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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7. 10: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 · 김성연 글 / 홍상현 사진

2009, 터치아트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1696

 

816.7

허44ㅅ

 

이 책에 소개한 열두 개의 산책 코스는 서울에 숨결을 불어넣는 문학 속 장소들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각 코스는 대부분 4km 미만의 거리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의 울림이 큰 장소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실제 산책 시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또한 한 코스씩 독립적으로 걸을 수도 있지만 소공동과 종로, 광화문, 정동 일대와 같이 가까운 곳은 저마다의 취향과 일정에 따라 두세 코스를 연결해 걸어도 좋다.

서울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은 도시이지만 문학 작품 속의 정취를 보다 잘 느끼려면 특정한 계절에 길을 나서보는 것도 좋다. 가령, 연세대 코스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친 나무'로 통하는 겹벚나무에 꽃이 피는 봄이나, 신록이 만발하는 초여름에 걸으면 좋을 것이고, 산등성이에서 서울을 굽어볼 수 있는 남산길은 청명한 가을날이 좋겠다. 다정한 이와 함께라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성북동을 걸어 보고, 미술관이나 등록문화재 등 볼거리가 특히 많은 정동길은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도 좋다.

 

허병식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현재 계간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성연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연세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상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2005년 이후 세 번의 개인전과 여러 번의 그룹전을 열었고, 2008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일러스트 하세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나와서 프랑스 아를르 국립사진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이다. 설화나 전설처럼 오랜 옛날부터 깃들어 있던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중요한 장면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연출되었다. 100여 년 전 근대도시 경성에서부터 오늘날의 첨단도시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학을 통해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서울을 들여다본다.

문학이 보여주는 서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같은 모습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무척 낯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문학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좁은 골목길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게 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차 례|

 

|발간에 부쳐|

서울만의 이야기, 서울의 문화자원

 

|책머리에|

서울을 걸어 문학을 만나다

 

01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 보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08 부암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부록|

인용 작품의 작가 약력

 

01 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새로 지은 신관과 리모델링을 거친 본관이 함께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관이 바로 옛 미쓰코시백화점이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중략)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 <날개>

신세계백화점 본관

1930년에 완공된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꼬시백화점 건물이었던 본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재로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내부 인테리어의 현대적 감각을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앙계단을 그대로 보존하고, 옥상정원을 재개장하여 방문자 휴게시설과 조각물을 배치했다.

영업 시간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미8군 PX 아래층은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이 한국물산 매장으로 되어 있어 그 경영은 한국인 위탁업자들이 맡아 하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해먹을 것이 궁색한 전쟁중이라 그 위탁 판매장 맡아하기도 웬만한 빽이나 수완 없인 어림없다는 게 최사장의 말이었고 앞을 다투어 갖가지 업종--수예품, 유기그릇, 대그릇, 고무신, 피혁제품, 귀금속--이 다 들어앉은 뒤에 엉뚱하게도 밑천 한 푼 안 드는 초상화 간판을 들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상술이 아니라는 게 최사장의 자부였다.(중략)휘황한 아래층 중앙부에 초상부를 차리고(중략)환한 조명 속에 펼쳐진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박완서, <나목>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 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예쁘군요."

그들에게는 좀 허풍스런 찬사를 보내야 하는 법인데 오후의 피곤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나른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앞에 선 우람한 지아이(GI)는 몸집보다는 민감한 듯했다. 금방 씰쭉해지더니 사진을 나꿔채듯이 제 눈앞에 가져가다 새삼스럽게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제품에 안심이 되는지 다시 입을 헤벌렸다.

나도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군요. 당신은 행운이에요. 물론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셔야죠. 어때요? 이 고운 실크 스카프에다 그리면."

박완서, <나목>

지금은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이용되는 한국은행(옛 조선은행) 건물.1930년대에는 근대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머엉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물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인 전차에 뛰어올랐다.(중략)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제 이대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구보가 또다시 고독과 피로를 느꼈을 때, 약칠해 신으시죠 구두에, 구보는 혐오의 눈을 가져 그 사내를, 남의 구두만 항상 살피며, 그곳에 무엇이든 결점을 잡아 내고야 마는 그 사내를 흘겨보고,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나의 구두를 비평할 권리가 그에게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리에서 그에게 온갖 종류의 사물을저주하고 싶다. 생각하며, 그러나, 문득, 구보는 이러한 때, 이렇게 제 몸을 혼자 두어 두는 것에 위험을 느낀다. 누구든 좋았다. 벗과, 벗과 같이 있을 때, 구보는 얼마쯤 명랑할 수 있었다. 혹은, 명랑을 가장할 수 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국가 중요문화재인 사적 제280호로 지정된 한국은행 건물은 1907년 착공되어 1912년부터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건물은 국내외 화폐문화의 역사와 한국은행의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잇으며 이곳에서는 화폐제조와 관련된 실물자료 및 영상자료를 접할 수 있다.

관람시간 화~일요일, 10:00 ~ 17:00

휴관일 월요일, 공휴일, 근로자의 날, 12월 19일 ~ 다음해 1월 2일. 공휴일(설날 및 추석연휴 제외)이 토요일, 일요일인 경우에는 개관.

문의 02-759-4881, 4882, 4061 | http://museum.bok.or.kr

 

참 요사이 무슨 좋은 일 있소. 맞은편의 경성우편국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구보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니-- 돌아보는 벗의 눈에 피로가 있었다. 다시 걸어 황금정으로 향하며, 이를테면, 조그만 기쁨, 보잘것없는 기쁨, 그러한 것을 가졌소. 뜻하지 않은 벗에게서 뜻하지 않은 엽서라도 한 장 받았다는 종류의…….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날 경성우체국 앞에서 구보씨는 벗으로부터 받는 엽서를 떠올렸다.

오늘 포스트 타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 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이십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뻔했습니다.

이십팔 관, 하고도 육백 몸매……!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이년을 데리고 진고개로 산보를 갔다가 경성우편국 바로 뒷문 맞은편, 아따 무어라더냐 그 양약국 앞에 놓아둔 앉은뱅이저울에 올라 서본 결과, 춘심이년이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우'자 쓴 벙거지 쓰고 감장 홀태바지 저고리 입고 가죽 주머니 베고 문 밖에 와서 안중문을 기욱이욱하며 '편지 받아 들여가오. 편지 받아 들여가오' 두세번 소리하는 것은 우편 군사라. 장팔의 어미가 까마귀에게 열이 잔뜩 났던 차에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질부등가라 깨어지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우편 군사에게 까닭 없는 화풀이를 한다.

"왠 사람이 남의 집 안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보아? 이 댁에는 사랑양반도 아니 계씬 댁인데, 왠 젊은 녀석이 양반의 댁 안마당을 들여다보아?"

(우편군사)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 아오. 어디 말 좀 하여 봅시다. 이리 좀 나오시오. 나는 편지 전하러 온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소."

(부) "여보게 할멈, 자네가 누구와 그렇게 싸우나. 우체사령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니 미국서 서방님이 편지를 부치셨나베.

어서 받아 들여오게"

(노파) "옳지, 우체사령이로구. 늙은 사람이 눈 어두워서……어서 편지나 이리 주오. 아씨께 갖다 드리게."

이인직, <혈의 누>

포스트 타워(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 타워는 정보소통 장소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시민들의 휴식과 체험을 위한 다양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1층 앞마당에 우정원이란 개방형 문화공간을 만들었고 보행자 광장을 조성했다. 또 11층에는 직원과 방문객을 위한 쉼터인 구름 카페와 도시의 정원, 간이 주방 등을 만들었다. 옛 중앙우체국 내에 있던 우정박물관은 2004년 충청남도 천안으로 이전했다.

 

'그러면 우선 비행기 회사에 들러 형편이나 알아볼까……'

이인국 박사는 캘리포니아산 시가를 비스듬히 문 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그는 스프링이 튈 듯이 택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도호텔로……"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전광용, <꺼삐딴 리>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아저씨를 따라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로오즈가아든으로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 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오십 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이왕직 악대의 음악 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조선호텔

1914년 10월 10일 환구단 자리를 헐고 개관한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철도호텔로 불리던 당시 조선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댄스파티' 등 서양풍 문화를 선도한 서양식 호텔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나인스 게이트'의 유리창 전면으로 환구단이 보인다. '나인스 게이트'의 뜻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 외에 아홉 번째 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문의 02-771-0500 | www.echosunhotel.com

 

환구단(원구단)

사적 제157호.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만들어졌다. 남별궁이란 태종의 둘째딸 경정 공주의 궁으로 작은 공주가 거처하는 마을이라 하여 일대가 소공동(小公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남별궁 터에 환구단만 남아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했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돌북)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환구단 건물 뒤로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인다. 조선 최초의 호텔이었던 이곳에서 근현대 소설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졌다.

 

덕기는 회피하듯이 이런 소리를 하며 전찻길로 나서자,

"대관절 어디로 갈텐가?"

하고 저녁 먹으러 갈 데를 의논한다.

여기는 황금정 이정목이다.

"타지 말고 좀더 걷세. 본정 삼정목까지."

"어딘데?"

"좋은 데를 하나 발견하였네. 값싸고 스테키나샨(썩 말없는 미인)이 있고…… 그런데 자네 너무 놀라 자빠졌다가는 큰일일세."

"왜?"

"왜든 가보기만 하세그려."

두 청년은 본정통으로 하여 꼽들었다.

염상섭, 《삼대》

명동의 상징적 공간, 명동성당.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곳이며, 때로는 약자를 보호해 주었으며, 한때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명동성당

사적 제258호. 한국 가톨릭의 대표 성지이며 1898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종현성당, 명동 천주교당이라고도 불렸다. 지하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명동성당에는 1880년대 이래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어 《경향잡지》, 《경향신문》 등이 간행되었고 한국교회의 출판문화를 선도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의 02-774-1784 | www.mdsd.or.kr

 

사오 일 동안 청음이 고루지 못하던 천기가 이날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고 석양에 이르러는 고운 비로 쓸어낸 듯이 구름은 흩어지고 청량한 월광은 동편 하늘에서 얼굴을 나타내는 때에, 더위를 쫓는 서풍은 서서히 불어 사람의 가슴까지 서늘하다. 길가에 손도 없는 빙수집의 주렴은 한가히 바람에 움직일 뿐이요, 종현 천주교당의 뎅뎅 치는 종소리는 지금 오후 여덟 시를 보하는 때라.

조중환, 《장한몽》. 1913, 《매일신보》(《한국신소설전집 9》, 을유문화사, 1968)

 

송빈이의 마음은 무엇에나 의지부터 하고 싶었다. 송빈이는 하루아침 다섯 시에 일어났다. 아침 미사종이 울리기 전에 천주교당으로 올라왔다. 처음보는 데다, 거의 남산 중턱 만큼이나 높은 지대여서 장안이 눈 아래 즐비하게 깔린다. 교당은 가까이 와보니 높으다는 것보다는 것보다는 장엄한 편이다. 서울의 여명은 먼저 이 교당 첨탑에 비치는 것이며, 좌우 남하의 홍예문들은 거기가 곧 천국에 들어가는 문처럼 위엄스러웠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대경성도시계획을 압둔 서울은 모든 현대문명의 호화와 정수를 한데 모와 '문화경성'의 면모를 널리 세상에 빛내려고 함이 작금의 대경성의 외관이다. (중략) 이러한 서울이라 그리 놀라울 것은 없으나 우리들의 시선을 모으게 할 또한 커다란 '뉴스' 하나가 생겨지고 잇음이 사실이다. 바로 장소는 대경성에서도 심장이라고 할 만한 명치정의 십자로점. 시간의 여유 있는 분은 한번 그리로 가보면 알리니 그 곳에는 삼목합명회사의 청부로 진행 중에 있는 커다란 공사장 하나이 언뜻 눈에 띄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머지않아 우리들 눈 앞에 황홀 찰란하게 나타나게 될 영화예술의 전당이다.

《삼천리》

2009년 새단장을 마치고 명동의 상업적 중심지에 새롭게 문을 연 명동예술극장.

이 지역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예배당? 정옥이 걔가 예수 믿던가?"

"아, 믿던가가 뭐야? 수표교 예배당엘 벌서 삼사 년이나 두구 댕기는데… 왜, 점심시간이면, 정해놓구 이 층에만 올라가서 찬송가 나부랭이 풍금치는 거, 입때 구경두 못했니?"

"글세, 풍금은 더러 치더구먼 두…… 그래, 걔가 수표교 다리 근처서 사나?"

"바로 수표 다리 골목 안인가 보더라. 왜, 맘이 있니?"

"맘은, 무슨……."

"맘이 있거든 지금이래두 찾어가 보렴. 수표 다리에 가서 곰보미장이 집이 어디냐구 물으면 대번 아르쳐줄 테니……."

박태원, 《천변풍경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다.

개발시대에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물의 깊이를 재는 넌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데리고

수표교 하나

내 눈물 속에 평생 잠겨 있어도

 

난 아직 내 눈물의 깊이의

깊이는 재지 못했네

 

돌이 된 내 눈물의 무게도

재지 못했네

정호승, <수표교>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중략)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

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포도송이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관수동 뒷거리

휴지 줍는 똘만이들의 부은 눈길이

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신동엽, <서울>. 1969년 《방황》 창간호에 발표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정현종, <느낌표>

 

내가 잃어버린 구름이

하늘에 떠 있구나

정현종, <내가 잃어버린 구름>

 

산에는 꽃이 피네

꽃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가는 길>

울룩불룩 자연스러운 돌에 소월의 시 <산유화>를 새겨 놓았다.

산책로 한켠에 서 있는 조지훈 시비. <파초우>가 새겨져 있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앞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봐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던고

조지훈, <파초우>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각딸각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 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하윌대로 하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 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갓을 좀 뒤로 잦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의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 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후략)

이희승, <딸깍발이>

문학의 집 서울

전시 시간 월 ~ 토 10:00 ~ 17:00. 문의 02-778-1026 | www.imhs.co.kr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연중 다양한 행사가 열리므로 일정을 확인하고 가면 좋다.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보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루었네

 <경부철도가> (1908, 최남선 작사)

옛 서울역사 내부. 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언젠가 새단장을 마치면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港口)와 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여 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 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 서울역사 3등 대합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나 창문 등에 예전 모습이 남아 있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를 골라서 돌아다니기로 했다.그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코를 다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 보다. 얼른 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룸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한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이상, <날개>

찻집 '티룸'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프랑스식 양식당 '그릴'. 2009년 리노베이션 이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서울역에 내린 성수는 휑뎅그렁한 역사며 아직은 찬 이른 봄의 깐깐한 바람 때문에 으스스 떨었다. 군용 담요로 만든 외투를 걸친 늙은 여자가 '깨끗한 하숙있어요' 했을 때도 그는 아직 그런 썰렁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여자가 다시 '이쁜 색시도 잇어요' 했을 때도 아직 첫 서울이 주는 당혹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성수가 서울에 달라붙기 위해 치른 이런 요행과 불운은 그가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 교정원으로 취직하기까지 무려 열두 번이나 거듭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무수한 서울과 만났다. 종삼과 만나고 르네상스와 만났으며 동대문이나 남대문 그리고 청량리나 영등포와도 만났다.

르네상스에서 만난 그 여대생과 같은 여자들과도 여러 번 조우(遭遇)했다. 그리고 용케도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서울에 남는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요즈음에 와서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서울이 그에게 어떤 의미와 빛깔을 던져 주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다.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한 것 같기도 한 오리무중의 감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안에서 혼자만 쑥죽을 찾아 먹는 그에게 아들놈이 말하는 수가 있다.

"아버지는 그런 풀을 어떻게 잡수세요. 아버지는 촌사람이야."

술 마시면 '타향살이'를 흥얼거리는 자신에게 여편네가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수가 있다.

"당신은 갈데없는 시향민이로군요."

이 말에서, 성수는 서울은 아직도 자기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잠겨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까닭없이 고향에 대한 미안함을 지닌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 눌러붙은 그 많은 촌놈들도 돌아서면 제각기 조금씩의 미안함을 안고 살 것이다. 고향에 대해서.

-끝-

최일남, <서울의 초상>

 

그날 오전, 서울역의 혼잡한 광장에 홀로 남겨졌을 때부터 나는 이 여행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회가 시작된 시간은 그보다 한참 먼저였다. 기차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다소 부지런을 떨었던 아침, 내가 없어도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가게끔 챙겨 둬야 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앞에 두고 느꼈던 전날 밤의 한숨, 그보다 더 앞으로 시간을 돌리면 기차표를 예매하러 나갔던 날의 몽롱함과 회의까지를 다 후회의 페이지에 삽입시켜야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후회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늘 그렇듯이 포기도 쉽게 하지를 못하고 결국 나는 예매한 기차표의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서울역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사이 이 여행을 포기해도 미련이 없을 만한 어떤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중략)

나중에 하나의 여행이 온전하게 소설로 담겨져 나오는 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필요가 먼저였고 소설은 의외의 부산물인 경우에 불과했다. 성실하게 삶을 더듬다 보면 운좋게 주어지는 그런 부산물.

그러나 이번 여행은 삶의 여러 관계들로 야기된 피할 수 없는 길떠남이 아니었다. 망설임과 후회가 그처럼 질겼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거기에서 연유되고 있을 것이었다. 소설이 제대로 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여행을 도모하고 실천하다니,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죽을 듯이 아껴서 써대도 겨우 마감 날짜를 지킬까말까 한 이 화급한 날들 중의 하루나 이틀을  온전하게 내던져 버리다니, 이 도박은 말하자면 벌써 몇 달 째 그랬듯이 이번 달 역시 마감 날짜를 그냥 지나치고 말리라는 뚜렷한 징표로서 제시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소설은, 확률이 높건 적건 간에, 결코 도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양귀자, <숨은 꽃>

 

사실을 말하면 개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약국 앞에 붙은 간이서점을 기웃거리긴 했었다. 읽을 것이 아닌 그저 볼 것, 머리에 입력되지 않고 단순히 눈에만 머물렀다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 그런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읽을 만한 책을 고르지 못하였다. 집에서도 그랬다. 어쩌면 손쉽게 아무 책이나 택해서 손가방 안에 쑥 밀어넣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이번 여행엔 아예 어떤 책도 동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무얼 구할 수 있었다면 왜 여행까지 생각했을 것인가.

(중략)

기차 안에서의 세 시간 동안 내가 만난 글자는 홍익회 판매원의 밀차에 담긴 군것질감의 상표와 앞자리 등받이에 새겨진 피로회복제 광고가 전부였다. 피곤하고 나른할 때 이 물약을 마시면 새 기운이 솟구친다는 광고 문구는 어느 좌석이건 간에 다 흰 천의 등받이에 녹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차 안 이곳 저곳에 내가 찾는 글자가 널려 있기는 한 셈이었다. 그것들의 한결같은 내용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내 눈은 글자를 읽고 뜻을 해독하는 짓을 멈추지 못한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나는 마녀의 주술 때문에 춤을 멈출 수 없이 쩔쩔매는 동화 속의 불행한 공주를 떠올린다. 누구, 이 춤을 멈춰 줄 사람은 없나요?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춤을 춰야 하고 자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춰야 한답니다. 제발, 이 춤을 멈춰 주세요.

양귀자, <숨은 꽃>

옛 서울역사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한다고 한다.

중림동 약현성당은 1998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복원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 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정호승, <약현성당>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전략) 마지막 돌아보는 셈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 왔다. 남대문의 미(美)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간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그 후 피난생활이 맺어 준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된 오랜 객지생활에서도 그때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은 조금도 퇴색함이 없이,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내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서울은 변화하고, 쳐다보고 우러러볼 높은 집도 많았거니와, 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버스에 앉아서도 줄창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는 사이에 남대문에 대한 흥미를 쉽사리 잃어 갔다. 나는 이미 이 고장이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가 지배할 고장이 아니란 걸, 남대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화재로 무너지기 전. 당당한 자태로 서 있던 남대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의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대문 시장. 살아 움직이는 이곳 사람들이 곧 시인이고,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시가 된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잔돈을 두어 두고도 심 원짜리를 낸 것이며, 부청 앞에서 내릴 테면서 정거장까지 간다고 한 것이며가 모두 요량이 있어서 한 짓입니다. 무사히 공차를 탄 윤직원 영감은 총독부 앞에서부터는 춘심이를 앞세우고 부민관까지 천천히 걸어서 갑니다.

"좁은 뽀수 타니라구 고생헌 값을 이렇기 도루 찾는 법이다."

그는 이윽고 공차 타는 기술을 춘심이한테도 깨우쳐 주던 것인데, 그런 걸 보면 아마 청기와장수는 아닌 모양입니다.

종로에서 그렇듯 많이 충그리고 길이 터지고 했어도, 회장에 당도했을 때에는 부민관 꼭대기의 큰 시계가 열두시밖에는 더 되지 않았습니다. 입장권을 사기 전에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 사이에는 또 한바탕 상지가 생겼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더러, 네 형이 출연을 한다면서 무대 뒷면으로 제 형을 찾아 들어가 공짜로 구경을 하라고 시키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심이는, 암만 그렇더라도 저도 윤직원 영감을 따라왔고, 그래서 버젓한 손님이니까 버젓하게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야 말이지, 누가 치사하게 공구경을 하느냐고 우깁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옛날 문화 예술 공연장 '부민관'이었던 곳이 지금은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된다.

 

음악회--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깜빡 잊었다. 첫날 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왓다. 일 년에 잘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코프스키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것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정신이 어디로 팔려 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에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 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 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던 것을…….

김남천, <경영>

고층 빌딩 일색인 서울에서 골목 한 구비를 돌아들면 매력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성당이 있다.

 

그들은 구세군 서대문 본영을 지나 경기고녀와 덕수국민학교 앞을 지나서 광화문으로 나왔다. "약속 있어?" 하고 이홍철 씨가 물었다. "없어." 하고 구보는 대답하였다. "9(나인)에 가 볼까?" "그러지." 9다방에는 소설가 남장우(南丁愚)가 가끔씩 들르는 곳이었다.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미대사관 담과 덕수궁 담이 이어지는 덕수궁길. 왼쪽 덕수궁 담 너머로 궁궐 건물들이 조금씩 보인다.

 

왕이 그녀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한 밤에 왕비는 그녀를 중궁으로 불렀다. 그녀가 프랑스 공사관으로 나가 살기 시작한 지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왕비와 그녀 사이에 커피와 케이크가 놓였다. 왕비는 더 가까이 오라, 하였다. 왕비의 자당의에 녹빛이 감도는 국화매듭의 단작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노리개의 부드러운 술이 눈앞에서 찰랑일 만큼 그녀가 왕비와 가까이 앉기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왕비는 그녀에게 전하께서 왕가의 이씨 성을 하사하신 것은 너를 딸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하였다. 리진은 옥첩지를 단정히 꽂고 있는 왕비의 흰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깊이 머리를 숙였다.

- 그러니 너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 또한 여염집 같으면 여식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같다.

리진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

-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중략)

- 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땀에 젖어가는 그녀의 귀에 흰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 너는 사랑을 얻어 개화된 세상에 먼저 나가는 것이니라, 서러워마라.

리진은 춤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불이 되려 했다.

- 다른 세상에 가서 여태의 족쇄를 플어버리고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 새 삶을 가지거라.

리진은 춤으로 땅이 되려 하고 쇠가 되려 했다.

- 조선의 여인으로 만 길을 떠나는 건 네가 처음일 게야.

신경숙, 《리진》

 

영철은 서대문 턱에서 탓든 전차를 차내 버리고 정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벌서 서양촌이란 노랑 냄새가 풍기고 학교촌이란 푸른 기운이 도는 것 가텃다. 그러면서도 한가롭고 깨끗한 늣김을 주엇다. 이 골목은 장차 오는 조선의 주인공인 남녀학생이 아츰 저녁으로 수천만번 그 힘찬 발자욱으로 다지고 다진 골목이다.

괴로운 바다와 가튼 세상을 다 지나 래세의 천당을 동경하고 땅 우에도 천국을 건설하려는 신남신녀가 찬미 성경을 끼고 묵상하며 종소리를 따라가고 오는 서울에도 이름난 정동골목이다.

이 골목 안에는 조선에 하나요 등대처럼 노피 서서 빗을 내는 여자전문학교가 녀왕처럼 군림하엿다. 마즌 편 음악실에서는 여름이거나 가을이든 봄이든 주야로 요량한 피아노 소리와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가 나뷔처럼 날어 담을 넘어서 지나가는 사람의 고달픈 가슴에도 안기는 파라다이스 골목이다.

방인근, <마도의 향불>

정동의 길들은 원형 분수대를 기점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붉은 벽돌로 지은 외벽과 하얀 창틀이 인상적인 정동교회.

 

"주로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와 찬송소리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창문은 구경꾼들로 메워졌고 제단에 나와 남녀 교인들이 나란히 무릎 꿇고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먹고 마시는 그 거룩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옛 배제학당 건물.

신식결혼, 연애결혼이 처음으로 열린 교회 앞에 다정한 이와 마주 앉고 싶은 벤치가 놓여 있다. 단정하게 놓인 모습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은 이곳이 교회당 앞이기 때문일까.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개관시간 화 ~ 일 10:00 ~ 17:00 문의 02-319-5579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소설 속 윤직원 영감은 정말 이동백 명창과 닮았을까?

 

그 양복신사는 웬일인지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윤직원 영감을 연해 흥미있게 보고 또 보고 해쌓더니, 차차로 호기심이 더하는 모양, 필경은 자리를 옮아 옆으로 바싹 와서 앉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앉아서 윤직원 영감에게 말없는 경의를 표한다고 할까, 아무튼 몹시 이야기를 붙여 보고 싶어하는 눈치더니 마침내,

"이번에 인기가 굉장헌 모양이지요?"

하고 은근 공손히 말을 청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으로 보면 인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니와, 또 낯모를 사람과 쓰잘데없이 이야기를 할 맛도 또한 없는 것이라 거저,

"예에!"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할 뿐입니다.

양복신사씨는 좀 싱거웠던지 잠깐 덤덤하더니 한참 만에 또,

"거 소릴 얼마나 공불 허면 그렇게 명창이 되시나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별 쑥스런 사람도 다 보겠다고 귀찮게 여기며 아무렇게나,

"글씨……나두 몰루."

"헤헤엤다. 괜히 그러십니다!"

"무얼 궈녀언이 그런다구 그러우……? 나넌 소리를 좋아넌 히여두 소리를 헐종은 모르넌 사램이요!"

"괘애니 그러세요! 명창 이동백(李東伯) 씨가 노래헐 줄 모르신다면 누가 압니까?"

원 이럴 데가 있습니까! 어쩌면 윤직원 영감더러 광대 이동백이라고 하다니요!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괘씸하고 창피하고 뭐, 도무지 어떻다고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법이 없어진 오늘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계동 자기네 댁만 같았어도 이놈 당장 잡아 내리라고 호령을 한바탕 했을 겝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판소리 공연이 열리던 정동극장에서는 요즘도 전통예술 공연이 열린다.

 

"(전략)여보 동포들, 들어보시오.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 있거든 황제 폐하 통치하에서 부지런히 빌어먹고 자식이나 잘 가르쳐서 국민의 지식이 진보될 도리만 하시오. 지금 우리나라에 국리민복 될 일은 그만한 일이 다시없소. 나는 오늘 개혁하신 황제 폐하의 만세나 부르고 국민 동포의 만세나 부르고 죽겠소."

하더니 옥남이가 손을 높이 들어,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국민 동포 만세, 만세, 만세!"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데

(후략)

이인직, <은세계>

고종의 도서관이었던 중명전. 지금은 정동극장 뒤에 옹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곳도 덕수궁 경내였다.

 

태평통(太平通) 쪽을 향하여 정동(貞洞) 골목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노동자는 건극문(建極門) 앞에까지 와서--그냥 건극문, 하면, 아는 이가 드물 게다.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덕수궁(德壽宮) 돌담을 끼고 정동 골목을 쑤욱 들어가노라면 아니 경성지방법원 맞은편짝에 있는 것은 용강문(用康門), 거기까지 가지 말고 바른편에는 전등 달린 전신주, 오른편에는 전등 안 달린 전신주 그 사이에 음침하게 울적하게 닫혀 있는 문이 바로 건극문이다.

(중략)

경성지방법원 앞까지 와서, 본래 같으면 이화학당(梨花學堂) 앞을 지나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것을, 그러나 오늘 밤은 조금 전의 행동화(行動化)할 수 없었던 그 흥미 있는 감정도 도와, 그 둘은 기약지 않고 좀더 은근한 방송국 넘어가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난 이 길이 좋아, 여기하구, 원남동 신작로하구."

갑자기 여자는 꿈꾸는 듯이 또 자못 감격을 금할 수 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한 거리는, 딴은, 남녀가, 특히 밤늦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참말, 모레 돌아가시렵니까?"

이화여고보의 긴 조선담--

"네, 그러나 또 며칠 있어두 좋구요."

마침 지나는 이화여고보 정문에 달린 외등을 쳐다본 여자는, 혹은, 남자나 마찬가지로 그 밝음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른다.

또 긴 담을 끼고 가면서,

"너무 오래 계시면, 아버니께서 걱정 하실까?"

정동 13번지, 양인의 집 외등에는 전구가 없었다. 까닭에 그 맞은편 전신주에 달린 전등은 그들에게는 좀더 원망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마침내 그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정문 앞에까지 왔다. 역시 전신주에 달린 전등이, 또 맞은편 노서아 영사관의 외등이, 남자를 잠시 주저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이 골목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절망임을 아는 그는, 용기를 내어 여자를 이화여전 정문 지붕 밑으로 이끌려 하였다.

박태원, <애욕>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고목 옆에 남아 있는 한식 교문.

 

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舍監)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중략)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 레터'였다. 여학교 기숙사라면 으레 그런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이지만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날아 들어왔었다. 기숙생에게 오는 사신을 일일이 검사하는 터이니까 그 따위 편지도 물론 B여사의 손에 떨어진다. 달짝지근한 사연을 보는 족족 그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편지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낸다.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영신이란 여자를 한 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닥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굴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릿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었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 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같으나 피봉 뒤에는,

'XX여자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심훈, <상록수>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앚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링술로

 

눈이

오는데

예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貞洞

聖미하엘 鐘樓가 보이는데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속에 돌층계가 잠드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서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지평선이 멀리 저문다.

박목월, <廢園>

이화여고 박물관은 옛날 여학교 교실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얼마나 우줄대며 다녔었나

이 골목 정동 길을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게는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 침침한 속에서

온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 소리

피아노 소리 분수와 같이 눈부시더라.

 

그 무렵

나에게는 사랑하는 소녀 하나 없었건만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음악소리에 젖는 가슴 위에

희망은 보름달처럼 둥긋이 떠올랐다.

 

그후 20년

커다란 노목이 서 있는 이 골목

고색창연한 기와담은

먼지 속에 예대로인데

지난 날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그 피아노 소리조차 들을 길 없구나.

장만영, <정동 골목>

손탁호텔 터 표석.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예전 손탁호텔이 있었다.

새로 지은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5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략)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중략)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 <거대한 뿌리> 1964. 2. 3

옛 러시아 공사관 탑. 역사책에 나오는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상한 고층 건물과 좋은 외관은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이다. 세 번째 건물은 약간 한국식 건축 양식이었는데 모양은 초라했다. 이들은 미국 감리교회와 미국 장로회파교회와 함께 회의소와 공장의 복합 주거지였는데, 그 위치는 다소 낮은 곳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사벨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저같이 의젓이 그 날개죽지 위에 싣고 잇는 자도 드물다.

 

상하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서정주, <광화문>

광화문 뒤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던 시절의 사진. 여러 차례 소실되고 재건되고 자리까지 옮겨진 광화문은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원래 경복궁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할머니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꽤 오래전부터 정규적으로 경복궁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여러 번 경복궁에 가 봤다.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에는 항상 졸병 네 명과 좀 높은 군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의 냉랭한 기세가 아니더라도, 군인들이 괜히 문 앞에 서 있을 리 없으니까 사람들은 언감생심 아무도 경복궁에 출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군인들 옆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 이어지는 돌담길을 계속 따라가면 청와대에 이른다.

 

그해 1936년 가을 威亨洙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려내게 되었다. 그때 내가 기초한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들을 합해 이르는 한 심포니를 만들어보려 했던 만큼, 동인들의 정신지향은 자세히 보면 여러 갈래였지만, 사람의 기본 자격 그것을 주로 생각한 점에서는 누구나 모두 일치했던 것으로 본다. 이 기본자격을 향한 짙은 향수, 기본자격을 박탈당하는 이들의 울부짖음과 몸부림, 이 기본자격을 향한 벅찬 질주, 이런 것은 이 때 우리들에겐 한 불치의 숙명처럼 되었던 것이다.

서정주, <천지유정>

밑동만 남은 통의동 백송을 초록 담쟁이가 뒤덮고 있다.

 

사라지기 얼마전 인사동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어쩜, 나무들도 생각을 한대. 나무가 하는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 않어?"

그리고 통의동 백송과 조계사 회화나무를 보러가자고 했었다. 나무가 만약 생각을 하는게 사실이라면 그건 사랑에 대해서일 것이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자칫하다가는 겉핥기 대꾸로 들릴까 봐서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우선 짝짓기를 위한 일차적인 사랑이 있었다. 목숨을 받아 태어난 어떠한 미물일지라도 짝짓기 행위는 눈물겹도록 놀라운 것이었다. 미물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식물도 알고 보면 번식을 위해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은 인간이 보고 즐기라고 피는 것이 아니며, 맛있는 열매는 인간이 먹고 즐기라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은 '나무의 사랑'은 일차적인 사랑만은 아니었다.

윤후명, 《무지개를 오르는 발걸음》

작가 이상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를 상가건물이 대신하고 있다. 저기 효자서당에서 혹시 이상의 시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래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뚤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烏瞰圖) - 시제1호(詩第一號)>

노천명이 살던 집. 오래된 집이지만 정겹고 단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오늘은 음력으로 며칠이나 되는지, 달이 밝다. 선선한 바람이 더운 이마를 및어준다. 끈적끈적하는 -좀 이상스러운 말이지만- 북경성(北京城)의 빈민촌인 이곳 누하동(樓下洞)에도 여름 저녁의 기분은 농후하다. 나는 이 이상 더 쓰기 싫다. 달이나 보자. 달이나 쳐다보다가 그리운 사람의 생각이나 하여 보자.

김기진,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

윤동주 시인이 잠시 몸을 의탁한 하숙이 있던 곳.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詩)>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에서

살았다. 종점근처의 쓸쓸한

하숙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 5장을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왕산은 해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덩어리 어둠에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

그런 밤일수록 눈물은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이제 두번 생각하지 않으리라.

효자동을 밤비를 그 기도를

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강바닥

달빛이 어리고

서글픈 편안이

끝없다.

박목월, <효자동>

청와대 영빈관 옆에 옛날에는 효자동 전차종점이 있었고, 이곳에서 출발한 전차는 태평로를 지나 마포종점에 도착하였다.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처럼 일어나 이 새피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의 의지……

신동엽, <아사녀> 부분.

 

수업을 끝내고 학교를 나서서 효자동 쪽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어.

곧장 집으로 갈 것을 호기심 때문에 일부러 그쪽 길로 들어섰던 것인데,

갑자기 어디선지 총소리가 들려오고 내가 빠져나가고 있는 골목길 앞쪽에서

사람들이 왁 하고 쏠려나오는 거야. 중3때 일이었으니까 안다고 해도 내가

뭘 얼마나 알았겠어? 형세가 하도 급하고 곧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

무서워져서 돌아서자 나도 딴 사람들처럼 무작정 뛰었어.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곁엣사람들이 하는 대로 아무 집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이제하, <자매일기>

 

영훈들은 달려서 적선동을 지나간다. 그의 스크린은 대열의 맨 앞장을 서고 있다. 그는 함성과 스크럼을 낀 옆 친구의 팔에서 느껴지는 열과 최루가스의 따가운 자극과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총성으로 정신을 잃은 듯이 효자동으로 달려간다. 드디어는 그의 스크럼이 깨어진다. 거기서부터 그는 구렁이처럼 길을 가로막는 기다란 하수관을 보고, 역진하는 전차를 보고, 불에 타는 소방차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와 혼주(混走)와 달리는 지프와 태극기와 그리고 펄럭이는 흰 가운자락을 본다.

이청준, <가수(假睡)>

 

효자동 낡은 중국집에 앉아

짜장면을 시켰다.

추억을 많이 갖고 사는 것이 부자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우리들의 옛 동네 효자동에 와서

짜장면을 시켜 놓고 다꾸앙에 춘장을 찍어 먹으며

모서리가 깨어진 가난한 추억을 꺼내 보았다.

삼일당에 걸렸던 이승만의 휘호는

4 · 19 때 성난 학생들에게 뽑혀 나갔고

탱크가 중앙청 앞에 버티어 선 후

청와대보다 낮게 낮게 지은 건물에서는

노오란 빗물이 새고 있었다.

 

칠궁 옆에 영비가 세운 진명학교는 이제

앞서 간 불꽃 나혜석의 그림도

노천명의 슬픈 시도 없이

낯선 신시가지 찾아 떠나갔고

빈 운동장엔 수십대의 자동차가

그녀들의 추억 위에 음흉한 괴물들을

주차시키고 있을 뿐……

팅팅 불어터진 짜장면을 쑤시다가

도난당한 추억을 어디에다 신고해야 하나,

근처 청와대를 잠시 떠올려 보다가

우리들은 말없이

낡은 중국집을 나왔다.

문정희, <중국집의 추억>

청와대 관람

관람운영일 매주 화 ~ 토요일(토요일은 10인 이하의 개인 / 가족에 한함)

신청대상 초등학생 이상(미취학 자녀는 가족 동반시 관람 가능)

관람시간 10시, 11시, 2시, 3시

집결장소 경복궁 동편 주차장 내 만남의 장소(관람시간 20분 전까지, 신분증 지참)

신청기한 관람희망일 10일 전까지

신청방법 홈페이지 내 관람 창으로 신청(노약자는 우편신청 가능), 사전예약 필수

셔틀버스 수시운행 중. 개인 및 가족단위 관람객에게 지원되며 단체 관람객은 만남의 장소에서 인원 점검 후 타고 온 차량을 이용해 바로 출발

관람문의 02-730-5800(ARS 음성안내), tour@president.go.kr

청와대 홈페이지 www.president.go.kr/kr/cheongwadae/viewing/guidance.php

 

 

 

 

posted by 황영찬
2013. 9. 13. 14:2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0 물고기 마음

 

루시드 폴 지음

2008, ANTENNA BOOK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4352

 

811.6

루58ㅇ

 

루시드 폴  조윤석

                         가수, 작사 · 작곡가, 공학자

 

1975.    3월. 서울 생

1982.    부산으로 이사

1999.    서울대 화공과 졸

2004.    스웨덴 왕립공대 재료과학 석사(Tekn. Lic.)

2007.    스위스화학회 '폴리머 사이언스 부문' 최우수 논문 발표상

2008.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생명과학 박사

2008.    일산화질소 전달체용 미셸 의료용 물질 미국 특허 출원

 

1993.    제5회 유재하가요제 동상

1997.    밴드 '미선이' 결성

1998.    미선이1집 'drifting' 발표

2001.    솔로 1집 'lucid fall' 발표

2002.    영화 '버스, 정류장' 영화음악 감독

2005.    2집 '오, 사랑' 발표

2006.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싱글상

2007.    라이브 앨범 'Light of the songs' 발표

2007.    3집 '국경의 밤' 발표

 

목차

 

推薦書  유희열

           여는 말

 

미선이 Drifting 1998

Sam

송시

진달래 타이머

치질

Shalom

시간

 

루시드 폴 1집 2001

풍경은 언제나

나의 하류를 지나

은행나무 숲

너는 내 마음속에 남아

해바라기

 

버스, 정류장 OST 2002

머물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장난스럽게, 혹은 포근하게

내 방은 눈물로 물들고

그대 손으로

약속된 사랑

 

오, 사랑 2005

물이 되는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오, 사랑

삼청동

들꽃을 보라

그건 사랑이었지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보이나요?

사람들은 즐겁다

 

국경의 밤 2007

마음은 노을이 되어

무지개

국경의 밤

가을인사

노래할게

날개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kid

라오스에서 온 편지

사람이었네

당신 얼굴, 당신 얼굴

 

기타

세상에서 나는 네가 제일 좋아

파노라마

가네

친구

길 위

투명인간

그대, 모든 짐은 내게

겨울 장마

바람은 차고 우리는 따뜻하니

 

맺는 말

讀後感   이동진

물고기 마음

 

처음 기타를 배우고

내가 보컬을 하게 될 줄 나는 몰랐었네.

보잘것없는 목소리에

불안한 음정에

도무지 나는 상상하지 못했네.

 

아주 멋진 노래 하나

그리며 살아가네.

평생을 건 숙명처럼

당신이 허락한다면

당신의 목소리되어

내가 이렇게 노래하려 해.

 

우리 같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 시린 마음에 꽃이 필까.

낮고 외롭지만 따뜻한 노래

다시 환한 저 불빛이 될까.

 

헤엄치듯 살아있는 노래소리.

당신 나 물고기 마음.

판이 안 팔리는 세상을

노래가 흔한 세상을

씩씩하게 우리는 노래하네.

 

노래는 나의 빛, 우리 마음의 빛.

찬란한 창공의 빛.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즈막히 부르리.

우리 그리고 나의 노래.

 

 

posted by 황영찬
2013. 9. 10. 14:1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9 전통 건강 음료

 

글 / 한국의 맛 연구회●사진 / 배병석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4

 

082

빛12ㄷ  181

 

빛깔있는 책들 181

 

한국의 맛 연구회-----------------------------------------------------------

 

강인희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 한국의 맛 연구회 회장

조후종    명지대학교 교수

이말순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신현희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진원    재캐나다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윤숙자    배화여자전문대학 교수

박혜원    신흥전문대학 교수

허채옥    한양여자전문대학 교수

김귀영    상주산업대학교 교수

김명순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이춘자    수원여자전문대학 교수

 

사진 촬영---------------------------------------------------------------------

 

배병석    88올림픽 문화행사 음식문화5천년전 및 온양민속박물관 유물 촬영 및 도록 발간의 사진작업을 담당했다.

 

그릇 협찬---------------------------------------------------------------------

무역센터    해강도예

곽규진    토리공방

양덕환    경기대학교 교수

 

|차례|

 

전통 건강 음료

전통 음료의 역사

갈수

숙수

청량 음료

    곡물가루를 이용한 음료(미수)

    오미자 국물을 이용한 음료(화채)

    밀수를 이용한 음료

    약재를 이용한 음료

    엿기름을 이용한 음료

    과일과 과일즙을 이용한 음료

    기타

부록

참고 문헌

오미 갈수  오미자 국물과 녹두즙을 각각 따로 만들어 섞은 다음 여기에 꿀을 넣어 신맛과 단맛이 적당하게 될 때까지 뭉근한 불에 달이면 분홍빛의 오미 갈수가 된다.

오과차  오과차는 모과, 대추, 황률, 은행, 호도 이렇게 다섯 과실로 달이는 우리나라 전통 약용차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9. 10. 09:0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8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유홍준 지음

200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06835

 

981.1

유95ㄴ 2 v. 1  c. 2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 우리 국토는 거대한 박물관 유물창고와 같고, 그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문화유산을 말하면서 결코 흘러간 역사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고 오믈이라는 한낮의 밝은 빛으로 조명해냄으로써 우리는 그의 해설에 따라 수천년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장쾌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게 된다.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미술사 등 어느 한 분야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문화유산의 진실을 그는 대맥을 잡아 풀이하면서, 단순하게 씨줄과 날줄로 옷감을 짜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정교한 무늬를 넣어 아름다운 비단옷을 짓듯 우리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솜씨는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새로운 문화창조라고 평가할 만한 것이다.

- 안병욱(성심여대 교수 · 한국사)

 

유홍준의 답사기는 이제까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기행문이나 문화재 해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우리 국토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씌어진 그의 답사기는 정확한 전문적 지식과 명석한 양식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낱낱 유물의 형태상 특징과 아름다움, 내용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것을 창조한 인간의 이야기, 더 나아가 그것이 지닌 현제적 의의까지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감동과 놀라움 속에, 때로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전통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 윤용이(원광대 교수 · 미술사)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널린 민족치고는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스스로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남달랐다고 하기 어렵다. 전란으로 없어져버린 것도 많고 특유의 낙천성으로 물건 간수에 신경을 덜 쓴 까닭도 있지만, 아무래도 생활이 곤궁하고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는 통에 공부와 살림을 제대로 못한 탓이 큰 것 같다. 이런 판국에 유홍준이처럼 입심 좋고 글솜씨 좋고 먹성 좋고 눈썰미 사납고 꽤나 극성맞기도 한 연구자 겸 평론가를 만난 것은 여간한 복이 아니다. 이 '답사기'가 독서계에 한바탕 바람을 일으키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윤산의 보물들이 두고두고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백낙청(서울대 교수 · 문학평론가)

 

지은이 유홍준(兪弘濬)은 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였으며,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을 수료하였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부문으로 등단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히였다.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1986, 열화당), 편역서로 『미학에세이』(1988, 청년사), 번역서로 『회화의 역사』(H. W. 잰슨, 1984, 열화당) 등이 있으며,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비평」 「단원 김홍도 연구노트」 등 한국회화사 관계 논문을 줄곧 발표해왔다. 현재는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차례

 

책을 펴내면서  국토박물관의 길눈이

 

1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1)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월출산 / 도갑사 / 월남사터 / 무위사 / 남도의 봄

 

2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2)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

해태식당 / 영랑생가 / 구강포 귤동마을 / 다산초당

 

3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3)

세상은 어쩌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만덕산 / 백련사 / 녹우당 / 윤고산 유물전시실 / 대흥사 유선여관

 

4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4)

일지암과 땅끝에 서린 얘기들

두륜산 대흥사 / 일지암 / 미황사 / 땅끝

 

5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1)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상)

내포평야 / 수덕사 대웅전 / 정혜사 불유각 / 수덕여관

 

6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2)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하)

남연군 묘 / 보부상 유품 / 해미읍성 / 개심사

 

7 경주(1)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첨성대 / 황룡사 구층탑 / 삼화령 미륵삼존 / 감실부처님 / 여근곡

 

8 경주(2)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감포가도 / 대왕암 / 감은사탑 / 고선사탑 / 석가탑

 

9 경주(3)

에밀레종의 신화(神話)와 신화(新話)

성덕대왕신종 / 봉덕사종 이동기 / 후천개벽춤 / 불국사 박정희종

 

10 양양 낙산사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

낙산일출 / 의상과 원효 / 원통보전 돌탑 / 낙산사 그림

 

11 관동지방의 폐사지

하늘 아래 끝동네

설악산 진전사터 / 도의선사 부도 / 미천골 계곡 / 선림원터 / 홍각국사 부도비

 

12 문경 봉암사(1)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상)

희양산 / 봉암사 / 지증대사 부도와 비

 

13 문경 봉암사(2)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하)

정진대사 부도와 비 / 마애보살상 / 야유암

 

14 담양의 정자와 원림(1)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상)

중부휴게소 / 누정의 미학 / 소쇄원

 

15 담양의 정자와 원림(2)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하)

식영정 / 서하당 / 환벽당 / 취가정 / 명옥헌

 

16 고창 선운사

동백꽃과 백파스님, 그리고 동학군의 비기(秘機)

동백숲 / 상갑리 고인돌 / 낙조대 / 칠송대 암각여래상 / 백파선사비 /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부록 답사일정표와 안내지도

도선국사비 / 전설 속의 스님 도선국사의 일대기를 새긴 이 비석은 17세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 규모의 장대함과 조각의 섬세함이 볼 만하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월남사의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이지만 백제양식이라는 지방적 특성이 잘 살아나 있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 다산 정약용

 

무위사 극락보전 / 조선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맞배지붕의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불당의 엄숙성도 유지하고 있다.

극락보전의 측면관 / 기둥과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조화로운 면분할로 집의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

극락보전의 벽화 / 고려불화의 화려하고 섬세한 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선초 벽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위사의 늙은 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영랑생가 / 소담한 초가 안채와 뒤뜰의 해묵은 동백꽃은 영랑의 시처럼 아름답지만 요새 만든 영랑시비는 우악스러워 고가의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윤종진(1803~1879)묘의 동자석 / 정다산이 귀양지를 귤동으로 옮기게 한 해남윤씨 집안의 한 묘 앞에는 귀엽고 현대적 조형감각이 살아있는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다산초당 / 주변의 나무숲이 울창하여 다산초당은 언제나 이처럼 어둠침침하다.

정석 / 정다산이 여기에 머물던 시절 손수 쓰고 새긴 각자(刻字)로 그의 귀양살이를 말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다산동암 / 정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든 현판으로 해맑은 획맛이 살아 있다.(위)

보정산방 / 추사 김정희의 중년 글씨로 글자의 구성과 획의 움직임에 예술적 변화가 능숙하게 구사됐다.(아래)

정다산의 「매화와 새」 /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장첩(障帖)을 만들어 딸을 위해 그림과 글씨를 쓴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 이처럼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시원스런 전망이 있기에 다산초당은 여기에 자리잡은 것이었다.

백련사 전경 / 백련사의 가람배치는 앞쪽에 만경루가 육중하게 가로막고 있어서 위엄과 권위를 앞세운 느낌을 준다.

백련사 부도 /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리탑으로 동백숲 속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윤고산 고택 / 해남 윤씨의 종가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고가이다.

녹우당 현판 / 윤공재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형님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로 불려지는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 초상화 왕국이라 불릴 조선시대의 뛰어난 초상화 중에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동국여지지도 / 윤공채가 그린 이 조선전도는 그의 실학자적 면모와 대화가다운 필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선여관의 노랑이

천불전의 창살무늬 / 사방연속무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창살은 내소사 창살과 함께 손꼽히는 명품이다.

대웅보전 돌계단의 돌사자 / 돌계단 머릿돌에 이처럼 호신수를 새기는 것은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돌사자는 아주 매섭게 생겼다.

대흥사 대웅보전 / 대흥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경내는 큰 절집답지 않게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일지암 / 초의선사가 칩거하던 일지암은 다선(茶禪)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차를 아는 스님만을 주인으로 모신다.

추사의 「명선」 / 초의가 보내분 차를 받고 그 폐백으로 보낸 추사의 작품으로 병거사(病居士)라 낙관한 추사의 말년의 대표작이다,

대웅보전 현판 / 신지도에 귀양살고 있던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이다. 획이 바싹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 갔지만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진다.(왼쪽)

무량수각 현판 / 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 가면서 쓴 글씨로 획이 기름지게 살지고 구성의 임의로운 변화가 두드러져 있다.(오른쪽)

'토말' 비 / 해남군 송지면 갈두마을 땅끝에 세워져 있는 비석으로 멀리 노화도가 보인다.

미황사 대웅보전 / 달마산의 준봉들을 배경으로 한 멋진 건물로 빛바랜 단청이 더욱 고찰의 맛을 자아내고 있다.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속을

돌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 「애린」 김지하

수덕사 대웅전 /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 중 하나로 고려시대 맞배지붕집의 장중하고 엄숙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대웅전의 측면관 / 둥근 기둥과 각이 진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절묘한 면분할로 집의 모양새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대웅전 내벽의 벽화 / 해체 수리 때 발견된 꽃그림으로 고 임천선생이 모사해둔 고려시대 벽화이다.

만공스님의 미륵상 / 일제시대에 만공스님이 세운 미륵석상으로 그 조형미를 떠나 스님의 족적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큰 의미를 새기게 된다.

정혜사 '불유각' 현판 / 정혜사의 샘물터에는 보호각이 세워져 있고 '부처님의 젖'이라는 뜻의 '불유각(佛乳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글씨는 만공스님.

 

으셔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귓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 일엽, 「그대여 웃어주소서」

수덕여관의 이응로 암각화 / 고암 이응로의 본부인이 경영하는 수덕여관 뒤뜰에는 고암이 문자추상화를 새겨놓은 너럭바위가 두 개 있다.

남연군 묘 / 흥선대원군은 여기가 황제를 낳을 명당이라고 가야사를 불지르고 금탑자리에 선친 남연군의 묘를 썼다.

남연군 묘의 산도(山圖) / 명당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 / 옛날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사령부가 있던 읍성으로 조선시대 성곽 중 가장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상황산 개심사 현판 / 일제시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전서체로 글씨가 멋스러우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풍겨준다.

개심사 대웅보전 /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조선초 맞배지붕집이다.

개심사 심검당의 부엌문 / 맘껏 휘어뻗은 나무로 기둥, 창방, 문지방을 만들어 천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린 멋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첨성대 / 한국과학사에서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첨성대의 기본형태는 신라토기 중 기대(器臺)를 닮은 단정한 모습이다.

첨성대의 실측도 / 남천우교수가 제시한 것으로 1척 = 29.7cm로 잡은 것이다.

황룡사지 발굴현장 / 항공촬영한 이 사진만으로도 황룡사의 규모가 파악된다. 사찰 경내만 약 3만평. 위쪽의 나무숲이 분황사이다.

생의사 미륵삼존상 / 경주 남산 삼화령 고개에 있던 석불로 지금은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애기부처의 귀여운 얼굴 / 앳된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동심과 불심의 만남이라고 할 만하며,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위)

애기부처의 발가락 / 개구쟁이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애기부처의 발가락은 이렇게 까맣게 되었다.(아래)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님 / 자연석 바위를 파서 감실 속의 부처상을 만든 이 감실부처님은 마치도 인자한 하숙집 아주머니상을 연상케 하는 따뜻한 인간미가 살아 있다.

여근곡 / 건천읍 부산(富山) 아래쪽 산줄기로 지형이 여자의 국부처럼 생겨 이런 이름을 얻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전설의 고향이며, 조선시대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가 이 길로 지나가면 꼭 떨어졌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경주터널을 지나 산자락 한굽이를 돌아서면 바로 나타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 튼실한 이층 기단부에 삼층탑신이 체감하는 구조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시킨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기본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 조선시대 정조 때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여기서 문무대왕의 뜻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 우현 고유섭선생의 수필 제목을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 미술사에 대한 선생의 열정을 기리고 있다.

감은사터 전경 /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 백제 사람들이 만든 석탑의 이상은 여기에 있었다.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인상, 그러나 여기엔 힘과 안정감이 약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 원효대사가 주지스님으로 주석하던 고선사의 삼층석탑에는 초기양식이 지니는 장중함이 서려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의 미학이 있다.

불국사 석가탑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까,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여기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에밀레종 비천상 /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은 힘이 넘쳐 흐르지만 에밀레종 비천상에는 정제된 세련미와 정교한 형식미가 돋보인다.

1915년, 봉황대에서 구경주박물관으로 에밀레종을 옮길 때 사진(동아일보 제공).

에밀레종의 종고리 / 용의 허리춤으로 끼여 있는 쇠막대는 지름 8.5cm로 이 시대의 기술로는 만들지 못하여 그 옛날부터 사용해온 쇠봉을 그대로 끼웠다.

에밀레종 /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고, 형태는 유려하면서 긴장이 살아 있는 곡선미를 보여준다.

성덕대왕신종 이전광경 / 동부동 옛박물관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길 때의 장관. 대한통운의 트레일러에 실린 신종은 연꽃으로 장식되었고 그 앞에는 여학생들이 부채춤을 추고 있으며 뒤에는 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다. 지금의 화랑로. 경주 손용석씨 촬영(1975년 5월 27일).

홍예문 / 무지개 형상의 입구를 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성문이다.

낙산사 칠층석탑 / 비록 보물 49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만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지 아직도 의심하고 있다.

원통보전의 별무늬 돌담 / 진흙과 토담에 기와와 둥근 화강암으로 별무늬를 장식한 아담한 의장이 보는 이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수월관음도」 / 14세기, 고려시대의 탱화로 일본 다이도꾸지(大德寺) 소장품에는 낙산사 창건설화가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낙산사」 /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즐겨 그린 겸재는 여러 폭의 낙산사 그림을 남겼는데, 어느 경우든 동해 바다의 일출을 곁들여 시원스런 화면구성을 보여준다.

손장섭의 「동해바다」 / 화면을 철망으로 가로막고 동해바다의 흰 포말을 강조하여 이미지의 상충이나는 회화적 효과를 얻어내었다.

진전사 폐사지 / 절집은 오간 데 없고 산등성 아래 삼층석탑 하나가 그 옛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 하대신라 지방에 세워진 선종 사찰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9세기 석탑으로, 특히 기단의 팔부중상과 일층몸돌의 4면 석불을 돋을새김하여 아담한 가운데 장식성이 돋보인다.

진전사지 부도 / 하대신라 선종의 시대, 부도의 시대를 말해주는 8각당 형식 부도의 시원양식으로 도의선사 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염거화상 부도 / 도의스님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로 여기에서 9세기 부도는 연화받침대 위의 8각당이라는 전형이 창조되었다. 일제 때 도굴꾼이 훔쳐간 것을 압수하여 지금은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 / 구조와 크기는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어딘지 중후한 멋을 풍겨준다.

홍각선사 부도비 /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고 돌거북이와 용머리만 남아 있는데, 거북이의 힘찬 기상과 정성을 다한 조각솜씨에서 9세기 지방문화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선림원지 석등 / 폐사지 위쪽, 아마도 조사당 건물 잎마당에 세워진 듯한 이 석등은 비록 지붕돌 귀꽃이 깨졌지만 고풍스러운 멋은 잃지 않았다.

지증대사 적조탑비 / 최치원이 지은 글을 83세의 분황사 스님 혜강이 쓰고 새긴 것으로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지증대사의 부도 / 비록 지붕돌 한쪽이 깨졌지만 장중한 형태와 섬세한 조각으로 9세기 석조예술의 난숙성을 보여준다.

지증대사 부도와 기단부 공양상 / 깊게 새긴 돋을새김의 정교한 조각솜씨는 가벼운 장식성이 아니라 치밀한 성실성을 느끼게 해준다.

봉암사 삼층석탑 /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전형적인 9세기 삼층석탑이다. 아담한 형태미와 날렵한 상륜부가 돋보인다.

정진대사 원오탑 / 지증대사 부도를 흉내낸 것이어서 매너리즘에 빠져 장중함은 없지만 언덕 위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잇어서 답사객에게 시원한 눈맛을 제공한다.

봉암사 대웅전 앞마당의 노주석 / 앞마당 양쪽에 있는 돌받침은 한밤중 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려놓던 곳이다.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마애보살입상  / 귀엽고 친숙한 인상의 이 고려시대 마애불은 월악산 미륵리 석불과 비슷한 지방양식이 나타나 있다.

야유암 / 봉암사 입구 너럭바위 한쪽 면에 새겨져 있는 이 글씨는 "밤에 노는 바위"라는 뜻에 걸맞게 풍류가 넘쳐흐른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 정철, 「소쇄원 초정(草亭)에 부치는 시」

대봉대 / 입구가 항시 열려 있는 소쇄원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이 대봉대(待鳳臺)이다. 초가 정자로 방문객은 여기에 걸터앉아 소쇄원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

광풍각 /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계곡의 한가운데에 단칸 정자를 짓고 광풍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은 겨울철 난방을 고려함이고, 사방으로 둘러져 있는 마루는 여름날을 위함이다.

화단을 2단으로 쌓은 매대(梅臺) / 담벽에는 훗날 송시열이 '소쇄처사 양공지려'라는 일종의 문패를 써서 달게 했다.

제월당 / 양지바른 언덕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이 이 집의 주건물이다.

돌다리 담장 / 흙돌담 밑으로 개울이 흘러갈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공미를 절묘하게 연출했다.

소쇄원 계곡 / 소쇄원 조영에서 핵심이 된 것은 이 암반 위로 흐르는 계곡이었다.

 

걸음 걸음 물결을 보며 걷자니

한 걸음에 시 한 수 생각은 깊어지는데

흐르는 물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물끄러미 담장 밑 계류만 바라보네

- 김인후 「소쇄원 48영가(詠歌)」 중 「담장을 뚫고 흐르는 계곡물」

 

남쪽 비탈에 오이를 심었지

이야말로 내 마음 진정시키는 약이라오

아침나절 김매고 물 주고

도롱이 벗어놓고 단잠을 잔다.

- 김성원, 「양파에 오이 심어」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

- 정철, 「성산별곡(星山別曲)」중에서

식영정의 노송 / 식영정 주위에는 이처럼 멋진 노송이 몇 그루 둘러져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성산별곡 시비가 무지막지하게 설치되어 그 운치를 해치고 말았다.

환벽당 / 환벽당의 툇마루에 앉으면 자미탄의 아기자기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정철, 「장진주사」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소리 따라 울리리라 …

땅에서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골목 산수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

- 황지우, 「화엄광주」

도솔암 석가여래상 / 배꼽의 비결로 더 유명해진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칠송대 양옆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쌍이 마치 협시보살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더욱 멋지다.

선운사 부도밭 / 선운사 입구 울창한 전나무숲 속에 있다. 까만 비석이 백파선사비이다.

백파선사비 앞면 /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는 글씨를 힘차고 굵게 새겨놓아 추사체의 굳센 필력을 느끼게 해준다.

백파선사비 뒷면 / 글자 획의 굵기와 자간(字間)의 간격조정이 어지러울 정도로 자유자재롭지만 그것이 바로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자율성이다.

도솔암 내원궁 지장보살상 / 조선초기의 금동 지장보살상으로 얼굴에는 선비의 풍이 나타나 있다.

정와 /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에 걸맞은 사랑스런 조촐한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관음전으로 개수되었다.

정와 현판 / 원교 이광사의 기교가 많이 들어간 글씨이다. 지금은 새로 지은 큰 건물 창방 사이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3-097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 | 송필용 그림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3022

 

811.6

도75흔

 

도종환 시화선집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의 시와 그림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장 뜨거운 순간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말들이 넘쳐흐르곤 합니다.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더 경건해지고자 말들이 두 손을 모으는 때가 많습니다. - 도종환(시인)

 

"도종환 선생님의 섬세하게 폐부를 파고드는 생태적 자연에 대한 희망과 사랑의 울림이 저의 지난 작업들과 일정 부분 공동분모가 되어 있었음을 느껴 투박하면서 자연의 맑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시의 아우라에 잡힐 듯 말듯 흐르는 물처럼 사유하고 명상하게 하는 빈자리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그림, 마음의 여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가에게 세상의 많은 꿈을 가슴에 품게 해주신 도종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시와 그림의 간극에서 펼쳐지는 풍경들과 마음의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 송필용(화가)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덕산중학교 교사로 복직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해인으로 가는 길』 등과 산문집 『모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과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과 민족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송필용

 

195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전남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학고제, 이화익갤러리, 금호미술관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진경 그 새로운 제안' (국립현대미술관), '몽유금강' (일민미술관), '구성과 중심' (예술의 전당), '한국모더니즘' (금호미술관), '가고픈 경기비경', '앙코르와트 기행전' 등 국내외 기획초대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금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청와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제비울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차례|

 

시인의 말

 

1부…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 가을 저녁 / 바람이 오면 / 꽃잎 / 담쟁이 / 늦가을 / 여백 / 처음 가는 길 / 희망의 바깥은 없다 / 홍매화 / 저무는 꽃잎 / 깊은 가을 / 시래기

 

2부…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초겨울 / 산벚나무 / 폐허 이후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빈 방 / 산경 / 그리운 강 / 오늘 밤 비 내리고 / 낙화 / 개울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자작나무

 

3부…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쓸쓸한 세상 / 섬 / 꽃다지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초저녁 / 혼자 사랑 /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나리소 / 꽃씨를 거두며 / 산 너머에서 / 쑥국새 / 오월 편지

 

4부…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이 세상에는 / 그대 잘 가라 / 꽃잎 인연 / 어떤 마을 / 목련나무 / 봄의 줄탁 / 연필깎기 / 빈 교실 / 어린이 놀이터 / 세우 / 돌아가는 꽃 / 눈 물

 

5부…함께 먼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흔들리며 피는 꽃 / 먼 길 / 저녁 무렵 / 깊은 물 / 나무 / 산맥과 파도 / 상선암에서 / 벗 하나 있었으면 / 풀잎이 그대에게 / 강 / 쇠비름 / 우 기

 

시의 그림들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들어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매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깊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날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콘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혼자 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와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아픔 그 그리움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먼 곳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습니다.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꽃잎 인연

 

몸 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 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 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먼 길

 

하늘엔 별도 없고

대추나무 잎마다 달빛만 흩어지는데

끝도 없이 먼 어둠을 건너는 구름

밤을 새워 풀그늘에 벌레는 울고

이 땅의 길들도 모두 저물어

저마다 쓰러져 깊게 누운 날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어쩌면 어쩌면 이리 아득해

몇 번이고 홀로 불을 켜고 앉아서

꺼지고 넘어지는 불씨를 안고

고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함께 먼 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 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우  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 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매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잇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posted by 황영찬

2013-096 불교 의식구

 

글, 사진 / 홍윤식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3

 

082

빛12ㄷ  180

 

빛깔있는 책들 180

 

홍윤식-------------------------------------------------------------------------

일본 교토(京都) 불교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문체부 문화재 위원,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 있다. 『한국불교의례의 연구』(일어판), 『고려불화의 연구』, 『삼국유사와 한국고대문화』, 『한국의 불교미술』, 『불화』, 『영산재』, 『만다라』, 『한국불화 화기집』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차례|

 

머리말

불교 의식의 기능과 의미

불교 의식의 구성

불교 의식의 신앙적 구조

불교 의식 용구와 불교 공예

불교 의식 용구의 구성 체계

불교 의식 용구

불교 의식 용구의 전통 문화적 의미

맺음말

참고 문헌

 

104위 신중도  위에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중상을, 아래에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8부 신장, 8부 금강, 8부 용왕 등 불법을 수호하는 104위의 신중을 표현하였다.

발원패  발원 내용을 적은 나무패로 벽에 걸어 놓는다.

거불패  부처와 보살의 명호를 적은 나무패이다. 높이 66센티미터, 폭 26.5센티미터, 좌대 54×23센티미터.

원패  기단은 거북모양이며 몸체에는 황룡이 장식되어 있고 발원 내용은 지워졌다. 높이 77센티미터, 좌대 31×30센티미터.

석가여래패  모란문을 양각한 화려한 불패이다. 높이 38센티미터, 좌대 26×17센티미터.

삼보패  생동감 넘치는 연화대 위에 세워진 패에 염주와 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높이 41센티미터, 좌대 28×17.3센티미터(위는 정면, 아래는 뒷면).

구룡 장식 관불기  불상에 물을 부으면서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용구로 아홉 마리의 용이 갓 태어난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설화를 근거로 이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높이 16센티미터, 대좌 폭 22센티미터.

정병  파랗게 핀 녹이 세월의 흔적을 잘 보여 주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정병이다. 높이 39센티미터, 밑지름 10.2센티미터.

촛대  양초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받침대로 금속, 점토, 나무 등으로 제작했다. 높이 81.5센티미터, 지름 29.5센티미터(왼쪽), 높이 81센티미터, 지름 31.5센티미터(오른쪽)

옥제 등잔  그릇에 기름을 붓고 심지에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켠다. 작은 옥등잔은 연등 행사에 사용되는데 사찰에서 불을 밝히고 발원하는 신앙 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8.8센티미터, 지름 24센티미터, 두께 0.9센티미터(오른쪽), 높이 3.5센티미터, 지름 9.5센티미터, 두께 4.5센티미터(가운데), 높이 12.5센티미터, 지름 25센티미터, 두께 1.6센티미터(왼쪽).

금강령  흔들어 소리를 내어 불 · 보살을 기쁘게 하거나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데 사용한다. 높이 23.3센티미터, 폭 7.8센티미터, 신고 8.7센티미터(위), 높이 20센티미터, 폭 7.8센티미터, 신고 7.5센티미터(아래).

목조 해태 고대 위의 홍고  왕실의 궁전 연회 때 사용되던 북의 형상과 비슷하다. 홍고 높이 85센티미터, 폭 74센티미터, 지름 74센티미터, 목조 해태 높이 119센티미터, 폭 103센티미터.

사보살도(四菩薩圖)  말세의 혼탁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널리 유포하라는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는 네 보살을 그린 것이다. 각각 138센티미터×79.5센티미터. 위의 왼쪽은 경물권보살(警物眷菩薩), 위의 오른쪽은 정업색보살(定業索菩薩), 아래 왼쪽은 조복애보살(調伏愛菩薩), 아래 오른쪽은 군미어보살(君迷語菩薩)

 

 

 

 

posted by 황영찬

2013-093-1 오래된 서울

 

예전 내 나이 열예닐곱 때에

이곳에 놀러오지 않은 날이 없었지.

바윗돌 하나 시냇물 하나도 모두 내가 가졌고

골짜기 터럭까지도 모두 눈에 익었겠지.

오며 가며 언제나 잊지 못해

시냇가 바위 위에다 몇 간 집을 지으려 했었지.

그대는 젊은 나이로 세상에서 숨어살 생각을 즐겨

나보다 먼저 좋은 곳을 골랐네 그려.

내 어찌 평생 동안 허덕이며 사느라고

이제껏 먹을 것 따라다니느라 겨를이 없었나.

싸리 울타리 서쪽에 남은 땅이 있으니

이제부턴 그대 가까이서 함께 살려네.

이 다음에 세 길을 마련하게 되면

구름 속에 누워서 솔방울과 밤톨로 배 불리세나.

- 장훈의 시 「우과천이군선옥계이거(偶過千二君玉溪移居)」 전문

 

맑고 얕은 옥계수

아늑한 청풍계 산기슭

천 년 전 왕희지王羲之와 사안謝安의 놀이가

지금은 벌써 옛일이 되었네

아름다워라, 우리 시사의 글벗들이여

예전엔 우리 함께 대빗자루를 타고 놀았지

산이 높으면 물도 더욱 길어지니

우리 늙을 때까지 서로 좇아 노니세

- 천수경(1786년 7월 16일)

 

1791년 유둣날 옥계시사의 시회 결과를 담은 『옥계청유첩』(개인 소장)에 수록된 이인문(위)과 김홍도(아래)의 그림. 만년의 정선이 「인왕제색」을 그린 때로부터 꼭 40년 뒤 인왕산 기슭에서 벌어진 일을 담은 그림이다.

1950년대 말 김영상이 촬영한 '송석원' 바위 각자 사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진이 '송석원' 각자의 존재를 증언하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김정희는 청년기에 청나라에 다녀온 뒤 자신의 예산 생가 뒤 오석산 바위에 '송석원'과 비슷한 필치로 '소봉래'라는 각자를 새기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탁본).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이다.

최근 확인된 또 다른 '송석원' 바위 각자의 사진이다. 사진 위쪽의 '벽수산장'이라는 각자 왼쪽에 횡서로 '송석원' 각자가 보인다. 사진의 주인공은 윤덕영이다.

이완용의 옥인동 집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 만년의 이완용이 '순양식 2층짜리 건물'인 바깥채 앞에서 차남 이항구(뒷줄 가운데) 및 네 손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13일자 1면 머리의 사설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는 이완용의 죽음에 대한 논평이었다. 여기에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유명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아래는 이 사설이 일제 당국의 금지령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이 날치 신문 전체가 발매금지처분을 당하자 해당 사설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한 모습.

벽수산장과 송석원 일대의 1929년 모습. 필운동의 배화여고 쪽에서 건너다본 모습이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자에 실린 '경성소경 : 명물 아방궁'기사(위)와 1924년 7월 21일자에 실린 '내 동리 명물 : 옥인동 송석원' 기사(아래). 두 기사 모두 당시 10년 넘게 건축이 진행되던 벽수산장의 위용을 소개한다기보다 윤덕영의 행태를 비꼬는 데 집중했다.

벽수산장의 몇 안 되는 흔적 가운데 하나인 정문 기둥 세 개. 하나는 아래 사진 철망 뒤의 건물에 담벼락 일부로 묻혀 있다.

백운동 영역에 유일하게 남은 김가진 자신의 흔적이 바로 이 '백운동천' 바위 각자다. 몰몬교회 입구에서 100미터만 걸어 올라가면 바로 나온다. '몽룡정'과 같은 솜씨의 글씨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가로 길이가 6미터에 가까운 이 대형 각자의 끝에는 '광부7년 중추(中秋) 동농'이라는 관지가 붙어 있어 '몽룡정' 현판을 쓴 지 몇 달 뒤에 썼음을 알 수 있다.

 

병든 몸이 더워 식히려 계정溪亭에 묵던 중에

난간에 기대어 달을 기다리다 술을 잠시 잊었네.

일 많은 세상에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었지만

숲 아래서 그대를 보니 두 눈 가득 반갑네.

바람 불어오는 옛 골짜기엔 공허한 소리뿐이고

적막한 밤 찬 하늘엔 화성이 달려가누나.

문득 고개 돌리니 도성엔 연무煙霧가 가득한데

깊은 밤 잠들어 꿈속이라 몇이나 깨었을꼬.

- 「몽룡정 가을밤(夢龍亭 秋夜)」(1908년) 전문

경복궁역 근처 적선동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진 '김가진 집터' 표석.  그의 국내 마지막 거주지였던 체부동 86번지가 인근에 있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사직도 기울었는데

부끄러움 안고 죽음을 견디며 지금껏 살았구나.

늙은 몸이지만 아직 하늘을 뚫을 뜻이 남아

담숨에 높이 날아 만 리 길을 떠나가네.

민국民國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보랴

천라지망天羅地網 경계망을 귀신같이 벗어났네.

누가 알아보랴 삼등열차 안의 이 나그네가

누더기 걸친 옛적의 대신破笠敝衣舊大臣인 것을.

-김가진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 직후인 '대한민국 원년(1919년) 11월'에 발표된 '대동단 선언문'.  선언문 말미에 연호를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적었고, 단원 명부 첫머리에는 '이강(의친왕)', '김가진' 등의 이름이 선명하다.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에 있던 김가진의 묘비와 무덤.  '동농김가진선생지묘'라고 쓰인 묘비는 문화혁명 때 없어졌지만 무덤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김가진의 중국 상하이 묘지와 그의 아들 김의한의 북한 평양 '재북인사 묘역' 묘지, 며느리 정정화의 대전 '국립현충원' 묘지 등 세 군데로 나뉜 이들 일가족의 사후 이산은 우리 민족의 현실과 과제를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 건축과 재학시절(1926~29년)의 김해경.  그는 이 시절에 이미 '이상'이라는 별명을 사용했으며, 건축과 문학과 미술 모두에 관심을 쏟으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사진 속의 다양한 조소상들이 그의 다양한 면모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상의 절친한 동료였던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1935년).  이상을 모델로 했다. 이 그림은 '불가능'을 향해 발버둥치는 이상과 구본웅 두 사람 모두의 내면이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 옛 집터의 변화. 왼편은 1910년대의 지적도로서 154번지 전체가 이상이 살던 원래의 집터다. 오른편은 현재의 지적도로서 154번지가 분할되어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던한' 복장으로 1930년대의 경성 시내를 산보하는 이상(왼쪽)과 구본웅을 동시대의 화가 이승만이 그린 캐리커처.  '봉두난발'의 이상과 '꼽추' 구본웅이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면서도 함께 걷는 모습이 조화롭게 표현됐다.

구본웅의 「여인상」(1936).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구본웅의 야수파적인 터치가 느껴지지만 194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그런 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1941. 5. 31) 전문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바람이 불어」(1941. 6. 2) 전문

이여성, 이쾌대 형제가 함께 등장하는 사진의 하나. 앞줄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여성, 뒤줄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가 이쾌대다. 이쾌대 등이 중심이 돼 일제 말기에 조직한 신미술가협회의 1943년 전시회 개막식 기념사진이다.

이여성이 '조선 현실의 과학적 인식'을 위해 펴낸 『숫자조선연구』의 제2권과 제5권 표지

'청전(이상범)'과 '청정(이여성)'의 2인전이 동아일보 사우회 주최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1935년 10월 1!3일 열린다는 광고(왼쪽).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 조사부' 소속으로서 이여성은 부장, 이상범은 화백이었다. 2인전을 소개한 동아일보의 1935년 10월 2일자 기사(오른쪽). 전시 첫날 전시작품 100점 가운데 60점 이상이 예매되는 등 성황이었다고 한다.

이여성의 역사풍속화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격구」(1936년경). 비단에 채색한 90.5×87m 크기의 대작이다.

이쾌대가 도쿄의 제국미술학교 졸업반 시절이던 1938년 왕성한 창작열로 완성한 유화 작품들. 위는 「운명」(160×130cm, 제25회 이과 전 입선), 아래는 「상황」(160×130cm). 학창시절의 여러 가지 모색이 민족적 소재의 발굴과 동양화 풍의 기법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그의 그림들은 맑은 수채화 또는 동양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서양화(유화)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능력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옥외패션쇼의 결과물.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에 실린 고대 복식 사진의 하나다.

1940년대 초 신미술가협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던 화가들. 왼쪽부터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김종찬

이쾌대의 인물화 세점.  일본 유학시절(1934~39)에 그린 「자화상」(목판에 유채, 45.7×38cm, 위), 귀국 후 서촌의 궁정동에 살며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하던 1942년 무렵 그린 「자화상Ⅱ」(켄버스에 유채, 53×41cm, 가운데), 후자는 그의 인물에 대한 천착이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치 고구려 벽화 속의 인물이 튀어 나온듯한 느낌을 준다. 아래 인물화는 「자화상Ⅱ」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법으로 그린 형 이여성의 인물화(캔버스에 유채, 90.8×72.8cm)다.

이쾌대가 해방을 전후해 그린 「군상」시리즈 4점 중의 첫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이 작품을 1944~1948년에 걸쳐 그리면서 「해방고지」(181×222.5cm)라는 부재를 붙였다. 그의 신고전주의적 화풍과 동양화적인 화풍이 아주 적절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쾌대의 「군상Ⅳ」(1948년). 미 공군의 독도 폭격으로 수십 명의 어민이 몰사한 사건이 작품의 계기가 되었다.

이쾌대의 자화상 가운데 남한에 현존하는 마지막 작품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49년). 형형한 눈빛과 붓을 꽉 잡은 손에서 그의 의지가 읽힌다.

김수임이 1930년대 말 세브란스 병원의 치과과장 비서 겸 통역으로 근무할 때 부스 과장과 함께 찍은 사진.

해방 후 모윤숙(앞줄 왼쪽 끝)이 주동이 돼 조직한 미국인 상대의 사교조직 낙랑클럽 회합 장면. 사진 뒤쪽 오른쪽 끝의 두 사람이 김수임베어드 대령이다.

1950년 6월 17일자 당시 한 일간지에 실린 김수임의 사흘째 재판 스케치 및 해설기사. 기사 제목들 가운데 "모(윤숙)여사 증인대서 진술", "김수임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매아미(매미)를 동무 삼던 고독한 여성" 등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일제시대 <조선일보> 시절의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벙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1953년) 전문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뭇 사나이들 머릿속 어지러웠다

가슴속 너울 일렁거렸다

 

1903년생

식민지시대

분단시대

미국

중국

남한과 북한

체코 등지를 망라

지치지 않는 스파이의 삶을 살았다

 

1910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박헌영의 친구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 공로자

현순 목사의 딸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시민권자 앨리스 현

컬럼비아대 졸업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 CIA 요원

 

앨리스와

그의 아우 피터 현

데이비드 현

세 남매는

 

1945년 매카시 사령관 비서였다

1949년

체코 경유

북한으로 들어가

박헌영과 합류

 

그녀는 미국 스파이였으므로

평양에서 처형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뭇 사나이들

그 매혹에 오만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었다

- 고은, 「앨리스 현」 전문, 『만인보』

 

앨리스 현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의 가족 사진. 중앙이 아버지 현순 목사, 그 왼쪽이 앨리스, 왼쪽 끝이 바로 아래 남동생 피터다. 1948년 9월 앨리스의 아들 웰링턴(오른쪽 끝)이 의학 공부를 위해 체코로 떠나기 직전 LA의 한 식당에서 가진 가족회식 자리였다.

『신천지』 1946년 5월호에 실린 앨리스 현의 「미국의 여성」 기사.

현순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직후의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앞줄 오른쪽부터 현순, 안창호, 신익희

앨리스 현이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22년 '정준'이라는 유학생과 만나 결혼한 뒤 별거 - 재결합 - 이혼을 거치는 과정에서 1927년 10월에 낳은 아들 웰링턴과 함께 찍은 사진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전시회의 브로슈어

위는 이중섭이 서울 누상동 시절에 그린 「길 떠나는 가족」(종이에 유채, 29.5×64.5cm). 그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 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 이 장면을 삽화식으로 여러 차례 되풀이해 그렸다.

 

통인동 뒷골목을 지나다 보니

옛날의 기와집

그대로 있고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서투르게 그려 놓은

마징가 제트

지금도 낙서가

여전하구나

 

개구쟁이 꼬마들이

30년을 그려 온

붉은 벽돌 담벼락의

재미있는 낙서들

지우고

또 지우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먼 옛날

어린 시절

 

커다란 대가리에

가느다란 손과 발

백묵으로 그리다 만

영이의 솜씨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아빠가 되고

영이는 엄마 되어

소꿉장난 하다가

싫증이 나면

영아는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 철수 바보 똥개

 

쫓아가서 지우면

화살표를 끌며

저만치 도망가서

영이는 백묵으로

화성인을 또 한 마리

그려 놓았다

 

쫓아가서 지우면

도망가서 그리고

쫓아가면

도망가고

지우면

그리고……

영이를 쫓다가

오후를 보낸 날은

꿈속에서도

약이 올랐다

 

어린 시절

되새겨 보니

아무래도 무엇인가

놓쳐버린 아쉬움

영이의 낙서를

지우려 하지 말고

영이의 뭉똑한

예쁜 손에서

그 하얀 백묵을

빼앗아야 했던 건데……

 

이제야 깨달은

먼 옛날의 어리석음

너무 빨리 크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지

자라지 않는

어른들은

그것을 모르지

- 김광규, 「영이가 있던 날」 전문

 

한때 그 가슴에 호랑이를 기르고

한양 도읍 오백 년 산자락에 펼치고

서울의 슬픔과 기쁨

소꿉장난처럼 내려다보던

장엄한 인왕산

아득한 할아버지의 고향

어린 날 올라가고 싶었던

헌칠한 미끄럼바위의

믿음직한 얼굴 어디로 갔나

맑은 물 돌 사이로 흐르던

가파른 골짜기 소나무 숲에 오늘은

깨어진 유리 조각 비닐 봉지 나뒹굴고

석유 냄새 풍기는 잿빛 아지랑이

큰 산을 가리고 아른거린다

그 억센 지맥도 이제는

동서남북 아스팔트길로 모두 끊기고

8백만 인구의 한가운데 갇혀

머지않아 쓰러질 듯

가쁜 숨만 헐떡인다

비쩍 마른 옆얼굴과

헐벗은 뒷모습 드러낸 채

종로구와 서대문구 변두리에 주저앉아

늘그막에 셋방살이를 하는

불쌍한 인왕산

- 김광규, 「인왕산」 전문

민정기 화백의 「인왕산」(천 위에 유채, 392×218cm, 6매 연작, 2007년). 서촌의 든든한 의지처이자 배경인 인왕산과 그 아래 서촌의 소박한 동네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서촌은 수백 년을 이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굳어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장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쫓는다

굽힘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런 후배

온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

우리의 잃어버린 이상을

새롭게 가꿔 가는

그의 힘찬 모습을 보라

 

그렇다

적선동에서 쓰러진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전문

 

posted by 황영찬
2013. 8. 31. 14:00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5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남진우 시집

2006,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3411

 

811.6

남78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1

 

봄날 뻐꾸기가 울고 있다. 가까운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도시의 소음 탓이거나 분주함 때문이리라. 잘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건물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리가 늘 내 귀를 채우고 있다.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라진다 해도 실내의 TV 음향이나 오디오의 음악,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내 몸을 가로지르며 흘러다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는 일에서 풀려나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뻐꾸기는 운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무심코 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던 나는 한 순간 전신이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뻐꾸기는 나를 삼키고 내가 있던 공간을 삼키고 이윽고 우주 전체를 삼켜 버린다.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오직 뻐꾸기 울음소리만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 몇 초 정도 지속된다…… 무중력 상태의 공간을 비행하는 느낌이 이럴까…… 그 소리에 잠겨 있으면 내 몸이 깊은 우물 속으로 한없이 낙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열기구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지상을 굽어보며 광막한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한동안 뻐꾸기 소리에 빠져 있다가 슬며시 놓여 나온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내 의식은 내 몸이 속한 공간에 닻을 내린다. 여전히 내 곁엔 아무도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에서 한가로이 뻐꾸기가 울고 있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고요의 밑바닥에서 내 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 울고 있는 뻐꾸기. 내 몸을 들락날락하는 저 소리를 징검다리 삼아 한 시절 건너가면 거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시인 남진우는 1960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현재까지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시집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 자를 위한 기도』『타오르는 책』이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서 시인은 낯선 것과의 조우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낯선 것들은 사자, 악어 같은 짐승이기도 하고, 식물이나 기후,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낯선 것들의 정체는 우리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미지의 세계의 한 자락이면서, 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또한 이 세계 안에 있는 타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부이면서 영원히 타자이기도 한 죽음과도 같은 잠처럼.

 

시인의 말

 

그물을 거둔 자리

물고기는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다

은지느러미를 빛내며

수많은 물방울 사이 잡히지 않는

말들의 뒤채임

2006년 여름

남진우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모자 이야기 / 꿈 / 여우 이야기 / 저수지의 개들 /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 겨울잠 / 먼 산 먼 길 / 종일토록 / 열대야 / 저 석양 / 계단 오르기 / 들소떼와 춤을 / 버섯들 / 소음 / 어부의 꿈 / 봄의 幻 / 도서관 유령 / 전갈에 물리다

 

제2부

낮잠 / 오래된 정원 / 조등 / 달의 물 / 소금별에서의 일박 / 베니스에서 죽다 / 문밖에서 / 환절기 / 우물 이야기 / 번개 치는 밤의 기록 / 일식 / 그가 보고 있다 / 오늘도 무사히 / 오후 세 시의 예감 / 어머니 /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 생은 다른 곳에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 / 눈 내리는 날 / 겨울 일기 / 그런 날 / 선인장 / 모래알과 마른 풀들 사이 / 겨울 아침

 

제3부

일식 / 金宗三 / 축제는 계속된다 / 오래된 사원 / 앙코르 / 반얀나무 아래 / 몽생미셸 / 오후 세 시의 추억 / 카타콤 / 경을 찾아서 / 정거장에서 / 오래전 길을 떠날 때 / 저녁 산책 / 연가 / 멍키 템플 / 수목한계선 / 독서

 

해설 | 열세번째 사도의 슬픈 헛것들 · 신형철

 

저수지의 개들

 

비 내리는 밤

저수지 밑에서 개들이 짖는다

흙탕물 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음소리

 

긴 혀를 늘어뜨리고

두 눈에 푸른 불을 켠 개들이

발톱으로 서로의 목줄기를 찢으며 짖어댄다

 

짖어댄다 소용돌이치는 저수지 밑

진흙탕을 달리며

일찍이 지상에서 쓸려 나가

저 어두운 물속에 갇힌 온갖 소리들이

 

물결과 물결 사이

허연 잇자국을 드러내며 거품을 뿜어댄다

물에 붙은 주검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면 위

부우연 숲 그림자를 흔들며 번져가는 울음소리

 

밧줄을 내려주어도 저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오직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짖어댈 뿐

일렁이는 수초 사이에서 뒤엉켜 싸우면서

저들은 밤새 금 간 제방을 물어뜯는다

 

우리가 버린 말

우리가 욕하고 더럽히고 깨트린 말들이

폭풍우 치는 밤

저렇게 어두운 물 밑에서 하염없이 짖어대고 있다

 

모자 이야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 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지금

목마른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에 와 있다

 

어둠에 잠긴 사방

시계 뚝딱거리는 소리

잠자리에 누운 내 심장에 와 부딪치고

창 가득히 밀려온 밤하늘엔 별 하나 없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타오르는 사자의 커다란 눈이 내 눈에 가득 차고

사나운 사자의 앞발이 내 목줄기를 짓누를 때

천둥처럼 전신에 와 부딪는

시계 뚝딱거리는 소리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두운 복도 저편

막 사라지는 사자의 꼬리가 보인다

 

소음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 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별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딛어서는 안 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먹구름처럼 모여드는 벌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소용없다

내가 건드리기도 전에 한 모금 꿀을 맛보기도 전에

별들이 달려와 나를 쏘아댄다

 

아픔이 환희처럼 온몸에 번져갈 때

꽃가루를 모으던 닫힌 입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쉴 새 없이 붕붕거리며 어서 쏴버려

쏘아버리라고 말한다

 

벌들에게 쏘이며

나 또한 입가에 힘을 모으고

최후로 마지막 침을 날린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거대한 말벌을 향해

 

벌이야

벌이라니까

 

열대야

 

1

연립주택 뒤 베란다에

악어떼가 살고 있다

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항아리

그 속에 숨어서 은밀히

우리를 엿보며 익어가고 있다

 

뚜껑을 열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한입에 우리를 집어삼킨 악어떼가

간장 위를 둥둥 떠다니며

짜디짠 열대 바다를 꿈꾸고 있다

 

2

수도관을 타고

연립주택 천장으로 벽으로 쓸려 나오는 악어떼

변기에서 욕조에서 장롱 서랍에서 쏟아지는 악어떼

이불을 들추면 싱긋 웃고 있는 악어떼

잠자는 우리 머리맡을 기어다니며

악어떼가 노래 부른다

커다란 입을 길게 찢으며 악어떼가

밤새도록 웅웅거린다

 

깊어질수록 끓어오르는

열대야를 헤집고 이 밤

악어떼가 행진한다

 

3

내 살을 뜯어먹고

냉장고 속을 노략질하고

거실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갔다가

구겨진 신문 상단에 웃고 있는 정치가의

입을 통해 기어나오는

 

저 시커먼 악어떼

 

흐릿한 눈으로 나를 굽어보며

이제 잠들 시간이라고

마음 놓고 꿈에 빠져들라고 속삭이는

 

악어떼악어떼악어떼

 

잠 못 이루는 밤

연립주택 베란다 유리창마다

불길이 치솟아오른다 타오르는 악어떼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버섯들

 

우기 지나

민달팽이 기어가는 연립주택 계단과 벽면에

축축하게 돋아나는 버섯들

 

은밀히 어둠을 밀어올리고

지난밤 꾸다 만 악몽처럼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르며

작은 틈새로 이마를 내미는

 

버섯들

벗지 못한 몸들이 뒤척이며 돌아누울 때

땅 위로 한 웅큼

식인종의 머리처럼 솟아나는

 

저들이 좁은 땅을 먹어치우며

집 안으로 쳐들어온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여기저기 종기를 퍼트리고

축축한 진물을 흘리며

 

버섯이

거대한 버섯이

뭉개구름처럼 피오오른다

 

지하철이 굉음을 울리고 지나간 다음의

텅 빈 적막 속

버려진 연립주택 단지 위 하늘로

자욱하게 번져가는 버섯들

 

겨울잠

 

반달곰 한 마리

가슴에 반달을 안고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반달이 떠 있고

 

적적한 사방

바람이 쓸고 가는 소리에 웅웅대는 항아리

반달곰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적마다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고

 

눈은 내려 숲과 들을 하얗게 뒤덮는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반달곰의 꿈도 깊어가고

눈밭 한가운데 놓인 항아리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둔 밤 달에서 녹아내린 고드름 한 방울

항아리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

겨울잠을 자던 작은 곰은

부스스 일어난다

 

잠시

머리에 맺힌 달빛을 쓸어보는

반달곰 한 마리

 

아주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불어가는

바람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다

항아리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세상을 엿보기 시작한다

 

종일토록

 

꽃게 한 마리

거품을 물고 꽃그늘 속으로 기어간다

꽃게 거품에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가 피워내는 꽃들이 바다를 덮는다

툭, 꽃 모가지가 떨어지고

투둑, 꽃게 다리가 부러진다

져 내리는 꽃잎 속에 꽃게 거품이 떠오르고

허공에 뜬 거품마다 반짝이는 아침 바다

꽃게 한 마리 바다를 물고

꽃그늘 속에서 기어나온다

한 세월 아득한 꽃 소식 기다리며

갯벌을 건너가는 꽃게 한 마리

 

어부의 꿈

 

호리병 속에 갇힌 마인은

말이 없다 잔잔한 바다 양탄자처럼 펼쳐진 하늘

그물을 끌어올린 어부는 잠시

뱃전에서 숨을 몰아쉰다

 

모든 예언은 거짓이거나 농담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오직 태양뿐

눈부신 빛살에 떠밀린 파도는 묵묵히 밀려왔다 밀려가고

전설을 가늠하듯 어부는 호리병을 치켜든다

 

어떤 마법이 그를 다른 해안에 데려다줄까

모든 소원이 헛되이 져 내린 뒤

호리병에 담긴 마지막 한 방울 술까지 다 마신 다음

어부는 적막한 해변 낡은 오두막집에

홀로 쓰러져 잠든다

 

깊고 어두운 꿈속

호리병을 열자

검은 연기와 함께

마인이 솟아오른다. 솟아올라

이제 네 소원을 들어주마 말한다

 

제발 이 삶 바깥으로 나를 데려가줘

내가 꾸는 꿈이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는 곳으로

꿈속의 호리병이 내게 소원 따윌

명령하지 않는 그곳으로

 

아득한 바다

양탄자처럼 펼쳐진 하늘 아래

호리병은 사라지고

어부 홀로 텅 빈 그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 석양

 

1

저녁

내 몸은 푸른 허기로 가득 찬다

바람의 비린내가 맡아지고

손가락 뼈마디에 와 걸리는 녹슨 석양빛이 만져지는 때

오래된 마당 구석 낡은 우물이 들어와 마음 한 켠을 차지한다

 

내 안에 기숙하던 아픔이 이리도 많아

오늘 이 저녁 만나는 모든 것들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내 갈 길을 묻는다

 

2

한때 내 속에 살던 노래는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는 텅 빈 우물로 고요하다

푸른 물이 그립다고 간혹 되뇌어보지만

이제 누가 내 속에

제 얼굴을 비춰볼 것인가

 

춥고 어두운 내 몸속에

간혹 길 잃은 짐승이 빠져 한 줌 뼈로 변한다

내가 길들일 수 없는 길들이

저 먼 세상 어디론가 소리 없이 풀려나가고

길의 끝

마른번개 한줄기 달려가다 멈추는 곳

 

푸른 허기에 감싸인 채

나는 우물을 굽어본다

지팡이가 돌계단을 치는 소리 들리다 그치고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3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빛

날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깃을 터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아무 맛도 없이

내 몸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라지는

 

문밖에서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다가왔고

잠시의 맑은 날 끝엔 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즐비한 술집 앞엔 가끔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신문과 전파는 무심히 붐비는 사람 틈새로 빠져나갔고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 갔다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지루한 것들뿐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막막한 세월을

유행 따라 머리 길이를 조절하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지급된 구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누추한 그림자를 끌고서 혀 밑에 쌓인 소금과 재를 맛보며

오래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미 내 삶은 유적지를 적시는 메마른 빗방울이었고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으므로

길 잃은 소녀의 울음도 장님의 호각 소리도

내 깊은 적막을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자객처럼

하나씩 증발해버리는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아침이면 사나운 새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고

저녁이면 어두운 카페에서 낯선 이국 가수의 목소리가

부우연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밤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습경보는 울려 퍼지고

추적자는 문을 두드리는데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베니스에서 죽다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거울 앞에 서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거울에 비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명종 소리를 들으며 하루는 시작되고

만원 지하철의 졸음과 함께 하루는 끝난다

장례식과 결혼식 사이 잠시 나이 든 부모의

생일잔치가 있고 잊혀진 여인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하지만

 

누구나 하고 깊은 일만 하며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 푸른

정맥을 드러낸 하늘에 주사를 놓고 싶은 날이면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를 꿈꾸고

거기 바닷가에서 나른한 햇살에 취해

홀로 죽는 꿈을 꾸고

 

서른여섯을 넘긴 다음부터

매일 아침 매일 저녁 나는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의 내가 내게 무슨 말을 묻기 전에

거울 앞에서 멍하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나에게

지나온 나날의 죄과를 하나하나 고백한다

 

서른여섯 거울 속의 나는 죽고

텅 빈 거울 속에 더 이상 나는 비치지 않고

거울 속 어두운 물 저편으로 흘러가

나는 흑사병이 도는 폐허의 도시에 도착한다

 

푸른 정맥을 드러낸 하늘 눈부신 햇살 아래

나직하게 파도 구르는 소리 들으며

서른여섯 불현듯 죽음처럼 찾아온 졸음에 잠겨들면

모래밭의 한 아이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수평선 저편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작은 기선 한 척

 

선인장

 

겨우내 반 지하 방에 갇힌 채

여인은 선인장처럼 시들어간다

물을 주지 않은 살갗에서 버석거리며 모래알이 떨어지는 동안

허공의 낙타떼는 지붕 위에 머물다가

방울을 울리며 떠나곤 한다

 

철 지난 옷 속에 가시를 숨기고 여인은

주방과 화장실만 오간다

개수대에 쌓인 그릇이 늘어날수록

현관 앞엔 우편물과 신문이 버려진 채 바래어가고

마룻바닥 위 모래 먼지에 낙타 발자국이 찍혔다가 지워진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옆에 두고

여인은 비좁은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잠을 잔다

불타는 천막 속에서 한 남자가 길길이 날뛰다

타 죽어가는 꿈을 꾸며 여인은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신기루처럼 아물거리며

한 때의 낙타가 다가오고 있다

모래 바람이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만삭의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선인장 가시를 입에 물고

여인은 반 지하 방 창문을 노려본다

창밖 수평으로 펼쳐진 마당에 어느덧 봄빛이 번져가고 있다

두 손으로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여인은 낮게 우얼거린다

 

그 새낀 죽었어, 하지만

나는 너를 꽃피우고 말 거야

 

오래된 사원

 

어스름이 내리는 강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물소 한 마리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강 건너 숲 저편

낡은 사원 하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서서히 무너져 가고

나는 끊긴 길 이편에 적막하게 앉아

저녁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해 저물도록 그림엽서를 팔던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노을 속으로 멀어져가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놀던 아이들 소리치며 그 뒤를 따라 뛰어간다

실눈 뜨고 바라보는 강물 위로 부서지는 마지막 햇살

 

뿔이 긴 소를 타고

저 물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면

거기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을까

 

저녁이 머뭇대며 내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는 숲 그림자

나는 어느덧 온몸을 휘감아 오르는 나뭇가지 푸르름에 휩싸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사원이 된다

 

앙코르

 

아주 멀리

돌의 도시가 떠오른다

해자를 건너 기나긴 성벽을 지나

아득한 전생의 꿈에서 보았던 탑들이 솟아오른다

 

황폐한 뜨락 저편 웅크리고 있는 땅거미

거대한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줄기와 뿌리를 뻗어 삼키려 드는

사나운 밀림 한가운데

 

부서지고 무너지고 금이 간 모습 그대로

돌의 도시는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읽을 수 없는 상형문자로 가득 찬 회랑을 돌아서

왕과 승려와 병사들이 차례로 내 곁을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전쟁과 추수를 거듭한 끝에

지금 나 홀로 이 돌의 도시에 남겨진 것일까

벽면에 새겨진 전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왕은 말이 없고

그 바퀴 아래 깔린 용병들의 신음 소리만 아직도 메아리친다

 

그늘진 사원 한 켠

목이 달아난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 앞에 잠시 고개 숙이고 몇번째인지 모를 생을 헤아리다

어스름에 잠긴 돌의 도시를 빠져나온다

 

몽생미셸

 

육지의 끝

썰물 진 바닷가에

조가비처럼 누워 있는 수도원

 

안개가 걷히면

순례자 대신 장사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영혼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비좁은 계단 사이 어깨를 부딪치며

값싼 지폐와 신성을 교환하기 위해 오간다

 

수도사의 휴게실을 지나 석회암 기둥의 회랑을 지나

바다를 등지고 멀리 바라보이는 목초지엔

무심히 풀을 뜯는 검은 얼굴을 한 양떼들

 

하루의 소란이 다 저물고 난 뒤

깊은 밤이 찾아오면 조가비는 비로소 입을 열어

밤하늘 가득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을

제 속으로 빨아들인다

 

오후 세 시의 추억

 

갈매기 한 마리

원을 그리며 내 머리 위에서 종일 돌고 있다

 

삭아가는 폐선 옆에 서서

멀리 난바다에 부서지는 햇살 바라보며 찍은

흑백사진

 

거기

홀로 선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

점이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돌지 않고

무슨 얼룩처럼 사진에 붙박힌 갈매기 한 마리

눈길을 주는 순간 물결을 일으키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어와

다시 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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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8. 28. 11:3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4 오페라 감상법

 

글, 사진 / 조성진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2

 

082

빛12ㄷ  179

 

빛깔있는 책들 179

 

조성진-------------------------------------------------------------------------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과 빈국립음대, 독일 함부르크대학과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학, 음악학, 오페라 연출을 전공하였다. 1980년부터 「아이다」를 시작으로 「꿈」, 「코지 판투테」, 「피가로의 결혼」 등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현재 예술의 전당 예술감독으로 있다.

 

차례

 

책 머리에

감상의 기본 태도

  어떻게 시작할까?

  어떤 작품을 볼까?

오페라의 명작들

오페라의 종류

오페라의 노래와 연기

  오페라 가수들

  오페라 하우스와 공연 시스템

영상 매체와 음반

  오페라의 명반들

매니어가 되려면

한국 오페라의 나아갈 길

부록

베르디의 「아이다」 중 제2막 라다메스의 개선 장면  카이로에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 하우스를 위하여 청탁된 작품인 만큼 규모가 크고 스펙터클의 효과가 있어 축제용 오페라로 손꼽히지만 베르디의 진정한 의도는 오히려 개선 장면이 끝난 뒤에 주인공들이 겪는 인간적인 고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그너의 「발퀴레」 중 제2막의 무대  4부작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하나이다. 바그너의 무대는 특히 조명 효과를 살려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마지막 장면  사라스트로가 시련을 이겨낸 타미노와 파미나를 축복하고 있다. 민중 악극의 형태를 빌어 만들어진 이 작품은 오페라사에서 가장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첫 장면  지극히 세부적이며 사실적인 무대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전통이다.

1902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던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 멜리장드역을 한 소프라노 메어리 가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베르디의 「맥베스」 중 여주인공 레이디 맥베스로 분장한 모습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오페라 가수들 중에서 성악과 연기의 조화를 이룬 최고의 소프라노로 기록되고 있다. 레이디 맥베스는 특히 격렬한 성격의 역으로 칼라스의 대표적인 배역 중의 하나이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탈리아 오페라 분야에서 아직도 가장 인기 있는 테너이다. 1961년에 데뷔하여 1960년대 후반 전세계 무대에 유명하게 되었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이전보다 무거운 역을 하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바그너의 작품만을 무대에 올릴 계획으로 1872년에 기초하여 1876년에 「니벨룽의 반지」4부작 전체를 초연하면서 개관하였다. 객석은 1,800석이며 나무와 벽돌로 지어졌다. 오케스트라 피트 위에는 덮개가 있고 무대 기계들은 풍부해서 모든 것이 바그너의 이상에 맞도록 되어 있다. 개관 이후 오늘날까지 전세계 바그너 추종자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 에리히 클라이버(1955년)

모차르트 「돈 조반니」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59년)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 칼 뵘(1962년)

모차르트 「마술 피리」 : 게오르크 숄티(1969년)

 

 

posted by 황영찬
2013. 8. 27. 15:1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3 오래된 서울

 

최종현, 김창희 지음

2013, 동하

 

 

대야도서관

SB089459

 

911

최75ㅇ

 

'서울학' 창설의 주역과 그 전파자가 눈이 무르도록 자료를 뒤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골목을 누빈 끝에 빚어낸 『오래된 서울

 

모처럼 묵직한 읽을거리가 탄생했다. 서울에 대한 책이지만 대하드라마처럼 장대하고 탐정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도 학술논문보다 더 학술적이고 문화비평보다 더 비판적이다. 풍부한 이미지에 민정기 화백의 '삽화'들까지 곁들여져 보는 맛 또한 특별하다. 저자들은 '최근의 기억까지 사정없이 지워진' 서울에서 고려 남경의 옛 흔적을 찾아내고 인왕산 아래 서촌에서 선대들의 못 다한 꿈을 되살린다. 경화사족에서 중인, 친일파, '모던 보이'를 거쳐 현대사의 격랑에 '미아'가 된 사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꿈의 주제들과 엇갈린 입장은 그대로 아픈 우리 역사의 축도다. 저자들은 힘주어 말한다. 전통과 역사는 먼 데 있지 않고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새겨져 있다고, 그리고 그 땅에 새겨진 기억을 반추하지 않은 채 만드는 현실은 비루할 뿐이라고, 이 책은 오랜 내공의 소산이다. '서울학' 창설의 주역과 그 전파자가 눈이 무르도록 자료를 뒤지고 발이 부르트게 골목을 누빈 끝에 빚어냈다. 박물관이 했어야 할 일을 대신, 그리고 더 잘해낸 저자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___ 강홍빈(서울역사박물관 관장)

 

화가들의 몇 가지 앵글을 찾아낸 것은 꽤나 지난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안평대군, 정선, 이인문과 김홍도, 다들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들이고, 그들의 작품 역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의 현장을 일일이 찾아 그런 앵글들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언덕 저 언덕을 몇 차례씩 오르내리고, 손에 도판을 든 채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며 ' 저 앞의 건물이 없다면 어떻게 보일까?' 일일이 맞춰보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런 유명한 작품들이 어떤 지점에서 어떤 시각으로 무엇을 본 것이라는 식으로 사실 확인만을 하는 데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넘어서서 그런 앵글이 갖는 의미를 천착하고 싶었다. 왜 굳이 그런 앵글을 잡았는지, 그런 앵글로는 무엇이 보이는지를 찾아보려 했다. 왜냐하면 그런 앵글들은 당대인들이 땅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 나아가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관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가지 앵글들 가운데 이인문과 안평대군의 그것이 바로 그 예다.

(…) 저자들의 당초 의도는 답사안내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서울의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으며, 그것의 역사적 맥락은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제공하는 책은 무수히 많다. 그 책들의 대개의 공통점은 이야기가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의 맥락을 가능한 수준에서 한 줄에 꿰어 보여주는 책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저자들은 외람되게도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것은 도시학 또는 도시사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___ 「에필로그」 중에서

 

최종현 崔宗鉉

1945년 중국 심양 출생.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우리나라의 도시 및 취락 역사를 필생의 연구분야로 설정하고 전국을 발로 뛰며 눈에 담고 기록으로 남겼다. 자연히 땅 - 도시 - 건축 - 인간의 유기적 관계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지금껏 이를 정식화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11년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뒤 오히려 연구가 탄력을 받고 있다면서 자신이 설립한 사단법인 통의도시연구소에서 샘솟는 의욕으로 '한국 전통건축에서의 정면성', '한국 도시의 입지와 구조', '옛길에서 만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의 연구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궁극적인 관심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과 도시를 건강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창희 金昶熙

1958년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와 프레시안에서 20여 년 언론인 생활을 했다. '표현의 자유'와 '역사기록으로서의 언론'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엄중한 과제라는 점을 그때 배웠다. '서울 정도 600년'과 관련된 일련의 기사를 준비하던 1992년 최종현 교수와 처음 만나 도움을 받은 이후 공동작업을 구두선처럼 얘기하다가 드디어 첫 결실을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이 행복한 동행아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땅이나 공간과 같이 궁극적으로는 말로 번역이 불가능한 것을 말로 옮기는, 역시 쉽지 않은 일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한양도성도」 채색필사본, 129.5×103.5cm, 18세기 중엽,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차례

 

오래된 서울

들어가는 글 ● '오래된 서울',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제1부 서울의 탄생

 

서울의 원점을 찾아서

· 서울의 나이는 600년인가 2,000년인가

· '서울의 원점 = 사대문 안'은 600년전 갑자기 생겨났을까

· 남경의 흔적을 찾아서

· 서울의 원점에 서다

 

삼산양수를 찾아서

· 의미심장한 고려 말 100년

· 삼산양수는 어디인가

· '사냥터'와 '이상향' 사이

· 유교와 불교의 합의 과정

· 다시 생각해보는 '삼산양수'

 

고려시대의 길을 찾아서 1

· 서울로 가는 길

· 한양에 들기 전 의관 정제하던 남경역

· 워터레벨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프로토타입

· '아름다운 청년'과 '향기로운 산' 마주보다

 

고려시대의 길을 찾아서 2

· '향교동'에서 길을 묻다

· 홍어집, 점집, 요정, 한복집… 푸근한 길

· 고려에서 조선으로 건너뛰는 길

 

제2부 꿈꾸는 인왕산

 

꿈꾸는 인왕산 1 : 왕실의 터전

· '땅' '물길' '하늘'을 읽으면 도시가 달라 보인다

· 태종과 세종이 '왕의 꿈'을 익힌 동네

· '왕의 꿈'과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의 꿈'

· 안평의 앵글

 

꿈꾸는 인왕산 2 : 모진 인연의 고리 속에서

· 경덕궁 또는 경희궁, '왕기설'의 실체

· 인경군, 내쫓긴 자리로 다시 돌아온 백성들

· 자수궁, 옛 여인들의 자취

· 기억정치, 과거를 상기하되 미래를 겨냥하는

· 육상궁에서

· 같고 또 다른 왕실의 꿈

 

질곡 속의 희망 찾기 1 : 서촌, 선비의 동네로 거듭나다

· 목소리는 없었으되 큰 울림으로 남은 사람

· 아직도 숨어 있는 대은암, 지척이지만 갈 수 없는 곳

· '경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스님에게서 비롯된 장의동과 청풍계

· 옛길을 찾으면 도시가 보인다

 

질곡 속의 희망 찾기 2 : 선비들의 자신감, 정점에 서다

· '백세청풍'의 계곡에 충절과 의리를 심고

· '맑고 시원한 동네'에서 최고조에 이른 시대정신

· 옥류동, '맑음' 혹은 '흐림'

· 옥류동과 청휘각은 어디에

· 이항복과 후손 이희영이 공존하는 서촌

· 「인왕제색」에 담긴 희망의 빛

 

옥계에서 꾸는 꿈 1 : 중인들, 시대를 타고 넘다

· 옥계, 사대부와 중인이 공존하던 지역

· 최고의 화원을 통해 그림을 남긴 뜻

· '송석원', 삼중의 의미를 갖다

 

옥계에서 꾸는 꿈 2 : 중인들, 승리하다

· 다시 '송석원'으로… 그 각자는 어디로 갔을까?

· 그림을 읽으니 도시가 보인다

· 중인문화의 절정, 송석원시사

· 꿈꾸는 옥계

 

제3부 서촌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

 

꿈을 잃은 서촌 1 : 친일파들의 폭력이 휩쓸다

· 정체성 변화로 몸살 앓는 서촌… 친일파들이 몰려들다

· '한양 아방궁'… 큰 것은 좋다

· 세도정치의 현장으로 전락한 송석원

· 한 시대의 폭력적 청산

· 벽수산장과 윤덕영

 

꿈을 잃은 서촌 2 : 조상의 터전에서 제 정신 갖고 살기

· 동농 김가진은 누구인가

· "깊은 밤 잠들어 꿈속이라 몇이나 깨었을꼬"

· 상하이에서… 계속되는 생각의 진화

· 남는 문제들

 

다시 꿈꾸는 서초 1 : 함께 걷는 길

· '천재'를 '박제'로 만들어버린 곳

· 아름다운 동행

· 그의 괴로움에는 정말 이유가 없었을까

· 말을 하면 바로 시가 되던 시절

 

다시 꿈꾸는 서촌 2 :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사회운동과 미술, 포기할 수 없는 두 축

· 서촌에서 다시 만난 형제, '민족'을 발견하다

· 해방정국… 설 자리를 잃다

· 암흑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온 빛

 

서촌에서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인들

· 종달새, 노래를 잃다

· 시인, 길을 잃고 서촌에 유폐되다

· 앨리스 현,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땅을 못 찾다

· '옥인동 사람' 현순 - 앨리스 현 부녀의 동행

· '특이한 존재'의 가는 길

 

오늘의 서촌 : 결코 끝나지 않은 꿈

· '정직한 화공'의 마지막 불꽃

· 결코 끝나지 않은 꿈

 

에필로그 ● 서울의 내일을 향한 꿈

참고문헌

도판출처

찾아보기

「서울지도(Map of Seoul)」(동판본, 45.6×45.2cm, 1902년) 일부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 위치한 아차산 제5보루에서는 한강 유역과 그 남쪽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보루는 5~6세기 무렵 이 지역을 차지했던 고구려가 백제의 동태를 살피고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이었다.

서울시 북한산 비봉의 정상에 서 있는 진흥왕 순수비. 사진의 비석은 모형이며, 원본은 국보 제3호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아차산 보루와 함께 이 순수비도 서울 지역이 삼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음을 증명한다.

「경복궁전도」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경복궁 터전의 지형과 물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연 하천의 물길을 살려 향원정과 경회루 연못, 금천교 등을 경유하게 유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정도전. 조선 건국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방원과의 갈등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는 바람에 조선시대 내내 그늘에 가려 있었으나 그가 새 왕조의 설계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무학. 그 역시 조선 건국기에 이성계의 측근으로서 큰 역할을 했고 특히 서울로의 천도에는 불교계를 대표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조선시대의 역사는 전혀 온당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세검정 쪽에서 자하문 고개로 막 올라서면 나타나던 창의문 모습. 조선시대 말기인 1890년대에 외국인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이곳에 이르면 비로소 남경에 도착한 셈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이 고개길은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

19세기 『대동여지도』 중의 「경조오부도」.

18세기에 제작된 「한양도성도」(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위)와 1927년도에 제작된 「경성시가도」(아래)에서 종로와 청계천 사이의 골목길을 비교해보자.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몇 개의 비슷한 루트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영조의 청계천 준천 직후인 1765년 제작된 「사산금표도」(목판본, 93×60cm, 1765년). 청계천이 오간수문으로 나가기 직전 양쪽에 '가산(假山)'이 표기돼 있다. 흥인지문 밖 안암천 물길이 한번 휘어 도는 위치의 구릉지 바로 아래에 고려시대 남경역의 후신인 '보제원'이 적시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수선전도」 중 창의문 넘는 길이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표기된 부분.

1930년대에 촬영된 서촌 지역의 항공사진.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의 서쪽에 가득 들어찬 집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물길, 골목길의 위치가 선명하다. 사진 왼쪽 가장자리 중간에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 '사직단'이며, 거기서 남동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내려오다 만나는 대형건물군이 인경궁 터전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청평위궁'이다. 그러나 이 무렵이면 이미 일제 식민당국의 대토지 점유가 많이 진행돼 사진 왼쪽 하단의 주택단지는 경희궁을 잠식하고 들어선 '전매국 관사'이며, 경복궁 담장 서쪽의 단지는 창의궁 자리에 들어선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다. 사진 왼쪽 위의 인왕산 기슭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서양식 건물은 윤덕영의 '벽수산장'이다.

1902년 동판으로 제작된 「서울지도」 중 서촌 부분. 준수방도 보인다.

인왕산 아래 자하문로변에 위치한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바로 그 자리가 위의 지도에 '준수방(俊秀坊)'이라고 표기된 지역이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의 「수성동」. 이 그림의 기린교 건너 왼쪽 바위 뒤쪽에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다.

김영상이 1950년대 말에 촬영한 기린교.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최근 모습. 화면 왼쪽 중간의 바위 계곡에 걸쳐진 돌다리가 기린교다. 1751년 겸재 정선의 그림과 그로부터 200년 후의 사진에 나타났던 소박한 돌다리가 21세기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몽유도원도.

최근 장서각에서 발굴된 청평위궁의 도면이다.

유일하게 한 장 남은 자수궁교의 사진. 이 다리는 1927년 자하문로가 복개되고 확장되면서 지하에 파묻히고 말았다. 오른쪽 뒤의 산이 북악산인 점으로 미루어 남쪽에서 북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따라서 자수궁은 오른쪽의 건물들이 아니고 이 사진에 나타나지 않은 왼쪽 나무가 우거진 안쪽에 있었던 것 같다.

창의궁에서 창의문까지 서촌의 영역 전체를 보여주는 「한양도성도」의 일부. 청계천 상류에 해당하는 물길 본류에 3개의 다리가 표시돼 있다. 남쪽에서부터 '금청교'는 지금의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의 적선시장 입구에, '수궁교(자수궁교)'는 신한은행 효자동지점이 있는 효자동사무소 앞 사거리에, '신교'는 푸르메자활센터가 위치한 청운동사무소 앞 사거리에 각각 있었다.

「한양도성도」 중의 창의궁 주변. 동쪽으로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북쪽으로는 경복궁의 서쪽 문인 연추문(영추문), 서쪽으로는 '금청교' 너머로 체부동과 인경궁 등이 각각 자리 잡았고, 남쪽으로는 대단히 복잡한 도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서십자각과 월성위궁, 내자시, 장흥교 등이 있었으며, 송담교는 종침교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 청와대와 담장을 끼고 있는 칠궁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로서 죽은 뒤 종묘에 합사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당초 이 자리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육상궁만 있었으나 나중에 후궁 6명의 사당이 더 옮겨와 칠궁이 되었다.

겸재 정선의 『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55년) 중의 「 청송당 」.  화면 중앙의 큰 건물이 청송당이고 그 아래 작은 건물 앞의 바위에 후대 사람들이 '청송당 유지'라는 바위 각자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지금 경기상고 뒤뜰에 있는 '청송당 유지' 바위 각자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의 「대은암」.  건물 뒤쪽으로 시커멓게 표시된 큰 바위 두 개가 보이지만 어느 것이 대은암인지는 분명치 않다. 청와대 뒤뜰과 북악산 자락이 개방되어야 확인할 수 있겠다.

사진으로만 전하는 북악산 자락의 여러 바위 각자들. 위는 김영상이 촬영한 '도화동천', 아래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촬영해 공개한 '쌍계동', '악록' 등이다.

겸재 정선의 「삼승조망」(개인 소장, 위) 「장안연우」(간송미술관 소장, 가운데) 「동대상춘」(개인소장, 아래)

서촌 지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정선은 서촌의 풍경을 많이 남겼는데 각각 다른 시기에 그려진 이 석 점의 그림은 서촌의 전경을 파노라마식으로 매우 아름답게 담았다. 이는 틀림없이 그의 서촌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남산의 위치가 화폭에서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면 정선의 앵글을 추정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창의문」. 이 그림에 나타난 촘촘한 계단이 지금 창의문로 위와 아래로 난 바로 그 계단으로 계승되었다. 창의문에서 내려오던 계단이 한번 꺾이는 위치에 지금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서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백운동」.  창의문에서 내려오는 계단의 서쪽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나중에 김가진의 백운동천과 백운장 영역으로 계승된다.

1927년에 발간된 「경성시가도」 중의 서촌 물길 부분. 파란 색 물길로부터 그 동쪽의 골목길까지의 영역이 합쳐지고 직선화돼 지금의 자하문로가 되었다. 지도 상단의 물길 바로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경복고등학교(당시 제2고등보통학교)이고, 그 동남쪽의 건물군은 지금의 '칠궁'인데 덕안궁이 합사(1929년)되기 전이어서 '육궁'이라고 표기돼 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간송미술관 소장, 1739년, 58.8×133cm).  상당히 큰 그림이지만 화면 가득 청풍계의 짙은 녹음과 바위 절벽,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보이는 듯 숨은듯 자리 잡은 건물들이 인상 깊게 표현됐다.

겸재 정선의 또 다른 「청풍계」(고려대 박물관 소장, 1730년, 36×96.2cm).  간송본에 버금가게 큰 그림으로 넓은 범위의 청풍계 전경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청풍계 안팎의 음영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백세청풍' 각자의 요즘 모습이다. 개인주택의 축대에 파묻힌 것은 재산권 행사이니 할 말이 없다 쳐도, 그 내력을 뻔히 알 텐데 이렇게 시야를 방해하는 철책을 두른 것은 무슨 심사일까?

 

천민리 떨어진 곳 모래바람 날로 불어

천지 온통 흐려지고 어두움에 잠겨버렸네

멀리 우리 집 맑고 시원한 그곳

붉은 먼지 한 뼘도 없구나

- 김상헌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독락정」.  '맑고 찬 시냇물'이 사시사철 흐르던 계곡에 작은 정자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 정자가 바로 김상헌의 손자 김수홍이 지은 것이다.

「한양도성도」에서 장동 지역 부분도. 창의문과 신무문(경복궁 북문) 사이에 도화동, 유란동, 백운동, 청풍계 등의 지명과 육상궁, 청송당, 독락정 등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육상궁의 바로 동쪽에 무속헌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청휘각」.  그림의 화제에 '청휘각(晴暉閣)'이라는 표현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대에 대부분 '청휘각(淸暉閣)'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한양도성도」에서 옥류동 부분.  청풍계에서 세심대(동대)를 넘어 남쪽 지역이며, 기린교가 있는 인왕산 물길의 북쪽이다. 이 큰 물길에 합류하는 작은 물길을 끼고 양쪽 야트막한 경사지에 옥류동이 자리 잡았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위).  지금의 동네 주민들은 '가재'라는 말의 출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이 청휘각 지역의 두 번째 주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온 것이었다. 이 우물은 1960년대 이후 사실상 식수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가운데와 아래 사진은 최근 가재우물 위의 바위를 타고 주택 건물이 들어앉은 모습(가운데)과 그 건물의 아래에 가재우물 자리가 쇠창살에 가로막힌 채 처참하게 방치된 모습(아래).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 「필운대」.  지금은 그림과 같은 청정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국보 제216호.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그림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