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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30. 17:5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23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시집

2016, 민음사

 

대야도서관

SB110693

 

811.7

민67ㅁ  216

 

민음의 시 216

 

어떤 시인은 세계 내에 견고한 집을 지으려 하고, 어떤 시인은 세계의 옥타브 밖으로 나아가려 한다. 유계영은 물론 후자 쪽이다. 영혼의 패턴이나 생각의 알고리즘에서 일탈하는 문장들, 섬세한 불확실성을 통해 진실에 닿으려는 행간들……

하지만 여기까지만 말하면 되는 것일까? 그런 시들은 이미 충분히 많지 않은가? 이런 질문과 함께 머뭇거린다면, 우리는 유계영의 시를 아직 덜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속이 보이는 심해어처럼 유연한 문장들을 덜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스타카토 풍의 불안과 공포를, 시간과 공간이 어긋나는 건조한 밤을, 입체파 회화처럼 단절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 몸과 얼굴 들을, 아직 덜 살아 낸 것인지도 모른다. 특유의 미니멀한 호흡 속에서, 세계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장욱(시인)

 

 

유계영

 

198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당신은 무엇으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날 본다

나는 달아날 수 없을 만큼만 뻗는 다리로 날 본다

 

2015년 가을

유계영

 


차 례

 

1부

 

시작은 코스모스

유리

내일의 처세술

모형

생각의자

퍼니스트 홈 비디오

생활의 발견

 

2부

 

뛰는 사람

출구

호랑의 눈

상온을 기준으로

하루 종일 반복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

지그재그

에그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

아이스크림

니진스키

 

3부

 

복화술사

생일 카드 받겠지

잠 속의 잠

빛나는 토르소

늑대

오래된 오렌지

휴일

불이야

암막 커튼으로 이루어진 장면 묘사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중이야

배우 훈련

일주일

오늘은 나의 날

구름이나

 

4부

 

위하여

오가 죽는 세계

안개 풍경

큰소리로 울어라

곡예사

새벽 시간

내일의 토모

룰루는 조르조트의 개

재연 배우 모모

눈 천사가 지워진 자리

한 줄로 서기

온갖 것들의 낮

콩소메 맛

발가락들

사월

악필 연습

식육

녹는점

 

작품 해설 ┃ 양경언

큰 소리로, 훗!

 

지그재그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처럼

나는 아프고 너는 지켜보기만 했는데

너를 좋아해서 웃어만 지는 얼굴

 

잘려 나간 팔다리가 식어 가는 동안에도

몸에서는 부드러운 털이 자라났지

 

모자 속의 토끼

사과 속의 코끼리 같은

순진한 준비물과

대괄호가 많은 아이들의 말속에서

레이디는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무릎이

명상의 밧줄처럼 잘 땋여

거기 남았다

우린 모두 그가 다녀온 공간을 위로하고 있다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을 꾸었다는 듯이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의 처세술

 

옷소매 속에서 자라나는 병든 팔

밤은 파이프 모양의 긴 겨드랑이

 

대재앙 오 초 전

마주 앉은 사람들 일부러 크게 웃는다

 

창밖을 서성이는 짐승과 눈 마주치면

 

가장 오래 사는 물 영원한 물 썩어도 이로운 물

사람들은 물의 자세를 배우기 위해 눕고

그 위에 눕는다

 

복면을 쓴 등 뒤의 어둠

빛을 믿는 사람만을 겁준다

 

모두 달라지고 아무도 망하지 않는 꿈

창문이 있던 벽의 흰 자리를 짚어 본다

 

광대버섯의 연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라나는 쓰레기

먹다 남긴 태양

 

천천히 말을 해

운동장의 흐린 햇살 위에 아이들이 벗어 놓은 가발

이곳에선 모두 농아가 된다

 

공기 속의 말을 떨어뜨리지 않는 신체 훈련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

 

퍼니스트 홈 비디오

 

고양이가 도넛처럼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일

고양이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는 일

 

염하려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

자주 뒷목을 잡곤 했던 일

아버지 한 번 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유머 감각에 감탄하는 일

거리의 보도불록에서 밟은 껌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일

죽음까지 끌고 가는 일

 

공 앞에서 아주 잠깐 애국하고

다시 저주하는 일

같은 채도의 사방연속꽃무늬

꽃무늬의 방에서 벌어지는 일

 

아버지가 도넉처럼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나를 보는 일

용서를 빌 때는 반말이 좋다는 걸 깨닫는 일

 

대부분의 코미디가

운 나쁜 캐릭터의 수치심으로 마무리되는 일

 

새벽 시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여자애들이

플라스틱처럼 반짝였다

빨갛게 부어오른 귀를 만지면서

청과상의 열매들 속니를 부딪치고

가끔은 놀라운 소리가 났다

버려진 개들이 살던 집을 기억해 내려고

자꾸만 꿈속을 밟고 다녔다

칭찬 끝에 남겨진 표정과 같이

아무도 고갤 들지 못했고

 

젖먹이들은 얼굴을 달게 절이느라

일찍 잠에서 깼다

 

아이스크림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벗겨지고 흰 깃발이 드러난다

너는 벗겨지고 바깥에서 문 잠그는 소리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너희가 잠자코만 있어 준다면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의 귀를 만져 본다면

이런 느낌일 거야

 

방향을 멈춘 깃발의 긴장

너도 나도 다 가진 비밀이라면

난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봐, 이렇게 쉬운 평화

 

거리의 모든 사람들아

너는 외계의 메시지이고

너는 우주와의 시차이다

양산 속의 꽃무늬가 지르는 비명 때문에

나는 인상을 쓰고야 만다

 

우리가 사랑한 계절에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

태양이면서도 태양이 아닌 것 때로는

태양이기만 한 것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온갖 것들의 낮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나의 의문으로

 

빨강에서 검정까지

경사면에서 묘지까지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를

공원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제 탔던 남자를 오늘도 탔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제 먹어 치운 빵을 태양이 등에 업고

나는 태양을 등에 업고

너는 나를 등에 업고

비둘기가 아주 잠깐 날아올랐지만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자신의 주술을 주머니에 차고 온다

먼눈에게 어둠은 가장 평범한 장소

노인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

가까운 물건의 이름을 자꾸 불러 본다

살든 죽든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노인의 아이는 빨간 모과를 줍고

노인의 아이는 화가를 만나네

노인의 아이는 태양을 그리며

 

바람은 수면 위에서 갈증을 씻는다

깎아 놓은 모과가 검어진다

그건 너무 오래 칼을 노려본 탓

 

오늘이 불편하면 내일을 기다리면 된다

주머니에 차고 온 술병을 무덤 위에 붓는다

 

암막 커튼으로 이루어진 장면 묘사

 

얼굴을 감싸고 선 나는

곁눈 속에서만 사는 귀신이 가장 두렵다

자기 색을 내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그들은 없는 색, 나쁜 색

 

커다란 밤이 날개를 젓고 있다

 

정말 투명해

천사의 쌍꺼풀처럼

가려움증 앓는 불빛들로 창밖은 가득해

 

곁눈으로 내 코를 쳐다보면

처음 본 얼굴이 길게 누워 있다

만지고 싶어서 손을 뻗으나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불룩해진 테두리

수많은 도형이 몸을 내밀고 있다

 

그래도 가장 슬픈 건 나의 죽음일 것이다

 

하루 종일 반복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목록

 

나는 점성촌의 개

나는 점성촌의 젖은 개

밤은 오해로부터 내린다

 

살찐 여자의 배 둘레처럼 아래로 흐르는 시간

밤이 찢어진 발바닥을 내린다

낙과와 신을 가려낼 수 있는

지면 위로 내린다

 

너는 언 빨래의 몽유병

빨랬줄에 걸린 해의 고민을 내린다

어린이를 벗는 어린이가 말한다

 

비가 온다

 

우리는 찢을 수 있어

익사한 몸들이 걸터앉은 물결을

몸의 질서를 벗어난 뼈의 잠영을

찢을 수 있어

 

우리는 어제 태어난 개의 꿈을 꾼다

 

에그

 

깃발보다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의 그림자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알아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창밖의 무례한 아침처럼

그러니까 다가올 키스처럼

어떻게 두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혀의 위치처럼

새는 뜻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다

 

새가 머무는 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리는 어둠을 쪼며

짧게 나누어 지는 잠

 

그런 잠은 싫었던 거야

삼백육십오 일 유려한 발목의 처녀처럼

하나의 목숨으론 모자라

죽음은 탄생보다 부드러운 과정

 

새는 알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는 알을 처음 본 게 아니지만

곧 태어날 새는 어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 보는

그런 명장면

 

일요일에 분명하고 월요일에 사라지는 월요일

 

3과 4의 사이

강물은 신발을 모은다

여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온

가을의 유령들이 모인다

나는 자꾸 깨닫는 사람

눈과 눈 사이를 찌를 수 있도록

물결을 평평히 눌러 두었다

 

0과 1의 사이

천사는 자신이 거대한 태아라는 사실이 싫다

고작 이런 대우나 받으려고 착하게 산 게 아니야

통통한 발을 벗어 버리고

차라리

 

괴물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우리뿐

 

9와 0의 사이

극락조 : 부리를 머금고 발을 꺾어 신은 새

유령 : 어둠에 기댄 것처럼 서 있기

오늘도 해가 두 발로 지지만

 

0과 1의 사이

바늘의 말투를 훔치려다 비가 되었다

말 없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러 강가로 몰려왔다

유령들은 강의 괘를 따르며 빠른 노래를 불렀다

 

생일 카드 받겠지

 

예뻐지고 싶은데

아무 때고 울음이 났다

공중화장살의 변기 위에서

밥숟가락의 무게를 고민하는 식탁 앞에서

왜 하필 교회의 첨탑 위에서

달력 속의 월요일을 헤아리면서

철면피처럼

 

괜찮은 부모를 가졌다는 건

게으름에 대한 핑계가 부족해지는 일

왜 하필 옮겨 적을 수 없는 나무의 독설처럼

사려 깊을까 어머니

 

아침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니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열리는 새로운 골목의 끝에

내가 발가벗고 서 있는 거예요

아침은 그렇게 밝는 거예요

 

나는 오늘 태어났고

내일은 손 닿지 않는 곳의 가려움을 견디는 재미

내년이면 나도

생일 카드 받겠지

 

눈 천사가 지워진 자리

 

난간에 걸터앉은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누운 해골이 포개지고 있어

 

검음이라 부르던 개가 있었다

새끼에게 뒷다리를 물려 죽은 검음

땅이 일어 삽날이 구겨졌다

나는 검음을 공터에 내던지고

돌아오며 발꿈치가 아팠다

 

숨을 참고 눈을 뜨지 않는 것

팔다리를 가지런히 놓고 꼼짝하지 않는 것

내가 연습한 죽은의 구체

냉장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상해 가는 밑반찬들

 

누군가 나를 흔든다면

엎드려 자던 가축의 네 다리처럼

갑자기 나타나 보여 주는 것

혓바닥의 모래처럼 뜨거워지는 것

안경알을 찌르는 빛이 되는 것

 

수면 위로 올라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뜨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아는지

우리가 연습한 놀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생각의자

 

불가능해요 그건 안 돼요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

 

몸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는데

나는 내 몸을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에 놀랐다

 

나는 고작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냉동육처럼 활발한 비밀을 간직한 나무의 하반긴을 생각할 수 있다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 둔 뒤부터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 가졌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

 

의자를 열고 들어가 앉자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

나는 더 오래 늙기 위한 새 의자를 고른다

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려고

 

 

 

 

 

posted by 황영찬
2018. 4. 17. 13:1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21 왜, 바나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을까요?

 

 

 

서명진 시집

2017, 행복에너지

 

대야도서관

SB121647

 

811.7

서34ㅇ

 

 

 

시인 서명진

196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한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하나은행 PB 센터 VIP 고객 소식지로 시 창작을 시작하여 단국대학교 시 창작, 시산맥 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보고싶다 보고싶어』, 『영업의 디자이너』, 『멘토를 만나다』 등이 있다.

현재 하나은행 지점장 및 PB로 재직 중이며 2008년부터 멘토 클럽 COP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하나인 상, 우수 PB 상, 명예의 전당 회원 상을 수상했다. 또한, 대전일보, 중도일보, 충청투데이 등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충청 및 대전지역 관공서, 대학교, 종합병원, 기업체 등 재테크 및 자산관리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의 말

 

한 줄

 

한 편이

 

당신

마음의 서재에

항상 꽂혀 있기를 바라며

 

2017년 7월

서명진

 

차례

 

제1부

사랑의 다리를 놓고

 

∞ 사랑하기 때문에

∞ 기도

∞ 앵두사랑

∞ 반창고

∞ 늦기 전에

∞ 물

∞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 딸이 엄마를 닮아 간다

∞ 여백 1

∞ 나의 창

∞ 탑 쌓기

∞ 사랑의 모래시계

∞ 숨소리

∞ 목련의 계절

∞ 노벨 뮤지엄

∞ 여백 2

∞ 종이 꽃 향기

∞ 두브로브니크의 사랑

 

제2부

함께 거닐며

 

∞ 원

∞ 참 좋을 때다

∞ 공통점

∞ 비상

∞ 男과 女

∞ 마시멜로 이야기

∞ 무제

∞ 같이는 가치

∞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

∞ 태극기 휘날리며

∞ 대장간의 미학

∞ 문이 열리다

∞ 알아 간다는 것

∞ 빈 항아리

∞ 불꽃놀이

∞ 우정을 맛보다

∞ 옆으로 걷기

 

제3부

마음을 즐긴다

 

∞ 도르래 도르래

∞ 비단잉어 날다

∞ 친구야

∞ 시니어 예찬

∞ 칼춤

∞ 벚비가 내리네

∞ 병아리의 꿈

∞ 역량

∞ 난,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 꽃이 피다

∞ 선생님

∞ 번호표를 뽑으세요

∞ 피요로드

∞ 엄마의 장난감

머리통에 작은 활자 하나 심고

∞ 그런 사람으로

∞ 플라톤의 자명종

∞ 스노우 드롭(Snow Drop)


■ EPILOGUE

■ 출간후기

 

사랑하기 때문에

 

왜,

바나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을까요?

 

왜,

포도는

얼굴 맞대고 뽀뽀를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당신의

껌딱지가 되어 있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늦기전에

 

일 년이

지났고

 

한 달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런 이야기만 들을 거니?

 

매일 똑같은 이야기만 들을 거야?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그랬지                          

우린 그랬어.                 

 

중앙에 노란 선 하나      

그려놓고                      

 

넌 오른쪽                    

난 왼쪽                       

넘어오지 말라며          

 

벌써 10년째,              

 

희미해져 보이지 않는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넘어올 만도 한데       

넘어갈 만도 한데       

 

아직도                    

서로                       

발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을 뿐     

 

또다시                     

중앙선이 선명해지네.

 

여백餘白 1

 

나의

마음에

·

·

·

·

·

·

·

·

·

·

·

·

·

당신이

채울 수 있도록

많이 비워두렵니다.

 

사랑의 모래시계

 

나의 사랑은

모래시계

 

너에게

한 알

두 알

세 알

 

평생을

내려주는 사랑

 

나의 비움이

 

조금씩

조금씩

 

너에게

쌓임으로 가득하기를

 

여백餘白 2

 

      나의 사랑은                                                                                                여백으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할 이야기가 필요 없어                                                                                     남겨 두렵니다

 

참 좋을 때다

 

처음 만났을 때

물으셨다.

 

나이가 몇이냐고?

'스물아홉'이라 하니

'참 좋을 때다'라고 하면서 웃으셨다.

 

10년 뒤 또 물으셨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서른아홉'이라 하니

또 웃으시면서 말하셨다.

 

'너, 참 좋을 때다'

 

지금 또 물으신다.

몇이 되었냐고?

이제는 50이라 하니

여전히 미소를 지으시며 말하신다.

 

'너, 참 좋을 때다'

 

비상飛上

 

누가

 

무엇을

위하여?

 

누가

 

누구를

위하여?

 

지상에

알 하나

떨어뜨려

 

나비를

꿈꾸게 하였는가?

 

무제無題

 

참새는 짹짹짹

비둘기는 구구구

노래하는데

 

나는

어떻게

노래 불러야 하나?

 

바다에는 해로

하늘에는 항로가

있는데

 

나의

인생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같이는 가치

 

누가 그러더라

함께해야 한다고

 

같이

음식도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그래야 가치가 있다고

 

누가 그러더라

같이해야 한다고

 

같이

봉사도 하고

노력도 하고

그래야 가치가 있다고

 

그래서

같이 = 가치라고

 

대장간의 미학

 

이른 아침

대장간 지붕 위에

코끼리 가족들이

올라갔어요.

 

아기 코끼리들이

줄지어 서서

엄마 아빠를 따라

하늘로

걸어가고 잇어요.

 

엄마는 빨간 하이힐을 신고

아빠는 검정 구두를 신고

아기들은 하얀 운동화를 신고서

 

뒤뚱 뒤뚱

쿵쿵 소리를 내며

 

대장간 지붕 위로

 

코끼리 가족이

봄나들이

갑니다.

 

알아 간다는 것

 

스무 해

그림자는

외로움을 등에 지고

가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며

마음으로 보아야 아는 것이라고

떠들던 노교수의 말이

어둠 속에 묻히고

 

핸드폰 속

수백 명의 전화번호들이

아는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선배들의 말을

알아갈 때

 

청춘의 그림자는

밝은 태양으로

당당히 걸어 나온다.

 

우정을 맛보다

 

어느 늦은 가을날

친구가 나오라고

갈 곳이 있으니 차에 타라 하네

 

청량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곳은

쓰러져가는 농가의 집 앞

 

감나무 밑에서

햇살에 온몸을 붉히고

옷을 벗어버린 채

주황색이 주렁주렁 반기며

 

친구가

일 년을 기다렸다고

붉은 감 하나 건네

 

입에 물고

 

친구를 바라본다.

 

친구야

 

친구야

'비가 오는데'

 

'응, 그러네'

 

친구야

'이제 가을이 지나가나 봐'

 

'그러게'

 

친구야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지네'

 

'아니, 너 어디 아프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친구야

밥이나 먹자고'

 

벚비가 내리네

 

비가

내리네.

 

꼭 이맘때

하얀 비가 내리네.

 

긴 겨울을 보내야만

찾아오는 벚꽃

 

가슴을 후비듯이

꽃피고

열흘을 못 넘기고

가 버리네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애절함을 뒤로한 채

 

누가 볼세라

 

밤에

 

벚비가 내리네.

 

병아리의 꿈

 

'살려주세요.'

'단단한 껍질로 막혀있어요.'

'도와주세요.'

 

'나에겐 꿈이 있어요.

장닭이 되어

새벽에 소리쳐 노래하고 싶어요.'

 

하지만 모두가 말하네요.

 

'병아리야

내가 도와주면

넌, 계란 프라이가 될 뿐

장닭이 못되고 죽는단다.'

 

'너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병아리야

넌, 할 수 있어.'

 

난,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지난밤

급하게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네.

 

멋진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기 때문이네

 

지금 엘리베이터엔 우리 둘뿐

가슴이 두근두근

첫사랑 그때의 심장박동 소리가

40대인 내게 찐하게 들려왔네.

 

정말 난 몰랐네.

아래층에 멋진 남자가 살고 잇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동안 우리는 왜 한 번도 못 마주쳤을까?

아~ 앞집 근영 엄마 윗집 지영 엄마가

매일 화장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이유가 있었네.

 

지금

나도 화장을 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향수를 뿌리고

쓰레기봉투 들고서

 

오늘 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번호표를 뽑으세요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나뿐이다

 

자신 있게

젤 예쁜 여직원 앞으로

다가서니

 

웃으면서

말한다.

 

'번호표를 뽑으세요.'

 

엄마의 장난감

 

아무리 잘났어도

엄마의 장난감만도 못하네

 

눈이 나빠져

잘 보이지 않는다며

이번에는 아주 큰 것으로

욕심을 부리시네.

 

수십 년을

친구처럼

애인처럼

 

오늘도

엄마를

웃기는 것은 바보상자뿐

 

내가 못 한 것을

그가 하네.

 

내가 안 한 것을

그는 하네.

 

그런 사람으로

 

눈 내리는 겨울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가을에

오곡백과를 나누면서 함께 즐기는

사람으로

 

무더운 여름에는

마주 보고 웃으면서

시원한 냉커피 한잔에 살아가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어느 봄날에

꽃 한 송이와 시 한 편 전할 줄 아는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

 

스노우 드롭Snow Drop

 

새해 첫 날

 

천사가

 

준 선물

 

'스노우 드롭'

 

ㄴㄴ이

 

내릴 때,

하얀 드레스를 입고

 

부끄러워

 

머리를 숙인

 

신부의 모습으로

 

차가운 땅속에서

 

희망으로

 

피었네요.

 

 

한얀 눈이

 

땅에 떨어지기 전

 

맨발로

 

뛰쳐나가

 

두 손을 뻗어 당신을 잡으렵니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posted by 황영찬
2018. 4. 16. 15:4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20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조은 시집

2007,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3259

 

811.6

조67 땅

 

조은의 시에서 전원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농촌과 다름없다. 글자 그대로 밭과 과수원이 있을 뿐이며, 더 있다면 "즐비한 돼지우리와 뒷간의 악취" 같은 것들에 친화력이 강한 그의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전원일 수 없는 전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한 친화력에 이끌려 시 속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전원적 사물들의 모습이다. 작품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러한 정황들을 단순히 잘 그려진 이미지로만 읽을 때, 우리는 조은의 시에서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전원적 사물들은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지듯 농촌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차용된 것이 아니며 순수한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인간과 함께 살고 또 살아 있는 존재이다. 더 자세히 적자면 조은의 시 쓰기는 전원 지향의 정신으로 자기 회복, 또는 자기 수정을 위한 운동이다.

- 오규원(시인)

 

조은

196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과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 『조용한 열정』 등이 있다.

 

自序

 

지하철 속에서, 만원 버스 속에서, 밀리며 출구를 찾지 못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몸만 부딪치는 (아, 정신은 다 어쩌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있다면, 정녕 잇기만 하다면, 이곳의 몸과 마음이 이보다는 편하리라.

 

내게 서툰 사랑의 흔적들을 남길 수 있게 해 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1991년 3월

조은

 

차례

 

自序

 

1

지금은 비가...

오늘은

과수원에서

전원일기(田園一期) 1

전원일기(田園一期) 2

전원일기(田園一期) 3

전원일기(田園一期) 4

산이 무너지고...

그가 여는 문에는

빈 달

겨울나무

파꽃

그는 햇볕이 봄눈만큼 짧게 남은 도시를

병(病)

사람들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반란처럼



2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그늘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눈이 내리고 1

눈이 내리고 2

눈이 내리고 3

쓰레기 하치장 1

쓰레기 하치장 2

쓰레기 하치장 3

장관(壯觀)

망월동에서

마이산에서

나를 멈추게 하며

원자력 병원



3

시(詩)

사물(四物)

사랑의 위력으로

폭우

웃을 때마다 물이

소용돌이

이곳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십자가

그림

저녁 무렵

유토피아처럼

오늘은 어디로

고립된 우리는 각각 고립되어

지독한 이 어둠보다 더 무서운

민들레 꽃

밤안개

바다

보름달

노을

지금 이 순간처럼

비 오는 풍경에서부터

전설처럼

꽃을 꺾다가

사진 속에는

해당화가 피고

부석사(浮石寺)

3월

남해 기행

 

작품 해설 / 오규원

물과 벼랑

 

전원일기(田園一期) 1

 

  그곳으로 옮기는 이삿짐을 꾸리며 가족들은 평화로운 날들이 주렁주렁 열리리라 믿었다. 즐비한 돼지우리와 뒷간 악취도 신비롭던 그 봄 잡목 숲을 일궈 과실나무를 심었다. 어린 과실나무가 빗물을 걸러 먹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낮잠은 달고 깊었다. 빗물에는 삭정이들만 떠내려갔다. 야산을 감싼 꽃잎은 넓었고 인근 비행장을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에 비탈의 도라지 밭이 세상을 희끗희끗 열었다. 아버지는 포클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며 저수지에서 발을 씻었다. 아버지의 물살이 저수지에 가득 찼다. 멀리서 보는 아버지는 잔잔히 굽이쳐 산 하나를 넘어갔다.

 

 

  그가 가는 곳으로 아치형의 길이 닫혔다. 산의 원래 모습은 저런 것일까. 도깨비바늘이 파고드는 그의 살 속에서 친숙한 말들이 수더분히 떨어졌다. 습한 웃음이 날아 올랐다. 우리는 멈춰 상수리나무를 흔들었다. 쉬고 싶은 씨앗들이 우루루 일어섰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빛이 온전했다. 나뭇잎에 묻힌 그와 내 몸이 우연히 빛났다. 지층에 섞이는 산 그림자. 숲을 타고앉은 태양이 어두워지도록 우리는 가을 산에 말려들었다. 간혹 뒤쳐진 그가 보이지 않았다. 허기진 들짐승의 울음소리를 흘리며 산이 몸을 뒤척였다. 산은 우리를 동요하며 며칠을 쉴 새없이 비워지고 잇었다.

 

마이산에서

- 악화되며 나를 덮쳐 오는 의혹이여. 그는 무엇을 굳게 믿어 이 많은

  돌들을 탑의 이름으로 재웠는가

 

관광버스 몇 대분의 사람들이 돌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일찍이 산을

굴러 내린 돌덩이들이 받쳐 든 탑의 몸체가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 머릿속에 음지를 만든다

산을 불리는 스피커의 목탁 소리

바람도 헛발을 디뎠을 이 산 아래서

내가 마시는 물에는 짙은 흙냄새가 난다

(그를 잠그던 정적이 깊었으리라)

저 바람에 쓸리는 풀들의 몸뚱이 위로

번쩍번쩍 들리는 풀들의 눈빛처럼

돌탑을 쌓았을 사람의 그때 그 믿음처럼

탑들은 오늘도 아슬하고 견고하다

관광객의 말소리 사이로 물이 바위를 미는 소리

낮게 낮게 들려오고

그 어디서 날아오르는 새

새가 날아간 곳으로 나무들은 쉬지 않고 가지를 뻗는다

꽃이 피는 기척에 돌아보면

우는가 썩는가 잠잠한 꽃송이들 초목들

(그를 잠그던 정적이 깊었으리라)

돌탑들은 오늘도 견고하다

그대 삶의 골격이여

숨어 있는 의미여

 

민들레 꽃

 

가랑이 사이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들린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태양의 귀도가 그녀 쪽으로 바뀐다

먼 곳으로 질주하던 바람이 급하게 멈췄다가

가던 길을 장악한다 이 순간에도 길이 있는

그곳에 부지런히 때를 입히는 수많은 별들 때문에

길은 한결같이 양끝이 흐리다

그곳으로부터 억만 년 오고 가는 사람들과 태양은

그늘을 왕성하게 늘어뜨리고 대지는

그 아래서 힘껏 육신을 굴리고

누렇게 뜬 그녀의 얼굴 위로

세상이 한동안 오묘하게 정지한다

 

날아가리라!

죽음마저 신선하지 않은 고인 물속 같은

이 밝은 평화를 버리고

산산이 부서지고

가벼워져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흙 속 뿌리가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는다.

흘 속 돌들이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는다.

그의 주검 곁 방향을 잃은 개미들 등으로

잡풀 그림자가 희끗희끗 옮겨 다니고

우리를 받아 뼈를 앉힐 땅도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 주지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

만물은 저마다 제 눈을 뜨고

하늘이 겨운 그림자를 낮은 곳에 널어 말린다.

울음이 삶에 쉬 섞이지 않는 이 순간

까치와 쓰르라미 개밥풀 둥근 나무의 많은 나뭇가지

개구리 파리 벌 모두 어우러져 바람을 일구고

부러진 나뭇가지 마른 잎에도 쉬고 있는 생물이 보인다.

바람이 빗기는 산. 그는 누워 있고

내일도 정직할 모습은 주검뿐인가.

산을 올라오는 것들이 모래로 날린다.

구석에 이렇듯 묻혀야 할 우리의 몸뚱이와

주검이 이토록 밋밋해서

이다지도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우리는

가면서 어디로 휘청거리는 것인가.

흘 속 뿌리는 삽을 물고 놓아 주질 않고

허공에 빠진 내 손은 무겁고 공허하고

다시 보는 하늘도 강도 허공에 머리를 두고 신음하는구나.

세상은 우리의 그 무엇도 섣불리 받아 주지 않고

아카시아가 긁은 내 팔에 지금 고이는 것

살아 있는 것에는 눈물만 질벅하고

 

산이 무너지고

 

1

그는 섬기던

산이 무너진 곳에 밭을 일구었다

깊고 깊은 지평선에는 모래가 날리고

교회의 첨탑만을 내밀고 마을은 숨어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반전하는

목화밭이 깊은 샘물처럼 깨끗하다

 

2

어둠이 진흙처럼 차 들어온다

목화송이는 제 의지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별도 비어 있다

새 우는 소리가 사막보다 깊다

두고 온 가족처럼 닿고 싶은 경지처럼 마을은

가깝고도 머얼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흙에

밤의 한구석이 반짝거린다

 

 

  우리가 발을 디딜 때마다 숲이 깊어진다. 둥치 큰 나무의 나이테와 뿌리를 따라 걷다가 우리는 나무 속으로 뛰어든다. 혹이 많은 바람이 지나간다. 누가 웃을 때 줄기이며 기우는 해에 매달리고 바람은 숲에서 굽은 것을 구부린다. 숲은 때로 숫돌처럼 번들거린다. 흥이 많은 사람들은 얏호! 야앗호! 허연 뿌리를 내놓은 몇 그루 나무가 보이는 비탈 아래 풀들이 허리까지 두리번거린다. 나무들이 하늘을 이룬 숲에서는 어둠은 나뭇가지나 풀잎 끝을 둥글리며 숲을 저벅저벅 걸어 다닌다. 누구의 손을 따라 우리들의 허리가 아래 마을의 입구까지 굽는다. 언덕을 내려가는 우리들의 다리에 붉은 흙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 돌아보니 숲은 왜소하다. 아, 숲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신기하다.

 

반란처럼

 

소 한 마리가 어둠이 모이는 개울을 건너옵니다

소가 지나온 들판은 어둠을 몰고 사방으로 몸을 젖힙니다

명랑하게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이

소의 발길마다 걸려 첨벙거립니다

길게 소가 울 때마다 달빛이 우수수 우수수

내가 없는 세상으로 이탈합니다

바람은 이 세상과 쟁기처럼 부딪치며 물속으로 가라앉고

어둠을 비끄러매며 별들은 차고 단단합니다

아이들 눈빛이 총총한 별에 걸려 헉헉거립니다

소 한 마리가 개울에서 물을 먹고 있습니다

굳어 있던 모래밭이 소의 등을 넘어 이곳으로 기울고

어두운 물의 걸림돌로 소는 멈춰 있습니다

뒷숲 벌레 울음이 낭자합니다

삐그덕거리는 문소리가 고조되고

소 한 마리가 개울을 건너옵니다

반란처럼 제 외양간으로

 

전원일기(田園一期) 2

 

연일 폭락하는 값에 판매를 위탁한 과일이 실려 나가고

아버지가 뿌리치는 밥상이 마당에서 우주처럼 돌았다

아버지의 분노는 나뭇가지 끝으로 치달았다

농한 과일들이 마당까지 굴러 와

그곳의 아버지를 자극했다

발길이 끊긴 이웃에서 날아오는 웃음과

된장 냄새를 따라다니는 내 모습이 서러워 올랴보는 하늘에서

흙바람이 일어 나를 가두었다

밤마다 부엌에서 범죄처럼 소리 죽여 밥을 먹어도

밥을 먹고 물을 마셔도 아버지와 공유하는 허기 속에는

어둠만 깊이 물살 쳤다

암울하게 굴러가는 세상을 발목에 차고 마당에 서서 보면

아버지의 그림자가 문에 꽉 끼어 날마다 신음했다

늑골에 박힌 내 별이 불길하게 떨었다

새벽부터 아버지의 방 앞을 뒹구는 과일을 쓸어 모아

돼지우리에 처넣는 나를 피해 동네 사람들은

발소리를 줄여 들판으로 갔다

 

시(詩)

 

왜 이렇게 정강이 뼈가 덜그럭거릴까

혼자

문밖에 나와 앉는다

고향보다 친숙한 어둠의

새로 돋은 떡잎을 뜯어내며

네게로 가는 길 구석구석마다 불빛을 내거는

이 축축한 발광(發光)

이 축축한 풍요

아아 문득

저 먼 곳으로부터 못 박혀 오는

석탄같이 아득한 파도 소리

왜 이렇게 정강이 뼈가 덜그럭거릴까

오늘 이 밤이 천국만큼 멀다

 

웃을 때마다 물이

 

물이 빠진다 웃을 때마다

몸에 고인 한 모금의 물마저

빠진다 웃을 때마다

웃고 있는 나의 정강이께로

흙이 올라오며 철렁거린다

 

물의 충혈된 눈을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보는 내가

이렇게 힘겹게 흙의 결을 풀고

빌등을 뚫고 올라오는 이 매운 삶의

돌부리를 뽑아 던지고 있는 건가

내가 물로 내려 낮게

타오르고 있는 건가

 

물이 맑은 뿌리를 내 몸에 담그고 바다

멀리까지 이어진 것도 같고

내 몸에 머리를

두고 있는 것도 같고

늙은 저 농부의 주름이 깊은 골을 따라오며

샘이 얕은 나를 꿰뚫는 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사막처럼

 

3월

 

바람이 핼쑥하다

타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

숨은 향기가 분수 같다

급소를 때리는 빗줄기

비틀대는 땅

산란기의 연어 떼처럼 거슬러 오르는

그녀는

물방울로 굴러 내린다

착각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낯익어 보인다

 

 

  우리는 꿈틀거리는 안개 망 위로 머리를 필사적으로 들어올린다 안개가 목을 비트는 이곳에서 마주치는 우리들 눈빛은 빳빳한 지느러미를 일으켜 함께 침잠하다 불쑥불쑥 멈춘다 형체도 삭아 버린 대지를 쓰다듬으며 물소리가 안개 속에서 파문을 일으킨다. 그때마다 우리들 머리 위로 키를 돋우며 안개망이 좁혀지고 우리들 몸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신비하게 고조된다 문득 안개가 가린 오늘 이 세상이 너무도 명료하다

 

그늘

 

숲을 서성거린다.

숲은 하늘이 얼룩진 허공에서 뿌리를 틀고 있다.

바람은 본능으로 숲을 밟고 지나간다.

(숲이 거대하면 두려움이 거대하다)

문득문득 떨어져 나가는 나뭇가지를 물고

세상은 언덕 너머 너머

 

우리들 몸은 그늘로 꽉 차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대하게 부풀며 숲은 한 몸같이

꿈틀거린다. 비대한 물소리를 따라 도는

풀들의 얽힌 허리 또한 난무하고

이곳에서 풀들은 일생 동안 정수리가 날카롭다.

멈춰 있는 물처럼 이토록 몸이 굳어 나는

한순간도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늘만 일렁이며 눈빛을 바꾼다.

당신과 내가 만날 때는 그늘이 겹쳐진다.

 

태양은 오늘도 머리맡에 단내를 풍기고

하늘은 퇴색한 채

얼마나 완고하게 과거로 기우는지

하늘이 누렇게 탈색된 허공 속에는

드물게 뻗는 크고 울퉁불퉁한 뿌리에 부딪쳐

온종일 추락하는 것들과 그 아래로

썩고 있는 새의 주검들.

경직된 몸은 천천히 회전하며

깊고 더러운 것들을 뿌리로 감으며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돌 하나를 주웠다. 비 내리는 철로 변에 별처럼 젖어 있었다. 기차가 반원을 그리며 지나간 뒤에도 오랫동안 돌들은 덜그럭거렸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고 꽃들이 몸을 놓아 버리고 떨어지는 그곳을 걸어 그린밸트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이곳에 올 때까지 정말 별처럼. 반짝반짝 어둠을 균열시키며 돌들이 아직도 제 몸에 물 가두는 소리. 돌 속 술렁이는 소리. 젖은 새들이 낮게 낮게 이동하던 그 철로 변이 뒤척인다. 밤이 덮은 나무들은 밤보다 더 어둡고

 

사물(四物)

 

1 비

 

풀잎과 풀잎

사이가 헐거워진다 선인장 가시에 빗방울

찔린다 한 방울…… 두 방울…… 여섯

방울이 꿰이기 전에 떨어진다 이미

하나의 물방울 되어

웅덩이를

적시며 물이 차오르는 동안

흘러넘치지 않는다 우리의 물

 

2 꽃

 

바다, 작은 모래알들이 바다를 밀고 와서 해변에다 눕혔다

 

모래의 틈 속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더듬으며 한 사람이 파도를 따라갔다

 

바다가 잡아당기고 간 모래의 귀뿌리를 따라 귀 밝은 사람들은 사람 사이로 오는구나

 

따로 남아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토하는 모래 한 줌에 향기가 났다

 

3 강

 

내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가늘게

강이 흐른다

버스에서 내려 난감한

내 앞에서 강은

배회하는 진눈깨비를 거머쥐며

무디고 날쌔게 자신을 넓힌다

강면의 마른 집들을

움켜쥐고 한 발 더 앞으로 뻗어 나간다

 

가장 낮은 자세로

성숙하는

강의 저 율동

 

강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

시선 밖 멀리까지

강물이 차오른다

둥. 둥. 둥. 둥둥둥둥둥둥둥둥

수평선이 처얼썩 하늘에 걸쳐진다

 

막 펼쳐 내는 첫 장의 꽃잎

그런 전류가 천지에 흐르고

마을 전체가 기름방울

하나의 무게로 떠오른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4 반도

 

노을이 씨방처럼 터진다

뒤척이는 나무들

뿌리 그 여린 끝으로 더듬어 내는

절벽 같은 희망이 반도(半島)의 빈 가지마다

고개를 내밀고

수그리고

반도의 빈 들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반도가 육중하게 자유로워진다

이윽고 미끄러지듯

미끄러지듯 자전하는 지구

 

오늘은

 

  고구마의 전분, 사람의 피, 소의 젖, 그런 것들이 별로 보인 오늘은 나의 하늘이 나를 짓이겼습니다. 하늘의 별, 사람의 눈, 나무의 잎사귀, 뿌리, 가지, 돌멩이 모두 흘러들어 허둥대는 나를 짓이겼습니다. 하늘이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힘겹게 강을 건너온 바람이 너덜거리는 손가락만 보이고 짚단처럼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벌판의 한 그루 나무가 무너지는 하늘을 받치고 나의 이마로 걸어왔습니다.

 

  종일 별이 나를 끌어 큰 산맥을 떠넘기고 나는 냇가 바위처럼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아 차갑게 타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하치장 2

 

멀지 않은 곳에서 밤 기차가 교차한다.

잡역부들은 폐품을 던지며 불기둥을 높이고

연기가 들어 올리는 늘 그 하늘이

오늘따라 적막하다

어둠 속으로 주춤주춤 들어앉는 사물들 곁으로

뜸한 행인에게로 마른 풀숲으로 간간이

신화(神話)처럼 불씨가 날아온다.

 

화덕 위 라면이 끓고 있다.

뒤틀린 나의 이 하루가 몰고 오는 허기 속에는

어둠만 쌓여 묵직하고 날아와

내 몸에 앉았던 시간들이 트럭의 진동에

일어선다. 허술한 제복의 인부들은

쓰레기 더미를 중심으로 흩러지고 모이고 저들의

땀과 저들의 호흡과 저들의 희망과 반죽되면 그것들이

쓰레기 하치장을 둘러치고 빨갛게 달고 있다.

 

별들이 어느새 날카롭다.

어둠 속 내게로 이 도시의 허리로 빈 깡통 하나가 굴러내리며

흔히 널려 잇을 풀씨들을 깨운다. 빈 깡통 하나가

명멸하는 이곳의 어둠을 낮게 베며 뒹군다.

내가 서성거리는 곳에는

달도 없이 별만 날카롭다. 바람도.

번호가 매겨진 리어카들도 빈 나무의 뿌리도 어둠에 깔려 있고

쓰레기 더미에서 가려져 따로 놓여 있는

안락의자, 팔레트, 밤색 구두 한 켤레

 

병(病)

 

  (그는 그의 그림자에 끌려 혼자 그들을 떠나왔다 그들이 가고 있는 그곳은 떠나온 나의 확신 때문에 갈수록 불완(不完)했다)

 

  사람들의 눈빛이 그의 골수 속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높은 산 그림자가 흩어지며 어른거렸다. 별이 우두둑 우두둑 으스러지는 그의 혼을 떠밀며 사람들이 내달렸다. 숨 가쁘게 포개지는 그들의 어깨는 신명난 들개처럼 별빛을 토막 쳤다.

 

  길은자궁속까지사람들을끌고들어가

  수렁같은칭찬을아끼지않았다

  그길의탯줄을말아쥔사람들의

  다리가살찌고있었다

 

  제구실을 못 하는 새벽 그의 뜰에는 날개를 접은 새떼. 버석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연일 그의 뜰로 흘러들었다. 먼지가 앉은 꽃들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우우우 무섭게 달이 벙그는 그의 밤은 넓어져

 

쓰레기 하치장 3

- 태양이 불순하게 떠오른다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는 거칠고

 

저들의 아이들은 이 둑길을 걸어 학교로 갔으리라

고여 있는 세상처럼

어제의 그 자리에서 태양은 지글거리고

저들의 웃음은 풍만한 햇볓에 눌려 눅눅하고 차갑다

어제도 또 오늘도

기이하게 그림자가 닳고 있는

버섯 같은 날들이 밑도 없이 넘치는

 

오늘도 어디로

 

꽃이 지고

피기도 하는 이 밤에 벽이

울리는 기침을 누가 자꾸 한다

개 짖는 소리

흐르는 전류와 취한의 노래

자동차 급 브레이크

사이 사이로

벽이 울리도록 누가 기침을 한다

 

둥둥 떠 있는 선인장 꽃

떠 있는 지붕들

(위험하다!)

나뭇잎들은 뒹굴며 낮은 곳으로 몰리고

어제의 무수한 별들은 한순간도

제힘으로 스러지지 않고 오늘도

착각인가 한 무리의 그림자가

별을 펄쩍펄쩍 넘나든다

(위험하다!)

 

어둠을 풍차처럼 돌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잠 속에서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어라

밤이 다시 아침으로 발전하는 것

 

꽃이 지고

피기도 하는 이 밤에 벽이

울리는 기침을 누가 자꾸한다

 

유토피아처럼

 

유토피아처럼 과일 가게는 철거반에게 헐리고

새로 지은 상가의 층계는 말쑥하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치량들과 삶이

즐거운 부인들이 구경하는 데서 냄비와 물통과 문짝과

딸아이의 속옷까지

맥어ㅓㅄ이 끌려 나와 ㄴㄹ블지는데

대단하다 정말 수차례 당해 ㅂㄴ 사람처럼

 

담담하게

두 딸과 남편의 도시락을 오늘 아침에도

꾸려 주는 저 아주머니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집을 짓는다.

철근을 넣고 모래를 거르고

꿈처럼 벽돌을 키워 올린다.

외딴 섬벽을 기어오르는 바닷물이 저들의

온몸에서 번들거린다.

무더운 팔에 햇빛이 엉기고

굽은 등으로 걸터앉는 하늘

하늘에 가려 먼 곳이 안 보인다.

판넬과 모래를 실은 트럭을 몇 차례 비켜서며

터무니없이 나는 왜 오그라드는지.

풀꽃은 왜떨어지는지.

바람은 왜 서는지.

꽃은 떨어져 어디를 찌그러뜨리고

신호등 앞 볏단같이 묶인 사람들이 보이는 이곳

무더운 바람이 범람하는 변두리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집을 짓는다.

시멘트 포대 쓸데없는 철사 토막

여자들도 보이고

하늘을 흩으며 가는 장화가 용기보다

외롭다. 질고 삐뚤은 바닥을 딛고 선 저들

하늘이 잠시 들먹거린다.

이 한낮 공사장

주변에서도 나는

하늘에 가려 먼 곳이 안 보이고

 

사랑의 위력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들의 말마다 모래가 날고 있다 언제나 이곳이 가파른 때문인가 내 곁에 쌓인 모래들만 비탈져 오늘도 반짝인다 지쳐 누운 낙타인가 이 모래언덕을 허물며 버둥대는 저것은 나를 꿈꾸게 할 것들은 수시로 문을 걸고 꺽꺽 울고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위력으로 날고 있는 모래의 말들아

  사랑이 깊고 깊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이곳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몸 한 부위에 별을 달고 사람들이 딸랑딸랑 스쳐 간다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의 날갯죽지가 암표처럼

불편하다 몇몇 아이들은

몸을 별 모양으로 오그리고

그림자를 몸속에 찔러 넣고

 

십자가

 

(멀리 가서 바람처럼

풀리고 싶어)

 

눈물도 은혜다

웃으며 웃으며 타오르는

저 뜨거운 망초 꽃

언젠가 다락방엔

쥐들마저 가고

손가락 한 마디도 포개지지 않는

그 피뢰침에는

별이 찔렸다

 

저녁 무렵

 

1

서너 마리 참새가 올라앉은 빨랫줄이

아무래도 땅에 닿을 듯하다

사람과 사람의 터울 사이로

치석(齒石) 같은 어둠이 깔리고

죄 없는 바람 한 자락

빨래줄을 지나가며 두 동강이 난다

무수한 바람의 허리를 뚝뚝

꺾어 버리는 우직한 사람들의 어깨선이

차츰 둥글어진다

얼핏

진화(進化)되지 않는 슬픔의 무게보다

가깝게 별이 보인다

 

2

모세의 머리털 같은 구름 한 자락에

노을이 가려져 잇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주인처럼

검은 소 떼가 몰려오고

부채의 손잡이 방향으로 귀가하는 사람들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어디에 가서

돌이 되어 바람을 굴절시키는

단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려나

천천히, 천천히 나는

돌들의 눈 속으로 차 들어가

 

사람들

 

  살아 있는 절망들이 엮이고 숲을 이룹니다. 하늘의 중심을 찌그러뜨리며 평야처럼 숲이 넓어집니다. 무덤 같은 정의가 즐비한 숲의 질서를 돌아가 보십시오. 설움이 마디마다 묻어 찐득거립니다.

 

바다

 

반짝이는 모래들은 모두 말라 있다.

물이 가까워 더욱 마른 모래들

 

빛을 확장하는 모래밭 위로 새들이

가까운 죽음처럼 어른거린다.

 

지구를 감고 도는 느린 물줄기 곁에서

모래층을 바꾸며 휘청이는 우리들의 다리에

가까운 무인도가 덫처럼 걸린다.

바다는 늘 이곳에 있다.

 

우리들 낮은 곳의 모래층을 적시며

명쾌하게 새를 날리기도 하면서

바다는

늘 이곳에 있다.

 

남해 기행

 

길어지는 섬 그림자

허리를 슬며

안개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둠이 몸을 풀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바다에서 배 안에서

벽인 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바다

 

바다에서도 나는

나를 가두고

두드리고 끌고 끝내

뜨거운 저 안개로도

바닷물로도

숨구멍 하나 터주지 못했다

 

멀어질수록 서둘러

가까워지는 육지

바다보다 앞서 가는 어선들

 

문득

먼 미래의 물살이

빙산을 밀고 오는지

바다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뱃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바다의 기류가 바뀌고 있었다

 

안개가 두려운

창자 속에 섬을 하나씩 채워넣고

배는 십계명처럼

우리를 끌고

 

돌아가는 우리들

그림자가

우리들의 무릎에서 안타깝게

잠들고 잇었다

 

지금은 비가 ……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 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 다오ㅗ. 그러면 난ㄴ 노루 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 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

 

 

posted by 황영찬
2018. 4. 13. 12:26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19 사진으로 본 일제시대의 잔영

 

 

이서규 지음

2005, 지식의날개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000

 

911.06

이54일

 

광복 60년,

그 아픈 과거의 흔적을 찾다

 

이 책은 80여 컷의 컬러 사진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역사 에세이로, 35년간 이 땅을 유린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 만들어진 유형 · 무형한 것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아프고 참담한 현실도, 그 현실 속의 사람들이 떠나가고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게 마련이다. 광복 60년, 두 세대가 지난 지금 이러한 흔적들이 재조명을 통해 그 시대의 진실을 되새겨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일본과 일본인을 바로 보고 제대로 알아야 그들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 이서규(李瑞圭)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와 스페인 마드리드 Complutense 대학 왕립 외교관학교, 중앙미디어그룹 영자신문 기자를 거쳐 CBS(기독교방송) 문화체육부 기자로 2004sus 아테네올림픽을 취재한 바 있고,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일본에 거주하면서 한일관계에 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차례 |

c o n t e n t s

 

책머리에


1. '식민'의 의미와 그 흔적을 찾아서

2. 조선은 그들에게 신천지였다

3. 착취와 수탈의 역사를 더듬다

4. 그들의 무덤이 말을 건넨다

5. 교통을 장악하는 자가 조선을 접수한다

6. 서로 다른 목욕 문화가 만나 낯을 붉히다

7. 식물까지 창씨 개명을 당하다

8. 한국인의 정신까지 수탈하다

9. 건축 양식, 일본식과 한국식의 차이

10. 일제의 붉은벽돌 콤플렉스

11. 성 문화에 '문화'는 사라지고, '행위'만 남았다

12. 러일전쟁, 군국주의를 부르는 비석

13. '조선의 자존심' 마저 일제의 군사요새로 전락하다

14. 일제가 약탈한 유물, 한반도에서 빛을 발하다

15. 재일동포, 두 개의 조국을 바라보는 비애

16. 한국과 일본, 가깝고도 먼 이웃

17. 정치는 실리를 다투지만 학문은 진리를 다툰다

18. 비록 일본인이지만 자랑스런 한국의 어머니

19. 아름다운 사람, 그가 있어 한일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과거 청산에는 반드시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용서에는 반드시 반성과 참회가 필요하다.

 

■ ■

동래도호어문

교각을 높이 올려 그 밑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형태인 이 문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모습이 혼재해 있다.

■ ■

부산근대역사관

1929년 설림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의 모습. 그 뒤 미군 사무실 미문화원으로 쓰이는 등 우리 현대사의 영욕을 겪은 증인이기도 하다.

■ ■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일본인 묘지 바로 앞에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가 서 있다.

■■

일본인 묘지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 부산시립공원묘지에 있다. 부산시는 인도적 차원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무연고 일본인 묘지 1,528기의 유해와 위패를 이곳에 안장했다.

■ ■

수성못 전경

수성못 인근에는 이 저수지를 만든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소가 있으며, 조선인 토지가 저수지에서 제외된 데 합의한 미즈사키의 공을 기려 시민들이 관리하고 있다.

■ ■

부산시 소재 동래역

부산시 동래구 난민동에 있으며, 전형적인 뾰족지붕의 일제시대 역으로 이런 역은 여객수가 적은 동해남부선에 밀집되어 있다.

■ ■

금강공원

황기 2600년 기념비가 있다.

■ ■

범어사

일제에 의해 왜곡당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 ■

부산진매축기념비

부산 동부경찰서 관내에 위치한 이 매축비는 부산을 내륙의 관문이라고 칭하는 글귀가 아직도 선명해 부산이 대륙침략의 시발점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 ■

남항매축기념비

원래 비문이 있던 곳을 파내 한반도 지도를 넣은 이 기념비는 한반도의 허리부분이 부러져 분단된 조국을 상징하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현재는 이순신 장군 영모비로 변모해 있다.

■ ■

유성관광호텔 내부에 있는 유성온천 기념비

공주 갑부였던 김갑순은 이 자리에 유성온천장여간을 세웠다. 한때 중부권 최고의 갑부였던 김갑순은 생전에 수많은 첩들 소생 자녀들의 재산 싸움으로 파산했다.

■ ■

할아버지상

1930년대 초 온천 사거리의 전차 개통을 기념해 만든 이 할아버지상은 당시 온천업에 뛰어든 일본인들이 사업의 성공을 빌며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

박간별장

일본인 거부인 하자마 호타이로가 지은 저택이다. 현재는 예식장의 연히장이 된 이 별장은 빼어난 정원조경과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하다.

■ ■

박간별장

자갈과 목재를 깔아 만든 정원과 삼나무로 만든 박간별장 대문의 모습은 1900년대 초 벼락 부자가 된 일본의 거부들이 얼마나 호사를 누렸는지 잘 보여준다.

■ ■

성지곡수원지 삼나무 숲

일본에서 주로 주택이나 선박 수리용으로 쓰이던 삼나무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 ■

성지곡수원지 계곡

이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여 늘어나는 부산 거주 일본인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가 상수도를 설치했던 곳이다.

■ ■

4각 13층 석탑

원나라 형식의 석탑으로 일제시대에 세워졌다.

■ ■

황기 2600년 기념비

대동아공영권을 강조하여 새긴 이 기념비에는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금강원을 확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

범어사 대웅전 계단

영남 불교의 주축이던 범어사 역시 일제의 종교 침투를 벗어나지 못해 곳곳에 일본인이 만든 건조물이 남아 있다.

■ ■

일본식 석등

범어사 대웅전 앞을 장식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석등이다. 둥근 모양의 지붕과 전반적으로 긴 몸체가 일본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 ■

범어사 대웅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제루

■ ■

보제루 현판

사찰의 입구에서 보면 대웅전이 개방되어 있는 우리 절의 구조와는 달리 범어사는 보제루가 대웅전을 가로막고 있어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보인다.

■ ■

서울중 · 고등학교 터(址)

일제가 경희궁의 일부를 헐고 세운 경성중학교 터. 광복 후 경성중학교는 서울중 · 고등학교로 개명되었으며, 1980년 강남개발의 여파로 서초동으로 이전되었다.

■ ■

서울 구로동에 있는 일련정종 본부

13세기 기존의 불교와 일본 민간신앙이 결합해 만들어진 일련정종은 일제의 대륙침략에 앞장선 대표적인 우익집단으로 현재는 공명당이라는 종교정당까지 보유하고 있다.

■ ■

천리교 교회 전경

일본 신도에서 출발한 이 종교는 주로 부산과 경남에 터전을 두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신도교파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였다.

■ ■

일본식 건물

전형적인 일제시대 상가건물 형태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의 추녀와 창문의 구조가 일본식 모델을 보여주는 부산자갈치시장의 한 상가다.

■ ■

남포동 영도대교 주변과 건어물 도매시장

전형적인 일본식 상가로 위는 콘크리트건물, 아래는 목조 건물이다. 나무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했다.

■ ■

뾰족집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은 이 일본식 2층 주택은 단열 효과를 내기 위해 벽과 벽 사이에 황토를 채워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영도다리

전형적인 견치식 공법을 이용한 영도다리의 교각. 1934년 섬이던 영도와 부산시를 잇는 이 다리가 개통되자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한다.

■ ■

대전교도소 감시탑

1919년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정치범을 수용했던 대전교도소에는 지금 재소자의 탈옥을 막기 위해 세워진 감시탑만 남아 있다.

■ ■

신현읍사무소

작은 건물도 화강암으로 지은 사례를 보여준다.

■ ■

부산세관 첨탑

건립 당시 붉은벽돌을 구하기 어렵자 러시아에서 벽돌을 종이로 한 장씩 싸서 수입할 만큼 일제는 많은 공을 들였다.

■ ■

서대문 형무소

1907년 건립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붉은벽돌로 쌓은 담을 따라 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경북대 병원 본관

처음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양식이다. 사각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룬다.

■ ■

부산지방 기상청

선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른 일제시대 건물처럼 현관 뒤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 ■

목조 건물 정란각

일제시대 요정으로 현재도 요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1」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 ■

러일전쟁 승전비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중인 이 기념비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 ■

가덕도 일본군 지하요새

일본군은 연합군 폭격에 대비해 암벽을 파고 포탄을 보관했다.

■ ■

사령부 발상지 기념비

가덕도 포병사령부의 상륙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비로 일본군 포대 자리에 세워졌다.

■ ■

우물

선박의 식수나 보일러용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 ■

일본군 포대

가덕도 외양포에는 산 능선을 따라 일본군이 포사격 시 관측을 위해 설치한 시설들이 흩어져 있다.

■ ■

일제시대 방공호

전황이 불리해지자 1943년 12월부터 건설된 이 방공호는 총독부 요인의 피신용이었다.

■ ■

벽화 천불도 단편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에서 출토된 벽화로 흙벽에 채색되었으며, 6~7세기 작품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복희여와도

중앙아시아 투르판 아스타나 고분 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것으로 천지창조의 설화를 인물화의 형태로 묘사하고 잇으며, 7세기 작품으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재일교포 3세 정구미 씨

민단계 교포로 국내에 교포들의 애환을 소개하고 있다.

■ ■

프란치스코의 집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이 단돈 200원으로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 ■

주방에서 일하는 고사카 요시히로 수사

 

 

 

posted by 황영찬

2018-018 우리 역사는 깊다 [2]

 

 

전우용 지음

2015, 푸른역사

 

대야도서관

SB108231

 

911.06

전66ㅇ  2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오늘로 들여다본 어제

오늘이 말해주는 내일

오래지 않은 오늘로

오래지 않을 미래를 그리다

 

이 책은 100년 전과 현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살피기 위해 귀성 풍습의 기원, 예방 접종의 시작, 전등 시대의 개막, 위생 관념의 확산, 대중교통 수단의 도입 등 주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사건들을 소개하고, 성찰의 재료로 삼을 만한 요소들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때그때 날짜에 맞춰 총 60개의 주제를 선정했기 때문에 꼭지들 간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모든 꼭지를 관통한 내 문제의식은 역사란 시간 · 공간 · 인간의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라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기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무겁게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를 지냈고,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서울은 깊다》, 《현대인의 탄생》, 《한국 회사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서울의 동쪽》 등이 있다.

 

차례

 

● 책머리에


7월 18일_을축년 대홍수

인간은 자연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

7월 22일_자동차취체규칙 제정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동차, 새 가족을 얻은 대신 잃은 것들

7월 24일_광무신문지법 공포

탄압받던 언론에서 ‘한통속’이 된 언론

7월 29일_양화진에 외국인 묘역 조성

글로벌시대,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과 외국인 묘지

8월 4일_김우진, 윤심덕 현해탄 투신

자살률은 시대의 ‘우울도’ 측정하는 바로미터

8월 6일_서소문 화교들의 삶

‘외국인 혐오증’, 우리가 용납될 공간도 줄인다

8월 10일_일제, 서울 시민의 공동묘지 용산 땅을 군용지로 수용

기억에서 지워진 공동묘지 용산, 삶 주변에서 사라진 죽음

8월 12일_보건부, 무면허 의사 275명 적발

의료 민영화, ‘가난이 사형선고’인 사회를 만든다

8월 19일_한성전기회사, 전등개설예식 개최

‘불야성’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 전등, 그래도 늘 부족한 현대인의 시간

8월 20일_청계천 복개 계획 제출

복개에서 복원까지, 청계천의 역사와 인간의 변덕

8월 23일_여자정신근로령 공포

만행의 기록이 문서로 남는 경우는 드물다

8월 29일_일본, 한국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

남이 이름 지어준 대로 불리는 자, 식민지 백성

8월 31일_종로경찰서, 종로변 상점에 변소 설치 지시

민주 사회의 관리들, 다양하고 상충되는 시민들의 요구 경청하고 설득하는 자세 필요

9월 15일_추석 임시열차 증편 운행

귀성과 민족 대이동, 이제 사라질지도 모를 한국적 ‘전통문화’

9월 26일_일본 제실박물관장, 순종 황제 알현

‘빼앗은’ 나라의 박물관과 ‘빼앗긴’ 나라의 박물관

10월 1일_가로명제정위원회, 새 동명과 가로명 고시

나라의 중심가로 세종대로, 그러나 나라의 정치 철학은?

10월 7일_종두규칙 공포

전염병 예방의 시대, 예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10월 12일_대한제국 선포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에 담긴 뜻

10월 22일_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의 주역 홍범도, 그에게도 이 땅에 설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주어야

10월 23일_일본 덴노, 조선총독에게 〈교육칙어〉 하달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진 〈교육칙어〉의 군국주의 정신

10월 27일_장충단 설치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 장충단, 털어내지 못한 오욕의 흔적

11월 4일_훈민정음 반포 팔회갑 기념식 개최

‘반글’, ‘암클’에서 ‘한글’이 된 훈민정음, 지금 다시 ‘반글’이 된 건 아닌가

11월 11일_경무청, 채소 도매상 단속

물가 단속으로 민심 다독이려 한 ‘권력 주연 코미디’의 서글픈 역사

11월 17일_우정총국 개국, 우편사무 개시

우편사무 개시와 지번 부여, 모든 것을 숫자화하는 시대를 열다

11월 27일_대한제국, 정동 부근에 고층건물 신축 금지

고층화를 향한 욕망, 뒷수습은 어찌 할까

12월 3일_조청국경회담 결렬

동북아 영토분쟁, 냉철한 역사인식으로 대처해야

12월 10일_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

여의도 상공을 비행한 안창남, 한국인에게 3차원의 시야를 선물하다

12월 17일_지전 상인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명분 없는 이득 경계했던 옛 상도, 지금 우리 기업문화에 절실히 필요한 것

12월 24일_셔우드 홀, 크리스마스실 발행

유병장수有病長壽 시대, 질병과 오래 동거하면서도 불행해지지 않을 방법 찾아야

12월 30일_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민심 살피고 국민 즐겁게 하는 ‘대’라는 이름에 충실했으면


●참고문헌

●찾아보기

 

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용산 전경

 

건물의 지붕만 수면 위에 떠 있어 수상도시를 연상케 한다.

당시 수해는 기록적인 폭우가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한강변 저지대에 새 택지가 조성된 탓도 컸다.

천재는 언제나 인재와 함께 하는 법이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8쪽.

 

1909년 2월 20일자 《런던 그래픽 뉴스 London Graphic News》에 실린 삽화

 

프랑스 영사의 이탈리아제 란치아 자동차가 서울에 나타난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들고 가던 짐도 내버리고 숨기에 바빴다. …… 소와 말도

놀라서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는 설명이 부기附記되었다.

자동차가 도로의 폭군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이보다 생생히 묘사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1921년 용산 철도운동장의 취재기자석

 

<신문지법>을 근거로 한 일제의 신문 검열은 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총독 정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기사를 써봐야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고 공연히 경찰서 구경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기자들은 변죽만 울리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사의 찬미>

 

김우진과 윤심덕의 실종 후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 <사의 찬미>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사의 찬미> 가사가 수록된 레코드회사의 음반 설명글은 윤심덕을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로 소개하고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대한제국기 장성군수를 지낸 목포 부호 김성규의 맏아들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살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심덕 역시 유부남을 사랑한 것 말고도 숱한 고민을 안고 산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둘 모두 죽을 핑계보다는 살 이유가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용산에 있던 조선총독 관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한국인들에게서 거저 빼앗다시피 한

용산 공동묘지 터에 초호화판 관저를 지었다. 그가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이 된 뒤

이 건물은 조선총독 관저가 되었다. 그러나 1919년 3 · 1운동으로

하세가와가 경질된 뒤에는 이 건물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1987, 서문당, 55쪽.

 

1956년 가톨릭의대 신입생들

 

일제 강점기 남한 지역에는 1개의 의과대학, 5개의 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해방 이후 의학전문학교들이 의과대학으로 승격하고, 1954년까지 부산대, 이화여대, 가톨릭대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어 의과대학은 8곳이 되었고, 정원도 많이 늘었다.

의학 교육기관의 확장은 '가짜의사'가 발붙일 곳을 줄였다.

*출처 :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2004.

 

1900년경 한성전기회사 앞의 매표소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걸린 자리다.

'밝은 밤'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간대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전등은 출현하자마자 귀신을 쫓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출처 : 체신부, 《한국전기통신100년사》, 1985.

 

일제 강점기 청계천 수표교 주변

 

서울이 조선 왕조의 수도가 된 이래 내내 청계천은 도시 하수도였다.

도성 안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도시 산업화에 따라 독소가 개천에 흘러들면서

청계천은 경성 주민의 전염병 발병률을 높이는 '살인하천'이 되어갔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청계천 복개는 경성부 당국자뿐만 아니라 경성부민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49쪽.

 

평화시장에서 열린 청계천 복개공사 개통 기념식(1963년 12월 5일)

 

지류 복개가 시작된 1936년부터 계산하면 청계천 복개에는 무려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복원 공사는 단 3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재원이 늘어나고 기술 수준이 높아진 덕인데,

반면 시행착오를 교정할 여유는 줄어들었다.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공감포토, 사진으로 보는 오늘, 역사속의 오늘, 1960년 10월 29일.

 

일본에 도착한 전라북도 여자정신근로대원들

 

중노동에 시달리며 임금조차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선발 과정에서, 또는 이동 중에 자기 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았기에 부모들은

사윗감 재목을 따질 겨를도 없이 혼사를 서둘렀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10년 일본에서 발행된 병합 기념엽서 중 하나

 

상단 원내는 순종 이척과 메이지 무쓰히토.

지도의 붉은 색 부분에는 각각 조선과 일본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보다 뒤에 나온 같은 양식의 지도에는 일본 대신 본주, 구주, 북구주, 북해도를 써넣어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표시했지만, 한국 강점 당시에는 조선의 '국가적 지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옛 그림엽서로 본) 민족의 사진첩 Ⅳ, 개화기의 생활과 풍속》, 서문당, 2007, 176쪽.

 

1920년대 후반 종로

 

전차가 다니는 큰 길은 근대도시의 중심가로 다운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사진은 '냄새'까지 전달해주진 못한다.

도시의 외관이 '근대화'한 뒤에도 도시 공간 내부는 오랫동안

중세적 '구린내'와 '지린내'로 채워져 있었다.

*출처 :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 산하와 풍물》, 서문당, 1986, 22쪽.

 

<서울시헌장>

 

미 군정청은 1946년 8월 10일 <서울시헌장>을 공포했다.

제1장 제1조는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었다.

뒤이어 '서울특별시 설치' 법령이 시행되면서 서울은 일본의 지방 도시 중 하나로 격하된 지

36년 만에 법률적으로 수도의 지위를 회복했다.

 

1936년의 광화문통

 

중앙분리대가 현재의 광화문광장 자리를 거의 그대로 점거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쓴 한성종두사 소장 박진성

 

뒤쪽에 송아지에서 혈청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 리하르트 분쉬,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200쪽.

 

현재의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원구단

 

고종은 독자적인 천하를 상징하는 원형 제단을 짓고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편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동주최 특별전 도록, 2010, 56쪽.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기념 촬영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 백계白系 러시아군과 체코군에게서 우수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군 승리의 중요 요인이었다.

*출처 : 박도, 우당기념관 엮음,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1910년대 보통학교 어린이들의 돗자리 짜기 실습

 

<교육칙어>는 학문과 기예를 함께 강조했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는 단순 기능을 가르치는 데에만 역점을 두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Ⅳ(6판), 1991, 835쪽.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에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강령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교육칙어>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학교 수업

 

학생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교실 안의 글자는 한자와 가나뿐이었다.

일제 강점기 공교육에서 조선어 교육은 계속 축소되다가 끝내는 사라졌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Ⅳ(6판), 1991, 831쪽.

 

1900년경의 체전부

 

고깔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왼손에는 장죽을,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채 우편 행낭을 어깨에 맸다. 온화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글을 아는 사람'의 풍모가 엿보인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17쪽.

 

1910년경 간도 용정 거리

 

한국인의 간도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간도 이주자가 계속 늘어나자 엄형嚴刑으로 일관하던 정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이후 중국인 비적들의 교민 습격이 빈발하자, 교민 보호를 위해 관리와 경찰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출처 : 최석로 해설,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민족의 사진첩 Ⅱ, 민족의 뿌리 - 그때를 아십니까?》, 서문당, 1998, 27쪽.

 

추락한 비행기에서 포즈를 취하는 안창남

 

안창남은 1923년 오쿠리비행학교의 의뢰로 일본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를 추모하는

인쇄물을 공중 살포하던 중 도쿄 인근에 추락했다. 추락한 뒤에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했던 그는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30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 《역사사진》(일본) 1923년 8월호.

 

1910년대 말의 지전

 

육의전 상인들은 대개 망했지만 건물은 남았다.

조선지주식회사 설립 당시 이 건물 가액은 2만 원 정도였는데,

당시 서울 일반 주택지의 기와집 한 채 값이 300원 남짓이었다.

*출처 :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78.

 

셔우드 홀이 처음 구상한 크리스마스실 도안

 

이순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하여 일본 침략자를 물리쳤다는 내용을 부기했다.

홀이 이런 도안으로 총독부 당국에 협조를 구할 만큼 순진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출처 : 대한결핵협회,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2003.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의 대통령 관저

 

일제 강점기 이 건물을 지었을 때의 공식 명칭은 그냥 '총독 관저'였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병학사, 1997.

 

posted by 황영찬

2018-017 앵통하다 봄

 

 

임성구 시집

2016, 문학의전당

 

대야도서관

SB110690

 

811.7

시68ㅅ  43

 

시인동네 시인선 043

 

태양과 달과 별은 지는 법이 없다.

단지 어둠이 우리 곁에서 피고 지기를 매번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나의 시는,

오뉴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불판 너럭바위 위에서도

시들지 않아야 하고……

 

어둠이 싱싱하게 자라나는 골짝에선

반갑게 어둠을 받아내고 지워내면서

하늘의 씨앗을 지상에 총총 뿌려

세상을 아름답게 가꿔내야 하고……

 

상류로 향하는 달빛 속 연어들처럼

힘차게 힘차게 은유의 비늘을 반짝이며

당신께로 좀 더 가까이 가고픈

무수한 열망과 절망 사이의 황홀한 키재기.

 

임성구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94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살구나무죽비』 등이 있다.

E-mail : jaje@hanmail.net

 

시인의 말

 

누군가가 유기해서

 

척박한 땅에 자라난

 

못생긴 내 자식들아

 

네 진한 향기를 열어

 

나보다

 

신나게 고함치거라

 

파란만장을

 

웃게 하라

 

 

2005년 어느 앵통한 봄에서 다시 봄까지

임성구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눈꽃 경적을 울려라

도화역(桃花驛)

꽃물 한때

토란잎 우산

달빛 우포

바람 호루라기

방어진(方魚津)

잡초의 눈물

잡내를 없애다

일 하는 사람

삼나무 숲에 들다

노래하는 김광석

수선화 지는 날

서운암의 봄

가을 탁발(托鉢)

단풍나무 관절

초정을 읽다



제2부 깨끗한 짝사랑 같은

뱀사골의 봄

삼파귀타

봄, 산동마을

나비물

양후니 형아

부부

시(詩)

다시 낫을 들다

바다, 노래방

나무 물고기

각북(角北)에 앉아 있다

분신

고사목

차향[茶香]에 녹다

이른 아침 하늘수국

야한 생각


제3부 온몸 녹아서 꽃이 되기까지

러브체인

꽃, 다방

케냐

그 짓

나들이

앵통하다, 봄

봄 혹은 강변카페

달에게 사정(射精)하다

위양못 삼매경

에로틱 아이스바

천리향

밤꽃 여자

화인(火印)

어떤 동백 시집

잡초의 눈물 2

텍사스 에레나


제4부 공손한 절규

먹구야

공갈 연애(戀愛)

부재중이었던 그해 봄

할복(割腹)의 시(詩)

내 시의 아가리를 찢고 싶다

황소개구리 울음처럼

김수영을 읽다

잡초의 눈물 3

공손한 절규

불빛 시위대

저, 울대를 그냥

내 시로 창난젓을 담그다

잘 까분다는 것

잡초의 눈물 4

몸이 식어 간다

개 한 마리

참 어이가 없어서


제5부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샐비어 엄마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오동꽃 장의차

팔월

환승

인공세심(洗心)실험실

옻단풍

아니 기쁩니까?

42병동 먹구에게

파란 나물

문자의 궁합

시를 업은 항아리

다듬어진다는 것

묵비권에도 가시가 있다

막차 떠난 후 불시착

용담꽃 평설(評說)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 사이, 내 이름이 참으로 따뜻하게 피어 있었음을…


해설 자학(自虐)과 자존(自尊)의 굴레

        정용국(시인)

 

도화역(桃花驛)

 

오월로 뛰어가는 김천 라고 어디쯤에

복사꽃이 피었다. 흰 눈 펑펑 내리는 날

기차가 그냥 지나쳐도

손 흔드는 간이역

 

내일이면 지워질 이 역에서 쓰는 편지

반쯤 고개 내민 복사우체통 비둘기

천년을, 또 천년을 향해

눈꽃 경적 울린다

 

이른 아침 하늘수국

 

널 보면서

뭉퉁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욱한 안개 너머

소녀의 깨끗한 미소

 

한 번도

다가서지 못한

 

내 유년의 짝사랑 같은……

 

러브체인

 

허공 난간에 매달린 가난한 진물들이

 

서로를 보듬은 채 푸르게 몸을 꼰다

 

녹아서 꽃이 되기까지

 

그 꽃이 지기까지

 

앵통하다, 봄

 

우물가 앵두나무가 뽑히던 컴컴한 봄

꽃의 대중들은 못 들은 척 고개 돌린 채

잘났다 제 잘났다고 빨갛게들 떠든다

 

앵두 젖 훔쳐 먹은 달콤한 올가미들

순해서 더 푸른 달아 기도문만 외지 마라

운주사 석가모니는 왜 여직 주무시나

 

바들바들 떨며 진 한 송이 사람의 집

온몸이 녹아내린 식초 같은 절규인 양

화구구(火口丘) 앵두꽃무덤에는 재 냄새가 진동한다

 

공손한 절규

- 노숙에 든 도시

 

딱지로 오래 앉은 그 상처의 속내는

 

단 한 방울 눈물조차 될 수가 없었다

 

낮술에

젖어버린 생애가

작두를 탄다

맨발로

 

시위 못 당긴 화살처럼

방향 잃어 질척인 목숨

 

동굴 안 부러진 종유석으로 널려 있다

 

차라리

출구를 막아주오

 

저 울음의 비상구를…….

 

그때 가난은 누가 낳았을까?

 

지푸라기 바람이 대문 밖에서 불어온 날

재 발라 놋그릇 닦는 어머니가 흔들리고

 

아득한

쌀뜨물 쑥국

보글보글 끓고 있다

 

비 한 자루 골목 골목 어둠을 쓸어내던

70년대 새벽종이 두부장수로 왔다 가고

삼십 촉 농촌의 꿈은 장닭처럼 경쾌했다

 

오래된 봄 한 술 뜬 샛별아파트 두레밥상

자연 퐁퐁 거품처럼 초록세상 부푼다

 

저만치

정겨운 얼굴

쑥뜸으로 오고 있다

 

내 시의 아가리를 찢고 싶자

 

고아 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예쁜 꽃을

 

콱 찢어 뭉개고 싶다,

세상 어디 발도 못 딛게

 

상처도

빛나길 열망하는

 

이 병신 같은

새끼

 

내 시로 창난젓을 담그다

 

쿰쿰하게 잘 썩은 세상

내 창자를 모두 꺼낸다

 

소금 대신 짠 눈물 섞인

백일 잠을 깨부수고

 

뜨신 네,

밥숟가락에게

 

개좆처럼 대들다

 

불빛 시위대

 

상남동 LED등은

마귀 같은 불빛 군중

 

저 거센 비바람에도

폐부까지 찌르는 말

 

부도난

살구나무죽비

처형하라

처형하라

 

개 한 마리

 

하루 해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물녘에

 

뉘 집 개가 짖는다

 

온 마을을 뒤흔든다

 

한쪽 귀

 

담을 넘어가 보니

 

힘없는 시가 놓여 있다

 

이 빠진 일상들이 새파랗게 질려 떤다

 

틀니 같은 행간들이 발악하듯 되짖는다

 

달걀로

 

바위 치던 자음들

 

내 낭심을 물었다

 

잡초의 눈물 3

- 아름드리나무 밑 잡초에게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시 한 편을 쓰겠다고

 

햇빛도 하나 없이

긴 사색에 젖지만

 

파문 져

영양실조에 걸린

해 한 포기

달 한 포기

 

악착같이 살아보겠단 그 결심도 네 앞에선

쉬-이 꺾여 우는, 빼빼 마른 영감(靈感)이여

 

아, 제발

무릎만 꿇지 마라

한낮 개꿈도

희망이다

 

잡초의 눈물 4

- 잡초에게도 등급이 있을까

 

번지레 잘났든디

학벌 아예 좋든지

 

길도 늪도 아닌 곳에

노둣돌 놓고 바라본 하늘

 

가을날

백발 꽃잎으로 번진

저 억새의 눈물 눈물

 

뜨거운 시 되겠다고 땅웃음 짓는 뿌리의 나날

 

밤은 어찌 날마다 불청객으로 찾아오나

 

못다 핀

혈전의 밤도

맥은 아직 살아 있다

 

할복(割腹)의 시(詩)

 

1

스스로 이 장검을

푹 찔러 넣는다

 

외마디 유서들은

"욱!"하고 쓰러지고

 

식어 쓴

문장들이 뚝 뚝,

애리한 몸에

 

2

봄이

긴 여름이

내 몸을 관통해갔다

 

몸 밖으로 흘러내린

늦가을 단풍 군무

 

벼랑을

뛰어내린다

 

아, 달라붙는

흰 서리꽃

 

시(詩)

 

바람 살짝 불어와도 마음 먼저 흔들려

주름으로 웃다가 팽팽하게 젖어가는

 

우포늪

가시연 같은

실안낙조 어부 같은

 

때 되면 호령하고 때 되면 회항하는

그들의 꿈은 늘, 가시 돋친 불화살

 

가슴에

새긴 마음 한 줄

검붉게 탄 초록바다

 

잡내를 없애다

 

얼마나 많은 욕심이 썩어서 문드러진 채

방 한 켠에 자리 잡고 울었는지 모른다

진갈색 염증들의 큰 눈이

나를 먹고 있었다

 

마흔에서 오십으로 휘어지는 이 길목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한 욕심을 볕에 말린다

뽕잎을 따다 먹인다

내가 나를 먹인다

 

누에가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푸른 한낮

오십은 육십을 먹고 칠십 팔십 백세를 먹고

가벼운 저 구름 속으로

실을 뽑아 올리겠다

 

분신

 

여자의 방 빠져나온 울혈의 날들이

전조등 하나 없이 저벅저벅 어둠 사린다

어머닌 이미 강을 건너시고

빈 배에 앉아 시를 쓴다

 

둥글게 매끄럽게 살란 말씀 새기는데

툭툭 터진 실밥처럼 보풀거린 문장이

자꾸만 갓길을 가고 있다

천길 벼랑 뾰족한 길

 

곁가지는 쳐내야, 모난 돌은 다듬어야

아름드리 된다는데, 꽃빛도 환하다는데

아직도 나를 태우며 가는 길이 아득만 하다

 

잡초의 눈물

 

이 척박한 땅에서도 푸른 꿈 안 버린 널

호미로 낫으로 쳐내겠다는 마음 한 켠

비릿한 풀물의 고함 천둥처럼 번진다

 

우후죽순 돋아난 날[刃]을 벼린 이 어둠

걷어내지 못하면서 감히 널 뽑겠다니

곁가지 피워 올린 꽃도 미안해서 못 보겠다

 

씀바귀 엉겅퀴꽃 구둣발로 앉은 나비야

 

발소리를 줄여라

안 온 듯이 다녀가거라

 

햇살아

밤새 고인 천둥눈물

남김없이 먹고 가거라

 

먹구야

 

섣불리 웃지 마라

 

장마의 날

있을 거다

 

함부로 짖지도 마라

 

우는 하늘

며칠이겠나

 

시인은

웃음도 울음도

 

절체절명에

 

쏟는

거야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 사이,

내 이름이 참으로 따뜻하게 피어 있었음을……

 

갓길에 핀

풋 찔레꽃도

 

울음 매우

따뜻했네

 

가슴을 다

도려내놓고

 

빛 한 줌

들이기까지

 

우주를

오래 애돌아 와서

 

참회 눈물로

벙그네

 

42병동 먹구에게

 

부러진

갈비뼈도

터져버린

공기주머니도

 

어머니의

하늘비단

자락 자락을

다 꿰매면

 

저만치

폈다 지는 꽃

열매 한 알로

오리라

 

고사목

 

지리산

법계사 근처

산등허리 한입 물고

 

온몸으로 비를 맞는

까마귀 몇 마리

 

울지도

날지도 못해

 

우두커니

 

슬프다

 

삼파귀타*

 

바람이 불어왔다

조용히 밤도 왔다

 

어둠 밝힌 별 노래에

터져버려 아린 물집

 

달 등의

박꽃 하나가

손수건이 되어주었다

 

물풀 같은 그 여자

열여덟 필리핀 순이

 

젖은 밤을 보내놓고

풋감 떨어진 새벽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엌문을 또 연다

 

*삼파귀타 : 필리핀의 국화.

 

용담꽃 평설(評說)

 

쪽빛 하늘 구릉 모서리

시집 한 권 놓여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마음 편한 때 있나봐

정제된 꽃잎 페이지 남청 글씨 좀 봐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은 자리 가을볕 자리

나비도 읽고 가고 잠자리도 읽고 가는

주머니, 향기주머니 무지개로 넘친 꽃밭

 

눈으로 퍼 먹고 냄새로도 저어 먹는

아침 산행 보폭 따라 앙가슴 열어놓은

간결한 한 다발의 시평(詩評) 시원하게 뜨겁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