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5 슬픔의 뿌리
도종환 시집
2002, 실천문학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9641
811.6
도74슬
실천문학의 시집 142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와 섞여 숲의 일부가 되고자 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말고 그저 개나리꽃처럼 피어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쓸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살고 싶은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강물 소리를 들으며 강물 소리와 함께 조용히 깊어지고 싶었습니다. 언제쯤 그날은 올른지요.
도종환은 간곡하고 지극한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사랑은 한 여인을 향하기도 하지만 그의 품은 넓고 깊어서 그의 일터인 학교의 학생이나 고통받는 이웃을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을 두루 끌어안는다. 그가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의 사랑이 겪는 시련 때문이다. 그의 비유는 사랑을 안고 출렁이고, 그의 노래는 더 깊고 지순한 사랑을 위해 강물처럼 흘러간다.
- 최두석(시인)
도종환의 시를 읽으며 세월의 징검다리를 생각했다. 한 발 두 발 건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고 싶은 순간들…… 그의 시에는 강변 마을의 아늑한 저녁 불빛들이 깜박이기도 하고, 한 인간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스런 운명의 그림자가 스며 있기도 하고, 이웃의 희망을 위한 지순한 사랑의 열정들이 박꽃처럼 피어나기도 한다. 삶과 시, 지극히 난해하기만 한 두 세계의 진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주 순결한 바보의 영혼을 바보의 영혼을 지녔을 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으 이런 모습은 그 자체가 80년대 이후 우리 시의 한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의 시가 제시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아주 따뜻하고 자랑스럽게 밟아나갈 수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며 가슴 아파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던 시간들이 오래 있었다. 곁에서 보아 아름답지 아니한가.
- 곽재구(시인)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1984년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고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시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다.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하였다.
■ 차례
제1부
쓸쓸한 세상 / 그리운 강 / 산 너머에서 / 목련나무 / 들 끝에서 / 땅끝에서 / 풀잎 한 촉 / 자목련 / 사랑의 침묵 / 아무도 없는 별 / 너와 나 / 개울가에서 / 눈 덮인 새벽 / 나리소 / 우체통
제2부
희망의 바깥은 없다 / 초록 꽃나무 / 여백 / 덕암리 / 산을 오르며 / 아름다운 길 / 빈 교실 / 살구나무 아래서 / 범종 소리 / 겨울 휴가 / 단풍 드는 날 / 시간의 단풍 / 꽃 지는 날 / 자작나무 / 저녁 무렵
제3부
섬백리향 / 나뭇잎 꿈 / 정향나무 / 소리 / 저녁 종소리 / 개구리 소리 / 저녁노을 / 그 밤 / 꺼버린 불 / 양안치고개를 넘으며 / 훈장 / 노래 / 새소리 / 백비
제4부
저녁 열차 / 쓸쓸한 풍경 / 말사 근처 /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 자귀나무꽃을 찾아서 / 내가 좋아한 바다 / 장마 / 조장 / 무심천 / 노을 / 비선폭포 / 천지
제5부
홍의장군 곽재우 / 온달 / 운주사 항아리탑 / 꽃소식 / 개나리꽃 / 새의 사랑 / 꽃재 / 코스모스 꽃밭 / 종례 시간 / 방학하는 날 / 개나리꽃 / 깃털 하나 / 사자 서커스 / 그날 밤 / 꽃피우기 / 독도
해설 / 유성호
후기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그리운 강
존 메이스필드의 「그리운 바다」의 운을 빌려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해일이 되어 가까운 마을부터 휩쓸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차갑고 거대한 물로 덮어버린 뒤
물보라를 날리며 배 한 척을 저어나가는 날이
한 번쯤 있었으면 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서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바다가 아니라 쏘가리 치리 동자개 몇 마리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는 강으로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나운 물살이 아니라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다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을 따라 흐르고 싶다
너무 많은 갈매기 가마우지 떼가 한꺼번에 내려앉고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바다가 아니라
내게 와 쉬고 싶은 몇 마리 새들과도
얼마든지 외롭지 않을 강으로 가고 싶다
은백색 물고기 떼를 거느려 남지나해에서
동해까지 거슬러오르는 힘찬 유영이 아름다운 것도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강 마을에도 어린 시절부터 내게 길이 되어주던
별이 머리 위에 뜨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호젓한 바람 불어오리니 아무래도
나는 다시 강으로 가야겠다
깃털 하나
출근길 차창에 흰 조각들이 날아와 부딪친다
눈발인가 종잇조각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빠르게 창 옆을 스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그러다 만난 대형 트럭 몇 대
칸칸이 쭈그리고 않은 닭들의 빼곡한 눈동자를 본다
멀어져 가는 흐린 하늘과 숲의 나무들 위로 날려보내는
이 지상에서 지녔던 육신의 짧은 흔적
그것마저 빗줄기와 바람에 날려 자취 없어진 뒤에
남아 있을까 말까 한 영혼의 마지막 깃털 하나씩
허공에 날려보내며 무심히 옮겨가는 목숨들을 본다
한번 제대로 날아보지 못한 채
황망히 돌아가는 무수한 비상의 꿈들을 본다
노을
광대한 옥수수밭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맨손으로 일군 땅 위에 금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옥수수밭 옆에 서너 살짜리 여윈 아이를 업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 아기엄마를 보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아이를 낳아서
얼마나 힘들게 키웠을까
혼자 그 생각을 했다
고난의 시절을 함께 걸어오지 않은
나는 진정 이들의 벗인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하는 이들과
험난한 길 함께하지 않은
나는 이들의 형제인가
그 생각을 했다
오늘 이렇게 손잡고 웃지만
내일도 함께 웃으며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벗인가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았다
평양으로 가는 길
폐허의 하늘 위에 뜨거운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방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들 끝에서
울면서 조시를 쓰던 날들은 가고
다시는 조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머리띠를 다잡아 묶던 날들도 가고
우리 사랑 헛되지 않았는데
꽃도 열매도 사라져 우리 곁에 없고
돌아보면 빈손을 흔드는
몇 개의 물푸레나무, 나뭇잎들
우리 청춘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바쳐
내 가장 소중한 것들 아낌없이 다 바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뜨거운 날들은 가고
잘못 걸어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나 지은 듯 고개 꺾고 서 있는
들 끝의 패랭이꽃, 패랭이꽃들
저녁 열차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이쪽에 앉아
기차가 지나가고 기적 소리까지 다 들을 건너간 뒤에도
오랫동안 붉게 물들어 있는 저녁 하늘 바라보았지요
서로 몸을 기대고 앉아 바람 속에 머리칼을 날리다
잡고 있던 손을 식어가는 볼에 가만히 대어보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입술이 스치는
당신과의 아름다운 입맞춤을 생각했습니다
열차의 불빛 속에 실려 새벽까지 함께 가는
당신과의 따뜻한 연애를 꿈꾸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빈자리에 저녁 바람이 불고
머물 곳 찾지 못한 새들이 하늘 건너 날아가고
당신과 함께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이 세상을
어둠이 걸어오는 이 세상의 하늘을 바라보다
혼자 돌아왔어요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
저녁 열차들이 몇 번 더 지나가고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시간의 쇠바퀴 소리
뒤로한 채 쓸쓸히 돌아왔어요
쓸쓸한 풍경
쓸쓸한 지 오래되었다
들 끝의 미루나무 한 그루
내 안에 혼자 서 있은 지
오래되었다
나뭇잎 무수히 떨리는 소리로
낯선 산기슭 떠도는 지
오래되었다
언덕의 나무들을 만나도
그 중 쓸쓸한 풍경만 만나고
강줄기를 따라 가다가도
시린 저녁 물빛 옆에서만
오래오래 머물렀다
서산 너머로 달이 지듯
소리 없이 사랑도 저물면서
풍경의 안에서고 밖에서고
쓸쓸한 지 오래되었다
꽃 지는 날
슬프지만 꽃은 집니다
흐르는 강물에 실려 아름답던 날은 가고
바람 불어 우리 살에도 소리 없이 금이 갑니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고자 하던 그대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대에게 꽃 지는 날이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대 이기고 지고 또 지기 바랍니다
햇살로 충만한 날이 영원하지 않듯이
절망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지를 하늘로 당차게 뻗는 날만이 아니라
모진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찢겨진 꽃들로 처참하던 날들이
당신을 더욱 깊게 할 것입니다
슬프지만 피었던 꽃은 반드시 집니다
그러나 상처와 아픔도 아름다운 삶의 일부입니다
겨울 휴가
그날은 마침 대학 친구들과 중국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시집간 조카가 어려운 콘도 이용권이 당첨되었다고 홀로 있는 제 아버지 생일날이기도 하니 두 집이 함께 휴가 가자고 제안을 해 와서 난생 처음 스키장을 가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가족들과 함께 가는 게 그동안의 미안함을 더는 일이겠다 싶어 그리 가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날은 또 선생님들 겨울 연수가 잡혀 있는 날이기도 하고 초임교사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전부 모이는 날인데 꼭 나와야 한다는 전화도 있었고 글 쓰는 이 몇이서 등산 가자는 연락도 왔다 그날이 무슨 길 떠나기 좋은 길일인가 싶었다
이리저리 미안하지만 모르는 척 짐을 싸기로 했는데 전날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루 종일 속이 거북하더니 당일날 아침엔 기어코 탈이 나서 그만 집을 나설 수가 없게 되었다 집사람과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집에서 쓰러져 누워 죽도록 앓았다 하루 낮 하루 밤을 먹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 채 앓다가 창 밖 세찬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통증이 지나가고 난 뒤에 홀로 맞이하는 쓸쓸함 많은 관계가 끊어진 채 홀로 앓고 있는 순간의 편안함 넉넉하게 외로운 이 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가 그 생각이 들었다 아픔과 함께 찾아오는 차고 적막한 한순간을 며칠 더 기온이 내려가다 추위가 잦아질 때쯤 다시 폭설이 내리리라 하는데 쓰러져 누운 채 저 혼자 텅텅 비어가는 이 겨울 휴가를
양안치 고개를 넘으며
양안치는 적수공권으로 고향 떠난 아버지 찾아 열몇살 어린 나이에 내가 혼자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며 처음 만난 고개였다 백마령 넘고 목행과 목계 지날 때까지도 겨울 들녘과 나루터 감싸안고 돌아 흐르는 강물이 아름다워 참을 만했는데 소태재 넘으면서 온몸을 조여오는 바람에 몸이 덜커덕덜커덕 소리를 내며 떨렸다 돌멩이를 만지고 있는 듯 딱딱하게 얼어가는 발 발이 시려 발가락 꼼지락거릴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고개 옆에는 밤새 쌓인 눈에 큰 소나무 가지들이 뚝뚝 부러져 있었다 소리고 없고 무게도 없는 것이 작은 입김에도 금방 흩어져 날아가 버리는 것이 모여 단단한 소나무 가지를 꺾는 걸 처음 보았다 눈 돌리면 아득한 낭떠러지 그때부터 고개를 넘을 때면 몸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양안치보다 더 험한 큰양안치고개 ㄴ넘어야 을씨년스러운 도시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낯선 많은 풍경을 만나고 헤어지며 파산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 동안 혼자 참고 혼자 견디고 혼자 낯선 시간을 찾아 들어가는 일에는 익숙하였지만 세상의 익숙하지 못하고 사람에 익숙하지 못한 채 세상의 몇 발짝 뒤에서 그림자처럼 혼자 어두어져 제 몸을 흔들어대곤 하였다
양안치를 넘은 것이 내 인생에 거센 바람 몰아치는 많은 고개가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는 첫 여행이란 걸 그땐 몰랐다 어렵게 고개를 넘고 나면 또 고개를 만나고 그 고개 다 넘어서 만나는 것 또한 낯설고 차가운 풍경 경계의 눈초리 늦추지 않는 시선 새로 만나는 쓸쓸함과 눈발처럼 날아와 언 몸을 때리는 가난 그리고 끝없는 바람 그런 것들이 될 것임을 그땐 몰랐다 내 생의 남은 날들이 그럴 것임을 그땐 몰랐다
그러나 고개 앞에 서면 언제나 큰 싸움을 앞에 둔 사람처럼 주먹이 쥐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연한 자세로 돌아서고 몸이 먼저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곳을 떠도는 눈발처럼 허망하고 시리고 쓸쓸한 것들도 저희끼리 모여 단단해지며 나뭇가지를 꺾던 기억이 떠 오르고 낯선 곳에도 언제나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이 잇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정향나무
물러나는가 싶더니 황사가 또 하늘을 덮습니다
세월 흘러도 늘 푸른 염결과 지조를 지닌 그대여
나는 그대가 이 봄에는 정향나무처럼
사람 사는 동네에도 뿌리내리기를 바랍니다
설한풍에도 변치 않던 그대 굳건함 믿는 만큼
훈풍 속에서 짙고 부드러운 정향나무처럼 살아도
그대 변치 않을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소나무는 지나치게 우뚝하고 단호하여 근처에
다른 수목들이 함께 살기 힘겨워합니다
없는 듯 있으면서 강한 향기 지닌 정향나무는
사람의 마을에 내려와 먼지 속에 살면서도
저 있는 곳을 향기롭게 바꿀 줄 압니다
그런 나무처럼 당신도 낮고 깊은 향기로
사람들 사이에 꽃피기 바랍니다
지금 쓸쓸하고 허전하지만 우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그대들 때문임을 압니다
그대들이 골목골목 꽃피어 세상이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 속으로 내려온 철쭉도 민들레
조팝나무도 내심으론 다 기뻐할 것입니다
자작 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자 서커스
조명이 켜지자 일곱 마리 사자가 차례차례
걸어나왔다 조련사 존 캄파롱고의 왼손 채찍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사자들은 정해진 의자에
앉거나 모양을 지어 질서 있게 움직였다
조련사의 손짓이 바낄 때마다
뛰어넘기를 할 차례인지 불붙은 구멍 사이를
빠져나가야 하는지 용하게 알아차렸다
어떤 때는 아직도 용맹스러운 이빨과
짐승의 목을 죄던 발짓이 남아 있는 듯 포효했지만
그것도 훈련받은 몸짓이었다
캄파롱고가 꼬리를 번쩍 들어올리면
불알을 달랑달랑 흔들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박수가 쏟아질 때마다 나는
무대 뒤 그들의 철창을 떠올렸다
먹이와 채찍으로 저렇게 길들여지기까지
얼마나 굶주렸을 것인가 그 생각을 했다
철창을 쥐고 흔들어보다 얼마나 절망했을 것인가
길들여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제 없다고
서서히 죽어가는 야성의 크기와 바꾸는
몇 덩이의 고기를 찢어 입에 넣으며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은 배를 채우고
짝짓기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얼마나 자신을 달랬을 것인가
작아지자고 고양이처럼 순해지자고 들판의 냄새와
빛나는 질주의 기억과 거칠 것 없던 목소리를
지워버리자고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비굴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살아 있어야 한다고
얼마나 몸부림쳤을 것인가 철창 안에서
나뭇잎 꿈
나뭇잎은 사월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뭉글뭉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별
아무도 없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달맞이꽃이 피지 않는 별에선
해바라기도 함께 피어나지 않고
폭풍우와 해일이 없는 곳에선
등 푸른 물고기도 그대의 애인도
살 수 없다
때로는 화산이 터져 불줄기가
온 땅을 휩쓸고 지나고
그대를 미워하는 마음 산을 덮어도
미움과 사랑과 용서의 긴 밤이 없는 곳에선
반딧불이 한 마리도 살 수 없다
때로는 빗줄기가 마을을 다 덮고도 남았는데
어느 날은 물 한 방울 만날 수 없어
목마름으로 쓰러져도
그 물로 인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별에선
그대도 나도 살 수 없다
낙엽이 지고 산불에
산맥의 허리가 다 타들어가도
외로운 긴 밤과 기다림의 새벽이 있어서
우리가 이 별에서 사는 것이다
덕암리
개나리꽃 참나리꽃 조팝나무 산철쭉
잘나고 못난 꽃들이 아니라
얼굴빛과 향기가 서로 다른 꽃들이 모여
동산을 환하게 가꿉니다
소나무 전나무 오리나무 가문비나무
저만 홀로 우뚝 솟은 나무가 아니라
특별히 잘난 데 없는 그만그만한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고 산을 만듭니다
뒷산이 앞산의 편안한 배경이 되어주고
그 뒷산이 또 다가와 은은한 그림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풍경은 앞산 뒷산이 함께 만듭니다
덕암리 고즈넉한 산줄기처럼
하찮고 버려지고 쓸모 없어 보이는
풀포기 돌멩이 잡목 몇 그루가 모여
천 년을 다시 살아갈 언덕이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드는 집터가 됩니다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아름다운 길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너와 함께 간 그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 옆으로 영롱한 음표들을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며 함께 꽃잎 같은 발자국을 눈 위에 찍으며
넘어야 할 고개 앞에 서서 다시 네 손을 잡는다
쓰러지지 않으며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눈보라 진눈깨비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나리소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우체통
그들이 사랑을 시작한 강가에는
키가 작은 빠알간 우체통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섶다리를 건너갔다 건너오며 사랑이 익어가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하늘을 넘어 남자의 편지가 가고
저녁 물소리로 잠든 창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답장이
밤마다 강을 건너가는 것을 우체통은 알고 있었습니다
두껍게 쌓인 눈이 오래도록 녹지 않던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이 강가의 우체통 근처에서 만나
깊고 맑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아주 아주 따뜻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을
우체통은 저녁노을과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맑은 눈빛이 점점
소년처럼 변해가는 남자의 얼굴과 소녀 같은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의 가슴에
남자가 달아주는 반짝이는 강 햇살 한 무더기를
우체통도 가슴 뜨겁게 바라보았습니다
둘은 우체통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랑하였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랑이 그렇게 비밀스럽게 시작하는 거라서
더욱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날의 사랑이 가장 맑고 지순한 사람을 만드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사랑조차도 그들끼린
빛나고 소중한 어떤 것이라서 보석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이 귀한 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착하고 너그럽게 만들기 때문이란 걸 우체통은
두 사람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산수유 열매처럼 붉어진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에 우체통은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리곤 했지만 돌아서서는
그 소리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체통은 가슴이 늘 벅차올랐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우체통은
그들이 줄 수 없는 걸 주며 견딜 수 없는 걸 견디게 하는
사랑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던 목소리를
오래도록 잊지 않았습니다
이별보다는 그리움에 젖은 편지가 다시 또
남자의 창을 향해 새 떼처럼 날아가고
산 그림자를 안은 강물처럼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투명해진 남자의 믿음과 뜨거움이 담긴 목소리를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또박또박 편지지에 심어가는
아름다운 사랑이 해와 달처럼 이어지길 빌었습니다
제발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편지가 우체통
바닥 깊은 곳에 던져지는 일이 없기를
한 사람의 편지만이 끝없이 쌓이고 또 쌓이는
일이 없기를 우체통은 강물에 빌고 또 빌었습니다
풀잎 한 촉
그래 우리도 풀잎이야
우리도 바람 앞에 쪼개지는 한 촉의 풀잎이야
목마름 때문에 몸이 먼저 쓰러지고
쓰러져 광활한 들 밖으로 잘려나간
손톱 같은 육신이야
사랑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괴로움이었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도 윤회의 바람 속에 갇힌 풀잎이야
그래 사실은 보잘것없는 풀잎이었다고
먼저 말해 목숨이 있는 동안 바람은 늘 불어왔어
이 세상 시작하던 날부터 우리 사라진 뒤까지
그렇게 불어갈 거야 당당했지만
고통스러운 때가 많았어
버리지 못하는 것들로 내 안은 가득했어
수없이 버리고 또 비우며 왔다 했는데
뿌리에서 물오르듯 다시 가득 차 있곤 했어
못 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에 이렇게
더 심하게 흔들리는 거야
빈 하늘에 그대 얼굴 오를 때마다
맹세하고 외치곤 했지만 나는 들었어
내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그런 날도 말을 안 했던 거야
두려움이었을까 하루에도 열두 번 바람에 끌려
넘어지면서 감추었던 거야
감추면서 흙 위에 찍은 몇 개의 발자국과 그림자로
조심스럽게 여기까지 왔어
쓰러져 쓰러져 견딜 수 없을 때는
쓰러져 흙 위에 있는 그대로 쓰러져
풀잎, 아주 잘 포장된 풀 하나의 목숨이야
우리도 이 화선지 같은 우주 위에
먹 없는 붓 한 자국의 흔적이야
서천으로 흘러드는 억겁의 강물 위에 떨어진
눈물 한 올이야
그 눈물 떨어지는 동안 배어 있던 반짝임이었어
작은 것들이 남고 그리고 사라지는 거야
아름다웠어 겁내지 마 버려 다시 버리는 거야
물에 풀리는 물감처럼밤이 두려움으로
점점 잿빛이 되어가는 제 빛깔 허공에 녹여 버리듯이
새벽을 향해 물안개 강 언덕을 떠나듯이
그렇게 네 안에서 너를 누르던 것들
힘주고 있던 것들 허세의 어깨뼈 풀어내는 거야
가는 거야 기다리고 잇어 그도 네가 그렇게 오길
내일 아침은 내일에 맡기고
쓰러져, 쓰러져, 견딜 수 없을 때는
이 세상에 이제는 정말 일어서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바닥 끝까지
쓰러져, 쓰러져,
눈 덮인 새벽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많이 용서해 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지난가을 풀벌레들 사랑의 음성은 전해주고
몸은 가려준 풀숲처럼 나도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것들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많이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내겐 강물 같고 남에겐 서릿발 같은
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지워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저 눈처럼
덮어주는 일이 풍요로운 모습이 되고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꺼버린 불
어둠보다 무서운 것은 안개다 새벽이 안개와 함께 올 줄은 몰랐다 발을 딛기도 전 길은 이미 안개에 녹아 없어지고 내릴 곳을 찾지 못한 발은 허공을 떠다니다 지워지곤 했다 기다리는 시간에 지팡이도 놓치고 중심도 잃은 사람들은 다시 제 안 깊은 곳으로 돌아가거나 눈에 보이는 한치 앞에다 몸을 던졌다
낮엔 안개 걷히지 않고 밤은 단순하던 빛깔을 자꾸만 바꾸는데 등을 켜고 어두운 시대의 들판을 건너가려다 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어둠은 어두운 대로 맞닥뜨리고 바람은 바람대로 맞서기로 했다 무명의 캄캄한 생을 건너기 위해 촛불 아래서 밤마다 뒤적이던 것들을 덮기로 했다
길을 찾겠다는 생각마저 버리고 현란한 어둠을 어둠 그대로 응시하기로 했다 길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쓰러진 우리 몸이 곧 누군가 밟고 가는 길이 되는 날을 생각했다 길은 언제나 소리 없이 올 것이므로 길을 찾지 못한다 해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가 길을 잃었어도 길은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내가 좋아한 바다
젊은 날 내가 좋아한 바다는 바람이 차고 쓸쓸한 겨울 바다였다 어촌 사람들의 가난한 흔적만 남고 어지러운 발자국들은 말끔히 씻겨나간 작고 조용한 바다였다
해송을 끼고 활처럼 굽은 해안선 허리를 따라 걸어갔다 오는 동안 육신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몇 마리 마른 물고기가 널려 있는 집 곁을 지나거나 뱃전에 가만히 흔들리며 앉아 있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지는 바다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크고 억센 바다와 만났다 함께 간 사람들은 싸워 이겨야 할 바다라고 말했다 배를 몰고 멀리까지 나가 파도와 맞서기도 하고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거나 그물까지 잃어버리고 빈 배로 떠도는 일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것이 훌륭한 선장이 되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 배를 다루는 기술은 늘었지만 바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더 많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다를 찾아 나서지만 오늘도 나는 바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다
옛날 그 자리에는 없어도 어딘가에 있을 바다를 만나려면 바다에 맞서려 하지 말고 먼저 바다를 좋아해야 하는데 바다를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되려고 해야 하는데 내가 먼저 작고 조용해져야 하는데
천지
백두산 천지가 무섭다
저토록 시퍼런 정신
한 점 티끌 없는 모습이 무섭다
백암봉 장군봉 백운봉 록명봉
열여섯 봉우리 산줄기가 무섭다
저 가파른 정신
흔들림 없는 굳센 자태가 무섭다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힘을
넉넉한 아름다움으로 감싸안는 산과 물이
■ 후기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와 섞여 숲의 일부가 되고자 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말고
그저 개나리꽃처럼 피어 있고자 했습니다.
그늘진 곳과 햇볕 잘 드는 곳을 가리지 않고
본래 살던 곳과 옮겨 심은 곳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개나리꽃같이만 살고 싶었습니다.
오지의 비탈이든 먼지 많은 도시이든 가리지 않고 뿌리내려
그곳을 환하게 바꿀 수 있다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바람에 거칠게 흔들렸으며
어느 날은 심하게 상처받았고
어느 날은 실패하였으며
어느 날은 등에 진 짐이 무거워 허리를 펼 수가 없었고
어느 날은 기쁨과 설렘으로 가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쓸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살고 싶은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강물 소리를 들으며
강물 소리와 함께 조용히 깊어지고 싶었습니다.
언제쯤 그날은 올른지요.
2002년 여름
도종환
'내가 읽은 책들 > 2013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066-1 그림을 본다는 것 (0) | 2013.06.25 |
---|---|
2013-066 그림을 본다는 것 (0) | 2013.06.21 |
2013-064 부석사 (0) | 2013.06.15 |
2013-063 서울 산 가는 길 (0) | 2013.06.15 |
2013-062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0) | 2013.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