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6 그림을 본다는 것
케네스 클라크 지음 엄미정 옮김
2013, XO BOOKS
대야도서관
SB080006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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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At Pictures
20세기 최고의 안목 케네스 클라크가 뽑아낸
명작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케네스 클라크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명작에서 잘도 뽐아낸다. 그림에 담긴 주제와 드라마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통찰을 거쳐 명료해지는데, 때로는 화가의 직접화법인양 생생한 실감이 드는 것은 그의 서술이 탁워한 설득력을 지닌 덕분이다. 명작이 간직한 감동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저자의 집요함은 경이롭다. 작가의 감춰진 생애와 무의식까지 파헤칠 때 그 놀라움은 절정에 이른다. 케네스 클라크와 함께라면 작품의 진면목에 쉽게 다가갈 테다. 물론 독자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그림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저자 손철주
나는 그림이 주는 기쁨을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려면 그림에 관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미술은 막대사탕이나 풀향기가 나는 상큼한 퀴멜주 한 잔처럼 한 순간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위대한 미술 작품의 의미 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의미의 일부가 영혼에 활력을 주듯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잇어야만 한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활발한 참여를 요하는데,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림 보는 연습을 하는 데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믿을 만한 그림 애호가의 경험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그거다. 나는 열여섯 점의 위대한 그림들 앞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과정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했다.(중략)
그림의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색채는 조화로운지, 소묘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는지, 세부를 살펴보고 즐기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가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작품을 즐기는 동안 만약 이 화가가 아주 능숙하게 자신의 의도까지 전달한다면, 한두 번 잠깐 동안은 회화의 특성에서 주제로 주의를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금방 다시 그림을 비평하면서 이 작품의 지배 동기 또는 근본 개념 같은 것들을 찾는다. 거기에서 그림의 전체적인 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 머리말 중에서
지은이
케네스 클라크 Kenneth Clark, 1903 ~ 1983
20세기 미술사 분야에서 최고 안목으로 꼽히는 영국의 미술사학자. 명작에 담긴 철학과 역사, 테크닉을 날카롭게 풀어내는 안목, 작가의 감춰진 생애와 명작의 비밀을 드라마틱하면서도 품위 있는 유머로 엮어 내는 솜씨는 일품이다.
런던에서 출생한 클라크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윈체스터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옥스퍼드 애슈몰린박물관의 학예사를 거쳤다. 역대 최연소인 30세의 나이에 내셔널갤러리 관장으로 발탁될 만큼 일찌감치 영국 미술계에서 존경받는 심미주의자로 평가받았다.
내셔널갤러리 관장으로서 루벤스, 렘브란트, 컨스터블, 푸생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영입한 클라크는 독일군 공습을 피해 소장품을 웨일즈의 동굴로 옮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장품이 없는 내셔널갤러리에서 영국민을 위로하는 음악회를 열만큼 대중과 호흡하는 데 관심이 컸던 그는 1969년 BBC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문명 Civilization」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미술을 통해 서구 문명의 역사를 조망한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작가, 제작자, 진행자로 참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기도 했다.
클라크는 미술사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풀어내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로열컬렉션의 왕 / 여왕의 초상화 감독관, 옥스퍼드대학교 초빙교수, 영국예술협회 회장을 두루 역임할 정도로 미술 이론과 실무, 강의 능력까지 갖춘 팔방미인이었다.
집필 작업을 위해 내셔널갤러리 관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클라크는 『고딕부활The Gothic Revival』(1928) 『레오나르도 다 빈치 : 화가의 길Leonardo da Vinci : An Account of His Development as an Artist』(1939) 『풍경에서 미술로Landscape into Art』(1940) 『누드 : 이상적 형태에 대한 연구The Nude : a study in ideal form』(1956) 『렘브란트와 이탈리아 르네상스Rembrandt and the Italian Renaissance』(1966) 『블레이크와 환상 미술Blake and Visionary Art』(1973) 『낭만주의의 반역The Romantic Rebellion』(1973) 『명화란 무엇인가What is a Masterpiece?』(1979) 『여성미Feminine Beauty』(1980) 등 주옥같은 명저를 남겼다.
옮긴이
엄미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동대학원에서 서양 미술사를 전공했다. 미술 전문지와 문호ㅘ교양지 기자를 거쳐 출판사에서 기획편집자로 일하며 '아트가이드' '아트클래식' '아트스페셜' '즐거운 지식여행' 시리즈 등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 『아르코 미술 작가론 - 동시대 한국 미술의 지형』 출판 간사로 일했고, 『한국의 예술 지원사』 등을 편집했다. 현재는 미술 관련 책을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판도라의 도서관 - 여성과 책의 문화사』 『죽음과 부활, 그림으로 읽기』(아트가이드 시리즈)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아트스페셜 시리즈) 『손 안에 담긴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타센 베이식아트 시리즈)가 있다.
우리 세대에게 그림 보는 법을 가르쳤던
로저 프라이를 기억하며
차례
머리말
티치아노 그리스도의 매장
벨라스케스 시녀들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라파엘로 고기잡이의 기적
와토 제르생의 간판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델프트의 베르메르 화실의 화가
컨스터블 뛰어오른 말 습작
고야 1808년 5월 3일
쇠라 물놀이, 아스니에르
터너 눈보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안나와 성모자
쿠르베 화가의 화실
보티첼리 그리스도의 탄생
렘브란트 자화상
그림 목록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TIZIANO
티치아노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 티치아노라고 불린 티치아노 베첼리오(1487년 무렵 ~1576)
캔버스에 유채, 148×20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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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토바 공작 소장품이었다가, 1628년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구입햇다. 찰스 1세 소장품 판매 때 영연방이 120파운드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이후 17세기에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로 꼽히는 독일 출신 에버하르트 야바흐(1618 ~ 1695)가 구입해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3,200프랑에 넘긴 이후 프랑스 왕실이 소장했다가 루브르미술관으로 넘어왔다.
사라진 조르조네 그림의 모작, <자화상>, 1510년 무렵, 헤르초크안톤울리히미술관, 브라운슈바이크, 독일
티치아노, 성모 마리아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스도의 매장>의 일부
티치아노, <성모 승천>, 1516 ~ 1518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베네치아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매장>, 1507년, 보르게세미술관, 로마
티치아노, <그리스도의 매장>, 1559년,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티치아노, <성모 영보>, 1559 ~ 1564년, 산 살바토레 성당, 베네치아
티치아노, 사도 성 요한의 얼굴, <그리스도의 매장>의 일부
VELASQUEZ
벨라스케스
시녀들
<시녀들>,
디에고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1599 ~ 1660), 캔버스에 유채, 313×27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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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년에 스페인 펠리페 4세(1605 ~ 1665)의 명령으로 그린 이 그림은 마드리드의 알카사르 궁전에 걸기 위한 것이었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벽에 걸린 그림들은 루벤스와 요르단스의 원작을 델 마소가 모사한 작품들이다.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오스트리아 황비가 되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렸던 마르가리타 공주의 또 다른 초상화 두 점은 현재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무릎을 꿇고서 어린 공주에게 초콜릿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붉은 색 그릇을 건네는 시녀는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사르미엔토이며, 또 다른 시녀는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이다. 난쟁이들의 이름은 마리바르볼라와 니콜라시토이다. '구아르다다마스' 곧 상궁으로 알려졌으며, 마르가리타 공주의 교사인 여인은 도냐 마르셀라 데 울바이다. 문간에 서 있는 남자는 이 화가의 친척인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로 여겨진다. 화가는 붉은 십자가가 있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복을 입었지만, 그는 1658년 6월 12일에야 산티아고 기사단 작위를 받았다. 따라서 왕이 <시녀들>을 보고서 '뭔가가 빠졌다'고 하며 친히 붓을 들어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기가 막힌 솜씨를 보면 십자가는, 틀림없이 훗날 벨라스케스 자신 또는 델 마소 중 하나가 그렸을 것이다.
<시녀들>은 1666년에 기록된 알카사르 궁전의 소장품 목록에 들어 있었다. 이 그림은 1734년에 있었던 알카사르 궁전 화재 때 피해를 입지 않았고 새 궁전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라 파밀리아', 곧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불렸다. 1819년에 프라도미술관이 세워지자, 이 그림은 그곳으로 옮겨졌다. 스페인 회화를 연구했던 미술사가 페드로 데 마드라소(1813 ~ 1898)는 1843년 판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면서, 이 그림에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벨라스케스, <성모의 무염시태>, 1618년, 내셔널갤러리, 런던
벨라스케스,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복을 입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시녀들>의 일부
벨라스케스, <난쟁이 돈 세바스티안 데 모라>, 1645년 무렵,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벨라스케스,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시녀들>의 일부
ROGIER VAN DER WEYDEN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흔리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1400년 무렵 ~ 1464)이라고 불렸던 로지에 드 라 파스튀르.
나무판에 템페라와 유채, 220×2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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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루뱅 시의 궁수 길드가 노트르담 오르 데 뮈르 성당에 봉헌하려고 주문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부인인 헝가리의 마리아가 이 그림을 원 주문자에게서 구입하여 스페인으로 보냈다. 1547년 이 그림은 마드리드의 에스코리알 궁전에 들어가, 1945년까지 그곳에 있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 ~ 1975) 장군의 지시로 프라도미술관으로 이송되었다.이 그림의 제작 연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많다. 1430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기사 로베르 드 마스밈(1387 ~ 1430)을 그렸다고 추정되는 캉팽의 초상화가 있다. 이 그림에서 반 데르 바이덴이 그린 니고데모가 캉팽 초상화의 인물과 닮았다는 이유로, 몇몇 권위 있는 연구자들은 1430년 작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자들은 이 그림이 1443년 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1435년이라는 연도는, 이 그림의 양식과 당시 반 데르 바이덴이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는 사실 두 가지 면에서 추정하는 연대이다. 이 걸작을 그린 결과 반 데르 바이덴은 자신의 삶과 화가 경력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완성 직후부터 걸작으로 인정받아, 1443년에 이미 모사본이 나올 정도였다. 1569년에 플랑드르 출신 화가 미카엘 콕시(1499 ~ 1592)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주문으로 이 그림의 모작을 완성했는데, 콕시의 그림은 프라도미술관에 걸리곤 했다. 지금은 콕시의 그림이 반 데르 바이덴의 원작이 있던 에스코리알 궁전의 그 자리에 대신 걸려 있다.
반 데르 바이덴, 성모 마리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일부
반 데르 바이덴, <십자가 처형>, 1455년 무렵, 산 로렌초 델 에스코리알 수도원, 마드리드
반 데르 바이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일부
플레말의 거장, 뉘우치지 않는 도적, <플레말 수도원 제단화>의 일부로 추정, 1410년 무렵.
프라 안젤리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430년대, 산마르코수도원미술관, 피렌체
왕의 정문 기둥 조각, 1145 ~ 1155년, 노트르담 대성당, 사르트르
반 데르 바이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일부
반 데르 바이덴, 사도 성 요한과 세 마리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일부
반 데르 바이덴, 눈물을 흘리는 니고데모,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일부
DELACROIX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1798 ~ 1863), 캔버스에 유채, 410×4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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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년에 베르사유 궁전 장식용으로 주문된 이 그림에는 1840년이라는 제작 연대와 들라크루아의 서명이 있다. 1885년에는 루브르미술관으로 이양되었다. 1852년에 들라크루아는 똑같은 주제를 원작보다 작게 그렸는데, 이 그림은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모로(1826 ~ 1898)가 소장하고 있다가 역시 루브르미술관으로 양도했다.
들라크루아, <녹색 조끼를 입은 자화상>, 1837년, 루브르미술관, 파리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년, 루브르미술관, 파리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루브르미술관, 파리
들라크루아, 죽어가는 여인,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의 일부
들라크루아, 두 여인,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의 일부
로댕, <다나이드>, 1885년, 로댕미술관, 파리
들라크루아, 보스포루스 해협과 십자군,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의 일부
RAFFAELLO
라파엘로
고기잡이의 기적
<고기잡이의 기적>, 라파엘로 산치오(1483 ~ 1520),
이어 붙인 종이에 수채, 318.8×4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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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1515년 교황 레오 10세가 주문했던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열 장 중 하나이다. 이 태피스트리는 시스티나 소성당 창문 아래, 그때도 지금과 같았던, 휘장을 그려 장식한 벽의 일부에 걸릴 예정이었다. 1516년 말 완성된 이 밑그림은 브뤼셀로 보내져 태피스트리로 제작되었다. 이 태피스트리의 제작 책임자가 피테르 반 엘스트 1세였다. 그는 직조기로 빠르게 작업하여, 1519년 크리스마스에 완성된 태피스트리 일곱 점을 시스티나 소성당에 걸었다. 한 점을 제외한 아홉 장의 밑그림은 브뤼셀에 남았다.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를 위한 태피스트리를 제작했다. 1620년 무렵까지도 이 밑그림으로 태피스트리를 계속 만들었다. 1623년 이후 이 밑그림 중 일곱 점을 찰스 1세가 구입했으며, 그것으로 몰트레이크 태피스트리 제작소에서 태피스트리를 여러 벌 직조했다. 찰스 1세의 소장품을 처분할 때, 이 밑그림은 공화정 수립의 일등 공신 올리버 크롬웰(1599 ~ 1658)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찰스 2세가 돌려받았다. 17세기 말에 몰트레이크 태피스트리 제작소가 문을 닫자 밑그림은 햄프턴 궁전으로 옮겨져, 왕실 건축물 감독으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퍼 렌(1632 ~ 1723) 경이 이 작품들을 위해 특별히 설계한 전시실로 들어갔다. 이후 밑그림은 여러 궁전을 떠돌다가, 1865년 빅토리아 여왕이 부군 앨버트 공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우스켄싱턴박물관, 지금의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 대여했다.
태피스트리를 직조할 때도 그랬지만 버킹엄 궁전과 윈저 궁전으로 자주 옮겨지는 과정에서 이 밑그림은 상당히 손상되었고, 여기저기를 복원했다. 복원 작업은 주로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화면 전체의 효과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복원 후에는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부분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라파엘로가 여러 조수들을 고용해 작업했다고 해도 주요 부분들, 이를테면 성 베드로의 얼굴 같은 부분은 라파엘로가 직접 그렸던 듯하다.
라파엘로, 사도 성 야고보와 사도 성 요한, 제베대오, <고기잡이의 기적> 일부
라파엘로, <볼세나의 미사>, 1512년, 스탄차 델리오도로, 바티칸 궁전, 로마
라파엘로, 성 베드로의 얼굴, <고기잡이의 기적> 일부
라파엘로,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성 비드로와 성 안드레아, <고기잡이의 기적> 일부
WATTEAU
와토
제르생의 간판
<제르생의 간판>, 앙투안 와토(1684 ~ 1721),
캔버스에 유채, 162×30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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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와토의 친구이자 화상인 에드몽드 프랑수아 제르생이 퐁 노트르담 35번지에 있던 화랑 간판으로 주문했다. 폐허 풍경화로 유명했던 화가 위베르 로베르(1733 ~ 1808)가 그렸던 그림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이 거리 가게들의 1층 전면은 아치형이었다. 와토는 여러 아치 중 하나에 이 그림을 끼우게끔 구상했다. 화면에는 애초에 아치형으로 계획했던 흔적이 여전히 눈에 띤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히 자연스럽게 사각형 화면으로 변형되어서, 처음부터 사각형 화면에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한편 1732년에는 판화가 피에르 알렉상드르 아블린(1702 ~ 1760)이 <제르생의 간판>의 동판화를 제작했는데, 거기서는 화면을 사각형으로 보여 주고는 원래의 아치를 표시했다. 아치 바깥 부분은 와토가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만일 그렇다면, 분명 아치의 외부는 와토의 제자였던 장 밥티스트 파테르(1695 ~ 1736)가 그렸을 것이다. 그는 <제르생의 간판>을 모사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제르생은 이 그림이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 애호가로 유명했던 장 드 줄리엔에게 팔았다. 1745년과 1750년 사이에 프리드리히 루돌프 폰 로텐부르크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 ~ 1786) 대왕을 위해 이 그림을 구입했고, 이후 <제르생의 간판>은 포츠담 궁전 소장품이 되었다. 이 그림은 1760년 이전에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었는데, 아마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에 적당하도록 화면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던 듯하다. 1952년까지 두 개로 쪼개진 상태로 독일 제국의 소장품이었으며 현재는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걸려 있다.
제르생의 화랑은 '위대한 군주(루이 14세)의 가게'로 불렸다. 화면 왼쪽에 보이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이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제르생의 간판>을 연구했던 필자들은 장중한 루이 14세 양식이 물러가고 새로운 로코코 양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알레고리로 설명해 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와토, 라벤더 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 <제르생의 간판> 일부,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베를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시바의 여왕, <진정한 십자가의 전설> 일부, 1466년 완성,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아레초
와토, 루이 14세의 초상화 포장, <제르생의 간판> 일부
와토, <무심한 남자>, 1717년, 루브르미술관, 파리
와토, <키테라 섬을 향한 출항>, 1717년, 루브르미술관, 파리
와토, <즐거움이 넘치는 무도회>. 1715 ~ 1717년, 덜위치미술관, 런던
와토, 그림 가게 손님들, <제르생의 간판> 일부
EL GRECO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일명 엘 그레코(1541 ~ 1614), 캔버스에 유채, 273×1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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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톨레도 대성당 성구실의 주제단화로 그려졌으며, 현재도 그곳에 있다. 1577년 7월 2일에 엘 그레코는 이 그림에 대한 계약금으로 400레알을 받았다. 잔금을 받기 위해 그는 톨레도 대성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579년 6월 23일 3,500레알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꼽힌다. 앞서 본문에서 밝혔듯이, 같은 주제를 그린 수많은 레플리카 중 몇 점은 엘 그레코 만년작에 속한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가 매달릴 십자가를 만드는 남자,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일부
미켈란젤로,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1546 ~ 1550년, 파올리나 소성당, 바티칸 궁전, 로마
엘 그레코, 관객을 향해 손짓하는 관리,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일부
엘 그레코, 세 마리아,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일부
엘 그레코, <성 마우리시오의 순교>, 1580 ~ 1582년, 산 로렌초 델 에스코리알 수도원, 마드리드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얼굴이 드러난 수건을 든 베로니카>, 1580년 무렵, 산타크루스미술관, 톨레도
엘 그레코, 하늘을 쳐다보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일부
VERMEER OF DELEF
델프트의 베르메르
화실의 화가
<화실의 화가>, 델프트 출신 얀 베르메르(1632 ~ 1675),
캔버스에 유채, 130×1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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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베르메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팔리지 않았다. 몇 달 후 베르메르의 부인이 빚 1,000플로린에 대한 담보로 이 그림을 시어머니에게 양도했다. 18세기에 고트프리트 폰 슈비텐 남작의 소장품이 되면서 이 그림은 빈으로 왔다. 1813년에는 체르닌 백작 요한 루돌프가 이 그림을 구입했는데, 그는 이 그림을 데 호흐의 작품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1942년까지 체르닌의 소장품이었던 이 그림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1889 ~ 1945)에게 압수되어 그의 별장이 있던 독일 바바리아의 베르히테스가덴으로 옮겨졌다.
피테르 데 호흐라는 이름은 그림 속에서 화가가 앉아 있는 의자 가로대에 기록되었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그림 속 화가가 데 호흐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요즘은 한동안 베르메르가 세간에서 잊혔던 시기에 첨가된 거짓 서명이라는 해석이 더 신빙성 있다고 본다. 베르메르의 서명은 지도에 있는데, 모델이 입고 있는 옷깃 바로 뒤에 보인다. 요즘 학자들은 모델을 아홉 뮤즈 중 역사의 여신 클리오라고 해석하는 편이며, 탁자에 놓인 물건들이 그 외 뮤즈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요즘 학자들은 이 그림이 회화 예술을 나타낸 알레고리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이 그림은 1675 / 1676년 작품 목록에 '회화 예술De Schiderconst'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다.
모델의 얼굴처럼 이 그림에서 매우 섬세한 부분 중 몇 군데는 과거 복원 과정에서 심하게 닦아 냈기 때문에 색을 살짝 다시 입힌 상태다.
베르메르, <뚜쟁이 여인>, 1656년, 고전거장미술관, 드레스덴
베르메르, <버지널을 치는 여인> 일부, 1662 ~ 1665년, 버킹엄 궁전, 런던
베르메르, 명성의 여신, <화실의 화가> 일부
CONSTABLE
컨스터블
뛰어오른 말 습작
<뛰어오른 말> 습작, 존 컨스터블(1776 ~ 1837),
캔버스에 유채, 125.7×18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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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과 1825년 사이에 그린 이 그림은 1825년에 로열아카데미에 전시된 <데덤 수문>을 위한 대형 습작이다. 컨스터블이 세상을 떠난 후인 1838년 5월 포스터스에서 J. 아치버트가 이 그림을 구입했는데, 이후 헨리 본에게 넘어갔다. 1900년에 세상을 떠난 본이 이 그림을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에 유증했다.
컨스터블, <들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1831년, 내셔널갤러리, 런던
컨스터블, <뛰어오른 말>, 1824 ~ 1825년, 로열아카데미,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