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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5. 15:2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1  강화도

 

글, 사진 / 이형구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9

 

082

빛 12 ㄷ 153

 

빛깔있는 책들 153

 

이형구-------------------------------------------------------------------------

홍익대학교를 졸업, 국립대만대학교 문과대학 고고인류학과 기본과정을 이수하였고 동 대학원 고고인류학과에서 문학석사, 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만 고궁박물관 객원연구원,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자료조사실 실장, 동 역사연구실 교수 겸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선문대학교 교수, 문화체육부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저서로 『발해 연안고대문화의 연구』『광개토대왕릉비신연구』『한국고대문화의 기원』『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단군을 찾아서 - 단궁릉 발굴 학술보고집』 등과 역서로 『갑골학 60년』과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머리글

지리와 환경

역사

문화 유적

신석기시대 문화

청동기시대 문화

고조선시대 문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문화

고려시대 문화

조선시대 문화

근세 국방 유적

맺는 글

부록

참고 문헌

 

▲ 마니산 참성단 전경  참성단의 구조는 상방하원(上方下圓)이다. 위는 참성단의 아랫부분, 아래는 참성단의 윗부분 영역이다.

▲ 갑곶 탱자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자생하고 있는 탱자나무로 천연기념물 제78호이며 수령 400년이나 된다.

▲ 강화역사관  갑곶돈대 아래에 세워진 강화역사관은 강화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전시관의 1층에는 선사, 역사실, 2층에는 국난 그복실로 꾸몄다.

▲ 병인양요 때 삼랑성 전투도  아군이 삼랑성 동문 성루 위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시키는 장면을 그린 상상도이다. 강화역사관에 전시된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 화도면 동막리 신석기시대 유적  강화의 선사 시대 문화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 토기 유적이다. 그러나 동막리 해안가 둑 주변이 많이 파괴되어 보존이 아쉽다.

▲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무덤  사적 제137호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북방식 고인돌 무덤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굄돌 위에 50톤이 넘는 화강암 덮개돌을 올렸다.

▲ 하점면 신삼리 고인돌 무덤  강화도 안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논바닥에 위치한 고인돌 무덤이다. 해발 5미터 이내의 논바닥에 장대한 고인돌과 덮개돌로 축조된 이 고인돌 무덤도 축조 당시에는 아마 지금처럼 논이 아니라 대지에 세워졌을 것이다.

▲ 마니산 참성단과 성화 채화 장면

▲ 봉천산 봉천대

▲ 삼랑성 동문

▲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

▲ 전등사 가람 배치도

▲ 전등사 대웅보전  고구려 때 개창되었다고 전해지는 전등사는 고려시대 정화 궁주의 원찰이었다. 위는 대웅보전 전경, 아래는 처마 모서리의 나상이다.

▲ 대웅전 내부 전경

▲ 중국 송대의 종

▲ 전등사 약사전

▲ 정수사  정수사에는 정수법당이라 부르는 대웅전(보물 제161호)이 유명하다. 맞배형 문의 건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다.

▲ 보문사 마애 여래상

▲ 고려 홍릉  고려산 남록 중턱에 위치한 고려 고종(1213~1259년)의 능으로 사적 제224호이다. 능 조역(兆域)에는 간단한 상석을 마련하고 좌우에 석인 한 쌍씩을 세웠다.

▲ 석인상

▲ 이규보 선생 묘와 석상  길상면 길직리 산 15번지 백운동에 있는 고종 때의 대학자 이규보 선생이 묻힌 곳이다. 아래는 석인과 석양.

▲ 봉은사지 5층석탑  하점면 장정리 봉은사지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강화도에서는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 강화 동종  고려궁 터 안의 서쪽 종각 안에 있는 이 종은 불교 관련 종이 아닌, 조선시대 강화 성문을 여닫을 때 그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쓰던 종이다.(보물 제11호)

▲ 강화지도  강화성 안에는 궁전과 관아가 상세히 배치되었고 곶(串)마다 돈대가 표시되었다. 조선 후기 제작. 이원기 씨 소장.

▲ 강화성 서문인 첨화루

▲ 석수문(石水門)  고려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동락천이 서문 아래로 지나 강화성 안을 관통하여 남문 쪽으로 흐른다. 서문 쪽에는 석수문(삼수문)이 있었고 남문 쪽에는 남수문(하수문)이 있었다.

▲ 강화유수부 동헌  원래 고려궁 터 자리에 세운 강화유수부의 상아(上衙)로 북쪽에는 조선시대의 행궁이, 동쪽에는 객사가 있었다.

▲ 강화유수부 이방청  강화유수부 6방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고려궁 터 정문인 승평문 서쪽에 위치해 있다.

▲ 용흥궁(위)과 현판(아래)  철종이 임금에 오르기 전인 19세까지 살던 초가집을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지어 용흥궁이라 이름했다.

▲ 장사각과 선원보각 현판  현재 전등사 대조루는 기념품 가게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 안에 여러 기념품과 함께 현판들이 걸려 있다.

▲ 규장외각도  정조 때 그린 그림으로 화제(畵題)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교동 향교  교동 읍내리 148번지 화개산 남록에 있다. 고려 원종 때 처음으로 공자를 모셨다고 한다.

▲ 성공회 강화 성당의 한식 예배당

▲ 갑곶 포대

▲ 문수산성 북문 터 홍예  북문 갑곶 건너편은 육지의 관문이다.

▲ 광성보  1977년 복원된 성문인 안해루이다.

▲ 손돌목돈  원형으로 된 돈대이다.

▲ 광성돈

▲ 남장포대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 9개 포대 가운데 가장 큰 포대이다. 포좌가 15문이 있다.

▲ 용두돈대  마치 용처럼 뻗어나온 능선을 이용해서 해안 끝머리 벼랑 위에 조그마한 타원형의 돈대를 마련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강화 돈대의 으뜸이다.

▲ 덕진돈  방형에 가까운 작은 성곽으로 서북쪽에 네모난 문이 있다.

▲ 계룡돈

▲ 계룡돈대 축성기명(記銘)

▲ 장곶돈

 

 

posted by 황영찬
2013. 2. 21. 12:15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0  三國志 4 천하를 삼분하다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6, 은행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4857

 

823.5

나15삼6  4

 

 

 

 

 

◎ 등장인물

 

사마의司馬懿(179 ~ 251년)

위(魏)의 권신. 서진(西晋) 왕조의 시조. 자는 중달(仲達). 그의 손자 사마염 때에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조조의 부하가 된 이후로 그 아들인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했으며, 삼국정립의 위기에 처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촉한(蜀漢)의 제갈공명을 오장원에서 막아낸 일은 유명하다. 또 요동을 정벌하여 요동 태수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밖에 남방의 오나라에 대비하여 회하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軍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다.

 

조비曹丕(186 ~ 226년)

위(魏)의 첫 번째 황제인 문제(文帝). 조조의 둘째 아들. 자는 자환(子桓). 재위기간은 220 ~ 226년. 후한의 헌제에게 선양받는 식으로 위나라를 세웠다. 조조와 동생 조식과 함께 건안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특히 그의 시(악부시)는 알기 쉬운 어휘와 치밀한 묘사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에 제정된 9품관인법은 6조시대의 귀족사회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

 

양수楊修(175 ~ 219년)

위(魏)의 재사. 자는 덕조(德祖). 청렴과 덕망을 겸한 명문 출신. 재기가 발랄하고 두뇌 회전이 매우 빨랐다. 조조는 자기도 기지가 뛰어난 재사였기 때문에 '계륵(鷄肋)' 등의 수수께끼를 양수가 쉽게 푸는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질투가 섞인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조조는 조비를 후계자로 정한 이상 조식의 참모로 활발히 일하고 있는 양수의 존재가 장차 화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계륵 사건으로 꼬투리를 잡아 죽인다.

 

여몽呂蒙(178 ~ 219년)

오(吳)의 명장. 자는 자명(子明).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녔다. 강적 관우와 형주에서 대결했을 때는 젊은 육손을 앞세워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후방을 급습하여 관우를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뜨렸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명작전이었다.

 

마초馬超(176 ~ 222년)

촉(蜀)의 장수. 자는 맹기(孟起). 제갈량이 장비와 겨룰 만한 용장이라고 한 인물. 아버지 마등 때부터 양주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211년, 적벽대전에서 패해 서쪽으로 온 조조 군과 동관에서 싸워 대패하고는 일시 장로의 휘하에 있다가 성도를 포위한 유비 군에게 투항했다.

 

이엄李嚴(? ~ 234년)

촉(蜀)의 장수. 자는 정방(正方). 원래 유장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의 촉 입성 때 전향했다. 그 후 촉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후사를 제갈공명과 함께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이 네 번째 위나라 정벌에 나섯을 때, 군량 보급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가 책임 추궁을 받는다.

 

장송張松(? ~ 212년)

유장의 모사. 208년 7월. 형주를 빼앗은 조조의 전승을 축하하러 갔으나 풍채가 좋지 못하다는 연유로 무시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비를 찾아간다. 211년, 한중의 장로 토벌에 나선 조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유비와 함께 한중을 치도록 유장에게 진언했다. 이어서 법정과 함께 유비를 위해 서촉 탈취 계획을 추진했으나 결국은 형인 장숙의 밀고로 유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종요鐘繇(151 ~ 230년)

위(魏)의 중신. 자는 원상(元常). 이각 · 곽사가 장안에서 횡포를 부리던 시기에 헌제의 장안 탈출을 도왔다. 후에 조조 휘하로 들어가서 관중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한수 · 마초 등을 내몰고, 관도의 싸움 때는 말 2천여 두를 공급하여 조조를 감격케 했다. 위 건국 후 태위에 올라 명제(明帝) 때까지 중신으로 있었다.

 

감녕甘寧

오(吳)의 용장. 자는 흥패(홍興覇). 손권이 가장 아끼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 명의 기병으로 위나라의 진중을 휩쓸어 강좌호신(江左虎臣)이라고 불렸다. 유비가 관우 · 장비의 원수를 갚으러 축병했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했다가 맹장 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로張魯

한중(漢中) 군웅의 하나. 자는 공기(公祺). 조부인 장릉이 창시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계승하여, 오두미도에 입각한 독립국을 세웠다. 215년, 조조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투항하려 했으나 동생의 반대로 마침내 대항하여 싸웠다. 요새인 양평관이 함락된 뒤 소수 민족 지역으로 도망쳐 저항을 계속했으나 마침내 조조의 설득으로 귀순하여 진남 장군에 봉해졌다.

 

하후연夏候淵(? ~ 219년)

조조의 장수. 자는 묘재(妙才). 조조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조조의 거병에 참가하여 원소 및 한수와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후에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서 한중을 지켰으나 유비의 공격을 받고 황충에게 죽임을 당했다.

 

서황徐晃(? ~ 227년)

조조의 장수. 자는 공명(公明).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조조가 허도로 후퇴하자 조인과 함께 강릉을 지키며 추격군에 대비했다. 219년, 조인이 지키던 번성이 관우에게 포위되자 구원병을 이끌고 가서 관우 군을 패세로 몰아넣었다.

 

순욱荀彧(163 ~ 212년)

조조의 모사. 원래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칠 때 그의 막하로 들어왔다. 조조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으나 그가 위공(魏公)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로 조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화가 두려워 자결했다.

 

가규賈逵

위(魏)의 문신. 자는 양도(梁道). 홍농군 태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간의관으로 작전에 임했다. 문제 때는 예주를 다스려 이름을 날렸고, 다시 명제를 섬기면서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었다.

 

한수韓遂(? ~ 215년)

후한 말 군웅의 하나. 자는 문약(文約). 영제 때 변장과 함께 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온 · 동탁 등의 공격을 받고 양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헌제 때 마초 등과 손을 잡고 조조와 싸우다 패하고, 수년 후 서평(西平) 금성(金城) 지방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관흥關興

관우의 아들. 자는 안국(安國).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했을 때, 장비의 아들 장포와 함께 종군하여 그를 도왔다. 난군 중에 아버지의 원수인 오나라의 반장을 찾아내어 죽이고 아버지가 쓰던 청룡도를 되찾아와 평생 사용했다. 무용이 뒤어나서 아버지 못지않다는 평을 들었다.

 

화흠華歆(157 ~ 231년)

위(魏)의 중신. 자는 자어(子魚). 하진에게 발탁되어 벼슬을 했으나 동탁이 전횡하자 일단 은퇴했다가 헌제 때 예장 태수가 되었다. 그 후 위나라에 가서 대신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관평關平(? ~ 219년)

관우의 아들. 정사(正史)에는 아버지와 같이 오나라 마충에게 체포되었다는 기록밖에 없으나, 소설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크게 활약하다 같이 목이 잘린다.

 

조휴曹休

조조의 조카. 자는 문열(文烈).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겨 정동대장군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228년, 대사마(大司馬)로서 오나라 방위를 담당하다가 손권의 유인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도망했으나, 결국 등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차례

 

절묘한 탈출극

주유의 분사

봉추 선생과 마등

마초의 복수전

위수의 지구전

이간책

장송의 변심

유비, 서촉으로 진군하다

조조 위공이 되다

부수관 점령

위연의 실패

공명의 서촉행

낙성 공방전

풍운 속의 마초

가맹관에서 맺은 인연

형주 쟁탈전

감녕의 결사대

불타는 장안성

장비의 깊은 계책

노장의 큰 전공

칠순 노장이 하후연을 베다

섣부른 배수진

사람을 죽인 닭의 갈비

한중왕 유현덕

방덕, 관을 지고 출전하다

신의 화타

관운장의 패전

외로운 성에 지는 해

사후의 관운장

간웅의 죽음

 

가도멸괵

[假途滅]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

 

: 빌릴 가

: 길 도

: 멸망할 멸

: 나라이름 괵

 

괵나라는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우인 괵중이 세운 제후국(諸侯國)인데, ()나라의 침입으로 괵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생겨난 이야기로 《천자문(千字文)》에 실려 있는 성어(成語)이다.

중국 춘추시대 이웃나라인 우()나라와 괵나라는 진나라와 경계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진나라의 헌공(獻公)이 괵나라로 쳐들어가려고 순식(荀息)에게 그 의견을 묻자, 순식은 '괵나라로 가려면 우나라를 통과해야 하므로 우나라 왕에게 옥과 말을 보내 길을 빌려달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순식의 계략에 따라 헌공은 우나라로 옥과 말을 보냈는데, 욕심 많은 우나라 왕은 재상인 궁지기(宮之寄)와 논의하였다.

궁지기는 왕에게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킨 뒤 우나라도 쳐들어올 것이므로 길을 빌려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우나라와 괵나라는 이와 입술 같은 사이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이[脣亡齒寒] 괵나라가 무너지면 우나라도 위험하다'고 간언하였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으나, 우나라 왕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진나라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일찍부터 괵나라와 우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졌던 진나라가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괵나라를 무너뜨린 뒤 우나라까지 쳐들어가 멸망시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군사계획의 의도를 숨기기 위한 구체적 수단으로 쓰이는 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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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2. 14. 09:40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9  북한산성

 

글, 사진 / 조면구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8

 

082

빛 12 ㄷ 152

 

빛깔있는 책들 152

 

조면구-------------------------------------------------------------------------

1952년 충남 아산군 도고면에서 출생했다. 한국 산서회, 한국 땅이름학회,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원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성동구청에 재직하고 있다. 1985년 이래 줄곧 북한산성 유적 조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월간 『산』에 '북한산성과 성내 유적'을 연재한 바 있다.

 

|차례|

 

여는 글

북한산의 지형과 역사

시대적 배경에 따른 축성론

북한산성 축성

성내 시설

보조 성곽과 축성

북한산성 찾아가는 길

맺음말

참고 문헌

 

▲ 17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도」의 북한성도

▲ 북한산 전경  단국대 김윤우 교수에 의하면 부아악은 백제, 신라, 고려 전기까지, 삼각산은 고려 전기 이후부터 불리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화산, 화악은 고려와 조선 전기에, 북한산은 조선시대 이후 삼각산의 별칭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삼각산, 북한산으로 다 호칭되지만 점차 북한산으로 굳혀 가고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 동장대

▲ 신라 진흥왕 순수비 유지(遺址)  북한산 서남쪽 해발 556미터 비봉 정상에는 국보 제3호인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이 백제를 무찌르고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새 영토를 두루 순행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지금은 모조비가 서 있으며 앞면에는 "사적 제228호 신라 진흥왕 순수비 유지", 뒷면에는 "이곳에 세워졌던 진흥왕 순수비는 1,400여 년의 오랜 풍우로 그 비신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16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고 유지를 사적으로 지정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 대남문

▲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

▲ 장군봉 아래에 있는 백운동문 각자  「북한지」에 의하면 백운동 입구 바위에 "백운동문" 4자가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성문  성문은 개구부, 육축, 문루, 문비 등으로 되어 있다.

▲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 유영터에는 245×150센티미터 크기의 비가 있다. 이 비는 숙종 41년(1715) 도제조 이이명이 당초 소동문 안에 건립한 금위영 유영을 이곳으로 옮겨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대서문 전경  문루가 일제 말기에 파손된 채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58년 당시 최현길 경기도지사가 698만 환을 들여 문루를 복원하고 우마차가 겨우 다니던 오솔길을 확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서암문 외측

▲ 북문

▲ 대동문

▲ 보국문

▲ 청수동 암문

▲ 부왕동 암문

▲ 가사당 암문

▲ 수문 방어 시설  수문은 성벽 일부가 개방된 취약지임으로 적의 공격에 대비한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 수구  수문에서 서암문을 잇는 성곽에 있으며 우수의 배수 역할을 한다.

▲ 부왕동 암문 인근의 여장

▲ 행궁의 옛 모습  무너지기 수년 전의 모습이다.

▲ 상창터의 궤궁암(掛弓岩) 각자

▲ 상창터의 석축

▲ 훈련도감 유영터에 있는 못

▲ 비석거리의 총융사 선정비들

▲ 산영루 터

▲ 북한승도절목  용학사 아래에 있으며 가로 225센티미터, 세로 110센티미터 크기이다.

▲ 중성과 중성문

▲ 탕춘대성의 독박굴 암문

▲ 삼천사 터 마애 여래 입상  불상 형태와 함께 고려 중기 양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보물 제657호.

▲ 삼천사 터에 있는 대지 국사 탑비 귀부의 모습

▲ 증취봉 자락의 울창한 숲속에 있는 삼천사 터의 석축

▲ 중흥사의 옛 모습  중흥사는 거찰이었다.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중흥사의 전경, 대웅전, 대웅전의 내외부, 극락전, 전륜전 등 6장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 태고사 원증 국사 탑비  태고사 경내에 있으며 전체 높이 3.42미터, 비신 높이 2.27미터인 화강암 석비이다. 장방형의 대석은 거북 모양으로 간결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지붕이 붕괴된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한 것이다.

▲ 태고사 대웅전과 탑비의 비각

▲ 태고사의 부도

▲ 태고사 원증 국사탑  보우의 사리탑으로 화강암 3층석탑인데, 500여 년의 모진 세파를 잘 견딘 채 지금도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잇다. 이 부도는 도굴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비각 복원 뒤 1980년 10월 복원되었다.

▲ 부왕사의 거대한 초석

▲ 성능의 부도  키가 2.8미터 되는 사리탑으로 문화재 지정이 요청된다.

▲ 북한도  축성 당시의 북한산성을 그린 것으로 성능 스님이 편찬한 「북한지」(1745년)에 수록되어 있다. 「북한지」는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2. 12. 16:21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18 왕초보 화엄경박사되다

 

정병조 지음

2012, 민족사

 

 

대야도서관

SB071828

 

223.55

정44ㅇ

 

화엄경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반야와 유식사상을 밑거름으로 하여 여래강사상이 싹트고 이것을 근본으로 하여 화인의 우주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또 화엄은 훗날 중국 선사상을 형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즉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완성판이자, 고대국가의 지도원리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 맨대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못하노니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어다

 

화엄에서는 수없이 많은 세계를 언급하고 잇습니다. 법문이 설해진 처소는 엄청나게 많은 장소이며, 또한 많은 횟수를 거듭하여 설해집니다. 화엄의 가르침을 얻은 후에 바르게 수행을 하려면, 편안하게 따라 들어가 부처님 법계의 미묘한 장엄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속과 함께하되 물들지 않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항상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 본문 중

 

정병조

1970년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2년간 인도 네루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1986년 동국대 대학원 철학박사학위를 취득, 1980년부터 2011년까지 동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사)한국불교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동국대 도서관장과 사회교육원 원장, 교무처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1년 정년퇴임했다. 2011년 현재 금강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며 동국대 명예 교수, 불교 연구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정병조의 불교강좌』, 『인도철학사상사』, 『지혜의 완성』, 『불교와 인도고전』, 『인도의 여정』, 『전환기의 한국불교』, 『정병조 불교입문』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역해 육조단경』, 『현대불교입문』, 『야스퍼스의 불교관』, 『불교의 심층심리』가 있으며, 「십일면관음의 연구」, 「한중불교교류사연구」, 「불교의 경제윤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또한 2010년 『성사원효(Master Wonhuo)』 및 『한국불교사상사(History of Korean Buddhism)』 등 영문판을 출간하였다.

 

삼보귀의三寶歸依

 

이 책을 불보살님 전에 올립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uddham saranam gacchami

dhammam saranam gacchami

samgh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buddh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dhammam saranam gacchami

dutiyam pi samgham saranam gacchami

 

tatiyam pi buddham saranam gacchami

tatiyam pi dhammam saranam gacchami

tatiyam pi samgham saranam gacchami

 

차례

 

● 글머리에

 

제1장 화엄경의 구성

    1 화엄경의 출현과 번역

       화엄경과 비로자나불

       번역의 종류

 

   2 화엄경 설법의 의미

       제목에 나타난 중심사상

      화엄의 부처님

 

    3 지상과 천상의 설법

       화엄경의 전개 방식

       설법의 주요 내용

 

제2장 화엄경 각 품의 내용

    1 부사의(不思議)한 믿음

       첫 번째 설법

          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2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3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4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5 화장세계품9華藏世界品)

          6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수행의 공덕

 

    2 변치 않는 믿음과 지혜의 열 가지 설법

       보광명전의 설법

          7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8 사성제품9四聖諦品)

          9 광명각품(光明覺品)

          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11 정행품9淨行品)

          12 현수품(賢首品)

        입법계품의 선재동자

 

    3 진여의 세계에 머무는 미묘한 열 가지 설법

        수미정상회 도리천궁의 6품

          13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

          14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15 십주품(十住品)

          16 범행품(梵行品)

          17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

          18 명법품9明法品)

        선재동자의 구도여정

 

    4 굳센 서원과 실천행을 위한 열 가지 법문

        제4회 야마천궁회의 10행(十行) 설법

          19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21 십행품(十行品)

          22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10행(行)의 의미

 

    5 중생과 보리, 진리에 대한 회향의 법문

        도솔천궁의 10회향 설법

          23 승도솔천궁품(昇兜率天宮品)

          24 도솔궁중게찬품(兜率宮中偈讚品)

          25 십회향품(十廻向品)

      10회향의 의미와 구도

 

    6 10지(十地)설법

      타화자재천궁의 설법

         26 십지품(十地品)

      10현과 6상

 

    7 보광명전에서 재차 설법함

       등각 · 묘각의 법문[인행과 불과의 원만함]

          27 십정품(十定品)

          28 십통품(十通品)

          29 십인품(十忍品)

          30 불아승지품(佛阿僧祗品)

          31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

          32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

          33 불부사의법품9佛不思議法品)

          34 여래십신상해품(如來十身相海品)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

          36 보현행품(普賢行品)

          37 여래출현품9如來出現品)

      등각 · 묘각위의 선지식

      보살도의 총결

          38 「이세간품(離世間品)」

 

    8 급고독원의 설법

         39 입법계품(入法界品)

 

● 후기

 

大 - 법계는 허공처럼 넓고 끝없어 항상하고 모든 세계를 포함함.

方 - 형상은 법계와 같아 반듯하고 삿되지 않으며 평등함.

廣 - 작용은 하늘처럼 두루하여 막히거나 장애 될 것이 없음.

佛 - 심오하고 미묘한 화엄법계의 이치를 깨친 분.

華 - 수행결과[佛果]를 맺는 수행공덕[因行].

嚴 - 인행(因行) 즉 수행의 꽃으로써 불과(佛果, 부처님의 경지)를 장엄.

經 - 오묘한 뜻을 수용한 바다.

 

불신(佛身)의 무변(無邊)함은 허공과 같고

지혜의 빛, 맑은 음성도 또한 그러하도다.

부처님은 제법에 장애가 없으니

마치 달빛과 같이 모든 것을 비춘다.

 

집금강신(執金剛神) - 법과 정의를 수호하며 무너짐이 없는 응신(應身)

신중신(身衆神) - 모든 행이 원만하여 정도(正道)를 따름

족행신(足行神) - 무량한 부처님을 섬기며 이에 무량한 몸

도량신(道藏神) - 대원으로 장엄하고 널리 공양을 행함

주성신(主城神) - 심성(心城)을 잘 수호하여 국토를 엄정히 함

주지신(主地神) - 깊고 넓은 원력을 중생을 따라 성취

주산신(主山神) - 선근을 쌓아 세상에서 벗어나 수승하고 빼어남

주림신(主林神) - 지혜의 줄기와 행의 꽃을 법문을 설하여 널리 펼침

주약신(主藥神) - 중생의 근기를 알아 구제하고자 법의 약[法藥]을 사용

 

만약에 나와 부처가

평등한 상에 안주함을 보고

그가 머무르지만 머무르는 바 없이

멀리 일체의 유상을 떠나 있으며

색(色)에나 수(受)에 수(數)가 없으며

상(想) · 행(行) · 식(識)에도 또한 그러한 것을

능히 있는 그대로 아는 자라면

그는 바로 대모니(大牟尼)로다.

보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보여진 법이 또한 따로 있지 않으니

일체의 법을 이렇게 분명히 알면

그는 세간을 능히 비칠 수 있도다.

일념으로 보기를 제불(諸佛)이

세간에 출현하지만

사실은 생긴 일 없음을 알면

그 사람이야말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지리라.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또 패괴(敗壞)함도 없이

만약 이와 같은 상을 전(轉)하면

그는 곧 무상인(無上人)이로다.

하나 안에서 무량함을 깨닫고

무량한 것 안에서 하나를 깨닫노니

전전(展轉)하여 생기는 것이 실(實)이 아니기에

이를 아는 자는 두려울 바가 없느니라.

- 문수사리보살의 게송 중에서

 

고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苦)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핍박이라고 하고 변해 달라짐이라 하고 반연이라 하고 모임[聚]이라 하고 가시라 하고 뿌리를 의지함이라 하고 허망하게 속임이라 하느니라.

 

고집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의 집(集)이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속박이라 하고 망그러짐이라 하고 애착하는 뜻이라 하고 망령된 생각이라 하고 가서 들어감이라 하고 결정이라 하고 그물이라 하느니라.

 

고멸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가 멸(滅)하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다툼이 없음이라 하고 티끌을 여윔이라 하고 고요함이라 하고 모양 없음이라 하고 없어지지 않음이라 하고 제성품이 없다 하고 장애가 없다 하고 멸(滅)이라 하고 자체가 진실함이라 하고 혹은 제 성품에 머문다 하느니라.

 

고멸도성제의 설법

여러 불자들이여, 고가 멸하는 도(道)라는 성제(聖諦)를 이 사바세계에서 혹은 일승이라 하고 끝까지 분별이 없음이라 하고 평등이라 하고 짐을 벗는다고 하고 나아갈 데 없다 하고 성인의 뜻을 따름이라 하고 신선의 행이라 하고 혹은 10장(藏)이라 하느니라.

 

서원컨대 빈궁한 사람이

밤과 낮으로 남이 가진 보화를 헤아리듯이

자기는 반전도 가진 것 없이

남의 말 듣기만 하는 것이 역시 그와 같도다.

 

어느 때나 중생들을 즐겁게 하고

국토를 장엄하고 부처님 공양

바른 법 받아 갖고 지혜 닦아서

보리를 증하려고 발심했으며,

 

믿고 아는 깊은 마음 늘 청정하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오며

교법이나 스님께도 또한 그렇게

정성껏 공양하려 발심하리라.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畵師]와 같아

갖가지 5음(色, 受, 想, 行, 識)을 그리네.

일체의 세계 중

어느 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가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이 또한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가지에는 차별이 없도다.

心如工畵師 畵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 10행(行)

● 환희하는 행[歡喜行]

- 목숨과 재물과 법의 세 가지 보시로써 나와 남을 기쁘게 하는 행

●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는 행[饒益行]

- 율의의 좋은 법으로써 중생을 삼취정계로써 거두어서 균등하게 요익하게 하는 행

● 거슬러 거역함이 없는 행[無違行]

- 만물의 이치를 인정하고 따라서 어기는 바가 없는 행

● 굴복하여 물러남이 없는 행[無屈撓行]

- 도에 정진하는 데 물러섬이 없는 행

● 어리석음의 어지러움을 떠난 행[離癡亂行]

- 정혜가 바르고 밝아 미혹하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행

● 잘 나타나는 행[善現行]

- 반야가 원만하게 빛나 경계와 지혜가 매우 밝은 행

● 집착이 없는 행[無着行]

- 부드럽게 조화하여 중생세계를 건너되 마음이 집착하는 바가 없는행

● 얻기 어려운 행[難得行]

- 대원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

● 좋은 법의 행[善法行]

- 미묘한 힘으로써 법을 설해 만물의 궤범이 되는 행

● 진실의 행[眞實行]

- 진실지(眞實智)를 체달하여 일체를 진실되게 살펴보는 행

 

보살의 10무진장(十無盡藏)

신장(信藏) · 계장(戒) · 참장() · 괴장(愧) · 문장(聞) · 시장(施藏) · 혜장(慧藏) · 염장(念藏) · 지장(持藏) · 변장(辯藏)

 

● 동방의 금강당(金剛幢)보살

- 고요하면서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 항상 고요함

● 남방의 견고당(堅固幢)보살

- 능히 들어가는 일을 보이고 나아가 닦기를 권함

● 서방의 용맹당(勇猛幢)보살

- 부처님을 뵙고 ㅂ버문을 듣개 되니,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구함

● 북방의 광명당(光明幢)보살

- 교화의 작용은 넓음, 교화 작용은 깊음, 교화 작용은 깊고 넓음

● 동북방의 지당(智幢)보살

- 믿기를 권하니 그 믿음의 수승한 덕을 찬탄함

● 동남방의 보당(寶幢)보살

- 생각하기 어려우니 불가사의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함

● 서남방의 정진당(精進幢)보살

- 모든 부처님의 몸이 한결같고, 두루하며, 일체가 모두 부처님의 몸

● 서북방의 이구당(離垢幢)보살

- 여래는 세간을 청정케 하고, 여래 스스로 청정함

● 하방의 성수당(星宿幢)보살

- 여래의 덕은 두루하며, 중생들에게 응함이 자재하고 자취는 묘함

● 상방의 법당(法幢)보살

- 부처님과 법을 찬탄하여 보고 듣기를 권함

 

■ 10현문(현수 법장스님 『華嚴經深玄記,』 권1)

 

1.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10현문의 총설이라고 할 만한 부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더불어[同處同時] 구족하여 드러나는 무진연기의 총체적인 모습을 밝힌 것입니다.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한다는 것은, 법계의 사물은 시 · 공간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동시에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마치 둥근 거울에 시방의 삼라만상이 다 비추임과 같습니다.

 

2.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하나[一]와 다수[多]가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법문입니다. 존재는 서로 용납하고 섭입(攝入)하여도, 장애되지 않고 하나하나 그대로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해 본다면 한 방에 100개의 등을 켰을 경우, 그 불빛이 제각기 방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불빛 하나하나는 빛을 두루 펼치지만 서로 간에 걸림이 없습니다.

 

3.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일체의 모든 법은 원융하고 무애하고 자재합니다. 이 법문의 요체는 모든 법이 상즉(相卽)하여 자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호수에 한 물결이 없으면 한 물결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물결이 없으면 한 물결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없다는 뜻에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전체가 없으면 하나가 없다는 뜻에서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고 표현합니다.

 

4.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인다라망[帝釋網]이란 제석천에 있는 보배로 된 그물입니다. 제망의 영상이 겹겹으로 서로 들어가도 걸림이 없는 문이 되겠습니다. 날줄과 씨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그물을 만들고 작용하듯이, 이 법계라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법계의 그물은 낱낱의 그물코마다 보주를 달고 있는데, 그 보주는 다른 모든 그물코에 달려 있는 보주의 영상을 비추게 됩니다. 보배 구슬 속에 우주의 그물 전체가 비춰지니 하나의 존재에 우주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잇는 도리를 설명합니다.

 

5.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미세하게 서로 받아들여 안립(安立)하는 법문입니다. 하나는 전체를 용납하고 전체는 능히 하나를 용납하는 융통 무애함입니다. 일과 다는 현상 그대로를 깨트리지 않고 그대로 일체의 관계를 가지기에 모든 것은 하나도 개성을 파괴하는 일이 없이 안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세상용이란 결국 하나와 전체가 상즉상입함이 미세하면서도 서로 용납하여 무애하는 의미가 됩니다.

 

6.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

하나의 사물을 여러 방면으로 관찰하여 경우에 따라 한 면이 숨어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각 방면이 동시에 서로 대립하므로 각 방면이 은밀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금으로 만든 사자상을 관찰할 때, 사자를 보면 금은 숨게 된다고 할 수 있고, 금을 보면 사자가 숨게 된다 할 수 있고, 금과 사자를 동시에 보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함께 이루어져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일체의 제법 작용이 넓고 좁음에 자재하여 걸림이 없습니다. 한 사물의 역량이 일체에 두루하여 제한이 없으면 광(廣), 일체에 두루하면서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협(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보시 수행할 때, 그 수행 측면에서 다른 나머지 바라밀을 모두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 갖추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실천행과 뒤섞여 없어지거나 감쇠되는 것은 아닙니다.

 

8.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삼세를 다시 셋으로 세분하면 구세가 되는데 여기에 이를 총괄하는 일념(一念)을 더하여 십세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십세의 법은 시간적으로 비록 선후의 차별이 있지만 결국 통틀어 본다면 일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융하여 서로서로 사무치게 들어가는 법문이며 원융자재하여 상즉상입하되 각기 전후 장단의 각별한 모양을 잃지 않는[異成] 특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

차별의 현상계[事]를 의지[託]하여 법을 나타내 사람들에게 요해(了解)하는 지혜를 낸다는 뜻으로 현상계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상즉상입하는 무애자재한 연기실상의 법문은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렵지만 연기의 실상은 깊고 먼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 어디에나 연기의 실상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 법문의 요체는 결국, 오직 지혜로써 같고 다름[同別]에 자재하는 법계의 측면을 강조한 것일 수 있습니다.

 

10.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무진연기의 실상을 주반으로 나누어 보는 법문입니다. 여기서 주반이란, 연기하는 모든 존재라는 것은 결국 홀로 독립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의하는 관계 속에 짝을 지어 생성변화되며 한마디로 요약해 법계임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법을 주로 하면 다른 법이 그 짝[伴]이 되어 따르며, 또 다른 법을 주(主)로 하면 먼저 주(主)가 되었던 법은 다시 짝 중의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가 되고 짝이 됩니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 맨대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못하노니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 017 한국의 토종개

 

글 / 하지홍, 임인학●사진 / 임인학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07

 

082

빛12ㄷ 151

 

빛깔있는 책들 151

 

옛그림 / 삽살개 - 하지홍-------------------------------------------------------------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미생물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자연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 삽살개 보존회 부회장으로 삽살개에 관한 유전자, 혈통 연구와 함께 보존과 혈통고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삽살개의 모색 특징과 혈통에 관한 연구' 외 20여 편의 논문과 3권의 저서(공저)가 있다.

 

진돗개 - 임인학----------------------------------------------------------------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뒤 잡지사의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거쳐 지금은 현대정공 홍보실에서 일하고 있다. 글과 사진을 함께하는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진돗개, 삽살개 등 한국의 토종개에 대한 글쓰기와 사진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92년에 「애견기르기」(대원사 刊)의 사진을 맡아 출간한 바 있다.

 

|차례|

 

들어가는 말

옛그림으로 살펴보는 한국개

삽살개

    삽살개의 유래와 전설

    삽살개와 관련된 옛문헌과 이야기들

    천연기념물 지정 경위

    현대 생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한 삽살개 탐구

    체형, 성품 및 훈련 능력

    삽살개의 육종 방향

진돗개

    진돗개의 유래와 보호 과정

    진돗개의 표준 체형

    진돗개의 품성

    우수 진돗개 고르는 법

    진도 현지에서 개를 구입하고자 할 때

    도시에서 진돗개를 구입하고자 할 때

    주의해야 할 가짜 진돗개

    진돗개의 사육과 훈련

    진돗개의 번식과 종견 선정

    진돗개의 육종 방향

끝맺는 말

참고 문헌

 

 

▲ 진돗개와 삽살개  토종개는 그 나라 민족들에 의해 보존, 개량되어 길러 온 토착견으로서 나라마다 고유의 토종개가 있다. 우리나라의 진돗개나 삽살개도 우리의 대표적인 토종개로서 뛰어난 품성을 지니고 있다.

▲ 풍산개  맹수 사냥에 쓰일 정도로 용맹하고 날렵한 풍산개는 북한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 제주개  제주 축산개발사업소에서 보호, 사육하고 있는 제주개는 완전 멸종에서 간신히 벗어나 계통 번식을 통해 원형에 가까워지고자 노력중이다.

▲ 이암의 젖먹이는 개그림. 지본 담채, 73×4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암의 꽃과 새 그리고 강아지 그림. 지본 채색, 86×44.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경윤의 나무 아래서 뒤통수 긁는 개 그림. 견본 담채, 15.5×17.7cm, 간송미술관 소장.

▲ 어유봉의 앉은 개그림. 지본 담채, 63.5×37cm.

▲ 어유봉의 엎드린 삽살개 그림(모사도). 지본 담채, 63.5×37cm.

▲ 김두량의 뒷다리로 옆구리를 긁는 검둥개 그림. 지본 수묵, 23×26.3cm.

▲ 김홍도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 김홍도의 늙은 사자 그림. 지본 수묵.

▲ 신윤복의 앉은 개그림. 지본 수묵, 16×25.3cm, 간송미술관 소장.

▲ 장승업의 오동나무 아래서 하늘 보고 짖는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 조석진의 달밤에 웅크리고 있는 개 그림. 견본 담채, 26×14.5cm, 간송미술관 소장.

▲ 웅크린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47×63cm.

▲ 작자 미상의 맹견도. 지본 채색, 40.2×9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작자 미상의 삽살개 그림. 지본 담채, 34×2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작자 미상의 긁는 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9×51cm.(위)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6×38cm.(아래)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9×51cm.

▲ 민화 문배도. 지본 채색, 36×38cm.(동그라미 안)

▲ 삽살개 가족. 지본.

▲ 들밥. 지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홍도의 경작도.

▲ 신윤복의 교접하는 개 그림

▲ 김득신의 짚신 짜는 그림

▲ 김익주의 응수도.  200여 년 전 그림으로 우리나라 옛 그림 가운데 진돗개를 닮은 개가 그려진 그림. 지본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삽살개  삽살개는 눈이 털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어수룩해 보이는 개이지만 의리와 충직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시추

▲ 페키니즈

▲ 황삽살개

▲ 청삽살개

▲ 충직한 삽살개  멀리서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힘차게 오솔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다.

▲ 청삽살개들

▲ 악돌이  1970년대 서울에서 종견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이 개는 1972년생으로 1974년 진도견보호협회 주최 품평회에서 최우수견으로 선정되었다.

▲ 중국 차우차우견  이 개는 혀가 보라색이므로 차우차우의 피가 섞인 진돗개는 혀에 보랏빛 반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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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016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8, 석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6312

 

911.05

이241조 1

 

석필 · 테마 역사 읽기

 

당쟁의 문을 열자.

외로운 왕과 강직한 선비들이 거기 있다. 조선 역사가 속속들이 보인다.

조선의 당쟁은 일본인들이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워낙 많이 공격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나는 조선의 당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노론에게는 우리 나라 유일의 성현으로 추앙받았으나 남인들에게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풍운의 정치가 송시열의 생애가 던져준 의문이 그 출발점이었다. 거기에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느낀 미진한 감정이 더해졌다. 장장 3백여 년에 걸친 당쟁의 현상과 내막을 내 안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어찌 조선 역사를 가르치겠는가 하는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그러나 역사는 죽어버린 화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다. 과거의 경험들은 찬란하면 찬란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유익함은 과거를 정확히 인식하여, 거기에 비추어 내일을 읽어낼 줄 아는 개인이나 사회만이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이덕일

 

진지한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이야기꾼의 자질이 더해져 이 시대 대중 역사서 저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진 사학자. 그는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방안의 하나로,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 지적 흥미와 학문적 깊이, 그리고 인간 중심의 사관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역사 평설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숭실대 사학과 강사

저서로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성학십도 · 동국십팔선정」(공저)이 있다.

 

차례

 

머리말

      '송자'와 '시열이'

주요 등장 인물

시대별 정당 분포도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조선 건국에서 사림의 등장까지

      갈라진 사림, 300년 당쟁의 시작

      붕당 출현을 예언한 이준경

      계속되는 동인들의 공세

      이이의 합당 노력과 '양시론'

      이이를 탄핵하다 귀양 가는 동인들

      동인과 서인의 노선 차이

 

공존의 틀, 붕당 정치

      이이의 죽음과 서인의 실각

      정여립의 난과 동인의 실각

      세자 건저 문제와 서인의 실각

      집권 동인, 남북으로 갈라지다

      왜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나?

      정철 석방을 요구하는 민초 시위대

      임진왜란 때 정권을 잡은 북인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혁신 정치

      인륜과 권력

      잇따르는 쿠데타 -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사대주의자들이 자초한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

 

개혁과 수구의 대결

      대동법 백년 전쟁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진보주의의 승리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은 정치

      상놈들만 군역의 의무가 있는 나라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상호 공존에서 상호 배척으로

      문묘종사를 둘러싼 싸움

      이이와 성혼의 '인심 도심 논쟁'

      기나긴 문묘종사의 길

      북벌, 효종과 서인 정권의 헛된 꿈

      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 제1차 예송 논쟁

      정권을 건 복제 논쟁 - 제2차 예송 논쟁

      송시열 처벌 문제로 갈리는 남인

      정청에 울려퍼진 김대비의 곡성

      남인 정권을 무너뜨린 기름 천막 유용 사건

 

살육의 시대

      허견의 옥사

      거짓 고변의 소용돌이

      조정에 복귀한 송시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서인

      장희빈 모친 모욕 사건

      사약을 받는 송시열

      이이 · 성혼, 문묘에서 쫓겨나다

      인현왕후 민씨 폐출되다

      고변과 역고변

      장희빈의 몰락

      우리 당이 미는 왕자가 세자가 되어야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왕 경종

      한밤중에 이루어진 왕세제 책봉

      세제에게 정권을 내놓으시오

      소론, 정권을 장악하다

      당운을 건 한판 승부

 

탕평에서 세도로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

      소론 강경파와 이인좌의 난

      탕평책의 등장

      영조의 중대 선언

      '혼돈 개벽'과 영조의 한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당쟁의 희생양 사도세자

      세손의 폐위를 꿈꾸는 척신들

      정조를 암살하려는 노론 벽파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

      영남 유림들의 마지막 도전 - 영남만인소

      정조의 죽음이 부른 세도 정치

 

나가는 글

      다시 보는 조선 사대부

      조선은 과연 당쟁 때문에 망했는가?

      당쟁에서 오늘을 읽는 법

 

부록

이 책의 배경이 된 주요 정치 일지

조선 각 시대 정당과 당인들

 

주요 등장 인물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 ~ 1570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宗統).

승문원부정자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했다. 풍기군수 시절 최초로 임금(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림파가 세력을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힌 조선 유학의 최고봉의 한사람이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 ~ 1572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사림파를 옹호하여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대사헌으로 있던 명종 5년(1550)에는 대윤(大尹) 윤임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영의정 시절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옹립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총괄했다. 신진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昇) 등의 공격을 받았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란 유차를 올렸다가 율곡의 공격을 받았으나 당쟁 예언이 사실로 나타나자 율곡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이준경을 옹호하였으므로 훗날 영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그 자손 이인좌가 영남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宗主).

모두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16세 때 어머니가 죽자 3년 간 여묘살이를 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죽은 후까지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 환속한 자'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나 당쟁이 현실화하자 크게 뉘우치고 동 ·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물리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ㅖ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 ~ 1598

서인 영수.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을 돕고 평양에 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초 선조가 피난할 때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죽은 후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사후인 1602년 북인들에 의해 삭탈관작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1633년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승무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손암(巽菴) 심의겸(沈義謙)

1535 ~ 1587

서인 영수.

명종 비(妃)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외숙 이양(李樑)이 사림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키려 하자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아 그를 탄핵하여 사림을 보호하여 명성이 높았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아우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을 때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사림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옹호하는 동인으로 분당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했다가 복관되었다. 전남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32 ~ 1590

동인 영수.

김종직의 학통으로서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여 년 간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강원도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음9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 ~ 1601

서인 중진 문신.

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 권신 이양(李樑)이 아들을 천거하자 끝내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양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 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가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동암(東菴) 이발(李潑)

1544 ~ 1589

동인 강경파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어 자파 등용에 힘썼다. 정여립의 옥사에 관련되어 대사간을 사퇴, 대죄하다가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 ~ 1609

북인 대북 영수.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전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 · 이조판서를 거쳐 15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서인 영수 정철을 세자 건저 문제로 실각시킨 후 그의 처벌문제로 동인의 의견이 갈릴 때 강경론을 주창해 북인(北人)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초래했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 평해(平海)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595년 풀려나와 영돈녕부사로써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북인이 갈릴 때 정인홍과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선조 때의 문장 팔가(八家) 중의 한 명으로써 시 · 서 · 화(詩 · 書 · 畵)에 모두 능했다.

 

정여립(鄭汝立)

? ~ 1589

동인 문신 · 반란 주동자.

원래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을 탈당하고 동인에 입당하였다. 스승 이이를 비판하다 선조의 미움을 받고 사직했다. 동인의 차세대 주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각지의 인물들을 끌어들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훈련을 시켰다. 선조 20년(1587)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대동계를 계속 확대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을 받고 관군이 출동하자 진안 죽도로 도망가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대대적인 국문이 벌어지고(기축옥사) 서인 위관 정철에 대한 원한이 쌓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 ~ 1593

서인 강경파 영수.

명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司諫) · 직제학(直提學) ·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 때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가사(歌辭) 「관동별곡」을 썼다. 성혼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 있던 우의정 시절 정여립 반란 사건의 위관(委官)이 되어 동인들을 엄하게 치죄함에 따라 동인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신성군에게 뜻이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진주(晋州)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임금의 어가를 가로막은 백성들의 요구로 석방되어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후 체찰사를 지내며 전란을 지휘하고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나 또다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한 후 강화도(江華島) 송정촌(松亭村)으로 이주해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 죽었다.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저술한 조선조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서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

남인 영수.

명종 때 관직에 진출해 선조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이산해, 이발과 함께 동인을 이끌었다. 광해군 건저 문제로 서인 영수 정철이 처벌받을 때 강경론을 주장하는 이산해에 반대하여 온건파인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1년 전에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천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군사를 총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하지만 전란중에 곽재우 등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그 세가 강화된 북인에 의해 1598년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誤國小人]'이란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되었다. 1600년 복관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남인의 시조로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

대북 영수.

남명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선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쳐 영남의병장(嶺南義兵將)이 되었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주전론을 주장하여 온건파인 유성룡을 탄핵해서 실각케 했다. 이산해와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어 선조 말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小北) 유영경에 맞서 광해군을 지지해 즉위케 하였다. 소북을 정권에서 몰아낸 뒤 광해군과 함께 전후복구에 힘썼으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등의 행위로 윤리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다. 이후 대북은 서인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정계에서 사라졌다.

 

춘호(春湖) 유영경(柳永慶)

1550 ~ 1608

소북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사간(司諫)으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병사를 모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가족을 먼저 피난시켜 처벌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에 재수되어 북인에 가담했다. 이후 북인이 분열될 때 소북의 영수가 되었다가 같은 파의 남이공(南以恭)과 불화하여 탁소북(濁小北)을 이끌었다. 선조 말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맞서 영창대군을 지지해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선조의 선위교서를 감추었다가 발각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정랑. 좌승지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햇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 직제학(直提學) ·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겸직하는 등 임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를 겸직하는 등 병무에 밝았다. 영의정 때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평생 당적이 없이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애썼으나 세자 건저 문제 때 서인 정철을 관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는 성혼을 구하려다 정철의 일당이란 탄핵을 받고 사직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관한 논의가 일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죽었다. 죽은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묵재(默齋) 이귀(李貴)

1557 ~ 1633

서인 · 반정 공신.

이이 · 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 선유관(宣諭官)을 역임하여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다 함흥판관 때 무고로 수감된 해주목사 최기(崔沂)를 만난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 김류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 때 임진강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가 정묘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론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죽었다.

 

이괄(李适)

1587 ~ 1624

서인 · 반란 주동자.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압록강변의 국경 수비를 위하여 출진하였다. 서인인 문회 · 허통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조정에서 그의 아들 전을 체포하려 하자 선조의 제10자 흥안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관군에 밀리자 부하의 손에 살해당했다.

 

기자헌(奇自獻)

1562 ~ 1624

대북 온건파 문신.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때 집권 대북(大北)에 속해 있었으나 인목대비의 폐위 논의 때 당론과 달리 적극 반대한 죄로 함북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대북이면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인조가 구신(舊臣)을 부를 때 응하지 않은 혐의로 옥에 갇혀 있던 중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48명의 정치범과 함께 전격 처형되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 1658

서인 · 한당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관찰사 · 부제학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귀국 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 대사헌이 된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민생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둔 개혁 정치가로서 공납폐(貢納弊) 해소책인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줄곧 주장하여 대동법을 반대하는 김집 · 송시열 등의 산당(山黨)에 대항하여 한당(漢黨)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제작하고 관개(灌漑)에 수차를 사용하고 상평통보 주조를 건의해 유통시키는 등 뛰어난 경제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제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적 업적이 되었다. 가평의 잠곡서원(潛谷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서인 · 노론 영수.

인조 11년(1633)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으나, 높은 학식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 : 뒷날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다. 그가 쓴 「장릉비문(長陵碑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친청파 김자점이 청에 밀고해 사직하였다가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효종 사망으로 야기된 1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여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 맞서 승리하였다. 효종비의 사망이 계기가 된 2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에 맞서 9개월복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하여 실각했다. 그해 현종이 사망하자 송시열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다시 9개월로 바꾸어야한다고 재론했다가 1년설을 지지하는 숙종에 의해 유배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척신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을 무고해 살육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진사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익훈을 옹호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숙종 15년(1689)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후 남인들의 공세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던 도중 만 82세의 노구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신원되었으며 이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大老社), 충북의 화양서원(華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

서인 · 노론 영수.

효종 때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후 승지가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같은 당인 송시열을 지지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유배시켰다.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이 패배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남인 윤휴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이끌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하는데 반발한 송시열의 상소로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 남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묵재(默齋) 허적(許積)

1610 ~ 1680

남인 · 탁남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 영수로써 3년설을 주장하며 서인들에 맞섰으나 패배하였다. 현종 5년(1664)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비판을 받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2차 예송논쟁 때 서인의 9개월설에 맞서 1년설을 주장, 승리하여 영의정에 복직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후 송시열에 대한 처벌의 강도를 놓고 남인들의 의견이 갈릴 때 온건파인 탁남(濁南)을 이끌어 강경파인 청남(淸南)에 맞섰다. 그 후 청남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연시연(延諡宴) 때 궁중의 기름 천막을 유용한 사건으로 몰락했다. 이후 서자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가 남인들이 재집권한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신원되었다.

 

백호(白湖) 윤휴(尹)

1617 ~ 1680

남인 · 청남 영수.

학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중용장구보록(中庸章句補錄)」「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이 뛰어났다.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어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복설에 반대하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한 후 제2차 예송논쟁 때는 1년복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관직에 나가 같은 해 대사헌이 되어 청나라를 정벌할 것과 송시열을 이배(移配)하고 서인 중진 민유중(閔維重)과 이단하(李端夏)를 삭탈관작하자고 주장했다. 숙종 6년(1680)의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허견의 옥사가 발생하자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사사(賜死)된 것은 숙종과 서인들의 미움 때문이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신원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

남인 · 청남 영수.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다가 만 52세 때인 효종 8년(1657)에 사헌부지평에 초임되어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의 1년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패배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 때 승리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헌에 특채되었다가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장기에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가 발생하자 온건파인 허적의 탁남에 맞서 강경파인 청남을 이끌었다. 숙종 5년(1679) 탁남의 영수인 영상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직되자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나주의 미산서원(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남인 문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輔導)했다.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은거했다. 효종 때 왕명으로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들의 공격으로 사직하고 다시 은거하였다. 효종이 죽자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장지(葬地)를 수원으로 정했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오히려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숙종 때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많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詩歌)를 지었다. 정철이 가사(歌辭)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서인 정치가라면 그는 시가(詩歌)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남인 정치가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 ~ 1714

서인 · 소론 영수.

유계 · 권시의 문인으로 후에 송시열에게도 사사했으나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와 정견의 차이로 절교했다.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주자서를 강학하는 등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현종 5년(1664)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익찬(翊贊), 집의(執義) 등을 제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다. 숙종 9년(1683)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나 대광보국승록대부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다. 그의 사후 소론이 실각하면서 관작을 추탈당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자 복관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

서인 · 소론 영수

효종 10년(1659) 학행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자 「복제사의(服制私議)」를 지어 남인의 3년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1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의 이론가로 또올랐다. 또한 제2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과 함께 9개월설을 주장하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복직되어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남인들에 대한 치죄 문제로 서인이 분열될 때 분당을 막고 두 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했으나 조정에 실패하자 소론 윤증을 지지하여 소론이 되었고 대동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다. 기사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학문에 정진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조 40년(1764)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황해도 장연의 봉양서원(鳳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장희빈(張禧嬪)

? ~ 1701

남인계 역관 장형(張炯)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나인(內人)으로 궁중에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된 후 왕자 균(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이로 인해 숙종 15년(1689)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으나, 5년 후인 숙종 20년(1694) 남인이 몰락한 후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장희재(張希載)

? ~ 1701

장희빈의 오빠로서 동생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되고 숙종 18년(1692)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남인 정권에 일조하다가 장희빈이 쫓겨난 후 유배되었다. 부친 장형의 묘에 흉물을 묻은 사건을 일으켜 장희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0년(1684) 공조좌랑(工曹佐郞)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서인 영수 수항(壽恒)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산(永平山)에 들어갔다가 숙종 20년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나와 사례한 후 부친의 묘소가 있는 양주(陽州)로 돌아갔다. 이후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출사해 호조 · 형조판서를 지낸 후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사망한 후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담당하였고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옹립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후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 경종 2년(1722)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의 손자 김성행이 관련되어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 16년(1740)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조선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金祖淳)은 그의 4대손(孫)이다. 사사된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재(疏齋) 이이명(李命)

165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호조참의에 제수된 후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임종하기 직전 독대(정유독대, 1717)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 경종)에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했다 하여 소론의 불만을 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숙종의 죽음을 고하기 위한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서양 신부들을 사귀고 돌아올 때 천주교와 서양 서적을 들여오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후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했다가 소론의 반발로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남해로 유배갔다. 그의 아들 이기지가 관련된 목호룡의 고변 때 임금으로 추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어 한강진(漢江津)에서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 복관되었다. 과천의 사충선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다녀온 후 대사간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좌의정을 역임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성사된 후 영의정 김창집을 대신하여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의 관료들이 경종의 병에 대해서 묻자 '발기불능'이라고 말했다. 귀국 후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 8월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 시신을 덕산(德山)에 묻고 자결했다. 영조 즉위년에 신원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1660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承文院)과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조정랑 ·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후 숙종 29년(1703) 호조판서가 되었다. 공조 · 이조판서를 거쳐 숙종 43년(1717) 우의정이 되었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을 세제로 책종하고 이어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관철시켰으나 소론의 반격을 받아 무산되자 사직하였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가 발생해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아계(丫溪)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소론 강경파 영수.

숙종 28년(170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이 연잉군을 밀어 왕세제로 책봉한 후 세제 대리청정을 관철시키자 자신을 소두(疏頭)로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규탄하는 연명 상소를 올려 일약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 후 목호룡을 배후에서 움직여 목호룡의 고변 사건(임인옥사)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인사를 대거 살육해 영조와 노론의 원수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국문 받을 때 "경종의 곁에 죽기를 원한다."며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고 사형당했다.

 

목호룡(睦虎龍)

1684 ~ 1724

남인가의 천얼(賤孼)로 종친 청룡군의 가노(家奴)였으나 풍수를 익혀 사대부들과 교류했다. 왕세제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葬地)를 정해준 공으로 속신(贖身 : 천민에서 풀려남)되었다. 이후 왕실 소유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가 되어 축재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 사주를 받아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3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해 노론 4대신 등이 사사되는 임인옥사를 불러왔다. 이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국문을 받았으나 김일경과 함께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다 사형당하였다.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 ~ 1724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된 후 경상도관찰사 · 개성유수 등을 거쳐 형조 · 이조 · 병조판서를 역임한 소론 4대신의 한 명이다. 경종 1년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관철시키자 이광좌 · 조태억 등과 함께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소론 정권이 수립되자 우의정에 올랐고 경종 4년(172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좌의정에 올랐다가 같은 해 사망했다. 영조 1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이인좌(李麟佐)

? ~ 1728

소론 강경파 · 반란 주동자.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집권하자 소론 강경파인 준소(峻少)와 남인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하였다.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후에도 반란을 꿈꾸다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반란을 고변하자 밀풍군(密風君) 탄(坦)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는 등 초기에는 기세를 올렸으나 진압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참형당했다. 이인좌는 영남 유림들이 존경하는 선조 때의 명신 이준경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영남 유림들이 난에 가담하였는데, 이 때문에 난이 진압된 후 대구부 남문 밖에 '영남반란평정기념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 찍고 영남인들의 출사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만암(晩庵) 유봉휘(柳鳳輝)

1659 ~ 1727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5년(1699) 41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1년 노론이 왕세제 책봉에 이어 세제 대리청정을 강행하여 성사시키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다. 경종 3년(1723) 이조판서에 올랐고 영조가 즉위한 후 탕평책에 의해 노 · 소론 연립 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 · 좌의정에 제수되는 등 소론 4대신의 한 명이었으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을 공격한 주동자라는 이유로 면직되어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영조 31년(1755)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다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소헌(素軒) 조태구(趙泰耉)

1660 ~ 1723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를 거쳐 대사성과 호조판서를 역임히였다. 숙종 46년 우의정에 올라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때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대리청정 요구를 저지시킨 후 집권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사주한 목호룡의 고변을 이용해 노론 4대신을 역률로 몰아 사사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경종 3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으나 영조의 즉위로 노론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

1674 ~ 1740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0년(1694) 문과에 장원하여 부수찬과 이조참의를 지냇다. 숙종 42년 숙종이 노론의 편을 들어 윤선거의 문집을 훼손하자 이에 항의하여 파직되었다가 2년 후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왕세제 대리청정 문제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신임옥사로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경종 4년(1722)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노론 왕 영조 밑에서 노론과 공존을 도모하는 온건한 탕평책을 추진했으나 끝내 화해하지는 못했다. 영조 9년 봉조하가 되었고 12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가 영조 16년(1740) 박동준(朴東俊)의 모함을 받아 울분 끝에 사망했다.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 ~ 1736

노론 영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해 관직에 오른 후 경종 때 세제 대리청정 문제로 소론에 의해 치죄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우의정으로 복귀한 후 소론을 공격하다가 정삼석(鄭三錫)의 탄핵을 받고 원주로 재차 귀양갔다가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방면되었다. 노론의 영수로써 소론을 먼저 처벌한 후 소론계 일부 인물을 등용하자는 조건부 탕평을 주장했다.

 

나경언(羅景彦)

? ~ 1762

노론인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로 있던 중 노론 벽파의 김한구 · 홍계희 · 김상로 · 윤급 등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하게 고변하여 뒤주 사건을 유발시킨 인물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먼저 사형시킨 후 사도세자를 죽였다.

 

익익재(翼翼齋) 홍봉한(洪鳳漢)

1713 ~ 1778

노론 시파.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영조 19년(1743)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영조 37년(1761)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이천보 · 민백상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후 영의정이 되었다.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에 의해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사이가 악화되자 영조 편에 붙어 사도세자를 돕지 않았다. 영조가 뒤늦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자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김귀주(金龜柱) 일당에게 돌려 실각시킨 후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했으나,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사사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부교리 이노술(李魯述)의 탄핵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홍인한(洪麟漢)

1722 ~ 1776

노론 벽파 영수.

영조 29년(175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 전라도관찰사 · 대사헌 등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면서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사도세자 사후 보복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세손(훗날의 정조)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여산(礪山)에 유배된 후 사사당했다.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35 ~ 1815

노론의 영수 홍봉한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 사도세자와 국혼9國婚)을 맺었다. 그녀의 나이 28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목도했다. 그녀의 나이 42세 때 아들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어 폐가(廢家)되었다. 정조는 그녀가 칠순이 되는 1804년(갑자년)에 홍씨 일문의 죄를 신원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무산이 되었다. 그녀는 집안을 신원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61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한중록」을 서술하였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일관되게 친정을 옹호하고 사도세자가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고 기술하여 사도세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이는 정말 군자다. 이이만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당이 없는 것이 걱정이겠다. 나도 주희의 말처럼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

- 선조의 말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 났다니.

- 성삼문(백이숙제를 비판하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이미 정적이었다. 부왕의 냉대에 상심한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었다가 창경궁에서 급서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는 무수한 소문을 낳았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인이 울어예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해 흰달 가는비 굵은 눈 쓸쓸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디 간고?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여쁜 그림자 날 좇을 뿐이로다.

- 정철 「속미인곡」중에서

 

관산에 뜬 달 바라보니 통곡이요

압록강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 쓰리도다.

조정의 신하들은 금일 이후에도

서인이요, 동인이요 나뉘어 싸울 것인가?

(痛哭關山月 像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各西東)

- 선조

 

철령 높은 봉에 쉬어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준들 어떠리

- 이항복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이를 부른 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참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의 상소문에서

 

몸을 닦고 글을 읽는 것이 너희들의 일이다. 잘 모르는 일을 억지로 논하다가 남들의 비웃음과 모욕을 사지 말라.

- 서인의 상소를 받은 인조의 비답에서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을랑 장만마라.

닫 들어라 닫 들어라.

청약립(靑篛笠 : 대나무 삿갓)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衣 : 비옷) 가져오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 윤선도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중에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청남의 영수 윤휴가 숙종의 사약을 받으며 남긴 말

 

전하께서 당을 없앤다고 하시더니 이제 도리어 두 당 외에 또 한 당을 보태서 음과 양 외에 따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 하나 나와 모두 셋이 되어 군자도 되지 못하고 소인도 되지 못합니다.

-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노론 대사헌 조관빈의 상소문에서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는 세 줄기 다섯 가지에 천 가지 만 가지 잎사귀를 털끝까지 분간하고 실같이 쪼개서, 서로 성내고 서로 떠든다. 문마다 기 하나씩을 세우고 집마다 진 하나씩을 쌓아서, 세상이 다하도록 그 송사를 능히 결단하지 못하고, 대를 전해가며 그 원망을 능히 풀지 못한다.

- 다산 정약용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 송순(宋純)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청상(萬古靑常)하리라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듣기 좋아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해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중에서

 

고산 구곡담(九谷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 : 풀베고 집을 지음)하니 벗님네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 율곡 이이 「고산구곡가」중에서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

- 남명 조식

 

병든 마음 둘 곳 생각다가

지팡이 짚고 삼계당 찾았노라.

벽에는 서책 가득하고

처마 앞에 활터를 두었다오.

새 서리에 천기(天氣) 엄숙하고

어젯밤 비에 시냇물 소리 들리누나.

이제야 진기(眞氣) 기를 곳 얻었으니

묵은 병을 아주 잊어버리겠네.

病懷然着處 扶杖出溪堂

辟上藏書籍 檐前眞謝場

新霜天氣肅 昨雨潤聲長

始得養眞地 昔疴渾却忘

- 항은(巷隱) 최태완(崔泰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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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