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황영찬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4/03'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4.03.05 2014-029 무대 미술 감상법
  2. 2014.03.05 2014-027-2 오직 독서뿐
  3. 2014.03.04 2014-028 無로부터의 우주
  4. 2014.03.03 2014-027-1 오직 독서뿐
  5. 2014.03.03 2014-027 오직 독서뿐

2014-029 무대 미술 감상법

 

글, 사진 / 최상철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26

 

082

빛12ㄷ  204

 

빛깔있는 책들 204

 

최상철-------------------------------------------------------------------------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 1982년부터 「햄릿과 오레스테스」를 시작으로 「햄릿 시리즈 3 · 4 · 5」, 「Taxi, taxi」, 「라쇼몽」, 「Emperor Jones」, 「상화와 상화」, 「끽다거」 등 주로 표현주의 계열의 연극 무대와 「묵향」, 「비상」, 「혁명시대」, 「사랑과 죽음」 등 현대 무용의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1991년, 1995년 「르라하 콰드리엔나레」, 「'93 Asia Scenography 초대전」, 「서울 천도 600주년 기념 '94무대 미술가 8인 초대전」에 출품한 경력이 있다. 또한 「극공간에 있어 아돌프 아피아의 심미성 원리에 대하여」라는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각종 논문 10여 편을 발표했다. 현재는 OISTAT(Organization for International Scenographers, Theatre Architects & Technicians) 한국 이사로 활동중이며 계원조형예술전문대학 조형과(공간연출 전공)의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차례|

 

책 머리에

극장과 무대 미술

현대 무대 미술의 흐름

한국 무대 미술의 현황, 가능성

우리의 지금

참고 문헌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를 위한 아피아의 무대 스케치  유리판 위에 손가락으로 불규칙한 색을 칠해 배경에 투사해 '번개, 구름' 등을 표현하려 했던 의도가 보인다. 1892년.

「파르지팔」 중 '숲 속의 빈터'를 위한 아피아의 무대 스케치  잘라낸 막과 틈새 조명으로 숲 속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1909년.

「율동 공간」을 위한 아피아의 무대 스케치  다양한 높이의 연단과 경사길, 계단, 벽들로 구성되어 '율동 공간'이라고 표제 붙인 그의 스케치들은 바그너의 음악극을 위해 그렸던 상징적이며 신낭만주의적인 그림과는 달리 건축적인 정격이 보인다. 1909년.(위, 아래)

「파르지팔」을 위한 아피아의 무대 스케치  1908년.

「율동 공간」을 위한 아피아의 무대 스케치  1910년.

「디도와 아에네아스」  크레이그의 최초 연출작. 크레이그의 스케치는 어떻게 하면 공간을 아름답고, 단순한 색채 효과로 극적 상상력을 극대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1905년.

「계단들」  '역동적인 연극'의 기본 구상으로 인간, 공간 그리고 광선의 장면적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크레이그의 무대 스케치. 1905년.

「움직이는 장면들」  무대의 높낮이를 다양하게 변환 가능하게 그렸던 것으로, 어떤 속도나 방향으로도 공간을 변화시켜 무대 스스로가 극적 환경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창안이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07년.

입센의 「북극으로의 출정」을 위한 크레이그의 무대 스케치  크레이그는 어떻게 공간을 꾸밈없이 아름답게 그리고 조명 효과로 공간을 살아 있게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였으며 그러한 암시 속에서 새롭고 자유로운 공간의 힘을 발견하였다. 1903년.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위한 펜 드로잉  비어즐리. 아르 누보 양식의 주된 특징은 오브레이 비어즐리, 윌리엄 모리스의 그림과 같은 독창적인 선과 세기말적 선정성이 두드러진 긴 곡선, 단정한 비례, 화초처럼 섬약한 형태미를 강조하여 모든 대상체들을 근본적으로 양식화하는 데에 있다. 1892년.

「기관차 발레」를 위한 데페로의 무대 스케치  물질과 기계라는 유물적 사관에 따라 발레리나들을 기계적이며 전형적인 사물로 취급, 극화시키고 있다. 1918년.

「부정한 아내와 관대한 남편」을 위한 포포바의 무대  루보우 포포바는 연기자들에게 일종의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미학적 차원의 물질적 생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22년.

트레짜코브의 「소란의 땅」을 위한 포포바의 무대 스케치  조립식으로 비탈진 바닥, 층계, 회전 풍차 등을 설치하여 남편의 질투 어린 육체 언어를 급회전하는 회전 풍차를 통하여 표현하였고 이동 가능한 침대, 발코니 등을 설치하여 연기자의 감정에 따라 변화하게끔 구성하였다. 1923년.

알렉산더 폰 수호보 - 코발린의 희극 「타렐킨의 죽음」을 위한 스테파노바의 무대 장치  최소한의 수단을 써서 최고의 표현력에 도달하려는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구성적인 무대 장치의 개발을 촉진하였다. 모스크바. 1922년.

「목요일이란 남자」  알렉산더 베스닌. 모스크바. 1923년.

「신랑이 발가벗긴 신부」  마르셀 뒤샹. 유채, 유리와 납철사, 인간이라는 물체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뒤샹은 이 작품에서 추상 - 기계적인 형상, 젊은이 - 기계들을 그렸다. 1923년.

「옷걸이」 만 레이. 여성적인 부분을 칠로 된 막대로 연결하였다. 1920년.

「장례식」  게오르그 그로츠. 유화. 독일 베를린 - 다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사회적인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전쟁 불구자는 다다의 작품에 강박적으로 등장한다. 1917년.

「우리 시대의 정신」  라울 하우스만. 입체 콜라주.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독일인들의 얼빠진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매우 특별한 메타포를 갖고 있다. 1921년.

움직이는 구조물 초안  모흘리 나기. 모흘리 나기는 1923년부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금속 공방의 마이스터로 있으면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꾀하였던 만능 예술가이다. 1928년.

「인간과 형상」 중 '인간과 공간'과 '자아와 공간'에 관한 도해  오스카 슐레머. 슈라이어의 후계자가 된 슐레머는 1923년부터 6년 동안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을 때까지 무대 작업과 실험 무대를 지휘하였다. 1924년.

「3조 발레」 3부 및 12장을 위한 등장 인물 계획  오스카 슐레머. 슈투트가르트. 1부 레몬처럼 노란 무대에서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발레, 2부 장밋빛 무대에서 장중하게 이루어지는 엄숙한 발레, 3부 검은 무대에서 신비하고 환상적인 발레. 1924년~26년.

「3조 발레」 중의 등장 인물  오스카 슐레머. 1925년.

「3조 발레」  오스카 슐레머. 슐레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 무용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3이란 숫자는 집합의 시작과, 단수인 나와 이원성의 상반을 의미한다. 배우들의 대칭적이고 비대칭적인 독특한 조형적 의상들은 인체에 어떤 물리력을 주며 이러한 힘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조직화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장대 무용(1927년, 위) · 공간 무용(1927년, 가운데) · 바퀴 무용(1928~29년, 아래)

「무대 컴포지션」  칸딘스키. 음악을 들으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형상들을 작품에 응용하였다. 기하학적인 모습을 한 인간들이 나오는 두 개의 시퀸스를 추상적으로 처리한 이 그림은, 거의 20년 동안 작업하였던 「컴포지션」 시리즈의 결과이기도 하다. 1928년.

「형태, 색채, 광선 그리고 음으로 된 놀이」를 위한 무대 초안  로만 글레멘스. 데시우. 단색과 줄친 평면들이 정확한 계산과 계량에 따라서 역동적이고 구성적인 기능을 하게끔 계획된 것이다. 1929년.

크레네크의 「조니는 연주한다」를 위한 무대 초안  로만 클레멘스. 데사우. 이 연극에서는 차갑고 감동이 배제된 건축 구조를 원용하기도 하였다. 1928년.

「해변의 아인슈타인」  로버트 윌슨. 베니스. 1976년.

「아침의 재판(The Greatday in the Morning)」  로버트 윌슨. 파리, 198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아돌프 아피아. 1892년.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  패트리스 체리우, 1988년.

원각사  우리의 극장사는 1902년 로마 콜로세움을 본떠 만든 원각사로부터 시작된다.

「파우스트」 최연호. 유작, 1996년.

 

 

 

 

posted by 황영찬

2014-027-2 오직 독서뿐

 

박지원朴趾源(1737~1805)

조선 후기의 문인, 실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이른바 북학파의 리더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한때 홍국영의 위해를 피해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에 은거햇다. 1780년 삼종형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에 참여해서, 열하까지 다녀왔다. 그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과 『열하일기』는 늘 뜨거운 쟁점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문체반정 당시 정조가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지목해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을 만큼 당대의 문풍이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책에 실은 글은 그가 여러 척독에서 한 책 읽기에 관한 언급과, 선비의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설명한 「원사原士」에서 간추렸다. 그의 글은 사유의 깊은 힘과 함께 생동하는 비유로 읽는 이의 의표를 찌른다. 사물에 대한 기호학적 사유와 인식론의 바탕 아래 펼쳐지는 묵직한 생각들이 음미할 만하다. 공부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는 일반적 내용인데도 간결하고 힘이 있다.

 

마을의 꼬맹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 싫어함을 야단치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가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글자 만든 창힐(蒼頡)을 기죽일 만합니다.

里中孺子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餒煞蒼頡.

- 박지원(朴趾源), 『창애에게 답함(答蒼厓)』3

자네는 신령한 지각과 재빠른 깨달음으로 남에게 건방을 떨거나 사물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네. 저들이 만약 얼마간의 신령한 깨달음이 있다고 하세.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설령 신령한 깨달음이 없다 해도 건방 떨고 업신여김이 내게 이익 될 게 무어겠나. 우리는 냄새 나는 가죽 부대 속에 겨우 몇 글자 감싸 둔 것이 남보다 조금 많은 데 지나지 않다네. 저 매미는 나무에서 울고, 지렁이는 땅 구멍에서 울지. 이 또한 시 읊고 책 읽는 소리가 아닐 줄 어찌 알겠는가.

足下無以靈覺機悟, 驕人而蔑物. 彼若亦有一部靈悟, 豈不自羞, 若無靈覺, 驕蔑何益? 吾輩臭皮帒中, 裹得幾箇字, 不過稍多於人耳. 彼蟬噪於樹, 蚓嗚於竅, 亦安知非誦詩讀書之聲耶?

- 박지원(朴趾源), 「박제가에게(與楚幘)」

독서를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기로는 포희(庖犧)씨만 한 이가 없다. 그 정신과 뜻은 천지만물을 포괄 망라하고 만물에 흩어져 있다. 이것은 다만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되지 않은 글일 뿐이다.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부비며 그 좀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한다.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와 묽은 술을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저 허공 속을 울며 나는 것은 얼마나 살아 숨 쉬는가? 그런데 이를 적막하게 ‘조(鳥)’란 한 글자로 말살시켜 버리면, 빛깔도 볼 수 없고 그 모습과 소리도 찾을 수가 없다. 이 어찌 마을 제사에 나아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위에 새겨진 새와 다르겠는가. 어떤 이는 그것이 너무 평범하므로 산뜻하게 바꾼다 하여 ‘금(禽)’자로 바꾼다. 이것은 책 읽고 글 짓는 자의 잘못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쳐 말했다.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이로구나.”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 抹摋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朝起, 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叫曰 :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釆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 박지원, 「경지에게(答京之)」2

자네, 재주에 공손하고 부드러운 바탕을 갖추고, 총명하고 신중한 자질을 갖추었겠다, 게다가 나이는 젊고 기력은 굳세니, 어찌 문사(文詞)의 말단에다 그저 심력을 쏟고 실지도 없는 데다 시간을 함부로 쓴단 말인가? ‘독서궁리(讀書窮理)’, 즉 책 읽고 이치를 따진다는 네 글자는 늙은 서생의 진부한 얘기요, 남을 권면하는 상투적 얘기일 뿐이라네. 하지만 대저 지금 실지에 공력을 쏟고 본령을 목표로 삼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안정되고 기운이 돌아가 쉴 곳이 있게 될 걸세. 인의(仁義)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잠깐 만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신중히 따져서 분명하게 분별하는 것은 절로 차례가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고 나을 지를 덮어놓고 논할 수는 없지 않겠나. 수명을 기르고 집안의 도리를 온전히 하는 것은 반드시 독서궁리란 네 글자가 큰 실마리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는 못할 걸세.

以子之才, 旣有溫恭豈弟之質, 兼之以聰明粹謹之資, 加以年富力强, 則豈可徒費心力於文詞之末, 枉用工夫於無實之地哉. 讀書竆理四字, 此是老生朽譚而勉人例語. 然大抵及今, 下工於實地, 究竟於本領, 則自然心有所底定, 氣有所歸宿矣. 仁精義熟, 非可造次, 愼思明辨, 自有次第, 則功效得失, 未可先論, 而其爲養壽命全家道, 則未必非此爲之大端也.

- 박지원(朴趾源), 「어떤 이에게(與人)」

옛사람 중에 책 읽기를 잘한 사람이 있는데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지은 이가 있으니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그 사람이다. 왜 그럴까? 공명선이 증자에게 배울 때 세 해 동안이나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제가 선생님께서 가정에서 생활할 때 생활하시는 것을 보았고, 선생님께서 손님 접대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선생님께서 조정에 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웠지만 아직 능히 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도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은 병법에 나오지 않는다. 여러 장수들이 승복하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러자 한신이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있는 것인데, 제군들이 살피지 못한 것일 뿐이다. 병법에 ‘죽을 땅에 둔 뒤에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古之人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 有善爲文者, 淮陰侯是已. 何者? 公明宣學於曾子 , 三年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 “宣見夫子之居庭, 見夫子之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宣安敢不學而處夫子之門乎?” 背水置陣, 不見於法, 諸將之不服固也. 乃淮陰侯則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 兵法不曰‘置之死地而後生乎?’”

- 박지원, 「초정집서(楚亭集序)」 중에서

그대가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글만 읽고 마음은 읽지 못했구려.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 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甞讀其心耳. 何也? 讀項羽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手, 猶然疑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 박지원, 「경지에게 답하다(答京之 之三)」 중에서

군자의 아름다운 말도 간혹 뉘우침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 착한 행실도 때로 허물이 있을 수가 있다. 독서에 이르러서는 1년 내내 해도 뉘우칠 일이 없고, 백 사람이 말미암아도 허물이 없다. 명분과 법이 비록 훌륭해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맛이 좋아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더욱 유익하고,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는 것은 독서뿐이다.

君子嘉言, 或不免乎有悔, 善行, 或不免乎有咎. 至於讀書也, 終歲爲之而無悔, 百人由之而無咎. 名法雖好, 久則弊生, 芻豢雖美, 多則害生. 逾多而逾益, 彌久而無弊者, 其惟讀書乎!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어린이가 책을 읽으면 요망하게 되지 않는다. 늙은이가 책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졌다 하여 변하지도 않고, 천해졌다 해서 멋대로 굴지도 않는다. 어진 자라고 넉넉한 법이 없고, 부족한 자에게 무익한 경우도 없다. 내가 집이 가난한데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집이 부유해도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幼者讀書而不爲妖, 老者讀書而不爲耄. 貴而不替, 賤而不僭. 賢者不爲有餘, 不肖者不爲無益. 吾聞家貧好讀書, 未聞家富而好讀書者.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독서의 방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고 욕심내지 말고, 속히 읽으려고도 하지 말라. 몇 줄을 읽을지 정하고 횟수를 정해 놓고 날마다 읽어 나가라. 뜻이 정밀해지고 의미가 또렷해지며, 음과 뜻이 익숙해져서 저절로 외워지면 그다음으로 넘어간다. 글자를 익숙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어렵거나 까다롭게 여겨서도 안 된다. 난삽해 하지도 말고, 읽다가 그만두거나 건너뛰지도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고, 높낮이를 제대로 해야 한다. 소리가 입에 머물되 웅얼거려서는 안 되고, 눈으로 따라가되 그저 흘려보내도 안 된다. 몸을 흔들며 읽더라도 어지러우면 못쓴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도 말고, 입을 쪽쪽 빨아도 안 된다.

讀書之法, 莫善於課, 莫不善於拕. 毋貪多, 無欲速. 定行限遍, 惟日之及, 旨精義明, 音濃意熟, 自然成誦. 乃第其次. 字毋習, 字毋易, 字毋蹶, 字毋滑, 字毋澁, 字毋倒, 字毋傍. 必正其音, 必得其高低. 口留而毋凝, 目送而毋流, 身搖而不亂. 眉毋皺, 肩毋搦, 口毋咂.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닭이 울면 일어나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간밤에 읽었던 것을 복습해서 가만히 다시금 헤아려 본다.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지, 의미가 분명치 않은 점은 없는지, 글자를 잘못 읽지는 않았는지를 마음에 점검해 보고 몸에 체득해 보아, 스스로 얻은 점이 있거든 기뻐하며 잊지 말아야 한다.

鷄鳴而起, 闔眼跪坐, 溫其宿誦, 潛復繹之. 其旨有未暢歟, 其義有未融歟, 字不訛歟, 驗之於心, 體之於身, 其有自得, 喜而不忘.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등불을 켜고 옷을 갖춰 입는다. 엄숙하고 공경스런 자세로 책상 앞에 앉는다. 이어 다음에 읽을 새 글을 묵묵히 침잠하여 살핀다. 몇 줄마다 단락을 끊고, 서산(書算)은 치워 딴 곳에 둔다. 잠심해서 훈고(訓詁)를 살피고, 주석과 풀이를 꼼꼼히 점검한다. 같고 다름을 검토하고, 음과 뜻을 환히 익힌다. 평온한 마음으로 뜻을 너그럽게 하되, 멋대로 천착하거나 억지로 의문을 내서는 안 된다. 모르는 부분이 있더라도 되풀이해서 살펴야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點燈畢服, 肅敬對丌. 乃次新篇, 默而沈翫, 數行斷章. 闔算移置, 潛究訓詁, 細閱註疏, 辨其同異, 曉其音義. 平心恕意, 勿私鑿, 勿强疑, 其有不得者, 反覆之而勿置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무릇 선비는 아래로는 농부나 물건 만드는 사람과 나란하고, 위로는 왕공과 벗이 된다. 지위로는 차등이 없고, 덕으로는 우아한 일에 속한다. 한 선비가 책을 읽으면 은택이 사해에 미치고, 공덕이 만세에 드리운다. 『주역』은 이렇게 말한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어 천하가 빛나고 밝다.”

독서한 선비를 두고 말한 것이다.

夫士下列農工, 上友王公. 以位則無等也, 以德則雅事也. 一士讀書, 澤及四海, 功垂萬世. 易曰 : "見龍在田, 天下文明." 其謂讀書之士乎!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선비 아닌 사람이 없지만 능히 바른 자가 드물다.

누구나 책을 읽지만 능히 잘하는 자는 드물다.

何莫非士也, 鮮有能雅者也, 孰不讀書也, 鮮有能善者也.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이른바 책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구두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다. 뜻을 잘 풀이하고, 얘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所謂善讀書者, 非善其聲音也, 非善其句讀也, 非善解其旨義也, 非善於談說也.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비록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충성되고 신의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책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한 것이다. 비록 권모와 지략과 경륜의 꾀가 있어도 책을 읽지 않으면 다 주먹구구로 맞춘 것이다. 이는 내가 말하는 우아한 선비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우아한 선비란 뜻은 어린아이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다. 1년 내내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는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사모함을 오로지 한다. 처녀는 수줍지만 지킴이 확고하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거리낄 것이 없음은 오직 문 닫고 책 읽는 것뿐이다.

雖有孝悌忠信之人, 非讀書, 皆私智鑿也, 雖有權畧經綸之術, 非讀書, 皆拳數中也, 非吾所謂雅士也. 吾所謂雅士者, 志如嬰兒, 貌若處子, 終年閉其戶而讀書也. 嬰兒雖弱, 其慕專也, 處子雖拙, 其守確也. 仰不愧天, 俯不怍人, 其惟閉戶而讀書乎!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책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글재주를 풍부하게 하려는 걸까? 글로 널리 기림을 받으려는 것인가? 강학하며 도를 논하는 것은 독서의 일이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은 강학의 실지다. 예악형정(禮樂刑政)은 강학의 쓰임이다. 책을 읽고도 실용을 알지 못하는 것은 강학이라 할 수 없다. 강학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실용이다. 그저 고상하게 성명(性命)이나 얘기하고 이기(理氣)나 자세히 따지면서 저마다 자기 생각만 주장해서 굳이 하나로 돌아가게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즈음에 혈기가 드러나, 이기를 겨우 분변한다 해도 성정이 먼저 어긋나고 만다. 이런 강학은 해롭다.

夫讀書者, 將以何爲也? 將以富文術乎? 將以博文譽乎? 講學論道, 讀書之事也. 孝悌忠信, 講學之實也, 禮樂刑政, 講學之用也. 讀書而不知實用者, 非講學也. 所貴乎講學者, 爲其實用也. 若復高談性命, 極辨理氣, 各主己見, 務欲歸一, 談辨之際, 血氣爲用, 理氣纔辨, 性情先乖. 此講學害之也.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책을 읽어 무언가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뜻이다. 1년 내내 책을 읽고도 배움이 나아가지 않는 것은 사사로운 뜻이 해치기 때문이다. 제자백가를 드나들고 경전(經傳)을 고증하고 근거를 찾아, 배운 것을 시험이나 하려 들고 공리(功利)를 다급하게 여겨 사사로운 뜻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것이다.

讀書而求有爲者, 皆私意也. 終歲讀書而學不進者, 私意害之也. 出入百家, 攷據經傳, 欲試其所學, 急於功利, 不勝其私意者, 讀書害之也.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천착을 미워하는 것은 사사로운 뜻 때문이다. 바야흐로 천착할 때는 경전(經傳)으로 증거로 삼지 않음이 없다. 천착하다가 막히면 또 경전으로 이를 되짚어 보지 않음이 없다. 계속 되짚어 보다가 경전을 고치고 주석을 바꾼 뒤에야 마음이 시원해진다.

所惡於鑿者, 爲其私意也. 方其鑿也, 未甞不以經傳證之, 鑿而有窒, 又未甞不以經傳反之. 反之不已, 改經易註而後, 快於心.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군자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독서뿐이다. 그런 까닭에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않으면 얼굴이 우아하지 않고, 말이 고아하지 않으며, 갈팡질팡 몸이 기댈 곳이 없고, 안절부절 마음 둘 곳이 없어진다. 바둑 장기 두고 술이나 마시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 한 것이겠는가?

君子終其身, 不可一日而廢者, 其惟讀書乎! 故士一日而不讀書, 面目不雅, 語言不雅, 倀倀乎身無所依, 伈伈乎心無所適. 博奕飮酒, 初豈樂爲哉?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자제가 오만 방탕해서 빈둥대며 멋대로 굴어 안 하는 짓이 없다가도 곁에 책 읽는 사람이 있으면 머쓱해서 일어나고 만다. 자제가 비록 총명하고 준수해도 독서를 싫어하지 않음이 없고, 부인네가 비록 농사를 짓더라도 책 읽는 소리 듣기를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子弟敖宕, 閒居肆志, 無所不爲, 旁有讀書者, 憮然而作矣. 子弟雖聰明俊秀, 莫不厭其讀書, 雖婦人夏畦, 莫不喜聞其讀書.

- 박지원, 「원사(原士)」 중에서

 

이덕무李德懋(1741~1793)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영처嬰處 등 여러 이름을 썼다.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한 해박한 식견과 정감 넘치는 개성적 문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을 만큼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한 차례 연행을 다녀왔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함께 사가四家로 병칭되었고, 네 사람의 시집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저서에 『청장관전서』가 있다. 『도서집성』, 『국조보감』, 『대전회통』, 『규장각지』, 『홍문관지』, 『규장전운奎章全韻』 등 많은 서적의 정리 · 교감에 참여하였다.

『청장관전서』 중에 수록된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연암 박지원이 몇 차례 빌려 가서 참고하고 인용했을 만큼 알찬 내용이 가득하다. 또 아동을 위한 학습서로 지은 『사소절士小節』의 「교습敎習」 가운데 독서에 관한 내용을 이 책에서 간추렸다. 구체적인 예시와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실례를 많이 들어 적용에 도움이 된다. 특히 어린이 독서 교육에서 지침으로 삼을 만한 내용이 많다.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할 것 없이 첫 권은 색깔이 반드시 손때가 묻어 더럽다. 심지어 썩거나 떨어져 나가 읽기조차 어렵다. 비록 세월이 오래된 것이라도 둘째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는 씻은 듯이 말끔하다. 나는 매번 세상 선비들이 오래 버티는 마음이 없는 것을 탄식하곤 한다. 무릇 책은 첫 권을 시험 삼아 읽을 때는 단단히 각오하고 읽을 것 같이 하다가, 오래잖아 게을러 싫증내고 포기해 버린다. 그래서 둘째 권 이하로는 눈길을 주거나 손길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첫 권과 끝 권의 새롭고 낡은 것이 완전히 다른 물건 같다.

쥐 오줌에 더럽혀지지 않으면 반드시 좀벌레의 배나 불린다. 서적이 재앙을 입음이 지극하다 하겠다. 또 근래 어떤 집에서 『비해(裨海)』란 책 한 질을 보았다. 모두 반질반질 해서 손이 한번도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선실지(宣室志)』나 『유양잡조(酉陽雜俎)』, 『이문총록(異聞總錄)』 같은 책은 모두 기름 때가 묻고 손때에 절어 마치 굴뚝 속에서 꺼낸 것 같았다. 이 몇 종류의 책은 모두 귀신이나 꿈 이야기, 또는 괴상한 이야기를 기록해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반드시 여기에 힘을 쏟는다. 식견은 없으면서 경솔하게 기이한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록 잗단 일이기는 해도 내가 일찍이 개탄하였다.

無論經史子集, 首卷色必垢暗, 甚至敗剝不堪讀. 雖年久者, 自次卷以下至于末卷, 其新如拭. 余每嘆世儒無耐久心, 凡書嘗試讀首卷, 若可牢確者. 而匪久懶厭, 仍拋之. 自第二以下, 則未嘗轉眼觸手. 故首尾之新舊, 判爲異物. 不汚鼠溺, 則必資蠧飽, 書籍之困厄極矣. 且近見誰家稗海一帙, 皆赫赫若手未嘗觸者, 而獨宣室志, 酉陽雜俎, 異聞総錄等書, 皆油暈垢蝕, 若拔自烟窰中. 此數書, 盡說鬼譚夢, 記災錄異, 故人必力焉. 坐於無識見, 而徑好奇故也. 雖曰細薄, 余嘗慨恨.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사람은 각자 재능이 있는 곳에 마음을 쏟게 마련이다. 『사기(史記)』란 책이 있다고 치자. 똑같이 한번 읽어도, 경륜에 힘쓰는 자는 일의 성공과 실패,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자취만 보고 나머지는 모른다. 문장에 힘쓰는 자는 문장을 구성하는 편장자구(篇章字句)의 방법만 살피고 나머지는 알지 못한다.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기이한 구절로 대구 맞추는 대목만 찾아서 따오고 기교를 섭렵하는 것만 보고, 그 밖의 것은 아예 모른다. 이것은 아랫 길 중에서도 아랫 길이다. 그밖의 자집(子集)이나 소설책도 또한 모두 이와 같다. 비록 한 방면으로 통한다 해도 대가는 아니다. 큰 선비는 안목이 몹시 멀어 나란히 행하고 함께 나아가 조금도 군색한 데가 없다. 우뚝하고 기운찬 것이 마치 대를 쪼개거나 벽돌을 쌓는 것 같을 뿐이다.

人各於才之局處焉專心. 若以一部史記言之. 同一讀也, 務經綸者, 所見無非成敗治亂之跡, 其它不知也. 力文章者, 所見無非篇章字句之法, 其它不知也. 業科擧者, 所見無非尋摘奇偶, 涉獵奇巧, 尤不知其它也. 是下之下也. 一切子集稗家, 亦皆如此. 雖有一條之通, 而非大方也. 鴻儒則眼目甚長, 幷行齊進, 不少窘束. 磊磊落落, 如破竹建瓴耳.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군자가 한가롭게 지내며 일이 없을 때 책을 읽지 않고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작게는 쿨쿨 잠만 자거나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재물과 여색에 힘쏟게 된다. 아아! 나는 무엇을 할까? 책을 읽을 뿐이다.

君子閑居無事, 不讀書, 復何爲? 不然, 小則昏睡博奕, 大則誚謗人物, 經營財色. 嗚呼! 吾何爲哉? 讀書而已.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독서는 정신을 기쁘게 함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은 받아들여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해박해지는 것이다.

讀書者怡神爲上, 其次受用, 其次淹博.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근래 일과를 정해놓고 독서를 하다 보니 네 가지 유익한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유익한 점은 정밀하고 미묘한 내용을 널리 알게 된다거나, 옛 일에 대해 통달함, 뜻과 재주에 보탬이 된다는 것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첫째, 대략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배나 낭랑해져서,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흐르고 돌아 몸 속이 편안해지니 추위를 잊기에 충분하다. 셋째, 이런저런 근심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이 글자에만 쏠려 마음이 이치와 하나가 된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넷째, 병으로 기침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시원스레 통해 아무 걸림이 없어져서 기침소리도 문득 멎는다. 덮지도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으면 마음이 아주 화평해지고 몸도 건강하다. 여기에 더해 등불은 밝고 창은 환한데 훌륭한 책이 앞에 놓여 있고 책상과 자리가 깨끗하기까지 하다면 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하물며 뜻이 높고 재주가 뛰어난데다, 나이가 젊고 기운마저 굳센 사람이라면 책을 읽지 않고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무릇 나의 동지들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近日覺日課讀書, 有四益. 廣博精微, 通達古昔, 資輔志才不與焉. 一, 畧略飢時讀, 聲倍朗潤, 味其理趣, 不覺其飢也. 二, 稍寒時讀, 氣隨聲而流轉, 軆內適暢, 足以忘寒. 三, 憂慮惱心時讀, 眼與字投, 心與理湊, 千思萬念, 有時消除. 四, 病咳時讀, 氣通不觸, 漱聲頓已也. 如其不暖不寒不飢不飽, 心地和悅, 軆幹康安, 加之以燈紅窓白, 書帙精覈, 几席明潔, 則可不勝其讀矣. 况兼之以志高才達, 年少氣健之子, 不讀復何爲哉? 凡吾同志, 勉之勉之.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날마다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일찍 일어나 마시고 먹은 뒤 책을 읽으면 입이 둔해 잘 읽지 못한다. 먹지 않고 읽으면 배나 매끄럽고 빨리 읽는다. 매번 시험해봐도 번번이 그랬다. 내 생각에 음식의 기운이 청명한 기운을 막아서 그런 것인가 싶다.

日授童子書, 早起飮啖而讀, 則口鈍不成讀, 不以則倍利快. 屢試屢然. 意食氣壅滯淸明之氣而然也.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지난번에 손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문 나서면 모두가 욕됨 뿐이고, 책을 펴면 부끄러움 아님이 없네.” 내가 말했다. “모두 명언이구려. 하지만 낱알 같이 작은 것에 마음을 모우고, 두터운 땅을 밟고도 빠질까봐 두려워하듯 한다면 무슨 욕됨이 있겠소? 비록 생각지 않은 욕됨이 있더라도 내 스스로 취한 것은 아니질 않소. 책을 읽되 매번 실천에 마음을 두어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고, 바깥 사물의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소. 다만 날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점이 있다면 독서가 아니고는 사람이 되지 못하니 공부를 할 뿐이지요.”

往有客咄咄曰: “出門都是辱, 開卷無非羞.”余曰: “儘名言耳. 然撮心于粒, 踏厚地如恐陷, 則何辱之有? 雖有橫來之辱, 非吾自取也. 讀書每以宲踐爲心, 浹洽骨髓, 不爲皮膜以外物事, 則何羞之有? 但日以少有羞焉, 則非讀書也, 不成人也, 爲工夫耳.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평소 가슴 속에 답답하게 쌓인 기운이 있으면 이따금 까닭 모를 슬픔이 일어나 답답해 한숨을 쉬게 된다네. 「이소(離騷)」와 「구변(九辨)」을 소리 내서 외우면 감촉됨이 몇 배나 더하지. 그래서 평상의 마음으로 돌아와 『논어』를 읽으면 그 기운이 반드시 가라앉곤 했는데, 이 같은 경험이 여러 차례였다네. 그제서야 성인의 기상이 천년 뒤에까지 객기를 이처럼 변화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내가 자못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네. 집안의 젊은이로 비분강개한 사람이 있었네. 밤중에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 육수부(陸秀夫)가 송나라 마지막 임금인 상흥제(祥興帝: 남송의 마지막 임금 조병(趙昺))를 업고 바다로 들어가던 일에 미쳤지. 집안 젊은이가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솟아 줄줄 흐르지 뭔가. 나 또한 한동안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네. 그래서 시험 삼아 『논어』 중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겠다고 한 대목을 소리내서 외우고 나서야 겨우 두 사람의 말과 웃음이 평소처럼 되더군.”

김회묵(金晦默)이 말했다.

“형의 말이 어쩌면 내 마음과 이다지도 꼭 같은가? 나 또한 이 같은 기운이 있다오. 매번 벌레가 울고 달이 환할 때가 되면 감격함이 깊어지곤 하지요. 지난 해에 북한산에 올라가 『논어』를 읽을 때였소. 눈 온 뒤에 동쪽 성문에 올랐지요. 첩첩한 묏부리가 우뚝 솟았는데 눈 빛이 눈에 어지러웠소. 뜻이 몹시 엄숙해지더니 갑자기 즐겁지가 않았더랬소. 급히 돌아와 『논어』를 읽자 그제야 겨우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더군요. 형의 말이 과연 그러하오. 예전 여백공(呂伯恭)도 기개가 넘쳐 굳세고 사나웠는데, 병중에 『논어』를 읽고는 비로소 기질을 변화했다더군요. 옛날부터도 이와 같았을 뿐입니다.”

余曰: “平日胸中, 有磈磊氣, 時時作無故之悲, 而噓唏之極. 誦離騷九辨, 尤感觸層疊. 平心讀論語. 其氣必按下, 如此者數. 始知聖人氣象, 千載之下, 能点化客氣如此也. 僕得效頗深. 宗人有年少而慷慨者, 與僕夜語, 語次到陸秀夫負宋帝入海事, 宗人淚忽湧于眼. 僕亦惻愴良久. 試誦曾點浴乎沂風乎舞雩章畢, 二人者始言笑自若也.” 希文曰: “兄言何其與余心甚合也. 僕亦有此氣. 每當蟲吟月白之時, 感激者深. 去年上北漢山中, 讀論語, 雪後登東城門. 疊嶂峨峨, 雪色眩眼. 意甚蕭然, 忽忽不樂. 急歸讀論語, 始帖然恬靜矣. 兄言果爾也. 昔呂伯恭多氣凌厲, 病中讀論語, 始變化氣質. 自古爾爾也.”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학동인 구씨(具氏)의 아들 궁기(宮其)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네 나이가 올해로 벌써 열 다섯 살이다. 무릇 사람의 나이가 15, 16세가 되면 어른의 틀거지가 7,8분 이상 갖추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 네 행동은 다닐 때는 차분하지 못하고, 앉으면 몸을 흔들어댄다. 말하고 웃을 때도 절제가 없다. 책 읽기는 몹시 거친데, 그마저도 싫어한다. 대저 총명은 지극히 정채롭고 꽃다운 것이다. 가령 총명이란 것에 귀신이 붙어 네가 꾸준히 부지런히 힘들게 공부하는 것을 보게 한다면 네 뜻을 어여쁘게 여겨 네 가슴 속에 찾아와 머물 것이다. 네가 만약 술 취한 사람처럼 경박하고 미친 사람처럼 게으르다면 비록 잠깐 네 가슴 속에 왔다가도 마땅히 네게 침을 뱉고 급히 날아서 떠나갈 것이다. 너는 뺨에 살이 붙고 눈이 우묵하데다 미간 마저 넓으니 무슨 일인들 할 수가 없겠느냐? 사람들이 혹 네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사람 됨이 저와 같으니 굶지는 않겠군.’이라고 칭찬한다고 하자. 네가 이 말을 자부해서 독서를 두 번째 일로 삼을 테냐? 비록 너로 하여금 옛날의 부자인 도주(陶朱)와 석숭(石崇)처럼 황금을 울타리 사이에 버릴 정도가 된다고 해도, 뱃속에 문자가 하나도 없다면 너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반드시 비루하고 더럽게 여기는 마음이 더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음에 좋겠느냐? 도주와 석숭인들 어찌 일찍이 책을 읽지 않았겠느냐? 내가 너를 아껴서 훈계하는 것이니, 너는 힘쓰도록 해라.”

誡學童具氏子宮其曰: “汝今年已十五歲矣. 大凡人子十五六歲時節, 長者田地已七八分作基. 今汝行不安詳, 坐則搖身, 言笑無節, 讀書甚麤且厭. 夫聦明至精英者也. 假使聦明有神, 見汝若勤苦不已, 憐其志而來栖於汝胷中矣. 汝若輕浮懈怠如醉夫如狂子. 雖暫栖於胷中, 當唾汝而急飛去矣. 汝豊頰深目, 眉間濶, 何事不可作也. 人或奇汝貌, 譽之曰: ‘爲人如彼, 終不餓也.’ 汝自負此言, 而以讀書爲第二件事耶? 雖使汝爲陶朱石崇, 黃金棄籓籬間, 腹中無一文字, 人人對汝, 必增鄙吝之心. 汝其安於意乎? 陶朱石崇, 何嘗不讀書乎. 吾愛汝而戒汝, 汝其勉矣.”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선비가 독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도 반드시 성현의 일과 행실과 훈계를 생각해서, 이를 끌어와 준칙으로 삼아 전도됨이 없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속인은 한 글자도 읽지 않는지라 지향점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런 것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된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과거 시험 보는 글에다 배운 글귀를 써먹을 뿐, 제 몸에다가는 한번도 시험해서 그 효험을 보려들지 않는다. 몹시 슬픈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고서를 여러 번 읽어 입만 열면 인용하고 끌어오는데 그 마음가짐을 살펴보면 비루하고 아첨 잘하며 교활하고 속임수를 잘 쓴다. 앞서 인용하여 끌어온 것은 단지 말을 꾸며대는 꺼리로 삼은 것일 뿐이다. 이같은 독서는 비록 많이 한다한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책을 읽고서 부드럽게 아첨하는 자를 사람들은 누구나 아끼니 아, 답답하다.

士貴讀書者, 一言語一動作, 必思聖賢事行訓戒, 引以爲準則, 可無顚倒. 俗人不讀一字, 專無指向, 恣情而行. 此不足道. 至於素稱多讀書者, 專用章句於科擧之文, 自家身上不一試而受其驗效, 可哀之甚也. 亦或有熟讀古書, 言言引據, 考其心術, 則鄙諂狡詐, 向所引據, 只爲粉飾口角之資, 此等讀書雖多奚以哉? 讀書而軟媚者, 人莫不愛之, 噫!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말과 행동이 몸과 마음 위를 향해서 기대어 돌아오지 않는다면, 늙도록 그저 허공을 나꿔채는 격이 되고 만다. 모두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한 연유이니, 참으로 맹랑한 사람이다.

言論行事, 不向身心上依歸, 則到老只是拏攫虛空. 皆由於不善讀書, 眞孟浪人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하흠(賀欽)이 말했다.

“오늘날 독서하는 사람은 단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소득이 하나도 없다.”

賀欽曰 : “今人讀書者, 只是不信, 故一無所得.”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책을 읽고 몸을 닦음에 으뜸으로 삼을 표준이 없다면 보람을 얻기가 힘들다. 강학하여 배우고, 살펴 성찰하며, 머금어 함양하고, 밟아 실천에 옮긴다. 이 네 가지는 지행(知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포괄하는 바가 대단히 넓다.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학문하는 방법이었다.

讀書修身, 若無宗準, 不足以見其效. 講學省察涵養踐履, 此於知行, 其爲目甚要, 而所包甚廣, 尤庵先生爲學之方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가 말했다. “‘입은 육예(六藝)의 글을 읊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손은 백가의 글을 들추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일에 대해 기록한 글은 반드시 그 요점을 드러내고, 주장을 엮은 것은 반드시 그 깊은 뜻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한유(韓愈)가 독서에 대해 직접 말한 것이다. 요점은 기사(紀事)와 찬언(纂言) 두 구절에 놓인다. 무릇 책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이 마침내 손으로 써보는 것만은 못하다. 대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라가게 마련이다. 스무 번을 보고 외운다 해도 한 차례 베껴 써보는 효과만 못하다. 하물며 반드시 그 요점을 드러내려면 일을 살핌에 자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깊은 뜻을 이끌어내려면 이치를 따져 생각함이 정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이 속에서 다시금 능히 같고 다른 것을 고찰해서 옳고 그름을 갈라 판단하고, 의심나는 것을 직접 기록하고 변론을 덧붙인다면 앎이 더욱 깊어지고 마음을 붙임도 더욱 굳세게 될 것이다.”이상은 이광지가 자제에게 과제로 준 초서(鈔書)의 방법이다.

李榕村光地曰 : “口不絶吟於六藝之文, 手不停披於百家之篇. 紀事者, 必提其要, 纂言者, 必鉤其玄. 此文公自言讀書事也. 其要却在紀事纂言兩句. 凡書目過口過. 終不如手過. 盖手動則心必隨之, 雖覽誦二十遍, 不如鈔撮一次之功多也. 況必提其要, 則閱事不容不詳, 必鉤其玄, 則思理不容不精. 若此中, 更能考究同異, 剖斷是非, 而自記所疑, 附以辨論, 則濬知愈深, 着心愈牢矣.” 右榕村課子弟鈔書之法.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의심스런 일이나 의심나는 글자가 있거든 그 즉시 유서(類書)나 자서(字書)를 살펴 점검해 보아라.

有疑事疑字, 卽時考檢類書字書.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책을 읽다가 좋은 뜻을 알게 되면 반드시 함께 공부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알려주어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이 해야 한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공은 늙어 흰 머리가 되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총명한 젊은이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흔쾌히 손수 쌓여있는 책을 뒤적여서 옛 사람의 아름다운 일과 뜻이 담긴 말을 찾아 읊조리며 강론하고, 너무너무 기뻐하며 당부해마지 않았다. 내가 한차례 뵐 적마다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곤 했다.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의 남은 풍도를 볼 수가 있었다.

讀書識得好義, 必樂告同人, 猶恐不及. 嘐嘐齋金公老白首, 好學不倦. 每逢聰明年少, 必欣然手檢積書, 窮尋古人美事旨言, 諷詠講論, 媚媚不厭, 申申不已. 予每一謁, 虛往實歸, 農巖三淵, 遺風可挹.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책을 볼 때는 무엇보다 먼저 서문(序文)과 범례(凡例)를 보고, 누가 지었는지, 교정은 누가 본 것인지, 권수는 얼마나 되고 목록은 몇 조목이나 되는지를 살펴 체재를 구별해야 한다. 멋대로 어지럽게 읽고는 스스로 박학하다 여겨서는 안 된다.

看書, 先看序及凡例著書人參校人卷帙幾何, 目錄幾條, 別其體裁. 不可鹵莽胡亂, 自命博學.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책을 볼 때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 말라. 손톱으로 줄을 긋지도 말라. 책장을 접어 보던 곳을 표시해도 안 된다. 책머리를 둘둘 말아도 안 된다. 책 표면을 문지르지도 말라. 땀난 손으로 받아 읽지도 말라. 책을 베지 말고, 팔꿈치로 괴어도 안 된다. 책 위에 술병을 얹어도 안 된다. 청소하는 곳에서 책을 펴지도 말아라. 책을 보며 졸다가 어깨나 다리 사이에 떨궈 접히게 해서도 안 된다. 책을 던지지도 말고, 등불 심지를 돋우거나 머리 긁던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겨서도 안 된다. 힘을 주어 사납게 책장을 넘기지도 말고, 먼지털이처럼 창과 벽에 휘둘러 쳐도 안 된다.

看書, 勿涎指揭葉, 勿以爪劃行, 勿摺葉以標方看, 勿捲書腦, 勿揉書面, 勿以汗手承而讀之, 勿枕書, 勿以肚凭書, 勿以書覆酒缸, 勿開書於掃塵處, 勿看書引睡, 墮摺於肩肱間, 勿擲書, 勿以挑燈搔首之指翻葉, 勿用力猛翻葉, 勿揮撲窓壁以拂塵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주명여(周明璵)가 말했다.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않으면 또한 자리에다 하늘이 낸 물건을 마구 없애는 짓이다. 두루 보아 널리 섭렵하는 것은 여유롭게 노니는 것과 같다.”

왕승건(王僧虔)이 자식을 경계하여 말했다.

“예전에 역사에 뜻이 있어 『삼국지』를 가져다가 책상 머리에 1백 일이나 놓아 두었지만 대충대충 보아 넘겨 그 가리키는 뜻의 귀추를 분변하지 못했다. 온 종일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 셈이다. 남은 네 속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황산곡(黃山谷)이 단돈례(檀敦禮)에게 대답했다.

“『한서(漢書)』는 읽기에 가장 좋다. 다만 권질의 차례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 한 시대의 일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해야만 저자인 반고(班固)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했다.

“배우는 자가 책을 읽을 때 능히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다 읽고 나서 그만두는 경우가 적다.”

학사(學士) 하섭(何涉)은 책상 위를 보면 책이 다만 한 권 뿐이었다. 한 권을 끝까지 다 읽기 전에 다른 책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왕구산(王緱山)은 책을 읽을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지런히 교정을 보았다. 비록 수백 권 안에 있는 지극히 세밀한 풀이까지 한 글자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독서란 입신(立身)과 비슷하다. 본말이 있어야만 하니, 구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책장 위에 있는 책 몇 권을 잠깐만에 대충 들쳐보고 문득 싫증을 내서 던져 버린다면 거칠고 지리멸렬해져서 앞서 읽은 것은 잊어버리고, 뒤에 읽은 것은 놓치게 된다. 대체 학문에 무슨 도움을 받겠는가? 그저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놀다가 뜻을 잃게 되는 것일 뿐이다.”

周明璵曰 : “積書不讀, 亦座暴殄, 汎覽博涉, 等於漫遊.” 王僧虔戒子云 : “往年有意於史, 取三國誌, 置床頭百日, 復徒業, 曾未辨其指歸, 終日自欺欺人. 人不受汝欺也.” 山谷答檀敦禮 : “漢書最好讀. 然須依卷帙先後, 字字讀過, 使一代事, 參錯在胸中, 便爲不負班固”. 溫公言 : “ 學者于書, 少能從第一卷讀到卷末止.” 見何涉學士案上惟一書, 未終卷誓不他讀. 王緱山每讀書, 自首至尾, 吃吃丹鉛, 雖數百卷中苛細箋註, 不輕放一字, 曰 : “ 讀書與立身相似. 要須有本末, 非可苟而已也. 今架上數冊稍遊其藩, 輒厭倦棄去, 鹵莽滅裂, 忘前失後, 何曾受學問之益? 直玩物喪志耳.”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남의 집의 책을 점검해보니, 첫 권은 반드시 낡고 더러운데, 둘째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는 손 한번 대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선비의 뜻이 처음에는 부지런 하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짐을 알 수가 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은 책을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그 사람이 돌려줄 때 종이에 보프라기가 일지 않았으면 반드시 읽지 않은 것을 나무라며 다시 주곤 했으므로 그 사람이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빌려갔다가 읽지 않고는 꾸지람 듣는 것을 꺼려 책을 밟거나 그 위에 드러누워 낡고 더러워지게 한 다음에 돌려주기도 했다. 이는 특히나 어른의 후의를 알지 못하는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다.

檢人家書帙, 首卷必壞汗, 而自第二卷至于末卷, 新鮮若手未觸者, 士志之始勤而終怠, 可知也. 同春堂宋先生, 書籍借人, 人或還之, 而紙不生毛, 則必責其不讀, 更與之, 其人不得不讀之. 有一人借書不讀, 憚其呵責, 踏臥卷上, 使之壞汗, 始還之, 此又乖舛, 不知長者厚誼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 한꺼번에 여러 줄씩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이 조금 읽고 금세 외우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둔한 사람에게 여러 줄을 가르치는 것은 약한 말에게 무거운 것을 지우는 것과 같다. 어찌 먼데까지 다다를 이치가 있겠는가? 글은 적은 분량을 익숙하게 읽어 뜻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처럼 한다면 비록 둔해서 잘 외우지 못해도 용서해주는 것이 옳다. 그저 여러 번 읽기만 하고 잘 외우지 못하면, 뜻을 더해 그 외우는 것을 감독하여 살피면 된다.

授小兒書, 切忌多行. 聰敏者, 少讀善誦, 不是好品, 使鈍者多行, 猶弱馬負重, 豈有致遠之理? 書貴少行熟讀知義. 若如此, 則雖鈍而不善誦, 怒之可也. 虛算而不善誦, 加意督察其誦, 可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칠 때 번다하게 말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모름지기 그 재주와 품성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상세하거나 간략하게 풀이해 주어야 한다. 어린 아이가 어찌 묵직하고 안정됨이 있겠는가? 어리석고 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번잡하거나 나부대게 마련이다. 높고 오묘한 문장의 뜻을 설명해 준다 해도 그저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건성으로 네네 할 뿐이다. 벌떡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정과 의리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傳)에서는 “중인 이하로는 상등의 것을 말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授小兒書, 煩言最是大忌. 須當隨其才品之高下, 詳畧解說. 小兒嘗有沈重安靜者哉? 非昏弱, 則必煩躁, 若說與高妙文義. 只欠伸唯唯而已. 有躍起之心, 情義以之阻隔. 傳曰, 中人以下不可以語上.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어른과 마주 앉아 가르침을 받을 때는 두 손을 모우고 바른 자세로 앉아 공경하여 듣고 자세히 여쭈어야 한다. 책 읽는 소리는 온화하면서도 나약해서는 안 된다. 맑되 촉급해서도 안 된다. 되풀이 해 읽지 말고, 중간에 끊어져도 안 된다. 시끄러워서도 안 되고, 안으로 삼켜도 안 된다. 거꾸로 읽거나 속여 읽지도 말아라. 글자를 빼먹고 읽거나 줄을 건너뛰며 읽어도 안 된다. 어지럽게 몸을 흔들거나 자주 고개를 돌려도 못 쓴다. 하품하고 기지개 켜거나 한숨 쉬고 기침을 해서도 안 된다. 강의를 들으면서 곁에서 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도 안 된다. 글자를 보면서 다른 일을 흘깃 거려도 안 된다. 무릇 책과 마주해 읽고 외우고 강의하고 질문할 때, 부채를 만지작거리거나 허리띠로 장난치고, 자리를 당기거나 버선을 매만지며,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고, 건들건들 덜렁덜렁대지 않으면서 묻기를 거칠게 하고 듣기를 싫어하는 자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對長者受敎, 拱手正坐, 敬聽詳問. 讀書之聲, 溫而無懦, 淸而無促, 勿複也勿絶也, 勿聒也勿吶也. 勿倒讀勿譌讀, 勿落字讀勿越行讀, 勿亂搖身勿頻回頭, 勿欠伸勿噫咳, 勿聽講而旁聽他言, 勿視字而偸視他事, 凡對書讀誦講問, 而不摩扇弄帶, 刮席撫襪, 爬癢剔甲, 搖搖浮浮, 麤問厭聽者, 未之見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책을 읽으면서 기운을 돋워 소리를 빨리 내면 듣는 자가 괴로울 뿐 아니라, 제가 먼저 싫증이 나서 계속하지 못한다.

讀書而盛氣疾聲, 不惟聽之者厭之, 先自厭而不之繼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교습(敎習)」중에서

군자는 책 읽는 틈틈이 울타리를 엮거나 담장을 쌓고, 뜨락을 쓸거나 거름을 쳐야 한다. 말을 먹이고 막힌 도랑을 치며, 방아 찧는 일도 때때로 한다면 근골이 단단해지고 뜻이 안정되게 할 수가 있다.

君子讀書之暇, 縛籬築牆. 掃庭除糞, 飼馬决渠, 舂米之事, 可時時爲之, 則筋骨堅而志慮定也.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중 「사물(事物)」 중에서

 

홍석주洪奭周(1774~18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명문가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홍낙성洪樂性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났고, 1795년 전강殿講에서 수석했다. 이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대제학과 좌의정 등의 직임을 맡았다. 방대한 문집과 여러 저작을 남겼다. 저서에 『연천집』, 『학해學海』, 『동사세가東史世家』 등이 있고, 편서도 많다.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았다.

이 책에 인용한 글은 그의 독서 비망록이라 할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독서 관련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선현의 아름다운 일화와 자신의 구체적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깊은 학문의 바탕에서 울려나오는 가르침은 학문하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하고, 수시로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피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알차다.

 

세상 사람들은 늘 독서가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은 진실로 책을 읽지 않고는 안 된다. 하지만 독서란 배움의 한 가지 일일 뿐이다. 배움은 독서에만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는 자가 도를 구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엄한 스승과 좋은 벗을 따라 날마다 그 가르침을 듣는 것이 첫 번째다. 옛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은 두 번째다. 길을 떠나 유람하면서 견문을 넓히는 것이 세 번째다.”

길을 떠나 유람하는 것은 배움에 있어 아무 상관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선비로서 일의 변화를 여러 번 겪어보지 않아 뭇 사람의 정리에 통하지 않고서 능히 도를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고, 또한 천하의 큰 일을 능히 담당할 수 있었던 사람도 없었다. 이 같은 것들은 방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부터 문 닫아걸고 혼자 앉아 있었던 성인은 없었다.”

멋있는 말이다.

世恒以讀書者爲學. 學固不可以不讀書. 然讀書者, 學之一事, 學不止於讀書已也. 余嘗謂: “學者之所以求道, 其事有三. 從嚴師良友, 日聞其指誨, 一也; 讀古人之書, 二也; 行役游覽, 以博其聞見, 三也.” 行役游覽之於學, 宜若無所與也. 然士不更歷事變, 不通於衆人之情, 未有能造於道者, 亦未有能當天下之大事者也. 若是者, 非塊然於一室之所能得也. 朱夫子曰:“自古無關門獨坐底聖人.” 信哉!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공은 일찍이 『논어』를 읽으면서 50번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매번 읽을 때마다 반드시 책에 마음을 온전히 쏟았다. 비록 읽다가 마지막 장까지 이르렀더라도 한 가지 생각이라도 다른 것에 미치면 버려두고 읽은 횟수에 포함하지 않았다. 3년째에 이르러서야 겨우 숫자를 채웠다. 선배들이 책을 읽을 때 마음 닦는 공부의 정밀하고 엄격하기가 이와 같았다.

櫟泉宋文元公, 嘗讀論語, 以五十遍爲限. 每讀必專心於書. 雖讀至卒章, 若有一念及它, 則棄去不算. 至三歲始滿數. 前輩讀書治心之工, 其精且嚴如此.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영조 때 경전을 외우는 강경(講經)의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대과(大科)와 소과(小科), 그리고 회시(會試)에서 모두 경전 한 권을 암송한 뒤에야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자들이 이를 몹시 괴로워하여, 서로 모여 시끄럽게 떠들었다.

참판(參判) 이의철(李宜哲, 1703~1778)이 말했다.

“책을 외우는 데는 묘방이 있는데 제군들이 모르는구나.”

이의철은 당시 큰 선비로 받들어졌고, 더욱이 경전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여러 유생들이 그 말을 듣고는 그만의 비방이 있을 것으로 여겨 삼가 앞 다퉈 가르침을 청했다.

이의철이 말했다.

“오직 열심히 읽으면 된다네.”

여러 유생들이 모두 머쓱해져서 저도 몰래 웃고 말았다. 하지만 책을 외우는 묘방은 실로 이것 밖에 없다. 성인이 다시 세상에 온다고 해도 능히 바꿀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구양수(歐陽修)에게 글짓는 법을 물었다.

구양수가 대답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네. 오직 부지런히 책을 읽고 많이 써보아야 하네.”

이의철의 말은 또한 구양수의 말과 같다.

英廟時, 嘗申嚴講經之制. 凡大小科會試, 皆背誦一經而後許赴. 應擧者多苦之, 方相與聒聒. 李參判宜哲曰:“誦書有竗方, 顧諸君未知耳.” 李公時方以宿儒見推, 尤邃於經. 諸生聞其語, 意其有獨得之秘也, 聳然爭請敎. 李公曰: “唯熟讀耳.” 諸生皆憮然失咲. 然誦書竗方, 實不外是, 聖人復起, 不能易也. 或問爲文于歐陽公. 公曰:“無它術, 唯勤讀書而多爲之耳.”李公之言, 亦歐陽子之言也. 李公, 陶庵李文正公之門人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유안세(劉安世)가 말했다.

“집안의 자제가 일 년 내내 책을 읽지 않을망정, 단 하루라도 소인과 가까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주자께서 그 말에 맛이 있다고 지극히 칭찬하셨다. 사람이 책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제멋대로 놀아 온갖 사특함이 그를 망치고 만다. 그 해로움이 실로 크다. 하지만 올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내년에 읽을 수가 있다. 저 소인들은 아는 것은 적으면서 아첨하기를 좋아한다. 가져오는 것은 즐기며 놀 거리이고, 익숙한 것은 약삭빠르고 경박한 태도다. 어느 집안이고 아이들은 심지(心志)가 안정되지 않아 정욕이 싹트기 쉽다. 음란하고 문란한 말이 한 번 귀에 들어가면, 나중에 비록 엄한 스승과 좋은 벗이 아침저녁으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더라도 방법이 없다. 이른바 소인이란 반드시 크게 간사하고 교활하거나 잰 체하고 음험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뒷골목의 시속을 따르는 무리로 제 입으로는 능히 사람을 아낀다면서 남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남의 수명을 해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아!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劉元城言: “人家子弟, 寧可終歲不讀書, 不可一日近小人.” 朱夫子極稱其有味. 人不讀書, 則心放而百邪棄之, 其害固大矣. 然今歲不讀, 明年猶可及也. 彼小人者, 寡識而喜諛, 所進者玩好之具也, 所慣者儇薄之態也. 人家子弟, 心志未定, 情慾將萌. 淫媟之語, 一入其耳, 後雖有嚴師良友, 朝夕而先後之, 亦無及矣. 所謂小人者, 非必大奸巨猾包莊凶險之謂也. 委巷流俗之徒, 自謂能愛人, 而壞人心術, 戕人壽命者, 比比是也. 嗚呼! 可不懼哉?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소동파가 만년에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제가 젊은 시절 옛 사람에 대해 의논하기를 즐겼습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의 이런저런 변화를 겪고 보니, 이따금씩 그 말이 과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참 진실한 말이다. 선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평지 위에서 옛 사람의 득실을 점검하는 것은 아주 쉽다. 막상 일이 바로 앞에 닥치면 한없이 어려운 점이 있음은 알지 못한다.” 

대저 백 번 듣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곁에서 구경하는 것은 또 자신이 직접 당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잘한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천하의 지극히 중요한 일을 맡고, 천하의 지극히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역사책에 실린 것은 열에 하나도 상세하지가 않다. 지금도 어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해서 얘기를 나눈 뒤 물러나와 전달할 때 능히 그 본뜻을 다 전달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하물며 천 년 백 년의 뒤에 짤막한 글에 남은 것을 주어 모아서 한 구절 한 글자의 사이에서 그 옳고 그름을 갈라 내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東坡晩年與人書, 有曰: “軾少時好議論古人, 旣老, 涉世更變, 往往悔其言之過.” 誠乎哉, 是言! 先賢有言: “吾輩從平地上, 點檢古人得失甚易, 不知事到手頭, 却有無限難處.” 夫百聞者, 不如一見. 傍觀者, 又與身親當之, 絶異. 細事猶然, 況任天下之至重, 當天下之至難者乎? 且史冊所載, 十不詳一. 今與人對面而譚, 退而傳之, 能盡其本意者, 或尠矣. 況由千百載之後, 掇拾於斷簡之所遺, 而剔抉其是非於一句一字之間, 不亦難乎?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내가 평소 기억력이 부족해, 일찍이 1백여 번씩 읽었던 것도 몇 달 뒤에는 문득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서는 점점 더 심해져서 사서삼경 외에는 능히 외울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평생토록 연독(延篤, ?-167))의 「이문덕에게 주는 글[與李文德書]」만은 몹시 아꼈다. 십여 세 때 한번 보고 그 자리에서 외우고는 이제껏 50년이 되도록 한 글자도 잊은 적이 없다.

이제 그 핵심이 되는 말을 여기에 적어둔다. 그 글은 이렇다.

“내가 일찍이 동틀 무렵이면 머리를 빗고서 사랑채에 앉곤 했다. 아침에는 『주역』과 『서경』, 『주례(周禮)』와 『춘추』를 외웠다. 저녁에는 안채의 섬돌을 서성이고 남쪽 다락에서 시를 읊조리고, 백가(百家)와 여러 사람의 것도 틈틈이 익혔다. 아득히 귀에 가득하고, 찬란하게 눈에 넘쳐서 어질어질 기뻐하며 혼자 즐거워 하였다.이때에는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받쳐주는 것도 몰랐고, 세상에 사람이 있는 줄도, 내게 몸뚱이가 있는 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비록 고봉(高鳳)이 책 읽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지도 모르고,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연주할 때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해도 내게 견주면 댈 것도 아니었다. 또 스승을 모시고 공부한 뒤로는 자식으로서 불효에 빠지지 않았고, 신하로 불충에 떨어진 적도 없었다. 위 사람과 사귈 때는 아첨하지 않았고, 아래 사람과 사귈 때는 깔보지 않았다. 이제 죽어서 지하에 가 돌아가신 아버님과 먼 조상을 뵙더라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있다. 이렇게 하고도 선에 머물지 않는 자는 예(羿)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연독의 자는 숙견(叔堅)이니, 후한 때 사람이다.

余素短記性, 雖曾讀百餘遍者, 數月之後, 輒多遺忘. 旣老愈益甚, 自三經四書以外, 無復能成誦者. 唯平生酷愛延篤與李文德書. 自十餘歲, 一覽卽誦, 至今五十年, 未嘗忘一字也. 今記其要語于此. 曰:

“吾嘗昧爽櫛縱, 坐於客堂. 朝則誦羲文之易, 虞夏之典, 歷姬公之典禮, 覽仲尼之春秋. 夕則逍搖內階, 詠詩南軒, 百家衆氏, 投間而作. 洋洋乎其盈耳也, 煥爛乎其溢目也, 紛紛欣欣兮其獨樂也. 當此之時, 不知天之爲蓋, 地之爲輿, 不知世之有人, 己之有軀也. 雖高鳳讀書, 不知暴雨, 漸離擊筑, 傍若無人, 方之於僕, 未足況也. 且吾自束修以來, 爲人子不陷於不孝, 爲人臣不陷於不忠. 上交不諂, 下交不瀆. 從此以後, 下見先君遠祖, 可不慚赧. 如此而不以善止者, 恐如敎羿射者也.”

篤字叔堅, 後漢人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제갈량(諸葛亮)은 책을 볼 때 큰 뜻만 살폈다. 도연명은 독서를 좋아했으나 깊은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한유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아(爾雅)』는 벌레와 고기 이름을 풀이했으니, 틀림없이 통 큰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호걸의 선비는 사물의 이름을 따지고 풀이하여 고증하는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에는 마음을 쏟지 않았다. 하지만 학문의 길은 정밀하고 거친 것을 따지지 않는다. 공자께서 사람들에게 시를 배우게 하시면서 또한 초목과 조수의 이름을 빼놓지 않으셨다. 후대의 배우는 자가 한 시대를 호령한 옛사람의 재주도 없으면서, 문득 앞의 몇 분의 주장을 구실로 삼으려 드니 또한 망령됨을 면치 못한다. 나 같은 사람은 흰 머리가 되도록 책벌레로 살았지만 조금도 아는 것이 없다. 한두 차례 붓을 끼적인 것 또한 서당 학동들의 질문에 대답하기에도 부족하다. 잠시 남겨 두고 없애지 않는 것은 나의 못남을 기록해 두려는 것뿐이다.

諸葛武后觀書, 獨觀其大義, 陶元亮好讀書, 不求甚解. 韓退之詩曰: “爾雅註蟲魚, 定非磊落人.” 自古豪傑之士, 固未有溺心于名物訓詁之瑣細者也. 然學問之道, 不遺精粗. 孔子敎人學詩, 亦不廢草木鳥獸之名. 後之學者無古人命世之才, 而遽欲藉口於數公之說, 亦不免鹵莽之歸矣. 若余者白首蠹書, 曾無一斑之窺, 而一二拈筆, 亦不足備塾蒙之問難. 姑存而弗去, 適以志吾媿耳.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종일 배불리 먹고서도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딱한 노릇이다. 장기나 바둑이 있지 않은가?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않는 것보단 낫다.”

선유(先儒)가 말했다.

“성인께서 사람들에게 장기나 바둑을 가르치신 게 아니다. 다만 마음 쏟는 바가 없는 것이 해로움을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르고 공평해서 폐단이 없다. 누르고 올림에도 지나친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을 바둑이나 장기 두는 무리에게 듣게 한다면 어찌 핑계거리가 되기에 충분치 않겠는가? 대저 공자의 시대에는 후세와 같은 도박의 풍조는 없었다. 학문의 길은 방심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바둑이나 장기는 마음을 쏟고 뜻을 다하지 않고는 이길 방법이 없다. 이 또한 방심을 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옛날에 이른바 노름이란 것도 이제 와서 고증할 길은 없지만, 내 생각에 또한 마땅히 법도와 형상이 담긴 바가 있어서 오늘날처럼 떠들썩 다투며 빼앗느라 위의를 상실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춘추시대에 지금의 마조(馬弔) 놀이 같은 것이 있었다면 성인께서 어찌 이런 가르침을 내리셨겠는가? 그래서 나는 말한다. 책을 읽어 뜻을 풀이하는 것은 그 시대를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孔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先儒謂: “聖人非敎人博奕也, 特甚言無所用心之害耳.” 愚謂: 聖人立言, 平正無弊, 未嘗有過於抑揚者, 斯言也, 使博奕之徒得之, 豈不足以藉口乎? 蓋夫子之時, 未嘗有後世賭博之風也. 爲學之道, 莫先於求其放心. 奕碁者, 不專心致志, 則無繇取勝, 是亦求放之一術也. 古所謂博, 今不可攷, 意亦當有法象所寓, 而不至如今世之喧鬨爭奪, 喪其威儀者. 若使春秋之時, 有如今馬弔之戱者, 聖人寧有是訓耶? 愚故曰: 讀書解義者, 不可不先考其時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학문의 방법은 방심, 즉 흐트러진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오도카니 앉아 오로지 흐트러진 마음을 구하려고만 들면 타고난 자질이 높은 사람의 경우 불교의 좌선(坐禪)이나 도가(道家)의 수신(守神)에 그칠 뿐이다. 그만 못한 사람은 도리어 마음의 병을 얻는 빌미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옛날의 군자는 가만히 있을 때는 시서(詩書)와 서책을 공부했고, 움직일 때는 금슬(琴瑟)과 활쏘기, 말 타기 등을 익혔다. 용모를 바로하고 절도를 삼가서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절제했다. 욕심을 막고 정신을 집중해서 내면을 길렀다. 생각이 없을 수야 없지만,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에 몰두했다. 일도 늘 있게 마련이지만, 일처리는 한결같음을 주로 했다. 이런 몸가짐을 지녀 오래도록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면서도 그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있지 않았다.

주자(朱子)가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거처에서는 공손히 하고, 일 처리는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성실로 하라’는 것이야 말로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또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흐트러진 것을 알아 이를 구하려 한다면 마음은 이미 흐트러진 것이 아니다.” 또 말했다. “3백 가지나 되는 예의(禮儀)와 3천 가지의 위의(威儀)가 모두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이다.”

이를 안다면 이단에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또한 마음의 병을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

學問之道, 求其放心而已矣. 然閉目兀坐, 而唯放心之是求, 則天資高者, 爲釋氏之坐禪, 道家之守神而已, 其下者, 鮮不反祟其心疾. 古之君子, 居則有詩書簡策之講, 動則有琴瑟射御之習. 正容謹節, 以制其外. 遏欲專精, 以養其內. 未嘗無思也, 思必致乎一. 未嘗無事也, 事必主乎一. 持之以久, 勿忘勿助. 如是而心不存者, 未之有也. 朱子曰:“孔子言,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便是存心之法”. 又曰: “知其放而欲求之, 則心已不放矣”. 又曰: “禮儀三百, 威儀三千, 皆是涵養也”. 知此則可以不流乎異端矣. 知此則亦可以無憂乎心疾矣.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범중엄(范仲淹)이 말했다.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스스로 하루 동안 먹고 마시고 봉양한 비용을 헤아려 본다. 내가 한 일과 걸맞으면 코를 골며 달게 잔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 내내 편안할 수가 없다.”

『국어(國語)』에 경강(敬姜)의 말이 실려 있다.

“밤에 허물을 헤아려 찜찜함이 없은 뒤라야 편안하다.”

옛날의 군자는 비록 밤중에 잠자는 중에도 스스로를 다스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젊어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삿되고 망령되며 바르지 않은 생각이 뒤죽박죽 일어나곤 했다. 비록 억지로 제어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문득 옛글을 가만히 외워서 이겨 내곤 했다. 근래에는 정신과 기운이 멍해져서 누웠다 하면 잠이 들어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잠깐씩 깨면 그 틈을 타고 딴 생각이 싹터 남을 면치 못한다. 옛사람의 말을 생각하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다.

范文正公言: “吾遇夜就寢, 自計一日飮食奉養之費, 與所爲之事, 相稱則鼾鼻酣寢. 不然則終夕不能安.” 國語載敬姜之言曰: “夜以計過無憾, 而後安.” 古之君子, 雖在宵寐之中, 未有弛其自治之功者也. 余少每就枕, 邪妄不經之念, 雜然而興, 雖欲强制而不可得. 輒黙誦古書以勝之. 近則神氣嗒然, 臥輒成眠, 不復有它念. 然時或暫醒, 不免有乘隙而萌者. 思古人之語, 未嘗不自媿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내가 어려서 꿈에 복희(伏羲)를 뵈었다. 괘(卦)를 그리는 모습이었다. 16살 때 꿈에는 공자를 뵈었다. 방 가운데 안석(案席)에 기대어 계셨다. 내가 절을 올리고 다시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이렇게 훈계하셨다.

“네 게으름과 불성실함을 없애도록 해라.”

내가 여쭈었다.

“역(易)의 이치가 궁금합니다.”

대답하셨다.

“한 해 겨울만 힘 쏟으면 알 수가 있다.”

또 여쭈었다.

“『춘추(春秋)』에 쓴 달과 날의 이름에 과연 모두 포폄(褒貶)이 있는지요?”

“하나하나 모두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전연 뜻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물러나오는데 자로(子路)가 작은 집의 동북쪽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채 묻지 못한 채로 잠을 깼다. 그런데도 또렷이 한 마디도 잊혀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내가 새로 정주(程朱)의 책을 얻어 깊이 빠져서 밥 먹고 잠자는 것조차 거의 잊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꿈에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뒤로 점차 기욕(嗜慾)의 허물에 빠지고, 나가서 벼슬살이를 함에 이르러서는 다시는 옛사람 꿈을 더 꾸지 않았다. 이제 늙어 흰머리가 되고 보니, 지난날 꿈꾸던 때에서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게으르고 불성실한 병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아! 누구를 탓하겠는가.

余幼時嘗夢見伏羲, 彷彿有畫卦狀. 十六歲夢拜孔子, 子方隱几于室中. 余旣拜而復進請敎, 則戒之曰:“去爾之慢與不誠.” 余問:“易理可識否?” 答曰:“用力一歲之冬, 亦可識也.” 又問: “春秋書月日名字, 果皆有褒貶否?” 曰:“以爲一一皆有意者, 非也, 謂全無意義者, 亦非也.” 退見子路立小軒東北隅. 欲有所問, 未果而寤. 猶歷歷無一語忘者. 方是時, 余新得程朱書玩賾之, 殆忘寢飱, 其發於夢寐者如此. 及其後漸溺於嗜慾之累, 至出而仕宦, 則益不復夢古人矣. 今余老白首, 距宿昔之夢, 適五十年矣. 而慢與不誠之病, 未有一毫減也. 嗟乎, 當誰咎哉.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포양(包揚)은 육구연(陸九淵)의 문인(門人)이다. 뒤늦게 주자에게서 배운 사람이다. 그가 주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책이란 것은 마음이 빠져드는 큰 함정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편집하던 사람이 크게 놀라

“이것은 선생의 말씀이 아니다”

라 하고는 서둘러 이를 삭제하고 싣지 않았다. 대저 포양의 학문은 진실로 육구연의 학설을 능히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을 어찌 감히 엉터리로 지어내어 속이려 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죽은 사람은 빨리 썩게 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빨리 가난해지려고 한다[死欲速朽, 喪欲速貧].”

제자 유약(有若)이 처음에는 공자의 말씀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나중에야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임을 알았다. 주자의 말 또한 연유가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여조검(呂祖儉)이 책을 읽다가 병이 났다.

주자가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맹자(孟子)께서는 ‘학문의 도(道)는 오직 흐트러진 마음을 구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셨네. 이제 한결같이 문자에만 빠져서 이 마음 전체를 온통 책 위로만 내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마저 알지 못하였으니, 비록 책을 읽은 들 또한 무슨 보탬이 있으랴!”

또 말했다.

“성인의 책은 반드시 사람에게 병이 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자칫 사마천이 빌미를 만들게 될까 염려스럽다.”

책이 함정이 된다고 말한 것 또한 반드시 이 같은 종류의 말일 뿐이다. 제자백가의 말 중에는 사람의 심지를 빠뜨릴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 지금 세상에 고증학을 하는 사람이 말로는 성인의 경전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일찍이 조용히 함양해서 마음으로 얻어 몸으로 체득하지 못한 채, 자질구레하게 명물(名物)과 훈고의 말단에만 온통 마음을 쏟는다. 게다가 온 세상을 내몰아 죽을 때까지 내달리면서도 돌아올 줄 모른다. 주자에게 이를 보게 했더라면 함정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리가 거의 없다. 하지만 포양이 이 말을 기록한 것은 본래의 뜻이 상세치 않다. 오로지 한 구절만 내세운 것은 그 뜻이 육구연을 위해 구실을 삼으려 했던 것일 뿐이다. 이 또한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包揚顯道, 陸氏之門人, 而晩學於朱子者也. 其錄朱子語曰:“書者, 溺心之大穽.” 輯語類者見之, 大駭曰: “此非先生之語也.” 亟削之, 不載. 夫顯道之學, 固未能捨陸氏也. 然先生之所不言, 亦豈敢架虛而肆誣哉? 孔子曰: “死欲速朽, 喪欲速貧.” 有子始疑其非孔子之言, 而終乃知其有爲而發也. 朱子之言, 蓋亦有爲而發歟? 呂子約讀書而生疾, 朱子責之曰: “孟子言, ‘學問之道, 唯在求其放心’, 今一向耽着文字, 令此心全體都奔在冊子上, 更不知有己, 雖讀得書, 亦何益耶?”又曰: “聖人之書, 必不至使人生疾, 恐只是太史公作祟耳.” 其謂書爲穽, 亦必爲此類言耳. 夫諸子百家之書, 可以溺人心志者, 固多矣. 今世爲攷證之學者, 名爲治聖人之經矣. 曾不能從容涵泳, 得之心而體之身, 屑屑馳騁於名物詁訓之末. 又且敺一世而趍之終身而不知返. 使朱夫子見之, 其不謂之穽也, 亦幾希矣. 然顯道之錄是語也, 不詳本指, 專標一句. 其意則固欲爲陸氏藉口耳, 此又不可以不之察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치를 궁구만 하고 일은 익히지 않는 것을 그대는 배움이라 말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군자의 학문은 다만 세세한 범절이나 일상의 일에 그치지는 않는다. 대개 장차 천하의 큰 일을 맡고 천하의 큰 변화에 응함을 가지고서는 어디를 가든 마땅함을 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천하의 일은 갑작스레 일어나므로 생각지도 못할 것이 또한 많다. 어찌 일일이 이를 익힐 수 있겠는가?”

내가 말했다.

“물론 그렇다. 천하의 일 중에 비록 갑작스러워 생각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해도 또한 어찌 일마다 익힐 수가 있겠는가? 작은 것을 익히면 큰 것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일정한 일을 익혀두면, 바뀌는 것도 통할 수가 있다. 이를 독서에 견주어보자. 글자마다 묻고 구절마다 배워서 수십 권을 읽은 뒤에는 다시 스승을 기다리지 않고도 진실로 능히 1백여 권을 정독할 수가 있다. 그럴진대 비록 평생 처음 보는 책과 만나더라도 또한 시원스레 아무 막힘이 없게 될 수가 있다. 또 큰 일에 임해 큰 변화에 대응하는 사람은 진실로 이치에 밝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하지만, 사실은 그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 더 걱정이다. 하루아침에 당황하여 마음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비록 평소에 익숙히 익혀 아무 의심이 없던 것조차 뒤죽박죽이 되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군자는 평소 거처할 때 엄숙하게 정신을 한데 모아서 기쁨과 성냄으로 그 마음이 휘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욕심으로 그 참됨을 흔들어놓아도 못 쓴다. 비록 틈을 엿보아 파고들어 온갖 생각의 단서가 뒤얽혀도 내 고요한 마음만은 늘 평소와 같아야 한다. 이것을 익히지 않고서 능히 큰 일에 임하고 큰 변화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감히 믿을 수가 없다. 대저 삼군(三軍)의 무리를 거느리는 사람은 반드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 이를 기른 뒤라야 일이 생겼을 때 이를 쓸 수가 있다. 자사(子思)의 ‘계신공구(戒愼恐懼)’즉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한다는 말과,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그리고 정이(程頤)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마음을 하나로 모아 딴 데로 가지 않게 한다는 ‘경(敬)’은 모두 큰 일에 임하고 커다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기르는 일에 해당한다.”

평소 훈련된 군대가 유사시에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제 힘만 믿고 훈련을 게을리하면 일이 발생했을 때 손 쓸 도리가 없다. 자사는 삼가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라고 주문했다. 맹자는 마음이 달아나지 않게 꼭 붙들라고 했다. 정이는 한 곳으로 집중해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가리키는 뜻은 같다. 큰 일을 거뜬히 해내고, 큰 변화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마음 훈련이 필요하다.

或曰:“窮其理而不習其事, 子以爲未足言學矣. 然君子之學也, 非獨於細節已也, 非獨於常事已也. 蓋將以任天下之大事, 應天下之大變, 無往而不得其宜也. 天下事有出於倉猝, 而不慮者亦多矣, 又安得事事而習之哉!”曰: “是固然矣. 天下之事, 雖非倉猝而不慮者, 亦安得事事而習之哉. 習之於小, 而其大者可推也. 習之於常, 而其變者可通也. 譬之讀書, 字字而問之, 句句焉受之, 數十卷之後, 不復待師長, 苟能精百餘卷也, 則雖遇平生未見之書, 亦可以沛然而無窒矣. 且臨大事應大變者, 固患其理之不明, 而尤患於其心之不定. 一朝倉皇方寸失守, 雖平日熟講而無疑者, 鮮有不顚倒而迷繆. 是以君子平居燕處, 肅然凝神, 不以喜怒撓其中, 不以耆慾蕩其眞. 雖投間伺隙, 萬端膠擾, 而吾之湛然者, 恒自若也. 不習乎此, 而能臨大事應大變者, 吾未之敢信也. 夫行三軍之衆者, 必養之於無事之時, 而後可以用之於有事之日. 子思子之戒愼恐懼, 孟子之求放心, 程夫子之主一無適之敬, 是皆臨大事, 應大變者之養兵也.”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옛날의 저서는 높고 낮음에 따라 대개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세상의 책 읽는 사람 또한 그렇다. 가장 으뜸은 도를 밝혀서 덕을 바로 세우는 것이니, 육경 사서와 여러 성현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세상을 경영해서 실용에 닿는 것이다. 성인의 경전은 이를 아우르고 있다. 역대의 역사책과 예악병형(禮樂兵刑)에 관한 책들이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그 다음은 표현을 잘 다듬어 보기만 좋게 한 것이다. 그 다음은 사물을 고찰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문장이 풍부하기로는 육경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공(禹貢)」의 산천과 『시경(詩經)』의 새 짐승과 초목, 『예기(禮記)』와 『악경(樂經)』의 각종 기계와 이름 및 제도 또한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쏟아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오로지 이것만 하는 데 그치면 또한 밖으로 겉돌아 말단이 될 뿐이다. 또 그 아래는 소설과 자질구레한 이야기이니, 놀며 떠들며 파적거리로 삼는 것일 뿐이다. 음란하고 외설스런 말과 괴상망측한 이야기는 사람의 심지를 흔들고 사람의 보고 들음을 현혹시킨다. 이는 명교(名敎)의 죄인인지라, 저서의 부류에 넣기도 어렵다. 옛날의 저서는 대략 이렇게 다섯 등급이 있었다. 그 높고 낮음을 진실로 알 만하다.

책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또 마땅히 마음자리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진실로 그 마음이 자기를 반성하고 실지에 힘쓰는 데 놓인다면, 비록 소설이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읽더라도 또한 덕을 바르게 하고 쓰임에 나아갈 수가 있다. 진실로 그 마음이 붕 떠 있어 중심으로 삼는 것이 없다면 비록 육경과 사서를 읽는다 해도 또한 심심풀이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古之著書者, 其高下大率有五等. 世之讀書者亦然. 太上, 明道以正德, 六經四書, 群聖賢之言, 是也. 其次, 經世以致用, 聖人之經兼乎是者也, 而歷代史乘, 禮樂兵刑之典籍, 亦與焉. 其次, 修辭以美觀. 其次, 稽物以洽聞. 文章之富, 未有尙于六經者也. 禹貢之山川, 詩之鳥獸草木, 禮樂之器械名數, 亦學者之所宜究心也. 雖然, 專以是而已, 則亦外且末矣. 又其下, 則小說

- 홍석주, 『학강산필(鶴岡散筆)』 중에서

 

 

홍길주(洪吉周(1786~1841)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헌중憲仲, 호는 항해沆瀣다. 대제학을 지낸 홍석주의 아우다. 그의 동생은 정조의 외동 사위인 홍현주洪顯周이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30대에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문필활동에 전념했다. 문집은 시기별로 『현수갑고峴首甲藁』, 『표롱을첨縹聾乙籤』, 『항해병함沆瀣丙函』 등의 방대한 글을 남겼고, 이 밖에 『서림일위書林日緯』, 『숙수념孰遂念』, 『수여방필睡餘放筆』 4부작 등의 저작을 남겼다. 이 밖에 기하학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다.

벼슬길을 멀리한 채 글쓰기에 몰두한 그는 폭넓은 사유와 흥미로운 지적 사유의 궤적을 유니크하게 보여준 작가다. 그의 사유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다. 기호학의 사유 방식과 흡사하다. 그는 거대 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의 깨달음을 더 중시했고, 복잡한 현상 속에 감춰진 이치 찾기를 즐겼다. 사물의 현상에서 의미를 뽑아 내서 이를 종횡무진으로 엮어 사유를 확장하곤 했다. 이 책에는 『수여방필』 4부작과 그 밖의 산문에서 가려 뽑은 독서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일상에서 포착하는 각성과 제언을 담아 후학을 권면한 내용이다.

 

맹자가 말했다.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한 마디를 읽으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 내일 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처럼 한다. 또 이튿날 한 가지 일을 들으면 꼭 그렇게 한다. 읽은 책이 나날이 더 많아지고 세상에서 듣고 본 것이 날로 더욱 넓어지면 고금과 천하의 좋은 점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서, 고금과 천하의 악함은 터럭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옛날에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를 위한 학문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성인이 거룩하게 된 까닭은 이것을 모았기 때문일 뿐이다. 군자는 배움에 있어 힘 쏟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중점을 두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거두는 보람이 크다. 내가 중점을 두는 것은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는 것일 뿐이다.

孟子曰 : "學問之道, 無他焉, 反求諸己而已矣." 今日讀一言而必如是, 明日見一人而必如是, 又明日聞一事而必如是. 至於所讀之書日益多, 而聞見於世者日益廣, 則古今天下之善, 皆備於我, 而古今天下之惡, 無一毫之留焉. 古之稱爲己之學, 循是而已矣. 抑聖人之所以聖, 集是而已矣. 君子之於學, 無所不力, 而必有所以爲主, 夫然后用功約而取效大. 吾之所以爲主者, 反求諸己而已矣.

- 홍길주, 「좌성(左省)」

사람이 아이 적에 책을 두세 번만 읽고도 곧바로 외우거나, 또 간혹 7,8세 때에 능히 시문을 지어 입만 열면 문득 사람을 놀래키기도 하였으나 정작 어른이 되어 늙어서는 성취한 바가 남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똘똘한 재주가 쉬지 않는 부지런함만 같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또 기름을 태워 새벽까지 애를 쓰며 쉬지 않고 흰머리가 흩날리도록 하더라도 능히 스스로 일가의 말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일까? 혹 겨우 백여 권의 책을 읽고도 붓을 내려 종이에 폄에 쟁그랑 소리를 내며 환히 빛나 만 권을 외운 자가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한다. 혹 똑같은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사람은 한 글자도 남김없이 외웠는데도 식견은 늘지 않고 저작에 볼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반 넘어 잊어버렸으나 핵심 되는 알맹이를 모두 파악해서 펼쳐 글을 지으면 이따금씩 똑같이 되곤 하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재주는 부지런함만은 같지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같지 못하다. 깨달음이란 한 글자는 도덕의 으뜸가는 부적이다. 옛사람의 책 가운데 경전과 역사책의 종류 같은 것은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가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자질구레한 것들은 하나하나 정밀히 궁구하여 심력을 나눌 필요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70, 80면쯤 된다면 그 정화로운 것을 추려 내면 십여 면에 지나지 않는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그 알맹이의 소재는 알지 못한다.

오직 깨달음이 있는 자는 손가는 대로 뒤적이며 지나쳐도 핵심이 되는 곳에 저절로 눈길이 가 닿는다. 그래서 한 권 안에서 단지 십여 면만 따져보고 멈추어도 전부 다 읽은 사람보다 보람이 두 배나 된다. 이런 까닭에 남들이 바야흐로 두세 권의 책을 읽을 적에 나는 이미 백 권을 읽어 치울 수 있고, 보람을 얻는 것도 또한 남보다 배나 된다.

人有兒時, 讀書二三遍, 卽誦者. 又或七八歲, 能作詩文, 發口輒驚人者. 及其壯而老, 所成就, 無甚過人. 始知了了之才, 不如兀兀之勤也. 復有焚膏繼晷, 矻矻不休, 以至于白首紛如, 而不能自成一家言者, 其故何也? 或僅讀百餘卷書, 而下筆伸紙, 訇鏗煒燁, 誦萬卷者, 瞠乎后. 或均之讀一部書, 一則誦不遺隻字, 而識解不加長, 著作無可觀. 一則忘失過半, 而盡輸其精華膏液, 浹于肺肝, 發爲文, 往往逼肖, 其故何也? 才不如勤, 勤不如悟, 悟之一字道德之元符也. 古人書如經史之類, 一字不可放過, 餘書或瑣瑣者, 不必一一精究, 以分心力. 假如一卷書約七八十葉, 捃其菁華不過十數葉 , 俗士從頭盡讀, 而不知其菁華之所在. 唯有悟者, 信手披過而菁華處, 自觸于眼, 一卷之內, 只究了十數葉而止, 其見功倍于盡讀者. 以故人方讀二三卷書, 我已了却百卷, 而見功亦倍於人.

- 홍길주,『수여방필』

연천 선생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책을 읽는 것에 다섯 가지 등급이 있다. 으뜸은 이치를 밝혀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옛 것을 널리 익혀 일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문사를 닦아 세상에 이름을 울리는 것이다. 그 다음은 기억력이 뛰어나 남에게 뽐내는 것이다. 가장 아래 길은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한 가지인데, 그 읽는 까닭은 이 같은 다섯 가지의 차이가 있다.”

淵泉先生常云: “人之讀書有五等, 上焉者明理以淑身, 其次博古以應事, 其次修辭以鳴世, 其次强記以夸人, 最下者聊以遣閑而已. 讀書一也, 其所以讀則有此五者之異.”

- 홍길주, 『수여난필』

성현의 글을 읽는 것은 덕에 나아가고 행실을 닦아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논어》 한 권을 읽었는데, 한 사람은 마치 자기 말처럼 다 외우지만 막상 어떤 경우에 닥치면 일찍이 생각이 책 속에 미치지 못하고 그 행동하는 바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읽은 것과는 반대로 한다. 한 사람은 능히 한두 장도 외우지 못하지만, 화나는 일이 생기면 문득 맹렬히 반성하여 이렇게 말한다. “《논어》 중에 한 구절이 있는데 내가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보니 화가 날 때 마음대로 하면 뒤에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는 식의 말이었다.” 하고는 마침내 참고 이를 가라앉혔다. 뜻하지 않은 재물과 마주해서는 또 맹렬히 반성하여 이렇게 말했다. “《논어》중에 한 구절이 있는데 내가 그 말이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재물을 앞에 두면 모름지기 의리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헤아려 보라는 뜻이었던 듯하다.”고 하고 마침내 물리쳐서 취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마침내 어느 사람이《논어》를 제대로 읽은 것이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일이 닥치면 먼저 경전에 나오는 경계하는 말을 꺼내서 의논하는 자의 입을 막고, 인하여 장차 자기가 한 옳지 않은 일을 그럴 듯하게 꾸미고 왜곡해서 의리에 합당하게 행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비록 요순이라도 감화시킬 수가 없다. 또 늘상 자기의 단점을 말하여 남들로 하여금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하면서 장차 옳지 않은 일을 하고 나쁜 말을 할 때에는 도리어 먼저 그 좋지 않은 점을 말한 뒤에 이를 좇는다. 이 같은 사람은 또 일찍이 생각이 책 속에 미치지 못하는 자의 죄인이라 하겠다.

讀聖賢書, 爲其進德修行, 增益其所不足也. 如讀論語一部, 一則盡誦如己言, 而遇事, 不曾思到卷中, 考其所爲, 一反其所讀, 一則不能誦其一二章, 有忿懥, 輒猛省曰: “論語中有一句, 吾不能詳記其語, 而想是忿而任情, 後必有難等說.” 遂忍而平之. 臨不意之貨, 又猛省曰: “論語中有一句, 吾不能詳記其語, 而想是臨財, 須較量其合義與否之意.” 遂却而不取. 這兩人究竟誰是會讀. 又有一等人, 遇事, 却先說起經傳中立戒語, 以杜設者之口, 仍將自己做的不義事, 文飾曲成, 以爲合義而行之. 這般人, 雖堯舜不可化. 又有恒言自己短處, 使人無可更說, 將做不善事, 發不善言, 却先說破其不善處而後從之. 如此等人, 又是不曾思到卷中者之罪人也.

- 홍길주, 『수여방필』

옛 사람을 잘 모방하는 것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밥을 먹은 효과는 정채가 빛나고 피부가 윤기나는 데서 드러난다. 이 정채와 피부에 어찌 일찍이 밥알의 형상이 있겠는가? 책 읽은 보람은 일을 행함에서 드러나니 문장 또한 이 같을 뿐이다. 밥알이 변화하여도 오히려 지게미와 비슷한 것이 있으니 바로 대변이다. 체해서 소화되지 않고 곧장 내려가면 먹은 것이 그 형상 그대로이다. 만약 반드시 잘 모방하는 것을 잘 읽은 보람으로 여긴다면 대변이 곧장 내려가는 것을 잘 먹은 효과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有以善摸倣古人爲好文章者, 余告之曰: “喫飯之效, 見於精采敷潤而體膚充澤. 是精采體膚, 曷嘗有飯粒之形象耶? 讀書之效見於行事, 文章亦如此而已. 飯之所化, 尙有髣髴於糟粕者, 唯大便也. 滯不化而直下, 則所啖者宛然其形. 若必以善摸倣爲善讀之效, 則大便直下, 方可謂之善啖之效耶?”

- 홍길주, 『수여난필』

연천 선생이 젊어서 책을 읽을 때 날마다 분량을 정해 두었다. 그리고 일과 외에 몇 권의 책을 한가할 때에 나누어 읽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은 세수한 뒤 호좌건(虎坐巾)을 얹을 때 본다. 또 어떤 책은 안채에 있을 때에 속으로 외운다. 어떤 책은 베갯머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때 외우고, 어떤 책은 잠자리에 들어 미처 잠들지 않았을 때 외운다. 모두 날마다 한 두 페이지를 넘지 않았지만, 달이 쌓여 해가 지나자 이미 너덧 질의 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원래의 일과와는 서로 방해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약관이 되기도 전에 이미 고금을 널리 살필 수 있었다. 승지(承旨)와 각신(閣臣)이 되었을 때도 『한서(漢書)』를 읽었다. 비록 하루 종일 공무를 보거나 임금을 모셔 밤 깊은 뒤에 퇴근해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등불 아래에서 책을 가져다가 서너 줄 읽은 뒤에야 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과는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사정이 있다고 거르게 되면 일이 없을 때에도 또한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또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先生少時讀書, 旣有逐日定課. 而用課外書數種, 分屬於閑時. 如某書則獨於盥後施虎坐巾時觀. 某書則獨於在內舍時黙誦. 某書則枕上未起時誦, 某書則就枕未睡時念. 皆日不過一二頁, 而積月踰歲, 已了却四五袟. 幷不與原課相奪. 以故, 未弱冠已博極今古. 爲承旨閣臣時, 讀漢書. 雖終日 在公或陪駕罷還夜深之後, 必取書於燈下, 讀三四行然後寢. 曰: “課不可闕一, 以故而廢, 則無故時亦怠矣.” 又嘗曰: “必欲待長久之暇, 可了一部書然後, 開卷則平生無可讀書之日. 雖於劇奔忙中, 有可讀一字暇, 便宜讀一字.”

- 홍길주, 『수여연필』

세상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는 서적이 너무 많아서 다 읽을 겨를이 없다. 문장과 도술은 옛것만 못하다. 모름지기 이러한 사정을 알았던 진시황이 나와, 경전이 아니면서 긴요치 않은 것을 가려 불태워 버린 뒤에야 바야흐로, 책을 읽어 배울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또 한 가지 주장이 있다. 천하에 무릇 책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모두 읽을 만하고 볼만하다 여기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말한다.

“경전과 역사 등 좋은 책은 진실로 읽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 책은 얻는 대로 보아 어떤 것은 읽고 어떤 것은 읽지 않아도 모두 안 될 것이 없다. 경전이 아니고는 보탬이 없다고 말한다면, 전국시대 제자백가 이하는 모두 불 태워야 마땅할 것이다. 작은 이치라도 볼만하다고 말한다면 근세의 자질구레한 총서나 잡찬도 모두 식견과 깨달음을 계발하는 데 보탬이 있을 것이다.”

世恒言: “天下書籍, 綦多無暇徧閱. 而文章道術浸不如古. 須有知事之秦始皇出, 擇其非經不急者, 而焚之然後, 方可讀書而爲學.” 此非通論也. 又有一種之說. 以爲天下之凡以書名者, 皆可讀皆可觀, 斯亦行不得. 余則曰: “經史等好書, 固不可不讀. 餘書隨得隨觀, 或觀或否, 都無不可. 以言乎非經無益, 則戰國諸子以下, 俱屬當燒, 以言乎小道可觀, 則近世叢瑣雜纂, 皆有助發識悟處耳.”

- 홍길주, 『수여난필』

책을 읽을 때에는 대충 건성으로 보아 넘김을 면치 못한다. 매번 고요히 누워 예전에 읽은 것을 생각하다보면, 문득 수 십 년간 깨닫지 못했던 오묘한 뜻을 깨닫곤 한다. 배움이 넓은 선비가 마땅히 때때로 책을 덮고 예전 읽은 여러 책을 가슴속에서 오르내리게 하면 반드시 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배운 것이 적은 자는 다만 마땅히 노력하여 많이 읽을 뿐 여유롭게 한가히 앉아 예전 읽은 것을 생각하는 데 자신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讀書時不免泛然看去. 每靜臥念平昔所讀, 忽悟累十年未造之奧. 博學之士, 宜時時掩卷, 以舊讀諸書, 上下于胸中, 必大有功效. 所學謏寡者, 惟宜矻矻多讀, 不可悠悠閑坐, 自諉以思舊讀

- 홍길주, 『수여난필』

천하에는 책을 함께 읽을 만한 사람도 없고, 함께 읽지 못할 사람도 없다. 시서(詩書)와 육예(六藝)를 지은 옛 작자는 모두 죽고 없다. 내가 책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한들 장차 누구와 함께 말하겠는가? 그래서 천하 사람 중에 더불어 책 읽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 산의 나무꾼이나 들의 농부, 저자의 장사치나 거간꾼의 경우, 그가 혹 한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거나, 또 일찍이 나와 더불어 평소 한 마디 말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나서 그 하는 행동을 보면 눈길이 노니는 바와 발길이 가는 곳, 손에 들고 다니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천하에서 날로 쓰는 떳떳한 윤리와 인정의 선악, 그리고 별들과 비바람, 산천과 숲과 못, 안개 구름과 새 짐승의 변화가 뒤섞어 그 사이에 오간다. 그 소리와 모습이 천하의 지극한 문장 아님이 없는 지라, 내가 모두 얻어서 이를 읽는다. 그래서 천하 사람 중에 더불어 책을 읽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天下之人, 無可與讀書者, 天下之人, 無不可與讀書者. 詩書六藝古作者, 皆逝矣, 我之有契於書, 將誰與語諸! 故曰, 天下之人, 無可與讀書. 然彼山之樵野之農, 衖市之賈儈, 其人或不識一字, 又未嘗與我有一言之素也. 遇而視其爲, 則目之所遊, 足之所循, 手之所携, 口之所發, 凡天下日用彛倫人情之善惡, 與夫星辰風雨山川林澤煙雲鳥獸之變, 雜然迬復于其間. 蓋其聲音狀䫉, 莫非天下之至文, 而吾皆得以讀之. 故曰, 天下之人, 無不可與讀書.

- 홍길주, 「送金性原宰江東縣序」

매번 옛 사람의 문집이나 다른 사람이 지은 시문을 읽다가, 이따금씩 격조에 아낄 만한 것이 있어 나와는 완전히 다른데도 마음으로 이를 아껴 마치 제 입에서 나온 것 같은 경우가 있다. 대개 그 체제는 비록 달라도 정취의 사이에 절로 서로 감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한 가지 법만을 굳게 지켜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함은 바로 정취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의 아름다운 작품과 다른 이의 빼어난 구절을 읽어도 그 좋은 점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침내 그 아름다움을 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깨달은 것이 다만 글이 이루어진 뒤에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일 뿐, 글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각을 얽어 이리저리 표현해 낸 경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다른 이의 안내를 받아 이름난 누각과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누각에서 바라본 강과 산, 아지랑이 낀 숲의 빼어난 경계나 경치 속에 있는 대와 나무, 바위의 기특함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살피지 않은 것이 없으면서, 문득 말미암아 간 길이나 어느 고을을 거쳤는지, 또는 어느 주막에서 자고 어느 고개를 넘었는지, 아니면 어떤 시내를 건너 이곳까지 이르렀는지는 한번도 묻지 않아, 훗날 안내자가 없이는 죽을 때까지 그 장소에 능히 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옛날에 이름난 작가나 이전 시기의 거장을 본받으려면 모름지기 먼저 그 사람이 글을 지을 때 마음이 말미암아 들어간 경로를 찾아 이를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바야흐로 잘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구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그 사람이 생각을 엮은 경로와 꼭 맞지는 않는다 해도 이처럼 노력하면 반드시 융합되어 묘리를 깨닫는 날이 있게 될 것이다.

每讀古人集及他人作詩文, 往往有格調好尙, 與我絶異, 而心愛之, 不啻若自其口出者. 蓋其體雖不同, 而情趣之間, 自然有相感者故也. 文人之膠守一法, 而斥異己者, 政坐不識情趣耳. 讀古人佳作及他人傑句, 非不曉其佳處, 而終不能奪其美而有之. 無他焉. 所曉者, 秪是句成以後, 著見之佳處而已, 不思其句成以前搆思轉折之路徑故也. 譬如隨人指導, 至名樓異境而還, 樓之所眺, 江山煙樹之勝, 境之所有, 竹木巖石之奇, 未嘗不一一領略, 而却不曾問其所由之程途, 歷某州, 宿某店, 踰某嶺, 渡某溪, 而至此. 異日無指導者, 則身終不能至其所矣. 欲傚古名家, 若先覺鉅匠者, 須先求其人作文時, 神思所由入之徑路, 攘以爲己有, 方稱善學. 己之所求, 未必盡與其人搆思之徑路相合, 而如是用功, 必有融然造玅之日.

- 홍길주, 『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

옛 사람의 좋은 작품을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먼저 그 뜻이 말미암아 들어간 경로를 찾아보아야 한다. 대저 그런 뒤라야 능히 가져다가 자기의 소유로 삼을 수가 있다. 그래야 훗날 글을 지으면 문득 그 묘처에 방불하게 될 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옛 사람의 글을 읽으면 한갓 겉으로 드러나는 광채와 기세만 보고 먼저 놀라서 문득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고 단정 짓고는 오직 그 찌꺼기만 주워다가 공령문에 쓸거리로 삼는다.

讀古人佳作, 須先尋其意匠所由入之徑路. 夫然後能取爲己有, 而他日作文, 便可髣髴其妙處. 今人讀古人文, 徒見其外著之光耀氣勢, 已先眩駭, 便自畫以不可幾及, 唯拾取糟粕, 以資功令之用.

- 홍길주, 『수여방필』

장별제(張別提)가 일찍이 말했다. “글 배우는 자가 나이가 아직 장성하지 않고 식견이 투철하지 않은데도 읽은 책이 문득 많게 되면, 앞서 읽은 것은 나중 읽은 것에 묻힌 바가 되어 능히 펴서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이치에 어긋난 듯하다. 하지만 따져보면 또한 속된 선비의 말은 아니다. 대개 사람 중에는 진실로 들은 것이 적은데도 능히 그 아는 바를 다 쓰는 사람이 있고 또한 많이 읽고서도 저술에서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장별제의 주장은 혹 격동됨이 있어 편 것 같다.

張別提嘗言: “學書者, 年未壯, 識解未透, 而所讀書卷遽多, 則先讀者, 輒爲後讀者所埋, 不能發而用之.” 此言驟聞甚乖理. 然究, 亦非俗士之言. 蓋人固有寡聞而能盡用其所知者, 亦或有多讀而不能逢原於著述者, 張之說似或有激而發耳.

- 홍길주, 『수여연필』

나는 책을 읽을 때 능히 수백 번을 넘지 않는다. 『수여방필』에서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젊었을 때 「화식전(貨殖傳)」을 읽었는데, 겨우 이백여 번 만에 비록 꿈속에서도 이를 외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마음이 다른 사물을 생각하면서도 입은 익숙하게 줄줄 외워 이미 십여 행을 내려가곤 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장차 마음을 보존하려는 것인데 마음을 놓아둠이 읽지 않을 때보다도 심함이 있었다. 그래서 버려두고 다른 글을 읽었다. 이제 삼십 년 뒤에 익혀 외우려 하면 서너 줄도 능히 내려가지 못한다. 책을 펼쳐 너덧 번 읽은 뒤에야 비로소 다시 외우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한 책을 문득 천여 번에 이르도록 읽은 이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그 마음을 다잡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한 권의 책을 수천 번 읽으려면 모름지기 먼저 수백 번을 읽어, 내가 「화식전」을 읽은 것처럼, 익숙해지면 바로 버려둔다. 그 사이에 다른 책을 읽다가 한두 해 지나 조금 껄끄러운 듯이 여겨지면 다시 수 십 백 번을 읽어 아주 매끄럽게 되면 그만둔다. 이렇게 몇 십 년이 지나 몇 천 번을 채우게 되면 마음이 방종함에 이르지 않고도 힘을 얻음이 또한 깊게 될 것이다.”

余讀書不能過數百籌, 前筆言之矣. 少時讀貨殖傳, 纔二百餘籌, 雖於睡夢中, 誦之不錯一字, 心思他事物, 而口吻慣滑, 已下十數行. 讀書將以存心也, 而心之放有甚於不讀時. 以故捨而讀他書. 今於三十年之後, 欲溫誦之, 則不能下其三四行. 展卷讀四五遍然後, 始復誦. 人有讀一書, 輒至千餘籌者, 未知能有何術以操其心也. 余嘗謂: “欲讀一書累千籌, 須先讀數百籌, 慣熟如余之貨殖傳, 卽棄之, 間以他書, 經一二歲, 覺其稍澀, 而更讀幾十百籌, 太滑則止. 如是, 經幾十年而滿幾千籌, 則心不至放, 而得力亦似深.”

- 홍길주, 『수여연필』

계서(季緖) 유협(劉勰)은 작가의 반열에 들지도 못했으면서 남의 글 헐뜯기를 좋아하여 당세 거공들의 비웃는 바가 되었다. 대저 다른 사람의 글을 망령되이 헐뜯어서는 안 된다. 그 편장과 체제, 자구와 색상이 갑자기 내 안목을 놀래키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쉽게 평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읽은 책을 내가 다 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읽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다 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저 사람이 비록 명성이 낮고 배움이 부족하더라도 간혹 어쩌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을 알 수도 있거늘 하물며 박식하기가 나보다 나은 사람일 경우이겠는가.

인품의 높고 낮음과 문사의 좋고 나쁨은 능히 스스로 아는 경우가 드물다. 오직 가슴 속에 담긴 서적의 많고 적음은 마땅히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부족한 것을 알아, 다른 사람의 작품 중에 내 눈에 익지 않은 것과 만나게 되면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는 잘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요즘은 그렇지가 않으니, 툭하면 소곤소곤 입을 놀리면서 “옛날에는 이런 것이 없었어.” 라고 말한다. 어찌 등 뒤에서 야유하는 자가 있음을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옛 말에 이르기를, “본 바가 적으면 괴이한 바가 많다.”고 했는데 바로 이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劉季緖未造作者之列, 而喜詆訶文章, 爲當世鉅工所嗤笑. 大抵他人文不可妄詆, 至其篇章體格字句色象之忽駭吾眼目者, 尤不可容易下評. 他人所讀書, 我未必盡讀, 我所未讀, 他人未必盡不讀. 彼雖諛聞淺學容或偶知, 我未及究, 況其博洽過我者乎. 人品之高下, 文詞之工拙, 尠有能自知. 惟胸中書籍之多寡, 宜未有不自知者. 旣自知其寡矣. 遇他人作不慣吾眼者, 宜惕然曰: “是必吾所未知也.” 今也不然, 輒呫呫動其喙曰: “古無是也.” 獨不慮背後有捓瘉者耶? 古語云: “少所見, 多所怪.” 政爲此等人道.

- 홍길주, 『수여방필』

한번은 책상 위에《설부(說郛)*》를 놓아 두었다. 손님이 우연히 그 중에 한 권을 꺼내어 채소 심는 것에 관한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설부》는 농사책이라고 말했다. 또 일찍이 유가서 한 책을 얻었다. 빈 면에다가 잡병을 앓은 경험을 몇 조목에 걸쳐 써 놓았는데 손님이 마침 보고 의가서(醫家書)라고 생각했다. 이는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학식이 넓은 선비도 또한 간혹 이 같은 병통이 있다. 기효람(紀曉嵐)이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교감할 때에 권질이 너무 많아 두루 살펴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왕왕 한두 군데를 들춰 보는 데서 실수가 생겨 마침내 그 전부를 가리곤 하였다. 이 어찌 앞서 손님이《설부》를 본 것과 다르다 하겠는가. [세상에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한 때를 가늠하고, 한 마디 말로 한 사람을 단정하는 것이 모두 이 같은 종류이다.]

* 설부(說郛): 명나라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총서(叢書)다. 백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각종의 이야기를 갈래별로 모았다. 뒤에 욱문박(郁文博)과 청나라의 도정(陶挺)이 증보하였다.

嘗丌寘說郛, 客偶抽其一卷, 見有種菜語, 退告人曰: “說郛農圃書也.” 又嘗得儒書一冊, 有錄雜病經驗數條于其空葉者, 客適見以爲毉家書. 是誠陋者耳. 博雅之士, 亦或有此病. 紀曉嵐校勘四庫全書, 編袟浩瀚, 未暇編閱, 往往偶摘其一二疎失, 遂蔽其全部. 是何異客之觀說郛者耶? [世之以一事盖一時, 一言蔽一人者 皆此類也.]

- 홍길주,『수여방필』

 

 

 

posted by 황영찬

2014-028 無로부터의 우주

 

로렌스 크라우스 지음 | 박병철 옮김

2013, 승산

 

대야도서관

SB092544

 

443.1

크292ㅁ

 

A UNIVERSE FROM NOTHING

 

우주는 왜 텅 비어 있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먼 미래의 우주를 바라보는 크라우스의 관점은 역설적이면서도

소름끼칠 정도로 놀랍다. 과학이 거꾸로 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 리처드 도킨스 후문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우주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가?

우주가 탄생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우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주는 왜 텅 비어 있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과학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크라우스의 자세는 참으로 솔직하다. 저자의 말대로 불안정한 무(無)는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이다. 경이로움과 함께 지적 탐구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 무(無)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 네이처 Nature

 

첨단물리학을 소개하는 탁월한 안내서이다. 크라우스는 어렵고 딱딱한 과학을 쉬운 어휘로 풀어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완벽한 답을 제시한다.

- 뉴사이언티스트 New Scientist

 

최근 들어 과학자들의 뛰어난 통찰과 놀라운 발견이 우주를 뒤흔들었다. 그 격동의 한복판에 로렌스 크라우스가 있다. 그는 넘치는 활력과 탁월한 기지로 놀라운 우주이야기를 멋지게 풀어냈다. '우주는 왜 텅 비어 있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 이 심오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면서 크라우스의 통찰은 절정에 달한다.

- 프랭크 윌책 Frank Wilczek,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재의 우아함 Lightness of Being』의 저자

 

지성의 심연으로 이끄는 탁월한 안내서. 크라우스는 우주의 특성을 설명하는 최신이론을 소개하면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흥미로운 책이다.

- 마리오 리비오 Mario Livio, 『황금 비율의 진실 The Golden Ratio』의 저자

 

우주가 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완전한 무(無)로부터 물리적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는 크라우스의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면서 우주에 대한 경이를 더욱 실감 나게 일깨워준다.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라이브러리 저널 Library Jounnal

 

달콤한 꿈이건 악몽이건 간에, 우리는 경험의 세계에서 깨어 있는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과학이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완전하면서 현실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완전함과 현실성 중 어느 한 쪽 편을 든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게임으로 변하지 않는다.

- 제이콥 브로노프스키(JACOB BRONOWSKI)

 

차례

 

페이퍼백 서문

서문

 

CHAPTER 1 우주의 미스터리 : 탄생

CHAPTER 2 우주의 미스터리 : 우주의 무게

CHAPTER 3 태초의 빛

CHAPTER 4 헛소동

CHAPTER 5 달아나는 우주

CHAPTER 6 우주 최후의 순간에 주어지는 공짜선물

CHAPTER 7 비참한 미래

CHAPTER 8 기막힌 우연?

CHAPTER 9 무(無)는 곧 유(有)이다

CHAPTER 10 불안정한 무(無)

CHAPTER 11 화려한 신세계

 

맺음말

후문

저자와의 문답

역자후기

찾아보기

 

1897년,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우디 크리크 주점의 벽에 걸린 액자에서

우디 크리크(Woody Creek), 콜로라도

 

여행과 관련하여 제일 처음 떠오르는 미스터리는 디음과 같다 : 여행자는 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에 어떻게 도달했을까?

- 루이스 보건(Louise Bogan)

『방 안의 여행(Journey Around My Room)』

 

일반상대성이론

[General Theory of Relativity]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발표한 이론.
특수상대성을 중력까지 확장한 개념으로 빛의 진로가 강한 중력의 장 속에서 굽어진다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뉴턴의 중력 이론을 자신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틀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시도는 1916년에 최종적으로 정리 발표된 일반상대성 이론의 개발로 발전하였다. 이 이론에 일반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이 특수 상대론의 일반화 또는 확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연 현상을 서로 상대적으로 등속도 운동하는 관찰자 사이에 관찰되는 현상에 대한 이론이었던 특수 상대성 이론을 가속도 운동의 경우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의 두 개의 기본원리인 상대성원리와 광속도불변의 원리에,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는 등가원리(等價原理)를 합치고, 구부러진 공간(리만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중력이론을 더하여 전개하였다.

'관성질량'이란 물체에 일정한 힘을 가했을 때 물체가 얻은 가속도의 비를 비교하여 얻은 질량. 물체의 관성의 크기를 나타내는 질량으로 즉,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가속도가 작다는 것은 물체의 관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력질량'이란 양팔저울을 이용해서 물체의 무게를 측정하여 얻은 질량.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무게)의 크기는 질량에 비례하므로(W=mg)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를 비교하면 중력 질량을 측정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관성질량=중력질량'이라는 '등가원리'를 내세웠다.

또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시공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은 중력장의 효과가 시공간의 휨(curvature)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질의 분포와 운동상태가 시공간의 휨을 결정하고 시공간의 휨이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그때까지 뉴턴역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던 수성(水星)의 근일점이동(근일점이동은 수성의 타원궤도가 닫히지 않아 근일점이 1백년마다 각크기 43초씩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현상이 설명되었을 뿐 아니라, 별빛이 태양 부근에서 휜다는 것과 별빛의 스펙트럼의 적색편이가 실측됨으로써 이론의 정당성이 확증되었다.

중력이론으로서는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며, 천체관측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우주론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사고실험

(thought experiment )

단순화된 장치 등의 조건을 설정하고 거기서 일어나리라고 예상되는 현상을 이론에 입각, 사유적(思惟的)으로 추구하는 사고과정. 구체적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고 실험 오차를 수반치 않는 점에서 현실적 실험의 극한을 취한 이상화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찰이나 저항을 수반하지 않는 물체의 운동을 조사하고 선 현미경의 실험 등은 그 실례이다.

사고실험은 양을 정의하는 수단으로서 또 이론 체계에 존재할 수 있는 모순의 검토 등에 이용된다.

 

근일점

[近日點, perihelion]

 지구의 공전궤도가 타원이므로,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1억 4천 7백만 km로 가장 가까워지는 때를 말한다. 보통 1월 3일 경에 나타난다. 행성이나 혜성 등은 타원궤도나 포물선, 쌍곡선 궤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궤도상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점을 근일점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행성의 근일점은 그 방향이 다른 행성의 인력에 의해서 변한다. 또한 A.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태양의 존재에 의해서도 행성궤도의 근일점 방향이 이동한다. 상대성이론에 따른 근일점 이동은 수성궤도의 관측으로 확인되었다.

지구의 근일점은 다른 행성의 섭동(攝動)에 의해 공전방향으로 1년에 11.63˝씩 이동한다. 행성 등의 궤도운동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근일점까지의 거리를 근일점거리라고 한다. 그리고 행성이나 혜성이 근일점을 통과하는 것을 근일점통과라고 말한다. 혜성의 경우 태양에 가장 가까워지므로 태양복사의 작용이 크며, 근일점통과일 때 꼬리가 크고 넓어지는 경우가 많다. 행성 등의 궤도를 결정하는 6가지 요소의 하나로 근일점통과시각이 있다. 정해진 시각의 궤도상의 위치가 정해지면, 그 천체의 운동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양에 가장 가깝고 속도가 빠른 근일점통과시각으로 정해두는 것이 편리하다.

 

현대과학은 태초의 빛(Fiat Lux, 창세기 1장 3절 : "빛이 있으라")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태초에 무(無)의 상태에서 빛과 복사에너지, 그리고 물질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로부터 각종 원소들이 탄생하여 수백만 개의 은하가 형성되었다. 이 모든 것은 물리학적으로 이미 엄밀하게 증명된 사실이다. 우리의 우주가 창조주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과학이 입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선언한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도 존재한다!"

 

- 교황 비오 12세(Pius ⅩⅡ)가 1951년 과학이 창세기의 내용을 증명했다는 취지로 발표한 선언문 

 

 

 

흡수선

[吸收線, absorption line]

 기체 분자 혹은 원자의 양자 내부에너지(전자에너지, 진동에너지, 회전에너지)가 상위 준위에서 하위 준위로 복사 전이되면 그 에너지 준위의 차이에 해당하는 진동수(파장)의 빛, 즉 ΔE = hv을 만족하는 진동수의 빛을 방출하여 방출선(emission line)이 되고, 외부에서 빛이 입사할 때 이 진동수에 해당하는 빛을 흡수하여 하위 준위에서 상위 준위로 복사 전이하면서 흡수선을 만든다. 흡수스펙트럼을 보면 개개의 흡수선은 폭이 매우 좁은 선으로 나타난다. 

 

도플러효과

(Doppler effect)

파원(波源)과 관측자 중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운동하고 있을 때 관측자에게 관측되는 파원의 진동수가 변하는 현상. 1842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J. C. 도플러가 이중성(二重性)의 빛에 관하여 별의 운동방향과 색의 변화를 연구하던 중 처음 발견했다.

〔음파의 도플러 효과〕 정지해 있는 관측자 쪽으로 진동수 (Hz)의 음을 내는 음원(音源)이 속도 (m/s)로 접근하는 경우를 가정하자. 음의 속도는 (m/s)라 한다.

어느 순간에 음원에서 나온 음파의 마루는 1초 사이에 만큼 진행한다.

이 사이에 음원도 만큼 진행하고 음파의 마루를 개 낸다.

음원이 진행하는 방향에서는 사이에 파의 마루가 개 있으므로 파장은 =()/가 되어, 음원이 정지하고 있을 때보다 짧아진다.

그러나 파의 진행속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관측자에게서는 그 음의 진동수가



가 된다.

즉, 진동수가 증가되어 실제의 음보다 높은 소리로 들린다.

반대로 음원이 멀어질 경우에는

=


가 된다.

다음에 음원이 정지해 있고 관측자가 음원 쪽으로 (m/s)의 속도로 접근해 가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음원이 정지해 있기 때문에 공간을 전파하는 음파의 파장은 변함이 없어 이다.

그러나 운동하고 있는 관측자에 대해 파의 마루는 속도 로 다가간다.

그 결과 관측자에게는 파의 진동수는


가 된다.

음원 및 관측자가 모두 운동할 때는 음원에서 관측자 쪽으로 가는 방향을 양으로 하여 속도를 각각 라고 정하면, 그 진동수는



가 된다.

〔광파의 도플러 효과〕도플러 효과는 음파뿐 아니라 모든 파동현상에서 일어난다.

다만 빛의 경우에는 빛의 속도가 매우 빨라 도플러 효과의 영향이 미미하다.

그래서 광원과 관측자의 상대속도가 광속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를 때에만 관측된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로렌츠 변환을 이용하여 기술한다.

음파와 다른 점은 어느 좌표계(관성계)에서도 진공 속의 광속 가 일정한 값을 가지는 것이다.

광원의 좌표계가 관측자의 좌표계 쪽으로 속도 로 병진운동을 할 때, 그 광원이 복사하는 진동수 의 광파가 방향으로 진행하고 관측자에게는 진동수 로 관측된다.

이 진동수의 비는

이다.

여기서 은 속도 방향 성분이다.

특히 에 평행한 경우는


이고, 에 반대방향으로 평행하다면

가 된다.

이들의 비는 ()이 1에 비해 무시될 수 있을 때에만 음파의 도플러 효과의 식과 같은 형식이 된다.

즉, 에 수직인 경우를 예로 들면


이 된다.

이 진동수의 비는 가 크고 ()이 1에 비하여 무시될 수 있을 때에만 1과 다른 값을 가진다.

이것은 광파에서만 볼 수 있는 효과로 가로의 도플러 효과라고 한다.

별이나 성운 중에는 지구에 대하여 시선방향으로 매우 큰 상대속도를 갖고 멀어져 가는 것이 있다.

그 스펙트럼을 정밀분석하면 특정원자의 선스펙트럼이 도플러 효과에 의하여 적색이동을 일으킴을 알 수 있다.

〔마이크로파의 도플러 효과〕항공기나 자동차의 속도측정에 응용된다.

또한 레이저광의 도플러 효과를 이용하여 액체의 유속을 측정하는 도플러 유속계도 실용화되었다.

 

허블의 법칙

[Hubble’s law]

미국의 천문학자 E. 허블이 도플러효과를 빛에 적용해 거리(r)와 적색편이(赤色偏移)의 관계를 밝힌 법칙이다. 1929년 허블은 외부은하의 스펙트럼 사진을 촬영한 결과 스펙트럼선이 적색으로 치우친 것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외부은하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우주팽창설의 관측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허블은 100인치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성운 중의 세페이드를 발견, 그 거리가 90만 광년이며, 따라서 이 소용돌이 성운이 은하 밖에 있음을 입증했다.
이 법칙은 '20세기 천문학의 최대 발견'이라고 칭해진다.

Vr = H × r (Vr : 은하의 후퇴속도, H : 허블상수, r : 은하까지의 거리)

 

초신성

(supernova)

1

이전까지 매우 어두웠던 항성이 갑자기 큰 폭발을 일으켜, 며칠 사이에 약 15등급(100만 배)이나 밝기가 커지는 현상. 폭발 변광성(爆發變光星)은 탄생에서 사멸에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예측할 수 없는 큰 폭발로 인해 갑자기 대단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별인데, 폭발의 규모가 작으면 신성(新星), 대단히 크면 초신성이라고 한다.

태양의 10배 이상의 질량을 갖는 무거운 별이 진화의 최종상태(사멸)를 맞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 결과 중성자별(中性子星) · 펄서(pulsar ; 脈動電波星) · 블랙홀 등이 형성된다.

폭발할 때 발생하는 총 에너지는 태양이 일생(약 100억 년) 동안 방출하는 양과 거의 같은 1044J정도이다.

이것을 불과 며칠 동안에 방출해 버리기 때문에, 그 폭발 직후의 밝기는 -18~-19등(절대등급)으로 태양의 100억 배가 된다.

별 중심부에서의 열핵반응(熱核反應)에 의해 수소가스를 헬륨 · 탄소 · 질소 · 산소 및 새로운 원소로 잇따라 변환하면서 에너지를 생성해 온 무거운 별은 그 진화의 최종단계에서 중심부에 철의 코어를 형성한다.

중심의 온도가 약 50억 K에 이르면 선 강도가 매우 높아져 철의 코어는 광분해를 일으키고, 다량의 열에너지를 흡수해 압력이 저하한다.

그러면 별의 외층부는 그 중심을 향해 급격히 낙하하고, 중력에너지가 해방되어 고온이 되며, 철의 코어 근처에서 규소 등의 열핵반응이 폭주하는데, 그 결과 별의 외층을 폭발적으로 날려 버린다(호일-파울러의 설).

광분해 때 발생하는 다량의 중성자는 철 · 코발트 · 니켈 등의 원자핵에 포획되어, 별의 내부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철보다 무거운 원자핵을 계속 형성해 간다.

이것이 초신성에 의한 중원소(重元素)의 합성이다.

이것들과 탄소 · 질소 · 산소 · 황 등의 원소를 다량으로 함유한 별의 외층가스는 성간공간(星間空間)의 가스와 서로 섞여 가스의 화학(원소) 조성을 변화시킨다.

이 성간가스는 곧 차가워지고, 거기에서 다음 세대의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데, 몇 천만 년 후 다시 초신성이 되어 폭발을 되풀이한다.

은하 속에서는 이와 같이 별의 탄생 · 진화, 초신성의 폭발과 원소합성, 성간가스로의 회귀와 별의 재형성이라는 사이클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 1955년 G. 버비지, W. A. 파울러 등에 의해 밝혀졌다.

폭발한 가스는 초속 1만~2만 km의 속도로 성간공간을 향해, 충격파로 가열되면서 팽창을 계속해 초신성의 잔해(殘骸)로 가스성운을 형성한다.

별의 중심에 있는 철의 코어는 광분해 때 외층의 급격한 낙하에 의한 압력으로 강하게 압축되어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며, 펄서 · X선별로서 관측된다.

이들 천체는 강한 자기장을 갖고 있으며, 하전입자(荷電粒子)를 수십억 eV로까지 가속해 지구에 내리찍어 우주선(宇宙線)으로 관측된다.

은하계 내에서도 드물게 나타나 1054년 황소자리 초신성, 1572년 카시오페이아자리 초신성, 1604년 뱀주인자리 초신성의 3개가 관찰되었다.

 

2

별이 갑자기 태양의 100억배,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은하에도 필적할 정도의 밝기로 빛나는 현상. 한국·중국·일본·아라비아·유럽의 기록에서, 우리의 은하계에서는 185년 이래로 적어도 8개 출현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1006년, 1054년, 1572(티코의 별), 1604년(케플러의 별)의 4개가 특히 유명하다. 1054년의 초신성후에는, <게성운>이 발견되었다. 티코의 별과 케플러의 별은 중세 유럽의 <천공은 불변이다>라는 우주관을 뒤집는 역할도 하였다. 망원경의 발달에 의하여 은하계 이외의 은하에서도 초신성이 관측되게 되었는데, 매년 10여 개가 발견되었다. 하나의 은하에서는 약 50년에 1회의 비율로 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케플러의 별 이래로 은하계에서는 초신성은 발견되어 있지 않은데, 은하계에서 약 16만 광년 떨어진 바로 이웃 은하, 대 마젤란운에서, 1987년 2월 24일, 384년만에 육안으로 보이는 초신성(초신성 1987 A)이 나타났다. 초신성은 별이 그 진화의 마지막에 일으키는 대폭발로, 스펙트럼의 특징으로, 수소를 포함하지 않는 I형과 수소를 포함하는 II의 2가지로 나뉘어진다. 대 마젤란운의 초신성은 Ⅱ형이다.

 

케플러의 법칙

[Kepler’s laws]

케플러는 브라헤의 행성 관측 결과로부터 행성(planet)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세 가지의 법칙, 즉 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의 법칙, 주기의 법칙을 찾아냈다. 케플러의 법칙은 후에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데 핵심적인 수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케플러의 법칙은 태양 주위의 행성의 궤도들로부터 유도되었지만, 위성에도 적용된다.

① 타원 궤도의 법칙(The Law of Orbits) : 제1법칙으로, 모든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이다. 궤도가 타원인 이유는 중력이 역제곱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역제곱의 법칙(Inverse Square Law)이란 힘(또는 양)이 떨어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법칙으로, 전기력, 중력 등의 자연 법칙이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② 면적의 법칙(The Law of Areas) : 제2법칙으로, 한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가므로, 행성은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움직이고, 멀어질수록 더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면적의 법칙을 따르는 이유는 운동량의 보존(Conservation of angular momentum) 때문이다.

③ 주기의 법칙(The Law of Periods) : 제3법칙으로,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공전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고 본다. 주기의 법칙을 따르는 이유는 뉴턴(Newton)의 중력의 법칙(Law of gravitation)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것은 '알려진 지식(known knowns)'이며,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것은 '알려진 미지(known unknown)'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unknown unknowns)'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아직 모르고 있는데,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 도널드 럼스펠트(Donald Rumsfeld)

 

암흑물질

[暗黑物質, dark matter]

우주 총 물질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어떠한 전자기파(전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 등)로도 관측되지 않고 중력을 통해서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물질이다. 은하계의 질량은 광학적인 측정으로 구한 항성의 수 또는 그 회전운동의 속도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은하계 내에는 수소가스가 떠돌고 있는데, 수소원자에서 발생하는 전파에 의해서도 은하의 넓이와 질량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 얻은 은하의 질량은 빛을 내고 있는 별의 측정으로 구한 질량의 10배나 되고, 은하의 바깥쪽에도 널리 퍼져 있다.

이 사실에서 가시광으로 관측할 수 있는 은하의 외부에 빛이나 전파를 방출하거나 흡수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물질이 대량으로 있으며, 수소가스는 중력에 의해 그들 물질을 당기거나 회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흑물질의 정체는 중성미자(中性微子, neutrino) 등의 물질로 예상할 수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얻지 못하고 있다. 별과는 달리 빛을 방출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 물질이다. 중력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대붕괴

[big crunch, 大崩壞]

아인슈타인 중력이론을 균일등방인 우주모형에 적용하면, 우주의 팽창률은 그 속에 포함된 물질의 밀도와 공간의 곡률에 따라 결정된다. 곡률항의 부호에 따라 세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부호가 음이면 팽창이 진행함에 따라 물질의 밀도는 희박해지지만 팽창은 곡률에 의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 된다(열린 우주). 곡률항이 양이면 어떤 시점에 이르러 곡률항과 물질항은 값이 같고 부호는 달라 차츰 팽창을 감속하게 되며, 그후에는 수축하여 결국에는 모든 물질이 다시 한 점으로 모이게 되며, 이를 대붕괴라고 부른다(닫힌 우주). 중간 경우로, 곡률이 0이면 물질항만이 팽창을 유지시키므로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밀도가 감소하게 되어 차츰 팽창을 멈추게 된다(평탄 우주).

위의 모든 경우에 팽창의 시작은 대폭발이라고 부르는 밀도와 시공의 곡률이 무한인 점에서 시작하게 되며 초기에는 공간곡률보다는 밀도항이 우세하여 세 가지 경우가 모두 비슷하게 진행된다. 물질밀도와 팽창률의 관측으로부터 공간곡률을 측정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관측결과로는 열린 우주 쪽을 지지하지만 아직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퀘이사

[quasar]

블랙홀이 주변 물질을 집어삼키는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는 거대 발광체로서 '준성(準星)'이라고도 하며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천체이다. 퀘이사는 하늘에서 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천 내지 수만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이다. 퀘이사가 그렇게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은,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들은 퀘이사가 이처럼 거대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이유를 중심의 블랙홀 때문으로 보고있다. 퀘이사의 중심에는 태양 질량의 10억 배나 되는 매우 무거운 블랙홀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원반이 둘러싸고 있다. 원반의 물질은 회전하면서 블랙홀로 떨어지고 있으며, 이때 물질의 중력 에너지가 빛 에너지로 바뀌면서 거대한 양의 빛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에 퀘이사는 우리 은하 내의 평범한 별로 간주되었고 퀘이사에서 오는 전파를 분류해 내지 못하고 단지 우리 은하 내의 어떤 전파원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네델란드계 미국인 천문학자인 마틴 슈미트가 전파성(전파를 발생하는 별)의 스펙트럼을 연구하던 중 퀘이사를 발견하였다. 퀘이사의 스펙트럼은 수소의 것과 비슷하였으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큰 적색 편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을 허블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이제까지 발견된 어떤 외부 은하보다 더 멀리 있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어떤 경우는 광속의 90%)로 멀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은하계 내에는 1,000억 개의 별이 있는데 한 개의 퀘이사가 이 모든 별을 합친 것보다 200배나 더 밝다. 그러면서도 어떤 퀘이사의 경우 직경이 1,600억km밖에 되지 않는다. 퀘이사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들이 별처럼 보여 준성전파원(Quasar : Quasi-stellar radio source)이라는 의미에서 퀘이사라 불리게 되었으나, 이들이 모두 전파원(radio source)은 아니므로, 정식 명칭은 준항성상 천체(QSO : quasi stellar object)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퀘이사(Quasar)로 계속 불리고 있다.

 

강입자충돌기

[Large Hadron Collider]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 :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가 제작한 태초에 에너지와 물질이 분리되지 않았던 빅뱅 직후의 고에너지 상태 재현을 위해 빛의 속도에 가깝게 양성자를 가속해 충돌시키는 장치다.

이 장치는 1980년대에 구상되고 94년 사업에 착수한 거대과학의 전형으로, 2008년 9월 10일 완공하여 첫 가동을 할 때까지의 14년 동안 60억 달러(약 6조 원)가 투입됐고, 한국 물리학자 60여 명을 포함하여 80개국 9,000여 명의 세계 물리학자들이 참여한 세계 최대의 실험장치다. 규모만도 길이가 27km에 달하는 둥근 터널 모양의 장치로, 스위스ㆍ프랑스 접경 쥐라산맥 지역의 지하 50∼170m에 건설됐다.

이전까지 가장 큰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7배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장치다. 그러나 장치를 제작하여 첫 가동 실패에 이어 이튿날 실시한 재가동, 2009년 2월에 실시한 3차례의 가동 또한 실패로 돌아가, 양성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충돌시키고자 하는 실험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강입자충돌기(LHC)의 구조
빅뱅 재현을 위해 우선 직선의 가속기로부터 원형의 LHC를 향해 머리카락 굵기의 양성자 빔을 쏜 뒤 자석으로 양성자의 방향을 틀어 원둘레 27km를 시계방향으로 돌게 하고, 이후 반시계방향으로 빔을 쏘아 이 실험이 성공하면, 최종적으로 양쪽 방향으로 양성자를 쏘아 광속에 가깝게 가속, 정면 충돌시킨다. 입자끼리 충돌할 경우 태양의 중심온도보다 10만 배나 뜨겁게 달궈진다.

양성자를 27km 둘레의 원형궤도에 잡아두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기장이 필요한데, 이러한 자기장을 얻으려면 초전도자석이 필요하다. 초전도를 유지하기 위해 60톤의 액체 헬륨을 쏟아 부어 내부 온도는 영하 271.3도, 달보다 10배 희박한 진공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지름 6cm 파이프 안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신호 검출은 파이프를 감싼 폭 수십m의 '엘리스(ALICE)', '아틀라스(ATLAS)', '시엠에스(CMS)', 'LHCb' 4대의 대형검출기가 한다.

실험 목적
과학자들이 이 실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켜 이때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1964년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가 예측했던 '힉스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입자충돌기 내부에서 양성자가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쿼크 같은 소립자들과 함께 힉스입자가 극히 짧은 순간이나마 그 존재를 나타낼 것이라고 기대하며, 초정밀 검출기를 통해 튀어나오는 입자를 찾겠다는 것이다.

LHC는 힉스입자 탐색뿐 아니라, 우주의 23%를 구성하는 '암흑물질'을 규명, 3차원 공간 외에 또다른 여분 차원이 존재하는지, 보통 입자들과 짝을 이루지만 보이지 않는 초대칭 입자, 원자 크기의 1억분의 1인 미니 블랙홀이 충돌 때 생성되는지도 검증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것은 처음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영광의 찬가(Gloria Patri)  중에서

 

쌍곡기하학

[hyperbolic geometry, 雙曲幾何學]

19세기 초, N.I.로바체프스키(1793∼1856)와 J.보여이(1802∼1860)는 유클리드평행선공리를 부정하고, 대신에 "한 직선 밖에 주어진 점을 지나서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무수히 그을 수 있다"라는 공리를 토대로 하여 하등의 모순성이 없는 기하학을 건설했다. 이것을 쌍곡기하학 또는 로바체프스키의 비유클리드기하학이라고 한다.

 

우주마이크로파배경복사

[宇宙-波背景輻射 , 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

3 K 흑체복사를 말한다. 1950년대부터 우주진화에 관한 두 가지 설 사이에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65년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으로 빅뱅이 확인되어 진화우주론이 옳다는 것이 거의 실증되었다. 이것은 마이크로파 인공위성에 의한 텔레비전 중계용 안테나에 항상 일정한 잡음이 남는다는 사실이 계기가 되어 발견되었다. 그 잡음의 원인은 우주에서 등방적으로 들어오는 복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복사에너지의 분포는 절대온도 약 3 K(2.74 K)인 흑체복사의 분포와 잘 일치하므로 3 K 흑체복사 또는 우주배경복사라고 한다. 이 복사의 기원은 진화우주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현재에는 먼 곳의 은하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는 빛에 대하여 충분히 투명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팽창우주의 초기에는 밀도가 높아서 빛이 자유로이 투과할 수 없는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 시대에는 물질로부터의 복사방출과 그에 의한 흡수평형상태를 이루었고, 물질의 온도에 따르는 흑체복사로 우주가 균일하게 채워져 있었다. 3K 흑체복사는 이러한 과거의 흑체복사의 빛이 적색이동을 한 것이다. 1992년에는 우주배경복사탐사위성 COBE에 의해 초기우주의 극히 미세한 온도 차에 따라서 물질의 요동(fluctuation)을 보여주는 마이크로파지도가 작성됨에 따라 빅뱅우주론과 진화우주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플라스마(플라즈마)

[Plasma]

플라즈마란 초고온에서 음전하를 가진 전자와 양전하를 띤 이온으로 분리된 기체 상태를 말한다. 이때는 전하 분리도가 상당히 높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음과 양의 전하수가 같아서 중성을 띠게 된다.

일반적으로 물질의 상태는 고체·액체·기체 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 플라즈마는 흔히 <제4의 물질 상태>라고 부른다. 고체에 에너지를 가하면 액체, 기체로 되고 다시 이 기체 상태에 높은 에너지를 가하면 수만℃에서 기체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분리되어 플라즈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플라즈마를 만들려면 흔히 직류, 초고주파, 전자빔 등 전기적 방법을 가해 플라스마를 생성한 다음 자기장 등을 사용해 이런 상태를 유지 하도록 해야한다.

일상생활에서 플라즈마를 이용하려면 이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우주 전체를 보면 플라즈마가 가장 흔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전체의 99%가 플라즈마 상태라고 추정된다.

번개, 북극 지방의 오로라, 대기 속의 이온층 등이 플라즈마 상태이다. 대기 밖으로 나가면 지구 자기장 속에 이온들이 잡혀서 이루어진 반 알렌대,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태양풍 속에도 플라즈마가 존재한다. 별의 내부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기체도 플라즈마 상태이다. 별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수소 기체도 플라즈마 상태이다.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인 플라즈마상태로는 형광등, 수은등, 네온사인, PDP(plasma display panel) 등이 있다.

플라즈마를 인공적으로 생성 실용화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플라즈마는 수억도의 온도를 갖는 초고온 핵융합에 이용되는 플라즈마로부터 최근의 반도체 공정, 신소재 합성등에 이용되는 저온 글로우 플라즈마나 아크플라즈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된다.

특히 공업적으로 많이 연구, 응용되는 것은 저온 플라즈마. 플라즈마 안에서는 반응성이 극대화되어 물질의 이온화와 재결합이 활발해지기 때문에 플라즈마를 이용하여 기존의 물질의 합성이나 가공 방법으로는 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도 있고 공해유발 공정이나 난공정 등을 대체할 수 있다.

 

부족한 것은 남는 것보다 낫다(Less is more).

-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구를 미스 반 데어 로에(Miss van der Rohe)가 인용함.

 

우주상수

[宇宙常數, cosmological constant]

우주상수에 관하여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물체는 길이가 줄고, 질량이 늘며, 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등의 기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적으로 가속도운동을 하는 물체의 경우까지 포함하여 발전시킨 것이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이 이론은 특히 질량이 아주 큰 천체나 우주 등을 다룰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 이론을 우주에 적용시킨 결과가 바로 우주가 팽창하거나 수축한다는 것이다.

미국 천문학자 허블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우주는 영원불변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우주의 모형을 설정하면 결국 우주는 수축하여 찌그러지고 말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수축을 멈추기 위해 '우주상수'를 식에 첨가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이것을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였는데, 오늘날 우주상수는 우주의 탄생이나 진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파동함수

(wave function)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 원자 · 분자 및 원자핵 · 소립자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이를 좌표의 함수. 상태함수라고도 한다.

좌표의 함수 대신 운동량과 그 밖의 양(力學變數)의 함수를 쓰기도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물리량은 연산자(演算子)로 표현하는데, 물리량이 어떤 값을 취하는 상태의 파동함수는 이 물리량의 연산자의 고유함수(固有函數)로 주어진다.

예컨대 x방향의 운동량의 연산자는 -(는 플랑크 상수 h의 1/2π)이므로, 고유값 P'의 파동함수 ¢(x)는 고유값방정식 =p'를 만족 하며, 파동함수는 ¢(x)=cexp (ip'x/) 로 주어진다.

단, expα =e를 나타낸다.

C는 각 경우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는 상수이다.

파동함수 ψ의 시간적 변화는 계(系)의 에너지의 연산자 H를 써서 -로 주어진다.

이것이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이 계가 고유값 E의 에너지의 고유상태이면 H=E이며, 이 경우의 파동함수의 시간변화는 =exp(iEt/h)가 된다.

여기서 는 시간에 의하지 않는 H=E를 만족하는 파동함수이다.

이 방정식도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한다.

 

불확정성 원리

[不確定性 原理, uncertainty principle]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고도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크기인 10-8cm 이하의 극히 미세한 세계에서의 에너지나 운동량은 야구공이나 축구공이 갖는 에너지나 운동량과는 다르고, 진동수나 파장도 눈에 보이는 줄이나 물결의 진동수 및 파장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같은 시간 t에 완전히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물리량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 시간과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오차가 나오는데, 하이젠베르크는 그 오차를 계산한 결과 플랑크 상수(h)를 곱한 수가 오차가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또 입자의 위치를 결정한 순간 속도, 운동량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매번 여러 가지 값으로 나왔다. 즉, 운동량이 불확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p를 운동량의 불확정성(오차), △x를 위치의 불확정성(오차)이라 하면 △p × △x ≥ h ∕ 4π인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다. 이 관계를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

고전역학에 의하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때 전자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동시에 측정할 수 있으며 완전한 측정 장치를 만들기만 하면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불확정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위치 x와 운동량 p는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고 쌍방의 불확정성(오차) △x와 △p가 서로 제약돼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고 하면 위치가 불확정해지는 것이다.

 

물질의 기원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생명의 기원은 하찮은 문제에 속한다.

-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암흑에너지

[dark energy]

우주 '암흑에너지'는 만유인력과 정반대되는 힘으로, 우주 팽창을 가속화하는 에너지이다. 질량을 가진 물질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만 있다면 우주가 한 점으로 수축했겠지만,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는 데서 중력보다 더 강한 밀어내는 힘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여 나온 개념이다.

우주는 대폭발에서 출발하여 팽창을 계속해 왔다. 바로 수년 전까지도 우주의 자체 무게 때문에 우주의 팽창 속도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최근의 초신성 관측은 팽창 속도가 오히려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암흑에너지가 우주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관측 결과이다. 암흑에너지는 물질이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과 달리 서로 밀어내는 '척력'의 에너지인데, 중력이 우세하던 감속 팽창의 시기에 이어 암흑에너지가 다시 우세해지면서 가속 팽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암흑에너지의 존재는 우주의 가속 팽창 학설이 본격 제기된 1998년 이후 가설로만 남아 있다가, 2003년 2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암흑에너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우주의 초기 모습을 공개하면서 처음 입증됐다. 우주 대폭발(big bang)의 흔적으로 지금도 미세하게 남아 있는 '태초의 빛'인 우주배경복사(CBR)를 NASA의 '윌킨슨 마이크로파 관측위성(WMAP)'이 관측해서 보내온 정밀한 데이터에 근거, 과학자들은 우주 전체의 에너지 가운데 별ㆍ은하ㆍ행성ㆍ가스 등 우리가 정체를 알고 있는 물질은 4%에 불과하며, 나머지가 암흑물질(24%)과 암흑에너지(72%)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암흑에너지의 존재는 우주의 3차원 지도를 그리려는 국제 연구 프로젝트인 '슬론 디지털 스카이 서베이(SDSS)'의 지상 망원경이 2003년 10월까지 은하 20만여 곳을 관측해 내놓은 데이터의 결과와도 일치됐다. 이로써,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도 계산되었는데 우주는 1초당 71km(약 330만광년 떨어진 은하 기준) 속도로 팽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현재 은하들 사이의 거리와 멀어지는 속도에 근거해 영화필름을 되돌리듯이 거꾸로 계산한 결과, 단일점에서 시작된 우주 탄생의 대폭발은 '137억년 전'(오차 1%)에 일어났다는 계산도 나왔다.

그러나 암흑에너지의 실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주는 크다.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당신은 약국까지 가는 길이 엄청나게 멀다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 더글라스 애덤스(Douglass Adams),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잠열

(latent heat)

물질의 상태가 기체와 액체, 또는 액체와 고체 사이에서 변화할 때 흡수 또는 방출하는 열. 예컨대 얼음이 녹아 물이 될때는 둘레 에서 열을 흡수하고, 거꾸로 물이 얼어 얼음이 될 때는 같은 양의 열을 방출한다.

이와 같은 경우, 열의출입 이 있더라도 온도는 변하지 않으므로 이 열을 잠열이라 부른다. 온도를 올렸을 때 생기는 변화에서는 잠열의 흡수가, 그 반대의 변화에서는 잠열의 방출이 일어난다.

알코올을 피부에 대었을 때 차게 느껴지는 것은 알코올이 기화할 때 피부로부터 잠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준안정상태

[metastable state, 準安定狀態]

열역학적으로 가장 안정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작은 흔들림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정한 상태이다. 보통 들뜬 상태의 에너지 준위의 평균 수명은 10-8초 정도이나, 준안정상태에서의 수명은 10-3초로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레이저가 발생하려면 적어도 3개 이상의 에너지 준위가 필요하며, 그 중 한 개는 준안정상태이어야 한다. 즉 준안정상태의 원자 수가 바닥상태의 원자 수보다 훨씬 많은 밀도반전 상태가 되어야 한다.

교통 표지나 시계, 계기의 문자판 등에 있는 야광 물질은 인광을 발산하는 물질인데 물질에 빛을 쪼여줄 때 그 물질에서 발하는 빛을 형광이라고 하고, 빛을 제거해도 발광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인광이라고 한다.

인광체가 빛을 흡수하면 이를 구성하는 물질의 전자가 들뜬 상태가 되는데, 들뜬 상태의 전자는 빛이 제거되더라도 바로 바닥상태로 떨어지지 않고 먼저 준안정상태로 이동한 후 다시 바닥상태로 떨어지면서 빛을 방출한다.

 

미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 요기 베라(Yogi Berra)

 

주계열성

[主系列星, main sequence star]

천구 상의 별들 가운데 90% 이상의 별들이 주계열성에 속한다. 주계열성은 처음으로 중심핵에서 수소핵융합반응을 시작하여 안정된 평형상태를 이루는 초기의 진화단계이면서도 또한 그의 대부분의 일생을 주계열 단계로서 살아가게 된다. H-R도 상에서 대부분의 별들은 온도가 높고 광도가 밝은 좌상단에서부터 온도가 낮고 광도가 어두운 우하단으로 대각선으로 놓이며 이러한 별들을 주계열성이라 부른다.

태양 근처의 별들에 대한 HR도

구상성단 M5의 HR도

 

슈바르츠실트의 해

[Schwarzschild’s soultion]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하나의 질점 주위에 있는 만유인력장에서의 세계선의 선소(線素)를 나타내는 식.

이는 원점으로부터 무한원인 곳에서는 평탄한 계량이 되는 진공 내 만유인력장 방정식의 하나인 구대칭이며 정적인 해이다. 슈바르츠실트가 이끌어냈다.

 

조물주가 어떤 계획하에 우주를 창조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병든 몸으로 태어나도 잘 살아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어떤 잔인한 실험의 대상으로 우리가 선택되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우주는 왜 하나인가?"라는 질문은 최근 들어 "여러 개의 미니-우주들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의 우주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지만, 앞의 질문보다는 쉽다.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받아 들인다면, 우주의 거시적 구조와 우리의 대한 관점을 바꿀 수밖에 없다.

- 린데, 198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끈이론

[string theory]

여기서 끈은 흔히 분자로 이루어져 눈에 보이는 끈이 아니라 더 이상의 세부구조를 갖고 있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를 말한다.
자연계에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의 4가지 힘이 존재한다. 끈이론은 이 4가지 힘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끈이론은 자연계의 기본입자가 하나의 자유도를 갖는 점(point)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도를 갖는 1차원 끈(string)이라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끈의 진동 형태에 따라 입자의 질량을 비롯한 모든 물리적 성질이 결정되고 우주도 이에 따라 형성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끈의 진동이 격렬하면 에너지가 크고 질량도 커진다. 끈의 진동 세기에 의해 힘의 크기가 결정되고, 끈의 진동 패턴에 따라 힘의 종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가 결정된다.

끈이론은 이후 초끈이론으로 발전하여 일반상대성이론양자역학이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주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통일장이론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또한 지난 50년 동안 과학계를 지배했던 점으로부터 시작하는 빅뱅이론을 부정하여 새로운 개념의 우주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직 완벽한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문제도 많다.

 

양자중력

[quantum gravity, 量子重力]

양자중력 이론중력의 상호작용을 양자화하려는 시도이다. 중력을 양자화하기 위한 현상으로 보통 블랙홀이 거론된다. 블랙홀 내부에서는 상대성이론이 파탄을 초래한다고 생각되며, 여기에서는 시공(時空)을 양자화한 이론이 성립되는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방향에 의한 최근의 발전으로는 홀로그래픽 원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블랙홀 내부의 정보량의 보존한계는 그 부피가 아니라 표면적에 의존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이론이다.

양자중력을 생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양자중력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기본적인 원리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중력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4가지 힘 가운데 가장 약한 데다가, 양자화된 중력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현상은 현재 도달할 수 있는 기술 수준에서는 관측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고도의 천체망원경에 의해서 블랙홀을 보다 더 자세히 관측할 수 있게 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밖에 양자중력을 다루는 것으로 루프 양자중력이론이 있는데, 초끈이론만이 양자중력을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대칭

[超對稱, supersymmetry]

양자이론에서 기본입자의 특징은 동일입자인데, 이것은 여러 개의 같은 입자(예를 들면 전자)가 있을 때, 이 입자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징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2개의 입자를 서로 바꾸어도 똑같은 상태가 된다(이 상태의 부호는 원래와 같거나 반대일 수 있음). 2개의 입자를 바꿀 때 부호가 원래와 같은 입자를 보손이라 하며, 부호가 바뀌는 입자를 페르미온이라 한다. 실제의 세계에서 초대칭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초전도체

[superconductor, 超傳導體]

도체의 경우 온도가 증가하면 전기저항 역시 증가하여 전기가 잘 흐르지 않고, 온도를 감소시키면 저항이 작아져 전도가 잘 일어난다. 특히 온도를 극저온으로 감소시킬 때 전기저항이 0에 가까워지는 현상을 초전도현상이라 한다.

초전도체의 기원
1911년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의 물리학교수 카멜린 온네스가 처음으로 초전도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수은의 전기저항을 측정하는 실험을 하다가 절대온도 4.2K(영하 268.8℃)에서 전기저항이 갑자기 없어지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를 초전도현상(superconductivity)이라 이름 붙였다. 초전도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온도를 임계온도라 하는데, 임계온도가 너무 낮으면 초전도체를 실용화하기 어려우므로 임계온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졌다. 카멜린 온네스 교수 이후 아칸소대학 헤르만 교수가 125K에서 초전도현상이 나타나는 초전도체를 발견하였으며, 1993년 초 스위스에서 임계온도 133K, 1993년 말 프랑스에서 임계온도 250K의 초전도체 박막을 제작하였다.

초전도체의 종류
홑원소물질로 나이오븀(Nb), 바나듐(V) 등 20여 종의 금속원소가 있으며 합금으로는 나이오븀과 저마늄의 합금(Nb3Ge)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금속이나 합금 등이 초전도 상태가 되는 온도는 가장 높은 경우 절대온도 23K으로 매우 낮다. 최근 네오디뮴(Nd), 란타넘(La) 등의 원소를 포함하는 금속화합물이나 특수한 자기물질(세라믹스)에서는 극저온이 아닌 비교적 고온에서 초전도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초전도체의 응용
고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전도체가 실용화되면 전기·전자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될 것이다. 초전도체 내부에는 자기장이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내부에 있던 자기장도 밖으로 밀어내는 성질인 완전반자성도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자석 위에 떠오르는 자기부상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완전한 전도체로서의 성질을 이용하여 전선을 만든다면 20% 이상의 전력 손실이 거의 사라지게 되어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초끈이론

[-理論, superstring theory]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으로 보고 우주와 자연의 궁극적인 원리를 밝히려는 이론이다. 197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1980년대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존 슈바르츠(John H. Schwang, 1941∼)와 잉글랜드 물리학자인 마이클 그린(Michael B. Green, 1946∼)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초끈이론은 끈이론에서 발전한 이론으로, 우주의 최소 단위가 마치 소립자나 쿼크처럼 보이면서도 이보다 훨씬 작고 가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어, 1차원적인 끈의 지속적인 진동에 의해 우주 만물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한다.

 

대통일이론

[大統一理論, Grand Unified Theories]

자연계에 있는 기본 입자와 네 가지 힘을 한 가지 입자와 한 가지 힘으로 통합하려 하는 물리 이론이다.

 

나는 무언가를 모른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무지는 나를 겁줄 수 없기 때문이다.

-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Fiat justitia - ruat caelum.(옳은 일을 행한 후, 하늘의 처분을 기다려라.)

- 고대 로마 속담

 

양자전기역학

[quantum electrodynamics, 量子電氣力學]

디랙(Paul Dirac, 1902-1984)은 그의 전자이론과 맥스웰 방정식[전기와 자기]의 양자공식을 이용하여 대전된 입자에 대한 복사장의 양자역학적 기술을 하였다. 1927년 디락은 광자의 생성과 소멸에 의해서 복사의 방출과 흡수가 장의 양자상태에 따라 교대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1901-1976)와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는 초기의 양자전기역학을 다듬어서, 전자를 하나의 결과적인 점전하로 다루었고, 1930년 오펜하이머는 무한전하밀도를 주목하고 무한한 에너지가 그 자체의 방사장과 무한질량이 상호작용을 이룬다고 하였다.

도모나가(Sin-Itiro Tomonaga, 1906-1979), 쉬빙거(Julian Schwinger, 1918-미상) 그리고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미상)이 각각 독립적으로 이 같은 비 물리적 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전자의 무한자체에너지(self-energy)와 진공의 분극화로 생기는 난점을 설명하기위해서, 그들은 디락 방정식에서 전하와 질량에 무한 보정항을 추가함으로서 실험상에서 측정된 양들과 바꿀 수가 있었다. 무한대에서 나오는 오류를 재 규격화함(renormalization)으로서 초기의 양자전기학은 완벽히 상대론적으로 다룸으로서 이루어졌다. 도모나가와 쉬빙거의 공식은 국소작용에 의한 복사장(방사장, 내비침마당, radiation field)을 통해서 전파되는 전하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하고, 이에 비해 파인만의 접근은 원격작용에 기초하고 있다[인력]. 이런 방식의 해결책은 현대물리의 새로운 분야를 설명하는데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즉, 우주선 소나기, 전자의 비정상 자기모멘트, 금속의 초전도[저온학], 헬륨의 초유동, 그리고 전자와 양전자(positron), 포지트로니움(positronium)[입자물리]의 준안정구조 등이다.

 

그것은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다.

-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이신론

[理神論, deism]

신(神)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만, 이를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고, 기적 또는 계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성적(理性的)인 종교관. 라틴어 deus(신)에서 온 말이다.
이신론은 기독교 신학과는 대립적으로 계시신앙에 기초하지 않으며, 이론적·과학적 신 해명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신앙의 추종자를 이신론자(deist) 또는 자연신론자라고 한다. 콜린즈(J.A. Collins)의 《자유사색 논고》(A Discourse on Free Thinking) 속에서 이들은 주로 자유사상가라고 칭하여졌다. 영국의 톨랜드(J. Toland)·틴달(M. Tindal)·샤프츠버리(E of Shaftsbury),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루소(J.J. Rousseau), 독일의 라이마루스(H.S. Reimarus)·레싱(G.E. Lessing) 등이 대표자들이다.

 

경험적 사실을 진리로 확증하는 것은 매우 심오한 과제이며, 르네상스 이후로 인류문명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 제이콥 브로노프스키(Jacob Bronowski)

 

 

 

 

 

 

 

 

 

 

 

 

 

 

 

 

 

 

 

 

 

 

 

 

 

 

 

 

 

 

'내가 읽은 책들 > 2014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029 무대 미술 감상법  (0) 2014.03.05
2014-027-2 오직 독서뿐  (0) 2014.03.05
2014-027-1 오직 독서뿐  (0) 2014.03.03
2014-027 오직 독서뿐  (0) 2014.03.03
2014-026 물소리 새소리  (0) 2014.02.27
posted by 황영찬

2014-027-1 오직 독서뿐

양응수梁應秀(1700~176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가 백수白水다. 권집權緝과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집 『백수집白水集』 30권 17책이 전한다. 1755년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사서강설四書講說」을 남겼고, 공부법의 방향을 갈래별로 엮은 『위학대요爲學大要』를 정리해 남겼다.

이 책에 수록한 독서에 관한 글은 『백수집』 권 26의 『위학대요』 중 「독서법讀書法」 항목에서 오늘날에 음미할 만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독서법」에 수록된 글은 모두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주자와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등 송대 학자들이 언급한 독서의 단계와 방법을 망라해 간추린 내용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공부법이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공부법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주로 독서에서 유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과 유의점을 설명한 내용이 많다. 어록체의 글이라 백화투의 표현이 섞여 있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책을 읽는 것은 장차 이치를 궁구하고, 실용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제 혹 문장 구절의 말단에만 마음을 쏟는 것은 소용이 없다.”

程子曰 : “讀書將以窮理, 將以致用也. 今或滯心於章句之末, 則無所用也.”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책을 읽을 때 유사하다 하여 그 뜻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마다 서로 막힌다. 마땅히 문장의 기세와 아래 위의 뜻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충실(充實)한 것을 일러 미(美)라고 한다고 할 때의 아름다움과, 시의 미(美)라고 할 때의 아름다움은 같지가 않다.

凡讀書, 不可以相類泥其義. 不爾, 則字字相梗. 當觀其文勢上下之意. 如充實之謂美, 與詩之美不同.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일찍이 독서가 사람을 기쁘게 할 때가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손과 발이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할 때가 있음을 알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옛사람의 뜻과 선생의 뜻이 서로 합치된 뒤라야 이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嘗覺讀書有令人喜時, 有令人手舞足蹈時. 或問 : “莫是古人之意與先生之意, 相合後, 如此否?” 曰 : “是也.”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읽은 책이 적으면 살펴 따져서 정밀한 뜻을 얻을 길이 없다. 대개 책이란 이 마음을 유지시켜 준다. 한때라도 내려놓으면 그만큼 덕성이 해이해진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항상 간직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의리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책은 모름지기 줄줄 외워 정밀하게 생각해야 한다. 흔히 밤중에 앉아 있을 때나 혹 고요히 앉아 있다가 얻곤 한다. 하지만 글을 기억하지 못하면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루 꿰어 큰 근원을 얻은 뒤라야 글이 쉽게 기억된다. 책을 보는 까닭은 자기의 의심을 풀고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는 데 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유익을 더하면 배움은 진전된다. 하지만 의심치 않던 곳에서 의심이 생겨야 바야흐로 나아간 것이다.

讀書少, 則無由考校得義精. 蓋書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讀書則此心常存, 不讀書, 則終看義理不見. 書須成誦精思. 多在夜中, 或靜坐得之. 不記則思不起, 但通貫得大原後, 書亦易記. 所以觀書者, 釋己之疑, 明己之未達. 每見每加新益, 則學進矣. 於不疑處有疑, 方是進.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꼼꼼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모두 설명이 있으니, 제가의 풀이를 하나하나 관통한 뒤라야 그 옳고 그름을 견줘보아 성현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뜻을 구할 수가 있다. 비록 이미 얻었더라도 또한 다시 이처럼 되풀이해 살피고 음미해서 그 의리가 내 안에 흠뻑 젖어들어 피부에 스미고 골수까지 무젖게 해야만 배웠다고 말할 수가 있다.

讀書先要虛心平氣熟讀精思. 令一字一句, 皆有下落, 諸家註解一一通貫然後, 可以較其是非, 以求聖賢立言之本意. 雖已得之, 亦且更如此反復玩味, 令其義理, 浹洽於中, 淪肌浹髓然後, 乃可言學耳.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책을 볼 때는 다만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이치가 담긴 곳을 찬찬히 살펴야 한다. 취할 만하면 비록 세속 보통사람의 말이라도 폐하지 않는다.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비록 성현의 말씀으로 전해 온다 해도 또한 다시금 살펴 가려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의미가 차분해지고 이치가 명백해져서 발은 실지를 딛고 행동에 의거함이 있게 되니, 통발에 걸려 스스로를 속이는 근심이 없다.

觀書, 但當虛心平氣, 以徐觀義理之所在. 如其可取, 雖世俗庸人之言, 有所不廢, 如有可疑, 雖或傳以爲聖賢之言, 亦須更加審擇. 自然意味平和, 道理明白, 脚踏實地, 動有依據, 無籠罩自欺之患矣.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남의 글을 볼 때 하는 소리를 따라 덩달아 옮겨가서는 안 된다. 내가 옳은 곳을 얻어 보아야만 믿을 수가 있다. 모름지기 침잠하고 깊이 살펴야 보는 곳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덩달아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看人文字, 不可隨聲遷就. 我見得是處, 方可信. 須沈潛玩繹, 方有見處. 不然, 人說沙可做飯, 我也說沙可做飯. 如何可喫?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란 일반적인 사람의 일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 저 일을 알려 하면 저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 문득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단지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반드시 이럴 것이라고 말한다.

讀書如問人事一般, 欲知彼事, 須問彼人. 今却不問其人, 只以己意料度, 謂必是如此.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배우는 사람이 책을 볼 때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물러서서 보려 하지 않는 데서 병통이 생긴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 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는 데서 생긴다. 이는 마치 송사를 처리할 때, 마음이 먼저 을의 견해를 주장함이 있으면 문득 갑이 옳지 않은 점만 찾고, 먼저 갑의 의사를 주장함이 있으면 을의 잘못을 보려고만 드는 것과 꼭 같다. 잠시 갑과 을의 주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야만 바야흐로 능히 그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다. 장횡거(張橫渠)는 “묵은 견해를 씻어버려야 새로운 뜻이 온다”고 했다. 이 말이 참으로 옳다. 만약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새로운 뜻을 얻겠는가?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두 종류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사사로운 뜻을 주장함이고, 다른 하나는 전부터 먼저 들어앉은 견해가 있는 것이다. 비록 떨쳐 내던지려 해도 또한 그것이 저절로 찾아오고 만다.

學者觀書, 病在只要向前, 不肯退步看. 愈向前, 愈看得, 不分曉. 不若退步, 却看得審. 大槪病在執着, 不肯放下. 正如聽訟, 心先有主張乙底意思, 便只尋甲底不是, 先有主張甲底意思, 便只見乙底不是, 不若姑置甲乙之說. 徐徐觀之, 方能辨其曲直. 橫渠云: “濯去舊見, 以來新意,”此說甚當. 若不濯去舊見, 何處得新意來? 今學者有二種病, 一是主私意, 一是舊有先入之說. 雖擺脫, 亦被他自來相尋.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마음이 공정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와 보니 정말 그렇다. 예를 들어 성인의 경전을 풀이할 때는 한결같이 자기 자신은 두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내맡겨 단지 그 도리만을 붙들어 옳고 그름을 스스로 보아야 한다. 그저 문자만 보게 되면 오히려 스스로 옛 습속에 얽매여 점검할 곳을 잃고 만다. 온전히 자기의 사사로운 뜻만 붙들고서 성현의 글을 본다면 어떻게 얻을 수가 있겠는가?

嘗見人云, 大凡心不公底人, 讀書不得. 今看來, 是如此. 如解說聖經, 一向都不有自家身己, 全然許心, 只把他道理, 自看其是非. 恁地看文字, 猶更自有牽於舊習, 失點檢處. 全然把一己私意去看聖賢之書, 如何看得出?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독서에는 방법이 있다. 이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낸 뒤에 보아야 한다. 만약 깨달아 얻지 못하면 잠깐 내려놓고 다른 생각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가 또 보아야 한다.

讀書有箇法, 只是刷刮淨了那心後去看. 若不曉得, 又且放下, 待他意思好時, 又將看來.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예전 진열(陳烈) 선생이 기억력이 없어 고생했다. 하루는 『맹자』를 읽는데,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방심을 구하는 것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아 말했다. “내 마음을 일찍이 거두어들이지 못했으니, 무슨 수로 책을 기억하겠는가?”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고요히 앉아 1백여 일 동안 책을 읽지 않고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였다. 그러고 나서 책을 읽자 마침내 한 번 보면 빠뜨림이 없었다.

昔陳烈先生苦無記性. 一日讀孟子,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忽悟曰 : “我心不曾收得, 如何記得書?” 遂閉門靜坐, 不讀書百餘日, 以收放心, 却去讀書, 遂一覽無遺.

 

                                      -양응수(楊應洙), 「독서법」 중에서

한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어 봤자 기억나지 않는 것을 괴로워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욕심이 많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복주의 진정지(陳正之)는 정말 노둔했다.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50글자씩 반드시 2,3백번은 읽어야 익숙해졌다. 습관이 되도록 읽어나가자, 나중에는 안 읽은 책이 없게 되었다.”

一學者, 苦讀書不記, 先生曰 : “只是貪多, 故記不得. 福州陳正之極魯鈍, 每讀書, 只讀五十字必二三百遍, 方熟. 積習讀去, 後來却無書不讀.”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의리를 구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돌이켜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한다. 진한(秦漢) 이래로 누구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그저 한결같이 서책 위로 나아가 구하기만 했지 자신에게 나아가 따져 깨달으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도달하지 못했는데 성인이 앞서 하신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은 단지 말만 빌리고,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미루어 궁구해야 비로소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인의예지를 설명하려면, 자신이 직접 인(仁)이 무엇이고 의(義)가 무엇이며, 예(禮)와 지(智)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 모름지기 몸소 체득해야만 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읽을 때는 자신이 어떻게 배우고 익혔는지 알아야 한다.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일찍이 어떻게 해야 기뻤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얻게 된다. 만약 그저 단락 따라 풀이나 하며 지나가고, 풀이하는 것으로 그치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讀書不可只專就紙上求義理. 須反來就自家身上推究. 秦漢以來無人說到此. 亦只是一向去書冊上求, 不就自家身上理會. 自家見未到, 聖人先說在那裏? 自家只借言語, 來就身上推究, 始得. 如說仁義禮智, 曾認得自家如何是仁, 自家如何是義, 如何是禮, 如何是智. 須是着己體認. 方得如讀學而時習之, 自家曾如何學, 自家曾如何習, 不亦說乎, 曾見須如何是說. 須恁地認, 始得. 若只逐段解過去, 解得了便休也, 不濟事.

- 양응수, 「독서법

누가 물었다. “책을 읽어도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핵심을 어떻게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근래에 배우는 자 가운데 어떤 부류는 책은 버려두고, 한 마디나 반 구절에서 이치를 깨달으려 든다. 또 한 부류는 내쳐 넘치도록 읽으면서도 귀착할 지점을 모른다. 이는 모두 배움을 아는 자가 아니다. 모름지기 익히 보고 익히 생각해서, 오랜 사이에 저절로 그 도리가 아무 걸림이 없게 되어야만 한다. 이른바 핵심이란 것은 그 속에 절로 있다.”

或問 : "讀書未知統要." 曰 : "統要如何便會知得? 近來學者, 有一種, 則捨去冊子, 却欲於一言半句上便要見道理. 又有一種, 則一向汎濫, 不知歸着處. 此皆非知學者, 須要熟看熟思, 久久之間, 自然見箇道理四停八當, 而所謂統要者, 自在其中矣."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모름지기 자세해야 한다. 구절 따라 글자마다 보아야만 한다. 노력이 거칠고, 정밀한 생각에 힘쓰지 않으면서 단지 의심할 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면, 의심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서 의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일 뿐이다. 독서는 의심이 없는 것은 의심이 나게 하고, 의심이 있는 것은 의심이 없게 해야 한다. 이에 이르러야만 큰 발전이 있다.

讀書須是仔細, 逐句逐字要見去着. 若用工麤鹵, 不務精思, 只道無可疑處, 非無可疑, 理會未到, 不知有疑爾. 讀書, 無疑者須敎有疑, 有疑者却要無疑. 到這裏方是長進.

- 양응수, 「독서법

배우려고 책을 읽으려면 모름지기 번거로움을 참고 세밀하게 이해해 나가야 한다. 절대로 마음을 거칠게 먹으면 안 된다. 만약 “꼭 책을 읽어야 해? 지름길이 따로 있는데”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다. 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흡사 몇 겹의 물건으로 속에 든 것을 감싼 것과 같아, 대놓고 살펴볼 방법이 없다. 오늘 한 겹을 벗겨내어 또 한 겹을 살피고, 내일 또 한 겹을 제거해서 또 한 겹을 이해한다. 껍질을 다 벗겨야 살이 보이고, 살을 다 걷어 내면 뼈가 나온다. 뼈를 다 제거하면 그제서야 골수가 나온다. 거친 마음과 큰 기세만 가지고는 얻지 못한다.

爲學讀書, 須是耐煩細意去理會, 切不可麤心. 若曰, 何必讀書? 自有箇捷徑法, 便是悞人底深坑也. 未見道理時, 恰如數重物色包裹在裏許, 無緣可以便見得. 須是今日去了一重, 又見得一重, 明日又去了一重, 又見得一重. 去盡皮, 方見肉, 去盡肉, 方見骨, 去盡骨, 方見髓. 使麤心大氣, 不得.

- 양응수, 「독서법

독서란 비유컨대 집 구경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한 차례 보고도 또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나야 본 것이다.

讀書者譬如觀此屋. 若在外面見有此屋, 便謂見了, 卽無緣識得. 須是入去裏面, 逐一看過, 是幾多間架, 幾多窓欞. 看了一遍, 又重重看過, 一齊記得, 方是.

- 양응수, 「독서법

성인의 말씀은 천 송이의 꽃과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보기가 좋다. 모름지기 단적으로 정말 좋은 곳을 보아야 비로소 얻은 것이다. 모름지기 힘을 쏟아 자세히 보아야 한다. 공부는 단지 자세히 보는 데 달렸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

聖人言語如千花, 遠望都見好. 須端的眞見好處, 始得. 須着力仔細看. 工夫只在仔細看上, 別無術.

- 양응수, 「독서법

독서의 방법은 마땅히 차례에 따라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두와 문장의 의미 사이에 침잠해서, 붙들어 보존하고 실천하는 실지를 체험한 뒤라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분명해져서 점차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널리 구하고 넓게 취해서 날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운다 해도 또한 배움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했다. “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을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보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이 말이 특별히 맛이 있다.

讀書之法, 當循序而有常, 致一而不懈. 從容乎句讀文義之間, 而體驗乎操存踐履之實然後, 心靜理明, 漸見意味. 不然則雖廣求博取, 日誦五車, 亦奚益於學哉? 程子曰 : "善學者, 求言必自近, 易於近者, 非知言者也." 此言殊有味.

- 양응수, 「독서법

책을 읽다가 의리를 깨달으면 가슴이 활짝 열려 시원스럽고 명쾌해진다. 이렇게 되는 것이 가장 좋다. 효과 보는 것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보람만 거두려 들면 근심스런 생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저 이렇게만 하면 가슴 속에 떡 덩어리처럼 딱 맺힌 것이 있게 된다. 그럴 때는 등한하게 내버려 두되 생각조차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 단지 온 마음을 쏟아 의미를 음미해야 문득 마음이 정밀해진다. 마음이 정밀해져야 익숙해지게 된다.

讀書看義理, 須是胸次放開, 磊落明快, 恁地去第一, 不可先責效. 纔責效便有憂愁底意, 只管如此, 胸中便結聚一餠子不散. 今且放置閒事, 不要閒思量. 只專心去玩味義理, 便會心精, 心精便會熟.

- 양응수, 「독서법

사람들은 독서는 마땅히 차분하게 완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스스로를 나태하게 만드는 말이다. 만약 어떤 책을 읽어 의미를 깨치지 못했다면 급하게 허둥대서는 안 되겠지만 놓아 버리지 않는 것이 그래도 낫다. 만약 온종일 서성이면서 이를 차분한 것이라 말한다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약 달이는 것에 비유해 보자. 모름지기 센 불로 달인 뒤에는 불기운을 늦춰서 은근히 달여야 문제가 없다.

人言讀書當從容玩味, 此乃自怠之一說. 若是讀此書, 未曉道理, 雖不可急迫, 亦不放下, 猶可也. 若徜徉終日, 謂之從容, 却無做工夫處. 譬之煎藥, 須是以大火煮潦然後, 以慢火養之, 却不妨.

- 양응수, 「독서법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배움은 노소가 다르다. 젊어서는 정력이 남아도니 모름지기 읽지 않은 책이 없어야 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가 들게 되면 주력할 것을 가려야 한다. 한 가지 책을 읽다가 뒤에 공부하기가 어렵겠다 싶거든 다시 읽어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침잠하고 따져 살펴 지극한 곳까지 마저 살펴야만 한다.

某嘗謂 爲學老少不同. 年少精力有餘, 須用無書不讀, 無不究竟其義. 若年齒向晩, 却須擇要用功, 讀一書, 便覺後來難得工夫, 再去理會, 須沈潛玩索, 究極至處可也.

- 양응수, 「독서법

정신이 우수한 사람은 널리 취해 얻는 것이 많다. 정신이 부족한 사람은 다만 말뜻이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 함양해야 한다. 중년이 지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으려 들면 안 된다. 단지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고 사색해야 의미가 절로 드러난다.

精神長者, 博取之, 所得多, 精神短者, 但以詞義簡易者涵養. 中年以後之人, 讀書不要多, 只少少玩索, 自見道理.

- 양응수, 「독서법

곽우인(郭友仁)이 작별 인사를 하자 주자가 말했다. “공은 식견은 밝지만 정력이 부족하니 날마다 글을 너무 많이 보면 안 되오. 또 기억력이 나빠도 공부를 쉬지 않고 하면 절로 큰 진전이 있을 것이오.” 또 말했다. “사람이 하루 중에 쓸데없는 말을 줄인다면 한두 구절을 얻고, 일없이 손님 만나 보기를 줄인다면 한두 사람을 얻는다. 일을 처리하면서 만약 몸뚱이를 온통 등한한 가운데다 둔다면 어찌 책을 읽겠는가? 사람이 날마다 할 일이 없다면,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고, 반나절은 책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1,2년만 하면 어찌 발전하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郭友仁拜辭, 朱子曰 : “公識性明, 精力短, 每日文字不可多看. 又記性鈍, 但用功不輟, 自有長進矣.” 又曰 : “人若於日間閑言語省, 得一兩句, 閒人客省見, 得一兩人也. 濟事若渾身都在閑場中, 如何讀得書? 人若逐日無事, 用半日靜坐半日讀書. 如此一二年, 何患不進?”

- 양응수, 「독서법

『맹자』와 『논어』를 보는 법은 다르다. 『논어』는 냉정하게 보아야 하고, 『맹자』는 숙독해야 한다. 『논어』는 구절과 뜻마다 각기 한 가지 의리를 담고 있어 자세하고 고요히 살펴야만 한다. 『맹자』는 큰 단락으로 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서 숙독해야 글의 뜻이 드러난다. 한 구절 한 글자마다 깨달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看孟子與論語不同, 論語要冷靜看, 孟子要熟讀. 論語逐文逐意, 各是一義, 故用仔細靜觀. 孟子成大段, 首尾通貫熟讀, 文義見, 不可逐一句一字上理會也.

- 양응수, 「독서법

예전 한 부류의 학자들은 많음을 탐하고 얻음에 힘써 『주례(周禮)』와 여러 역사 책, 그리고 당대의 전고(典故)까지 읽으려고 했다. 한결같이 모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허다한 공부를 죄다 이해하려고 들었다. 짧은 순간에 몸이 이미 온통 스스로 고꾸라져서 놓아둘 곳을 잃고 말았다. 이는 마치 음식 먹는 일과도 비슷하다. 제 철도 아닌 어떤 잡된 물건을 한 끼에 온통 배부르게 먹어 치우면, 이 때문에 배가 더부룩하고 장이 뒤틀려서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된다.

向時有一截學者, 貪多務得, 要讀周禮諸史本朝典故, 一向盡要理會得許多沒緊要底工夫, 小刻身己都自恁地顚顚倒倒, 沒頓放處. 如喫物事相似, 將甚麽雜物事, 不是時節, 一頓都喫了, 便被他撐腸拄肚, 沒奈何他.

- 양응수, 「독서법

무릇 글을 볼 때 적게 보며 숙독하는 것이 첫째다. 천착해서 주장을 세우지 않고 반복해서 체험하는 것이 둘째다. 몰두해서 이해하되 보람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이 셋째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를 지켜야 한다.

凡看文字, 少看熟讀, 一也. 不要鑽硏立說, 但要反覆體驗, 二也. 埋頭理會, 不要求效, 三也. 三者, 學者所當守.

- 양응수, 「독서법

글을 볼 때는 용맹한 장수가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 곧장 단번에 끝까지 무찔러 싸우는 것 같이 해야 한다. 가혹한 형리가 옥사를 다스리면서 막바로 철저하게 추궁해서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얻을 수 있다.

看文字, 須是如猛將用兵, 直是鏖戰一陣, 如酷吏治獄, 直是推勘到底, 決是不恕他, 方得.

- 양응수, 「독서법

글을 볼 때 두 가지 병통이 있다. 성품이 둔한 부류는 이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봐도 생소해서 서두르기만 해서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또 민첩하고 날카로운 부류는 흔히 자세히 보려 들지는 않고, 쉽게 얻어 대충 소홀히 하려는 생각이 많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看文字, 有兩般病, 有一等性鈍底人, 向來未曾看, 看得生, 卒急着不出, 固是病. 又有一等敏銳底人, 多不肯仔細, 易得有忽略之意, 不可不戒.

- 양응수, 「독서법

독서는 우선 숙독해야 한다. 그 말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해야 한다. 계속해서 정밀하게 따져 보아 그 뜻이 죄다 내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숙독해서 깊이 생각하여 깨달아 얻은 뒤에도 또 이 정도에서 의문을 멈추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전이 있다고 할 만하다. 만약 이쯤에서 그친다고 하면 끝내 다시는 진전이 없다.

大抵讀書, 先須熟讀, 便其言皆若出於吾之口, 繼以精思, 便其意皆若出於吾之心然後, 可以有得爾. 然熟讀精思旣曉得後, 又須疑不止如此, 庶幾有進. 若以爲止如此矣, 則終不復有進也.

- 양응수, 「독서법

배우는 사람이 글을 처음 보면 그저 몇 개의 혼란스러운 물건으로 보일 뿐이다. 오랫동안 보아 한두 조각에서 십여 조각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큰 진전이 있는 것이다.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 그의 눈에는 온전한 소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學者初看文字, 只見得箇渾淪物事. 久久看作一二兩片, 以至於十數片, 方是長進. 如庖丁解牛, 目視無全牛, 是也.

- 양응수, 「독서법

 

안정복安鼎福(1712~1791)

조선 후기 학자. 자는 백순百順, 호가 순암順菴 또는 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남인 실학의 정맥을 이었다. 역사와 지리학의 방법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운 점은 높이 평가된다. 저서에 『동사강목』, 『순암집』, 『가례집해家禮集解』 등이 있다. 1767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중 난해한 구절을 해석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안정복의 독서론은 「상헌수필橡軒隨筆」과 「잡록」, 그 밖에 사우 간에 주고받은 편지글 중에서 뽑았다. 그의 독서론은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방향을 짚어 주는 명료성이 있다. 특히 학문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많다. 공부를 겉멋이나 혈기로 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 점검은 어떻게 하는지, 공부에 임하는 각오는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성호 이익의 독서론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담았다. 이익에서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들의 공부법이 잘 담겨 있다.

책이란 옛 성현들의 정신과 심술(心術)의 궤적이다. 옛 성현들이 오래 살면서 가르침을 베풀 수 없었으므로, 반드시 책을 저술하여 뒷 세상에 남겨, 후인들이 그 말을 말미암아 자취를 찾고, 자취를 통해 이치를 미루어 알게 하려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후세의 선비가 책을 읽어 성현의 뜻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으면 그 뜻을 알 수가 없고, 널리 보지 않고는 그 변화에 통달하지 못한다. 옛 사람이 말했다. “책 읽어 1만권을 독파했더니, 글을 씀에 신기(神氣)가 있는 듯 하다.” 또 말했다. “책을 천 번 읽으니, 그 뜻이 절로 드러난다.” 또 말했다. “묵은 책을 싫증 안 내고 백 번을 읽는다.” 또 말했다. “1만권의 책을 끼고 있는 것이 1백개의 성을 손아귀에 둔 것보다 낫다.” 또 말했다. “5천권의 책을 읽지 않은 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 옛 사람이 독서에 있어 많이 읽고 넓게 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書者古聖賢精神心術之運也. 古聖賢不能長存而施敎, 故必著書垂後, 欲使後人由言而尋跡, 由跡而推理, 是以後儒莫不讀書以求聖賢之意. 而不多讀, 無以知其義, 不博觀, 無以通其變. 古人曰 : "讀書破萬卷,下筆如有神." 又曰 : "讀書千遍, 其義自見." 又曰 : "舊書不厭百回讀," 又曰 : "擁書萬卷, 勝於南面百城." 又曰 : "有不讀五千卷者, 不入吾室." 古人之於讀書, 其多且博, 可知矣.

- 안정복安鼎福, 「상헌수필(橡軒隨筆)」하 중에서

내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말을 살펴 보았더니 이런 말이 있었다. “일찍이 ‘책은 반드시 1만 번을 읽은 뒤라야 그 정신과 통할 수 있다’고 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두율(杜律)》을 가져다 1만 3천번을 읽었다.” 그는 마침내 이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한번은 역질을 피해 촌가에 머물렀다. 다만 『중용』 한 권만 가지고 갔으므로 1만번을 읽었다. 문리가 통달해서 글을 쓰면 문장을 이루었다. 참판 임유후(任有後)도 젊은 시절 역병을 피해 나가 있었다. 머무는 곳에 책이 없고, 다만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한 편만 있었다. 또한 1만번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변려문이 붓만 잡으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모두 이미 있었던 분명한 징험이다.

余觀東岳李安訥語, 有云嘗聞慕齋金安國先生言, 讀書必萬遍然後, 可以通神, 於是取杜律讀一萬三千遍, 遂以詩名于世. 吳德溪健嘗避癘寓村家, 惟取中庸一卷去, 讀過萬遍, 文理通達, 下筆成章. 任參判有後少時亦避癘, 寓中無書, 惟有王勃滕王閣序一篇, 亦讀過萬遍, 自後騈儷之文, 操筆立成. 此皆已然之明驗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명 나라 양천상(楊天祥)은 자가 휴징(休徵)이니, 혜주(惠州) 사람이다. 자란 뒤 열심히 배우고 책을 읽어, 낮에는 문지방을 넘지 않았고, 밤에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겨울 밤에는 얼음 물에 발을 담궜다가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의 독송하는 방법은 마음으로 책과 마주하고, 귀로는 소리를 들었다. 입에 올리려 들지도 않았고, 굳이 풀이하는 법도 없었다. 매 장마다 1백번씩 읽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는 비록 일이 생기거나 물건이 와도 일체 들은 체 하지 않았다. 먹고 자는 것도 모두 폐한 채 반드시 외우는 숫자를 채운 뒤라야 응대하였다. 글을 지으려 붓을 잡으면 천마디 말이 쏟아져 나왔다. 평생 한가한 날이 없었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에 진사(進士)가 되어 벗과 여러 형제에게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내가 약관(弱冠) 때부터 뜻을 힘써 책을 읽었으니, 이제까지 13년이다. 1년 중에 명절과 집안 경사 및 병으로 앓아 누운 날이 60일이 넘지 않는다. 나머지 300일은 모두 외우고 읽었다. 날마다 석 장 이하로 읽은 날이 없으니, 1년이면 9백장을 밑돌지 않고, 15년이면 1만 5천장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의 1만권 독서에 견주면 겨우 열에 한 둘일 뿐이지만, 근세 사람과 견준다면 내가 그래도 많을 것이다. 예전 상자평(尙子平)은 집안 일을 일절 끊고 오악(五嶽)을 두루 유람하였다. 하지만 어찌 능히 이를 소매에 품고 와서 남에게 알려 줄 수 있었겠는가? 또한 혼자 아는데 만족했을 뿐이리라. 오악을 유람하려면 산 넘고 물 건너는 수고로움이 있고, 헤어져 쓸쓸한 근심이 있다.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여러 해를 지나보내야만 겨우 다 볼 수가 있다. 대저 오경(五經)에는 천지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오악에 견준다 해도 어느 것이 더 크겠는가? 제자백가와 역대의 사서(史書)의 말은 또한 세상의 동천(洞天)이요 복지(福地)이다. 내가 이를 읽어 매번 책 한 권을 마치면 마음이 툭 터지고 정신이 가쁜해져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새로웠다. 대문과 뜰을 나서지 않은 지 10여년에 이를 두루 읽었다. 비록 남에게 알려주기에는 부족하나 또한 혼자 알기에는 충분하다.”

明楊天祥字休徵, 惠州人. 長而苦學讀書, 晝不踰閾, 夜不帖席, 冬夜以凍水沃足致跛. 其讀誦之法, 以心對書, 以耳聽聲, 不求上口, 亦不強解. 每簡以百遍爲度, 當其讀時, 雖事至而物來, 一切不聞, 食寢俱廢, 必誦數足後應之. 爲文操筆千言, 平生無暇日, 無書不讀. 正德丁丑, 成進士, 書示友人及諸昆弟曰 : “予自弱冠, 厲志讀書, 至今十三年. 一年之中, 除時節家慶及疾病之日, 不過六十日, 其三百日, 皆誦讀. 日不下三簡, 一年不下九百簡, 十有五年, 不下一萬五千簡. 方之古人萬卷, 僅十之一二, 然以近世較之, 予猶爲多. 昔尙子平勅斷家事, 徧遊五嶽, 豈能袖之以喩人哉? 亦足以自喩而已. 遊五嶽, 則有跋涉之勞, 有離曠之憂. 勞筋苦骨, 曠年閱歲, 僅乃徧之. 夫五經備天地萬物之理, 比之五嶽也, 孰大而加之? 諸子歷代史百家之言, 亦寰中洞天福地也. 予讀之每徹一書, 心曠神怡, 視聽俱新. 顧不出戶庭者十餘年, 徧之矣, 雖不足以喩人, 亦足以自喩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상사(上舍) 신후담(愼後聃)은 자가 이로(耳老)이고 호는 돈와(遯窩)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문인이요, 나와는 동문이 된다. 젊었을 때 한번 만나 나와 함께 독서의 방법에 대해 토론한 일이 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성현의 책은 1만 번 쯤 읽지 않고는 그 뜻을 알지 못하네. 비근한 일에 견줘 말하자면, 1백 아름이나 되는 나무를 베려할 때는 반드시 큰 도끼로 찍은 뒤라야 손을 댈 수가 있는 법일세. 성현의 말씀은 의리의 심오함이 어찌 큰 나무 따위에 견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여러번 읽은 뒤라야 대략 그 뜻을 알게 된다네. 지금 사람들은 책 읽기를 견디지 못해, 반드시 한 두 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안다고 여기니, 얻을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어찌 작은 낫으로 큰 나무를 찍어 그 껍질만 벗기는데 그치고 마는 것과 다르겠는가?”

그때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가 세상을 뜬 후 손자에게 준 글 한 편을 얻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빈노인(河濱老人)은 5,6세 때부터 책을 읽어 60에 병으로 죽게 되었다. 평생에 독서한 횟수를 기록하여 어린 손자에게 보여준다. 나는 『중용』을 가장 많이 읽었다. 1만번 이후로는 숫자를 헤아리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수 천 번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대학』은 5천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헤아리지 않았는데, 내 생각에 1만 번에서 그다지 차이 나지 않지 싶다. 『서경』과 『역경』은 각각 수 천번을 읽었고, 『시경』과 『논어』, 『맹자』도 각각 1천 여번 씩 읽었다. 『소학』은 1백 여번 읽었고, 『예기』와 『춘추좌씨전』은 각각 50번씩 읽었다. 삼전(三傳)은 그 절반만 읽었다.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와 『효경』은 각각 수십 번씩 읽었다.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全)』,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은 죽을 때까지 읽었다. 그 가운데 초록하여 1백번 또는 수십번 씩 읽은 것이 있다. 심씨(沈氏)가 편찬한 『백가유찬(百家類纂)』은 수십 번 읽었다. 그 가운데 『도덕경(道德經)』과 『음부경(陰符經)』 및 『남화경(南華經)』과 『참동계(參同契)』는 수 백번 씩 읽었다. 『한위총서(漢魏叢書)』에 『대대례(大戴禮)』나 『왕씨역례(王氏易例)』, 『초씨경씨역문(焦氏京氏易文)』, 『신공시설(申公詩說)』 같은 글은 각각 수십번 씩 읽었다.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와 한문공(韓文公)의 『창려집(昌黎集)』은 초록해서 1백번 또는 수십번 씩 읽었다. 그밖에 읽기는 했어도 횟수가 수십번이 되지 않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많이 읽었더라도 단편의 짧은 글은 적지 않는다. 중풍으로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겨우 써서 네게 주니, 네가 능히 유업(遺業)을 잇기 바란다.”

愼上舍後聃字耳老, 號遯窩者也, 星湖李先生之門人也, 與余爲同門. 少時嘗一見, 與我論讀書之法, 其言曰 : "聖賢之書, 不讀萬遍, 不知其義. 以鄙事比之, 欲伐百圍木, 必須以大斧斫之然後, 可以下手. 聖賢之語, 其義理之深奧, 豈可以大木較之哉? 必須多讀然後, 畧知其義. 今人不耐讀書, 必欲一二看閱, 自以爲知, 其不可得必矣. 是何異於以小鎌子斫大木, 不過剝其皮膚而止耳?" 其時聞其言而喜之, 及其沒後, 得其示孫兒書一篇, 有曰 : "河濱老人自五六歲讀書, 至六十病且死, 記平生讀書之數, 以示幼孫. 萬後不計數, 而想不下數千. 大學半萬後不計數, 而想去萬不遠, 書易各數千讀, 詩論語孟子各千餘讀, 小學百餘讀, 禮記春秋左氏傳各五十讀, 三傳半之, 周禮儀禮孝經各數十讀. 二程全書,朱子大全,心經,近思錄,性理大全, 終身所閱, 其中抄讀百遍或數十遍者有之. 沈氏所撰百家類纂數十讀, 而其中道德經陰符南華參同則讀至數百, 漢魏叢書中, 如大戴禮,王氏易例,焦氏京氏易文,申公詩說之類, 各數十讀, 太史公史記,韓文公昌黎集, 抄讀或百遍或數十遍. 其外讀不及數十者不記, 多讀而單篇小文不記. 風攣不成字, 強書貽汝, 冀汝之克嗣遺業也."

- 안정복, 「상헌수필」하 중에서

독서는 다만 본문의 의리를 추구해야지, 경솔하게 간추려서 별도의 뜻을 찾거나, 보태 부연하여 다른 주장을 펼쳐서는 안 된다.

讀書只求本文上義理, 不可徑約而求別義, 不可漫衍而爲他說.

- 안정복, 「잡록(雜錄)」

책 보는 일은 삼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음란한 소설을 보면 저도 몰래 방탕한 마음이 생겨난다. 산수의 해맑은 이야기를 읽으면 어느새 안개와 노을을 향한 생각이 깃든다. 병법과 진법에 관한 여러 글을 보노라면 모르는 사이에 용맹한 기운이 솟아난다. 성현의 경전을 읽으면 뜻과 기운이 화평하게 되어 어느새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은 매번 잡서(雜書)를 가지고 경계로 삼았다.

看書不可以不愼. 看淫戱小說, 不覺有流蕩之意, 看山水淸談, 不覺有烟霞之想, 看兵陣諸說, 不覺有武猛之氣, 看聖賢經傳, 則志平氣和, 而油然有正大之心. 故古人每以雜書爲戒.

- 안정복, 「잡록」

독서는 모름지기 의문이 있어야 한다. 의문이 있은 뒤라야 학업에 나아갈 수가 있다. 주자께서는 “책을 읽을 때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고 하셨고, 또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의문이 없는 것 같더니, 그 다음부터 점점 의문이 생겨나서, 중간에는 말 한마디 마디마다 의문 투성이다. 이런 과정을 한 차례 거친 뒤에야 의문이 점차 풀려, 두루 꿰고 회통(會通)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독서의 일대 단안(斷案)이니, 달리 다른 방법은 없다. 대저 성현의 말씀은 모두 평이하면서도 명백해서 굽은 길을 찾아 구하여 스스로를 의심으로 어지러운 가운데에다 얽어매는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退溪) 선생이 말씀하셨다. “책을 읽으면서 굳이 다른 뜻을 깊이 구하면 안 되고, 마땅히 본문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뜻만 구하라.” 이 말씀은 꼭 알맞으면서도 쉬우니 시험삼아 따져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전의 글은 두 가지 뜻이 있게 마련이다. 뒷 사람이 해석할 때는 반드시 헤아려서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한다. 이제 그대가 독서할 때, 경전의 뜻풀이와 다른 것이 있거든, 그 같지 않은 곳에 나아가 경중을 찬찬히 따져보고 읊조리며 상세히 음미한다면 절로 분별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나의 사사로운 뜻을 마음 속에 가로질러 놓고 도리어 선유(先儒)의 학설을 자기에게 맞추려 한다면 이는 절대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자기가 직접 한편의 글을 짓는 것이 낫지, 어찌 굳이 괴롭게 옛 책을 읽는단 말인가?

讀書須要有疑, 有疑而後, 可以進業. 朱子曰 : “讀書大疑則大進.” 又曰 : “始讀未始有疑, 其次漸漸有疑, 中則節節是疑. 過了這一番後, 疑漸釋, 以至融貫會通, 方是學.” 此爲讀書之一大斷案也, 更無別法. 而大抵聖賢言語, 皆平易明白, 不可探曲以求, 自致纏繞于疑亂之中矣. 退溪李子曰 : “讀書不必深求異意, 當於本文上, 求見在之義.” 此語的當簡易, 試入思議也. 經文固有兩般義, 後人解釋時, 必量度而取其最近者. 今君讀書, 有與傳義不同者, 試就其不同處, 劑量輕重, 諷詠詳玩, 則自有可別之道矣. 我之私意, 橫在肚裏, 却以先儒之說, 求合於己, 是甚不可. 若然則我去自做一般文, 何必苦苦讀古書乎?

- 안정복, 「권철신의 별지에 답함(答權旣明哲身別紙)」

책을 읽다가 의문을 갖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의문이 작으면 진보도 작고,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 실로 이는 바꾸지 못할 가르침이다. 하지만 의문에만 힘을 쏟고 밑바탕이 정해지지 않으면, 마음의 실마리가 점차 어지러워져서 실효를 얻기가 어렵다. 내 생각은 이렇다. 독서에서 비록 자득(自得)이 중요하지만, 자득한 뜻을 앞세워 마음 속에 가로 놓아 두면 그 폐단이 선유(先儒)의 가르침에 대해 먼저 잘못된 점만 찾으려 드는 혐의가 있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미 이루어진 가르침에 의거하여 되풀이해 읽고 침잠하여 깊이 음미하기를 오래한 뒤에, 그래도 의문이 끝내 가시지 않는다면 또 스스로 “내 한 때의 거칠고 얕은 식견이 어찌 선배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내 생각이 잘못된 걸 게야.”라고 여겨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오래 읽었는데도 의문이 끝내 풀리지 않으면 의리로써 질정하고 선각에게 물어서 지극히 마땅한 귀결점을 구해야 한다.

만약 내 견해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면 또한 하나의 주장을 갖출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자족해서 선배를 가볍게 보는 습관이 들면 안 된다. ‘학(學)’이란 한 글자는 『서경』의 「열명(說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 말은 이렇다. “오직 배워 뜻을 겸손히 갖고, 힘써 때에 민첩하라.” 배움은 반드시 뜻을 겸손하게 한 뒤에 옛 가르침과 벗들의 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지 이를 가로막아 버리는 폐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만세의 학자들이 최초로 학문 할 때 받들어야 할 지극한 가르침이다. 가만히 배우는 자를 살펴보니, 수십 권의 책을 읽어 몇 건의 의리를 강구하여 약간 얻은 것이 있다 싶기만 하면 마침내 사사건건 선배의 허물을 찾으려 든다. 심지어는 편장(篇章)의 훈고에 있어서도 조각조각 찢어발겨 이리저리 뽑고 찢어 누더기로 만드는 나무람을 면치 못하기까지 하니, 이는 실로 통렬하게 징계해야 할 지점이다.

讀書有疑, 固是美事. 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實是不易之定訓. 然而惟疑之務而靡所底定, 則心緖漸紛, 而實効難得. 愚則以爲讀書雖以自得爲貴, 先以自得之意橫在肚間, 則其弊恐於先儒之訓, 有洗垢索瘢之嫌. 故當依其成訓, 讀來讀去, 沉潛玩味之久, 而疑終未已, 則又自以爲我一時粗淺之見, 豈有過於前輩者? 是必吾見妄也. 又讀之之久, 而疑終未解, 則質之以義理, 講之於先覺, 以求其至當之歸. 若使吾見不至甚妄, 則亦可備一說. 不可以此自足, 有輕視前輩之習. 學之一字, 始見于書之說命. 其言曰, 惟學遜志, 懋時敏. 學必遜志然後, 於古訓與朋友之言, 易於虛受, 無扞格之患. 此萬世學者最初爲學承受之至訓也. 竊觀學者, 若讀數十卷書, 稍能講究數件義理, 而有得焉, 則遂欲事事求過于前輩, 至若訓誥篇章, 斷斷分裂, 未免撏撦繿縷之譏, 此實痛徵處也.

- 안정복, 「권기명에게 답함(答權旣明書)」

일찍이 들으니 주자(朱子)가 그 문인에게 독서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문자는 차라리 얕게 볼망정 너무 깊어서는 안되고, 낮춰볼지언정 지나치게 높으면 안 된다.” 또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문자를 볼 때 의론 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는 자기의 뜻을 우선해서 남을 보는 것이니, 성현의 말씀을 가슴 속에 무젖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독서를 살펴보니 매번 자기 주장을 내세우되 반드시 깊고 높기만을 구하려 든다. 그런 까닭에 책 한 권을 읽고 한 가지 이치를 얻는데도 침잠하여 꼼꼼히 하는 공부를 보탤 겨를도 없이 먼저 제 주장부터 늘어놓아 반드시 자기 뜻에 합치되기만을 구하려 든다.

만약 이런 점을 서둘러 돌이키고 빨리 되돌리지 않는다면, 끈적끈적 들러붙은 버릇이 오래 되어 스스로 이기려고만 들뿐 뜻을 겸손히 해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뜻이 사라지고 만다. 심술(心術)에 해가 될 뿐 아니라 덕에 나아가는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嘗聞朱子語其門人, 以讀書之法曰 : “文字寧看得淺, 不可太深, 寧低看, 不可太高.” 又曰 : “公看文字, 好立議論, 是先以己意看他, 却不以聖賢言語來澆灌胸中. 自後只要白看乃好.” 愚嘗觀公之讀書, 每欲自主議論, 而必求其深高. 故讀一書得一理, 未及加沉潛縝密之功, 而先自主張, 必欲求合於己意. 若或於此不能亟回頭疾旋踵, 則膠滯之久, 自用勝而欠遜志虛受之義, 未必不爲心術之害, 而有妨於進德修業之大功矣.

- 안정복, 「권기명에게 답함

대저 학문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글을 널리 읽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친다. 하지만 글을 널리 본다는 것은 많이 듣고 말을 신중히 하며, 많이 보고 행실을 삼가, 살펴 묻고 밝게 따져 많이 알고 덕을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감춰지고 구석진 일을 찾아다니고, 기이한 이야기를 주워 모아 많이 아는 것을 뽐내고 화려함을 다투어 입과 귀로 외우고 암송하는 밑천으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터득함은 마음으로 이를 체득하고 몸으로 징험해서, 쌓음을 참되게 하고 오래도록 힘써서 저절로 꿰뚫어 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격물(格物)하는 궁리가 깊지도 않으면서 뜻과 생각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어쩌다 본 것이 있으면 혼자 선인이 미처 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전을 업신여기고 도리에서 벗어나면서도 그칠 줄 모르는 것과는 같지 않다.

大抵爲學之方, 必先博文, 必貴自得. 然欲其博文, 則多聞愼言, 多見愼行, 審問明辨, 多識畜德之謂也, 非若世之搜求隱僻之事, 鉤摘奇異之說, 誇多鬬靡, 以爲口耳記誦之資者也. 欲其自得, 則體之於心, 驗之於身, 眞積力久, 自然貫通之謂也, 非若世之窮格未到, 意慮橫生, 偶有所見, 自以爲發前人之未發, 至於誣經離道, 而不知止者也.

- 안정복, 「황이수 덕길에게 답장함(答黃耳叟德吉書)」

한동안 못 만나 몹시 보고 싶네. 생각건대 그대 형제가 부모님을 봉양하는 여가에 반드시 글공부를 할 터인데, 지금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글을 보고 있는가? 때로 특별한 맛이 있는 대목이라도 있는가? 동생의 편지에 마음을 쏟아 배움에 향하겠다는 말이 있던데, 이왕에 이런 독실한 마음을 지녔거든 반드시 이런 독실한 공부를 실행에 옮겨 쉬는 틈이 없어야 한다네.

만약 한갓 말뿐이라면 비록 마음이 있더라도 실다운 학문이 없게 되니, 이는 특히 배우는 사람의 공통된 병통일세. 반드시 집안 살림은 관심 두지 않고 괴롭게 공부해서 오래 습관이 쌓인다면 절로 시원스러운 지점이 있게 될 걸세. 이는 모두 선현(先賢)께서 이미 시험해본 말로 후학을 일깨워 주신 것이라네.

乍阻瞻菀. 竊想君昆季定省之餘, 必有簡策之工. 今讀何書觀何書, 而時有雋永否? 季君書, 有慥慥向學之語. 旣有此慥慥之心, 則必行此慥慥之工, 無時間斷而已. 若徒以言爲, 則雖有心, 而無實業, 此尤學者之通病也. 必也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積習之久, 自當有灑然處. 此皆前賢已試之言, 而諭後學者也.

- 안정복, 「황덕일 황덕일 형제에게(與黃莘叟德壹耳叟書)」

선배의 영향은 점차 멀어지고, 후학의 취향은 점점 어긋나서, 속학(俗學)들 외에 스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말하는 자 또한 너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재주가 높은 사람은 옛사람의 말을 굳이 다 믿으려 들지 않고 먼저 별도의 길을 찾지요. 기운이 약한 사람은 옛사람의 말을 의심할 수 없다고 여겨 글의 뜻에 얽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옳지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현의 글을 공평한 마음으로 익히 읽고, 글에 따라 뜻을 풀이하여 문장의 뜻이 평이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여, 사견(私見)을 내세우지 않고 별도의 뜻을 세우지도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서 비록 의문의 단서가 점차 생겨나더라도 의문나는 점을 가지고 선현이 미처 펴지 못한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옛 사람의 말에 합치되기를 구하되, 합치됨을 구하고도 얻지 못한 뒤에야 사우(師友)에게 질문하여 그 득실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의심하여 스스로 선현이 미처 펴지 못한 뜻이라고 말했던 것이, 정자와 주자가 울타리 곁에다 이미 내다버린 물건이 아닐 줄 어찌 알겠습니까? 후학이라면 다만 마땅히 선현들이 해석해 놓은 뜻을 밝히 알아 이를 받들어 따르기를 마치 왕조의 법령을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처럼 한 뒤라야 비로소 일관되이 통일되는 뜻이 있게 되어, 나아가는 바가 어지럽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마다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집집마다 문호를 열어 그 어지러움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늘 이러한 생각을 품고는 있었지만 우러러 여쭐 곳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감히 번거롭고 귀찮게 하여 옳은 지 그른 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말이 많다는 나무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깊이 살펴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前輩之影響漸遠, 而後學之步趨漸差, 俗學之外, 自謂有志於此者, 亦不無過不及之失. 才高者以古人之言, 不必盡信, 先尋別路, 氣弱者以古人之言, 爲無可疑, 繳繞文義, 二者均爲不是矣. 愚意欲將聖賢之書, 平心熟讀, 隨文解義, 務使文義平易明白, 不主私見, 不立別意. 讀之之多, 雖疑端漸生, 不可以所疑者, 謂前賢未發之旨, 而求合於古人之說, 求合不得然後, 或質之師友, 以正其得失而已. 其所疑之自謂得前賢未發之旨者, 安知非程朱笆籬邊已棄之物耶? 後學只當明知前賢所釋之義, 而遵奉之, 若王朝令甲之不敢有違, 然後始有一統之意, 而所趨不亂矣. 不然則人執一椎, 家開一戶, 不勝其紛然矣. 常懷此意, 無所仰質, 玆敢煩瀆, 欲承可否之敎. 饒舌之誚, 是恐是懼, 幸俯諒之. 不宣.

- 안정복, 「소남 윤장에게 보냄(與昭南尹丈書)」

배운다는 것은 앎과 행함을 합친 이름이다. 배우는 바는 무엇인가? 성인(聖人)이다. 성인이란 나면서부터 알아 편안히 행하여서 인륜의 지극함이 된다. 성인의 도를 배우는 것은 성인의 앎과 행함을 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순(舜) 임금은 여러 사물에 대해 밝았고, 인륜을 살폈다. 이 말은 만물의 이치를 밝게 알았고, 특별히 인륜을 깊이 살폈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깝다.” 지식이 아무리 많다해도 마땅히 먼저해야 할 것은 실로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맹자도 이렇게 말했다. “요순(堯舜)의 지혜로도 사물에 두루 미치지 못했던 것은 먼저 힘써야 할 일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먼저 힘써야 할 일이란 것은 어떤 일을 가리킬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래에서 배워 위로 도달한다.[下學上達]” 여기서 아래란 것은 비근(卑近)한 것을 일컫는다. 비근하여 알기 쉬운 것이 날마다 쓰는 떳떳한 윤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힘을 쏟아 그치지 않고 오래 쌓아, 많은 괴로운 경계를 다 겪고 난 뒤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어렵다거나 가로 막히는 근심이 없어 쾌활하고도 시원스런 경계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상달(上達)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이른 바 배운다는 것은 다만 하학(下學)일 따름이다.

學者知行之緫名, 而其所學, 學聖人也. 聖人生知安行, 而爲人倫之至, 學聖人之道, 不過求聖人之知與行, 而不出於日用彛倫之外也. 舜明於庶物, 察於人倫, 言其明知庶物之理, 而尤致察於人倫也. 大學論格致之義, 亦曰 : “知所先後, 卽近道矣.” 知雖多般, 而所當先者, 實不出於日用彛倫之外. 孟子亦曰 : “堯舜之知, 而不遍物, 急先務也.” 其謂先務, 指何事也? 子曰 : “下學而上達.” 下者卑近之稱也. 卑近易知者. 非日用彛倫而何? 用工於此, 積累不已, 備盡多少辛苦境界然後, 心體爲一, 無艱難扞格之患, 而庶幾覩快活灑然之境, 上達卽在此也. 故所謂學者, 只是下學而已.

- 안정복, 『하학지남(下學指南)』 「독서(讀書)」

『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그리고 육경을 가져다가 글자를 헤아려 보았다. 『효경』은 1,903자, 『논어』는 11,705자, 『맹자』는 34,685자, 『주역』은 24,107자, 『상서(尙書)』는 25,700자, 『시전(詩傳)』은 39,234자, 『예기』는 99,010자, 『주례(周禮)』가 45,806자, 그리고 『춘추좌전』이 196,845자였다. 중간의 재주를 기준으로 삼아, 만약 날마다 300자씩 외운다면 4년 반이 못되어 마칠 수가 있다. 혹 조금 둔하여 중간 가는 사람의 절반으로 줄인다 해도 9년이면 마칠 수가 있다.

取孝經論孟子六經, 以字計之. 孝經一千九百三字, 論語一萬一千七百五字, 孟子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周易二萬四千一百七字, 尙書二萬五千七百字, 詩傳三萬九千二百三十四字, 禮記九萬九千一十字, 周禮四萬五千八百六字, 春秋左傳一十九萬六千八百四十五字止. 以中才爲準, 若日誦三百字, 不過四年半, 可畢. 或稍鈍, 减中人之半, 亦九年可畢.

- 안정복, 「독서의 차례(讀書之序章)」 중 「구양공독서법(歐陽公讀書法)」

 

홍대용洪大容(1731~1783)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가 담헌湛軒이다. 북학파 지식인으로 천문 · 과학 · 음악 방면에 해박한 식견을 지녔다. 1765년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으로 연행 길에 올라, 절강 선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均 · 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귀국 이후에도 이들과 서신 왕래를 통해 지속적인 교유를 가졌고, 문인 후배 및 후손에게까지 교류가 이어졌다.

책에 수록된 글은 엉성 등을 통해 알게 된 중국 선비 조욱종趙煜宗에게 보낸 편지인 「매헌에게 보내는 편지(與梅軒書)」의 전문과 다른 글에서 간추린 세 편을 담았다. 조욱종에게 보낸 편지는 예전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부 수록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한 편의 글을 단락별로 나눠서 공부의 단계에 따른 대중 처방으로 읽었다. 특히 독서와 송서, 간서로 구분한 세 가지 독서법의 설명과 질문 방법과 잘못된 습관 등을 차례로 지적해서 낱낱이 일러 준 내용이 인상적이다.

 

독서는 진실로 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외우는 것을 버린다면 더더욱 기댈 바가 없게 된다. 날마다 배운 책을 가지고 우선 정밀하게 외워 음과 구두에 착오가 없어야만 한다. 그런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워 먼저 한 차례 읽는다. 그 다음은 한 차례 외우고, 다시 한 차례 본다. 보기를 마치고는 다시 읽는다. 이렇게 모두 3,40 차례 하고 그만둔다. 매번 한권이나 반권을 떼고 나면 앞서 배운 것까지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우고, 그 다음에 보기를 각각 서너 차례 한 뒤에 그만둔다.

讀書固不貴記誦, 惟初學舍記誦, 益無依據. 每日將所受書, 先要精誦, 音讀無錯, 然後始立算, 先讀一遍, 次誦一遍, 次看一遍, 看已復讀, 摠得三四十遍而止. 每畢受一卷或半卷, 幷前受亦先讀, 次誦次看, 各得三四遍而止.

- 홍대용洪大容, 『여매헌서(與梅軒書)』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소리를 높이면 기운이 빠진다. 눈을 놀려서도 안 된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 마음이 부산스러워진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된다. 몸을 흔들면 정신이 흩어진다.

凡讀書, 不可高聲, 聲高氣乏. 不可遊目, 目遊心馳. 不可搖身, 身搖神散.

- 홍대용, 『여매헌서』

위의 독서, 송서, 간서의 세 조목은 나눠 말하면 다르지만, 마음을 오로지하여 체득해서 얻어야 하는 점은 꼭 같다. 몸을 거두어 똑바로 앉아,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다른 소리를 거둔다. 손과 발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을 한데 모아 책에도 쏟아붓는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의미가 나날이 새롭고, 절로 무궁한 온축이 있게 된다.

右三條, 分言雖殊, 要專心體究則一也. 須斂身正坐, 目定視, 耳收聽, 手足不妄動, 聚合精神, 灌注于書. 循此不已, 意味日新, 自有無窮妙蘊.

- 홍대용, 『여매헌서』

처음 배우는 사람이 의문을 깨칠 수가 없는 것은 일반적인 병통이다. 하지만 병의 뿌리를 따져보면 뜬 생각을 쫓아 내달리느라 뜻이 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서 억지로 의문을 깨치려 들면, 에돌고 막히고 얕고 가볍게 되어, 참 의문을 깨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의문을 깨치려면 먼저 뜬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

하지만 뜬 생각은 또한 억지로 밀쳐낼 수가 없다. 억지로 밀쳐내려 들면 이것이 외려 한가지 생각을 덧보태게 해서 어지러히 뒤엉킴을 더하게 만든다. 다만 어깨와 등을 곧추 세워 뜻을 고무시켜 편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면 뜬 생각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금세 흩어지고 만다.

凡初學, 不能會疑, 人之通患. 然原其病根, 馳逐浮念, 志不專於書也. 故不去浮念, 强欲會疑, 迂滯淺率, 眞疑不會. 是故欲會疑, 先去浮念. 然浮念亦不可强排. 强排則卽此轉添一念, 適增攪繞. 惟竦直肩背, 鼓發意趣, 一字一句, 心口相應, 浮念倐散, 亦不自覺也.

- 홍대용, 『여매헌서』

무릇 뜬생각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앨 수가 없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수시로 맑게 다스림을 보태야 한다. 혹 심기가 평온하지 않거나 옭죄인 생각이 떠나지 않거든, 즉시 묵묵히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에 집중시키다. 그러면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오고, 뜬 기운이 물러난다. 과연 이 도리를 능히 하여 나날이 다달이 공력을 쌓음이 점차 익숙해지고, 보람이 점점 커지면 글을 보는 식견이 날로 발전할 뿐 아니라 심기가 편안하고 화평해져서 일을 함에 몰두하여 정밀하게 된다. 위로 도달하는 배움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凡浮念不可一朝凈盡. 惟貴勿忘, 隨加澄治. 或値心氣不平, 纏縛不去, 卽默坐闔眼, 注心臍腹, 神明歸舍, 浮氣退聽. 果能此道, 時月之間, 用功漸熟, 責效漸長, 不惟文識日進, 心安氣和, 作事專精. 上達之學, 亦不外是.

- 홍대용, 『여매헌서』

의리(義理)는 다함이 없으니, 결코 망녕되이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글을 대충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다.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궁구하여 탐색한 것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던 데서 의문이 생기고, 아무 맛 없는 데서 맛이 생겨난 뒤라야 능히 독서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義理無窮, 切不可妄自滿足. 凡文字粗通者, 必無疑, 非無疑也, 究索之不到也. 疑生於無疑, 味生於無味, 然後可謂能讀書矣.

- 홍대용, 『여매헌서』

무릇 독서는 절대로 서둘러 의문을 깨치려 들면 안 된다.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해서 읽고 또 읽는다. 의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의문이 생기면 되풀이해서 살피고 탐구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할 일도 아니다. 혹 일에 응하는 가운데 이를 징험해보고, 혹 잠겨 노니는 중에 구해본다. 빨리 가거나 걸어가거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수시로 살피고 탐색한다. 쉬지 않고 이렇게 하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설령 통하지 않더라도, 이같은 탐색을 먼저한 뒤에 남에게 묻는다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凡讀書, 切不可徑要會疑. 只平心專志, 讀來讀去, 不患無疑, 有疑則反覆參究. 不必專靠文字, 或驗之應事之際, 或求之游泳之中, 凡行步坐臥, 隨時究索. 如是不已, 鮮有不通, 設有不通, 先此究索而後問於人, 乃可以言下領悟.

- 홍대용, 『여매헌서』

책을 읽을 때 공연히 소리의 기세를 펴거나, 글자를 잘못 틀리게 읽는 것, 어거지로 자구를 가져다 붙이거나, 입에서 나오는대로 논난을 펼치는 것,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버러 돌아보지 않거나, 한번 묻고 한번 대답하고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은 더 나아짐을 구하려는데 생각이 없는 것이니, 함께 배우기에 부족하다.

凡讀書, 虛張聲氣, 錯亂音讀, 强拈字句, 信口發難, 答語未了, 掉過不顧, 一問一答, 不復致思, 此無意於求益也, 不足與爲學也.

- 홍대용, 『여매헌서』

책을 볼 때에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窮究)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 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凡看書, 默誦其文, 玩索其意, 參以註釋, 潛心溫繹. 若徒寓目而心不在, 亦無益也.

- 홍대용, 『여매헌서(與梅軒書)』

성현의 말씀을 볼 때 옛 사람을 참고삼아 이미 그러한 자취를 살피고, 내 자신에게 이를 돌이켜서 통변(通變)의 마땅함을 구해야만 한다. 받아들여 감동하고 슬퍼하고 두려워 하기를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한다. 옛 사람의 독서는 대개 이같은 바탕이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학문이다.

凡看聖賢言語, 參之古人, 考其已然之跡, 反之吾身, 求其通變之宜. 歆動惻怛, 如針箚身. 古人讀書, 盖有此本領, 不如是, 皆僞學也.

- 홍대용, 『여매헌서』

내가 일찍이 맹자가 말한 ‘내 뜻으로 지은이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 네 글자를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옛 사람이 지은 글은 의리(義理)나 사공(事功) 뿐 아니라 편법(篇法)과 기승전결 같은 문사의 말단 기교조차도 각각 뜻을 두지 않음이 없었다. 이제 나의 뜻을 가지고 옛 사람의 뜻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로 합쳐져 아무 간격이 없고 서로 기뻐하여 이해하면, 이는 옛 사람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에 스며 하나가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귀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딱 붙으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와서 능히 이처럼 하게 되는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문장 구절을 본뜨고 해묵은 자취를 흉내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주고받음이 만 가지로 변화하고, 바로 곁에서 근원과 만나게 되어, 내가 또한 옛사람일 뿐이다. 이처럼 책을 읽은 뒤라야 하늘의 교묘함을 빼앗을 수가 있다.

余嘗以孟子以意逆志四字, 爲讀書符訣. 古人作書, 不惟義理事功, 雖篇法起結文辭之末技, 莫不各有其志. 今以吾之意, 逆古人之志, 融合無間, 相說以解, 是古人之精神見識, 透接我心. 譬如乩神降附靈巫, 分外超悟, 不知自何而來, 能如是. 不待依㨾章句蹈襲陳跡, 而酬酢萬變, 左右逢原, 我亦古人而已矣. 如是讀書, 然後可以奪天巧.

- 홍대용, 『여매헌서』

고인이 책을 지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아 공명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살핀 것을 밑천 삼아 명예를 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고 기억하여 살핀 것을 밑천으로 삼는 것 또한 조급하고 얄팍하게 섭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온종일 소리 내서 읽어, 눈이 책의 행간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뜻과 생각이 날리고, 입으로만 읽을 뿐 마음이 이르지 않고 보니, 작자의 본래 뜻을 살피는 것은 열 겹의 무쇠 관문에 가로막힌 격이다. 어찌 도에서 더욱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는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다.

古人作書, 非敎人飭文藻以取功名, 資記覽以干名譽. 然要飾文藻而資記覽者, 亦不可以躁淺涉獵而得之. 今終日誦讀, 目不離行墨, 自以爲如是足矣. 然意慮飛越, 口到而心不到, 視作者本志, 不啻隔十重鐵關. 豈不益遠於道乎? 此天下之棄才也.

- 홍대용, 『여매헌서』

처음 배움을 시작한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어려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어려워 괴롭다고 내버려 둔 채 그저 손쉬운 것만 차지해서 구차하게 편안하기만 도모한다면 이는 버린 재주로 마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조금만 스스로 굳게 참아, 살펴 점검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열흘 사이에 반드시 소식이 오게 되어 있다. 어려워 괴롭던 것은 점차 사라지고 취미가 날로 새로워진다.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이 자연스레 이르러 장차 무한히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다.

初學讀書, 孰不苦其難也? 然任其苦難, 聊占便宜, 以圖苟安, 是終於棄才而已. 若稍自堅忍, 不忘省檢, 旬日之間, 必有消息, 苦難漸去, 趣味日新, 馴致乎手舞足蹈, 將有無限樂事.

- 홍대용, 『여매헌서』

독서란 장차 이치를 밝혀서 일에다 펼치려는 것이다. 진실로 정밀하게 읽고, 익숙하게 강하며, 적실하게 보고, 진실되게 얻는다면, 저 책이란 것은 아무 짝에 쓸데 없는 낡은 종이일 뿐이니, 이를 묶어 다락에 올려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오직 정밀하고 익숙하며, 적실하고 참된 것은 비록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다. 그럴진대 독서란 것은 그 공부가 진실로 끝이 없어, 실로 배우는 자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사업이다. 비록 그렇긴 해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는 진실로 한쪽에만 치우쳐 다른 하나를 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본말과 경중의 차이로 또 크게 등급의 구별이 생긴다. 이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돈오(頓悟)로 들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훈고로 귀착되고 마니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의 독서란 대충대충 섭렵하여 읽다 말다하는 것이다. 이미 정밀하지도 익숙치도 않은데 어찌 적실하고 진실됨을 논하겠는가? 독서의 공부가 이런 지경인데도 또 한 책을 다 읽고는 내 일을 이미 마쳤다고 말하며, 함부로 날뛰고 망녕된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문득 가서 이를 실행하는 큰 일이 남아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려하는 것에 비유해보자. 책이란 한 부의 노정기(路程記)이고, 행함이란 말에게 꼴을 먹이고 수레에 기름칠 해서 노정기에 따라 몰고 또 달리는 것이다. 다만 말에 고삐를 씌우고 수레를 손질해 두고는 몰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으면서, 오직 열심히 노정기만을 강론한다면, 먼 길을 가려는 계획은 끝내 무너져 이루어질 날이 없다.

且讀書, 將以明夫理而措諸事也. 苟能讀之精, 講之熟, 見之的, 得之眞, 則彼書者, 乃無用之故紙也, 可以束之高閣矣. 惟精也熟也的也眞也, 雖聖人猶有所憾焉, 則讀書者, 其功固無涯岸, 而果學者之終身事業也. 雖然, 知行兩端, 固不可偏廢, 而本末輕重之分, 又大有等別, 於此有差則不入於頓悟, 必歸於訓詁, 可不懼哉? 今吾輩之讀書, 鹵莽涉獵, 忽斷忽續. 旣未精熟, 何論的眞? 其讀書之功旣如是, 而又讀盡一書, 便謂吾事已了, 乃猖狂妄行, 無所忌憚. 不知讀書盡後便去行之, 方大有事在. 譬如有人欲作遠行, 書者一部路程記也, 行者秣馬脂車, 按記而驅且馳者也. 惟縶馬理輪, 弗驅弗馳, 切切焉惟記之是講, 所以行邁之謀, 終無潰成之日也.

- 홍대용, 『철교에게 준 편지(與鐵橋書)』 중에서

아아! 곤륜산의 옥도 갈고 쪼지 않으면 기왓장 자갈돌과 한 가지다. 예장(豫章)의 훌륭한 재목도 깎고 다듬지 않으면 가시나무와 다를 게 없다. 안연(顔淵)과 맹자의 자질로도 배워 닦지 않는다면 평범하고 천한 사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옥은 쪼지 않을 수 없고, 재목은 깎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은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으로 배움을 알지 못한다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알면서 능히 행하지 못한다면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긴 해도 힘껏 할 수 없다면 용기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알고서 행하고, 용기로 나아갈 때 이를 두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 공자의 문하에 제자가 3천명이었으되,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일컬어진 자는 홀로 안연 뿐이었다. 증자(曾子)와 민자(閔子) 이하로는 대개 축에 들지도 못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 힘들기가 이와 같았다. 하물며 성인의 시대에서 수천 여년이나 떨어지고, 성인의 살던 곳에서 수천 여리라 떨어진 곳임에랴! 도타운 풍속은 날로 사라지고, 경박한 풍속만 날로 심하다. 이러한 때를 당해 공자께서 말씀하신 배우기를 좋아하는 선비를 만나 보려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나 안연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만약 명리에 뜻을 끊고 책에만 마음을 쏟아, 어렵고 험한 길을 피하지 않고서 오로지 도만을 구하는 사람은 또한 오늘날의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할만 하다.

嗚呼! 不磨不琢, 崑崗之玉, 猶之瓦礫矣, 不鑿不斲, 豫章之材, 猶之樲棘矣, 不學不修, 顔孟之姿, 不離於凡夫賤卒. 是以玉不可以不琢, 材不可以不斲, 人不可以不學. 人而不知學, 可謂智乎? 知而不能爲, 可謂義乎? 爲而不能力, 可謂勇乎? 知而爲之, 勇以將之, 斯其爲好學者歟. 昔者孔氏之門, 其徒三千, 稱好學者獨有顔淵, 曾閔以下, 盖無與焉, 若是乎好學者之難得也. 况乎去聖人之世數千有餘歲, 去聖人之居數千有餘里. 淳風日喪, 而薄俗日競, 當此之時, 欲求見孔氏所謂好學之士, 不亦難乎? 雖然, 顔淵何可當也, 若絶意名利, 潛心簡編, 不避難險, 惟道之是求者, 亦可謂今之好學者矣

- 홍대용, 『주도이에게 한 애사(周道以哀辭)』중에서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낯빛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집중하되 기운은 편안하게 갖는다.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선입견을 주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몸을 자주 흔드는 것은 그 뜻이 급해서이고, 눈동자를 어지러이 굴리는 것은 그 마음이 들떠 있기 때문이다. 몸가짐을 바로하고 눈동자를 고정시키면 중심에 법도가 갖춰진다. 마음을 보존하고 앎에 도달하게 되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먼저 대강의 뜻을 살핀 뒤에 곡절을 미루어 헤아린다. 반드시 일을 하는데다 중점을 두어 문장의 구문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한 구절을 보고나면 문득 이를 알아야 하고, 한 구절을 알고 나면 이를 행해야 한다. 한 가지를 알아 한 가지를 행하면 발과 눈이 둘다 나아가게 된다. 경전이나 역사책 외에 이단의 잡서는 또한 반드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해야 한다. 음란하고 불경스런 주장은 공부를 해치고 뜻을 잃게 만드니 절대 읽어서는 안 된다.

讀書必整襟肅容, 專心易氣. 毋生雜念, 毋主先入. 搖身數者, 其志促, 轉睛亂者, 其心浮. 竦身定睛, 中心必式. 存心致知, 一擧兩得. 先觀其大義, 而後推其曲, 必措諸事爲, 而毋繳繞於章句. 才見一句, 便要知之, 才知一句, 便要行之. 一知一行, 足目兩進. 經史之外, 異端雜書, 亦必捨其所短. 而取其所長, 如淫媟不經之說, 害工喪志, 切勿寓目.

- 홍대용, 『자경설(自警說)』중에서

 

 

 

'내가 읽은 책들 > 2014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027-2 오직 독서뿐  (0) 2014.03.05
2014-028 無로부터의 우주  (0) 2014.03.04
2014-027 오직 독서뿐  (0) 2014.03.03
2014-026 물소리 새소리  (0) 2014.02.27
2014-025 해양 생물  (1) 2014.02.25
posted by 황영찬

2014-027 오직 독서뿐

 

정민

2013, 김영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79152

 

029.4

정38ㅇ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책을 왜 읽나? 어떻게 읽을까? 무엇을 읽을까? 옛글 속에 뜻밖에 이런 물음에 대답한 글이 많다. 선인들의 독서는 생활 그 자체였다. 밥 먹듯이 읽고 숨 쉬듯이 읽었다.

 

"앵무새 공부,

원숭이 독서와 결별하라!"

 

조선 최고 지식인들의 삶을 바꾸는 핵심 독서 전략!

허균, 이익, 양응수,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 그들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 독서를 통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정립했을까? 어떻게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와 기적 같은 학문적 성취를 완성했을까? 입으로만 흉내 내는 앵무새 공부, 읽는 시늉만 하는 원숭이 독서를 뛰어넘어 삶을 바꾸는 핵심 독서 전략을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배운다!

 

오직 독서뿐! 책 읽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 책만 읽으면 될까? 된다. 어떻게? 그 대답은 옛 선인들이 이미 친절하게 다 말해 두었다. 왜 읽고, 어떻게 읽고, 무엇을 읽을까? 여기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 책은 아홉 분 선인의 글 속에서 독서에 관한 글을 추려 내 옮긴이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모아 놓고 읽으니 반복되는 얘기가 있다. 소리 내서 읽는 낭독의 위력, 정독의 한 방편으로 권장되는 다독의 효과, 의심과 의문을 통해 확장되는 생산적 독서 훈련 등이 그것이다. 한결같이 강조하고, 예외없이 중시했다.

「서문」 중에서

 

정민[鄭珉]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터넷 시대가 될수록 독서의 소중함은 더 절실해진다. 어려서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지식을 얻지만 깊은 사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뿐이다. 또한 책 읽기는 필연적으로 그쓰기와 맞닿는다.

그동안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삶을 바꾼 만남』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일침』,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을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있고,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도 썼다.

 

차례

 

서문

 

책을 일는 까닭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책은 마음을 지켜 준다 / 책은 밥이고 옷이다 / 독서하기 좋은 때 / 한 가지 뜻으로 한 책씩 읽어라 / 마음으로 읽어라 / 꼭 필요한 책은 숙독해야 /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의문과 메모의 독서법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읽으나 마나 한 독서 / 독서와 벼슬길 / 책 보관은 공정을 담아 / 보이지 않는 독서의 힘 / 잊기 전에 메모하라 / 깊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라 / 의문을 품어라 / 역사책을 읽는 법 / 역사책 속의 성공과 실패 / 공부의 바른 태도

 

옛 성현의 독서 아포리즘

백수白水 양응수梁應秀 1700~1767

독서의 쓸모 / 문맥을 살펴라 / 독서에서 기쁠 때 / 줄줄 외워 깊이 생각하라 / 본래의 뜻을 구하려면 /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야 / 덩달아 하지 마라 / 모르면 물어라 / 물러서서 살펴보라 / 스스로 판단하라 / 잠깐 내려놓기 / 기억력을 높이려면 / 욕심을 버려라 / 종이를 벗어나 몸으로 깨달아라 / 핵심을 파악하려면 / 의심하는 것이 공부다 / 거친 마음을 버려라 / 독서와 집 구경 / 자세히 보라 / 가까운 데서 찾으라 / 써먹을 궁리 / 긴장과 이완 / 강약의 조절 / 노소의 차이 / 역량과 나이에 따라 / 꾸준함이 총명을 이긴다 / 『논어』와 『맹자』의 독법 / 욕심은 독이다 / 공부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세 가지 / 용맹한 장수와 가혹한 재판관처럼 두 부류의 병통 / 숙독과 정사精思, 그리고 의문 / 포정이 소를 잡듯

 

바탕을 다지는 자득의 독서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많이 읽고 널리 보라 / 1만 번 독서의 힘 / 양천상의 독서기 / 내가 읽은 책과 읽은 횟수 / 아전인수의 독서 / 잡서를 경계하라 / 독서와 의문 / 자득과 겸손 / 얕게 읽고 낮춰 보라 / 스스로 터득하라 / 독실한 마음, 독실한 공부 / 사견을 눌러라 / 하학상달下學上達 / 구양수의 독서분일법讀書分日法

 

독서의 바른 태도와 방법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초학들의 책 읽는 방법 / 책 읽기의 자세 / 외우는 방법 / 책 보는 마음가짐 / 세 단계 독서 / 뜬생각과 의문 / 뜬생각을 다스리는 법 / 의문의 중요성 / 의문을 깨치려면 / 책 읽기의 못된 버릇 / 옛것을 내게 비춰 보라 / 이의역지以意逆志 독서법 / 천하의 쓸모없는 재주 / 무한히 즐거운 일 / 자각해서 노력해야 / 먼길을 가려면 /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 / 독서에 임하는 자세

 

독서는 깨달음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읽기 싫어요! / 지렁이의 책 읽는 소리 /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네 / 가장 책을 잘 읽은 사람 / 마음을 읽어야지 / 오직 독서뿐 /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할 때 / 독서의 좋은 방법 / 새벽의 복습과 점검 / 새벽의 새 일과 / 선비의 보람 / 능히 잘 읽는 사람 / 책을 잘 읽는다는 말의 뜻 / 부끄럽지 않은 일 / 실용이 먼저다 / 독서의 해악 / 독서와 천착 / 하루도 그만둘 수 없는 일 / 책의 기운

 

생활의 습관, 독서의 발견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첫 권만 때 묻은 책 / 통째로 읽어라 / 다만 책을 읽을뿐 / 독서의 세 가지 효용 / 독서의 유익한 점 네 가지 / 청명한 기운 / 책을 펴면 부끄러워 / 『논어』의 위력 / 열다섯 살의 마음가짐 / 독서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 / 맹랑한 사람 / 소득 없는 독서 / 독서의 표준 / 베껴 쓰기의 위력 / 모르면 찾아라 / 좋은 내용은 함께 나눠라 / 규모와 체제를 먼저 살펴라 / 책에 대해 해서는 안 될 행동 / 한 권을 끝까지 집중해서 읽어라 / 책을 아끼는 태도 / 적은 분량을 깊이 읽어라 /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칠 때 주의해야 할 점 / 가르침을 받는 바른 자세 / 빨리 읽지 마라 / 독서만이 능사가 아니다

 

안목과 통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

독서와 학문 / 집중해서 읽어야 / 글을 외우는 묘방 / 가장 무서운 건 소인 / 안목을 갖추면 글쓰기가 변한다 / 평생 가장 사랑한 글 / 배움은 정밀하고 거친 것을 가리지 않는다 / 독서는 그 시대를 고려해야 /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 / 잠자리의 생각 / 꿈에 만난 성현 / 말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 평소의 연습이 중요하다 / 옛 책의 다섯 가지 등급

 

사색과 깨달음의 독서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라 / 깨달음이 있어야 / 독서의 다섯 등급 / 『논어』를 제대로 일은 사람 / 독서의 효과 / 일상과 독서 / 책의 선택 / 일은 책 다시 읽기 / 모든 것이 책이다 / 내 것으로 만들어야 / 옛글을 읽는 자세 / 독서와 활용 / 독서의 횟수 / 남의 글 비판하기 / 부분과 전체

 

허균許筠(1569~1618)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양천陽川, 자가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이다. 학산鶴山 또는 성소惺所도 썼다. 아버지는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엽許曄이다. 형 허봉許篈과 누이 난설헌蘭雪軒이 모두 문학으로 이름 높았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오고, 이듬해에 한 번 더 다녀왔다. 올 때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해서 돌아왔다. 시 비평의 방면에도 두각을 드러내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성수시화惺叟詩話』를 펴냈고,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조선조 최고의 앤솔러지로 꼽힌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정치가로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훗날 여모를 꾀하다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그는 대단한 천재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중국에서 구해 온 명말明末의 청언소품淸言小品을 두루 섭렵하여 이 가운데 좋은 내용만 추려 『한정록閑情錄』으로 묶었다. 이 책에 수록한 독서 관련 항목은 『한정록』중 「정업靜業」편에서 간추렸다. 이 책에 실린 글은 허균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가 중국의 청언소품에서 따온 글이다. 독서에 임하는 자세를 말하고, 독서를 통해 삶의 운치를 깃들이는 법을 설명했다.

장횡거(張橫渠)*가 말했다.
"책은 이 마음을 지켜준다. 한때라도 놓아 버리면 그만큼 덕성이 풀어진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늘 있게 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마침내 의리義理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게 된다."

張橫渠云 : "書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讀書則此心常在, 不讀書則終看義理不見."

-허균許筠, 『한정록閑情錄』 중 「정업靜業」

*장횡거 : 송나라 때 학자 장재(張載). 미현 횡거진(橫渠鎭) 사람이라 횡거선생이라 불렀다.

 

안지추(顔之推)*가 말했다.

"재물을 많이 쌓아두는 것이 얕은 재주를 몸에 지니는 것만 못하다. 재주 중에 익히기 쉽고 귀한 것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이나 어리석은 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많은 사람을 알고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책은 읽으려 들지 않는다. 이는 배부르기를 구하면서 먹거리 마련에는 게으르고, 따뜻하려 들면서 옷 해 입는 데는 나태한 것과 같다."

顔之推曰 : “積財千萬, 不如薄伎在身. 伎之易習而可貴者, 莫如讀書. 世人不問賢愚, 皆欲識人之多見事之廣, 而不肯讀書. 是猶求飽而懶營饌, 欲煖而惰裁衣也.”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안지추 : 남북조 시대의 문인.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지었다.

독서에도 때가 있는데, 동우(董遇)*가 말한 ‘삼여(三餘)의 설’이 가장 일리가 있다. 그가 말했다.


"밤은 낮의 나머지다. 비 오는 날은 개인 날의 나머지다.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다. 마땅히 이 세 가지 나머지에는 사람의 일이 조금 뜸하므로 내가 한 뜻으로 학문에 힘을 쏟을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한밤중에 가만히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끓이노라면 온 세상은 적막한데 성근 종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이처럼 해맑은 광경 속에 책과 마주하여 피곤을 잊고, 이부자리를 걷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길을 막게 되면 문을 닫고 깨끗이 소제한다. 사람의 왕래도 끊고 서책만 앞에 가득하다. 흥에 따라 뽑아서 뒤적인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들려,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로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하고 적막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또 한 해도 늦어 잎 다 진 숲에 싸락눈이 살풋 내리거나 흰눈이 쌓였을 때, 바람은 마른 가지를 흔들고, 찬 새는 들판에서 우짖는다. 방안에서 난로를 끼고 앉아 차 향기에 술이 익는다. 예전 지은 것을 읊조려 외우노라면 완연히 좋은 벗과 마주한 것만 같다. 이러한 정경이야말로 세 번째 즐거움이다. 내가 일찍이 이같은 맛을 얻었기에 동우의 설을 부연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하려한다.

讀書亦有時節, 故董子三餘之說, 最爲有理. 其曰 : "夜者日之餘, 雨者時之餘, 冬者歲之餘. 當此三餘. 人事稍與踈闊, 吾可一意問學" 何也? 良宵燕坐, 篝燈煮茗, 萬籟俱寂, 疎鍾時聞, 當此淸景, 對編簡而忘疲, 徹衾枕而不御, 一樂也. 至如風雨蔽途, 掩關却掃. 絶人往還, 圖史滿前, 隨興抽檢. 潺湲在耳, 簷花拂硏. 如此幽寂, 二樂也. 又若空林歲晏, 微霰密雪. 枯條振風, 寒禽呼野. 一室擁爐, 茗香酒熟. 陳編諷誦, 宛對良友, 顧此景象, 三樂也. 吾嘗得此意味, 故衍其說, 與諸子共之.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동우 : 위나라 사람

소동파가 왕랑(王郞)에게 준 편지에서 말했다.
"나이가 젊은데 배움이 없는 사람은 한 권의 책마다 모두 숫자를 꼽아가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바다에 들어가면 온갖 물건이 다 있지만, 사람의 정력은 모두 거두어 다 가질 수는 없다. 다만 구하려 하는 바를 얻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매번 한 가지 뜻으로 이를 구해야 한다. 만약 고금의 흥망치란과 성현의 작용을 구하려 한다면, 단지 이 뜻만을 추구해야지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또 달리 사적이나 문물 따위를 구하려 해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학문을 이루어 팔방에서 적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제대로 섭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한 몫으로 말 할 수가 없다."

東坡與王郞書云 : "少年無學者, 每一書, 皆作數次讀之. 當如入海, 百貨皆有, 人之精力, 不能兼收盡取, 但得其所欲求者耳. 故願學者, 每次作一意求之. 如欲求古今興亡治亂, 聖賢作用, 且只作此意求之, 勿生餘念. 又別作一次, 求事迹文物之類, 亦如之也. 若學成, 八面受敵, 則涉獵者, 不可同日而語."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소순흠(蘇舜欽)*이 장인인 두기(杜祁) 공의 집에서 지낼 때 일이다. 매일 저녁 책을 읽는데, 술 한 말을 기준으로 삼았다. 가만히 하는 양을 엿보니, 그가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을 읽다가 자객이 철퇴로 진시황을 치는 대목에 이르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깝다! 친 것이 맞질 않았구나.” 그리고는 큰 술잔으로 가득 따라 마셨다. 또 장량(張良)이 “처음에 신은 하비 땅에서 일어나 유(留) 땅에서 상(上)과 만났습니다. 이는 하늘이 저를 폐하께 준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 한 데 이르자, 또 책상을 어루만지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렵구나.” 하더니, 다시 큰 잔을 들이켰다. 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처럼 먹는다면 한 말도 많다할 것이 없겠다.”

蘇子美客外舅杜祁公家, 每夕讀書, 以酒一斗爲率. 密覘之, 子美讀漢書張良傳, 至與客椎擊秦皇帝, 撫掌曰 : “惜乎! 擊之不中.” 遂滿引一太白. 又讀至“良曰始臣起下邳, 與上會於留. 此天以授陛下”, 又撫案曰 : “君臣相遇, 其難如此.” 復擧一太白. 公笑曰 : “有如此下物, 一斗不足多也.”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소순흠 : 송대의 문인. 자는 자미(子美). 소동파의 아버지다.

왕도곤(汪道昆)의 책장에는 찌를 찔러둔 책이 만권을 훨씬 넘었다. 손님이 한참동안 곁눈질해서 보자, 공이 말했다. “많다고 괴로워 말게. 다만 참고하고 찾아보려고 갖추어둔 거라네. 인생에 쓸모 있는 책은 단지 몇 종류를 숙독하면 되네. 비유하자면 한(漢) 고조(高祖)가 천하를 취할 적에 가장 뜻이 맞았던 사람은 소하(蕭何)와 장량(張良)과 한신(韓信) 등에 불과했지."

汪道昆架上牙籤, 不啻萬卷. 客睥睨久之, 公曰 : “無苦其多, 聊備檢訨. 人生所用書, 只須熟數種. 譬之漢高取天下, 其最屬意者, 不過蕭張韓耳.”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문절공(文節公) 예사(倪思)가 말했다.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학 울음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비가 섬돌에 떨어지는 소리, 창으로 눈이 흩날리는 소리, 차 달이는 소리 등은 모두 소리 가운데 지극히 맑다. 하지만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가장 좋다. 다른 사람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까지 기쁘지는 않지만, 자제가 책 읽는 소리만큼은 기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또 말했다. “천하의 일은 이로움과 해로움이 반반인데, 온통 이롭고 작은 해로움도 없는 것은 다만 책 뿐이다.”

倪文節公曰 :“松聲澗聲, 山禽聲野蟲聲, 鶴聲琴聲, 棋子落聲雨滴堦聲, 雪洒窓聲煎茶聲, 皆聲之至淸. 而讀書伊吾聲爲最. 聞他人讀書, 未極其喜, 惟子弟讀書聲, 則喜不可勝言.” 又曰 : “天下之事, 利害常相半, 有全利而無小害者, 惟書.”

-허균, 『한정록』 중 「정업(靜業)」

 이익李瀷(1681~1763)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성호星湖. 저서에 『성호사설』과 『곽우록藿憂錄』 외에 사서삼경에 대한 독서 비망기에 해당하는 질서疾書 연작을 남겼다. 남인 학단의 출발점에 선 학자로 신후담愼後聃 · 안정복 · 권철신權哲身 등의 문인을 배출했다. 정약용丁若鏞이 그 학문적 흐름을 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에 은거하며 자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했고, 일생에 걸쳐 실용적 학문 경향을 추구했다.

이 책에 수록한 글은 주로 『성호사설』과 사서질서의 서문에서 추려 냈다. 이익은 독서에서 메모와 토론을 가장 중시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한다는 '질서疾書'와, 사제 또는 붕우 간의 서면 토론 및 대면 토론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 의문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독서를 역설했다. 역사책 읽기에서 주의할 점 등 공부하는 사람이 유념해야 할 독서의 바른 태도를 친절하게 일러 준다.

 

찾는 것이 있어 책을 읽으면 읽더라도 얻을 것이 없다.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하는 자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읽어봤자, 읽고 나면 아마득하기가 소경과 다름없다. 이는 흑백을 말하면서도 정작 희고 검은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말을 해도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데 불과하므로, 마치 실컷 먹고나서 토하는 것과 한 가지다. 살과 피부에 보탬도 되지 않고 뜻 또한 사납게 된다.

有求而讀書者, 雖讀無得. 故擧子業者, 至唇腐齒爛, 讀止則茫然如瞽師, 言白黑而無以知白黑, 其言之也, 不過入耳出口. 如飽食而嘔, 不惟肌膚無益, 而志亦戾矣.

- 이익, 『성호사설』 중 「유구독서(有求讀書)」

어려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행하려면 독서만한 것이 없다. 성현의 글을 읽고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보아 얻은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예로부터 현달하고서도 평생 배운 것을 베풀어 행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어째서 그런가? 막상 일을 할 때는 처음 나아갈 때와 같지 않고, 남의 마음이 내 마음만 못한 까닭에, 혹 위세나 지위에 눌리고, 혹 무리가 떠드는 데 유혹되며, 시세(時勢)에 내몰리거나 이욕에 이끌리게 된다. 이는 모두 이욕이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이기려 들면 마음이 옮겨간다. 마음이 옮겨지면 일도 따라서 옮겨간다. 비록 옛 성인께서 형세로 판단하고, 지난 역사가 증명했어도 그 가운데 얽히고 설키면, 일이 같지 않고 시대가 다른 것만 보는 까닭에 잠깐만에 생각의 방향이 바뀌고 속마음도 달라지고 만다. 이런 까닭에 큰 일에 당하여 시비를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작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야 능히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요점이다.

幼而學之, 壯欲行之, 莫如讀書. 讀聖賢書, 推究義理人, 孰無多少見得? 然古來顯任, 未聞有以平生所學施措者. 何也? 做時不如就時, 人心不如我心故. 或爲威尊所壓, 或爲衆咻所誘, 或爲時勢所迫, 或爲利欲所導, 而都不過其利欲者爲之. 機栝欲勝, 則心遷, 心遷則事移. 雖古聖之所勢斷, 前史之所證明, 其中回互周羅, 但見其事有不同, 時有異宜處. 故俄而頭面易方, 腸肚剝換矣. 是以當大事, 判是非, 必也不貴爵祿者, 能之, 此其要也.

- 이익, 『성호사설』 중 「독서사환(讀書仕宦)」

 

옛 책은 읽으면 사람에게 뜻과 지혜를 보태주니 엄한 스승인 셈이다. 어찌 업신여겨 함부로 하겠는가? 판목에 새긴 뒤로 서적이 비록 많아지긴 했어도 가난한 선비가 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하는 것은 괴로울뿐 아니라 또한 잘못 되기도 한다. 선조의 해묵은 장서는 점점 헐어지고 훼손되게 마련인지라 자손이 비록 살펴보려 해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평소에 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책을 아껴 손상되지 않도록 한다. 잘 아는 고을 수령에게 부탁해서 표지와 붙일 종이를 많이 얻어와 책이 헐면 바꾸었다. 남에게 책을 빌렸을 때도 책을 꿰맨 것이 끊어지거나 문드러진 것은 반드시 종이를 비벼 꼬아 기워 묶었다. 실을 마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옛날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은 책을 햇볕에 말릴 때 반드시 곁에 서서 마음을 쏟았고, 이동할 때는 반드시 네모난 판목에 보관했다. 책에 손의 땀이 젖을까 염려해서였다.

매번 책 한 장을 다 읽으면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가장자리에 대고, 집게 손가락으로 덮어 책면을 눌러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넘겼다. 사람들이 손톱으로 집는 것을 번번이 보게 되는데, 이는 책 아끼기를 재물 아끼는 것만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전 극선(郤詵)이 과거시험의 사책(射策)에서 1등으로 뽑히자 붓에게 두 번 절을 하며 말했다. “용수우(龍鬚友)가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어떤 사람이 금거북을 새긴 보배로운 비녀를 선물하자 제자에게 주며 말했다. “붓 3백 자루를 사오너라.” 붓이 못 쓰게 되면 또한 글 주머니에 보관해 두고, 자손에게 좋은 향으로 예를 올리게 했다. 문방구를 아끼는 마음 또한 훌륭하다 하겠다.

古書者, 讀之益人意智, 乃嚴師也. 其可慢之耶? 板刻之後, 文籍雖繁, 非貧士所可易得. 手寫傳錄, 不但艱難, 又亦以訛誤. 先祖舊藏漸至殘缺, 子孫雖欲看閱, 何可得也? 故平余生敬以玩之, 無至傷損. 託於所識宰縣者, 多取粧褾貼紙, 隨缺隨易, 借人典籍, 其縫池斷爛者, 必撚紙補綴, 亦緣絲繩之難辦也. 昔范文正晒書, 必側立而暴其腦, 移動必永以方版, 恐手汗之漬. 每竟一板側, 右手大指, 面襯其沿, 而覆以次指, 面撚而挾過. 每見人以手指爪撮起, 卽是噯書不如愛貨貝也. 昔郤詵射策第一, 再拜其筆曰 : "龍鬚友使我至此." 有遣金龜寶簪者, 與弟子曰 : "市筆三百." 管退亦藏之文囊, 令子孫以名香禮之, 其愛惜文房意, 亦善矣.

- 이익, 『성호사설』 중 「경완서적(敬玩書籍)」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로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 했다고 할 만하다.

有一學士, 看書未半, 投地曰 : "掩卷輒忘, 看亦何益?" 玄谷曰 : "人之喫飯, 不能恒留腹中, 然精英之氣, 亦能潤身澤體, 讀書雖忘, 自有長進之效." 可謂善於辭令.

- 이익, 『성호사설』 중 「조현곡(趙玄谷)

「장횡거화상찬」에 묘계질서(妙契疾書), 즉 오묘한 깨달음을 빨리 적었다고 했다. 묘계(妙契) 즉 오묘한 깨달음은 잘 하기가 어렵지만 그 즉시 써두는 질서(疾書)는 쉬운 일이다. 장횡거가 『정몽(正蒙)』을 지을 적에 가는 곳마다 붓과 벼루를 마련해 두었다. 또 밤중에라도 얻은 바가 있으면 일어나서 등불을 가져와 이를 써두곤 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금세 달아날까봐 염려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정자(程子)가 이를 기롱하여 “자후(子厚)는 이처럼 능숙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이다. 능숙했다면 굳이 빨리 쓰지 않더라도 절로 잊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 말이다.

橫渠贊云, 妙契疾書. 妙契難能, 而疾書乃其所短也. 橫渠之作正蒙, 隨處置筆硯, 又或夜中有得, 起而取燭書之. 恐其不疾則旋遺也. 故程子譏之曰 : "子厚如此不熟." 蓋熟則不必疾其書而不自忘也.

- 이익, 『성호사설』 중 「묘계질서(妙契疾書)」

오늘날 사람들은 책은 존중하지만 그 정신은 잃었다. 글은 읽으면서도 그 뜻은 저버리고 있다. 깊이 생각하면 잘못이라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 주제넘다 하며, 부연설명하면 쓸데없는 짓이라 한다. 곧이곧대로 규정하여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도 성역을 설정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 결과 둔한 사람과 총명한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옛 사람이 뒷사람에게 기대하는 바이겠는가? 가령 사람이 백리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수레와 말을 갖추고 하인과 마부가 앞장을 서서 하루 만에 당도하였고, 한 사람은 옆길로 찾아가다가 곤란을 겪은 뒤에 비로소 도달하였다고 하자. 만일 이들로 하여금 다시금 그 길을 가게 한다면 길을 찾아가며 다닌 사람은 정확히 알아, 길잡이를 앞세우고 간 사람처럼 갈림길이나 네거리에서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 주석만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其在于今, 尊其書而失其心, 誦其文而後其義. 思量則爲妄, 致疑則爲僭, 發揮則爲賸. 尺尺寸寸, 一切卑近, 勒爲禁網, 而愚與智無別. 此豈古昔人所望於後來哉? 比如人趨百里之程, 其一人則需以車騎, 導以傔騶, 一日便到, 其一人探搜旁蹊, 艱難而始達. 後使之更趨焉, 則其探搜者認得分明, 不比導行者之或迷於歧衢也. 以此知謹守訓誥之非心得者也.

- 이익, 「논어질서서(論語疾書序)」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의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얻어도 야물지가 않다. 의문이란 의심하고 머뭇대면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 옳은 줄 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울러 살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얻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혹 잘못된 것을 옳다고 우겨도 대응할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과일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복숭아나 살구 같은 과일을 주면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살이 맛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씨 속에 다시 어떤 맛이 있을지 의심한다. 다른 날 개암이나 밤 따위를 주면 껍질은 벗겨내고 씨만 먹는다. 맛이 씨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서 복숭아나 살구씨의 맛이 개암이나 밤처럼 먹을만 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만약 그때에 모두 먹어보아서 분명하게 알아두었더라면 어찌 다시 이같은 근심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의문을 갖는 것은 의문을 없게 하려는 것이다. 저 먹기만 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비록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또한 장차 이를 따를 것이다.

學必要致疑, 不致疑, 得亦不固. 所謂疑者, 非謂狐疑猶豫無所决擇也. 若知如是而是, 則必兼審如是而非, 方始是見得. 不然則人或以非爲是, 將無以應也. 比如食果子相似, 與之以桃杏之屬, 噉其肉而棄其仁, 美在肉也. 猶疑夫核中更有滋味在也. 佗日與之以榛栗之屬, 剝其皮而噉其仁, 美在仁也. 又安知向之仁之美, 不如榛栗之可噉乎? 若使當時都咬破知得分明, 豈復有此患? 故有疑所以無疑也. 彼食焉而不疑者, 雖爲栗房可嚼, 亦將從之矣.

- 이익,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평소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늘 의심이 생기곤 한다.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다. 그 당시에는 꼭 그렇지 만은 않았을 터. 역사책을 쓸 때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면하려는 지극한 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저 보아 넘길 때는 착한 사람이야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지만, 저 악한 사람이 어찌 그토록 지독했겠는가?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사람이 실제 시비에 현혹되어, 버리고 취함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나무람을 받고 죄를 얻었던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러한 뜻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常時讀史, 每疑. 善者偏善, 惡者偏惡. 在當時, 未必然. 作史, 雖因懲惡勸善之至意. 今人平地上看過, 以爲善者固當, 彼惡者, 胡此至極. 其實, 善中有惡, 惡中有善. 當時之人, 實有是非之眩, 故有去取不審, 貽譏得罪者也. 讀史, 不可不知此意.

- 이익, 『성호사설』 중 「고사선악(古史善惡)」

천하의 일은 대개 열에 여덟 아홉은 요행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고금의 성공과 실패, 날카로움과 둔함은 그때의 우연에 따른 것이 워낙 많다. 선과 악, 어짊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반드시 그 실지를 얻은 것도 아니다.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보고 여러 책에서 증거를 찾아 참고 대조해서 비교해 보아야지 진실로 오로지 한 가지 책만 믿고서 단정할 수가 없다.

옛날 정자(程子)가 역사책을 읽을 때, 절반쯤 읽다가 문득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패를 가늠해 보곤 했다. 그런 뒤에 문득 보아 합치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더욱 곰곰이 생각했다. 그 사이에는 요행으로 성공하거나 불행으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대개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맞는 경우 또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역사란 것은 성패가 이미 정해진 뒤에 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꾸미게 마련이니, 이를 보면 마치 진실로 마땅한 것만 같다. 게다가 착한 사람은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그 장점을 없애 버린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대한 판단과 착하고 악함에 대한 보답을 징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아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당시에 훌륭한 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겠고, 졸렬한 계책이 어쩌다 맞아 떨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그런데 천년 뒤에 무엇으로 옳고 그름의 진실을 안단 말인가? 이런 까닭에 역사책에 근거해서 성패를 가늠해보면 합치되는 것이 많고, 오늘날 눈으로 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생각해 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맞지가 않는다. 이는 내 지혜가 밝지 않아서가 아니라 요행으로 이루어진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일이 어그러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또한 역사책이 진실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천하의 일은 놓여진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은 그 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가 된다.”

天下事大抵八九是幸會也. 其史書所見, 古今成敗利鈍, 固多因時之偶. 然至於善惡賢不肖之別, 亦未必得其實也. 歷考前史, 旁證諸書, 參驗而較勘之, 誠未可以專信一書而爲已定也. 昔程子讀史, 到一半, 便掩卷思量, 料其成敗, 然後却看, 有不合處, 又更精思. 其間多有幸而成, 不幸而敗. 盖其不合處固多, 而合處亦未可準信. 史者作於成敗已定之後. 故隨其成與敗而粧點, 就之若固當然者. 且善多諉過, 惡必棄長. 故愚智之判, 善惡之報, 疑若有可徵, 殊不知. 當時自有嘉謀不成, 拙計偶逭, 善中有惡, 惡中有善也. 千載之下, 何從而知其是非之眞也? 是以據史書, 料其成敗, 則合處多, 從今日目擊顯見者而思量, 則八九是不合. 此非但吾智之不明, 卽幸會之占多也. 非但今事之多戾, 亦史書之難眞也. 余故曰 : "天下之事, 所置之勢爲上, 幸不幸次之, 是非爲下."

- 이익, 『성호사설』 중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

나는 평소에 “가르치기가 어렵지만, 배우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경전을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옛 가르침을 법도로 삼게할 뿐, 이렇다저렇다 의논하는 뜻은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남을 따라 덩달아 웃으면서 마침내 자기 견해는 없게 되지 싶다. 아니면 장차 다른 자료를 채집하고 널리 궁구해서 증명하는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낮은 처지에 함부로 따진다 하여 죄과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져 밝히는 것이 더 낫다. 그런 까닭에 제자의 직분은 오로지 가르침을 받되 스스로를 속이는데 이르지 말고,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멋대로 바꾸는 데서 실수가 생겨서는 안 된다.

余嘗曰 : "敎旣難, 學亦不易." 使經生學子, 將尺寸古訓, 無容議意耶, 有似乎隨人嬉笑, 而卒無見解. 將旁採博究, 要歸證明耶, 有似乎處下橫議, 易陷罪過. 然與其昏也, 寧覈. 故弟子之職, 專聽受, 而不至於自欺, 發疑難, 而無傷於躐易.

- 이익, 「중용질서후설(中庸疾書後說)」

 

 

 

 

'내가 읽은 책들 > 2014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028 無로부터의 우주  (0) 2014.03.04
2014-027-1 오직 독서뿐  (0) 2014.03.03
2014-026 물소리 새소리  (0) 2014.02.27
2014-025 해양 생물  (1) 2014.02.25
2014-024 소크라테스처럼 읽어라  (0) 2014.02.25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