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 三國志 4 천하를 삼분하다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6,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4857
823.5
나15삼6 4
◎ 등장인물
사마의司馬懿(179 ~ 251년)
위(魏)의 권신. 서진(西晋) 왕조의 시조. 자는 중달(仲達). 그의 손자 사마염 때에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조조의 부하가 된 이후로 그 아들인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했으며, 삼국정립의 위기에 처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촉한(蜀漢)의 제갈공명을 오장원에서 막아낸 일은 유명하다. 또 요동을 정벌하여 요동 태수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밖에 남방의 오나라에 대비하여 회하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軍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다.
조비曹丕(186 ~ 226년)
위(魏)의 첫 번째 황제인 문제(文帝). 조조의 둘째 아들. 자는 자환(子桓). 재위기간은 220 ~ 226년. 후한의 헌제에게 선양받는 식으로 위나라를 세웠다. 조조와 동생 조식과 함께 건안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특히 그의 시(악부시)는 알기 쉬운 어휘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에 제정된 9품관인법은 6조시대의 귀족사회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
양수楊修(175 ~ 219년)
위(魏)의 재사. 자는 덕조(德祖). 청렴과 덕망을 겸한 명문 출신. 재기가 발랄하고 두뇌 회전이 매우 빨랐다. 조조는 자기도 기지가 뛰어난 재사였기 때문에 '계륵(鷄肋)' 등의 수수께끼를 양수가 쉽게 푸는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질투가 섞인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조조는 조비를 후계자로 정한 이상 조식의 참모로 활발히 일하고 있는 양수의 존재가 장차 화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계륵 사건으로 꼬투리를 잡아 죽인다.
여몽呂蒙(178 ~ 219년)
오(吳)의 명장. 자는 자명(子明).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녔다. 강적 관우와 형주에서 대결했을 때는 젊은 육손을 앞세워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후방을 급습하여 관우를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뜨렸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명작전이었다.
마초馬超(176 ~ 222년)
촉(蜀)의 장수. 자는 맹기(孟起). 제갈량이 장비와 겨룰 만한 용장이라고 한 인물. 아버지 마등 때부터 양주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211년, 적벽대전에서 패해 서쪽으로 온 조조 군과 동관에서 싸워 대패하고는 일시 장로의 휘하에 있다가 성도를 포위한 유비 군에게 투항했다.
이엄李嚴(? ~ 234년)
촉(蜀)의 장수. 자는 정방(正方). 원래 유장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의 촉 입성 때 전향했다. 그 후 촉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후사를 제갈공명과 함께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이 네 번째 위나라 정벌에 나섯을 때, 군량 보급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가 책임 추궁을 받는다.
장송張松(? ~ 212년)
유장의 모사. 208년 7월. 형주를 빼앗은 조조의 전승을 축하하러 갔으나 풍채가 좋지 못하다는 연유로 무시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비를 찾아간다. 211년, 한중의 장로 토벌에 나선 조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비와 함께 한중을 치도록 유장에게 진언했다. 이어서 법정과 함께 유비를 위해 서촉 탈취 계획을 추진했으나 결국은 형인 장숙의 밀고로 유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종요鐘繇(151 ~ 230년)
위(魏)의 중신. 자는 원상(元常). 이각 · 곽사가 장안에서 횡포를 부리던 시기에 헌제의 장안 탈출을 도왔다. 후에 조조 휘하로 들어가서 관중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한수 · 마초 등을 내몰고, 관도의 싸움 때는 말 2천여 두를 공급하여 조조를 감격케 했다. 위 건국 후 태위에 올라 명제(明帝) 때까지 중신으로 있었다.
감녕甘寧
오(吳)의 용장. 자는 흥패(홍興覇). 손권이 가장 아끼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 명의 기병으로 위나라의 진중을 휩쓸어 강좌호신(江左虎臣)이라고 불렸다. 유비가 관우 · 장비의 원수를 갚으러 축병했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했다가 맹장 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로張魯
한중(漢中) 군웅의 하나. 자는 공기(公祺). 조부인 장릉이 창시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계승하여, 오두미도에 입각한 독립국을 세웠다. 215년, 조조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투항하려 했으나 동생의 반대로 마침내 대항하여 싸웠다. 요새인 양평관이 함락된 뒤 소수 민족 지역으로 도망쳐 저항을 계속했으나 마침내 조조의 설득으로 귀순하여 진남 장군에 봉해졌다.
하후연夏候淵(? ~ 219년)
조조의 장수. 자는 묘재(妙才). 조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조조의 거병에 참가하여 원소 및 한수와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후에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서 한중을 지켰으나 유비의 공격을 받고 황충에게 죽임을 당했다.
서황徐晃(? ~ 227년)
조조의 장수. 자는 공명(公明).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조조가 허도로 후퇴하자 조인과 함께 강릉을 지키며 추격군에 대비했다. 219년, 조인이 지키던 번성이 관우에게 포위되자 구원병을 이끌고 가서 관우 군을 패세로 몰아넣었다.
순욱荀彧(163 ~ 212년)
조조의 모사. 원래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칠 때 그의 막하로 들어왔다. 조조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으나 그가 위공(魏公)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로 조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화가 두려워 자결했다.
가규賈逵
위(魏)의 문신. 자는 양도(梁道). 홍농군 태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간의관으로 작전에 임했다. 문제 때는 예주를 다스려 이름을 날렸고, 다시 명제를 섬기면서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었다.
한수韓遂(? ~ 215년)
후한 말 군웅의 하나. 자는 문약(文約). 영제 때 변장과 함께 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온 · 동탁 등의 공격을 받고 양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헌제 때 마초 등과 손을 잡고 조조와 싸우다 패하고, 수년 후 서평(西平) 금성(金城) 지방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관흥關興
관우의 아들. 자는 안국(安國).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했을 때, 장비의 아들 장포와 함께 종군하여 그를 도왔다. 난군 중에 아버지의 원수인 오나라의 반장을 찾아내어 죽이고 아버지가 쓰던 청룡도를 되찾아와 평생 사용했다. 무용이 뒤어나서 아버지 못지않다는 평을 들었다.
화흠華歆(157 ~ 231년)
위(魏)의 중신. 자는 자어(子魚). 하진에게 발탁되어 벼슬을 했으나 동탁이 전횡하자 일단 은퇴했다가 헌제 때 예장 태수가 되었다. 그 후 위나라에 가서 대신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관평關平(? ~ 219년)
관우의 아들. 정사(正史)에는 아버지와 같이 오나라 마충에게 체포되었다는 기록밖에 없으나, 소설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크게 활약하다 같이 목이 잘린다.
조휴曹休
조조의 조카. 자는 문열(文烈).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겨 정동대장군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228년, 대사마(大司馬)로서 오나라 방위를 담당하다가 손권의 유인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도망했으나, 결국 등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차례
절묘한 탈출극
주유의 분사
봉추 선생과 마등
마초의 복수전
위수의 지구전
이간책
장송의 변심
유비, 서촉으로 진군하다
조조 위공이 되다
부수관 점령
위연의 실패
공명의 서촉행
낙성 공방전
풍운 속의 마초
가맹관에서 맺은 인연
형주 쟁탈전
감녕의 결사대
불타는 장안성
장비의 깊은 계책
노장의 큰 전공
칠순 노장이 하후연을 베다
섣부른 배수진
사람을 죽인 닭의 갈비
한중왕 유현덕
방덕, 관을 지고 출전하다
신의 화타
관운장의 패전
외로운 성에 지는 해
사후의 관운장
간웅의 죽음
가도멸괵
[假途滅虢]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
假 : 빌릴 가
途 : 길 도
滅 : 멸망할 멸
虢 : 나라이름 괵
괵나라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우인 괵중이 세운 제후국(諸侯國)인데, 진(晉)나라의 침입으로 괵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생겨난 이야기로 《천자문(千字文)》에 실려 있는 성어(成語)이다.
중국 춘추시대 이웃나라인 우(虞)나라와 괵나라는 진나라와 경계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진나라의 헌공(獻公)이 괵나라로 쳐들어가려고 순식(荀息)에게 그 의견을 묻자, 순식은 '괵나라로 가려면 우나라를 통과해야 하므로 우나라 왕에게 옥과 말을 보내 길을 빌려달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순식의 계략에 따라 헌공은 우나라로 옥과 말을 보냈는데, 욕심 많은 우나라 왕은 재상인 궁지기(宮之寄)와 논의하였다.
궁지기는 왕에게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킨 뒤 우나라도 쳐들어올 것이므로 길을 빌려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우나라와 괵나라는 이와 입술 같은 사이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이[脣亡齒寒] 괵나라가 무너지면 우나라도 위험하다'고 간언하였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으나, 우나라 왕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진나라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일찍부터 괵나라와 우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졌던 진나라가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괵나라를 무너뜨린 뒤 우나라까지 쳐들어가 멸망시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군사계획의 의도를 숨기기 위한 구체적 수단으로 쓰이는 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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