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 역사를 훔친 첩자
김영수 지음
2006, 김영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4300
911.03
김64역
표정있는역사
잘 키운 첩자 하나 백만대군 안 부럽다!
한반도의 춘추전국시대인 삼국시대! 삼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왜까지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합종연횡과 암투모략을 일삼았다. 이러한 격변의 소용돌이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숨은 영웅, 첩자가 있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첩보술의 대가였고, 중국인까지 벌벌 떨게 한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은 개인첩보기구를 둔 정보정치의 일인자였으며, 살수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을지문덕은 A급 첩자이기도 했다. 베일에 싸였던 첩자들의 활약상이 우리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역사의 뒤편에서 나라를 빛낸 숨은 영웅들이 여기 다 모였다!
예측불허 첩보술로 무장한 고대첩자들의 종횡무진 활약기!
◎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첩보술의 달인이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백제와의 전투. 김유신은 신라 군영에 백제 첩자가 잠입한 것을 눈치 채고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원병이 온다는 허위 정보를 흘린다. 백제는 이러한 허위 정보로 인해 동요하고 신라는 백제에게 대승을 거둔다. 김유신은 적의 첩자를 역이용할 정도로 첩보술의 대가였던 것이다.
◎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제임스 본드?
수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던 고구려. 을지문덕은 수군의 식량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홀홀단신 적진으로 들어간다. 을지문덕을 만나면 바로 사로잡으라는 중국 황제의 밀지가 떨어진 위태로운 상황. 과연 을지문덕의 운명은?
◎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는 우리 역사 최초의 부부첩자?
호동은 옥저지방을 유람하다 낙랑왕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된다. 이때 호동의 옥저 유람은 단순 유람이 아닌 낙랑을 멸망시키기 위한 정보 수집이 목적이었는데……. 사랑을 미끼로 아내를 첩자로 이용한 호동과 그 안에 숨겨진 첩자 세계의 냉혹함!
◎ 바둑 두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백제 멸망을 위한 완벽한 시나리오!
고구려는 도림이라는 승려 첩자를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 나온 것처럼 꾸며 백제로 보낸다. 도림은 개로왕의 취미인 바둑을 이용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각종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키는데…….
◎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위대한 불륜?
신라 대야성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막료 검일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백제의 첩자 모척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김품석에게 불만을 품은 검일을 포섭 · 매수하여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김영수|
1959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김영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석 · 박사 과정 때부터 굵직굵직한 번역서와 연구서를 펴냈다. 90년 국내 최초의 고구려 통사인 『고구려간사』를 번역했고, 92년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인 『고대 중국 야철기술 발전사』를 번역하여 과학기술처 장관상을 수상했다. 93년에는 이 책의 모태가 된 「고대 첩자고」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94년에는 한 · 중 고대사의 민감한 문제점들을 짚어낸 한 · 중 · 일 삼국의 주요 논문들을 모아 편집한 책 『고대 동북 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라는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편저를 주도하여 펴냈다.
92년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학위를 뒤로 한 채 중국 알기와 중국 알리기에 몰두하여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을 답사했다. 그 결과 『지혜로 읽는 사기』『명문가의 자식교육』『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등과 같은 의미 있는 작업물들을 내놓았다. 번역 작업도 꾸준히 진행하여 『간신론』『모략』『맨얼굴의 중국사』『추악한 중국인』『황제들의 중국사』『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중국사 강의』등을 선보임으로써 중국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이제 자신의 전공인 고대 한 · 중관계사 연구로의 복귀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축적해둔 내공을 부지런히 펼쳐내고자 하는 그는 한 · 중 · 일 3국의 역사인식과 의식수준을 '역사 중독'이란 말로 명쾌하게 진단한다. 이에 따라 역사과잉과 역사편중에 빠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역사인식의 근원적 문제점들을 강렬하고 냉철한 역사관으로 파헤쳐 나가고자 한다.
그 첫 작업의 하나로 13년 전 제기했던 한국 고대사의 첩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본서를 선보인다. 역사의 이면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러나 역사에 만만치 않은 흔적을 남긴 익명의 존재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복권시키는 최초의 작업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독자들의 아낌없는 비판과 충고를 기다리고 있다.
【차례】
프롤로그
1장 첩보술로 흥한 고구려 첩보술로 망하다
2장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된 첩자
3장 짧지만 강한 백제의 첩자 기록
4장 첩자들의 전성시대
5장 첩자의 정의와 첩자 이론서
6장 첩자 조직과 첩보술
에필로그
부록
▲ 『삼국사기』판본
▲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상 낙랑은 고구려 지배층의 첩보전에 희생된 비운의 여인이었다.(이 책에서는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상이라는데 다른데서는 아차산에 있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상이라 하는데...)
▲ 중원고구려비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비석. 현재 충북 충주시 가금면에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 아차산성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치밀한 첩보 활동에 밀려 수도를 빼앗기고 최고 통수권자인 개로왕 마저 살해당하는 처참한 지경에 몰렸다. 사진은 개로왕이 목 잘린 아차산성의 모습이다.
▲ 원효(위)와 의상(아래) 당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던 중 두 사람은 '첩자' 혐의를 받고 한 달 가까이 구금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당시 승려들이 첩자로 활동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수 문제 양견(위)과 양제 양광(아래) 수는 양대에 걸쳐 네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침중한 타격을 입고 결국은 멸망했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였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빈틈없는 첩보력을 과시했다. 사진은 고구려를 침공한 수 문제 양견과 그 아들 양재 양광의 초상화다.
▲ 을지문덕 수와의 2차전쟁에서 심리전을 절묘하게 구사하여 대승을 이끌어낸 명장이다.
▲ 살수대첩도 수의 3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켜버린 살수대첩의 상상도. 전쟁의 이면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지피지기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청천강 고구려와 수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살수대첩의 현장 모습이다.
▲ 경주시 서면 단석산 '중악'으로 기록된 이곳 석굴에서 김유신은 고구려, 백제, 말갈을 평정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수련했다. 이 무렵 그는 고구려 첩자 백석과 접촉함으로써 첩자와 첩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남생묘지명 탁본 고구려의 멸망은 내분과 그를 이용한 당의 첩보전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서로의 첩보 조직을 가동하여 적이 아닌 서로를 감시했고, 이는 결국 당에 역이용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사진은 연개소문을 이어 권력을 계승했으나 정쟁에 패해 당으로 망명한 남생의 묘지명이다.
▲ 박제상 영웅의 이미지가 강한 박제상의 행적도 사실은 첩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 오자서 초나라 평왕에게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도망쳐 오나라의 개혁을 주도했던 오자서는 첩자 활용에 대단히 능숙했다. 그는 자객 전저를 기용하여 국왕 요를 암살하고 합려를 즉위시켰으며, 이어 요리를 사간으로 발탁하여 합려의 정적인 경기를 암살했다.
▲ 박제상 사당 차술령 아래에 위치한 박제상의 사당. 박제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내가 세웠다고도 한다.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치열한 첩보전이 오갔던 642년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결과적으로 김춘추가 왕위에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설 수 있게 한 중대한 계기로 작용했다.
▲ 대야성이 있던 자리 대야성 전투는 결과적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를 자극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이면에는 첩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지금의 경남 합천에 자리 잡고 있다.
▲ 조령 김춘추의 고구려행으로 연개소문과의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 회담은 마목령(조령)과 죽령의 소유권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 김유신 김유신은 첩자 활용과 첩보전에 관한 한 발군이었다. 그가 첩보전에 대해 남다른 인식을 가졌던 계기는 화랑 시절 고구려 첩자 백석의 유인에 말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 단재 신채호 김유신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던 단재의 평가는 첩자 활용과 첩보전이란 측면에서 보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단재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김유신의 이런 행위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이다.
▲ 충북 진천 김유신 탄생지 김유신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첩자 활용의 달인이었던 김유신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 제매정 책략가 김유신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은 누이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한 것이었다. 이 일로 김유신은 김춘추 가문과 단단히 결합했고, 두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진다. 사진은 김유신의 집으로 알려진 터에 남은 우물 제매정의 모습이다.
▲ 김유신의 묘와 사당 살아서는 삼국 통합의 주역으로 추앙받았고,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던 김유신은 사실 전쟁터에서 대부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첩보력이 눈부신 역할을 했다.
▲ 매소성 전투 7세기, 신라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매소성 전투 상상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와 백제에 집중했던 첩보망을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로 돌렸다.
▲ 매소성 신라는 매소성(현 경기도 연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할 수 있었고, 여기에도 김유신의 첩보망이 발휘되었다.
▲ 황초령비 탁본 젊은 날 승려로 위장하여 고구려 정세를 염탐하는 첩자 활동을 벌였던 거칠부는 그때의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훗날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 사진은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다.
▲ 제 도시 모형 전국시대 제나라 수도 임치의 모습을 상상한 복원 모형.
▲ 적벽 첩자로 시작해서 첩자로 끝난 적벽대전의 현장 모습이다.
▲ 쿠빌라이 원 세조 쿠빌라이는 유능한 통치자답게 첩자 활용에 능숙했다.
▲ 명 태조 주원장 주원장이 만든 첩보 기구는 철저히 내부감찰을 위한 조직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자신의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독재 정권을 강화했고, 명나라는 그 여파로 중국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대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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