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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5. 09:1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48 풍속화(하나)

 

이태호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20

 

082

빛12ㄷ  164

 

빛깔있는 책들 164

 

이태호-------------------------------------------------------------------------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고대 산수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김홍도의 진경산수' '다산 정약용의 예술 세계' '조선시대의 초상화' '1940년대 친일 미술' 등이 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그림으로 본 옛 서울」 등이 저서와 평론집 「우리 시대, 우리 미술」이 있다.

 

|차례|

머리말

풍속화의 시대 배경과 의의

17, 18세기 초 풍속화의 태동을 예고하는 기록화

18세기 전반 선비 화가들의 속화

    민중에 대한 인식 변화와 사실적 창작 태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오명현(吳命顯), 윤용(尹熔) 등 풍속화의 확산

조선 후기 풍속화를 남긴 화가들

 

▲ 김홍도의 부전도

▲ 「북새선은도권」의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길주 관아의 중앙 대청에는 붉은 관복을 입은 시험관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의 앞마당에는 말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무과 시험 장면이, 왼쪽의 초당에는 문과 시험을 치르는 유생들 모습이 보인다. 한시각. 1664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57.7×16.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북새선은도권」의 함흥방방도(咸興防榜圖)  함흥 관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한시각. 1664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56.7×169.0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기사계첩(耆社契帖)」의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광화문 밖 기로소에서 가진 연회 장면이다. 차일 친 건물 안에 원로 중신들이 음식상을 앞에 놓고 두 동자의 춤을 구경하고 있으며 밖에는 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처용무가 진행되고 있다. 마당 아래 오른쪽으로 백발이 성성한 두 촌로가 처용무의 흥에 맞추어 몸짓을 하는 광경과 아래쪽 좌우에 가족들로 보이는 선비와 여인, 아이들이 배치되어 있다. 잘 정돈되고 딱딱하게 구성된 화면에서 그 권위의 균형을 깨고 있는 이런 표현 방식은 궁중 기록화의 새로운 전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진여, 장태홍 등 합작. 1720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43.9×67.6센티미터. 보물 제638, 639호.

▲ 「기사계첩」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부분  기마 행렬의 위에 구경나온 사람들을 그려넣었다. 이 행렬도는 딱딱한 수평식 횡렬 구성이면서도 세세 인물들의 표정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선비 차림의 남정네나 아낙네와 아이들이 말과 소와 나귀 등과 함께 삼삼오오 서 있는 모습은 현장감을 살리면서 풍속화적 맛을 돋우어 준다. 김진여, 장태홍 등 합작. 1720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43.9×67.6센티미터. 보물 제638, 639호.

▲ 평양감사향연도  궁중이나 양반 관료의 권위적 기록화에서 민간인 구경꾼이나 민중 삶이 보다 다양하고 폭넓게 그려지는 풍속화적 진면목은 풍속화가 유행하는 18세기 후반 이후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필자 미상의 '평양감사향연도'이다. 아래는 그 부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채색. 71.2×196.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평양감사 선유도(船遊圖)  위의 향연도와 같은 필치로 그린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대동강에서 벌어진 향연 장면인데 잔치를 위해 밤을 밝히는 장면과 성곽 위에 횃불을 들고 나온 평양 사람들의 도열 모습은 장관이다. 아래는 그 부분이다.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채색. 71.2×196.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 부분  조선 후기 궁중 기록화 가운데 풍속화적 해석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S자 형의 길을 따라 진행되는 정조의 행차 행렬도 그러하려니와 그 행차를 구경나온 각종 사람들의 세세 표정들이 생동감 넘친다. 필자 미상. 18세기 말. 비단 수묵 채색. 156.5×65센티미터.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리시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 옥(玉) -

 

모기는 일어나고 파리는 잠드니 날이 더울까 두렵고

푸르고 설익은 보리는 밥을 끓여 먹을 수가 없구나

이웃집 개는 짓고 외상 술빚은 급한데

고을관리마저 세금을 재촉하러 깊은 밤 문 앞에 이르렀구나

- 전가서사(田家書事) -

 

▲ 나물 캐는 두 여인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21.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목동오수도(牧童午睡圖)  윤두서의 '쟁기질과 목동'에서의 목동 모습과 유사하다. 김두량이 "윤두서를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두 그림의 비교를 통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두량.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31×51센티미터. 평양조선미술관 소장.

▲ 짚신 삼는 노인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21.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선거도(旋車圖)  윤두서. 18세기 초. 비단에 수묵. 25×2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낮잠(樹下午睡圖)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1.8×24.8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쟁기질과 목동(耕畓牧牛圖)  윤두서. 18세기 초. 비단에 수묵. 25×2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돌 깨는 석공  강희언의 작품(18세기 중엽. 비단에 수묵. 22.8×15.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과 윤두서 작품(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22.9×17.7센티미터. 개인 소장. 아래)은 동일한 주제에 거의 같은 수법으로 그려졌는데 윤두서의 작품에는 김광국의 발문이 붙어 있다.

▲ 「사제첩(麝臍帖)」 표지  조영석의 소묘를 모은 것으로 시인 이병연의 발문을 받아 놓은 화첩이다. 발문의 내용을 볼 때 "어진 제작의 거부로 왕의 노여움을 산 뒤 조영석의 그림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고 조영석 스스로 '사제첩'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이 화첩의 표지에는 '사향노루의 향기나는 그림'이라는 '사제(麝臍)'의 제목을 쓰고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범한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니라(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금기의 엄명을 덧붙여 놓았다. 이는 조영석의 당대 현실 풍속에 대한 높은 관심과 애정 또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관료 의식에서 나온 글귀이다. 특히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당부는 봉건 사회의 선비 관료가 서민층의 일상을 다룬 데 대한 사회적 제약을 염두에 둔 것이라 여겨진다.

▲ 바느질  조영석의 「사제첩」 가운데 바느질하는 그림이다. 어머니가 두 딸과 함께 바느질하는 장면으로 소묘풍이면서도 호분과 채색이 가해져 비교적 회화성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2.5×2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새참  조영석의 「사제첩」(아래)과 김홍도의 풍속화첩(위)에는 '새참'이라는 같은 주제 그림이 잇다. 조영석이 일렬 횡대식으로 배열한 데 비하여 김홍도는 원형 구도로 부감하여 포착한 점에 차이가 있다.

▲ 젖 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종이에 수묵. 28.5×44.5센티미터.

▲ 수공선거도(手工旋車圖) 부분  한여름 나뭇가지에 옷을 벗어 걸쳐 놓은 채 선반 작업에 열중해 있는 두 장인을 담은 그림이다. 옷의 회청색 음영이나 피부의 담홍색이 연녹색 잎의 나무와 어울려 있다.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 말과 마동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종이에 수묵. 23×24.1센티미터.

▲ 작두질  조영석의 속화들은 가벼운 선묘와 담백한 설채가 날코기 같은 소묘품이면서도 민중 생활의 순박하고 우직스런 감정들을 유감없이 실어 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개성미와 예술적 탁월함이 돋보인다. 종이에 수묵. 23×24.1센티미터.

▲ 이 잡는 노승  조영석.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3.9×17.3센티미터. 개인 소장.

▲ 편자 박기  갈색 말을 가마니 위에 눕혀 놓고 요동치는 말의 움직임을 조절하며 앞발의 편자에 못을 박는 인물의 야무진 표정과 동세는 생동감이 넘친다. 조영석.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8.7×19.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편자 박기  조영석의 '말징 박기'와 동일한 주제의 그림으로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린 것이다. 멀리 밥그릇이 놓인 소반을 배치하고 근경에 바구니와 소용 도구를 놓았으며 위통을 벗어젖힌 인물이 사실감을 자아낸다.

▲ 노승과 사미승  어리숙하면서도 투박한 선맛이나 동세 묘사의 정확한 표정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영석.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7.9×22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영석 농경도의 부분

▲ 선유도  조심스런 필치의 이 그림은 조영석 38세 때 작품으로 그의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풍속도들의 표현 수법과 유사하여 편년 설정에 기준작이 된다. 조영석. 1723년 작. 종이에 수묵 담채. 29×42센티미터. 개인 소장.

▲ 장기도  조영석. 소묘. 개인 소장.

▲ 설중방우도  방안에 유복을 입은 주인과 갓을 쓰고 방한모를 걸친 손님을 그리고 문밖에는 소와 두 시동의 만남을 그린 것으로 다분히 풍속화적이다. 물론 주변 수목과 설산 풍경이 전통적 산수 인물화의 구성법을 지녔지만 각 인물들과 풍물의 정확한 묘사를 통해 풍속화적 작품으로 훌륭히 재해석해 놓앗다. 나무와 산경 처리에는 젊은 시절 화보를 통해 익힌 필묵법의 잔영이 드러나 잇으면서도 조영석의 개성미에 감추어져 있다. 조영석.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115×5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지게꾼(負甕圖)  이 그림의 세부를 살펴보면 정확한 묘사를 위해 유탄과 엷은 담홍색의 밑선으로 조심스레 수정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 얼굴 표정, 팔과 손, 무릎과 장딴지의 근육, 지게와 어깨띠의 무늬, 짙은 먹으로 균형을 잡은 모자와 짚신 등 실물 사생에 의한 설명적 의도가 짙다. 그리고 아래와 오른쪽 언덕의 나무와 잡풀은 담채와 먹의 선염 효과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이 형식은 조선 중기 산수화풍의 잔영으로 윤두서나 조영석의 산수인물화와도 통한다. 바로 이 점이 시대감을 짐작케 하는 표현 기법이다. 그러면서도 오명현의 배경 처리는 선배들의 화풍보다 아교 포수된 명주 바탕에 풀어 낸 먹의 번짐이 한층 싱그럽다. 오명현. 18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9.7×20.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점괘 보는 노승(占卦圖)  오명현. 18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8.3×28센티미터. 개인 소장.

▲ 점괘 보는 두 승려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린 그림이다. 이런 승려 풍속도는 18세기 후반 풍속화에 와서 흔히 다루어졌던 소재이기도 하다.

▲ 허리띠 매는 취객(老人倚松圖)  괴팍한 품성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은 이 작품은 엄정하고 절제된 행동을 미덕으로 생각했던 양반 사회의 관행을 깨는 주제이다. 오명현. 18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26.6×20센티미터. 개인 소장.

▲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  숲 속에서 사제간에 마주하여 공부하는 선비의 생활상을 옮긴 그림으로 이인상의 낙관 말고도 화원 화가 김득신의 도인이 찍혀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바위와 언덕의 마른 붓질 표현이나 인물 의습 처리의 각이 지고 꾸불꾸불한 선묘법에서 이인상의 독특한 필치와 조영석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송하수업도'는 선비 화가가 자기 일상을 담은 풍속화로 손색이 없는 소재이며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처리된 풍경이 그 두 인물의 자세와 어울려 회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인상.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8.7×27.5센티미터. 개인 소장.

▲ 유천점 주막거리(柳川店逢爐圖)  종이에 수묵 선묘로 그린 이 그림은 황해도 연안 북쪽에 위치한 배천의 동리 '유천'을 지나다 만난 감흥을 형상화한 것이다. 늙은 버드나무가 있는 주막 안의 모습, 나귀 타고 주막을 찾아드는 나그네들, 주막 입구의 마구간과 말징 수리소 등의 표현은 거칠고 성글면서도 이인상만의 독특한 개성이 무르익어 잇다. 주막 거리의 정경을 실감나게 설명해 낸 훌륭한 사경 풍속화이다. 이인상. 18세기 중엽. 24×43.2센티미터. 개인 소장.

▲ 현정승집도  이 작품은 강세황이 직접 그린 뒤 서문에 밝힌 대로 6월 초복날 처남댁에서 개를 잡아 먹고 시회를 가진 기념으로 그린 소묘이다. 마루 한가운데 편하게 앉아 있는 이가 강세황 자신이다. 풍속화식으로 그린 것으로 시회도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 준다. 1747년 작. 종이에 수묵 담채. 35×101.8센티미터. 개인 소장.

▲ 활 쏘기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에서. 자세를 교정해 주는 사람의 진지함과 이를 받아 들이는 실연자의 일그러진 표정이 재미있다. 화살이 곧은 지 한쪽 눈을 감고 재보는 인물과 활의 휘임 정도를 조절하는 모습 등이 매우 실재적이면서 익살스럽기까지 한 김홍도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 활 쏘기  강희언의 「사인삼경도첩」 중에서. 활 쏘는 인물만을 포착한 김홍도의 '활 쏘기'와 달리 소나무 아래 활 쏘는 인물들의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빨래하는 여인들이 원경 처리되고 있다.

▲ 그림 그리기  강희언의 「사인삼경도」 화첩 중에서. 18세기 중엽 당시 화단의 사제 관계나 지식인 모임에서 그림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맨 위쪽 갓을 쓰고 편하게 앉아 구경하는 이가 강세황 자신이다.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6×21센티미터. 개인 소장.

▲ 석천한유도(石泉閑遊圖)  화원 화가인 김희겸이 1748년에 그린 '석천한유도'는 종이에 치밀한 선묘와 채색의 기록화풍이다. 2층 누각 난간에 기대어 매를 쥐고 잇는 전일상과 그 주변은 기둥에 칼을, 바닥에 지필묵과 서적을 함께 배치하여 무관으로서 문무가 겸비된 모습을 보여 준다. 누각 안의 가야금과 대금을 부는 두 여인과 계단의 술과 수박을 든 두 여인은 머리와 복장이 관기인 듯하다.누각 아래에 두 마리 개와 못가에서 잘생긴 말을 씻어 주는 마부의 배치는 지방 관아의 후원 정경을 담아 낸 풍속화로 손색 없는 구성이다. 종이에 수묵 담채. 119.5×87.5센티미터. 예산 전씨 종가 소장.

▲ 담소도  김윤겸.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8.6×24.3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계도권」 가운데 봄과 가을 장면  김두량, 김덕하. 1744년 작. 비단에 수묵 담채. 7.2×18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계도권(四季圖券)」 가운데 가을과 겨울  김두량, 김덕하. 1744년 작. 비단에 수묵 담채. 7.2×18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빈풍칠월도  이방운의 '빈풍칠월도' 가운데 제2폭 9월 추수장면이다.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5.6×20.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3. 5. 13. 15:1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47 소설 동의보감(하)

 

이은성 지음

2000,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4752

 

813.6

이6719동 3

 

|차례|

 

13. 正面對決

14. 免 賤

15. 7年戰爭 속에서

16. 美 史

□ 발 문  내가 아는 이은성----------------李珍燮

 

▲ 최종환(드라마 구암 허준의 양예수역)

내의원 정3품 어의.침술의 대가로 선대왕 때부터 2대에 걸쳐 왕과 세자의 안위를 책임져온 당대 최고의 명의다. 의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의원의 입지를 확고히 한다. 반면, 침술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유의태를 과거에서 낙방시킨 일화는 내의원에서도 은밀하게 회자되고 있는 비밀. 유의태와의 구침지희 침술대결에서 패한 치욕을 떨쳐내지 못해 유도지를 낙방시킨 것은 물론 유의태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허준을 박해한다. 공빈 김씨의 동생이 불치명인 반위(위암)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구안와사(안면마비)로 진단해 허준에게 진료를 맡기고, 허준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붙인다.

 

미완성의 소설.

 

왜 예진아씨는 안 나오지?

 

 

 

 

 

 

 

 

 

posted by 황영찬

2013-037-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대정읍성|  제주의 옛 세 고을 중 하나로 서남쪽의 중심지였던 대정현의 옛 자취를 말해주는 읍성이다. 다 허물어지고 잔편만 이렇게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안쪽에 추사 유배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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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47-2호 예산 김정희종가 유물|  예산 추사 고택에 전래되던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 유물들 중 뿔뿔이 흩어졌던 것의 하나로 여미지식물원 남상규 회장이 제주 추사관에 기증한 것이다.

1. 신해년 책력 표지 : 묵은 책력을 스크랩북으로 하여 추사의 작품 초고 17점이 들어 있다. '길상여의관(吉相如意館)'은 추사의 호 중 하나로 추사의 글씨이다.

2. '춘축(春祝)' : 영조대왕이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에게 보내준 새봄맞이 글이다.

3. 전서 : 신해년 책력에 들어 있는 작품으로 갑골문에 가까운 전서 글씨다.

|제주 추사관 전경과 실내|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제주 추사관은 전시실을 지하에 배치하고 위층은 「세한도」에 나오는 건물처럼 아무런 치장이 없는 단아하고 정중한 건물이다. 사람들이 꼭 감자창고 같다고 말하는 소박미가 있다.

|베를린 전쟁기념관 피에타상|  베를린 전쟁기념관에는 오직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 조각 하나만 설치하여 긴장되면서도 엄숙한 공간을 연출해냈다.

|제주 추사관 추모의 공간|  제주 추사관 2층은 추사 선생을 추모하는 긴장된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건축가는 여기에 작은 초상 조각을 배치해 베를린 전쟁기념관처럼 비어 있는 긴장된 공간의 경건함을 나타내려고 했는데 등신대 초상이 공간을 차지해버렸다. 건축적 공간이 조각의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추사 흉상|  임옥상이 무쇠를 소재로 제작한 이 초상 조각에는 고난받는 한 시대 지성인의 분위기가 잘 살아 있다.

|대정읍성 돌하르방|  대정읍성의 지킴이로 서 있던 돌하르방의 옛 사진이다. 지금은 대정 곳곳에 따로 떨어져 있고 대정읍성 북문에 4기가 서 있다.

|이재수의 난 '삼의사비'|  1901년 신축년에는 대정에서 천주교와 민중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속칭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대정 주민을 이끌었던 세 명의 장두가 모두 처형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대정청념회에서 불의에 저항한 세 명을 의사(義士)로 받들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대정향교 가는 길|  제주 추사관에서 대정향교로 가기 위해 인성리 들판길로 들어서면 멀리 박쥐 같기도 하고 바구니 같기도 한 단산 아래로 긴 밭담과 방사탑이 제주 들판의 독특한 서정을 보여준다.

|인성리 방사탑|  방사탑은 거욱대라고도 하는데 풍수상 지세가 약한 곳을 보완한다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방사탑 위에는 까마귀 모양의 돌이나 동자석을 올려놓는다.

|대정향교 전경|  대정향교는 온전히 잘 보존되어왔고 또 지금도 유림에서 잘 관리하고 있어 제주답사 중 만나기 힘든 한옥의 멋을 맛볼 수 있다. 답사객들은 향교에 있는 노송을 보면서 꼭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 같다고 말하곤 한다.

|육군 제1훈련소 정문 기둥|  1 · 4후퇴 때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이곳 모슬포로 옮겼다. 전쟁이 끝난 뒤 훈련소는 폐쇄되고 도로가 생겼는데 당시 훈련소 정문 기둥이 한길 양쪽에 남아 있다.

|강성대 교회|  1952년 공병대가 세운 군인교회로 강병대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가 군대 주둔지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건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 제38호로 등록되었다.

|제주마|  제주마는 약 150마리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축산진흥원에서 종자를 보존하면서 우량종을 만들어가고 있다.

|견월악의 제주마 방목장|  축산진흥원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마를 기르는 견월악의 방목장이다. 언제 가도 조랑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배 열배나 큰 나무들이

몇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

나도 그대로 단풍드는 날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 도종환, 「사려니 숲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 2011)

 

|교래리마을 아치|  교래리는 토종닭 유통특구이자 삼다수마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마을 입구에 환영 아치를 세워놓았다.

|교래 자연휴양림|  제주의 독특한 지형인 곶자왈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이 천연림을 이루고 있다. 요즘은 탐방로가 설치되어 한 차례 산책을 즐기며 나무의 생명력과 싱그러움을 배울 만하다.

|따라비오름|  교래리에서 가시리로 가다보면 따라비오름이 먼저 맞이한다. 아담한 크기에 억새가 아름다워 오름의 공주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가시리마을 디자인카페|  가시리 마을회관 격인 디자인카페는 현대적이면서도 소탈하게 꾸며져 격조를 갖춘 주민 복합공간이라는 분위기가 있다.

|조랑말 박물관|  노출콘크리트 구조의 작은 박물관이지만 제주마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가시리 리립박물관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조랑말박물관 내부|  전시실의 패널 설명과 설치들이 아주 친절하고 친숙하게 되어 잇어 교육관의 기능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녹산장 유채꽃|  제주도에서 유채꽃이 가장 많이 심어진 곳으로 봄이면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제주마의 고향 기념비|  헌마공신 김만일을 기리기 위해 남원읍 마을회관 앞마당에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에는 '제주마의 본향(本鄕) 의귀(衣貴)'라고 쓰여 있다.

|감귤박물관|  제주를 대표하는 과일인 감귤의 특성과 세계 귤의 종류 등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2005년에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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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1. 유자 2. 감귤 3. 문단 4. 향문감 5. 그레이프프루트 6. 한라봉

|이중섭 미술관|  서귀포에는 이중섭이 한국전쟁 중 1년간 피난살이를 했던 집을 복원하고 그의 예술을 기리는 미술관이 있다.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낙원」|  이중섭의 작품 중 아주 예외적이라 할 만큼 평화롭고 행복에 가득 찬 분위기가 있다. 실제로 이중섭은 서귀포 피난시절을 더없이 행복하게 생각했다.

|이중섭 「황소」|  이중섭 예술의 가장 큰 매력은 그리움의 감정을 극대화시킨 것이라고 할 때 이 황혼에 울부짖는 황소 그림이 가장 이중섭답다고 할 만하다.

|석주명을 기리는 작은 공간|  서귀포 토평사거리의 그가 한때 근무했던 경성제대 생약연구소(현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 한쪽에 그를 기리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석주명 흉상|  우리는 그를 나비박사라고 부르지만 그는 또한 제주학을 부르짖는 선구자이기도 했다.

|서귀포 귤빛여성합창단|  2005년에 창단한 단원 35명의 여성합창단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046 소설 동의보감(중)

 

이은성지음

2000,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4751

 

813.6

이6719동 2  c. 2

 

|차례|

 

7. 乞僧 金民世

8. 漢陽으로

9. 스승의 부름

10. 對決

11. 密陽 天皇山

12. 內醫院

 

▲ 이순재(드라마 허준의 유지태역)

유의태

유의태는 소문난 명의였다. 특히 효험이 있는 의약품을 만드는 데 천재적인 재주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어 앉은뱅이가 된 그의 누님을 자신의 재주로 고칠 수 없다면서 방치했다.

그런데 그 누님의 아들이 효자였다. 병든 어미를 지게 위에 모시고 팔도강산을 구경시켜드리려고 했다. 하루는 그 아들이 갈증이 난 어머니를 위해 우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오동나무 밑에 죽어 있는 암탉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것을 깨끗이 씻어 푹 고아 삶아서 어머니께 드리니 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성치 못했던 온몸이 풀리면서 모자(母子)는 고향에 돌아왔다. 신의(神醫)라고도 소문이 난 유의태를 향해 그 누님은 ‘네 이놈, 유의태야’ 하면서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는 세 번 알을 깐 닭이 오동나무 밑에서 죽은 경우라야만 특효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동생의 의술보다는 아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병이 완치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명의 유의태는 실존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유의태는 소설이나 TV 드라마의 내용처럼 허준의 스승은 아니다. 이 설화는 기술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는 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동의보감」과 TV 드라마 「허준」 등에 이 모티브가 영향을 주었다.

<출처 : 디지털진주문화대전>

 

 

 

▲ 백윤식(드라마 구암 허준의 유지태역)

 

▲ 김병세(드라마 허준의 유도지역)

▲ 남궁민(드라마 구암 허준의 유도지역)

 

 

▲ 박철민(드라마 구암 허준의 구일서역)

산음 땅의 사냥꾼. 지리산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산짐승을 사냥해 웅담이나 사향 따위를 약재상들과 거래한다. 거칠고 우직한 사냥꾼의 풍모 대신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 외지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푼돈을 가로챈다. 허준에게도 호패를 구해주겠다고 사기를 치다가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얻어맞고 허준을 형님으로 모신다. 방정맞고 덜렁대는 구석이 있지만 잔정이 많아서 두루두루 인심을 얻고 있다. 금술 하나만은 남부럽지 않은데, 아직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두지 못해 노심초사한다.

 

▲ 고두심(드라마 구암 허준의 손씨역)

관노비로 사또의 은혜를 입어 양반의 자식을 낳은 기쁨도 잠시였다.방황하는 허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허준이 용천고을에서 도망칠 때 함께 떠나지만, 지아비 허륜의 은혜와 사랑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반가의 규수를 사랑하는 허준의 마음을 단념시키려던 뜻을 꺾고 다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허준과 다희 사이에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손자 겸이가 태어나자 지극정성을 다해 키운다.

 

▲ 정호빈(드라마 구암 허준의 안광익역)

유의태의 친구.김민세와 함께 내의원에 출사해 그와 여동생의 혼인을 주선했다. 그러나 김민세 일가에 찾아온 불행으로 인해 여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던져버린다. 부술(해부학)에 심취해 들짐승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보는 기인으로 살다가 허준을 만나 혈자리와 침술을 전수한다. 사람의 배를 갈라보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던 안광익은 유의태가 반위(위암)로 죽어가며 남긴 유언을 받들고, 오랜 친구였던 유의태를 부술 하는 허준을 도와준다.

 

 

 

 

 

 

 

 

posted by 황영찬

2013-037-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명월성|  명월포(지금 한림항)와 비양도에 왜구가 나타나는 것을 대비해 쌓은 진지이다. 조선 중종 때 목성으로 축조되고 선조 때 석성으로 개축되었는데 이후에도 제주 서쪽을 방어하는 군사시설 기능을 해왔다.

|명월성 팽나무 군락|  수령 400년까지 되는 노거수 팽나무 65그루가 명월천변을 따라 줄지어 있다. 이리 굽고 저리 굽으면서 자란 굴곡진 팽나무 줄기에는 모진 바람을 이긴 강한 생명력이 서려 있다.

|명월대|  명월천 한쪽에는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이 야외무대로 삼았던 명월대가 남아 있다.

|백난아 기념비|  폐교된 명월국민학교는 제주 갈옷 몽생이 작업장이 되었고 교문 옆에는 명월리가 고향인 「찔레꽃」의 가수 백난아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산방산|  오름의 섬에 이처럼 불쑥 솟은 바위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장대한 기상의 산방산이 있음으로 해서 제주의 서남쪽은 동쪽의 성산일출봉과 달리 색다른 풍광을 선사해준다.

|산방굴에서 내다본 풍경|  산방굴사는 산방굴이라는 자연 석굴 안에 불상을 모신 절로 굴 앞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선적인 고요함이 있다.

|하멜상선전시관|  하멜이 표착할 때 타고 온 스페르베르호를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삼은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그럴 듯하고 의도도 좋았다. 다만 예산이 부족해서 실물 크기가 아니라 80퍼센트 축소했다.

|『하멜보고서』|  서양에 코리아를 알린 최초의 기행문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하멜이 보상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다.

|서물과차 각석| 서불이 새겼다고 전하는 이 글씨는 '서불과차(徐市過此)'로 판독되기도 한다. 서귀포, 남해, 거제도에 똑같은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태장어|  보통 장어보다 몇배나 더 큰 무태장어는 그 서식지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데 천지연과 천제연 폭포 아래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천지연폭포|  너무도 유명한 천지연폭포는 언제나 관광객으로 만원인데, 명불허전이라고 그 장쾌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는 제주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폭포 위쪽으로 자생하고 있는 담팔수 여섯 그루는 천연기념물이다.

|용머리해안|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용머리처럼 보였지만 막상 해안가로 내려가면 거대한 절벽들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킨다.

|송악산과 진지동굴|  절울이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송악산은 제주 서남쪽의 마침표 같은 오름으로 바다를 내려다볼며 걷는 산길이 사뭇 행복하다. 절벽 아래로는 일제가 파놓은 진지동굴이 줄지어 있다.

|해안 절벽의 진지동굴|  송악산 아래 절벽엔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파놓은 진지동굴이 줄지어 있다. 이 군사시설을 위해 제주인들은 혹독한 사역에 동원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떤 동굴은 디귿자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진지동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는 알뜨르 비행장에 20개의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견고한 콘크리트 돔으로 축조하고 그 위를 흙과 풀로 덮어 위장한 이 격남고들은 일제가 마지막 옥쇄작전지의 하나로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알뜨르 비행장 훈련기 모형|  알뜨르 비행장에서는 카미까제 특공대 조종사들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그들의 훈련기는 잠자리 모양의 빨간색이어서 '아까똠보'라고 불렀다.

|백조일손지묘|  '백 할아버지 한 무덤'이라는 이 무덤은 4 · 3사건의 후유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했는지를 말해주는 유적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으로 학살당한 132명의 시신을 7년 만에 수습하면서 뼈만 추려 봉분을 만든 공동묘지이다.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 김지하,  「빈 산」(『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추사 김정희 초상|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의 초상이다.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학예를 높은 차원에서 완성한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납읍 산신당|  천연기념물 제375호인 제주 납읍리의 난대림은 후박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등이 제주 천연의 모습을 전해준다. 숲속 깊은 곳에는 해묵은 곰솔을 앞에 둔 번듯한 산신당이 있어 신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추사 유배지|  추사는 대정에 유배되어 8년 3개월간 귀양살이를 했다. 전후 세 차례 집을 옮겼는데 여기는 강도순의 집터에 그가 처음 살던 송계순의 집 모양을 편지에서 말한 대로 복원한 것이다.

|「세한도」|  추사가 남긴 불후의 명작인 「세한도」는 제작 과정, 여기에 첨가된 시문들, 그리고 그 이후의 전래 과정이 모두 하나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엮어진다.

|추사 유배지 안채|  추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집을 '귤중옥'이라 이름지었다. 매화나 연꽃은 육지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귤만은 제주가 아니면 볼 수 없다며 허허로운 마음으로 귀양살이를 받아들였다. 담장 너머로는 하귤 한 그루가 있다.

|추사 유배지의 수선화|  추사는 일찍부터 수선화를 좋아했다. 육지에서는 귀한 이 수선화가 제주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농부들이 웬수 보듯 하는 것을 보면서 사물이 장소를 잘못 만나면 당하는 것이 이러하다고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추사의 「수선화부」 탁본|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후대에 사모하는 이가 많아 여러 가지 탁본으로 간행되었다. 그 중 수선화를 노래한 「수선화부」 마지막에는 몽당붓으로 아무렇게나 그렸다는 수선화 두 송이 그림이 실려 있다.

|추사의 '무량수각' 현판|  추사는 귀양살이 내려오면서 해남 대흥사에 '무량수각'(위)이라는 현판을 써주었고, 또 그후 고향 예산의 회암사를 중수하자 '무량수각'(아래)을 써주게 되었다. 이 두 글씨에서 보이는 차이는 곧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체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앞의 글씨는 살이 찌고 윤기가 나는데 뒤의 글씨는 군더더기 없이 필획의 골기만 남기고 있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선생 귀양살이 모습이다. 이 그림은 소동파가 하이난에 유배되었을 때 나막신 신고 도롱이 입은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를 번안하여 그린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추사의 삶과 학예가 소동파와 비슷했다고 말하곤 했다.

 

 

posted by 황영찬

2013-037-2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삼성혈|  삼성혈은 고양부 3성 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곳이자 탐라국의 출발을 말해주는 제주 아이덴티티의 유적이기도 하다.

|삼성혈 숭보당과 전사청|  삼성혈은 조선왕조에서도 존중해주어 한때는 삼성사라는 사액까지 내려주었고, 사우철폐령 이후에는 전사청과 삼성전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성혈 입구 돌하르방|  제주의 오리지널 돌하르방 47기 중 가장 의젓하게 잘생긴 작품으로 꼽히고 잇다. 침묵의 권위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도 친근미를 잃지 않고 있다.

|성읍의 돌하르방|  옛 정의현 읍성 대문 앞에 세워진 성읍 돌하르방은 통통한 얼굴에 동그란 벙거지를 쓴 아주 야무진 모습을 보여준다.

|대정읍성의 돌하르방|  옛 대정현 읍성 대문 앞에 있던 돌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제주 세 고을이 서로 다른 모습의 돌하르방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돌하르방 어디 가시나요

돌하르방 어딜 감수광                                      돌하르방 어디를 가시나요

어드레 어떵연 감수광                                   어디로 어째서 가시나요

이레 갔닥 저레 갔닥                                        이리 갔다 저리갔다

저레 갔닥 이레 갔닥                                        저리 갔다 이리 갔다

아명 아명 여봅써                                         아무리 아무리 해보세요

이디도 기정 저디도 기정                                 여기도 벼랑 저기도 벼랑

저디도 바당 이디도 바당                                 저기도 바다 여기도 바다

바당드레 감수광 어드레 감수광                       바다로 가세요 어디로 가세요

아무 디도 가지 말앙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이 섬을 지켜줍써                                           이 섬을 지켜주세요

제주섬을 펴줍써                                         제주섬을 살펴주세요

- 김광협(金光協)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 부분

 

|삼사석|  삼사석은 옛날 고양부 3성이 활을 쏘아 서로의 터전을 정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살맞은돌'을 모아놓은 곳이다. 작고 아담한 제주도식 비석과 돌보호각이 아주 소탈한 멋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곁에 근래에 엄청 거대한 삼사석비가 세워져 예스러운 분위기에 상처를 주었다.

 

모흥혈고(毛興穴古)        모흥혈의 아득한 옛날

시사석류(矢射石留)        화살 맞은 돌 그대로 남아

신인이적(神人異蹟)        삼신인의 기이한 자취

교탄천추(交嘆千秋)        세월이 바뀌어도 오래도록 비추리

 

 

|삼양동 선사유적지|  삼양동에서는 기원전 1세기의 집터 236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대의 선사시대 마을유적이자 삼성혈의 탐라국이 출발했던 시기를 유물로써 증언해준다.

|삼양동 검은 모래|  삼양동 해변에는 백사장이 아니라 검은 모래가 깔려 있다. 이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광으로 요즘에는 검은 모래 찜질이 유행하여 한여름에는 외지인들로 붐빈다.

|불탑사 오층석탑|  제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석조문화재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유행한 5층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화산암을 이용한 질감과 색감이 제주만의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항파두리성|  대몽항쟁기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인 항파두리에는 긴 토성이 남아 있다. '항파두리'는 항아리 주둥이처럼 둥글게 돌아간 모습을 표현하는 제주어이다.

|항파두리 전시관|  항파두리는 3공화국 시절 천편일률적으로 정비한 군사 유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었다. 이때 전국의 유적지 기념관에는 유명화가들이 민족기록화라는 이름으로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예술작품인 기록화로 진지하게 그린 것이 없고 이처럼 개성 없는 그림을 남겨 화가의 이름조차 밝혀놓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의 이야기다.

|제주목 관아|  한동안 빈터로 남아 있어 '목관아지'라고 불리던 이 자리에 제주목의 옛 관아 기본 건물을 복원했다. 이로써 서울에 경복궁이 있다면 제주엔 제주목 관아가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아직 이 공간은 그런 수준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다.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로 활쏘기 대회가 열릴 때 본부석 기능을 한 건물이다. 그래서 사방이 다 뚫려 있다. 세종 때 처음 지어졌다고 하나 이후 수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듭했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 양식이다.

|관덕정의 '탐라형승' 편액|  관덕정 안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 아래 대단히 크고 장중한 글씨체인 '탐라형승' 편액이 걸려 있다. 보기에도 호방한 이 편액은 아계 이산해 또는 정조 때 제주목사인 김영수의 글씨라고도 전한다.

|옛 관덕정 광장|  관덕정 앞마당에서는 조선시대에 활쏘기뿐만 아니라 대중집회도 열렸고, 근대사회로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광장 기능을 함으로써 제주의 큰 집회와 사건은 모두 여기에서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제주의 심장 같은 공간이었다.

|관덕정 돌하르방|  제주의 옛 돌하르방47기 중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고 또 우리에게 제주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미지이다. 위엄 있으면서도 유머도 있고 인간미도 넘친다.

|제주성 동문 앞의 돌하르방|  옛 사진을 보면 현재의 돌하르방은 제주성 입구에 세워져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벽이 철거되면서 관덕정 앞, 삼성혈 입구 등 곳곳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서자복상|  제주에는 '복신미륵' '자복미륵'이라 불리는 석상이 제주시 동서 양쪽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결합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에 있는 서자복상 곁에는 기자석(祈子石)이 지금도 놓여 있다.

|동자복상|  서자복상과 쌍을 이루는 이 석상 역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을 보여주는데 본래 여기에는 만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석상의 전통이 훗날 돌하르방 조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용담마을 큰길가 마을 벽화|  용담마을은 한두기마을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동쪽은 동한두기라고 불리고 있다. 한두기마을 큰길가에는 마을 주민의 초상을 설치해놓고 '용담마을, 삶은 지속된다'는 표어를 내걸었다. 여기에서 제주인들의 고향을 지키려는 의지와 저력을 엿볼 수 있다.

|용두암|  제주의 아름다움은 오름, 나무뿐만 아니라 기암괴석에도 있다. 제주 해안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한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용두암이다.

|오현단|  제주와 인연 있는 다섯 분의 성현을 기린 단으로 본래는 귤림서원에 모셔져 있었는데 서원이 철폐되자 단을 만들고 조촐한 조두석 5기를 세웠다.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제단이다.

|향현사|  제주 출신으로 조선왕조 세종 때 문신이었던 고득종을 모신 사당이다. 본래 여기가 그의 생가터였다.

|오늘날의 오현단|  오현단엔 무수히 많은 비석이 난립하여 어지럽기 그지없다. 조상을 위하는 방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이미 오현은 문중의 조상이 아니라 제주의 역사 속 공인이니 사사로운 위선 사업은 여기에서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오현단 '증주벽립'|  '증주벽립'은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도다'라는 뜻으로 서울 성균관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하여 새겨놓은 것이다.

|제주성|  성벽 길이 약1,400미터에 달하던 제주성은 오늘날 약 150미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제주도는 가능한 한 복원해나갈 계획이라고 하니 그때를 기대해보게 된다.

|『탐라순력도』|  「한라장촉(漢拏壯囑)」(위)은 제주도의 전반적 실태를 기록한 지도이다. 『감귤봉진(柑橘封進)』(아래)은 조정에 진상할 귤을 제주목 관아 망경대 앞에서 점검하는 그림이다.

|『탐라순력도』|  「산장구마(山塲驅馬)」(위)는 제주목사가 말목장을 점검하는 그림으로 이때 국마가 2,375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목장의 경계 구실을 하는 긴 잣성들이 나타나 있다. 「건포배은(巾浦拜恩)」(아래)은 건입포에서 임금께 절을 올리는 그림으로 여기에는 신당을 불태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때 농민으로 귀속시킨 무당이 28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라봉 낙조|  제주시 사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히는 제주의 장관이다.

|김만덕 초상|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그린 김만덕 초상이다. 윤여환의 작품으로 제주 여인상을 아주 단아하게 표현했다.

|김만덕 묘소|  사라봉에 큰길이 생기면서 이곳으로 이장해놓았는데 그 위치가 향(向)도 맞지 않고 길가를 등지고 있어서 안쓰럽기만 하다.

|추사 김정희의 편액 '은광연세'|  제주 유배 중 추사는 김만덕을 기리는 마음을 '은광연세' 네 글자에 담았다.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김만덕 기념탑|  김만덕 할머니를 기린다고 세운 기념탑이다. 김만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엄청난 '뽈대'일 뿐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037-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한라산 백록담|  제주도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것은 지질학적 특성과 경관의 아름다움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그리고 한라산 800미터 이상 천연보호구역 등 세 곳이었다.

|성산일출봉|  약 10만 년 전에 바다 속에서 수중 폭발한 화산체로 원래는 섬이었으나 1만 년 전 신양리 쪽 땅과 섬 사이에서 자갈과 모래가 쌓이면서 제주섬과 연결되었다.

|만장굴 내부|  만장굴은 현재 1킬로미터만 개방되어 있지만 총 길이는 약 13.4킬로미터로 세계에서 네번째로 긴 용암동굴이며 최대 높이는 23미터, 최대 폭은 18미터로 내부가 훤히 뚫려 있다.

|김녕사굴|  김녕에 잇는 이 S자형 용암동굴은 입구가 마치 뱀의 머리처럼 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가늘어져 사굴, 즉 뱀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에 따른 전설도 생겼다.

|당처물동굴|  길이 약 110미터의 비교적 작은 동굴이지만 종유관, 석순, 종유석, 동굴산호가 아름답고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거문오름|  말발굽형 오름으로 표고 355미터 지점엔 깊이 35미터의 선흘수직동굴이 있다. 여기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시작점이다. 앞쪽 사면엔 삼나무가 조림되어 굼부리 안쪽은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용천동굴 내부|  전신주 공사 중 발견된 이 용천동굴은 1천 년 이상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아 가느다란 명주실 같은 종유석이 지금도 생성되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 실사단은 조사 명목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용천동굴 내부|  용천동굴 안은 색채와 형태가 정말로 환상적이다. 이 굴 끝에는 낭떠러지 아래로 넓은 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  제주 바다는 해녀들의 해산물 밭으로 제주인의 삶을 일궈가는 터전이다. 지금은 이처럼 많은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아직도 해녀는 삼다도의 상징이고 정신이다.

|일본 해녀와 제주 해녀|  직업으로서 아무런 보조장비 없이 잠수일을 하는 나잠업은 제주도와 일본에만 있다. 일본 해녀들은 아랫도리만 가린 채 작업하고 제주 해녀들은 소중이라는 해녀복을 입고 물질해왔다. 지금은 모두 고무옷을 입고 작업한다.

|해녀박물관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하도리는 1932년 일제의 수탈에 항의하여 해녀들이 봉기한 곳이고 지금도 제주 해녀의 10분의 1이 물질을 하고 있어 여기에 기념탑과 박물관이 세워졌다.

|옛 해녀 사진|  1964년 사진이다. 젊은 해녀들이 여에 서서 물질 작업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해녀는 나이와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는데 아마도 하군 애기해녀처럼 보인다.

|해녀복|  지금은 모두 고무옷을 입고 있지만 옛 해녀복은 물옷이라고 해서 소중이, 적삼, 물수건으로 구성되었다.

|별방진 성벽|  세화리에서 하도리로 가다보면 성벽이 나오는데 여기가 별방진이다. 왜선이 우도에 정박하기 때문에 김녕에 있던 방호소를 이쪽으로 옮긴 것이다. 진 안쪽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옛 모습을 잃었고 외벽만 장하게 남아 있다.

|하도리 해녀 불턱|  갯가에는 해녀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불턱이 잇다. 둥글게 돌려진 돌담이 바람을 막아주고 가운데는 불턱이 있어 불을 쬐게 되어 있다. 불턱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고 하군 해녀는 일하는 요령도 배운다.

|종달리 돈지할망당|  종달리 해안가에 있는 신당으로 '돈지'는 배가 닿을 수 있는 해안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이 할망당은 신령스럽게 자란 생게남(우묵사스레피 나무)이 신목 구실을 하여 생게남 돈지당이라고도 한다.

|영실의 진달래 능선|  진달래가 활짝 핀 영실의 능선은 행복에 가득 찬 평화로움 그 자체가 된다. 산자락 전체가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진분홍빛을 발한다.

 

높으나 높은 산에 / 흙도 아닌 조약돌을

실오라기 틈을 지어 / 외로이 피는 꽃이

정답고 애처로워라 / 불같은 사랑이 쏟아지네

 

한 송이 꺾고 잘라 / 품음 직도 하건마는

내게 와 저게 도로 / 불행할 줄 아옵기로

이대로 서로 나뉘어 / 그리면서 사오리다

-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한라산 등반기

 

|선작지왓과 윗세오름|  1700고지에 이처럼 드넓은 고원이 펼쳐진다는 것이 신비롭기만 하다. 『오름나그네』의 저자 김종철은 여기에 진달래가 피어날 때면 미쳐버리고 싶어진다고 했다.

|백록담|  백록담에 오른 이들은 한결같이 그 적막의 고요한 모습이 명상적이고 선적이며 비현실의 세계 같다고 했다. 정지용은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라고 했다.

 

제주 사람은

한라산이 몽땅 구름에 묻혀야

그때 한라산을 바라본다

그것도 딱 한 번 바라보고 그만둬버린다

정작 한라산 전체가 드러나 있는 때는

그 커다란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한라산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괜히 어제오늘 건너온 사람들이

해발 몇 미터의 한라산을 어쩌구저쩌구 한다

삼양리 검은 모래야

너 또한 한라산이지, 그렇지

- 고은 「한라산

 

 

 

 

 

 

 

 

 

 

 

 

 

posted by 황영찬

2013-045 소설 동의보감(상)

 

이은성 지음

2000, 창작과 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4748

 

813.6

이6719동 1

 

중국의학에의 의존을 타파한 민족의학의 보고

『동의보감』을 탄생시킨 의성(醫聖) 허준!

내 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사랑하는 민족애,

병들어 고통받는 민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헌신,

천첩의 자식이라는 신분의 질곡과 온갖 간난신고를 극복해가는

동앗줄과도 같은 허준의 집념! 그 허준의 뒤에는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기까지 한

살신성인의 스승 유의태, 천수관음의 화신 같은

인의(仁醫) 김민세가 있었다.

극작가 특유의 숨막힐 듯한 속도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전개는 읽는 이를 압도한다.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적 재미 속에서 우리는 선조 중에 허준 같은

성스러운 의사가 있었음에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면서

생활의 궁박함에 내몰려 잊어가던 민족의 뿌리를

되새긴다.

 

저자 李恩成

1937년  경북 예천 출생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녹슨 線」 당선

1969년  제15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당신」으로 최우수 각본상 수상

1973년  『세종대왕』(KBS방영)으로 대한민국예술제 각본상 수상

1975년 『忠義』(KBS)로 대한민국연극영화 TV예술상 최우수 TV각본상 수상

1976년 『집념』(MBC)으로 제12회 한국연극영화 TV예술상 최우수시나리오상 수상

1977년  『집념』으로 제16회 대종상 최우수각본상 수상

1984년  『開國』(KBS)으로 한국연극영화 TV예술상 TV각본상 수상

1989년  『두 夕陽』으로 제25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수상

 

그 외의 작품으로 『대원군』(1972, MBC), 『예성강』(1976, MBC), 『巨商 林尙沃』(1977, MBC), 「等身佛」(1981, KBS), 「旌善아라리」(1985, KBS), 『女心』(1986, KBS) 등이 있음

1988년 작고

 

|차례|

 

序說

1. 龍川 脫出

2. 名醫 柳義泰

3. 山사람 7년

4. 아들의 눈물

5. 野火

6. 非人不傳

 

 

허준 (許浚 ; 1546~1615)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龜岩)이다. 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년 9월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영(令)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그러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직(陞職)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鄭)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정2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특히 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淸)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저서에 《벽역신방(疫神方)》 《신찬벽온방(新纂瘟方)》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맥결집성(訣集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訣集成)》 등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전광렬(드라마 허준의 허준역)

동의보감에 나오는 33가지 물 이야기

동의보감에 나오는 33가지 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연친화적이어서 그런지 한방의학을 사랑하고 한약을 즐겨 들기 때문에, 궁금해 하실 분이 계실듯 하여 여기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1) 정화수(井華水, 새벽에 처음 긷는 물).
사람이 놀래거나 충격으로, 몸에 뚤려 있는 아홉 구멍에서 피가 나올 때에 좋고, 입냄새를 없애주며, 안색을 곱게 해주고, 눈에 백태(白苔)까 끼는 질환에 이 물로 씻어주면 좋다.
술 마신 뒤 속풀이에도 좋다. 약을 먹을 때, 약을 다릴 때, 술을 빚거나 초(醋)를 만들 때도 쓰면 좋다.

2) 한천수(寒泉水, 찬 샘물).
당뇨병, 기타 질환으로 인해 목이 자꾸 마르는 소갈(消渴)이나 구역질[反胃], 더위 먹고 설사하는 열리(熱痢), 오줌 빛이 붉고 아랫배가 몹시 아픈 열림(熱痳)을 다스리며, 옻이 올라 생긴 피부질환 부위를 씻어주면 좋고, 대ㆍ소변을 보는데 유리하다.

3) 국화수(菊花水, 국화 뿌리 밑에서 나는 물).
일명 국영수(菊英水)라고도 하는데, 중풍이나 눈이 어지럽고 침침한 현모(眩冒)를 다스리고, 기력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충해 주고 안색을 좋게 하며, 오래 마시면 수명을 연장해 준다.

4) 납설수(臘雪水, 섣달 대한[大寒] 무렵에 내린 눈 녹은 물).
계절병ㆍ돌림열병으로 심하면 말을 못하게 되고, 뺨에 크고 작은 부스럼이 나며, 입이 헐고 기침이 나는 온역(瘟疫)이나 술 마신 뒤 갑자기 열이 오르는 폭열(暴熱), 황달 등을 다스리며 독을 풀어주고, 눈을 씻으면 빨갛게 달아오른 열적(熱赤)을 없애준다.
모든 과일을 담가두면 좋다.

5) 춘우수(春雨水, 정월에 처음 내린 빗물).
그릇에 받아 약을 달여 먹으면 양기가 오르고, 부부가 한 잔씩 마시고 합방을 하면 신통하게도 임신을 하게 된다.
청명이나 곡우에 내린 빗물로 술을 빚으면 색과 맛이 좋으며 오래 보관할 수 있다.

6) 추로수(秋露水, 가을에 내린 이슬).
해가 뜨기 전에 거두어 쓰면 소갈을 그치게 하고, 몸이 가볍고 배고픈 줄을 잘 모르며, 살결이 고와진다.
백 가지 풀에 맺힌 이슬을 모아쓰면 백 가지 병을 다스리고, 백 가지 꽃에 맺힌 이슬은 낯빛을 곱게 해주며, 잣나무 잎에 맺힌 이슬은 눈을 밝게 해준다.

7) 동상(冬霜, 겨울에 내린 서리).
술마신 뒤 열이 오르는 것과, 추위에 코가 막히는 것을 다스린다.
여름철 땀띠가 짓무른 데 조개껍질 가루에 개서 바르면 곧 낫는다.
해 뜨기 전에 닭의 털로 쓸어 모아 사기그릇 병에 넣어두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8) 박(雹, 우박).
장맛이 좋지 못할 때, 한 두 되 모아서 장독 속에 넣어두면 본래의 맛을 찾을 수 있다.

9) 하빙(夏氷, 여름 얼음).
몸에 열이 몹시 나고 가슴속이 답답하며 괴로운 번열(煩熱)을 제거한다.

10) 방제수(方諸水, 금조개 껍데기로 밝은 달을 향하고 받는 이슬).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어린아이의 열이나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마르는 번갈(煩渴)을 제거해 준다.

11) 매우수(梅雨水, 매화 열매 익는 5월의 빗물).
부스럼이나 옴[瘡疥(창개)]을 다스려 주고, 흉터를 줄여준다,

12) 반천하수(半天河水, 나무나 왕대를 잘라낸 그루터기에 고인 물).
마음속의 근심, 귀신 들었다고 하는 병, 헛소리 해대는 병을 다스리며 다친 곳의 독을 씻어준다.

13) 옥류수(屋霤水, 볏짚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
개에게 물린 상처를 씻는데, 지붕에 물을 뿌려 처마 밑에서 받아쓰는 것이다. 또한 처마 밑의 물에 젖은 흙을 개에게 물린 상처 부위에 바르면, 차도가 있게 된다.

14) 모옥누수(茅屋漏水, 띠 풀로 덮은 집의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
옴이나 독창 따위의 운모독(雲母毒)을 죽이니 운모 고약을 만드는 데 쓴다.

15) 옥정수(玉井水, 옥이 나는 곳에서 솟아나는 물).
오래 마시면 몸이 윤택해지고 모발(毛髮)이 희어지지 않는다.

16) 벽해수(碧海水, 짠 바닷물).
풍으로 생긴 피부병이나 옴을 제거하고, 한 홉을 마시면, 밤이 지나도 소화되지 않고 뱃속이 더부룩하게 팽창해 있는 것을 토해낸다.

17) 천리수(千里水, 멀리서 흘러 내려온 강물).
손ㆍ발끝의 병을 다스리는 약을 달이고 대ㆍ소변을 쉽게 보는데 쓰인다.

18) 감란수(甘爛水, 많이 휘저어서 거품이 생긴 물).
곽란을 다스리고, 방광에 들어가서 장의 경련 때문에 아랫배가 쥐어뜯는 듯 아프는 분돈증(奔豚症)을 다스린다.

19) 역류수(逆流水, 거슬러 돌아 흐르는 물).
위에 물기가 고여 있어서 출렁출렁 소리가 나고 가슴이 답답한 담음(痰飮)을 토하는 약을 조제할 때 쓴다.

20) 순류수(順流水, 순하게 흘러 내려온 물).
배꼽 아랫배[下焦(하초)]나 허리ㆍ무릎의 병을 다스리고, 소변을 쉽게 보는 약에 쓰인다.

21) 급류수(急流水, 빠르게 흐르는 개울물).
소변을 쉽게 보는 데에 쓰이고, 정강이 이하의 풍약(風藥)을 달이는 데에 쓰인다.

22) 온천(溫泉, 뜨거운 샘물).
모든 힘줄과 뼈가 오그라드는 것과 온갖 피부병에 좋다. 목욕을 하고 나서는 빠진 기운을 약물과 음식으로 보강해 주어야 한다.

23) 냉천(冷泉, 맛이 떫고 찬 물).
민간에서는 초수(椒水)라고도 한다.
편두통ㆍ등이 싸늘한 증상ㆍ울화병ㆍ오한 등의 병에 이 물로 목욕하면 낫는다.
7~8월경에 목욕을 하되, 밤에 목욕하면 좋지 않다.

24) 장수(漿水, 좁쌀죽을 끓인 뒤 위에 뜨는 맑은 물).
갈증을 그치게 하고 곽란과 설사를 다스리며, 졸음[睡(수)]을 물리쳐 준다.
끓인 물에 생쌀을 넣어 만든 것을 미초(味酢)라고 하는데, 북쪽에서는 이것을 여름에 우물에 넣에 차게 마심으로 더위를 물리친다.

25) 지장수(地漿水, 누런 흙물이 가라 앉아 위에 뜨는 맑은 물).
근심 걱정에 시달리는 병과 여러 가지 독을 풀어준다. 산중의 독버섯을 먹으면 반드시 죽고, 단풍나무 밑에서 자란 버섯을 먹으면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계속하다가 결국 죽게 되는데, 이 물을 마시면 나을 수 있으나, 다른 약으로는 살릴 수가 없다.

26) 요수(潦水, 인적이 없는 산이나 골짜기에 새로 생긴 흙구덩이에 고인 물).
추위로 인해 생긴 병이나 황달에 마황연교탕(麻黃連翹湯)으로 다스리는데 이 물을 쓴다. 일명 무근수(無根水)라고도 하며, 비위 상한 것을 고쳐주고, 음식을 잘 들 수 있게 한다.

27) 생숙탕(生熟湯, 끓인 물과 찬물을 반반씩 섞은 물).
음양탕이라고 하며, 강물과 샘물을 합한 것 또한 음양탕이라고 한다.
볶은 소금을 넣어서 한 두 되 마시면, 밤이 지나도 소화가 안 되는 증상을 고쳐주며, 독이 들어있는 식물을 토해내고, 곽란을 다스린다.

28) 열탕(熱湯, 뜨겁게 끊인 물).
속 끓이다가 죽는 병이나 곽란, 장단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켜 오그라져서 뒤틀어지는 전근(轉筋)을 다스린다.
양기를 돕고 경락을 통하게 하며, 찬 기운이 스며들어 손발에 감각이 없는 냉비(冷痺) 환자가 다리를 무릎까지 담그고 땀을 내면 좋다.

29) 마비탕(麻沸湯, 생삼[麻]을 삶은 물).
소갈(消渴)을 다스리고, 몸에 쓸데없이 오른 열을 내려준다.

30) 조사탕(繰絲湯, 누에고치를 켜내고 남은 물).
살충제가 되며, 뱀이나 벌레의 독을 풀어준다. 소갈과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증상을 치료한다.

31) 증기수(甑氣水, 밥 찌는 시루 뚜껑에 맺힌 물).
아침마다 이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잘 자라고 빽빽하며 검고 윤택이 난다.

32) 동기상한(銅器上汗, 구리로 만든 밥그릇 뚜껑에 맺힌 물).
동기에 밥을 담고 덮어두면 뚜껑에 물방울이 맺혀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떨어진 밥을 먹으면 악성 부스럼이나 등창이 생긴다.

33) 취탕(炊湯, 하룻밤 묵은 숭늉).
이 물로 얼굴을 씻으면 윤기가 없어지고 몸을 씻으면 버짐이 생긴다.

<출처 : 록인음료>

 

 

▲ 김주혁(드라마 구암 허준의 허준역)

九鍼之戱


아홉 개의 침이 펼치는 재주를 말합니다. 출전은 연원은 후한 시대의 명의인 화타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조제를 알 수 없는 마불산 혹은 마패탕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이를 술에 타 아픈 사람에게 먹인 후 개복과 뇌수술까지 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습니다.


머리가 많이 아팠던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이 치료를 거부했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또한 관우의 독화살 자리를 수술한 명의로 이름이 높습니다.


화타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전설이 구침지희(九鍼之戱)와 오금희(五禽戱)입니다.

오금희란 화타가 오금(호, 비, 원, 태, 조)의 자세와 동작을 본떠 창안한 독특한 체조인데 이를 실행한 제자들은 나이 90세에 이르도록 청년 같은 기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또한 구침지희는 살아 있는 닭의 몸 안에 아홉 개의 각종 침을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찔러 넣는데, 닭이 아파하거나 죽어서는 안되는 고도의 침술 경지를 제자들에게 시범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것은 닭의 내장과 근육 등 각 기능을 거울 들여다보듯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경지로서 다섯 침까지가 범의, 여섯 침이 교의, 일곱 침이 명의로 이 명의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자들로 하여금 병자를 보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침은 대의, 마지막 아홉 침을 다 쓸 수 있으면 이미 침 하나로 모든 병을 다 볼 수 있는 태의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화타의 제자들이 침술연마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 방법은 오히려 항간의 재주 없는 자들까지도 자기의 침술을 과대 선전하고자 걸핏하면 닭에게 침을 놓는 재주겨루기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화타보다 한 시대 앞이었던 창공(본명이 순우의로 신선계 의술의 대가)의 의술을 좇는 쪽과는 서로의 명예를 걸어 목숨을 건 내기의 수단으로 전락한 채 남아 있는 무서운 놀이이기도 합니다.

<출처 : 다음 Q&A>

 

 

▲ 박은빈(드라마 구암 허준의 다희역)

몸 속에 넣는 침의 종류

1. 참침(鑱鍼)

피부를 자극하여 피를내는 침 아주 작으며 못의 형태를 하고 있슴. 찌르기 보다는 피부에 상처를 내는 침

2. 원침(圓鍼)

끝이 둥근모양이며 피부를 문질러서 기혈을 흐르게 하는 침 맛사지봉같은 역할을 함 찌르지 않음

3. 시침(鍉鍼)

끝이 약간 뾰족하면서 찌르기보다는 자극하는 침

4. 봉침(鋒鍼)

삼각칼과 비슷하며 피부에 피를 내는 침

5. 피침(鈹鍼)

외과 수술칼처럼 생김 종기나 피부의 큰 상처에 생긴 부분을 잘라내는 일종의 외과칼

6. 원리침(圓利鍼)

원침과 비슷하나끝이 예리해서 찌르는 침 약간 굵고 깊이 찔러진다

7. 호침(毫鍼)

보통 지금 쓰는 침과 비슷

8. 장침(長鍼)

 길이가 20센티정도되는 아주 긴침

9. 대침(大鍼)

굵고 큰침으로 주로 관절을 맛사지하는데 쓰거나 불에 달구어서 뜸처럼 사용하였다.

 

▲ 이재용(구암 허준의 김민세역)

유의태의 친구. 법명은 삼적대사다.내의원 의원으로 동궁전 세자의 병을 완치시켜 어의 양예수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뛰어난 의술로 어의가 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예기치 않게 찾아온 불행으로 인해 출가를 결심했다. 어린 아들이 한센병환자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자식을 잃은 참담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한센병환자들을 살육한 업보를 씻기 위해 일평생을 한센병환자 촌에 머물며 의술을 펼친다. 허준에게는 의술의 도를 깨우쳐준 스승이다.

청맹과니

[명사]
1.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
2. 사리에 밝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유의어] 까막눈이, 뜬소경, 눈뜬장님

 

▲ 김미숙(드라마 구암 허준의 오씨역)

 유도지의 어머니. 경상도땅 최고 의원의 아내라는 명성과 세도가 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지만, 의원을 찾는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의원의 재산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유의태 제자들의 처자식을 하인처럼 부리며 다희와 손씨에게 모멸감을 안긴다. 남편이 시골 촌구석 의원으로 사는 것이 한평생 불만이라 아들 도지만큼은 내의원에 출사하기를 학수고대한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크기에 피붙이 하나 없는 예진과의 혼사를 번번이 반대하고 나선다.

▲ 정은표(드라마 구암 허준의 임오근역)

유의태의 제자.약재창고를 관리하며 환자들에게 처방한 약재며 시술 방법을 기록하는 것이 주된 소임이다. 환자 앞에만 서면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 침 한번 제대로 놓아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내의원 의원이 되겠다는 허망한 꿈만 꾼다. 넉살 좋고 순박한 구석이 있어서 스승인 유의태는 물론 도지와 오씨에게도 신망을 받고 있다. 얕보기만 했던 허준이 스승의 인정을 받고, 중풍으로 죽어가던 정경부인까지 살려내자 존중하기 시작한다. 운 좋게 내의원에 들어가 의원이 된 허준과 재회하고, 의녀 홍춘과 불타는 사랑을 나눈다.

 

 

posted by 황영찬

2013-044 민화 그리기

 

글, 사진 / 나정태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19

 

082

빛12ㄷ  163

 

빛깔있는 책들 163

 

나정태-------------------------------------------------------------------------

1952년 서울 출생. 민화연구가. 궁중 미술(도화서 화원 그림)을 연구하고 있으며 민화 연우회를 창립하였다. 개인전과 여러 공모전을 통해 현대적인 민화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최근 혜원 신윤복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며 현재 전업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머리말

민화의 체취

민화의 종류

민화의 재료

민화 그리기

도화서 화원풍의 민화와 일반 민화

현대의 민화

참고 문헌

 

▲ 책거리 병풍 가운데 1폭

▲ 봉황장생도  82×22.8센티미터

▲ 십장생도(十長生圖) 병풍  창덕궁 소장.

▲ 민화에 쓰이는 재료  민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 가운데 붓과 먹, 벼루이다.

▲ 민화에 쓰이는 물감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분채(汾彩), 석채(石彩), 채묵(彩墨), 당채(唐彩) 등이 있다.

▲ 까치와 호랑이

▲ 책거리도

▲ 궁중 도화서 화원의 봉황 가족 그림  개인 소장.

▲ 「도원(桃園)」  이중섭, 76×65센티미터, 1953년 작품.

▲ 「꽃과 회동」  이중섭, 14.7×19.5센티미터.

▲ 「아이들」  박수근, 17×8센티미터.

▲ 「평상(平床)」 이 그림은 민화 산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와 새, 단순 평면 구도의 초가, 앉아 있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였다. 장욱진, 1974년 작품, 개인 소장.

▲ 「십장생(十長生)」  박생광. 민화 쌍학도와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4. 29. 13:3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40-2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선조들이

생각한 건축물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건물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보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다. 건립 연대는 그보다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이 조사되기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인되었던 건물로 주심포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가장 오랜 건물이다. 1937년~1940년 해체 · 수리될 당시 1308년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목조건물

조선 선조 36년(1603)에 지어진 경남 통영의 세병관이 목조건축물 중에서 평면 면적이 가장 큰 건물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어진 여수 진남관은 객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건물이다. 숙종 23년(1697)에 건립된 화엄사 각황전은 법당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중층의 법당인 각황전은 상 · 하층이 모두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기초와 터닦기는 다르다

기초를 집터를 닦는 것이라 잘못 이해하기 쉽다. 터닦기는 집 지을 터를 만들기 위하여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성토하여 평평한 대지를 만드는 것이다. 기초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기둥이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땅을 다지는 것을 말한다.

▲ 해남 미황사  유난히 석축을 많이 쌓은 모습이다.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층이 구분되도록 바른층쌓기를 했다.

▲ 양산 통도사  쌓는 돌을 모두 정교하게 다듬은 다음 목조가구를 짜듯 격식을 갖추었다. 면석의 화려한 문양은 어느 전각의 기단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기둥의 이름

기둥은 놓이는 위치와 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주 :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 귀기둥이라고도 한다.

평주 : 건물의 바깥 둘레에 세운 기둥. 평기둥이라고도 한다.

고주 : 건물 내부의 세운 기둥. 고주는 하나일 수도 있고, 둘 이상일 수도 잇다. 내부의 기둥이 외곽기둥보다 높기 때문에 고주라 한다.

활주 : 팔작지붕의 건물 추녀 밑을 받치는 기둥. 한옥은 추녀가 밖으로 많이 빠져 나오기 때문에 처지기 쉽다. 추녀가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가적으로 설치한 보조기둥이다.

▲ 주심포 다포

▲ 초익공

▲ 이익공

 

'전 · 각 · 루'의 차이

전은 왕과 왕비가 업무를 보거나 생활하는 건물 또는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에 사용하는 명칭이다. 경복궁의 근정전, 각 사찰의 대웅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각은 전과 같은 큰 건물의 부속 건물을 칭하는 것으로, 전보다는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다. 루는 2층의 건물을 일컬어 사용하는 용어로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등이 그 예이다.

▲ 강진 무위사극락전  조선 세종 12년(1430) 건립된 대표적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고려 말기 이후의 건축물에서 곡선재를 많이 사용했는데, 무위사극락전은 직선재를 사용해 단정하고 엄숙하면서도 균형 있는 짜임새가 일품이다. 기둥과 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측면은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유연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직선적이고 기능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자의 지붕은 형태가 다르다

팔각정이나 육각정 등의 정자는 지붕이 길게 뻗지 않고 우산처럼 추녀마루가 중앙의 꼭지점에서 만난다. 추녀마루만 있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런 지붕의 형태를 모임지붕이라고 한다. 지붕의 평면 모양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이라 부른다.

▲ 경복궁 경회루  팔작지붕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큰 건물이다.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처음에는 사정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세종 7년(1425)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3개의 무지개문 위에 우진각지붕으로 된 문루를 올렸다.

 

지붕도 장식을 하나요?

지붕에 특별한 장식을 한다. 초가지붕에서는 용마름('ㅅ'자형으로 역은 이엉)을 빳빳하게 다림질하거나, 지붕을 일 때 쓰는 새끼를 보기 좋게 꼰다거나 해서 치장을 한다. 기와지붕에서는 기와에 문양을 넣어 장식하거나 조형물을 놓아 꾸미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치미와 잡상이 있다. 치미는 기와의 한 종류로 용마루 양 끝에 놓여 건물의 격을 높인다.

잡상은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여러 가지 인물상이다.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해 장식한다. 일반적인 잡상의 순서는 ① 삼장법사 ② 손오공 ③ 저팔계 ④ 사오정 ⑤ 마화상 ⑥ 삼살보살 ⑦ 미구룡 ⑧ 천산갑 ⑨ 이귀박 ⑩ 나토두 순이다.

 

대문은 집 안으로 열린다.

이는 대문을 통해 복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문은 집 안으로 열린다

옛날에는 대문을 달 때 집 안으로 열리도록 했다. 지금의 아파트는 내부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밖으로 열리도록 했지만, 한옥이나 일반 주택에는 아직도 문이 안으로 열리도록 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집 안으로 복이 들어오게 한 것이다. 매년 봄이 오면 대문에 '입춘대길'이란 글씨를 써서 붙여 놓은 것도 대문을 통해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문이 집 밖으로 열리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배려를 한 것이다.

▲ 문경관문  경북 문경에서 충북 충주로 넘어가는 문경새재에 설치된 3개의 관문 중 1관문인 주흘문이다. 문경새재는 지리적 · 군사적 요충지로 옛부터 중요시 되어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관문을 설치하자는 제안이 처음 나왔고,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영의정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관문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문경에서 주흘산을 넘어 중원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었다.

▲ 수원 화성  본래 수원성은 흙을 쌓아 만든 단순한 읍성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수원부를 화성이라 개칭하고, 도시를 둘러싼 성곽 공사를 정조 18년(1794) 시작하여 2년 뒤 완공하였다. 화성은 전통적인 축성 경험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이론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축조하였다. 당신의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고 중국 성곽의 장점을 취해 길이 5.52km에 달하는 성곽을 만들었다.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치밀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과학적인 성곽이다.

▲ 서울 창경궁  성종 15년(1483)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궐'이라고 불린다. 조선 전기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 등 3대 궁궐이 모두 불탄 뒤 창덕궁과 창경궁만 재건됨에 따라 창덕궁이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신임년의 사화, 숙종 때 희빈 장씨의 처형,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 등 많은 사건이 창덕궁에서 일어났다.

▲ 서산 해미읍성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조선시대 성종 22년(1491)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둘레 2km, 성벽 높이 4~5m로 북쪽의 야산을 둘러쌓은 평지형 성이다. 정문인 진남문은 축조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들어 올린 석문과 팔작지붕이 위풍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한다. 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밖에 깊이 판 해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그 증거가 되는 기록이 진남문 아래 성벽에 남아 있다. 천주교 역사에서는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천여 명의 신도들이 김옥소에 갇히고 처형당한 피의 순교사를 써 내려간 아픔의 현장이다.

▲ 고창읍성  조선시대 읍성으로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곽의 둘레는 1,684m로 대부분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성문은 동 · 서 · 북에 3개를 두었고, 치 6개, 수구문 2개, 옹성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조선 숙종 때 이항이 주민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는 설과 단종 원년(1453)에 축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성벽에는 제주시, 화순시, 나주시 등의 글자가 새겨 있어 성을 축조하기 위해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인부가 동원된 사실을 알 수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