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6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8, 석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6312
911.05
이241조 1
석필 · 테마 역사 읽기 ①
당쟁의 문을 열자.
외로운 왕과 강직한 선비들이 거기 있다. 조선 역사가 속속들이 보인다.
조선의 당쟁은 일본인들이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워낙 많이 공격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나는 조선의 당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노론에게는 우리 나라 유일의 성현으로 추앙받았으나 남인들에게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풍운의 정치가 송시열의 생애가 던져준 의문이 그 출발점이었다. 거기에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느낀 미진한 감정이 더해졌다. 장장 3백여 년에 걸친 당쟁의 현상과 내막을 내 안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어찌 조선 역사를 가르치겠는가 하는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그러나 역사는 죽어버린 화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다. 과거의 경험들은 찬란하면 찬란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유익함은 과거를 정확히 인식하여, 거기에 비추어 내일을 읽어낼 줄 아는 개인이나 사회만이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이덕일
진지한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이야기꾼의 자질이 더해져 이 시대 대중 역사서 저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진 사학자. 그는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방안의 하나로,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 지적 흥미와 학문적 깊이, 그리고 인간 중심의 사관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역사 평설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숭실대 사학과 강사
저서로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성학십도 · 동국십팔선정」(공저)이 있다.
차례
머리말
'송자'와 '시열이'
주요 등장 인물
시대별 정당 분포도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조선 건국에서 사림의 등장까지
갈라진 사림, 300년 당쟁의 시작
붕당 출현을 예언한 이준경
계속되는 동인들의 공세
이이의 합당 노력과 '양시론'
이이를 탄핵하다 귀양 가는 동인들
동인과 서인의 노선 차이
공존의 틀, 붕당 정치
이이의 죽음과 서인의 실각
정여립의 난과 동인의 실각
세자 건저 문제와 서인의 실각
집권 동인, 남북으로 갈라지다
왜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나?
정철 석방을 요구하는 민초 시위대
임진왜란 때 정권을 잡은 북인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혁신 정치
인륜과 권력
잇따르는 쿠데타 -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사대주의자들이 자초한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
개혁과 수구의 대결
대동법 백년 전쟁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진보주의의 승리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은 정치
상놈들만 군역의 의무가 있는 나라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상호 공존에서 상호 배척으로
문묘종사를 둘러싼 싸움
이이와 성혼의 '인심 도심 논쟁'
기나긴 문묘종사의 길
북벌, 효종과 서인 정권의 헛된 꿈
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 제1차 예송 논쟁
정권을 건 복제 논쟁 - 제2차 예송 논쟁
송시열 처벌 문제로 갈리는 남인
정청에 울려퍼진 김대비의 곡성
남인 정권을 무너뜨린 기름 천막 유용 사건
살육의 시대
허견의 옥사
거짓 고변의 소용돌이
조정에 복귀한 송시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서인
장희빈 모친 모욕 사건
사약을 받는 송시열
이이 · 성혼, 문묘에서 쫓겨나다
인현왕후 민씨 폐출되다
고변과 역고변
장희빈의 몰락
우리 당이 미는 왕자가 세자가 되어야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왕 경종
한밤중에 이루어진 왕세제 책봉
세제에게 정권을 내놓으시오
소론, 정권을 장악하다
당운을 건 한판 승부
탕평에서 세도로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
소론 강경파와 이인좌의 난
탕평책의 등장
영조의 중대 선언
'혼돈 개벽'과 영조의 한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당쟁의 희생양 사도세자
세손의 폐위를 꿈꾸는 척신들
정조를 암살하려는 노론 벽파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
영남 유림들의 마지막 도전 - 영남만인소
정조의 죽음이 부른 세도 정치
나가는 글
다시 보는 조선 사대부
조선은 과연 당쟁 때문에 망했는가?
당쟁에서 오늘을 읽는 법
부록
이 책의 배경이 된 주요 정치 일지
조선 각 시대 정당과 당인들
주요 등장 인물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 ~ 1570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宗統).
승문원부정자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했다. 풍기군수 시절 최초로 임금(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림파가 세력을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힌 조선 유학의 최고봉의 한사람이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 ~ 1572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사림파를 옹호하여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대사헌으로 있던 명종 5년(1550)에는 대윤(大尹) 윤임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영의정 시절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옹립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총괄했다. 신진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昇) 등의 공격을 받았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란 유차를 올렸다가 율곡의 공격을 받았으나 당쟁 예언이 사실로 나타나자 율곡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이준경을 옹호하였으므로 훗날 영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그 자손 이인좌가 영남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宗主).
모두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16세 때 어머니가 죽자 3년 간 여묘살이를 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죽은 후까지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 환속한 자'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나 당쟁이 현실화하자 크게 뉘우치고 동 ·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물리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ㅖ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 ~ 1598
서인 영수.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을 돕고 평양에 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초 선조가 피난할 때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죽은 후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사후인 1602년 북인들에 의해 삭탈관작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1633년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승무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손암(巽菴) 심의겸(沈義謙)
1535 ~ 1587
서인 영수.
명종 비(妃)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외숙 이양(李樑)이 사림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키려 하자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아 그를 탄핵하여 사림을 보호하여 명성이 높았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아우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을 때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사림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옹호하는 동인으로 분당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했다가 복관되었다. 전남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32 ~ 1590
동인 영수.
김종직의 학통으로서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여 년 간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강원도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음9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 ~ 1601
서인 중진 문신.
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 권신 이양(李樑)이 아들을 천거하자 끝내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양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 선조 때 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가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동암(東菴) 이발(李潑)
1544 ~ 1589
동인 강경파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어 자파 등용에 힘썼다. 정여립의 옥사에 관련되어 대사간을 사퇴, 대죄하다가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 ~ 1609
북인 대북 영수.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전랑에 오른 후 부제학 · 대사간 · 이조판서를 거쳐 15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서인 영수 정철을 세자 건저 문제로 실각시킨 후 그의 처벌문제로 동인의 의견이 갈릴 때 강경론을 주창해 북인(北人)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초래했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 평해(平海)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595년 풀려나와 영돈녕부사로써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북인이 갈릴 때 정인홍과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선조 때의 문장 팔가(八家) 중의 한 명으로써 시 · 서 · 화(詩 · 書 · 畵)에 모두 능했다.
정여립(鄭汝立)
? ~ 1589
동인 문신 · 반란 주동자.
원래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을 탈당하고 동인에 입당하였다. 스승 이이를 비판하다 선조의 미움을 받고 사직했다. 동인의 차세대 주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각지의 인물들을 끌어들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훈련을 시켰다. 선조 20년(1587)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대동계를 계속 확대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을 받고 관군이 출동하자 진안 죽도로 도망가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대대적인 국문이 벌어지고(기축옥사) 서인 위관 정철에 대한 원한이 쌓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 ~ 1593
서인 강경파 영수.
명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司諫) · 직제학(直提學) ·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 때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가사(歌辭) 「관동별곡」을 썼다. 성혼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 있던 우의정 시절 정여립 반란 사건의 위관(委官)이 되어 동인들을 엄하게 치죄함에 따라 동인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신성군에게 뜻이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진주(晋州)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임금의 어가를 가로막은 백성들의 요구로 석방되어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후 체찰사를 지내며 전란을 지휘하고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나 또다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한 후 강화도(江華島) 송정촌(松亭村)으로 이주해 쓸쓸한 만년을 보내다 죽었다.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저술한 조선조 가사 문학의 일인자로서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
남인 영수.
명종 때 관직에 진출해 선조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이산해, 이발과 함께 동인을 이끌었다. 광해군 건저 문제로 서인 영수 정철이 처벌받을 때 강경론을 주장하는 이산해에 반대하여 온건파인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1년 전에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천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군사를 총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하지만 전란중에 곽재우 등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그 세가 강화된 북인에 의해 1598년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誤國小人]'이란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되었다. 1600년 복관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남인의 시조로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
대북 영수.
남명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선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쳐 영남의병장(嶺南義兵將)이 되었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주전론을 주장하여 온건파인 유성룡을 탄핵해서 실각케 했다. 이산해와 함께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어 선조 말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小北) 유영경에 맞서 광해군을 지지해 즉위케 하였다. 소북을 정권에서 몰아낸 뒤 광해군과 함께 전후복구에 힘썼으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등의 행위로 윤리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다. 이후 대북은 서인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정계에서 사라졌다.
춘호(春湖) 유영경(柳永慶)
1550 ~ 1608
소북 영수.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사간(司諫)으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병사를 모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가족을 먼저 피난시켜 처벌되었다가 다음해 병조참판에 재수되어 북인에 가담했다. 이후 북인이 분열될 때 소북의 영수가 되었다가 같은 파의 남이공(南以恭)과 불화하여 탁소북(濁小北)을 이끌었다. 선조 말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맞서 영창대군을 지지해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선조의 선위교서를 감추었다가 발각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정랑. 좌승지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햇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 직제학(直提學) ·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겸직하는 등 임란 이래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를 겸직하는 등 병무에 밝았다. 영의정 때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평생 당적이 없이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애썼으나 세자 건저 문제 때 서인 정철을 관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는 성혼을 구하려다 정철의 일당이란 탄핵을 받고 사직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에 관한 논의가 일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죽었다. 죽은 해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묵재(默齋) 이귀(李貴)
1557 ~ 1633
서인 · 반정 공신.
이이 · 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 선유관(宣諭官)을 역임하여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다 함흥판관 때 무고로 수감된 해주목사 최기(崔沂)를 만난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되었다. 김류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 때 임진강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가 정묘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론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죽었다.
이괄(李适)
1587 ~ 1624
서인 · 반란 주동자.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압록강변의 국경 수비를 위하여 출진하였다. 서인인 문회 · 허통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조정에서 그의 아들 전을 체포하려 하자 선조의 제10자 흥안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관군에 밀리자 부하의 손에 살해당했다.
기자헌(奇自獻)
1562 ~ 1624
대북 온건파 문신.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때 집권 대북(大北)에 속해 있었으나 인목대비의 폐위 논의 때 당론과 달리 적극 반대한 죄로 함북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대북이면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인조가 구신(舊臣)을 부를 때 응하지 않은 혐의로 옥에 갇혀 있던 중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48명의 정치범과 함께 전격 처형되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 1658
서인 · 한당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관찰사 · 부제학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귀국 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 대사헌이 된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 민생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둔 개혁 정치가로서 공납폐(貢納弊) 해소책인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줄곧 주장하여 대동법을 반대하는 김집 · 송시열 등의 산당(山黨)에 대항하여 한당(漢黨)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제작하고 관개(灌漑)에 수차를 사용하고 상평통보 주조를 건의해 유통시키는 등 뛰어난 경제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제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적 업적이 되었다. 가평의 잠곡서원(潛谷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서인 · 노론 영수.
인조 11년(1633)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으나, 높은 학식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 : 뒷날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다. 그가 쓴 「장릉비문(長陵碑文)」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친청파 김자점이 청에 밀고해 사직하였다가 김자점이 거세된 이후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효종 사망으로 야기된 1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여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 맞서 승리하였다. 효종비의 사망이 계기가 된 2차 예송 때 1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에 맞서 9개월복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하여 실각했다. 그해 현종이 사망하자 송시열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다시 9개월로 바꾸어야한다고 재론했다가 1년설을 지지하는 숙종에 의해 유배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척신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을 무고해 살육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진사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익훈을 옹호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숙종 15년(1689)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후 남인들의 공세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던 도중 만 82세의 노구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신원되었으며 이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大老社), 충북의 화양서원(華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
서인 · 노론 영수.
효종 때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후 승지가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같은 당인 송시열을 지지하여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유배시켰다.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이 패배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남인 윤휴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이끌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하는데 반발한 송시열의 상소로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 남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묵재(默齋) 허적(許積)
1610 ~ 1680
남인 · 탁남 영수.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 영수로써 3년설을 주장하며 서인들에 맞섰으나 패배하였다. 현종 5년(1664)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비판을 받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2차 예송논쟁 때 서인의 9개월설에 맞서 1년설을 주장, 승리하여 영의정에 복직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후 송시열에 대한 처벌의 강도를 놓고 남인들의 의견이 갈릴 때 온건파인 탁남(濁南)을 이끌어 강경파인 청남(淸南)에 맞섰다. 그 후 청남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연시연(延諡宴) 때 궁중의 기름 천막을 유용한 사건으로 몰락했다. 이후 서자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가 남인들이 재집권한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신원되었다.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 ~ 1680
남인 · 청남 영수.
학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중용장구보록(中庸章句補錄)」「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이 뛰어났다.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어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복설에 반대하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한 후 제2차 예송논쟁 때는 1년복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관직에 나가 같은 해 대사헌이 되어 청나라를 정벌할 것과 송시열을 이배(移配)하고 서인 중진 민유중(閔維重)과 이단하(李端夏)를 삭탈관작하자고 주장했다. 숙종 6년(1680)의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허견의 옥사가 발생하자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사사(賜死)된 것은 숙종과 서인들의 미움 때문이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신원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
남인 · 청남 영수.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다가 만 52세 때인 효종 8년(1657)에 사헌부지평에 초임되어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의 1년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했으나 패배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 때 승리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헌에 특채되었다가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장기에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가 발생하자 온건파인 허적의 탁남에 맞서 강경파인 청남을 이끌었다. 숙종 5년(1679) 탁남의 영수인 영상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직되자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나주의 미산서원(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남인 문신.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輔導)했다.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은거했다. 효종 때 왕명으로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들의 공격으로 사직하고 다시 은거하였다. 효종이 죽자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장지(葬地)를 수원으로 정했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오히려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숙종 때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많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詩歌)를 지었다. 정철이 가사(歌辭)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서인 정치가라면 그는 시가(詩歌) 문학의 대가이자 불운한 남인 정치가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 ~ 1714
서인 · 소론 영수.
유계 · 권시의 문인으로 후에 송시열에게도 사사했으나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와 정견의 차이로 절교했다.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주자서를 강학하는 등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현종 5년(1664)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익찬(翊贊), 집의(執義) 등을 제장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송시열의 노론과 싸웠다. 숙종 9년(1683) 임금의 부름으로 과천까지 왔으나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제시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나 대광보국승록대부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다. 그의 사후 소론이 실각하면서 관작을 추탈당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자 복관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
서인 · 소론 영수
효종 10년(1659) 학행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있을 때 제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자 「복제사의(服制私議)」를 지어 남인의 3년설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1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의 이론가로 또올랐다. 또한 제2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과 함께 9개월설을 주장하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복직되어 대사헌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남인들에 대한 치죄 문제로 서인이 분열될 때 분당을 막고 두 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했으나 조정에 실패하자 소론 윤증을 지지하여 소론이 되었고 대동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다. 기사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학문에 정진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조 40년(1764)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황해도 장연의 봉양서원(鳳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장희빈(張禧嬪)
? ~ 1701
남인계 역관 장형(張炯)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나인(內人)으로 궁중에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된 후 왕자 균(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이로 인해 숙종 15년(1689)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물리치고 왕비가 되었으나, 5년 후인 숙종 20년(1694) 남인이 몰락한 후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장희재(張希載)
? ~ 1701
장희빈의 오빠로서 동생이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되고 숙종 18년(1692)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남인 정권에 일조하다가 장희빈이 쫓겨난 후 유배되었다. 부친 장형의 묘에 흉물을 묻은 사건을 일으켜 장희빈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0년(1684) 공조좌랑(工曹佐郞)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서인 영수 수항(壽恒)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산(永平山)에 들어갔다가 숙종 20년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나와 사례한 후 부친의 묘소가 있는 양주(陽州)로 돌아갔다. 이후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출사해 호조 · 형조판서를 지낸 후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사망한 후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담당하였고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옹립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후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의 공격을 받아 사직했다. 경종 2년(1722)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 때 그의 손자 김성행이 관련되어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 16년(1740)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조선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金祖淳)은 그의 4대손(孫)이다. 사사된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
1658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호조참의에 제수된 후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이 임종하기 직전 독대(정유독대, 1717)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 경종)에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했다 하여 소론의 불만을 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숙종의 죽음을 고하기 위한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서양 신부들을 사귀고 돌아올 때 천주교와 서양 서적을 들여오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후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했다가 소론의 반발로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남해로 유배갔다. 그의 아들 이기지가 관련된 목호룡의 고변 때 임금으로 추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어 한강진(漢江津)에서 사사(賜死)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 복관되었다. 과천의 사충선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다녀온 후 대사간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좌의정을 역임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성사된 후 영의정 김창집을 대신하여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의 관료들이 경종의 병에 대해서 묻자 '발기불능'이라고 말했다. 귀국 후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 8월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두 아들도 아버지 시신을 덕산(德山)에 묻고 자결했다. 영조 즉위년에 신원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1660 ~ 1722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承文院)과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조정랑 ·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후 숙종 29년(1703) 호조판서가 되었다. 공조 · 이조판서를 거쳐 숙종 43년(1717) 우의정이 되었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써 연잉군을 세제로 책종하고 이어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관철시켰으나 소론의 반격을 받아 무산되자 사직하였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가 발생해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아계(丫溪)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소론 강경파 영수.
숙종 28년(170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이 연잉군을 밀어 왕세제로 책봉한 후 세제 대리청정을 관철시키자 자신을 소두(疏頭)로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규탄하는 연명 상소를 올려 일약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 후 목호룡을 배후에서 움직여 목호룡의 고변 사건(임인옥사)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인사를 대거 살육해 영조와 노론의 원수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국문 받을 때 "경종의 곁에 죽기를 원한다."며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고 사형당했다.
목호룡(睦虎龍)
1684 ~ 1724
남인가의 천얼(賤孼)로 종친 청룡군의 가노(家奴)였으나 풍수를 익혀 사대부들과 교류했다. 왕세제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葬地)를 정해준 공으로 속신(贖身 : 천민에서 풀려남)되었다. 이후 왕실 소유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가 되어 축재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 사주를 받아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3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해 노론 4대신 등이 사사되는 임인옥사를 불러왔다. 이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국문을 받았으나 김일경과 함께 끝내 정당함을 주장하다 사형당하였다.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 ~ 1724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6년(1680)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된 후 경상도관찰사 · 개성유수 등을 거쳐 형조 · 이조 · 병조판서를 역임한 소론 4대신의 한 명이다. 경종 1년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관철시키자 이광좌 · 조태억 등과 함께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소론 정권이 수립되자 우의정에 올랐고 경종 4년(172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좌의정에 올랐다가 같은 해 사망했다. 영조 1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이인좌(李麟佐)
? ~ 1728
소론 강경파 · 반란 주동자.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집권하자 소론 강경파인 준소(峻少)와 남인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하였다.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후에도 반란을 꿈꾸다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반란을 고변하자 밀풍군(密風君) 탄(坦)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는 등 초기에는 기세를 올렸으나 진압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참형당했다. 이인좌는 영남 유림들이 존경하는 선조 때의 명신 이준경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영남 유림들이 난에 가담하였는데, 이 때문에 난이 진압된 후 대구부 남문 밖에 '영남반란평정기념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낙인 찍고 영남인들의 출사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만암(晩庵) 유봉휘(柳鳳輝)
1659 ~ 1727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5년(1699) 41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1년 노론이 왕세제 책봉에 이어 세제 대리청정을 강행하여 성사시키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다. 경종 3년(1723) 이조판서에 올랐고 영조가 즉위한 후 탕평책에 의해 노 · 소론 연립 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 · 좌의정에 제수되는 등 소론 4대신의 한 명이었으나,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을 공격한 주동자라는 이유로 면직되어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영조 31년(1755)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다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소헌(素軒) 조태구(趙泰耉)
1660 ~ 1723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12년(1686)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를 거쳐 대사성과 호조판서를 역임히였다. 숙종 46년 우의정에 올라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경종 때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세제 대리청정 요구를 저지시킨 후 집권하였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사주한 목호룡의 고변을 이용해 노론 4대신을 역률로 몰아 사사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경종 3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으나 영조의 즉위로 노론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
1674 ~ 1740
소론 4대신의 한 사람.
숙종 20년(1694) 문과에 장원하여 부수찬과 이조참의를 지냇다. 숙종 42년 숙종이 노론의 편을 들어 윤선거의 문집을 훼손하자 이에 항의하여 파직되었다가 2년 후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 4대신의 한 명으로서 왕세제 대리청정 문제와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신임옥사로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경종 4년(1722)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노론 왕 영조 밑에서 노론과 공존을 도모하는 온건한 탕평책을 추진했으나 끝내 화해하지는 못했다. 영조 9년 봉조하가 되었고 12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가 영조 16년(1740) 박동준(朴東俊)의 모함을 받아 울분 끝에 사망했다.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 ~ 1736
노론 영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해 관직에 오른 후 경종 때 세제 대리청정 문제로 소론에 의해 치죄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우의정으로 복귀한 후 소론을 공격하다가 정삼석(鄭三錫)의 탄핵을 받고 원주로 재차 귀양갔다가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방면되었다. 노론의 영수로써 소론을 먼저 처벌한 후 소론계 일부 인물을 등용하자는 조건부 탕평을 주장했다.
나경언(羅景彦)
? ~ 1762
노론인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로 있던 중 노론 벽파의 김한구 · 홍계희 · 김상로 · 윤급 등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하게 고변하여 뒤주 사건을 유발시킨 인물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먼저 사형시킨 후 사도세자를 죽였다.
익익재(翼翼齋) 홍봉한(洪鳳漢)
1713 ~ 1778
노론 시파.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영조 19년(1743)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영조 37년(1761)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이천보 · 민백상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후 영의정이 되었다.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에 의해 사도세자와 영조와의 사이가 악화되자 영조 편에 붙어 사도세자를 돕지 않았다. 영조가 뒤늦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자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김귀주(金龜柱) 일당에게 돌려 실각시킨 후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했으나,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사사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부교리 이노술(李魯述)의 탄핵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홍인한(洪麟漢)
1722 ~ 1776
노론 벽파 영수.
영조 29년(175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 전라도관찰사 · 대사헌 등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면서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사도세자 사후 보복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세손(훗날의 정조)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 여산(礪山)에 유배된 후 사사당했다.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35 ~ 1815
노론의 영수 홍봉한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 사도세자와 국혼9國婚)을 맺었다. 그녀의 나이 28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목도했다. 그녀의 나이 42세 때 아들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어 폐가(廢家)되었다. 정조는 그녀가 칠순이 되는 1804년(갑자년)에 홍씨 일문의 죄를 신원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무산이 되었다. 그녀는 집안을 신원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61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한중록」을 서술하였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일관되게 친정을 옹호하고 사도세자가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고 기술하여 사도세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이는 정말 군자다. 이이만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당이 없는 것이 걱정이겠다. 나도 주희의 말처럼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
- 선조의 말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 났다니.
- 성삼문(백이숙제를 비판하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이미 정적이었다. 부왕의 냉대에 상심한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었다가 창경궁에서 급서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급서는 무수한 소문을 낳았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인이 울어예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해 흰달 가는비 굵은 눈 쓸쓸한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디 간고?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여쁜 그림자 날 좇을 뿐이로다.
- 정철 「속미인곡」중에서
관산에 뜬 달 바라보니 통곡이요
압록강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 쓰리도다.
조정의 신하들은 금일 이후에도
서인이요, 동인이요 나뉘어 싸울 것인가?
(痛哭關山月 像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各西東)
- 선조
철령 높은 봉에 쉬어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준들 어떠리
- 이항복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이를 부른 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참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 조선 최대의 개혁 정치가 김육의 상소문에서
몸을 닦고 글을 읽는 것이 너희들의 일이다. 잘 모르는 일을 억지로 논하다가 남들의 비웃음과 모욕을 사지 말라.
- 서인의 상소를 받은 인조의 비답에서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을랑 장만마라.
닫 들어라 닫 들어라.
청약립(靑篛笠 : 대나무 삿갓)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簑衣 : 비옷) 가져오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 윤선도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중에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청남의 영수 윤휴가 숙종의 사약을 받으며 남긴 말
전하께서 당을 없앤다고 하시더니 이제 도리어 두 당 외에 또 한 당을 보태서 음과 양 외에 따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 하나 나와 모두 셋이 되어 군자도 되지 못하고 소인도 되지 못합니다.
-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노론 대사헌 조관빈의 상소문에서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는 세 줄기 다섯 가지에 천 가지 만 가지 잎사귀를 털끝까지 분간하고 실같이 쪼개서, 서로 성내고 서로 떠든다. 문마다 기 하나씩을 세우고 집마다 진 하나씩을 쌓아서, 세상이 다하도록 그 송사를 능히 결단하지 못하고, 대를 전해가며 그 원망을 능히 풀지 못한다.
- 다산 정약용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 송순(宋純)
…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청상(萬古靑常)하리라
…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듣기 좋아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해
-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중에서
고산 구곡담(九谷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 : 풀베고 집을 지음)하니 벗님네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 율곡 이이 「고산구곡가」중에서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
- 남명 조식
병든 마음 둘 곳 생각다가
지팡이 짚고 삼계당 찾았노라.
벽에는 서책 가득하고
처마 앞에 활터를 두었다오.
새 서리에 천기(天氣) 엄숙하고
어젯밤 비에 시냇물 소리 들리누나.
이제야 진기(眞氣) 기를 곳 얻었으니
묵은 병을 아주 잊어버리겠네.
病懷然着處 扶杖出溪堂
辟上藏書籍 檐前眞謝場
新霜天氣肅 昨雨潤聲長
始得養眞地 昔疴渾却忘
- 항은(巷隱) 최태완(崔泰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