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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 10:10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150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이덕일 · 김병기 지음

2007, 역사의 아침

 

시흥시립대야도서

SB009832

 

 

911.032

이24고

 

박찬규의 고구려 산성 답사기 수록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하신 터다.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다."

 

기마민족 특유의 진취성을 발휘하여

중원의 패자로 군림한 동아시아 최강국

 

고구려의 역사가 되살아난다!

 

엄중한 학문적 방법으로 바로잡는 고구려 역사와 30가지 쟁점들

■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단군의 아들인가?

■ 고구려 역사는 700년인가 900년인가?

■ 고구려 여인 고씨는 어떻게 북위의 황후가 되었나?

■ 태조대왕은 과연 94년 동안 왕위에 있었을까?

■ 광개토태왕은 어떻게 그 광활한 대륙을 정복했을까?

■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최선의 정책이었나?

■ 비운의 임금 안장왕의 사망 기록이 서로 다른 이유는?

■ 고구려의 전사집단 좌식자坐食者는 무위도식하는 존재인가?

■ 고구려는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 영양왕은 어떻게 수나라의 200만 대군을 격파했을까?

■ 연개소문은 무자비한 독재자인가 구국의 영웅인가?

■ 고구려의 천하관과 중국의 천하관은 어떻게 다른가?

■ 고구려 벽화에 불교와 도교가 함께 그려진 이유는?

■ 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 소나무를 심은 까닭은?

■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은 중국인 동수인가 고구려의 국왕인가?

■ 13개 군의 태수들에게 하례받은 유주자사 진은 누구인가?

■ 서양에까지 위명을 떨친 고선지는 왜 비참하게 생을 마쳤나?

■ 고구려 멸망 150년 후 고구려 후손과 신라대군이 중국에서 맞붙은 이유는?

 

■ 이덕일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를 이끌어가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특히 『조선왕 독살사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선비 살해사건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우리나라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실체를 다각도로 파헤쳐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된 고조선 역사를 완전 복원해낸 책으로 주목받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 김병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증조부와 부친을 이어 가학家學인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단국대학교에서 한국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문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으로 한국사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공저), 『조선 명가 안동 김씨』,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3』(공저), 『한국사의 천재들』(공저) 등이 있다.

 

■ 박찬규

단국대학교에서 한국 고대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연구원으로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있다. 1998년 만주 지역 첫 답사에서 고구려를 재발견하는 벅찬 감동을 느낀 후 지금까지 중국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고구려 · 발해 유적지를 본격적으로 답사하며 우리 역사의 현장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문연구원이며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차례

 

책머리에

 

1부  고구려의 건국

1_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단군의 아들인가?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 고구려

고조선의 후예들 | 고구려의 개국이념, 다물

2_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어디에서 왔을까?

부여와 동부여 · 북부여의 수수께끼

추모왕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들 | 『위서』에 전하는 자세한 내용

'광개토태왕비'에는 왜 북부여라고 썼을까?

중국인들이 부여와 북부여를 혼동한 이유 | 고구려로 흘러든 부여족

3_ 베일에 싸인 예맥족의 실체

고구려는 어느 부족이 건설했을까?

예족과 맥족은 하나의 부족일까? | 국가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예와 예맥

맥족과 예족의 통합 과정 | 고구려를 세운 맥족이 예족을 통합하다

4_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부여 시조 동명왕

동명성왕의 정통성을 계승하다

동명왕이 세운 고구려와 부여 | 동명의 지파가 세운 구려 종족

동명왕 사화와 추모왕 사화의 차이점 | 부여의 건국영웅은 누구인가?

5_ 고구려 700년인가 900년인가

추모왕이 건국하기 이전의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관한 여러 설들

 

2부   전쟁과 외교로 보는 고구려의 강역

6_ 중원의 한 · 신 · 후한과의 숙명적 대결

다물의 꿈을 실현하다

흉노의 편을 드는 고구려 | 북중국을 유린한 고구려군

후한을 거듭 공격하는 태조대왕 | 서안평은 어디인가?

산서성 일대를 공격하는 신대왕

7_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 · 후연과의 관계

선비족 모용씨와 얽히고설키는 관계들

오호십육국시대로 접어들다 | 중흥군주 미천왕 | 고구려의 시련

후연의 국왕이 된 고구려 출신 고운

8_ 북위를 장악한 고구려 사람들

고구려는 북위의 조공국이 아니었다

선비족의 북위와 고구려 | 북위의 황후가 된 고구려 여인

북위의 황제가 된 고구려 여인의 아들

9_ 남북조를 이이제이로 다스리다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다

남북조의 대립 | 남조의 계속된 혼란

10_ 북방 유목민족들과 고구려

유연, 거란에서 우즈베키스탄까지

몽골계 유연과 고구려 | 돌궐과 고구려 | 고구려와 거란 | 고구려와 서역 관계

11_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

평양성 천도가 만든 변화들

백제와의 관계 | 신라와의 관계

 

3부  고구려의 국왕과 지배층

 

12_ 고구려 초기의 이상한 왕위계승

왕자들이 잇달아 자결하는 이유

태자 해명이 자결한 이유 | 귀족을 숙청하는 대무신왕

호동왕자가 비극적 죽음을 당한 이유

13_ 태조대왕 즉위의 수수께끼

계루부 왕실의 정통성 확립 과정

모본왕은 왜 시해당했을까? | 태조대왕은 과연 94년 동안 왕위에 있었을까?

태조대왕이 죽은 해에 시해당하는 차대왕 | 『해동고기』라는 책

14_ 농민 출신 을파소의 개혁 정치

농사꾼이 국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왕과 권력을 나누어 가진 연나부의 반란 | 농사꾼에서 국상으로 | 개혁정치의 꽃, 진대법

15_ 광개토태왕의 대제국 건설

강력한 왕권으로 확장한 대제국

각 전사집단의 통합 | 불교 유임과 율령 반포, 태학 설립 | 광개토태왕의 전술

독자적인 천하관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역 | 고구려의 속국들

16_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남긴 것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의 의미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 |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최선의 정책이었나?

전통적 국제관계의 변화와 북연의 멸망

17_ 고구려 후기 왕실의 혼란

비운의 임금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서로 다른 사망 기록들 | 『삼국사기』「지리지」의 사랑이야기를 찾아서

안장왕의 의문의 죽음

18_ 귀족과 국왕의 갈등

귀족들이 대대로를 선임할 수 있었던 이유

평양 궁전 앞의 대혈투 | 고구려의 왕권이 약해진 이유

귀족에게 선임권이 있었던 국정 최고 관직 대대로

 

4부  중원과의 전쟁

19_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했던 이유는?

좌식자 1만여 명의 수수께끼

싸움이 숙명이었던 고구려인 | 전문 전사집단 대가

자발적인 순장자들 | 이원적인 군사체제의 문제점

20_ 고구려는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

생포한 국왕들을 살려준 이유

광개토태왕은 왜 백제를 멸망시키지 않았을까? | 고구려 중심의 천하체제

백제와 신라의 차이점 |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는 장수왕

21_ 수나라 두 황제를 물리친 영양왕을 찾아서

수나라 두 황제의 침입을 격퇴한 위대한 군주

시조묘에 제사한 평원왕 |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는 영양왕

1차 전쟁 | 2차 전쟁과 살수대첩

22_ 대막리지 연개소문 일대기

당나라의 조직적 악마 만들기에 희생된 영웅의 복원

(1)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삼국사기』는 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서술했을까?

연개소문은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 『삼국사기』에 관철된 당태종의 연개소문관

두 세계관의 충돌 | 연개소문의 유화책 | 신라를 침공하지 마라

(2)동북아의 운명을 건 대전쟁

운명의 안시성 혈투 | 당태종이 철수한 진짜 이유 | 연개소문의 비도술 | 그 후의 일들

 

5부  고구려인의 사상과 풍속

23_ 고구려식 천하관과 중국식 천하관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생각

두 비문과 『삼국사기』의 차이점 | 가공되지 않은 고구려인의 세계, 두 비문

중국의 천하관과 고구려의 천하관

24_ 고구려인들의 종교 생활

고구려 벽화에 불교와 도교가 함께 그려진 이유

소수림왕이 불교를 선뜻 받아들인 이유 | 신라의 불교 수용이 어려웠던 이유

도교의 융성과 고분벽화

25_ 고구려의 혼인제도는 데릴사위제였나?

고구려의 데릴사위와 옥저의 민며느리에 대한 오해들

별채 뒤에 사위집을 둔 이유 | 데릴사위제와 민며느리제는 모두 매매혼

여성에게 더 관대했던 고구려 사회

26_ 형제의 부인이 된 왕후 우씨

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 소나무를 심은 까닭

한밤중에 시동생을 찾은 왕후 | 형수를 아내로 삼은 산상왕

주통천의 여인을 투기하는 왕후 우씨 | 고구려는 과연 형사취수제 풍습이 있었나?

 

6부  고구려인과 망명객 그리고 유민들

27_ 고구려에 온 중국 망명객들

중국인 장하독 위에 쓰여진 묵서명의 비밀을 찾아서

묵서명이 있는 고분벽화 | 왜 장하독 위에 묵서명을 썼을까?

탈취당한 미천왕의 시신 | 한인 포로들은 어디에 수용되었나?

28_ 덕흥리 고분벽화의 유주자사 진

난하 부근까지 진출한 고구려

13군 태수들이 하례하다

29_ 고구려 유장들의 궤적

당의 장수가 된 고선지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궤적

서양에 위명을 떨친 고선지 |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30_ 잊혀진 건국영웅 이정기

당나라 한복판에 치청왕국을 세운 이정기 일가의 발자취

당나라에 파견되는 신라군 |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성장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이정기 |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을 아우르는 치청왕국 건설

 

7부   답사기로 읽는 고구려사

31_ 발로 쓴 고구려사

첫 도읍지 환인에서 낙양의 위나라 문소황후릉까지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에서 관전의 고구려 산성까지

고구려와 북위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 | 대흥안령 산맥을 넘다

위나라 왕후가 된 고구려 여인을 찾아서

32_ 산성의 나라 고구려

박찬규의 고구려 산성 답사기

산성을 가장 잘 이용한 나라 | 요동반도의 지킴이 비사성 | 고구려 산성의 전형 성산산성

고구려의 세력확장 기지 박작성 | 저기가 추모왕의 도읍 홀본성인가

영욕의 환도산성 | 축성술의 백미 백암성 | 답사를 마치며

 

고구려 왕 계보도

찾아보기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단군사화가 묘사된 것이나, 고구려가 만주 지역의 한사군을 쫓아내고 발전한 국가라는 사실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예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던 나라다.

 

 

▲ 오녀산성 전경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비류수 가의 홀본(오녀산성을 중심으로 한 환인 지역)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 단군신화가 묘사된 각저총 벽화  왼쪽 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 무용총 수렵도에 나타난 활 쏘는 무사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이름은 '활 잘 쏜느 자'라는 뜻이다.

▲ 광개토태왕릉비 중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라고 쓴 부분

▲ 기자

▲ 남한산성 숭렬전  백제 시조 온조의 사당이다.

 

고구려는 미천왕 12년(311) 요동군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서쪽 진출의 교두보로 확보했고, 서진西進하여 미천왕 14년(313)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이듬해(314) 가을 9월에는 대방군을 침공했다. 계속해서 그 이듬해(315)는 현도군을 공격함으로써 서안평을 교두보로 한 서쪽 지역의 공략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국 세력을 지금의 난하 밖까지 축출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 고구려가 중국과 쟁패를 겨룬 대릉하

▲ 북위를 건국한 선비족의 발상지 알선동굴

▲ 조양시와 시내를 관통하는 대릉하

▲ 알선동굴  북위를 건국한 선비족은 처음 대흥안령 산맥의 알선동 일대에 거주했다.

▲ 알선동굴 내 암각(복제품)

▲ 효문제의 장릉

▲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사신도  오른쪽의 두 남자는 머리에 새 깃털을 꽂고 환두대도를 찬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절로 추측된다.

▲ 머리에 새 깃털을 꽂은 무용총 수렵도의 무사

▲ 관미성 성벽  관미성은 오두산성으로 비정된다.(경기도 파주 소재)

▲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전사시킨 아차산성

 

영락永樂 14년인 광개토태왕 14년(404)에 왜가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 영토인 대방계에 쳐들어왔을 때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끌고 이를 물리치러 나갔는데, 광개토태왕릉비는 이때 왕이 이끈 군사를 임금의 깃발을 나부끼는 '왕당王幢'이라고 표현했다.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정벌하면서는 관군官軍이란 표현도 사용했는데 이는 각 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전사집단을 국왕의 군대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준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 서쪽 벽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 따르지 않은 태자 해명은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 환도산성 아래 무덤떼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쪽 성벽과 망루만 남아 있다.

▲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고구려 불상으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광개토태왕의 영토확장을 묘사한 기록화(전쟁기념관 소장)

▲ 장수왕릉  (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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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