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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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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30. 16:4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3 독도

 

글 / 박인식●사진 / 김정명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5

 

082

빛12ㄷ  182

 

빛깔있는 책들 182

 

박인식-------------------------------------------------------------------------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월간 『사람과 산』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했다. 월간 『사회체육』에 장편소설 「만년설」(1985~1986)을 연재한 바 있고 창작집 『사람의 산』(1987년 예문사), 산악희곡집 『서문동답』(1987년 문성당), 『북한산』(1993년 대원사), 기행소설 『대륙으로 사라지다』(1994년 광화문) 등의 저서가 있다.

 

김정명-------------------------------------------------------------------------

1972년 어린이들을 위한 영상물로 「옛날 옛날 이야기」 시리즈 30여 편을 제작했고, 1986년에는 문화영화제에서 「설악산 사계」로 우수작품상을 받았으며 1987년 주간조선에 「한국의 얼을 찾아서」를 연재했다. 1993년 미도파백화점에서 KBS와 공동으로 독도 365일 사진전을 개최하였고, 그 해 대전 엑스포 무역박람회에서 독도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잇다. 저서는 「산과 들에 피는 꽃 (95)식물도감」이 잇으며, 1994년 1월부터 KBS 2TV 아침방송에 「한국의 야생화」를 방송하고 있다.

 

도움 주신 곳-----------------------------------------------------------------

푸른 울릉 · 독도 가꾸기 모임

 

|차례|

 

독도는 우리 땅

지리와 자연 환경

    개관

    토양과 식생

    동물과 어류

    독도의 사계

독도의 역사

    독도의 한국 영토 첫 확인, 서기 513년

    조선시대의 공도 정책

    일본 속의 독도 역사

    1697년 조선 영토로 공식 인정

    '독섬'에서 유래된 '독도'

    지도 속의 독도 역사

    일본인의 불법 밀입과 조선의 대응

    한반도 식민지화의 서곡, 1905년 독도 침탈

    일본의 억지 주장이 계속되는 이유

독도를 지킨 사람들

    독도를 지킨 영웅, 안용복

    홍씨 문중의 독도 사수

    독도 의용 수비대의 활약

    '자연섬' 독도를 위래

참고문헌

 

저 멀리 동해 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은 동해로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 타고 떠나다

한라산 제주에서 배 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 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 한돌, '홀로 아리랑'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

동경 132도 북위 37도

평균 기온 12도 강수량은 천삼백

독도는 우리 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 알 해녀 대합실

17만 평방 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

- 정광태, '독도는 우리 땅'

독도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위는 태극기와 독도에 뿌리내리고 사는 해국이 어우러진 정경이다. 아래는 국기 게양대. 우리가 독도를 국토와 민족의 이름으로 지켜 나갈 때 독도는 우리 땅과 민족에게 내일도 선명한 아침을 밝혀 줄 것이다.

가산도 뗏목 탐사  지난 1988년 KBS-TV에서는 「가산도(독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다. 그때 제작팀은 뗏목을 만들어 해류에만 의지한 채 울릉도를 출발한 지 3일 만에 독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지도 모양  동도의 바위 사면에는 풀이 돋아난 곳이 주변과 구분되어 마치 우리나라 지도 형상을 한 곳이 있다.

 

가제바위에서 본 동도와 서도  독도는 동도와 서도, 두 개의 큰 섬과 60여 개의 바위들로 구성된 화산섬이다. 면적은 약 5만 평. 행정 구역상으로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산 42번지에서 산 75번지로 동해의 끄트머리 자락에 위치한다.

동도의 독립문바위  동도는 서도에 비해 면적은 좁지만 독립문바위를 비롯한 수려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동도에서 본 서도  서도는 해발 167.9미터로 독도의 유일한 주민인 김성도 씨의 집과 유일한 식수원인 '물골'이 있다.

천장굴  천장굴은 동도의 중앙에 있는 해식 동굴이다. 거친 동해의 파도는 바위를 깎아 기묘한 바위와 신비한 동굴을 만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도의 이야기가 들려올 것 같다.

삼형제굴  삼형제굴은 서도 북서쪽 탕건봉 맞은편 옆에 있다. 얼른 보아 아버지 옆에 비켜서서 동해를 응시하는 아들의 형상이다. 큰 바위에 파도가 뚫어 놓은 굴 세 개가 머리를 맞댄 의좋은 형제의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탕건봉  서도에는 떨치고 일어서는 남성의 양기를 느끼게 하는 탕건봉이 솟아 있다. 반듯하게 잘린 정상 부분이 남자들이 머리에 쓰는 탕건을 닮았다 하여 탕건봉으로 불리는 이 바위 봉우리는 멀리서도 발견된다(위). 아래는 동도의 해식 동굴 안에서 본 탕건봉의 모습이다.

동도 정상에서 본 촛대바위

장군바위  일명 촛대바위라고도 한다. 동도와 서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여 이름도 두 가지다. 동도에서 보면 촛대 모양이지만 서도 쪽에서 보면 출전을 앞둔 장군의 긴장된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섬장대꽃과 벌  해풍에 씻긴 말간 꽃들이 독도의 바위틈을 비집고 향기를 내뿜고 있다. 거친 해풍에 날개짓하기도 힘들 듯 싶은데 독도의 벌은 육지 벌만큼이나 부지런하다.

털머위  독도는 해안이 모두 바위 절벽이어서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식물조차 독도에 상룩할 수 없어 종자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는 식물만 번식할 수 있다.

독도에서 제일 큰 섬괴불나무와 꽃  5월이면 노란색 꽃을 피우는데 거친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낙엽 떨기 나무이다. 한때 토끼가 다 뜯어먹어서 현재는 벼랑에 10여 그루만 남아 있다. 100원짜리 동전을 통해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강치  조선시대에 강치는 울릉도 주민에게 '바닷가제'로 불렸는데 그런 가제가 많이 출몰하는 섬이라 하여 독도는 정조 때 '가제도'라 명명되기도 하였다.

괭이갈매기  부근의 바다에 물고기가 풍부하기 때문에 독도에는 각종 새들이 저마다의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바다제비와 괭이갈매기, 슴새, 황조롱이 등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천연기념물인 괭이갈매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괭이갈매기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이 괭이갈매기의 일생은 독도의 사계절과 맞물려 전개된다. 독도는 망망한 바다 위로 솟아올랐다가 울릉도가 있는 서쪽으로 지는 태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이 되면 날아와서 수만의 새끼를 부화시키고 키우다가 계절이 바뀌면 새끼와 더불어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괭이갈매기에 의해 나이를 먹고 철이 든다.

독도의 풀, 파도, 갈매기  독도는 풀도 나무도 없는 돌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쑥, 쇠비름, 왕호장근 등 50여 종의 식물과 하얗게 바다를 뒤덮은 괭이갈매기가 독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왼쪽 바위를 뒤덮은 것은 왕호장근의 군락이다.

태풍 전야  독도가 위치하고 있는 동해는 남태평양에서 북태평양으로 부는 태풍의 통로이다. 하늘의 먹구름이 짙어지면서 태풍으로 변하고 있다. 태풍 전날은 원래 평화로운 법이지만 다음날 큰 태풍이 이곳을 지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다. 동해에 울릉도, 우산도를 나란히 표시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나타낸 것이다.

용오름  회오리치는 물기둥이 지름 50~60미터, 높이 500미터로 높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용오름이라 하고 과학 용어로는 토네이도 현상이라 한다. 아래는 용오름이 시작될 때이고 위는 끝날 때의 모습으로 물기둥이 흐트러지고 있다.

클라프로트의 삼국총도  하야시의 『삼국통람도설』을 번역한 클라프로트는 그 책 안에 부록 지도첩으로 「삼국총도」 및 「조선팔도지도」를 첨가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이 명기되어 있어 독도 문제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독도의 일출  동해에 얼굴을 씻은 태양이 이땅에서 제일 먼저 선명한 아침을 여는 곳이 바로 독도이다. 동해에서 솟은 해는 독도를 연 다음에야 울릉도와 한잔도에 선명한 아침의 서기를 뿌려 준다. 위는 천장굴 앞에서 본 일출, 아래는 얼굴바위에서 본 일출 광경이다.

한국령  1954년에서 1956년까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때에 울릉도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는 일본의 어부들로부터 독도를 지켰다. '한국령'이라는 글씨들은 독도 의용 수비대가 활약하던 당시에 새겨 놓은 것이며 위의 '한국'은 한진호 씨 글씨이다.

독도 의용 수비대  우리는 독도를 노래나 구호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 곳에 살며 독도에 불법 침입한 일본 어부들이나 해군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여 물리친 영웅들의 넋이 구천에서도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 의용 수비대원 명부

고성달  김수봉  김인갑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안학률  이상국  정이관  정재적

조상달  한상용  허신도  홍순칠  황영문(이상 사망자)

구용복  김경호  김병렬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박영희  서기종  양봉준  오일환

유원식  이규현  이필영  이형우  정원도  정현권  최부업  하자진(이상 생존자)

1996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는 고 홍순칠 대장에게 4등급인 보국훈장 삼일장을, 나머지 대원 32명에게는 5등급인 광복장을 각각 수여하기로 의결했다.

태극기 게양대 밑에 새겨진 '한국령' 글씨

독도 수비대가 세운 팻말  한자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팻말로 동도 선착장 부근에 있다.

파도가 밀어 올린 포탄  미 군정 때에 독도는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바다에 떨어졌던 녹슨 포탄 1개를 파도가 밀어올렸다.

독도 기념 우표  1954년 9월 15일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뜻으로 3종의 독도 도안 우표를 발행하였다. 이에 일본은 11월 19일 이 우표가 첨부된 한국의 우편물을 반송하기로 의결한 적도 있다.

독도의 샘 물골  물골은 독도의 모든 식물들이 만들어 낸 수액들이 고여 만들어진 샘이다.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물골 덕이다. 1989년부터 독도에 나무 심기가 본격화되면서 물골의 생명수는 더욱 맑고 그 양도 풍부해졌다.

물길러 가는 계단  서도에 있는 물골은 태풍을 피해 독도를 찾아든 어부들의 목을 축여 주는 생명수다. 거친 파도를 피해 물을 길어야 했던 사람들의 의지가 가파른 벼랑에 계단을 만들었다. 이 계단은 1987년 울릉도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민간인의 집  독도 주민 김성도 선장의 집이다. 고 최종덕 씨가 산비탈 절벽을 깎아 지은 민간인 숙소로 여름이면 어부들의 보금자리 역할도 한다. 태풍이나 강풍이 몰아쳐도 피해가 없을 정도로 위치가 잘 선정되었다.

이차년도 나무 심기  이차년도부터는 흙이 붙어 있는 10센티미터 정도의 큰 나무를 심어 정성을 기울였다. 또 토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망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는 야생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장군바위를 배경으로 한 독도의 일출

독도박물관 전경과 전시실 내부  1997년 8월 8일 준공된 독도박물관은 울릉도 약수공원 내에 위치한다. 제1, 2전시실에는 서지학자 이종학 씨가 수집한 독도 관련 자료가 있고, 제3전시실에는 독도 의용 수비대 및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 활동 자료가 총 580여 점 전시되어 잇다.(사진 제공 삼성문화재단)

 

 

posted by 황영찬
2013. 9. 30. 09: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2 책이 무거운 이유

 

맹문재 시집

2005,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602

 

811.6

맹3619책

 

창비시선 252

 

맹문재 시인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성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그는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종달새 소리와 흰나비를 쫓는 순진한 소년이다. 그는 쇳가루를 뒤집어쓴 공장노동자 생활을 경험한 바 있으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배신과 실망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하나의 소망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시는 인간이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씌어진 그의 시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본다. 거짓된 말은 사람을 유혹하나 진실된 말은 사람을 움직인다.

최동호 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맹문재 孟文在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등이 잇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차례

 

제1부 ___

운(運) / 봄 / 품 / 홍무수 맛 / 안부 / 별똥별 / 선생님 / 목련꽃 / 선생님 / 목련꽃 / 귤 / 가장자리에서 / 나침반 / 신발 / 주인 / 집 / 귀가 / 손목시계

 

제2부 ___

책이 무거운 이유 / 달 / 단단한 무늬 / 벽화 앞에서 / 까치집 / 꽃 / 새순 지팡이 / 첫눈의 노래 / 다음에 / 까마귀 소리 / 사십대 / 아름다운 얼굴 / 산길 / 배수진을 친 집

 

제3부 ___

약수 / 염소 / 도둑고양이 / 착지점, 이자 /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 사십을 생각한다 / 이자가 적을 만든다 / 말일 / 사남매 / 시집 읽기 / 예 /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다 / 라면을 한 개 더 삶다

 

제4부 ___

소읍은 살고 있었다 / 겨울 저녁을 닮은 단추 / 사십세 / 뉴스가 사이렌을 울린다 / 안전 주간 / 치기를 위하여 / 안주를 뱉다 / 수선공의 손 / 배수진과 원탁 / 1980년대에 대하여 / 평전 다시 읽기 / 아름다운 푯대 / 뿔

 

해설 | 이경수

시인의 말

 

목련꽃

 

잠지리에 들었는데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도 제법 내리는 것 같다

택시에 받혀 나가떨어진 엊저녁 퇴근길에 본 사내가 떠오른다

그의 아내도 저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까

정비공으로 일하는 작은동생의 운전길이 미끄러울텐데

쇠를 만들어 밥 먹는 제철소 친구들의 안전화가 젖을텐데

자전거를 타고 건너다가 넘어졌던 그곳 철길이 여전히 미끄러워

나는 이불 속으로 움츠러든다

이사를 다녔던 거미줄 같은 길들이 질펀하다

시골집의 낡은 전선과 형광등이 괜찮을까

할머니의 산소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잠자다가 일본 광산에 끌려간 조선인들, 그들이 탄 열차가 흔들린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그날도 저렇게 비가 내리지 않았을까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길을 내기 위해 목련꽃들이

천둥소리를 잡아먹고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사십대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에

더이상 놀라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어

십이월의 섬에서 고독하게 저녁을 맞는다

 

식사 시간에도 새벽안개를 긁어모았고

담화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고

일기장마다 건조한 지도를 그려온 나의 그림자도

조용히 앉아 풀어지고 있다

 

저쪽 언덕 위에서는 위로(慰勞)가

마치 송편 같은 눈으로 아웃된 나를 안쓰러워하며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머리가 허옇고 눈을 껌벅거리고

장작개비처럼 마른 팔로 책을 들고 있는 한 노인이

등을 구부린 채 골목길을 가고 있다

위로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싶지만

이내 포기한다

나의 카리스마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인 것이다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를 무시하고

십이월의 섬에 앉아 카리스마의 독설을 묵묵히 듣는다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소를 부려 밭을 갈던 아버지의 목청이 가라앉았다

거실의 텔레비전이 가라앉았다

걸려온 전화를 조심스레 받는 어머니가 가라앉았다

안방의 장롱이 가라앉았다

야근한 뒤 점심도 굶고 잠자는 동생이 가라앉았다

화장실이 가라앉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가라앉았다

안부전화를 건 제철소의 동료가 가라앉았다

쿨룩거리는 냉장고가 가라앉았다

먼 지방의 공사장으로 간 여동생 남편이 가라앉았다

십년째 쓰는 전기밥솥이 가라앉았다

고객의 호출을 착하게 받는 막내 동생이 가라앉았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낡은 수첩이 가라앉았다

윤기 없는 아내가 가라앉았다

날아드는 먼지를 막지 못하는 현관이 가라앉았다

취직 걱정에 몸살이 난 내가 가라앉았다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가라앉았다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1

돈, 돈 하고 있는데

주는 돈 다 셈하면 가져도 좋아, 못하면 헛일이고

나는 이자의 제의에 휘파람을 불었다

 

만원, 이만원, 삼만원…… 십만원, 십일만원……

백만원, 백일만원……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돈방석에 앉아 있었다

세기만 하면 되었기에

유행가를 부르듯 부지런히 이어갔다

천일만원, 천이만원, 천삼만원……

 

2

그러나 점점 초조해졌다

설마 그렇게 많이 가졌을까 하고 생각했던 이자의 돈이

끊기지 않고 속주머니에서 계속 나와

오히려 겁이 난 것이다

그래도 엄청난 기회를 잃을 수 없다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일억 일만원, 일억 이만원, 일억 삼만원……

 

마침내 나는 헐떡거렸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이자에게 농락당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산더미 같은 돈 앞에서 든 것이다.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이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띠고

내게 돈을 건넸다

 

3

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눈을 돌려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어디에도 있는 별, 그러나 나의 손안 어디에도 없는 별

 

진정 내게 전략이 없는가?

 

배수진과 원탁

 

아더왕은 원탁이 잇어 배수진을 칠 수 있었을까

배수진을 쳤기에 원탁을 살릴 수 잇었을까

 

영화 「킹 아더」를 보다가 생각했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개채용에 또 한번 속고 나서

배수진을 치지 않는 한 원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살인범의 죄까지

나와 상관있다고 애써 인정해왔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환경은 지배계급의 원탁이기에

나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탁에 둘러앉는 것보다

배수진을 치고 들어가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아더왕의 지배계급성을 싫어하지만

언 강물 위에 배수진을 치고 칼을 뽑았던 결정을 수용한다

 

모든 길은 원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수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귀가

 

1

나는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 우리 집이 보이는데

아직 식구들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모두 잠들었는지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나는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갈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길이 너무 미끄러워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술 몇잔을 마셨다고 이렇게 힘이 없을까

나는 오기를 가지고 올라갔지만

몇걸음 못 가 다시 미끄러지고 말았다

 

2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밧줄을 구해 와

매듭을 지어 집을 향해 던졌다

밧줄은 대문에 정확히 걸려

나는 밧줄을 감아쥐고

한 발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가갔을 때

대문이 나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이 밧줄을 놓고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 하는데

아내와 어린애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대한 아버지가 왔다고 큰소리쳐야 하는데

따뜻한 방에 슬픈 그림자를 눕히고 재워야 하는데

 

3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밤바람이 제법 찼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손발을 오므렸다

 

나는 온몸으로 길을 녹이며 오르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

 

야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한 마리의 고양이와 마주쳤다 주춤거리며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제법 무서웠는데 슬퍼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 들켰다고 화를 내는 것일까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다음날 저녁 나는 다시 그 쓰레기통에서 고양이와 마주쳤다. 나를 아는 눈치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눈빛이었지만 늦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처럼 외롭고 슬퍼 보였다

 

그 다음날 귀갓길에 나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어느새 고양이는 나의 슬픈 신발이 되어 있었고 외로운 거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골목에 들어서서 다가갔다 그런데 고양이는 없었다 왜 오지 않았을까, 허망했고 걱정도 되었다

 

그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눈빛을 찬물을 끼얹어 장작불을 끄듯 내 마음속에서 끌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슬퍼 보였고 외로워 보였던 그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촛불로 삼고 복잡한 서울 거리를 헛디디지 않고 다녔다 구조조정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인터넷 뉴스를 뒤졌고 아이들의 용돈을 마련하려고 교통비를 아꼈다 주눅 든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고 『전태일 평전』을 읽었고 겨울바람을 막으려고 전세 대출금 이자를 연체하지 않고 냈다

 

사남매

 

할머니가 밭에 나가 있는 동안

일곱살 동생이 열다섯 된 오빠를 데리고 논다

마늘 몇접 걸려 있는 처마 밑에 놀이터를 마련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따라

방을 꾸미고 컴퓨터를 설치하고

화단을 가꾸고 우편함을 만들고 만국기를 단다

해가 뜨면 오빠와 할머니께 인사를 한 뒤 회사에 출근하고

집에 있는 오빠가 궁금해 회사에서 가끔씩 전화를 걸고

과일과 붕어빵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퇴근한다

저녁을 지어 오빠와 할머니와 냠냠 먹고 나서는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설거지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오빠는 동생의 소꿉놀이가 즐거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헤헤 웃으며 손뼉을 치고

동생은 했던 놀이를 하고 또 해도 마냥 즐거워하는 오빠가 좋아

집안 살림을 신나게 한다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남매를 부르면

동생은 오빠를 이끌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오빠는 동생을 따라가야 된다는 마음으로 달려간다

할머니가 세상에 두번 다시 오지 않기라도 하는 듯 치마를 잡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서면

이부자리 곁에서 낮잠을 자던 또다른 남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멘트공장에 일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 뜬 남편과

정신박약아인 아들과 이자가 안될 딸과 노모를 버리고 가면서

선물로 남기고 간 인형 남매가

어느덧 언니들과 어울려 놀 만큼 자라난 것이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 동안

사남매는 모여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손뼉을 치며 노래도 부른다

 

운(運)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리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아름다운 얼굴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푯대

 

공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가

뒤편의 산마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꽃들은

말갛게 쓸린 오후의 골목길처럼 깨끗했고

미인의 귀볼처럼 발그레했고

세상살이가 좋기라도 하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저 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나는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쇳가루를 뒤집어쓴 시커먼 공장을

아름다운 푯대로 삼으려고 했던 내가

꽃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니

 

공장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내가

꽃 앞에서 강박관념을 느끼는 존재라니

나를 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푯대여

 

책이 무거운 이유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무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만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살한 노동자의 유서에 스며 있는 슬픔이나

비전향자의 편지에 쌓인 세월을 잊을지 모른다고

때로는 겁났지만

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의 나무를 기준으로 삼아

몸무게를 달고

생활계획표를 짜고

유망 직종을 찾아보았다

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

 

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그 나무 때문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9. 27. 11:5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2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수연산방 안마당에 성북동 골짜기의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이태준, <달밤>

작가 이태준이 살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집필한 곳. 수연산방.

 

성북동 안골짜기라면 물 맑고 공기 좋고 여름엔 나무 그늘 푸지고 겨울엔 솔바람 소리 그윽하고 살면 살수록 정이 드는데다 거기 또한 이웃까지 좋고 볼 양이면 따로 낙지(樂地)를 구할 생각조차 날 리 없다.

석운과 나는 이와 같은, 낙지 부럽지 않은 행복한 지대에 십 년 동안을 이웃하고 살았다. 재 직업이 비록 A출판사의 편집원이라고는 하나, 성미가 본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다 학교 적에는 미학을 전공했고, 취미가 또한 서예에 잇는 지라 사의 일만 끝나면, 한시바삐 시내의 혼탁한 공기와 착잡한 소음을 벗어나야겠다는 듯이 이내 집으로 돌아오는 버릇이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집을, 나의 집이라기보다는 나의 집이 있는 성북동의 깨끗한 자연과 석운이 있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다.

김동리, <청자>

 

심우장은 한용운이 거처하던 자그마한 집이지만 만해의 높은 기상이 서려 있기에

결코 작지 않은 집니다.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새암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건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의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한용운, 심우장 산시 1 <山居>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

 

소설가 춘원 이광수도 만해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만해는 원래 춘원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좋아하였는데, 그도 역시 창씨개명을 하자 몹시 실망하여 심우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명륜동에서 소설을 쓰다가 불교에 대한 것을 풀기 위해 고개를 하나 넘어 성북동 심우장으로 찾아온 것인데, 만해는 그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하고 문전박대를 한 것이었다.

정찬주, 《만행》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巖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잇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조지훈, <돌의 미학>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그러나 요사이 구보는 교외(郊外)를 즐기지 않는다. 그곳에는, 하여튼 자연이 있었고, 한적(閑寂)이 있었다. 그리고 고독조차 그곳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요사이,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구보 씨는 다섯시 반에 성북동에 있는 '유정'이라는 술집에 닿았다. 거기가 《성남동 까치》출판기념회 자리였다. 여느 술집과 마찬가지로, 가로가 긴 아크릴 간판을 단 한옥이었다.

(중략)

구보는 이런 얘기를 했다.

- 김광섭 선생의 《성남동 까치》는 60년대의 끝에 와서 문득 우리 문학의 하늘에 울린 길한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한국 시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중략) 《성남동 까치》는 시에게 위엄과 점잖음의 옷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번쩍거리지도 절그럭거리지도 않는--목숨처럼 자유무애하고 자유인답게 점잖은 그런 옷입니다.

최인훈,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나는 참을 수 없이 그 분들이 내 할아버지라는 느낌이다. 그 분들의 핏줄과 내 핏줄이 하나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테면 1970년 5월 29일 저녁, 노인들이 환장하게 보고 싶어서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詩祭에 갔다가 들은 김광섭 선생의 답사 "나는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해서 시를 씁니다"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김광섭의 별이 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는 뜨끈한 물이 넘쳤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

정현종, <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의 말씀>

 

나는 뇌출혈로 메디칼센터에 입원하여 오랜 혼수 상태를 겪으면서 사경을 헤맸어요. 그 후 성북동 나의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따스한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 있었어요.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내 시적 생명은 끝났다는 절망감을 안고 있었지요. 그 때,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침마다 하늘을 휘익 돌아 나는 비둘기떼를 보게 되었지요. <성북동 비둘기>의 착상은 거기에서였지요. 둘 째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둘 째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 김광섭

 

병든 아내가 잠들어 있는

병원 5층의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전등불들의 행렬은

아주 딴 세상의 하모니카 구먹들만 같다.

5십 5년 전의 달밤 성북동에서

소년시인 함형수(滅亨洙)가 불고 가던

하모니카의 도리고의 세레나데 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함형수가

지금은 딴 세상에서 불고 있는

꼭 그 하모니카 소리만 같다.

서정주, <노처(老妻)의 병상(病床) 옆에서> 부분

 

흙냄새 나무냄새 맡으며 핥으며 땅을 기어가는 바람이 성북동을 찾아 산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올라간다 사장님들과 외국대사님들과 외국인 부사장님과 사장님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숲속에 모여 사는 성락원 일대 들어가는 길을 왼쪽으로 꺾어서 올라가노라면 캐나다대사관 공관 입구서부터 경사는 가팔라지고 다시 사장님들 저택 대문전을 지나서 외국손님 가득 가득 실은 관광버스가 매일 드나드는 우거진 숲속 대원각쯤에서 숨이 차고 저녁이면 노란 꾀꼬리 처량한 뻐꾸기 울음 소리 아닌 노랫소리 트럼펫 소리 숲을 울리고

정한모, <성북산조(城北散調) 3>

성북동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관과 공관, 으리으리한 저택 등 담 높은 집이 많다.

 

그날은 안개 같은 이슬비가 뿌리고 있었다.

나는 제 시간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성북동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여름감기가 걸린 탓에 며칠을 두고 앓고 방금 일어난 터였다.

나는 틀림없이 그 부잣집 사모님이 한달의 봉급에서 내가 앓아누웠던 이틀치의 공백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주며 이제 우리는 다른 가정교사를 둘까 해요라는 따위의 은근한 거절선언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또 한 가지 언덕 위의 양옥집 부수는 작업이 이틀 동안 도대체 얼마 만큼 진전이 되어 있을까, 해부실에 걸려 있는 인체 골격 구조 표본처럼 앙상하고 볼품없게 뼈다귀를 드러내고 있을까라는 기대도 아울러 품고 있었다.

때문에 성북동 그 길고도 긴 언덕길을 올라가는 나의 걸음은 열쇠구멍으로 다가가는 듯한 아슬아슬한 전율과 흥분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최인호, <무너지지 않는 집>

 

성북동에 있는 사장의 집은 성벽 같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늦게 돌아오게 될지 몰라 산업체 학생들은 빠지라고 했지만 윤희와 순옥은 한사코 따라나섰다. 까짓놈의 학교 때려치지 뭐, 하고 호기까지 부리며 쫓아나섰던 순옥은 그날 있은 중간고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담장 안은 들여다보이지도 않았고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쥐새끼 한 마리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원목을 켜서 만든 대문은 서른명이 달라붙어 밀어젖혀도 꿈쩍 않았다. 행여 그들과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맞은편 담벼락 쪽으로 달라붙어 지나가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그리고 가끔 지나는 광택을 잘낸 고급승용차들과의 거리만큼이나 순옥은 자신의 초라함을 사장집 대문 앞에 주질러앉아 확인해야 했다.

방현석, <새벽 출정>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당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이렇게 조용한 곳이 예전에는 '노랫소리 트럼펫소리 울리는' 요정이었다.

지금은 고즈넉하여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곳. 길상사.

 

거기서 무엇이 보이느냐.

저 문 뒤

바람도 보이느냐.

맞은편 하늘로 길은 사라지고

모든 지붕은 멀리 사라지고

어디서 흐린 마치 소리가

진종일

뼈의 집을 짓고 있다.

햇빛은 등뒤에서 한결 뚜렷하다.

몇 사람은 흙 속에서

구름과 함께 서성이고

뒤뜰에는 자주 기침하지 않는 하느님

한겨울 쉬었다가 내리는 눈

때없이

죽은 아비의 혼도 날아다닌다.

불치의 병을 기다리는

나의 새벽이

순라꾼의 맨발을 기웃거리고

누군가 저 산그늘 밑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강은교, <성북동>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그가 아내를 흔들었다. 드러누운 아내가 힘없는 눈을 간신히 떠본다. 그녀 앞에는 누더기에 싸인 핏덩이가 꼼지락거리며 모친의 젖을 물고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아기를 받고 국밥을 먹이고 불을 피워 보호해 주고 있다.

이기영, <산모>

사직공원은 도심에서는 드물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오 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 벤치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 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신동엽, <3월> 부분

아무런 건물도 없이 제단만 모셔져 잇는 사직단의 모습에서 무언가 신성한 시운이 느껴진다.

 

새벽의 사직공원 안은 서늘하기도 하거니와 휭하게 널찍해 보였다. 산 중턱에 아침 산보하는 사람이 더러 눈에 띄었다. 영아는 미끄럼틀 옆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신문팔이에게서 조간 한 장을 사서 펴들었다. 신문의 잉크 냄새가 어쩐지 신선하게 코를 찔렀다.

이호철, <4월과 5월>

 

아직싹트지않은이른봄건강이없는그는오와사직공원산기슭을같이걸으며오가긴히이야기해야겠다는이야기를듣고있었다. 너무나뜻밖에일은--오의아버지는백만의가산을날리고마지막경매가완전히끝난것이바로엊그제라는--여러형제가운데이오에게만단한줄기촉망을두는늙은기미호걸의애끓는글을오는속주머니에서꺼내보이고-저버릴수없는마음이-오는운다

이상, <지주회사>

 

쪽대문을 열어 놓으니 사직공원이 환히 내려다 보인다. 인제는 봄도 늦었나 보다. 저 건너 돌담 안에는 사쿠라 꽃이 벌겋게 벌어졌다.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돋고, 새침히 옷깃을 핥고 드는 요 놈이 꽃샘이겠지. 까치들은 새끼 칠 집을 장만하느라고 가지를 입에 물고 날아들고…….

이런 제기랄. 우리 집은 언제나 수리를 하는 겐가, 해마다 고친다. 벼르기는 연신 벼르면서 그렇다고 사직골 꼭대기에 올라붙은 깨끗한 초가집이라서 싫은 것도 아니다.

김유정, <따라지>

 

사직공원에서 벚꽃의 낙화가 난분분한 게 바로 엊그저께 같은데 인왕산 줄기를 아카시아의 안개구름이 젖비린내를 풍기며 피어오르고 나면 곧장 장마가 지고 여름이었다.

박완서, 《미망》

 

서울로 이사를 와서 행촌동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한 이삼일 뒤의 일이다. 그날 나는 딸 옥환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잠시 문안에 들어갔다가 나왓다. 그동안 집은 아내 혼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인, <사기사>

우리나라 전통기법으로 돌을 쌓아 만든 독립문. 여기서 말하는 독립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청국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표적이던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다 반대인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십일월십사일에 독립문 정초식(定朧式)이 있었는데, 이날 독립협회가 조직이 되었다. 개혁과 자주독립에 열기를 가진 많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독립협회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채만식, <여자의 일생>

 

미국사람이 경인철도 시설권 얻고, 노국인(러시아사람)이 경원, 경성 광산채굴권 얻고, 무산 압록강 유역, 울릉동 산림벌채권 허가받고, 노한은행 지점 개설되고, 경인철도 시설권은 미국 사람 손에서 일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경부철도 시설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뿐이오니까, 금성 당현금광이 독일인 손에 들어가고, 영국기사 설계로 덕수궁 석조전이 아가리 벌려 하품하는 백돼지처럼 서고, 이 판이 아니더이까. 이 판에 영은문이 헐리면 어쩔 것이며, 독립문이 선들 어쩔 것이며, 장안신사 서른 명이 모여들어서 독립협회 간판 내거니 무삼 소용이며, 몇몇 사람이 똑똑한 소리 몇 마디 해서 어쩔 것이며, 눈을 뜨고 깨어나고 세계로 나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오니까.

이호철, <1기 졸업생 3>

 

백상충과 장경부는 사직골 언덕길을 넘어 독립문을 비껴돌았다. 독립협회가 대한제국을 영구 독립국가로 선언하려 1897년에 완공한 독립문을 바라보는 백상충의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이완용은 3년 뒤에 매국노로 변신했으니 독립문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셈이었다. 민중계몽운동을 주장하며 대의민주정치를 표방했던 독립협회는 개화지식인 애국지사가 주축이 되었으나 회원 중에는 기회주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문을 세울 당시 들끓었던 민족자존(民族自尊)의 드높은 외침은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됨으로써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김원일, 《늘푸른 소나무》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허는 덴가요?"

심훈, <상록수>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제아무리 충직한 함경도 물장수 김서방도 그 겨울의 지독한 눈구덩이만은 헤칠 엄두가 안 났던지 자주 물장사를 걸렀다. 그러나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안마당, 바깥마당, 장독대, 지붕 위에 지천으로 쌓인 눈을 퍼다가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만 지피면 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우린 우리의 완벽한 은신을 감지덕지할 줄만 알았지 그 허점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쓴 일단의 인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주둔하고 잇는데 거기서 산동네를 쳐다보면 매일 아침 저녁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는 집이 몇 집 있더라는 것이었다. 연기 나는 집을 하나하나 다 뒤져 봐도 재수없게 다 죽게 된 늙은이 아니면 병자가 고작이더니 이 집엔 웬 젊은 여자가 다 있냐고 마침 문을 열어 준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중략)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국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잇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김남천, <경영>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하면서…….

 

붉은 벽돌의 높은 담, 서대문형무소의 우중충한 풍경은 서희 마음을 짓누른다. 이곳 풍경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잿빛이엇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그 가족의 마음처럼,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길상의 건강이 그런 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 옥색 명주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쏟아지는 눈물을 훔친다.

박경리, 《토지》 제3부 3권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감옥을 둘러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해오는 듯하다.

 

형무소 넓은 뜨락에 물결처럼 사람들이 넘실거린다.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너절한 양쪽 길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메인다. 찌부러진 국숫집, 빵집이 번창한다. 형무소 뜨락에도 매점 이외 떡장수, 고구마장수가 목판을 벌여 놓고 있었다.

도둑과 살인자와 사기꾼 그리고 정치범들이 살던 붉은 벽돌집은 지금 반역자들로 가득 차고 광장에는 그 반역자들의 가족으로 가득 차 잇다. 꽃시절이 되면 창경원 울타리 밖에까지 매표구를 늘여 한철을 재미보는 것처럼, 꽃바람은 가고 지금은 초겨울, 누더기 걸친 구경꾼 아닌 가엾은 무리들이 임시로 마련된 창구 앞에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아침에 학교 가려고 나왔다가 아파트 앞에서 나는 체포되어 다시 감방에 처넣어졋다. 재수감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문민정부에서도 이럴 수가 있냐고 물었고, 곧 나는 후회했다. '문민정부'라는 말이 뭘 구걸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五舍下 감방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구서대문구치소 일대가 유적지 보존 조치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사형장 앞에 주차된 웬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려 했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멀리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된 1980년 7월 2일 오후 1시의 햇살을 받아 독립문 아치 하늘이 어떤 영원감을 잠시 보여주고 지나갔다.

황지우,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 부분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프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지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命名)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룻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략)

이양하, <신록 예찬(新綠禮讚)>, 《조선일보》(1937)

청송대에서는 소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시절>

본관 앞 백양나무. 옛날에는 이 나무가 하얗게 줄지어 서서

길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양나무를 시간의 나무라 부른 옛 부족이 있었다

갈잎나무 잎사귀 거죽이 한밤처럼 검푸르고

뒤쪽은 대낮같이 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족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필시 삼세 번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나무 잎새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시인 부족을

사방 오랑캐가 가만둘 리 없으므로

세상은 항상 개판이었고 역사는 언제나 비가(悲歌)이므로

무참한 무참한 서사(敍事)이므로

유종호, <언제나 비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적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옆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 때까지 밖은 휘양한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질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뚜라미 울음 뿐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닌가?

(중략)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누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윤동주, <달을 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 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인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장철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겉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홀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나는 영안실 입구의 전광판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호텔처럼 죽은 자에게도 각자의 방이 있었다. 이 세계는 혹시 무수한 방으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신생아실에서 태어나 교실에서 배우고 소주방에서 술 먹다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채팅방에서 채팅하다 고시원의 쪽방에서 잠드는, 그리고 끝내는 대형 병원의 영안실에서 마감하는 삶.

김영하, 《퀴즈 쇼》

사방팔방으로 그려진 건널목의 하얀 선들. 신촌을 누비는 청춘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그곳.

 

서울하고도 신촌에 80년대 초부터 있어온 술집이 있다. 신촌은 50년대에도 있었고(그때 그곳에 살아보지 않아 확실히는 모르지만) 60년대에도 있었을 것이고 80년에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촌에는 90년대, 그것도 세기말의 발작적이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잡지 같은 후반부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낮에는 유리와 플래카드로 분칠한 새 건물이 '비까번쩍'하고, 밤에는 요요한 불빛으로 휘황찬랑하다. 그러나 지금 거기에 분명히 70년대와 80년대의 먼지를 덮어쓴 채 삭아가는 집이 하나 있다.

성석제, <언젠가는>

 

(전략) 이들은 큭 머리를 맞대는 게 지겨워지면 남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문득 화장실에 다녀와서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다. 어느 날은 로버트 드 니로가, 어느 날은 성석제가, 어느 날은 성원근, 기형도, 김소진이 먼저, 그들은 몸에 큰 오버코트를 입고 꼬부라진 혀로 인사를 하고는 무거운 문을 밀었다. 바깥에는 소란한 90년대가 거센 연기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과 별 사이에서 차갑고 더러운 눈, 물이 막 걸음을 떼려는 소년들의 이마에 떠어지곤 했다. 죽은 소년도 있었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소년도, 떠나지 못한 소년도 있었다.

모두 어른이 되었으리라.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끼리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언젠가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듯이.

시간도 사람도 포스터도 추억도 모두 사라지고 골조만 앙상한 '언젠가는'만 남는다. 그러니 인생이여, 부탁하노니, 즐겁게 춤을 추시다가 그대로 멈출 줄 알지어다!

성석제, <언젠가는>

산책 끝에 가볼 만한 곳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공씨책방, 숨어 있는 책,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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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4. 15:5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 한 귀퉁이에 있는 비각.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적이지만 그 내력은 만만치 않다.

 

"花商(화신백화점)의 '쇼윈도우' 속에서 붉은 입술을 방긋이 벌이고 있고 被女들의 푸른 치마폭은 아침의 '아스팔트' 위에서, 백화점의 층층계 위에서 깃발과 같이 발랄하게 팔락거리지 않는가."

김기림, <봄의 전령>, 《조선일보》, 1933년 2월 22일

옛날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종로타워.

예나 지금이나 주변 어느 건물보다 눈에 띄는 랜드마크와 같은 건물이다.

 

그래도,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그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하여 주려 하였다. 사실, 4, 5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기쁨을 가져 이렇게 거리로 나온 젊은 부부는 구보에게 좀 다른 의미로서의 부러움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가정을 가졌고,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당연히 그들의 행복을 찾을 게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그리고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질 사태가 벌어졌다. 안의 얼굴에 놀라운 기쁨이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빠른 말씨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조경란의 장편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에는 주인공이 이 레스토랑(탑 클라우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다.

 

33층 스카이라운지의 화장실은 한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자동센서가 달린 커다랗고 둥근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통유리 앞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남산타워와 은밀한 도시의 요새처럼 환하게 붉을 밝힌 동대문 두산타워의 빽빽하게 밀집한 빌딩숲과 구불거리는 길에 수많은 골목을 숨긴 인사동 거리, 푸른빛의 간접조명을 받으며 성채처럼 우뚝 선 세종문화회관 건물……33층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한밤은 셀 수 없이 많은 빛을 흩뿌려 놓은 듯 화려한 빛무리로 들끓고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힐 때마다 자동센서에서 저절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탑 클라우드, 높은 구름, 구름의 꼭대기, 나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유람하다가 지나는 길에 잠깐 이곳을 비행하고 있는 거란 느낌에 휩싸이고 있었다.

조경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늘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로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서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보신각에서는 매일 낮 12시 보신각종 상설 타종행사가 열린다.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직접 종을 쳐 볼 수도 있다.

 

이야기에 팔려서, 오는 줄도 모르게 어느덧 종각 앞을 지나 광교를 건너고 잇다. 화신 잎 네거리까지가 송영호 군에겐 거주지역이고, 게서부터는 남쪽으로 본정을 들어 명치정 골목을 돌아 내려오는 건, 이를테면 여행을 하는 셈이다.

채만식, <종로의 주민>

 

썸싱 장소를 묻다가 소양이가 종로 2가에 자주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옥의 말에 의하면 소양이도 여느 젊은 아이들처럼 재수할 때부터 종로통이었고, 자리마다 인터폰이 있어서 졸팅하는 재미로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썸싱에서 희중을 만나게 되었다.

강석경, 《숲속의 방》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에는 일어 학원 말고도 학원이 무수히 많았다.

서울 아이들은 보통 학교를 두 군데 이상이나 다니나 보다. 영수 학원, 대입 학원, 고입 학원, 고시 학원, 예비고사반, 연합고사반, 모의고사반, 종합반, 정통영어반, 공통수학반, 서울대반, 연고대반, 이대반……이 무수한 학원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몰려 들어가고 쏟아져 나오고 했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무가 되어 한껏 바람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네

가축의 피가 되어 욕망을 으르렁거리기도 했네

정액이 되어 번식의 황홀경에 도취되기도 했네

눈물이 되어 타령으로 한세상 쓴 살이도 했네

자학의 세월 돌부리에 몸 부딪치며

계곡을 뒤흔들기도 했네

아으, 구름이 되어 한량처럼

한세상 두둥실 떠돌기도 했건만

이제 모든 소리를 탕진하고 늙어

침묵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네

저기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네

함민복, <탑골공원에서>

 

종로에 들렀다가 탑골공원으로 갔다. 갈비와 물김치가 못 견디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몰래 주워먹었다. 그러고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얘기를 엿들으며 하루를 보냇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 걸지 않았다.

김영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잇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탑골공원 한 구석에 숨은 듯이 서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기념비.

옛 파고다극장이 있던 낡은 건물.

영원토록 젊은 시인을 추억하게 하는 곳.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지나,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아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옛 조선극장 터.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인사동에 들어서게 된다.

 

"진짜 호경기야 만주사변 지나서 아니겠습니까. 만주사변을 일으켜 놓자 그쪽에선 구경꾼을 잃어버린 왜놈들이 조선땅을 찾아들었던 거죠. 그쪽에선 그맘때 벌써 영화가 판을 쳤다지만 우리네야 명절 때면 모를까 어디 큰맘 먹지 않고는 우미관이나 조선극장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서커스에서 몸담아 지나온 영욕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잇었다.

한수산, 《부초》

 

그들이 인사동에 있는 르네상스에 들어섰을 때, 아닌게 아니라 분위기는 무척 가라앉고 처져 있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뭐랄까 조금은 느적지근하고 사람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고급스런 냄새가 났다. 함부로 막걸리 냄새를 풍긴다든가, 도나캐나 쇠똥말똥 밟은 흙발로 들어서서는 안 될 것 같은 가라앉은 치장으로 휩싸여 있었다. 우선 전후의 막돼먹은 다방과는 달리 디스크 플레이어를 따로 유리 박스에 가두어 두고 그 옆으로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작은 산더미 같은 레코드판이 그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어지간한 다방에 들어서면 공기부터가 텁텁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들로 하여 쇠전이나 장바닥에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르네상스는 안 그랬다. 모두가 차분히 가라 앉아 있고 박힐 것들이 제자리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최일남, <서울의 초상>

 

걸어서 인사동까지 온 운지는 승찬이 평소 잘 들락거린다는 이층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어서면 머리끝이 천장에 닿았다.

"여기가 바로 그 쟁이들이 밤낮으로 죽치고 술마시는 그 술집인가? 이름부터 좀 수상한데? 세상만들기라……."

"예, 괜찮은 집이예요. 선배도 앞으로 잘 애용해보세요."

김소진, 《양파》

 

오늘은 인사동이 궁금하다

며칠 안 나가는 동안

눈에 번쩍 띄이는 벼루가 나왔다가

눈 밝은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틈만 나면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 그 벼루 조각 한 번 참!

은 만나지 못하고

찌든 먹 냄새만 가슴에 환하게 담고

목 부러진 백자주병처럼

고개 꺾고 돌아오는

이근배, <인사동 산책 - 벼루 읽기> 부분

 

시현은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그곳이 바람든 여염집 여편네 같다고 생각한다. 체면과 탐욕이, 명분과 실리가 적절히 섞여 있는 그 모습이, 과거와 현재가, 예술과 상혼이, 그리고 온갖 딜레탕트적인 주변예술이 뒤섞여 이제는 노쇠와 퇴락밖에 남지 않은 비만한 중년부인을 닮아가고 있다.

김형경, 《새들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전통의 거리라는 인상이 강하던 인사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 쌈지길 모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천상병 시인의 아내(문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 귀천.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 석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 이

평균 60여 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천상병,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의 분점이 생겼다. 이제 인사동에는 귀천 카페가 둘이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광화문 큰 거리를 총독부 쪽으로 어슬어슬 걸어가노라니 그의 그림자가 짤막하게 앞에 누워 간다. P는 그 자기 그림자를 꽉 밟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내어 디디면 그림자도 그만큼 앞으로 더 나가곤 한다. 이 그림자와 자기 자신에서, 그리고 그림자를 밟으려는 자기 자신과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자에서 P는 자기의 이중인격의 모순상(相)을 발견하였다.

(중략)

물론 그는 지금이라도 누가 한 달에 삼십 원만 줄 테니 와서 일을 해달라면 마치 주린 개가 고기를 보고 덤비듯이 덮어놓고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 딴판으로 배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P가 삼청동으로 올라가느라고 건춘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저편에서 말쑥하게 몸치장을 한 여자 하나가 마주 내려왔다.

역시 삼청동 근처에 사는 여자인지 P와는 가끔 마주치는 여자다.

P는 그 여자와 만날 때마다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는 체하면서도 실상은 고비 샅샅 관찰을 하였고, 그리고 속으로는 연애라도 좀 했으면 하던 터였었다.

무엇보다도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모지지 아니하고 얼굴의 윤곽이 둥글듯이 모가 나지 아니한 것, 그래서 맘자리도 그렇게 둥글려니 하는 것이 P의 마음을 끈 것이다.

(중략)

삼청동 꼭대기에 있는 집--집이 아니라 사글세로 든 행랑방--에 돌아왔다

객지에 혼자 있으니 웬만하면 하숙에 있을 것이로되 방값이 밀리고 그것에 졸릴 것이 무서워 P는 방을 얻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채만식, <레디 메이드 인생>, 《신동아》, 1934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東門)이다.

키 큰 가로수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오늘 산책을 시작한다.

 

불안과 초조와 희망이 섞인 사흘이 겨우 지났다. 나흘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찬구는 P의 집에 가보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통지는 오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 일러 그런 게지 하고 도로 나와 창덕궁 앞으로 나서서 단성사 앞을 지나 종로를 한 바퀴 휘돌아 또 들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편지도 안 왔다 한다. 이번에는 북으로 돌아 원동 계동 재동 삼청동 일대를 돌아 오정 때나 되어 세 번째 글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소식도 없었다. 혹시 또 채용이 못 되는 것인가 생각하니 기가 탁 막힌다. 그러나 자기가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이라 돌려 생각하고 아주 멀리 장충단공원으로 가서 잔디밭에서 낮잠을 잤다. 따뜻한 햇살에 몸은 노곤히 풀리면서도 깊은 잠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언뜻 눈을 뜨고 보니 꽤 잠을 잔 모양으로 가로 길게 비낀 나무 그림자가 오후도 퍽 늦어진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찬구는 분주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 P의 집으로 걸음을 빨리하였다.

유진오, <오월의 구직자>

여고와 남고가 모여 있던 동네에 자리잡은 정독도서관.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지는 향수어린 풍경.

 

도서관에 다다랐을 때엔 마침 때 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라고 영민이가 킁킁거렸다.

우리는 거리에 서서 도서관 문 닫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늘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첫눈 치고는 폭설에 가까웠다. 날이 더운 탓에 눈은 쌓이질 않고 땅 위에 떨어지자마자 녹았다. 그러나 좀 후에는 쌓이기 시작했다.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벽에 기대서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그때였다. 도서관 시간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려고 기웃거렸다.

소녀가 맨 나중에 나오고 있었다.

최인호, 《머저리 클럽》

 

정독도서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1977년 1월에 개관한 서울시립공공도서관이다. 옛날 학교 건물을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있어 곳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운영시간 07:00(동절기 08:00) ~ 20:00 정기휴관일 매월 1, 3주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칠 경우 휴관)

 

북촌

북촌한옥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북촌문화센터 및 북촌한옥마을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북촌의 유명한 풍경을 찍을 수 있는 '북촌 8경'이란 포토 스폿도 마련되어 있는 데 이에 대한 정보도 있으니 사진을 찍을 계획이 있는 이들은 한번 확인해 보고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http://bukchon.seoul.go.kr

헌법재판소의 백송. 버팀기둥에 몸을 의지해야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알렌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 말이다.

(중략)

둥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되어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 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팁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 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멀리서 보아도 희게 빛나는 백송의 줄기. 오랜 세월 탓에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늦가을 아침 유언을 남기고 죽은 박지원의 재동 집 벽장에 들어있었다는 지구의를 떠올린다. 그 지구의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지구의를 가져왔다고 쓴 바 있다. 박지원이 손수 지은 재동 집 사랑채 앞에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는 숲을 이룰 만큼 많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잇다. 바로 그날,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바로 그 나무 한 그루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의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박지원의 벽장 속의 지구의와 뜰 앞에 나무 한 그루도 남겼다. 그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인촌 김성수의 대저택을 그대로 보존한 인촌기념관.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 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 난 장자[富者] 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중략)

구경을 아주 원만히 마치고 난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는 제 집이 청진동이니까 걸어가라고 보내고, 자기 혼자만 전차 정류장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숱해 몰려 나온 구경꾼들과 같이서 전차를 탈 일이며, 또 버스를 탈 일이며, 그뿐 아니라 재동서 내려 경사진 계동길을 걸어올라가자면 숨이 찰 일이며 모두 생각만 해도 대견했습니다. 십 원짜리를 가지고 하면 또 공차를 탈 수도 있을 테지만, 에라 내가 돈을 아껴서는 무얼 하겠느냐고 실로 하늘이 일까 무서운 변심을 먹고, 마침 지나가는 인력거를 불러 탔던 것이고, 결과는 돈 오 전을 가외에 더 뺏겼고, 해서 정히 역정이 났었고, 그리고 또 대문이 말입니다.

대문은 언제든지 꽉 잠가 두거니와, 옆으로 난 쪽문도 안으로 잠겼어야 할 것이거늘 그것이 훤하게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큰대문을 열어 놓고 있노라면 어쩐지 집안엣것이 형적 없이 자꾸만 대문으로 해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고, 그 대신 성서롭지 못한 것이 자꾸만 술술 들어오는 것만 같고 하여, 간혹 창작바리나 큰짐이 들어올 때가 아니면 큰대문은 결단코 열어 놓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 집의 엄한 가헌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중앙고등학교에 있는 이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겨 놓았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그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쳤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채만식의 업적을 기리는 채만식 문학비.

<국화 옆에서>를 새겨 놓은 서정주 시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의 찻집 싸롱마고에서는 이런저런 문화 행사들이 열린다.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피는 소설 속 한옥집은 어디쯤 있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름을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후략)

박인환, <목마와 숙녀>

 

어머니를 따라서 살게 된 가회동집은 한옥으로서 굳이 말하자면 튼 ㅁ자형이었다. 대문을 열면 좌우에 사랑방과 창고가 들여져 있었고, 곧 뜰로 이어졌다. 곱은자형의 안채에는 안방과 뒷방이 있었으며, 대청을 사이에 두고 건넌방이 있었다.

뜰은 나무들이 울창했다.

인위적으로 가꿨다기보다 절로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와를 얹은 동편 담장을 따라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라일락과 단풍나무와 사철나무가 있었으며,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자라고 있었다. 특히 마당의 중앙에 서 있는 백목련은 아주 나이 많은 나무여서 기둥이 한 아름은 충분히 될 정도였다.

박범신, 《외등》

 

08 부안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나는 아직도 청청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도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산마루 어느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후략)

김관식, <자하문 밖> 부분

성문 현판에는 분명 창의문이라 쓰여 있지만 사람들은 자하문이란 이름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樺榴나무에 연둣빛 기류가 감돌게 되면 봄은 벌써 와 있다고 해야 한다.

해는 차츰 길어지고 낮달이 유난히 눈을 끈다. 저녁에는 사철나무 키 작은 어깨가 달싹인다. 저희끼리 뭔가 표정을 나누고 있다. 이럴 때 서울의 부암동 산꼭대기 그 누옥, 술 때문인지 온종일 입에서 떼지 않는 파이프 때문인지 강화백의 한쪽 눈이 젖어 있다. 지금도 아마 그 큰 눈의 어느 한 쪽은 젖어 있으리, 고지새가 한 마리 거실 맞은 편 뜰에 내려와 집주인의 눈을 먼발치서 가만히 바라본다.

김춘수, <강화백>

 

여기가 어디다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여기가 종로구란 말이냐?

(중략)

작년에 네 가족들이 삼 년 남짓한 외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 전세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실망하더니 이런 마을을 찾아낸 모양이로구나. 여긴 완전히 시골마을이여, 커피집도 잇고 미술관도 있긴 하나 방앗간도 있더구나. 방앗간에선 흰 가래떡을 뽑고 있더구나. 옛날 생각이 나서 한참 구경을 했구나. 설이 다가오는가. 방앗간에서 흰떡을 뽐는 사람들이 꽤 있던걸. 아직도 설이라고 흰떡을 뿜는 그런 마을이 이 도시에도 있구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환기미술관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11 ~ 2월은 오후 5시) |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 매주 일요일, 설날, 추석연휴 휴관

입장료 일반 2,000원, 학생 1,000원 문의 02-391-7701 ~ 2 | www.whankimuseum.org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가 담만 즐비하게 남았즈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남았겠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떡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드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싶었다.

현진건, <고향>

좁은 골목 입구 담 아래 현진건의 집터를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있다.

 

지난 봄에 창의문 밖에 있는 전 대원군의 별장을 구경한 일이 있다. 워낙은 김모라는 당시 재상이 지은 것인데 뒤에 대원군이 가진 것이라는데 첫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재목으로 그렇게 아끼는 것이 없이 짓는 집을 왜 요즘 집장수들의 집처럼 간사를 좁게 지었나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그때 사람들이라고 키가 더 작았던 것도 아니요, 재목을 아꼈음도 아니요, 다만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겸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태준, <집 이야기>

석파정은 잠긴 문틈으로 보기만 해도 풍채 좋은 한옥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느릿느릿 흘러내리던 인왕산(仁旺山) 자락이 세검정 시냇물을 만나 문득 걸음을 멈추면서 불끈 또아리를 튼 이곳은 풍광이 좋아 예로부터 별장이 많던 것이었다. 세검정 개울 건너 산비탈에 자리잡은 것은 춘원(春園)의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둘러쳐진 철조망 너머 숲 사이로 살짝 보이는 기와지붕은 대원군의 별장이었다는 석파정이었고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현대식 삼층건물은 무슨 재벌동아리 회장의 별장이었다.

김성동, 《길》

'춘원헌'은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남긴 곳이다.

 

세검정 빨래란 자고로 유명하다고 하오. 날이나 밝은 아침이면, 밥솥과 장작과 빨래 보퉁이와 빨래 삶을 양철통과를 사내가 걸머지고, 여편네는 진뜩 한 임 이고 코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자하문으로 주렁주렁 넘어오는 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이 고장의 한 풍경이오. 그들은 개천가 빨래하기 좋은 목에다가 진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어 가며 빨래질을 하는 것이오. 저보시오. 개천가에는 홑이불, 욧잇, 치마, 모두 널어 말리고 있소.

이광수, <육장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상명대학교 건물은 큰길에서 바로 보인다.

 

"저기는 세검정인가요?"

초희는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저 큰 집은 뭐지요?" 전에는 집 한 채 없던 세검정 골짜기에 그득 서 있는 집들, 그 중에서도 산중턱에 새로 지은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저건 학굔가 부지요?"

"상명여자사범대학이야"

"저기다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박영준, 《고속도로》

 

집 앞에서 135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인지를 지나, 상명여대 입구에서 내린다. 홍은동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론 제법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왼쪽으론 몇 개의 작은 산길이 나 있다. 그중 하나의 산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나무들과 바위와 바람이 있다. 비라도 내린 날이면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봄과 여름에는 야생화도 핀다.

구효서, 《낯선 여름》

 

내가 자하문고개를 넘어 세검정을 찾았던 것은 1964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의 학생이었고 게다가 세검정은 초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서울에서는 꽤 외딴 동네에 들었다. 그날은 가랑비가 하루 종일 안개처럼 흐르다 멈췄다 하는 날씨였는데, 그렇다고 음산하지는 않았다. 그곳 분지는 안개비에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배운 대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산수운연(山水雲煙)의 경계를 몽롱하고 침중하게 나타낸다는 선염법(渲染法)에 의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였다. 집에서 나와 그곳에 틀어박힌다는 상상이 실제의 일처럼 내 앞에 다가와 나는 망연자실, 남모르는 환희에 몸이 떨렸던 것도 같다. 버스가 자하문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아마도 느티나무인가, 황록색에 붉은빛을 띤 가을 잎사귀들이 무리져 날리는, 어쩌면 비현실의 세계 같기도 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세검정이라는 동네가 두고두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 바로 이때의 느낌 때문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을의 깊고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저 도끼로 찍어 놓은 준(皴)처럼 주름져 보이는 것도 인상이 깊었다.

윤후명, 《돈황의 사랑》

 춘원이 살던 동네에는 '춘원'이라는 빌라가 있어 이정표 구실을 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주위는 점점 낯설어졌다. 길 가는 사람을 까닭 없이 멸시하는 듯한, 거드름 섞인 높고 도도한 담장들 사이의 삭막한 길. 모든 것이 나로부터 철저하게 무관했다. 그런데 나는 방금 이런 세상을 두려워하여 거짓된 말의 방패 뒤에 비열하게 몸을 숨겼던 것이다.

서영은, 《그녀의 여자》

 

부귀영화를 빼앗아 만년이나 누릴 듯, 후세의 비평을 듣는 단종의 삼촌 세조도 겨우 열세 해 만에 호화로운 꿈도 한 줌의 흙을 보태었을 뿐이요. 그의 원자(元子) 덕종(德宗)은 세조 생전에 참혹한 꼴을 본 것이매, 손도 꼽지 않으려니와, 둘째이신 예종(睿宗)이 또한 겨우 왕위에 오르신 지 일년에 이 세상을 버리시니, 나이 겨우 스무 살이신 예종이 장남한 왕사(王嗣)를 두실리 없다. 세조 비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명을 받들어 덕종의 둘째 아들이신 자산군(者山君)을 왕위에 모시니 곧 성종(成宗)이시며, 임금 노릇 하신 지 스물 다섯 해, 춘추 서른 여덟에 승하하시니 원자 연산(燕山)이 왕위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 영특한 임금, 갸륵한 어른으로 존숭을 받으시는 성종으로도 호색이 빌미가 되어 비빈 사이에 질투의 불길이 일어나고, 나중에 세자의 어머님이요 곤전마마이신 막중한 왕비를 폐위시키고 또 사약을 내리니, 백성의 집인들 어찌 이러한 흉변이 잇으랴. 한 지어미 원한을 품으매 오 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거늘, 막중한 왕비어니 종묘 사직이 어찌 위태치 아니하랴.

박종화, 《금삼의 피》

그만 헐려버린 충신동 한옥이 너무 아까워 서재만 뽑아서 평창동 산 속에 옮겨 놓았다는 박종화 고택.

 

차가 도심지를 뒤를 밀어내면서 자하문 고개로 넘어가고 있었다. 눈발은 어느덧 굵어져 있었다. 눈발 너머의 숲은 새댁처럼 음전햇으나, 음모자 같은 구석도 잇어 뵜다. 숲 사이로 그림 엽서에서나 봤음직한 아름다운 2층 3층 양옥들이 나타났다. 먼 이역의 딴 세계였다.

(중략)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인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자 3층집이었다. 눈이 너른 정원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집채만한 암석이 그의 품에 키는 낮고 나이는 많은 노송 한 그루를 품고, 정원 끝에서 그를 내려다 봤다.

박범신, 《죽음보다 깊은 잠》

 

마리가 다시 뾰족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때 그에게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며칠전 재혁이 전화에서 자랑한 곳이었다.

"나 요즘 사는 집 하나는 팔자 늘어졌다. 건평만 100평 단독주택 나 혼자 쓴다는 거 아니냐? 그것도 평창동 그윽한 곳에 집주인들 식구대로 해외 나갈 일이 있는데, 그게 겨우 다섯 달이라 세를 줄 수도 없고 두둑한 관리비까지 주며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데 어떻게 하냐? 거기다 잘나가는 교회 당회장님 부탁이니."

이문열, 《호모 엑세쿠탄스》

 

문득, 새소리가 울려댓다. 그를 부르는 휴대전화의 울림이었다.

Y문학박물관에서 그에게 오는 오후 시간 중에 방문해달라고 했다. 며칠전 전화에서, 그쪽의 용건은 문인들의 라이프마스트를 떠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보존도 해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준은 머리를 식힐 겸 평창동의 그 문학박물관에 갔다. 관장은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K여사, 노년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과 창작가들의 지료와 자취들을 폭넓게 많이 수집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많지 않은 문학박물관의 기능을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노년에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극성이냐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에도 "그럼 나라도 이런 걸 안 하면 누구 하우?" 하는 K여사의 주름진 얼굴이 남준의 가슴을 가만히 흔들었다. 문학을 위해 헌신하는 일중엔 이런 일도 있구나…….

호영송, 《죽은 소설가의 사회》

영인문학관

관람시간 전시기간(4 ~ 5월, 9 ~ 10워)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전시기간 이외에는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토, 일요일 휴관 문의 02-379-3182 | www.youngin.org

 

영인문학관 내부.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대학가와 대학오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대학로를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대항노, 아니면 대항로가 될 것인데, 그 때문인지 그 거리는 그야말로 대항의 신작로로 변하여 시국 규탄대회가 열려 최루탄이 난무하기 일쑤이고,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이 무리져 와서 마음껏 북 두드리고 꽹과리 치고 기타 치고 춤추고 악을 쓰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새벽 두세 시에도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만우 씨의 고막을 얼얼하게 만든 것은 다반사로 잇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우 씨는 그 거리에 빽빽하게 들어선 무슨무슨 레스토랑의 간판을 무슨무슨 레지스탕스로 읽곤 할 정도였다. 레스토랑이든 레지스탕스이든 저런 것들이 한 거리에 저렇게 많이 있을 필요가 있는 건지 만우씨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 연극이나 영화 같은 것을 구경하고 싶을 때는 편리한 점도 잇긴 했다. 그 거리에 꽤 많은 연극 공연 극장들이 모여 있고, 제법 쓸 만한 영화관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재즈 카페도 있고, 심지어 낭만적인 시절에나 있을 법한 고전음악 감상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만우 씨는 이 동네에서 10년도 더 넘게 살아 오고 있고 지금도 이 동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는 자로서, 이 동리에 머무름으로써 얻게 되는 그럴듯한 이익들을 어떻해서든지 찾아내 보려는 버릇이 있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거리의 활달함 같은 것도 창작생활에 보탬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만우 씨가 술을 마실 만한 적당한 공간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사실이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대학로도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도 잇다.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샘터 파랑새극장.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오월>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기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서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잇는 것이다.

(후략)

피천득, <수필>

 

향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면 누구든 이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대할 수 잇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정자였다. 어느 날 임금께서 길을 가다가 이 정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미풍에 얹혀 슬쩍 지나가는 향기가 있었다. 기가 막힌 향기였다. 임금은 수행 신하들을 불러서 부근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오도록 했다.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향기가 좋기로 소문난 꽃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왔다. 모란, 난초, 양귀비……그러나 임금은 꽃을 하나하나 코에 대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이때였다. 먼 하늘 깊은 곳에 잇는 별빛인지, 가늘고 맑은 바람이 한줄기 흘러왔다. 그러자 보라. 풀섶 사이에서 작은 꽃이 갸우뚱 고개를 내밀다가 들킨 향기를, 바로 그 황홀한 향기가 아닌가.

향감별사는 임금 앞에 돌아가서 아뢰었다. "그 향기는 화관이 크고 아름다운 꽃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멀고 귀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굳세게 살고 자기 빛을 잃지 않은 작은 풀꽃이 지니고 잇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향기는 보는 이의 마음이 청정할 때만이 제대로 깃들 수 잇기 때문에 좀체로 만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정채봉, <멀리가는 향기>

조금은 뜬금없지만 어쨌든 반가운 김광균의 시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를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

옛날에는 청춘들의 아지트. 지금은 추억을 지켜주는 고마운 공간, 학림다방.

 

(전략)

1973년 : 동숭동 개나리꽃 소주병에 꽂고 우리의 緯度 위로

봄이 후딱 지나간 것을 추도하다. 가정교사 때려치우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다.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그때

홍표 · 성복이 · 석희 · 도연이 · 정환이 · 철이 · 형준이 · 성인이와 놀다.

그들과 함께, 스메타나, <몰다우江> 쏟아지는 學林다방, 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 지나가는 버스 세워놓고 욕지거리, 감자 먹이기 등 發狂을 한다.

發精期, 그 긴 여름이 가다.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바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숲 위로 새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로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城떠나다. 친구들 <아침 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후략)

황지우, <활엽수림에서>

역사와 내력이 진하게 묻어나는 학림의 방명록.

 

나의 학림. 방학이 끝나고 서울역에 5시 반에 내리면 갈 데가 없어서, 이불 보따리 책 보따리 들고 찾아와 새벽잠을 자던 학림. 나의 고향, 나의 청춘, 나의 상실, 내가 슬피 울던 곳, 보첼로를 청해 듣던 곳. 1990. 6. 15. 김승옥.

달빛 밝은 밤이면 수만 리가 한 마을입니다. 2004. 정월. 황석영

희미한 옛사랑이 머물었던 곳 <학림다방>에 4 · 19세대 한 사람이 34년 만에 다녀가다. 1994. 5. 2. 김광규

 

(전략)

L선배가 학림을 다시 찾은 것은 1985년 가을이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가파른 나무 계단은 여전했다. 추억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옛날의 아늑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의 시간이 훼손되어버린 듯한 느낌은 통렬한 아픔을 몰고 와 그곳을 찾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사연을 듣고 나니 호기심이 일었다. 어떻게 변해 있길래 저러는가 싶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혼자 학림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실내를 훑어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 탁자와 빛 바랜 소형 소파,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어두우면서도 편안한 조명, 은은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 그녀의 이야기가 연상시킨 천박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학림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추억을 남긴 채 문을 닫은 것은 1983년이었다. 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것. 새 주인은 대학로라는 새로운 소비문화 거리의 고객 취향과 맞지 않은 학림의 1960년대 분위기를 털어냈다. L선배가 망연자실한 것은 당연했다. 학림의 분위기가 다시 바뀐 것은 1987년 K가 학림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그는 과거의 정취를 살리는 데에 골몰했다. 내부 단장을 새롭게 하는 한편, 학림의 추억을 안고 찾아오는 '늙은 손님'들을 반갑게 만났다. 방명록도 만들었는데, 그들이 남긴 글들은 빛 바랜 흑백 사진처럼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후략)

정찬, <베니스에서 죽다>

 

(전략)

그야 주인의 직업이 직업이라 결코 팔리지 않는 유화(油畵) 나부랭이는 제법 넉넉하게 사면 벽에 가 걸려 있어도, 소위 실내장식이라고는 오직 그뿐으로, 원래가 삼백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시작한 장사라, 무어 찻집답게 꾸며 보려야 꾸며질 턱도 없이, 다락과 의자와 그러한 다방에서의 필수품들까지도 전혀 소박한 것을 취지로, 축음기는 자작(子爵)이 기부한 포터블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모든 것이 그러하였으므로, 물론 그러한 간략한 장치로 무어 어떻게 한밑천 잡아 보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엉뚱한 생각은 꿈에도 먹어 본 일 없었고, 한 동리에 사는 같은 불우한 예술가들에게도, 장사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구락부와 같이 이용하고 싶다고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을 감격시켜 주었던 것이요, 그렇기에 자작은 자기가 수삼 년간 애용하여 온 수제형 축음기와 이십여 매의 흑반 레코드를 자진하여 이 다방에 기부하였던 것이요, 만성(晩成)이는 또 만성이대로 어디서 어떻게 수집하여 두었던 것인지 대소 칠팔 개의 재떨이를 들고 왔던 것이요, 또 한편 수경(水鏡) 선생은 아직도 이 다방의 옥호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 그릐 조그만 정원에서 한 분의 난초를 손수 운반하여 가지고 와서 다점의 이름은 방란장(芳蘭莊)이라든 그러한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의하여 주는 등, 이 다방의 탄생에는 그 이면에 이러한 유의 가화미담이 적지 않으나, 그러한 것이야 어떻든, 미술가는 별로 이 장사에 아무러한 자신도 있을 턱 없이, 그저 차 한 잔 팔아 담배 한 갑 사먹고 술 한 잔 팔아 쌀 한 되 사먹고 어떻게 그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으면 하고, 일종 비장한 생각으로 개업을 하였던 것이 (후략)

박태원, <방란장 주인> 

카페 마리안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언명법으로 된 명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콧속으로 무언가 썩은 냄새가 밀려들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보랏빛 명조체로 힘차게 타이핑된 폰트 18크기의 명제였다. 폰트 18,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가 나는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잇었다. 문득 어떻게 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마치 눈앞에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실체처럼 여겨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 글자체며 폰트까지 하나의 개념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인가 하는 짧은 궁금증이 스쳐갔다.

윤이형, <피의 일요일>

혜화동 로터리.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4.19혁명 18년 뒤 쓰여짐)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한무숙문학관은 돌담에 나무 대문 그리고 기와지붕을 한 100여 년 된 한옥이다.

 

현숙하다는 칭송을 듣기까지의 심중의 고초는 한마님께옵서 익히 아오시는 몸부림이오며 아내가 깊고 깊은 절망을 겪은 후에야 갖출 수 있는 거동에 대한 보답이오이다. 겉이 평정하옵다고 안이 잔잔할 수는 없나이다. 송조집 진이의 자질은 투기하옵기엔 너무나 뛰어났사오며 시새워하기엔 위인이 지나치게 사리 밝고 민첩 체체하옵고 설부요안은 천품이오니 천수를 부러워할까 겨눌 기력은 없사옵니다.

사가(士家)에 태어나서 부도 여공을 익히고 배운 바는 이름 석 자 문안문, 여우 언문 익혀 쓰고, 열녀전 떼면 학문은 족하다 하셨나이다. 아녀자가 학문하면 기구해진다 하오셨는데 학문 익히지 못한 몸 시앗보고 공규(空閨)를 지킨 지 하 오래이오니 선인들 말씀은 거짓이오잇가.

송도집 진이의 높은 학식을 잡기라 할지라도 자즈러진 가무 현악 하오며 찌르는 듯한 재치를 따라가지 못하오니 지아비 마음을 그와 어찌 겨누어 차지할 수 있겠사오리잇가. 마음을 암담하게 아프게 던져 버리오니 남이 현숙하다 하더이다.

한무숙, <이상종의 아내>

 한무숙문학관

www.hanmoosook.com 문의 02-762-3093

 

한무숙문학관 내부 응접실에는 작가가 생전에 쓰던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장왕록 영문학 교수, 노벨상 수상자 펄벅(Pearl Comfort Buck) 여사, 한무숙(1964년)

 

이제는 아득하게만 생각되는 50년대 말 아직 학교에 다닐 때 혜화동에 있는 한무숙 여사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 송영택 형의 제의에 의해서였다. (중략) 한무숙 여사는 물론 몇 안 되는 당대 유수한 여류 작가였고, 《역사는 흐른다》의 작가로서 명성이 높았었다. (중략) 우리가 찾아갔을 때 한무숙 여사는 듣던 바대로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맞아 주었는데 미당이 얘기했다던 '마담 델리카'란 말을 실감시켜 주었다. (중략) 한 여사는 가슴을 앓던 시절에 읽은 체호프를 얘기하고 투르게네프를 얘기하였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처녀지>, <연기>, <귀족의 검>, <그 전날 밤> 등등. 투르게네프의 표제 자체가 그대로 시가 되는 탓도 있지만 부지중에 어떤 정서적 감염을 경험하였다. 한 여사는 또 토마스 만을 얘기하였다. <토니오크뢰거> - 그러자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50년대 말 명륜동댁의 서가에 꽂힌 책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책이 있었다.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토마스 만이 쓴 <파우스트 박사>의 일역판이다. 그것은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인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당시 신간이었다는 것과 내 자신이 몹시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는 것과 연관된 것이라 생각된다.

<작품 해설-삶의 진실과 슬픔>, 《한무숙 문학전집 6-감정이 있는 심연》

 

 

 

 

 

posted by 황영찬
2013. 9. 17. 10: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 · 김성연 글 / 홍상현 사진

2009, 터치아트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1696

 

816.7

허44ㅅ

 

이 책에 소개한 열두 개의 산책 코스는 서울에 숨결을 불어넣는 문학 속 장소들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각 코스는 대부분 4km 미만의 거리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의 울림이 큰 장소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실제 산책 시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또한 한 코스씩 독립적으로 걸을 수도 있지만 소공동과 종로, 광화문, 정동 일대와 같이 가까운 곳은 저마다의 취향과 일정에 따라 두세 코스를 연결해 걸어도 좋다.

서울은 어느 계절에 걸어도 좋은 도시이지만 문학 작품 속의 정취를 보다 잘 느끼려면 특정한 계절에 길을 나서보는 것도 좋다. 가령, 연세대 코스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친 나무'로 통하는 겹벚나무에 꽃이 피는 봄이나, 신록이 만발하는 초여름에 걸으면 좋을 것이고, 산등성이에서 서울을 굽어볼 수 있는 남산길은 청명한 가을날이 좋겠다. 다정한 이와 함께라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성북동을 걸어 보고, 미술관이나 등록문화재 등 볼거리가 특히 많은 정동길은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것도 좋다.

 

허병식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현재 계간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김성연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연세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상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2005년 이후 세 번의 개인전과 여러 번의 그룹전을 열었고, 2008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일러스트 하세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나와서 프랑스 아를르 국립사진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이다. 설화나 전설처럼 오랜 옛날부터 깃들어 있던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중요한 장면들이 서울을 배경으로 연출되었다. 100여 년 전 근대도시 경성에서부터 오늘날의 첨단도시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학을 통해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서울을 들여다본다.

문학이 보여주는 서울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같은 모습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무척 낯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문학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좁은 골목길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게 된다. - '책머리에' 중에서 

 

|차 례|

 

|발간에 부쳐|

서울만의 이야기, 서울의 문화자원

 

|책머리에|

서울을 걸어 문학을 만나다

 

01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 보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08 부암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10 성북동

숨어 있는 시와 사랑의 길에서 무엇이 보일까

 

11 사직동 · 현저동

가난의 풍경,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12 연세대 · 신촌

윤동주, 달을 쏘다

 

|부록|

인용 작품의 작가 약력

 

01 소공동 · 명동

모던보이의 뒤를 좇아 남촌을 거닐다

새로 지은 신관과 리모델링을 거친 본관이 함께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관이 바로 옛 미쓰코시백화점이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중략)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 <날개>

신세계백화점 본관

1930년에 완공된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꼬시백화점 건물이었던 본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재로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내부 인테리어의 현대적 감각을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앙계단을 그대로 보존하고, 옥상정원을 재개장하여 방문자 휴게시설과 조각물을 배치했다.

영업 시간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미8군 PX 아래층은 서쪽으로 삼분의 일쯤이 한국물산 매장으로 되어 있어 그 경영은 한국인 위탁업자들이 맡아 하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해먹을 것이 궁색한 전쟁중이라 그 위탁 판매장 맡아하기도 웬만한 빽이나 수완 없인 어림없다는 게 최사장의 말이었고 앞을 다투어 갖가지 업종--수예품, 유기그릇, 대그릇, 고무신, 피혁제품, 귀금속--이 다 들어앉은 뒤에 엉뚱하게도 밑천 한 푼 안 드는 초상화 간판을 들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상술이 아니라는 게 최사장의 자부였다.(중략)휘황한 아래층 중앙부에 초상부를 차리고(중략)환한 조명 속에 펼쳐진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박완서, <나목>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 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예쁘군요."

그들에게는 좀 허풍스런 찬사를 보내야 하는 법인데 오후의 피곤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나른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앞에 선 우람한 지아이(GI)는 몸집보다는 민감한 듯했다. 금방 씰쭉해지더니 사진을 나꿔채듯이 제 눈앞에 가져가다 새삼스럽게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제품에 안심이 되는지 다시 입을 헤벌렸다.

나도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군요. 당신은 행운이에요. 물론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셔야죠. 어때요? 이 고운 실크 스카프에다 그리면."

박완서, <나목>

지금은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이용되는 한국은행(옛 조선은행) 건물.1930년대에는 근대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머엉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물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인 전차에 뛰어올랐다.(중략)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제 이대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구보가 또다시 고독과 피로를 느꼈을 때, 약칠해 신으시죠 구두에, 구보는 혐오의 눈을 가져 그 사내를, 남의 구두만 항상 살피며, 그곳에 무엇이든 결점을 잡아 내고야 마는 그 사내를 흘겨보고,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나의 구두를 비평할 권리가 그에게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리에서 그에게 온갖 종류의 사물을저주하고 싶다. 생각하며, 그러나, 문득, 구보는 이러한 때, 이렇게 제 몸을 혼자 두어 두는 것에 위험을 느낀다. 누구든 좋았다. 벗과, 벗과 같이 있을 때, 구보는 얼마쯤 명랑할 수 있었다. 혹은, 명랑을 가장할 수 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국가 중요문화재인 사적 제280호로 지정된 한국은행 건물은 1907년 착공되어 1912년부터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건물은 국내외 화폐문화의 역사와 한국은행의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잇으며 이곳에서는 화폐제조와 관련된 실물자료 및 영상자료를 접할 수 있다.

관람시간 화~일요일, 10:00 ~ 17:00

휴관일 월요일, 공휴일, 근로자의 날, 12월 19일 ~ 다음해 1월 2일. 공휴일(설날 및 추석연휴 제외)이 토요일, 일요일인 경우에는 개관.

문의 02-759-4881, 4882, 4061 | http://museum.bok.or.kr

 

참 요사이 무슨 좋은 일 있소. 맞은편의 경성우편국 3층 건물을 바라보며 구보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니-- 돌아보는 벗의 눈에 피로가 있었다. 다시 걸어 황금정으로 향하며, 이를테면, 조그만 기쁨, 보잘것없는 기쁨, 그러한 것을 가졌소. 뜻하지 않은 벗에게서 뜻하지 않은 엽서라도 한 장 받았다는 종류의…….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날 경성우체국 앞에서 구보씨는 벗으로부터 받는 엽서를 떠올렸다.

오늘 포스트 타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 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이십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뻔했습니다.

이십팔 관, 하고도 육백 몸매……!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이년을 데리고 진고개로 산보를 갔다가 경성우편국 바로 뒷문 맞은편, 아따 무어라더냐 그 양약국 앞에 놓아둔 앉은뱅이저울에 올라 서본 결과, 춘심이년이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우'자 쓴 벙거지 쓰고 감장 홀태바지 저고리 입고 가죽 주머니 베고 문 밖에 와서 안중문을 기욱이욱하며 '편지 받아 들여가오. 편지 받아 들여가오' 두세번 소리하는 것은 우편 군사라. 장팔의 어미가 까마귀에게 열이 잔뜩 났던 차에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질부등가라 깨어지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우편 군사에게 까닭 없는 화풀이를 한다.

"왠 사람이 남의 집 안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보아? 이 댁에는 사랑양반도 아니 계씬 댁인데, 왠 젊은 녀석이 양반의 댁 안마당을 들여다보아?"

(우편군사)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 아오. 어디 말 좀 하여 봅시다. 이리 좀 나오시오. 나는 편지 전하러 온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소."

(부) "여보게 할멈, 자네가 누구와 그렇게 싸우나. 우체사령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니 미국서 서방님이 편지를 부치셨나베.

어서 받아 들여오게"

(노파) "옳지, 우체사령이로구. 늙은 사람이 눈 어두워서……어서 편지나 이리 주오. 아씨께 갖다 드리게."

이인직, <혈의 누>

포스트 타워(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 타워는 정보소통 장소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시민들의 휴식과 체험을 위한 다양한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1층 앞마당에 우정원이란 개방형 문화공간을 만들었고 보행자 광장을 조성했다. 또 11층에는 직원과 방문객을 위한 쉼터인 구름 카페와 도시의 정원, 간이 주방 등을 만들었다. 옛 중앙우체국 내에 있던 우정박물관은 2004년 충청남도 천안으로 이전했다.

 

'그러면 우선 비행기 회사에 들러 형편이나 알아볼까……'

이인국 박사는 캘리포니아산 시가를 비스듬히 문 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그는 스프링이 튈 듯이 택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도호텔로……"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전광용, <꺼삐딴 리>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아저씨를 따라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로오즈가아든으로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 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오십 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이왕직 악대의 음악 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조선호텔

1914년 10월 10일 환구단 자리를 헐고 개관한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철도호텔로 불리던 당시 조선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댄스파티' 등 서양풍 문화를 선도한 서양식 호텔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나인스 게이트'의 유리창 전면으로 환구단이 보인다. '나인스 게이트'의 뜻은 조선시대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 외에 아홉 번째 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문의 02-771-0500 | www.echosunhotel.com

 

환구단(원구단)

사적 제157호.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만들어졌다. 남별궁이란 태종의 둘째딸 경정 공주의 궁으로 작은 공주가 거처하는 마을이라 하여 일대가 소공동(小公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남별궁 터에 환구단만 남아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했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돌북)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환구단 건물 뒤로 웨스틴 조선호텔이 보인다. 조선 최초의 호텔이었던 이곳에서 근현대 소설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졌다.

 

덕기는 회피하듯이 이런 소리를 하며 전찻길로 나서자,

"대관절 어디로 갈텐가?"

하고 저녁 먹으러 갈 데를 의논한다.

여기는 황금정 이정목이다.

"타지 말고 좀더 걷세. 본정 삼정목까지."

"어딘데?"

"좋은 데를 하나 발견하였네. 값싸고 스테키나샨(썩 말없는 미인)이 있고…… 그런데 자네 너무 놀라 자빠졌다가는 큰일일세."

"왜?"

"왜든 가보기만 하세그려."

두 청년은 본정통으로 하여 꼽들었다.

염상섭, 《삼대》

명동의 상징적 공간, 명동성당.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곳이며, 때로는 약자를 보호해 주었으며, 한때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명동성당

사적 제258호. 한국 가톨릭의 대표 성지이며 1898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종현성당, 명동 천주교당이라고도 불렸다. 지하 성당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명동성당에는 1880년대 이래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어 《경향잡지》, 《경향신문》 등이 간행되었고 한국교회의 출판문화를 선도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의 02-774-1784 | www.mdsd.or.kr

 

사오 일 동안 청음이 고루지 못하던 천기가 이날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고 석양에 이르러는 고운 비로 쓸어낸 듯이 구름은 흩어지고 청량한 월광은 동편 하늘에서 얼굴을 나타내는 때에, 더위를 쫓는 서풍은 서서히 불어 사람의 가슴까지 서늘하다. 길가에 손도 없는 빙수집의 주렴은 한가히 바람에 움직일 뿐이요, 종현 천주교당의 뎅뎅 치는 종소리는 지금 오후 여덟 시를 보하는 때라.

조중환, 《장한몽》. 1913, 《매일신보》(《한국신소설전집 9》, 을유문화사, 1968)

 

송빈이의 마음은 무엇에나 의지부터 하고 싶었다. 송빈이는 하루아침 다섯 시에 일어났다. 아침 미사종이 울리기 전에 천주교당으로 올라왔다. 처음보는 데다, 거의 남산 중턱 만큼이나 높은 지대여서 장안이 눈 아래 즐비하게 깔린다. 교당은 가까이 와보니 높으다는 것보다는 것보다는 장엄한 편이다. 서울의 여명은 먼저 이 교당 첨탑에 비치는 것이며, 좌우 남하의 홍예문들은 거기가 곧 천국에 들어가는 문처럼 위엄스러웠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대경성도시계획을 압둔 서울은 모든 현대문명의 호화와 정수를 한데 모와 '문화경성'의 면모를 널리 세상에 빛내려고 함이 작금의 대경성의 외관이다. (중략) 이러한 서울이라 그리 놀라울 것은 없으나 우리들의 시선을 모으게 할 또한 커다란 '뉴스' 하나가 생겨지고 잇음이 사실이다. 바로 장소는 대경성에서도 심장이라고 할 만한 명치정의 십자로점. 시간의 여유 있는 분은 한번 그리로 가보면 알리니 그 곳에는 삼목합명회사의 청부로 진행 중에 있는 커다란 공사장 하나이 언뜻 눈에 띄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머지않아 우리들 눈 앞에 황홀 찰란하게 나타나게 될 영화예술의 전당이다.

《삼천리》

2009년 새단장을 마치고 명동의 상업적 중심지에 새롭게 문을 연 명동예술극장.

이 지역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02 남산길

남산 등성이에서 굽어보는 서울

 

 

"예배당? 정옥이 걔가 예수 믿던가?"

"아, 믿던가가 뭐야? 수표교 예배당엘 벌서 삼사 년이나 두구 댕기는데… 왜, 점심시간이면, 정해놓구 이 층에만 올라가서 찬송가 나부랭이 풍금치는 거, 입때 구경두 못했니?"

"글세, 풍금은 더러 치더구먼 두…… 그래, 걔가 수표교 다리 근처서 사나?"

"바로 수표 다리 골목 안인가 보더라. 왜, 맘이 있니?"

"맘은, 무슨……."

"맘이 있거든 지금이래두 찾어가 보렴. 수표 다리에 가서 곰보미장이 집이 어디냐구 물으면 대번 아르쳐줄 테니……."

박태원, 《천변풍경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다.

개발시대에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물의 깊이를 재는 넌

내 눈물의 깊이는 재어보았니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데리고

수표교 하나

내 눈물 속에 평생 잠겨 있어도

 

난 아직 내 눈물의 깊이의

깊이는 재지 못했네

 

돌이 된 내 눈물의 무게도

재지 못했네

정호승, <수표교>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중략)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

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포도송이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관수동 뒷거리

휴지 줍는 똘만이들의 부은 눈길이

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신동엽, <서울>. 1969년 《방황》 창간호에 발표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정현종, <느낌표>

 

내가 잃어버린 구름이

하늘에 떠 있구나

정현종, <내가 잃어버린 구름>

 

산에는 꽃이 피네

꽃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가는 길>

울룩불룩 자연스러운 돌에 소월의 시 <산유화>를 새겨 놓았다.

산책로 한켠에 서 있는 조지훈 시비. <파초우>가 새겨져 있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앞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봐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던고

조지훈, <파초우>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각딸각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못 구경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 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크리트 길바닥을 걸어다니던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날 나막신 소리를 내는 것은 그다지 얘깃거리가 될 것도 없다.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궁상이 다닥다닥 달려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요, 사업이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삼순 구식(三旬九食)의 비참한 생활을 해 가는 것이다. 그 꼬락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이야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하윌대로 하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지(理智)만이 내 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이 뾰족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조글조글한 갓을 좀 뒤로 잦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 중의 적삼이거나 복(伏)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의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 망정 행전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후략)

이희승, <딸깍발이>

문학의 집 서울

전시 시간 월 ~ 토 10:00 ~ 17:00. 문의 02-778-1026 | www.imhs.co.kr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연중 다양한 행사가 열리므로 일정을 확인하고 가면 좋다.

 

03 서울역 · 약현성당 · 남대문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보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루었네

 <경부철도가> (1908, 최남선 작사)

옛 서울역사 내부. 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언젠가 새단장을 마치면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港口)와 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여 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 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옛 서울역사 3등 대합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나 창문 등에 예전 모습이 남아 있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를 골라서 돌아다니기로 했다.그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코를 다쳐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 보다. 얼른 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룸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한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이상, <날개>

찻집 '티룸'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프랑스식 양식당 '그릴'. 2009년 리노베이션 이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서울역에 내린 성수는 휑뎅그렁한 역사며 아직은 찬 이른 봄의 깐깐한 바람 때문에 으스스 떨었다. 군용 담요로 만든 외투를 걸친 늙은 여자가 '깨끗한 하숙있어요' 했을 때도 그는 아직 그런 썰렁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여자가 다시 '이쁜 색시도 잇어요' 했을 때도 아직 첫 서울이 주는 당혹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성수가 서울에 달라붙기 위해 치른 이런 요행과 불운은 그가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 교정원으로 취직하기까지 무려 열두 번이나 거듭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무수한 서울과 만났다. 종삼과 만나고 르네상스와 만났으며 동대문이나 남대문 그리고 청량리나 영등포와도 만났다.

르네상스에서 만난 그 여대생과 같은 여자들과도 여러 번 조우(遭遇)했다. 그리고 용케도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서울에 남는 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요즈음에 와서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서울이 그에게 어떤 의미와 빛깔을 던져 주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다.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한 것 같기도 한 오리무중의 감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안에서 혼자만 쑥죽을 찾아 먹는 그에게 아들놈이 말하는 수가 있다.

"아버지는 그런 풀을 어떻게 잡수세요. 아버지는 촌사람이야."

술 마시면 '타향살이'를 흥얼거리는 자신에게 여편네가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수가 있다.

"당신은 갈데없는 시향민이로군요."

이 말에서, 성수는 서울은 아직도 자기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잠겨 볼 때가 있다. 그리고 까닭없이 고향에 대한 미안함을 지닌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 눌러붙은 그 많은 촌놈들도 돌아서면 제각기 조금씩의 미안함을 안고 살 것이다. 고향에 대해서.

-끝-

최일남, <서울의 초상>

 

그날 오전, 서울역의 혼잡한 광장에 홀로 남겨졌을 때부터 나는 이 여행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회가 시작된 시간은 그보다 한참 먼저였다. 기차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다소 부지런을 떨었던 아침, 내가 없어도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가게끔 챙겨 둬야 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앞에 두고 느꼈던 전날 밤의 한숨, 그보다 더 앞으로 시간을 돌리면 기차표를 예매하러 나갔던 날의 몽롱함과 회의까지를 다 후회의 페이지에 삽입시켜야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후회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늘 그렇듯이 포기도 쉽게 하지를 못하고 결국 나는 예매한 기차표의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서울역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사이 이 여행을 포기해도 미련이 없을 만한 어떤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중략)

나중에 하나의 여행이 온전하게 소설로 담겨져 나오는 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필요가 먼저였고 소설은 의외의 부산물인 경우에 불과했다. 성실하게 삶을 더듬다 보면 운좋게 주어지는 그런 부산물.

그러나 이번 여행은 삶의 여러 관계들로 야기된 피할 수 없는 길떠남이 아니었다. 망설임과 후회가 그처럼 질겼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거기에서 연유되고 있을 것이었다. 소설이 제대로 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여행을 도모하고 실천하다니,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죽을 듯이 아껴서 써대도 겨우 마감 날짜를 지킬까말까 한 이 화급한 날들 중의 하루나 이틀을  온전하게 내던져 버리다니, 이 도박은 말하자면 벌써 몇 달 째 그랬듯이 이번 달 역시 마감 날짜를 그냥 지나치고 말리라는 뚜렷한 징표로서 제시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소설은, 확률이 높건 적건 간에, 결코 도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양귀자, <숨은 꽃>

 

사실을 말하면 개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약국 앞에 붙은 간이서점을 기웃거리긴 했었다. 읽을 것이 아닌 그저 볼 것, 머리에 입력되지 않고 단순히 눈에만 머물렀다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 그런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읽을 만한 책을 고르지 못하였다. 집에서도 그랬다. 어쩌면 손쉽게 아무 책이나 택해서 손가방 안에 쑥 밀어넣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이번 여행엔 아예 어떤 책도 동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무얼 구할 수 있었다면 왜 여행까지 생각했을 것인가.

(중략)

기차 안에서의 세 시간 동안 내가 만난 글자는 홍익회 판매원의 밀차에 담긴 군것질감의 상표와 앞자리 등받이에 새겨진 피로회복제 광고가 전부였다. 피곤하고 나른할 때 이 물약을 마시면 새 기운이 솟구친다는 광고 문구는 어느 좌석이건 간에 다 흰 천의 등받이에 녹색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차 안 이곳 저곳에 내가 찾는 글자가 널려 있기는 한 셈이었다. 그것들의 한결같은 내용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내 눈은 글자를 읽고 뜻을 해독하는 짓을 멈추지 못한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나는 마녀의 주술 때문에 춤을 멈출 수 없이 쩔쩔매는 동화 속의 불행한 공주를 떠올린다. 누구, 이 춤을 멈춰 줄 사람은 없나요?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춤을 춰야 하고 자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춰야 한답니다. 제발, 이 춤을 멈춰 주세요.

양귀자, <숨은 꽃>

옛 서울역사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한다고 한다.

중림동 약현성당은 1998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복원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 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정호승, <약현성당>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전략) 마지막 돌아보는 셈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 왔다. 남대문의 미(美)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간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생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

그 후 피난생활이 맺어 준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된 오랜 객지생활에서도 그때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은 조금도 퇴색함이 없이,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내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빈번이 딴 데로 한눈을 파느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서울은 변화하고, 쳐다보고 우러러볼 높은 집도 많았거니와, 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버스에 앉아서도 줄창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는 사이에 남대문에 대한 흥미를 쉽사리 잃어 갔다. 나는 이미 이 고장이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가 지배할 고장이 아니란 걸, 남대문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이 고장의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화재로 무너지기 전. 당당한 자태로 서 있던 남대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의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대문 시장. 살아 움직이는 이곳 사람들이 곧 시인이고,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시가 된다.

 

04 정동길

정동, 그 눈부신 황혼의 거리

 

잔돈을 두어 두고도 심 원짜리를 낸 것이며, 부청 앞에서 내릴 테면서 정거장까지 간다고 한 것이며가 모두 요량이 있어서 한 짓입니다. 무사히 공차를 탄 윤직원 영감은 총독부 앞에서부터는 춘심이를 앞세우고 부민관까지 천천히 걸어서 갑니다.

"좁은 뽀수 타니라구 고생헌 값을 이렇기 도루 찾는 법이다."

그는 이윽고 공차 타는 기술을 춘심이한테도 깨우쳐 주던 것인데, 그런 걸 보면 아마 청기와장수는 아닌 모양입니다.

종로에서 그렇듯 많이 충그리고 길이 터지고 했어도, 회장에 당도했을 때에는 부민관 꼭대기의 큰 시계가 열두시밖에는 더 되지 않았습니다. 입장권을 사기 전에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 사이에는 또 한바탕 상지가 생겼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더러, 네 형이 출연을 한다면서 무대 뒷면으로 제 형을 찾아 들어가 공짜로 구경을 하라고 시키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심이는, 암만 그렇더라도 저도 윤직원 영감을 따라왔고, 그래서 버젓한 손님이니까 버젓하게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야 말이지, 누가 치사하게 공구경을 하느냐고 우깁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옛날 문화 예술 공연장 '부민관'이었던 곳이 지금은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된다.

 

음악회--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깜빡 잊었다. 첫날 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왓다. 일 년에 잘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코프스키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것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정신이 어디로 팔려 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에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 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 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던 것을…….

김남천, <경영>

고층 빌딩 일색인 서울에서 골목 한 구비를 돌아들면 매력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성당이 있다.

 

그들은 구세군 서대문 본영을 지나 경기고녀와 덕수국민학교 앞을 지나서 광화문으로 나왔다. "약속 있어?" 하고 이홍철 씨가 물었다. "없어." 하고 구보는 대답하였다. "9(나인)에 가 볼까?" "그러지." 9다방에는 소설가 남장우(南丁愚)가 가끔씩 들르는 곳이었다.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미대사관 담과 덕수궁 담이 이어지는 덕수궁길. 왼쪽 덕수궁 담 너머로 궁궐 건물들이 조금씩 보인다.

 

왕이 그녀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한 밤에 왕비는 그녀를 중궁으로 불렀다. 그녀가 프랑스 공사관으로 나가 살기 시작한 지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왕비와 그녀 사이에 커피와 케이크가 놓였다. 왕비는 더 가까이 오라, 하였다. 왕비의 자당의에 녹빛이 감도는 국화매듭의 단작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노리개의 부드러운 술이 눈앞에서 찰랑일 만큼 그녀가 왕비와 가까이 앉기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왕비는 그녀에게 전하께서 왕가의 이씨 성을 하사하신 것은 너를 딸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하였다. 리진은 옥첩지를 단정히 꽂고 있는 왕비의 흰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깊이 머리를 숙였다.

- 그러니 너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 또한 여염집 같으면 여식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같다.

리진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

-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중략)

- 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땀에 젖어가는 그녀의 귀에 흰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 너는 사랑을 얻어 개화된 세상에 먼저 나가는 것이니라, 서러워마라.

리진은 춤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불이 되려 했다.

- 다른 세상에 가서 여태의 족쇄를 플어버리고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 새 삶을 가지거라.

리진은 춤으로 땅이 되려 하고 쇠가 되려 했다.

- 조선의 여인으로 만 길을 떠나는 건 네가 처음일 게야.

신경숙, 《리진》

 

영철은 서대문 턱에서 탓든 전차를 차내 버리고 정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벌서 서양촌이란 노랑 냄새가 풍기고 학교촌이란 푸른 기운이 도는 것 가텃다. 그러면서도 한가롭고 깨끗한 늣김을 주엇다. 이 골목은 장차 오는 조선의 주인공인 남녀학생이 아츰 저녁으로 수천만번 그 힘찬 발자욱으로 다지고 다진 골목이다.

괴로운 바다와 가튼 세상을 다 지나 래세의 천당을 동경하고 땅 우에도 천국을 건설하려는 신남신녀가 찬미 성경을 끼고 묵상하며 종소리를 따라가고 오는 서울에도 이름난 정동골목이다.

이 골목 안에는 조선에 하나요 등대처럼 노피 서서 빗을 내는 여자전문학교가 녀왕처럼 군림하엿다. 마즌 편 음악실에서는 여름이거나 가을이든 봄이든 주야로 요량한 피아노 소리와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가 나뷔처럼 날어 담을 넘어서 지나가는 사람의 고달픈 가슴에도 안기는 파라다이스 골목이다.

방인근, <마도의 향불>

정동의 길들은 원형 분수대를 기점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붉은 벽돌로 지은 외벽과 하얀 창틀이 인상적인 정동교회.

 

"주로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와 찬송소리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창문은 구경꾼들로 메워졌고 제단에 나와 남녀 교인들이 나란히 무릎 꿇고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먹고 마시는 그 거룩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옛 배제학당 건물.

신식결혼, 연애결혼이 처음으로 열린 교회 앞에 다정한 이와 마주 앉고 싶은 벤치가 놓여 있다. 단정하게 놓인 모습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은 이곳이 교회당 앞이기 때문일까.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개관시간 화 ~ 일 10:00 ~ 17:00 문의 02-319-5579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소설 속 윤직원 영감은 정말 이동백 명창과 닮았을까?

 

그 양복신사는 웬일인지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윤직원 영감을 연해 흥미있게 보고 또 보고 해쌓더니, 차차로 호기심이 더하는 모양, 필경은 자리를 옮아 옆으로 바싹 와서 앉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앉아서 윤직원 영감에게 말없는 경의를 표한다고 할까, 아무튼 몹시 이야기를 붙여 보고 싶어하는 눈치더니 마침내,

"이번에 인기가 굉장헌 모양이지요?"

하고 은근 공손히 말을 청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으로 보면 인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니와, 또 낯모를 사람과 쓰잘데없이 이야기를 할 맛도 또한 없는 것이라 거저,

"예에!"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할 뿐입니다.

양복신사씨는 좀 싱거웠던지 잠깐 덤덤하더니 한참 만에 또,

"거 소릴 얼마나 공불 허면 그렇게 명창이 되시나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별 쑥스런 사람도 다 보겠다고 귀찮게 여기며 아무렇게나,

"글씨……나두 몰루."

"헤헤엤다. 괜히 그러십니다!"

"무얼 궈녀언이 그런다구 그러우……? 나넌 소리를 좋아넌 히여두 소리를 헐종은 모르넌 사램이요!"

"괘애니 그러세요! 명창 이동백(李東伯) 씨가 노래헐 줄 모르신다면 누가 압니까?"

원 이럴 데가 있습니까! 어쩌면 윤직원 영감더러 광대 이동백이라고 하다니요!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괘씸하고 창피하고 뭐, 도무지 어떻다고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법이 없어진 오늘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계동 자기네 댁만 같았어도 이놈 당장 잡아 내리라고 호령을 한바탕 했을 겝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판소리 공연이 열리던 정동극장에서는 요즘도 전통예술 공연이 열린다.

 

"(전략)여보 동포들, 들어보시오.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 있거든 황제 폐하 통치하에서 부지런히 빌어먹고 자식이나 잘 가르쳐서 국민의 지식이 진보될 도리만 하시오. 지금 우리나라에 국리민복 될 일은 그만한 일이 다시없소. 나는 오늘 개혁하신 황제 폐하의 만세나 부르고 국민 동포의 만세나 부르고 죽겠소."

하더니 옥남이가 손을 높이 들어,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국민 동포 만세, 만세, 만세!"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데

(후략)

이인직, <은세계>

고종의 도서관이었던 중명전. 지금은 정동극장 뒤에 옹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곳도 덕수궁 경내였다.

 

태평통(太平通) 쪽을 향하여 정동(貞洞) 골목을 터덜터덜 내려오던 노동자는 건극문(建極門) 앞에까지 와서--그냥 건극문, 하면, 아는 이가 드물 게다.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덕수궁(德壽宮) 돌담을 끼고 정동 골목을 쑤욱 들어가노라면 아니 경성지방법원 맞은편짝에 있는 것은 용강문(用康門), 거기까지 가지 말고 바른편에는 전등 달린 전신주, 오른편에는 전등 안 달린 전신주 그 사이에 음침하게 울적하게 닫혀 있는 문이 바로 건극문이다.

(중략)

경성지방법원 앞까지 와서, 본래 같으면 이화학당(梨花學堂) 앞을 지나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것을, 그러나 오늘 밤은 조금 전의 행동화(行動化)할 수 없었던 그 흥미 있는 감정도 도와, 그 둘은 기약지 않고 좀더 은근한 방송국 넘어가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난 이 길이 좋아, 여기하구, 원남동 신작로하구."

갑자기 여자는 꿈꾸는 듯이 또 자못 감격을 금할 수 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한 거리는, 딴은, 남녀가, 특히 밤늦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들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참말, 모레 돌아가시렵니까?"

이화여고보의 긴 조선담--

"네, 그러나 또 며칠 있어두 좋구요."

마침 지나는 이화여고보 정문에 달린 외등을 쳐다본 여자는, 혹은, 남자나 마찬가지로 그 밝음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른다.

또 긴 담을 끼고 가면서,

"너무 오래 계시면, 아버니께서 걱정 하실까?"

정동 13번지, 양인의 집 외등에는 전구가 없었다. 까닭에 그 맞은편 전신주에 달린 전등은 그들에게는 좀더 원망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중략)

마침내 그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정문 앞에까지 왔다. 역시 전신주에 달린 전등이, 또 맞은편 노서아 영사관의 외등이, 남자를 잠시 주저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이 골목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절망임을 아는 그는, 용기를 내어 여자를 이화여전 정문 지붕 밑으로 이끌려 하였다.

박태원, <애욕>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고목 옆에 남아 있는 한식 교문.

 

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舍監)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중략)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 레터'였다. 여학교 기숙사라면 으레 그런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이지만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날아 들어왔었다. 기숙생에게 오는 사신을 일일이 검사하는 터이니까 그 따위 편지도 물론 B여사의 손에 떨어진다. 달짝지근한 사연을 보는 족족 그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편지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낸다.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영신이란 여자를 한 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닥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굴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릿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었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 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같으나 피봉 뒤에는,

'XX여자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심훈, <상록수>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앚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링술로

 

눈이

오는데

예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貞洞

聖미하엘 鐘樓가 보이는데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속에 돌층계가 잠드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서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지평선이 멀리 저문다.

박목월, <廢園>

이화여고 박물관은 옛날 여학교 교실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얼마나 우줄대며 다녔었나

이 골목 정동 길을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게는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 침침한 속에서

온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 소리

피아노 소리 분수와 같이 눈부시더라.

 

그 무렵

나에게는 사랑하는 소녀 하나 없었건만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음악소리에 젖는 가슴 위에

희망은 보름달처럼 둥긋이 떠올랐다.

 

그후 20년

커다란 노목이 서 있는 이 골목

고색창연한 기와담은

먼지 속에 예대로인데

지난 날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그 피아노 소리조차 들을 길 없구나.

장만영, <정동 골목>

손탁호텔 터 표석.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자리에 예전 손탁호텔이 있었다.

새로 지은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5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략)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중략)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 <거대한 뿌리> 1964. 2. 3

옛 러시아 공사관 탑. 역사책에 나오는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상한 고층 건물과 좋은 외관은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이다. 세 번째 건물은 약간 한국식 건축 양식이었는데 모양은 초라했다. 이들은 미국 감리교회와 미국 장로회파교회와 함께 회의소와 공장의 복합 주거지였는데, 그 위치는 다소 낮은 곳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사벨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05 광화문 · 효자동

권력의 시선 아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저같이 의젓이 그 날개죽지 위에 싣고 잇는 자도 드물다.

 

상하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서정주, <광화문>

광화문 뒤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던 시절의 사진. 여러 차례 소실되고 재건되고 자리까지 옮겨진 광화문은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원래 경복궁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할머니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꽤 오래전부터 정규적으로 경복궁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여러 번 경복궁에 가 봤다.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에는 항상 졸병 네 명과 좀 높은 군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의 냉랭한 기세가 아니더라도, 군인들이 괜히 문 앞에 서 있을 리 없으니까 사람들은 언감생심 아무도 경복궁에 출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군인들 옆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 이어지는 돌담길을 계속 따라가면 청와대에 이른다.

 

그해 1936년 가을 威亨洙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려내게 되었다. 그때 내가 기초한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들을 합해 이르는 한 심포니를 만들어보려 했던 만큼, 동인들의 정신지향은 자세히 보면 여러 갈래였지만, 사람의 기본 자격 그것을 주로 생각한 점에서는 누구나 모두 일치했던 것으로 본다. 이 기본자격을 향한 짙은 향수, 기본자격을 박탈당하는 이들의 울부짖음과 몸부림, 이 기본자격을 향한 벅찬 질주, 이런 것은 이 때 우리들에겐 한 불치의 숙명처럼 되었던 것이다.

서정주, <천지유정>

밑동만 남은 통의동 백송을 초록 담쟁이가 뒤덮고 있다.

 

사라지기 얼마전 인사동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어쩜, 나무들도 생각을 한대. 나무가 하는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 않어?"

그리고 통의동 백송과 조계사 회화나무를 보러가자고 했었다. 나무가 만약 생각을 하는게 사실이라면 그건 사랑에 대해서일 것이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자칫하다가는 겉핥기 대꾸로 들릴까 봐서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우선 짝짓기를 위한 일차적인 사랑이 있었다. 목숨을 받아 태어난 어떠한 미물일지라도 짝짓기 행위는 눈물겹도록 놀라운 것이었다. 미물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식물도 알고 보면 번식을 위해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은 인간이 보고 즐기라고 피는 것이 아니며, 맛있는 열매는 인간이 먹고 즐기라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은 '나무의 사랑'은 일차적인 사랑만은 아니었다.

윤후명, 《무지개를 오르는 발걸음》

작가 이상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를 상가건물이 대신하고 있다. 저기 효자서당에서 혹시 이상의 시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래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뚤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烏瞰圖) - 시제1호(詩第一號)>

노천명이 살던 집. 오래된 집이지만 정겹고 단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오늘은 음력으로 며칠이나 되는지, 달이 밝다. 선선한 바람이 더운 이마를 및어준다. 끈적끈적하는 -좀 이상스러운 말이지만- 북경성(北京城)의 빈민촌인 이곳 누하동(樓下洞)에도 여름 저녁의 기분은 농후하다. 나는 이 이상 더 쓰기 싫다. 달이나 보자. 달이나 쳐다보다가 그리운 사람의 생각이나 하여 보자.

김기진,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

윤동주 시인이 잠시 몸을 의탁한 하숙이 있던 곳.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詩)>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에서

살았다. 종점근처의 쓸쓸한

하숙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 5장을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왕산은 해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덩어리 어둠에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

그런 밤일수록 눈물은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이제 두번 생각하지 않으리라.

효자동을 밤비를 그 기도를

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강바닥

달빛이 어리고

서글픈 편안이

끝없다.

박목월, <효자동>

청와대 영빈관 옆에 옛날에는 효자동 전차종점이 있었고, 이곳에서 출발한 전차는 태평로를 지나 마포종점에 도착하였다.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처럼 일어나 이 새피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의 의지……

신동엽, <아사녀> 부분.

 

수업을 끝내고 학교를 나서서 효자동 쪽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어.

곧장 집으로 갈 것을 호기심 때문에 일부러 그쪽 길로 들어섰던 것인데,

갑자기 어디선지 총소리가 들려오고 내가 빠져나가고 있는 골목길 앞쪽에서

사람들이 왁 하고 쏠려나오는 거야. 중3때 일이었으니까 안다고 해도 내가

뭘 얼마나 알았겠어? 형세가 하도 급하고 곧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

무서워져서 돌아서자 나도 딴 사람들처럼 무작정 뛰었어.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곁엣사람들이 하는 대로 아무 집으로 뛰어들었던 거야.

이제하, <자매일기>

 

영훈들은 달려서 적선동을 지나간다. 그의 스크린은 대열의 맨 앞장을 서고 있다. 그는 함성과 스크럼을 낀 옆 친구의 팔에서 느껴지는 열과 최루가스의 따가운 자극과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총성으로 정신을 잃은 듯이 효자동으로 달려간다. 드디어는 그의 스크럼이 깨어진다. 거기서부터 그는 구렁이처럼 길을 가로막는 기다란 하수관을 보고, 역진하는 전차를 보고, 불에 타는 소방차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와 혼주(混走)와 달리는 지프와 태극기와 그리고 펄럭이는 흰 가운자락을 본다.

이청준, <가수(假睡)>

 

효자동 낡은 중국집에 앉아

짜장면을 시켰다.

추억을 많이 갖고 사는 것이 부자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우리들의 옛 동네 효자동에 와서

짜장면을 시켜 놓고 다꾸앙에 춘장을 찍어 먹으며

모서리가 깨어진 가난한 추억을 꺼내 보았다.

삼일당에 걸렸던 이승만의 휘호는

4 · 19 때 성난 학생들에게 뽑혀 나갔고

탱크가 중앙청 앞에 버티어 선 후

청와대보다 낮게 낮게 지은 건물에서는

노오란 빗물이 새고 있었다.

 

칠궁 옆에 영비가 세운 진명학교는 이제

앞서 간 불꽃 나혜석의 그림도

노천명의 슬픈 시도 없이

낯선 신시가지 찾아 떠나갔고

빈 운동장엔 수십대의 자동차가

그녀들의 추억 위에 음흉한 괴물들을

주차시키고 있을 뿐……

팅팅 불어터진 짜장면을 쑤시다가

도난당한 추억을 어디에다 신고해야 하나,

근처 청와대를 잠시 떠올려 보다가

우리들은 말없이

낡은 중국집을 나왔다.

문정희, <중국집의 추억>

청와대 관람

관람운영일 매주 화 ~ 토요일(토요일은 10인 이하의 개인 / 가족에 한함)

신청대상 초등학생 이상(미취학 자녀는 가족 동반시 관람 가능)

관람시간 10시, 11시, 2시, 3시

집결장소 경복궁 동편 주차장 내 만남의 장소(관람시간 20분 전까지, 신분증 지참)

신청기한 관람희망일 10일 전까지

신청방법 홈페이지 내 관람 창으로 신청(노약자는 우편신청 가능), 사전예약 필수

셔틀버스 수시운행 중. 개인 및 가족단위 관람객에게 지원되며 단체 관람객은 만남의 장소에서 인원 점검 후 타고 온 차량을 이용해 바로 출발

관람문의 02-730-5800(ARS 음성안내), tour@president.go.kr

청와대 홈페이지 www.president.go.kr/kr/cheongwadae/viewing/guidance.php

 

 

 

 

posted by 황영찬
2013. 9. 13. 14:2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0 물고기 마음

 

루시드 폴 지음

2008, ANTENNA BOOK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4352

 

811.6

루58ㅇ

 

루시드 폴  조윤석

                         가수, 작사 · 작곡가, 공학자

 

1975.    3월. 서울 생

1982.    부산으로 이사

1999.    서울대 화공과 졸

2004.    스웨덴 왕립공대 재료과학 석사(Tekn. Lic.)

2007.    스위스화학회 '폴리머 사이언스 부문' 최우수 논문 발표상

2008.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생명과학 박사

2008.    일산화질소 전달체용 미셸 의료용 물질 미국 특허 출원

 

1993.    제5회 유재하가요제 동상

1997.    밴드 '미선이' 결성

1998.    미선이1집 'drifting' 발표

2001.    솔로 1집 'lucid fall' 발표

2002.    영화 '버스, 정류장' 영화음악 감독

2005.    2집 '오, 사랑' 발표

2006.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싱글상

2007.    라이브 앨범 'Light of the songs' 발표

2007.    3집 '국경의 밤' 발표

 

목차

 

推薦書  유희열

           여는 말

 

미선이 Drifting 1998

Sam

송시

진달래 타이머

치질

Shalom

시간

 

루시드 폴 1집 2001

풍경은 언제나

나의 하류를 지나

은행나무 숲

너는 내 마음속에 남아

해바라기

 

버스, 정류장 OST 2002

머물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장난스럽게, 혹은 포근하게

내 방은 눈물로 물들고

그대 손으로

약속된 사랑

 

오, 사랑 2005

물이 되는 꿈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오, 사랑

삼청동

들꽃을 보라

그건 사랑이었지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보이나요?

사람들은 즐겁다

 

국경의 밤 2007

마음은 노을이 되어

무지개

국경의 밤

가을인사

노래할게

날개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kid

라오스에서 온 편지

사람이었네

당신 얼굴, 당신 얼굴

 

기타

세상에서 나는 네가 제일 좋아

파노라마

가네

친구

길 위

투명인간

그대, 모든 짐은 내게

겨울 장마

바람은 차고 우리는 따뜻하니

 

맺는 말

讀後感   이동진

물고기 마음

 

처음 기타를 배우고

내가 보컬을 하게 될 줄 나는 몰랐었네.

보잘것없는 목소리에

불안한 음정에

도무지 나는 상상하지 못했네.

 

아주 멋진 노래 하나

그리며 살아가네.

평생을 건 숙명처럼

당신이 허락한다면

당신의 목소리되어

내가 이렇게 노래하려 해.

 

우리 같이 노래를 부르면

우리 시린 마음에 꽃이 필까.

낮고 외롭지만 따뜻한 노래

다시 환한 저 불빛이 될까.

 

헤엄치듯 살아있는 노래소리.

당신 나 물고기 마음.

판이 안 팔리는 세상을

노래가 흔한 세상을

씩씩하게 우리는 노래하네.

 

노래는 나의 빛, 우리 마음의 빛.

찬란한 창공의 빛.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즈막히 부르리.

우리 그리고 나의 노래.

 

 

posted by 황영찬
2013. 9. 10. 14:13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9 전통 건강 음료

 

글 / 한국의 맛 연구회●사진 / 배병석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4

 

082

빛12ㄷ  181

 

빛깔있는 책들 181

 

한국의 맛 연구회-----------------------------------------------------------

 

강인희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 한국의 맛 연구회 회장

조후종    명지대학교 교수

이말순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신현희    성균관대학교 강사

김진원    재캐나다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윤숙자    배화여자전문대학 교수

박혜원    신흥전문대학 교수

허채옥    한양여자전문대학 교수

김귀영    상주산업대학교 교수

김명순    한국전통음식연구가

이춘자    수원여자전문대학 교수

 

사진 촬영---------------------------------------------------------------------

 

배병석    88올림픽 문화행사 음식문화5천년전 및 온양민속박물관 유물 촬영 및 도록 발간의 사진작업을 담당했다.

 

그릇 협찬---------------------------------------------------------------------

무역센터    해강도예

곽규진    토리공방

양덕환    경기대학교 교수

 

|차례|

 

전통 건강 음료

전통 음료의 역사

갈수

숙수

청량 음료

    곡물가루를 이용한 음료(미수)

    오미자 국물을 이용한 음료(화채)

    밀수를 이용한 음료

    약재를 이용한 음료

    엿기름을 이용한 음료

    과일과 과일즙을 이용한 음료

    기타

부록

참고 문헌

오미 갈수  오미자 국물과 녹두즙을 각각 따로 만들어 섞은 다음 여기에 꿀을 넣어 신맛과 단맛이 적당하게 될 때까지 뭉근한 불에 달이면 분홍빛의 오미 갈수가 된다.

오과차  오과차는 모과, 대추, 황률, 은행, 호도 이렇게 다섯 과실로 달이는 우리나라 전통 약용차이다.

 

 

 

posted by 황영찬
2013. 9. 10. 09:0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8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유홍준 지음

200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06835

 

981.1

유95ㄴ 2 v. 1  c. 2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 우리 국토는 거대한 박물관 유물창고와 같고, 그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문화유산을 말하면서 결코 흘러간 역사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고 오믈이라는 한낮의 밝은 빛으로 조명해냄으로써 우리는 그의 해설에 따라 수천년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장쾌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게 된다. 역사학, 고고학, 민속학, 미술사 등 어느 한 분야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문화유산의 진실을 그는 대맥을 잡아 풀이하면서, 단순하게 씨줄과 날줄로 옷감을 짜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정교한 무늬를 넣어 아름다운 비단옷을 짓듯 우리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솜씨는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새로운 문화창조라고 평가할 만한 것이다.

- 안병욱(성심여대 교수 · 한국사)

 

유홍준의 답사기는 이제까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기행문이나 문화재 해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우리 국토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씌어진 그의 답사기는 정확한 전문적 지식과 명석한 양식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낱낱 유물의 형태상 특징과 아름다움, 내용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것을 창조한 인간의 이야기, 더 나아가 그것이 지닌 현제적 의의까지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감동과 놀라움 속에, 때로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전통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 윤용이(원광대 교수 · 미술사)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널린 민족치고는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스스로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남달랐다고 하기 어렵다. 전란으로 없어져버린 것도 많고 특유의 낙천성으로 물건 간수에 신경을 덜 쓴 까닭도 있지만, 아무래도 생활이 곤궁하고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는 통에 공부와 살림을 제대로 못한 탓이 큰 것 같다. 이런 판국에 유홍준이처럼 입심 좋고 글솜씨 좋고 먹성 좋고 눈썰미 사납고 꽤나 극성맞기도 한 연구자 겸 평론가를 만난 것은 여간한 복이 아니다. 이 '답사기'가 독서계에 한바탕 바람을 일으키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윤산의 보물들이 두고두고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백낙청(서울대 교수 · 문학평론가)

 

지은이 유홍준(兪弘濬)은 1949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였으며,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을 수료하였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부문으로 등단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히였다.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1986, 열화당), 편역서로 『미학에세이』(1988, 청년사), 번역서로 『회화의 역사』(H. W. 잰슨, 1984, 열화당) 등이 있으며,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비평」 「단원 김홍도 연구노트」 등 한국회화사 관계 논문을 줄곧 발표해왔다. 현재는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차례

 

책을 펴내면서  국토박물관의 길눈이

 

1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1)

아름다운 월출산과 남도의 봄

월출산 / 도갑사 / 월남사터 / 무위사 / 남도의 봄

 

2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2)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

해태식당 / 영랑생가 / 구강포 귤동마을 / 다산초당

 

3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3)

세상은 어쩌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만덕산 / 백련사 / 녹우당 / 윤고산 유물전시실 / 대흥사 유선여관

 

4 남도답사 일번지 - 강진 · 해남(4)

일지암과 땅끝에 서린 얘기들

두륜산 대흥사 / 일지암 / 미황사 / 땅끝

 

5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1)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상)

내포평야 / 수덕사 대웅전 / 정혜사 불유각 / 수덕여관

 

6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2)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하)

남연군 묘 / 보부상 유품 / 해미읍성 / 개심사

 

7 경주(1)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첨성대 / 황룡사 구층탑 / 삼화령 미륵삼존 / 감실부처님 / 여근곡

 

8 경주(2)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감포가도 / 대왕암 / 감은사탑 / 고선사탑 / 석가탑

 

9 경주(3)

에밀레종의 신화(神話)와 신화(新話)

성덕대왕신종 / 봉덕사종 이동기 / 후천개벽춤 / 불국사 박정희종

 

10 양양 낙산사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

낙산일출 / 의상과 원효 / 원통보전 돌탑 / 낙산사 그림

 

11 관동지방의 폐사지

하늘 아래 끝동네

설악산 진전사터 / 도의선사 부도 / 미천골 계곡 / 선림원터 / 홍각국사 부도비

 

12 문경 봉암사(1)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상)

희양산 / 봉암사 / 지증대사 부도와 비

 

13 문경 봉암사(2)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하)

정진대사 부도와 비 / 마애보살상 / 야유암

 

14 담양의 정자와 원림(1)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상)

중부휴게소 / 누정의 미학 / 소쇄원

 

15 담양의 정자와 원림(2)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하)

식영정 / 서하당 / 환벽당 / 취가정 / 명옥헌

 

16 고창 선운사

동백꽃과 백파스님, 그리고 동학군의 비기(秘機)

동백숲 / 상갑리 고인돌 / 낙조대 / 칠송대 암각여래상 / 백파선사비 /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부록 답사일정표와 안내지도

도선국사비 / 전설 속의 스님 도선국사의 일대기를 새긴 이 비석은 17세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 규모의 장대함과 조각의 섬세함이 볼 만하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월남사의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이지만 백제양식이라는 지방적 특성이 잘 살아나 있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 다산 정약용

 

무위사 극락보전 / 조선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맞배지붕의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불당의 엄숙성도 유지하고 있다.

극락보전의 측면관 / 기둥과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조화로운 면분할로 집의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

극락보전의 벽화 / 고려불화의 화려하고 섬세한 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선초 벽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위사의 늙은 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영랑생가 / 소담한 초가 안채와 뒤뜰의 해묵은 동백꽃은 영랑의 시처럼 아름답지만 요새 만든 영랑시비는 우악스러워 고가의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윤종진(1803~1879)묘의 동자석 / 정다산이 귀양지를 귤동으로 옮기게 한 해남윤씨 집안의 한 묘 앞에는 귀엽고 현대적 조형감각이 살아있는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다산초당 / 주변의 나무숲이 울창하여 다산초당은 언제나 이처럼 어둠침침하다.

정석 / 정다산이 여기에 머물던 시절 손수 쓰고 새긴 각자(刻字)로 그의 귀양살이를 말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다산동암 / 정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든 현판으로 해맑은 획맛이 살아 있다.(위)

보정산방 / 추사 김정희의 중년 글씨로 글자의 구성과 획의 움직임에 예술적 변화가 능숙하게 구사됐다.(아래)

정다산의 「매화와 새」 /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장첩(障帖)을 만들어 딸을 위해 그림과 글씨를 쓴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 이처럼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시원스런 전망이 있기에 다산초당은 여기에 자리잡은 것이었다.

백련사 전경 / 백련사의 가람배치는 앞쪽에 만경루가 육중하게 가로막고 있어서 위엄과 권위를 앞세운 느낌을 준다.

백련사 부도 /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리탑으로 동백숲 속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윤고산 고택 / 해남 윤씨의 종가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고가이다.

녹우당 현판 / 윤공재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형님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로 불려지는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 초상화 왕국이라 불릴 조선시대의 뛰어난 초상화 중에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동국여지지도 / 윤공채가 그린 이 조선전도는 그의 실학자적 면모와 대화가다운 필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선여관의 노랑이

천불전의 창살무늬 / 사방연속무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창살은 내소사 창살과 함께 손꼽히는 명품이다.

대웅보전 돌계단의 돌사자 / 돌계단 머릿돌에 이처럼 호신수를 새기는 것은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돌사자는 아주 매섭게 생겼다.

대흥사 대웅보전 / 대흥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경내는 큰 절집답지 않게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일지암 / 초의선사가 칩거하던 일지암은 다선(茶禪)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차를 아는 스님만을 주인으로 모신다.

추사의 「명선」 / 초의가 보내분 차를 받고 그 폐백으로 보낸 추사의 작품으로 병거사(病居士)라 낙관한 추사의 말년의 대표작이다,

대웅보전 현판 / 신지도에 귀양살고 있던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이다. 획이 바싹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 갔지만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진다.(왼쪽)

무량수각 현판 / 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 가면서 쓴 글씨로 획이 기름지게 살지고 구성의 임의로운 변화가 두드러져 있다.(오른쪽)

'토말' 비 / 해남군 송지면 갈두마을 땅끝에 세워져 있는 비석으로 멀리 노화도가 보인다.

미황사 대웅보전 / 달마산의 준봉들을 배경으로 한 멋진 건물로 빛바랜 단청이 더욱 고찰의 맛을 자아내고 있다.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속을

돌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 「애린」 김지하

수덕사 대웅전 /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 중 하나로 고려시대 맞배지붕집의 장중하고 엄숙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대웅전의 측면관 / 둥근 기둥과 각이 진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절묘한 면분할로 집의 모양새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대웅전 내벽의 벽화 / 해체 수리 때 발견된 꽃그림으로 고 임천선생이 모사해둔 고려시대 벽화이다.

만공스님의 미륵상 / 일제시대에 만공스님이 세운 미륵석상으로 그 조형미를 떠나 스님의 족적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큰 의미를 새기게 된다.

정혜사 '불유각' 현판 / 정혜사의 샘물터에는 보호각이 세워져 있고 '부처님의 젖'이라는 뜻의 '불유각(佛乳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글씨는 만공스님.

 

으셔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귓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 일엽, 「그대여 웃어주소서」

수덕여관의 이응로 암각화 / 고암 이응로의 본부인이 경영하는 수덕여관 뒤뜰에는 고암이 문자추상화를 새겨놓은 너럭바위가 두 개 있다.

남연군 묘 / 흥선대원군은 여기가 황제를 낳을 명당이라고 가야사를 불지르고 금탑자리에 선친 남연군의 묘를 썼다.

남연군 묘의 산도(山圖) / 명당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 / 옛날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사령부가 있던 읍성으로 조선시대 성곽 중 가장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상황산 개심사 현판 / 일제시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전서체로 글씨가 멋스러우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풍겨준다.

개심사 대웅보전 /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조선초 맞배지붕집이다.

개심사 심검당의 부엌문 / 맘껏 휘어뻗은 나무로 기둥, 창방, 문지방을 만들어 천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린 멋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첨성대 / 한국과학사에서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첨성대의 기본형태는 신라토기 중 기대(器臺)를 닮은 단정한 모습이다.

첨성대의 실측도 / 남천우교수가 제시한 것으로 1척 = 29.7cm로 잡은 것이다.

황룡사지 발굴현장 / 항공촬영한 이 사진만으로도 황룡사의 규모가 파악된다. 사찰 경내만 약 3만평. 위쪽의 나무숲이 분황사이다.

생의사 미륵삼존상 / 경주 남산 삼화령 고개에 있던 석불로 지금은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애기부처의 귀여운 얼굴 / 앳된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동심과 불심의 만남이라고 할 만하며,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위)

애기부처의 발가락 / 개구쟁이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애기부처의 발가락은 이렇게 까맣게 되었다.(아래)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님 / 자연석 바위를 파서 감실 속의 부처상을 만든 이 감실부처님은 마치도 인자한 하숙집 아주머니상을 연상케 하는 따뜻한 인간미가 살아 있다.

여근곡 / 건천읍 부산(富山) 아래쪽 산줄기로 지형이 여자의 국부처럼 생겨 이런 이름을 얻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전설의 고향이며, 조선시대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가 이 길로 지나가면 꼭 떨어졌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경주터널을 지나 산자락 한굽이를 돌아서면 바로 나타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 튼실한 이층 기단부에 삼층탑신이 체감하는 구조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시킨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기본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 조선시대 정조 때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여기서 문무대왕의 뜻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 우현 고유섭선생의 수필 제목을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 미술사에 대한 선생의 열정을 기리고 있다.

감은사터 전경 /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 백제 사람들이 만든 석탑의 이상은 여기에 있었다.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인상, 그러나 여기엔 힘과 안정감이 약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 원효대사가 주지스님으로 주석하던 고선사의 삼층석탑에는 초기양식이 지니는 장중함이 서려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의 미학이 있다.

불국사 석가탑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까,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여기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에밀레종 비천상 /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은 힘이 넘쳐 흐르지만 에밀레종 비천상에는 정제된 세련미와 정교한 형식미가 돋보인다.

1915년, 봉황대에서 구경주박물관으로 에밀레종을 옮길 때 사진(동아일보 제공).

에밀레종의 종고리 / 용의 허리춤으로 끼여 있는 쇠막대는 지름 8.5cm로 이 시대의 기술로는 만들지 못하여 그 옛날부터 사용해온 쇠봉을 그대로 끼웠다.

에밀레종 /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고, 형태는 유려하면서 긴장이 살아 있는 곡선미를 보여준다.

성덕대왕신종 이전광경 / 동부동 옛박물관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길 때의 장관. 대한통운의 트레일러에 실린 신종은 연꽃으로 장식되었고 그 앞에는 여학생들이 부채춤을 추고 있으며 뒤에는 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다. 지금의 화랑로. 경주 손용석씨 촬영(1975년 5월 27일).

홍예문 / 무지개 형상의 입구를 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성문이다.

낙산사 칠층석탑 / 비록 보물 49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만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지 아직도 의심하고 있다.

원통보전의 별무늬 돌담 / 진흙과 토담에 기와와 둥근 화강암으로 별무늬를 장식한 아담한 의장이 보는 이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수월관음도」 / 14세기, 고려시대의 탱화로 일본 다이도꾸지(大德寺) 소장품에는 낙산사 창건설화가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낙산사」 /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즐겨 그린 겸재는 여러 폭의 낙산사 그림을 남겼는데, 어느 경우든 동해 바다의 일출을 곁들여 시원스런 화면구성을 보여준다.

손장섭의 「동해바다」 / 화면을 철망으로 가로막고 동해바다의 흰 포말을 강조하여 이미지의 상충이나는 회화적 효과를 얻어내었다.

진전사 폐사지 / 절집은 오간 데 없고 산등성 아래 삼층석탑 하나가 그 옛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 하대신라 지방에 세워진 선종 사찰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9세기 석탑으로, 특히 기단의 팔부중상과 일층몸돌의 4면 석불을 돋을새김하여 아담한 가운데 장식성이 돋보인다.

진전사지 부도 / 하대신라 선종의 시대, 부도의 시대를 말해주는 8각당 형식 부도의 시원양식으로 도의선사 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염거화상 부도 / 도의스님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로 여기에서 9세기 부도는 연화받침대 위의 8각당이라는 전형이 창조되었다. 일제 때 도굴꾼이 훔쳐간 것을 압수하여 지금은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 / 구조와 크기는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어딘지 중후한 멋을 풍겨준다.

홍각선사 부도비 /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고 돌거북이와 용머리만 남아 있는데, 거북이의 힘찬 기상과 정성을 다한 조각솜씨에서 9세기 지방문화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선림원지 석등 / 폐사지 위쪽, 아마도 조사당 건물 잎마당에 세워진 듯한 이 석등은 비록 지붕돌 귀꽃이 깨졌지만 고풍스러운 멋은 잃지 않았다.

지증대사 적조탑비 / 최치원이 지은 글을 83세의 분황사 스님 혜강이 쓰고 새긴 것으로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지증대사의 부도 / 비록 지붕돌 한쪽이 깨졌지만 장중한 형태와 섬세한 조각으로 9세기 석조예술의 난숙성을 보여준다.

지증대사 부도와 기단부 공양상 / 깊게 새긴 돋을새김의 정교한 조각솜씨는 가벼운 장식성이 아니라 치밀한 성실성을 느끼게 해준다.

봉암사 삼층석탑 /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전형적인 9세기 삼층석탑이다. 아담한 형태미와 날렵한 상륜부가 돋보인다.

정진대사 원오탑 / 지증대사 부도를 흉내낸 것이어서 매너리즘에 빠져 장중함은 없지만 언덕 위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잇어서 답사객에게 시원한 눈맛을 제공한다.

봉암사 대웅전 앞마당의 노주석 / 앞마당 양쪽에 있는 돌받침은 한밤중 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려놓던 곳이다.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마애보살입상  / 귀엽고 친숙한 인상의 이 고려시대 마애불은 월악산 미륵리 석불과 비슷한 지방양식이 나타나 있다.

야유암 / 봉암사 입구 너럭바위 한쪽 면에 새겨져 있는 이 글씨는 "밤에 노는 바위"라는 뜻에 걸맞게 풍류가 넘쳐흐른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 정철, 「소쇄원 초정(草亭)에 부치는 시」

대봉대 / 입구가 항시 열려 있는 소쇄원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이 대봉대(待鳳臺)이다. 초가 정자로 방문객은 여기에 걸터앉아 소쇄원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

광풍각 /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계곡의 한가운데에 단칸 정자를 짓고 광풍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은 겨울철 난방을 고려함이고, 사방으로 둘러져 있는 마루는 여름날을 위함이다.

화단을 2단으로 쌓은 매대(梅臺) / 담벽에는 훗날 송시열이 '소쇄처사 양공지려'라는 일종의 문패를 써서 달게 했다.

제월당 / 양지바른 언덕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이 이 집의 주건물이다.

돌다리 담장 / 흙돌담 밑으로 개울이 흘러갈 수 있도록 설계하여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공미를 절묘하게 연출했다.

소쇄원 계곡 / 소쇄원 조영에서 핵심이 된 것은 이 암반 위로 흐르는 계곡이었다.

 

걸음 걸음 물결을 보며 걷자니

한 걸음에 시 한 수 생각은 깊어지는데

흐르는 물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물끄러미 담장 밑 계류만 바라보네

- 김인후 「소쇄원 48영가(詠歌)」 중 「담장을 뚫고 흐르는 계곡물」

 

남쪽 비탈에 오이를 심었지

이야말로 내 마음 진정시키는 약이라오

아침나절 김매고 물 주고

도롱이 벗어놓고 단잠을 잔다.

- 김성원, 「양파에 오이 심어」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

- 정철, 「성산별곡(星山別曲)」중에서

식영정의 노송 / 식영정 주위에는 이처럼 멋진 노송이 몇 그루 둘러져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성산별곡 시비가 무지막지하게 설치되어 그 운치를 해치고 말았다.

환벽당 / 환벽당의 툇마루에 앉으면 자미탄의 아기자기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정철, 「장진주사」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소리 따라 울리리라 …

땅에서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골목 산수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

- 황지우, 「화엄광주」

도솔암 석가여래상 / 배꼽의 비결로 더 유명해진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칠송대 양옆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쌍이 마치 협시보살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더욱 멋지다.

선운사 부도밭 / 선운사 입구 울창한 전나무숲 속에 있다. 까만 비석이 백파선사비이다.

백파선사비 앞면 /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는 글씨를 힘차고 굵게 새겨놓아 추사체의 굳센 필력을 느끼게 해준다.

백파선사비 뒷면 / 글자 획의 굵기와 자간(字間)의 간격조정이 어지러울 정도로 자유자재롭지만 그것이 바로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자율성이다.

도솔암 내원궁 지장보살상 / 조선초기의 금동 지장보살상으로 얼굴에는 선비의 풍이 나타나 있다.

정와 /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에 걸맞은 사랑스런 조촐한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관음전으로 개수되었다.

정와 현판 / 원교 이광사의 기교가 많이 들어간 글씨이다. 지금은 새로 지은 큰 건물 창방 사이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3-097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 | 송필용 그림

2007, 랜덤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3022

 

811.6

도75흔

 

도종환 시화선집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의 시와 그림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간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시는 제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저를 때리면 저도 그 비를 다 맞았습니다. 치열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하지 않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면, 울컥 치솟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장 뜨거운 순간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간절한 사랑과 아픈 소망이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말들이 넘쳐흐르곤 합니다.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더 경건해지고자 말들이 두 손을 모으는 때가 많습니다. - 도종환(시인)

 

"도종환 선생님의 섬세하게 폐부를 파고드는 생태적 자연에 대한 희망과 사랑의 울림이 저의 지난 작업들과 일정 부분 공동분모가 되어 있었음을 느껴 투박하면서 자연의 맑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시의 아우라에 잡힐 듯 말듯 흐르는 물처럼 사유하고 명상하게 하는 빈자리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그림, 마음의 여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화가에게 세상의 많은 꿈을 가슴에 품게 해주신 도종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시와 그림의 간극에서 펼쳐지는 풍경들과 마음의 여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 송필용(화가)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덕산중학교 교사로 복직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해인으로 가는 길』 등과 산문집 『모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과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과 민족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송필용

 

195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전남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학고제, 이화익갤러리, 금호미술관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진경 그 새로운 제안' (국립현대미술관), '몽유금강' (일민미술관), '구성과 중심' (예술의 전당), '한국모더니즘' (금호미술관), '가고픈 경기비경', '앙코르와트 기행전' 등 국내외 기획초대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금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청와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제비울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차례|

 

시인의 말

 

1부…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 가을 저녁 / 바람이 오면 / 꽃잎 / 담쟁이 / 늦가을 / 여백 / 처음 가는 길 / 희망의 바깥은 없다 / 홍매화 / 저무는 꽃잎 / 깊은 가을 / 시래기

 

2부…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초겨울 / 산벚나무 / 폐허 이후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빈 방 / 산경 / 그리운 강 / 오늘 밤 비 내리고 / 낙화 / 개울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자작나무

 

3부…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쓸쓸한 세상 / 섬 / 꽃다지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초저녁 / 혼자 사랑 /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나리소 / 꽃씨를 거두며 / 산 너머에서 / 쑥국새 / 오월 편지

 

4부…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이 세상에는 / 그대 잘 가라 / 꽃잎 인연 / 어떤 마을 / 목련나무 / 봄의 줄탁 / 연필깎기 / 빈 교실 / 어린이 놀이터 / 세우 / 돌아가는 꽃 / 눈 물

 

5부…함께 먼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흔들리며 피는 꽃 / 먼 길 / 저녁 무렵 / 깊은 물 / 나무 / 산맥과 파도 / 상선암에서 / 벗 하나 있었으면 / 풀잎이 그대에게 / 강 / 쇠비름 / 우 기

 

시의 그림들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들어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매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깊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날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콘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혼자 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와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아픔 그 그리움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먼 곳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습니다.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꽃잎 인연

 

몸 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 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 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먼 길

 

하늘엔 별도 없고

대추나무 잎마다 달빛만 흩어지는데

끝도 없이 먼 어둠을 건너는 구름

밤을 새워 풀그늘에 벌레는 울고

이 땅의 길들도 모두 저물어

저마다 쓰러져 깊게 누운 날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어쩌면 어쩌면 이리 아득해

몇 번이고 홀로 불을 켜고 앉아서

꺼지고 넘어지는 불씨를 안고

고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함께 먼 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 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우  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 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매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잇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posted by 황영찬

2013-096 불교 의식구

 

글, 사진 / 홍윤식

1998,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03

 

082

빛12ㄷ  180

 

빛깔있는 책들 180

 

홍윤식-------------------------------------------------------------------------

일본 교토(京都) 불교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문체부 문화재 위원,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 있다. 『한국불교의례의 연구』(일어판), 『고려불화의 연구』, 『삼국유사와 한국고대문화』, 『한국의 불교미술』, 『불화』, 『영산재』, 『만다라』, 『한국불화 화기집』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차례|

 

머리말

불교 의식의 기능과 의미

불교 의식의 구성

불교 의식의 신앙적 구조

불교 의식 용구와 불교 공예

불교 의식 용구의 구성 체계

불교 의식 용구

불교 의식 용구의 전통 문화적 의미

맺음말

참고 문헌

 

104위 신중도  위에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한 천중상을, 아래에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8부 신장, 8부 금강, 8부 용왕 등 불법을 수호하는 104위의 신중을 표현하였다.

발원패  발원 내용을 적은 나무패로 벽에 걸어 놓는다.

거불패  부처와 보살의 명호를 적은 나무패이다. 높이 66센티미터, 폭 26.5센티미터, 좌대 54×23센티미터.

원패  기단은 거북모양이며 몸체에는 황룡이 장식되어 있고 발원 내용은 지워졌다. 높이 77센티미터, 좌대 31×30센티미터.

석가여래패  모란문을 양각한 화려한 불패이다. 높이 38센티미터, 좌대 26×17센티미터.

삼보패  생동감 넘치는 연화대 위에 세워진 패에 염주와 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높이 41센티미터, 좌대 28×17.3센티미터(위는 정면, 아래는 뒷면).

구룡 장식 관불기  불상에 물을 부으면서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용구로 아홉 마리의 용이 갓 태어난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설화를 근거로 이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높이 16센티미터, 대좌 폭 22센티미터.

정병  파랗게 핀 녹이 세월의 흔적을 잘 보여 주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정병이다. 높이 39센티미터, 밑지름 10.2센티미터.

촛대  양초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받침대로 금속, 점토, 나무 등으로 제작했다. 높이 81.5센티미터, 지름 29.5센티미터(왼쪽), 높이 81센티미터, 지름 31.5센티미터(오른쪽)

옥제 등잔  그릇에 기름을 붓고 심지에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켠다. 작은 옥등잔은 연등 행사에 사용되는데 사찰에서 불을 밝히고 발원하는 신앙 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8.8센티미터, 지름 24센티미터, 두께 0.9센티미터(오른쪽), 높이 3.5센티미터, 지름 9.5센티미터, 두께 4.5센티미터(가운데), 높이 12.5센티미터, 지름 25센티미터, 두께 1.6센티미터(왼쪽).

금강령  흔들어 소리를 내어 불 · 보살을 기쁘게 하거나 중생들을 성불로 이끄는 데 사용한다. 높이 23.3센티미터, 폭 7.8센티미터, 신고 8.7센티미터(위), 높이 20센티미터, 폭 7.8센티미터, 신고 7.5센티미터(아래).

목조 해태 고대 위의 홍고  왕실의 궁전 연회 때 사용되던 북의 형상과 비슷하다. 홍고 높이 85센티미터, 폭 74센티미터, 지름 74센티미터, 목조 해태 높이 119센티미터, 폭 103센티미터.

사보살도(四菩薩圖)  말세의 혼탁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널리 유포하라는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는 네 보살을 그린 것이다. 각각 138센티미터×79.5센티미터. 위의 왼쪽은 경물권보살(警物眷菩薩), 위의 오른쪽은 정업색보살(定業索菩薩), 아래 왼쪽은 조복애보살(調伏愛菩薩), 아래 오른쪽은 군미어보살(君迷語菩薩)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