
짖어댄다 소용돌이치는 저수지 밑
진흙탕을 달리며
일찍이 지상에서 쓸려 나가
저 어두운 물속에 갇힌 온갖 소리들이
물결과 물결 사이
허연 잇자국을 드러내며 거품을 뿜어댄다
물에 붙은 주검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면 위
부우연 숲 그림자를 흔들며 번져가는 울음소리
밧줄을 내려주어도 저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오직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짖어댈 뿐
일렁이는 수초 사이에서 뒤엉켜 싸우면서
저들은 밤새 금 간 제방을 물어뜯는다
우리가 버린 말
우리가 욕하고 더럽히고 깨트린 말들이
폭풍우 치는 밤
저렇게 어두운 물 밑에서 하염없이 짖어대고 있다
모자 이야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 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지금
목마른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에 와 있다
어둠에 잠긴 사방
시계 뚝딱거리는 소리
잠자리에 누운 내 심장에 와 부딪치고
창 가득히 밀려온 밤하늘엔 별 하나 없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타오르는 사자의 커다란 눈이 내 눈에 가득 차고
사나운 사자의 앞발이 내 목줄기를 짓누를 때
천둥처럼 전신에 와 부딪는
시계 뚝딱거리는 소리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두운 복도 저편
막 사라지는 사자의 꼬리가 보인다
소음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 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별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딛어서는 안 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먹구름처럼 모여드는 벌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소용없다
내가 건드리기도 전에 한 모금 꿀을 맛보기도 전에
별들이 달려와 나를 쏘아댄다
아픔이 환희처럼 온몸에 번져갈 때
꽃가루를 모으던 닫힌 입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쉴 새 없이 붕붕거리며 어서 쏴버려
쏘아버리라고 말한다
벌들에게 쏘이며
나 또한 입가에 힘을 모으고
최후로 마지막 침을 날린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거대한 말벌을 향해
벌이야
벌이라니까
열대야
1
연립주택 뒤 베란다에
악어떼가 살고 있다
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항아리
그 속에 숨어서 은밀히
우리를 엿보며 익어가고 있다
뚜껑을 열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한입에 우리를 집어삼킨 악어떼가
간장 위를 둥둥 떠다니며
짜디짠 열대 바다를 꿈꾸고 있다
2
수도관을 타고
연립주택 천장으로 벽으로 쓸려 나오는 악어떼
변기에서 욕조에서 장롱 서랍에서 쏟아지는 악어떼
이불을 들추면 싱긋 웃고 있는 악어떼
잠자는 우리 머리맡을 기어다니며
악어떼가 노래 부른다
커다란 입을 길게 찢으며 악어떼가
밤새도록 웅웅거린다
깊어질수록 끓어오르는
열대야를 헤집고 이 밤
악어떼가 행진한다
3
내 살을 뜯어먹고
냉장고 속을 노략질하고
거실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갔다가
구겨진 신문 상단에 웃고 있는 정치가의
입을 통해 기어나오는
저 시커먼 악어떼
흐릿한 눈으로 나를 굽어보며
이제 잠들 시간이라고
마음 놓고 꿈에 빠져들라고 속삭이는
악어떼악어떼악어떼
잠 못 이루는 밤
연립주택 베란다 유리창마다
불길이 치솟아오른다 타오르는 악어떼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버섯들
우기 지나
민달팽이 기어가는 연립주택 계단과 벽면에
축축하게 돋아나는 버섯들
은밀히 어둠을 밀어올리고
지난밤 꾸다 만 악몽처럼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르며
작은 틈새로 이마를 내미는
버섯들
벗지 못한 몸들이 뒤척이며 돌아누울 때
땅 위로 한 웅큼
식인종의 머리처럼 솟아나는
저들이 좁은 땅을 먹어치우며
집 안으로 쳐들어온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여기저기 종기를 퍼트리고
축축한 진물을 흘리며
버섯이
거대한 버섯이
뭉개구름처럼 피오오른다
지하철이 굉음을 울리고 지나간 다음의
텅 빈 적막 속
버려진 연립주택 단지 위 하늘로
자욱하게 번져가는 버섯들
겨울잠
반달곰 한 마리
가슴에 반달을 안고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반달이 떠 있고
적적한 사방
바람이 쓸고 가는 소리에 웅웅대는 항아리
반달곰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적마다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고
눈은 내려 숲과 들을 하얗게 뒤덮는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반달곰의 꿈도 깊어가고
눈밭 한가운데 놓인 항아리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둔 밤 달에서 녹아내린 고드름 한 방울
항아리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
겨울잠을 자던 작은 곰은
부스스 일어난다
잠시
머리에 맺힌 달빛을 쓸어보는
반달곰 한 마리
아주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불어가는
바람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다
항아리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세상을 엿보기 시작한다
종일토록
꽃게 한 마리
거품을 물고 꽃그늘 속으로 기어간다
꽃게 거품에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가 피워내는 꽃들이 바다를 덮는다
툭, 꽃 모가지가 떨어지고
투둑, 꽃게 다리가 부러진다
져 내리는 꽃잎 속에 꽃게 거품이 떠오르고
허공에 뜬 거품마다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 한 마리 바다를 물고
꽃그늘 속에서 기어나온다
한 세월 아득한 꽃 소식 기다리며
갯벌을 건너가는 꽃게 한 마리
어부의 꿈
호리병 속에 갇힌 마인은
말이 없다 잔잔한 바다 양탄자처럼 펼쳐진 하늘
그물을 끌어올린 어부는 잠시
뱃전에서 숨을 몰아쉰다
모든 예언은 거짓이거나 농담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오직 태양뿐
눈부신 빛살에 떠밀린 파도는 묵묵히 밀려왔다 밀려가고
전설을 가늠하듯 어부는 호리병을 치켜든다
어떤 마법이 그를 다른 해안에 데려다줄까
모든 소원이 헛되이 져 내린 뒤
호리병에 담긴 마지막 한 방울 술까지 다 마신 다음
어부는 적막한 해변 낡은 오두막집에
홀로 쓰러져 잠든다
깊고 어두운 꿈속
호리병을 열자
검은 연기와 함께
마인이 솟아오른다. 솟아올라
이제 네 소원을 들어주마 말한다
제발 이 삶 바깥으로 나를 데려가줘
내가 꾸는 꿈이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는 곳으로
꿈속의 호리병이 내게 소원 따윌
명령하지 않는 그곳으로
아득한 바다
양탄자처럼 펼쳐진 하늘 아래
호리병은 사라지고
어부 홀로 텅 빈 그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 석양
1
저녁
내 몸은 푸른 허기로 가득 찬다
바람의 비린내가 맡아지고
손가락 뼈마디에 와 걸리는 녹슨 석양빛이 만져지는 때
오래된 마당 구석 낡은 우물이 들어와 마음 한 켠을 차지한다
내 안에 기숙하던 아픔이 이리도 많아
오늘 이 저녁 만나는 모든 것들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내 갈 길을 묻는다
2
한때 내 속에 살던 노래는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는 텅 빈 우물로 고요하다
푸른 물이 그립다고 간혹 되뇌어보지만
이제 누가 내 속에
제 얼굴을 비춰볼 것인가
춥고 어두운 내 몸속에
간혹 길 잃은 짐승이 빠져 한 줌 뼈로 변한다
내가 길들일 수 없는 길들이
저 먼 세상 어디론가 소리 없이 풀려나가고
길의 끝
마른번개 한줄기 달려가다 멈추는 곳
푸른 허기에 감싸인 채
나는 우물을 굽어본다
지팡이가 돌계단을 치는 소리 들리다 그치고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3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빛
날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깃을 터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아무 맛도 없이
내 몸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라지는
문밖에서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다가왔고
잠시의 맑은 날 끝엔 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즐비한 술집 앞엔 가끔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신문과 전파는 무심히 붐비는 사람 틈새로 빠져나갔고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 갔다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지루한 것들뿐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막막한 세월을
유행 따라 머리 길이를 조절하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지급된 구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누추한 그림자를 끌고서 혀 밑에 쌓인 소금과 재를 맛보며
오래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미 내 삶은 유적지를 적시는 메마른 빗방울이었고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으므로
길 잃은 소녀의 울음도 장님의 호각 소리도
내 깊은 적막을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자객처럼
하나씩 증발해버리는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아침이면 사나운 새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고
저녁이면 어두운 카페에서 낯선 이국 가수의 목소리가
부우연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밤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습경보는 울려 퍼지고
추적자는 문을 두드리는데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베니스에서 죽다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거울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명종 소리를 들으며 하루는 시작되고
만원 지하철의 졸음과 함께 하루는 끝난다
장례식과 결혼식 사이 잠시 나이 든 부모의
생일잔치가 있고 잊혀진 여인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하지만
누구나 하고 깊은 일만 하며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 푸른
정맥을 드러낸 하늘에 주사를 놓고 싶은 날이면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를 꿈꾸고
거기 바닷가에서 나른한 햇살에 취해
홀로 죽는 꿈을 꾸고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매일 아침 매일 저녁 나는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의 내가 내게 무슨 말을 묻기 전에
거울 앞에서 멍하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
지나온 나날의 죄과를 하나하나 고백한다
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
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
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
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푸른 정맥을 드러낸 하늘 눈부신 햇살 아래
나직하게 파도 구르는 소리 들으며
서른여섯 불현듯 죽음처럼 찾아온 졸음에 잠겨들면
모래밭의 한 아이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수평선 저편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작은 기선 한 척
선인장
겨우내 반 지하 방에 갇힌 채
여인은 선인장처럼 시들어간다
물을 주지 않은 살갗에서 버석거리며 모래알이 떨어지는 동안
허공의 낙타떼는 지붕 위에 머물다가
방울을 울리며 떠나곤 한다
철 지난 옷 속에 가시를 숨기고 여인은
주방과 화장실만 오간다
개수대에 쌓인 그릇이 늘어날수록
현관 앞엔 우편물과 신문이 버려진 채 바래어가고
마룻바닥 위 모래 먼지에 낙타 발자국이 찍혔다가 지워진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옆에 두고
여인은 비좁은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잠을 잔다
불타는 천막 속에서 한 남자가 길길이 날뛰다
타 죽어가는 꿈을 꾸며 여인은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신기루처럼 아물거리며
한 때의 낙타가 다가오고 있다
모래 바람이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만삭의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선인장 가시를 입에 물고
여인은 반 지하 방 창문을 노려본다
창밖 수평으로 펼쳐진 마당에 어느덧 봄빛이 번져가고 있다
두 손으로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여인은 낮게 우얼거린다
그 새낀 죽었어, 하지만
나는 너를 꽃피우고 말 거야
오래된 사원
어스름이 내리는 강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물소 한 마리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강 건너 숲 저편
낡은 사원 하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서서히 무너져 가고
나는 끊긴 길 이편에 적막하게 앉아
저녁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해 저물도록 그림엽서를 팔던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노을 속으로 멀어져가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놀던 아이들 소리치며 그 뒤를 따라 뛰어간다
실눈 뜨고 바라보는 강물 위로 부서지는 마지막 햇살
뿔이 긴 소를 타고
저 물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면
거기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을까
저녁이 머뭇대며 내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는 숲 그림자
나는 어느덧 온몸을 휘감아 오르는 나뭇가지 푸르름에 휩싸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사원이 된다
앙코르
아주 멀리
돌의 도시가 떠오른다
해자를 건너 기나긴 성벽을 지나
아득한 전생의 꿈에서 보았던 탑들이 솟아오른다
황폐한 뜨락 저편 웅크리고 있는 땅거미
거대한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줄기와 뿌리를 뻗어 삼키려 드는
사나운 밀림 한가운데
부서지고 무너지고 금이 간 모습 그대로
돌의 도시는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읽을 수 없는 상형문자로 가득 찬 회랑을 돌아서
왕과 승려와 병사들이 차례로 내 곁을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전쟁과 추수를 거듭한 끝에
지금 나 홀로 이 돌의 도시에 남겨진 것일까
벽면에 새겨진 전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왕은 말이 없고
그 바퀴 아래 깔린 용병들의 신음 소리만 아직도 메아리친다
그늘진 사원 한 켠
목이 달아난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 앞에 잠시 고개 숙이고 몇번째인지 모를 생을 헤아리다
어스름에 잠긴 돌의 도시를 빠져나온다
몽생미셸
육지의 끝
썰물 진 바닷가에
조가비처럼 누워 있는 수도원
안개가 걷히면
순례자 대신 장사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영혼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비좁은 계단 사이 어깨를 부딪치며
값싼 지폐와 신성을 교환하기 위해 오간다
수도사의 휴게실을 지나 석회암 기둥의 회랑을 지나
바다를 등지고 멀리 바라보이는 목초지엔
무심히 풀을 뜯는 검은 얼굴을 한 양떼들
하루의 소란이 다 저물고 난 뒤
깊은 밤이 찾아오면 조가비는 비로소 입을 열어
밤하늘 가득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을
제 속으로 빨아들인다
오후 세 시의 추억
갈매기 한 마리
원을 그리며 내 머리 위에서 종일 돌고 있다
삭아가는 폐선 옆에 서서
멀리 난바다에 부서지는 햇살 바라보며 찍은
흑백사진
거기
홀로 선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
점이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돌지 않고
무슨 얼룩처럼 사진에 붙박힌 갈매기 한 마리
눈길을 주는 순간 물결을 일으키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어와
다시 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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